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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뷰] 봉하마을서 괴로웠던 1년, ‘시민 노무현’이 되기까지

      연예 인터뷰

      [인터뷰] 봉하마을서 괴로웠던 1년, ‘시민 노무현’이 되기까지

      영화 ‘시민 노무현’ 백재호 감독. 사진제공|콘텐츠판다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를 맞이해 뜻깊은 영화 하나가 개봉한다. 퇴임 이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봉하마을서 지낸 454일을 그린 영화 <시민 노무현>(감독 백재호)이 그 주인공이다.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봉하마을로 내려가 지내면서 관련 자료들을 보는 시간이었어요. 그 안엔 ‘노무현’이란 사람이 내내 뭔가를 시도하다가 좌절하는 기록이 있는데, ‘좋은 세상을 만들려는 이 대단한 사람이 이렇게까지 해도 안 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제 자신이 엄청 작게 느껴지더라고요. 그걸 이겨내는 게 정말 어려웠어요.” 다음은 22일 진행된 백재호 감독과의 일문일답이다. Q.가장 원론적인 것부터 물어볼게요. 왜 ‘노무현’이었습니까? A.제가 광주 출신의 서울 사람이에요. 정치와 사회에 관심이 많았고, 그 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동경의 대상이었죠.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는 비보에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리고 더 궁금해졌죠. 좋은 세상이 오길 바랐고, 그걸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컸던 사람이 왜 이렇게 됐을까. 그럼 좋은 세상이 오는 건 불가능한 일일까. 이런 의문에서 시작하게 되었어요. Q.지금까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다룬 콘텐츠가 많이 나와서, 한편으론 기시감이 든다는 지적도 있는데요? A.그런 우려의 시선은 이 작품을 계획할 때부터 유념하고 있었어요. 10주기라 비슷한 작품들이 나올 거라고도 생각했고요. <시민 노무현>에선 내가 느낀 걸 있는 그대로 보여줘야겠다고 결심했죠. 직접 봉하마을로 내려가 1년간 지내면서 느꼈던 것들, 그리고 고인의 어록들을 최대한 왜곡되지 않게, 있는 그대로 필름 안에 담고 싶었습니다. Q.영화 속 유시민 작가의 말이 기억에 남아요. 죽음에 대한 얘길하면서, ‘그 선택은 그 분답다’고 했는데, 굉장히 조심스러운 얘기잖아요? A.저 역시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도 고민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유시민 작가도 자신의 말이 얼마나 큰 힘을 지니고 있는지 알고 있는 분이기 때문에, 이제는 얘기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마음 먹고 하신 거로 생각해요. 논란이 되어도 충분히 얘기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뜻이죠. Q.생전 자료 분량에 한계가 있진 않았나요? A.알려지지 않은 생전 자료는 생각보다 훨씬 많아요. 재임 기간 발언이 왜곡돼 고생했던 탓에, 이후에 그분이 기록을 더 자주 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일거수일투족 기록한 것들을 보면서, 저 역시 노 전대통령의 심리 변화를 발견할 수 있었고요. 그의 마음, 그리고 여러 선택들을 제대로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영화’라는 매체를 택했고, 정말 옆을 지켰던 사람들의 부연 설명을 넣어 차별점을 두려고 했어요. 노무현 희화화 콘텐츠만 봤던 일부 1020 세대도 그 분의 진심을 확인할 수 있을 거로 기대합니다. Q.생전 자료를 보면서 확인한 노 전 대통령의 진짜 얼굴은 무엇일까요? A.정말 많은 걸 알고 있고 대단한 사람이지만 겉으로 티내지 않고 대중과 눈높이를 맞추려고 했던 사람. 그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주변에 있는 대단한 학자들보다도 더 공부하려 했고, 시민으로 돌아와 살면서 좋은 세상을 모두와 함께 해나가려고 했죠. 시민의 힘으로 좋은 세상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걸 몸소 실천한 거예요. Q.마지막으로, 영화 내내 ‘노무현 정신’이란 단어가 나오는데 감독이 생각하는 ‘노무현 정신’이란 어떤 것인가요? A.약자와 타인에 대한 배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바로 ‘노무현 정신’이 아닐까요?

      이다원 기자 2019.05.24 07:58

    • KBS, 노무현 전 대통령 10주기 특집 ‘봉하마을에서 온 편지’ 방송

      연예

      KBS, 노무현 전 대통령 10주기 특집 ‘봉하마을에서 온 편지’ 방송

      KBS 제공.KBS1은 오는 23일 오후 10시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를 맞아 특집 <봉하마을에서 온 편지>를 방송한다 <봉하마을에서 온 편지>에서는 2008년 봄 노 전 대통령이 귀향 후 일상을 담은 70시간 이상 분량 61개 테이프 원본을 활용해 노무현 전 대통령 생전을 되새겨본다. 11년 전 촬영 당시와 지금의 봉하마을을 비교하고, 촬영 당시 심은 장군차 나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등 소소한 환경 변화도 엿본다. 봉하마을을 떠난 사람들과 새롭게 찾아온 사람들, 생태문화공원으로 조성된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와 생가터, 사저 등도 소개된다. 이밖에 노 전 대통령이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루고자 했던 농촌 살리기, 환경 지킴이 활동 등 계획과, 2008년 방송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의 사연도 조명한다.

      손봉석 기자 2019.05.22 22:08

    • 바른미래당 손학규 대표 “봉하마을도 참배할 것”

      생활

      바른미래당 손학규 대표 “봉하마을도 참배할 것”

      바른미래당 손학규 신임대표가 3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을 방문해 고 이승만·박정희·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 묘역을 모두 참배했다. 손 대표는 “그동안 우리가 현충원을 참배하면서 어느 대통령은 가고 어느 대통령은 안 가고 했다”며 “바른미래당의 정신은 영호남·진보보수를 아우르는 중도개혁 통합정당이다. 시간을 잡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안장된 봉하마을도 참배할 것”이라고 말했다. 손학규 대표는 또 “우리나라 대통령 모두를 하나로 모시면서 번영, 사회적 안정, 변화와 통일이 함께 이뤄지기를 기원했다”고 덧붙였다. 손학규 바른미래당 신임 당대표가 3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권호욱 선임기자손 대표는 문재인 정부와 관계설정에 대해 “촛불 정신을 제대로 지켜야 된다고 생각한다. 촛불정신은 패권정치 청산이고 국민주권의 확립”이라며 “바른미래당은 그 정신에 입각해서 경제를 살리고 정치를 제대로 개혁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가 협치와 정치개혁을 위해서 해나가야 할 일이 많다”고 했다. 손학규 대표는 이날 당대표 취임 후 국회에서 처음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촛불 정신에 입각해 패권 정치를 극복하고 국민 주권의 시대를 열기 위해 정치개혁에 앞장 설 것”이라며 “선거제도 개편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손 대표는 “동서가 화합하고, 경남 호남이 화합하고 보수 진보가 결합해 (탄생 한)중도 개혁의 통합 정당으로 새로운 정치를 열어나갈 것”이라며 “(바른미래당은)온갖 세대가 골골루 포진해 있다. 세대 초월한 통합이 됐다”고 말했다. 손학규 대표는 또 “저는 함께 잘 사는 나라를 위해 정치 개혁을 하겠다고 했다”며 “기업과 노동자가, 대기업과 중소기업, 자영업자가 함께 잘 사는 나라를 만들어 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방탄소년단

      손봉석 기자 2018.09.03 10:33

    •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9주기…與, 추도식 열리는 봉하마을 모인다

      생활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9주기…與, 추도식 열리는 봉하마을 모인다

      더불어민주당 지도부·의원들 대거 참석…평화·정의당 의원들도 합류 더불어민주당 지도부와 소속 의원들은 23일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9주기 추도식에 대거 참석해 고인을 추모한다.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이날 오후 2시 경상남도 김해 봉하마을에서 열리는 추도식에는 추미애 대표와 홍영표 원내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는 물론 의원 수십 명과 당직자들이 참석할 예정이다. ‘노무현의 마지막 비서관’이라 불리는 김경수 경남지사 후보 등 6·13 지방선거에 출마한 후보들도 전국에서 모여들 것으로 보인다고 연합뉴스는 보도했다. 이날 정세균 국회의장은 추도식에서 공식 추도사를 낭독한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앞줄 가운데) 등 당 지도부가 1일 오후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에 있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하고 있다. 연합뉴스 민주평화당 장병완 원내대표와 김경진 상임선대위원장, 정의당 이정미 대표와 노회찬 원내대표도 추도식에 참석한다.

