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
책으로 모인 세월호 세대 세계관…“과거 참사로만 내버려두지 말고 미래와 이어가자”... 국가폭력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았다”며 “‘내란 사태라는 새로운 국가폭력이 일어났을 때 세월호 때처럼 가만히 있지 않고 (광장으로) 나갔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매주 만나...
#세월호 #세월호11주기 #416연대
세월호 11주기
최경윤 , 박채연 2025.04.16 21:56
사회
책으로 모인 세월호 세대 세계관…“과거 참사로만 내버려두지 말고 미래와 이어가자”... 국가폭력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았다”며 “‘내란 사태라는 새로운 국가폭력이 일어났을 때 세월호 때처럼 가만히 있지 않고 (광장으로) 나갔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매주 만나...
#세월호 #세월호11주기 #416연대
세월호 11주기
최경윤 , 박채연 2025.04.16 21:56
사회
[포토뉴스]‘세월호 기억식’에서 묵념하는 민주당 대선 후보들…국민의힘 주자들은 불참... 시작된 16일 김경수·김동연·이재명 대선 경선 후보(왼쪽부터)가 경기 안산시 화랑유원지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11주기 기억식에 나란히 참석해 304명 희생자에 대한 묵념을 하고 있다.
권도현 2025.04.16 21:46
정치
국민의힘, 세월호 참사 11주기에 “더 안전한 대한민국 만들겠다”... 김경수 예비후보와 권영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인사를 나누고 있다. 권도현 기자 국민의힘은 세월호 참사 11주기인 16일 “가슴 아팠던 그 날을 기억하며 앞으로 더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세월호 #국민의힘 #권영세 #신동욱 #세월호참사 #11주기
민서영 기자 2025.04.16 19:01
오피니언
[여적] 11번째 봄, 세월호... 국가는 안전보다는 비용과 편익을 앞세우려 한다. 이를 멈춰 세울 힘은 기억일 것이다. 16일 열린 세월호 참사 11주기 선상 추모식에서 한 유족은 “11년이든, 110년이든 죽을 때까지 절대 잊지 못할...
세월호 11주기
박재현 2025.04.16 18:10
연예
김재원 “세월호 참사 11주기, 희생자 아픔 여전해” (아침마당)KBS1 ‘아침마당’ 김재원과 엄지인 아나운서가 세월호 참사를 추모했다. 17일 방송된 KBS1 ‘아침마당’에는 ‘꽃피는 인생수업’을 주제로 꾸며지며 족저근막염, 난청 등 건강과 관련한 꿀팁이 공개됐다. 이날 오프닝에서 김재원은 “어제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지 11년 되는 날이었다. 많은 분들이 슬픔의 기억 속에 보내기도 했는데 그 이후에 크고 작은 참사도 있었다. 거리에서 대형참사가 일어난 지도 2년 반이 지났고 비행기 참사도 4개월이 지났다. 심지어 대형 산불이 일어난지도 3주가 지났는데 우리 기억 속에서는 희미해지지만 그분들의 아픔은 여전하다는 것도 잊지말아야 한다”고 해도했다. 이에 엄지인은 “그 분들의 아픔을 기억해드리는 것 말고는 해드릴 게 없겠지만, 공감하면서 기억하면서 위로를 전해드린다”고 덧붙였다. 한편, 김 아나운서가 언급한 세월호 참사 11주기와 관련해 지난 16일 경기 안산시 화랑유원지 제3 주차장에서 기억식이 열렸다. 이외에도 서울 영등포구 국회도서관에는 희생자를 추모하는 전시가 열렸으며, 다양한 지역에서 11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김희원 온라인기자 2025.04.17 09:27
연예
오늘(16일) 세월호 11주기···이승환→레이먼 킴, 희생자 추모가수 이승환. 경향신문 자료사진 세월호 참사 11주기를 맞아 가수 이승환과 셰프 레이먼 킴이 희생자를 추모했다. 16일 이승환은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세월호 참사 11주기. 기억하는 우리가 세상을 바꾼다”라는 짧은 글과 함께 세월호 추모를 상징하는 노란 리본 사진을 게재했다. 지난 2014년 4월 16일 오전 10시, 전남 진도군에서 제주로 향하던 세월호가 전복됐다. 해당 사고로 인해 안산 단원고 학생들과 교사를 포함해 304명이 안타깝게 하늘의 별이 됐다. 이승환 인스타그램 캡처. 요리연구가이자 셰프인 레이먼 킴 역시 희생자들을 애도했다. 그는 “바로 그해 바로 그날이 딸아이가 우리 곁에 온 것을 알게 된 날이다”라며 “천사가 우리에게 찾아 온 날이 다른 이들의 천사가 떠난 날이라 죄송하다”라고 전했다. 이어 “기억만 하기에도 지치고 삶속에서 잊혀져 가는 시간이다. 그래도 기억하고 잊지 않으려 노력하겠다”며 명복을 빌었다. 레이먼 킴 인스타그램 캡처. 누리꾼들 역시 “기억하겠다”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반응을 보이며 희생자들을 애도했다. 한편 세월호 관련 단체들은 16일 전국 곳곳에서 추모행사를 연다. 전남 진도군 맹골수도에서는 세월호 참사 유족들이 선상추모식이 열었으며 전남 진도군 팽목항 세월호 추모관에서는 기억식이 개최된다. 4·16 재단도 이날 오후 3시 경기 안산 화랑유원지에서 세월호 참사 11주기 기억식을 열 예정이다.
강신우 온라인기자 2025.04.16 13:32
연예
세월호 참사 11주기 다큐멘터리 ‘리셋’···모두의 바람을 담은 티저 포스터 공개제작: CACTUS PICTURES | 배급: ㈜영화특별시 SMC | 제공: ㈜빅브라더스, Natalie Yun 다수의 국제 영화제에서 공식 초청 및 수상을 이어가고 있는 세월호 참사 11주기 다큐멘터리 ‘리셋’이 모두의 바람을 담은 티저 포스터를 공개했다. (감독: 배민 | 제작: CACTUS PICTURES | 배급: ㈜영화특별시 SMC | 제공: ㈜빅브라더스, Natalie Yun | 개봉: 2025년 4월 30일) 세월호 참사 11주기를 맞아 과거를 재점검하고 더 나은 내일을 위한 9년간의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리셋’이 오는 30일 개봉을 앞두고 잊혀선 안 되는 11년 전의 그날을 담은 티저 포스터를 공개했다. 세월호 참사 11주기를 맞아 개봉하는 영화 ‘리셋’은 사고가 발생한 순간부터 10년이 지난 현재까지를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왜 사고가 발생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던지며 시작하는 영화는 세월호 인양부터 이를 지켜보는 유가족들과 함께하며 그동안 뉴스에서는 볼 수 없었던 방대한 양의 기록과 증언을 전한다. 지나버린 11년의 세월 동안 분노와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는 유가족들에 주목한 감독의 세심한 시선을 만나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게 하고, 그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방향을 제시한다. 제작: CACTUS PICTURES | 배급: ㈜영화특별시 SMC | 제공: ㈜빅브라더스, Natalie Yun 영화의 연출을 맡은 배민 감독은 참사가 발생한 2014년 4월, 이 비극을 다큐멘터리로 기록해야겠다는 결심과 함께 진도 현장을 여러 차례 방문하며 광범위한 취재를 이어 나갔다. “이 작품은 단순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이야기”라며 “참사의 원인과 이후 변화한 대한민국을 함께 되돌아볼 기회가 되길 바란다” 고 당부한 감독은 ‘리셋’이 단순한 기록물이 아닌 앞으로도 계속 전해질 수 있는 메시지를 담은 작품으로 남길 바랐다. 여기서 더 나아가 국제 관객들에게도 세월호 참사의 의미를 알리고자 영어 자막을 수십 번 검토했다. 그 결과, 2022 리자이나 국제 영화제 캐나다 장편 다큐멘터리 부문 노미네이트를 시작으로, 2023 레드록 영화제 아글렛 어워드 심사위원 대상, 2024 마드리드 독립 영화제 최우수 다큐멘터리상, 카미나리 일본 영화제 베스트 다큐상을 받는 쾌거를 달성했다. 이어 지난 3월엔 런던 프레임 국제 영화제에서 장편 다큐멘터리 부문 그랑프리를 수상하며 이미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티저 포스터는 우리 모두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바다 위 세월호의 모습을 포착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선수 위로 보이는 “그날 이후, 모두의 시간이 멈췄다”는 카피는 당시 정말 시간이 멈추길 바랐던 모두의 마음과 함께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11년 전의 그날에 멈춰버린 유가족들의 슬픔을 되짚어 보게 한다. 제작: CACTUS PICTURES | 배급: ㈜영화특별시 SMC | 제공: ㈜빅브라더스, Natalie Yun 이에 노란 리본을 떠올리게 하는 타이틀 로고와 “모두의 바람을 담아”라는 문구가 더해지며 영화 ‘리셋’이 잊혀선 안 되는 세월호 참사를 재조명하고, 답을 받지 못한 질문들을 찾아가는 과정에 힘을 더해줄 작품으로 남을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의 간절한 바람을 모아 새로운 출발점을 만들어낼 이야기 ‘리셋’은 4월 30일 극장 개봉 예정이다. 제작: CACTUS PICTURES | 배급: ㈜영화특별시 SMC | 제공: ㈜빅브라더스, Natalie Yun
손봉석 기자 2025.04.03 20:51
연예 인터뷰
[인터뷰] ‘목화솜 피는 날’ 박원상·우미화 “세월호 유가족 役, 마음 무거웠죠”영화 ‘목화솜 피는 날’ 신경수 감독, 우미화, 박원상, 조희봉.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죄책감을 가질 단어 하나, 세월호. 바다 한가운데에서 침몰한 세월호 속 꽃같은 아이들이 떠난지 벌써 10주기가 됐다. 유가족과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까지 차곡차곡 쌓아 만든 영화 ‘목화솜 피는 날’(감독 신경수)이 그 미안한 마음과 희망을 가득 담아 그리운 아이들에게 편지를 보낸다. “어제 제 아내도 동네 친구들과 단체로 영화를 보고 왔는데, 영화를 보고 미안해졌다고 하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다들 가진 마음일 거예요. 그래서 이 영화가 만들어진 거고, 이 작품의 의미인 거죠. 미안함을 넘어 기억하고, 이젠 다시 제자리를 찾아오려는 유족들의 이야기가 ‘목화솜 피는 날’의 키워드일 거예요. 우리가 매일같이 세월호를 품고 살 순 없어도 중간 중간 기억을 리셋할 수 있게, 이 영화가 그런 구실을 하길 바랍니다.”(배우 박원상) 배우 박원상. “지난해 이 프로젝트가 진행된다고 했을 때 깨달았어요. 저도 당시를 목격했고 미안했고 슬퍼했는데, 어느덧 일상으로 돌아와 살고 있었다는 걸요. 미안함을 다시 느꼈고요. 우리가 잊고 있던 부분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 계기가 됐어요. 또 이 작품을 찍으면서 유가족인 동수 부모님도 만났는데, 그분들이 그러더라고요. ‘기억은 제가 살아가는 힘이고 삶이에요’라고요.”(배우 우미화) 스포츠경향이 최근 만난 배우 박원상과 우미화는 ‘목화솜 피는 날’의 의미를 몇번이고 되새겼다. 그러면서 과거에 갇히지 않고 앞으로 함께 나아갈 수 있는 희망의 방법에 대해서도 저마다 생각을 들려줬다. 영화 ‘목화솜 피는 날’ 한 장면. 연기에 대한 무게감…“유가족을 연기하다니, 감히 제가요” ‘목화솜 피는 날’은 10년 전 사고로 죽은 딸과 함께 사라진 기억과 멈춘 세월을 되찾기 위해 나선 가족 ‘병호’(박원상)와 ‘수현’(우미화)의 가슴 뜨거운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두 사람이 배우로서 유가족을 연기한다는 건 그 무게감이 남다를 터였다. “짐작하는 바와 다르지 않았어요. 유가족을 연기하면서 ‘이 감정을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까. 감히 내가 해낼 수 있을까’란 생각에 어려웠고 마음이 무거웠어요. 유가족의 지난한 10년을 다 담아낼 순 없으니 꾹꾹 바닥에 누르고 견디는 모습밖에 표현할 순 없겠구나란 생각이 들었죠. 또 ‘우미화’의 개인적인 눈물이 담기면 안 되겠다고 느껴 그 점을 경계하려고 했어요.”(우미화) “처음 이 작품이 제안왔을 땐 세월호란 소재 때문에 밀어내고 싶다는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어요. 내게 온 인연이니까요. 다만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감당할 수 있을까. 