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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

      일제 국외 강제동원 피해자 640명만 생존

      ... 단 640명 생존해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사단법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은 행정안전부에 ‘국외 강제동원 피해 생존자 의료지원금 지급현황’에 대한 정보공개청구 결과 이 같은 사실을 파악했다고 4일...

      #생존자 #강제동원 #피해자 #일제

      강현석 기자 2025.03.04 20:38

    • 일제 국외 강제동원 생존자 단 ‘640명’ 남았다···100세 이상 172명

      사회

      일제 국외 강제동원 생존자 단 ‘640명’ 남았다···100세 이상 172명

      ... 단 640명 생존 중인 것으로 집계됐다. 사단법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은 행정안전부에 ‘국외 강제동원 피해 생존자 의료지원금 지급현황’에 대한 정보공개청구 결과 이같은 사실을 파악했다고 4일...

      #생존자 #강제동원 #피해자 #일제

      강현석 기자 2025.03.04 14:20

    • 사회

      강제동원 피해 배상금, 일본 기업에 직접 받을 길 열렸다

      ...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1·2심에선 패소했으나 2012년 대법원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소멸하지 않았다”며 사건을 다시 판단하라고 하급심에 돌려보냈고,...

      #강제동원 #미쓰비시 #제3자변제

      김나연 기자 2025.02.18 20:51

  • 스포츠경향

    • 이승환, 일제 강제동원 피해 알리기 위해 3천만원 기부

      연예

      이승환, 일제 강제동원 피해 알리기 위해 3천만원 기부

      가수 이승환. 사진 이선명 기자 57km@kyunghyang.com 가수 이승환이 일제의 강제동원 피해 알리기를 위해 3000만원을 기부했다. 시민단체 민족문제연구소는 21일 “이승환이 지난 19일 ‘스무 번째 차카게 살자!’의 수익금 가운데 3000만원을 기부했다”고 밝혔다. 이어 “기부금 증서를 전달하며 2015년 군함도, 2024년 사도광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과정에서 일본 정보의 역사 왜곡에 맞서 한국 정보의 외교 포기에 맞서 강제 동원 역사를 알리고 기록하기 위해 노력한 민족문제연구소 활동에 지지를 보내줬다”고 했다. 그러면서 “수익금은 강제동원 역사를 알리는 일에 쓰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승환은 지난 19일 연세대학교 백주년기념관에서 스무 번째 콘서트 ‘차카게 살자’를 진행했다. 이승환이 직접 기획한 이 콘서트는 2001년 시작돼 20년간 진행됐다. 이승환은 수익금을 소아암 어린이를 위해 기부해왔는데 일제강점기 당시 자행된 강제동원 피해 알리기에도 나선 것이다. 특히 이승환은 올해를 마지막으로 자선 콘서트 진행을 마무리한다. 이승환은 이날 마지막 자선 콘서트에서 민족문제연구소 임재성 변호사에게 기부 증서를 전달하며 “우리를 잊지 않는 우리를 위해 활동하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에 3000만원을 기부한다”고 했다.

      이선명 기자 2024.10.22 16:17

    • 이영애, 광복절 앞두고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에 1억 기부

      연예

      이영애, 광복절 앞두고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에 1억 기부

      배우 이영애. 경향신문 자료사진 꾸준한 기부를 이어온 배우 이영애가 광복절을 앞두고 선한 영향력을 이어갔다. 중앙일보에 따르면 이영애는 13일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 1억원을 기부했다. 이영애는 “나라를 되찾은 날을 생각하며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으로 희생되신 분들에게 써달라”는 취지로 기부금을 전달했다. 이영애는 “보다 많은 이들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고통에 관심을 갖고 이를 보듬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피력했다”는 뜻도 재단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영애의 기부 역사는 꾸준히 이어져 왔다. 매년 기부를 진행해온 이영애는 올해에도 지난 6월 호국의달을 맞아 천안함재단에 5000만원을, 지난해 6월에는 육군부사관발전기금재단에 1억원을 전달했다. 이영애가 이번에 기부한 곳인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은 일본 기업을 상대로 대법원 판결로 승소한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위해 판결금과 지연 이자를 지급해오는 등 지원을 이어왔다. 앞서 이영애는 독립 유공자를 돕는 과정에서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의 사연을 알게됐고, 향후에도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돕겠다는 의사를 재단에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영애는 친부뿐 아니라 시아버지 역시 육군사관학교 출신 6·25 참전 용사로 알려져 있다.

      이선명 기자 2024.08.14 11:36

    • 임종성 위원장, 일본 강제동원 한복판 사도광산 앞에서 기자회견 열어

      생활

      임종성 위원장, 일본 강제동원 한복판 사도광산 앞에서 기자회견 열어

      임종성 위원장 “일본은 사도광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시도 철회하라!” 안민석 의원 “조선인에 대한 인권유린 현장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왔다” “일본은 사도광산 유네스코 등재를 철회하라!” 더불어민주당 경기도당 임종성 위원장(경기광주을)이 일본 강제동원 현장인 사도광산 한복판에서 외친 일성이다. 지난 7일 오후 2시 현장에 도착한 임종성 위원장을 비롯한 안민석, 윤미향, 양정숙 의원 등 ‘사도광산 유네스코 등재를 반대하는 의원들’ 모임의 소속 국회의원들은 역사의 현장에서 “일본 정부의 유네스코 꼼수 등재를 막기 위해 왔다”며 기자회견의 취지를 밝혔다. 이외에도 한신대 한국사학 김준혁 교수도 민주당 국회의윈들과 이 자리에 함께 했다. 방문단 일행은 기자회견을 통해 “일본의 역사 왜곡이 한일관계 발전에 가장 큰 방해 요소가 되고 있기에 역사 왜곡을 통한 ‘꼼수’ 유네스코 등재를 중단할 것”을 강하게 요청했다. 임종성 위원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꼼수로 세계인의 눈과 귀를 속이는 것이 일본의 국익에 어떤 도움이 되는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며 “일본이 국제사회 일원으로 평화에 기여하고 공여하면서 사는 길은 과거 침략과 강제동원 사실인정, 사죄와 반성, 실천이 우선되어야 가능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어 안민석 국회의원은 “에도시기만 반영하고 근대화 시기에 일본이 저지른 강제동원 역사를 배제하고 등재하려는 것은 과거의 잘못을 은폐하려는 행위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며 “조선인에 대한 인권유린 현장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왔다”고 강조했다. 이 자리에서 김준혁 교수는 “사도광산의 세게유산등재 신청은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하여 배상도 하지 않고 사과도 하지 않았기에 절대 용서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번 기자회견은 니가타일보, 니카타TV 등 일본 현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또한 방문단 일행은 방사능 오염수 해양방류를 반대하기 위해 후쿠시마에 방문한 국회의원들과 일본 현지 화상회의를 통해 상황을 공유하고 귀국 후 공동대응을 모색할 계획이다. 윤석열 정부의 강제동원 피해자 제3자 배상에 대한 국민 여론이 차가운 가운데 이에 대한 반대 움직임은 그칠 줄 모르고 확산되고 있다.

