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
서경식 교수 별세···전세계 ‘작은 사람들’ 편에 최후까지 서려 했던 디아스포라...> <다시, 일본을 생각한다> 등의 사회비평, 인문 교양 관련 서적도 냈다. 재일조선인 등 디아스포라 문제를 환기하는 작품들이다. 문학평론가 권성우 숙명여대 한국어문학부 교수는 <서경식 다시...
#서경식별세 #디아스포라 #나의미술순례시리즈
김종목 기자 2023.12.19 13:55
문화
서경식 교수 별세···전세계 ‘작은 사람들’ 편에 최후까지 서려 했던 디아스포라...> <다시, 일본을 생각한다> 등의 사회비평, 인문 교양 관련 서적도 냈다. 재일조선인 등 디아스포라 문제를 환기하는 작품들이다. 문학평론가 권성우 숙명여대 한국어문학부 교수는 <서경식 다시...
#서경식별세 #디아스포라 #나의미술순례시리즈
김종목 기자 2023.12.19 13:55
문화
[책과 삶] '디아스포라' 환대는 인류의 의무다지난해 노벨문학상 수상자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소설 세 권이 국내에 처음 번역돼 출간됐다. ⓒMatilda Rahm 바닷가에서 압둘라자크 구르나 지음·황유원 옮김|문학동네|424쪽|1만6000원 낙원 압둘라자크...
#노벨문학상 문학
이영경 기자 2022.05.20 14:47
오피니언
[기고]쿠바 한인 디아스포라의 이민 100년... 3월25일, 자신들이 도착했던 프로그레소 항구에서 쿠바행 배에 올랐다. 그 여정이 100년의 디아스포라가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서정인 | 주멕시코대사 필자는 이달 중순...
서정인 | 주멕시코대사 2021.03.29 03:00
오피니언 송두율 칼럼
[송두율 칼럼]한인 디아스포라의 미래... 프랑크푸르트에도 등장한다는 소식까지 들린다. 이렇게 국내정치적 상황과 민감하게 연동된 한인 디아스포라 내의 오래된 갈등도 그러나 세대가 바뀌면서 장기적으로는 약화될 것으로 보인다. 김포공항을...
송두율 |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2019.06.17 20:49
연예
‘제12회 디아스포라영화제’ 17일 개막···6년 연속 조민수&김환 사회, 가수 김윤아·장기하 개막공연‘제12회 디아스포라영화제’ “디아스포라 주제를 담은 영화를 통해 공존의 희망을 나눌 수 있길” 제12회 디아스포라영화제(주최: 인천광역시/주관: 인천광역시영상위원회)가 지난 17일 오후 7시, 인천문화예술회관 야외광장에서 개막식을 개최하며 본격적인 여정에 돌입했다. 2019년부터 6년 연속 디아스포라영화제 개막식 사회자로 호흡을 맞추고 있는 배우 조민수와 아나운서 김환의 매끄러운 진행 속에서 진행된 개막식에는 인천광역시장 유정복, 국회의원 이자스민, 인천광역시의회 문화복지위원장 김종득, 하와이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베키 스토케티, 개막작 <그때는 아무것도 없었다>의 이반 야그치 감독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수많은 관객의 환호 속에 진행된 개막식은 대한민국 가요계를 대표하는 싱어송라이터 김윤아는 ‘장밋빛인생’, ‘야상곡’, ‘봄날은 간다’ 등 히트곡을 열창했다. ‘제12회 디아스포라영화제’ 올해 디아스포라영화제의 상영작 중 하나인 <패스트 라이브즈 Past Lives>에 출연하기도 한 장기하는 ‘부럽지가 않어’, ‘그렇고 그런 사이’ 등의 무대를 선보였다. 개막 공연 후에는 팔레스타인 출신 영화감독이 유대인 정착민이었던 어린 시절 친구와의 이별을 이해하려 요르단강 서안지구로 여행을 떠나는 내용을 그린 이반 야그치 감독의 개막작 <그때는 아무것도 없었다 There was Nothing Here Before>가 상영되며 묵직한 울림을 선사하기도 했다. 개막식에 참석한 이반 야그치 감독은 “디아스포라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되어 기쁘다”는 소감과 함께 “지금 이 시간에도 세계에서 여러 이유로 생겨나고 있는 디아스포라 존재들에게 디아스포라영화제가 큰 힘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혁상 프로그래머는 “올해 영화제는 전 세계 29개국 총 75편 작품이 상영되며, 다양한 아카데미 프로그램 및 교육·부대프로그램 등도 진행된다”며 “올해 상영되는 작품을 통해 부디 공존의 희망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되길 희망한다”라고 개막 소감을 전했다. ‘제12회 디아스포라영화제’ 제12회 디아스포라영화제는 인천문화예술회관 야외광장에서 개최된 개막식을 시작으로 5월 18일부터 21일까지 인천광역시 중구에 위치한 애관극장, 인천아트플랫폼, 한중문화관에서 ▲디아스포라 장편 ▲디아스포라 단편 ▲디아스포라 인 포커스 ▲디아스포라의 눈 ▲시네마 피크닉 총 5개의 섹션을 통해 전 세계 29개국 총 75편의 작품이 상영된다. 또 인천 지역 맛집들과 함께하는 식음부스 ‘디아드링크’, 플리마켓 ‘만국시장×디아스포라영화제’, 지역문화 투어 프로그램 ‘개항장 디아유람단’, 영화제의 추억을 담아 갈 수 있는 포토 부스 ‘디아모먼트’ 등 다양한 부대 프로그램도 마련되어 있다. 21일까지 야외무대에서는 김뜻돌, 양반들, 파드마, 라라 베니또 등 인기 뮤지션들이 다채롭고 개성 넘치는 공연을 선보였다. 또 인천음악창작소와 함께 인천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뮤지션들의 버스킹 공연도 영화제 관객과 만났다. 그 외에도 모델, 배우 등 다방면에서 활약하고 있는 요가 강사 오원과 함께 하는 요가스쿨도 진행되었다. ‘제12회 디아스포라영화제’ 제12회 디아스포라영화제는 오는 21일까지 애관극장, 인천아트플랫폼 일대에서 진행된다. 자세한 정보는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손봉석 기자 2024.05.21 04:52
