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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년간 아내병상 지킨 기상 캐스터 김동완의 감동 순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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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년간 아내병상 지킨 기상 캐스터 김동완의 감동 순애보

      날씨처럼 사람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것이 또 있을까. 오늘은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지, 바람이 부는지, 아니면 비가 오는지. 사람들은 일기예보를 보면서 어떤 옷차림으로 밖을 나서야 할지 결정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 5주 연속 주말의 일기예보가 빗나가면서 기상청에 대한 사람들의 불만이 급증하고 있다. 원조 기상캐스터, 김동완 통보관이 그립다는 사람도 있다. 김동완 통보관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생활 기상예보와 일기도로 재미+감동 선사 한국 일기예보의 살아 있는 전설, 김동완 통보관(73). 서울 화곡동의 한 다방에서 만난 김 통보관은 여전히 건강하고 활기찬 에너지가 넘쳤다. 과거 TV에서 일기예보를 하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특별히 건강관리는 하지 않는다고 했다. “부모님으로부터 건강한 체질을 물려받았어요. 지금까지 크게 아파본 적이 없으니까요. 비결이 있다면 바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거예요. 마인드 컨트롤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방법을 터득했거든요.”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건 어찌 보면, 김 통보관이 방송에서 끝까지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이기도 했다. 당시 김 통보관은 하루에 10개 이상의 프로그램을 소화해야 할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방송을 할 때마다 매번 다른 멘트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하다보니 스트레스로 머리가 다 빠질 지경이었다. 그대로 몸을 혹사시키다가는 언제 쓰러질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나무 인형을 하나 사서 서랍 속에 넣어 놓고는 인형을 볼 때마다 ‘참자, 아량을 갖자’고 다짐했다. 그렇게 3년이 지나고 나니, 어느 순간부터 마인드 컨트롤이 가능해졌다. 이제 웬만한 일에는 크게 감정이 동요하지 않는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젊게 산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김 통보관의 일기예보가 시청자의 꾸준한 사랑을 받은 이유는 바로 ‘생활 기상예보’ 덕분이었다. ‘여우가 시집가는 날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미니스커트를 입기에는 추운 날씨입니다’, ‘불쾌지수가 80을 웃돌면 모든 분들이 짜증스러운 기분에 사로잡힙니다. 감정 관리에 각별히 유념하세요.’ 그의 일기예보에는 항상 일상생활과 밀접한 이야기가 등장했다. 매일 뉴스 말미 1분 30초 동안 형식적으로 전달되던 일기예보와는 달리 귀에 쏙쏙 들어오는 재미있는 내용들이었다. “1965년 라디오만 있던 시절에 진행자가 ‘날씨 듣겠습니다’라고 말하면 곧바로 다른 채널을 듣던 때였어요. 청취자에게 날씨가 좀 더 재미있게 전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바로 ‘생활 기상’이었죠.” 김동완 통보관의 ‘생활 기상’은 청취자들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특히 그는 ‘일기도’를 손으로 직접 그리면서 일기예보를 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기상청에서 20, 30년 동안 근무한 사람들도 그리지 못하는 것이었다. “처음 기상청에 들어가면서부터 일기도 그리는 게 재미있더라고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2년 넘게 일기도를 그리다 보니 안 보고도 정확하게 그릴 정도가 되더군요. 