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경향신문

  • 주간경향

    • [손호철의 미국사 뒤집어보기](8) 21세기 상거래의 최전선 시애틀

      국제 손호철의 미국사 뒤집어보기

      [손호철의 미국사 뒤집어보기](8) 21세기 상거래의 최전선 시애틀

      미국 시애틀에 있는 현대팝예술박물관 / 손호철 제공 <영하의 삶>(Life Below Zero). 알래스카 오지의 삶을 찍은 이 프로그램은 혹독한 추위 속에서 말코손바닥사슴 등을 사냥해 식량을 조달하고, 거의 자급자족으로 살아가는 에스키모 원주민이나 백인의 삶을 그리고 있다. 이들도 눈썰매의 기름값 등 최소한의 현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덫을 놓아 비버, 스라소니 등을 잡아 모피를 손질해 판다. 미 서부 북쪽 끝에 있는 시애틀 근처에는 컬럼비아강이 흘러간다. 포틀랜드를 떠나 시애틀 방향으로 2시간을 달려 컬럼비아강 입구에 이르러 좌회전해 20분 정도 가면 포트 니스퀄리(Fort Nisqually)라는 요새가 나타난다. 미 서부의 남쪽인 캘리포니아를 개척시킨 것이 금이었다면, 북쪽인 시애틀 지역과 그 북쪽인 캐나다를 개척시킨 것은 비버, 수달 등 이 지역에 많은 동물 모피였다. 17세기부터 유럽에는 상류층 부인들을 중심으로 모피 옷이 인기를 끌었고, 그중 최고로 친 것이 물가에 댐을 만들고 사는 비버였다. 유럽비버가 남획으로 빠르게 멸종하자, 유럽의 모피업자들은 미 대륙으로 눈을 돌렸다. 특히 미 대륙의 비버는 유럽비버보다 커서 모피 옷을 만들기에 안성맞춤이었다. 17세기 초 네덜란드서인도회사(DWIC)는 뉴욕지역에 ‘식민지(colony)’를 만들고 비버를 수집했다. 또다시 남획으로 동부지역 비버가 멸종하자, 모피회사들은 서부로 향했다. 일부 회사는 러시아영토였던 알래스카로 진출했지만, 런던에 있는 허드슨 베이 컴퍼니(HBC)는 1800년대 초 워싱턴주 컬럼비아강 입구에 모험심이 강한 개척자들을 선발해 보냈다. 시애틀에 있는 현대팝예술박물관. 손호철 제공 e커머스의 최전선 ‘아마존’ 자리 잡아 모피를 찾아 먼 길을 이동해 미지의 땅인 이 지역에 도착한 이들은 자신들이 생활하고, 외적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는 요새를 지었다. 그 요새가 바로 포트 니스퀄리다. 이들은 요새가 완성되자, 비버 사냥에 나섰다. 그러나 원주민들은 침입자들을 용납하지 않았고, 이들을 공격했다. HBC가 택한 대안은 교역, 다시 말해 원주민과의 물물교환이었다. 이들은 원주민으로부터 모피를 사들이는 대신 거울, 칼, 도끼, 옷 등 원주민들이 본 적이 없었던 유럽 문명의 상품들을 파는 물물교환을 했다. 포트 니스퀄리는 서구 자본주의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문물을 수집하고 생산하던 원주민들의 ‘생존경제’를 만난 ‘19세기 세계 상거래의 최전선’이라고 할 수 있다. 추위를 이기기 위해 비버를 필요한 만큼만 잡던 원주민들은 이곳을 통해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통합됐고, 유럽 귀부인들의 사치를 위해 마구잡이로 비버들을 잡기 시작했다. 이는 또다시 멸종위기로 이어졌고, HBC는 이 요새를 비버 수집소로부터 농사를 짓는 농업 전진기지로 바꿔야 했다. 20세기 들어 복원한 요새를 보고 있으면, 끊임없는 탐욕으로 자원을 고갈시키고 있는 자본주의에 의해 생겨난 최근의 유례없는 생태위기, 기후위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포트 니스퀄리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쯤 달리면 시애틀이다. 시애틀 하면 우리는 세계적인 커피체인 스타벅스를 떠올리지만, 시애틀을 상징하는 것은 스타벅스가 아니다. 60㎞ 떨어진 포트 니스퀄리가 ‘19세기 세계 상거래의 최전선’이었다면, 시애틀에는 ‘21세기 상거래의 최전선’이 자리 잡고 있다. 인터넷 쇼핑, 즉 e커머스의 최전선인 아마존이다. “아버지, 돈 좀 빌려주세요. 지금 인터넷 사용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어서 인터넷서점을 만들려고 합니다. 이름은 아마존입니다. 아마존이 A로 시작하는 만큼 웹사이트에 제일 앞에 나올 것이고요. 아마존은 세계에서 제일 큰 강이라는 점에서 세계에서 제일 큰 서점 이름으로 어울리니까요.” 창업을 준비하던 제프 베이조스는 1994년 아버지에게서 30만달러를 빌려 시애틀에 한 임대주택 차고에서 아마존을 창립했다. 아마존은 인류 역사에 전자상거래라는 유통혁명을 가져왔다. 21세기 최첨단 상거래인 e커머스의 왕국인 아마존 본사가 시애틀에 있다. 손호철 제공 21세기 최첨단 상거래인 e커머스의 왕국인 아마존 본사가 시애틀에 있다. 손호철 제공 ‘인간적 플랫폼 경제’는 불가능한 걸까 아마존이 처음부터 성공한 것은 아니다. 계속 돈이 들어가면서 투자 유치에 어려움을 겪었고, 부도 위기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최고의 서점체인인 반스앤드노블이 그의 투자 제의를 거절하며 100만달러에 회사를 팔라고 했다. 베이조스는 “당신들은 과거이고 아마존은 미래”라고 장담했다. 그의 장담대로 아마존은 성공해 세계 최고의 서점이 됐다. 이 성공에 기초해 판매 품목을 늘리면서 아마존은 이제 세계 최고의 전자상거래기업으로 성장했다. 특히 2020년대 초 세계를 휩쓴 코로나19 팬데믹은 비대면 상거래인 전자상거래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전자상거래는 2024년 현재 세계 전체 소매구매의 20%를 넘어섰다. 27억명이 넘는 사람이 온라인쇼핑을 이용하고 있으며, 전자상거래매장이 2669만개에 달하고, 온라인 상거래 규모가 6조3000억달러다. 미국의 경우 온라인 상거래가 2024년 기준으로 1조2600억달러인데 이중 아마존이 37.6%를 차지해 2위인 월마트 6.4%를 압도하고 있다. 투자 제의를 거절한 반스앤드노블은 점점 쪼그라들어 기업가치가 2억달러에 불과하지만 아마존은 2조달러다. 세계로 이어졌던 당시의 거래네트워크 지도 / 손호철 제공 시애틀 중심가에 있는 아마존 본사 앞에는 여러 거울을 이어 붙여 지구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는 커다란 공 모양의 조형물이 2개 설치돼 있다. 그 앞에 서자 문득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다음 해(2021년) 작품상, 감독상 등 아카데미상을 휩쓴 <노매드랜드>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2008년 월스트리트발 경제위기로 집을 잃은 한 노인이 미니버스에 짐을 싣고 미국을 유랑하는 사회고발 영화다. 주인공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여기저기서 허드렛일을 하는데 전국 각지에 있는 아마존 물류창고에서 일하고 돈이 어느 정도 모이면 떠나는 장면이 나온다. 아마존은 생산을 하지 않고 사람들이 접촉하는 플랫폼으로 돈을 버는 ‘플랫폼 경제’의 전형으로, 창립자 베이조스는 재산이 2300억달러에 이르는 세계 최고의 갑부가 됐다. 하지만 <노매드랜드>가 보여주듯이, 초단기 노동자를 양산하고 수많은 소상공인의 생계를 빼앗는 등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물류창고는 냉난방이 되지 않고 화장실에 갈 시간조차 없어 병에 소변을 눠야 하는 등 열악한 노동조건 때문에 이직률이 연 150%에 달한다. 긴급구조대에 따르면 1년이면 38명이 자살을 시도하거나 자해를 한다. 뉴욕타임스는 아마존을 인간의 ‘노동력을 태워 달리는 폭주 자동차’라고 비판한 바 있다. 21세기 ‘플랫폼 경제 시대’에 ‘인간적 플랫폼 경제’는 불가능한 것인가? 포트 니스퀄리가 ‘모피 거래 제국의 최전선’이었다는 내용의 포스터 / 손호철 제공 모피 옷 제작용 비버를 잡기 위해 백인들이 19세기 초 시애틀 근처에 설치했던 요새 / 손호철 제공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 2025.04.18 14:29