연예
전직 교장선생 방승호 ‘K-디아스포라’로 파격도전전직 교장 선생 방승호가 신곡으로 새 장르에 도전한다. 전직 교장 선생이었던 방송호가 신곡 ‘K-디아스포라’로 싱잉랩에 도전하며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한다. 원래 ‘디아스포라’는 팔레스타인을 떠나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도 유대교의 규범과 생활 관습을 유지하는 유대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K-디아스포라 (사)K-디아스포라 세계 연대(K-Diaspora Worldwide Network, 이사장 고도원)는 전 세계 193개국에 흩어져 있는 730만 K-디아스포라와 한국을 사랑하는 세계시민을 상호 연결하는 프로젝트다. 재외 동포 2·3세 청년들을 대한민국의 인재로, 더 나아가 훌륭한 세계 시민으로 키워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이번 신곡 ‘K-디아스포라’의 작사를 고도원이 맡았다. 방승호는 “K-디아스포라 세계연대 설립 과정을 지켜보며, 그들을 위한 노래를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탄생한 노래다. 이 노래를 통해 전 세계 청소년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 세계 각지에서 재외 동포들이 한국인의 정신과 색깔을 유지하며 빛을 내길 응원하는 따뜻한 곡이다”라고 밝혔다. ‘K-디아스포라’ 노래 도입부의 선율은 다양한 국악기가 채운다. 작곡을 맡은 Thunder dragon 랩이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방승호의 싱잉랩이 운치를 더해 리스너들의 감성을 자극할 예정이다. 각지에 살고 있는 재외 동포들이 몸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만은 하나인 한국인임을 잊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민족 가요 아리랑을 떠올리게 만드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이라는 가사가 담겨 있으며 ‘바다와 대륙을 넘어 세계는 하나. 문화적 경계 생각의 경계 미움 다툼의 경계 가뿐히 넘어서 세계평화 향해 나가 나가 나가 나아가자’는 가사를 통해 재외 동포를 응원하고 있다. 한편, 방승호는 학교 폭력 예방 노래 ‘콜드블루-둘레길’ ‘배워서 남주나’ ‘아현고 아이들’ 등을 발매했고 책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요’를 집필한 바 있다. ‘K-디아스포라’는 21일 오후 12시부터 각종 온라인 음원 사이트를 통해 감상할 수 있다.
이선명 기자 2024.03.21 09:15
연예
제12회 디아스포라영화제, ‘다양성’과 ‘관용’의 가치를 담은 출품작 공모 시작인천광역시영상위원회 인천광역시영상위원회가 오는 2024년 5월 인천광역시 일대에서 개최될 예정인 제12회 디아스포라영화제 출품작 공모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출품 공모는 지난 수요일 12월 13일부터 내년 1월 31일 자정(*대한민국 시간 기준 [GMT +9:00])까지 진행된다. 2022년도 이후 제작이 완료된 작품 가운데 이주 및 이산 등을 뜻하는 ‘디아스포라’ 주제의 작품은 물론 인종, 국적, 난민, 성별 등의 이슈를 폭넓게 조망하며 동시대인들의 고민을 함께 나누고자 한 작품이라면 극영화를 비롯해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실험영화 등 모든 장르, 출품작의 국적, 제작 국가 등의 구분 없이 어떤 작품이든 출품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혐오와 차별에 맞서 다름에 대한 관용, 다양성의 가치를 대중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작품을 주요 선정 기준으로 삼는다. 이혁상 프로그래머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이들이 전쟁은 물론, 여러 이유로 차별과 고통을 받고 있다”라며 “제12회 디아스포라영화제는 여전히 유효한 차별을 넘어 영화를 통해 공존의 희망을 나눌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고 전했다. 프로그래머는 이어 “전 세계 영화인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린다”라고 덧붙였다. 내년 1월 31일에 마감되는 제12회 디아스포라영화제 출품 접수는 영화제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온라인으로 가능하며 내부 시사를 거친 이후, 상영 여부가 결정 되고 영화제 개최 전 홈페이지를 통해 최종 상영작이 공개 될 예정이다. 단체 출품 등 기타 문의는 디아스포라영화제 프로그램팀으로 이메일 문의를 통해 가능하다.