어느 날 방송에서 자랑 삼아 일기도를 그려봤는데, 사람들이 너무 신기해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게 제 트레이드마크가 됐죠.” 독일대사관에서 근무하던 한 외국인은 김 통보관이 일기도를 그리면서 일기예보 하는 모습이 너무 놀랍고 멋있다며 그의 방송분을 녹화 테이프에 담아 고국에 보내기도 했을 정도. ‘생활 기상’에 ‘일기도’까지. 김 통보관은 밀려드는 방송 섭외로 인해 연일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자랑하는 김에 한 가지 더 하자면, 그는 좀처럼 NG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방송 중에 기침이 나오면, 저는 그냥 편하게 해요. 그러고 나서 ‘요즘 공기가 매우 건조합니다. 감기 걸리기 쉬운 날씨가 예상됩니다’라고 말하는 거죠. 그럼 제가 일부러 기침을 한 줄 안다니까요. 그런 위기 상황을 애드리브로 넘기니까 NG가 날 수 없었죠.” 인기가 날로 치솟다 보니 TBC(동양방송)에서는 일기예보를 뉴스 뒤에 붙이지 않고, 독립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서 별도 편성했다. 당시 TBC 이병철 회장은 김 통보관을 만날 때마다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TBC에서 오래 일해달라”고 부탁했고, KBS 사장은 그를 영입하기 위해 백지수표를 내밀기도 했다. 5백억원 슈퍼컴퓨터보다 숙련된 예보관이 더 필요 요즘 기상청의 일기예보가 자꾸만 빗나가기 때문인지 김동완 기상캐스터를 그리워하는 목소리가 높다. 지금 예전과 달리 기상청은 5백억원에 달하는 슈퍼컴퓨터를 쓰고 있는데, 왜 날씨를 정확히 예보하지 못하는 걸까. 이에 대해 김 통보관은 날씨가 ‘독특한 분야’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날씨 분야는 아무리 최신 기계를 가져다 놓아도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아요. 날씨는 그 나라의 환경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죠.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하잖아요. 한 계절을 적어도 다섯 번은 겪어봐야 날씨를 예측할 수가 있어요. 그러려면 5년의 세월이 필요하잖아요. 슈퍼컴퓨터도 다섯 번은 날씨를 경험해봐야 정확한 자료를 얻을 수 있지 않겠어요? 컴퓨터를 믿으려면 앞으로 좀 더 시간을 갖고 기다려야 해요.” 현재 기상청의 시스템에도 문제가 있긴 하다. 일기예보는 불확실한 미래를 예측하는 일이기 때문에 많은 경험과 지혜가 필요한 분야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짧은 기간에는 얻을 수가 없는 영역의 일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예보관은 기껏해야 3년 근무하면, 다른 업무로 순환 근무를 해야 하는 시스템이다. 예보관의 경력이 길어야 5년을 넘지 못하다 보니 숙련된 예보관이 나올 리 없다. “예보관은 격일 근무를 해야 하고 업무가 힘들기 때문에 기피하는 경향이 있어요. 제도적으로 개선을 해야 합니다. 시간 외 근무, 공휴일 근무, 야근 수당도 줘야 해요. 또 예보관에서 부이사관, 이사관으로 승진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주고, 기상청장도 예보관 출신이 아니면 할 수 없게 해야 해요. 나중에 기상청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엘리트들이 앞 다투어 자원하지 않겠어요?” 그래도 기상예보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다는 사람들을 위해 한 가지 조언을 한다면 “날씨를 정확하게 맞추려 하지 말고, 틀리지 않도록 노력하라”고 말해주고 싶다고. 오늘 최고 기온이 33도이고, 내일 낮 최고 기온이 35도까지 올라갈 것 같아도, ‘내일은 오늘보다 더 덥겠습니다’라고 말하라는 것. 그럼 예보가 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 통보관 역시 시청자들로부터 항의전화를 수도 없이 받았다. 욕을 하도 많이 먹어서 아마 오래 살 거라고 너스레를 떨 정도다. 