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
‘원고 한국, 피고 북한’ 재판 3분 만에 종료···‘남북사무소 폭파’ 손배소, 비용 다시 산정해야... 소송대리인으로 출석했다. 피고(북한 정부) 측 자리는 비어 있었다. 앞서 한국 정부는 2023년 6월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의 법적 책임을 물어 국가 채권을 보전하겠다”며 북한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최혜린 기자 2025.04.09 13:22
정치
‘원고 한국, 피고 북한’ 재판 3분 만에 종료···‘남북사무소 폭파’ 손배소, 비용 다시 산정해야... 소송대리인으로 출석했다. 피고(북한 정부) 측 자리는 비어 있었다. 앞서 한국 정부는 2023년 6월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의 법적 책임을 물어 국가 채권을 보전하겠다”며 북한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최혜린 기자 2025.04.09 13:22
정치
‘적대적 두 국가’로 고착된 남북관계…충돌 가능성 줄이는 게 가장 중요... 부양, 남북의 확성기 방송 등으로 고조된 군사적 긴장 완화가 꼽힌다. 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은 “남북관계는 장기간 여러 가지가 중첩돼 악화했기에 쉽게 풀릴 수 없다”며 “접경지역에서 긴장을 완화해...
#남북관계 #북한 #김정은 #윤석열 #미국 #트럼프 #통일부
박광연 기자 2025.04.07 21:45
정치 다시, 민주주의로
[다시, 민주주의로] ‘적대적’ 남북관계, 긴장 완화 최우선…‘북·미 대화’서 실마리 찾아야... 전문가들은 한목소리로 얘기한다. 당장의 과제로는 남한의 대북전단 살포와 북한의 오물풍선 부양, 남북의 확성기 방송 등으로 고조된 군사적 긴장 완화가 꼽힌다. 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은 “남북관계는...
#남북관계 #북한 #김정은 #윤석열 #미국 #트럼프 #통일부
박광연 기자 2025.04.07 18:01
정치
학생 넷 중 셋 “남북 관계 평화롭지 않아”…전쟁·군사위협 언급 늘었다... 간 군사적 대립이 없는 상태’가 떠오른다는 응답(34.5%)이 가장 많았다. 전년도 조사 때는 ‘남북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상태’라는 답변이 가장 많았으나 이번 조사에서는 두 번째(25...
#통일부 #북한 #평화 #전쟁 #통일교육
박광연 기자 2025.04.04 10:00
축구
‘승리 눈앞에 두고 페널티킥 악몽’ U-17 축구 대표팀, 사우디에 승부차기 패배…남북 결승전 무산선제골 넣은 오하람. 대한축구협회 제공 한국 U-17(17세 이하) 축구 대표팀이 결승 진출 직전 좌절했다. 후반 추가시간 마지막 순간 동점골을 허용한 뒤 승부차기에서 패배하며 23년 만의 우승 꿈이 산산조각 났다. 백기태 감독이 이끄는 한국은 17일(한국시간) 사우디아라비아 타이프의 오카드 스포츠 클럽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5 아시아축구연맹(AFC) U-17 아시안컵 준결승에서 1-1로 비긴 후 승부차기에서 1-3으로 패했다. 한국은 이번 대회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인도네시아에 0-1로 패하는 수모를 겪었지만, 이를 보약 삼아 아프가니스탄(6-0 승), 예멘(1-0 승)을 연파했다. 8강에서는 타지키스탄과 2-2로 비긴 뒤 승부차기에서 승리해 4강에 올랐다. 전반전은 양팀의 팽팽한 기싸움 속에 전개됐다. 전반 25분 사우디 압둘라흐만 수피야니의 중거리 슛을 박도훈(현풍고) 골키퍼가 선방했고, 한국은 전반 32분부터 공세를 강화했다. 한국은 전반 45분 세트피스를 빠르게 처리해 기회를 만들었다. 프리킥 상황에서 진건영(천안제일고)이 상대가 전열을 정비하기 전 기습적인 패스를 김예건(영생고)에게 전달했고, 김예건의 오른쪽 크로스를 오하람(광양제철고)이 왼발 슈팅으로 연결했다. 골키퍼에게 막힌 볼을 오하람이 재차 오른발로 밀어 넣어 선제골을 기록했다. 후반전에도 한국은 사우디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막아내며 더 많은 득점 기회를 만들었다. 후반 21분 부상당한 김예건 대신 김지성(매탄고)을 투입했고, 후반 23분에는 임예찬(대건고)과 박서준(충남기계공고)을 빼고 정현웅(오산고), 류혜성(울산현대고)을 교체 투입했다. 드리블하는 박병찬. 대한축구협회 제공 한국은 후반 39분 김은성(대동세무고)이 골키퍼가 비운 골문 앞에서 절호의 득점 기회를 잡았으나 슈팅이 골대를 넘겨 아쉬움을 삼켰다. 2-0으로 달아날 수 있는 중요한 찬스였다. 한국은 1-0 리드를 지키며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9분의 추가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후반 57분(추가시간 포함)에 결정적인 실수가 나왔다. 세트피스 상황에서 압둘라흐만 수피야니가 올린 프리킥을 아부바커 사이드가 슈팅으로 연결했고, 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박도훈 골키퍼가 상대 선수 압둘아지즈 알파와즈의 다리를 걸어 페널티킥을 허용했다. 사이드가 페널티킥을 침착하게 성공시키며 경기는 1-1 동점이 됐다. 곧바로 이어진 승부차기에서 한국은 첫 번째 키커 김지성이 성공했으나, 이후 김민찬(울산현대고)이 골대를 넘겼고 정현웅과 김도연(충남기계공고)의 슛이 연달아 골키퍼에게 막히며 1-3으로 패배했다. 4강에서 맞붙은 북한과 우즈베키스탄. 아시아축구연맹 홈페이지 캡처 북한은 이튿날 열린 준결승에서 우즈베키스탄에 0-3으로 완패했다. 전반 31분 사드리딘 카사노프에게 선제골을 내준 북한은 전반 40분 강명범의 경고 누적 퇴장으로 수적 열세에 몰렸다. 10명으로 싸워야 했던 북한은 후반 17분과 20분 연달아 2골을 내주며 완패했다. 이로써 2010년과 2014년 두 차례 아시안컵을 제패했던 북한의 정상 탈환 도전도 무산되었고, 기대를 모았던 남북 결승 대결도 성사되지 않았다. 비록 우승 도전은 좌절됐지만, 한국은 4강 진출로 11월 카타르에서 열리는 U-17 월드컵 출전권을 확보했다. 한국은 지난 2002년 아랍에미리트연합 대회 이후 23년 만에 아시아 정상을 노렸으나 이루지 못했다. 이번 대회 결승전은 21일 0시(한국시간) 킹 파드 스포츠 시티 스타디움에서 사우디아라비아와 우즈베키스탄이 맞붙는다.
박효재 기자 2025.04.18 09:55
축구
8강서 ‘남북전’은 없다···북한, 오만과 2-2 무승부, 조 2위로 U-17 아시안컵 8강행AFC 홈페이지 캡처 북한 17세 이하(U-17) 남자 축구 대표팀이 2025 아시아축구연맹(AFC) U-17 아시안컵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오만과 비기면서 조 2위로 8강 진출에 성공했다. 북한은 12일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의 킹 압둘라 스포츠 시티 홀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5 AFC U-17 아시안컵 조별리그 D조 3차전 최종전에서 오만과 2-2로 비겼다. 1승2무(승점 5점)로 조별리그를 마친 북한은 이날 이란(1무2패·승점 1점)을 3-1로 물리친 타지키스탄(2승1패·승점 6점)에 승점 1점차로 선두를 내주며 조 2위로 8강행 티켓을 차지했다. 오만(1승1무1패·승점 4점)과 이란은 각 조 1, 2위 팀에만 주는 8강 진출권을 따내지 못하고 탈락했다. 북한이 조 2위로 조별리그를 통과하면서 8강에서 열릴 뻔했던 남북전은 피하게 됐다. 한국과 북한의 맞대결은 결승전에서나 가능하다. AFC 홈페이지 캡처 한국은 전날 C조 최종전에서 예멘을 1-0으로 물리치고 2승1패(승점 6점)를 기록, 인도네시아(승점 9점)에 이어 조 2위로 8강에 올랐다. 북한이 D조 1위를 차지했다면 한국과 8강에서 맞대결을 치를 예정이었지만, 조 2위가 되면서 북한은 C조 1위를 차지한 인도네시아와 한국시간 14일 오후 11시 캉 압둘라 스포츠 시티 홀 스타디움에서 4강 진출을 다투게 됐다. 이에 따라 한국은 타지키스탄과 한국시간 15일 오전 2시15분 프린스 압둘라 알 파이살 스타디움에서 8강전을 치러 4강 진출에 도전하게 됐다. U-17 아시안컵에서 역대 2차례(2010, 2014년) 우승한 북한은 이날 오만을 상대로 전반 10분 만에 김유진의 선제골이 터졌지만 후반 20분 오만의 오사마 알 마마리에게 동점골을 내주며 팽팽한 접전을 이어갔다. 후반 29분 리강림의 추가골로 승리를 눈앞에 뒀던 북한은 후반 추가시간 막판 오만의 알왈리드 살람에게 극장골을 허용하며 무승부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AFC 홈페이지 캡처
윤은용 기자 2025.04.12 10:23
스포츠종합
[하얼빈 동계AG]같은 역사 새긴 땅 하얼빈에서 찬바람 날린 남북 선수단···‘셀카 대통합’ 이번에는 없었다북한 피겨 페어 렴대옥과 한금철이 12일 중국 하얼빈 헤이룽장 빙상훈련센터 다목적홀에서 열린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 피겨 페어 프리스케이팅에서 은메달을 획득, 시상대에 오르며 손을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가장 가깝지만 가장 먼 나라, 북한이다. 2025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에서 북한은 한국과의 거리를 유지했다. 2024 파리 올림픽 때처럼 남북한 선수단이 셀카를 찍으며 물리적 거리를 좁힐 여지도 없었다. 선수들은 같은 공간에서 운동하면서 마치 남처럼 서로를 지나쳤다. 북한은 이번 대회에 세 명의 선수를 파견했다. 모두 피겨 종목이었다. 2017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 페어스케이팅 부문에서 동메달을 딴 렴대옥은 파트너를 바꿔 한금철과 이번 대회 페어에 출전했다. 남자 싱글에는 젊은 기대주 로영명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한국 취재진을 대하는 북한 선수단은 하얼빈의 공기처럼 차가웠다. 공식 훈련 후 질문을 던져도 선수들은 눈길을 주지 않았다. “선수를 자극하지 말라”는 관계자의 날 선 반응만이 돌아왔다. 남북한 선수단은 같은 빙상장에서 훈련하고 연기를 펼치면서도 일말의 교류를 하지 않았다. 소수의 아시아 국가만 참가하는 국제대회에서 남북한은 오히려 더 어색한 사이가 됐다. 국제대회에서 남북한의 교류는 흔한 일이 아니다. 2017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에서도, 2024 파리 올림픽에서도 북한 선수들은 한국 취재진과 거리를 뒀다. 그렇기에 지난해 파리에서 남북한 탁구 대표팀 선수들의 ‘셀카 대통합’은 역사의 귀중한 한 장면이 됐다. 