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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 원희복의 인물탐구

      [원희복의 인물탐구]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 “진보는 반성과 성찰, 그리고 통합하라”

      그는 최근 지리산에서 내려와 오랜만에 서울에 왔다. 그리고 12월 3일 광화문을 거쳐 청와대 앞을 걸었다. 그는 효자동을 지나며 ‘제2의 4·19혁명과 같은 유혈사태(경찰의 총격)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명예로운 국민혁명이 돼야 하고, 또 그리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다. 그가 불편한 몸에도 촛불시위에 나선 것은 “박근혜 하야를 요구하는 이 역사적 현장에 잠깐만이라도 있어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역사의 현장에 서고 싶었다는 심경을 토로하는 모습을 보면 그는 천생 ‘기자’다. 하지만 그는 총이 국민을 향해 겨누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1980년 광주의 경험도 있지만 군인이나 경찰이 그때보다 훨씬 성숙해 있기 때문이다. “총이 국민 겨누는 사태 일어나지 않을 것” 그는 또 이 민중혁명의 현장에서 “JTBC 손석희가 처음 ‘삼성 쪽 언론사로 갈 수 있느냐’는 말도 있었지만 이번 박근혜 하야 정국을 통해 역사를 바꾸는 이 상황에서 언론의 역할을 생각하게 한다”고 말했다.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 2013년 정치일선에서 떠난 그는 ‘실체적 고통’과 맞서 싸웠다. 그는 고열과 함께 온몸에 물집이 생기며 내장기관 기능이 떨어지는 희귀한 천포창에 시달렸다. 시점은 박근혜 정권의 종북몰이가 절정에 이를 때였다. 아마 박 정권의 만행을 그의 오장육부가 격렬히 거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공기 좋고 물 좋은 지리산 자락에 들어가 깨끗한 음식을 먹으며 요양했다. 말기암 환자들 틈에서 신문도, 방송도 없이 살았다. 박근혜 정권이 흔들리자 그의 병도 나아갔다. ‘우주의 기운’ 덕일까. 아니다. 촛불의 힘 덕일 것이다. 그는 식사 때 반주 한두 잔 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이 좋아졌다. 그는 촛불의 힘에 대해 “국민들은 박근혜 정권에 위임했던 자신의 권력이 농락당했다는 것에 분노하고, 국가의 품격이 떨어지는 국제적 망신에 분노하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권 전 대표는 이 상황에서 9일 국회의 탄핵결의 이후 진보진영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박근혜가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지켜보겠다고 하는 것은 속된 말로 ‘갈 데까지 가겠다’는 것이다. 그것을 용납해선 안 된다. 바로 퇴진시켜야 한다. 그런 면에서 국회의 탄핵결의는 실체적으로 새로운 시작이다. 구체적이고, 강한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 그 중 진보정당은 박근혜가 버틸 때 솔직한 민심의 이정표 역할을 해줘야 한다. 민주노총도 이 상황에서 중심적 단체로 역할을 할 능력이 있고, 또 그 역할을 할 것이라 믿는다. 이 상황에서 이른바 대권주자라는 사람들은 실체적으로 뭘 하느냐로 검증될 것이다. 탄핵 이후 촛불을 들고 최선봉에 서야 할 것이다.” 그는 지금 하야시국이 가지는 의미도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박근혜에 대해 선거의 여왕, 콘크리트 지지율 운운하지만 실제는 ‘박정희의 딸’에서 나온 지지”라며 “지금 이 순간은 그 견고한 박정희 신화가 깨지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는 지금의 경제발전을 박정희가 이룩했다는 잘못된 신화에서 저임금을 감내한 노동자들의 희생의 결과로 교정하는 것으로, 한국 사회 발전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평가했다. 1987년 6·10 시민혁명은 그해 1월 남영동에서 ‘탁치니 억하고 죽은’ 서울대 박종철에서 시작해, 화이트칼라의 이른바 넥타이부대가 가세하고, 6월 연세대 앞에서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숨지면서 ‘완성’됐다. 