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경향신문

  • 경향신문

  • 스포츠경향

    • 울주군청 정종진, 추석씨름대회 금강장사

      스포츠종합

      울주군청 정종진, 추석씨름대회 금강장사

      정종진이 16일 경남 고성군국민체육센터에서 열린 위더스제약 2024 추석장사씨름대회 금강장사에 오른 뒤 트로피를 들어 올리고 있다. 연합뉴스 울주군청의 정종진이 2024 추석장사씨름대회 금강급(90kg 이하) 정상에 올랐다. 16일 경남 고성군국민체육센터에서 열린 위더스제약 후원 대회에서 정종진은 팀 동료 노범수를 3-1로 꺾고 우승했다. 5판 3승제로 진행된 결승전에서 정종진은 끈질긴 승부 끝에 금강장사 타이틀을 차지했다. 정종진은 16강에서 전 대회 우승자 임태혁(수원특례시청)을 2-1로 제압하는 이변을 일으켰다. 8강에서는 문경시청의 신현준을, 준결승에서는 수원특례시청의 김기수를 연이어 물리치고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전 첫 판을 잡채기로 이긴 정종진은 두 번째 판에서 노범수에게 밀어치기로 패했다. 하지만 세 번째 판과 네 번째 판에서 밀어치기와 잡채기로 연속 승리를 거두며 역전에 성공했다. 이번 우승으로 정종진은 개인 통산 세 번째 금강장사에 올랐다. 위더스제약 2024 추석장사씨름대회 금강급(90㎏ 이하) 경기 결과 금강장사 정종진(울주군청) 2위 노범수(울주군청) 공동 3위 김기수(수원특례시청), 오성호(양평군청)

      박효재 기자 2024.09.16 17:50

    • ‘금강불괴’의 끝이 보인다···벌랜더, AZ전 3이닝 8실점 ‘한 타자에 홈런 2방 7실점 수모’

      야구

      금강불괴’의 끝이 보인다···벌랜더, AZ전 3이닝 8실점 ‘한 타자에 홈런 2방 7실점 수모’

      휴스턴 저스틴 벌랜더가 9일 애리조나전에서 3회초에 5실점 등 총 8실점을 하고 마운드에 내려오면서 힘겨운 표정을 짓고 있다. AP연합뉴스 ‘금강불괴’도 가는 세월을 붙잡기엔 역부족이다. 메이저리그 현역 최다인 260승 투수 휴스턴의 저스틴 벌랜더(41)가 처참하게 무너졌다. 벌랜더는 9일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 미닛 메이드 파크에서 열린 2024 메이저리그(MLB) 애리조나와 홈경기에 선발 등판했지만 3이닝 8피안타 8실점으로 부진했다. 삼진은 1개도 잡아내지 못했다. 팀이 6-12로 패하면서 시즌 6패째(3승)를 기록한 벌랜더는 시즌 평균자책점은 4.52에서 5.30으로 크게 상승했다. 벌랜더는 2회초 페이빈 스미스에게 3점포를 맞으며 고개를 숙였다. 3회에는 에우제니오 수아레스에게 1타점 적시타를 맞았고, 이어 스미스에게 만루홈런을 허용했다. 벌랜더가 1경기에 같은 타자에게 홈런을 허용한 것은 11번 있지만, 7타점을 헌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벌랜더는 최근 6경기에서 27⅔ 이닝 동안 41개의 안타를 맞으며 27실점했다. 이 기간 평균 자책은 8.78. 탈삼진은 19개에 그쳤다. 하락세가 뚜렷하다. 앞서 벌랜더는 부상으로 4월 말 시즌 첫 등판을 가졌고, 6월 10일 경기 후 목 불편 증상으로 다시 부상자 명단에 올랐다. 휴스턴과 벌랜더의 보장 계약은 이번 시즌까지다. 이번 시즌에 140이닝을 넘게 던져야 2025시즌 3500만 달러 상호 옵션이 발동된다. 휴스턴 저스틴 벌랜더가 9일 애리조나전에 선발 등판, 공을 던지고 있다. AP연합뉴스 하지만 벌랜더는 잦은 부상으로 140이닝을 던질 수 없는 상황이다. 이날까지 14경기에서 단 74 ⅔이닝을 소화하는데 그쳤다. 내구성과 구위가 떨어진 벌랜더가 올 시즌 뒤 현역을 연장하기 쉽지 않다는 전망이 나온다. 불과 2년 전, 아메리칸 리그(AL) 개인 세번째 사이영상을 수상했던 벌랜더는 올해 잦은 부상으로 고전하고 있다. 이날 최고 구속은 시속 153㎞이 나왔지만 볼끝의 움직임이 떨어지면서 애리조나 타선에 난타당했다. ‘금강불괴’로 불려온 벌랜더도 이젠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모습이다. 벌랜더는 2005년 빅리그 데뷔한 이후 통산 260승 149패 평균자책 3.29를 기록 중이다. 월드시리즈 우승 2회를 경험했고, 올스타에 9번 선정됐다. 2011년 AL MVP에 올랐고, 3번의 사이영상, 다승 1위 4회, 탈삼진 1위 5회를 이뤄냈던 강속구 투수의 대명사다.

      양승남 기자 2024.09.09 12:04

    • 연정훈·김종민·유선호, ‘1박 2일’ 역사상 최초 금강산行 ···‘어리둥절’

      연예

      연정훈·김종민·유선호, ‘1박 2일’ 역사상 최초 금강산行 ···‘어리둥절’

      KBS ‘1박 2일’ 연정훈, 김종민, 유선호가 금강산 등반에 나선다. 7일 방송되는 KBS2 예능프로그램 ‘1박 2일 시즌4’(이하 ‘1박 2일’)에서는 ‘2024 파리올림픽’ KBS 해설위원들과 함께 전지훈련을 떠난 여섯 멤버의 두 번째 이야기가 그려진다. 지난 주 전지훈련 맞대결에서 외인구단 팀에게 패하며 산악 등반 벌칙이 확정된 외계인 팀(연정훈·김종민·유선호·이영표·기보배·정유인)은 ‘금강산’에 간다는 이야기에 혼란에 빠진다. 과연 금강산의 진실은 무엇일지 관심이 쏠린다. 더불어 ‘1박 2일’ 멤버들과 KBS 해설위원진의 양보할 수 없는 저녁식사 복불복 맞대결이 공개된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운동선수들답게 해설위원 팀의 악착같은 승부욕이 발동됐고, 덩달아 ‘1박 2일’ 멤버들의 승부욕 역시 뜨겁게 불타오르며 올림픽 경기 못지않은 박진감 넘치는 승부가 펼쳐졌다는 후문이다. 여기에 공정한 진행을 위해 제작진이 섭외한 특별 심판이 깜짝 등장한다. 심판으로 출연한 의문의 인물은 ‘피구왕 통키’ 분장까지 감행하며 모두의 시선을 강탈했다고 해 궁금증을 자아낸다. ‘1박 2일’에 깜짝 등판한 특별 심판의 정체는 오는 7일 저녁 6시 10분 방송되는 ‘1박 2일 시즌4’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손봉석 기자 2024.07.07 01:20