당시 3위에 오른 한국의 임종훈·신유빈은 2위를 차지한 북한 리정식·김금용, 1위인 중국 대표팀 선수들과 함께 시상대에서 스마트폰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남북한 선수들끼리 별다른 대화를 주고받지는 않았지만 이들이 한 프레임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며 웃는 모습은 세계적으로 큰 화제를 모았다. 지난 7일 중국 하얼빈 국제 컨벤션 전시 스포츠센터에서 열린 제9회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 개회식에서 북한 선수단이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렴대옥-한금철 조는 지난 12일 프리스케이팅에서 112.20점으로 1위를 차지했다. 쇼트프로그램 점수가 56.68점으로 3위였으나 두 부문 점수를 합한 총점은 168.88점으로 전체 2위였다. 은메달을 수확한 두 선수는 경기 종료 후 공식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비로소 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렴대옥은 “우리를 많이 고무해주고 대회 기간 응원해준 것에 관해 하얼빈, 중국 인민들에게 감사 인사를 드린다”라며 “(한금철과) 같이 한 지가 얼마 안 되기 때문에 계속 노력할 것이다. 올림픽을 위해서”라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던 것은 (김현선) 감독 동지 (덕분이다)”라며 “감독 동지의 노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99%가 아니고 100%다. 우리 조국이 없었다면 이곳에 설 수 없었다”라고 강조했다. 기자회견장에서 제공되는 동시통역기에는 한국어 채널이 있다. 줄곧 동시통역사는 이 채널을 기기에 쓰인 그대로 ‘한국어’라고 소개했으나 전날에는 북한 선수들을 의식해 ‘조선어’라고 바꿔 불렀다. 기자회견 시작 전 사회자는 “정치적 질문은 삼가 달라”라고 당부했다. 이 역시 다른 기자회견에서는 없었던 안내말이다. 같은 언어로 지어진 세계를 여전히 높은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파리에서 생긴 일] 셀카, 응원, 축하…파리에서 남북한이 소통하는 방법2024 파리 올림픽에서 북한 선수들을 처음 본 건 지난달 29일 탁구 경기장에서였다. 당일 리정식과 김금용은 사우스 파리 아레나 4에서 열린 탁구 혼성 단체 준결승전에서 홍콩을 꺾고 결승전에 진출했다. 현장에 있던 기자들은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에서 리정식과 김금용을 기다렸다. 8년 만에 복귀한 올림픽에서 메달을 추가한 소감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러...https://sports.khan.co.kr/article/202408051633003
하얼빈 | 이두리 기자 2025.02.13 09:30
연예
에릭 모브랜드 교수 “남북관계, 한국 방관적인 태도 조금 아쉽다” (The GeoVista)아리랑TV 19일 아리랑TV ‘The GeoVista’(지오비스타)는 김진아 한국외국어대학교 LD 학부 교수 진행으로 에릭 모브랜드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를 초대해 트럼프-이시바 체제의 동북아 정세를 미리 진단했다. 최근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단독 과반 확보에 실패함에 따라 이시바 시게루 총리의 리더십에 대한 내부 비판과 외부 압력이 커지고 있다. 내년이면 창당 70년을 맞는 자민당 내 파벌 정치, 일본의 제103대 일본 총리로 선출된 이시바 시게루 총리의 정치 성향을 집중 분석했다. 또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과 이시바 총리의 등장으로 미일 동맹 및 한미일 삼각 협력이 새로운 변화와 도전을 맞이하고 있다. 아리랑TV 글로벌리스트(국제인)인 에릭 모브랜드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시각에서 트럼프와 이시바 체제에서 동맹의 안정성과 협력 방향성을 분석하고, 한미일 군사협력이 지속될 수 있을지 함께 전망했다. 미일 관계에 대해 에릭 모브랜드 교수는 “트럼프 당선인과 이시바 총리의 성격을 떠나 미국과 일본은 동맹국이므로 계속 가까워질 것”이라며 “한국과 일본, 미국은 각각 중국과 다른 관계성을 맺고 있어 국가 간의 세계관을 이해하며, 새로운 행정부에서 이러한 관계에 대해 다른 고려 사항이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미일 협력을 바탕으로 한 동아시아 안보 구조와 일본의 역할에 대해서도 “트럼프의 스타일이 국제 문제에 미치는 영향이 있을 수 있으며, 심각한 문제로는 한국에 미군을 주둔시키는 목적이 무엇인가에 있다”며 “이는 한미 안보 환경에 큰 변화가 있을 가능성이 있으며, 현재 우크라이나에 주둔하는 북한군과 남북 관계와의 연관성으로 인해 동아시아 안보 지형에 심각한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미국, 한국, 일본 간의 지속적인 논의는 다른 요소에 비해 영향력이 미미하다”라고 말했다. 이시바 총리가 총선을 앞두고 내놓은 아시아판 나토 실현 가능성에 대해 “트럼프 당선인이 다자간 협력보다 양자 간 협력을 선호하는 것은 사실이며, 다자간 협력 기관에서 미국 역할이 전 세계적으로 감소하고 있다”며 “다자간 시스템은 도약 개별 파트너에 대한 이점이 적고, 일부 국가에서는 저항이 강하기 때문에 다자간 시스템에 대한 저항 파트너들은 이 주도권 경쟁이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지 회의적이다”라고 답했다. 아리랑TV 북한과 일본, 북일 회담 가능성에 대해서도 “북한과의 협상은 어려운 시기이며, 미국과 일본이 주도적으로 북한과 논의를 시작할 가능성이 있다”며 “남북 관계 형성에 있어 한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해주길 바라기 때문에 현재의 방관적인 태도는 조금 아쉽다”고 전했다. 이날 프로그램에선 에릭 모브랜드 교수일본과 미국의 잇따른 정치 리더쉽 교체 이후의 변화하는 한미일 협력 관계에 대한 심도 깊은 분석이 이어졌다. 지오비스타(The GeoVista)는 아리랑TV를 통해 매주 화요일 저녁 7시에 방송되며, 전문가와의 대담은 아리랑TV 유튜브 채널에서 방송 전날인 월요일 오전에 미리 만나볼 수 있다.
손봉석 기자 2024.11.19 19:23
정치 표지 이야기
‘확성기 전쟁’ 60년…남북관계의 가늠자로체제 선전에서 괴음 테러까지 대남심리전 변천사 지난 9월 19일 인천 강화군 송해면에서 바라본 북한 황해도 개풍군 야산에 설치된 대남 확성기. 북한의 대남 확성기 소음으로 인천 강화군 송해면, 양사면, 교동면 등 3개 면 주민 4천600여명이 소음 피해를 겪고 있다. 연합뉴스 휴전 이후 남북은 확성기로 싸웠다. 정전협정은 “쌍방은 모두 비무장지대 내에서 어떠한 적대 행위도 감행하지 못한다”고 명시했지만 그래도 했다. 서로의 체제를 선전하고, 상대 지도자를 비방하는 심리전의 주된 도구였기 때문이다. 남북은 때로는 중단하고, 때로는 재개하면서 확성기 방송을 이어갔다. 확성기 방송은 시기별 남북관계가 대화로 향했는지, 적대로 향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가늠자기도 하다. 북한은 1960년대부터 대남 확성기 방송을 시작했는데, 방송의 목적과 성격에 따라 세 가지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남북이 대등하게 겨뤘던 196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다. 비무장지대 일대의 한국군과 남한 주민들을 상대로 “사회주의 지상낙원으로 오라”며 월북을 선동하거나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했다. 대남 확성기 방송은 이 시기 가장 활발했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후 중단한 것도 잠시, 양측은 1년 만에 방송을 재개했다. 과거의 대남 방송을 기억하는지를 묻자 당산리 주민 김완식씨(76)는 가수 고운봉이 1941년 발표한 ‘선창’을 북한이 개사한 노래로 불렀다. “울려고 내려왔나, 매 맞으러 내려왔나, 지긋지긋한 국군 생활.” 김씨는 “1970년대에 정미소에서 일하다가 팔을 다쳤는데, 그다음 날 북한 방송에서 ‘누구누구씨 어디서 일하다 팔 다치셨죠’라고 하더라. 이야, 무서웠다”고 했다. 상황이 변한 건 199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다. 북한은 경제난과 전력난이 심화하자 확성기 방송 시간을 줄였다. 전문가들은 이 시기 북한의 확성기 방송이 방어용으로 변모했다고 본다. 체제 경쟁의 의미가 없어지면서 북한은 남한에서 송출하는 확성기 방송을 북한 군인과 주민들이 듣지 못하게 할 목적으로 확성기 방송을 했다. 한국의 정권교체 이후 마련된 대화 국면도 주요 변수였다.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에서 북한은 대북 확성기 방송 중단을 먼저 요구했다. 회담 이후 상호 비방은 중단됐고, 체제 우월성 선전이나 음악 방송으로 대체됐다. 2004년 장성급 군사회담을 통해 남북은 확성기 방송 중단에 합의했다. 그해 6월 “통일될 날까지 안녕히 계십시오”라는 멘트를 마지막으로 휴전선 전 지역에서 확성기가 꺼졌다. 2015년 목함지뢰 사건으로 양측은 확성기 방송을 재개했으나 2018년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다시 확성기 방송이 중단됐다. 6년 만에 재개된 최근의 대남 확성기 방송은 세 번째 시기로 부를 수 있을 만큼 특징적이다. 이번 대남방송도 애초에 방어적 목적으로 시작됐을지 모르나, 최근에는 한국의 접경지역 주민들을 괴롭히는 공격 용도로 활용되고 있다. 강화도 당산리 주민 안미희씨는 “이 소리를 못 참아서 문제를 제기하는 와중에도 북한이 ‘얘네들 힘들어하는구나’ 하고 더 심하게 할까봐 걱정이 된다”고 했다. 실제 북한은 파주시 대성동마을을 향해 7월부터 방송을 했는데, 9월 28일부터는 소음의 출력을 높여 온종일 방송하고 있다. 파주시 대성동마을에서 55년을 산 주민 정순자씨는 “예전에 노래 나올 때가 은은하고 듣기 좋았다. 괴뢰도당, 미제 어쩌고 할 때는 그래도 말로 했는데, 지금은 귀신 소리, 공장에서 쇠 가는 소리, 짐승 소리 등 갖은 소리가 다 난다”고 했다. 더 큰 문제는 남북대화라는 변수도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는 점이다. 파주가 고향으로 민통선 안쪽에서 30년째 농사를 짓고 있는 박해연씨(65)는 “남북이 대화하면서 (대남 확성기 방송이) 어느 날 갑자기 없어졌거든요. 왜 다시 하게 하냐고요? 출구도 다 막아놓고선. 고무줄도요, 너무 빨리 당기면 끊어져요”라고 했다.