손봉석 기자 2023.12.15 22:15
연예
[스경포토] 포즈 취하는 '코리안 디아스포라' 참석자들배우 존 조, 저스틴 전 감독, 배우 스티븐 연, 정이삭 감독(왼쪽부터)이 6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KNN타워 KNN시어터에서 열린 '코리안 아메리칸 특별전: 코리안 디아스포라' 기자회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3.10.6
정지윤 기자 2023.10.06 15:49
오피니언
[홍명교의 눈]홍콩과 영덕의 디아스포라낯선 도시에 가면 나도 모르게 외진 골목을 걷곤 한다. 지난 1월 홍콩에 갔을 땐 오래된 서점들을 찾아다녔고, 그늘진 육교 아래선 몇 번이고 동남아 출신 이주노동자들을 목격했다. 모두 여성이었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스마트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 홍콩의 반중 시위가 시작된 지 4개월이 지났다. 그간 1400여명의 시민이 연행됐고 8명이 목숨을 잃었다. 우리 언론은 2019년 홍콩과 1987년 한국의 유사성을 찾으려 애쓰고 있지만 이 사태를 ‘민주주의 대 독재’라는 이원론적 구도로만 보면 무언가 놓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우리가 쉽게 놓친 풍경 속에 홍콩과 한국을 잇는 공통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39만명에 달하는 이주 가사노동자들의 존재는 홍콩이 처한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들 대부분은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에서 왔다. 홍콩의 이주 가사노동자 지원단체 ‘엔리치’ 보고서에 따르면 이주노동자들의 경제 공헌도는 126억 달러(약 14조원)로, 홍콩특구 총생산의 3.6%를 차지한다. 홍콩의 25~54세 여성들은 가사노동자를 고용하지 않을 경우 49%만이 경제활동이 가능하다고 밝혔지만 고용했을 땐 78%가 가능하다고 했다. 이주 가사노동자는 평일엔 고용주의 집에서 일하며 생활하지만 주말엔 고용주 가족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밖으로 나가야 한다. 거주할 곳 없는 노동자들이 늦은 밤까지 거리에 있어야 하는 이유다. 학대와 욕설, 성폭력, 임금 체불, 하루 13시간이 넘는 장시간 노동은 이들의 일상이다. 한 달에 4410홍콩달러(약 67만원)를 받지만 높은 물가를 고려하면 턱없이 적은 돈이다. 홍콩 시위에 대한 이주노동자들의 여론은 압도적 지지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들은 자유롭게 시위에 참여할 수 없다. 산더미처럼 쌓인 가사노동, 홍콩 시민사회의 무관심이 그들을 가로막는다. 취업비자가 취소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소셜미디어(SNS)를 통한 가짜뉴스와 협박도 방해 요소다. 우리는 얼마나 다를까? 얼마 전 경북 영덕의 한 오징어가공업체에서 4명의 이주노동자가 질식해 목숨을 잃었다. 국내엔 100만명이 넘는 이주노동자가 있지만 이들에겐 노동권이 보장돼 있지 않다. 국경을 넘나드는 노동의 이동은 자본에 의한 글로벌한 착취가 낳은 그림자다. 식민통치기 부유한 영국인들은 중국인 여성들을 노예처럼 부렸다. 이후 홍콩이 겪은 불완전한 탈식민지화는 식민시절의 모순을 남겨뒀다. 이주여성과 오징어 창고에서 목숨을 잃은 태국·베트남 노동자들은 세계 자본주의가 낳은 돌봄노동의 국제분업, 저임금 단순노동 분업의 참혹한 결과일 따름이다. 바로 그 점에서 홍콩과 한국은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가 각 사회에 밴 뿌리 깊은 모순에 도전하려면 민족의 자부심 같은 허상이 아니라 외양은 달라도 마찬가지로 억압받고 있는 이들 간의 연대를 통해야만 한다. 홍콩 시민사회가 이주민들과 함께 싸울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면 이 운동은 홍콩과 중국대륙의 3억 농민공, 동아시아 전체에 대안을 보여줄 수 있다. 이는 우리에게도 주어진 과제다.
홍명교 동아시아 연구활동가 2019.09.27 14:35
사회 원희복의 인물탐구
[원희복의 인물탐구]80년 만에 할아버지 나라 찾은 ‘수지’ 극적 세계사가 만든 디아스포라의 상징기자는 10월 20일 서울시내 한 음식점에서 오스트리아에서 온 여성을 만났다. 그가 건넨 명함에는 오스트리아 빈 국립도서관 대외관계 및 마케팅 담당 매니저 ‘수지 왕(Suzie Wong)’이라고 돼 있었다. 명함을 받은 기자는 고개를 흔들며 “왕이 아니라 서(Sue)”라고 말했다. 기자의 말에 수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웃었다. 20세기 현대사에서 우리 민족의 디아스포라를 얘기할 때 보통 러시아 연해주나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고려인 얘기를 많이 한다. 그러나 수지(47)의 사례 역시 매우 특이하면서도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수지의 사연은 한·중·일 동양사뿐 아니라, 유럽에서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까지 포함된 매우 ‘글로벌’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수지는 10월 17일 생애 처음으로 한국에 왔다. 그는 한국말을 못하지만 한국은 할아버지의 나라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결혼한 지 꼭 80년 만에 핏줄을 찾아 서울에 온 것이다. 