    • 금강주택, 지속적인 기부활동으로 사회적 책임 앞장

      생활

      금강주택, 지속적인 기부활동으로 사회적 책임 앞장

      금강주택이 지속적인 기부활동을 통해 사회적 기업으로서의 책임에 앞장서고 있어 눈길을 끈다. 금강주택은 초록우산어린이재단과 2015년부터 꾸준히 국내아동지원을 함께하고 있다. 2019년부터는 매년 1억 원을 후원하여 난방비 및 저소득 아동 등 주거안정비 지원을 진행해오고 있다. 작년 말 전달된 후원금은 아동 가정의 최저주거기준 이상 주거 개선을 위한 보증금 지원과 아동의 건강한 성장 발달 지원을 위한 난방비 및 난방용품 지원금으로 사용됐다. 또한 금강주택은 과거 울진지역 산불피해 이재민을 위한 물품기부, 강원 산불피해 성금 기부 등 다양한 기부활동을 진행해오면서 사회적 기업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있다. 금강주택 관계자는 “취약계층 아동들이 향후 건강한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도움이 필요한 곳에 꾸준히 후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강석봉 기자 2024.07.04 19:49

  • 주간경향

    • [이기환의 Hi-story](115)나라님도 ‘와유’할 때 금강산 직접 여행한 제주 여인·14세 소녀

      문화/과학 이기환의 Hi-story

      [이기환의 Hi-story](115)나라님도 ‘와유’할 때 금강산 직접 여행한 제주 여인·14세 소녀

      ‘와유(臥遊)’라…. 국립춘천박물관이 지난해 12월 초부터 상설전시관 2층 브랜드존에서 <이상향으로의 초대 금강산과 관동팔경> 관련 작품 전시를 시작했습니다. 요즘 국립박물관의 ‘핫템’인 ‘고 이건희 회장 기증품’인 ‘단발령망금강산’(정선·1676~1759) 등 9건이 특별 출품됐답니다. 저는 전시회 설명 중 ‘누워서 노닌다(즐긴다 혹은 감상한다)’는 뜻인 ‘와유(臥遊)’라는 용어에 이른바 꽂혔습니다. ‘와유’는 중국 남북조 시대 송나라의 종병(375~443)과 관련된 성어인데요. 종병은 벼슬길도 마다하고 산수를 유람했던 은사였습니다. 그러다 늙고 병들어 다닐 수 없게 되자 대안을 마련했는데요. “예전에 다녔던 명승지를 모두 그림으로 그려 벽에 걸어놓고 누워 감상하며 노닐었다(臥以游之)”(<송서> ‘열전·종병’)는 겁니다.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국보). 다시 그려봐야 이보다 잘 그릴 수 없다는 작가의 자부심이 배어 있다. 그렇게 잘 그렸으니 머리맡에 기대어 실컷 보라고 자랑했다. 개인소장·리움미술관 제공 ■‘눕방’으로 상상여행 조선조 실학자 성호 이익(1681~1763)의 ‘와유 찬양론’을 보죠. “와유란 몸은 누워 있지만 정신은 노니는 것… 직접 보지는 못하기 때문에 상상에 근거해야… 마음과 눈에 도장 찍히듯… 앉은 자리에서 감상해도 마음은 간다.”(<성호전집> ‘와유첩발’) 그림 속 풍경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그림을 통해 마음의 유람을 즐긴다고 한 겁니다. 문신 신정하(1680~1715)는 정선의 금강산 그림을 보고 찬탄했습니다. “정선의 (금강산) 화첩을 보고 어루만지며 상상하니 깊고 높은 물과 산에서 정신이 노니는 듯하고….”(<서암집>) 또 정선의 ‘금강전도’(국보)에도 재미있는 글이 실려 있습니다. “일만이천 봉 드러난 뼈를 뉘라서… 참모습 그려 내리… 설령 내가 발로 직접 밟아 보자 한들 이제 다시 두루 걸어야 할 터, 그 어찌 머리맡에 기대어 실컷 봄만 같으리오(縱令脚踏須今遍 爭似枕邊看不慳).” 정선이 ‘다시 그린들 이보다 잘 그릴 수 있겠느냐, 차라리 이 그림을 머리맡에 두고 보는 게 낫다’고 자화자찬하고 있습니다. ■정조가 누워 감상한 산 그림 꼼짝없이 구중궁궐에 ‘붙잡혀’ 정사를 펼쳐야 했던 임금들은 어떠했겠습니까. 예컨대 정조는 1788년 단원 김홍도(1745~1806?)·김응환(1742~1789)에게 “금강산의 풍경을 그려오라”는 명을 내립니다. “김홍도는 임금의 명을 받들어 비단 화폭을 가지고 금강산에 들어가 연 50일 머물면서 일만이천 봉과 구룡연 등 여러 경승을 잘 살펴보고 형상을 본떠 수십 장 길이의 두루마리로 만들었다.”(서유구의 <임원경제지> ‘이운지’) 이때 그린 김홍도의 ‘금강산도’는 수십 길, 즉 40~50m 되는 두루마리 대작이었다는 얘기입니다. 현재는 화첩 형식의 초고본(5권 70장)이 남아 있습니다. 소문난 ‘일벌레’, ‘책벌레’였던 정조는 밤늦게까지 책을 읽고, 정사를 펼치다가 틈틈이 김홍도의 대작 ‘금강산도’를 보고 마음의 유람, 즉 ‘와유’을 즐겼을 겁니다. 정조는 1788년(정조 12) 단원 김홍도·김응환에게 “금강산의 풍경을 그려오라”는 명을 내린다. 서유구는 “김홍도가 임금의 명을 받들어 50일 머물면서 수십 장 길이의 두루마리 금강산 그림을 그렸다”(<임원경제지> ‘이운지’)고 전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자료 14세에 불과했던 김금원은 남장 차림으로 여행을 떠난다. 충북 단양팔경 중 하나인 ‘옥순봉’을 둘러보며 “시인들은 풍월 읊느라 잠시의 틈도 없고 조물주는 인간을 시기해서 산 밖으로 쫓아냈네. 산새는 산 밖의 일을 알지 못하고 봄빛은 숲속에 있다고 지저귄다”고 읊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연세대도서관 소장 ■‘18세기 셀럽’ 여성 이럴 때 사대부·선비는 물론 임금조차 ‘와유’로 대리만족하는 판이었는데요. 그럴 때 “떠나볼까” 하고 길을 나선 여성 두 분이 있었답니다. 그것도 “산천에서 놀이를 즐기는 부녀자는 장 100대에 처한다”(<경국대전>)는 규정이 있는데 말입니다. 실화입니다. 먼저 제주 출신인 김만덕(1739~1812)을 소개해보죠. 