특히 어린이날 날씨를 틀리게 예보한 기억은 지금도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아내, 5년째 당뇨·실명·다리골절로 병상 투병 중 “어린이날 아침에 자신만만하게 ‘오늘은 어린이들의 얼굴만큼이나 해맑은 날씨가 계속되겠습니다’라고 말했는데, 방송국을 나오기가 무섭게 소나기가 쏟아졌어요. 정말 너무 창피해서 밖에 나갈 수가 없더라고요. 그렇다고 방송국에 다시 들어가자니 사람들 볼 낯도 없고. 그냥 비를 맞고 뚜벅뚜벅 걸어서 집까지 갔죠. 길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김동완씨 오늘 비 안 온다더니 어떻게 된 거예요?’라고 물어봤고, 라디오에서는 ‘일기예보가 틀려서 어린이날 행사를 취소한다’는 방송이 나왔어요. 속이 얼마나 타들어 가던지…. 집에 가서 아내에게 화풀이를 했죠, 뭐(웃음).” 현재 김 통보관의 아내는 병상을 지키고 있다. 20년 전부터 당뇨 때문에 고생을 하다가 5년 전 합병증으로 실명까지 왔다. 실명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욕실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병원에서 인조 뼈를 넣어 수술을 했지만, 앞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재활 훈련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아내는 다리를 못 쓰게 됐고, 그로부터 3년을 침대 위에서 보냈다. 다리를 못 쓰면서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 그 약한 몸은 더 쇠약해졌다. “아내가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 있으니 제가 대소변을 다 받아냈어요. 그나마 그 일은 쉬운 축에 속해요. 저 혼자 힘으로 아내를 욕실로 옮겨 목욕시키는 건 너무 힘들더라고요.” 아내의 병 수발을 하던 김 통보관도 체중이 8kg이나 빠질 정도로 건강이 나빠졌다. 아들 딸들이 ‘“이러다가 아버지가 먼저 죽게 생겼다”면서 어머니를 요양원으로 보내자고 간청했다. 하지만 김 통보관은 아내를 보낼 수가 없었다. “자식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했어요. 내가 사회적으로 명성을 얻고 성공할 수 있었던 게 바로 아내의 헌신 덕분이었다고 얘기했어요. 제가 방송 생활하는 33년 동안 혼자서 5남매를 다 키우고 대학까지 보냈어요. 저는 그저 방송하고 사회생활하느라 집안일에는 하나도 신경을 못 썼거든요. 제가 아내를 챙겨줘야지 누가 챙겨줍니까.” 하지만 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내자는 자식들의 성화는 시간이 갈수록 더해만 갔다. 그러던 중 지난 7월, 정부에서 요양원 비용 80%를 지원해주는 제도를 발표했다. 끝내 자식들을 이기지 못한 김 통보관은 결국 두 손을 들었다. 그렇게 아내를 요양원으로 보낸 지 이제 겨우 두 달이 흘렀다. “저도 자꾸 몸이 약해지니까 차라리 체계가 잘 잡혀 있는 전문 기관에서 간호받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요양원에 가서 면회를 하고 돌아올 때마다 눈물이 나서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아요. 다시 집에 데려오고 싶은 생각만 간절해요.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모릅니다.” 국회의원 출마, 30억원 전 재산 날렸지만 후회 없어 2000년 김 통보관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가 젊은 시절 힘들게 모았던 전 재산 30억원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지금 그의 주머니는 텅텅 비어 있다. 하지만 총선 출마를 후회하지는 않는다. 인생살이를 배웠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니, 이제는 사람 얼굴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다. 30억원이라는 비싼 수업료를 내면서 배운 것이다. 더 이상 돈에 대한 욕심도 없다. 명예에 대한 욕심 역시 그렇다. “전성기 때는 하루라도 방송을 쉬면 못 살 것 같았어요. 날씨예보를 저 아닌 다른 사람이 한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거든요. 방송을 시작한 꼭 33년 되던 1997년 11월부로 방송 인생을 접었어요. 그런데 의외로 아무렇지도 않더군요. 이제는 편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웃음).” 