    • [손호철의 미국사 뒤집어보기] (7) 진보와 노동운동의 도시 포틀랜드

      국제 손호철의 미국사 뒤집어보기

      [손호철의 미국사 뒤집어보기] (7) 진보와 노동운동의 도시 포틀랜드

      미국 최초로 스트립걸들이 노조를 결성했던 스트립클럽 / 손호철 제공 “손호철입니다.” “예약 없는데요.” “아니 한 달 전 예약했는데….”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도착해 저가 전국체인인 모텔6 포틀랜드에 들어갔는데 예약이 안 돼 있단다. 휴대전화의 호텔 예약 사이트에서 예약 내용을 보여줬다. “아, 이건 메인주 포틀랜드의 모텔6인데요.” 아이고! 그동안 세계 각국을 여행했지만, 메인주에도 포틀랜드가 있는 줄 모르고 멍청한 실수를 하고 말았다. 긴 여행에 경비를 줄이려고 싼 모텔에 예약했다가 생돈을 날리고 말았다. 미국 서부가 대체로 그러하지만, 특히 포틀랜드는 매우 ‘진보적’인 도시다. 그런 만큼 찾아갈 데가 여러 곳이다. 첫 목적지에 도착했다. 작은 가정집이었다. 사무실이 아니고 가정집이라는데 실망했다. 그러나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 ‘팔레스타인에 연대를’과 같은 각종 피켓, 그리고 창문으로 보이는 ‘IWW’라는 글자가 내 가슴을 뛰게 했다. IWW(Industrial Workers of World·세계산업노동자들)는 한때 세계 노동운동, 진보 운동의 희망이었다. 1980년대 미국 유학 당시 나는 미국의 노동조합 하면 AFL-CIO(미국 노동 총연맹 산업별 조합회의)만 있는 줄 알았다. 어느 날 ‘<관타나메라>(Guantanamera)’, ‘We Shall Overcome’ 등을 세계적으로 알린 좌파 포크송 가수 피터 시거(Pete Seeger)를 통해 IWW라는 노동조합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사라진 줄 알았던 IWW 여전히 존재 20세기 초 AFL(미국노동자연맹) 등 세계의 노동운동은 산업별로 나뉘고, 기능공 중심이고, 개별 국가로 조직되고, 개량주의적이었다. 1906년 시카고에서 설립한 IWW는 ‘혁명적 산업조합주의’라는 이념으로 무장해 사회주의적 경향이 강했으며, 국가와 산업을 넘어 세계의 모든 노동자가 ‘하나의 노동조합’에 모두 모여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만국의 노동자는 단결하라!’였다. 1917년에는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에 15만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했다. 1918년 캐나다가 IWW를 불법화했다. 정부의 탄압과 제1차 세계대전 등으로 조합원들이 급감하고 와해했다. 소수 명맥을 유지하던 IWW는 1950년대 매카시 광풍에 또다시 타격을 받았다. 존 리드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레드> 포스터. 워런 비티가 각본, 감독, 주연, 제작을 맡아 1981년 개봉했다. 손호철 제공 “아니 IWW가 살아 있어?” 1950년대 매카시즘 이후 IWW가 사라진 줄 알았던 나는 이번 답사를 준비하며 IWW가 미미하지만, 오리건을 중심으로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2016년 오리건 지역 패스트푸드 체인점인 버거빌에 IWW 노동조합이 결성됐다는 것이다. IWW는 매니저를 노동자들이 직접 선출하는 등 작업장 민주주의를 주장하며 여전히 급진적인 프로그램을 유지하고 있었다. 관계자들을 만나 IWW의 현황에 대해 듣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문이 잠겨 있었다. IWW와 지역 노동운동의 흔적을 찾아 포틀랜드 커뮤니티대학(PCC)으로 향했다. 대학센터 1층에는 대학노조가 중심이 돼 미술대학생들이 공동으로 그린 ‘기억하라’는 대형벽화가 나를 맞았다. ‘노동조합’, ‘커뮤니티’, ‘연대’라는 큰 글씨들이 쓰인 벽화는 1935년 파업하는 포리스트글로브 노동자들, 노동자들을 구타하는 경찰들, IWW열성지지지였던 인 마리 에퀴 박사, 농업노동자노조 공동창립자이자 이민자 권리 운동가인 시프리아노 페렐 등이 그려져 있는 감동적인 벽화였다. 그림 속의 글이 내 가슴을 찔렀다. ‘우리는 협상을 원하지, 구걸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가 낳은 세계적인 좌파 저널리스트 존 리드를 기리기 위해 시에서 설치한 ‘존 리드 벤치’ / 손호철 제공 ‘존 리드 기념 벤치’에 담긴 미국의 관용 유학 시절인 1982년 가을 나는 난생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카데미 수상식을 눈이 빠지게 보고 있었다. 세계 3대 논픽션의 하나로 꼽히는 <세계를 움직인 열흘>이라는 러시아혁명 현장 르포를 쓴 존 리드(1887~1920)의 일대기 영화 <레즈>(Reds)의 수상을 보기 위해서였다. 할리우드 최고의 바람둥이지만, 탁월한 사회의식을 가진 워런 비티가 공동집필, 제작, 감독, 주연한 대작은 3시간 15분의 상영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감동적인 영화였다. 대작답게 거의 모든 부문에 후보로 올랐지만, 헨리 포드의 유작인 <황금연못>에 대한 추모표에 밀려 줄줄이 낙방했다. 다행히 감독상을 받았다. “잊힌 미국의 한 공산주의자의 일대기를 위해 자금을 대준 미국 자본주의에 감사한다.” 언덕 위에 있어 포틀랜드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워싱턴 공원의 한 벤치 앞에 서자 22년 전 영화인들의 박수 속에 단상에 올라간 워런 비티의 냉소적이지만, 뼈가 담긴 수상소감이 떠올랐다. 포틀랜드시는 2001년 지역 출신인 존 리드를 기념하기로 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구즈 홀로 지역이 내려다보이는 이 벤치를 ‘존 리드 벤치’로 지정하고 기념판을 설치했다. 지역 갑부집에서 태어난 리드는 하버드대학 졸업 후 프리랜서 언론인으로 명성을 쌓았다. 멕시코혁명 르포로 명성을 얻었고 제1차 세계대전 종군기자로 이름을 날렸다. 급진적 사회주의자로 미국을 대표하는 좌파 극작가 유진 오닐, 초기 페미니스트 사회주의자 엠마 골드만 등과 친교가 깊었던 그는 러시아의 혁명 분위기를 감지하고 러시아로 달려가 혁명을 직접 목격하고 세계적인 대작을 썼다. 반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총을 들고 혁명수비대에 참가했다. 전성기 시절인 1900년대 초반의 IWW 파업 포스터 / 손호철 제공 귀국 후 미국도 러시아와 같은 혁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미국 공산노동당(CLPA)을 공동 창당했다. 반역죄로 기소된 그는 위조여권을 갖고 노르웨이, 스웨덴을 거쳐 러시아로 들어갔다. 러시아혁명에 실망한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려고 화물선에 숨어 탔다가 핀란드 세관에게 발각돼 구금됐다. 그는 풀려나 러시아로 추방됐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발진티푸스(벼룩을 매개로 한 전염병)에 걸렸다. 당시 러시아는 미국 등의 경제제재로 약을 구할 수 없었고, 결국 사망했다. 말년의 비판적 견해 때문에 사이가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소련공산당 지도부는 그를 크렘린 혁명열사릉에 묻었다. 아직 밤이 깊지 않았지만 나는 성인용 스트립클럽 매직 타번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스트립쇼를 하는 16명의 스트립걸이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조를 결성하고 공연예술노조에 가입했다는 뉴스를 봤기 때문이다. 스트립걸까지 노조를 결성하다니, 포틀랜드답다. 도착해보니 상호가 달랐다. 종업원들이 노조를 결성하자 주인은 가게 문을 닫았고, 가게는 다른 가게로 바뀌어 있었다. 역시 미국은 미국이었다. 한국 자본가들도 자주 사용하는 폐업이었다. 포틀랜드를 떠나려니, 오클랜드시 중심가에 사회주의자의 이름을 딴 ‘잭 런던광장’을 만들고 반역죄로 기소돼 적국 러시아에서 혁명을 돕다 죽은 존 리드의 기념 벤치를 만든 미국의 관용이 부러웠다. 우리는 과연 충남 예산 한가운데에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 광장’을 만들고 금산에 ‘(지리산 빨치산 대장)이현상 벤치’를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 커뮤니티대학 미대생들이 집단 작업을 통해 그린 지역 노동운동 벽화 / 손호철 제공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 커뮤니티대학 미대생들이 집단 작업을 통해 그린 지역 노동운동 벽화 / 손호철 제공 전설적인 좌파 노동조합 IWW 앞에는 진보적인 내용을 담은 포스터들이 진열돼 있다. 손호철 제공 전설적인 좌파 노동조합인 IWW의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 사무실 / 손호철 제공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 2025.04.04 15:30