      #방사능 오염수 해양방류 임종성

      강석봉 기자 2023.04.07 17:02

    • 임종성 위원장, 조선인 강제동원 역사 부정하는 일본 사도광산 방문

      생활

      임종성 위원장, 조선인 강제동원 역사 부정하는 일본 사도광산 방문

      “일본의 사도광산 세계문화유산 등재시도, 일본에 한 번 속지 두 번 속지 않겠다” 의지 밝혀... 더불어민주당 경기도당 임종성(경기 광주을) 위원장은 강제동원의 실상을 알리고 사도광산 세계유산 저지의 당위성을 알리기 위해 3박 4일간의 일정으로 4월 6일 일본으로 출국했다. 이번 사도광산 방문은 안민석, 양정숙, 윤미향 국회의원 등 사도광산 유네스코 등재 반대 의원모임 국회의원들과 김준혁 한신대 교수 등 민간인 교류단이 함께했다. 일본은 2015년 군함도 등 조선인 강제동원 사실이 있는 근대산업시설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바 있으며, 유네스코는 당시 한국을 포함한 피해국 정부의 우려를 반영하여 총회에서 강제동원의 사실을 밝히도록 했다. 그럼에도 일본정부는 강제동원 사실을 부인하고‘조선인 강제동원 명시’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강제동원의 역사를 지닌 미쓰비시 사도광산을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유네스코 측은 일관되게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대상지에 신청 기간 등 모든 역사를 기술하도록 권고하고 있으나 일본은 조선인 강제동원의 역사를 부인하고 이 기간을 제외하고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임종성 위원장은“세계문화유산은 세계의 모든 시민이 공유해야 하는 완전한 역사이어야 함에도 일본은 조선인 강제동원의 역사를 제외하고 추진하고 있다. 이는 과거 침략역사를 숨기는 행위로 용납할 수 없다”라고 강조했다. 이어“군함도 등재 시 약속을 어기는 등의 행위를 볼 때 일본의 역사 왜곡의 심각성을 알려야 할 필요성이 있어 뜻있는 국회의원들과 함께하게 되었다. 군함도는 일본 정부에 속아 못 막았지만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는 반드시 저지할 것이다”며 일본의 의도에 한 번 속지 두 번은 속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번 방문에서는 요시자와 후미토시(니이가타 국제정보대학) 교수가 주선하는 <한일역사연대시민>과의 간담회를 비롯하여 일본 현지의 <사도광산 사실조사 시민단체>의 코스키 쿠니오(전 사도시 시의원) 활동가 등과의 간담회가 예정되어 있으며 일본 관계부처 등을 방문해 역사 왜곡의 심각성을 확산시킬 계획이다.

      #임종성 더불어민주당 경기도당

      강석봉 기자 2023.04.06 14:24

  • 주간경향

    • [취재 후]강제동원, ‘남의 일’일까요

      정치 취재 후

      [취재 후]강제동원, ‘남의 일’일까요

      김찬호 기자 최근에야 작은할아버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름은 김영문.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 전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분이 돌아가신 곳이 일본이라고 합니다. 그 시절, 어떤 이유로 일본에 가서 왜 그곳에서 사망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돌아가신 할머니에게서 아버지가 들은 이야기를 겨우겨우 더듬어 ‘10대 때 결혼도 못 한 상태에서 일본에 갔고, 곧바로 사망해 화장된 상태로 돌아왔다’라는 사실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해당 내용과 할아버지와의 나이 차 등을 계산해보니 1930년대 후반~1940년대 초반 무렵 일본에 갔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었습니다. 일제가 한반도에서 강제동원을 가장 활발히 한 바로 그 시점입니다. 설마 남해에 있는 작은 섬에서까지 강제동원을 했을까 싶어 전문가에게 물어봤습니다. “일제는 심한 가뭄이 들어 구휼을 할 수 없게 되면 일본으로 강제동원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 대표적인 지역이 남해”라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강제동원 문제에 관해 여러 차례 기사를 썼지만 집안에 피해자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못했습니다. 부랴부랴 국가기록원의 강제동원자 명부를 검색해 봤습니다. 이름과 당시 주소를 입력했지만 김영문이란 이름은 검색되지 않았습니다. 대신 남해에서 돌아가신 큰할아버지 이름이 나왔습니다. 전문가에게 다시 물어보니 “그 당시에는 장남을 보낼 수 없어 동생이 장남 이름으로 대신 가기도 했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당시 가족들이 강제동원 피해자로 신고를 안 했을 수도 있고, 누락됐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전쟁이 한창인 시기 돈 없고, 많이 배우지도 못한 섬 청년이 일본행 배를 탈 가능성이 ‘강제동원’ 외에 뭐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김영문 할아버지는 운이 좋은 편입니다. 비록 죽어서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이름을 기억하고 찾는 가족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일제가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겠다고 나선 사도광산에는 약 1500명의 조선인이 동원됐습니다. 그중 700명가량이 아직도 누구인지 모릅니다. 일본 정부와 광산을 운영한 전범기업 미쓰비시 등이 명부를 내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와 상관없는 남의 이야기 같을지 모릅니다. 일제는 전쟁을 시작하며 연인원 700만명을 한반도에서 강제동원했습니다. 적어도 한국인에게 강제동원 문제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란 의미입니다. 이들에게 이름이라도 찾아줄 수 있게 일본 정부의 ‘상식적’인 조치를 기대합니다.