여기에 종교인·해직교수·해직기자 등이 함께한, 소위 ‘배운자들’, 즉 ‘시민혁명’이었다. 이후 시국은 7~8월 노조 결성이 이어진 노동자대투쟁 국면을 거쳐 1994년 선명하고 새로운 전국노동조합 조직 민주노총으로 이어졌다. 권 전 대표는 이 국면에서 기자에서 노동조합 위원장으로,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초대 위원장을 거쳐 민주노총 초대위원장이 됐다. 그는 1996년 당시 신한국당의 노동법 날치기에 대항하는 총파업을 주도, 법 재개정을 이끌어냈다. 파리특파원 거쳐 언론노동운동가로 그렇게 축적된 노동조합 역량은 이번 2016년 11월 민중총궐기에서 주요 추동세력이 됐다. 백남기 농민의 죽음도 민주노총과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등 ‘민중총궐기’ 국면에서 발생했다. 민주노총과 전농은 이번 탄핵 주말시위 지도부의 주요 일원이다. 그런 면에서 87년 6·10혁명이 대학생과 화이트칼라가 주도한 혁명이었다면, 지금은 블루칼라가 앞섰고, 시민단체가 뒤따른 국민·민중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으로서 그의 감회는 남다르다. “이번 민주노총 총파업에 대해 일반 국민들의 이해가 과거보다 높아진 분위기다. 총연맹 차원에서 노동조합의 정치파업은 정당하고 중요하다. 특히 민주화가 이뤄지지 않은 국가에서 노조의 정치파업은 당연하다. 유럽 등 세계 여러 나라의 노동운동이 그렇다. 심지어 전두환 정권 때 김대중 사형선고에 반대해 영국과 호주 노조가 파업을 결의했다. 노조가 외국의 정치문제에까지 개입한 것이다. 민주노총의 정치파업은 노조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다.” 권 전 대표는 1941년 일본 야마구치현에서 태어났다. 일본으로 징용 간 부모님은 막노동을 했다. 해방 후 귀국한 가족은 경남 산청에 정착했다. 지역에서 초등학교를 설립한 그의 부친은 좌우익 갈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가족은 부산으로 이주했고, 그는 경남중·고와 서울대 농학과를 나와 신문기자가 됐다. 전두환 군부정권에서 보도지침에 길들여진 우리 언론은 6·10항쟁을 통해 노조 설립을 통한 언론민주화투쟁을 전개했다. 파리특파원을 7년 하며 ‘잘 나가던’ 권 기자는 1987년 귀국해 회사 내 노동조합을 만들고 위원장이 됐다. 후배들과 밤새 술 먹기를 좋아했던 권 기자는 언론노동운동가로 변신했다. 그는 1988년 전국의 언론사 노조를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으로 엮고 위원장이 됐다. 그는 언론노련 위원장을 세 번이나 역임했다. 6·10항쟁으로 커진 전국의 노조역량은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를 거쳐 1995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으로 이어졌고, 그는 이 과정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1996년 창립된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이 됐다. ‘어용’이 판치던 노조풍토에 당당한 전국적 선명노조를 만든 것이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노동조합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국민승리21을 만들어 1997년 15대 대통령선거에 진보진영 후보로 출마했다. 비록 30여만표, 1.2%의 득표율이었지만 정당체계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진보정치의 씨앗을 뿌리는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민주노동당을 창당해 2002년 16대 대선에선 100만표(3.9%)에 가까운 득표를 했다. 2007년 대선 역시 민주노동당으로 출마했다. 그가 대통령선거에 세 번이나 도전했던 것은 김대중 대통령의 네 번 도전에 이어 두 번째 대기록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대선 출마를 무모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보수정당 후보의 대선 출마가 ‘대권 욕심’이라면 그의 대선 출마는 ‘진보정치 확장’이었다. 