    • [손호철의 미국사 뒤집어보기](6) 다양성과 관용의 도시 샌프란시스코

      국제 손호철의 미국사 뒤집어보기

      [손호철의 미국사 뒤집어보기](6) 다양성과 관용의 도시 샌프란시스코

      ‘미국 동성애자의 도시’답게 샌프란시스코에는 이들을 위한 LBGT센터가 여러개 있다. 손호철 제공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꼭 머리에 꽃을 꽂으세요.” 북캘리포니아를 대표하는 항구도시 샌프란시스코로 들어가는 골든게이트 다리를 건너며 나는 ‘샌프란시스코’를 흥얼거렸다. 1967년 발표된 이 노래는 샌프란시스코만이 아니라 그 시대의 특징인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반전운동과 히피문화를 대표한다. ‘꽃’은 단순한 꽃이 아니라 ‘평화’를 상징한다.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반 반전운동과 히피문화를 상징하는 세계적인 음악 페스티벌은 1970년 우드스톡축제다. 하지만 우드스톡 이전에 샌프란시스코가 있었다. 구체적으로 1967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사랑의 여름’이라는 축제다. 기존의 고루한 남녀관을 혁명적으로 파괴하는 ‘프리섹스’, ‘꽃의 힘(flower Power)’, ‘폭력과 징집 중단’을 내걸고 미국 전역에서 10만명의 ‘꽃아이들’(flower children)이라 불린 젊은이들이 샌프란시스코로 몰려들었다. ‘헤이트 애시베리.’ 샌프란시스코 중심가에 있는 헤이트 거리와 애시베리 거리의 교차점에 서자 전설적인 거리 팻말이 나타났다. 이 지역에는 1960년대 들어 전후 비트세대 문학의 영향을 받은 젊은이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이들은 일과 풍요로운 소비주의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자본주의와 주류 문화에 저항해 유희와 쾌락, 마약, 공동체를 강조하며 ‘체제 밖’으로 나가(drop out) 일과 소비를 거부하며 살아야 한다는 히피문화를 주도했다. 한 지역 히피신문은 1967년 베트남전쟁 징집 분위기에서 “인간의 저 아래 속에 묻어두었던 ‘축제’라는 개념을 끌어내 의식화하고 공유해 연민과 깨달음, 사랑의 르네상스를 통해 모든 인류가 통합되는 혁명을 이뤄야 한다”며 ‘사랑의 축제’를 제안했다. 대안에 목말랐던 젊은이들은 헤이트 애시베리로 몰려들었다. 1967년 수많은 젊은이가 지미 헨드릭스 등의 공연에 열광했던 골든게이트 공원에 안개가 끼어 있다. 손호철 제공 골드러시가 낳은 ‘동성애자의 메카’ ‘사랑은 인권이다.’ 헤이트 애시베리 거리를 걷다가 이 구호를 보자 머리를 망치로 맞은 것같이 놀랐다. 대학에서 ‘인권의 정치’도 가르쳤지만, 전혀 생각하지 못한 구호다. 사방에 동성애자와 무지개연합을 상징하는 ‘빨주노초파남보’ 총천연색 간판과 벽화가 가득했다. ‘흑인, 트랜스젠더, 동성애자, 이민자, 장애인, 병자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하여’라는 구호 등 거리는 시장 만능 자본주의의 극단적 형태인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세상과 달리 최소한 문화적으로는 해방된 ‘문화해방구’였다. 커피점 상호마저 <민중에게 커피를(Coffee to the People)>이다. 1967년 이곳에 모였던 젊은이들을 생각하며 거리를 걷자 ‘평화, 1967, 사랑의 여름’이라는 그림이 보였다. 마침 지나가던 할머니가 내 손을 끌고 따라오란다. 스타킹을 신은 ‘야한’, 거대한 여자 다리 모형을 2층 베란다에 도발적으로 설치해 놓은 건물이 나타났다. 한국 같으면 ‘19금’에 걸려 당장 강제로 철거했을 건축물이다. 조금 더 가자 한 건물 옆 벽에 ‘역사상 최고의 기타리스트’인 지미 헨드릭스가 기타를 연주하는 그림이 나타났다. “여기가 내 애인인 지미 헨드릭스가 살던 집이에요.” 설마 진짜 애인이랴만, 고마운 할머니 덕분에 지미 헨드릭스의 집도 구경할 수 있었다. 사랑의 축제가 여기서 열린 것은 우연이 아니다. 샌프란시스코는 항구도시답게 개방성을 특징으로 한다. 샌프란시스코는 인구 대비 동성애자가 15.4%로 미국에서 제일 많은 ‘게이의 도시’, ‘동성애자들의 메카’로 불릴 만큼 다양성과 관용, 자유를 상징하는 도시다. 세계적으로 동성애자 비율이 약 3% 정도인 것을 생각하면 평균의 5배, 시민 7명 중 한 명이 동성애자라는 뜻이다. “아니 골드러시와 동성애가 무슨 관계가 있어?” 이 지역 동성애의 뿌리를 골드러시에서 찾은 한 교수의 글을 읽고 나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글을 읽자 이해가 됐다. 골드러시로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면서 샌프란시스코가 다양성과 관용의 도시로 변했다는 것이다. 특히 이들 대부분이 남성이었고, 여성은 드물었기 때문에 동성애가 퍼지기에 좋았다. 두 번째 계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다. 전쟁으로 징집병사가 급증했고, 미국 정부는 이들 중 동성애자를 가려 강제 전역시켰다. 문제는 해군이었다. 해군에서 적발된 동성애자들은 샌프란스시코항에 내리게 했다. 자연히 지역에는 동성애자들이 늘어났고, 동성애자 커뮤니티와 조직이 생겨났다. 세계 최고의 기타리스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지미 헨드릭스가 살던 집 / 손호철 제공 그때의 젊은이들은 아직도 ‘반자본’ 실천할까 결정적 계기는 호세 세리아가 1961년 미국에서 최초로 공개적으로 동성애자임을 밝히고 공직(샌프란시스코 시의원)에 출마한 것이다. 그는 선거에서 예상외로 6000표나 얻었다. “그날 이후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마하는 사람은 게이커뮤니티를 방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세리아의 증언이다. 게이(남성 동성애자)만이 아니라 여성 동성애자, 양성애자, 성전환자들도 커밍아웃하고 조직화를 시작했다. 1977년 처음으로 동성애자가 시의원에 당선됐다. 동성애자들의 힘이 강해지자 시는 친동성애 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다. 이를 본 동성애자들이 샌프란시스코로 몰려들었고, 그들의 힘은 더 강해졌다. 일종의 ‘눈 굴리기 효과’가 나타났다. 위기도 있었다. 1980~1990년대의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위기다. 이후 15년 동안 지역에서 15만명이 AIDS로 죽었다. 이 같은 위기 속에도 동성애운동은 지속돼 2004년 역사상 처음으로 동성애자 부부에게 결혼증명서를 발급했다. 동성애자 결혼은 많은 법적 논쟁을 낳다가 2013년 연방대법원의 판결로 최종적으로 합법화됐다. 한국이라면 당장 철거했을 법한 ‘19금’ 외관의 건물 / 손호철 제공 게이 거리로 알려진 카스트로 거리 가까운 곳에 샌프란시스코 LBGT센터가 있다. 건물 전체를 이들을 상징하는 보라색으로 칠한 것, ‘즐거움(Joy)은 우리들의 집단적 힘의 연료다’, ‘레즈비언, 양성애자, 게이, 성전환자’라고 써놓은 것이 이색적이다. 우리는 아직도 차별금지법조차 제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언제쯤이나 성적 정체성이 다른 LBGT가 이같이 떳떳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고 살 수 있을 것인지 답답하기만 하다. “헤이 조-” 지미 헨드릭스가 이빨로 기타 줄을 물어뜯는 특유의 연주법으로 히트곡인 ‘헤이 조’를 시작했다. 비가 내리는 텅 빈 골든게이트 공원 잔디밭에 서자 58년 전 지미 헨드릭스의 연주를 들으며 열광했던 수만명의 젊은 함성이 들리는 듯했다. 근 60년이 지났으니 이제 그 젊은이들은 대부분 70대 후반의 노인이 됐을 것이다. 그들은 아직도 얼마나 그때의 열정을 유지하며 ‘반자본주의’, ‘반소비주의’를 실천하고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샌프란시스코 헤이트 애시베리 거리의 화려한 외관 / 손호철 제공 한 건물에 ‘1967년 사랑의 여름’이란 글씨가 쓰여 있다. 손호철 제공 지금도 ‘문화해방구’인 샌프란시스코 헤이트 애시베리 거리의 표지판 / 손호철 제공 샌프란시스코의 한 가게에 ‘사랑은 인권이다’라는 포스터가 걸려 있다. 손호철 제공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 2025.03.21 15:00

