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학·환경
김해 첫 자연부화 새끼 황새들, 9월 자연 방사 계획... 깃털은 부드럽고 윤기가 있고, 생리적 수치도 정상 범위를 유지하고 있어서 건강이 양호하다. 김해시는 부화 후 예산황새공원 전문가들과 하루 2회 이상 체중, 깃털 성장, 섭식량 등 주요 건강지표를...
김정훈 기자 2025.04.22 11:43
과학·환경
김해 첫 자연부화 새끼 황새들, 9월 자연 방사 계획... 깃털은 부드럽고 윤기가 있고, 생리적 수치도 정상 범위를 유지하고 있어서 건강이 양호하다. 김해시는 부화 후 예산황새공원 전문가들과 하루 2회 이상 체중, 깃털 성장, 섭식량 등 주요 건강지표를...
김정훈 기자 2025.04.22 11:43
오피니언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장화와 왕관... 참 좋겠다. “토방에 장화 한 쪽 뒤집어 세워놓”고 조심조심 “그 신발 바닥 뒤축에 모이를 올려놓”는 아버지 같은 사람들을 섬기는 세상의 첫 문을 올봄엔 간절히 열고 싶다. 김해자 시인 ...
김해자 시인 2025.04.17 20:10
사회
김해서 승용차와 킥보드 충돌, 중학생 사망... 현장. 독자 제공 지난 14일 오후 9시 50분쯤 경남 김해시 외동사거리에서 김해생명과학고등학교 방면으로 주행하던 크루즈 승용차와 킥보드가 충돌했다. 이 사고로 공휴형 전동킥보드를 몰던 중학교...
김정훈 기자 2025.04.15 10:53
사회
김해 산불 67시간 만에 진화…헬기 2대·인력 204명·차량 49대 투입 ‘성과’... 22일 경남 김해에서 발생한 산불이 나흘 만에 꺼졌다. 산림청 중앙사고수습본부는 25일 오전 9시쯤 김해시 한림면 안곡리 산불의 주불 진화를 완료했다고 밝혔다. 지난 22일 오후 2시2분쯤 산불이 발생한 지...
이종섭 기자 2025.03.25 09:58
연예
‘THE 맛녀석’ 문세윤, 기강 잡으려다 김해준에게 거울 치료 당해iHQ 김해준이 김준현, 문세윤의 꼰대력을 거울 치료해 웃음을 안긴다. 25일 방송되는 코미디TV ‘THE 맛있는 녀석들’에서는 메뉴 하나로 시작해 건물까지 세운 맛집 특집으로 메밀우동과 부대찌개 식당을 방문한다. 첫 번째 식당에서 음식을 맛보던 황제성은 국물에 밥을 말아 먹자며 맛팁을 제안하는데, 별안간 문세윤도 자신이 먹고 싶은 총각김치를 맛팁인 척 제작진에게 요구해 모두를 당황시킨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요청에도 제작진은 식당 사장님의 냉장고까지 털며 총각김치를 준비하고 이에 감동한 김준현, 문세윤, 황제성, 김해준은 “오늘의 맛팁 대상”이라며 만족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훈훈한 분위기도 잠시, 문세윤은 총각김치가 안 보인다는 카메라 감독의 말에 김해준에게 “그 정도 센스가 없나? 감독님이 너 찍으려고 계신 줄 알아?”라며 타박했고, “반찬 위치를 바꿔줘야 할 것 아니냐?”라고 잔소리를 이어간다. 이에 김준현도 “음식이 메인이고 네가 인서트야!”라며 호되게 교육을 시켜 김해준을 폭발하게 만든다. 김해준은 추가로 나오는 음식을 정리하며 김준현과 문세윤에게 반란을 꾀하지만, 오히려 식탁 위에 올려둔 손이 화면을 가려 또 한 번 문세윤에게 혼이 난다. 그러던 중 두 번째 집에서 문세윤이 식탁 위에 손을 올려놓자, 김해준은 이때다 싶어 똑같이 잔소리를 퍼부어 폭소를 안긴다. 김해준은 “손 치워라. 음식을 왜 가리느냐? 먹방의 기본도 안 배운 것이냐?”라고 거울 치료를 시전해 상황을 반전시킨다. 이에 문세윤은 “이 바닥에 영원한 강자도 영원한 약자도 없다”라며 민망함을 달랜다. 먹방 기강을 잡으려는 김준현, 문세윤과 반란을 꾀하는 김해준의 모습은 금요일 저녁 8시 코미디TV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손봉석 기자 2025.04.24 19:59
연예
김준현, 김해준 깐족 펌프 댄스에 “꼴 보기 싫은 춤 선” (THE 맛녀석)iHQ 김해준이 어린 시절, 오락실에서 동네 형에게 맞은 웃픈 일화를 털어놨다. 지난 18일 방송된 코미디TV ‘THE 맛있는 녀석들’에서는 ‘파리에서 베이징까지 어떻게 가요’ 특집으로 프랑스 가정식과 북경오리 먹방을 펼쳤다. 두 번째 식당 북경오리 전문점에선 황제성이 쪼는맛에 걸려 멤버들의 먹는 모습을 지켜보는 신세가 됐다. 황제성은 고추잡채와 북경오리를 조합한 맛팁으로 멤버들의 호응을 이끌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이 먹지 못하자 “어릴 적 오락실에서 느꼈던 비참한 기분이 든다. 돈 없어서 형들 게임하는 거 보고 있었다”라며 심경을 밝혔다. 그러자 김해준은 “나도 그랬다. 나는 공짜 오락을 했다”라며 “어떤 형이 펌프 게임을 하고 있을 때, 나는 맨바닥에서 발판도 없이 펌프하는 척을 했다. 근데 그 형이 일찍 게임 오버되고는, 기계에서 내려와서 나를 막 때렸다. 한마디도 못 하고 두들겨 맞았다”라고 설명했다. 이에 김준현은 “너무 슬프다. 그 정도였다고?”라며 이야기에 몰입했고, 문세윤도 안타까운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막상 당시 상황을 재연하며 펌프 댄스를 선보이자 김준현은 “벌써 꼴 보기 싫다. 돈 내고 해도 얻어맞았을 춤 선이다”라며 태세 전환해 폭소를 안겼다. 다른 멤버들도 때린 형의 심정을 이해한다며 공감해 또 한 번 웃음을 자아냈다. ‘THE 맛있는 녀석들’은 매주 금요일 저녁 8시 코미디TV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손봉석 기자 2025.04.20 10:08
연예
‘THE 맛녀석’ 김해준, ♥김승혜 연락 두절에 “어디야? 카메라 켜봐!” 의심 폭발iHQ 개그맨 김해준의 아내 개그우먼 김승혜가 맛녀석 방문을 깜짝 발표했다. 4일 방송되는 코미디TV ‘THE 맛있는 녀석들’은 ‘안줏발 세우는 특집’으로 꾸며진다. 이날 방송은 술은 안 먹지만 안주에 진심인 사람들을 위한 특집으로, 황제성이 주축이 되어 맛집 소개부터 메뉴 선정까지 멤버들에게 안주 먹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날 멤버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쪼는맛’ 게임을 진행한다. 준비된 게임은 ‘콜백 챌린지’. 소중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신호 연결음이 들리는 즉시 바로 끊는 것이 룰이며, 가장 늦게 콜백이 오는 사람이 ‘한입만’의 주인공이 된다. 멤버들은 공평하게 모두 어머니에게 연락하기로 정한다. 하지만 최후의 2인 황제성과 김해준의 휴대 전화벨이 동시에 울려, 아내 콜백 챌린지로 재대결을 한다. 하지만 김해준은 끝내 아내 김승혜에게 콜백을 받지 못해 “겉으로는 코미디TV인데 속으로는 코미디가 아니다”라며 녹화 내내 불안한 모습을 보인다. 김해준은 결국 제작진에게 “전화 좀 하고 와도 돼요?”라고 묻는다. “지금 방송에 신경을 쓸 수 없어서 그래. 왜 지금 전화가 안 되냐고!”라고 울분을 토하며 아내에게 다시 전화를 건다. 김해준은 전화를 받은 김승혜에게 “장난 아니니까 카메라 켜봐”라고 말해 현장을 웃음바다로 만든다. 이어 김승혜는 THE 맛녀석 멤버들과의 통화에서 “제가 한복 입고 갈비찜 싸서 맛녀석에 방문하려고 했다. 오빠 다이어트한다고 해서 참치쌈장이랑 두부를 준비하고 있었다”라고 밝혔고, 이에 김준현은 “그런 와이프한테 영상 켜보라고 하고, 이런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라며 김해준을 질책해 그를 당황케 한다. 사랑꾼(?) 김해준의 초조한 모습과 아내 김승혜와의 케미는 4일 저녁 8시, 코미디TV ‘THE 맛있는 녀석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손봉석 기자 2025.04.04 16:20
연예
‘THE 맛녀석’ 김해준 “황제성, 직급 올릴 생각 말고, 위를 늘릴 생각을 해라!” 촌철살인iHQ ‘THE 맛있는 녀석들’ 멤버들이 황제성 특집을 맞아 황제성에 대한 솔직한 평가 시간을 가졌다. 4일 방송되는 코미디TV ‘THE 맛있는 녀석들’에서는 말하는 대로 안줏발 세우는 특집으로 술은 안 먹지만 안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맛녀석 공식 술알못(?) 황제성이 직접 맛집을 소개한다. 가장 먼저 촬영장에 도착해 자신의 특집에 대한 설렘을 감추지 못하던 황제성은 김준현, 문세윤, 김해준이 자신을 평가한 결과지를 받고 긴장한다. 황제성은 제작진이 건넨 ‘황제성 평가지’에 “뭔데 날 평가해?”라며 불쾌한 모습을 보이지만 이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멤버들이 남긴 글을 확인한다. 황제성은 ‘먹는 것에 진심이다. 미식의 즐거움을 알고 리액션이 좋다’라는 김준현의 칭찬에 함박웃음을 보인다. 그러나 “책을 좀 읽어야 한다. 단어에 허점이 있어 (단어) 몇 개로 돌려막는다”라는 지적에 당황한다. 제작진도 황제성의 맛 평가 영상을 공개해 김준현의 평가를 뒷받침한다. 영상 속 황제성은 어떤 음식이 나오든 “기가 막힌다”라는 표현으로만 맛 평가를 해 웃음을 안긴다. 황제성의 외모에 대한 평가도 이어진다. 문세윤은 ‘조금만 더 살찌면 펭귄맨이랑 비슷하게 생겨서 괜찮을 것 같다’라고 말했고, 김준현은 ‘머리 좀 잘랐으면 좋겠다. 머리가 축 늘어져 있다’라고 냉철(?)한 평가를 날린다. 이에 황제성은 “우리 스타일리스트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라며 웃픈(?) 경고를 날린다. 막내 김해준도 황제성에 대한 재치 있는 평가로 재미를 더한다. 김해준은 ‘직급을 위로 올라가려 하지 말고, 위를 늘릴 생각을 해라’라며 결정타를 날린다. 이에 황제성은 잠시 말문이 막히지만 이내 “겸허하게 수용하겠다”라고 밝히며 “오늘은 진정성을 담은 내 특집이다”라고 멤버들의 평가를 뒤집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인다. 황제성은 야심 차게 준비한 ‘로바다야키 코스’와 2차 코스의 정석인 ‘실내포차’의 메뉴들로 멤버들의 평가를 바꿀 수 있을지 ‘THE 맛있는 녀석들’ 4일 저녁 8시 코미디TV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손봉석 기자 2025.04.03 21:49