굉장히 여러 감정이 섞이더라고요. 대본을 더 꼼꼼히 보게 됐고요. 이 작품은 세월호 10주기를 기리는 것으로만 머물면 안 된다고 생각했죠. 그러다 첫 리딩날 한 장소에 모인 배우들을 봤는데, 그들의 얼굴을 보니 이내 ‘아, 할 수 있겠다’란 생각이 들었어요. 다 비슷한 생각으로 십시일반 모인 거라는 걸 느꼈거든요.”(박원상) 배우 우미화. 작품의 비하인드 하나 중 놀라운 건 이 작품을 촬영 8회차만에 완성했다는 점이다. ‘육룡이 나르샤’ ‘소방소 옆 경찰서’ 등을 히트시킨 신경수 PD의 영화 데뷔작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너무 놀라운 게 신경수 감독이 ‘소방서 옆 경찰서 그리고 국과수’ 촬영을 마친 뒤 일주일 만에 목포로 내려가서 8회차를 찍었다는 거예요. 지치고 힘들었을 텐데, ‘목화솜 피는 날’ 촬영현장에선 에너지가 더 올라왔더라고요. 늘 세월호 관련한 이야기를 담고 싶다고 했었는데, 그걸 할 수 있게 돼 힘이 난 모양이었어요. 피곤했겠지만 그런 기색 없이 에너지가 넘쳤죠. 그 덕분에 현장도 좋은 기운이 넘쳐났고, 우리도 피곤함 없이 촬영에 집중할 수 있었죠.”(우미화) 박원상은 이 작품으로 세상에 바라는 바도 명확해졌다. “목포 신안의 야적처럼 올라가있는 세월호 선체가 하루라도 빨리 제자리를 찾아갔으면 좋겠어요. 외면한다고 해서 잊혀지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10년, 20년이 흘러도 잘 보존해서 기억했으면 하고요. 그래야 벌어지지 말아야 할 일이 벌어졌을 때 과거처럼 말도 안 되는 시행착오를 더 이상은 겪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고든 책임져야할 사람들이 자기들이 필요한 것만 바라보면 안 되는데, 괜히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거나 벌어지면 안되는 일들이 10년간 계속 일어났고요. 이 작품 하나로 잘못된 걸 싹 다 수정할 수 없겠지만 이게 마중물이 되어서 또 다른 세월호, 이태원 사고 관련 영화들이 나온다면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박원상) ‘목화솜 피는 날’은 전국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이다원 기자 2024.06.03 15:00
문화/과학
[기고]세월호의 진실을 덮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영화 <침몰 10년, 제로썸> 비평-세월호의 잠수함 충돌설로 거대한 의혹 직조 /빈하용, 한국스마트협동조합 지난 4월 2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침몰 10년, 제로썸>(이하 ‘제로썸’)에 나오는 주장들을 하나하나 반박하기란 고된 일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더욱 곤란한 일이다. 영화 속 어떤 주장은 의도적으로 사실을 비틀고 있다. 세월호 좌현 핀안정기실 내부의 손상이 잠수함 충돌과 관련 있는 듯 말하는 변호사는 자신이 고위직으로 몸담았던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선조위·2017~2018) 조사관들이 그와 상반되는 조사 결과를 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2018~2022)에서 침몰 원인 조사를 책임졌던 사람은 잠수함 충돌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을 도출했으나, 이를 심의하는 위원들의 정무적 판단으로 인해 종합보고서에 제대로 담기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로 그 조사의 전제, 방법, 결과 모두 대한조선학회 등 외부 전문가 그룹의 압도적 비판을 받았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는다. 어떤 내용은 그 발화자의 동기와 의도가 의심스럽다. 그날 세월호의 방향타를 잡고 있었으나 침몰하는 배에 승객을 두고 도주했던 조타수는 현장 주변 영상을 보다가 진실의 잠수함을 발견한 듯 말한다. “잠망경이네.” 그에게 바다에 솟아오른 안테나처럼 보인 것은 맑은 수면에 길게 늘어져 비친 배의 그림자였다. 자신이 해오던 주장이 “지금 증명이 되는 거잖아”라고 말하는 그는 사고 당시 자신의 조타 행위에 대한 진술을 2014년에만 여섯 차례 이상 바꾼 바 있다. 또 어떤 내용은 절실한 믿음이 들어간 추측이라 반박조차 어렵다. 참사 직후 방한한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이 참사 당일 백악관에 게양됐던 성조기를 가져와 애도하고 단원고에 목련 묘목을 보내기까지 한 것은 이 사건에 미국이 관련됐기 때문 아니겠느냐는 전직 국회의원의 의심을 어찌하겠는가. 핵전쟁 가능성까지 검토한 한국전쟁 당시 미국 기록이 50년이 지나야 공개되는 걸 보면 세월호 참사도 40~50년 지나야 그 실체가 밝혀지리라는 ‘진보적’ 원로 학자의 진단도 반론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배의 문제 지적하면 ‘박근혜 동조자’로 몰아 <제로썸>은 조사위원회 관계자, 선원, 유가족, 정치인, 기자, 학자, 소설가 등의 기대와 절망과 상상을 뒤섞어 거대한 의혹을 직조해 낸다. 세월호는 미국 잠수함이 운항 중이던 바다를 지나다가 충돌해서 침몰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대한민국과 미국 정부는 이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동기에서든 이런 의혹을 사실로 믿기 시작하면, 4월 15일 인천항을 떠날 때부터 세월호 선체가 매우 취약한 상태에 있었음을 보여 주는 모든 데이터와 문서와 진술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자신의 머릿속에는 손에 잡힐 듯 그려지는 미국 잠수함의 존재를 부인하는 조사기구, 권력기관, 주류 학계, 어용 언론이 한심할 뿐이다. 선사, 선원, 규제기관의 잘못이 수년간 누적돼 위험해진 선체를 침몰 원인으로 지목하는 다수의견, 이른바 ‘내인설’에 대한 <제로썸>의 비판은 명쾌하기 그지없다. 세월호라는 배의 문제를 지적하는 이들은 “박근혜 정부의 결론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세월호 문제에서 이보다 더 손쉽고 강력한 무기가 있겠는가. 사고 주변 해역에 잠수함이 없었고, 애초에 그럴 수 있는 환경도 아니며, 충돌을 뒷받침하는 데이터가 없다는 따위의 반박은 모두 박근혜 세력에 동조하는 일이 된다. <제로썸>은 진실을 진영의 소유로 만드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 <제로썸>이 제기하는 세월호 잠수함 충돌설은 윤석열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믿는 부정선거론과 닮았다. 부정선거론 신봉자의 핵심 활동은 부정선거의 증거나 범인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의혹을 계속 의혹으로 남겨두는 일이다. 잠수함 충돌설도 그런 단계에 접어들었다. 공식 조사기구의 시간과 예산을 소진한 후 이들은 잠수함을 찾아다니느라 바쁘지 않다. 누군가 잠수함을 숨기고 있다는 의혹을 계속 제기하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잠수함 충돌설의 고약한 점은 그것을 공적으로 심의해 사실관계를 확정하고, 그 거짓됨을 만장일치로 선고할 ‘헌법재판소’가 없다는 것이다. <제로썸>에 담긴 주장을 헌법과 법률과 양심에 따라 검토하고 평의해 온 국민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정리해줄 심판관이 없다. 윤석열의 계엄과 같은 국헌문란 행위는 재발하지 않겠지만 <제로썸> 같은 영화는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또 나올 수 있는 이유다. 아니, 사실 우리에게는 세월호 잠수함 충돌설에 관해 헌재와 같은 역할을 하라고 설치한 기관이 있었다. 마치 헌재처럼 사참위에도 위원장 포함 총 9명의 위원이 있었다(위원회 종료 시점에는 3명이 사퇴해 6명). 헌법까지는 몰라도, 각종 법률과 규칙과 양심, 그리고 경험법칙과 논리법칙에 따라 증거를 검토해서 사실과 거짓을 판명할 사명이 있는 기관이었다. 안타깝게도 이 기관의 세월호 침몰 원인 평의는 한없이 시간을 끌다가 마감 기한에 쫓겨 황급히, 두루뭉술하게 종료됐다. <제로썸>은 제목만으로 이미 모욕적인 영화 잠수함 충돌설의 주창자들은 조사기구가 의혹을 제대로 검증하지 않고 덮어버렸으며, 다시 조사할 수만 있다면 진실이 떠오를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제로썸> 등장인물 중 몇몇은 바로 그 조사기구에서 핵심직책을 맡아 침몰 원인을 조사했다. 선조위에서는 오직 ‘외력설’을 검증하기 위한 추가 모형시험을 하러 네덜란드까지 다녀왔다. 사참위에서는 내인설을 부정하고 외력설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각종 조사 과제와 연구 용역을 설정했다. 여러 해 동안 ‘잠수함 찾기’에 몰두했으나 그 결과는 내부 위원들도 외부 전문가들도 납득시키지 못했다. 과학의 영역에서 잠수함 충돌설은 기각됐다. 조사 담당자들의 반발 때문인지 사참위는 잠수함 설의 공식 기각을 선언하지 못했으나, 이제 그 미지의 잠수함은 깊은 불신과 이념의 바다에서만 목격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인용이나 기각의 문제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과학적 검증 혹은 반증을 위한 기본 요건을 갖추지 못했으므로 잠수함 설은 인용이나 기각이 아니라 조기에 각하됐어야 한다. 이것이 사참위 조사 담당자들을 격노하게 했던 대한조선학회의 공식 의견이다(2022년 7월 사참위에 제출). <제로썸>을 보고서 침몰의 진실을 밝히려는 정의감에 불타오르는 이들은 부정선거론을 접하고서 윤석열을 지키려는 사명감에 북받치는 이들과 세계관을 공유한다. <제로썸>을 통해 계몽된 이들은 대체로 윤석열의 탄핵을 촉구하러 거리에 나섰을 것이나, 사실과 증거를 대하는 태도에서 양측은 슬프도록 닮았다. <제로썸> 개봉 이틀 후 윤석열 파면이 선고된 것은 물론 우연이다. 그러나 부정선거론을 대중에게 알린 영화 <더 플랜>과 누군가 공모해 세월호를 침몰시켰다는 의혹을 퍼뜨린 영화 <그날, 바다>의 제작자가 같은 사람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세월호 이후 10년, 그리고 11년, 진실을 위한 싸움 끝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제로썸>은 그 제목만으로 이미 모욕적인 영화다. <제로썸>은 잠수함을 밝히지 못했다면 아무것도 밝히지 못한 것과 다름없다고 말한다. 공범들이 “면죄부를 던지면서 없던 일처럼” 해버렸으니 “10년 세월이 허송세월”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제로썸>은 탄압에 맞서고 무관심을 견디면서 한 걸음씩 진실로 나아갔던 참사 피해자들을 욕되게 한다. 이윤보다 안전을 우선하는 사회가 되기를 바랐던 평범한 사람들의 노력을 조롱한다. 계엄을 막아내러 국회의사당으로 향하듯 생명과 진실을 찾아 세월호로 향했던 모든 발걸음을 마치 “호수 위에 떠 있는 달그림자”를 쫓는 어리석은 짓처럼 치부한다. 세월호 잠수함 충돌설은 은폐된 진실을 폭로하는 비밀병기가 아니라 힘겹게 건져 올린 진실의 조각들을 다시 가라앉히는 돌덩이가 됐다. “침몰 10년, 당신의 세월호는 끝났습니까”라고 다그치듯 묻는 <제로썸>은 축적된 사실을 애써 외면하며 게으른 정의의 수호자로 나선다. 4월 4일 오후 광화문 앞에서 성조기를 두른 채 먼 곳을 응시하던 윤석열 수호자처럼 <제로썸>은 무엇이든 알고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미국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린다. 세월호의 진실을 덮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
전치형·김성수·박상은 세월호, 다시 쓴 그날의 기록 집필진 2025.04.11 14:30
정치