그는 척박한 이 땅에 진보노동운동의 씨를 뿌리고, 진보정치의 열매를 맺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뿌린 진보정치의 씨앗은 순조롭게 결실을 맺었다. 민주노동당은 2004년 4월 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10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해 원내 진입에 성공했다. 그 자신도 2008년 18대 총선에서 지역에서 당선돼 지역구 재선의원이 됐다. 진보세력을 통합한 통합진보당은 2012년 19대 총선에서 원내 13석을 획득해 원내 제3당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2013년 그렇게 어렵게 만든 통합 진보정당이 쪼개지는 것을 보며 그는 정치를 떠났다.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가 7일 서울 프레스센터에 있는 언론노조 사무실을 방문해 28년 전 전국언론노조 창립을 주도하던 당시 사진 앞에서 후배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새언론포럼 제공 이 하야시국에서 진보진영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진보정당, 진보세력, 진보정치인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반성과 성찰, 그리고 혁신이다. 민주노동당을 창당하고 진보진영 대선후보였던 나부터 국민에게 사죄한다. 진보정당이 제 역할 했으면 나라가 이렇게 참담한 상황까지 가지 않았을 것이다. 진보정당은 분열되고 국민의 기대를 저버림으로써 제 역할을 못한 것에 대해 반성하고 성찰해야 한다.” ‘성찰하라’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추구했던 보편적 복지, 경제민주화, 정치혁신 등 국민의 살림살이를 나아지게 하는 정당으로 거듭나라는 것이다. 진보정당은 적어도 보육·교육·의료·주거·노후대책 등을 책임지는 정책정당으로 거듭나야 한다.” 진보의 오랜 문제인 분파와 분열을 어떻게 극복하나. “나는 아프기 전부터 진보대통합을 외쳤다. 초기 민주노동당으로 되돌아가면 된다. 어느 세력, 누구 세력, 어떤 노선을 따져선 안 된다. 소위 NL(민족해방)이나 PD(민중민주) 등도 화학적으로 결합을 해야 한다. 노선을 뛰어넘어 결합한 과거 민주노동당 정신으로 다시 합쳐야 한다.” 최근 민주노총 주도로 진보정치를 통합하는 ‘민중의 꿈’을 추진하고 있다. 가능성을 어떻게 보나. “울산에서 무소속 국회의원 2명을 당선시켜 여의도로 보냈다. 박근혜 정부의 집요한 종북세력 매도공세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아직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다. 진보에 기대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인 것이다. 그것에 보답하기 위해서도 통합해야 한다.” 결국 권 전 대표가 이 하야시국에서 진보진영에 요구하는 것은 ‘(분열에) 반성하고, (민생정책을) 성찰하고, (소아를 버리고) 통합하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어느 세력, 어떤 노선 따져선 안 된다” 그는 아직도 주소지를 창원에 두고 있다. 국회의원을 지낸 대부분의 사람들, 지역 토박이라도 한 번 서울(여의도) 물을 먹으면 대부분 지역을 떠나지만 그는 그러지 못한다고 했다. 그것이 자신을 지지했던 지역 유권자에 대한 ‘도리’라고 말했다. 오히려 요즘 아파트에서 동네 사람을 만나면 주민들이 ‘함께 있어줘 고마워 한다’고 말했다. 그는 다시 창원에 내려갔다가 연말·연초 일본에 간다. 일본 온천에 가서 마지막 남은 병 찌꺼기를 말끔히 씻고 올 계획이다. 잠깐 서울에 온 사이 후배들의 식사 초대가 이어졌지만 시간이 없어 일일이 응하지도 못했다. 이 인터뷰도 식사시간을 어렵게 짬을 내 이뤄졌다. 하지만 권 전 위원장은 바쁜 서울 일정에도 자신이 만든 광화문 프레스센터의 언론노조 사무실에 들러 후배들을 격려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의 삶은 언론민주화 운동사이고, 진보노동 운동사이며, 또 근래 진보정당 역사이기도 하다. 이는 척박한 이 땅을 따뜻한 인간애가 흐르는 땅으로 바꾸기 위한 투쟁의 기록이다. 기자의 ‘회고록이나 자서전을 쓸 계획이 없느냐’는 질문에 그는 “그렇지 않아도 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후배들이 구술을 받아야 한다고 찾아왔다”면서 “이제 몸이 괜찮으니 내가 직접 쓰겠다”고 말했다.