문화/과학
김해숙 국립국악원장 “어릴 때부터 국악 접할 기회 만들어야”ㆍ부임 이후 ‘국악의 대중화’ 기치로 내걸어 서울 서초동 우면산 자락에 터를 잡은 국립국악원에서는 매주 토요일마다 어린이를 위한 ‘국악동화’ 공연이 열린다. 어린이 연극과 뮤지컬, 인형극 등의 작품을 우리 전통음악과 결합한 공연으로, 영·유아부터 초등학생까지 어린이 동반 가족을 대상으로 한다. 지난해 3월 첫선을 보인 이후 매진 행렬을 이어가며 큰 호응을 얻은 이 공연에는 김해숙 국립국악원장(63)의 ‘갈증’이 그대로 담겨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국어와 국사는 필수인데, 왜 국악은 아닐까요? 유·초등 교육현장에서도 서양음악과 국악을 가르치는 비중은 9대 1 수준입니다. 오히려 외국에서는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우리 전통음악을 우리 국민들이 제대로 접할 기회가 얼마나 있었을까요? 어린아이들에게 우리 악기의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들려준다면 조금은 다르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국악동화 공연을 시작하게 됐죠.” 7월 19일 오후 국립국악원에서 만난 김해숙 원장은 인터뷰 내내 국악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2014년 취임한 이후 ‘국악의 대중화’를 목표로 쉼없이 달려 왔지만, “여전히 우리 땅에서도 우리 음악이 낯선 상황”에 대한 답답함이 국악교육에 대한 열망으로 그를 이끌었다고 했다. 국립국악원이 2015년 성탄절을 맞아 캐럴과 국악이라는 다소 생소한 조합의 앨범을 낸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올해로 임기 4년째를 맞은 김 원장은 취임 당시부터 가야금 산조 명인이자 여성 최초의 국립국악원장으로 주목을 받았다. 부임 첫해부터 국악의 대중화와 세계화·현대화를 기치로 내걸었다. 우리 전통음악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중과 만나지 않는 음악은 박물관 속에 갇혀 있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 김 원장의 신념이다. “국악인으로서 우리 국악계가 더 넓어지는 것을 소원합니다. 우리나라 영토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우리 문화의 크기가 작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간 우리 사회가 경제성장을 위해 달려오면서 전통문화 진흥을 소홀히해 왔지만, 이제 앞으로는 우리 문화에서 경쟁력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전통문화 기반을 굳게 다지지 않고서는 세계화·국제화를 외친다 해도 모래 위의 성처럼 불안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국악도 움직여야 생동…대중과 함께해야” 국립국악원에서는 요일별로 각각 다른 색깔의 공연이 매주 열리고 있다. 전통춤을 만날 수 있는 ‘수요춤전’과 다채로운 우리 소리를 만날 수 있는 ‘목요풍류’, 우리 전통예술과 다른 장르가 만난 창작무대 ‘금요공감’, 그리고 토요일에 열리는 ‘토요국악동화’와 ‘토요명품공연’까지. 김 원장 취임 이후 1년 만에 공연 횟수도 전년 대비 160% 가까이 늘어났다. 김 원장은 “언제든 관객이 국악원을 찾았을 때 각각 다른 장르의 공연이 열린다는 것은 국가 세금으로 운영하는 국립국악원으로서도, 수요자 입장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고 봐요. 단원들이나 직원들은 공연이 늘어나 힘들겠지만…”이라며 웃었다. 국악 분야에 한정하지 않고 클래식, 현대무용,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와의 융합 무대도 펼쳐진다. 오는 10월 중에는 영화 의 김태용 감독이 연출한 외국인 대상 음악극 의 막이 오른다. 대중음악에 국악의 선율을 접목할 수 있도록 대중음악 작곡가들을 대상으로 한 국악 수업 역시 2년째 진행 중이다. 50년 가야금 외길을 걸어왔지만, 김 원장은 “우리 전통음악도 기운생동(氣韻生動)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문화와 만나 접점을 넓혀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흐르지 않는 물은 썩는다고 하는데 문화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문화도 고여 있으면 정체될 뿐입니다. 가야금도 25현 개량 악기가 나왔을 때 ‘그건 가야금이 아니다’라는 일부의 반발이 있었지만, 지금은 대다수 악단이 쓰고 있죠. 악기는 사실 도구일 뿐이고, 그것으로 어떤 음악을 만들어 내는가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저는 퓨전과 전통을 양날개에 펼칠 수 있다고 봐요. 국악 역시 다른 문화예술과 만나되, 중심을 분명이 갖고 있어야 합니다. 중심 없이 만난다면 흡수돼 버리기 쉽죠.” 지난 2월 국립국악원 우면당은 1988년 개관 이후 29년 만에 자연음향 공연장으로 탈바꿈했다. 마이크와 스피커가 없는 자연음향 공연장은 국악계의 오랜 숙원사업이기도 했다. 김 원장은 이를 ”조용한 혁명“이라고 표현했다. “우리 전통음악은 우리 전통공간에 맞게 성장해 왔어요. 궁중음악은 궁중의 회랑에서, 가야금과 같은 악기는 창호지와 구들이 있는 방에 맞게 소리가 발전해 온 것인데, 서구식 극장에서 하는 공연문화가 도입되면서 전통음악도 전파음향에 의존하게 됐습니다. 아무리 성능이 좋은 마이크라고 해도 마이크를 들이대면 본래의 소리가 바뀝니다. 앞으로 자연음향 공연이 자리를 잡으면, 작곡가도 연주자도 소리에 좀 더 세밀하게 귀 기울이며 내실을 다지는 훈련을 해야 해요. 그런 노력이 쌓이며 장기적으로 우리 실내악의 질적인 향상을 가져올 거라고 봅니다.” 리모델링은 공연장의 ‘규모’보다 ‘소리’에 중점을 뒀다. 공연장 천장과 객석 주변에는 소리를 왜곡 없이 전달하는 음향 반사판을 각각 12개씩 설치했고, 국악기의 울림을 키우기 위해 무대 아래엔 10개의 공명통을 설치했다. 공명통은 연주자 출신인 김 원장의 아이디어다. “예전에 일본 요코하마의 노악당에서 공연을 했는데, 마이크를 쓰지 않았는데도 소리가 왕방울만하게 들려 깜짝 놀라서 물었더니 독 모양의 울림통을 쓰고 있었어요. 쉽게 생각하면 우리 에밀레종의 울림과 같은 원리죠.” “국악의 대중화, 교육부터 시작해야” 국립국악원은 2015년 10월 박근형 연출가의 공연 취소 논란으로 홍역을 치렀다. 김해숙 원장 역시 올해 초 문화계의 ‘블랙리스트’ 압력을 시인하며 이에 대해 사과하기도 했다. 공연 취소사건 당시 해외출장 중이었다는 김 원장은 “직접적인 외압이 있었다고 하긴 어렵지만 국악원이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기관이다 보니 그런(블랙리스트) 분위기가 있었고, 지난해 (국정농단 사건이) 세상에 공개되고 나서야 이상했던 점들의 퍼즐이 맞춰졌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건이 터지고 나서 국악원장이기 이전에 예술가, 연주자로서의 제 정체성에 대해서도 더 깊이 고민하게 됐다”면서 “어떤 이유에서든 국악원이 공연 초청을 해놓고 취소했다는 것은 정말 죄송한 일이고, 다시 있어서는 안될 일”이라고 덧붙였다. 인터뷰 말미, 김 원장에게 남은 임기 중 이뤄내고자 하는 목표를 물었다. 답은 역시 ‘교육’이었다. “국악의 대중화와 진흥을 위해 최선을 다해 뛰었지만, 아무리 대중과의 접점을 넓히려고 해도 벽에 부딪혔어요. 사람들이 국악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접할 기회가 적어 낯선 게 문제입니다. 그럴수록 어린아이 시절부터 조금이라도 국악을 친숙하게 접해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국악원이 교육기관은 아니고 단기간에 달성할 수 있는 목표도 아니지만, 국악인으로서 그 숙제를 풀기 위해 계속 노력할 생각입니다.”