73년 인생을 살아오면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제 삶에 큰 욕심은 없다. 다만, 한 가지 꿈은 있다. 일주일에 하루 10분 정도 날씨와 관련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싶다. 날씨를 토대로 레저, 산업, 낚시, 스포츠 등과 연계해 종합적인 일기예보를 전달하는 게 그의 마지막 소망이다. 평생토록 일기예보를 했지만, 여전히 일기예보는 그에게 목마름이고, 에너지를 만드는 원동력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자리를 뜨면서도 “오늘의 날씨는 덥고 습도가 높을 예정이니, 짜증내지 말고 하루를 즐겁게 보내시길 바랍니다”라는 유쾌한 멘트로 마무리하는 김 통보관. 날씨가 곧 그의 인생이다. 앞으로도 많은 시청자들은 ‘일기예보’를 보면서 ‘김동완’이라는 이름 석 자를 기억할 것 같다.■글 / 김민주 기자 ■사진 / 이성훈

      2008.09.08 00:00

    • 연예

      ‘외상성 뇌출혈’로 1년째 병상투병중인 원로스타 트위스트 김

      1960~197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영화배우 트위스트 김. 그가 1년째 식물인간 상태로 병상에 누워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세간에 충격을 주고 있다. 음란물 명의 도용 사건 이후, 한동안 소식을 들을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식물인간’ 상태였기 때문이다. 서울 도봉동의 한 병원에서 그를 만나봤다.트위스트 김(70)의 병상 투병 소식을 접하고, 기자가 병원을 찾은 것은 지난 9월 13일. 6층 병실에서 만난 트위스트 김은 머리가 하얗게 세었고, 코와 목에 호스를 끼고 있었으며, 마른 장작처럼 깡마른 상태로 휠체어에 앉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과거 무대 위에서 뛰어다니며 왕성하게 활동하던 트위스트 김이 맞나 의아할 정도였다.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병실에서 그를 간호하고 있던 부인 이옥이씨와 조카 김 모씨에게 그간의 안타까운 사정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1년 동안 세번의 뇌수술 받아 1964년 영화 ‘맨발의 청춘’으로 데뷔해 ‘잃어버린 태양’, ‘파란능금’ 등 1백5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전성기를 누렸던 영화배우 트위스트 김. 그는 재치 있는 입담과 뛰어난 춤 솜씨로 영화뿐 아니라, 각종 TV 쇼 프로그램에서도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특히 국내에 ‘트위스트’ 춤을 처음 소개해, 예명이 ‘트위스트 김’이 됐을 정도다. 그런 그에게 갑자기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은 2003년. 일부 성인 사이트에서 ‘트위스트 김’이라는 이름을 도용하면서부터다. 당시 트위스트 김은 명예훼손으로 그들을 고소했지만, 관련 법률이 없던 터라 ‘패소’하고 말았다. 한창 각종 영화와 TV 프로그램 등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다양한 활동을 하던 그가 ‘음란물 사이트의 운영자’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모든 일이 ‘뚝’ 끊겼다. 부인 이옥이씨는 “아무리 ‘아니다’라고 외쳐도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했다”고 밝혔다.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까지 소문이 다 퍼져 일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어요. 사람들하고 연락도 다 끊기고 정말 힘들었죠.” 이로 인해 트위스트 김과 그의 부인은 극심한 우울증까지 겪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난 2005년 6월, 트위스트 김의 이름을 딴 성인 사이트 운영자에게 1천만원의 벌금형이 선고되면서 트위스트 김은 ‘음란물 사이트 운영자’라는 혐의를 벗을 수 있었다. 그 뒤 ‘트위스트 김’이 무죄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도 다시 들어오기 시작했다. 2005년 10월에는 일일드라마 ‘맨발의 청춘’에 출연했고, CF 촬영과 영화 촬영을 하자는 제의도 들어왔다. 