이효상 기자 2024.10.28 06:00
국제 가깝고도 먼 아세안
[가깝고도 먼 아세안](39) 베트남, 남북 긴장 완화의 해결사 될까지난 8월 12일 또 럼 베트남 총서기 겸 국가주석이 베트남 주석궁에서 리성국 북한대사 대표단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VNA ‘한국전쟁 재발 위험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미국 싱크탱크 스팀슨센터의 로버트 매닝 선임연구원은 지난 10월 7일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 폴리시(FP)에 한반도의 전쟁 발발 위험을 경고하는 기고문을 실었다. 매닝 선임연구원은 최근 북한이 통일정책을 포기하고 핵무기와 이를 탑재할 수 있는 미사일 능력을 크게 강화한 것을 우려했다. 또한 올해 1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언급한 것을 두고 군사 충돌 가능성도 제기했다. 여기에 더해 북한은 남북 회담이나 교류사업, 경제협력을 담당해온 관계기관을 폐지하는 등 소통 창구를 없애버렸다. 윤석열 정부 역시 정권 출범 때부터 북한에 대화보다는 강경한 태도를 견지해 오고 있어 남북관계는 심각한 상황이다. 과거에는 러시아와 중국이 북한을 달래주는 중재자 역할을 자처했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그럴 여력이 없다. 미국과 유럽연합(EU) 역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때문에 한반도에 신경 쓸 틈이 없다. 마주 보고 달려드는 기차 같은 남북관계에 중재자가 필요한 상황에서 어쩌면 베트남이 이 문제를 풀어줄 해결사가 될지도 모른다. 베트남은 북한의 정치·경제·외교적 롤모델 2019년 2월 28일 베트남 하노이가 북·미 정상회담 장소로 낙점된 것은 북한이 베트남식 개혁·개방 모델을 따르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시간을 거슬러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도보다리 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문재인 당시 대통령에게 ‘베트남식 (개혁·개방) 모델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베트남의 유명한 경제학자이자 개혁·개방 실현에 중요한 역할을 한 레당 도안은 2019년 2월 CNBC와 인터뷰에서 ‘북한은 지난 3년간 베트남의 개혁·개방을 공부했다’라고 밝혔다. 북한은 진작부터 엘리트 집단인 김일성대와 김책공대 학생들에게 베트남의 개혁·개방 정책을 배우게 했다. 베트남 고위 공무원이 북한으로 가서 강의도 하고 북한 고위관계자와 대학생이 베트남으로 직접 가서 배우기도 했다고 한다. 베트남은 시장 개방과 국외 자본 유치에 적극적이면서도 공산당의 권력은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정치체제를 유지하고 싶은 북한 처지에서는 베트남이 이상적인 롤모델이다. 무엇보다 북한과 베트남 모두 중국에 종속되기를 극도로 경계하기에 김정은 위원장에게 베트남식 개방 모델은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10년 넘게 전쟁을 한 ‘철천지원수’ 미국의 까다로운 요구 조건을 수용하고 관계 개선을 해 빠른 경제 성장을 하는 베트남의 경험도 전수하고 싶었을 것이다. 여러모로 베트남은 북한의 정치적·경제적·외교적 롤모델이다. 북한에 무력 도발이 아닌 개혁경제가 살길이라고 진실하고 신뢰성 있게 조언해줄 수 있는 국가는 베트남밖에 없다. 1975년 베트남전쟁에서 패배한 미국의 경제 보복은 가혹했다. 베트남은 전쟁이 끝난 직후 세계은행과 IMF 회원국이 됐지만 어떤 기구로부터도 경제적 지원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1978년 캄보디아에 이어 중국과 전쟁까지 치러야 했다. 베트남이 지금은 세계 1~2위를 다투는 쌀 수출국이지만, 1988년까지만 하더라도 쌀이 부족해 300만명이 기아에 허덕였다. 베트남이 내부적인 논란 속에서도 개혁·개방을 결정하고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이유다. 국제사회 요구에 따라 10년 동안 캄보디아에 주둔하고 있던 10만명의 베트남 군대도 과감하게 철군했다. 수용하기 어려운 것들을 베트남은 받아들이고 세계 무대에 나섰다. 1989년 심각한 인플레이션과 베트남 화폐 가치 폭락으로 1인당 국민 소득은 96달러에 불과했는데, 2023년에는 4347달러로 35년 동안 450배 성장했다. 미국과의 교역액도 1995년 4억5100만달러에서 2023년 1240억달러로 276배 성장했다. 지난 30년간 연평균 6~7%의 고성장을 이룬 베트남과 달리 북한은 1988년 1000달러 내외이던 1인당 GDP가 2023년에는 되레 500달러 미만으로 추락한 것으로 추정된다. 2018년 6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1차 북·미 정상회담 직후 마이크 폼페이오 당시 미국 국무부 장관은 평양을 방문한 뒤 곧바로 하노이를 찾아 “북한이 미국과 관계 개선을 한 베트남식 개혁·개방을 따르면 ‘기적’ 같은 경제 성장이 재현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과 미국 모두 베트남식 개방 모델에 합의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2019년 2월 하노이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에서는 이런 기대가 무너졌다. 극단적 보수주의자였던 존 볼턴 미국 국가안보보좌관 때문에 모든 것이 수포가 됐다. 2019년 6월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판문점에서 깜짝 회담하며 다시 물꼬를 트는가 싶었지만, 코로나19 유행과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 실패로 모든 것이 허망하게 끝나버렸다. 베트남, 남북 양쪽과 우호적인 관계 한국과 북한은 끝까지 포기하면 안 된다. 남북관계가 극단적으로 치달아 양쪽이 대화조차 하기 어렵다면 베트남을 통해 관계 개선을 시도해야만 한다. 지난 30년간 베트남에 투자한 외국인 중 한국인이 가장 많다. 현재 9000여개의 한국 기업이 베트남에 진출해 있고, 약 17만명의 한국인이 베트남에서 살고 있다. ‘사돈의 나라’라 불릴 정도로 많은 베트남 여성이 한국에 정착하는 등 한국에 약 22만명의 베트남인이 살고 있다. 한국과 북한 모두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연결된 나라는 드물다. 최근 북한이 베트남과의 관계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남북문제에서 베트남의 역할을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024년 3월 15일 김성남 북한 노동당 국제부장이 대표단을 이끌고 베트남을 방문해 레 화이 쭝(Le Hoai Trung) 베트남 대외부장과 회담했다. 양국 관계 발전을 위한 민간교류 협력이 주요 의제였지만, 전쟁도 불사한다는 북한의 움직임에 전 세계가 주시했다. 지난 8월 12일에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5년 동안 공석이었던 주하노이 북한대사로 리성국을 임명해 또 럼(To Lam) 베트남 당서기장 겸 국가주석에게 신임장을 제출했다. 지난 9월 9일에는 박상길 북한 외무성 부상(차관)이 베트남을 방문해 부이 타잉 썬(Bui Thanh Son) 부총리 겸 외교부 장관과 회담했다. 지난 9월 18일 황 쑤언 치엔(Hoang Xuan Chien) 베트남 국방부 차관과 공산당 중앙위원, 중앙군사위원 등 대표단이 평양을 방문해 김민석 북한 국방성 부상(차관)과 회담했다. 지난 8월 15일 베트남 국영방송 VTV는 “북한이 올해 말 외국인 대상 관광을 재개한다”고 보도했다. ‘베트남 뉴스’는 “스키장이 있는 삼지연을 포함한 북한 전역이 대상”이며 “베트남 여행사들은 2025년부터 북한 관광 고객 모집을 할 것”이라고 전했다. 전쟁도 불사한다는 북한이 동맹국 베트남 국민을 상대로 관광객을 모집한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다. 북한이 한국에 오물풍선을 보내고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소리 높이는 것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자신에게 관심을 달라는 울부짖음이다. 대화 채널이 단절된 채 극심하게 경색된 남북관계에 베트남이 중재자로 나서주길 바란다.