선명수 기자 2017.07.24 17:43
정치
[총선 격전지-경남 김해 을]‘천하장사’ 대 ‘노무현 마지막 비서’ㆍ새누리 이만기-더민주 김경수, ‘낙동강 벨트’ 핵심지역서 박빙 승부 경남 김해시 을 선거구의 총선 대결은 ‘천하장사’ 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관’의 싸움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 새누리당의 이만기 후보와 더불어민주당의 김경수 후보의 대결이다. 김해 을은 여당의 우세지역인 부산·경남 지역에서도 야권 후보들이 저력을 보이고 있는 ‘낙동강 벨트’ 중 핵심 지역이어서 이곳의 승부는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비교적 연령대가 높은 유권자들이 많이 지지하는 이 후보와 젊은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김 후보가 박빙 승부의 양상을 이어가고 있다. 김해 을의 현역 의원인 새누리당 김태호 최고위원은 지난해 8월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에 따라 20대 총선의 대결구도 역시 일찌감치 형성됐다. 씨름 천하장사 출신으로 방송에서도 활약한 이만기 후보는 초반부터 높은 인지도를 바탕으로 새누리당 공천이 유력했고 결국 단수 공천을 받았다. 19대 총선에서 김태호 의원에게 의석을 내줬던 더민주 김경수 후보는 2014년 경남도지사 선거에도 나섰지만 낙선한 뒤 세 번째 도전을 통해 설욕을 노리고 있다. 젊은 직장인 가구의 비율이 높은 경남 김해시 장유1동 일대의 모습. / 김태훈 기자 이 후보, 높은 인지도로 장년층이 지지 각 당의 공천이 마무리되고 후보 등록 후 본격적인 유세 일정이 시작되면서 두 후보는 각자 당의 색깔인 붉은색과 푸른색 점퍼를 걸치고 이름을 알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관내 경로당이나 부녀회 등 유권자들이 모이는 곳을 도는 일정에 더해 도로변에서 피켓을 들고 깍듯한 인사를 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씨름선수 경력과 방송활동으로 이 후보의 인지도가 높은 편이지만 김 후보 역시 지난 두 번의 선거를 치르면서 유권자들에게 존재감을 알린 바 있다. 지역 유세 중 주민들이 두 후보에게 인사를 건네는 경우도 많았다. 두 후보의 대결구도가 일찍부터 명확하게 굳어지면서 유권자들도 대체로 지지 후보를 미리 염두에 두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외동에서 만난 주민 홍성유씨(70)는 “이만기가 요 몇 년 동안 김해에서 뭐 좀 해볼라고 애 많이 쓰더라. 이번에는 함 안 되겠나”라고 말했다. 장유3동에서 만난 주부 이선자씨(65)도 “(이 후보가) 듬직하고, 아직 정치 안 해봤으니까 때는 덜 묻었을 거 아입니꺼. TV에서 보던 양반이 동네에서도 자주 보이니까 얼굴도 눈에 익고”라며 이 후보의 친숙한 이미지가 마음에 들어 한 표를 줄 것이라고 말했다. 김 후보의 지지자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가까이에서 보필한 경력 때문에 김 후보를 지지한다는 경우가 많았다. “노 대통령 때문에 김해까지 와서 일했던 사람인데, 이제는 여기서 제대로 일 한 번 해보라고 밀어줘야 안 되겠습니까.” 직장인 표윤수씨(42)는 김 후보가 나왔던 선거마다 지지해줬지만 낙선했던 게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주부 김은선씨(38)도 “남편이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했는데, 이번 선거에서 김경수 찍으라고 집안 어르신들한테까지 졸라놔서 안 찍을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김해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향이지만 봉하마을이 있는 진영읍은 선거구가 조정되면서 김해 갑 선거구로 넘어갔다. 지난 선거에서 야당 지지율이 높았던 진영읍과 함께 여당 지지율이 높았던 한림면과 회현동도 김해 갑으로 넘어감에 따라 이 후보와 김 후보 모두에게 크게 유리하거나 불리한 상황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젊은 직장인 가구 비중이 높은 장유1·2·3동 일대의 인구 비중이 높아진 점은 김 후보에게 다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상황이다. 김 후보, 세 번째 도전 통해 설욕 노려 외지에서 유입된 인구의 비율이 높은 김해시에서도 장유동 일대는 특히 유입 인구 비중이 높은 지역이다. 창원시 국가산단과 가까운 지리적 특성 때문에 새로 개발된 아파트와 주택단지 주민 중 창원으로 통근하는 직장인들의 비중이 높다. 약 25만명의 지역구 인구 중 60%에 달하는 약 15만명이 장유동에 집중돼 있는데, 김해의 원도심과 지리적으로도 떨어져 있는 만큼 정치 성향도 달라 야당이 우세한 지역이다. 이에 비해 원도심에 가까운 내외동 일대는 여야 지지세가 경합을 보이고, 농촌지역과 소규모 공장지대가 섞여 있는 주촌면·진례면·칠산서부동 일대는 여당 지지가 우세한 지역으로 분류된다. 지역과 연령대에 따라 지지 정당과 후보가 뚜렷하게 갈리는 양상이 나타난 데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주촌면사무소 앞에서 만난 자영업자 김모씨(56)는 “시내에는 외지 사람들 많아가 야당 많이 찍는다 카지만 촌동네로 나가면 연세 많은 양반들은 아직도 무조건 1번 찍는다”고 말했다. 반면 퇴근시간대 장유1동에서 만난 직장인 심모씨(35)는 “이만기씨를 안 찍는 건 일단 새누리당으로 나와서 그런 것도 있지만 전에는 다른 당에 있다가 공천 받으려고 옮겨다닌 게 보기 싫어서 그렇기도 하다”고 말했다. 김 후보도 총선과 지방선거에서 두 차례 낙선한 바 있지만 이 후보도 당 공천에 도전한 경우까지 포함하면 총선에 두 차례, 김해시장 선거에 한 차례 도전한 적이 있다. 16대 총선에서 경남 마산 합포구로 출마 의사를 밝혔으나 당시 한나라당의 공천을 받지 못했고, 17대에선 같은 지역구에서 당을 옮겨 열린우리당 후보로 나서서 낙선했다. 2014년의 김해시장 선거에서는 새누리당 공천을 받지 못했다. 이 후보는 이번 선거만큼은 물러날 수 없다는 자세로 각오를 다지고 있다. 마산 출신이지만 오랜 시간 김해에 있는 대학 교단에 서며 누구보다도 김해 을 지역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것을 이 후보는 내세운다. 이 후보는 “낙선의 아픔을 겪었지만 현실정치가 지역민과의 소통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서민의 아픔과 고통을 나누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호랑이 굴로 뛰어들었다”며 “정치는 진정성이다. 지역 서민의 뜻을 받들어 공정한 사회와 반듯한 김해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김 후보 역시 지난 선거에서 간발의 차로 낙선한 선례를 되새겨 이번 총선에서는 반드시 이기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19대 총선에서 4.2%포인트 차로 패한 근본적 이유로 준비가 부족했다는 판단을 내리고 그동안 바닥 민심을 훑으며 김해가 인구에 비해 기반시설이 부족하다는 문제를 푸는 데 집중했다는 것이다. 김 후보는 “김해는 몸집은 불어났지만 체력은 여전히 부실하고, 기업 수가 전국 1·2위를 다투지만 대부분 영세한 중소기업들이라 좋은 일자리와는 거리가 있다”며 “국회의원이 연습하는 자리가 아니라 책임지고 증명하는 자리인 만큼 지난 20여년간의 풍부한 경험을 통해 산적한 과제를 풀어 결과로 증명하겠다”고 밝혔다.
김태훈 기자 2016.03.29 15:17
정치 표지 이야기
[표지이야기]김해을 야권연대 먹힐까ㆍ재·보선지역 민심 르포 지난 4월 14일 남녘 땅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4·27 재·보선 공식 선거운동 첫날 경남 김해를 찾았다. 이번에 선거가 치러지는 김해을 지역은 독특한 곳이다. 한나라당 텃밭인 PK(부산·경남)지역에서 창원 일부 지역과 함께 유일하게 야당 우세지역이다. 재미있는 점은 같은 김해라도 김해갑(한나라당 김정권 의원) 지역과 김해을 지역의 투표성향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 김해갑은 구도심이 있고 농업지역도 있어 보수성향이 강하고, 김해을은 신도시가 계속해서 건설되는 곳으로 젊은층이 유입되기 때문에 개혁성향이 강하다. 서울로 치면 김해갑은 강북이고, 김해을은 강남인 셈이다. 한나라당 김태호 후보가 내외동 거북공원에서 유세를 펼치고 있다. |권순철 기자 김해을에는 토박이가 별로 없고 외지에서 들어온 인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20~40대로 젊은층이 꽤 두껍다. 특히 이들은 인근의 창원과 부산지역에 직장을 두고 출퇴근하고 있다. 여기에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고향(진영읍)도 이곳이다. 소위 말하는 ‘노풍’의 진원지다. “중앙에서 왜 요란을 떠는지 모르겠다” 김해을 지역의 선거열기가 서서히 뜨거워지고 있다. 한나라당과 국민참여당(참여당)의 상징색인 파란 티셔츠와 노란 점퍼를 입은 선거운동원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우선 한나라당 김태호 후보와 참여당 이봉수 후보의 사무실이 있는 김해시 장유면으로 찾아갔다. 장유면은 전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면이다. 인구가 무려 12만여명이다. 사실 12만명이면 국회의원 선거구 하나가 될 수 있는 인구다. 이번 김해을 선거구의 인구는 8개 읍·면·동에 29만1000여명이다. 선거구 인구의 40% 정도가 거주하기 때문에 이곳에 후보들이 베이스 캠프를 치고 있는 것이다. 후보들 사무실 건물에 인접한 롯데마트에서 쇼핑을 마치고 나온 주부 박모씨(60대)에게 선거 얘기를 꺼냈다. 극구 사양하다가 어떤 후보를 지지하느냐는 기자의 계속된 질문에 박씨는 “요즘 TV만 켜면 이 지역 선거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왜 그렇게 중앙에서 요란을 떠는지 모르겠다”며 “지역 일꾼을 뽑는 선거에 왜 그렇게 관심이 많으냐”고 되물었다. 그는 “요란을 떨고 있는 야당 후보보다 조용한 김태호 후보에게 더 마음이 간다”고 말했다. 김태호 후보의 ‘나 홀로 선거운동’에 높은 점수를 준 것이다. 김 후보는 이재오 의원(현재 특임장관)이 지난 은평을 재·보선에서 그랬듯이 이른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선거운동원들을 전혀 데리고 다니지 않고 혼자 시민들을 찾아다니고 있다. 이는 “외지 출신(경남 거창)이 왜 이 지역에 왔느냐”, “국무총리 청문회에서 낙마한 후 반성의 시간이 부족했다”는 등의 비판을 의식한 선거 전략이다. 발길을 장유면에서 가장 번화한 곳인 코아상가 쪽으로 옮겼다. 식당을 운영하는 김학선씨(40대)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을 시작했다. 김씨는 “정부가 국민 여론을 수렴하고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지역 주민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있다”며 “이런 때일수록 국가 균형발전을 주장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꾸 떠오른다”고 말했다. 최근 구제역에 대한 정부의 안이한 대처, 동남권 신공항 파동, LH공사 이전 갈등 등 매끄럽게 처리하지 못한 정부 정책을 비판한 것. 그는 “낙하산으로 내려온 김태호 후보보다는 이 지역 토박이인 이봉수 후보가 더 낫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신’ 위력 발휘할까 창원에 직장이 있다는 30대의 이성윤씨가 옆에서 말을 거들었다. 그는 자기는 원래 민노당을 지지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번 후보 단일화로 민노당 후보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참여당 이봉수 후보를 지지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출퇴근을 위해 창원터널을 지날 때면 참여당 유시민 대표와 이봉수 후보가 인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며 “처음에는 유시민 대표가 한두 번 하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날마다 나오는 것을 보고 진정성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 지역은 부산과 창원의 베드타운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 부산과 창원에 직장을 둔 사람들이 집값이 저렴하고 환경이 쾌적한 김해를 주거지로 선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참여당 이봉수 후보가 내외동에서 한 시민과 악수하고 있다. 택시를 타고 김해을의 또 다른 인구밀집지역인 내외동으로 이동했다. 내외신도시 인구는 8만여명이다. 어디를 가나 택시기사들이 민심을 전하는 파수꾼 역할을 한다. 선거 얘기를 꺼내자 이런 저런 말을 해줬다. 50대 중반의 이 기사는 김태호 후보가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그는 “택시를 운전할 때 보면 김태호 후보가 ‘방사능 비’가 내리는 가운데에도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90도 인사를 하고 있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며 “도지사 두 번을 한 행정경험이 있는 김 후보가 무명의 이봉수 후보보다는 훨씬 지역을 발전시킬 수 있는 인물”이라고 말했다. 택시는 내외동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연지공원에 도착했다. 벤치에서 홀로 책을 읽고 있는 20대의 젊은이에게 다가갔다. 그는 자기를 대학교 휴학생이라고 소개했다. 이번 선거에서 투표할 것이냐고 물었다. 유시민 대표 팬이라고 다소 질문의 의도에서 벗어난 말이 날아왔다. 유 대표의 사인도 받았다고 자랑했다. 유시민 대표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제1야당인 민주당에서 대선주자들이라고 분류되는 사람들이 (현 정부에 대한) 비판이 너무 약한 것 같다”며 “유시민 대표는 그들에 비해 시원시원하게 정부를 비판하기 때문에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이번 선거가 ‘이봉수 대 김태호’가 아닌 ‘유시민 대 김태호’라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이번 선거에서 이른바 ‘노무현 정신’은 얼마나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시민들 사이에서는 두 가지 의견이 팽배했다. 한나라당의 한 당원은 “‘노풍’이 지난 지방선거에서 불었다면 김맹곤 시장이 월등히 많은 득표를 해야 했는데 야당의 고정표 이외에 추가로 받은 표가 없다”며 “언론에서 자꾸 ‘노풍’ ‘노풍’ 하는데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는 단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봉수 후보 자원봉사자는 “이봉수 후보 쪽에서는 표를 의식해 ‘친노’를 결코 선거에 이용하지 않을 것”이라며 “다만 이 지역 사람들 가슴 속에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가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야당은 이 지역에 발도 못 붙였다. 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야당은 이 선거구에서 승자였다. 민주당 최철국 의원은 지난 2004년 17대 국회의원 선거 이후 두 번 연속 당선됐으며, 지난 지방선거에서도 승리했다. 특히 지방선거에서 김해을 지역에서는 광역의원 4석 중 3석, 기초의원 9석 중 5석을 야당이 휩쓸었다. 반면 한나라당의 조직은 와해됐다. 한나라당은 이번에 김태호 전 경남지사를 앞세워 고토수복을 꾀하고 있다.