‘세월호 막말’ 차명진 2심도 패소···법원 “명예훼손 정도 심각”차명진 전 의원. 연합뉴스 “징하게 해 처먹는다”라는 등 세월호 유가족들을 향해 모욕성 막말을 한 차명진(66) 전 의원에게 1심에 이어 항소심 민사 법원도 손해배상을 명령했다. 서울고법 인천원외재판부 민사1부(이현우 부장판사)는 세월호 유가족 126명이 차 전 의원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1심과 같이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했다고 27일 밝혔다. 항소심 재판부는 “세월호 유가족 1명당 100만원씩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1심 법원의 판단을 취소해 달라”는 차 전 의원의 청구를 기각하고, 소송 비용도 모두 부담하라고 명령했다. 재판부는 “차 전 의원이 (인터넷) 게시물에 사용한 단어는 피해자들을 조롱하거나 혐오하는 표현이고 ‘자식 팔아 내 생계 챙긴’이라는 부분은 자극적인 데다 반인륜적”이라고 판단했다. 이어 “편향적이고 선동적인 표현도 있고 (세월호 유가족들을) 인격적으로 비난하는 내용도 있다”며 “명예훼손 정도가 심각하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또 “차 전 의원이 쓴 내용이 진실하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며 “세월호 유가족들을 비방하기 위한 목적으로 상당히 모욕적이고 악의적인 표현을 썼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부연했다. 차 전 의원은 항소심 재판에서 “(인터넷에 올린) 게시물은 사실을 전제로 한 주관적인 의견 표명에 해당한다”며 “비록 모욕적인 표현을 썼더라도 사회 상규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앞서 1심 재판부는 2021년 12월 “피고가 사용한 어휘는 모멸적이고 경멸적인 인신공격으로 볼 수 있다”면서도 “게시물을 올린 지 1시간 만에 스스로 삭제하고 다음 날 사과문을 올린 점 등을 고려해 원고 1인당 100만원을 위자료로 산정했다”고 밝혔다. 차 전 의원은 세월호 참사 5주기를 앞둔 2019년 4월 15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세월호 유가족들. 자식의 죽음에 대한 세간의 동병상련을 회 처먹고, 찜 쪄먹고, 그것도 모자라 뼈까지 발라 먹고 진짜 징하게 해 처먹는다”라고 썼다.
이주영 기자 2025.03.27 15:03
오피니언 편집실에서 편집실에서
[편집실에서] 세월호를 이야기합니다홍진수 주간경향 편집장 이번 호 표지 이야기를 어느 기사로 할지 고민했습니다. 주간경향 기사 마감일 오전에는 최종 결과가 나오는 총선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이달 16일에 10주기를 맞는 세월호 이야기를 할지 한참 생각했습니다. 결국 한동안은 전국민적 관심사로 자리할 총선을 선택했습니다. 대신 제가 쓰는 이 글에서는 세월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벌써 10년입니다. 아직도 그날, 2014년 4월 16일 점심때 제가 누구와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이 납니다. 회사 근처 김치찌갯집에서 회사 선배와 “세월호란 배에 사고가 났는데 전원 구조라 다행이다”라는 이야기를 했고, 점심을 먹다가 전원 구조가 오보라는 소식을 접하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그때의 그 당혹감이 머릿속에 지금도 어렴풋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10년이 지났습니다. 아시다시피 세월호 참사는 진행 중입니다. 세월호 참사로 많은 사람의 인생이 사라지거나 바뀌었습니다. 강산도 변한다는 긴 시간이 흘렀지만 유가족의 상처는 여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4월이 오면 다시 세월호를 이야기합니다. 주간경향은 이번 호에서 유해정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 센터장을 만났습니다. 유 센터장은 유가족과 생존자 등을 제외하고는 가장 가까이에서 세월호 사건을 바라본 사람으로 꼽힙니다. 유 센터장은 인권활동가로 일하다 세월호 참사가 나자 진도로 내려갔습니다. 세월호 작가 기록단의 일원으로 2015년부터 세월호 기록을 담은 5권의 책을 냈습니다. 10주기를 기록해 달라는 가족협의회의 요청으로 2022년부터 유족, 생존자, 관련자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최근 <520번의 금요일>, <봄을 마주하고 10년을 걸었다> 등을 출간했습니다. 유가족이 경험한 혐오와 편견, 분명히 존재했지만 드러내지 못했던 가족들 간의 갈등 등을 솔직하게 담았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사회적 재난과 참사를 기록하고 연구하다 올 초 재난피해자권리센터를 설립했습니다. 센터는 따로 떨어져 있는 재난피해자들을 연결하고, 혐오에 노출되기 쉬운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4월 16일 열리는 세월호 10주기 기억식에서 공연되는 ‘4160인 합창’ 연습 현장도 다녀왔습니다. 세월호 유족과 시민 등 4160명이 현장 참여와 녹화영상으로 ‘가만히 있으라’, ‘네버엔딩 스토리’, ‘화인’,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잊지 않을게’,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등 6곡을 함께 부릅니다. 선곡과 노래 순서에 의미가 없을 수 없겠지요. 참사 순간의 비통함과 슬픔, 참사 이후 그리움과 회상, 아픔과 고통, 진상 규명의 의지, 기억 그리고 연대와 치유 등이 노래에 담겨 흐릅니다. 한국사회는 아직도 세월호를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했습니다. 외면하고 덮어버리려는 노력이 되레 더 컸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세월호를 말할 때면 감정이 요동칩니다. 내년 이맘때 올해보다는 더 담담하게 세월호를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홍진수 편집장 2024.04.17 06:00
사회
세월호 10주기 4160인 시민합창 울린다추모 무대 <세월의 울림>…‘가만히 있으라’ 등 6곡 메들리 지난 4월 6일 경기 안산 단원구청 대강당에서 진행한 ‘4160인 시민합창’ 전체연습에서 한 시민이 악보를 살펴보고 있다. 정희완 기자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아 ‘4160인 시민합창단’이 꾸려졌다. 합창단은 오는 4월 16일 경기도 안산 화랑유원지에서 열리는 10주기 기억식에서 무대에 오른다. 합창의 제목은 <세월의 울림>이다. 참사를 추모하는 의미가 깃든 6곡(약 12분)을 메들리로 엮었다. 곡의 순서와 노랫말은 지난 10년의 세월을 관통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발생한 사건과 감정, 정서가 함축돼 있다. <세월의 울림>은 침몰하는 세월호 선내에서 방송된 ‘가만히 있으라’로 시작한다. 그리움과 아픔을 표현한 ‘네버엔딩 스토리’와 ‘화인(火印)’, 진상규명의 의지를 다지는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로 이어진다. ‘잊지 않을게’로 기억을 약속하고, 연대의 뜻을 담은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로 마무리한다. ■이제 4월은 옛날의 4월이 아니다 본 공연에 앞서 지난 4월 6일 경기 안산 단원구청 대강당에서 2차 전체 사전연습이 진행됐다(1차 연습은 지난 3월 31일 진행). 시민 200여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손에 악보를 든 채 지휘자 박미리씨(48)의 말에 집중했다. 박씨는 이번 합창을 총괄하는 연출감독을 맡았다. 2015년부터 세월호 유가족과 시민으로 구성된 ‘416합창단’의 지휘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호흡을 다 써서 부른다고 좋은 게 아니에요. 호흡이 짧아지면 짧아지는 대로, 그렇게 표현을 하면 훨씬 아름다워요. 호흡을 이었다가 빼고, 이렇게 하면 밀고당기는 느낌이 있어요. 다시 해보겠습니다.” 노랫소리가 강당을 꽉 채웠다.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등 4성부 합창이다. 박씨의 설명이 이어졌다. “보통 허밍은 둥글게 감싸주고 위로하면서 안아주는 느낌을 주고 싶을 때 들어갑니다. 세게 ‘아~’ 할 필요가 없어요. 테너가 허밍을 너무 세게 하면 소프라노 소리를 잡아먹게 됩니다. 소리를 내되 질감을 다르게 하면 됩니다.” 지난 4월 6일 경기 안산 단원구청 대강당에서 ‘4160인 시민합창’ 전체연습을 하고 있다. 정희완 기자 10주기 기억식 현장에 참석해 노래를 부르는 시민은 706명이다. 무대 맨 앞에 서는 416합창단 소속 33명도 포함한다. 지난해 9주기 때 구성된 시민합창단 304명보다 2배 이상 많다. 이에 따라 중앙무대에 더해 양쪽에 날개 모양으로 추가 무대를 설치해 합창단이 약 2000개의 객석을 에워싸는 구조가 된다. 나머지 시민들은 영상을 통해 참여한다. 노래, 수어, 악기연주, 율동 등을 촬영해 주최 측에 사전에 제출하면, 이를 기억식 현장에서 화면에 띄우는 방식이다. <세월의 울림>의 첫 번째 곡은 ‘가만히 있으라’이다. 가수 이승환씨가 작사·작곡해 2015년에 발표한 노래이다. 참사 당시 세월호가 기우는 상황에서 선내에 방송된 “가만히 있으라”는 내용을 담아 참사의 참혹함과 어른들의 책임을 표현했다. 참사 사망자 304명 가운데 250명이 단원고 학생들이다. 공연은 현재 단원고에 재학 중인 학생들이 영상을 통해 이 곡을 부르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현장에 참석한 청소년들이 이어받는다. 연습 중에 박미리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악보에 쉼표 보이시죠? 여기서 확 줄어들어야 해요. 그래야 가사 전달이 잘됩니다. 마지막에 반주가 다 빠지고 ‘가만히 있으라’ 목소리만 남게 됩니다. 객석에서 보면 조용하게 들릴 거예요. 그 울림을 상상하고 부르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 곡은 그룹 부활의 ‘네버엔딩 스토리’이다. 멜로디와 가사에 짙은 그리움이 배 있다. “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게 되는, 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이뤄져 가기를”이라는 후렴구로 유명하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노래를 통해 목소리를 낸 첫 번째 곡이라는 점에도 의미가 있다. 참사 발생 이후 유가족들은 진상규명과 특별법 제정 등을 촉구하며 단식과 행진, 삭발 등을 했다. 2014년 12월 유가족들은 연대해준 시민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자리에서 이 곡을 불렀다고 한다. 2015년에는 뮤직비디오가 제작되기도 했다. 지난 4월 6일 경기 안산 단원구청 대강당에서 진행한 ‘4160인 시민합창’ 전체연습에서 지휘자 박미리씨가 시민들에게 곡을 설명하고 있다. 정희완 기자 세 번째로 ‘화인’이 이어진다. 도종환 시인의 추모시에 가수 백자씨가 멜로디를 입혔다. 화인의 사전적 의미는 ‘쇠붙이로 만들어 불에 달궈 찍는 도장’이다. 가슴속에 새겨진, 평생 지울 수 없는 비통함을 그린 곡이다. 가사처럼 유가족들에게 4월은 더 이상 어느 따뜻한 봄날의 4월이 아닐 것이다. 2015년 참사 500일 추모제 때 유가족과 시민들이 함께 불렀다. 당시는 세월호가 인양되기 전이었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가 네 번째로 들어간다. 2016년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탄핵 촛불집회 때 많이 울려 퍼진 노래다. 민중음악가 윤민석씨가 만들었다. 다른 곡에 비해 멜로디가 경쾌하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등 노랫말에는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향한 의지가 담겼다. 합창에서는 어린이들의 목소리로 곡을 시작한다. 박미리씨는 “세월호 이야기를 노래를 통해 아이들과 같은 자리에서 나눌 수 있다는 건 세월호 부모님들의 10년간 싸움의 큰 성과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작은 행동이 큰 울림으로 이날 합창연습에는 416합창단 소속 유가족 7명도 함께했다. 단장인 최순화씨(고 이창현 학생 어머니)는 인사말을 통해 “4160인 합창을 처음 시작한다고 했을 때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이 노래를 하게 될까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고 막막했다”라며 “하지만 많은 분이 힘을 합하고 노력해서 곡이 완성되는 것 같다”라고 했다. 