      글·원희복 선임기자 사진·이상훈 선임기자 2016.12.13 15:24

    • [인터뷰]‘온몸 정치’ 불사르는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

      정치

      [인터뷰]‘온몸 정치’ 불사르는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

      ㆍ“거리의 힘 커져야 막가파 국회 막을 수 있어” 160㎝ 정도의 아담한 키에 갸날픈 체격. 해맑은 웃음을 환하게 지으며 기자와 인사를 나눈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은 영락없는 소녀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 의원의 해맑은 모습은 국정감사장과 국회 인사청문회, 용산참사 현장과 쌍용차 평택공장에서 180도 바뀐다. 백용호 국세청장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송곳 같은 질문으로 백 후보자의 덜미를 잡는 모습이나 쌍용차 평택공장 파업 현장에서 온몸을 던지며 힘없는 노동자들과 소통하려다 ‘닭장차’(경찰전경버스)에 끌려가며 ‘민주주의’를 외치는 모습을 봐도 그렇다. 이 의원을 찾은 8월12일. 그날도 그는 여전히 바빴다. 마침 기무사 요원이 쌍용차 평택공장 파업 현장에서 민주노동당 간부와 시민단체 관계자를 불법적으로 사찰한 증거인 수첩과 동영상을 공개하고 있었다. 조금 전 기자회견에서 기무사의 민간인 사찰 건에 대해 폭로했다. “기무사가 1989년 당시 윤석양 이병의 보안사 민간인사찰 폭로사건 이후 공식 중단한 민간인 사찰을 재개한 증거를 이번 쌍용차 평택공장 현장에서 확인했다. 민주노동당 당직자와 시민단체 관련자 등 민간인들을 날짜와 시간대별로 집요하게 사찰한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 없었던 일이 다시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확보된 수첩에는 민간인에 대한 광범위하고 무차별적이며 조직적인 불법사찰의 내용이 담겨져 있다. 시계가 거꾸로 가고 있다.” 강제 연행 당시 상황은 어땠는가. “8월4일 쌍용차 사측 용역과 충돌이 일어났다. 그동안 물과 의약품 반입을 막아서 소소한 충돌이 있었다. 그러나 그날은 아예 사측에서 고용한 용역들이 작정하고 나왔다. 용역이 농성천막을 부수면서 대열을 지어서 나왔다. 그 뒤에 경찰이 서 있었다. 용역이 한 번 폭력을 행사하고 빠지니까 그 뒤에 경찰이 나섰다. 용역이 폭력을 쓰는 건 묵인하면서 그 다음에 나서는 건 경찰의 공정한 공무집행이 아니라고 봤다. 지휘관에게 이 문제에 대해 얘기하자고 했더니 피하면서 엉뚱하게 우리 보좌관들을 연행했다. 황당해서 항의했고, 보좌관을 연행한 버스에 들어가서 석방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정확하게 연행은 아니었다.” 경찰이 왜 이렇게 무리하게 강경하게 나온다고 생각하나. “요 며칠 상황을 보면 ‘경찰국가’가 된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도심에서의 모임도 철저하게 막는다. 시민들이 모여 의사를 표현하는 것 자체를 청와대 당국자들이 볼 수 없도록 막으려고 하는 게 아닌가 한다. 이 과정에서 법도 책임도 없고, 경찰은 익명으로 숨는다. 결국 경찰의 과잉충성이 경찰국가를 만드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쌍용차 사태와 관련해 “살려고 해야 살려주지”라고 말했다. “노동자들의 요구는 순진하다 싶을 만큼 간단하다. ‘함께 살자’ 딱 네 글자였다. 쌍용차 노동자들은 이것을 위해 자신들이 먼저 양보했다. 8시간 근무 대신 5시간만 해도 된다고 했다. 마지막에는 월급, 휴업수당 안 받아도 좋고 휴업기간이 길어져도 좋다고 했다. 단지 회사 간판만 떼어내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다. 노동자들은 결코 과도한 요구를 하거나 극렬하지 않았다. 정부는 그동안 무대응으로 일관하다가 폭력사태까지 불러왔다. 이 대통령은 아무래도 보고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게 아닌가 보인다.” 최근 이 의원 ‘수난시대’라고 한다. 그 만큼 의정활동을 정열적으로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정확히 말하면 ‘국민의 수난시대’다. 