김해 | 권순철 기자 2011.04.20 17:37
사회 사람의 빛
[사람의 길]노숙자에서 벤처기업가로, ‘더웨이’ 김해일길 위의 날들 해일씨가 간만에 서울에 왔다. 외국 바이어도 만나고, 신제품에 관심을 갖고 있는 한 거래선과 상담을 겸해서다. 전국의 약국에 부외품을 대는 한 총판에서 기존의 ‘라이트그립’과 새로 출시된 ‘위드펜’에 대해 판매 의사를 타진해왔다. 어쩌면 ‘글씨보정기구’라는 자신의 제품을 새롭게 인식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늦봄 오후의 햇살이 제법 따갑다. 묵직한 가방을 든 그의 한쪽 어깨가 자꾸만 밑으로 처진다. 서울의 거리는 그의 기억 속에서 항시 낯설다. 해일씨는 거리의 한 커피숍 문을 밀고 들어섰다. 한쪽 구석에 자리 잡은 그는 잠시 숨을 고른 후 가방 속에서 치아 모형과 칫솔 하나를 꺼내들었다. 최근 그는 기능성 칫솔의 개발에 매달리고 있다. 그래서 그는 가방 속에 항상 치아 모형과 칫솔을 넣고 다니며 언제 어디서든 틈나는 대로 치아 모형에 칫솔질을 해보곤 한다. 제품개발전문회사 (주)더웨이 김해일(41) 대표의 고향은 현재 그의 회사가 위치하고 있는 대구다. 아버지는 원래 전주 사람이고, 어머니는 서울, 형은 충북 청원이 고향이다. 가족들의 적이 이처럼 모두 제각각인 것은 순전히 부모의 전력 탓이다. 그의 부모는 유랑극단의 배우였다. 아버지는 익살스러운 역을 자주 맡았고 어머니는 악역이 단골이었다. 어머니의 악역이 어찌나 실감났던지 관객들에게 돌을 맞는 일도 다반사였다. 해일씨는 어려서 부모를 따라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극단의 가설 무대가 서면 그는 형과 함께 관객들이 앉을 돗자리를 까는 일을 도맡아했다. 그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가 되자 그의 부모는 대구에 자취방을 하나 얻어주고 형과 함께 지내도록 했다. 부모가 다시 유랑공연을 떠나면 남아 있는 아이들은 스스로 집안 살림을 하며 학교에 다녔다. 소풍이나 운동회 때 김밥을 싸가는 건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어렵게 고등학교를 마친 해일씨는 대구에 있는 한 전문대학 일본어과에 입학했다. 당시 대학에는 교련 수업이 있었다. 젊음의 반항심 때문이었을까. 해일씨는 군사교육을 거부하다 강제 입영됐다. 어릴 적부터 예능적 끼를 타고난 그는 군 예능부대인 문선대에 들어갔다. 부모를 따라다니며 어깨 너머로 배운 피아노 솜씨가 도움이 되었고, 그는 문선대 고참에게서 재즈피아노를 제대로 익힐 수 있었다. 전역 후 복학을 준비하면서 한동안 재즈피아노 강사를 했던 것도 모두 그 덕분이었다. 하지만 공부보다 먹고사는 것이 더 급했던 해일씨는 끝내 대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본격적으로 돈벌이에 나서야 했다. 학력이 변변치 못하다 보니 이력서를 넣고 떨어지기를 반복하다 겨우 들어간 곳이 한 여성 의류회사의 영업직. 그 의류 회사는 소위 ‘화류계 여성’들의 옷을 만들어 파는 곳이었다.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밤에는 업소에 가 옷을 팔았고 낮이면 아가씨들이 쉬고 있는 집을 찾아다니며 영업을 했다. 특유의 친화력과 말솜씨 덕분이었을까. 고객은 나날이 늘어만 갔고 그에 따라 매출 실적도 쑥쑥 올라갔다. 그러는 사이 몇몇 사람이 투자해줄 테니 룸살롱을 한번 운영해보라고 은근히 권유해왔다. 해일씨는 스물셋의 나이에 룸살롱 사장이 되었다. 비록 ‘바지사장’이기는 했지만. 술장사는 아가씨들의 확보가 관건, 평소에 많은 영업 대상 아가씨들의 리스트를 확보하고 있던 그로서는 ‘고기가 물 만난 격’이었다. 그가 운영하는 업소는 날로 성황이었고, 그는 낮에는 영업사원으로 밤에는 업소 사장으로 정신없이 돈을 벌었다. 외제차도 굴렸고 돈을 물 쓰듯 쓰고 다녔다. 그러나 ‘화려한 시절’도 잠시, 업소 운영의 생리에 어두웠던 해일씨는 투자자들이 이익금을 야금야금 빼내가는 것을 몰랐고,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장사가 거듭되면서 마침내 빚에 몰리게 되었다. 카드를 돌려 막고 사채로 급한 불을 껐다. 그러다가 급기야 회사의 공금에까지 손을 댔다. 빚은 2억 원으로 불어났고, 투자자들의 원금 때문에 맘대로 업소를 처분할 수도 없었던 그는 끝내 빈손으로 도망쳐 나올 수밖에 없었다. 공금횡령에 부정수표단속법 위반, 게다가 숨어다니면서 향토예비군법 위반이 추가되는 등 길고 긴 수배생활이 시작되었다. 수중에 남은 돈 몇십만 원을 들고 서울로 갔지만 막상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서울역 근처를 배회하며 노숙자로 지내다가 채 1주일을 버티지 못하고 다시 대구로 내려왔다. 하지만 대구 역시 검문을 피해 그가 다닐 수 있는 곳이라곤 1년간 몸담았던 학교밖에 없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강당이나 벤치, 동아리방 등에서 잠을 자면서 끼니는 후배들의 도움으로 해결했다. 처음엔 흔쾌히 밥을 사주던 후배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슬슬 그를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 하루 한 끼라도 먹는 날이면 행복할 정도의 힘든 날이 이어졌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을까. 어느 날 해일씨는 우연히 학교 뒷산을 오르다 혼자 노래 연습을 하는 예쁜 여학생을 보았다. 그녀는 성악과에 다니는 5년 후배였다. 한눈에 반한 그는 자신의 처지도 잊어버린 채 어떻게든 그 여학생에게 접근하기 위해 4시간이 넘게 끙끙거리며 노래 한 곡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노래로 함께 강변가요제에 나가자고 꼬드겼다. 어찌된 심산인지 그 여학생은 생각보다 선선히 응낙했고, 둘은 서울 본심에 나갔다가 보기 좋게 예선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그녀와 만남만은 계속되었었고, 그녀와 만나는 동안 그는 하루에 한 끼라도 그녀를 통해 해결할 수 있었기에 이래저래 행복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둘은 동거를 시작했고, 아이가 생겼다. 알고 보니 그녀의 가족사는 그보다 훨씬 지독했다. 경찰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툭 하면 술을 먹고 들어와 27년 연하의 어머니에게 손찌검을 해댔다. 견디다 못한 어머니는 딸을 데리고 나와 숨어 살다가 한 남자를 만났지만 ‘총알을 피하려다 대포를 만난 격’이었다. 그 남자는 정강이에 칼을 차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폭력의 정도는 아버지보다 더 심했고, 어머니로는 부족했는지 그 딸과 심지어 해일씨에게까지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한번은 아기를 업고 있는 아내 옆에서 칼로 툭툭 머리를 치면서 행패를 부리는 바람에 참지 못한 해일씨가 부엌에서 칼을 들고 나와 죽자 사자 싸웠던 적도 있다. 해일씨는 학교 매점을 하던 아는 형의 도움으로 15만 원짜리 사글세방에서 살림을 차리면서 노숙자 생활을 청산했지만 여전히 수배자의 신분이었다. 맏아들이 태어난 지 2년 만에 둘째 딸이 태어났다. 그는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 했다. 신분이 드러나지 않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했다. 막노동도 했고 업소에 주류를 대주는 소위 ‘꽈대기’ 일도 했다. 고령에서 남의 목장 일을 하고 있던 친척에게 빌붙어 ‘머슴살이 밑에서 머슴살이’를 하기도 했다. 지관공장에서 일할 때는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며 담뱃값 100원으로 하루를 나기도 했다. 당시 없는 사람들이 즐겨 찾던 ‘솔’ 담배가 200원 하던 때였다. 사는 게 너무 퍽퍽해 술 한잔 걸친 채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다가 넘어져 얼굴도 다 까먹고 정신을 차려 보니 자전거마저 없어져 넋을 놓고 펑펑 울었던 적도 있다. 그야말로 ‘인생이 자체가 뒤죽박죽’인 시절이었다. 어떡하다 소재가 알려져 집으로 빚쟁이들이 쳐들어오고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차압 딱지가 붙는 꼴도 겪었다. 값나갈 살림도 없는 집에서 중고로 산 고작 2만 원짜리 서랍장에까지 딱지가 붙는 모습을 보면서 “다 가져가라! 내 인생까지도 다 가져가라!”고 울부짖기도 했다. 정말 강도짓까지 해보려다 미수에 그친 적도 있었다. 그래도 끝내 포기할 수 없었다. 아내와 아이들을 먹여 살릴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못난 자신을 의지하고 있는 그들을 지킬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다! 그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커피자판기부터 여행사, 홈페이지 제작회사 등 영업사원으로 나섰다. 홈페이지 제작회사에 근무할 때는 인터넷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출근 며칠 만에 큰 계약을 따내기도 했다. 영업사원으로 일하면서 대구 시내 건물이란 건물, 사무실이란 사무실은 안 가본 데가 없을 정도였다. 빚도 조금씩 갚아나갔다. 은행에서는 자신의 처지를 듣고는 ‘딱하다’며 빚의 일부를 탕감해주기도 했다. 게다가 ‘빚을 어떤 식으로 갚아나가’라고 조언까지 해주었다. 그는 수배생활 7년 만에 자수를 했다. 첫애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1억 원 정도의 빚을 갚아서였는지 불구속으로 처벌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2003년 10월 모든 빚을 청산했다. 비록 1년 만에 문을 닫기는 했지만 2002년 홈페이지 대행회사를 직접 차린 일은 그로 하여금 새삼 사업에 대한 의지를 갖게 했다. 그는 2003년 ‘글씨보정기구사업’을 시작했다. 1년 전 ‘운전자의 흡연 편의를 위해 차량변속장치에 재떨이를 부착하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특허를 신청하면서 겪은 경험이 발단이 되었다. 당시 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해일씨는 특허 신청 비용을 아끼기 위해 PC방에 며칠씩 틀어박혀 혼자 특허변리를 공부했다. 그리고 직접 장문의 서류를 되풀이해 작성하면서 볼펜을 쥐고 있는 손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볼펜에 고무줄을 묶어서 사용하다가 문득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던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성장기의 아이들이 연필을 똑바로 잡지 못해 체형까지 변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당장 찰흙과 석고 등으로 샘플을 만들어보았다. 