어떻게 멀고 먼 오스트리아 국적의 여성에게 한국인의 피가 흐를 수 있었을까. 참 질기고 극적인 운명의 연속이었다. 수지의 가족사를 간단히 요약해 보자. 수지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할아버지의 저서 「거울, 비극의 시작」을 들어보고 있다. 상해 임시정부서 파리 유학간 할아버지 수지의 할아버지 서영해는 1902년 부산에서 태어난 키 160cm의 지극히 토속적인 조선인 남자다. 그는 부산 초량동에 있던 중국영사관 부속중학을 졸업해 일본어와 중국어를 능통하게 했다. 1919년 17세에 3·1운동에 가담했던 그는 경찰의 수배를 받자, 아예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하려고 혼자 상해 임시정부를 찾았다. 그러나 불과 17세에 불과한 어린 서영해를 본 상해 임정의 김규식·장건상 선생은 그를 프랑스로 유학 보냈다. 당시 국제외교의 중심인 국제연맹이 파리에 있어 파리 외교가 중요했지만 프랑스어를 능통하게 하는 사람이 귀했기 때문이다. 1920년 12월 혼자 프랑스에 도착한 서영해는 리세(유치원부터 고교까지 정규교육과정)에 입학해 12년 과정을 6년 만에 졸업했다. 프랑스 정규교육과정을 기초부터 마친 한국인은 당시 드물었다. 그는 1929년 파리 신문학교(에콜 드 주르날리즘)까지 졸업하고 파리에 를 설립했다. 1934년 임정은 국무위원회를 열어 외무행서(지금의 대사격) 규정을 의결하고 파리 외교행서에 서영해, 미국 외교행서에 이승만을 임명했다.(한시준 단국대 교수 논문) 서영해는 국제연맹에 일제의 한국 침략 부당성을 알리고, 1937년 벨기에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 대표단으로 참석해 “동양평화는 한국 독립에 있다”고 역설했다.( 1937.10.15) 1945년 임정의 대일 선전포고서를 파리 주재 일본대사에게 두 번이나 통보하기도 했다. 한편 그는 를 통해 한국의 실상을 유럽에 알리는 작업을 했다. 1929년 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프랑스어 소설을 쓰고, 소설 말미에 3·1독립선언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해 실었다. 그는 또 프랑스 언론에 일제의 ‘한국인은 야만스럽다’는 주장에 대해 반박문을 쓰고, 등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서영해는 이런 가운데 파리에 유학 온 오스트리아 출신의 여성 엘리자를 만났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고, 1937년 빈 시청에서 정식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1938년 독일 히틀러는 오스트리아를 침략하고,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서영해는 프랑스 망명정부를 따라 영국으로, 아이를 가진 엘리자는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지난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한·불 학술세미나 서영해 코너에 이승만과 함께 찍은 사진과 「고려통신사」 보고서가 전시돼 있다. 할머니의 재혼, 아버지 성이 바뀌다 1939년 서영해와 엘리자 사이에 아들 ‘스테판 칼 알로이스 솔가시 서’가 태어났다. 6년이나 지속된 제2차 세계대전은 서영해와 엘리사를 영원히 갈라놓았다. 1945년 5월 유럽에서 전쟁이 끝났지만 두 사람은 재결합하지 못했다. 이 해 10월 엘리자는 중국인 ‘식닝 왕’과 재혼해 서영해의 아들 스테판 서도 ‘스테판 왕’으로 성이 바뀌고 말았다. 서영해는 1946년 한국에 돌아와 대학(연세대, 이화여대)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그에게 프랑스어를 배운 사람이 이동원 전 외무부 장관과 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 등이다. 그리고 1948년 스무 살 아래 경남여중 교사였던 황순조와 재혼했다. 한편 서영해는 정치활동에 나섰는데 그는 이승만보다 김구 편에 섰다. 서영해는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을 지지하며 1948년 4월 남북 연석회의차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1948년 1월 1일 김구가 서영해에게 준 초판본에는 서영해를 ‘지제(志第)’ 즉 뜻을 같이하는 아우라고 썼다. 그러나 1948년 8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실망한 서영해는 부부가 함께 프랑스로 떠났다. (1948년 통일독립촉진회(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가 유엔총회에 파견한 대표단 선발대로 파리로 출발했다는 설도 있다) 중국 상해를 거쳐 파리로 가려던 서영해 부부는 또 한 번 운명적 반전을 맞는다. 상해에서 프랑스 비자를 기다렸으나 부인의 비자가 나오지 않은 것이다. 이때 중국은 심각한 국공내전을 겪고 있었고, 결국 공산화가 됐다. 상해에 있던 한국인은 모두 억류됐다가 1949년 모두 본국으로 귀환조치됐다. 그때 중국에서 살았고, 중국어를 잘한 서영해는 상해에 남았다. 아마 프랑스로 가기 위한 비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부인 황순조와 영원한 이별이 됐다. 이후 서영해는 중국에서 ‘실종’됐다.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서에는 1953년 6월 30일 ‘실종’이라고 돼 있다. 