      김찬호 기자 2024.03.13 06:00

    • 정치

      정부 강제동원 해법, 국민 위한 결단 맞나

      ㆍ윤 대통령 ‘통 큰 양보’ 오히려 한일관계 악화시킬 수도 모든 국가는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한다. 이 과정에서 필수불가결하게 국가 간 갈등이 발생한다. 첨예하게 갈린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것은 주로 ‘협상’이다. 이를 ‘외교’라고 부른다. 국가 간 협상은 원하는 것을 모두 얻어내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인 경우는 50 대 50. 사안에 따라 55 대 45로 조금 더 양보하기도 한다. 정상국가라면 절반을 훌쩍 뛰어넘어 양보하는, 혹은 양보한 것처럼 보이는 협상은 하지 않는다. 국내 정치적 반발까지 감수하며 그런 선택을 할 이유가 없다. 천재지변으로 인한 국가적 비상사태, 임박한 전쟁 수준의 위기, 별도의 정치적 목표 그리고 정치 책임자의 판단 착오가 있지 않다면 말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 3월 16일 오후 일본 도쿄 총리 관저에서 열린 공동 기자회견에서 보도진 질의를 듣고 있다. / 도쿄=연합뉴스 ‘제3자 변제방식’을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문제의 해법으로 낙점한 윤석열 대통령의 결정도 이 구조로 살펴볼 수 있다. “양국 관계 정상화는 두 나라 공통 이익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도 매우 긍정적인 신호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는 윤 대통령의 말 속에 정부가 얻고자 한 것이 드러난다. 이해를 어렵게 하는 명분, 각종 수사 등을 걷어내면 ‘역사문제’와 ‘미래이익’의 교환이다. 협상에 오른 품목들만 놓고 보면, 1965년 한일협정 때와 닮았다. 강제동원 배상금을 이번에는 한국이 지급한다는 것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윤 대통령은 일본 요미우리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제3자 변제방식은) 나중에 구상권 행사로 이어지지 않을 만한 해결책”이라며 “그런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하고 있다”고도 말했다.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한국 방안을 미심쩍어하는 일본에 대한 배려다.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윤석열 정부’에선 그런 일(구상권 청구)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라는 대통령실 관계자의 설명이 해당 발언의 한계를 가장 잘 보여준다. 대신 앞으로 한국 정부는 윤석열 정부 입장을 계승하느냐, 마느냐를 선택해야 할 상황에 놓였다. 마치 일본 정부가 과거사 문제의 인정 및 사죄를 담은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느냐를 놓고 갈팡질팡하는 모습과 닮았다. 정권 교체 시 제3자 변제방식은 오히려 한일관계를 악화시키는 기폭제가 될 수도 있다. 윤 대통령이 본인 발언대로 ‘정치지도자의 책무’를 쫓아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를 ‘조화롭게 해결’한 것이 아닌 한일 간에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뇌관만 심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완전히 패배한 외교였나 ‘통 큰 양보’가 사실상 불가능한 외교에서 ‘완전한 승리가 없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한 귀결이다. 국가가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것 외에 또 하나의 전제가 해당 논리를 뒷받침한다. 이는 주권 국가 간 외교는 ‘순차게임’이 아닌 ‘동시게임’이라는 점이다. 상대가 한 수를 두면 이를 다 지켜보고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주고받을 것을 맞춰보고 교환한다는 의미다. 그만큼 한쪽이 완전히 유리한 결과 도출은 어려워진다. 간혹 외교에서 순차게임 상황이 발생하기는 한다. 천재지변 등으로 발생한 재난상황에 대한 ‘긴급 지원’이거나 정치·경제적 종속관계에서 발생하는 모종의 상황이다. ‘제3자 변제방식’이 국내에서 논란이 된 주요 원인 중 하나는 한일 간 외교가 마치 순차게임처럼 보인다는 점 때문이다. 과거사 문제는 가해국과 피해국이 명확한 사안이다. 그들 표현대로 ‘만세일계’(혈통이 한 번도 단절된 적이 없다)라는 천황이 존재하는 한 일본은 과거사 문제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일본 스스로 짊어진 ‘원죄’를 피해자가 속한 한국이 해결해주는 것도 상식적이지 않다. 윤 대통령의 ‘제3자 변제’는 방식, 시기, 관례 등에 비춰봐도 모두 논란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일본을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월 16일 오후 일본 도쿄 총리 관저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한일 확대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 도쿄=연합뉴스 ‘왜 제3자 변제방식이어야 하느냐’, ‘왜 꼭 지금이어야 하느냐’ 등의 문제는 정치적 판단에 맡길 수도 있다. 하지만 ‘왜 한국 정부가 먼저 문제를 해결하고 일본의 평가 및 상응 조치를 기다리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이번 해법으로) 물컵에 비유하면 물이 절반 이상은 찼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이어질 일본의 성의 있는 호응에 따라 그 물컵은 더 채워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른바 ‘물컵 이론’은 사전협상을 통해 합의를 이루고, 발표한다는 의례(프로토콜)를 벗어나 한국 대통령이 먼저 결단하고, 일본 총리의 호응을 기다린다는 측면에서 외교의 신기원이다. 윤석열 정부가 여러 차례 계승 의사를 밝힌 김대중-오부치 선언과 비교해봐도 묘하게 뒤틀려 있다. 1998년 10월 8일, 발표된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의 시작은 같은해 1월 있었던 한일 어업협정에 대한 일본 측의 일방적 파기였다.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한일 간 정책 문제가 불거졌고, 수습 과정에서 역사문제에 대한 ‘청산’이 아닌 ‘정리’가 이뤄졌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의 일본어 통역을 담당했던 조세영 전 외교부 1차관 회고에 따르면 “과거사를 청산했다고 선언하면 훗날 다시 문제가 불거졌을 때 한국의 입장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정리로 유도한 결과”였다.