이어 “제목이 <세월의 울림>인데, 이 노래를 함께했던 모든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울림이 되고, 세월호를 기억하는 모든 분에게 감동을 주는 큰 울림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지난 4월 6일 경기 안산 단원구청 대강당에서 진행한 ‘4160인 시민합창’ 전체연습에서 한 어린이기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를 부르고 있다(사진 위). 지난 4월 6일 경기 안산 단원구청 대강당에서 진행한 ‘4160인 시민합창’ 전체연습에서 홍기헌씨가 노랫말을 수어로 표현하고 있다. /정희완 기자 다섯 번째 곡은 기억하겠다는 약속과 다짐을 담은 ‘잊지 않을게’다. 마찬가지로 윤민석씨가 작사·작곡했다. 세월호 추모곡 가운데 가장 많이 불린 노래다. 10주기 기억식 현장에서는 객석에 있는 시민들이 먼저 부르도록 유도할 계획이다. 기억식 프로그램 안내 소책자에 가사도 실을 예정이다. 시민들이 첼로와 바이올린 등을 연주하는 영상도 함께 나온다. 마지막으로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를 합창한다. 정희성 시인의 시에 멜로디를 얹은 곡이다. 연대를 통해 슬픔과 아픔을 나누고 치유로 나아간다는 뜻이 읽힌다. 국내 재난참사 유가족들은 지난해 12월 ‘재난참사피해자연대’를 공식 발족했다. 세월호를 비롯해 삼풍백화점, 씨랜드 화재, 인천 인현동 화재, 대구지하철, 가습기 살균제, 공주사대부고 병영체험학습, 스텔라데이지호 등 8개 참사 유가족들이 참여했다. “우리가 겪은 참사를 누군가는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생명이 존중받는 안전한 사회를 위해 나아가고자 한다”는 게 연대체의 기본 정신이다. 시민들의 연대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이날 연습에 나온 수어 참가자 홍기헌씨(51)는 “10년 전에 세월호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한 적이 있다. 당시 한 어르신이 오셔서 고맙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알고 보니 단원고 학생의 외할머니였다. 가짜뉴스나 악성 댓글이 많은데 이 서명운동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고 하셨다”고 전했다. 이어 “이렇게 작은 행동도 피해 유족분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돼 이번 합창에도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충북 괴산에 거주하는 박성수씨(54)는 아내, 자녀 2명과 함께 왔다. 박씨 부부는 “10주기에는 추모 활동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합창단을 신청했다”라고 했다. 이어 “사실 집에서 연습을 하지 못했다. 반주를 듣기만 해도 울컥했기 때문”이라며 “이렇게 많은 사람과 함께하니 제대로 부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제주에 거주하는 청소년 20여 명은 지난 4월 9일부터 자전거로 안산까지 이동한 뒤 합창에 합류한다. 이번 합창은 연습 과정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지난 2~3월 연습기간 동안 32개 단체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주최 측에서 강사를 파견했다. 여기에 유가족들도 동행했다. ‘세월호참사 10주기 위원회’에서 합창 실무를 담당하는 진수경씨는 “유가족은 시민에게 힘을 받고, 시민은 유가족에게 힘을 주는 자리였다”라며 “시민합창단은 세월호 참사를 주제로 많은 시민이 모인다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10주기가 끝이 아니라 생명이 존중되고 안전한 사회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지난 4월 6일 경기 안산 단원구청 대강당에서 진행한 ‘4160인 시민합창’ 전체연습에서 세월호 참사 유가족 최순화씨가 시민들에게 인사말을 하고 있다. 정희완 기자 ■10주기 이후에도… 최순화씨는 이날 연습이 끝난 이후 주간경향과 만난 자리에서 첫 곡인 ‘가만히 있으라’를 언급했다. “가만히 있으라가 없었다면 이렇게 참사도 발생하지 않았을 겁니다. 또 세월호를 기억하고 추모하려는 시민들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압력이 지금도 있다는 게 속상하고 화도 납니다.” 최씨는 10주기를 계기로 많은 행사가 개최되면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다만 10주기 이후의 시간이 걱정이라고 털어놓았다. “이번 10주기로 세월호 참사가 끝났다고 생각할까 봐서요. 4월만이 아니라 다른 때에도 4월처럼 관심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의 문제이잖아요. 참사가 던지는 질문과 메시지를 더 많은 사람이 함께 연구하고 고민했으면 좋겠습니다.” 최씨가 말을 이어갔다. “세월호와 관련해 여전히 숙제가 많이 남아 있잖아요. 이런 숙제를 푸는 게 또 우리 부모들의 숙제입니다. 10주기 이후 내년, 후년에도 운동이 이어질 수 있도록 해야죠.” 이번 시민합창은 10주기 이후에도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또 하나의 기록이자 기억의 매개로 남을 듯하다.
정희완 기자 2024.04.15 06:00
화제
[인터뷰] 세월호 가라앉은 진실 ‘침묵행동’으로 밝혀낸다세월호 참사 6주기인 16일 오전 서울 광화문에서 ‘세월호침묵행동’의 유희씨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최근 끝난 21대 총선에서 야당이 대패했다. 그 원인으로 다양한 문제가 지적되는 가운데 야당 후보들의 연이은 막말도 그중 하나로 꼽힌다. 특히 모 후보의 세월호 막말과 이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채 갈팡질팡하는 야당 수뇌부의 행보에 중도층 유권자들이 등을 돌렸다는 분석이 여러 곳에서 나왔다. 전 국민을 충격 속에 빠뜨리며 진도 앞바다에 가라앉은 세월호가 6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슬픔의 바다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세월호는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의 한 기준이 됐다. 세월호 참사의 정부 책임을 인정하느냐 그렇지 않으냐, 이를 여전히 슬퍼하느냐 이제 그만 잊자고 하느냐 등으로 의견이 나뉜다. ‘촛불 시민’과 ‘태극기 부대’로 사람이 갈리기도 한다. ‘먼훗날 한국사회를 되돌아보면서 세월호 참사 이전 시대와 이후 시대로 나눠질 것’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그러나 세월호 침몰과 관련한 여러 의혹은 여전히 안갯속이다. 그러는 가운데 세월호 희생자와 피해자를 모욕하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그 수위도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이로 인해 “하루속히 세월호 참사의 모든 의혹들을 밝혀내고 책임자들을 합법적으로 처벌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피로감을 빨리 풀어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키우는 개인과 단체 또한 늘고 있다. ‘세월호침묵행동’도 그들 중 하나다. ‘세월호침묵행동’은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저녁이면 광화문 교차로에 나와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스카프피켓행동’을 침묵 속에 진행한다. 또 일요일에는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혜화역 2번 출구 근처에서 세월호 관련 리본이나 배지 등을 나눠 주며 ‘세월호를 기억해 달라’고 호소한다. 더러는 일요일과 공휴일을 빼고 매일같이 청와대 앞에서 진상규명을 눈물로 호소하는 고 임경빈군의 어머니 옆에서 힘을 보태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세월호침묵행동’이 세월호 참사 관련 단체들 중 비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최소한의 ‘사람의 도리’를 할 뿐이다. 그래서 대표도 없다. 서로가 뭐를 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저 세월호 희생자와 피해자들의 아픔을 보듬어 안아주고 싶을 뿐이다. 이를 위해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마다 강원도 원주에서 달려오는 사람도 있다. 이들의 첫걸음은 유희씨(40)가 지난해 5월28일 광화문에서 세월호 리본스카프를 들면서 시작됐다. 전날 청와대는 ‘세월호 특별수사단 설치와 전면 재수사’를 바라는 국민청원에 대한 답변에서 “아직 독립적인 수사체계를 말할 단계는 아니다”라며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지켜보자고 했다. 청와대가 문제 해결을 위해 팔소매를 걷어붙이기를 바란 시민 가운데 한 명이던 유씨로서는 어이가 없었다. 청와대 답변에는 의지도 없고, 내용도 없다고 생각했다. 사참위 뒤에 숨어 버린 청와대에 화가 났다. 그래서 홀로 광화문에 나서 침묵한 채 피켓을 들었다. 그런 유씨 곁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유씨는 “오래전부터 노란리본공작소 등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촛불정부의 책임있는 답변을 기다렸는데, 너무 실망스러웠다. 소리치지 않으면 가슴이 무너져 버릴 것 같았다. 무작정 피켓을 들고 광화문에 섰다”고 전했다. 그로부터 11개월. 절대 녹록지 않은 시간이었다. “지나가면서 아무렇지 않게 세월호 희생자와 피해자를 모독하는 발언을 하는 사람이 많다. 더러는 ‘못된’ 유투버들이 찾아와 그런 말을 하고 녹화까지 해 간다. 그런 날이면 몸 안의 모든 장기가 뒤틀리는 듯한 고통을 겪는다. 지독한 몸살 같은….” 그러나 모든 이들이 그러는 것은 아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다가와 ‘힘내라’고 응원해 주고, 그럴 때면 정말 힘이 난다고 유씨는 전한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더욱 무장이 되는 느낌이다. 추운 날에는 핫팩을 잘 쓰는 요령이 생겼고,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에도 우비를 입고 버틸 강단이 생겼다. 경빈이 엄마 등 세월호 유가족들이 모든 억울함을 풀었다고 말씀하실 때까지 피켓을 들 것이다.” 16일 오전 서울 광화문에서 ‘세월호침묵행동’의 김지수씨(오른쪽)가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침묵행동을 하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유씨 옆에서 함께 피켓을 들고 있는 김지수씨(55)는 “세월호가 점점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다. 세월호는 희생자와 그들 가족의 문제가 아니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조차 밝혀내지 못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우리의 안전을 담보할 수 있겠냐”고 말했다. 김씨는 ‘이 일을 하면서 어떤 보람이 있느냐’는 물음에 “보람을 찾으려 하는 일이 아니다. 살려고 하는 일이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수백명이 한꺼번에 생목숨을 잃었는데, 그에 대한 진상규명도 이뤄지지 않고, 진실을 밝혀 달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되레 괴물이 되는 곳이라면, 그곳이 곧 지옥이다. 지옥에서 살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국회를 향해서도 쓴소리를 내뱉었다. 많은 의원이 가슴에 배지만 달고 겉으로만 행동할 뿐 세월호 진상규명 등 실질적은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16일 오전 서울 광화문에서 ‘세월호침묵행동’ 식구들이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활동을 벌이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세월호침묵행동’에는 단원고 희생자 김동영군의 아버지 김재만씨(57)도 함께하고 있다. 