특별히 수난을 겪는다기보다 피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그리고 굳이 물러서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원칙, 민주주의, 기본적인 인권을 지키라고 하는데 자꾸 밀어내니까 앞에 가 있는거다.” 백용호 국세청장 후보자 청문회에서 이른바 ‘다운계약서’ 문제를 지적해 백 후보자를 궁지로 몰았다. 이명박 정부 인사의 가장 큰 문제점은 뭐라고 생각하나. “한마디로 흠을 흠으로 안 보는 거다. 가장 놀랐던 건 한나라당 의원과 공직 후보자의 자세이다. 누구나 그러 했는데 그걸 왜 문제 삼느냐고 하는데 그 ‘누구나’가 자신들만의 ‘한정된 그룹’이다. 불법이 아니냐고 따지자 그 뒤에 한나라당 진수희 의원이 바로 받아서 ‘나도 다운계약서 했다’고 말하더라. 문제될 사안도 아니고 국회의원 다 털어보면 안 걸릴 사람이 누가 있느냐 하더라. 기가 막혔다. 다 털어보자고 하고 싶었다. 그 뒤에 더 황당한 건 문제가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게 된 지경에까지 가서도 두 번째 발언하기 전에 민주당 의원들의 공격 논리가 흔들리니까 한나라당 의원들이 백 후보자의 인격에 대해 ‘상찬’했다. 법률적 문제가 안 되는데 이렇게 도덕적 책임감을 느끼신다, 훌륭한 인간미와 열린 자세를 지니시고 있다 등등. 정말 놀랐다.” 최근 강연회에서 MB정부는 ‘실용이 아니라 이념을 앞세운 정부’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례가 있나. “대표적으로 경제 문제와 남북 문제를 보면 그렇다. 정무위원회에 있을 때 경제 입법 다섯 가지를 놓고 토론하면서 이게 지금 서민의 경제위기를 탈출하는데 있어 어떤 도움이 되느냐고 물어보면 대답을 못한다. 새 정부가 들어섰고, 어쨌든 공약했고, 대기업과 자본이 들어올려면 일단 길을 열어놔야 한다는 논리이다. 경제적인 영향은 따져보지 않고 재벌 위주, 대기업 프렌들리로 가는 것이 이념으로 가는 대표적인 사례다. 남북 관계 중 대표적인 것이 개성공단 기업주들이 기숙사를 지어달라고 하자 이 대통령이 기숙사를 지으면 근로자들이 집단행동을 할 우려가 있다고 발언한 적이 있다. 개성공단이 한미연합사 훈련 때문에 닫히고 열리고 했는데 청와대에서 개성공단 기업주들에게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지키도록 지도하겠다고도 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국가와 사업을 하면서 그들의 정치 사정과 입장도 존중하지 않고 한다면 상대방이 수긍을 하겠는가?” 기륭전자 사태, 촛불정국, 용산참사 현장, 미디어법 날치기 통과, 쌍용차 사태 등 현장에는 항상 이 의원이 있었다. 항간에 ‘거리의 여전사’, ‘거리정치’의 상징으로 불리고 있다. “변호사 시절 항상 현장에 가서 생생한 목소리를 듣는 것이 내 업무 방식이었다. 국회의원이 돼서도 마찬가지다. 민의를 대변하는 머슴으로서 업무상 당연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한마디라도 살아있는 말을 해야 하는 게 옳지 않은가? 그런 호칭이 주어지는 것은 그만큼 국회의원이라면 현장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그런 게 모자랐다는 차원에서 나온 게 아닌가 생각한다.” 장외 단식보다 국회 내에서 투쟁해야 한다는 시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국회 안팎을 놓고 무엇이 우선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국민들의 요구, 핵심적인 정책을 어디에서 가장 잘 풀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국회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최근 벌어졌다. 이 답답함을 정치인들이 흡수하고 풀어나가야 한다. 따라서 지금은 거리에 있을 때다 라는 생각이다. 국회 내에서 원만히 현안을 챙기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렇다고 거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어야 한다. 거리의 힘은 더 커져야 하고 거리의 힘이 커져서 직접민주주의의 요소가 활성화 되어야만 한나라당의 ‘막가는 국회’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글·김태열 기자 사진·김석구 기자 2009.08.20 11:30

