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긴호 9호세대 비화](36)'사석'이 대마를 잡다
긴급조치 9호 시대의 '영원한 도망자' 권형택(현 우리자원 대표,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사무총장)은 원래 11-11거사는 물론 어떤 데모에도 참여하지 않기로 돼 있었다. 양춘승(현 지환테크 대표, 관악민주포럼 회장)이 3월 거사에 나서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남아서 농법회 후배들을 건사하라"고 부탁했고, 그렇게 하기로 언약한 터였다.
그는 성격이 느긋하고 배짱이 두둑했다. 별명이 '곰'이었다. 그래서 농법회 내에서도 대외 업무는 활동성 강한 양춘승이 담당하고 내부 살림은 차분한 성격의 그가 책임지기로 역할을 분담한 것이다. 이에 따라 그는 개인적 진로도 대학원에 들어가기로 정해놓고 있었다.
"농법회와 후배들을 부탁해"
하지만 26동 사건이 터지자 양춘승과 한 약속을 잊어버렸다. 아니 알면서도 지킬 수 없었다. 당시 농법회를 비롯한 서클은 가족적 유대감으로 뭉쳐 있었다. 피가 물보다 진한 것은 당연지사. 가족이 사고를 당하면 법도 명분도 필요 없다. 26동 사건으로 농법회 후배 최상일(현 문화방송 라디오본부 CP)이 구속되자 좀처럼 흥분하지 않던 그도 그만 '꼭지가 돌고' 말았다.
김경택(현 온샘미디어 대표)이 거사를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그는 쉽게 결단을 내렸다. 최상일같이 성격이 곱고 여린 후배마저 감옥에 갔는데 그냥 졸업하는 것은 죄악이라 생각했다. 한사의 장기영(현 일용직 노동)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권형택은 서클 동기인 양기운(현 남원자활후견기관 관장)에게 은밀히 뒷일을 부탁했다.
양기운은 사대 체육학과 소속으로 3학년 때에야 농법회에 가입한 늦깎이 운동권이었다. 전북 남원 출신에 전라고를 졸업한 그는 고물상을 하던 아버지의 병환으로 가정환경이 극도로 어려운 중에 서울대에 입학했다. 그래서 철저한 아웃사이더였다.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는 친구뿐 아니라 선각자연하는 운동권에 대해서도 대단히 냉소적이었다. 이런 그의 엇나간 태도를 다잡아 준 선배-동료가 농법회 민인기(현 해남자활후견기관 관장, 희망해남21 운영위원)-이범영(전 민청련 의장, 작고)-양춘승 등이었다.
3학년 여름에 농법회 농활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뒤늦게 운동권에 뛰어든 그는 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당시 운동권에는 '비밀주의'가 극에 이르렀다. 서로의 일에 대해 아는 체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특히 상대방의 모임이나 일에 대해 묻는 것은 금기로 여겼다. 뒤늦게 운동권이 된 양기운은 답답한 마음에 이것저것 물어보는 일이 잦았다.
그의 이런 행동은 운동권의 생리에 맞지 않았다. "저 친구 이상하다, 조심하라"는 얘기가 나왔다. 학내 사찰라인에서 프락치를 키운다는 소문을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이고 있던 운동권에서는 당연히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체육 전공자가 운동권이 된 예가 좀처럼 없던 터다. 소문은 유령처럼 돌아다녔다. 물론 그의 정체에 대해 대놓고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해명할 대상도, 방법도 없었다.
이런 차에 권형택을 통해 간접적으로 거사 계획을 접한 그는 펄쩍 뛰었다. 그 역시 최상일이 구속된 뒤 눈에 보이는 게 없을 정도로 이성을 잃고 있었다. 그는 이미 데모를 아름답게(?) 한 번 하고 감옥 갔다 나와서 농사지으러 고향에 내려가는 것으로 진로를 잡고 있었다. 그러니 고민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그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나는 야전 스타일이고 형택이는 학자 스타일이었다. 형택이가 데모를 하겠다니 어이가 없었다. '무슨 얘기냐, 너는 공부하고 후배 지도나 해라, 데모는 내가 하겠다'고 했다. 형택이도 양보하지 않았다. 서로 옥신각신하다가 합의가 되지 않아서 결국 둘 다 하게 됐다."
