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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향포토] 투표일에도 열린 1643차 수요시위

      사회 경향포토

      [경향포토] 투표일에도 열린 1643차 수요시위

      ... 10일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국대사관 인근에서 열린 제1643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시위에서 참가자들이 일본정부의 전쟁범죄 인정, 진상규명, 공식사죄, 법적배상, 책임자 처벌 등을...

      정지윤 기자 2024.04.10 13:40

    • [경향포토] 세월호 10주기 앞두고 희생자들 추모하는 수요시위

      사회 경향포토

      [경향포토] 세월호 10주기 앞두고 희생자들 추모하는 수요시위

      ... 10일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국대사관 인근에서 열린 제1643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시위에서 참가자들이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아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묵념을 하고 있다. 2024.04...

      정지윤 기자 2024.04.10 13:40

    • [경향포토] 세월호 희생자 추모하는 수요시위 참가자들

      사회 경향포토

      [경향포토] 세월호 희생자 추모하는 수요시위 참가자들

      ... 10일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국대사관 인근에서 열린 제1643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시위에서 참가자들이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아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묵념을 하고 있다. 2024.04...

      정지윤 기자 2024.04.10 13:40

    • [경향포토] 통제선 사이에 둔 수요시위와 극우단체

      사회 경향포토

      [경향포토] 통제선 사이에 둔 수요시위와 극우단체

      13일 서울 종로구 옛 주한 일본대사관 인근에서 열린 제1613차 정기 수요시위 현장 맞은편에 극우 시민단체 회원이 시위를 폄훼하는 내용의 손 팻말을 들고 있다. 이예슬 기자

      이예슬 기자 2023.09.13 15:49

  • 스포츠경향

    • 제 1400회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 시민 2만명 운집

      생활

      제 1400회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 시민 2만명 운집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이자 74주년 광복절을 하루 앞둔 2019년 8월 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옛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1400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집회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일본 정부를 향해 전쟁 범죄 인정, 위안부 동원 사죄, 법적 배상을 촉구해 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가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1400회를 맞았다.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이하 정의기억연대)는 이날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제1400차 정기 수요시위와 ‘제7차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 기념 세계 연대 집회를 열었다. 이날은 1991년 8월 14일 고 김학순 할머니가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일본 정부에 맞서 자신의 피해 사실을 용기 있게 증언한 사실을 기억하자는 의미의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이기도 하다. 서울은 이날 낮 기온이 35도에 육박하는 더위가 이어졌지만 중·고등학교 학생과 시민 등 2만명(주최측 추산)은 거리를 가득 메웠다. 윤미향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은 “평화로에서는 서로 존중하고 함께 더불어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자고 해왔다”며 “김복동·김학순 등 여러 할머니의 외침이 있었기에 소중한 평화, 인권의 가치를 배웠다”고 말했다. 북측에서 보내온 연대사와 세계 각지 연대 발언 후 집회 참가자들은 ‘일본 정부는 피해자들에게 사죄하라’며 구호를 외쳤다.정의당 심상정 대표, 더불어민주당 남인순·박주민 최고위원 등 정치권 인사도 이날 집회에 함께했다. 1992년 1월 8일 시작해 이날로 1400회를 맞은 수요시위는 국내 13개 도시를 비롯해 미국, 대만, 호주 등 세계 12개국 37개 도시 57곳에서 함께 진행이 됐다. 일본 아베 신조 정권이 경제 보복 조처를 잇달아 내놓는 속에도 도쿄, 나고야 등에서 일본 시민사회도 공동행동에 나섰다. 대만 타이베이에선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맞아 시민단체와 정계 인사 등이 참석한 연대 집회가 열렸고, 호주 시드니에서는 한인뿐 아니라 현지인들도 ‘함께 평화’,‘노(No) 아베’,‘공식사과’ 등 손팻말을 들었다. 참가자들은 성명서에서 “28년 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시작한 미투(me too)는 각지에서 모인 우리들의 위드 유(with you)를 통해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과 전시 성폭력 추방을 위한 연대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또 “가해국 일본 정부는 피해자들의 명예, 인권을 훼손하는 일체 행위를 중단하고 전쟁 범죄를 인정하라”며 진상 규명, 공식 사죄, 배상을 포함한 법적 책임 이행 등을 촉구했다. 이날 서울 집회에 참석한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 할머니는 “끝까지 싸워서 이기는 게 승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14일로 1400회를 맞은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가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인근 소녀상 옆에서 약 2천여명의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열리고 있다. 수요시위는 故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군 성노예 종군위안부 피해 사실을 공개 증언한 이듬해인 1992년 1월 8일 처음 열렸다. 사진은 한 참석자가 길원옥 할머니의 손을 잡고있는 모습.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손봉석 기자 2019.08.14 22:31

    • 위안부 할머니들, 한파 속 수요시위 “정부는 가만 있으라”