김씨는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혀 달라는 것은 누구에게 보복해 아이들의 한을 풀기 위함이 아니다.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다. 다만 상대가 누구이고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아야 용서고 뭐고 할 수 있지 않으냐”고 말했다. 김씨는 이어 “진도에서는 장례를 치를 때 상주를 웃음짓게 할 정도로 흥을 돋운다. 나도 그러고 싶다. 세월호 참사의 모든 의혹이 밝혀지면 해마다 4월16일을 ‘슬픔을 기억하는 날’이 아니라 우리나라가 더욱 안전해진 것을 기뻐하는 날로 만들고 싶다”고 덧붙였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에도 세월호의 진실은 여전히 진도 앞바다에 가라앉아 있다. 그곳이 더는 슬픔과 원통의 공간이 아니라 위로와 배려의 공간이자 ‘안전 교육의 장’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세월호침묵행동’의 소리 없는 외침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상규명이 우선이다. ■세월호침묵행동은? 현재 세월호 참사 진실규명 등을 위해 활동하는 주축은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와 4월16일의 약속 국민연대다. 하지만 두 곳 외에도 전국적으로 수많은 단체가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려 애쓰고 있다. 세월호침묵행동도 그중 하나로, 시민 10여명이 순전히 자신들의 주머닛돈으로 세월호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 가족들의 아픔을 보듬어안는 일을 해오고 있다. 정기적인 모임이 있고 여러 행동도 함께하지만 회비나 규칙 같은 것은 없다. 당연히 대표도 없다. 이들은 “세월호 참사의 아픔은 우리 사회가 잊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희생자 가족들이 사고 책임자들을 용서했을 때 비로소 씻어지는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광화문 #진상규면 #세월호 진실
엄민용 기자 2020.04.20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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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다큐 제작한 김진열 감독이 남긴 1년의 스케치김진열은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주로 개인의 삶을 파고들었던 그녀는 어느 한 집단으로 시선을 돌렸다.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로 가족을 잃은 이들이었다. ‘나쁜 나라’는 세월호 참사 피해 가족들의 이야기다. 참사 후 1년의 시간을 차곡차곡 담았다. 2015년 10월 개봉될 예정이었지만 두 달이 더 지나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첫 장면이 마음에 걸린 탓이다. 본래는 생존 학생들이 사고 후 처음으로 등교하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상처가 될 수 있었다. 내부적인 논의 끝에 김진열(42) 감독은 첫 장면을 수정했다. 영화는 2014년 6월 5일 진도체육관에서 시작된다. 세월호 국정조사특별위원회의 첫 활동이 시작된 날이다. “기본적으로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요. 국정조사특별위원회와 첫 대화를 하면서 가족들은 정치인들만 믿고 기다려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되죠. 상황적으로 가족분들이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어요.” 참사 직후 안산에는 시민기록위원회가 구성됐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기록하고 후대에 남기는 것이 목적이었다. 영상, 사진, 글, 만화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모였다. 6년 전부터 영화 제작 워크숍을 위해 안산을 오가던 김 감독 역시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됐다. “전혀 낯선 지역이 아니다 보니 마음이 좀 더 쓰였어요. 제가 교육을 다니던 동네가 고잔동이었는데, 단원고등학교까지 걸어서 15분이에요. 오가면서 마주쳤던 아이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니까 더 속상했던 것 같아요.” 그녀는 정일건·이수정 감독과 함께 다큐멘터리 연출에 뛰어들었다. 처음엔 너무나 큰 참사여서 어떤 식으로 기록해야 할지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연스레 김 감독은 ‘책임연출자’가 됐다. 영화는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가족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유가족 내부 회의, 안산 분향소의 일상, 해경 회의, 국회 단식 농성, 도보 순례 등 유가족들이 1년간 밟아온 걸음들이 카메라 안에 담겼다.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정서적 흐름’이다. “편집할 때 의견이 두 가지로 나뉘었어요. 한쪽에서는 정치권에서 수사·조사권 합의할 때 어떤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고, 왜 유가족들이 합의안에 반대했는지 등 세부적으로 들어가길 원했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어차피 합의가 끝난 상황에서 그 과정을 다 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입장이었죠. 특별법이 통과되고 한참 뒤에 영화가 나올 거니까 너무 깊게 들어가기보다는 정서적 흐름에 중심을 두는 걸로 의견이 모아졌어요.” 사실 이 영화에는 내레이션이 크게 필요하지 않다. 간단한 자막만으로도 관객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전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민들에게 좀 더 친절하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약간의 내레이션이 필요하다고 김 감독은 판단했다. 영화 속에서 틈틈이 들리는 차분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배우 문소리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면 관객들이 좀 더 편하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배우이고, 그중에서도 세월호 참사에 대해 마음 아파하고 관련된 활동을 하셨던 분이면 좋겠다 싶었는데 문소리씨가 거론됐어요. 문소리씨도 전체 의도를 파악하시고 나서 흔쾌히 참여를 결정해주셨어요. 모르긴 해도 많이 힘드셨을 거예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굉장히 감사했죠.” 카메라를 들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을 때부터 카메라를 든 건 아니었다. 2년 정도 작은 규모의 격주간지 사회부, 문화부에서 펜을 들고 현장을 누볐다. 기자에서 감독이 된 건 취재 과정에서 오는 갈증 때문이었다. “취재원을 겨우 두세 번 만나고 글을 쓰다 보니 내가 분명 잘못 쓰는 게 있겠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어요. 그런데 다큐멘터리를 보니까 카메라 앞에 서 있는 사람과 카메라를 든 사람이 되게 친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거예요. 단순히 한두 번 만난 관계는 아닌 것 같더라고요. 취재원과 오랫동안 밀착하지 못하는 것. 그걸 다큐멘터리가 해소해줄 수 있겠다 싶었어요.” 기자일 땐 새벽까지 일하며 원고 마감하는 게 너무 고단했다. 그런데 영상을 편집하면서는 밤을 새도 피곤함을 느끼지 못했다. 자신이 직접 카메라에 담았던 사람들을 편집 과정에서 또다시 화면으로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 다큐멘터리만의 매력이었다. “그렇게 밤샘을 해도 힘들지 않아서 이 일이 나하고 맞나 보다 생각하지만, 정작 후배들한테는 권하지 않아요(웃음).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들은 되게 느슨해요. 보통 1년에서 3년 정도의 기간을 두고 작업하는데, 매일같이 취재 대상과 밀착할 순 없잖아요. 자기 생활도 통제해야 하고, 생계를 위해 그 밖의 일도 해야 하죠. 그래서 후배들에게는 프로덕션에서 월급 받으면서 단기간에 ‘빡세게’ 배우고, 나이 들었을 때 독립 다큐를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말해주고 있어요.” 전보다 더 잘하고 싶고, 남들에게 인정도 받고, 스스로도 최선을 다해 만들었다는 성취감을 느끼고 싶었다. 항상 이런 생각들에 짓눌려 다시 연출을 하기까지 7년이 걸렸다. 너무 오랜만이다 보니 감을 잃은 느낌이었다. 그만큼 이번 작업은 그녀에게 새로운 시도였다. “제 또래와 작업한 게 처음이었어요. 유가족분들이 저하고 비슷한 나이시거든요. ‘나도 나이 들었나 보다. 그래서 사람 대할 때 능글능글하게 척척 안기는구나’라는 생각도 들었고요(웃음). 이번 작업을 하지 않았더라면 저는 안산 분향소에 가서 분향 한두 번 하고 가끔 뉴스에서 유가족분들 보고 마음 아파하는 정도로 끝났을 것 같아요. 이번 다큐멘터리를 통해 소시민들이 어떻게 시민으로 성장해가는지 보게 됐어요. 저에게는 큰 공부였죠.”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경험은 없다. 대학 때 학생운동도 하지 않았다. 선배들과 집회 현장에 가면 전경들을 뚫고 나와 홀로 김밥을 사 먹으러 갔다고 회상한다. 하지만 그녀의 관심은 항상 약자를 향해 있었다. 여성 장애인의 삶을 주목한 ‘여성 장애인 김진옥씨의 결혼 이야기’(1999), 비전향 장기수 할머니들의 모습을 담은 ‘잊혀진 여전사’(2005) 등 그녀가 만든 작품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줄곧 한 인물을 통해 뭔가를 보여주는 방식을 택해왔다. 다수가 모인 집단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건 ‘나쁜 나라’가 처음이다. 참사가 일어난 지 70일 정도 지났을 무렵, 진상 규명을 위한 서명을 받으러 전국 각지로 떠나는 유가족들과 동행했다. 막 초기 작업을 시작했던 그녀는 이때를 가장 마음 아팠던 순간으로 꼽는다. “대구 쪽에 갔을 때였어요. 유가족분들이 거리에 가만히 서 계시는 걸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슬퍼하고 힘들어해도 부족한데, 거리로 나가서 피켓 들고 외쳐야만 하는 상황이었잖아요. 아버님 한 분이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계셔서 그 모습을 촬영했는데, 너무 죄송스러웠어요. 촬영 내내 그런 순간들이 계속 있었던 것 같아요.” ‘노숙’은 필수 옵션이었다. 유가족들이 노숙을 하니 촬영을 위해서라도 같이 있어야 했지만 차마 그들을 두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집에 가지 못한 적도 많다. “‘저 먼저 갈게요’라는 말이 안 나왔어요. ‘오늘은 집에 가야 하는데’ 하다가도 밖에서 자는 일이 허다했죠. 왠지 모를 미안함이 있었던 것 같아요. 어느 순간 유가족분들이 교대로 집에 가서 주무시더라고요. 저도 당당하게 집에 갔다 오겠다고 했더니 모두 ‘아~ 집이 있었겠구나’라고 하셨어요. 저도 집이 있다고 받아쳤죠(웃음).” 가족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는 건 둘째치고 어떻게 얼굴을 바라볼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고민했던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 유가족들의 정서가 스며들면서 점차 편안해졌다. “이제는 유가족분들과 같이 아이들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면서 깔깔깔 웃거든요. 