정교한 작전 시나리오
쉽게 결단을 내리기는 문성훈(현 템피스투자자문 리서치센터 소장)도 마찬가지였다. 진주의 교육자 집안 출신으로 서울고를 나온 그는 이경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 이경회는 1950~60년대 서울상대 운동권의 간판 서클이던 경우회의 후신이다. 경우회가 1968년 통혁당 사건을 겪고 나서 바꾼 이름이 이론경제학회였고, 문성훈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공식적으로 정치경제학회로 불렸다.
전통이 깊다 보니 족보도 화려하다. 박재윤(현 아주대 총장, 전 통상산업부 장관)-신영복(현 성공회대 교수)-김근태(현 보건복지부 장관)-김태동(현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전 청와대 경제수석)-장명국(현 내일신문 발행인) 등이 1960년대 경우회의 면면이다. 1970년 초반 멤버는 정금채(현 안양군포환경운동연합 상임의장, 71학번)-김형기(현 경북대 교수, 72학번)-최영기(현 한국노동연구원장, 73학번) 등이 대표적이다. 문성훈의 74학번 동기로는 김삼수(현 서울산업대 교수)-조창환(현 서울 백석중 교사)-박경(현 목원대 교수)-이헌창(현 고려대 교수) 등이 있었다. 당시 이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구심점이 됐던 이가 68학번 박덕제(현 한국방송통신대 교수)였다.
그가 쉽게 감옥행을 결심한 이유가 이처럼 유서 깊은 서클의 리더라는 자존심만은 아니었다. 집안 내력도 간단치 않았다. 서울상대 71학번으로 뒷날 노동운동에 투신해 민주노총 산하 최대 산별연맹인 전국금속산업노동조합연맹 위원장을 지내는 문성현(현 민주노동당 경남도당 대표)이 그의 형이다. 그는 졸업하고 번듯한 직장에 취직해 있다가 갑자기 그만두고는 노동현장으로 달려갔다. 문성훈에게 "대학 들어가면 서클활동을 해보라"며 이경회에 입회하게 한 사람이 그였다. 문성훈의 말을 들어보자.
"나도 학교를 졸업하면 노동현장으로 갈 생각이었다. 서클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을 한 것이다. 당시 현장 얘기가 한창 많이 나올 때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철저한 검증 없이 수용한 측면이 있었던 것 같다. 데모하고 감옥 가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눈앞에 일은 있고 사람은 없으니까 내가... 해야 되는 것이었다."
6인조 거사팀이 구성되자 김경택은 정교하게 작전을 짰다(작전도 참조). 도서관을 거점으로 진지전을 펴려면 열람실에 있는 학생만으로는 부족하다. 밖에서 학생들을 끌고 들어가야 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권형택의 말.
"밖에서 시위하는 것은 성공하기 어려웠다. 춘승이도 5분을 못 버텼다. 그래서 경택이가 제안한 것이 진지전이었다. 학생식당에서 2명이 초동을 떠서 기관원을 끌어모으고, 다른 2명은 5동 앞에서 시위를 하다가 점심 먹으러 내려오는 교련반 학생들을 끌고 도서관으로 진입한다. 나머지 2명은 도서관에 있다가 학생들이 들어오면 문을 잠그고 농성체제로 들어간다. 이런 식으로 정교하게 작전을 짜서 시간대별로 시나리오를 만들고 현장답사까지 했다."
기관원을 유인하는 학생식당 시위는 양기운과 문성훈이 맡았다. 5동 앞에는 권형택과 장기영이 배치됐고, 김경택과 연성만(현 그린콜닷컴 이사)은 도서관에 미리 들어가 사전 정지작업을 하기로 했다. D데이는 11월 11일, H아워는 학생식당이 가장 붐비는 낮 12시 55분.
6인 주동자는 '필승 시나리오'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서클별로 요소요소에 후배들을 동원했다.