    • [손호철의 미국사 뒤집어보기](5) 복합위기 시대의 실리콘밸리

      국제 손호철의 미국사 뒤집어보기

      [손호철의 미국사 뒤집어보기](5) 복합위기 시대의 실리콘밸리

      기후위기로 말라 죽어가는 미국의 옥수수밭. 실리콘밸리는 기후위기 등에 얼마나 답을 주고 있는가? / 손호철 제공 “아이고, 또 틀렸네!” 1980년 나는 동양통신(현 연합뉴스) 기자로 근무하다가 “5·18을 ‘폭동’이라고 보도하라”는 신군부의 지침에 저항해 통신사를 떠나 미국으로 유학을 가야 했다. 미국 대학교수들은 과목당 매주 300쪽 이상의 원서를 읽고 비판적 글을 두 장 정도 써오라고 했다. 한 학기에 세 과목을 들으니 900쪽 이상을 읽고 영어로 비평문을 쓰는 것은 고문이었다. 더 큰 문제는 타자였다. 치다가 오자가 생기면 그 페이지를 전부 다시 쳐야 했다. 이렇게 타자를 반복하다 밤을 새우는 날이 많았다. “호철, 이거 한 번 써봐.” 어느 날 미국인 대학원 동료가 나를 연구실로 불러 무언가를 보여줬다. 애플이 만든 매킨토시 PC(퍼스널 컴퓨터)였다. PC를 구입하면서 오자가 생기면 그 페이지를 전부 다시 쳐야 하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었다. 덕분에 영어로 글쓰기 속도가 붙었다. 애플 덕에 박사학위 논문을 끝낼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남쪽 동네를 우리는 세계 첨단산업의 산실인 ‘실리콘밸리’라고 부른다. 마리포사의 금·광물 박물관을 떠나 3시간을 달리자 실리콘밸리의 심장인 산호세에 도착했다. 목적지인 애플 본사(애플파크)가 가까워지자 문득 40년 전 처음 매킨토시를 접하고 느꼈던 전율이 생각났다. 이 동네에서 일하고 있는 서강대 제자 권새봄과 박선우도 생각났다. “스티브 잡스와 아이폰처럼 인문학적 상상력과 예술적 감각 그리고 자연과학적 테크놀로지를 모두 갖춘 다빈치형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아트앤테크놀로지와 지식융합부를 만들려고 하니 손 교수가 신생학부 학장을 맡아 기틀을 잡아주십시오.” 그때 뽑은 제자들이 실리콘밸리에서 일하고 있어 저녁을 같이하기로 했다. 애플 본사의 방문센터에서 애플 제품을 구입하는 사람들 / 손호철 제공 산호세에 있는 애플 본사의 방문센터 / 손호철 제공 애플의 혜택 뒤편엔 노동자의 눈물 애플파크에 도착해 방문센터로 가자 애플 제품을 사기 위한 애플 팬이 넘쳐났다. 옆방에는 이미 전설이 된 애플의 거대한 원형사옥 모형 앞에 많은 방문객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원형사옥을 하늘에서 내려다볼 수 없기에 모형이라도 보려는 사람들이다. 옥상으로 올라가자 길 건너 나무 사이로 원형사옥의 모습이 보였다. 이곳에서 가까운 팔로알토의 한 작은 집 주차장에는 특이한 팻말이 설치돼 있다. ‘실리콘밸리 발상지’, ‘현대의 금광’이라고 할 수 있는 실리콘밸리는 골드러시 100년 후인 1939년 이 지역에 있는 스탠퍼드대학 졸업생으로 나중에 휴렛팩커드(HP) 컴퓨터회사를 만든 빌 휴렛과 데이비드 팩커드가 자기 집 주차장에 전자회사를 설립한 것에서 시작됐다. 이 지역은 스탠퍼드대학, UC버클리 등 세계적 명문대학이 자리 잡고 있어 산학협력에 유리해 전자산업 등 첨단기업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샌프란시스코, 버클리 등의 자유분방한 분위기는 실험적 연구와 투자, 창업에 유리했다. 애플을 만든 스티브 잡스도 샌프란시스코 출신이다. 애플이 우리에게 준 혜택은 말할 수 없이 많다. 내가 박사학위를 따게 해줬고, 최영미 시인이 그의 대표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에서 “섹스만 해줄 수 있다면 완벽한 동반자”라고 극찬한 PC에서부터 이제 모두가 ‘없이는 살 수 없는’ 휴대전화에 이르기까지 그 예는 많다. 사실 길 안내부터 필요할 때면 언제든 찾아볼 수 있는 휴대전화가 없었다면, 이번 미국답사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 면에 불과하다. 길 건너 나무 사이로 원형의 애플 본사 건물이 보인다. / 손호철 제공 “우리가 죄수냐?” 2022년 중국의 폭스콘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구호를 외치며 정문으로 진격했다. 코로나19로 많은 직원이 그만두자 고임금을 약속해 노동자들을 새로 고용하고도 낮은 임금을 준 데다가 코로나19를 이유로 외출도 금지하는 등 사실상 감옥 같은 생활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애플은 시총 3조달러의 세계 최고 기업이고, 아이폰 덕으로 삼성전자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수익을 내고 있다. 하지만 노동자 50% 이상이 법적 보호를 거의 받지 못하는 파견노동자로 강제 초과근무가 일상화돼 ‘착취공장’이라는 비판을 듣는 폭스콘에서 아이폰을 생산하고 있다. 독특한 원형 디자인으로 유명한 애플 본사 모형 앞에서 방문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 손호철 제공 세계는 불타는데 실리콘밸리는 비파만 켜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잉여가치론을 통해 이윤에 눈이 멀어 인간과 자연을 파괴하는 자본주의의 착취와 파괴를 생생하게 분석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본주의는 ‘완만한 학살’에 다름 아니다. 반면에 주류경제학은 자본주의의 긍정적인 면만을 강조한다. 특히 최근 주류경제학에서 주목하는 것은 미국의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다. 그는 자본주의를 ‘창조적 파괴’라고 분석했다. 구체적으로 “내부로부터 경제구조를 부단히 낡은 것을 파괴하고 부단히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부단히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는 산업변화의 과정”이다. 애플, 그리고 실리콘밸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창조적 파괴’다. 이를 통해 아이폰, 인공지능(AI) 등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새로운 기술과 제품들이 만들어지고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고 있다. 산호세에 있는 애플 본사의 방문센터 / 손호철 제공 그러나 그 과정에서 파괴되는 것들의 고통은 어떠한가? 파괴과정 속에 쓸모없는 것이 되어 도태되고 있는 수많은 노동자의 삶은 어떠한가? 아니 최근 들어서는 창조적 파괴에 의해 발전하고 있는 AI 혁명으로 인류 자체가 위협받고 있다. 어디 인간뿐일까? 진짜 문제는 기후위기, 생태위기다. 미국 여행 내내 목격한 옥수수밭이 이를 증언하고 있다. 곳곳에서 끝없이 이어진 옥수수가 누렇게 죽어가고 있다. 인류만이 아니라 지구 자체의 미래가 위협받고 있는 생태파괴의 시대에 생태적 파괴를 최소화하는 ‘생태기술’이나 ‘적정기술’이 아니라 지속적인 창조적 파괴, 이에 따른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제품이 바람직한가? 여러 지구적 위기가 중첩된 ‘복합위기의 시대’에 창조적 파괴와 실리콘밸리는 인류에게 축복인가? 저주인가? 1960년대 말, 전후 풍요를 누리던 서구 자본주의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반전 운동, 68혁명 등 다양한 대중운동도 폭발했다. 하지만 정치학자들은 가치 중립적인 ‘과학적 정치학’이라는 이름 아래 침묵하며 통계 연구 등에 몰입하고 있었다. 이를 바라보며 한 정치사상가가 일갈했다. “로마는 불타고 있는데 네로는 비파만 켜고 있다.” 미국 자본주의, 아니 세계 자본주의의 최첨단인 실리콘밸리를 바라보며 나 역시 그처럼 일갈하고 싶어졌다. “세계는 불타고 있는데 실리콘밸리는 비파만 켜고 있다.”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 2025.03.07 14:30