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체결한 박근혜씨를 제외한 역대 대통령들은 한일관계의 중요성을 몰라서가 아닌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 청산을 경계했다는 의미다. 지난 3월 15일 최상목 경제수석은 “일본과의 관계개선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며 ‘공급망 파트너’, ‘수출 기여’, ‘과학기술 협력’ 등을 이유로 꼽았다. 모두 정책 사안이다. 그런데 정책 문제에 대한 구체적 협상에 앞서 한국 대통령이 ‘강제동원 문제 해법’과 ‘번복 방지’를 언급했다. 협상장에 들어가기 위한 입장권으로 과거사 문제 해결을 사용한 것이다. 이는 일본 측 요구사항이기도 했다. 문제는 한일 관계개선으로 인한 경제적 효과가 한국에만 나타나느냐는 점이다. 공급망·교역망이 거미줄처럼 얽힌 현대 경제에서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다. 협상의 균형추부터 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일본이 ‘완전히 승리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역사와 미래가 등가교환 대상이 맞느냐는 점이다. 양금덕 할머니 등 강제동원 피해자가 엄연히 생존해 있다. 정부 논리대로라면 이들이 맞을 내일은 적어도 정부가 구상하는 미래에 포함되지 않았다. 윤 대통령이 한일 정상회담을 위해 일본으로 떠난 지난 3월 16일 2018년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강제동원 피해 배상 확정판결을 받은 피해자들은 미쓰비시중공업의 한국 내 자산을 받아내기 위한 추심금 소송을 제기했음을 밝혔다. 1965년 이래로 정부, 피해자, 수혜자 이 삼각구도가 반복되고 있다. 가해국 일본만 빠졌다. 일본의 입장 계승 외교 지난 3월 15일 포스코는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 40억원의 기부금을 납부했다고 발표했다. 1965년 대일 청구권 협상으로 받은 일본 측 자금으로 수혜를 입은 곳은 모두 16개 기업으로 확인된다. 포스코를 제외한 나머지 5곳은 “정부 요청이 올 경우 출연을 검토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나머지 10곳은 “출연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정부는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기여해주길 바라고, 기업은 정부가 ‘명시적’으로 요청하면 나선다는 입장이다. 입장이 갈리는 것은 출연금의 꼬리표가 ‘제3자 변제’, 즉 불법적 행위로 인한 손해에 대한 ‘배상금’이라는 점 때문이다. 실제로 미쓰비시가 배상금과 관련한 어떤 논의에도 참여하지 않는 것은 그들 스스로 전범기업임을 부인한 결과다.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대표연구위원은 “일단 배상 자체를 한국 정부가 할 수 있는 부분인가 하는 점에서 의문”이라며 “과거 한일협정 때나 노무현 정부 때도 굳이 위로금, 지원금, 보상 등의 단어를 쓴 것은 강제동원의 책임은 일본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제3자 변제 개념이 배상에서 출발한다는 점에 대한 고려 없이 우리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돈 받을래, 말래’라고만 윽박지르는 것 같아 서글픈 느낌”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양 할머니를 비롯한 생존 피해자 2명은 “동냥해서 주는 것 같은 돈은 받지 않겠다”고 거부했다.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지난 3월 15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 전쟁기념관 입구에서 열린 윤석열 정부 대일 굴욕외교 저지를 위한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각종 여론조사에서 강제동원 해법에 대한 반대 여론이 60%를 넘나들고, 주요 대학가에서는 시국선언이 나왔다. 서울대 민주화교수협의회 등 전문가들 역시 우려 목소리를 내지만 윤 대통령은 “국민을 위해 대국적 차원에서 내린 결단”이라는 소신을 굽히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외교 문제를 국내정치에 끌어들이지 말라”고 일갈했다. 윤 대통령이 밀어붙인 결과 지난 3월 16일 한일 정상회담이 일본 도쿄에서 열렸다. 크게 되돌린 것, 새로운 것, 변하지 않는 것 등이 결과로 나타났다. 이날 양 정상은 셔틀 외교 재개에 합의했고,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한 한·미·일 안보 협력에 적극 나서기로 했다. 또 일본은 불화수소, 불화폴리이미드, 포토레지스트 3종과 관련한 수출규제 조치를 해제하기로 했고, 정부는 일본의 수출규제에 대한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를 취하하기로 했다. 한일 간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정상화도 선언했다. 강제동원 문제를 해결한 결과는 일본과의 관계를 과거로 되돌린 것 외에 새로운 것은 없었다. 하나를 양보하면, 또 다른 하나가 새롭게 요구되는 현상은 어김없었다. 일본 NHK는 한일 정상회담 결과를 두고 “기시다 총리는 (윤 대통령과) 회담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과거 양국 간 합의의 착실한 이행을 한국 측에게 요구했다”며 “시마네현 다케시마(일본이 주장하는 ‘독도명’)를 둘러싼 문제에 대해서도 일본의 입장을 전달했다”고 보도했다. 이를 두고 대통령실 관계자는 독도 문제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없고, 나올 리도 없다”고 부인했지만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즉답하지 않았다. 진실공방과 별개로 윤석열 정부가 말하는 한일관계의 ‘미래’를 위해서는 ‘대체 어디까지 양보해야 하느냐’가 새로운 화두가 됐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이날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양국 정상 공동기자회견에서 “한국 정부가 발표한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조치는 어려운 관계에 있었던 한일관계를 건전한 관계로 되돌리기 위한 것으로 평가한다”며 “1998년 10월에 발표한 한일 공동선언을 포함해 역사인식에 대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계승한다”고 말했다. 별도의 사죄 표현은 없었다. “평가한다”, “계승한다” 그것이 전부였다.