후배를 시위에 동원하려면 기술적인 노하우가 필요하다. "12시에 5동 앞에서 데모가 있으니 친구들을 끌고 오라"는 식의 전파는 자살행위다. 정보 유출뿐 아니라 그 후배가 연행됐을 때 구속 가능성 또한 높기 때문이다. 경찰 수사가 입체적으로, 그리고 고강도로 전개되면 두 사람 사이에 오간 대화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믿을 만한 후배에게조차 "12시에 5동 앞에서 기다려라, 책 줄게"라는 식으로 말한다. 나중에 후배가 조사를 받더라도 "나는 데모하는 줄 몰랐고 선배가 책 준다고 해서 갔다"고 오리발을 내밀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또 하나 잊어서는 안 되는 점이 주력 보호다. '싹수'가 보이는 후배들은 운동을 이어갈 수 있게 남겨놓아야 하는 것이다. 보통 거사팀은 여기서 딜레마에 빠진다. 장래를 위해서는 이들을 보호해야 하지만 눈앞의 거사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이들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을 동원은 하되 안전한 곳에 배치하거나 이중삼중의 안전장치를 마련해둔다.
권형택과 양기운은 농법회 주력군을 주로 학생식당에 배치했다. 11-11거사의 최종 목표는 도서관을 점거해서 농성을 벌이는 것이다. 농성부대는 열람실에서 공부하는 학생과 5동 앞 시위에 합류하는 교련반으로 구성될 것이다. 작전이 성공하면 이들은 전원 경찰에 연행되고 26동 사건 때 조사를 받았거나 요시찰 대상인 학생은 온전하지 못할 게 확실했다. 즉 5동 앞 시위조가 가장 위험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주력을 '사석'에 해당하는 학생식당으로 빼돌린(?) 것이다.
6인 주동자를 배치하는 데도 이런 점이 감안됐다. 학생식당 시위조의 임무는 학내 상주하는 기관원과 경찰, 교직원을 유인하는 것으로 끝난다. 적당히 시간만 끌면 되는 것이다. 선동력이나 시위 경험이 상대적으로 약한 양기운-문성훈을 식당에 배치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식당 앞으로 모여드는 군중
하지만 아무리 치밀하게 작전을 짜고 도상연습까지 했다고 하더라도 실제 상황은 시나리오대로 되지 않는다. 양기운-문성훈이 주동한 학생식당 시위가 생각 밖으로 커져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D데이인 11월 11일 오전. 권형택은 유인물을 가방에 가득 넣고 5동 앞에 대기하고 있다가 학생과 주임과 마주쳤다. 그는 허둥거리며 "경택이 못 봤느냐"고 물었다. '아차, 정보가 샜구나!'하는 생각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글쎄요... 못 봤는데요."
이날 오전 관악캠퍼스에서 김경택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관원과 교직원의 눈에 띄지 않게 신중하게 처신했기 때문이다. 데모가 벌어질 것이라는 낌새를 챈 학교 당국과 기관에서 그의 소재를 찾느라 부산을 떠는 사이에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12시 55분 학생회관 식당. 점심을 먹고 있던 학생들은 삐~하는 메가폰의 잡음과 흩날리는 유인물에 혼비백산했다. 이어서 메가폰을 통해 변조된 날카로운 쇳소리가 실내를 진동했다.
"어려운 시대에 사는 학우여 모입시다. 짓밟힌 학원의 자유와 부당하게 구속된 동료 학생들의 권리를 찾읍시다. 권력과 돈으로 학생과 교수의 입을 막으려는 억울한 현실을 타개합시다..."
메가폰을 잡은 사람은 양기운이었다. 그가 선동 연설을 하는 사이에 문성훈은 준비한 유인물 200여장을 뿌렸다. 전광석화처럼 분위기를 휘어잡은 두 사람은 곧바로 '정의가'를 선창했다. "정의와 용기는 젊음의 생명, 승리의 깃발은 높이 솟았다..." 학생들이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 즈음 김경택은 연성만과 함께 도서관 4층 열람실에서 아크로폴리스 광장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뒤늦게 상황을 알아차린 사복형사들이 식당 쪽으로 황급히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마침내 작전이 개시됐다. 머릿속에서 수없이 반복했던 시뮬레이션. 이제 운명을 건 실전 상황에 돌입한 것이다.
4층 열람실에서는 학생식당과 5동 쪽이 한꺼번에 조망된다. 그는 연신 시계를 보면서 기관원과 교직원, 학생의 동선을 세밀하게 관찰했다. 5동에서 학생식당 방향으로 넓은 아크로폴리스 광장을 가로지르는 군중을 지켜보던 그의 눈에서 갑자기 당혹스런 기운이 스쳤다. 다시 한번 시계를 훔쳐본 그의 시선이 5동 쪽으로 향했다.