    • [손호철의 미국사 뒤집어보기](4) 금이 만든 캘리포니아

      국제 손호철의 미국사 뒤집어보기

      [손호철의 미국사 뒤집어보기](4) 금이 만든 캘리포니아

      캘리포니아주 바스토에는 골드러시에 대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손호철 제공 ‘포티나이너스(49ers).’ 전설적인 쿼터백 조 몬태나가 활약하던 인기 있는 샌프란시스코 미식축구팀의 이름이다. 샌프란시스코와 포티나이너스는 무슨 연관이 있는가? 포티나이너스는 미국 역사에서 독특한 의미가 있다. 이는 1849년 캘리포니아 골드러시 때 일확천금을 노리고 서부로 몰려든 사람들을 의미한다. 금을 찾는 포티나이너스야말로 미국 서부 개척의 핵심동력이었다. 보스턴 등 동부에서 시작된 백인들의 아메리카대륙 정착은 유럽으로부터 인구 유입이 늘어나면서 서서히 서부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1800년대 중반까지는 ‘대평원’이라고 불리는 로키산맥 동쪽에 머물러 있었다. 서부 개척을 본격화한 것은 세 가지다. 하나는 종교 탄압에 따른 모르몬교도들의 대이동이다. 미주리와 일리노이에 주로 자리 잡고 있던 모르몬교는 일부다처제 등과 관련, 1844년 자신들의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타살당하자 일부가 대대적으로 서부로 이동했다. 이들은 로키산맥을 넘어 솔트레이크시티 등 유타지역에 자리 잡았다. 그러나 유타지역은 아직 서부 끝과 태평양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두 번째는 백인이나 백인혼혈의 경우 4년간 일하면 땅의 소유를 인정한다는 오리건 지역의 토지 기증법이다. 이 법이 알려지자 땅을 갖지 못한 백인들이 땅을 찾아 서부로 이주하는 인구가 많이 늘어났다.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것으로 금이다. 인구 세 배에 달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금이다!” 1848년 초 제임스 마셜은 새크라멘토 근처의 콜로마 근처 강에서 금을 발견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캘리포니아의 다른 지역과 북쪽의 오리건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금은 사방에 널려 있었고, 이들은 쉽게 떼돈을 벌었다. 이 소식이 동부, 나아가 세계로 알려지자 미국 동부뿐 아니라 유럽, 라틴아메리카, 멀리 중국에서까지 사람들이 물밀 듯이 몰려들었다. ‘골드러시’였다. 특히 1849년 포티나이너스가 몰려들며 금 생산이 최고조에 달했다. 1849년 초를 기준으로 캘리포니아 인구는 10만명 정도로 알려졌는데, 1849~1855년 이의 세 배에 달하는 30만명이 몰려들었다. 골드러시 전에 샌프란시스코는 인구 300여명의 작은 항구에 불과했다. 1850년 인구 2만5000명의 큰 항구로 발전했다.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배들이 샌프란시스코 앞바다를 가득 메웠다. 샌프란시스코를 만든 것은, 아니 캘리포니아를 만든 것은 골드러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샌프란시스코 시청사 앞 공원에 포티나이너들이 삽을 들고 있는 동상이 세워져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아메리카대륙의 다른 지역처럼 캘리포니아도 원래 인디언이라고 부르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거주지였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샌타바버라 방향으로 두 시간 달려가면 여러 벽화가 그려져 있는 추마시 동굴이 나타난다. 1000년 전에 원주민들이 만든 것으로 오래전부터 원주민들이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었음을 증언해주고 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1492년 미 대륙에 도착(발견이 아니다)했지만, 태평양을 접하고 있는 서부에는 1542년에나 유럽 배가 도착했다. 이후 스페인은 물품교환소와 성당 등을 지었지만 지리적 조건 때문에 스페인 등 유럽과의 접촉이 많지 않았다. 1821년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자 캘리포니아는 멕시코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미국·멕시코 전쟁(1846~1848)에서 미국이 승리하면서 캘리포니아는 미국에 속하게 됐다. 요세미티공원 역사관에는 포티나이너스에게 학살당한 가족에 대한 인디언들의 증언을 들을 수 있다./ 손호철 제공 포티나이너스는 두 가지 경로로 캘리포니아로 올 수 있었다. 우선 바다다. 당시는 파나마운하가 없었던 만큼 동부나 유럽에서 캘리포니아로 오기 위해서는 남아메리카 끝을 지나 3만3000㎞를 항해해 반년 만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같은 여행이 너무 힘들어지자, 일부 해운회사들이 동부에서 고객들을 모집해 니카라과, 파나마 대서양 쪽에 내리게 한 뒤 카누와 당나귀를 타고 정글을 통과해 태평양 쪽에 도착해 거기서 다시 증기선으로 캘리포니아로 승객들을 운반했다.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바다 항로를 택할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육로를 택했다. 캘리포니아 트레일이 그것이다. 캘리포니아 트레일은 미주리강에서 캘리포니아 서부지역까지 2600㎞에 달하는 험난한 길로 대강 6개월이 걸렸다. 말이나 당나귀가 끄는 마차를 4명 정도가 타고 이동했다. 마차 준비와 식량 등으로 캘리포니아 행에는 1인당 100달러 정도 들었다. 이는 일반인들이 넉 달은 벌어야 하는 돈으로 몹시 가난한 사람들은 캘리포니아 행에 동참하지도 못했다. 황금에 눈멀어 원주민 제노사이드 일확천금을 향한 캘리포니아 트레일의 마지막 난관은 캘리포니아를 남에서 북으로 가로지르고 있는 시에라네바다산맥을 넘어 서쪽으로 가는 것이다. 나는 맨재너 수용소에서 북으로 달려 매머드 호수를 지나 시에라네바다산맥이 자랑하는 아름다운 공원 요세미티로 향했다. 지그재그로 아찔한 요세미티공원의 산길을 달리자 마차를 타고 이곳을 넘어가던 포티나이너스들이 가파른 길에 힘들어하는 말을 다그치는 채찍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마리포사. 요세미티에서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넘어서면 나타나는 작은 도시다. 이곳에는 캘리포니아주가 옛 금광을 박물관으로 만든 ‘캘리포니아주 금·광물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이른 시간이라 개장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골드러시에 대한 많은 자료와 광물이 진열돼 있지만 사진 촬영은 금한다고 한다. 미술관의 세계적인 명작들도 사진을 찍게 하는 시대에 웃기는 관료주의다. 주목할 것은 골드러시가 동양인들의 본격적인 미국 이민의 출발점이 됐다는 사실이다. 골드러시 직전인 1848년 미국에 800명에 불과했던 중국인은 1860년 2만5000명으로 늘어났고, 한때 금광 노동자들의 25%를 차지했다. 중국인은 용모나 복장에서 눈에 띄었고, 반중국 분위기가 생겨났다. 1877년에는 월로우카운티에서 중국계 금광 노동자 34명이 집단학살 당했고, 차이나타운을 불 지르고 공격한 샌프란시스코 폭동이 일어났다. 요세미티공원 역사관에는 캘리포니아로 몰려든 백인들이 원주민 마을을 공격하는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손호철 제공 골드러시의 최대피해자는 원주민들이었다. 유럽인 등 외부인들이 급속히 유입되면서 면역력을 갖지 못한 이들은 각종 유라시아 질병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 그뿐만 아니라 포티나이너스들은 금을 캐기 위해 이 지역에 사는 원주민들을 쫓아내고 학살했다. “인디언이 박멸될 때까지 두 종족 간의 박멸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초대 캘리포니아주지사인 피터 버넷은 공공연히 원주민 박멸을 주장했다. 골드러시 전 15만명에 달했던 캘리포니아의 원주민은 1860년에는 3만명으로 줄어들었다. 황금이 백인들의 원주민 제노사이드를 가져왔으니, ‘황금에 눈이 먼다’는 말 그대로다. 캘리포니아주 금·광물박물관에 전시 중인 광물들 / 손호철 제공 샌프란시스코 시청 앞 광장에는 샌프란시스코를 있게 한 금광 개척자들 포티나이너스의 동상이 서 있다. / 손호철 제공 마리포사에 있는 캘리포니아주 금·광물박물관 / 손호철 제공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 2025.02.14 15:00