이분 이야기는 정사인 <정조실록>, 정조의 일기인 <일성록>, 명재상 채제공(1720~1799)의 시문집(<번암집> ‘만덕전’), 유학자·실학자인 다산 정약용(1762~1836)의 <다산시문집>에 실려 있습니다. 그만큼 당대의 ‘셀럽’이었다는 거죠. 김만덕은 “제주 남자와는 혼인하지 않겠다”고 과감히 선언하며 독신을 고수한 ‘원조 비혼녀’였는데요. 뛰어난 장사수완으로 큰 부자가 됐답니다. 1795년(정조 19) 김만덕 인생에서 큰 전기가 마련됩니다. 제주에 큰 기근이 들어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했답니다. 이때 김만덕은 천금을 들여 백성을 구휼했습니다. 1796년 제주목사 유사모(1750~?)가 장계를 올려 김만덕의 선행을 보고했습니다. 그러자 정조가 “너의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명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김만덕의 대답이 전혀 뜻밖이었습니다. “저는 늙고 자식도 없습니다. 신분을 바꿀 마음도 없습니다. 그저 육지로 나가 한양 구경을 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금강산도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정조는 흔쾌히 “그렇게 하라”고 허락했습니다. 대단하죠. 푸짐한 상금도, 신분상승도 원하지 않고 그저 ‘한양 구경, 금강산 유람’을 소원으로 내세웠으니 얼마나 파격적인 발언입니까. ■“만덕에게 ‘갑질’하면 안 된다” 국립춘천박물관이 상설전시실 2층 브랜드존에 마련한 전시(‘이상향으로의 초대, 금강산과 관동팔경’). 이 자리에는 고 이건희 회장의 기증품 9건 9점이 출품되었다. 국립춘천박물관 제공 정조는 김만덕의 한양 및 금강산 유람을 위해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었답니다. “마침 한겨울(1796년 음11월)이라 (금강산 여행을) 떠날 수 없었다. …봄이 올 때까지 양식을 주고 곧바로 내의원의 차비대령인 행수 의녀로 충원하라. 그래서 수의(首醫·어의)에 소속시켜 각별하게 돌봐주라.” 정조는 만덕을 임금의 주치의인 어의의 휘하에 두도록 특전을 베풀었습니다. 자칫 김만덕을 질투하는 자들이 ‘갑질’을 하지 않을까 해서 “만덕을 건드리지 말라”고 조치를 취한 거죠. 그뿐이 아닙니다. <일성록> 1796년 11월 28일자는 “규장각 초계문신을 대상으로 한 시험에 ‘(김)만덕’이라는 시제를 냈고, 그 시험에서 서준보(1770~1856)가 수석을 차지했다”고 했습니다. ‘만덕’을 시제로 시험을 치를 정도였던 겁니다. 정조는 “만덕이 금강산 여행을 마치고 돌아갈 때도 후히 대접하라. 만덕이 지나가는 각 도의 관찰사는 양식과 경비를 넉넉히 전하라”는 특명을 내렸습니다. 김만덕은 정조 임금의 보살핌 속에서 1797년 늦봄 꿈에 그리던 금강산 유람을 떠납니다. “김만덕은 금강산 만폭동과 중향봉 등 절경을 두루 찾아다녔다. 안문령-유점사를 거쳐 해금강 삼일포에서 뱃놀이를 한 뒤 총석정(통천)까지 두루 구경한 뒤 한양으로 돌아왔다.” ■“눈동자가 두 개래” 김만덕의 일거수일투족은 당시 한양에서 엄청난 화제를 뿌렸습니다. <만덕전>(김만덕의 전기)을 쓴 채제공은 “만덕을 둘러싼 소문이 장안에 널리 퍼져 사람들이 다투어 그를 만났다”고 기록했습니다. 정약용의 <다산시문집>(‘변·중동에 관한 변증’)은 김만덕을 둘러싼 ‘오해와 진실’을 소개하면서 실소하는데요. 즉 한양으로 올라온 김만덕이 “내 눈은 중동(重瞳·눈동자가 두 개)”이라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김만덕의 눈을 보려는 이들로 ‘줄을 서시오’를 외칠 만큼 길었는데요. 호기심을 참지 못한 정약용 역시 만덕을 초청해 그의 눈을 자세히 살펴보았답니다. 그러나 ‘중동’이 아니었답니다. 김만덕 스스로도 잘못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도 한양 사람들은 김만덕의 말만 철석같이 믿었다는데요. 정약용은 “아무리 내가 아니라고 해도 사람들은 ‘만덕의 눈이 중동이 맞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이렇게 허언을 믿으니…”라며 혀를 찹니다. 우상으로 떠오른 김만덕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믿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쨌든 김만덕이 금강산·한양 호화여행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갔는데요. 그때가 58세였습니다. 김만덕은 자신을 보살펴준 채제공에게 “이제 이승에서는 볼 수 없겠다”고 눈물을 흘렸는데요. 채제공은 “울지마라”면서 지당한 한마디를 남깁니다. “너는 제주에서 나고 자랐으니 한라산 백록담 물을 떠 마셨을 것이고, 지금 또 금강산을 두루 답사했다. …천하의 남자 중에 이렇게 유람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느냐. 그런데 이별하는 자리에서 도리어 아녀자의 수다스러운 태도를 보이다니….” ■14세 소녀의 “떠나볼까?” 단원 김홍도가 정조의 명으로 금강산을 답사한 뒤 길이 40~50m 달하는 ‘금강산도’를 그렸다. 그러나 그 두루마리 그림은 전해지지 않는다. 대신 단원이 정조의 명으로 ‘금강산도’를 그리기 위해 사전에 초본(밑그림)을 남겼는데, 이것이 <해동명산초본첩>이다. 금강산 그림을 ‘와유’하고싶은 정조의 명에 부응하듯 사진에 가까울 정도로 치밀한 필치를 보여준다. 원래 60면이었는데 국립중앙박물관에는 32면이 남아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또 한 분 ‘떠나볼까?’ 하고 훌쩍 행장을 꾸린 신여성이 있었으니, 불과 14세의 김금원(1817~?)이었습니다. 원주 출신인 김금원의 신분은 기녀였습니다. 