      김찬호 기자 2023.03.17 14:26

    • 사회 표지 이야기

      강제동원 문제 전담기구 있었더라면…

      ㆍ타국과 동등한 위치에서 논의 가능한 정부 조직 필요 현재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유산은 모두 1154점이다. 남한에 15점, 북한에 2점이 세계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일본에는 25점의 세계유산이 있다. 세계유산 보유숫자로만 보면 11번째로 많은 세계유산을 가진 나라다. 지난 2월 1일 사도광산이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추천한 세계유산 후보가 되면서 이 순위에도 변동 가능성이 생겼다. 만일 사도광산이 일본의 의도대로 세계유산에 등재되면 26점의 세계유산을 보유한 이란과 함께 세계유산 보유 순위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나라가 된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2020년 6월 19일 부산 남구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 개관한 추모관 ‘기억의 터’에 강제동원 희생자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제공 2015년부터 사도광산 등재 움직임 아베 신조 전 총리를 위시한 자국 내 보수·우익세력들이 사도광산 등재를 추진하는 동력의 바탕이다. 10여년만 거슬러 올라가도 일본의 전략은 지금과 달랐다. 200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일본대표였던 곤도 세이이치 전 일본문화청 장관이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정 신청을 서두르지 말자고 공개적으로 밝힐 정도였다. 가장 밀접한 관계국인 한국과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2015년 무렵이 되면서 일본의 전략은 크게 바뀌었다. “2015년 일본이 군함도를 포함한 메이지 산업유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려고 추진할 때부터 사도광산 문제를 인지하고 관련 보도자료를 냈어요. 사도광산이 세계유산 추천 잠정목록 2번이었거든요.” 당시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강제동원위원회) 조사과장이었던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대표는 사도광산을 세계유산으로 올리려는 일본의 본격적 움직임을 그때 이미 간파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과정을 보면 먼저 각국 정부가 등재를 원하는 자국의 유산을 잠정목록에 올려야 한다. 이후 잠정목록에 등재된 유산 중 정식신청할 후보를 선정해 유네스코에 추천하는 방식을 따른다. 이를 감안하면 곤도 전 장관의 공식 언급과 달리 2007년부터 일본에선 내부적으로 세계유산 등재 추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사도광산은 2010년 처음으로 일본 잠정목록에 올랐다. 정 대표가 안타까워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강제동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문화유산일지라도 어두운 역사까지 함께 조명하면 반대가 없을 텐데, 적어도 일본이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수도 있던 기회를 놓쳤으니까.” 옆 나라의 세계유산 등재 추진을 두고 그때그때 대응할 게 아니라 강제동원 문제 전담 상설기구 설치 등 근본 대책 마련에 나섰다면 좀더 충분한 시간을 갖고 선제적인 대응을 할 수 있었을 거란 아쉬움이다. 이스라엘의 ‘야드 바셈’ 같은 기관 있어야 줄여서 부르는 약칭은 강제동원위로 같지만 먼저 존재했던 강제동원 문제 전담기구는 사실 명칭이 달랐다. 2004년 첫 출범 당시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라는 간판을 달고 시작했다. 활동기간이 한시적인 기구로 출발했고 이후 명칭 개정과 함께 활동기간을 연장한 뒤에도 시한부 운명은 바뀌지 않았다. 과거 국권을 침탈한 옆 나라가 침략의 역사를 교묘히 위장하는데도 체계적인 대응이 늦을 수밖에 없었던 건 전담기구의 부재 탓이 컸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문제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전쟁과 식민지배 피해 당사국인 한국에 이스라엘의 ‘야드 바셈’ 같은 기관이 없는 현실을 개탄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50년대 들어 이스라엘 정부가 나서 만든 이 기관은 ‘이름을 기억하라’는 뜻에 걸맞게 피해사실 조사와 희생자 발굴 및 지원 등의 업무를 전담하는 상설기구로 탄생했다. 강제동원위원회에서 조사과장과 심사과장으로 근무한 허광무 박사는 정부 조직이 필요한 또 다른 이유로 타국 정부와 동등한 위치에서 협상과 논의를 이끌어야 하는 특성을 들었다. 허 박사는 “국내에서 발생한 문제라면 쟁점이 있는 사안이라도 중립적인 재단 같은 기관을 통해 해결할 수 있겠지만, 강제동원은 줄곧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는 일본 정부를 상대해야 하니 민간 차원에서는 어렵다”고 말했다. 학계나 시민사회 등 민간 차원에서는 일본 내부의 ‘양심적’ 세력이 한국 측을 지원하기도 하는 등 관계가 유연하지만, 일본 정부와는 논의의 출발점 자체를 설정하기가 쉽지 않다는 지적이다. 허 박사는 “그렇다고 한국 정부가 창설한 기구 또한 일본 정부와 갈등만 유발해서는 안 되고, 조사를 거쳐 확인한 정부의 공식 입장을 전해 일본 내부의 여론 역시 바른 방향으로 유도하는 쪽이 최선”이라며 “무엇보다 국가가 자국민이 겪은 피해에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점에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는 의미도 있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역사왜곡 문제 발생할 수도 이게 끝이냐는 문제도 남는다. 군함도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하시마섬을 비롯해 일본이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으로 소개하는 세계유산, 그리고 역시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의 한이 서린 사도광산의 뒤를 이어 또 다른 역사왜곡 문제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어서다. 현재로선 일본의 세계유산 잠정목록 가운데 침략전쟁이나 강제동원 문제와 얽힌 역사적 유산이 더 이상은 없다. 언제든 잠정목록에 올린 뒤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할 대상으로 의심할 만한 후보들은 몇 군데 있다. 정 대표는 “도야마현 구로베가와 발전소가 대표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미쓰비시가 전쟁 시기에 만든 지하 군수공장 50여곳을 포함 일본 전국 2000여곳에 굴을 파고 만든 지하 공장들도 근대 산업유산이라는 이름을 붙여 언제든 왜곡된 역사를 홍보하기 위한 공간으로 전용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나마 우리는 일본과 수교를 맺은 국가여서 관계를 바로잡기만 하면 논의가 가능하다. 미수교국인 북한은 일본에서 나오는 역사 자료를 전혀 활용할 수 없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문제를 전담하는 기관이 있고 장관급 인사를 수장으로 두고는 있지만 자료와 접촉 채널의 한계 때문에 피해 조사에서부터 수십년째 큰 벽에 가로막혀 있다. 일본에서 발굴한 자료뿐 아니라 고향이 북한인 피해자의 유골조차 봉환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정 대표는 “강제동원 당시의 피해자는 남과 북으로 갈라지기 전의 피해자들이니 피해자 조사와 추모는 결국 남북한이 함께해야 한다”며 “일본 육군 조병창처럼 남한의 인천과 북한의 평양에 각각 남아 있는 동일한 성격의 역사 유산을 함께 세계유산으로 등재시키면 일본과는 달리 역사적 교훈을 되새기는 선도적 역할을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2022.02.11 17:55