    • [손호철의 미국사 뒤집어보기](3) 황무지에 숨겨진 일본계 강제수용소

      국제 손호철의 미국사 뒤집어보기

      [손호철의 미국사 뒤집어보기](3) 황무지에 숨겨진 일본계 강제수용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만자나르 강제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은 일본계 미국인들의 위령탑. 그들은 시에라네바다산맥을 뒤로 하고 묻혀 있다. / 손호철 제공 데스밸리. 미국 캘리포니아주 중부 동쪽 끝에 있는 이곳은 해수면보다 82m나 낮고, 최고 기온이 50도를 기록할 정도로 무더운 사막으로, 금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향하던 서부 개척자들이 무수히 죽어 나갔다. 차베스기념관을 나와 북으로 395번 도로를 4시간 정도 달리면 오른쪽에는 데스밸리가, 왼쪽에는 수천 년 된 나무로 유명한 세쿼이아 국립공원과 캘리포니아주를 북에서 남으로 가로지르는 시에라네바다산맥이 나타난다. 이곳은 인적과 거리가 먼 오지다. 특히 기이한 바위들과 황무지가 이어진 론 파인은 서부영화의 단골 촬영지로 서부영화박물관이 세워져 있다. 이 박물관을 지나 북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부끄러운 미국의 역사가 숨겨져 있다. 카레이스키. 중앙아시아에 흩어져 있는 한인들을 지칭하는 말로 아픈 우리의 역사다.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고 일본과 소련(현 러시아) 국경 간의 긴장이 고조되자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1937년 한 말 이후 하바롭스크 등 연해주에 정착해 살고 있던 한인(고려인) 약 20만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켰다. 최근 뉴라이트들의 공격으로 문제가 된 홍범도 장군 역시 카자흐스탄으로 끌려갔다. 이 같은 사실을 처음 접하고 스탈린에게 분노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문제는 ‘독재자’ 스탈린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권과 민주주의의 국가’ 미국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론 파인을 지나 북쪽 요세미티 쪽으로 이어지는 황무지에 숨겨진 만자나르(Manzanar) 역사유적이 그 증거다. 일본계 폭동에 놀라 ‘충성 서약 논쟁’ 야기 1941년 12월 일본은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격하고 미국에 선전포고했다. 두 달 뒤 미국은 미국 시민이거나 영주권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적’인 일본의 피를 물려받았다는 이유로 미국에 사는 일본계 12만명의 재산을 몰수하고, 이들을 만자나르와 같은 오지에 날림으로 세운 열 군데의 강제수용소에 감금했다. 다시 말해 독일 나치가 제2차 세계대전 중 운용했던 악명 높은 유대인 강제수용소 비슷한 것을 미국이 운영한 것이다. “엄마, 여기가 어디야?” 1942년 초, 우뚝 솟아 있는 감시탑과 철조망이 없다면 수용소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잡풀이 무성한 넓은 벌판에 트럭들이 도착했다. 트럭에 실려 온 한 어린아이는 엄마에게 물었다. 젊은 엄마는 답을 못하고 딸을 끌어안고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이렇게 실려 온 1만명은 36개 블록으로 조직한 504개의 목조 건물 막사에 수용됐다. 500에이커의 넓은 수용소는 8개의 감시탑에서 기관총으로 무장한 군·경찰이 감시했다. 수용소에는 취사시설이 없어 기온이 40도에 가까운 더운 날이건, 추운 겨울이건 긴 줄로 한 시간 이상 기다려 밥을 받아먹어야 했다. 물론 식사는 엉망이었다. 화장실 역시 좌변기였지만 칸막이가 없어 최소한의 사생활도 없었다. 만나자르 강제수용소의 칸막이가 없는 화장실 / 손호철 제공 역사 보존을 위해 만자나르 수용소에 남겨놓은 감시탑 하나와 철조망이 아름다운 시에라네바다산맥을 배경으로 일본계 미국인의 슬픈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일본계 미국인들은 시간이 지나자 부족한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사도 짓고, 가축도 키우고, 아이들을 위한 학교와 병원도 세우고 적응해 나갔다. 한데 수용소 측이 미국에서 태어난 ‘2세들’을 특별대우하면서 이들과 일본에서 태어나 건너온 ‘1세’ 간의 알력이 커졌다. 설상가상으로 수용소 관계자들이 설탕과 고기 등 식료품을 빼돌렸다는 소문이 돌면서 폭동이 일어났다. 군·경찰에 17세 소년, 21세 청년이 사살당하고 여러 명이 다쳤다. 역사적 유적으로 복원해 놓은 막사로 들어가자 ‘충성 서약 논쟁’에 대한 자료들이 눈길을 끌었다. 만자나르 폭동에 놀란 미국 정부는 일본계 중 미국에 충성하는 ‘충성파’와 ‘비충성파’를 판별하고 분리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대대적인 조사에 착수했다. 모두를 대상으로 한 등록서류라는 형식의 설문조사였는데 이중 27, 28번 문항이 논란을 일으켰다. 설문이 논쟁적이어서 조사 중 문항을 수정해야 했는데 핵심은 ‘미군에 입대할 의사가 있느냐’는 것과 ‘내외의 모든 적으로부터 미국을 적극적으로 방어할 의사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1988년 강제수용 사과와 배상 당시 미국사회에서는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 이후 커진 반일 감정으로 일본계는 일본으로 추방해야 한다는 의견이 강했다. 따라서 설문에 ‘그렇다’라고 답했다가 추방당해 송환되면 일본에서는 반역자 취급을 받을 것이라는 점에서 일본계 1세들은 고민이 깊었다. 일부는 먼 이국에 와 평생을 피땀 흘려 일군 재산을 모두 빼앗고, 자신들을 수용소에 가둔 나라에 어떻게 충성을 맹세할 수 있냐며 과감하게 ‘노(No)’라고 답했다. 2세 중에서도 군에 끌려갈 것을 두려워한 사람들은 ‘노’라고 답했다. 이렇게 ‘노’라고 답한 600여명은 다른 수용소로 끌려갔다. 부인과 달리 남편이 ‘노’라고 답한 집은 남편만 끌려가면서 눈물의 이별을 해야 했다. 한 지식인은 끌려가며 외쳤다. “누가 나에게 충성심을 물을 수 있단 말인가? 이게 그 잘난 아메리칸 드림인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충성 설문에 ‘No’라고 답해 다른 곳으로 이송되는 일본계 미국인들 / 손호철 제공 많은 일본계 2세는 자신들이 미국에 충성을 다하는 미국 시민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미군에 입대했다. 하지만 이들의 충성심을 완전히 믿지 못한 미국 정부는 이들을 태평양 전선이 아니라 유럽 전선에 배치했다. 일본계 2세들은 용맹함으로 이에 답했다. 미국은 일본계 병사들의 전선 투입을 확대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미국과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일본계들은 1946년 감옥 같은 수용소에서 3년 반 만에 풀려났다. 그들은 옛 터전으로 돌아갔지만, 그들이 일궈 놓았던 모든 것은 사라지고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계 미국들에게 충성 여부를 물은 설문지 / 손호철 제공 수용소의 소방서, 닭을 길러 먹던 닭장, 1만명이 굶주림을 해결했던 식당, 농구장 등 운동시설을 지나 수용소의 가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시에라네바다산맥이 끝없이 병풍을 친 평지에 작은 하얀 돌탑 같은 것이 눈에 띄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돌탑에 한자로 ‘위령탑’이라고 쓰여 있다. 이곳에 끌려와 목숨을 잃은 일본계들의 무덤이다. 미·일전쟁으로 ‘깨어진 아메리칸 드림’이 묻힌 곳이다. “미국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있었던 일본계의 강제수용이 부당했음을 인정하고 이에 사과한다.” 1988년 미국 의회는 공법 100-383을 통과시켰고, 이 법에 따라 강제수용을 사과했다. 그리고 수용한 일본계 미국인들에게 1인당 2만달러를 배상했다. 미국이 최소한 이 정도의 양심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카레이스키는? 러시아 정부가 과거 고려인의 강제이주 부당성을 인정, 사과하고 이에 배상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일본계 미국인들을 수용한 만자나르 수용소의 운동장 / 손호철 제공 만자나르 수용소로 실려 와 짐을 내리는 일본계 미국인들 / 손호철 제공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캘리포니아 등 서부지역에 사는 1만명의 일본계를 강제수용한 만자나르 수용소 모습 / 손호철 제공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 2025.01.24 15:00