그러나 1956년까지 상해 인성학교 교사를 했던 것까지 확인된다. 이후 서영해의 행적은 사라졌다. 계획대로 프랑스로 갔다는 설도 있고, 월북해 김일성대학 교수를 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이 모두 간접 증언뿐이다. 중국에서 돌아와 부산에서 혼자 살던 부인 황순조는 1989년 세상을 떠나기 전 남편의 책을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했다. 1995년 사촌이 그의 독립운동 기록을 모아 서훈 신청을 했고,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서영해의 이런 삶은 2005년 4월 19일자 ‘다시 쓰는 독립운동 열전-서영해 파리대사의 외교투쟁’으로 소개됐다. 한편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서영해의 아들 스테판은 빈 응용예술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해 건축가가 됐다. 스테판은 같은 대학에서 만난 독일 출신의 ‘헨리에테 스텝케 비에센더’와 결혼, 수지(1970년)와 스테파니(1981년) 두 딸을 낳았다. 스테판은 자신의 아버지가 ‘한국인 저널리스트 서영해’라는 것을 기억하고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스테판과 수지는 주한 오스트리아대사관, 빈대학 한국사 교수 등에게 문의했지만 만족할 만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 한국어도 모르고 인터넷도 없던 당시 할아버지 뿌리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스테판은 2013년 세상을 떠났다.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손녀들. 왼쪽부터 정정화·김의한 선생 손녀 김선현 임정기념사업회 이사, 김진아 전주대 교수, 김규식 선생 손녀 김수옥씨, 윤봉길 의사 손녀 윤주경 독립기념관장, 수지, 조소앙 선생 손녀 김상용 국민대 교수, 수지 6촌 친척 내외, 맨 오른쪽은 김규식 선생 증손녀 김신희씨. 80년 만에 독립유공 후손으로 인정받아 수지는 빈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하고 박물관과 골동품 복원사업 등을 하다 2005년부터 빈 국립도서관에서 근무하고 있다. 수지는 2009년 한국 국립중앙도서관에 ‘저널리스트 서영해’에 대한 자료를 문의했다. 아마 같은 국립도서관이라 협조 요청이 수월했을 것이다. 그때 한국 국립중앙도서관은 2005년 보도 내용을 보내줬다. 그러나 한국어를 모르던 수지는 이 신문 자료를 보관만 하다 2015년 마침 빈에 교환교수로 온 전주대 김진아 교수를 만났다. 김 교수는 기사를 영문으로 번역해 설명해줌으로써, 비로소 수지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 수지는 에 연락, 한국에 사는 친척을 확인하고 또 서영해의 직계로 국가보훈처에 보훈신청까지 했다. 보훈처는 2017년 수지와 스테파니가 서영해의 직계임을 확인하고 보훈대상자로 지정했다. 1937년 서영해와 엘리자가 오스트리아 빈 시청에서 결혼식을 올린 지 꼭 80년 만에 합법적이고 공식적인 혈육이 확인된 것이다. 10월 17일 바로 그 서영해의 큰손녀 수지가 처음으로 할아버지의 고향에 왔다. 서울에서 6촌 친척(서혜숙씨 등)을 만나고 부산에 있는 할아버지의 고향과 증조할아버지 산소도 둘러봤다. 친구 김진아 교수가 있는 전주도 방문하고, 할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천안 독립기념관과 국립중앙도서관을 찾았다. 지난해 파리에서 동생과 만난 독립운동가의 손녀들이 환영해 줬다. KBS 라디오방송 인터뷰도 했다. 20일간 할아버지 고향에서의 일정은 그의 페이스북에 고스란히 남았다. -생애 처음으로 할아버지 친척을 만난 소감은. “6촌 친척을 처음 만났다. 솔직히 처음에는 두려움도 있었다. 그러나 금방 친해지고 진짜 가족임을 느꼈다.” -할아버지가 쓴 책과 평소 보던 책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나.(국립중앙도서관 ‘영해문고’에 보관된 첫장에 쓰여진 ‘徐嶺海 志第 惠存(서영해 지제 혜존)-戊子元旦(무자원단) 白凡 金九(백범 김구)’라는 글의 의미를 기자에게 물었다. 이에 기자는 ‘뜻을 같이하는 동생 서영해에게 이 책을 드리니 간직해 달라, 1948년 새해 아침’이라는 의미라고 말해줬다) “가만히 할아버지의 숨길을 느껴보려고 했다. 할아버지의 유산을 이렇게 만지고 볼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감동적이었다. 이렇게 책을 도서관에 기증한 할아버지의 부인(황순조 여사)이 놀랍고 고맙다.” -할아버지의 나라에 대한 인상은. “많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됐다. 할아버지의 행적을 들어보니 돌아가신 아버지와 비슷한 공통점을 느꼈다. 전반적으로 서울은 너무 큰 도시다. 서울에 비하면 오스트리아 빈은 작은 마을 같다.” -앞으로 할아버지에 대한 책을 쓸 생각이 있는가. “그렇다. 더욱 할아버지에 대해 연구해볼 생각이다. 그러나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한국 독립운동사가 아닌, 우리의 가족사에 대해 쓸 생각이다.” 수지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해주고, 가족을 찾게 해준 에 거듭 감사를 표시했다. 수지는 11월 2일 오스트리아로 떠났다. 그리고 임시정부기념관이 세워지는 2020년 동생 스테파니와 함께 다시 한국에 올 예정이라고 했다.