      생활

      위안부 할머니들, 한파 속 수요시위 “정부는 가만 있으라”

      13일 낮 12시 서울 중학동 옛 주한 일본대사관 건너편 ‘평화의 소녀상’ 앞에 800여명의 시민들이 모였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공식 행사에 앞서 김복동 할머니를 포함한 고령의 피해자 6명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100억이 아니라 1000억을 준다 해도 그 돈 안 받습니다.” 말문을 연 김복동 할머니는 단호했다. 13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수요시위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정근 기자김 할머니는 “우리가 아무리 힘이 없다고 해도 정부 간에 협상을 하게 된다면 먼저 피해자인 우리한테 말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우린 이렇게 속이 아픈데 자기네끼리 숙덕숙덕해서 체결하더니 이젠 할머니들 꼬시려 다닌다고 들었다”며 최근 외교부 관계자들이 피해 할머니 댁을 방문한 사실을 꼬집었다. 김 할머니는 “소녀상도 국민들이 한 푼 한 푼 모아 후손들에게 아픈 역사를 가르치기 위해 세운 것인데 우리 정부는 물론 일본 정부도 간여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돈 때문에 싸워온 게 아니다. 아베는 앞으로 나와서 진실된 마음으로 사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옥선 할머니는 “우린 ‘위안부’가 아니다. 강제로 끌려갔는데 왜 우릴 ‘위안부’라 부르냐”며 “피해자를 속이고 입을 막으려 한다. 반드시 일본으로부터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을 받을 수 있게 여러분이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이용수 할머니도 “국민 여러분들이 끝까지 이 역사를 남기기 위해 투쟁해달라. 내가 앞장서겠다”고 외쳤다. 이날 할머니들은 14일 공식 출범을 앞둔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 무효와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전국행동’(전국행동)이 계획 중인 재단 설립에도 적극 참여할 뜻을 밝혔다. 윤미향 정대협 대표는 “되돌아보면 할머니들에게 국가란 어떤 존재였나 생각하게 된다”며 “정부는 뒷짐을 졌을 뿐, 할머니들이 자신의 인권과 명예를 회복하겠다고 싸워왔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왜곡하고 전쟁을 미화할 때 평화의 걸림돌이라고 외쳤지만 이제 걸림돌을 하나 더 추가하게 됐다”며 “우리 정부가 이제 전쟁범죄를 은폐해주는 범죄 동조자가 되고 있단 걸 목격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정부에게 이젠 ‘가만 있으라’고 말하고 싶다”며 이렇게 외쳤다. “우리가 직접 역사를 바로세워 나가겠습니다. 정부는 가만히 있으세요. 우리가 하겠습니다. 우리보고 가만 있으라 하지 마세요. 우리는 행동하겠습니다.” 세 딸과 함께 전북 익산에서 올라온 이정은씨(34)는 “아이들에게 역사 현장을 직접 보여주기 위해 상경했다”며 “이번 한·일 간 합의는 나라를 팔아먹은 행위”라고 말했다. 여성·노동·종교·학술·법조 등 다양한 분야의 시민사회단체들로 구성된 전국행동은 14일 오전 11시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출범식을 갖고 한·일 위안부 합의 무효화를 위한 연대를 시작한다. 전국행동은 출범식에서 위안부 할머니 지원을 위한 재단 설립을 제안하고 향후 구체적인 행동 등을 밝힐 계획이다.

      #위안

      온라인뉴스팀 2016.01.13 20:11

  • 주간경향

    • 사회 렌즈로 본 세상

      [렌즈로 본 세상]1396차 수요시위, 경제보복 규탄

      7월 17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건너편에서 제1396차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가 열렸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수요시위였지만 이날 손수 만든 손팻말을 들고 현장에 나온 학생들은 일본의 경제보복을 비난하고 식민지 범죄에 대한 진정한 사죄를 촉구했다. 찌뿌듯한 날씨에 간간이 소나기가 내렸지만 학생들의 열기를 식히지는 못했다. 일본은 최근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문제삼아 주요 소재에 대한 수출규제 등 경제보복을 가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보복이 아니다”라고 부인하고 있지만 그들의 주장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기’라는 사실은 시위에 참가한 어린 학생들 모두가 분명히 알고 있다.