      윤진근 온라인 기자 2018.05.23 06:59

  • 주간경향

    • 사회 특집

      [포커스]그 후 8년, 다시 찾은 봉하마을

      ㆍ끊이지 않는 추모행렬… 5월 한 달간 주말 사저도 공개 봉하마을 1.5㎞. 녹색표지판에 정식으로 적혀 있는 글자. 플래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그윽한 찔레꽃 향기 같은 노무현 대통령님! 당신이 그립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당선을 노무현의 이름으로 축하드립니다.-김해 노사모 일동” 많은 상념이 스쳐지나간다. 벌써 8년이다. 8년 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다음 주 은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을 방문해 ‘식지 않은 추모 열기’를 취재했다. ‘봉하마을’은 국가의 공식 도로안내판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30-6.’ 노 전 대통령의 사저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찍어 갔다. 그에 앞선 주말. 덕수궁 앞에 설치된 시민분향소에 국화꽃을 들고 추모하러 가는 시민의 발길을 경찰이 막았다. 뚫고 들어가려는 시민은 격리돼 끌려갔다. 국화를 든 가족을 병력으로 에워쌌다. 군복을 입고 가스총을 든 보수단체 인사들은 새벽에 몰려가 시민분향소를 부수고 노 전 대통령의 영정을 전리품처럼 치켜들었다. 8년 전 봉하마을의 밤. 어둑해진 가운데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부엉이바위를 경찰의 서치라이트가 비추고 있었다. 만일의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다지만 후안무치한 풍경이었다. 8년 전, 비극의 장소 부엉이바위로 올라가는 길. 추모객들이 돌탑을 쌓았다. / 정용인 기자 민주주의 성지… 그 후 8년 서거 후에도 봉하마을을 찾는 추모객들의 발길은 잦아들지 않았다. 오히려 늘었다. 당시 표지를 장식한 이 ‘현상’을 표현한 말은 다음과 같았다. “봉하마을, 민주주의 성지 되나.” 이 다시 봉하마을을 찾은 것은 5월 16일. 여전히 부엉이바위는 아무 말 없이 그곳을 찾은 추모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관광버스가 정차하던 텅빈 공터였던 자리에는 노 전 대통령을 기리는 ‘아주 작은 비석’이 마련돼 있다. 넓적한 비석 주변엔 시민들이 십시일반 모금으로 마련한 박석이 박혀 있다. 비석에는 ‘대통령 노무현’이라는 글자만 새겨져 있다. 다시 밑의 동판에는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입니다’라는 노 대통령의 생전 어록이 신영복 선생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신영복 선생도 지난해 1월 타계했다. 평일 오후지만, 간간이 이어지는 추모객의 행렬은 계속됐다. 대통령 서거 후 계속된 추모 열기를 다룬 「주간경향」 (당시 제호 Weekly경향) 표지.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돌아가신 게.” 경기도 안성에서 근처에 다른 업무차 왔다가 들렀다는 정명훈(33), 정유진(여·29) 부부의 말이다. 세 살배기 딸과 함께 왔다. 오늘 처음으로 온 것이라고 했다. 물었다. 안 돌아가셨다면, 좋은 일을 하셨을까. “그럼요, 그럼요.” 옆에 서 있던 부인 정유진씨가 적극적으로 말했다. 남편 정명훈씨는 이렇게 덧붙였다. “정치에 무지해서 잘 몰랐는데, 뒤늦게 뉴스를 뒤져보고서야 알았습니다. 돌이켜보니 괜찮은 분이었다는 것을요.” 어떤 영상이 기억에 남느냐는 질문에 그는 태안 기름유출 사건 때 공무원들 앞에서 노 대통령이 자신이 다 책임질테니,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피해복구를 해달라고 부탁하던 영상과 전시작전통제권을 두고 국방부 고위간부들 앞에서 연설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이날 방문객들 중에는 정씨 부부처럼 가족단위로 온 젊은 부부들이 많았다. 대구에 사는 최수정(여·42), 정한덕(41)씨 부부도 앞의 부부처럼 이번이 첫 방문이라고 했다. 초등학교를 다니는 두 딸을 데리고 1시간30분 걸려 봉하마을에 왔다. 최씨가 말했다. “오고 싶은 마음이 항상 있었는데, 시간이 주말밖에 안나고, 또 주말에 오면 복잡하니 큰 결심하고 시간을 내게 되었어요.” 원래 정치에 관심이 없어서 한 번도 투표 한 적이 없던 최씨는 “노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소식을 TV에서 보면서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났다”고 회상했다. “참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인터넷으로 노 전 대통령 관련 기사나 일화를 찾아보면서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고… 그냥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리면서 가슴에 뭔가 남겨진 것이 있었습니다.” 최씨 부부가 사는 곳은 대구다. 지역정서상 그런 감정을 주변에 드러내는 것은 쉽지 않다. “맞아요. 그래도 저 같은 사람도 많습니다. 말만 안하고 있지 가슴속으로는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들 말이에요.” 최씨는 그 뒤로 정치에 대해 많이 귀를 기울이고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한다. ‘눈물이 나오는데 주변에 민망해서 삼키고 있다’는 최씨에게 ‘남편보다 더 적극적인 것 같다’고 말을 건네니, 저만치 떨어져 있던 남편 정씨가 “끌려다닙니다”라면서 미소를 보였다. “아이들에게도 설명해주던 참이에요. 문재인 대통령은 아는데 노무현 전 대통령은 누군지도 잘 모르거든요.” 부엉이바위에 오르는 산길. 길 주위로 야생초를 설명하는 작은 팻말이 오밀조밀하게 꽂혀 있다. 서거 2년 뒤쯤 기자가 다시 방문했을 때는 부엉이바위 쪽으로 가는 길이 나무철책으로 막혀 있었는데 지금은 그 철책은 철거되고 없다. 바위틈 동굴 속에 마련되어 있는 작은 암자가 생각나 들러보았지만 암자를 지키던 비구니스님은 출타했는지 빈 동굴 속에는 촛불만 밝혀져 있었다. 부엉이바위가 잘 보이는 길가에 자그마한 조약돌을 쌓아올린 돌탑이 만들어져 있다. 5월 16일, 봉하마을 대통령 묘역을 찾은 추모객들이 고개 숙여 묵념하고 있다. / 정용인 기자 새로 조성된 생태문화공원 부엉이바위 아래도 달라져 있었다. 작은 연못이 만들어졌다. 안내설명판을 보니 ‘거울못’이라고 하여 ‘봉화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모아 타원형 모양의 영지를 조성해 수면에 투영된 봉화산과 부엉이바위를 차분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한 곳’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다. “원래는 조용히 추모하는 공간인데, 이번 어린이날만 공간 성격을 바꿔 거기에 뗏목을 띄웠습니다. 