    • 정치

      일본 군함도에는 분노하면서 국내 ‘강제동원’은 왜 지울까

      ㆍ부평 ‘일본육군 조병창’ 건물 철거 논란… 책임 싸고 관계기관 핑퐁게임도 인천시 부평구에 있는 미군기지 캠프마켓. 과거 일본육군 조병창 지역이었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 역사를 담고 있는 하나뿐인 건물이 철거된다. 증거를 없애기로 한 것은 일본이 아니다. 강제동원 피해국 한국이 스스로 결정했다. 건물을 철거한 부지에는 공원과 관청 건물을 만들 계획이다. 해당 부지 바로 옆에 이미 공원이 있지만 문제될 것은 없다. 일단 공원이 크고 많을수록 집값은 오르고 모두가 행복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주간경향은 지난 1436호에서 강제동원 역사를 바라보는 한국의 두가지 시선을 전했다. 이러한 경향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존재한다. 한쪽에서는 일본 군함도의 강제동원 역사를 밝히기 위해 치열한 외교전을 펼친다.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이미 확보한 강제동원 증거를 없애는 작업을 진행한다. 두가지 노력 중 군함도를 둘러싼 외교전은 이미 알려져 있다. 주간경향은 지난 한달, 우리 손으로 피해 증거를 지우는 과정을 추적했다. 취재가 시작된 후 철거책임을 두고 정부 기관들 사이에 치열한 ‘핑퐁게임’이 벌어졌다. 어느 한 곳도 “최종 철거 결정을 우리가 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결정 권한이 없다. 우리는 의견만 전달했다”는 입장은 약속한 듯 같았다. 이대로라면 누구도 결정하지 않았는데 역사적 건물이 철거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할 상황이다. 이미 강제동원 피해 당사자 상당수가 세상을 떠났다. 앞으로 역사적 증거들로만 일본과 대립하는 상황이 된다. 그때가 되면 누가, 왜 국내에 남아 있던 증거를 파괴했는지 따지게 될 것이다. 주간경향은 파괴의 과정을 기록해 훗날 판단의 근거를 남기기로 했다. 인천시 부평구 부평2동 이른바 ‘삼릉마을’에 있는 미쓰비시 줄사택 인천시 부평구 ‘삼릉’마을 인천시 부평2동은 토박이들에게 ‘삼릉(능)’마을로 불린다. 마을 도처에 있는 ‘삼능OO’이라는 간판은 이곳이 ‘삼릉’이라는 단어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인천 부평지역에서 3대째 거주하고 있는 박명식씨(59)에게도 ‘삼릉마을’은 추억의 공간이다. 어릴적 할아버지 집이 있던 공간이자 친구들과의 약속 장소이기도 했다. 그런데 ‘삼릉’이라는 지명의 의미를 묻자 박씨는 한숨을 쉬었다. “삼릉마을이라고 하니 무덤이 3개 있나 보다 했지. 그런 뜻인지 알았겠어요?” 박씨의 대답이다. 삼릉(三菱). 한자를 일본식으로 읽으면 ‘미쓰비시’. 한국인에게 익숙한 전범기업 그 ‘미쓰비시’다. 박씨에 따르면 부평지역에는 일본식 이름의 건물이 많았다. “동네에 아베라는 이름이 붙은 극장, 창고, 사무실도 있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삼릉마을도 이곳에 미쓰비시 공장으로 강제동원된 노동자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광복절이면 소개되는 ‘미쓰비시 줄사택’이 바로 이곳에 있다. 현재 4개동이 남은 줄사택은 폐허와 다름없다. 집 외벽에는 붉은 글씨로 ‘철거예정’이라고 적혀 있다. 보존되고 있다기보다 방치됐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한 상황이다. 광복절 ‘반짝’ 관심은 ‘미쓰비시 줄사택’을 둘러싼 갈등을 키웠다. 이곳을 개발하려는 쪽은 줄사택에 대한 관심이 걸림돌이다. 개발론자들의 바람은 이곳을 주차장으로 만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보존하고 싶은 쪽은 줄사택의 가치가 광복절에만 조명받는 것이 아쉽다. 이마저도 ‘왜 미쓰비시 사택이 있는지’, ‘노동자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등은 정확히 알려지지도 않았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시간만 흘렀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은 간단하다. 이곳에 남은 일제강점기 유적들의 가치를 평가해 철거 후 개발을 하든, 보존 후 활용을 하든 결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절차는 과거에는 불가능했고, 현재는 무시되고 있다. 그 이유는 삼릉마을을 나와 조금만 걸으면 보이는 미군기지 ‘캠프마켓’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군기지 캠프마켓 내에 있는 옛 일본육군 조병창 병원건물. 1780호 건물로도 불린다. ‘캠프마켓’과 ‘인천 일본육군 조병창’ 미군 기지 ‘캠프마켓’은 광복 직후 인천시 부평구에 자리 잡았다. 2002년에 반환이 결정됐는데 현재는 전국 미군기지에 보급하는 ‘빵’ 공장만 운영 중이다. 캠프마켓의 일부 지역은 반환이 이뤄졌다. 하지만 아직도 가장 넓은 크기의 기지 중심부는 반환되지 않았다. 이는 이곳에 정확히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의미다. 바로 이 상황이 부평에 남은 일제강점기 유적들에 대한 평가를 어렵게 한다. 미군기지가 앉은 자리가 바로 옛 일본육군 ‘조병창’이고 이에 대한 조사가 진행돼야 부평 일대 유적에 대한 평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조병창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육군에서 부르던 고유 명칭이다. 병기와 탄약 등의 제조와 수리를 담당하는 공장을 의미한다. 부평 조병창이 특별한 것은 그 희귀성에 있다. 일본 육군은 전쟁 말기까지 조병창을 총 8개 운영했다. 일본 본토에 6개, 일본이 세운 괴뢰국인 만주국에 1개, 부평이 마지막 1개다. 당시 부평 조병창의 공식 명칭은 ‘인천 일본육군조병창’이다. 일본이 부평을 조병창 부지로 선택한 것은 지리적 조건 때문이다.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조건 박사는 “부평은 당시 경성과 인천을 잇는 중간에 위치하면서 한강을 통한 수로 접근이 용이하고 계양산, 철마산, 원적산 등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자리하고 있다”며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병참시설이 들어설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었다”고 설명했다. 반환이 결정된 부평 미군기지 캠프마켓을 구역별로 구분한 지도. A·B구역은 반환이 완료됐다. /부평문화원 제공 부평이 조병창으로 낙점된 것은 1939년 초로 보인다. 1939년 8월 9일 일본육군 조병창 장관 고스다 가쓰조가 육군대신 이타가키 세이시로에게 보낸 ‘토지 매수의 건 신청’이라는 문서에 부평 일대의 토지 매수가 필요하다는 내용이 기재돼 있다. 육군성이 고스다의 요청을 허가함과 동시에 조선에 ‘제조소’ 증설이 필요한 이유를 기재한 1939년 9월 1일 문서도 있다. 해당 문서에 따르면 조병창 설립 목적은 ‘만주와 중국 일대로 보낼 병기를 신속히 생산한다’와 ‘부평 조병창은 총기류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부평 조병창 산하에는 부평 제1제조소와 평양제조소가 속했다. 제1제조소 아래는 다시 3개의 공장이 있었는데 공장마다 소총과 탄약, 총검, 군도 등을 나눠 생산했다. 이 밖에도 기숙사와 병원, 매점 그리고 노동자들을 훈련시킬 기능자 양성소도 만들었다. 부평 조병창의 생산력도 놀라운 수준이었다. 총검 45만개를 만들었는데 이는 일본 전체에서 생산된 30년식 총검 전체 수량의 5% 이상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일본육군은 부평 조병창 산하에서 ‘마루유’라고 불렀던 수송 잠수함까지 생산했다. 이렇게 놀라운 생산이 가능했던 근원에는 ‘조선인 강제동원’이 있었다. 부평 조병창에 동원된 조선인들은 두 시기로 나눠볼 수 있다. 각각 ‘조병창 등 관련 시설물 건축 단계’, ‘조병창 완공 후 무기 생산 단계’다. 인천대 이상의 교수 연구에 따르면 일본은 부평 조병창을 건설하기 위해 김포, 강화, 경상남북도, 전라남북도 등 전국에서 강제동원을 했다. 