부모는 그러나 금원을 마냥 여자아이로만 키우지 않았습니다. “부모가 가사나 바느질 같은 여자아이의 일을 시키지 않고 문자를 가르쳤다. 덕분에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통하고 고금의 문장도 본받게 됐다.”(<호동서락기>) 금원은 보통내기가 아니었습니다. 조선 여성으로서 부녀자의 도리를 단호히 거부하면서 담장 밖 여행을 추구했습니다. “여자가 깊숙한 규방에서 살면서 식견을 넓히지 못한 채 결국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면 얼마나 슬픈 일이냐.” 김금원은 “남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은 불행이지만 하늘은 나에게 산수를 즐기는 어진 성품과 눈과 귀로 보고 듣고 느낀 바를 글로 쓸 수 있는 능력까지 주었다”고 했습니다. 물론 14세 어린 딸의 여행을 선선히 응할 부모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소녀 김금원은 ‘마치 새장에 갇힌 새가 나와 푸른 하늘을 날아오르고, 천리마가 굴레를 벗고 천 리를 달리는 기분’이라 했습니다. ■덧없는 인생을 노래한 14세 소녀 김금원의 여행을 두고 다른 견해도 있습니다. 김금원이 원주 감영의 기녀 신분으로 참여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물론 김금원이 사대부들의 유람에 시와 문장을 담당한 기녀로서 동행했을 수도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호동서락기>는 분명 금원이 남장을 하고 여행길에 올랐다고 했습니다. “때(1830)는 춘삼월 내 나이 14세, 머리를 동자처럼 땋고 수레에 앉았다. 충북 제천 의림지를 찾았는데….” 김금원은 이어 단양팔경을 둘러보는데요. 특히 단양팔경 중 하나인 옥순봉을 구경한 뒤의 감동을 시로 남겼습니다. 14세에 불과한 김금원은 울진 평해 월송정을 지나면서 “덧없는 인생, 사람의 생(生)이 가련할 뿐(浮世人生只堪可憐也哉)”이라는 세상을 달관한 듯한 어른스러운 시를 남겼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금원이 정양사 앞 혈성루에 올라 금강산 일만이천 봉을 묘사한 글. 봉우리마다 각기 다른 기이한 형상을 직유법을 사용해서 표현하고 있으며 형용할 수 없는 천태만상을 리듬감 있는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간송미술관·연세대도서관 소장 “시인들은 풍월 읊느라 잠시의 틈도 없고(詩家風月暫無閒) 조물주는 인간을 시기해서 산 밖으로 쫓아냈네(造物猜人送出山). 산새는 산 밖의 일을 알지 못하고(山鳥不知山外事) 봄빛은 숲속에 있다고 지저귀네(謂言春色在林間).” 말이 나온 김에 김금원이 평해(울진)의 월송정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며 지었다는 시를 좀 보죠. “덧없는 세상, 사람의 생(生)이 가련할 뿐(浮世人生只堪可憐也哉)”이라 했습니다. 이게 14세 소녀의 시입니다. ■그리운 금강산 김금원은 이후 꿈에 그리던 금강산으로 발길을 돌리는데요. 장안사-옥경대-표훈사-백운대-보덕굴-백천동-만폭동-금강문-감로수 등 내외 금강산 전체를 둘러봅니다. 김금원이 금강산 일만이천 봉을 묘사한 장면을 볼까요. “눈 쌓인 언덕 같고, 불상 같고, 칼 든 군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도 같고, 연꽃과도 같고, 파초잎과도 같다. 치켜올린 것도 있고 내려뜨린 것도 있고 더러는 가로 갔고 더러는 세로로 섰으며 일어서 있는 것도 쭈그리고 있는 것도 있다.” 국립춘천박물관이 상설전시실의 개편에 따라 선보이는 고 이건희 회장의 기증품. 겸재 정선(왼쪽)과 현재 심사정(가운데), 허필 등의 작품 등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그린 이건희 기증품 9건 9점이 전시된다. 국립춘천박물관 제공 봉우리마다 각기 다른 천태만상을 직유법을 사용해 리듬감 있는 필치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후 총석정, 삼일포 등 관동팔경을 두루 거칩니다. “바닷속 언덕 가까운 곳에 서 있는 돌(총석정)은 모두 6면으로 깎아 하나의 떨기로 묶어 놓았는데 거의 10여개나 된다. 매 떨기의 돌은 어떤 것은 7~8개, 어떤 것은 10여개의 기둥이다. 그 돌들이 가지런한 치아처럼 벌어졌는데 쇠줄로 갈아낸 듯 하나하나가 6면으로 조금도 굴곡이 없고 넓고 좁은 것도 없이 정밀하고 조밀조밀하다.” 지극히 공감각적인 묘사죠. 김금원은 이후 설악산 일대와 한양을 두루 살피고 여행을 마무리 짓습니다. ■글로 전하지 않으면… 이 대목에서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이제 평범한 조선의 여성으로 돌아와야 했으니까요. “군자는 족한 줄 알고 그칠 수 있기에… 지금 유람으로 숙원을 이뤘으니 멈출 만하다. 이제 본분으로 돌아가… 남장을 벗어버리니 여자가 됐다.” 김금원은 1차 여행을 다녀온 뒤 17세 살 연상인 김덕희(1800~?)의 첩(소실)이 되는데요. 1845년 평안도 의주 부윤으로 발령받은 남편을 따라 경기 이북-황해도-평안도 지방을 여행하는 행운을 누립니다. 김금원의 2차 여행입니다. 이 1·2차 여행의 경험을 담아 쓴 기행문이 <호동서락기>입니다. 저술 동기도 깜찍합니다. “지나간 일도 스쳐 지나가면 눈 깜짝할 사이의 꿈에 불과하다. 글로 전하지 않으면 누가 지금의 금원을 알겠는가….” 김금원은 여자로서가 아니라 여행작가로서, 시인으로서 후대에 당당하게 이름을 알리고 싶었던 겁니다. 이 순간 한 조각 상념이 떠오릅니다. 예전에 금강의 겨울산(개골산)을 여행한 적이 있는데요. 이제는 ‘와유’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것….