온 분들이 봉하마을 어린이날 행사는 상업적으로 오염된 다른 어린이날 행사와는 다르다고 말해주던데요.” 노 대통령 사저 건너편, ‘추모의 집’이라는 이름이 붙은 가건물 한편의 사무실에서 만난 이원애 노무현재단 봉하사업본부 팀장의 말이다. 부엉이바위 밑 작은 연못을 비롯, 김해시 근린공원 사업으로 ‘생태문화공원’이 만들어진 것은 지난해다. “원래 봉하가 시골 구석에 있다보니까 교통편이 좋지 않아 차가 없는 분들이 접근하긴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젊은 사람들 방문은 별로 없었고 거제나 남해 같은 관광지를 가는 길에 고속도로에서 나와 잠깐 들르는 단체관광객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생태문화공원이 만들어진 뒤 젊은 가족단위 방문객이 대폭 늘었습니다. 듣기로는 인근 김해나 창원까지 포함해서 도심에 있는 대부분의 공원이 도로를 끼고 있어, 여기처럼 풀밭에 돗자리를 깔고 안심하고 아이들이 뛰놀 수 있는 공원은 별로 없다고 해서….” 이 팀장이 개인적으로 ‘제일 아름답게 보는 풍경’은 할머니에서 유모차를 탄 손주까지 삼대(三代)가 놀러와 평화롭게 머물다 가는 것이다. “가족 나들이 나온 그런 분들을 감사하게 생각해요. 지금까지는 어떻게 보면 정치색이 없진 않았거든요. 대통령이 바랐던 것은 사람들이 와서 시간을 보낼 만한, 거닐 만한 공간이 되는 것이지 않았을까요. 무슨 사상의 전쟁터가 아니라 생태문화공간으로. ‘전직 대통령을 기념하는 공간도 있고 친환경 마을이라 공기도 좋고 신뢰가 있는 공간이 되었구나’ 하는 것이 노 전 대통령이 바랐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도 정치의 바람은 봉하를 비켜가지 않았다. 지난 대선 기간 동안 주요 후보 다섯 명 중 홍준표 후보를 제외하곤 모두 봉하마을을 다녀갔다. 나머지 후보들 중에서도 이재오 후보가 다녀갔다고 조호연 권양숙 여사 비서실장(44)이 말했다. 당선 뒤에는 아직 찾지 않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수락 연설을 한 다음 날 이곳을 찾아 참배한 뒤, 권양숙 여사와 면담을 하고 갔다. 권 여사는 현재 사저에 살지 않는다. “시민에게 돌려줄 집이라고 공언한 뒤 현재는 다른 곳을 구해서 옮기셨습니다. 한동안 새로 살 집 보러가는 데 흥미를 느끼셔셔 집 구경하러 돌아다니시곤 했는데….” 봉하마을을 자주 찾던 참여정부 사람들은 지금도 비공식적으로 자주 권 여사를 찾아와 만나고 돌아가곤 한다고 그는 귀띔했다. 기자가 방문하기 이틀 전에는 참여정부에서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한 유시민 작가가 다녀갔다. 최근 연간 70여만명이 찾던 봉하마을 방문객이 지난해 80여만명으로 다시 증가추세다. 이 팀장의 말이다. “통상적으로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5월에 찾는 사람이 제일 많지만, 특히 지난해 5월에는 20만여명이 다녀갔습니다. 아마 총선 결과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이번 대선이 끝난 뒤 다시 추모객이 급증하고 있는데, 지난 토요일(5월 13일)이 1만1000여명, 일요일이 1만7500명이었습니다. 평일 방문도 늘었고요.” 내년 전면 공개를 앞두고 5월 한 달간 주말, 노 전 대통령 사저가 일반에게 공개된다. / 노무현재단 제공 대선 후 주말 2만5000여명 다녀가 재단 봉하사업본부가 입주해 있는 추모의 집 가건물 자리에는 ‘지상 2층, 지하 1층’ 규모의 ‘시민문화체험관’이 건립될 계획이다. 계획은 2015년부터 시작했는데 여러 모로 우여곡절이 많았다. 국비 신청 단계에서 3년째 계속 잘리고 있다. ‘이러다가 올해 착공되면 대통령이 바뀌니 특혜준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오겠다고 이 팀장에게 말을 건넸다. “맞아요.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언론에서 그렇게 이야기할 가능성도 없지 않은 것 같아요. 지방재정투자심사도 2015년과 2016년 받았고, 지난해(2016년도)는 김해시로부터 토지매입비까지 확보한 사업인데….” 약 1000평 규모의 연면적 부지 위에 들어서는 시민문화체험전시관은 노무현 대통령의 생애를 담고 추모하는 공간을 만드는 한편, ‘국정체험 교육프로그램’이나 ‘자연체험 교육공간’도 만들 계획이다. “이지원이라든가 수석회의나 장관회의 같은 것을 중·고등학생들이 직접 체험해보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또 노 전 대통령이 하고 싶었던 것인데, 생태복원이나 생태문화공원과 연계해서 자연체험 교육도 해보고 싶고요. 문화예술적 측면에서 보면 지역민을 위한 작은 야외공연 프로그램도 열어보고 싶습니다.” 권 여사가 떠난 빈 사저는 관련 정비작업을 거친 후 내년에 봉하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공개될 예정이다. 그에 앞서 올해는 5월 한 달간 주말, 그리고 노 전 대통령 생일(9월 1일) 전후에 인터넷과 현장 예약접수를 받아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다시 봉하마을의 해가 진다. 땅거미가 질 무렵, 국화 한 송이를 들고 묘역을 찾은 중년의 남성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서울에서 온 김정용씨(55·경영컨설턴트)다. 앞서 만난 추모객들이 이번이 첫 방문인 것과 달리, 김씨는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직후, 그 후 4년 뒤, 그리고 다시 4년 뒤인 이 날이다. “뭐라고 할까요. 마음속에 항상 있죠. 안타깝죠. 이상하게 느낌이 올 때가 있어요. ‘가야겠다’라고. 서거 당시 왔을 때는 표현하기 힘든, 뭐랄까 가슴이 아리는 것이 있었다면 이번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가장 자랑스러워 하던 친구인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잖아요. 완전히 마음이 편하기는 어렵겠지만 조금은 ‘이제는 쉬십시오’ 하는 마음이랄까요. 정권이 바뀌었다고 이뤄진 것은 아니잖아요. 문재인 대통령도 걸출한 인물이니 잘하실 겁니다. 제 마음도 위로받고 싶고…. 항상 응어리져 있는 건 모든 국민이 마찬가지일 거예요. ‘지켜주지 못해 죄송하다’는 마음 말입니다.” 회상하는 김씨의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봉하마을 방문 TIP 수도권에서 자가운전으로 방문하는 경우 막히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편도로 5시간 이상 걸린다. 요즘 내비게이션에는 대부분 ‘봉하마을’이 등록되어 있다. 제일 좋은 것은 KTX를 탄 후 진영역에 내려 택시를 타고 방문하는 방법이다. 진영역에서 약 10분 거리이며 택시비는 5000원에서 6000원이 나온다. 생가 옆 기념품가게에서는 티셔츠, 담요, 문구류, 엽서세트 등 기념품을 구입할 수 있으며 지역특산품으로는 봉하쌀로 만든 막걸리와 봉하 찰보리빵 등이 유명하다. 영농법인 봉하(http://bongha.net)가 운영하는 ‘봉하장터’ 인터넷 사이트에서 친환경 봉하쌀, 우리밀 가공식품, 무농약 양파와 찰토마토 등 먹거리도 구입할 수 있다.