그를 당혹스럽게 만든 점은 군중이 식당 쪽으로 너무 몰려드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5동 앞에 학생이 모이지 않게 된다. 우려는 곧 현실로 나타났다. 두 번째 작전 개시 시간이 됐는데도 5동 앞은 썰렁했다. 권형택과 장기영이 유인물을 뿌리며 학생들을 모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허사였다. 사람이 모이지 않았다.
작전 차질의 원인은 식당 시위가 생각보다 커져버린 데 있었다. 식당조가 경찰로부터 제지를 당한 때는 '정의가'를 다 부르고 양기운이 민주구국투쟁선언문을 읽던 중이었다. 그 사이에 학생들이 식당 안과 건물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를 안 교련반 학생들도 평소처럼 5동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식당 쪽으로 뛰어내려갔다.
"형택아, 그냥 들어와!"
김경택은 창문을 열고 소리쳤다. 그는 5동 앞 시위조를 철수시킬 요량이었다. 상황 전개에 따른 작전 일부 수정은 사전에 머릿속에 수없이 반복해서 그려본 바였다. 그런데 권형택에게 그의 외침은 들리지 않았다. 옆에 있던 연성만이 말했다.
"안 되겠는데요."
옳은 판단이었다. 그는 연성만에게 식당으로 내려가라고 '오더'를 내렸다. 식당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 알 수 없어 통제가 필요했다. 그런데 아뿔싸! 다시 5동 쪽을 돌아보니 텅 비어 있는 게 아닌가. 권형택도 장기영도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이 무렵 학생식당은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양기운이 선언문을 읽는 중에 형사가 덮치고 옆에 있던 학생들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달려들어 몸싸움이 벌어졌다. 그러나 불가항력이었다. 덩치가 큰 양기운도 사복형사들에게 완전히 둘러싸여 들려나갔다. 문성훈이 군중을 통제하려고 했으나 그 역시 기관원의 표적이 되어 체포되고 말았다.
5동 앞에 있던 권형택은 교직원들에게 잡혀 경비실에 억류돼 있었다. 장기영은 몸을 피해 도서관으로 올라갔다. 그는 김경택을 만나 상황을 전해듣고 다시 식당으로 뛰어내려갔다. 김경택도 아래층으로 내려가 학생들의 진입에 대비했다.
장기영이 아크로폴리스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연성만이 군중을 도서관으로 인솔하고 있었다. 기관원과 경찰은 대부분 식당 안에 모여 있었다. 양기운-문성훈의 체포를 저지하는 학생들과 육탄전을 벌이고 시위 적극 가담자를 색출해 검거하는 데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연성만을 만난 장기영은 식당을 빠져나온 학생들을 이끌고 도서관에 진입했다. 그곳에는 김경택과 도서관장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이거, 뭐하는 짓이야."
도서관장이 결사적으로 학생들의 진입을 막고 있었다. 김경택은 난감했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사람이 경찰이 아니라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스승을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완력으로 넘어뜨리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김경택은 도서관장을 밀치고 진입로를 열었다. 그러자 봇물 터진 듯 학생들이 4층 열람실로 밀려들었다. 그는 장기영과 연성만이 열람실에 들어온 것을 확인한 뒤 철문을 잠가버렸다. 어림잡아 400여명. 이 정도면 충분했다. 양기운과 문성훈이 식당 시위를 너무 멋지게 주동한 바람에 작전에 차질을 빚긴 했지만 결과는 성공이었다.
도서관이라는 목표를 탈환해 진지를 구축하기까지 절반의 희생이 있었지만 살아남은 세 사람은 승전의 희열을 나누었다. 열람실의 의자를 쌓아 철문 앞에 바리케이드를 친 뒤 창문으로 내다보니 아크로폴리스 광장에는 대군중이 형성돼 있었다. 학생이 경찰을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었다.
바로 그때 아크로폴리스 광장에 있던 군중의 시선이 일제히 도서관 4층 창문을 향했다. 빨간 점퍼를 입은 학생이 몸을 내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손에는 유인물과 메가폰이 들려 있었다. "놀부다!"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탄성을 질렀다. 그의 말대로 국사학과 3학년 연성만이었다.
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2004.09.23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