하지만 서서히 ‘음란물 사이트’ 파문에서 벗어나고 있던 어느 날, 트위스트 김은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부인 이옥이씨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모습.2006년 9월, 한 호텔에서 공연을 하다가 넘어져서 ‘외상성 뇌출혈’을 일으킨 것이다. 당시 뒤로 넘어지면서 뒷머리 부분에 큰 상처를 입고 수술을 받았다. “지금이 9월이니까 사고 난 게 딱 1년 전이네요. 당시 의사 말로는 3~4개월이면, 회복될 거라고 했어요. 다행히 수술 후, 경과가 좋아서 말도 잘하고 식사도 할 수 있었죠. 조금씩 걸어 다니면서 노래를 부를 정도였거든요. 하지만 뇌에 다시 물이 차기 시작해 2차 수술에 들어갔죠.” 회복 기간은 1차 수술 때와 비슷했다. 2차 수술 역시 상태가 호전되는 듯했으나, 다시 뇌에 피가 고인다는 진단을 받고, 3차 수술을 감행했다. 그렇게 1년 동안 세 번의 수술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결국 합병증으로 폐와 신장에도 이상이 생겼고, 지금은 말도 못하고, 혼자서는 몸도 가누지 못하는 상태다. 부인 이씨는 “남편이 저렇게 아프고 보니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이런 상태를 누구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고 밝혔다. 평소 건강이 좋아서 그나마 살아 있는 것 현재 트위스트 김은 병원에서 재활 치료를 받고 있다. 혼자서는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부인과 조카가 옆에서 교대로 그를 간호하고 있었다. 그나마 트위스트 김은 평소 운동을 많이 해서 건강했기 때문에 이 정도로 회복된 것이란다. “원래 폐활량도 좋고 건강했기 때문에 그래도 이 정도로 회복이 된 거라고 하네요. 안 그랬으면 벌써 돌아가셨다는 거죠. 젊은 사람이라도 가망이 없을 거라고 그랬는데, 일어났잖아요.” 병원에서는 점점 좋아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가족들 입장에서는 본인이 말을 못하기 때문에 상태를 알 수가 없어 답답하기만 하다. 그는 목에 연결된 고무 호스를 통해 제공되는 ‘죽과 두유’로 식사를 대신하고 있다. 가까이 다가서서 자세히 얼굴을 보니 트위스트 김의 얼굴색은 매우 좋아 보였다. 가끔 눈을 떠서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는 등 꼭 사람을 알아보는 것 같았다. “선생님, 빨리 쾌차하세요”라고 말을 건네자, “알았다”는 듯이 눈을 느리게 깜박거린다. 알아듣는 것 같았다. 옆에 서 있던 트위스트 김의 조카가 “말을 알아듣기는 하시는 것 같은데 말을 못하니까 답답하죠”라고 한다. 부인과 조카가 트위스트 김의 옆에서 교대로 간호를 하고 있다.부인 이외에 1년째 트위스트 김을 간호해주고 있는 또 한 사람은 바로 그의 조카 김 모씨다. 한때는 ‘전원일기’, ‘대추나무 사랑걸렸네’ 등에 출연하기도 하는 등 연기자를 꿈꾸었던 그녀다. 트위스트 김과 같이 공연을 다니기도 해 트위스트 김에게는 자식과도 같은 존재다. 부인 이옥이씨 역시 조카에게 각별한 고마움을 표시했다. “쟤(조카를 가리키며) 없었으면, 나도 벌써 쓰러졌을 거예요. 나도 나이가 있는데 체력이 안 되잖아요. 정말 고맙지.” ‘긴 병에 장사 없다’는 옛말이 있다. 아무리 아버지 같은 분이지만 조카가 이렇게까지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는 걸 보니 트위스트 김 부부와의 각별한 인연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트위스트 김에게는 1남 1녀의 자식이 있다. 하지만 딸은 미국에서 살고 있어 자주 올 수 없는 상황이고, 아들은 일산에서 학원 강사로 일하고 있어 1주일에 한 번 들른다고 한다. 현재 부인은 여러 가지 주변 상황 때문에 심신이 매우 쇠약해 있는 상태다. 음란물 사건 이후, 3~4년 동안은 일이 ‘뚝’ 끊겼고, 2005년 무혐의가 밝혀지면서 일을 시작할 무렵, 사고가 났다. 때문에 경제적인 부담이 큰 상황이다. 1년 동안의 병원비가 벌써 수천만원이 넘는다. 또 한 가지 부인의 걱정은 성인 사이트 명의도용 사건 중 ‘민사’ 재판이 아직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몇 년이 흐르는 사이에 담당 판사도 바뀌고, 또 남편이 1년째 아무 말도 못하고 누워 있으니 재판에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다. 언제쯤 이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 기약이 없어 더 답답하다. 