펜글씨 1급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친구의 도움이 컸다. 그 샘플을 기초로 경북대학교 공학설계기술원의 도움을 받아 2003년 8월 ‘필그립’ 시제품을 만들 수 있었다. 계명대학교 벤처보육사업단의 지원금 5000만 원으로 ‘더웨이’라는 회사도 설립했다. 2004년 초 프랑크푸르트 국제문구박람회에 출품하여 좋은 반응도 얻었다. 완제품은 2004년 8월에 출시되었다. 그때부터 해일씨는 혼자 마트를 돌아다니며 영업을 하고 납품도 했다. 문구 코너의 작은 매대에서 시작해 호응이 좋자 단독매대가 생긴 곳도 있었다. 외국에 상품을 독점 공급하려는 곳도 생겼다. 제품을 출시한 후 2분기 만에 5억 원의 매출을 올리기도 했다. 해일씨는 지금 제2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제품의 이름을 ‘필그립’에서 ‘라이트그립’으로 바꾸고 일본 한 업체의 주문으로 성인용 글씨보정기구 ‘위드펜’도 개발해 세계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삼각연필‘로 유명한 독일의 유수 문구업체 파버카스텔 사의 자사제품 부착용 그립의 개발 주문도 받아 그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EVA와 같은 무독성친 환경 소재의 채택으로 세계시장을 석권하겠다는 야심찬 계획도 세워두었다. 지금 개발이 마무리 단계인 기능성 칫솔에 대해서는 대만의 한 무역업자가 투자를 약속했다. 이제 해일씨의 맞상대는 빌 게이츠다. 해일씨는 어려웠던 시절, 한 생활정보신문 칼럼에서 읽은 ‘길함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 이상은 높이 두고 작은 일부터 시작하라’는 ‘주역’의 한 구절을 잊지 않는다. 해일씨는 얼마 전 의성에 있는 어머니 산소에 다녀왔다. 유랑극단의 배우로 세상을 떠돌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시장에서 약장수 노릇도 마다 않던 어머니다. 그때 해일씨는 맨 앞에 앉아 어머니에게 미리 받아둔 1000원짜리를 꺼내들고 바람잡이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해일씨가 빚에 쫓기던 시절, 하루는 어머니가 집으로 찾아왔다. 어머니는 부엌에 쌀 한 포대를 던져놓고 집 밖을 나서려다 아이를 업고 있던 아내를 보고는 말없이 지갑을 열었다. 지갑 안에는 제법 뭉툭한 지폐가 있었건만 어머니는 달랑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아내에게 주고는 해일씨를 향해 “너는 고생 직쌀나게 해봐야 할 놈이다”라고 소리치던 어머니다. 하지만 또 어떤 날에는 “너는 착해서 끝내 잘될 거야”라며 눈물을 훔치던 어머니다. ‘더 웨이(The Way)’. 그 길. 인간 김해일이 살아왔고 앞으로 살아나가야 할 길. 앤서니 퀸 주연의 영화 ‘라스트라다(길)’에서 유랑곡예사 잠파노와 젤소미나가 걸어갔던 길. 평생을 유랑의 삶을 살아왔던 어머니는 생전에 아들이 피아노로 연주하는 ‘젤소미나의 노래’를 그토록 좋아하셨건만…. 해일씨가 걸어가는 아스팔트 위로 문득 뉘엿한 봄볕이 떨어져내렸다.
2008.05.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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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짜릿한 매력! 유도선수 출신 청년시인 김해준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오늘’을 의미 있게 만드는 문학 작품은 우리가 좀 더 견고하고 풍성한 삶의 근육을 키워나가게끔 돕는 역할을 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1년에 책 한 권도 읽지 않는다는 성인이 35%가량 된다는 뉴스가 더 이상 놀랍지 않게 되어버린 이 시대는 분명 다양한 성격을 갖춘 작가들의 지속적 작품 활동을 필요로 한다. 반짝이는 재능을 가진 문학인들이 더 많이 발견되어야 하는 중요한 이유다. 최근 7년 만에 재개된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대한 소식이 들려와 반갑다. 선배들의 뒤를 이어 문단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을 것으로 평가되는 신인문학상 수상자들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맞춤법도 모르던 유도선수, 시의 세계에 빠지다 전통 서정시의 계보를 잇는 베스트셀러 시인 문태준, 해외 각국에서 작품이 번역 출간되며 한국 문학의 성공적 세계 진출을 이뤄낸 소설가 신경숙, 독창적인 상상력과 자신만의 감각적 색깔이 돋보이는 시인 김민정, 섬세한 포착으로 장르를 넘나들며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하는 시인 권혁웅…. 현재 한국 문학계의 흐름을 형성하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이들 작가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수상자 출신이라는 것. 이처럼 뛰어난 역량의 작가를 대거 배출해온 「문예중앙」이 7년 만에 2012년 신인문학상 수상자를 발표해 화제가 됐다. ‘한 뼘의 해안선’으로 시 부문에 당선된 김해준(28)씨와 ‘이야기 속으로’라는 작품으로 소설 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박사랑씨가 그 ‘영광의 얼굴’들이다. 특히 유도선수 출신의 시 부문 당선자 김해준씨는 대다수 작가 지망생과는 다소 차별화된 독특한 이력으로도 주목을 받았다. 고등학교 진학 전까지는 진득하게 책 한 권 읽어본 기억이 없을 정도로 문학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는 그는 학창 시절 자신이 시를 쓰는 사람이 될 거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제대로 된 글을 써본 적도, 시를 접해본 적도 없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기초적인 맞춤법조차 잘 모르는 학생이었다. 친구에게 써서 보낸 카드 속 ‘생일 축화해’라는 말이 틀렸다는 것을 열일곱 살에 처음 깨달았다던 그는 이제 운명처럼 이끌려 들어선 시의 세계에 무섭도록 흠뻑 빠져들고 있다. “문학은커녕 원래부터 공부나 책 읽는 걸 좋아하지 않았어요. 위인전이나 명작동화처럼 또래 아이들이 누구나 한 번쯤 볼 만한 책도 읽어본 적이 없거든요. 딱히 읽으라고 권유하거나 시키는 사람도 없었고요. 그러다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하게 되면서 책과는 아예 멀어져버렸죠. 중학교 1학년 때 키가 지금이랑 비슷했을 정도로 체격도 크고 몸집도 좋았어요. 그러다보니 학교 유도부 선생님 눈에 띄어 유도를 시작하게 됐죠. 적성에 잘 맞는 것 같더라고요. 엄청난 두각을 나타낼 정도는 아니었지만 전국대회에 출전할 만큼 성적도 꽤 나왔고 스스로도 재미있어서 열심히 했어요. 운동부니까 오전 내내 연습하고 점심 먹고 겨우 학교수업을 들으러 가는데, 그마저도 피곤해서 잠만 자다 나오는 거죠.” 우직한 근성과 반복된 노력으로 벼려낸 이야기 그렇게 계속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갈 거라 생각했던 그의 인생에 의도치 않던 새로운 페이지가 펼쳐졌다. 몸이 좋지 않아 당분간 운동을 계속하는 것이 어려워졌고, 마침 고등학교 진학과 맞물리는 바람에 고민 끝에 체육 특기생이 아닌 문예창작과 학생으로 안양예고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느닷없는 우회였지만 당시로서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어깨가 아파서 일단 운동을 쉬게 되면서 나중에 체육고등학교 같은 곳으로 전학 가는 걸 염두에 두고 특목고 진학을 결정했어요. 선생님께서 어차피 성적도 좋지 않으니까 일반계 공부는 힘들 거고 특목고에서 특목고로 전학하는 건 상대적으로 쉬울 거라고 조언하셨거든요. 학교 소개 팸플릿을 보니까 도저히 연극영화과, 미술과, 무용과는 무리인 것 같고 그나마 문예창작과가 무난할 거란 생각에 지원한 거였어요. 다행히 입학은 했는데 문제는 학교생활에 적응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거예요. 수업 시간에 앉아 있는 것부터 낯설었죠. 그래서 처음에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만 있다가 집에 오곤 했어요. 얼른 전학을 가거나 차라리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였어요. ” 어색함을 견디다 못해 ‘그럼 어디 한번 정식으로 공부를 해보자’라는 다짐을 하고 처음으로 학교 공부를 시작했다. 문예창작과라는 소속에 걸맞게 글도 써보고 다른 친구들처럼 백일장 같은 글짓기 대회에 참여해보기도 했다. 물론 실력은 스스로 돌이켜봐도 형편없었다. 그러다 난생처음 자신이 쓴 시를 ‘읽어준’ 선생님을 만났다. 특강을 담당했던 김민정 시인이었다. 선생님은 시의 마지막 행에서 눈을 떼며 그에게 딱 한마디를 건넸다. “이렇게 못 쓴 시는 처음 봤다”라고. “저는 눈에 띄는 학생도 아니었고 스스로 의욕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제게 이런저런 평가를 해준 선생님이 아예 없었어요. 비록 좋은 평가는 아니었지만 김민정 선생님께서 처음으로 제 글에 대한 피드백을 주신 거였어요. 그리고 덧붙이시더라고요. 먼저 책부터 좀 읽으라고요. 선생님 말씀을 듣고 뭔가 해봐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됐어요. 직접 쓴 글로 관심을 받아본 게 처음이었거든요.” 책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것부터 차근차근 단계를 짚어 이끌어준 스승을 따라 그는 문학 속으로 풍덩 빠져들었다. 애초에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는 게 없으니 오히려 어려울 것도 없었다. 일단 국내에 출간된 모든 시집을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전직 유도선수로서 우직한 뚝심을 살려 묵직하게 파고들었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반복해서 한 가지 동작을 연습하고 땀 흘렸던 것처럼, 요령 피우지 않고 생각을 다듬고 말끝을 벼르기 시작했다. 