    • [시사와 사람]이수호 민주노동당 혁신재창당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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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사와 사람]이수호 민주노동당 혁신재창당위원장

      “총선 후 진보신당과 다시 합쳐야” 그가 돌아왔다. 선린인터넷고에서 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던 ‘이수호 선생님’이 다시 진보 진영의 선두에 섰다. 그에게 민주노동당 혁신재창당위원장과 비대위원이라는 새로운 직함이 붙었다. 해직을 당했을 때도, 전교조 위원장과 민주노총 위원장 직을 수행하면서도 이수호 위원장은 천직이었던 교사 직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교단에 선 지 33년 만에 그는 학교에 사표를 던졌다. 반쪽으로 쪼개져 남은 민주노동당의 위기를 추스르기 위한 결단이다. “당이 타이타닉호가 되었고 서서히 잠기고 있었지요.… 나는 타이타닉호로 달려갔어요. 무조건 뛰어올라야 한다 생각했지요.” 이수호 위원장이 사표를 쓰며 남긴 ‘아내에게’라는 시에는 자신의 천직인 교사를 왜 그만두어야 했는지 절절한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당의 요청도 있었다. 교직에 대한 안타까움도 있지만 나는 진보정치 운동이 이렇게 끝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할 수 없었다.” “같은 편끼리 자리다툼 참담한 반성” 민주노동당은 천영세 의원이 혁신비상대책위원회 대표를 맡고 있다. 비대위원이 된 이 위원장은 혁신재창당 위원장 직을 맡았다. 재창당이라는 용어가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심상정 비대위의 혁신안은 이미 대의원이 통과시켰으므로 그대로 이어받는다. 재창당도 대선 전에 당 중앙위원회의 결정사항이다. 진보정치의 협소한 틀 속에 갖혀 있어서는 안 된다. 진보 진영이 대연합하는 재창당이 필요하다. 이번 총선은 불가피하니까, 일단 서로 총선을 잘 치르고 다시 단결해 이명박 보수 정권에 맞서야 한다. 큰 단결을 만들어가는 것이 재창당이다.” 민주노동당 사무실에서 만난 그의 입에서는 말마다 ‘안타까움’이라는 표현이 붙었다. 지난 대선부터 시작해 진보 진영의 분열까지 모든 것은 그에게 ‘안타까운’ 현상일 수밖에 없다. “지난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진보 정당이 갖는 급진성을 상쇄하기 위해 권영길 후보로 안정적인 선택을 했다고 본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진보 정당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심상정 의원이 낫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후 대선 평가 과정에서는 과도하게 종북주의가 등장했다. 안타까운 것은 심상정 비대위가 너무 과도한 조건을 내걸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일반 당원의 뜻과 상관없이 양 정파끼리 합의해 당권을 주고받는 것도 잘못됐다. 결국 과도한 정파적 대립이 문제다. 소위 헤게모니를 다투는 권력지향적 내부의 문제가 실제로는 비례대표 임명권으로 촉발됐다. 춥고 배고픈 시절 민주주의를 위해 애써온 운동 세력들에게 국회의원 자리 몇 개가 생기면서 서로 욕심이 생긴 것이다. 서로 우리 편이 국회의원 몇 자리 차지하려고 했던 것에 참담한 반성을 한다.” 그에게 혁신재창당위원장이라는 직함이 주어지자, 당장 비례대표 의원이 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가 싹텄다. 하지만 3월 3일 발표한 민주노동당의 비례대표 후보 명단에는 그의 이름이 없다. “진보정치 분열로 대중조직도 흔들려” “물론 제안이 있었다. 이명박 정부의 교육 정책에 문제가 많다. 교육전문가가 의회에 들어가야 한다면서 민주노총 쪽 사람들이 교사 출신인 나를 추천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그러나 내가 국회의원으로 가는 것은 욕심으로 보이고, 자리에 연연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단호하게 내 몫이 아니라고 했다. 다만 나는 뒤에서 후배들이 잘 할 수 있도록 하겠다.” 