호찌민 | 유영국 <베트남 라이징>·<왜 베트남 시장인가> 저자 2024.10.25 15:30
정치 렌즈로 본 세상
[렌즈로 본 세상]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남북관계남과 북을 연결하는 경의선과 동해선 도로는 폭파돼 뿌연 연기를 뿜으며 허공으로 사라졌다. 지난 10월 15일 합동참모본부가 공개한 영상에는 분명히 그렇게 찍혀 있었다. 하지만 하늘 높이 적란운처럼 뿜어져 나왔던 잿빛 연기는 사라지지 않고 다음 날 임진강에서 연막처럼 퍼져나가고 있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데, 고성능 관측장비가 무슨 소용일까? 제구실을 못 하지만 경기 파주 오두산 통일전망대의 망원경은 북서쪽을 향하고 있다. 전망대 남서쪽에서는 한강이 굽이쳐 올라온다. 강원도 검룡소에서 발원한 한강과 함경남도 마식령산맥에서 흘러나온 임진강은 바로 오두산 앞에서 만난다. 그리고 한 줄기가 되어 서해로 흘러간다. 만나면 하나가 되어 흘러가는 것이다. 망원경 너머에는 굽이쳐 내려오는 임진강과 수확을 기다리는 민통선의 황금 들녘, 그리고 북으로 향하는 자유로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지만 실제로 보이는 건 별로 없다. 윤석열 대통령의 8·15 통일 독트린은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까? 통일전망대 1층 상설전시실에 걸린 윤 대통령의 사진 옆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 있다. “저와 정부는 2024년 올해를, ‘자유 평화 번영의 통일 대한민국’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원년으로 만들겠습니다.”
김창길 기자 2024.10.22 06:00
정치
북한, ‘경의선·동해선 남북 연결도로’ 폭파10월 15일 오전 인천 옹진군 대연평도에서 해병대원이 해안선 수색정찰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북한이 10월 15일 경의선·동해선 남북 연결도로를 폭파했다고 합동참모본부가 밝혔다. 합참은 이날 국방부 출입기자단에 보낸 문자메시지를 통해 “북한은 오늘 정오께 경의선 및 동해선 남북 연결도로 군사분계선(MDL) 이북 일부 구간을 폭파했다”며 “우리 군은 감시 및 경계태세 강화 중”이라고 밝혔다. 앞서 북한군 총참모부는 지난 10월 9일 보도문을 통해 “9일부터 대한민국과 연결된 우리 측 지역의 도로와 철길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견고한 방어축성물들로 요새화하는 공사를 진행되게 된다”고 발표했다. 북한은 같은 날 유엔사-북한군 통신선을 통해 보낸 통지문에서도 “우리 측은 10월 9일부터 남쪽 국경선 일대에 우리 측 지역에서 대한민국과 연결됐던 동·서부의 도로와 철길을 완전히 끊어버리기 위한 공사를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성준 합동참모본부 공보실장은 지난 10월 14일 정례브리핑에서 “도로에 가림막을 설치해 놓고 그 뒤에서 도로를 폭파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하는 것이 식별되고 있다”고 밝혔다. 북한은 지난해 말부터 남북 육로 단절을 위해 도로 주변 지뢰 매설과 가로등 제거, 철로 제거, 인접 부속 건물 철거 등을 진행해왔다. 남북 연결 육로에는 철도 및 도로인 동해선과 경의선, 화살머리고지 및 공동경비구역(JSA) 통로 등이 있다. 합참에 따르면 북한은 지난해 11월 경의선 도로 인근에 나뭇잎 지뢰를 살포했고 같은 해 12월 동해선에 지뢰를 매설했다. 올해 3월에는 동해선 도로 펜스, 4월엔 경의선 도로 가로등을 철거했다. 이어 5월에는 동해선 철도 레일 및 침목을 제거했고 6월에 동해선 도로 가로등을 철거다. 또 7월엔 경의선 철도 레일 및 침목을 제거한 뒤 8월엔 경의선 열차 보관소를 해체했다. 김명수 합참의장은 지난 10월 10일 국회 국방위원회의 합동참모본부 국정감사에서 “경의선과 동해선은 (지난) 8월에 차단됐다”며 “이런 움직임은 사전에 감시되고 있었다”고 밝혔다.
홍진수 기자 2024.10.15 13:15
화제
제1세대 여성운동가 김정례 “제 생애 마지막 꿈은 남북 평화통일입니다”여성에 대한 차별과 인권 신장은 여전히 여성계의 최대 화두다. 그만큼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인 분위기에 익숙해진 우리 사회에서 여성 인권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 그런데 1940년대부터 여성 계몽과 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해온 사람이 있다. 최근 그 공로를 인정받으며 비추미여성대상 대상인 ‘해리상’을 수상한 김정례 한국여성유권자연맹 고문을 만났다. 비추미여성대상 해리상 수상 지난 10월 31일, 제12회 비추미여성대상 시상식이 열렸다. 비추미여성대상은 삼성생명공익재단이 주관하며 여성가족부가 후원하는 권위 있는 여성상으로, 여성의 사회적 역할 증진과 여성 문화 창달에 기여한 인사를 선발하고 격려하기 위해 제정된 상이다. 여기서 ‘비추미’는 해, 달, 별의 통칭으로 사회를 밝고 건강하게 비추는 사람을 의미한다. 수상자는 국내외 주요 기관과 전문 인사들로부터 후보자를 추천받아 별도의 심사위원회가 2개월에 걸쳐 현장 실사 등을 통해 결정된다. 올해 수상자는 해리상에 김정례 한국여성유권자연맹 고문, 달리상에 홀트일산복지타운 조병국 의사, 별리상에 노정혜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특별상에 서혜경 경희대 음악대학 교수이며, 각 부문별로 상금 3천만원과 상패가 수여됐다. 해리상을 수상한 김정례(85) 한국여성유권자연맹 고문은 이날 시상식에서 “이 상을 받게 돼서 영광스럽다”라면서 “상금은 평화통일을 위한 시금석으로 사용하겠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해리상은 여성의 지위 향상과 권익 신장에 기여한 사람에게 주어지는데, 김 고문은 제11대·12대 국회의원, 제20대 보건사회부 장관, 국무총리실 직속 여성정책심의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여성 차별 조항 개선에 노력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받았다. 시상식이 끝난 직후인 11월 초,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 위치한 김 고문의 자택을 찾았다. 잔디가 깔린 정원에 석류나무와 감나무를 심고, 다양한 종류의 장이 담긴 장독대를 손수 관리하며 여성계의 대모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김 고문. 그의 명륜동 집은 여성계 인사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아지트 같은 장소다. 김 고문은 자택을 방문한 기자에게 “비 오는 날에 찾아오느라 고생했다”라고 반갑게 웃으며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넸다. 비추미여성대상 해리상 수상 축하 인사를 전하자 김 고문은 “영광스럽고 감사하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큰 상을 받은 것 같다”라면서 “앞으로도 다른 사람들에게 빛이 되라고 준 것 같아서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라고 겸손한 소감을 밝혔다. 차를 마시며 담소를 이어가던 김 고문은 담담하고 차분하게, 때론 진지하게 대한민국 1세대 여성운동가로서 녹록지 않았던 삶의 여정을 전했다. 법적으로 여성 차별 조항 개선에 앞장서 김 고문은 전라남도 담양의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났다. 집은 가난했지만 공부에 대한 욕심도 많았고, 성격 역시 매사에 도전적이고 진취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농촌에 있는 여성들은 대부분 못 배우고 가난해서 한평생 고생만 하는 것 같아 보였다. “제가 스무 살 초반이었으니까 광복 직후였어요. 제 눈에는 농촌 여성들이 힘들게 일하는 모습이 무척 안타깝고 불쌍하게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밤마다 여성들을 모아놓고 한글을 가르쳐주기 시작했죠. 무지했던 여성들이 한글을 익혀가는 모습을 보면서 뿌듯했고 보람을 느꼈어요. 그 일이 제가 여성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였어요.” 그는 그 후로 1년 동안 농촌 여성들의 계몽운동을 계속 이어갔다. 또 그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입바른 소리를 자주 해서 경찰서에 드나드는 일도 잦았다. 집에서 아버지는 “여자가 밖으로만 나돈다”라며 노발대발했고, 결국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로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일도 생겼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김 고문을 둘러싸고 “담양에 여장군이 한 명 나왔다”라는 소문이 돌면서 아버지의 화는 누그러졌고, 담양군 관계자들은 김 고문을 두고 “앞으로 담양을 대표하는 여성 지도자가 될것”이라며 옹호하기도 했다. 실제로 얼마 뒤 조선민족청년단(청년들의 수련을 위해 결성된 청년운동단체)에서 ‘교육을 받으러 왔으면 좋겠다’라는 제의를 받았다. “조선민족청년단의 슬로건이 마음에 들었어요. 국가지상, 민족지상, 비정치, 비군사, 비종교였거든요. 좌익과 우익을 따지지 않고, 서로 비판도 하지 않았죠. 이 나라 청년은 조국을 재건하기 위해 대한민국의 지도자로 성장을 해야 한다는 내용의 훈련이었어요. 당시 3백여 명의 여성들과 함께 훈련을 받았는데, 저희가 여성 1기였습니다.” 훈련을 마치고 담양으로 돌아온 그는 조선민족청년단 담양 지부를 결성하고, 담양군단부 여성 부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서울중앙단부 여성부 지방조직책을 맡았으나 1년 뒤 여자 청년단이 통합되면서 그 진행 과정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김 고문은 여자청년운동의 기틀을 확고히 했고, 국립여학도 중앙훈련소를 신설해 여군 창설의 기반도 다졌다. 