그렇게 웃다가도 정적이 흘러요. 누가 우리를 보면 제정신 아닌 것처럼 보이겠다고 저희끼리 말하기도 해요. 이야기하면서 막 웃다가 갑자기 우는 분도 있어요. 그러면 저희는 개의치 않으면서 또 깔깔거리고…. 서로 힘든 걸 아니까요. 저 사람 실컷 울 수 있도록 내버려두자는 거죠.” 각자의 역할을 찾아서 무수히 많은 매체가 세월호 관련 기사를 쏟아냈지만 정작 제대로 된 보도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유가족들이 계속 고립돼갔고, 속보 영상을 내보내 그들의 상황을 알려야 하지 않느냐는 내부적인 고민도 많았다. 결국 영상팀은 애초 기획대로 기록 작업에 집중했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할 따름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세월호 참사가 어느덧 잊혀져갈 시기에 영화가 세상에 나왔다. 위로를 해주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가족들은 그녀에게 타이밍이 좋은 것 같다는 말을 건넨다. “본인들이 겪었던 것의 10분의 1도 안 나온다고들 말씀하시죠. 그게 당연하고요. 저희가 담아낸 것보다 더 힘든 상황들이 많았으니까요. 이것저것 더 넣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분은 ‘그건 제작진의 몫이다. 우리가 거론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정리해주시는 분도 있었어요(웃음).” 그녀는 독립영화 시장에 대해서도 한마디 더했다. 올해부터 독립예술영화 전용관에 대한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이 모두 끊기게 된 상황. 대신 영화진흥위원회는 극장 자체가 아닌 특정 영화 배급을 지원하는 정책을 내놓았다. “사실 이번에도 대형 멀티플렉스를 뚫으려고 시도했는데 열어주지 않더라고요. 이제는 다들 세월호 참사에 대해 위축이 돼 있어서 어느 분야든 세월호와 관련됐다고 하면 스스로가 자기 검열하듯 열어주지 않는 것 같아요. 저희 입장에서는 독립예술영화 전용관이 무척 소중한 공간이에요.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구조를 갖고 있으니까요. 문화라고 하는 건 수익 여부를 떠나 사람들이 폭넓게 향유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 부분이 좀 어려운 것 같아요. 극장이 몇 군데나 버텨줄지, 영화인들은 그 걱정을 하고 있어요.” ‘나쁜 나라’는 김 감독의 영화가 아니라 모두의 영화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그녀의 카메라 앞에 일상을 노출해줬기 때문에 다큐멘터리로 제작될 수 있었고, 많은 이들이 관심을 보이고 후원했기에 개봉까지 갈 수 있었다. “모두가 몇 날 며칠 동안 배가 침몰하는 과정을 목격한 사람들이잖아요. 우리가 참 이기적이다 싶은 게, 어느 순간 피해자를 왜곡해서 비난하고 있더라고요. 제가 그날의 목격자로서 카메라를 들고 기록 작업을 했던 것처럼 각자의 역할이 있는 것 같아요. 이 영화가 지금 시점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가 됐으면 해요.” 지난 12월 14일부터 16일까지 진행된 세월호 참사 청문회에서 유가족들은 “모르겠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최선을 다했다”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들어야 했다. 해가 바뀌고, 참사 2주기가 다가오고 있지만 아직도 모든 게 뿌옇고 캄캄할 뿐이다. <■글 / 노도현 기자 ■사진 / 원준희>
2016.01.05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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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아온 4월, 세월호 돌아보기작년 4월 진도 앞바다에 가라앉은 세월호는 아직도 차가운 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세월호 사고 후 1년. 도언 엄마 이지성씨와 함께 지난 1년을 돌아봤다. 또다시, 봄 따뜻한 봄 날씨가 반갑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작년 이맘때 세월호 사고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은 봄이 오지 않았으면 한단다. 안산 단원고 2학년 3반이었던 고 김도언양의 어머니 이지성씨(44)는 봄이 오는 게 두렵다고 한다. “작년 3월 중순쯤에 도언이가 친구들과 찍은 동영상이 있어요. 꽃향기도 맡고 나비도 보면서 까르르 웃는 모습이 담겨 있어요. 딱 이맘때죠. 그전에도 힘들었지만 봄이 다가오는 게 많이 두려워요. 새 학기가 시작돼서 도언이 또래들이 학교에 다니고, 곧 벚꽃도 피잖아요. 작년 어느 날 아침에는 도언이가 밖에 벚꽃이 많이 폈다며 사진 찍자고 하더라고요. 근데 제가 지각해서 안 된다고 말렸어요. 수학여행 가기 전엔 튤립축제 가자고 했었는데, 튤립은 5월에 피니까 수학여행 갔다 오면 가자고 약속했단 말이에요. 결국 그 약속도 못 지켰네요.” 그녀는 작년 4월 16일에 받았던 ‘전원 구조’라는 문자메시지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세월호에 탄 승객 전원이 구조됐다는 것이 오보로 밝혀진 뒤에도 아이들이 살아 돌아올 거라고 굳게 믿었지만 현실은 그녀가 생각한 것과 정반대로 흘러갔다. 세월호 참사로 인한 사망자는 295명, 9명은 실종 상태다. 단원고 학생 4명, 교사 2명과 일반 승객 3명이 아직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세월호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은 전보다 많이 줄어들었고, 세월호로 인해 드러난 우리 사회의 민낯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흐려져가고 있다. 남은 가족들의 삶 유가족들의 삶도 1년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우선 일터로 돌아간 부모들이 늘었다. 남아 있는 가족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자식 생각에 일을 하기 힘들어 다시 그만둔 부모들이 많다. 누군가 미리 예고라도 해줬다면 마음의 준비라도 할 수 있었을 거라는 그들. 평화로운 봄날에 청천벽력같이 다가온 자식의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도언 엄마는 피부관리실을 운영하던 피부관리사이자 건강·산모 관리 등에 대해 강의하는 강사였다. 사고 이후에도 강의 요청이 계속 들어왔지만 그녀는 다시 강단에 설 수 없었다. “아이들이 왜 죽었는지도 밝히지도 못한 무능한 엄마가 누구를 위해 강의를 하겠어요. 미리 알았더라면 어떤 방법이든 가리지 않고 다 써봤을 거예요. 산이라면 밤새 땅이라도 파겠는데 바다는 그럴 수 없잖아요. 구조해주기만을 기다렸던 아이들이 우리를 얼마나 원망하면서 하늘나라로 갔겠어요. 그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때가 많아요.” 도언 엄마는 최근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고 있는 것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이 없어지는 게 안타까웠고, 자신이 남긴 기록이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언이가 발견되고는 일주일 동안 집에만 있었어요. 그런데 문득 ‘내가 힘이 없어서 내 새끼를 잃었는데 이렇게 무기력하게 앉아 있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어요.” 유가족들의 눈에 남아 있는 자식들이 들어온 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한참 뒤였다. 그들에겐 남아 있는 자식들의 슬픔을 보듬어줄 정신이 없었다. 도언이 오빠는 동생을 떠나보낸 두 달 뒤 군 입대를 했다. 도언 엄마는 아들이 입대하기 전까지도 아들의 분을 알아주지 못했다. “18년 동안 함께 지냈던 동생이 하늘나라로 떠났는데 얼마나 슬펐겠어요. 그런데 저는 피켓 들고 서명 받으러 다니느라 전혀 보듬어주지 못한 거죠. 그때 생각하면 많이 미안해요.” 유가족들은 지난 1년간 목 놓아 울 시간 없이 바쁘게 살았다. 그들은 세월호 사고의 진상 규명을 위해 전국으로 서명을 받으러 다녔다. 광화문광장과 국회 앞에서 피켓을 들고 진실을 밝혀달라고 외쳤다. 전국 곳곳에서 간담회를 열고 일반 시민들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유가족들은 외국에까지 지친 몸을 이끌고 가 교민들에게 세월호 사고에 대해 알리고 함께 얘기하는 자리를 가졌다. 이들은 3월 4일부터 18일까지 LA, 뉴욕 등 미국의 주요 도시들을 방문해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과 안전사회 건설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간담회를 열었다. 도언 엄마는 고 박예슬양의 아버지 박종범씨와 함께 3월 19일부터 일주일간 캐나다를 방문해 교민들을 만났다. 문제는 ‘인양’ 유가족들과 실종자 가족들이 하루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이유는 딱 한 가지, ‘진상 규명’을 위해서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인양이 꼭 필요한 상황. 지난해 11월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들로 구성된 세월호 가족대책위원회는 수중 수색을 종료한다는 정부의 결정에 동의하면서 동시에 세월호를 인양해 선체 내부를 수색할 것을 요구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세월호 내부 격실이 빠른 속도로 붕괴되고 있어 무리하게 수색 작업을 계속하면 또 다른 사고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피해 가족들은 수색 작업에 대한 아쉬움이 많이 남았지만 잠수사 가족들이 자신들처럼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길 원치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11일 수중 수색을 종료한 시점부터 지금까지 인양 문제는 조금도 진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가족대책위원회는 올해 1월 26일부터 2월 14일까지 20일간 안산에서 팽목항까지 릴레이 도보 행진을 했다. 이는 세월호 인양과 실종자 수습 등을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행진은 각 반별로 30여 명이 1박 2일간 하루 10시간 25km를 걸은 뒤 매일 저녁 7시에 다음 반과 교대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정말 힘들었어요. 새벽에 일어나서 밤늦게까지 움직이는 게 쉽지 않았죠. 하지만 한 발자국 움직일 때마다 세월호의 진실에 두 걸음, 세 걸음 다가가고 있는 것 같았어요. 이른 아침에 함성 한 번 지르면 힘든 게 싹 풀려서 걷고 또 걸었어요.” 지난 2월 22일, 이완구 국무총리가 안산 화랑유원지에 마련된 세월호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를 찾아 조문했다. 그는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총동원해서 여러분과 함께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겠다”라며 세월호 피해 가족들을 위로했다. 이날 일부 실종자 가족은 세월호를 인양해달라며 무릎을 꿇고 이 총리에게 호소했다. 이 총리는 그들의 손을 잡고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지만 아직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해양수산부는 지난 1월부터 세월호 인양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전남 진도 인근 사고 해역을 관측·조사해오고 있지만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나오지 않은 상황이다. 