      사진·글 이준헌 기자 2019.07.19 15:27

    • 사회 렌즈로 본 세상

      [렌즈로 본 세상]여전히 해방은 오지 않았네 3·1절 열린 수요시위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제1272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가 열리고 있습니다. 마침 3·1절이라 수요시위는 우리에게 더 가슴에 와닿습니다. 지난 25년간 239분의 피해자 할머니가 단 39분으로 줄어드는 동안 정부가 한 것은 고작 졸속적이고 굴욕적인 2015년 12월 28일 한·일 위안부 합의뿐입니다. 2015 한·일 합의가 ‘대승적 타결’이니 ‘합의를 진심으로 존중한다’ 등의 발언을 고위 공직자들이 스스럼없이 하는 동안 할머니들은 하나둘 쓰러져갑니다. 올해 아흔인 이용수 할머니가 수요시위에서 마이크를 잡고 “내 나이 90은 활동하기 딱 좋은 나이”라고 하시며 한·일 합의 무효와 위안부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요구하는 발언을 언제까지 하셔야 할까요. 한많은 여생 편안히 보낼 수 있도록 만들어 드리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자 인간으로서 도리인 것을 왜 그들만 모르는 것인지 답답합니다.

      사진·글 이상훈 선임기자 2017.03.07 10:54

    • 사회 렌즈로 본 세상

      [렌즈로 본 세상]멈출 수 없는 수요시위, 진정한 사과는 언제쯤…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1184차 수요시위에 참석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습니다. 매주 수요일이면 열리는 시위는 예전과 별반 다를 것이 없지만 최근 양국 간에 흐르는 화해 무드는 이곳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위안부 문제를 줄기차게 제기해온 정대협은 “과거사는 허울뿐인 화해와 상생을 위해 내려놓거나 묻을 수 있는 짐이 아니라 반드시 해결되고 청산돼야 할 과제”라고 주장합니다. 양국 정상 간의 정치적인 행위로 어두운 역사를 지울 수는 없습니다. 일본이 피해자들에 대한 진솔한 사과와 가해자로서의 책임을 다한 뒤 화해와 상생을 이야기해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사진·글 이상훈 선임기자 2015.06.30 14:14

    • 사회 표지인물 표지 이야기

      [표지인물]“수요시위가 이렇게 오래 갈 줄 몰랐어”