함께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갈라선 것에 대해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그는 역시 ‘안타깝다’라는 말로 입을 열었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단병호 의원이다. 민주노총 시절 사무총장으로 단 위원장을 모셨다. 탈당한 사람들과 사적으로 이야기하지는 못했지만 모든 걸 떠나서 찾아뵙고 소주나 한잔해야겠다. 심상정·노회찬 의원은 아끼고 좋아하는 동지들이다. 나는 과도한 정파 간의 대립을 싫어하는 사람 중 하나다. 다 가깝게 지내던 분인데… 어떻든 진보정치의 안타까운 과정이다. 서로 잘 됐으면 좋겠다. 총선에서 괄목할 만한 성적을 남기고 다시 만나야 하지 않겠나.” 그는 민주노동당의 내분으로 민주노총까지 분열되는 조짐이 보이고 있다며 우려하는 목소리를 냈다. 그는 “진보정치의 분열이 민주노총과 전농 같은 대중 조직의 분열로 이어지는 죄과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교직을 떠났지만 그의 아들이 역사 선생님으로 천직을 이어가고 있다. 아들 역시 아버지처럼 전교조 조합원이다. 아들이 교직을 선택했을 때 그는 ‘기분이 좋았다’고 표현했다. 그의 겉모습은 예전 텔레비전 뉴스에서 본 것처럼 짧은 머리에 점퍼 차림이다. 학교에서는 캐주얼 차림이었지만 다시 노동자의 상징인 점퍼 차림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머리카락은 왜 자라지 않는 것일까? “2004년 민주노총 위원장일 때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면서 삭발 단식 농성을 했다. 그런데도 파병이 이뤄졌다. 파병은 야만적인 행동이다. 그후 이렇게 머리를 짧게 하고 있다. 이라크에 파병된 군인들이 돌아오면 머리를 기를 것 같다.”

      2008.03.13 00:00

    • [커버스토리]우수의원 단병호 -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정치 표지 이야기

      [커버스토리]우수의원 단병호 -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노동쟁의사업장 찾아 ‘상시 현장국감’ 노동운동가 출신답게 단병호 의원의 주요 통과법안은 노동과 환경 분야에 집중되어 있다. ▲근로기준법에 건설일용노동자의 체불임금에 대한 원청(사용업체)의 연대책임과 원청에 대한 직접청구권을 신설했고, ▲건설근로자의 고용개선 등에 관한 법률에서는 건설현장 위생시설 설치 의무화와 건설공제제도 의무가입제도를 도입했다. 또 ▲최저임금법에 수습직 최저임금 차별 폐지와 경비직 등 감시직 노동자의 최저임금 부분 적용을 신설했고,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선 재활치료 의무화, 산재인정 전 건강보험 우선 적용, 재활급여 신설, 의료기관의 산재지정병원 의무화, 진료비 대부제도 신설 등을 주도했다. 단 의원은 법안 발의에도 적극적이어서 대표발의한 법률안 40건 중 12건이 통과 처리됐고, 28건이 계류 중이다. 특히 2008년 2월 임시국회에서 ‘환경보건법안’이 통과될 예정인데, 주요 내용은 ‘건강 영향 조사에 대한 주민청원’ 제도 도입과 ‘건강 피해에 대한 보상’ 실시의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다. 활발한 의정활동으로 수상 내역도 화려하다. 불교인권위원회의 ‘불교인권상’, 경향신문의 ‘노동부 선정 국정감사 최우수의원’을 수상했고, ‘국정감사 NGO모니터단’이 선정하는 국감우수의원에도 4년 연속 올랐다. 또 단 의원이 주도하는 ‘노동기본권 실현 국회의원 연구모임’은 2년 연속 우수 국회의원 연구단체로 선정됐다. 2007년 국감에서도 석면공장 인근 주민 악성중피종 집단 발병 가능성, 정부기관 환경영향평가 위반 최다 기록, 포항철강공단 코호트조사 은폐·축소 의혹 등을 문제제기하고 비정규직법 시행에 따른 문제점 지적과 개선방안, 홈에버·뉴코아 사태의 원인과 해결방안,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의 문제점 해결 등에 주력했다. 단 의원은 노동쟁의사업장 중심의 찾아가는 ‘상시 현장국감’을 실시하고, ‘노동포럼’ 등을 개최하는 등 비회기 기간 중에도 활발한 활동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2008.0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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