또 1960년에는 국내 최초의 여성 주간지를 발행하는 여성주보사를 창설하고, 1969년에는 한국여성유권자연맹을 창립해 초대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여성의 정치 참여를 확대시키기 위해 주력했다. “처음에 한국여성유권자연맹을 창립했을 때의 취지는 여성의 참정권 행사를 제대로 하자는 것이었어요. 나라가 잘되기 위해서는 유권자가 깨어 있어야 한다는 계몽운동에 주안점을 뒀죠. 지금도 정치는 우리의 생활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한국여성유권자연맹은 여전히 사회정의를 바로 세우고, 올바른 국회의원을 뽑도록 계몽하고 지도하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여성유권자연맹은 여성들의 사회 진출을 돕는데도 큰 역할을 해왔다. 김 고문은 “한국여성유권자연맹에서 배출한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해 사회 곳곳에서 많이 노력하고 있다”라며 “그동안 장관 4명, 국회의원 6명, 대학총장 3명, 한국여성개발원장(현 한국여성정책연구원) 2명 등을 배출했다”라고 밝혔다. 김 고문은 민정당 소속으로 제11대·12대 국회의원과 국무위원 및 제20대 보건사회부 장관도 역임했다. 또 국무총리실 직속의 여성정책심의위원회 부위원장을 비롯해 1991년에는 한국여성정치연맹을 창립하고 1, 2대 총재를 지냈다. 현재는 한국여성유권자연맹 고문, 한국여성정치연맹 명예총재로 활동 중이다. 1 (사)한국여성유권자연맹 주최 남녀모두행복한세상만들기 행사. 2 취로사업장에 나온 할머니를 위로하는 김정례 여사. 3 1983년 4월 한국여성개발원 현판식 하는 날. 4 김정례 선거대책본부에 격려차 방문한 윤보선 전 대통령. 김 고문의 이 같은 활발한 정치활동은 여성이 정당한 발언권을 가지고 국정에서 주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이끌었고, 여성의 올바른 참정권 행사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 한국여성유권자연맹을 통해 여성 정치 지도자를 발굴·육성하며 여성의 정치의식을 향상시키도 했다. 김 고문의 가장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국회의원과 장관을 거치면서 법적, 제도적 분야부터 여성 차별 조항을 고쳐나가는 데 앞장섰다는 것이다. 우선 1980년 헌법시안에 ‘여성평등조항’을 삽입하는 데 큰 기여를 했고, 부모평등·부부평등·남녀평등 이념이 실현될 수 있도록 ‘가족법’ 개정 운동에 선봉으로 활동했다. 특히 보건사회부 장관 시절, 남녀차별 조항 개선, 근로환경 개선, 여성의 재취업을 위한 ‘재취업 특별법’도 추진하는 등 여성의 사회 진출 기반을 마련했다. 1983년에는 여성계의 오랜 염원이었던 한국여성개발원을 설립하고 청사를 마련해 오늘날의 한국여성정책연구원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기여했다. “제 인생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여성운동가의 모습이 아닌, 아내와 엄마로서 김정례 여사는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20대 초반부터 여성운동에 빠져 살아왔던 김 고문은 아예 결혼 생각이 없었다. 워낙 외부활동이 많은 터라 결혼한 뒤 가정에 소홀하게 될까봐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고향 사람이었던 남편이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김 고문에게 반해 “인생을 함께하고 싶다”라며 손을 내밀었다. “남편은 결혼 생각이 없던 저를 10년 동안 말없이 지켜줬어요. 그래서 결혼했는데, 하고 보니 잘한 것 같아요(웃음). 가정을 갖고 엄마가 돼보니, 여성의 입장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됐거든요.” 남편은 결혼 전부터 일본에서 사업을 해왔다. 때문에 결혼 뒤에도 어쩔 수 없이 일본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았다. 그렇게 한평생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김 고문과 아들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를 해준 남편 故 윤재수씨. 일과 가정밖에 모르던 남편은 19년 전, 지병이 악화되면서 세상을 떠났다. 남편은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지금의 명륜동 자택을 직접 지었다고 한다. 현재 47세인 아들은 안정된 직장을 다니다가 그만두고 사업을 준비 중이다. 김 고문은 어떤 공식석상이든 한복을 즐겨 입는 것으로 유명하다. 20대 초반에는 활동성 때문에 바지를 자주 입었는데, 약혼식 때 우연히 한복을 입어본 뒤 한복의 아름다움에 반해 그 뒤로는 거의 한복을 입는 편이다. “남자든 여자든 한복을 입으면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한국적인 정서도 느껴지고요. 그래서 공식석상에서는 무조건 한복을 입으려고 노력합니다. 여성계 인사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한복을 즐겨 입어서 한국의 미를 알리는 데 앞장섰으면 좋겠어요.” 김 고문을 포함해 국내외 여성계 인사들이 오랫동안 여성의 권익을 위해 노력해온 덕분에 지금은 여성의 정치 참여도와 의식수준이 매우 높아졌다. 김 고문 역시 그렇게 느끼고 있을까. “제가 여성운동을 시작했던 건 시대적인 분위기도 강하게 작용했어요. 오랜 시간 여성의 정치의식과 사회의식을 높이고, 모든 분야에 주인의식을 가지고 참여하도록 계몽하는 데 많은 역할을 했다고 자부합니다. 물론 다른 여성단체들도 많은 활동을 해왔습니다. 지금은 여성의 지위가 많이 향상됐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김 고문은 “앞으로가 더욱 중요하다”라고 강조한다. 정보화 시대에는 여성의 역할이 지식이나 수준이 높아졌다고 해서 그걸로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21세기는 남녀가 함께 사회 참여에 앞장서고,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돼야 합니다. 여성이 주최자가 된 만큼 사회와 국가 발전은 물론 경제 발전에도 실질적인 역할을 해야 합니다.” 김 고문이 생각하는 여성의 남다른 경쟁력은 바로 ‘모성애’다. 모성애를 바탕으로 한 여성 특유의 친화력과 부드러운 정서는 남성에게 없는 여성만이 가진 장점이기 때문이다. 그는 여성의 이런 장점이 인류의 평화를 이룩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현재 여성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바로 여성의 높아진 의식수준에 발맞춰 과거보다 더욱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 “과거에는 남성들에게 가려져 기를 못 펴고 여성운동을 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여성들이 가진 자질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돼 있고, 또 여성의 지식수준도 매우 높아져 충분히 자질을 갖췄어요. 때문에 여성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적극적으로 여성의 사회 참여를 이끌어야 하고, 성 차별 없이 사회의 일꾼을 선발해야 된다는 것을 주장해야 합니다.” 올해 85세인 김 고문의 꿈은 ‘남북 평화통일’이다. 젊었을 때는 살아 있는 동안에 통일 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도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으니 답답할 뿐이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김 고문이 직접 ‘통일’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고 한다. “비추미여성대상을 받고 제가 달라진 점이 있어요. 해리상이 저에게 세상에 도움이 되라고 채찍질을 하는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죽을 날만 기다리지는 않을 작정입니다. 비추미여성대상의 상금 3천만원 역시 저의 염원인 통일운동을 하는 데 가치 있게 쓰고 싶어요. 제 인생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글 / 김민주 기자 ■사진 / 원상희 ■사진 제공 / 김정례>
2012.12.05 19:59
재테크
‘남북이 공존하는 땅’ 개성공단 스케치‘북한’은 일종의 판타지였다. 초등학교 때 ‘통일포스터’ 대회가 열리면, 북한 사람을 늑대나 돼지로 그리는 친구들이 꼭 한 명은 있었다. 북한은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념, 막연한 공포가 지배하는 땅이었다. 지난 5월 16일, 개성공단을 직접 다녀왔다. 개성에 머물렀던 일곱 시간은 단단했던 판타지를 깨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것도 두 번이나.이번 방문은 사회복지단체 ‘러빙핸즈’와 ‘낙원건설주식회사’의 도움으로 이뤄졌다. 러빙핸즈는 북한에 전지분유 지원 가능성을 타진 중이고, 낙원건설은 개성공단에 아파트형 공장을 짓고 있는 건설회사다. (편집자 주)흰색 울타리 안쪽은 개성공단, 녹색 울타리 바깥은 개성 외곽이다. 그 사이에는 인민군이 경계근무 중이다.첫 번째 판타지 북한은 오랫동안 ‘볼 수는 있지만 갈 수는 없는 땅’이었다. 개성공단 방문 하루 전, 그간 미디어에 보도된 관련 기사들을 출력했다. A4용지 50여 장, 한 뭉치였다. 일산에 있는 낙원건설 사무실로 가는 길에도, 개성공단까지 운전을 한 낙원건설의 남상준 부사장(50)의 차 안에서도 자료를 읽었다. 사진을 보고, 기사를 읽어도 개성은 막연했다. 실제로 본 적이 없으니, 실체도 없었다. 오전 8시 10분, 자유로를 타고 달렸다. 9시 ‘출경(出京, 남측 경계선을 넘어 북측으로 가는 것을 출경이라고 한다)’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가다 남 부사장이 말한다. “개성이 먼 곳인 줄 아셨죠? 저기 울타리 너머가 북한이에요. 가깝죠?” 강변북로를 달리다가 63빌딩을 바라보는 거리보다 가까워 보였다. 9시에 열리는 개성공단에 들어서기 위해 줄 선 남측 차량들. 주황색 깃발은 남측 차량이라는 표시다.‘북한’의 실체가 다가오고, 판타지가 깨지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다. 