문학에 관해서만큼은 그야말로 극심한 ‘허약 체질’이었던 그는 그렇게 조금씩 생각과 말의 근육을 키워나갔다. “저는 머리가 좋고 재능이 특출 난 사람이 아니라서 남들보다 많이 읽고 많이 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오규원 선생님의 「현대시작법」이나 권혁웅 선생님의 「시론」 같은 책이 큰 도움이 됐죠. 처음에는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컸지만 일상 속에서 시를 끄집어내는 일이 무척 재미있더라고요. 사람마다 체질에 맞는 글이 있는 것 같은데 저는 시가 가장 편하고 잘 맞았어요. 물론 쓰는 과정은 어렵고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재미도 있고 힘들다는 마음은 안 들거든요.” 학교에서 소설이나 비평 같은 다른 장르도 배웠으나 그와 가장 잘 맞는 쪽은 역시 시였다. 감각을 훈련하고 갈고닦아서 밖으로 끄집어내는 과정이 즐거웠다. 또한 시집은 굳이 1페이지부터 정독하지 않고 어떻게 읽어도 의미를 찾을 수 있어 좋았다. 시 한 편으로 몇 시간을 보낸 적도 많다. 여러 번 읽어도 그때그때 상황과 감정에 따라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물론 시를 쓰는 데도 크게 재능이 있는 편은 아니지만 다른 장르는 도저히 손을 못 대겠더라고요. 특히 치밀하게 앞뒤를 구성해야 하는 소설은 정말…. 보통 소설은 종이에 육신을 밀어 넣어 쓴다고 하고, 시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당겨 쓴다고 하잖아요. 저는 백지에서 기미를 잡아채는 쪽이 맞더라고요. 게다가 저는 정말 투박하게 써요. 평소에는 4절지 연습장에 낙서하듯이 쓰다가 이걸 설계도처럼 짜서 맞춰요. 한 번 앉으면 진득하게 쓰는 편이라 보통 일고여덟 시간씩 끄적거리고 있어요. 중간에 끊어지면 영 다시 시작하기가 힘들어서 늘 그렇게 한 번에 다 써요. 어떤 때는 스무 시간씩 하고 있어요. 머리나 감각은 별론데 체력이 워낙 좋아서 충분히 가능해요(웃음).” 온몸 구석구석 ‘시’라는 굳은살이 새겨질 때까지 오늘날 ‘시인 김해준’이란 이름을 얻기까지 그에게 숱한 좌절과 실망의 나날들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과연 제대로 잘 가고 있는 것인지 불안하고, 불투명한 현실에 대한 두려움으로 스스로를 갉아먹었던 기억들도 생생하다. “학교 다닐 때도 선생님들께 제대로 칭찬받아본 적이 없어요. 재능이 넘치는 친구들을 보면 저처럼 죽어라 매달리지 않아도 정말 잘 쓰고 실제로 상도 많이 받고 하더라고요. 전 백일장 같은 데 나가서 한 번도 1등을 못해봤어요. 열 개가 넘는 3등 표창장만 갖고 있어요(웃음). 대학도 다른 덴 다 떨어지고 딱 한 군데 붙어서 입학했고, 지금껏 신인문학상 등에 도전한 횟수만 해도 200번이 넘을거예요. 능력 있는 친구들은 목표를 정해서 딱 하나만 보고 도전하기도 하던데, 저는 잡지사나 신춘문예엔 전부 작품을 냈었어요. 그렇게 해도 한 번도 당선이 안 되니까 스스로 자꾸만 움츠러들게 되는 거죠.” 대학을 졸업하고 난 뒤에는 대학원에 진학해 시를 계속 파고들고 싶었지만 여러 현실적 문제로 인해 포기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종일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글을 쓰고 싶은데 직장일로 도통 시를 들여다볼 시간이 나지 않는 것도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원래는 친구도 많고 사람들과 어울리길 즐기는 성격이었지만 2년여 전부터는 혼자만의 웅덩이를 파게 됐다. 사람들과 연락을 끊고 시간이 나면 방 안에 틀어박혀 시를 쓰기 위한 생각에 골몰했다. “저는 생각을 오래하는 편인데다 주로 제 경험이나 기억에서 이미지를 끄집어내기 때문에 내면에 집중하는 시간이 꽤 많이 필요해요. 의도적으로 그런 것도 있고 또 잘 안 풀리기도 하니까 점점 생활을 단조롭게 만들게 됐죠. 사실은 최근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어요. 자신감이 바닥을 치려고 할 즈음인데 정말 기쁘게도 당선이 된 거예요.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전화를 받고 나서는 무척 기뻐서 한동안 말을 못 이을 정도였어요. ‘내가 계속 시를 써도 되는구나’라는 증명서를 받은 기분이랄까요? 물론 아직 저는 ‘떫은 감’이지만 심사위원들께서 가능성을 높이 봐주신 것 같아요. 이제 더 진심으로 열심히 써야죠. 좀 더 전문적으로 문학 공부도 하고 싶고요.” 정식으로 ‘시인’이란 이름을 갖게 됐다는 사실이 아직도 영 믿기지 않는다는 그는 앞으로 오래오래 시를 쓰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고 말한다. 유도를 그만둔 지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어도 아직 몸에 남아 없어지지 않은 굳은살처럼 몸 구석구석 ‘시’라는 굳은살을 새겨 넣을 생각이다. 그렇게 온몸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고픈 것이다. “시 말고 다른 일은 생각해본 적도 없어요. 다른 사람보다 늦게 문학을 접했지만 시를 쓰는 일도 운동과 비슷한 것 같아요. 훈련하듯이 언어를 연마하고, 본능적으로 경기를 이끌어가듯이 몸을 시에 맞춰가야 하니까요. 꾸며내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몸에 배도록 수련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죠.” 시인으로서 이제야 겨우 관문을 한 단계 통과한 거라 생각한다는 그는 지금부터가 더욱 집중해야 하는 중요한 ‘대회’인 셈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가능성을 읽어준 이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서, 아니 스스로에게 좌절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조금씩이나마 점차 나아지는 모습을 보이고 싶다. 그리고 자신으로 인해 단 한 명이라도 시를 가까이 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시는 인간의 삶을 건강하게 만든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전직 유도선수 시인의 뚝심 있는 ‘한 판’이 기대된다. 김해준 시인의 등단작 한 뼘의 해안선 마른 국화를 태워 연기를 풀어놓는다. 꽃잎이 불씨를 타고 오그라든다. 별들로 판서된 역사가 쇠락한 하늘 아래, 야경꾼의 홍채에선 달이 곪아간다. 통금의 한계에 닿아 부서지는 경탁 소리가 시리다. 첫 기제의 밤이 젖어간다. 된서리 맞고 실밥 모양으로 주춤주춤 경계를 얼려가던 복부에서 비린내가 터져 나온다. 절개했던 자리가 하얗게 번뜩인다. 새어머니는 훗배앓이 중이다. 뻘에서 태어난 입술에서 고동 소리가 샌다. 물려받은 반지의 녹이 지난 맹세로 생식한다. 태어난 해안에서 침몰해가는 유년. 바리캉으로 밀어낸 태모가 이방에 닿아 바람으로 분다. 가마의 계절풍은 성장을 멈추고, 내가 가졌던 땅을 만조로 삼키는 병풍이 펼쳐진다. 유폐했던 이름이 글썽이며 타들어간다. 문간에서 날린 살비듬이 어떤 풍향을 탔는지 나는 모른다. 술잔에 내린 테를 삼켜 캄캄한 바다. 두 명의 어머니가 같은 연안에 이불을 깐다. 해진 안감에 귀를 묻고 손금이 크는 소리를 듣는다. 빛과 어둠이 범벅된 하늘이 몸 안으로 새어든다. 김해준 시인 추천 처음 시를 접하고자 하는 당신을 위한 시집 3 장석남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한국 서정시를 대표하는 장석남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 절제된 언어로 자연과 주변을 관조하며 깊은 서정의 세계를 선보인다. 김해준 시인이 ‘진짜 시인의 모습을 가진 시인’이라 생각한다는 장석남 시인은 이 시집에서 느림과 비움, 그리고 ‘호젓함’을 이야기한다. 차분하게 벼려진 단어 하나하나에 마음이 깃들어 있어 가만히 소리 내어 읽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시들이 가득하다. 김기택 「사무원」 익숙한 일상 속 정서를 꿰뚫는 김기택 시인의 「사무원」은 시를 제대로 접하게 된 이후 김해준 시인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본 시집이라고 한다. 곳곳에 배어 있는 좋은 이미지들과 사유 덕분에 시 한 편 한 편이 강렬하게 뇌리에 박힌다. 현대인의 고단한 일상을 그린 50여 편의 시는 감정 노동자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끔 만든다. 생활 속 가까이에서 시를 읽고 느껴야 하는 이유를 깨닫게 해주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박형준 「춤」 전통적인 시의 서정성을 현대적으로 풀어내는 박형준 시인의 네 번째 시집.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 감각적이면서도 섬세하게 마음을 울리는 시들을 만날 수 있다. 어렵지 않게 비교적 술술 읽힐뿐더러 단단하게 응축되어 있는 이야기들로 인해 쉽게 시에 젖어들게 된다. 평소 시를 자주 접하지 않았던 이들도 부드럽고 단아한 시의 매력에 빠져들게 하는 시집이다. <■글 / 이연우 기자 ■사진 / 원상희>
2012.07.02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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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로 찾아가는 문화기행]가야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고령&김해 방문기오는 설 연휴에 떠나게 될 일본 규슈 자전거 여행을 앞두고, 우리 역사 가운데 특히 가야 시대의 문화를 깊이 있게 느끼고 싶었다는 필자 이재언. 혹독한 겨울바람을 헤치고 가야의 고장 고령과 김해로 자전거 답사를 다녀왔다. 찬란한 철기문명을 열어 일본에까지 영향을 끼쳤던 가야. 현세인들에게는 그 자체가 신화적 상상력의 시대로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마침 부산으로 가는 지인의 차편에 편승해 대구에서 멀지 않은 경북 고령군에서 하차했다. 대가야국이 있었던 고령을 돌고 나서 밀양으로 이동, 1박을 하고 나서 바로 금관가야의 김해로 가는 일정이다. 고령향교. 대가야국의 혼이 살아 있는 고령(高靈) 며칠 전 포항·경주 지역에 쏟아진 폭설의 여파 때문인지 성주, 고령 일대에는 눈이 제법 쌓여 있었다. 읍내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가야 유적지는 가야왕궁 터다. 조선시대 향교가 있는 그 자리가 바로 왕궁 터다. 지산동 고분군이 있는 주산의 기슭으로 현재 이렇다 할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고령읍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로 미루어보건데 충분히 왕궁이 있었을 법하다. 