그들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세월호 피해 가족들에게 가장 큰 힘이 되는 건 이들의 행동에 함께 동참하는 시민들이다. 그들은 정부나 언론은 바뀌지 않았더라도 시민들은 바뀌었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항상 쉽게 잊는 우리가 대한민국을 이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희생됐다”라고 말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청와대 앞에서 농성할 당시, 가족들 반대편에서 농성을 반대하는 피켓을 들고 있었던 주민들도 피해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눈 뒤엔 이내 피켓을 내리고 그들을 응원해줬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시민들이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가족들을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도보 행진 때 한 노인은 그들에게 ‘빨갱이’라고 부르며 손가락질하기도 했다. 이유는 지겹다는 것이었다. 도언 엄마는 더 이상 세월호 피해 가족들을 정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 말아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죽은 애들이 너희 애들밖에 없냐고 대놓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저희는 순수하게 내 새끼를 위해 외치는 거예요. 아이들이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잖아요. 저희를 ‘빨갱이’나 ‘종북좌파’ 같은 단어와 엮지 않으셨으면 해요. 저희를 나무라는 어르신들을 보면 가끔 제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해요. 내가 시민 한 명도 설득하지 못하는데 외국에 나가서 교민들을 설득하려고 하다니.”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사진은 가족들의 마음에 또 한 번 상처를 남겼다. 지난 1월 일간베스트저장소(이하 일베)에 단원고 교복을 입고 어묵을 먹는 한 남성의 사진이 올라왔다. 글의 제목은 ‘친구 먹었다’였다. 세월호 사고 이후 일베에는 배 안에 갇힌 사람들을 비유해 ‘오뎅탕이 돼버렸다’라고 비하하는 댓글이 올라왔다. 어묵을 먹는 사진 역시 세월호 피해 학생들을 비하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분향소에 한 청년이 찾아왔다. 그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말했다. 엄마들은 흔히 어른들이 하는 위로의 말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청년은 무릎까지 꿇고 죄인이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봉사를 하게 해달라고 했다. 엄마들이 특별히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대답하자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봉사라도 좀 하게”였다. 그는 바로 그 비하 글과 관련된 가해자였다. “가해자가 두 명이에요. 한 명은 직접 글을 올린 사람이고, 다른 한 명은 글 올리라고 자극한 사람. 우리는 자극한 사람을 몰랐던 거죠. 문을 열고 당장 끌어냈어요. ‘이 정도 했으면 용서해야지’라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절대 용서할 수도 없고, 용서를 논할 가치도 없는 일이에요. 주한 미국 대사가 피습당했을 때도 사실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누가 배 타고 가라 했냐’라며 우리를 비하했던 사람들이 미국 대사 앞에서는 회복을 바란다며 사랑한다고 외치고. 진정한 부모라면 그럴 수 있을까요?”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는 것 세월호 피해 가족들은 세월호가 우리 사회에서 점점 잊히고 있는 게 두렵지 않다고 말한다. 정부에서 사고의 진실을 덮으려고만 한다면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몇 배 더 많이 움직일 것이기 때문이다. 참사 1주기를 한 달 앞둔 지난 3월 16일과 17일 세월호 피해 가족들은 팽목항과 청와대 앞에서 조속히 선체를 인양하고, 아홉 명의 실종자를 수습해달라고 정부에 호소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인양 계획조차 없이 참사 1주기를 맞을 수 없다면서 전국을 떠도는 가족들의 절박함에 응답해달라고 외쳤다. 세월호 사고 이후 그 어느 지역보다 비통함에 빠졌던 안산에도 봄이 오고 있다. 세월호 합동분향소가 있는 화랑유원지 근처 화정천 길엔 새싹이 돋았다. 날씨가 좀 더 따뜻해지면 나무에 연분홍빛 벚꽃들이 만개해 아름다운 풍경을 이룬다고 한다. 화정천 길은 하늘로 떠난 단원고 학생들이 아침마다 등교하던 길이기도 하다. 세월호 피해 가족들은 다가올 1주기를 어떻게 맞이할까. 이들은 4월 15일 다시 한번 사고 현장에 방문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도언 엄마는 배 안에 있던 아이들이 곧 구조가 될 거라고 굳게 믿으며 기다리고 있었던 현장을 다시 바라볼 수 있을지가 걱정이란다. 아이를 떠나보낸 엄마들끼린 가끔 이런 얘기도 나눈다고 한다. 벚꽃 피면 벚나무 꽃봉오리를 다 따고 다닐 거라고. 아직 이들에게 4월은 너무 가혹한 듯하다. 세월호는 지금… 세월호 참사 1주기 전까지 세월호 선체 인양 여부가 결정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정의당 박원석 의원이 3월 9일 해양수산부에서 받은 서면 답변 자료에 따르면 해수부는 “세월호 선체 인양 관련 기술 검토 태스크포스팀이 3월 말까지 기술 검토를 완료할 계획이며, 검토 결과 공표는 4월 이후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이는 4월에도 선체 인양 계획이 확정될지 불투명하다는 의미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과 책임 등에 관한 진상 규명을 위해 설치된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이하 세월호 특위)는 아직 정식으로 출범하지도 못했다. 지난해 11월 세월호 특별법이 통과되고, 2월 17일 세월호 특위 설립 준비단이 마련한 시행령 안이 정부로 넘어갔다. 그러나 세월호 특위가 정부에 시행령 안을 송부한 지 한 달이 넘었는데도 정부는 공식 답변을 하지 않고 있다. 정부가 적시에 직제·예산 마련에 필요한 지원을 하지 않으면 세월호 특위의 독립성 보장이 어려워질 수 있다. 세월호 특위 측은 정부 보고서를 재검토하는 수준으로 특위 활동을 마치진 않겠다는 입장이다. <■글 / 노도현 기자 ■사진 / 안지영, 경향신문 포토뱅크>
2015.03.25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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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240일, 세월호 유가족의 목소리2014년 4월 18일 금요일은 아이들이 수학여행에서 돌아오는 날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시간은 흘러가지만 유가족들은 오늘도 사고가 난 그날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말한다. 아이들이 돌아오는 금요일이 진짜 오기를 함께 기다려달라고. 안 산 단원고 2학년 6반 신호성군의 엄마 정부자씨는 아들의 시가 지면에 실리길 원했다. 장래희망이 국어 선생님이었던 호성군은 책을 좋아했다. 엄마는 아들이 떠난 뒤에야 비로소 아들의 시를 읽었다. 그리고 아들의 시를 어느 책에라도 싣고 싶었다. 아들에게 작은 선물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다. “책 작업이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때였어요. 호성이 어머님이 연락하셨더라고요. 호성이가 쓴 시가 있는데 책에 실어줄 수 있냐고요. 어머님께 시를 받고 펑펑 울었어요. 밑동만 남은 나무는 어머님 같고, 베어진 나무를 끌어안고 있는 건 호성이 같아서요.” 호성군의 시를 소개하는 김순천 작가의 옆에서 정부자씨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 시는 놀랍도록 세월호 참사 상황과 맞아떨어졌다.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예견했던 것처럼. 잘 자라던 나무를 베어 넘기려는 자는 누구일까. 그것을 말리지 않는 우리는 무엇일까. 공식 인터뷰집, 진상 규명 위한 중요한 자료 지난 1월 13일에 출간된 책 「금요일엔 돌아오렴」(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저, 창비)은 유가족들의 증언과 고백을 모아낸 가족대책위 차원의 공식 인터뷰집이다. 4·16 세월호 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대표 김순천)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직후부터 그해 12월까지 단원고 희생 학생 유가족들과 동고동락하며 그중 부모 13명을 인터뷰해 책을 펴냈다. “워낙 큰 사건이기 때문에 작가 한두 명이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었어요. 영상팀과 사진팀, 구술과 기록 관리를 위한 학자팀이 모여서 함께 시민기록위원회를 만들었어요. 그 안에 작가기록단을 꾸렸고요. 이 책은 작가기록단이 마무리한 첫 번째 작업물입니다.” 작가기록단은 인터뷰를 하고 글을 정리했다. 더불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윤태호, 유승하, 최호철, 손문상, 조남준, 홍승우, 마영신, 김보통 8명의 만화가가 총 13편의 삽화와 표지화를 그렸다. 특히 드라마 ‘미생’의 원작자로 잘 알려진 윤태호 작가는 살인적인 스케줄 가운데서도 책의 삽화를 요청받자 “이런 일에 나를 잊지 않고 동참시켜줘 정말 고맙다”라며 흔쾌히 작업을 해줬다고 한다. 세상에서 제일 슬픈 책은 무엇일까. 책을 펴자마자 눈물짓게 되는 책? 다 읽고 나서는 대성통곡이라도 하고 싶어지는 책? 만약 그렇다면 유가족들의 생생한 증언과 고백, 4월 16일에 멈춰버린 시간의 기억을 담은 이 책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책이다. 첫 줄을 읽기가 무섭게 눈시울이 젖어든다. 어떤 부분에선 한 줄 한 줄 읽어가기 어려울 만큼 목이 멘다. 큰 슬픔과 마주하기 두려워 “이제 그만하자”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세월호 참사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은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지금, 기록집을 낸 것일까. “이 책은 그간 언론매체를 통해 보도되지 못한 유가족들의 애타는 마음, 힘없는 개인이 느끼는 국가에 대한 분노와 무력감, 사건 이후 대다수 가족이 시달리고 있는 트라우마 등이 고스란히 담긴 중요한 기록이에요. 9개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사건 당일의 일분일초를 또렷하게 기억해내는 부모들의 기억이 재구성됐다는 점에서 아주 신뢰할 만한 증언록이 될 거예요.” 첫 번째 공식 인터뷰집이란 의미를 가지는 이 책은 진상을 규명하는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고 김 작가는 말했다. 눈물바람으로 눈의 부기가 가라앉을 새가 없었던 정부자씨는 책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제목을 정한 사람이 미웠다”라고 했다. 제목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괜히 미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금요일은 아이들이 돌아오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더 이상 돌아오지 못한다. 무척이나 잔인한, 그러나 인정해야 하는 현실이다. 그러나 유가족들에게 금요일은 여전히 놓을 수 없는 현재진행형의 특별한 어느 날이다. 