      ㆍ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의 소원은 ‘마지막 수요시위’ 12월 14일이면 수요시위가 1000차를 맞는다. 장대비가 쏟아지고 눈보라가 쳐도 수요시위는 계속됐다. 매주 수요일 낮 12시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어김없이 일본대사관 앞에 모였다. 목소리를 높여 일본에 사죄를 요구하고 책임을 물었다. 그 세월이 20년이다. 강산이 두 번 변할 시기다. 그만큼 할머니들도 늙었다. 1992년 60대의 나이로 수요시위를 시작했던 그들이 이제는 백발의 80대가 됐다. 남아있는 할머니보다 세상을 떠난 할머니들이 더 많다. 그러나 20년 세월 동안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사죄하지 않는 일본과 소극적인 자세로 방관만 하는 한국 정부다. “지난 20년간 우리정부는 꿀먹은 벙어리” “강하게 우리 정부를 때려야 한다.” 수요시위 1000차를 맞는 소회를 묻자 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 할머니(86)는 정부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일본도 문제지만 지난 20년간 일본에 제대로 된 문제제기 한 번 하지 않은 우리 정부에 대한 불신과 분노의 표출이었다. “지금 나이가 90이 다 되어가는 할머니들이 사죄하라고 아우성치는 것도 할 짓이 아니다. 나이 많은 할머니들을 거리에 방치해두지 말고 정부가 앞장서서 해결해야 하는데, 꿀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다.”  특히 이명박 정부에 대한 실망감은 더 크다. 이명박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부터 일본에 ‘과거에 얽매여 있으면 오늘이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며 과거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논란을 빚었다. 김복동 할머니를 비롯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청와대 측에 몇 차례 면회를 신청했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만나기 어렵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정부가 손놓고 있는 사이에 싸움은 온전히 할머니들의 몫이었다. 김복동 할머니는 1992년부터 수요시위에 참여했다. 1차 수요시위가 1992년 1월 8일에 시작되었으니 초창기부터 참여한 셈이다. 시작할 당시 1000차까지 이어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할머니는 “처음에는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어. 이렇게 모여 시위를 하면 빨리 해결되겠지 했던 게 1000차를 넘어가고 있으니까 막막해”라고 말했다. 그런 막막함에 가끔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대표에게 “변한 게 하나도 없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네가 해놓은 게 뭐가 있나”라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윤 대표와 할머니들이 동분서주하며 고생했지만 아직 일본의 사죄를 받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의 다른 표현이다. 일본의 사과는 아직 못 받았지만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용기와 의지로 위안부의 존재와 그 참상이 세계에 알려졌다. 1993년 김복동 할머니는 빈 세계인권대회에서 위안부 시절 참혹했던 경험을 증언을 통해 세계에 알렸다. 할머니는 싱가포르, 수마트라,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자바 등 오지로 끌려다니며 위안부 생활을 했다. 저녁이 되면 다리를 펼 수 없을 정도로 하루에만 수십명의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다. 할머니는 세계인권대회에서 이때의 기억을 자세하고 침착하게 증언해 전세계 인권운동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후 유엔 인권강령에 위안부 문제가 담겼다. 할머니의 용기 있는 증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고통스러운 기억을 증언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마음의 고통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빈에 머무는 16일 동안 몸무게가 4㎏이 빠지고, 스트레스로 얼굴이 부어올라 흉터가 남았다. 하지만 할머니는 이후에도 건강이 허락하는 동안에는 적극적으로 증언 활동을 했다. 일본, 미국, 캄보디아 등 초청이 오면 마다하지 않고 다녀왔다. 담담하고 침착한 김복동 할머니의 증언에 청중석은 자주 울음바다가 됐다. “내가 눈을 감기 전에 한을 풀어주시오” 해방 이후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어느 누구에게도 차마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김복동 할머니가 혼자만의 비밀로 덮어둔 일을 세상 밖에 내놓기로 결심한 데에는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최초 공개증언이 있었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는 “정신대 ‘위안부’로 고통받았던 내가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일본은 종군 ‘위안부’를 끌어간 사실이 없다고 하고, 우리 정부는 모르겠다고 하니 말이나 됩니까. 내가 눈을 감기 전에 한을 풀어주시오”라며 최초의 ‘커밍아웃’을 했다. 당시 부산 다대포해수욕장에서 홀로 횟집을 운영하고 있던 김복동 할머니는 방송을 통해 이를 보고 망설이던 끝에 1992년 1월 17일 위안부 신고를 하게 됐다. 증인으로 서지 않으면 위안부 문제가 그대로 묻혀질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김복동 할머니는 “그때까지는 숨어 살았지만, 나와서 말하지 않으면 지워지고 잊혀지는 일이라는 생각에 증인으로 나서게 됐다. 그리고 나섰으니까 끝까지 가자는 생각을 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이후 부산과 서울을 오가는 장거리 투쟁이 이어졌다. 서울에서 집회나 회의 일정이 잡히면 전국 각 지역에 있는 할머니들이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는 정대협이 경제적으로 어려웠을 때라 할머니들은 각자의 주머닛돈을 털어 차비며 여관비를 댔다. 