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골목 내시경
[골목 내시경]부천시 원미동-소설 속 풍경 사라지고 깔끔한 신도시로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원미동은 양귀자의 소설 <원미동 사람들>로 유명한 곳이다. 부천의 옛 이름을 딴 전철 1호선 소사역에서 원미산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 원미동이 있다. 길 한 편엔 ‘원미동 사람들 거리’라는 푯말도 걸려 있다. 하지만 소설 속 골목의 풍경은 어디에도 없다. 그 시절은 오로지 지금도 꾸준히 팔린다는 소설 속에만 박제돼 있다. 의 거리는 소설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서울에서 넘쳐나는 사람들을 위해 막 신도시가 생겨나던 때 원미동이 만들어졌다. 지금도 그 시절의 이층집과 연립주택이 골목에 간간이 보이지만, 대부분 새로 지은 높은 공동주택과 상가주택들이 지금의 원미동 골목을 이루고 있다. 구석구석 소규모 아파트단지도 보이고 골목길은 신도시답게 반듯반듯 깔끔하다. 원미동 골목을 걷다 보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아이들을 만날 수 있다. 양귀자는 소설에서 “원미동 아이들은 집 안에서 틀어박혀 지내는 법은 애시당초 배운 적이 없다. 아침 눈뜨면서부터 집 앞으로 뛰쳐나와 어두워질 때까지 거리에서 놀았다”고 썼다. 그 당시만큼은 아니겠지만 어느 골목에서도 옹기종기 모여 수군거리고 뛰어다니는 어린이들을 볼 수 있다. 봄을 맞아 아이들은 골목에서 활개 치고 있다. 붉은 띠를 맨 태권도복을 입고 집으로 돌아가는 어린 소녀도 있고, 자전거를 쏜살같이 달리는 짓궂은 소년들도 보인다. 과자가게 앞에서 작당 모의를 하는 10대 초반의 소녀들과 아니꼬운 표정으로 도도하게 걷는 소년들도 있다. 공원 놀이터의 아이들 활력 원미동엔 아이들만 많은 건 아니다. 골목에 박힌 공원에는 펄펄한 노인들이 그다지 길지 않은 둘레길을 쌩하니 걷는다. 마치 사슬을 만들 듯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바쁜 걸음으로 걷고 있다. 좀 더 풀기가 빠진 노인들은 장의자에 앉아 뱅글뱅글 돌아가는 행렬을 지켜본다. 바로 곁에 원미산이 있고 잘 정비된 산책로와 운동시설이 있음에도 노인들은 귀찮은 듯 동네 공원에서 봄날 오후를 즐기고 있다. 그 곁으로 어린아이들이 미끄럼틀을 오르내리고 그네를 탄다. 젊은 부모들이 곁에서 참견하거나 아이들을 이끌고 있다. 근래에 이렇게 붐비는 공원 놀이터는 보지 못했다. 서울 강남의 잘 꾸며진, 그러나 아이 하나 볼 수 없는 곳과 달리 놀이터는 본연의 임무를 다하고 있다. 양귀자의 소설이 그린 원미동의 풍경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이 있다면 이와 같은 아이들의 소란과 활력이다. 운동하는 어르신들과 놀이터를 가득 채운 어린이들이 있다. 동네 안팎으로 초등학교 3개, 중학교와 여고까지 있으니 골목과 거리가 아이들로 넘치는 건 당연하다. 다만 학원을 오가는 지친 표정보다 숨이 찰 때까지 골목을 뛰어다니는 모습을 더 자주 볼 수 있다. 아이를 상대로 하는 주산학원도 있고 피아노 학원에는 이런저런 공부 도우미까지 한다는 선전도 붙어 있다. 어디에나 아이를 책상 앞에 붙잡아두려는 부모의 심사야 뻔하지만, 원미동 아이들은 빨치산처럼 골목을 뛰어다닌다. 시로 승격되기 전 부천의 옛 이름은 소사읍이었다. 복숭아가 많이 나던 곳이라 복사골로도 불렸다. 한국전쟁 직후 이곳이 신종교의 성지 노릇을 하던 때도 있었다. 특정 종교 신자들이 모여 신앙촌을 이루어 살았고, 소사에서 정도령이 나오고 새 구세주가 세상을 구하는 역사를 이룰 거라는 믿음도 퍼졌다. 자신을 믿으면 영원히 살 수 있다고 외치던 교주도 나왔는데, 그 역시 죽은 후 부활했다는 소식은 없다. 그런 종교들의 극성과는 달리 원미동 골목 안의 종교 사정은 비교적 조용한 편이다. 개척교회와 작은 교회들이 골목 안 상가 건물에 깃들어 있고, 아주 큰 원미동 성당과 석왕사 절이 원미동의 신앙을 이끌어간다. 다만 곳곳에 병도 고쳐주고 신점도 본다는 신당도 보인다. 원미동을 남과 북으로 가로지르는 큰 골목에는 구역을 따라 3곳의 시장이 줄지어 있다. 원미종합시장, 원미부흥시장과 금강시장이 있다. 모두 한 길을 따라 있어 굳이 따로 나눌 일이 있나 싶다. 앞의 두 시장은 파는 물건이나 가격도 비슷하다. 현대화된 전통시장답게 비를 맞지 않고 장을 볼 수 있도록 천장이 있고 깔끔하게 정비돼 있다. 금강시장은 골목을 따라 상점들이 이어져 있는데 시장보다 상점 거리라 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거리 곳곳을 이야기가 담긴 벽화로 치장했다. 큰 골목에 줄지어 있는 3곳의 시장 종합시장에는 터키 아저씨가 견과류 가게를 열고 있다. 열심히 먹어보라고 권하며 외치는 호객 솜씨가 남대문 상인보다 낫다. 