다시 한번 금요일이 왔으면… “알아요. 아이들이 살아 돌아오는 금요일은 영영 다시 오지 않는다는 걸. 그래도요. 그래도 꼭 한 번 다시 금요일이 왔으면 좋겠어요. 우리 아이들이 오지 않더라도… 부모들이 아이들을 만나러 갈 수 있는 금요일이라도 말이에요. 그냥, 지금은 그래요. 진상 규명이라도 제대로 되는 것. 그게 지금 우리 부모들이 바랄 수 있는 유일한 금요일이지 않을까 해요.” 정부자씨는 자신은 그저 내 아이 밥해주고 빨래해주고 싶은 엄마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 처한 상황이 그리고 그 상황 속에서 살아내야 하는 삶이 무척 낯설다고 했다. 기자간담회 중 마이크가 전해졌을 때도 “헐벗은 느낌이다”라고 했다. 많이 배운 똑똑하고 잘난 사람도 아닌 자신이 왜 생판 모르는 기자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말해야만 하는지 좀처럼 현실감이 들지 않는다고 했다. 간담회 시작 전부터 단상 앞에 앉아 소리 없이 눈물을 훔쳤던 정씨는 간담회 내내 그리고 끝나고 이어진 인터뷰에서도 ‘이 낯선 곳에서 왜 내가 이러고 있어야 하지’라는 생각만 든다고 했다.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아보지만 서글픈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제가 우리 빌라 반장이라 집집마다 관리비를 걷으러 돌아다녔어요. 그때마다 호성이가 뒤에서 손전등을 비춰주며 같이 다녀줬어요. ‘엄마, 엄마. 조심, 조심’ 이러면서요. 사고 난 뒤 동네 사람들이 저를 보면 ‘뒤에서 불 비춰주던 걔야?’ 그러면서 제 손을 잡고 엉엉 울어요. 대화 자체가 안 돼요. 그래서 이제는 제가 관리비도 못 걷어요.” 호성이는 엄마를 무척이나 아끼는 살가운 아들이었다. 그래서 정부자씨는 더욱 아들의 빈자리가 힘들다. 누군가는 이런 그녀를 보고 “호성이 엄마는 호성이 가고 나서 만능이 됐다”라고 했단다. 뭐라도 해야 마음이 편해지는 이상한 병에 걸린 것 같다고 말했다. 멍하니 있으면 “엄마, 뭐 해?”라고 말하는 호성이 목소리가 들린단다. 그러면 분향소든 어디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돌아다닌다. 책에 대한 소감도 결국은 “진실을 밝혀달라”라는 간곡한 청을 한 번 더 하는 의미다. 사정하고, 울고, 떼쓰면 진실을 밝혀줄 줄 알았단다. 또 당연히 밝혀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밝혀진 것은 하나도 없다. 왜 이런 거냐고 정부자씨는 반문한다. 이게 사는 거냐고 한탄한다. 이건 사람 사는 데가 아니라고 발을 동동 구른다. “안산의 곳곳, 분향소, 팽목항, 광화문, 국회, 청운동에서 유가족들을 만났어요. 그들의 모습은 참으로 다양했어요. 304명이면 304개의 고통이 존재했죠. 우리 사회가 이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무엇을 빼앗아갔는지 분명히 알아야 해요. 책 작업을 한 작가로 느낀 것은… 이 작업을 하면 할수록 세월호 참사와 같은 일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란 거예요. 누구나 유가족이 될 수 있어요. 그렇기에 이 책은 유가족의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해요.” 김 작가는 평범한 유가족들이 얼마나 잘 견디며 싸워왔는지에 대한 삶의 기록이 고스란히 담긴 인터뷰라고 했다.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유가족들을 이 책을 통해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말이다. 유가족의 아픔이야 가늠할 수조차 없지만 그들과 밀착해 지내면서 그들의 말을 생생히 듣고 기록한 작가들의 아픔도 만만찮았을 것 같았다. 꼭 해야만 하는 일이지만 선뜻 내가 하겠다고 나서지 못하는 일이었으리라. 안산에 살고 있던 김 작가가 이 기록 작업을 하게 된 것은 피할 수 없는 필연 같은 것이었다. “주요 희생 지역이 안산시 선부동, 와동, 고잔동이에요. 선부동에서 70명, 와동에서 69명, 고잔동에서 83명이 희생됐어요. 제가 살고 있는 선부동의 아파트에서만 15명의 아이가 희생됐어요. 고통의 한가운데 있었죠. 거리를 무시하지 못하겠더군요. 유가족과 인터뷰를 하고 오면 짧게는 하루 반나절, 길게는 며칠씩 앓아누웠어요. 다른 작가들도요.” 일상으로 돌아가는 사치를 꿈꾸다 공황장애로 집 안에서만 생활해온 김건우군의 엄마는 이제 광화문 천막을 지키며 아들을 위해 싸운다. 신승희양의 언니는 매일 밤 거인이 돼 배를 건져내는 꿈을 꾼다. 그러면서 차도에 뛰어들면, 아파트 위에서 뛰어내리면 금방 죽을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는 자신을 바보 같다고 탓한다. 수학여행 가기 싫어하는 아이를 굳이 떠밀어 보내곤 떨쳐내지 못하는 죄스러움에 몸부림치는 엄마도 유가족 부모들과 모임을 만들어 삶을 추스르려 한다. 암 말기에 접어들어 어떤 활동에도 나서지 못하는 한 어머니가 다른 유가족들에게 미안해하는 이야기도 담겼다. 304명이면 304개의 고통이 존재한다고 했던가. 304개의 고통을 전부 알진 못하더라도 책에 담긴 13명의 고통을 통해 조금이나마 아픔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책에 소개된 열세 분의 이야기는 우연과 우연이 쌓인 결과입니다. 어떤 분은 지면의 제약으로, 어떤 분은 자식 얘길 하는 게 사무치도록 아파 차마 인터뷰를 할 수 없어서, 한창 거리로 나갈 때는 시간이 없어서, 반대로 열심히 활동을 못하시는 분은 자격이 없다고, 또 어떤 분은 자신의 얼굴이 너무 알려졌다며 거절하셨어요. 매번 상황이 급변했죠. 평범한 시민이 어떻게 유가족이 될 수 있는지 정말 생생히 봤습니다.” 인터뷰의 끝은 결국 “진실을 밝혀달라”라는 울음 섞인 간절한 청이었다. 분향소로, 팽목항으로, 광화문으로, 국회로, 청운동으로 바쁘게 다니는 것도 진실 때문이다. 그렇게 길을 누빈 것처럼, 그렇게 책을 만든 것도 진실 때문이다. 아이를 먼저 보낸 엄마들은 가방에 약 한 보따리씩 싸서 갖고 다닌 지 오래다. 심리치료는 언감생심이고, 병원에도 가지 않는다. 입원하라는 말을 들을까 봐서다. 지금은 병원에 누워 있을 때가 아니다. 최근 생존 여학생 1명이 자살을 시도해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생존 학생들 중 의사들이 장담할 정도로 경과가 좋은 학생이었다. 그런 아이가 죽고자 마음을 먹었다. 병원에서 눈은 떴지만 입은 닫았던 아이가 며칠 만에 말을 건넨 이는 죽은 단짝의 오빠였다. “그 아이는 ‘내가 죽으면 다시 어른들이 반성하고 진상을 규명해줄 것 같아’ 죽으려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만하고 일상으로 가장 돌아가고 싶은 건 우리예요. 하지만 보세요. 진실을 밝히지 않으면 살아 있는 아이조차 일상으로 돌아가 잘 살지 못해요. 죽은 아이, 산 아이 모두를 위해 우리는 멈출 수 없어요.”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을 두 번 세 번 죽일 만큼 아픈 말들과 서러운 오해들이 세상을 메우고 있다. 그런데 직접 만난 유가족들은 오로지 평범한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기만을 바랐다.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평범한 일상은 다시 누릴 수 없는 사치가 돼버렸다는 사실을. 그래도 꿈꾼다. 오늘 울고, 내일 다시 일어서서 진실을 밝히려 한다면 그 사치를 한 번쯤은, 하루쯤은 누릴 수 있지 않을까 말이다. 그래서 오늘도 낯선 장소에 부은 눈을 감추지 못하고 간다. 가서 말한다. 진실을 밝혀달라고. Mini Interview “유가족 기록, 고통의 언어이지만…진짜 사랑의 언어이기도 해요” 김순천(작가·세월호 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대표) 언론을 통해 유가족을 보는 국민과는 달리 유가족과 밀착돼 지냈다. 기록단으로서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유가족의 모습은 어떠했나? 교황이 방문하기 전날이었다. 광화문에서 같이 밤을 새우는데… 예슬이 엄마가 ‘거위의 꿈’을 틀어놓았다. 노래가 흐르는데 갑자기 예슬 엄마가 “예슬아, 보고 싶다!” 하고 소리를 지르더라. 차마 책에 다 담지 못한, 세상에 알리지 못한 이런 유가족의 모습들이 무척 많다. 뉴스나 신문에 유가족이 화내고, 소리 지르고, 어떨 땐 싸움도 하는 모습이 보이니까 그들이 별난 사람들인 줄 안다. 하지만 옆에서 본 유가족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다. 어떤 모습이었냐는 물음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모를 만큼 말이다. 유가족에 대한 오해도 있는 게 사실이다. 세상의 오해가 안타까울 것 같다. 많다. 정말 무척이나 많다. 그중 가장 세상이 미울 만큼 안타깝고 속상한 게 보상금과 관련된 얘기다. 보상금을 받았다, 몇 억을 받았다 등등 온갖 억측이 많다. 하지만 지금 유가족이 받은 돈은 누구나 여행 갈 때 의무적으로 드는 여행자보험 보상금 그거 하나다. 그나마도 타가지 않은 분이 더 많다. 그 보상금을 받기 위해서는 아이들 사망신고를 해야 하는데, 사망신고를 안 한 거다. 아니 못하고 있는 거다. 하고 싶지 않으신 거다.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는 말이다. 정말 이분들은 돈 생각 안 한다. 생각해봐라. 세상천지에 자식 목숨하고 돈하고 바꿀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자꾸 돈과 결부시키는 세상의 시선이 참 잔인하다. 보상금 문제는 어떻게 진척되고 있는지? 앞서 말한 여행자보험, 일반인까지 다 가입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부모님들이 받은 보상금은 없다. 그리고 그런 말은 아예 꺼내지도 말라신다. 오해를 받으니까. 우리 사회는 현재 진실 규명을 해달라는 유가족의 청을 보상 문제로 바라본다. 책에 싣지 못했지만 꼭 소개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아직도 바닷속에서 나오지 못한 허다윤양의 이야기다. 아이돌 그룹 비스트의 양요섭을 좋아해서 부족한 용돈을 쪼개고 모아 잡지에 실린 그 가수의 브로마이드를 다 모아놨더라. 그 아이가 아직 못 나오고 있다. 지금 진도에 가면 바지선까지 다 철수했고 작은 부표 하나만 떠 있다. 다윤이 엄마는 그 차가운 바닷속에 자기 딸이 있다는 걸 정말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신다. 많이 괴로워하고 방황하고 계신다. 어떤 때는 당신도 모르게 밖으로 돌아다니시고 그런다. 유가족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로는 무엇이 있을까? 마음은 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몰라 못하는 분들도 많다. 10반 주희양 어머님을 인터뷰할 때였다. 사람들이 욕하고 비난하는 게 힘들지 않으시냐 물었더니, 언젠가 여수 간담회 자리에 갔을 적 이야기를 하시더라. 어떤 할머니 한 분이 자기 밭에서 딴 옥수수를 한 바구니 삶아 와서는 안겨주시는데, 바로 삶아서 가져오셨는지 옥수수가 뜨끈뜨끈하더란다. 이후 사람들이 공격할 때, 이상하게 할머니의 옥수수가 생각나신다고 했다. 뜨끈뜨끈하던 그 옥수수가, 그 온기가. 주희양 어머님은 그걸 사랑이라고 표현하셨다. 유가족을 살린 것도, 내동댕이친 것도 국민이다. 할머니와 같은 심정, 함께 있어주려는 것, 분향소라도 한 번 찾아주는 것과 같은, 정말 잊지 않아주려는 마음이 유가족에겐 큰 힘이 된다. 책이 드디어 발간됐다. 작가로서 소망이 있다면? 우리나라는 위험 사회다. 평범한 사람들 누구나 유가족이 될 수 있다. 남의 일이 아닌 나의 문제로 받아들여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유가족뿐 아니라 희생된 학생들, 일반인 분들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함께 멈춰서 생각해봤으면 한다. 이 책은 고통의 언어로 쓰인 동시에 진짜 사랑의 언어이기도 하다. 나무 -신호성 새들의 보금자리가 되는 곳 식물들이 모여 살 수 있는 곳 이 작은 나무에서 누군가는 울고 웃었을 나무 이 나무를 베어 넘기려는 나무꾼은 누구인가 그것을 말리지 않는 우리는 무엇인가 밑동만 남은 나무는 물을 주어도 햇빛을 주어도 소용이 없다 추억을 지키고 싶다면 나무를 끌어안고 봐보아라 <■기획 / 장회정 기자 ■글 / 강은진(객원기자) ■사진 / 김성구, 경향신문 포토뱅크>
2015.01.22 1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