일본대사관 앞뿐만이 아니라 국회와 청와대에서도 집회를 했다. 그간 자신들의 잘못으로만 돌리며 억눌러왔던 고통과 한은 할머니들의 절규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수요집회에 나와 고개를 숙이고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할머니들이 많았다. 그러나 수요시위를 하면서 할머니들은 점차 ‘내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일본 정부가 부끄러운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할머니들이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삼엄한 긴장 속에서 경찰과 대치하는 경우도 많았다. 김복동 할머니는 “지금은 우리가 구호만 외치며 신사적으로 시위하지만 그 때만 해도 굉장했다”며 “각 지방에서 몸빼바지 입은 할머니들이 올라와서 대사관 앞에서 욕하고 계란도 던지고 했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많은 할머니들이 아직 생존해 있을 때라 50여명의 할머니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국회든 청와대든 대사관이든 경찰들이 막아서면 그 자리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경찰들은 그대로 할머니들을 둘러메고 차에 태워 서울역 광장에 내려놨다. 할머니들은 다시 기차를 타고 집으로 내려갔고, 일정이 있으면 다시 또 올라와 시위를 반복했다. 김복동 할머니는 “그렇게 올라갔다 내려갔다 그 짓을 얼마나 하며 살았는데”라고 말했다. 학생들과 시민들이 모여 함께 노래하고 춤도 추는 지금의 수요시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열심히 시위에 참여했지만 주변의 시선은 여전히 신경쓰였다. 김복동 할머니는 부산에서 활발하게 장사도 잘 했고 이웃과도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할머니는 “그때 부산 다대포 양산상회 할매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신이 위안부였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나니 친구들을 만나기가 싫었다. 괜히 이상하게 보는 것 같아 한동안은 아예 바깥출입을 안 했다. 위안부였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연락을 끊은 친척도 있었다. 할머니는 “바깥출입을 하도 안 하니까 말도 잊어버리고 텔레비전만 상대하다 보니까 꿈에도 텔레비전에서 본 사람만 나오더라”고 말했다. “우리가 힘을 합쳐 끝을 봐야겠다” 용기를 내어 증언을 했지만 삶은 더욱 쓸쓸해졌다. 할머니가 1995년 위안부 할머니들의 거처인 광주 으로 옮겨간 것은 그래서였다. 그 곳에서 위안부 할머니들끼리 친동기처럼 정을 나누며 살았다. 그림을 잘그렸던 고 강덕경 할머니도 친동기처럼 가까이 지냈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렇게 친했던 이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는 “그때 서로 언니 동생하면서 의논하고 위로해가면서 살았었는데 지금은 전부 다 죽고 없다”고 말했다. 친구들이 세상을 떠난 후, 김복동 할머니는 다시 부산으로 내려와 홀로 생활하다 시력이 급격히 나빠지자 지난해 3월, 서대문구에 있는 쉼터로 거처를 옮겼다. 많은 이들이 떠나간 지금, 할머니에게는 담배가 좋은 친구다.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술은 끊었지만 담배는 친구 같아 끊을 수 없다. 할머니가 술·담배를 배운 건 열여섯, 위안소 생활을 하면서부터다. 위안소로 끌려온 이튿날, 지옥같던 첫날의 공포를 끊어내기 위해 자살을 결심했다. 위안소 청소를 해주는 중국남자에게 손짓, 몸짓으로 먹고 죽는 시늉을 하며 약을 구해달라고 했다. 집을 떠나올 때 어머니가 비상금으로 준 1원을 중국사람에게 주었다. 중국사람은 얼마 후에 무엇인가 담긴 병을 주면서 큰 양동이에 물도 떠서 같이 주었다. 병에 든 것을 입에다 대니 따가워 견딜 수가 없었다. 독약이 아니라 중국술 배갈이었다. 술도 많이 먹으면 죽는다는 소릴 들어 먹기로 했다. 목이 떨어져나가는 것 같았지만 한 병을 다 마셨다. 그리고 사흘 동안 의식불명상태로 있다가 깨어났다. 그렇게 술을 시작한 후 술을 끊기 전까지 하루에 2홉들이 소주를 한 병 반 정도 마셨다. 아침에 일어나면 밥상에 컵이 2개 놓였다. 하나는 물잔, 하나는 소줏잔이었다. 컵에 소주를 가득 채워 한 잔 마시고 그 다음에 물 한 잔 먹고 그리고 밥을 먹었다. 김복동 할머니의 소원은 ‘마지막 수요시위’다. 일본의 사죄를 받고 마지막 수요시위를 한 후, 단 얼마간이라도 마음 편히 살다 고단한 생을 마치는 것이다. 지금은 그 끝을 보기 위해 지치고 힘든 몸을 이끌고 수요시위에 나간다. 김복동 할머니는 “학생들이고 국민들이고 수요시위한다고 하면 모두 오잖아. 그 사람들이 누구를 위해서 오나. 우리들을 위해서 오는 건데 우리가 어디까지나 힘을 합쳐서 끝을 봐야겠다는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할머니는 ‘마지막 수요시위’를 넘어 ‘전쟁 없는 세상’을 소원한다. “전쟁 나면 다 당한다. 안 당할 수가 없다. 희생자도 많고 여성들이 특히 그렇다.” 김복동 할머니가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건립에 1000만원을 기부한 것도 그런 이유다. 김복동 할머니는 “우리들은 죽고 나면 그뿐이다. 그러나 박물관은 과거의 역사고 과거에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비극이 있었구나라고 깨닫는 공부방이 되는 거지. 앞으로 후세들이 살아가면서 과거에 우리나라가 어떠했다는 걸 잊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야 죽고 나면 아무 쓸 데 없는 거고”라고 말했다. 1000차 수요시위 이후에도 1001차, 1002차 수요시위는 이어질 것이다. 안선미 정대협 팀장은 “수요시위가 최장기 집회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하루라도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며 “고령의 할머니들을 거리에 나서게 하는 게 바람직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할머니들 스스로가 운동가가 되어 쉬라고 말려도 안 들으시는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싸움이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이어온 게 1000차였고, 또다시 희망이 있을 거라 믿는다”고 말했다. 참고: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한국정신대연구회 엮음, 한울