개성은, 일단 물리적으로 가까웠다. 육로로 한 시간이다. 기대감과 두려움이 막연하게 섞였다. 그러면서도 미리 출력해간 자료들을 손에서 놓지 않고 읽었다. 이때는, 이 자료들이 개성에 대한 두 번째 판타지를 깨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리라는 걸 알 도리가 없었다. 통일전망대로 가는 갈림길을 지나 도라산 출입국관리소(CIQ)에 도착했다. 미리 발급받은 ‘방문증명서’와 수첩을 들고 내렸다. 운전자의 수속은 따로 이뤄졌다. 공항에 있는 출입국관리사무소와 비슷한 풍경, 가지고 온 짐을 검색대 위에 놓고, 금속감지기를 통과했다. 수속을 마치고 다시 남 부사장의 승용차에 올랐다. “여기가 남방 한계선입니다. 여기서부터 4km는 비무장지대죠. 아, 혹시 잡지나 출판물 같은 거 있으면 안 됩니다. 가지고 오셨다면 저한테 맡기세요.” “여기 기사 출력한 인쇄물 한 뭉치 있는데요.” “그래요? 괜찮을 겁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괜찮지 않았다. 4분여를 달리자 북방 한계선이다. 인민군이 지키고 섰다. 남방 한계선의 남측 군인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 표정은 굳었고, 몸은 경직됐다. “북측 군인들은 군기가 바짝 들었죠. 초반에는 전봇대 같았어요. 공단 안에 들어가면 분위기가 또 다를 겁니다.” 인민군보다 먼저 눈에 띈 건 붉은색 아카시아였다. 남 부사장에 따르면, 붉은 아카시아는 북한에서 만든 개량종이다. 북측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일종의 신호가 된다. 민둥산은 또 하나의 신호다. “나무가 거의 없죠. 북한은 아직 화목 연료를 때서 그렇습니다. 지금이 5월이라 좀 녹색이 보이지, 겨울에는 더 황량해요.” 북측 CIQ를 지나 개성 공단으로 진입했다. 오랫동안 개성공단을 드나든 남 부사장을 알아보는 사람이 많았다. 요즘에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드나든다. “오늘 들어오는 날인가? 온제 가십네까?” 제복을 입은 북측 관리원은 익숙하게 말을 걸어온다. 낙원건설의 아파트형 공장 건설 현장으로 가기 전에, 잠시 차에서 내렸다. 개성공단에 입주해 있는 ‘우리은행’과 ‘훼미리마트’의 개성공단 지점은 생소하고 익숙하다. 잠시 후, 발걸음을 재촉하는 남 부사장을 따라 다시 차에 올랐다. “아, 우성씨, 아까 그 출력한 거 저 친구가 좀 보겠다고 가져갔어요.” 그러려니 했다. 무식이 죄다. 남 부사장과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는 사이라길래, 개인적인 호기심이겠거니 치부했다. 약 7시간 후, 이 인쇄물이 ‘입경(入京, 남방 한계선을 넘는 것)’ 길의 발목을 잡았다. 좁다란 방 안에서 완고한 북측 관리소 직원과 1:1로 대면하게 될 줄을, 이때는 몰랐다. 생경한 개성공단 풍경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일단 방문이 예정된 업체들을 돌아봐야 했다.개성공단의 남측 사람들과 북측 근로자들 개성공단에는 1백83개의 업체가 입주해 있다. 섬유, 봉제, 전기, 전자 제조업체들이 주다. 방문 전에 남 부사장의 설명을 들었다. “북측 근로자의 기본급은 월 52.5불입니다. 남녀 동일해요. 북측 근로자 대표인 직장장의 경우엔 직급수당을 합쳐 1백2불을 받습니다. 저희는 근로자 지급 총액이 7천불 정도 돼요. 약 7백만원이죠. 낙원건설은 북측 근로자 1백22명을 두고 있는데, 남한이라면 중간 관리자 2명을 쓰는 비용밖에 안 됩니다.” “비정규직은 없느냐”는 질문은 우문이었다. 북측에는 애초에 비정규직이라는 개념이 없다. 비정규직은 자본주의의 개념이다. 개성공단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개성개발지도총국에서 관리한다. 임금도 마찬가지다. 직접 근로자의 손에 쥐어지진 않는다. 총국으로 들어간 임금은 평양에서 관리한다. 근로자는, 인민화와 배급표를 받는다. 두 곳의 업체를 방문했다. 개성공단이 열린 2003년부터 입주해 공장을 경영해온 ‘원년 멤버’ (주)로만손과 ‘만선코퍼레이션’이다. 로만손은 시계와 보석을 만들고, 만선은 닥스, EXR 등의 의류업체에 납품하는 옷을 생산한다. #1 (주)로만손 오문표 개성 법인장 (주)로만손은 2004년 10월 개성공단 시범단지 입주 업체로 승인받았고, 2005년 8월 개성공장을 준공했다. 올해로 3년째다. 오문표 개성 법인장(51)은 공장 가동 초기에는 한 달에 한 번, 요즘은 일주일에 한 번꼴로 개성과 남한을 넘나든다고 한다. “부부가 떨어져 지내다 보니 금슬도 좋아진다”며 웃었다. “전에는 못하던 속 깊은 얘기도 하고 그래요(웃음).” 개성공단에서의 생활에는 대체로 만족한다. 작업 성취도도 높은 편이다. 개성공단에서 공장을 경영하는 데 장단점이 있을 겁니다. “남측에서는 불가능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30일 안에 제품 생산을 마무리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20일 만에도 가능해요. 사고방식에 차이가 있습니다. 직장장을 통해 긴급 오더를 내리면 ‘총화(일종의 회의)’를 통해 조직력을 모읍니다. 서열과 계급이 확실한 체제 안에서, 근로자는 책임감을 갖고 움직입니다. 개인보다 단체가 우선해요. 일사불란하고 확실하게 생산을 완료하죠. 직장장을 통하면 확실합니다. 조직 관리가 간편하죠.” 근로 환경은 어떻습니까? “시설은 남측보다 월등히 낫다고 생각합니다. 공동으로 운영하는 탁아소도 있고, 샤워 시설, 문화 시설도 갖추고 있어요. 음악 활동도, 배구, 배드민턴 등의 체육 활동도 할 수 있죠. 작업 시간은 오전 7시 반부터 오후 5시 반까지 8시간입니다. 회사마다 다르지만, 주 48시간 근로시간을 엄수합니다.” 최근 남북 관계 경색에 따른 개성공단 내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경직되진 않았나요? “개성공단에 상주하는 통일부 직원들이 방출됐죠. 하지만 공단 내 분위기는 예전과 다른 것이 없습니다. 언론에서 보도하는 내용과는 약간 다르죠. 개성공단 내에서 정치색, 이념 등은 배제하고 일합니다. 민간 차원의 교류, 협력이죠. 그래도 그런 일이 벌어지면 회사 주가는 대폭 하락합니다(웃음).” 시계나 보석류가 없어진 적은 없나요. 남측에서도 종종 발생하는 일인데요. “초반에 4~5개 없어진 적이 있습니다. 직장장을 통해 항의했죠. 그랬더니 바로 총화를 합니다. 범인은 못 찾았지만 물건은 찾았어요. 이후 분실 사고는 없습니다. 북측 근로자들은 책임감과 자존심이 강해요.”#2 만선코퍼레이션 이숙자 법인장 이숙자 법인장(43)은 개성공단 유일의 여성 법인장이다. 법인장은 북측 근로자와 가장 가깝게 일하는 남측 사원이다. 상대적으로 여성 근로자가 많은 개성공단의 특성상, 이숙자 법인장은 북측 근로자들과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에 용이하다. 물론 처음부터 쉽진 않았다. 기술을 가르치고, 함께 일하는 과정에서 신뢰가 쌓였다. 만선코퍼레이션 개성공장에서는 북측 근로자 1천50명이 일한다. 개성공단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성공한 케이스로 꼽힌다. “북한 사람들과 마음을 열고 일해요. 일하는 입장에서 마음의 벽은 없어요. 개성공단의 수익이 바로 노동자에게 가지는 않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죠. 이렇게 민간기업이 하나 둘씩 들어와서 확대가 되면 마음의 벽은 금세 허물어지지 않을까요(웃음).”2003년 당시와 지금의 상황이 많이 다르죠? “처음에는 서로 어색했죠. 눈도 안 마주치고 그랬어요(웃음). 지금은 다릅니다. 처음에 일을 가르칠 때는, 북측 근로자들이 모두 처음 접하는 일이다 보니 어렵게 배웠죠. 하지만 배우려는 의지가 강했고, 성실했어요. 다 가르치고 나면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빼먹지 않아요. 기본적인 인성교육이 잘돼 있는 것 같아요. 책임감과 도덕성이랄까요. 개개인이 구사하는 문장들도 일목요연합니다. 악기도 잘 다루고, 춤도 잘 춰요. 체제와 문화는 다르지만, 기본적인 교양은 잘 갖추고 있죠. 자존심이 강하고, 손재주는 섬세합니다. 이론교육 습득이 빠르고 공동체 생활을 잘해 일사불란합니다. 품질은 자부할 수 있어요.” 초반의 어려움은 어떤 거였죠? “경계심이죠. 하지만 남측 기술인이 묵묵히 끌고 가면 선생으로 예우를 해줘요. 초반에는 저를 판단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선생님이냐 아니냐, 기술이 있느냐 없느냐, 존중할 만한 사람인가 아닌가를 그들도 판단하는 거죠. 배울 점이 있고, 존중할 만한 사람이라는 판단이 서면 확실하게 일을 잘합니다.” 출퇴근 풍경도 궁금하네요. “출근 시간 20분 전에는 모두 나와서 준비를 해요. 빨래도 하고, 작업 준비도 하죠. 북측 근로자들의 경쾌한 발걸음과 여자 근로자들이 재잘대는 소리를 들으면 유쾌해집니다. 물론 핸디캡도 있죠. 하지만 사업하는 입장에서 그 정도의 핸디캡은 어디나 있는 거죠.” 공장에서 일하는 분들이 대부분 여성인데, 남자 근로자는 몇 명인가요? “만선의 1천50명 중 남자는 백 명이에요. 북측은 아직 가부장이 강한 사회라, 처음에는 여자 관리자를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북측 남자들은 집 안에서 빗자루질 같은 허드렛일도 안 해요. 조선시대의 남존여비 사상이 남아 있죠. 우리 사장님은 북측 여자 근로자들이 무거운 걸 들면 도와주곤 했는데, 남자 근로자들은 사장님을 보고 웃으면서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남측 남자들은 희한하구만, 선생 그거 달려 있습네까?’ 그러면서요(웃음).”#3 낙원건설 남상준 부사장 낙원건설은 지난 1996년 4월부터 대북사업을 진행해왔다. 2007년 7월부터 지금까지는 개성공업단지 내 1단계 아파트형 공장을 건설 중이다. 개성공단이 열린 지 벌써 5년 정도가 됐습니다. 요즘 개성공단에서의 사업 현황은 어떻습니까? “처음보다 한결 부드러워졌습니다. 내부적으로는 완화가 되고 있는데, 아직 우리가 아는 상식의 벽은 굉장히 두껍죠. 미디어가 보도하는 내용과도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자유로운 왕래가 어려우니까요. 하지만 기업하는 분들이나 북측 근로자나, 벽은 많이 허물어져 있습니다. 이건 물질적인 것만으로 되는 게 아니죠. 내부에서 신뢰가 쌓여가는 것입니다. 고무적인 현상이죠. 개성공단에 들어가면 순박해지는 것 같아요. 때 묻지 않은 사람들과 같이 일해서 그런지(웃음). 