이 교수는 “공사 규모가 컸던 만큼 최소 수천명의 인력이 동원됐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무기 생산 단계에서는 더 많은 조선인이 동원됐다. 일본군이 제작한 ‘유수명부’와 ‘임시군인군속계’ 등의 자료에 따르면 부평 조병창 소속으로 기재된 조선인은 총 1만2584명이다. 동원자 중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국민학생을 포함한 학생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매일신보 1944년 5월 10일자에도 실렸다. 기사에 따르면 당시 경성공업, 인천중학, 인천상업 등에서 동원이 됐다. 결국 부평 조병창 건물은 어린 학생들을 포함한 조선인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졌다. 인천시 부평구 캠프마켓 토양오염도 측정결과. 문제가 된 1780호 건물은 단순 유류 오염으로 표시돼 있다.(위)/독자 제공, 부평 미군기지 캠프마켓 내에 있는 건물들에 번호를 붙인 지도./ 부평문화원 제공 부평 조병창의 가치 전쟁 이후 일본은 서둘러 조병창 관련 역사를 지웠다. 조병창은 전쟁 당시 일본육군의 무기 생산 정도와 의도를 드러낸다. 전후 일본은 내부에 남아 있던 조병창 건물을 없애고, 부지는 공원 등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일본 사가미 조병창, 부평 조병창 딱 두군데만 현재까지 남아있게 됐다. 두 조병창이 보존된 것은 미군이 주둔기지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일본 사가미 조병창 부지의 미군은 이전 계획이 없다. 결국 조병창을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은 부평이 유일하다. 현재 부평에 자리 잡은 미군기지는 44만㎡에 달한다. 이를 편의상 A·B·C·D 구역으로 나누면 2019년 A구역 10만9961㎡, B구역 10만804㎡의 반환이 완료됐다. 각각의 구역에는 조병창 건물들이 산재돼 있다. 기지 반환 전, 문화재청은 해당 건물들에 대한 실태조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조병창으로 이용될 당시 건물의 정확한 용도와 가치에 대한 조사까지는 이뤄지지 못했다. 특히 아직 반환되지 않은 D구역에 주요 건물들이 몰려 있어 반환 후 정확한 조사를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문제는 일부 지역 반환과 함께 즉시 생겨났다. 미군기지로 사용됐던 지역에 환경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주한미군 공여구역주변지역 등 지원 특별법(이하 ‘주한미군 특별법’) 제12조에 따르면, “국방부 장관은 반환공여구역을 징발해제 또는 양여, 매각 등 처분하기 전에 지상물, 지하 매설물, 위험물, 토양오염 등을 제거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이중 부평 조병창 지역은 토지오염 문제가 있다. 지역에는 여러 소문이 떠돈다. 다이옥신과 같은 심각한 오염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부터 단순 유류 오염이라는 주장까지 있다. 만약 다이옥신 같은 심각한 오염이라면 즉각 시민에게 공개돼야 한다. 국방부에 사실관계를 문의했다. 국방부는 지난해 말 환경공단에 조사용역을 발주해 토지오염 정도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그 결과, 미군 기지 일부에서 중금속, 유류 오염이 확인됐다. 다이옥신은 없었다. 하지만 오염이 확인된 만큼 주한미군 특별법에 따라 국방부는 토지를 정화해야 한다. 그후, 인천시에 부지를 반환하는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다. 그런데 정화가 필요한 토지 위에 특별한 가치가 있는 건물이 있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부평 조병창 지역에서 바로 이 문제가 발생했다. 아직 반환되지 않은 미군기지 캠프마켓의 D구역. 주요 일본육군 조병창 건물들이 이 지역에 있다. 문제가 된 곳은 B구역 내에 있는 이른바 ‘1780호 건물’이다. 이 건물의 용도가 밝혀진 것은 1~2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은 “병원으로 밝혀지기 전에는 이 건물이 조병창 본부 건물로 알려져 있었다”며 “미군 부지가 반환된 2019년, D구역에서 진짜 본부 건물을 확인한 후에야 이 건물이 병원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말했다. 1780호 건물은 병원의 한 부분이었다. 그런데 6·25전쟁 당시 북한군 포격으로 병원 중앙 부분이 파괴돼 별개의 건물처럼 보이게 됐다. 원래는 2층 건물이었는데 현재는 1층만 남았다. 건물 아래 토지가 유류로 오염됐지만, 건물의 가치는 관련 전문가 모두 “특별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상의 인천대 교수는 “일제 침략, 6·25전쟁, 미군기지까지 한국 근현대사를 총망라하는 보기 드문 건물이다”고 평가했다. 배 교육부장은 “아직 한 번도 건물의 내력이나 변천 과정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지 않았다”며 “철거하고 어떻게 활용할지 논의하기 전에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조사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지 않더라도 1930~1940년대 건물이라는 점에서도 가치는 있다. 하지만 이 건물은 지난 6월 철거가 결정됐다. 광복 직후 미군이 촬영한 일본육군 조병창 / 부평문화원 제공 누가 철거를 결정했나 1780호 건물의 철거 결정 과정에는 인천시, 국방부, 환경공단, 문화재청, 인천시가 조직한 시민참여위원회까지 다양한 기관과 사람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지금부터 “우리가 아닌 저쪽 책임이다”는 이야기가 반복되는 만큼 이해를 위한 주의가 필요하다. 가장 먼저 철거에 대한 인천시 입장을 들어봤다. 인천시 관계자는 “시에서 철거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다”며 “지난해부터 환경공단, 국방부, 시민참여위원들과 함께 회의를 했는데 보존이 어렵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인천시는 관련 조례에 따라 캠프마켓 시민참여위원들의 (철거)의결을 따라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주간경향은 철거가 결정됐다는 지난 6월 17일 ‘제3회 캠프마켓 반환공여구역 주변지역 등 시민참여위원회(제5기)’ 회의록을 입수했다. 해당 회의록 말미에 위원장은 “국책사업 반납할 지경, 환경정화 1년 반~2년 늦춰지고 비용 증가 등 고려해서 부득이 철거하지만 아카이브 작업을 통해서 나중에 복원하는 방향으로 모으면 어떻겠나? 이렇게 의견을 모으는 것으로 하고 표결절차는 안 거치고 반대의견을 달아서 위원회 의견으로 정리하겠음”이라고 말한다. 이를 통해 두가지를 알 수 있다. 1780호 건물은 비용과 시간 문제로 철거한다. 철거에 대한 표결절차는 거치지 않았다. 회의록에는 묘한 대화도 있다. 한 인천시 관계자는 “건물 하부 오염정화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건물을 보존하고자 한다면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해야 한다”며 “예를 들면 시민참여위원회가 오염된 것을 인정하고 건물을 보존하자는 서명을 하는 등 의결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자 한 위원은 “시민참여위원회가 책임져야 한다고 표현하셔서 듣기에는 부담된다”고 말했다. 회의 분위기를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날 회의의 특이한 부분은 또 있다. 역사적 가치를 이유로 건물 보존을 주장했던 위원들 일부가 참석하지 못했다. 대표적인 것이 인천대 이연경 교수다. 이 교수는 미군기지 반환 사업에 참여한 경력이 있다. 