반찬가게들도 나름 메뉴가 다르고 가격도 차이가 있어 장 보는 눈썰미가 필요하다. 떡볶이 가게에는 나이 든 모자가 세트 메뉴를 시켜놓고 그날 일과를 되짚고 있다. 금강시장 두부 가게 주인은 옌볜 출신이라고 했다.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다며 바짝 포를 뜬 건두부를 권한다. 두부 한봉지를 집어 들고 “한봉지에 2000원이다. 볶아먹고 무쳐먹어도 좋다. 쫄깃하면서도 고소한 게 보통 두부와는 다르다. 새벽부터 콩을 갈아 직접 만든 거니까 한번 먹어보시라”고 열을 올린다. 주인장의 권유대로 오이를 썰어 함께 무친 건두부는 일품이다. 도시를 일러 ‘가족을 잃어버린 곳’이라 부른다. 진즉 이웃은 사라졌고, 가족마저 낱낱이 자기 안에 매몰돼 모두가 외로운 곳을 도시라고 했다. 다른 곳은 그럴진대 적어도 원미동 골목에서는 가족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어머니의 손을 잡은 자식, 노모를 부축하는 딸의 느린 걸음, 3대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골목을 호령하는 모양새를 골목을 걷는 내내 볼 수 있다. 1980년대부터 서울에서는 눈을 크게 뜨고도 찾을 수 없던 정경이 지금 원미동 골목에는 남아 있다. 원미동 골목 끝은 원미산으로 이어진다. 장을 보고 돌아가던 이가 시장을 향하는 이웃에게 말한다. “파가 금값이더니 조금 내렸더라. 총각네 채소가게에 들어온 무가 싱싱하고 싸더라. 오징어는 비싸고 별로다.” 이웃으로 산 지가 오래된 듯 서로가 말을 놓고 수다를 떤다. 더불어 어제도 술 먹고 들어 온 서방 욕은 덤으로 퍼댄다. 장 보러 가는 길에 취직 못 한 자식 걱정이며 눈치 없는 가족 이야기까지 장마당의 약장사처럼 큰소리로 풀어놓고 있다. 도시에 아직도 이웃이란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더 깊이 속살을 파고들어 이곳에 살아 보면 미움과 악다구니가 없겠나 싶지만, 사람들의 표정과 말투엔 날 세운 살벌함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양귀자의 소설 속엔 깊은 상처와 쓰라림이 있다. 요즘 원미동 사람들은 살 만해졌고, 밀려난 이들이 아니라 자신의 자리에 정착한 이들이 살고 있다. 골목 안 집들은 대부분 요즘 유행을 따라 정비돼 있지만, 간간이 옛날 형태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부동산은 “수도권에서 그래도 이 동네가 집값 적당하고 살 만하다. 환경도 좋고 지하철 7호선에 1호선이 지나가니 교통도 좋은 편이다. 신혼살림 하거나 초등학교 아이들 키우기에는 여러모로 좋은 곳”이라고 했다. 한참 신축 붐이 지나 시설 좋은 물건도 많고, 눈을 낮추면 싼 가격에 구축 매물을 잡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원미동에는 종합시장, 부흥시장, 금강시장 모두 3곳의 시장이 있다. 상가주택 곳곳에는 불황과 팬데믹 사태 탓에 ‘임대’ 표지를 붙인 곳이 많다. 반면 깔끔하게 새로 문을 연 간식 가게와 커피집들도 골목 분위기를 화사하게 만들고 있다. 한 골목 안에도 흥망과 성쇠가 같은 줄에 놓여 있다. 옛 가게들은 아주 오래돼 1980년대의 간판과 분위기를 고스란히 짊어지고 있고, 이제 막 새로움과 세련됨을 자랑하는 곳들도 곳곳에 들어서고 있다. 곳곳에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벽화로 그린 길목도 이채롭다. 전봇대에 붙은 부동산 매물 광고 눈길 원미동은 곁에 원미산을 두고 있는데, 봄이면 피어나는 진달래며 복사꽃으로 유명하다. 이름대로 멀리서도 보이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소설 <원미동 사람들>은 중학교 교과서에도 실렸고, 간혹 대입 수능시험의 지문으로도 나오고 있으니 국민 대다수가 이곳의 이름은 들어봤을 터이다. 소설의 무대는 1980년대라서 그 안에 담긴 묵직하고 절박한 풍경은 이제 찾아볼 수 없다. 곧 진달래가 붉어질 계절이니 원미산과 원미동 주변도 봄의 기운이 절정을 맞을 것이다. 근자에 생각 없는 정치인의 말 한마디에 원미동이 있는 부천이 입길에 올랐다. “이부망천(離富亡川), 이혼하면 부천으로 떠나고 망하면 인천으로 주저앉는다”는데, 그는 사과했다 하나 다시 슬그머니 제자리로 돌아갔다. 말 한마디에서 그의 천박한 욕망과 이웃에 대한 모독과 인간에 대한 몰이해를 읽을 수 있다. 원미동에는 아직도 가족의 따뜻함과 이웃의 정겨움이 남아 있다. 골목을 가득 채우는 아이들의 소란에서 이 어려운 시절의 용기를 얻을 수 있다. 고맙게도 원미동 사람들은 도시가 잃어버린 대부분의 미덕을 아직도 품고 있다. 활기와 희망을 보고 싶으면 원미동 골목을 걸어 보길 권한다. 다른 곳에 없는 즐거움이 곳곳에 묻어 있기 때문이다.
김천 자유기고가 2021.03.19 1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