      정용인 기자 2017.05.23 10:02

    • 사회 광복 70년 역사르포

      [광복 70년 역사르포](35)봉하마을 부엉이 바위… 부정과 불의의 구체제에 스스로 몸을 내던지다

      11월 17일 오후, 늦가을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평일인데도 사람들은 많았다. 관광버스도 몇 대 들어왔다. 사람들은 뒷짐을 지고 말 없이 묘역을 이리저리 걸었다. 1960년대 베스트셀러였던 라는 책이 생각났다. 사건으로 구속된 양수정 편집국장은 서대문형무소 사형집행장으로 가는 조용수 사장을 비롯한 사형수의 마지막 모습을 관찰했다. 삶의 마지막 순간을 앞둔 인간의 참담한 심경, 뭐라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순간에 인간은 하늘과 땅을 번갈아 쳐다보는 행태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 모습이었다. 간혹 ‘쯧~쯧~쯧’ 하고 혀를 차는 사람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멍하니 하늘 혹은 뒷산 바위를 쳐다보다 천천히 땅에 박힌 박돌에 쓰인 글을 읽었다. 땅에 박힌 박돌에는 ‘당신이 그립습니다’ ‘당신을 알게 돼 행복했습니다’ 혹은 그냥 ‘고맙습니다’ 등 이런저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경남 진양 봉하마을. 고 노무현 대통령의 생가가 있고, 바로 뒤 양옥집은 퇴임 후 살던 사저이다. 그 뒤로 멀리 그가 투신한 부엉이바위가 보인다. 대통령 퇴임 후 불과 1년 3개월 만에 야트막한 뒷산 봉화산 언저리 바위까지 오르는 데 채 30분이 걸리지 않았다. 흐린 날씨 탓에 시야는 좋지 않았지만 생가 자리, 친환경 농법을 위해 오리를 풀어놓던 논도 보였다. 쓰레기를 치우러 자주 갔던 화포천에는 여전히 개울물이 흘렀다. 지금 시야는 아마 2009년 5월 23일 오전 6시40분 새벽안개가 끼었을 때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곳 경남 진영 봉하마을 봉화산 언저리에 있는 부엉이바위에서 몸을 던졌다. 대통령직에서 퇴임한 후 불과 1년 3개월 만이다. 물론 파란의 우리 현대사에서 ‘전직 대통령’의 운명은 순탄치 않았다. 우리의 전직 대통령은 쫓기듯 해외 망명 길에 오르거나, 최측근의 총격에 의해 죽거나, 깊은 산사에 유폐되고 교도소에 수감됐다. 한 나라의 정치 발전 수준을 다양하게 평가하지만 ‘전직 대통령의 정상적인 활동’ 역시 중요한 척도이다. 나름 정상적으로 활동하는 전직 대통령을 가진 것도 문민정부 이후다. 하지만 전직 대통령이 투신 자살한 사례는 처음이다. 그는 밝게 웃는 모습으로 청와대를 나왔다. 그리고 낙향해 봉하마을의 ‘촌부’로 아름다운 전직 대통령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줬다. 자전거 뒤에 손녀를 태우고 달리는 모습, 친환경 오리 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모습, 찾아온 사람들에게 웃으며 얘기하는 모습 등등 이따금 봉하마을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얼마 안 돼 그는 “자신을 잊어 달라”는 처절한 절규를 하다 끝내 뒷산 부엉이바위에서 몸을 던졌다.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극단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를 자살로 내몬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지금 반성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의 자살은 옳았는가. 철조망이 쳐진 부엉이바위. 2008년 2월 노무현이 청와대를 나온 지 6개월도 안 돼 그의 ‘정치 후원자’였던 박연차의 정·관계 로비 의혹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검찰이 그의 주변을 털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12월 4일 친형 노건평이 세종증권 매각과정에서 인수 청탁과 함께 29억여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언론은 노무현의 사과를 요구했으나 그는 “사과하면 형님의 죄를 인정하는 것”이라며 대국민 사과를 거부했다. 검찰의 노무현 털기는 더욱 노골화됐다. 2009년 3월 26일 한 신문은 이호철 전 민정수석과 정윤재 전 비서관이 금품을 수수했다며 ‘노무현 게이트’라고 명명했다. 이호철과 정윤재는 해당 신문을 고소했고, 결국 이 보도는 오보로 드러났다. 그러나 검찰의 노무현 털기는 전방위적으로 집요했다. 검찰은 정상문 전 총무비서관이 박연차로부터 돈을 받았고, 이 가운데 일부가 부인 권양숙 여사에게 들어간 정황을 포착했다. 돈은 ‘빌린 것’이라는 주장과 ‘받은 것’이라는 주장이 맞섰다. 또 이 돈의 일부가 딸에게 송금됐는데 이 과정에서 불법 혐의가 드러났다. 결국 4월 7일 노무현은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사과했다. 그는 “송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더욱이 지금껏 저를 신뢰하고 지지를 표해주신 분들께는 더욱 면목이 없습니다”라고 솔직히 사과했다. 그다운 솔직한 사과였다.(하지만 정 전 총무비서관이 해운회사 세무조사 무마와 관련해 돈을 받은 혐의는 재판에서 무죄로 드러났다.) 2009년 5월 29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식(노제)이 열린 서울 시청앞 광장(서울광장)에는 수십만명의 추모객이 몰려 그의 마지막 길을 애도했다. 마침내 피의자의 신분으로 검찰 출두 4월 12일 부인 권 여사와 아들 노건호가 검찰에 소환됐다. 검찰과 언론은 노 전 대통령에게 ‘포괄적 뇌물수수죄의 공범’ 혐의를 적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자식을 위해 부인 권 여사가 오랜 후원자로부터 돈을 ‘빌리고’ ‘받고’ 하는 과정에서 일부 법을 어기고 송금된 것이었다. 언론은 더 집요했다. 언론은 봉하마을 그의 집 주변에 고성능 카메라를 설치하고 거의 24시간 가족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했다. 노무현은 4월 21일 “저의 집 안뜰을 돌려주세요”라며 언론에 ‘사정’했다. 