      #이기환 #김만덕 #김금원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2024.01.02 07:08

    • 문화/과학 정태겸의 풍경

      [정태겸의 풍경](21) 강원 삼척 준경묘·영경묘와 금강소나무숲

      ㆍ하얀 비밀의 숲 강원도가 하얀 폭설로 뒤덮였다. 삼척의 산과 산 사이에 자리한 마을은 북유럽을 연상케 했다. 눈 돌려 보는 모든 풍광이 열두폭 병풍에 겨울의 풍경을 담은 수묵화 같았다. 이번 목적지는 왕가의 묘소다. 자료를 찾다가 발견했는데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준경묘, 영경묘. 태조의 5대조인 이양무와 그의 부인이 잠든 곳이라고 했다. 조선을 건국한 왕의 뿌리가 되는 조상의 묘임에도 그 실체가 밝혀진 건 대한제국을 세운 직후인 1899년이었다. 다시 말해 조선 왕실은 500년이 다 돼가도록 이 무덤을 비밀에 부쳤다. 눈 내린 날 구태여 이곳을 찾은 이유는 묘소를 에워싼 금강소나무숲 때문이다. 발이 푹푹 빠질 만큼 쏟아진 눈은 소나무 가지마다 두껍게 앉았고, 하얀 눈밭 위에는 작아도 기품 있는 재각(齋閣)이 꼿꼿하게 서 있었다. 삼척의 깊은 산골인지라 누구도 보지 못했을 설경이고 아무나 감상하기 어려운 자태다. 행운이었으리라. 한해의 시작이 좋다. 비밀의 숲에서 만난 이 기운이 모두에게 전해지길. 올해는 좋은 일만 가득하길….