지난 몇 년간의 소송과 세간의 비난으로 극도로 예민해져 있는 부인 이옥이씨는 “지금은 몸도 아프고, 너무 힘들어서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다”며 “빨리 남편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만을 바란다”는 이야기를 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부인이 병실을 나간 뒤, 다시 한번 트위스트 김에게 다가갔다. “선생님 기분 괜찮으세요? 조만간 건강해진 모습 뵈러 또 찾아올게요”라고 하자 역시나 눈을 크게 깜박인다. 화려했던 원로 스타의 쓸쓸한 투병, 트위스트 김의 빠른 쾌유를 진심으로 바란다. ■글 / 김민주 기자 ■사진 / 원상희

      2007.10.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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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상에 누워 있는 ‘박치기왕’ 김일과 애틋한 정 나누는 이왕표

      “선생님께는 팬들의 박수와 환호성이 좋은 약이죠” 링이 아닌 병상에서 사투 벌이는 ‘박치기왕’ 김일을 극진히 보살피고 있는 이왕표. 두 사람의 특별한 사연이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있다. 프로레슬러 사제지간으로 지낸 30년 동안 이왕표는 박치기왕 김일을 아버지 이상으로 생각했을 정도. 스승을 위해서라도 프로레슬링의 인기를 되찾고 싶다는 이왕표의 애틋한 마음을 들어봤다. 사제지간으로 만난 30여 년의 ‘끈’ 그때 그 시절, 그가 나오면 ‘무조건’ 이길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상대 선수가 의자로 때리고, 심판의 눈을 피해 무자비한 반칙을 가해도 팬들은 그의 ‘한 방’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우리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의 ‘박치기’가 시작되면 TV 앞에 모인 사람들은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질렀다. 가장 정직해야 하는 링에서 반칙을 일삼는 ‘나쁜’ 상대를 응징하는 모습은 차라리 숭고했다. 그는 우리의 영원한 박치기왕이었고, 어린이들의 우상이었다. 자신보다 체격이 건장한 외국 선수를 쓰러뜨리는 모습에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심어줬다. 박치기왕 김일 선생(75)은 그런 존재였다.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던 이왕표(50)는 김일 선생이 출연한 영화를 넋을 놓고 보곤 했다. 그리고 링 위에서 악당을 무찌르는 ‘프로레슬러’가 되는 것이 그의 꿈이 되었다. 이왕표가 열아홉 살 되던 해, 일간지에 ‘김일 도장 1기생 모집’ 광고가 났다. 무조건 도장으로 찾아간 그는 꿈에서나 볼 수 있던 김일 선생을 곁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하지만 예상대로 훈련은 혹독했고 맞기도 많이 맞았다. 욕을 얻어먹는 것은 이골이 났을 정도. 당시 김일 선생은 그에게 무섭고 다가서기 어려운 존재였다. 하지만 스승은 190cm가 넘는 제자를 예사롭지 않게 봤다고 한다. 박치기왕 김일. 키 185cm에 130kg의 거구로 링 위에서 거칠 것 없이 포효하던 그는 지금 사각의 링이 아닌 병상에 누워 있다. 80년대를 거치면서 퇴락한 프로레슬링의 운명처럼 김일 선생의 삶 역시 평탄치 않았다. 링을 떠난 후에 시작한 사업은 줄줄이 망했고, 그 스트레스는 그의 몸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거기에 박치기 후유증으로 뇌혈관 질환까지 생겨, 급기야 그는 1992년 겨울 속초 앞바다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다행히 그의 팬이던 을지병원 이사장의 배려로 입원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유일한 후계자 이왕표 대표가 곁을 지켰다. 그리고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휠체어에서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지던 김일 선생이 병상에 누운 지 2년 만에 일어난 것이다. 