그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간곡히 호소한다”면서 “먼 산이라도 바라볼 수 있는 자유, 최소한의 사생활이라도 돌려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언론은 그의 애절한 호소를 외면했다. 4월 22일 그는 ‘사람세상’ 홈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마지막 글을 올렸다. “처음 형님 이야기가 나올 때에는 ‘설마’ 했습니다. …그러나 500만불, 100만불,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됐습니다.… ‘아내가 한 일이다, 나는 몰랐다’ 이 말은 저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 뿐입니다. 이상 더 노무현은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가 없습니다. 자격을 상실한 것입니다. 저는 이미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수렁에 함께 빠져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 이것이 국민들에게 한 그의 마지막 말이다. 4월 30일 노 전 대통령은 ‘포괄적 뇌물수수죄’ 피의자로 검찰청으로 향했다. 언론은 그가 봉하마을에서 검찰까지 가는 길을 헬기까지 동원해 생중계했다. 그리고 그는 검찰청사 앞에서 사진기자들의 포토라인에 서는 ‘수모’를 당했다. 검찰 소환 후 잠시 잠잠하던 노무현은 5월 23일 오전 6시40분쯤 수행 경호원과 함께 사저 뒷산인 봉화산을 올랐다. 늘 가던 산책길이었다. 노무현은 봉화산 중턱에 있는 부엉이바위에 이르러 경호원을 바로 옆에 있는 정토사에 심부름 보냈다. 그리고 부엉이바위에서 몸을 던졌다. 부엉이바위는 그리 높지 않은 산 중턱에 있는 나지막한 바위이다. 그래서 뛰어내려 자살하기에 너무 낮다는 지적이 있을 정도다. 하지만 부엉이바위는 날카롭고 아래쪽까지 이어져 있다. 아마 노무현은 이곳에서 몸을 허공에 날린 것이 아니라, 바위를 향해 자신의 몸을 던졌을 것이다. 그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내던지는 ‘처절한 시도’였을 것이다. 경호원이 그를 찾아 병원에 옮겼지만 이미 숨진 상태였다. 그러니까 그의 최후 모습을 본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는 투신 1시간19분 전인 5시21분 유서를 남긴 것으로 드러났다. 그의 유서는 간명하면서도 솔직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너무 슬퍼하지 마라./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미안해하지 마라./누구도 원망하지 마라./운명이다./화장해라./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오래된 생각이다.” 그의 죽음은 국민에게 충격을 줬다. 500만(장례위원회 추산)이 넘는 인파가 전국에 마련된 분향소에 조문했다. 집요하게 그를 추적하던 방송도 오락 프로그램을 방영하지 않았다. 5월 29일 시청앞에서 열린 노제에는 서울광장과 대한문 앞, 남대문까지 인파로 가득찼다. 하지만 이 모두 덧없는 일이었다. 그는 수원의 한 화장장에서 화장돼 봉화산 정토원에 머물렀다가 그 아래 조성된 묘역에 안장됐다. 지난 11월 17일, 궂은 날씨였지만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를 찾고 있다. 500만의 인파가 전국 분양소에 조문 누가 노무현을 죽였는가. 법무부 장관을 지낸 천정배 의원은 “권력기관의 사유화와 보수언론의 탐욕이 만들어낸 재앙이다”라고 규정했다. 한 언론은 여론조사에서 그의 자살 책임으로 “56.3%는 검찰, 49.1%는 언론을 꼽았다”고 보도했다. 수사에 대한 책임을 지고 검찰 수뇌부가 사퇴했지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검찰도 스스로만의 판단에서 전직 대통령 털기에 나섰을까. 그를 죽음으로 내몬 언론도 서로 책임 미루기로 바빴다. 진보신문은 “비판 대신 증오, 죽은 권력 물어뜯기”라며 보수언론에 책임을 돌렸다. 보수언론은 “진보언론 역시 노무현을 희화화했고, 사망 후 다른 보도행태를 보였다”고 주장했다. 그랬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보수언론이나 진보언론이나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드러났지만 그가 회갑선물로 받은 시계 처리도 국가정보원이 왜곡해 언론에 흘린 것으로 드러났다. 게다가 경찰청장이라는 사람은 ‘자살한 이유는 전날 거액의 차명계좌가 발견됐기 때문’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이렇게 허위발언한 전 경찰청장은 징역 10월을 선고 받고 법정구속됐다. 이런 정황은 노무현 털기에 검찰과 경찰, 국정원 등 사정기관이 총동원됐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노무현이 세상을 떠난 지 벌써 6년이 넘었다. 그래도 묘소에는 꾸준히 사람들이 찾는다. 주말에 60명 예약을 받았다는 인근 식당 주인은 “찾아온 그들은 ‘가슴이 허(虛)해서 왔다’고 한다”고 전했다. 이곳을 경비하는 한 전경은 “묘 앞에서 엉엉 우는 사람도 꽤 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무엇이 ‘허’ 하길래 여기를 찾고, 무엇이 억울하길래 묘 앞에서 통곡을 하는가. 이날 전남 고흥에서 묘소를 찾은 박채주씨(77)는 ‘평소 노무현을 좋아했느냐’는 질문에 “그러죠, 민주주의를 갈망했던 우리에게 권위를 버린 진정한 민주주의 모습을 보여준 분이지요”라고 말했다. 박씨 자신은 4·19 학생혁명에 가담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박씨는 묘역을 나서며 “여기에 안 오는 것이 나았다”면서 “안 왔으면 이렇게 가슴이 아프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침통해 했다. 노무현은 대통령은 가진 절대 권위를 스스로 허물었다. 연줄과 빽으로 자리를 나눠먹던 관행에 익숙한 사람들, 정치자금과 특혜를 나눠 갖던 기업가, 공론을 조성하기보다 특정 이득을 추구하는 언론, 남북 긴장으로 이득을 보던 군인이나 군수업자들에게 그는 분명 ‘별종’이자 위협적 존재였다. 수백·수십 년 우리 정치·경제·사회 체제를 장악했던 이런 구체제가 합세해 노무현을 죽음으로 몰았다. 그는 이 구체제와 싸우다 싸우다 마지막 순간, 그 체제에 남은 몸뚱이를 내던지며 항거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많은 사람을 가슴 아프게 한 그의 마지막 선택은 분명 잘못이었다.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 이상훈 선임기자 2015.11.24 10:51