      글·사진 정태겸 글쓰고 사진찍으며 여행하는 몽상가 2022.01.14 15:05

    • 경제 다시 보는 남북건설협력사업

      [다시 보는 남북건설협력사업](4)금강산 이산가족 면회소

      ㆍ6·15 정상회담 이후 남측에서 설치 제의 이산가족은 우리 현대사의 질곡을 반영한다. 이산가족 관련 남북 간 협의가 구체적으로 시작된 것은 1970년 초였다.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북한에 ‘평화통일 구상’을 밝히며 ‘선의의 체제경쟁’을 제안했고, 1971년 8월 12일 대한적십자사는 북한에 이산가족찾기를 제안했다. 북한은 8월 14일 제안을 수락했으나 이산가족 상봉을 합의하지 못하고 적십자 본회담은 1973년 7차를 끝으로 열리지 못했다. 그러나 본회담 외에 적십자 실무회담은 지속됐다. 1975년 실무회담에서 남한은 북한 판문점에 남북이산가족면회소를 설치할 것을 최초로 제안했으나 북측은 호응이 없었다. 2002년 9월 제15차 이산가족 상봉 모습 / 현대아산 제공 남북이산가족 상봉이 처음 이루어진 것은 1985년이었다. 1984년 서울 풍납동지역 수해가 발생한 후 북한이 수재민에게 물자를 보내겠다고 적십자사에 제안해 물꼬가 트였다. 남한적십자사는 수해물자를 받겠다고 답변하고 추가로 남북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회담을 재개해 1984년 11월 이산가족 고향방문을 합의했다. 2000년 이전 이산가족 상봉은 단 한차례 남북은 방문단 규모, 방문지(남한-고향, 북한-평양과 서울) 등에 이견이 있었으나 여러 번의 협의를 통해 1985년 9월 20일부터 23일까지 서울과 평양에서 역사적인 남북이산가족 상봉 및 남북예술단의 공연이 열렸다. 후속으로 열린 적십자회담에서 이산가족의 자유 왕래, 이산가족의 재결합, 남북 적십자공동위원회설치, 이산가족면회소 설치 등에 대해 논의했으나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다.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은 남북관계를 동반자 관계로 규정하고 새로운 통일외교정책의 기본방향을 담은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7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7·7 선언 후 대한적십자사는 북한에 이산가족 상봉 관련 회담 재개를 제의했다. 1989년 5월 북한적십자사에서 회담을 수락해 9월부터 7차례에 걸쳐 실무회담이 열렸으나 역시 이산가족 상봉은 합의하지 못했다.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 공사 모습 / 현대아산 제공 1990년부터 남북고위급회담이 시작됐으며, 이산가족 상봉 관련 협의도 진행했다. 하지만 노태우 대통령이 임기 말 레임덕에 들어간 것, 남쪽 대북강경파들의 남북기본합의서에 대한 반발 등으로 무산됐고, 관련 회담은 1998년까지 열리지 못했다. 2000년 이전에도 남북이산가족 상봉 혹은 고향방문이 여러 번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러나 이산가족 상봉은 1985년에 단 한 차례 있었을 뿐, 모두 2000년 이후 이루어졌다. 특히 직접 대면 상봉 22번 중 15번이 2000년부터 2007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1998년 집권한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 극복과 남북관계 개선이 가장 중요한 공약이었다. 본격적인 이산가족 상봉은 2000년 6·15 정상회담이 계기가 됐다. 6·15 남북공동선언에서 “남과 북은 올해 8·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나가기로 하였다”고 선언했다. 그 결과 2000년 한 해 동안 이산가족방문단을 2차례 교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2000년 6·15 정상회담 이후 이산가족 상봉 협의를 위해 금강산에서 6월 27일부터 열린 1차 남북적십자 실무회담에서 남한은 이산가족면회소 설치를 제의했다. 남한은 이산가족면회소를 별도로 건설하는 것이 아닌 남측의 자유의집이나 북측의 통일각을 활용해 매월 4회, 회당 100명씩 상봉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남북은 이산가족면회소의 설치·운영에 기본적으로 합의하고 구체적인 사항은 추후 협의하기로 했다. 남한이 이산가족면회소 설치를 제안한 것은 이산가족이 고령인 점을 고려해 상봉 제도화와 상시적으로 만날 수 있는 장소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2000년 9월 열린 제1차 적십자 본회담에서 남측은 면회소를 판문점 각 측 지역에 각각 설치해 매주 100명씩 만나는 방안을 제시했다. 북측은 면회소를 금강산에 설치할 것과 운영과 관련된 문제는 12월에 협의하자고 제안했다. 북한이 이산가족 상봉에 편리한 판문점이 아닌 금강산 지역에 건물을 신축하자고 제안한 것은 판문점이 유엔이 관리하는 지역인 점을 꺼렸고, 금강산이 남한 주민의 방문을 허용한 유일한 북한지역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2002년 9월에 열린 4차 적십자회담에서 면회소를 △우선 금강산지역에 설치 △경의선 철도·도로가 연결되면 추가로 서부지역에 설치하는 문제 협의 및 확정 △금강산지역에 설치하는 면회소는 남북이 공동 건설하되 자재·장비는 남측이, 공사인력은 북측이 제공 △금강산면회소 완공 후 면회 정례화 등을 합의했다. 상봉 제도화와 상시적 만남 장소 확보 건설을 위한 실무접촉은 2002년 10월부터 2003년 1월까지 3차례 열렸다. 북한은 면회소 건설장소를 온정리 조포마을로 할 것과 면회소를 1000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로 건설할 것을 제안했다. 남한은 건물규모는 증축이 가능하므로 우선 적정규모로 할 것을 주장했다. 남북은 이견을 해소하지 못했으나 규모는 1000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하되 구체적인 내용은 추후 실무자들이 검토하기로 했다. 2003년 8월, 남과 북은 금강산에서 건설실무자(추진단)회의를 열었으나 합의를 도출하지 못했다. 건설실무자회의가 난항을 겪자 2003년 11월 남북적십자 본회담에서 면회소문제를 논의했다. 남북은 ‘전담건설·전담관리’ 방식이 합리적이라고 공감했고 면회소 장소, 규모, 완공 후 시설·관리 운영문제 등에 대해도 의견접근을 이루었다. 금강산면회소 장소는 고성군 온정리 조포마을 앞 구역, 규모는 6000평으로 결정하고 ‘금강산면회소 건설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했다. 합의서에는 남한이 건설과 관리·운영을 전담하고, 북한은 금강산 현지에서 건설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신변안전과 편의를 보장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2003년 11월 건설에 합의해 남측은 면회소 건설을 위해 준비를 진행했다. 면회소 공사를 계기로 조달청은 처음으로 북한에서 건축되는 건축물의 설계 및 공사과정에 참여했다. 공사는 남북 근로자 간 접촉이 증대되는 등 남북 간 교류와 협력 증진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 공사 모습 / 현대아산 제공 면회소는 5만㎡(1만5000평)의 부지에 지하 1층, 지상 12층 규모의 면회소동과 지상 3층 규모의 면회사무소 2동 및 경비실로 계획됐다. 면회소동 1·2층엔 600명을 수용하는 행사장과 회의실, 편의시설 등이 들어서며 3·4층에 호텔구조 객실 78실, 5∼12층에 콘도구조 객실 128실 등 총 206실의 객실이 마련됐다. 면회소는 최대 1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게 건설됐다. 건물은 철근콘크리트구조로 건설이 가능했으나, 공사 기간 단축과 북측 근로자의 건설시공능력 등을 고려해 철골구조로 계획됐다. 금강산의 전력 사정을 고려해 건물 내에 전력생산과 난방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시스템(일종의 CES·Community Energy System)을 구축했고, 용수공급을 위한 심정도 설치했다. 2005년 착공, 공사기간 연장 끝에 완공 이산가족면회소 착공식은 2005년 8월 31일 한완상 대한적십자사 총재와 장재언 북한적십자회 중앙위원장, 남과 북 이산가족 550명 등 8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금강산 온정리 조포마을 앞 면회소 부지에서 남북 공동행사로 진행됐다. 2007년 하반기 완공을 목표로 공사가 시작됐다. 정부는 이산가족면회소 건립을 위해 남북협력기금에서 대한적십자사에 550억원을 지원했다. 면회소 공사의 시공사는 현대건설과 현대아산(주)컨소시엄이 담당했다. 건설공사의 감독과 감리는 조달청 공무원이 금강산에 상주하면서 수행했다. 공사에는 북한인력이 참여했다. 투입된 건설인력은 대부분 외부에서 차출된 돌격대였으며, 이들의 숙식을 위한 컨테이너를 설치해 공사를 진행했다. 순탄하게 진행될 줄 알았던 이산가족면회소 공사는 여러 난관이 있었다. 북한은 2005년 말 발생한 미 재무부의 방코델타아시아(BDA) 북한계좌 동결에 대한 대응으로 2006년 7월 미사일을 발사하고 이산가족 상봉 행사와 면회소 공사를 중단시켰다. 공사는 중단 후 7개월이 지난 2007년 3월에 재개됐으나 2년이었던 공사 기간 연장이 불가피했다. 2007년 10월, 남북정상회담에서 양측은 면회소 완공 시 이산가족 상시 상봉을 합의했다. 같은 해 11월 적십자회담에서는 상봉 행사 정례화도 합의했다. 그러나 이산가족면회소는 2008년 7월 11일 발생한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으로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다. 당시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는 공사가 완료돼 7월 12일부터 감리에 의한 준공검사를 진행하고 있었으나 공사를 중단하고 철수했다. 8월 중순 열릴 예정이었던 준공식은 취소됐고, 2008년 하반기로 진행하기로 했던 이산가족 상봉 행사도 열리지 못했다. 금강산 관광 중단 후 이산가족면회소는 정상적으로 사용되지 못했다. 2009년 9월, 2010년 10~11월, 2014년 2월, 2015년 10월, 2018년 8월 등 5차례 이산가족 상봉에 사용됐을 뿐 12년간 방치됐다. 방치된 이산가족면회소의 모습은 남북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이산가족문제는 인도주의적 문제다. 정치적인 이벤트가 아닌 순수한 가족의 만남으로서, 이산가족 상봉이 상시적으로 이루어져 이산가족면회소가 사람들로 북적이는 그날을 기대해본다. 변상욱은 건축사, 건축시공기술사다. 1999년부터 현대아산 기술관리부에서 일하며 금강산관광지역 건설사업을 관리했다. 이 시기 금강산 호텔, 금강산 옥류관 건설 등에 참여했다. 이후 2004년부터 2016년까지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에서 건설사업과 공장건축인허가업무를 담당했다. 2007년 산업포장을 받은 바 있다.