글·사진 원희복 선임기자 2017.11.07 11:21
사회 탈북 교수 주승현의 ‘우리는 모두 조난자다’
[탈북 교수 주승현의 ‘우리는 모두 조난자다’](8) 다시 차별의 경계선을 넘는 ‘디아스포라’탈북민은 북한을 나온 탈출자인 동시에 남북한 어느 곳에서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생아이기도 한 것이다. 분단이 주는 이러한 낙인효과와 무게를 스스로 벗어던지고 국제사회의 미아로, 디아스포라로 남기를 원하는 이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 A의 신변보호를 담당한 경찰에게서 전화가 왔다. A가 휴전선을 넘어온 직후 유관기관에서 만나볼 의향이 있느냐고 연락해왔지만 지방에 있는 회사에 파견되어 근무하던 시기라 틈이 없었다. 사회인이 되고도 나를 찾는 데 이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 만났다. 그는 귀순 전 내가 있었던 비무장지역에서 근무했던 엘리트 군관(장교)이었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 휴전선을 넘어온 수많은 귀순자들이 있었지만 현역 북한군 보위군관(군의 정보·사찰 담당)의 귀순은 그가 처음이었다. 북측 비무장지대에 있을 때 그를 본 적은 없었지만 나를 잘 알고 있었다는 그의 말에서 귀순 전에 나를 벤치마킹하며 한국행을 준비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의 귀순 동기는 명약관화했다. 17세에 군에 입대하여 10년간 최전방에서 군복무를 한 그는 성실성과 명민함을 인정받아 보위군관으로 발탁된 후 고향에 갔다. 그러나 어머니와 여동생이 굶주릴 대로 굶주려 제대로 운신조차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피눈물을 삼키며 돌아섰고, 비무장지대에 투입 후 DMZ를 넘어온 것이다. ‘권총호출귀순사건’으로도 알려진 A는 첫 인민군 현역 보위군관이었고 정치형 귀순자였지만 한국 사회에 나온 후 공사장과 일용직을 전전해야 하는 처지에도 큰 불평은 없었다. 다만 호출귀순자라는 이유로 안보강연에서 배제한 국방부에 대한 섭섭함이 있을 뿐이었다. 탈북민은 남북한 어느 곳에서도 설 자리가 없다. 북한에서는 배신자로, 북한을 떠나는 순간 북한체제의 피해자로 묘사된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는 북한체제의 증언자인 동시에 이등·삼등국민으로 취급된다. 도래지를 찾아 떠나는 새들처럼 ‘탈남’하는 무리는 한때는 동유럽으로, 또 한 시기는 서구권으로 가더니 아직은 지문공유가 닿지 않은 북유럽의 사민주의 국가들로 다시 발길을 돌리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탈북 후 정착 못하고 다시 한국 떠나 나를 찾아온 것은 옛 전우에 대한 향수 때문이기도 했고 대학 진학 문제 때문이기도 했다. 현장 일을 하면서 돈을 모을 수 있지만 공부를 하며 세상을 보고 싶다는 말에 기꺼이 그의 대학 진학을 도왔다. 나처럼 정치학을 전공하고 싶다고 했고 준비 끝에 원하는 대학에 입학했다. 얼마 남지 않은 첫 학기를 앞두고 그는 조금은 흥분된 목소리로 TV방송의 사시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됐다고 알려왔다. 걱정은 됐으나 만류할 수도 없었다. 종편의 시사프로그램에 나간 후 그는 일약 스타가 되었다. ‘호출귀순자’라는 전과(前科) 아닌 전과는 안보강의조차 할 수 없는 결격사유였지만, 방송에서는 그것만큼 솔깃한 소재도 없었다. 게다가 현역 DMZ 보위장교 출신의 경험과 증언은 부지불식간에 수많은 추종자들을 양산해냈다. 그런 운명을 시기했을까. 북한출신자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과 폄하 발언으로 아슬아슬한 긴장의 수위를 넘나들었던 진행자와 A의 방송은 폭발의 임계점을 넘어섰고 결국 그는 하차했다. 현장 일을 하면서도 드러난 적이 없었던 분개와 상실감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고 어느 날 그는 ‘탈남(脫南)’했다. 탈남지에서의 생활도 녹록지 않았다. 얼마 안 되는 돈마저 현지에서 사기를 당했고 다시 귀국한 뒤론 아내와의 관계도 틀어져 결국 징역을 선고받고 구속됐다. “미안하다.” 면회실 저편에서 그가 말했다. 학교를 그만둔 것이 미안한 것인지, 그곳에 있는 것이 미안한 것인지 나도 알 수 없었다. B를 만난 것은 내가 대학에 입학해서였다. 북한의 유수 대학에서 공부를 하다가 한국방송을 듣고 무작정 두만강을 건너 운 좋게 한국에 입국한 그는 당시의 경제형 탈북민 중에서 비경제적 동기로 이탈한 몇 안 되는 목적형 탈북민이었다. 그의 목적이 한국에서의 학업이었던 것처럼 수도권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해나갔고 가정도 이루고 슬하에 두 아이도 뒀다. 인품이 좋아 그를 형으로 따르는 고향인들이 많았는데 나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가정도 이루고 원하는 공부도 마친 후 남부러워하는 기업에도 입사한 그의 좌절은 문득 두 자식으로부터 찾아왔다. 탈북민 자식들과 함께 공부하는 학교로 아이를 보낼 수 없다는 한국 부모들의 항의를 목격한 후 아내와 조용히 짐을 쌌고 회사에 사표를 낸 후 한국을 떠났다. “미안하다.” 새로운 정착지에서 온 카톡이었다. 미리 얘기를 하지 않고 떠난 것이 미안한 것일까? 몇 달 후 그를 형으로 따르던 동생들이 하나 둘 한국을 떴다. 이곳에서 동고동락하며 이루어온 소중한 인연들이 그와 함께 한꺼번에 사라진 것이다. C는 전형적인 경제형 탈북민이었다. 많은 아사자가 생겼던 ‘고난의 행군’ 시기에 인신매매로 중국으로 넘겨졌고 여러 번 팔리면서 가까스로 한국에 입국했다. 하나원에서 만난 탈북출신 남성과 결혼했지만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했고 일본으로 시집갔지만 다시 한국으로 왔다. 어느 지역 공단 근처의 다방에서 일하던 그는 이제는 조금 편히 살고 싶다며 복지가 좋다는 나라로 갔다. 