      글·박송이 기자, 사진·김석구 기자 2011.12.06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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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수요시위 1천 회 현장 스케치

      ㆍ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야기, 우리가 함께 내야 할 목소리 “일본 정부는 진심으로 사죄하라”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한 목소리로 외쳤다. 20년이라는 세월 동안 굳게 귀를 막고 있는 일본 정부를 향한 단호하고도 간절한 외침이었다. 묵묵부답 일본 정부를 향한 천 번의 외침 지난 12월 14일 정오, 서울 종로구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동원에 따른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책임 이행을 촉구하는 수요시위가 열렸다. 1992년 1월 8일, ‘미야자와’라는 피켓을 든 제1회 수요시위가 시작된 이후 천 번째 날이었다. 같은 자리에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20년 동안 이어진 수요시위는 단일 집회로는 유례없는 세계 최장 기록을 세웠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주관으로 열린 제1천 회 수요시위에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중 강일출, 길원옥, 김복동, 김순옥, 박옥선 할머니가 참석했다. 한명숙 전 총리, 한나라당 정몽준 전 대표, 민주당 정동영 최고위원, 통합진보당 이정희 공동대표 등의 정치인과 배우 김여진, 이서진 등 각계 인사는 물론 3천여 명의 시민들이 참여해 뜻을 같이했다. 배우 권해효의 사회로 진행된 집회는 할머니들을 응원하는 풍물패의 공연을 시작으로 20년 동안 할머니들과 함께 정의와 평화를 외쳐온 이들의 활동 보고와 연대 발언이 이어졌다. 생존자 대표로 발언에 나선 김복동 할머니(86)는 이 자리에서 “일본은 이 세상에 태어나 한 번 활짝 피어보지도 못한 어린 소녀들을 먼 나라 전쟁터로 끌고 가 노예로 짓밟았다”라며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 정부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백발 늙은이들이 매주 거리에 나앉아 외치는 이 소리를, 그리고 이 아픈 역사를 모르지는 않을 것인데 일본 정부에 하루빨리 사죄하라고 엄중하게 말해주면 좋겠다”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뒤이어 시위 참석자 전원은 일본 정부를 향해 △전쟁 범죄 인정 △진상 규명 △공식 사죄 △법적 배상 △전범자 처벌 △역사 교과서에 기록 △추모비와 사료관 건립의 일곱 가지 요구사항을 촉구하는 시간을 가졌다. 특히 이번 수요시위에서는 매주 평화를 염원하는 시위를 계속해온 일본대사관 앞 거리를 ‘평화로’로 이름 붙이는 캠페인과 함께 시민들의 기부로 제작된 ‘평화의 비(평화비)’ 제막식이 열렸다. 지난 2010년 10월 13일에 열린 제939회 수요시위에서 발의된 ‘천원으로 세우는 평화비 건립 모금 제안’에 따라 피해자 할머니들과 정대협 봉사자들을 비롯한 국내외 수많은 이들이 십시일반 성금을 모았고, 이를 드디어 ‘평화로’에 세우게 된 것이다. 한복을 입고 작은 의자에 걸터앉은 소녀는 ‘위안부’란 이름으로 희생당해야 했던 피해자들의 모습을 형상화했고, 의자 옆 돌바닥에는 ‘1992년 1월 8일부터 이곳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가 2011년 12월 14일 천 번째를 맞이함에 그 숭고한 정신과 역사를 잇고자 이 평화비를 세우다’라는 문구가 한글·영어·일본어로 새겨져 있다. 먼저 세상을 떠난 할머니들과의 가교 역할을 하는 작은 새 한 마리가 소녀의 어깨에 앉아 있고, 피해자들의 오랜 기다림을 반영하는 의미로 바닥에는 소녀가 아닌 할머니 모습으로 그림자를 형상화했다. 이에 대해 일본 후지무라 오사무 관방장관은 12월 8일 기자회견을 열어 평화비 설치를 중단시켜달라는 요청을 전달했고, 제막 이후인 12월 18일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는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가 우리 정부에 평화비 철거를 요구하고 나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1천 회를 맞는 이번 수요시위는 서울뿐 아니라 대구, 부산, 광주 등 30여 도시에서도 함께 열려 연대의 희망을 꽃피웠다. AP·로이터통신과 일본 NHK·후지TV 등 해외 언론사들도 취재에 나섰다. 미국, 일본, 독일, 이탈리아 등 세계 각국에서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게 정의를!’이라는 공동 슬로건으로 평화 행렬에 동참했다. 등록된 남은 생존자 63명, 시간이 많지 않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의 역사는 1992년 1월 8일 미야자와 기이치 당시 일본 총리의 방한을 계기로 시작됐다. 1990년 37개 여성단체가 참여해 정대협을 출범하고, 1991년 8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는 처음으로 고(故) 김학순 할머니가 공개 증언에 나서면서 수요시위의 싹이 움트게 됐다. 이후 혼자서 한 맺힌 세월을 감당해온 피해자들이 속속 목소리를 내게 됐고, 점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 과거 청산 문제, 여성 인권 문제 등을 공론화하는 계기로 확산되기도 했다. 정기 수요시위에 모인 이들은 20년 동안 지속적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상 규명과 문제 해결 및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 회복을 요구해왔다. 처음에는 ‘내 잘못’이라며 가슴을 치고 고개를 숙여 피하던 할머니들은 점차 당당하게 세상 밖으로 나왔고, 고통스러움을 견뎌내며 쓰라린 역사를 증언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삼복더위에도,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에도, 한겨울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엄동설한에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할머니들은 수요시위를 통해 ‘내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일본 정부가 부끄러운 것’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정대협과 피해자 할머니들 몇몇이 모여 시작한 외로운 싸움은 일반 시민, 학생들, 일본을 비롯한 외국의 시민단체가 함께하는 평화의 연대로 확산됐다. 