      변상욱 건축사 정리·김찬호 기자 2021.04.23 11:29

    • 경제 다시 보는 남북건설협력사업

      [다시 보는 남북건설협력사업](1)금강산 관광

      ㆍ상상 속의 명산을 직접 밟아보다 금강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하는 노래다. 동네에서 아이들이 고무줄놀이를 하며 부른 노래였던 것 같다. 내게 금강산은 수많은 글, 노래, 그림 등의 예술작품에나 나오는 상상 속의 산 같은 것이다. 그래서 1998년 11월 금강산관광을 위해 동해항에서 출발하는 금강호를 보며 비현실적인 감흥을 느꼈다. 해금강 설경 / 사진작가 이정수 금강산관광 논의는 1989년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북한을 방문해 금강산관광사업에 합의하면서 시작됐다. 정 회장은 냉전체제가 해체되면 북한과의 사업이 현대그룹 도약의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국내외 정세 때문에 본격적인 사업 추진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정 회장의 1992년 대통령선거 낙선이었다. 현대그룹의 대북사업은 1998년 정권교체 시까지 중단됐다. 정권이 바뀐 후 정 회장은 대북사업을 적극 추진했다. 1998년 6월 22일 현대그룹과 조선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가 금강산관광사업에 관한 계약을 체결했다. 금강산관광사업 계약체결에 앞서 6월 16일 정 회장은 소 떼 500마리와 함께 북한을 방문했다. 이 장면은 CNN을 통해 전 세계에 생방송으로 중계됐다. 금강산관광은 육로를 이용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분계선 통과가 유엔사 관할이기 때문이다. 또 금강산에 관광객을 위한 숙박시설도 없었으므로 배에서 숙식이 가능한 크루즈를 이용해 관광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크루즈 4척을 말레이시아의 스타크루즈에서 임대했다. 크루즈의 이름은 금강호, 봉래호, 풍악호, 설봉호였다. 금강산의 4계절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다양한 아이디어가 적용된 숙소 바지선 위에 호텔을 만든 해금강호텔. 세계최초의 플로팅호텔이다. 북한의 서커스 공연장. 외부를 덮은 막과 내부를 지지하는 스페이스 프레임으로 구성돼 있다. 평양의 냉면 전문 음식점 옥류관의 금강산 분점 / 현대아산 제공 초기 숙소로 이용된 해금강호텔은 바지선 위에 호텔을 건축한 세계최초의 플로팅호텔이었다. 7층, 160실 규모로 건조 당시 세계적 이슈가 됐다. 인프라가 없었던 초기 금강산관광에 전력, 용수, 오수처리 등을 자체적으로 할 수 있는 해금강호텔은 유용한 해결책이었다. 그러나 엔진소음, 진동과 흔들림에 의한 뱃멀미로 금강산호텔, 외금강호텔이 건립된 후에는 선호되는 숙소는 아니었다. 온정각은 관광객의 휴게시설로 1999년 2월 개관했다. 온정각에는 식당, 판매점이 있었다. 짙은 붉은색 계통의 지붕에 외장재는 적삼목을 사용했다. 현대그룹은 금강산 특성을 고려해 시설들을 저층으로 건립하고 붉은색의 경사지붕, 외장은 목재를 사용한다는 기준을 마련했다. 온정각 건너편에는 동관을 2005년 추가로 개관했다. 기존 온정각은 1층이었으나 동관은 2층으로 건축됐다. 문화회관은 북한의 서커스 공연을 위해 건립한 건물이다. 스페이스 프레임과 막구조로 건립됐다. 막구조는 2002년 월드컵경기장을 건축하면서 국내에 많이 도입된 구조로 1998년까지는 잘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구조에 비해 고가였다. 하지만 기둥이 없는 큰 공간을 짧은 기간에 건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1999년 11월에는 금강산온천장이 준공됐다. 평화문제연구소에 따르면 금강산 온천은 400년 전에 발견됐으며, 금강산에서 유일한 온천이라고 한다. 온천수가 솟아나는 곳에 욕탕을 지어 바닥에서 온천수가 올라오는 구조로 돼 있다고 한다. 현대아산은 온정각에서 금강산여관으로 향하는 길목에 온천장을 건설했다. 기존 북한의 온천장에서 배관을 해 온천수를 공급했으며, 동시에 1000명이 이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금강산은 눈이 자주 오는 지역으로 노천탕에서 눈을 맞으며 온천욕을 즐길 때가 가장 좋았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금강산에서 유일한 온천. 온천수가 솟아나는 곳에 욕탕을 지어 바닥에서 온천수가 올라오는 구조로 돼 있다. 저렴한 숙소확보도 필요했다. 북한이 금강산관광을 위해 1981년 건설한 금강산여관을 임대해 2003년 6월부터 리모델링 공사를 시작했다. 금강산여관은 본관(12층 객실 167개실)과 부속동 3개동(봉래동, 풍악동, 설봉동)으로 구성돼 있었다. 부속동을 포함하면 객실수가 총 219개였다. 금강산여관의 리모델링 공사는 북한의 건축수준을 파악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 남한에서는 북한의 철근 콘크리트구조 건축기술 수준이 상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금강산여관 리모델링을 위해 건물을 조사한 결과, 여러 문제점이 발견되기도 했다. 금강산여관은 착공 1년 만인 2004년 7월 개관했다. 리모델링은 구조체만 남겨두고 구조보강을 비롯해 전기, 냉난방 등 신축에 가까운 규모로 시행했다. 공사는 북한 인력을 이용해 진행했다. 이들은 금강산 외 지역의 청년들로 남측 기술자들이 기술을 가르치면서 공사를 했다. 금강산여관은 이후 금강산호텔로 이름이 바뀌었다. 초기에는 식당시설도 없어 관광객은 도시락으로 점심식사를 해야 했다. 이후 온정각, 해상호텔 등에 식당을 만들면서 이용이 가능해졌다. 특히 금강산 옥류관은 평양의 냉면 전문 음식점 옥류관의 금강산 분점으로 2005년 8월 개관했다. 북한의 백두산 건축연구원이 기본 계획설계를 하고 남한의 건축사사무소에서 실시설계를 했다. 옥류관은 평양과 같이 한옥지붕을 가진 절충형의 건물이었다. 내부에는 북한의 예술가들이 그린 벽화가 설치돼 있었다. 평양 옥류관의 요리사가 파견돼 평양과 동일한 메뉴(냉면·온반 등)를 판매했다. 이외에도 금강산에는 패밀리마트(현재 CU)가 있었다. 2002년 11월에 온정각과 금강빌리지에 처음 문을 열었고, 2008년 금강산관광 중단 전까지 3개 매장을 운영했다. 패밀리마트는 한때 평양진출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산가족면회소 금강산에 마련된 이산가족면회소. 금강산 온정리 지역에 12층 규모로 건립됐다. / 현대아산 제공 금강산은 남북이산가족 상봉에서도 가장 중요한 장소였다. 총 22번의 대면상봉 중 4번을 제외하고 모두 금강산에서 이루어졌다. 이산가족면회소는 금강산 온정리 지역에 12층 규모로 건립됐다. 면회소동(12층)과 면회소 사무소동(3층) 2개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면회소동 1~2층엔 600명을 수용하는 행사장과 회의실, 편의시설 등이 있고, 3~4층에 호텔 구조 78실, 5~12층에 콘도 구조 128실 등 총 206실의 객실에 최대 1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2005년 착공해 2008년 준공했다. 사업비는 540억원 정도로 알려져 있으며, 남북협력기금으로 충당했다. 2018년까지 총 4차례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열렸다. 온정리인민병원과 금강산영농장 금강산에서는 남북의료협력사업이 진행되기도 했다. 2006년 북한은 현대아산을 통해 금강산 온정리인민병원 개·보수 지원을 요청했다. 온정리인민병원은 내과, 외과, 소아과, 산부인과 등이 있었다. 주민 8700명을 치료하는 병원이었으나, 시설이 열악했다. 보건복지부는 산하단체인 국제의료보건재단을 통해 건물의 단열, 난방 등을 개·보수하고, 각종 의료시설도 지원했다. 북한 환자의 진료와 치료는 남한 의사와 북한 의사가 함께했다. 특히 산부인과 치료, 안과 치료(백내장 수술) 등에 주민의 호응이 컸다고 한다. 현대는 관광에 사용되는 식자재 중 농산물을 금강산 현지에서 생산해 조달하는 방안도 추진했다. 금강산관광 시 식자재를 모두 해상으로 운송하면 비용이 많이 들고 신선도 유지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1999년 현대는 북한의 금강총회사와 협의해 3만평(9만9174㎡) 규모의 온실을 설치했다. 최초의 농산물 납품은 2000년 3월 이루어졌다. 농업기술 전수를 위해 남한의 농업전문가도 파견했다. 그러나 농작물 생산과 납품은 금강산관광지역과 영농장이 5㎞ 정도 거리임에도 남한 인원이 방문할 수 없었다. 전화통화도 불가능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땅이 척박하고 출하 시 수량과 품질검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적정 품질과 수량의 확보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북한은 농작물을 현대에 납품할 때 이것을 수출로 간주해 검역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현대그룹이 어려움에 처한 것이 금강산관광사업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금강산관광사업은 2003년 육로관광이 시작된 후 2005년부터 흑자를 기록했으며, 2007년에는 162억원의 순이익을 거뒀다. 2008년 8월 금강산관광이 중단되기 전 누적 관광객은 거의 200만명에 달했다. 2008년 금강산관광이 중단되지 않았다면 10년 내에 투자비 회수를 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금강산관광 중단은 안타까움이 크다. 산허리에 안개가 자욱한 금강산. 다시 한 번 가고 싶다. 될 수 있으면 완행열차를 타고 철원을 거쳐 설레는 마음으로. 변상욱은 건축사, 건축시공기술사다. 1999년부터 현대아산 기술관리부에서 일하며 금강산관광지역 건설사업을 관리했다. 이후 2004년부터 2016년까지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에서 건설사업과 공장건축인허가업무를 담당했다.