    • [손호철의 미국사 뒤집어보기](2) 농업노동자의 아버지 세사르 차베스

      국제 손호철의 미국사 뒤집어보기

      [손호철의 미국사 뒤집어보기](2) 농업노동자의 아버지 세사르 차베스

      미국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의 안창호 동상 옆에 설치돼 있는 멕시코계 노동운동가 세사르 차베스 동상/ 손호철 제공 “농민들은 한 자루의 감자와 같다.” 농민들이 자기 농지에 매달려 일하는 노동과정의 고립 때문에 한 공장에 모여 일하는 노동자들과 달리 감자처럼 한 자루에 모아놓아도 단결하지 못하고 각각 분리돼 있을 뿐이라는 카를 마르크스의 비판적 평가다. 그러나 중국혁명 등 여러 농민혁명이 보여주듯이 그의 평가는 틀렸다는 지적이 많다. 캘리포니아 등 미국의 상황은 전혀 다르다. 유럽과 아시아 등 소농 위주의 많은 나라와 달리 미국은 안창호가 일했던 리버사이드의 오렌지농장처럼 대농장들이다. 과거 남부의 대농장은 대부분 목화를 생산했고, 아프리카 노예에 의존했다. 대농장들은 노예해방 후에는 농업노동자에 의존하고 있다. 농업도 공장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을 택하고 있다. 주목할 것은 캘리포니아 등 대농장의 노동자들은 멕시코계 등 스페인어권의 히스패닉계와 필리핀계 같은 ‘유색인종’ 이주노동자들이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그런 만큼 열악한 노동조건에도 불구하고 권리의식은 취약하고 이들의 조직화, 농업노동자 노동조합 건설은 꿈꾸지 못한 어려운 과제였다. ‘농업노동자 진군’ 부조서 동학 농민 떠올라 2021년 1월 막 취임한 조 바이든 대통령의 집무실이 공개됐다. 책상 위 가족사진 뒤에 작은 흉상이 놓여 있었다. 멕시코계 노동운동가 세사르 차베스(Cesar Chavez·1927~1993)의 흉상이다. 그는 농업노동자 노조의 건설이라는 어려운 과업을 이룬 전설적 지도자다. 우리는 아프리카계 민권지도자 마틴 루서 킹은 잘 알고 있지만, 세사르 차베스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하지만 그는 ‘멕시코계의 마틴 루서 킹’이다. 특히 히스패닉계가 인구의 20%로 아프리카계(13%)를 넘어서 미국 최대의 소수민족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2014년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은 차베스의 생일인 3월 31일을 연방 공휴일로 선포했다. 차베스 무덤 뒤에 새겨진 농업노동자 파업 부조는 한국의 동학농민들을 연상시킨다./ 손호철 제공 로스앤젤레스를 떠나 북으로 200㎞를 달려 베이커스필드 근처에 가면 역사적 유적이 나타난다. ‘세사르 차베스 국립기념물(National Monument)’이다. 그가 말년을 보낸 농장을 기념물로 만든 것이다. 기념물로 들어가자 아름다운 정원에 묘지가 나타났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답게 나무 십자가 앞에 차베스 부부가 누워 있다. 그 뒤에는 작은 벽 분수 위에 부조가 눈길을 끈다. 차베스를 따라 피켓을 들고 진군하는 농업노동자들의 모습이다. 그 모습이 전북 정읍에 조각된 동학농민군의 진군 모습과 빼닮았다. 갑자기 차베스가 전봉준처럼 보였다. 농업노동자의 처참한 생활을 고발하는 사진들. ‘비미국적 꿈’이라는 제목이 가슴을 후빈다. / 손호철 제공 ‘비미국적(Un-American) 꿈’. 전시관에 들어가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단어다. ‘대부분 유색인종인 이주농업노동자는 커뮤니티로부터 고립된 캠프에 살며 일해야 했고, 농장을 따라 이동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초등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기 힘들었으며 인종주의와 멸시 속에 살아야 했다.’ 이주농업노동자의 삶을 압축한 표현이다. 게다가 지독한 가난이 따라다녔다. 전시관에 만들어 놓은 초라한 숙소 모형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먹먹하게 만든다. 캘리포니아 농업노동자의 처절한 삶을 그린 존 스타인벡의 소설 <분노의 포도>에 나오는 표현처럼 “사람들의 마음속에 분노의 포도가 하나 가득 가지가 휘게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넘어온 차베스 역시 대공황으로 경영하던 농장이 망한 뒤 이주농업노동자가 된 부모를 따라 여기저기 옮겨 다녀야 했다. 잦은 전학 때문에 중학교밖에 나오지 못했다. 허드레 노동현장을 전전하던 그는 현실탈출을 위해 군에 입대했다. 제대 후 커뮤니티 서비스 조직(CSO)에서 일하던 그는 1962년 노동운동에 전념하기로 했다. 그는 농업중심지인 중부 캘리포니아 델라노로 이사해 실업수당으로 버티며 농업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오랜 노력 끝에 그는 1964년 자신의 집을 사무실로 해서 전국농업노동자협회(NFWA)를 출범시켰다. 1965년 장미재배노동자들의 부탁으로 파업을 주도해 3일 만에 임금인상을 관철했다. 명성을 얻은 그는 역사적인 델라노 포도 파업에 뛰어들었다. 그가 이끄는 NFWA는 이 파업을 원래 시작했던 농업노동자조직위원회(AWOC)와 통합해 통합농업노동자들(UFW)이란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조합원이 7만명으로 늘어났다. 5년간 계속된 투쟁에서 그는 주 정부가 있는 새크라멘토까지 항의 행진도 하고 캘리포니아산 포도 불매운동을 벌이는 등 다양한 방식을 시도했다. 그는 간디를 따라 비폭력운동을 주장했다. 매우 종교적이었던 그는 기도회를 열고 서양에서는 드물게 단식투쟁을 통해 여론에 호소했다. 그 결과 임금인상, 작업조건 개선뿐 아니라 포도 포장지에 노동조합의 승인을 받았다는 표시를 하도록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전국적인 인물로 성장했고, 시사주간지 ‘타임’ 표지에까지 등장했다. 우리가 먹고 있는 캘리포니아산 수입 오렌지에는 이들 이주농업노동자와 차베스의 눈물이 묻어 있는 것이다. 정신혁명을 강조한 차베스의 지나치게 종교적 측면은 주로 사회운동과 갈등을 일으켰다./ 손호철 제공 ‘만국의 노동자 단결’은 이상론일까 전시관에는 1965년 델라노 포도 파업을 주도하는 젊은 차베스의 사진이 우리를 맞는다. 지도자들의 소개를 보니 차베스뿐만이 아니라 AWOC의 레리 이투리옹 같은 필리핀계 농민노동자 지도자들도 포함돼 있어 투쟁이 ‘소수민족 연합투쟁’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65년 역사적인 포도 노동자 파업을 주도한 세사르 차베스 사진 / 손호철 제공 전시관에 들어가면 파업 시위하는 농업노동자 사진이 맞이한다./ 손호철 제공 “우리 혁명은 정신과 가슴의 혁명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기고 있다.” 멕시코계답게 노동운동가로는 특이하게 신앙심이 강하고 종교적 투쟁에 크게 의존한 만큼 그의 ‘정신혁명론’이 크게 쓰여 있다. 이 같은 경향은 말년에 그를 ‘주류운동’으로부터 고립시켰다. 그는 자신과 다른 견해를 용납하지 않는 권위주의적 리더라는 한계도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비판적인 ‘좌파’를 ‘미국 공산당의 프락치’라는 근거 없는 죄명을 씌워서 숙청해버렸다. FBI에 따르면 미국 공산당이 UFW에 침투했다는 증거는 없다. 미국의 농업노동자 중 40%는 멕시코 등에서 밀입국한 불법노동자들이다. 그는 이들을 투쟁을 약화시키는 ‘적’으로 간주함으로써 인권단체들과 갈등해야 했다. 차베스 같은 지도자가 외국인 노동자를 적으로 간주해 이들을 고용하지 말라는 시위를 벌인 민주노총 건설노조 같은 편협한 시각을 가졌다니 충격적인 일이다. 기념관을 떠나며 나는 물었다. 국경을 넘은 노동자들의 연대는 불가능하고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라는 마르크스의 호소는 낭만적 이상론에 불과한 것인가?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 2025.01.10 15:30