정대협이 주최하는 수요시위는 20개 정대협 회원단체와 여성단체, 뜻을 함께하는 수많은 시민사회단체, 종교계 등 일반 시민들이 주관하고 참여해 이어온 소중한 역사다. 한국뿐 아니라 일본,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폴란드, 남아프리카공화국, 필리핀, 태국, 버마 등 약 23개국 60여 도시의 수만 명이 이끌어온 소중한 세계 연대의 열매이기도 하다. 또 피해자와 시민들이 연대하는 장소, 살아 있는 역사교육의 공간, 여성 인권과 평화를 외치는 장, 국경과 이념은 물론 세대와 성별을 초월한 연대의 장이라는 의미도 갖고 있다. 하지만 수요시위는 이제는 더 이상 열리지 않아야만 할 우리 역사의 아픔이자 시대의 비극이다. ‘다 함께 모여 한 목소리를 내면 빨리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집회를 시작했던 피해자 할머니들은 수요시위가 1천 회를 맞는다는 사실이 암담하고 막막하기만 하다. 2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늙고 아픈 몸을 이끌고 거리로 나왔지만, 일본 정부는 아직까지 그 어떤 공식적인 해명이나 사과를 하지 않고 있으며 우리 정부 또한 특별한 대책이 없다. 뻔뻔한 일본 정부의 태도에 가슴을 치다가도, 한국 정부의 무관심과 냉담한 시선이 더욱 서운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이곳에 모이는 할머니들의 소원은 ‘마지막 수요시위’에 참석하는 것이다. 일본의 진심 어린 사죄를 받아내고, 함께 목소리를 내준 고마운 사람들과 모여 마지막 수요시위를 연 뒤, 짧게나마 후련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살다 눈을 감게 되길 매일 간절히 기도한다. 중요한 것은 이제 우리에겐 시간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시간은 속수무책으로 흐르고, 할머니들은 가슴속 응어리를 묻어둔 채로 세상을 등지고 있다. 올해만 해도 벌써 열여섯 명의 할머니들이 떠났다. 여성가족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신고자 234명 가운데 생존자는 이제 63명뿐이다. 그나마 남아 있는 분들도 고령으로 인한 각종 질병과 일본군 ‘위안부’ 생활로 인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피해자들의 평균 나이 86세. 그들 중 3/4이 돌보는 가족 없이 혼자 지내고 있으며 60% 이상이 주위 사람의 부축 없이는 거동조차 힘든 상태다. 우리가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하는, 그들의 목소리에 함께 힘을 실어야 하는, 간절하고도 강력한 이유다. 오늘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1천 회 수요시위에 쏟았던 관심을 함부로 놓아버리지 말고, 할머니들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가져가야만 하는 의무가 있다. 앞으로 시간이 더 흐른다면 일본 정부는 지난날의 과오를 씻고 잘못을 사죄해야 할 대상을 모두 잃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또 다른 범죄이자 비극을 저지르는 일이다. 일본 정부가 일본 국민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으려면, 세계평화를 선도하는 나라로 제 몫을 할 수 있으려면,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과 역사에 대한 예의를 다하려면, 지금이라도 하루빨리 행동에 나서길 바란다. 과거에 눈을 감는다면, 현재도 미래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때이다. “제1천 회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 함께한 이들의 목소리”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 팀 올해로 한국 초연 10주년을 맞는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출연 배우들은 이날 직접 무대에 올라 극중 ‘말하라’ 독백을 낭독하며 참가자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여성의 성(性)에 대한 신랄하고도 유쾌한 이야기를 다룬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매 공연마다 한국 사회의 현실과 문제를 반영한 연출을 선보이며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내왔는데, 이번 10주년 공연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모놀로그를 통해 사회에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여덟 번째 독백으로 삽입된 ‘말하라’는 원작자인 이브 앤슬러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를 직접 만난 뒤 보고 들은 얘기를 한 편의 시로 만든 것으로, 당시의 혹독한 현장을 담담하지만 강한 문체로 묘사한다. ‘위안부’ 시절의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한 ‘말하라’가 흘러나오는 동안 현장에 있던 할머니들은 애써 참아왔던 눈물을 쏟아내며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고, 사회를 맡은 권해효는 “가슴이 먹먹해진다”라고 했다. 더불어 제작사는 연극의 수익금 일부를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터전인 ‘나눔의 집’에 기부할 것을 약속하기도 했다. “공연을 하면서 ‘말하라’ 모놀로그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됐어요. 마침 천 번째 수요시위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저희 모두 반드시 참석해야 된다는 사명감 같은 걸 느꼈어요. ‘말하라’는 연습 때나 공연 때 수십 번도 넘게 했던 독백인데, 직접 이 무대에서 하려니 다른 때와는 무척이나 느낌이 달라서 마음을 다잡으며 읽느라 힘들었어요. 