    • 사회 표지 이야기

      [커버스토리]봉하마을 7일간의 기록

      조문객의 분노와 눈물, 추억 그리고 이별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에서 조문객들이 국화를 든 채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분노 5월 23일 오후 6시 30분. 노 전 대통령의 유해를 실은 검은색 캐딜락이 봉하마을에 들어섰다. 무겁고 팽팽하던 침묵이 깨졌다. “우리 대통령을 살려내라.” 사람들은 울부짖고 또 울부짖었다. 울부짖음은 곧 분노와 뒤범벅됐다.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 검찰, 언론이 ‘대통령을 죽인 자들’로 ‘살생부’에 올랐다. 명계남씨와 성난 지지자들은 마을회관 광장에 임시로 차려진 기자단 천막에 들이닥쳤다. 명씨는 “너희들의 기자정신이 노무현 대통령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며 절규했다. 24일 정식분향소가 차려지고 그 옆 야외천막 프레스센터가 차려지기 전 언론들은 몇 차례 쫓겨나고 들어오기를 반복해야 했다. 이른바 ‘조중동(조선·중앙·동아)’ 기자에 대한 색출 작업도 벌어졌다. 노사모 회관 앞에서는 ‘OOO(한 언론사 대표의 이름)의 개들, 오면 죽는다’는 살벌한 문구가 내걸리는가 하면, 성난 조문객이 프레스센터를 찾아 “왜 조중동 기자에게 프레스 카드를 주느냐”고 항의하는 일도 잦았다. 경향·한겨레에 대해서도 “너희도 똑같다. 반성하라”는 비난이 곳곳에서 나왔다. 23일 봉하로 달려온 정세균 민주당 대표 등 민주당 지도부는 “대통령 죽고 이제야 왔냐” “다 나가라”는 야유 속에 빈소로 향했다.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은 “배신자”라는 비난과 함께 한 차례 조문을 거부당했고, 추미애 의원은 “대통령이 손 내밀 때 뭐했냐”고 면박당했다. ‘정치 보복’의 당사자로 지목된 정부와 한나라당에 대한 분노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가 탄 차가 계란세례를 받고, 김형오 국회의장은 물병세례를 받았다.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 박근혜 전 대표도 조문객에 막혀 발길을 돌렸다. “조문객 여러분, 대통령께서 편히 가실 수 있도록 마음의 길을 열어주십시오.” 마을회관 위 스피커에서는 김만수 전 청와대 대변인의 이 같은 호소가 계속 흘러나왔다. 그러나 옹이진 사람들의 ‘마음의 길’은 끝까지 열리지 않았다. 7일장이 끝나도록 정부 여당 인사는 봉하마을에 들어서지도 못했다. 눈물 5월 24일 오후 2시 30분. 따가울 정도로 땡볕을 내려쪼이던 맑은 하늘에 순식간에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후두둑, 후두둑, 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하늘이 터진 듯 무섭게 퍼부었다. 조문객 행렬은 분향소 앞부터 2㎞ 남짓 이어진 마을 입구까지 늘어서 있었다. 비를 피할 만한 천막도 변변치 못해 속수무책이었다. 하지만 조문객들은 애써 비를 피하려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기다리던 행렬에 그대로 서서 묵묵히 비를 맞았다. 그들 빰에 흐르는 것이 눈물인지, 빗물인지 알 수 없었다. 봉하마을을 찾는 조문객들에게는 노 전 대통령을 생전에 지지했는지, 정치를 같이했거나 특별한 인연이 있는지 하는 것은 큰 상관이 없어 보였다. 조문객들은 노 전 대통령을 가여워하며, 자신을 가여워하며 울고 있었다. ‘영원한 비주류’ 노 전 대통령에 자신을 오버랩하며 서러워하고 있었다. 23일 분향소 인근에서 만난 한 여성 노사모 회원은 너무 울어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대통령 하나도 못 지킨 죄인이다. 어떻게 우리를 두고 가실 수 있나”라며 울먹였다. 25일 낮 대구에서 왔다는 한 청각 장애인 부부는 노 전 대통령 사저 앞에서 부엉이바위를 바라보며 기자의 수첩에 이렇게 썼다. “너무 마음이 아프고 억울하다.” 한 번 터진 비주류의 눈물은 엄청난 폭발력으로 번져나갔다. 24일 13만 명, 25일 40만 명, 26일 50만 명, 27일 78만 명을 넘어선 조문객 수는 28일에는 100만 명을 넘겼다. 3일째쯤 되면 줄어들겠거니 했던 참여정부 참모진들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추억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바람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저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언제 우리가 만났던가. 언제 우리가 헤어졌던가. 만남도 헤어짐도 아픔이었지… 너와 나는 작은 연인들.” 봉하마을 회관 스피커에서는 쉼없이 노 전 대통령의 생전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노 전 대통령의 노래 솜씨는 별로였다. 그러나 어떤 기교 없이, 또박또박 노랫말을 눌러가며 부르는 것은 딱 ‘노무현스러웠다.’ 구수한 사투리가 묻어나는 노 전 대통령의 ‘담백창법’은 7일 내내 사람들 가슴 속을 호소력 있게 두드렸다. 봉하마을 어귀 노사모회관 앞에는 대형 스크린이 내걸렸다. 그 속에서 노 전 대통령이 때로는 격하게, 때로는 장난스럽게 말을 걸고 있었다. 조문객들은 분향소를 쉽게 떠나지 못하고 스크린 앞에 삼삼오오 모여 앉았다. 박수를 보내고 눈물을 흘렸다. 봉하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추억을 붙잡고 마음 속에 그를 다시 살려냈다. 너도나도 노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말하고 아파했다. 1988년 방북으로 구속되고 2005년 외아들을 잃는 아픔을 겪은 임수경씨는 “저도 아픔이 있어 해인사에 머물 때 대통령 내외가 위로해주셨다”고 했다. 원진레이온 산업재해 노동자 40여 명도 분향소를 찾아 “88년도부터 같이 투쟁했다. 점심도 먹고 가스 구덩이에도 들어가고… 잊을 수 없다”며 애달파했다. 1989년 초선 노무현 의원은 원진레이온 산재 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권오일 전 에바다 학교 교감은 청각장애인 학생 30여 명과 봉하마을을 찾아 “7년 넘게 끌던 에바다 학교 비리를 해결해주신 분이 노 전 대통령”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이별 29일 0시. 분향이 잠시 중단됐다. 봉하마을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하던 일을 멈추고 노 전 대통령의 애창곡 ‘상록수’를 함께 부르기로 약속한 시간이다.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가수 양희은씨의 ‘상록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봉하마을의 모든 사람이 일어서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29일 영결식을 앞둔 이별의식의 시작이었다. 장의위원장인 한명숙 전 총리가 봉하마을에 찾아와 자원봉사자들을 격려하고 있다. 발인이 곧 시작될 오전 5시. 봉화산 사자바위 부근이 밝아지며 먼동이 터왔다. “받들어, 총!” 의장대 소리와 함께 운구병들이 태극기에 싸인 노 전 대통령의 관을 모시고 마을회관 빈소 밖으로 나왔다. 조문객들은 흐느끼기 시작했다. 노 전 대통령의 관이 운구차 속으로 사라지자 흐느낌은 통곡으로 변했다. 노 전 대통령의 영정이 사저를 돌고 오는 동안 운구차는 마을 어귀에서 기다렸다. 분향소부터 마을 입구까지 늘어선 조문객의 손에는 하나같이 노란 종이비행기가 들려 있었다. 누군가 노래를 시작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노무현을 위한 행진곡’은 처연했다. 가사도 뒤엉키고 박자도 안 맞았지만 노래를 끝내기 아쉽다는 듯 후렴이 반복됐다. 예정된 시각보다 20분 정도 늦어진 오전 6시. 운구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운구차는 한참 동안 봉하마을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조문객들은 쉽게 노 전 대통령을 놓아주지 못했다. 운구차 앞에 주저앉아 통곡하고 떠난 운구차를 쫓아 따라갔다. 이제 봉하마을을 빠져나가면 한줌의 재가 돼 돌아올 터였다. 운구차는 수백 개 만장이 휘날리는 좁은 길을 따라 서서히 마을을 빠져나갔다. 운구차가 지나는 곳마다 노란 종이비행기가 일제히 날았다. ‘봉하마을 참여정부’ 노 전 대통령의 서거로 봉하마을에는 ‘작은 참여정부’가 다시 차려졌다. “대단히 충격적이고 슬픈 소식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오늘(23일) 오전 9시 30분경 이곳 양산 부산대 병원에서 운명하셨습니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처음으로 알린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마지막까지도 봉하마을의 ‘비서실장’이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이 떠난 이후에도 장의위 운영위원장을 맡아 영결식 및 장례 일을 묵묵히 챙겼다. 노 전 대통령과 ‘맞담배’를 피울 정도로 막역했던 이해찬 전 총리는 봉하마을의 ‘맏상주’였다. 그는 중국에 머물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듣고 바로 귀국, 23일 밤 봉하마을에 도착했다. 이후 줄곧 봉하마을을 지키며 분향소를 찾는 정치인, 각계 주요 인사 등을 맞았다. 386측근들의 맏형 격인 이호철 전 청와대 민정수석은 봉하마을에서도 ‘군기반장’ 역을 맡았다. 방송 카메라가 늘어선 포토라인 근처에서 전 참여정부 비서관·행정관들이 모여 담배를 피우거나 하면 “모양이 좋지 않다”며 군기를 잡았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의 아들 건호씨에게 “(분향소에) 나가봐야 안다. 아버지가 얼마나 훌륭한 분인지”라며 직접 분향소에 나가 조문객을 맞을 것을 설득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의 동지였던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은 ‘시묘살이’를 도맡았다. 국민장 기간 내내 몸이 부서져라 분향소 상주자리에 서서 조문객들을 맞았다.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은 한명숙 전 총리가 낭독했던 눈물의 조사(弔辭)를 썼다. 천호선 전 청와대 대변인은 봉하마을에 몰려든 취재진을 상대로 ‘현장 브리핑’을 맡았다. 김만수 전 청와대 대변인은 봉마하을 아나운서를 맡아 나지막한 목소리로 ‘알리미’ 역할을 했다. 그러나 ‘봉하마을 참여정부’는 참모진만의 것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100만 조문객 모두 ‘상주’이자 참여정부의 일원이었다. 조문객들은 땡볕 아래서 평균 4~5시간씩 기다려야 분향소 앞에 다다를 수 있었지만 새치기나 몸싸움, 고성은 없었다. 휴가를 내고 달려와 조문객의 식사와 헌화, 청소를 도맡는 자원봉사자도 줄을 이었다. 이들은 노 전 대통령의 운구차가 떠난 뒤에도 휑한 봉하마을에 남아 바닥에 떨어진 노란 종이비행기를 줍고 자리를 걷고 쓰레기를 분리수거했다. 기존 정치인들과 언론에 불같이 화를 내고 손잡기를 거부하면서도 한편 자신들의 ‘정의’는 확고했다. 단순히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말할 수 없는 거칠고 순수한 에너지가 꿈틀대던 그곳은 ‘봉하마을 참여정부’였다.