    • [손호철의 미국사 뒤집어보기] (1) 안창호가 세운 미주 최초의 코리아타운

      국제 손호철의 미국사 뒤집어보기

      [손호철의 미국사 뒤집어보기] (1) 안창호가 세운 미주 최초의 코리아타운

      트럼프 주의로 상징되는 격동을 겪고 있는 미국. 그 뿌리를 찾아서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가 2024년 말 두 달간 2만9000㎞를 달려 답사한 ‘미국사 뒤집어보기’를 연재한다.(편집자 주) 리버사이드. 미국 남캘리포니아의 중심도시 로스앤젤레스에서 동쪽으로 100㎞쯤 떨어진 작은 도시다. 나는 로스앤젤레스 공항에 내려 렌터카를 찾자마자 2시간을 달려 리버사이드로 향했다. 중심가에는 아프리카계 민권운동의 대부인 마틴 루서 킹, 멕시코계 노동운동의 대부인 세사르 차베스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길 건너편에도 비폭력저항 운동의 정신적 지주인 인도의 간디 동상이 눈에 띄었다. 세계적인 이들 운동가 사이에 친숙한 중년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 옆에는 반갑게도 한글이 보였다. ‘도산 안창호 기념공원’. 동상의 주인공은 안창호(1878~1938)였다. 우리 독립운동가가 킹 목사, 차베스, 간디와 어깨를 나란히 하다니! 리버사이드 중심가에 있는 ‘도산 안창호 기념공원’ / 손호철 제공 안창호 동상 옆에 있는 마틴 루서 킹 동상 / 손호철 제공 한 말의 격동 속에 ‘민족 대이주’, ‘코리아 디아스포라’가 시작됐다. 그중 한 곳이 미국이다. 1903년 1월 13일 인천에서 갤릭호에 몸을 실은 121명의 젊은이가 사탕수수노동자로 하와이에 도착했다. 공식적인 첫 미국 이민이다. ‘기회의 땅’ 미국을 찾는 한인은 계속 늘어나 미국 내 한인은 미국 인구국이 집계한 합법적 인구만 2017년 기준 190만 명을 넘어섰다. 특히 ‘서울특별시 나성구’라는 별명을 가진 로스앤젤레스에는 23만명이 살고 있고, 거대한 코리아타운이 있다. 이보다 앞서 최초의 코리아타운은 로스앤젤레스가 아니고 리버사이드에 세워졌고, 이를 주도한 사람이 독립운동가 안창호였다. 평안도에서 태어난 도산은 1894년 서울로 이사해 영어를 배우고 기독교를 믿기 시작했다. 서재필의 독립협회에서도 활동했다. 1902년 결혼한 도산은 서양을 배우기 위해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왔다. 우여곡절 끝에 오렌지농장으로 돈이 넘쳐나고 일자리가 많았던 리버사이드에 왔다. 여기에 정착한 그는 이곳에 많은 한인을 불러들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일본 영사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하와이 한인들을 불러올 수 있도록 조치했다. “정직이 우리의 무기다.” 도산은 일본 노동자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일본 노무 관리관의 훼방에도 한인들이 이곳에 자리 잡는 길은 성실하게 일해 백인농장주들의 신임을 얻는 것으로 판단했다. “오렌지 하나도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다.” 그는 솔선수범해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다른 한인들도 사명감을 가지고 그의 말을 따랐다. 그의 전략은 맞아떨어져 백인농장주들은 한인을 대거 고용하기 시작했고, 한인 노동자들을 전담할 한인노동국도 만들었다. 리버사이드 오렌지농장에서 일하는 도산 안창호 사진이 샌프란시스코한인회관의 파차파 캠프 전시회에 전시 중이다. /손호철 제공 ‘도산 안창호 기념공원’에 오렌지를 따는 도산의 모습이 부조로 새겨져 있다. / 손호철 제공 작업복 차림으로 오렌지를 가득 따는 도산의 사진이 누구보다 솔선수범한 그의 리더십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도산 안창호 기념공원’에 있는 그의 동상 옆에는 오렌지를 따는 그의 모습 등을 새긴 동판이 있다. “아니 왜 오렌지 따는 작업복 차림의 안창호가 아니라 양복을 입은 동상을 만들었지요?” 한인 미주 이민사와 안창호 연구의 권위자로 공원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한 캘리포니아주립대학(UC) 리버사이드의 장태한 교수의 답변이 충격적이다. “원래 작업복으로 하려고 했는데 한국 정부가 양복으로 하라고 해서.” 한심한 관료주의라니! 다행인 것은 장 교수 주도로 미주교포들이 모금해 동상을 오렌지 따는 안창호 동상으로 바꾸기로 했다는 것이다. 1905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세운 미주 최초의 코리아타운인 파차파 캠프 안내표지 / 손호철 제공 이번 답사를 위해 사전 조사를 하기 전에는 ‘실력양성론’ 등의 문제점 등 때문에 개인적으로 안창호를 아주 높게 평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전 조사와 답사를 통해 그를 다시 평가하게 됐다. 과연 우리 독립운동가 중에 안창호처럼 직접 노동자로 일하며 대중을 조직하고 운동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노동 현장에 위장 취업해 노동운동을 조직했던 조선공산당 핵심 등 좌파운동가들을 제외하면 없을 것이다. 교민들이 낸 애국헌금을 가지고 사치스럽게 생활했다는 비판을 듣고 있는 이승만은 말할 것도 없고 김구 등 임시정부 지도부 대부분도 안창호와는 달랐다. “여기가 최초의 코리아타운인 파차파 캠프입니다.” 장 교수는 나를 ‘도산 안창호 기념공원’으로부터 2㎞ 떨어진 한적한 곳으로 안내했다. 세월이 100년 이상 지난 만큼 코리아타운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지만, ‘리버사이드시 문화관심장소 파차파 캠프’라는 팻말이 역사를 증언해주고 있었다. 팻말을 보고 있자니 조국을 잃고 태평양의 파도를 넘어 이곳에 와 자리 잡아 고된 농장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오렌지 따는 것이 나라를 되찾는 것이라 생각했고, 어렵게 번 돈을 조국 독립운동에 기꺼이 내놓았던 옛 선조들의 체취가 느껴져 울컥했다. ‘도산 안창호 기념공원’에 대해 설명하는 장태한 UC 리버사이드대학 교수 /손호철 제공 이곳은 원래 유니온 퍼시픽 철도직원들이 숙소로 사용하던 일종의 판잣집 동네로 철도에 가까워 매우 시끄러웠고, 1층 목조건물이 20여 채 있었다고 한다. 주목할 것은 파차파캠프가 가족중심의 공동체였으며 자치와 민주주의 교육장이었다는 사실이다. ‘술, 도박, 아편 금지’ 등 엄격한 규율을 정하고 위반하는 사람에게는 벌금을 내게 했고, 자치를 했다. “이 캠프는 ‘민주주의 한인공동체’로,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민주공화주의의 실험장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장 교수의 평가다. 미주이민 1세대로 리버사이드에 왔다가 27세에 사망한 김태석의 묘 / 손호철 제공 ‘김태석의 묘, 1898-1925’. 장 교수가 안내한 가까운 공동묘지에도 낯익은 한글이 나타났다. 리버사이드 이민 1세대의 묘지였다. 격동의 19세기 말에 한반도에서 태어나 20세기 초 어린 나이에 태평양을 건너 리버사이드로 온 그는 오렌지 농장에서 고생하다가 27세의 꽃다운 나이에 이곳 먼 이국땅에 묻히고 만 것이다. 리버사이드 코리아타운이라는 첫 답사를 끝내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문득 떠오른 것이 비극적인 도산의 이후 삶이다. 그는 1919년 임시정부 설립 움직임이 생기자 가족들은 미국에 남겨두고 혼자 성금을 모아 중국 상하이로 떠났다. 임시정부 내무총장 등으로 활동하던 그는 1924년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를 기다린 것은 ‘빨갱이’, 정확히 표현해 ‘볼쉐비스트’라는 투서였다. 그는 결국 추방당하고 만다. 이후 상하이에서 일제에 잡혀 와 투옥됐고, 병보석으로 풀려나 세상을 떠나야 했다. 투서의 배후와 관련해 연구자들은 이승만이 미주 한인사회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안창호 등을 평소 모함했다는 사실, 이승만이 평소 안창호·박용만·김규식을 공산주의자라고 미국 정보기관에 통고했다고 자랑하곤 했다는, 이승만과 함께 활동했던 한 구미위원회 위원의 증언에 주목한다. 한국 정치의 비극인 ‘정적 빨갱이 만들기의 원조’가 바로 미국이고, 안창호가 그 첫 피해자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나는 씁쓸하게 리버사이드를 떠났다.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 2024.12.27 15: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