이건 개성공단에서 일하는 남측 사람들의 공통적인 느낌일 겁니다.” 체제가 달라 어려운 점은 없으세요? “사상과 이념이 개입하면 굉장히 힘들어집니다. 같이 일을 할 수가 없죠. 개성공단에서는 그걸 다 제쳐두고 합니다. 민초들이 사상과 이념으로 싸워서 뭘 얻겠어요(웃음). 오로지 열심히 해서 좋은 물건 만들어 이득을 남긴다면 북한 주민들도 혜택을 보니까, 열심히 하는 거죠. 6개월에서 1년 정도는 신뢰를 쌓는 기간입니다. 그 기간을 거치면 아주 유리한 입장에서 기업을 경영할 수 있습니다.” 개성공단의 상황은 이전보다 많이 완화된 편이죠? “북측에 들어가서 사업하기가 편해졌죠. 절차도 간소화됐고, 법제조항이랄지, 입출입, 통신 등이 좋아졌습니다. 처음에는 입출입을 하루에 한 번씩 했어요. 지금은 하루에 10회 정도 움직입니다. 통신도 그래요. 처음에는 유선통신도 불가능했죠. 지금은 유선통화가 가능합니다. 전혀 불편하지 않아요. 오히려 휴대전화에서 해방될 수 있으니까 편안하죠(웃음). 입출입 서류 절차도 전에는 7일 정도 걸리던 게 이제는 3일이면 됩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개성공단의 의미는 어떻습니까? “대북사업을 하는 남측 기업이 돈을 잘 벌어야겠죠(웃음). 그럼 북측 근로자들에게 돌아가는 보수나 복지가 더 좋아질 것으로 봅니다. 멀리 보면 북한 주민들의 생활상이 나아지는 것을 기대할 수도 있겠죠. 남북의 격차를 조금씩 줄여갈 수 있는 초석이라고 봐요.”만선코퍼레이션과 (주)로만손 공장에서 일하는 북측 근로자들과 인터뷰는 불가능했다. 카메라 렌즈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작업에만 열중했다. 카메라를 들고 가까이 가면 스르륵 등을 돌렸다. 남 부사장은 “북측 사람들은 카메라에 찍히는 걸 매우 싫어한다”고 했다. (주)로만손 개성공장에 들렀을 때는 점심시간이었다. 북측 근로자들은 마당에서 배구를 했다. 여자 근로자도 각 팀에 한 명씩 끼어 있었다. 건물 안에 있는 사람들은 창밖으로 배구를 구경했다. 낯설기만 했던 오전의 풍경은, 오후가 되자 익숙해졌다. 개성을 ‘경제 통일의 초석’이라고 했던 미디어의 보도가 피부로 느껴졌다. 깨진 판타지와 여전한 벽 오후 4시, ‘입경’을 서둘렀다. 북측 CIQ에 도착해 들어올 때와 같은 수속을 밟았다. 북측 직원이 수첩에 적힌 내용을 훑어볼 때는 괜스레 긴장됐다. 수속대에 서서 증명서를 내밀었더니 내 이름을 부른다. “정우성 선생” “네?” 뒤쪽에서 관리원 두 명이 다가온다. “선생, 잠시 이쪽으로 오시라요.” 무슨 일일까. 왜 부를까. 어디로 데려가려는 걸까. “선생, 소지품 중에 아침에 차에 두고 내린 게 있지요?” “네? 네, 있죠.” 수속대 왼편, 좁은 복도 초입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가운데 놓인 책상과 양쪽에 놓인 의자 두 개. 옆에는 2인용 소파가 있다. 좁은 방, 경직된 분위기. 오전에 ‘잠시 보겠다’며 가져갔던 출력물 뭉치가 북측 관리원의 손에 들려 있다. 군데군데 밑줄도 그어져 있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선생, 여기 좀 앉아보시라요” 머릿속이 복잡하다. ‘`남영동 대공분실’이 떠올랐다면 과장일까. “여기 보십시요. 정 선생은 이런 거 가지고 오면 안 된다는 거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출력한 기사 중에는 보수적인 논조의 사설도 있었다. 개중에는 탈북자 인권 문제에 대한 글도 있었다. ‘남한이 한낮이라면 북한은 한밤중이었다. 남한이 청동기라면 북한은 구석기였다`’라는 개성공단 방문기도 있었다. 모두 밑줄이 그어져 있다. “체제를 비난하는 이런 내용이 적힌 인쇄물을 가지고 들어오면 안 된다는 거 몰랐습네까? 여기 보십시오. 북한을 비난하는 내용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만 있다고 할 수도 없고, 빤히 있는데 없다고 하기도 곤란한 상황이다. 말문이 막힌 것은 다시금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분위기는 급속도로 냉각됐다. “아, 있네요. 그럼 어쩌죠?” 몰랐던 척 인정했다. 애써 웃어 보였다. 머릿속으로는 이미 몇 개의 비극적인 시나리오를 혼자 완성했다. ‘억류될 수도 있다’ 불안이 영혼을 잠식했다. 의지할 사람은 남 부사장뿐이다. 개성공단 안에서 느꼈던 평화로운 분위기는 이미 어그러졌다. 이 방에서 느껴지는 건 여전히 두터운 이념과 체제의 벽, 그리고 긴장이다. “개성공단 내에서 체제나 이념은 제쳐두고 일한다”는 남 부사장의 말이 이제야 피부로 다가온다. 이때 남 부사장이 방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남 사장이랑 같이 들어온 선생 맞지요? 선생도 책임이 커요. 앞으로 잘해야겠어. 벌금 백 불 내고 가시라요. 없으면 정 선생 오늘 못 나갑니다.” 북측 관리원의 표정을 읽을 수 없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다. 농담을 할 상황은 아니다. 개성공단에서 통용되는 화폐는 달러다. 내 지갑에는 달러가 없다. 만원짜리 몇 장뿐이다. 대략 이런 공식이 성립됐다. “금지된 문서를 가지고 왔다→들켰다→벌금을 내야 한다→돈이 없다→못 나간다.” 마음속의 시계는, 순식간에 20년 전으로 돌아갔다. 마당에 떨어진 ‘삐라(대남선전물)’를 경찰서에 갖다 주면 연필 몇 자루를 주던 시대, 남북의 대립각이 더 첨예했던 시대, ‘간첩’이라는 말에 겁부터 나던 시대. 오래 되지도 않은 과거가 다시 현실이 됐다. 벌금을 내고, 벌금 납부 통지서에 서명했다. “개성공업지구 세관규정 제41조에 의하여 위와 같이 벌금을 납부할 것을 통지함”이라고 써 있다. ‘벌금 물리는 이유’란에는 ‘불순 인쇄물 단속’이라고 적혀 있다. 개성공단은 그런 곳이었다. 남측의 기업자본과 북측의 노동력이 만나는 땅, 철저한 협약과 규칙을 준수하며 신뢰를 바탕으로 민간 차원의 교류가 이뤄지는 땅. 공단 내에서 이념과 체제의 ‘차이’를 느낄 수 없었던 건 개성공단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여전히 벽은 두터웠다. 섣불리 가졌던 개성공단에 대한 판타지가 다시 깨졌다. “제가 말씀드렸죠? 아직 벽은 두텁습니다. 철저해요. 좋은 경험했다고 생각하세요(웃음).” 글쎄, ‘좋은 경험’이라고 하기엔 긴장의 정도가 심했다. 다시 남 부사장의 차에 오르고, 비무장 지대를 건너고, 남측 CIQ에서 보관함에 넣었던 휴대전화를 꺼냈다. 전원을 켜자 밀린 문자가 들어온다. ‘개성도 가고 좋겠다, 비행기 타고 가니?’ 친구의 살가운 문자는 오히려 순박했다. 개성은 몰라서 ‘판타지’였다가 너무 가까워서 놀랐다. 비행기는커녕 육로로 한 시간이면 도착하는 땅이었다. 개성공단 풍경은 남북이 무척이나 가까워진 것 같아서 오히려 비현실적이었다. 언뜻 자유로워 보이기도 했던 개성공단 풍경에 긴장이 풀렸다가 다시 느낀 이념의 벽은 60, 70년대로 돌아간 것 같아서 다시 비현실적이됐다. 개성에 머물렀던 7시간 남짓, 관념은 몇 번이나 깨졌다. 오늘의 일정에 ‘판타지’는 없었다. 자유로에 들어서자 긴장이 풀리고 잠이 몰려 왔다. 눈을 떴을 때는 다시 일산이었다. ■ 글&사진 / 정우성 기자
2008.06.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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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 공식수행원으로 북한에 다녀온 김화중 전 장관전 보건복지부 장관, 현 여성단체협의회장 김화중이 한반도의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갈 남북정상회담에 공식 수행원 자격으로 동행했다. 그 긴박하고 가슴 벅찼던 3일간의 여정을 생생하게 전한다.처음 남북정상회담 공식 수행원 명단에 올랐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가 생각난다. 내 이름이 명단에 올랐다는 사실을 알고는 무척 놀랐다. 역사적인 책임감으로 어깨가 무거웠고, 나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바꿨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내게는 여성단체 대표로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그동안 서울대학교 교수로, 또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지내면서 북한에 대한 연구와 관심은 필수적이었기에 북한의 의료는 물론 정치, 경제 상황까지 익숙했다. 그러나 국가적으로 중요한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좀 더 면밀한 준비가 필요했다. 우선 북한에 관한 정치, 경제 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통일부에서 보내준 책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또 여성단체 사람들을 만나며 의견을 모았다. 여성 대표로 북한을 방문하는 것이기에 그들의 요구를 충분히 알고 있어야했다.6개월 전과 달라진 평양 시내 나는 그동안 북한을 여러 차례 다녀왔다. 여성단체협의회 회장,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상임의장, 통일부 통일고문으로 북한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지난 4월에는 민화협의 양묘사업(묘목을 키우는 일)을 추진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했다. 평양은 아직도 나무를 떼고 있어 산에 나무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실정이다. 매해 홍수가 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당시 평양 여성이나 남성들은 매일 똑같은 의상을 입고 다녔다. 나는 이를 이상하게 여기고 북측 관계자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건 우문이었다. 나도 1960~1970년대에는 교복을 맞춰서 그것만 입곤 했었는데, 그동안 어려웠던 시절을 잠깐 잊은 것이다. 현재 북한의 상황이 학창 시절과 비슷한 걸로 보아 남한의 70년대 초반 수준으로 가늠되었다. 북한은 전력 사정이 좋지 않다. 이 때문에 평양 시내에는 가로등이 없어 밤이 되면 깜깜해진다. 건물들은 칠이 안 된 상태로 초라했다. 평양국제공항은 텅 비어 있다. 비행기라곤 우리가 타고 온 비행기 단 한 대뿐이었다. 그런데도 북한 사람들의 얼굴은 참 밝았다. 