이 교수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당시 용산 미군기지에 들어가야 하는 일정이 잡혀 있어서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며 “만약 철거가 결정되는 회의라는 걸 알았다면 어떻게든 참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또 다른 위원 A씨는 “회의 안건이 철거여부 결정이란 것을 당일 아침에야 알았다”며 “이날 회의에는 국방부, 환경공단 관계자들까지 참석해 건물 철거 외에 토지를 정화할 방법이 없다고 강조했다”고 말했다. A씨는 “이미 철거가 결정된 상황에서 회의를 하는 느낌이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회의록에 따르면 국방부 관계자는 “정화를 하면서 보존할 수 있는지 깊게 고민했으나 이 건물은 불가하다”고 말했다. 환경공단 관계자는 “굴착이 확실하고 단기간 저비용인데 다른 방법도 선택할 수도 있지만, 이 경우 정화비용을 떠나서 확실한 정화가 가능한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고 기간도 예상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굴착은 건물 철거 후 오염된 흙을 파내는 것이다. 6·25전쟁으로 파괴되기 전 일본육군 조병창 병원건물(위)./ 국사편찬의원회, 현재 부평 미군기지 캠프마켓 B구역에 있는 일본육군 조병창 병원건물. 이른바 ‘1780호 건물’ / 부평 문화원 제공 이에 대해 부산 하야리아 미군 부대 이전 당시 환경정화 문제 등에 관여했던 경성대 도시공학과 강동진 교수에게 문의했다. 강 교수는 “건물을 부순 뒤 흙을 파서 세척하는 가장 빠르고 쉬운 방식을 택한 것”이라며 “독일, 영국 등 선진국에서는 비록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건물을 유지한 상태에서 자연 치유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무조건 안 된다고만 할 게 아니라 다양한 나라의 사례,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듣고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강 교수는 “이미 해봤기 때문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며 하야리아 부대 이전 사업에서 얻은 교훈도 들려줬다. 그는 “당시 기름에 오염됐다는 이유만으로 총 380동의 건물 중 355동을 헐어냈다”며 “그 건물들을 어떻게든 남겼더라면 부산의 특색을 살린 공원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유류 오염 때문에 건물을 헐어내는 잘못을 제발 반복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국방부에도 ‘건물 철거가 공식입장’인지 물었다. 국방부는 서면으로 “오래된 건물을 보존하면서 법적 기준 이하로 정화를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환경공단과 함께 설명했지만 건물 존치 여부는 인천시가 결정했다”고 답했다. 이후 국방부 관계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법에 따라 토지 위의 건물 가치가 아닌 환경문제에 대해서만 판단한 것”이라며 “건물 존치, 철거 여부에 대한 결정 권한은 국방부에 없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국방부가 기자에게 보낸 답변을 입수한 인천시가 다시 기자에게 연락해 왔다. 인천시 관계자는 “건축물 철거 결정 권한은 인천시에 없다”며 “향후 활용할지 말지 시민참여위원회를 통해 결정해 의견을 전달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국방부가 환경정화를 해서 철거를 할지 최종 결정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누가 철거를 최종 결정을 했느냐’를 두고 각 기관의 입장은 다른 듯 닮았다. “우리는 건물 철거의 최종 결정을 하지 않았다. 이에 관한 의견을 전달했을 뿐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1780호 건물은 왜 이렇게 급하게 철거해야 하는 것일까. 환경문제 아닌 시간, 비용의 문제 주간경향은 시민참여위원회의 3월 25일 회의록에서 그 실마리를 찾았다. 이날 회의에서 한 위원은 오염 조사 자체에 근원적 의문을 제기한다. “토양오염 그림을 그려놓은 것을 보면 건축물 아래도 오염돼 있는 걸로 보이는데 건물 아래 기초가 있고 잡석이 깔려 있고 조사가 불가능할 텐데 어떻게 조사했을까 궁금합니다”라고 묻는다. 그러자 시청 관계자는 “건물 최대한 인접한 곳에 보링(지질을 조사하기 위해 땅속 깊이 구멍을 뚫는 일)을 한다”고 답한다. 이에 위원은 “몰라서 질문을 드린 게 아니다”며 “건물을 철거하면 그 안쪽은 오염과 별로 상관없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 건축물은 현 상태로 놔두고 활용계획까지 나온 다음에 철거를 해도 토양오염 정화와는 상관이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시청 관계자는 “토양정화 명령권자는 부평구청장인데 3년 이내에 완료를 해야 한다”고 답한다. 철거가 속전속결이어야 하는 첫 번째 이유 ‘행정기간’ 문제다. 두 번째 이유는 보다 근본적이다. 또 다른 한 위원이 “1780호 건물 같은 경우 오염은 됐지만 존치를 위해 국방부와 재협의한다고 돼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시청 관계자는 “국방부에서는 건물 주변은 정화할 수 있는데 건물 하부까지 정화하지 못한다고 한다”고 답한다. 이에 해당 위원은 “결국 방법은 건물을 차폐하고 사후 관리를 하는 것이다”라고 보존 방법을 설명한다. 그러자 시청 관계자는 “토지 소유권이 넘어오면 오염정화에 대한 책임까지 넘어오게 된다. 추후 비용 부담은 인천시 책임이다”고 답한다. 쉽게 말해, 국방부 비용으로 토지정화를 할 수 있는데 건물 보존을 위해 정화를 하지 않고 소유권을 이전받으면 인천시가 향후 비용을 지불한다는 것이다. 속전속결의 두 번째 이유 ‘비용’ 문제다. 세계문화유산의 꿈 부평문화원은 일찍부터 일본군 조병창의 역사적 가치에 주목했다. 문화원 소속 허광무 박사는 “일본 군함도 문제에 국민적 관심이 쏠리는 상황에서 정작 국내에 있는 강제동원 증거는 오늘 철거될지, 내일 철거될지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다”며 “부평문화원 차원에서 조병창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했는데 건물이 철거되면 불가능할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세계문화유산 추진은 통일부에서도 관심을 가질 만한 사안이다. 부평 조병창의 부속 기관은 평양제조소다. 북한 역시 해당 건물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평 조병창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남북이 함께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 의미가 있다. 또 이 문제가 인천지역에서 결정할 문제가 맞느냐는 지적도 있다. 인천지역 사학자 B씨는 “부평 조병창은 인천의 역사만이 아닌 한반도의 역사”라며 “전국 곳곳에서 국내 최다 인원이 동원된 부평 조병창을 두고 몇몇 사람끼리 저건 철거하고, 이건 남기고 하는 식으로 결정하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전문가들은 문화재청의 태도에 분노한다.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문화재청 관계자는 “인천시에 보존을 권고했다”며 “인천시처럼 나오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철거를 하더라도 법상으로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강제동원은 한국 역사의 문제다. 정부든 국민이든 일제강점기 문제를 “덮어버리자”고 주장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강제동원 실태 조사는 각종 제약에 막혀 있다. 취재 도중 만난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한 가지 부탁을 했다. “1780호 건물 철거가 선례가 돼 앞으로 반환될 C구역 주요 건물들도 환경정화를 이유로 철거될 것 같다. 한번 조사라도 해볼 수 있게 제발 관심을 가져달라”는 것이다.

      글·김찬호 기자 사진·이석우 기자 2021.08.02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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