사실 공연 때는 너무 격정적으로 읽으면 관객들이 받아들이는 데 힘들어하실 수도 있기 때문에 감정을 순화시키는 편이거든요. 그런데 막상 앞에 할머니들이 앉아 계시니 단어 하나하나가 더 절절하게 느껴지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아서 힘겹게 읽었네요. 앞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해 우리 배우들도 더 많이 애써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단순히 연기로만 끝낼 것이 아니라 계속 가슴에 새기고 가야 할 문제라는 생각을 했어요. 책임감과 의무감을 갖고 공연해야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어린 나이에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감내해야 했고 또 평생을 그 상처 속에 살아야만 했던 그분들을 위해서, 그리고 어디선가 또다시 자행될 수도 있는 이러한 폭력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조속히 해결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전곡고등학교 2학년 임수진·홍다솔·김솔 1천 회를 맞은 수요시위에는 사회적 관심을 반영하듯 각계 인사들은 물론 시민들과 학생들이 모여 인산인해를 이뤘다. 특히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다수 참여해 희망을 확인하게 했다. 학생들은 시위 내내 일본 정부에 대한 규탄의 내용과 할머니들에 대한 응원의 메시지를 담은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쳤다. 학생들 중에는 현장 자원봉사를 지원해 참여한 이들도 있었고, 역사 수업의 일환으로 같은 반 친구들이 단체로 찾기도 했다. “매주 수요시위가 열린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얼마 전 뉴스를 보다가 이번이 1천 회라는 것을 듣고 의미 있는 자리라 생각해서 찾아오게 됐어요. 직접 현장에 와본 건 처음이에요. 참여해보니 마음이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이상하고 미묘해요. 할머니들을 뵈니 반갑기도 하고, 이렇게 함께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무척 다행이란 생각도 들어요.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외치는데 꼭꼭 문 닫아 걸고선 아무 말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본 정부가 야속하게 느껴져요. 할머니들의 요구를 꼭 들어줬으면 좋겠어요. 사실 학교 수업시간에는 일제강점기 내용을 배울 때 강제징용이나 위안부에 관한 이야기가 짧게 한두 줄 정도만 나오기 때문에 정확하게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어떤 피해를 겪었는지 잘 몰라요. 더 자세히 확실히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할머니들이 아까 우리 같은 어린 학생들이 많이 와서 정말 고맙고 힘이 된다고 하셨는데, 저희도 할머니들이 일본으로부터 정당한 사과와 보상을 받으실 수 있도록 계속 힘을 드리고 싶어요. 이제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20년 동안이나 일본이 모른 척했으니 그 사이에 이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겠죠. 방학하고 나면 또 다른 친구들을 더 모아서 이 현장에 다시 나올 거예요.” # 일본인 시민사회단체 회원들 수요시위 1천 회를 맞아 세계 각지에서는 다양한 연대 행동이 열리고 있다. 하루 전날인 12월 13일에는 뉴욕 쿠퍼버그 홀로코스트센터에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이 만나는 행사가 열렸고, 14일 일본 정부부처가 집결되어 있는 가스마가세키의 외무성 건물 주변에서는 일본 시민들이 서로 손을 잡은 채 ‘외무성을 인간 사슬로 포위하자’라는 연대집회를 가졌다. 이렇듯 서울 수요시위 현장에서도 많은 외국인들이 참여해 일본 정부의 조속한 문제 해결을 촉구했는데, 특히 일본의 책임에 공감하는 일본인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눈에 띄었다. “저희는 일본 아이치 현 나고야에서 ‘아이치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모임’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어요. 오늘 이 시위에 함께하고자 회원들과 함께 어제 한국에 왔어요. 이 플래카드는 회원들 한 명 한 명이 할머니들을 응원하고 일본 정부의 행동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마음을 담아 직접 손으로 쓴 천 조각들을 모아 만든 거예요. 직접 이 자리에 와보니 가장 인상 깊은 점은 무엇보다 학생들과 젊은 사람들이 많다는 거예요. 참 대단하네요. 그들이 귀여운 목소리로 ‘할머니, 힘내세요’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니 기쁜 마음이 들어요. 저는 20년쯤 전에 아시아여성회의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처음 접하게 됐어요. 굉장한 쇼크였죠. 이 문제는 한국인들뿐만이 아니라 일본인들도 함께 고민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일본은 과거의 행동에 대해 명확하게 사죄하고 책임져야 하고요. 일본이 사과하지 않는다면 앞으로의 발전도 없을 거예요.” “저희(야만바·나쓰미)는 직업이 아티스트이기 때문에 어떤 단어나 말보다는 그림으로 표현하고 힘을 보태려고 해요. 규슈 유후인에 살고 있는데 몇 년 전에 ‘위안부’ 문제를 알게 되면서, 관심을 갖고 공부하게 됐어요. 오늘이 시위 천 번째 날이라고 하는데 저희가 할머니들에게 조금이라도 희망을 주고 싶어요. 이 무궁화 그림은 ‘상처 위에 핀 꽃’이라는 내용이에요. 부디 빨리 이 문제가 해결되고 양국이 서로 도와가며 잘 살 수 있게 되길 바라요.” <■글 / 이연우 기자 ■사진 / 박동민 ■자료 제공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www.womenandwar.net)>

      2011.12.30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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