가난하다고 불행한 것은 아니다. 북한은 빈부 격차가 크지 않으니 어떤 것이 잘사는 건지 잘 모른다. 70년대의 나도 가난했지만 행복했다. 그런데 불과 몇 달 만에 평양 시내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건물에는 모두 페인트칠이 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가장 예쁜 옷을 입고 거리로 나왔다. 놀랍게도 평양 시내 가로수에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조명 장식을 달아놓아 어두웠던 밤거리가 환해졌다. 거리에는 남측 방문단을 환영하는 많은 인파가 몰렸다. 그들은 우리를 보기 위해 앞을 다퉈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모두 동원되어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서 우리를 진심으로 환영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머무른 3일 동안 어디서든 우리만 보면 손을 흔들며 반가워했다. 그들을 보며 ‘우리는 하나’라는 생각이 피부에 와 닿았다.앵무새처럼 김일성, 김정일을 이야기하는 북한 주민들 남한 방문단의 안내원들은 모두 사회나 정치학을 전공한 대학 교수들이었다. 그들은 중요한 외국 회의에도 참여하는 사람들로 소위 고위층에 속했다. 차로 이동하면서 그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들은 세계에서 사회주의를 가장 성공시킨 나라가 북한이라며 체제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러면서 이 모든 것이 김일성 수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덕분이라고 찬양했다. 그는 남한이 잘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전혀 부럽지 않다고 했다. 빈부의 격차보다는 차라리 모두 가난한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의 능력이나 자질에 따라 교육을 받아야지 돈이 있다고 공부하고 없다고 공부를 못 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라고 묻기도 했다. 나는 거기에 대해 “남한에서도 공부를 잘하는 학생에게는 장학금이 주어지고 기초생활보장도 된다”고 대답해주었다. 이번에는 내 차례였다. “북한에서는 하라는 만큼만 일을 한다. 우리는 일을 하는 만큼 돈을 버니까 생산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는 내 말에 어느 정도 수긍하는 듯했다. 분야별 회의에서 남북의 여성 지도자들이 모였을 때였다. 우리는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영유아 사업과 여성 보호를 의제로 준비했다. 그러나 그들은 “김일성 수령님, 김정일 장군님이 이렇게 잘해주셔서…”와 같은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회담이 전혀 진행되지 않았다. 참다못한 나는 “알았다. 이제 그만하라. 공동선언문에 반대할 사람 아무도 없다. 구체적인 방안을 이야기하자”고 잘라 말했다. 내 이야기에 그들은 “좋다”면서도 통일 이야기와 준비해온 체제 찬양만 계속했다. 우리는 결국 서로 벽만 보고 이야기한 셈이다. 회담이 끝나고 “구체적인 문제는 논의되지 않았다. 그러려고 모인 것이 아니냐”고 했더니, 북측 사람들도 웃었다. 나는 “우리 자주 만나기로 하자. 그렇게 되면 발전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라며 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북한 사람들은 아이에서부터 할머니, 지식인 할 것 없이 모두 입만 열면 김일성, 김정일을 찬양했다. 그것도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절절하게 이야기한다. 김일성 대학에 방문할 일이 있었다. 그곳에는 김일성, 김정일이 언제 다녀와서 어떤 이야기를 남겼는지 모두 기록해놓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김일성, 김정일의 한마디 한마디가 대단한 듯했고, 어쩌다 눈빛이라도 마주치는 건 굉장한 일이었다. 나는 안내원에게 “참 재미있다. 북한에서는 입만 열면 김일성과 김정일을 찬양하는데 우리는 입만 열면 노무현 대통령 비판이다”라고 말했다. 북한 사람들에게 체제 비판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들이 눈물을 흘리며 김일성, 김정일 찬양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들 자신이 그렇게 좋고 행복하다는데 굳이 비판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상대방 체제의 다른 점을 이해하고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매순간 손에 땀을 쥐게 했던 정상회담 이번 정상회담은 초반부터 5년 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서로 얼싸안았던 그때와는 달리 노무현 대통령과 굳은 얼굴로 악수만 한 것이 이번 환영식의 전부였다. 대통령뿐 아니라 방문단들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회담을 위해 가져온 의제들이 많아 부담감이 컸으니 더욱더 긴장됐을 것이다.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의 만찬에서도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없었다. 우리는 이번 회담이 잘되지 못한 채 돌아가면 얼마나 야단이 나려나 하는 걱정뿐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둘째 날인 10월 3일 점심 때까지 이어졌다. 하루를 더 머물러야 할지도 모른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날 협의가 잘 안 된다면 저녁 때 ‘아리랑’ 공연도 보지 못할 거라고 했다. 함께 간 재벌 총수들도 모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오전 회담을 마치고 난 노무현 대통령은 굉장히 힘든 얼굴로 “개방, 개혁이 어디서나 좋은 말인 줄 알았는데, 여기서는 그렇지 않았다. 신중하게 써야겠다”고 했다. 우리는 뭔가 잘못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오후 7시가 조금 안 됐을 때였다. 모두 잘 해결이 됐다는 연락이 왔다. 우리가 제안하는 것을 그쪽에서 다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놀라운 결과였다. 그때까지 가장 힘든 문제는 상호체제를 인정하지 않는 데에 있었다. 북측이 원하는 건 적화통일이고, 우리가 원하는 건 자본주의통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상호체제를 인정하기로 하니, 그 뒤의 모든 문제들은 일사천리로 해결이 됐다고 한다. 모든 것이 성공적으로 합의되고 나자 김정일의 표정도 밝아졌다. 마지막 환송식장에서는 그동안 보기 힘들었던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우리는 테이블마다 그에게 술을 권했다. 그가 답례로 테이블을 돌면서 웃으며 농담을 하기도 했다. 첫날과는 매우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남북이 상호 협동해야 하는 이유 정부의 대북사업에 대해 많은 이들이 ‘퍼주기식’이라고 쉽게 비판하곤 한다. 그러나 직접 북한을 방문하고 오랫동안 북한에 대해 연구한 나의 생각은 다르다. 우선 개성공단만 해도 그렇다. 개성공단은 남한과 아주 가까운 군사 요충지다. 그런데 북한은 그곳을 우리에게 내주었다. 그들이 전쟁을 하려고 했다면 내주지 않았을 것이다. 개성에 방문해보니 개성공단만 내준 것이 아니라 개성시 전체를 내준 것이었다. 개성시를 우리가 4단계로 개발하기로 되어 있었다. 만일 북한이 우리에게 강릉시를 내달라고 했다면 주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신의주까지 철도를 놓자고 제안한 것은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다. 중국이나 러시아 등으로 편리하게 나아가려면 북한을 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북한은 철도를 운행할 물량 자체가 거의 없는 편이다. 물론 미래에는 분명 북한에게도 큰 도움이 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북한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북한에서 잘 받는다는 봉급이 7만원 정도고, 보통이 5만원 정도다. 북한의 예산은 남한의 국방비보다도 적다. 값싼 노동력 때문에 요즘 북한 시장에 많은 선진국들이 관심을 두고 있다고 한다. 남과 북은 말이 통하고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상호협력만 한다면 많은 부분에서 유리할 것이다. 이번에 협의된 사안 중에 조선회사 건립이 있다. 한국의 조선 기술은 세계적이다. 세계 각지에서 배를 만들어달라는 주문이 쇄도하고 있다. 그런데 배를 만들 수 있는 공간이 충분하지 않아서 그 주문을 다 못 받고 있다. 대우조선 사장이 전 세계를 다니면서 배를 만들 수 있는 곳을 찾았지만, 어떤 곳보다 북한이 적지라고 판단했다. 남북이 함께 조선사업을 하게 된다면 우리는 저렴한 노동력으로 생산성을 높일 수 있게 되고, 북한에게는 고용창출과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남북정상회담 합의문1 다음달 남북총리회담 개최 2 다음달 남북 국방장관회담 개최 3 남북정상회담 정례화 원칙적 합의 4 서해에 공동어로수역 추진 5 통일지향적으로 남북의 제도, 법률 정비 6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 7 이산가족 상봉을 확대하며 영상편지교환사업 추진 8 백두산 관광을 실시하기로 하고 이를 위해 백두산-서울 직항로를 개설하기로 합의 9 북경올림픽 남북단일팀 원칙적 합의 10 한국전쟁 종전을 위한 3자 혹은 4자회담 추진■정리 / 두경아 ■사진 / 이주석·경향신문포토뱅크
2007.11.14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