바로 뒤에는 아담한 고령읍을 감싸듯 주산(310m)이 내려다보고 있다. 주산을 올려다보니 거대한 봉분들이 포도송이처럼 모여 있어 고령에서나 볼 수 있는 아주 이색적인 산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충동적으로 고분군을 향해 달려가고 싶었다. 어차피 등산로 입구가 대가야박물관 쪽에 있어 먼저 약 1.5km 거리에 있는 박물관으로 갔다. 개관 시간이 조금 남아 있어 일단 자전거를 두고 바로 배후에 있는 주산 기슭에 있는 고분군을 따라 등산을 시작했다. 크고작은 고분 200여 기가 마치 포도송이처럼 밀집되어 있는 곳이 지산동 고분군이다. 주산에서 내려다본 고령읍.산 전체를 덮은 봉분들이 무덤이라기보다는 무슨 모뉴먼트(Monument) 같다. 필경 왕이나 왕족들의 무덤인 것 같은데 왜 이리도 높은 곳에 터를 잡았을까. 대다수 능들의 위치와 방향이 고령읍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혹시 망자가 나라의 수호신이 되어 도읍을 굽어 살펴달라는 주술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추측은 순장제도가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과도 일치한다. 노비나 종자, 기타 생전에 아끼던 유품들을 망자의 곁에 잠들게 하는 순장제도 역시 죽음을 하나의 끝이나 단절로 보지 않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1970년대 본격적인 발굴 조사에 의해 1,500년 이상 잠들어 있던 지하의 세계가 빛을 볼 수 있었다. 주요 유물들이 무수히 도굴되었음에도 교과서에 실려 있는 환두대도나 금관, 토기, 마구, 장신구 등이 상당량 출토되었다. 가야의 문명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는 높은 수준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쉬운 것은 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다. 유물들이 보여주는 재료와 형태, 용도, 양식 등을 통해서도 우리의 시간 여행은 흥미로운 것이지만,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었더라면 고대와의 교감과 소통은 한결 더 긴밀해졌을 텐데 말이다. 김해의 김수로왕릉. 개실마을의 점필재 선생 사당. 하산 길에 왕릉전시관을 들렀다가 출발점이었던 대가야박물관으로 입장했다. 그곳에서는 의미 있는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그것은 ‘일본 속의 대가야’라는 전시로 당시 가야가 주변국들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오키나와에서만 생산되는 야광조개로 만든 국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멀리까지 해외교역이 있었으며, 철기문물의 수출로 번영을 누리던 가야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자칫 삼국시대 중심의 고대사에 묻히기 쉬운 가야 역사를 생생하게 전해주는 전시장이다. 박물관에서 나와 장터에서 국밥으로 점심 식사를 하고 난 뒤 33번 국도를 따라 밀양으로 장거리 이동을 했다. 거의 100km 거리를 이동해야 하니 지체 없이 떠나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서울은 한낮의 기온이 영하인데, 이곳은 영상 5℃ 정도로 자전거 타기에 괜찮은 조건이었다. 자전거를 달리면서 지형들을 유심히 살폈다. 가야 번영의 밑거름이 된 철의 생산이 도대체 어디서 얼마나 이루어졌는지 그것이 내내 궁금했다. 아름다운 도자 벽을 자랑하는 김해 클레이아크 미술관. 33번 국도를 따라 남하하던 중에 쌍림면 소재 개실마을의 ‘점필재 종택’에 잠시 들렀다. 사림파의 거두, 영남학파의 종조로 일컬어지는 문충공 김종직 선생의 종가이다. 포은-길재-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신진사류의 대표적 학자로 연산군 때 무오사화로 가문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가 뒤에 신원되고 선생의 5대손에 이르러 고령 땅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선생의 고향은 밀양이지만 개실마을은 종손의 집성촌으로 350여 년을 이어온 것이다. 마침 밀양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친구를 만나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 길이 멀고 힘들어 예정 시간보다 훨씬 늦은 어두운 시간에야 밀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분산성벽.설화의 땅, 김해 새벽같이 일어나 이른 아침의 공기를 가르며 김해를 향해 달렸다. 밀양에서 김해를 향해 가는 길은 두 갈래로 나뉘어 있다. 58번 국도를 따라 동쪽 삼랑진을 거치는 길은 김해 시내로 가는 길이며, 25번 국도를 따라가는 길은 김해 서쪽에 있는 진영과 진례 방향으로 시내와는 좀 거리가 멀다. 후자의 길을 선택한 것은 먼저 진영의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생가와 봉하마을을 둘러보기 위해서다. 정치적인 호불호를 떠나 우리 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곳을 그냥 지나치기란 어려운 일일 것이다. 진영읍에서 봉화산을 찾아가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제 워낙 유명해진 곳이어서 길 가는 사람들에게 묻기만 해도 제대로 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야트막하면서도 산세가 수려한 봉화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놀랍게도 오전 10시 전후의 시간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방문한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추모의 열기가 아직도 식지 않았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인파를 따라 봉화산 정상까지 올라가는 동안 여러 가지로 착잡한 심경이었다. 차분하고 진지한 참배객들의 표정들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도대체 무엇이 저들을 저렇게 움직이는가’ 하는 생각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대가야왕릉전시관의 지산동 고분 모습. 봉하마을을 뒤로하고 도자기로 유명한 진례를 향해 달렸다. 9km 정도 달려 진례면에 당도하니 약간 높은 언덕 위에 오벨리스크 비슷한 도자 타워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도자 전문 미술관인 김해 클레이아크(Clay Arch)를 알려주는 타워이다. 둥근 방주형 건물의 벽을 도자로 미장해 멀리서 볼 때 보석 같은 화사한 느낌을 주는 외장이 인상적이다. 아크가 방주형(Arc)에서 온 것인 줄 알았는데 건축(Architecture)의 줄임말이었다. 도자와 건축이라니 획기적인 아이템이 아닐 수 없다. 전시장, 창작관(레지던시 프로그램), 체험관 등의 규모가 생각보다 크고 정성스럽게 잘 단장되어 휴일 많은 사람들이 가족 단위로 찾고 있었다. 도자 산업체들이 밀집된 진례, 나아가 김해의 시민들이나 업체들에 중요한 정보와 교류의 장이 될 것으로 보인다. 분산성 봉수대의 고목. 진례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난 뒤 김해 시내로 달렸다. 어디서 좋은 흙이 생산되기에 도자기가 발전한 것인지, 그리고 어디서 철 생산이 이루어졌기에 철기 강국 금관가야가 발전할 수 있었는지가 여전히 궁금했다. 냉정IC를 거쳐 20km 정도 달린 뒤 김수로왕릉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왕릉의 옆에 있는 한옥촌까지 함께 둘러보고 나서 수로왕비릉을 향해 올라갔다. 김수로왕 탄생 설화의 현장 구지봉(龜旨峰)과 도래인(渡來人)으로 알려진 수로왕비 허황옥릉이야말로 김해의 배꼽과도 같은 곳이다. 구지봉에 올랐을 때 마주한 바위가 눈에 띄었다. 마치 자라가 머리를 내밀어 맞이하는 듯한 모양이었다. 학창 시절 구지가(龜旨歌, 김수로왕의 강림 신화 속에 삽입된 노래)라 하여 외웠던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내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을래’라는 구절을 기억할 것이다. 바로 그 현장이다. 노래의 온 구절과 의미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지만, 아무튼 자라 머리 같은 바위의 형상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야트막하지만 산세가 수려한 봉화산. 참배객들이 줄을 잇는 봉하마을의 노 전 대통령 생가. 에필로그 구지봉에서 내려오는 길에 수로왕비릉을 거쳐 들렀다가 바로 사충단을 끼고 분산성(330m)으로 올라갔다. 경사가 심해서 자전거를 끌다가 타다가 하다 보니 정상까지 30분 정도가 걸렸다. 봉수대 정상에서 보는 풍경은 장관이었다. 김해의 젖줄 서낙동강이 햇살을 반사하면서 평야 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모습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분산성은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쌓은 성으로 김해 일대를 내려다볼 수 있는 천혜의 요새이자 김해 시민들의 안식처이기도 하다. 성이 언제 처음으로 축성되었는지 정확한 역사적 기록이 없지만 그 연원은 가락국일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범부의 눈으로 보아도 이 이상의 요건을 가진 천혜의 요새는 없으니 고대의 영웅들에게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가야왕릉전시관의 가야 토기. 분산성이 땅을 감시하기 위해 지어졌다면 김해천문대는 하늘을 살피기 위해 지어졌다. 실제로 가야인들이 천문관측을 위해 이 산에 올랐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 둘의 중간쯤 되는 공터에는 지난해 방영된 MBC-TV 드라마 ‘김수로’의 촬영지가 남아 있다. 산 전체가 가야국 테마파크인 셈이다. 분산성의 맞은편에는 산세가 빼어나고 기암절벽이 많은 신어산이 있으며, 중턱쯤에 절묘하게 자리 잡은 사찰들의 풍경 또한 볼 만하다. 이틀간 고대 가락국들로 떠난 시간 여행을 이제 마쳐야 할 시간이다. 서울로 돌아가는 심야 버스를 기다리면서 휴식을 갖는 동안에도 많은 기억들과 환상들이 떠나질 않는다. 가야여, 우리 또 봐요! 답사후 이재언이 직접 그린 상상 속의 수로왕비. ‘통일의 왕 김수로왕에 대한 기다림’, 알렉시스 그레그·테너 콜맨 작. 필자 이재언은… 1958년생. 강원대를 졸업하고 홍익대 대학원 미학과 석·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경희대 겸임교수, 선갤러리 조형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1989년부터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일산-종로의 여정을 자전거로 출퇴근하며, 미술과 자전거에 관한 다수의 칼럼 집필이나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역서 「존 듀이 경험으로서의 예술」(책세상) <■글&사진 / 이재언(미술평론가)>