이는 이왕표 대표의 극진한 보살핌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저도 일이 많아서 선생님을 찾아뵙는 것이 힘들 때도 있죠. 하지만 선생님을 뵈면 마치 부모님을 뵙는 것처럼 좋아요. 요즘도 레슬링 경기장에 자주 모시고 가는데, 선생님께서 ‘경기장에 가서 앉아 있는 게 가장 행복하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에요.” 얼마 전 김일 선생은 대장을 잘라내는 큰 수술을 받았다. 당시 이왕표 대표는 시합 때문에 미국에서 다시 멕시코로 가야 했지만 그는 멕시코로 들어가는 비행기표를 예약하지 못했다. 스승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김일 선생은 큰 수술을 이기고 거뜬히 일어났다. 그리고 이왕표는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한 달에 4~5번은 꼭 병문안을 가서 스승의 말동무가 되었다. “선생님은 정말 무서운 분이었어요. 카리스마가 얼마나 대단하셨는지 눈빛만 봐도 스르르 뒷걸음질칠 정도였죠. 가르치실 때도 항상 엄하셨어요. 그런데 선생님의 막내아들이 군대에서 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제 앞에서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셨어요. 그날 이후로 선생님을 아버님같이 생각하게 됐죠. 강하게만 보이던 분이 제 앞에서 눈물을 흘릴 정도로 저를 믿어주셨거든요.” 김일 선생은 1994년에 이왕표를 정식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왕표는 김일 선생의 뒤를 이어서 프로레슬링을 되살려야 하는 책임을 진 것이다. 프로레슬링 방송 재개가 ‘꿈’ 이왕표의 하루는 짧기만 하다. (사)대한종합격투기협회 회장, 한국프로레슬링연맹 대표, 선문대학교 겸임교수, 이왕표 스포츠센터 대표. 이 모든 것이 그가 맡은 직함이다. 프로레슬링에 관련된 일에는 그가 참여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 그러면서도 115kg의 우람한 몸을 유지하기 위해 새벽 6시에 일어나 6시간 동안 운동을 한다. 1년에 20회 정도 열리는 프로레슬링 경기에 출전하고, 1년에 4~5번 해외 원정 시합도 치러야 한다. “체력 관리를 철저히 하고 있어요. 믿기 힘들겠지만 115kg 몸무게 중 92kg이 근육입니다. 체지방 검사를 하면 근육량이 100%를 넘는다고 나와요.(웃음)” 그는 운동선수에게 치명적인 ‘천식’을 이겨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10여 년 전부터 시합 뒤에 호흡 조절이 안 될 정도로 상태가 심했지만, 병원 치료와 꾸준한 운동으로 이겨냈다. 이런 사연이 알려지면서 천식알레르기협회에서 제2대 홍보대사로 선정되어 활동중이다. 이런 꾸준한 자기 연마의 목적은 단 하나, 프로레슬링의 부활이다. 30여 명에 불과한 프로레슬러, 곳곳에 빈자리가 눈에 띄는 경기장, 방송 중계가 되지 않는 현실 등 그가 해결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얼마 전 부천에 이왕표 스포츠센터를 오픈한 것도 후배들이 먹고사는 걱정 없이 운동에 열중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쇼 프로그램에 후배들을 출연시키는 것도 인지도를 높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물론 마음에 안 드는 쇼 프로그램도 있어요. 하지만 프로레슬링을 알리는 것이 우선이에요. 이번에 스포츠센터를 열었는데, 후배들이 마음 놓고 운동할 수 있게 하려구요. 무엇보다 프로레슬링 경기가 방송 중계되도록 만드는 게 급선무입니다.” 그는 요즘 프로레슬링 방송 재개를 위해 동분서주하는데, 케이블 TV를 통해 그의 노력이 가시화되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은 프로레슬링 경기가 방송되기 위해서 해결해야 할 일이 많다. 스폰서를 찾아야 하고, 선수들도 더 모아야 한다. “미국의 프로레슬링처럼 인기를 끌어야죠. 후배들도 열심히 하고, 저도 노력하고 있으니까 3년 정도면 예전의 인기를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국내 유일의 프로레슬링 챔피언 이왕표. 그리고 70년대 어린이들의 영웅이던 박치기왕 김일. 30년 동안 이어져온 두 사람의 끈이 프로레슬링의 부활로 열매 맺기를 기대해본다. 글 / 최영진 기자 사진 / 백성우

      2005.10.01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