      2009.06.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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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버스토리]‘봉하마을의 추모’ 새롭게 싹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뛰어내린 부엉이바위 옆 길을 봉하마을을 방문한 추모객들이 오르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 후 봉하마을이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봉하마을은 아직도 많은 방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추모열기는 여전하다.또한 노 전 대통령이 생전에 꿈꿨던 생태마을과 친환경농업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그의 고향이자 퇴임 후 희망을 걸었던 봉하마을의 미래는…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뜻을 잊지 않겠습니다.” 동창원IC를 지나 10여 분. 진영읍 도로에 걸려 있는 김해노사모 명의의 플래카드가 기자를 맞아주었다. 본산공단을 지나 삼거리. 산 속 소나무에는 고인을 기리는 수많은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봉하마을 입구부터 노 전 대통령 사저에 이르는 길에는 추모 글귀가 적힌 수많은 노란·검은 색 리본이 이어져 있다. 평일이라 그런지 차는 막히지 않았다. 차분한 분위기. 간간히 눈물을 훔치는 이도 있지만, 벽에 붙은 추모 글을 살펴보는 사람들. 주차장에는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승용차와 버스가 서 있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후 봉하마을은 ‘성지’로 떠올랐다. 경남 김해시 집계에 따르면 영결식 후 토요일(5월 30일)에는 5만 명, 일요일에는 15만 명의 방문객이 봉하마을을 찾았다. 평일에도 평균 1만여 명의 국민이 봉하마을을 방문했다. 차분하지만 추모 열기는 끊이지 않는다. 이미 서거 전에도 노 대통령이 귀향한 봉하마을은 관광명소였다. 여행사들은 봉하마을 방문상품을 마련하기도 했다. 하지만 서거 후 방문객이 몇 배 이상 늘었다. 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 양정철·김경수 비서관 등이 머물면서 장례절차를 돕고 있다.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은 서울 구로동에 있던 전국사무국을 올해 초 봉하마을로 옮겼다. 전국에서 모인 노사모 회원들은 영결식 이후에도 자원봉사를 하며 이곳에 머물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저·서거 장소 그리고 안장될 곳이 함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서거 후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노무현 가치’의 발현지라는 점에서도 봉하마을은 부각되고 있다.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30-6.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저 주소다. 마을 규모는 아담하다. 김경수 노 전 대통령 비서관은 총 50여 가구가 있다고 말했다. 사저 앞에는 노 전 대통령 생가 복원 공사가 한참 진행 중이다. 10월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사저 너머엔 노 전 대통령이 뛰어내린 부엉이바위가 보인다. 추모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부엉이바위를 배경으로 휴대전화로 기념사진을 찍는다. 하지만 웃음기는 없다. 봉하마을 곳곳에 매대가 있다. 파는 물건은 소박하다. 가장 큰 곳은 사저 옆 50m쯤에 위치한 ‘봉하마을에서 생산한 찰보리빵’ 공장이다. 주차장 옆에 마련된 고구마·옥수수 매대는 닫혔다. 노사모 관계자는 “장례 기간 동안 미뤘던 농사일을 시작하다 보니 일손이 달릴 것”이라고 말했다. 천막주점에서 파전에 막걸리를 앞에 둔 외지 손님들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시국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 사저 바로 옆에는 산딸기밭이 있다. 경찰 발표에 따르면 새벽 5시 50분께, 집을 나선 노 전 대통령은 이곳에서 일하는 동네주민을 만나 인사를 나눴다고 한다. 돌아가는 방문객 손에는 1상자에 1만 원 하는 이 산딸기와 찰보리빵이 들려 있다. 봉하마을 슬픔 속 추모 행렬 이어져 부엉이바위로 오르는 길. 긴 행렬은 한 곳에 멈춰 있다. 오렌지색 경찰통제선이 처져 있다. 노 전 대통령이 떨어진 곳이다. 기자가 방문하기 하루 전, 현장 검증이 있었다. 경호관 이모씨는 현장 검증을 하던 중 끝내 통곡했다. 바위 밑에서 위를 올라다봤다. 상당히 가파랐지만 완만한 경사가 져 있다. 등산로에서는 보이지만, 이곳에서 정상은 보이지 않는다. 추락장소 옆으로 가느다란 오솔길이 봉화산 앞 공터까지 나 있다. 추락장소 입구를 떠나지 못하는 조문객들을 뒤로 하고 올라갔다. 등산로 옆 바위를 타고 넘어 들어가니 두 개의 바위 사이의 토굴이 나온다. 희미한 촛불이 안을 밝히고 있다. 들어가니 비구니 두 사람이 노 전 대통령 영정을 모시고 있다. 그날 아침, 노 전 대통령은 이 토굴에 들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젊은 시절, 그는 이 토굴에서 사법고시공부를 했다. 비구니들에 따르면 이곳에 ‘굴 법당’이 마련된 것은 10여 년 전. 노 전 대통령도 종종 들러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한 비구니가 말했다. “그날 아침에 만나뵙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곳에 들른 노 대통령이 ‘스님은 여자인데, 밤에는 있지 마세요’라고 말씀하셨거든요.” 토굴 바로 위에는 경남문화재 제40호인 ‘진영 봉화산 마애불‘이 누워 있다. 노 전 대통령의 유골이 안장된 정토원도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다. 노 전 대통령의 유골은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는 정토원 수광전에 모셔져 있다. 정토원의 정봉스님(55)은 “노 전 대통령은 이곳에서도 공부했다”고 말했다. 일제시대 창건한 정토원은 그동안 몇 차례 화재로 소실됐다. 정봉스님은 노 전 대통령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이곳에서 49재를 치렀고, 퇴임한 뒤도 여러 번 참배했다고 밝혔다. 진영읍에 산다는 이모씨가 정토원까지 올라오는 길의 전기공사를 한참 진행하고 있었다. 밤에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다. 이씨가 노전 대통령 사저 쪽을 바라보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저기 진영읍도 집을 지으려면 평당 300만 원은 나옵니다. 저거(노 전 대통령 사저) 짓는 데 평당 350 들었데요. 그게 무슨 아방궁입니까.” 이씨는 기왕 만들 거, 아방궁은 아니더라도 더 크게 지었으면 외국 관광객이 보러 와도 동네 주민들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겠냐고 개인 의견을 밝혔다. 내려가는 길. 회사원 한상조씨(49·경기 고양)는 덕수궁 시민분향소에 서거 이튿날 분향하러 갔다가 조문하지 못하고 휴가를 내 부인과 내려왔다고 말했다. 그는 분향소를 에워싼 전투경찰을 보고 분노를 느꼈다고 말했다. “막아서는 게 또 뭡니까. 분향하러 간 시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본 것 아니요?” 80학번인 그는 80년대 자기 세대가 내걸고 싸우던 ‘민주주의’를 다시 말하게 될 줄 몰랐다고 말했다. 회사에 여기 온다고 말할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내가 누구 눈치볼 나이냐”며 웃었다. 친환경 생태농업이라는 ‘희망’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마을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마을 앞 들녘에서 김정호 비서관을 만났다. 참여정부 집권 초기부터 기록담당비서관을 지낸 그는 현재 영농법인 ㈜봉하의 대표이사다. 연녹색 셔츠에 작업복 바지. 영락없는 농사꾼이다. 동네 주민들과 함께 포크레인으로 땅에 고무다라이를 파묻고 있다. “수련을 심으려고요. 전남 함평군에서 받은 것인데, 나중에는 자그만 화분에 담아 방문객들에게 기념품이 될 수 있도록….” 그는 기자를 인근의 농수로로 안내했다. “저게 노랑어리연꽃입니다. 저건 심은 게 아니라 자생군락이에요. 옆에 마름도 그렇지만 봉하마을의 자연은 수생식물의 보고입니다.” 마을 자랑이다. 김정호 비서관이 봉하마을 앞에 조성된 체험형 주말농장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 지난 1주일 손을 놓고 있던 봉하마을 농민들은 모내기 준비에 한창이다. 하지만 아직 본격적인 파종은 이뤄지지 않았다. 