      변상욱 건축사 정리·김찬호 기자 2021.03.12 16:08

  • 레이디경향

    • 재테크

      금강산의 속살 ‘내금강’ 59년 만에 전격 공개

      금강산이 드디어 남측 관광객들에게 자신의 ‘속살’을 열어 보였다. 59년 동안 굳게 닫혀 있던 ‘내금강’ 관광길이 지난 6월 1일 드디어 열린 것. 덕분에 북한의 4대 사찰 중 마지막 남은 ‘표훈사’를 시작으로,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사찰 ‘보덕암’, 계곡의 자태가 아름다운 ‘만폭동’, 국내 최대 마애석불인 ‘묘길상’ 등 금강산의 아름다운 자태가 여과 없이 드러났다. 이밖에 보는 내내 가슴을 졸이게 만드는 아찔한 ‘교예공연’, 금강산이 한눈에 보이는 노천탕이 있는 온천, 닥터피시, 지난 5월 오픈한 면세점까지.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금강산의 다양한 볼거리를 소개한다. 금강산은 노부부만? 초등학생도 OK! 금강산 관광이 시작된 지 벌써 9년이 지났다. 지난 9년 동안 ‘죽기 전에 꼭 한 번 가봐야 한다’며 환갑이나 칠순을 맞은 노부부들의 방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제는 ‘갈 만한 사람들은 모두 가봤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 이 때문인지 2004년 육로 관광이 개통되면서 금강산을 찾는 관광객의 연령층은 차츰 낮아지기 시작했다. 30~40대의 중년 부부, 산악회나 동호회 회원들, 대학생들은 물론이고, 초등학교에서 단체로 금강산을 관광하고 있는 추세. 고향이 북한이거나 친인척을 북측에 둔 60~70대 노부부들은 ‘눈물’로 북한 땅을 밟았고, 30~50대 중년 부부들은 어머니, 아버지의 고향에 대한 ‘향수’를 갖고, 20대 대학생들은 동포애와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호기심’으로, 초등학생들은 ‘여기가 6·25전쟁으로 갈라진 우리의 반쪽’이라는 설명을 들으며 역사 공부하듯이 북한 땅을 밟는다. 실제로 초등학생들의 단체 관광이 적지 않다고 한다. 2박 3일 일정의 금강산 관광 코스. 첫째 날, 버스는 아침 8시 30분 광화문에서 출발한다. 북한도 엄연히 국적이 다르기 때문에 ‘국경’이나 다름없는 북측 출입사무소를 무사히(?) 통과해야만 북한 땅을 밟을 수 있다. 버스를 타고 비무장지대를 지나면 남과 북의 허리를 가르고 있는 ‘군사분계선’을 볼 수 있다. 군사분계선… 단단한 철제 벽으로 만들어져 있지 않을까 기대를 했지만, 막상 보니 1미터가량의 나무 기둥 하나를 세워놓은 게 전부다. ‘허접한 나무 기둥 하나로 남과 북이 나뉘어 있다니…’. 허무한 생각을 감출 수 없다. 그렇게 생경한 북한 풍경을 감상하다 보면, 어느새 금강산 관광특구에 도착한다. 도착 시간은 오후 4시다. 내금강…도도하고 화려한 아름다움 금강산은 크게 외금강, 내금강, 해금강으로 나뉜다. 외금강은 웅장한 남성적 매력이 풍기는 반면, 내금강은 화려하고 도도하면서도 아늑한 여성으로 비유된다. 98년 외금강 관광을 시작한 지 9년 만인 2007년 6월 1일, 군사시설이 많다며 공개를 거부하던 북한이 드디어 내금강 관광을 허용했다. 내금강을 가기 위해서는 북한의 마을을 지나야 하기 때문에 북한 측이 끝까지 보여주지 않으려고 고집했던 곳이다. 이렇듯 어렵게 열린 내금강은 59년 만에 남측 관광객들의 방문을 허락했다. 관광 둘째 날, 드디어 내금강으로 출발했다. 내금강을 가기 위해서는 온정각에서 온정령(859m)까지 버스로 이동을 한다. 2시간 동안의 버스 이동 중에는 북측 안내원이 합승해 금강산 굽이굽이 얽혀 있는 전설을 구성진 목소리로 풀어낸다. ‘북한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과 ‘저 많은 것을 어떻게 외울까’ 하는 신기함 때문에 2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르게 흘러갔다. 중간에 ‘금강읍’이라는 북한의 한 마을을 통과하는데, 실제 북한 사람들이 밭을 갈고, 길거리를 걷고, 이야기를 하는 등 현재 살고 있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다. 버스 이동이 끝나면, 그곳에서부터 4km 정도는 도보 산행이다. 내금강 관광의 입구는 표훈사. ‘금강산 4대 사찰’로 불리는 신계사, 유점사, 장안사, 표훈사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절이다. 표훈사에 있는 스님은 삭발을 하지 않고, 빨간 망토를 두르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내금강의 등산로는 산책로를 연상시킬 정도로 완만해 주변의 정취를 마음껏 느끼면서 산행을 즐길 수 있다. 산행 중에는 관광객들을 인도하는 2인 1조의 북한 안내원도 만날 수 있는데, 북한 사람을 직접 만나 인사도 하고 간단한 대화도 나눠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금강산 곳곳에 불교문화의 흔적 만폭팔담으로 불리는 8개의 옥빛 연못을 감탄사를 연발하며 지나치다 보면, ‘보덕암’에 도착한다. 깎아지른 바위 절벽에 위태롭게 매달린 작은 사찰이 바로 보덕암. 그 신기한 모습에 관광객들의 탄성이 끊이질 않는다. 그야말로 자연과 인간이 합작으로 만들어낸 절경이다. 일부 관광객들 사이에서는 내금강의 진짜 볼거리는 바로 ‘보덕암’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 보덕암에 도착하면 북한 안내원들로부터 보덕암에 얽힌 전설을 들으며, 주변 정취를 감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보덕암을 지나면 높이 15m, 폭 9.4m의 한국 최대 마애불 ‘묘길상’과 마주하게 된다. 묘길상은 오랜 시간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관광객들의 합장 앞에서 거대한 위용을 자랑한다. 묘길상을 뒤로하고 내려오는 길에도 곳곳에 남아 있는 불교문화 유적의 흔적들이 관광객들의 발길을 잡는다. 서산대사가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한 ‘백화암터부도밭’, 고려시대 때 나옹화상의 원불로 조각된 ‘삼불암’, 화재로 주춧돌과 사리탑 하나만 앙상하게 남은 ‘장안사터’를 마지막으로 내금강 관광 코스가 끝이 난다. 관광 셋째 날에는 만물상, 해금강, 구룡폭포 중에 선택해서 관광을 마친 뒤 서울로 향하게 된다. 금강산 관광을 마치며… 2박 3일의 금강산 관광 중 정말 잊을 수 없는 것은 ‘내금강의 빼어난 절경’도, 금강산이 병풍처럼 한눈에 보이는 ‘노천탕’도 아닌, 바로 반세기 만에 처음 만나보는 ‘북한 사람’들이었다. 영화배우처럼 예쁘게 단장한 북한 안내원들, 그들이 불러주는 북한 특유의 하이톤 노래, 버스 이동 중에 보았던 무표정한 북한 군인들, 마을 개천에서 물놀이를 하던 아이들, 빨래를 하면서 신기한 듯 우리를 힐끔 쳐다보던 북한 주민들…. 분단 반세기가 만들어낸 너무 다른 그들의 모습이 금강산을 떠나오는 내내 가슴 한구석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내금강 답사 코스 온정각 출발 - 온정령 - 금강읍 - 표훈사 - 금강문 - 만폭동 금강대 - 내팔담(흑룡담 비파담 벽파담 분설담 진주담 거북담 선담 화룡담) - 마하연터 - 묘길상 - 보덕암 - 표훈사 - 백화암터부도밭 - 삼불암- 울소 - 장안사터 표훈사 내금강의 시작을 알리는 표훈사는 ‘금강산 4대 사찰’중 유일하게 전쟁을 견디고 남아 있는 절이다. 묘길상 높이 15m, 폭 9.4m의 국내 최대 마애불 보덕암 북한 국보급 유적 98호인 보덕암은 절벽을 따라 매달리듯 세워져 있다. 20m가 넘는 절벽에 7.3m 구리기둥과 쇠줄이 암자를 지탱하고 있다. 삼불암 북측 보존급 유적 309호인 삼불암은 삼각형의 바위 앞면에 높이 3.7m, 가슴 너비 1.3m의 세 명의 부처가 새겨져 있다. 교예공연 금강산 관광특구에 도착한 첫째 날은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모란봉 교예단의 공연을 관람한다. 교예단원들은 북한에서 최고의 재능을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자칫 생명까지 위험할 수 있는 아슬아슬한 공연이 이어졌다. ‘도대체 어떻게 저런 걸 해낼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발생한 한 남자 단원의 실수. 순간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분위기와 함께 장내에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두 번이나 실수를 계속하며 가슴을 졸이게 만들던 그는 결국 세 번째에 극적으로 성공하면서 관객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런데 문득 ‘저 사람 오늘 무사(?)할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금강산 온천 1999년에 문을 연 금강산 온천은 100% 천연 온천수에 라돈 성분이 들어 있어 류머티즘에 효과가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천탕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금강산의 아름다운 봉우리들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그야말로 ‘신선 놀음’이 부럽지 않은 순간이다. 닥터피시, 발 마사지 뜨거운 온천수에 살면서 사람 몸의 각질을 먹는 것으로 유명한 닥터피시의 서비스(?)도 맛볼 수 있다. 면세점 지난 5월 북한에도 드디어 면세점이 들어섰다. 온정각에 들어선 면세점은 2백55평 규모로 각종 나물과 술 등 북한 특산품과 고급 양주와 시계, 화장품과 향수 등 다양한 상품을 판매한다. 가격은 일반 면세점 가격과 비슷한 수준이다. ■글 / 김민주 기자 ■사진 / 이주석 ■취재 협조 / 한국관광공사

      2007.09.18 00:00

  • 화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