고단하고도 짠한 삶을 살고 있는 그에게서 이상하게도 북한이나 한국에 대한 원망과 불평을 들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중국이나 일본 생활에서 기억되는 흔한 회고조차도 없었다. 다만 내게 한 번 부탁한 적이 있었는데 자기가 알고 있는 친구들 중 대학공부를 하는 사람이 유일하니 나중에 자신이 겪은 기구한 삶의 여정을 책으로 남길 수 있느냐는 부탁이었다. 확신 있게 대답해줄 수 없었던 것이 아직까지도 미안하다. 어쨌든 그는 외국에서 살고 있지만 지금도 자기 삶의 주체로 여전히 동태적이다. 필자도 북한 출신이지만 탈북민을 생각하면 너무 안됐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북한에서는 배신자로, 북한을 떠나는 순간 북한체제의 피해자로 묘사된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는 북한체제의 증언자인 동시에 이등·삼등국민으로 취급된다. 결국 한반도 분단이 만든 탈북민은 북한을 나온 탈출자인 동시에 남북한 어느 곳에서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생아이기도 한 것이다. 분단이 주는 이러한 낙인효과와 무게를 스스로 벗어던지고 국제사회의 미아로, 디아스포라로 남기를 원하는 이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 차별의 경계선을 다시금 넘으려는 그들의 생애와 선택을 비난하는 이도 있지만 그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거나 반성하고 있는 곳은 없다는 것이 바로 분단 조난자들이 겪고 있는 비극이자 슬픔이라고 생각한다. 탈북인 3만명 중 15%가 ‘탈남’ 목숨을 걸고 입국한 이 땅을 다시 등지는 탈북민의 행렬은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 정확한 통계를 공개한 적이 없어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일각에서는 약 5000명의 탈북민이 탈남했거나 되돌아온 것으로 추산한다. 한국에 입국한 누적 탈북민이 3만명이니 6명 중 한 명이 탈남했거나 탈남의 경험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통일의 모델로 벤치마킹하려는 독일의 그것과 비교하면 차이가 크다. 독일이 분단된 후 1990년에 통일을 이룰 때까지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한 동독인은 무려 460만명에 달한다. 탈북민의 탈북이 본격화된 후부터 계산하더라도 약 20년이 된 시점에 와서야 3만명에 도달한 우리와는 확연히 비교된다. 그뿐이 아니다. 460만명의 동독 탈출자 중 서독에 정착한 후 다시 3국행을 택한 이는 극소수인 반면 우리는 3만명의 탈북민 중 15%에 가까운 사람들이 제3국으로의 탈남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 중에는 다시 북한으로 돌아간 탈남입북자(脫南入北者)들도 있다. 심지어 한국에 정착한 탈북민 중 북한이 자신의 ‘조국’이라며 공개적으로 송환을 요구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최근에 3국으로의 탈남자가 주춤한 추세는 한국에서의 형편이 나아져서가 아니라 탈북민의 탈남을 정부가 외교채널을 통해 조치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영국이나 캐나다와 같이 탈북민들이 선호하는 탈남 국가들과 지문정보 공유에 합의함으로써 한국 국적의 탈북민이란 사실이 적발되면 추방하는 형식이다. 그러나 삼엄한 북·중 국경선이 3만의 탈북민을 막지 못했듯이 탈북민 문제에 대한 동어반복과 어물쩍 넘기기가 지속되어 추상성만 남발한다면 탈남의 행렬은 다른 경로와 방법으로도 충분히 나타나게 될 것이다. 지문공유는 순간의 미봉책일 수도 있다. 정작 우려는 다른 곳에 있다. 460만의 동독 탈출자 중 3국을 선택하는 이는 얼마 안 되지만 서독에서 정착했던 동독인들이 다시 동독으로 돌아간 사례가 대표적이다. 전체에서 무려 11%에 달하는 40만명의 서독 정착 동독인들이 동독으로 다시 돌아갔는데 그 이유는 당시 동독은 다시 돌아와도 처벌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만약 북한이 탈북민이 돌아와도 처벌을 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준다면 과거 동독의 사례처럼 3국이 아닌 북한을 선택할 함의도 존재하는 것이다. 이미 지난 3월 북한인권정보센터(NKDB)가 진행한 설문에서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답한 탈북민이 20.8%에 달한 조사도 있다. 북한도 이를 알고 “비록 죄를 지은 자식이라도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고향으로 돌아오려는 사람들을 위해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다”고 선전하는 한편 “고난의 언덕을 딛고 올라선 조국은 그 사이 천지개벽했다. 탈북자들의 고향과 마을도 몰라보게 변했고 친척·친구들도 행복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며 정치·경제·연계·목적형 탈북에 국한 없이 모든 탈북민의 재입북을 적극적으로 종용하고 있다.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다” 20.8% 결국 향후에 일반적인 탈남보다 더 심각하게 대두될 부분이 바로 ‘재입북’의 문제일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재입북 탈북민이 19명이지만 비공식적으로는 훨씬 많다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다. 잊을 만하면 재입북을 하려다가 적발된 탈북민의 실형 소식이 자주 언론에 등장하는 것을 보면 앞으로도 그 숫자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재입북의 원인을 북한에 의한 협박과 회유라는 일면으로 단정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최근에는 한 탈북청년이 배를 타고 아무런 저지도 받지 않은 채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유유히 북한으로 되돌아간 사건도 있었고, 휴전선을 통해 월북을 시도하려다 잡힌 탈북민도 있었다. 