지난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친환경·품질을 보증한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던 ‘봉하오리쌀’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지난해는 2만3600평 농사를 지어 50t의 쌀이 나왔습니다. 올해는 24만 평을 지어 500t을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리들이 보이지 않는다. 묘목과 함께 오리새끼들이 자리고 있다. 논두렁마다 놓여 있는 노란 우리는 현재는 비어 있다. 농사가 본격화되면 오리들은 이곳에서 밤을 난다. 화학비료 대신 오리들이 잡초와 해충을 잡아준다. 친환경생태 농업에서 화학비료 대신 들어가는 ‘농약’은 직접 만들어 사용한다. 김 비서관의 자전거 뒤에 올라타 마을 입구의 ‘미생물 배양센터’ 비닐하우스를 방문했다. 비닐하우스에는 장독이 가득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인산칼륨 비료 대신 현미식초와 쇠뼈 태운 것을 발효시켜 놓는다. 쇠뼈 대신 굴이나 계란껍질을 이용하기도 한다. 오히려 화학비료보다 싸게 먹힌다고 한다. 한 노인이 왔다. 생태농법 작목반 소속 농민이다. 김 비서관은 농민 개인별로 처방된 ‘가이드’에 따라 생태농약을 만들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떠나는 노인을 배웅한다. 봉하마을에 오기 전, 한 번도 농사를 한 적 없던 김 비서관은 벌써 농부가 다 됐다. 김 비서관은 광역 생태농약 살포기, 친환경생태농법(포트농법) 전용 이양기 등을 보여줬다. 들판을 가리키며 김 비서관은 말했다. “저기가 봉하 체험형 주말농장입니다. 벌써 예약이 다 되었어요. (노 전 대통령이) 이걸 직접 보지 못하셨어요. 기자들이 밖에서 24시간 카메라를 들고 지키고 있으니 나와 보시지도 못하고….” 자리를 옮겼다. 사저에서 5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생태연못’이다. 위쪽엔 물이 흘러내리도록 되어 있다. “원래 이곳에 우물이 있었어요. 주말체험을 한 아이들이 이곳에서 손발을 씻고 정자에서 쉴 수 있게 하면 좋겠다는 바람이었죠.” 정자는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노무현 호화생일파티’라는 제목으로 인터넷에서 유명해진 사진시리즈에 등장하는 곳이다. 물론 ‘호화파티’라는 이름은 역설적으로 붙인 이름이다. 노 전 대통령은 평상복 차림의 마을 주민들과 파리바게트 케이크를 두고 집들이 겸 생일파티를 하고 있었다. 담담하게 이야기하던 김 비서관의 말에 미묘한 감정의 흔들림이 나타난다. “생각해보니 노 전 대통령이 아주 안 보신 건 아니네요. 돌아가시기 3주 전이던가, 밤중에 연락이 와서 죽 둘러봤어요.” 기자들의 카메라를 피해 심야에 마실 나간 것이다. 원래 비서관에겐 칭찬을 잘 안 하는 편인데, 이날 노 전 대통령은 등을 두드리며 “정말 좋다”고 말했다고 그는 전했다. 그는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마지막으로 눈에 담아두기 위한 것이 아니었겠냐”고 덧붙였다. 땅거미가 깔렸다. 길가에 선 한 여성이 눈물을 훔치고 있다. 황숙경씨(52·경기 파주)는 23일 뉴스를 듣고 귀를 의심했다고 한다. 그뒤 내려와 아는 사람 집에 머물면서 매일 이곳을 방문한다. 황씨는 인터넷을 하지 않아 노사모의 활동은 잘 몰랐다고 한다. “올 때마다 이전에 몰랐던 그분의 생전 업적을 하나씩 알게 됩니다. 눈물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인근 경남에서 오는 방문자도 많다. 김해와 서울을 오가는 고속버스 기사 최오봉씨(49·경남 진해)는 이날 근무를 마치고 부인과 함께 이곳을 방문했다. 서거 소식은 그날 아침 가족과 함께 한 찜질방에서 들었다. “저도 그렇지만 제 처가 꼭 한 번 오고 싶다고 해서 왔습니다.” 서거 3주 전 밤늦게 마을 둘러봐 봉화산에서 내려다본 봉화마을 전경. 오른쪽 아래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저가 보인다. 마을 입구엔 전체 건물을 노란색으로 칠한 노사모 회관이 있다. 원래 이곳은 방문객들에게 노 전 대통령의 업적을 알리고 간단한 기념품을 팔던 공간이었다. 서거 후 사무실 안쪽은 그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으로 뒤덮였다. 다음 노사모 카페를 운영하는 김옥기씨(50·경남 창녕)는 “대통령 서거 전에 회원이 1만6000여 명이었는데, 서거 후 2만여 명이 새로 들어왔다”라며 “그동안 심정적으로 노무현을 지지하던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인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서거 후 추모 열풍에 대해 “7, 80년대 억압정책으로 치닫는 이명박 정부의 실정이 노무현의 5년을 다시금 돋보이게 하는 것 같다”라고 풀이했다. 그러나 그는 노사모의 정치세력화는 없을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을 반대하는 쪽은 끝없이 ‘정치적 의심’을 거두지 않았지만 노 전 대통령의 관심은 민주주의 못지않게 고향으로 돌아가 생태농업을 일구고 어떻게 하면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드느냐에 있었다”라며 “그런 노 전 대통령의 유지를 잇는다면 시민사회 영역이라면 모를까 정치 참여를 이야기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봉하마을의 밤이 깊었다. 논 쪽에서 들려오는 개구리 울음 소리는 여느 시골마을과 다르지 않다. 부엉이바위 쪽은 아직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다. 경찰의 서치라이트가 부엉이바위 인근 숲 속 구석구석을 비추고 있다. 낮에 설치한 전등이 줄지어 정토원 쪽으로 올라가는 산길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다. 마을회관 옆 분향소에는 환하게 웃는 고인의 초상화가 걸개그림으로 걸려 있다. 서거 후, 인터넷에는 2002년 12월 18일 노무현 당시 민주당 후보의 마지막 대선 광고 동영상이 다시 퍼졌다. ‘어메이징 그레이스’노래를 배경으로 노무현 후보는 “오늘 밤이 지나면 우리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납니다”라고 입을 연다. 동영상을 올린 한 누리꾼은 이렇게 적었다. “살아계실 때 우리가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났듯이, 이승을 떠나시는 마지막 날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날 것으로 믿습니다. 정치가 썩었다고 외면하지 말라는 말씀처럼 오늘 가시는 길 외면하지 않고 직시할 것입니다. 이제 당신의 마지막 메시지를 가슴에 새기기 위해 가시는 길을 보러 집을 나섭니다. 좋은 곳에서 편안히, 그토록 바라는 대한민국이 변하는 모습을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김경수 비서관 “장지는 아직 확정하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 측 김경수 비서관은 남은 장례 일정으로 바빴다. 그는 “아직 서거하신 지 보름도 안 됐고 결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며 추모사업이나 앞으로 계획에 대해 말을 아꼈다. 다음은 김 비서관과 나눈 일문 일답. 장의 절차는 어떻게 되나. “아직 최종적으로 정해지지 않았다. 49재가 7월 10일이다. 현재는 정토원에 모셔져 있지만 그때 안장할 것으로 보인다.” 장지는 확정되었나. 일부 언론에선 지관과 함께 돌아보는 유족의 모습이 보도되었는데. “여러 군데 살펴보았지만 아직 확정하지 않았다.” 봉하마을은 이후 어떻게 되나. 인터넷을 중심으로 사저에서 부엉이바위, 정토원까지 걷는 ‘올레 길’ 논의도 있다. “지금은 그것을 이야기할 상황이 아니다. 아직 상중이다. 장례절차를 마련한 후에나 논의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주 작은 비 건립위원회’도 거론된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을 위원장으로 한국예술종합대학교 총장을 맡고 있는 황지우 시인이 비문을 완성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언제까지 만들겠다는 계획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추모사업이나 사료관 건립도 거론되는데. “여러 사람이 아이디어를 갖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기자들에게 건넨 것 같다. 그런 차원으로 이해한다. 지금은 장례절차를 잘 마무리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많은 사람이 조문하면서 ‘클라우드9’ 담배를 올렸다. 생전에 자주 피우시던 담배인가. “함부로 말하긴 곤란하다. 대통령께서는 디스 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피우셨다.”

      2009.06.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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