2011.02.15 15:48
화제
노숙자에서 벤처기업가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는 김해일“돈은 어느 정도 벌면 의미가 없어요. 좋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어요” 잘나가던 룸살롱 사장에서 노숙자가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노숙자 생활 1년, 수배자 생활 7년… 그 긴 터널을 빠져나와 어엿한 벤처사업가로 살아가는 김해일 대표. 그의 인생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 같다. 스물세 살에 룸살롱 사장, 2년 만에 사업 실패로 수배자 생활 유랑극단 배우로 살던 부모님을 따라 전국을 떠돌았다. 스물세 살에 단란주점 사장이 되었지만, 사업 2년 만에 모든 것을 잃고 노숙자와 수배자로 전락했다. 수배중에 아내를 만나 결혼을 했지만, 가난은 피할 수 없었다.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서 온갖 궂은일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글씨 보정 기구’라는 아이디어로 사업을 시작해 6개월 만에 매출 5억원을 올리며 당당히 벤처사업가가 됐다. ‘더웨이’ 김해일 대표(38)의 인생스토리는 한 편의 영화처럼 믿기 힘든 일들의 연속이다. 어릴 때는 유랑극단 배우인 부모님을 따라 전국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다섯 살 위의 형과 함께 대구에서 자취 생활을 시작했다. 운동회나 소풍 때 김밥을 싸 간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부모님은 여전히 유랑극단을 따라서 전국을 떠돌았기 때문이다. 생활보호대상자로 등록이 돼서 정부보조금으로 형과 생활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문대 일본어과에 입학했다. 당시에는 대학교에서 교련 수업이 있었는데, 군사 교육을 거부하자 강제 입영됐다. 1년 남짓 짧은 대학 시절이 마지막 학창 시절이 될지는 몰랐다. 제대 후 재즈피아노 강사를 하면서 복학 준비를 했다. “부모님을 따라다니면서 어깨너머로 피아노를 배웠어요. 집에 돈이 있나요! 피아노 살 돈이 없어서 초등학교 다닐 때는 음악시간마다 자진해서 풍금을 옮겼어요. 그때 한번 쳐보려구요.(웃음) 그러다 문선대에 가서 고참한테 많이 배웠죠. 제대 후에 재즈피아노 강사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지요.” 하지만 공부보다는 먹고사는 것이 중요했다. 학력이 변변치 않다 보니 그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었다. 전봇대나 정보지에 구인 소식이 눈에 띄면 모두 서류를 넣어봤지만 번번이 떨어졌다. 그러다 의류 회사에 영업사원으로 취직하면서 그의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가 취직한 의류 회사는 ‘화류계 여성’에게 옷을 파는 곳이었다. 매일 밤낮없이 전국을 돌아다녀야 했다. 밤에는 룸살롱에 가서 옷을 팔았고, 낮에는 아가씨들이 쉬고 있는 집을 찾아다녔다. 유창한 말솜씨 덕분인지 고객은 나날이 늘어갔다. 몇몇 사람들이 투자를 해주겠다며 룸살롱을 해보라고 권하기 시작했다. “스물세 살에 룸살롱 주인이 됐어요. 그때 정말 잘나갔지요(웃음). 술장사는 아가씨들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서 매출이 좌우되거든요. 제가 영업을 하면서 만난 아가씨들이 많았으니까 장사는 잘 됐어요.” 낮에는 의류 회사 영업사원으로 일하고, 밤에는 룸살롱 사장으로 변신했다. 그의 예상대로 룸살롱 매출은 생각보다 높았다. 당시에 외제 차를 타고 다닐 정도로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하지만 너무 젊어서 룸살롱 운영에 대한 노하우를 몰랐다. 투자금을 대주던 사람들은 수익의 일부분을 자신도 모르게 가져가기도 했다. 앞으로 벌고 뒤로 밑지는 격이었다. 카드를 돌려 막고, 사채로 급한 불을 끄기도 했다. 그러다 의류 회사의 공금에까지 손을 댔다. 당시 그의 빚은 2억원으로 불어나 있었다. 투자자들 때문에 룸살롱을 처분하지도 못하고 빈 몸으로 도망나왔다. 부정수표단속법 위반, 향토예비군법 위반 등으로 길고 긴 수배자 생활이 시작된 것. 노숙 생활중 만난 아내, 새로운 인생 시작 수중에 몇십만원을 들고 서울로 갔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얼마 버티지 못하고 대구에 내려왔다. 하지만 검문을 피해 갈 곳이라곤 1년간 다니던 학교밖에 없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강당이나 벤치, 동아리방에서 잠을 잤다. 처음에는 밥을 사주던 후배들도 그를 보면 피하기 시작했다. 하루에 한 끼라도 먹는 날이라면 그는 행복했다. 몇 달을 그렇게 지냈을까? 우연히 학교 뒷산에서 혼자 성악 연습을 하는 예쁜 여대생을 봤다. 한눈에 반했다. 그녀에게 말을 걸어보기 위해 4시간 동안 혼자서 노래를 만들었다. 함께 강변가요제에 나가자고 제의를 했다. “당시 제 몰골이 제대로였겠어요? 하지만 제가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그녀가 색다르게 본 거죠. 성악을 전공하는 자신보다 제가 피아노를 잘 쳤으니까요. 그래서 그녀와 계속 만났어요. 그녀를 만나면서 고정적으로 하루에 한 끼를 먹었죠.” 시간이 지나면서 동거를 하고, 아이가 생겼다. 아이를 지우려는 아내를 설득해 15만원짜리 방에서 살림을 시작했다. 아는 형이 자신의 처지를 알고 50만원을 준 것이었다. 아이를 위해서 그는 일을 해야 했다. 1년간의 노숙자 생활을 청산했지만, 아직도 자신은 수배자 신분이었다. 신분을 드러낼 필요 없는 일이라면 뭐든지 했다. 막노동부터 여러 가지 일을 하기 시작했다. 공단에서 일할 때는 담뱃값 1백원만 가지고 하루를 살기도 했다. 나머지는 모두 저축을 했다. 사기성이 있는 부동산 영업으로 돈을 벌기도 했다. 커피 자판기 사업부터 여행사 영업, 홈페이지 회사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제가 어렵게 자리를 잡은 것이 홈페이지 회사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할 때였어요. 제가 인터넷을 알겠어요, 자판을 칠 줄 알겠어요. 그래도 거기에서 살아남았다니까요. 출근한 지 며칠 만에 큰 계약을 따내기도 했어요.” 수배자로 숨어 살면서도 빚을 조금씩 갚아나갔다. 은행에서는 자신의 처지를 듣고 ‘딱하다’며 빚을 일부를 탕감해주기도 했다. 빚을 ‘어떤 식으로 갚아라’는 조언까지 해줄 정도였다. 젊은 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수밖에 없었다. 맏아들이 태어난 지 2년 만에 둘째 딸이 태어났다. 첫애는 네 살 때 출생신고를 했다. 아내와 아이들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를 믿고 따라줬다. 유치원은 꿈도 꾸지 못하고 부족한 것도 많았지만, 잘들 커줬다. 현재 아들은 초등학교 4학년, 딸은 초등학교 2학년이다. “수배 생활한 지 7년 만에 자수를 했어요. 첫애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야 했거든요. 그때까지 1억 정도 빚을 갚아서 그랬는지, 불구속으로 처벌받았어요. 그리고 2003년 10월경에 모든 빚을 청산했죠.” 홈페이지 영업사원으로 일하면서 용기를 얻어 2002년 홈페이지 대행 회사를 차리기도 했지만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가 도전한 것이 ‘글씨 보정 기구’ 사업이었다. 연필을 똑바로 잡지 못해서 체형까지 변하는 아이들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찰흙과 석고 등으로 샘플을 만들었다. 펜글씨 1급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친구의 도움이 컸다. 샘플을 가지고 경북대학교 공학설계기술원의 도움을 받아 2003년 8월 시제품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투자자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수소문 끝에 계명대 벤처보육사업단의 문을 두드려 지원금 5천만원을 받았다. 2003년 10월, 사무실을 열었고, 이제는 자신이 만든 ‘필그립’을 알리는 일만이 남았다. 누구도 도전하지 않았던 길을 뚫어야 했다. 지난해 초 프랑크푸르트 국제문구박람회에 제품을 선보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회사 홈페이지도 없는 소규모 회사였지만, 외국 바이어들은 그의 제품을 사려고 몰려들었다. “완제품은 2004년 8월에 나왔어요. 그때부터 까르푸나 이마트, 홈플러스 등을 돌아다니면서 제품을 홍보했죠. 처음에는 조그마한 매대에서 판매했는데, 호응이 좋아서 단독 매대가 만들어진 곳도 있어요. 외국에서는 저희 상품을 독점 공급하려는 곳도 생겼구요.(웃음)” 지난해 3/4분기와 올해 1/4분기 매출액을 합하면 벌써 5억원이란다. 짧은 시간에 성공 궤도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가족은 아직 월셋집에 산다. 그는 자신의 제품을 원하는 사회복지단체에는 무료로 보급하고 있다. 젊은 날에 고생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때문이다. “처가 없었으면 저는 자포자기했을 것입니다. 저에게는 가족이 가장 소중해요. 돈은 어느 정도 벌면 더이상 의미가 없어요. 돈을 벌면 좋은 곳에 써야죠.” 김해일 대표는 영화 같은 인생을 살았다. 하지만 젊은 날의 고생이 헛되지 않도록 좋은 일을 하면서 살 것이라고 약속한다. 그의 성공 신화가 앞으로 계속되기를 기원한다. 글 / 최영진 기자 사진 / 지호영
2005.06.01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