재입북한 사람들은 20대부터 6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대에 걸쳐 있는데 가족과 함께 동반 ‘재입북’한 사례도 있고 홀로 북한으로 들어가 기자회견장에서 침 튀겨가며 한국을 비난하던 탈북민이 나중에 가족을 동반하고‘재탈북’하기도 한 웃지 못할 후일담도 있다. 재입북자들의 기자회견을 지켜보면서 나는 몇 가지 특이점을 발견했다. 북한체제에 유리하도록 각본된 기자회견이겠지만 대본과 상관없이 공통적으로 격앙하는 부분이 모든 이들에게서 동일하게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한민족이라고 생각했던 남한 사회와 주민들로부터 북한 출신들이 받고 있는 천대와 멸시, 차별과 수모라는 표현이었고 탈북민은 인간 이하의 대접과 막심한 후회로 ‘인간생지옥’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불편한 언어였다. 대체로 건조하고 무덤덤한 증언이지만 그들의 감정이 격해지는 그 지점에서 기자회견의 모든 내용이 살아남기 위한 연출이 아님을 눈치챘다. 나는 내가 지금 살고 있는 한국 사회가 그들이 말하는 ‘인간생지옥’이라고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그러진 냉대와 편견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생사를 걸고 온 이 땅을 다시 떠나는 주변인의 모습에 생각이 미치자 아픔이 밀려왔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올해 3월에 진행한 조사에서는 한국에서 탈북민 2명 중 1명이 북한출신이라는 이유로 차별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에서 살다온 그 피해자들은 한국에서도 사생아가 됐다. 주민등록증은 있지만 북한출신이란 꼬리표는 찝찝한 느낌의 유사어가 됐고, 한민족이지만 이질적인 사고방식과 정서의 폭은 일상화된 차별을 가져왔다. 배고파서 온 사람들이 배만 부르면 잘 정착할 것이라고 봤던 판단은 너무나 순진했다. 배고픔보다 더한 것이 같은 민족구성원으로부터 받는 차별이고 생존공포증임을 탈남과 재입북으로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몇몇의 진단처럼 그것이 또 다른 형태의 저항이라는 것에도 동의하기는 어렵다. A는 정치적 귀순자임에도 자신이 받는 추레한 대우에도 별로 불평한 적이 없었다. B는 목적형 탈북민으로서 자신의 진로를 적극적으로 주도했다. 경제형 탈북민인 C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남에게 의존한 적이 없었다. 한국 사회의 차별과 편견, 배제에서 비롯된 이들의 탈남은 어쩌면 저항보다는 더 나은 자유를 꿈꾼 선택일 수도 있다. 국제사회의 미아로, 디아스포라도 남을지언정 남북한의 사생아, 분단의 조난자의 형편을 넘어서겠다는 의지는 숙명주의를 넘어서는 다소간의 발걸음이자 보다 나은 삶을 향한 선택이지 않았을까. 기실은 한반도의 병리적인 분단구조에 사는 모두야말로 진짜 분단의 조난자들이라는 광의의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어김없이 계절은 또 바뀌고 있다. 도래지를 찾아 떠나는 새들처럼 ‘탈남’하는 무리는 한때는 동유럽으로, 또 한 시기는 서구권으로 가더니 아직은 지문공유가 닿지 않은 북유럽의 사민주의 국가들로 다시 발길을 돌리고 있다. 어느 날 새벽인가 한 통의 국제전화에 잠을 깼다. “너 아직도 한국이냐? 생각보다 끈질긴 면이 있네?” 진심인지 야유인지 모를 친구의 안부전화에 대꾸 대신 그가 이동한 서구권에서 북유럽으로의 빠른 대륙 종횡에 혼자 감탄했다. 그 친구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 행여 북한으로 재입북했을까봐 절친들이 수군거렸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어디로 갔든 언젠가는 다시 만날 것이란 사실을. 그러나 그들이 떠난 자리에 남겨진 묵직함은 이곳에 남겨진 사람들이 지고 가야 할 분단의 멍에이자 괴로움이다.
2017.03.28 15:13
문화/과학 신간
[신간]1300년 디아스포라, 고구려 유민 外저자는 2000년 중국 남방 소수민족인 먀오족 마을을 방문했다. 이 방문을 계기로 저자는 먀오족이 고구려 유민의 후손임을 입증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책은 고구려 유민들이 중국 역사에 강제 편입되는 과정을 밝히면서 중국 동북공정의 논리를 논파한다. 김인희 지음·푸른역사·1만7800원 책은 인류의 역사를 우반구와 좌반구의 창조적 긴장이라는 관점에서 풀어냈다. 신경학, 심리학, 철학, 신화, 역사, 문학을 종횡무진으로 넘나든다. 저자는 기계적이고 공감능력이 부족한 좌반구의 문화가 서구세계를 제패했다고 진단한다. 이언 맥길크리스트 지음·김병화 옮김·뮤진트리·4만원 신자유주의가 꿈꾸는 세상은 도시에서 완성된다. 두바이의 화려한 건물들에는 12시간씩 2교대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의 노역이 배어 있다.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 불평등을 만들어내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맨얼굴을 담았다. 마이크 데이비스 외 지음·유강은 옮김·아카이브·2만5000원 포석정과 나로호 발사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책은 와 에 등장하는 일화들 중 과학적으로 흥미로운 내용들을 뽑아 풀어낸 책이다. 다뉴세문경, 포석정, 석굴암, 천마도 등을 현대 과학의 눈으로 살핀 일종의 한국과학사다. 이종호 지음·동아시아·각 권 1만6000원
2011.01.19 1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