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
“후지산이 무너지고 있습니다”…‘중계석의 시인’ 송재익 캐스터 별세... 57%를 기록하기도 했다. 고인은 스포츠 중계의 수준을 끌어올린 인물로 평가받는다. ‘중계석의 시인’이라 불릴 만큼 입담이 매력적이었다. 한준희 쿠팡플레이 해설위원은 “척박했던 시절 스포츠...
황민국 기자 2025.03.18 19:51
인물
“후지산이 무너지고 있습니다”…‘중계석의 시인’ 송재익 캐스터 별세... 57%를 기록하기도 했다. 고인은 스포츠 중계의 수준을 끌어올린 인물로 평가받는다. ‘중계석의 시인’이라 불릴 만큼 입담이 매력적이었다. 한준희 쿠팡플레이 해설위원은 “척박했던 시절 스포츠...
황민국 기자 2025.03.18 19:51
문화
김수현 측 “김새론과는 성인 이후 사귀어”···교제 사실은 시인... 김수현 배우 김수현 측이 고 김새론 배우와의 교제 사실을 시인했다. 다만 유튜브 채널 ‘가로세로연구소(가세연)’가 제기한, 고인이 미성년자였을 때부터 사귀었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전면 부인했다....
정환보 기자 2025.03.14 14:29
사회
송경동 시인도 곡기 끊는다…문화예술인, ‘윤석열 탄핵 인용 때까지’ 단식... 대통령의 탄핵을 촉구하며 단식 투쟁에 돌입했다. 단식에는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송경동 시인 등이 참여한다. 문화연대, 블랙리스트 이후, 영화인연대, 한국민예총, 한국민족춤협회,...
윤석열 내란 재판
고희진 기자 2025.03.12 10:23
인물
작가회의 이사장에 강형철 시인... 강형철 시인(사진)이 선임됐다. 작가회의는 지난 8일 개최한 제38차 정기총회에서 새 이사장에 강 시인, 사무총장에 송경동 시인을 각각 선출했다고 11일 밝혔다. 강 이사장은 1985년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2025.03.11 20:17
연예
‘1DAY 1K-CULTURE: K-PEOPLE’ 추사 김정희 선비정신을 잇는 김주대 시인의 문인화아리랑TV 31일 오전 8시 30분 국내외 시청자들에게 대한민국 예술가들의 작품세계와 철학을 소개해온 아리랑TV 데일리 문화정보프로그램 ‘1DAY 1K-CULTURE: K-PEOPLE’에 ‘그림 그리는 시인’으로 유명한 김주대 시인이 출연한다. 그는 대학생 때 쓴 ‘민중시’로 등단한 이후, ‘도화동 사십 계단’, ‘꽃이 너를 지운다’, ‘그리움의 넓이’, ‘포옹’ 등의 시집을 발표, ‘관념이 아닌 삶으로 시를 쓰는 작가’로 평가 받는 중견 시인이다. 그가 2014년부터 그의 시를 먹으로 그린 문인화들은 ‘꽃이 져도 오시라’는 문인화첩으로 출간돼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제 그림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림을 잘 그리지는 못해요. 정신을 그려넣는 거기 때문에, 사람 살면서 행복할 때 보다 좀 불행하고 또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암울할 때 식은 땀처럼 흘러나오는 시를 그림으로 그린다.”는 시인 김주대. 아리랑TV 조선시대 문인화의 맥을 잇는다고 평가 받는 그의 작품들은 국내외 저명인사들이 소장하고 있다. 청소부 아저씨가 계단을 쓸고 내려오다가 계단에 핀 작은 꽃을 발견하고 그 꽃을 쓸지 않고 내려오는 모습을 그린 ‘화엄경’은 독일의 전 총리 슈뢰더의 부인이 소장하고 있다. 그림을 완성한 후 마지막에 찍는 ‘낙관’ 대신 작품의 처음에 찍는 인장인 ‘두인’을 더 신경써서 그림에 넣는다는 문인화가 김주대. “보통 두인은 작가가 좋아하는 글자를 새겨넣는데, 저는 목숨처럼 소중하게 써보자는 결심으로 ‘목숨’이라는 글자를 새겨넣은 두인을 쓰고 있다.”는 시인 김주대. 아리랑TV 그가 목숨처럼 그의 정신을 새겨넣은 ‘도화동 사십 계단’, ‘폐허를 밀고 가다’, ‘꽃이 져도 오시라’, ‘사랑을 기억하는 방식’ 등 그의 작품들은 대중들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추사 김정희의 선비정신을 잇는 문인화가로 평가 받는 김주대 시인의 작품세계와 철학은 12월 31일 오전 8시 30분 아리랑TV를 통해 전세계 시청자와 만난다. 아리랑TV
손봉석 기자 2024.12.30 05:37
스포츠종합
고양 소노, 학폭 의혹 일부 시인한 김민욱에게 계약 해지 통보김민욱 | KBL 제공 프로농구 고양 소노가 학교폭력 의혹을 일부 시인한 포워드 김민욱에게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소노의 한 관계자는 10일 기자와 통화에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거나 구단 이미지를 실추하면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는 조항에 따라 김민욱에게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고 말했다. 김민욱은 아직 해지 합의서에 서명하지는 않았다. 최근 김민욱은 폭력사건의 피해자이자, 가해자로 떠올랐다. 그는 지난달 10일 서울 SK전 하프타임 김승기 전 소노 감독에게 라커룸이 던진 젖은 수건에 맞았다. 김 감독은 자진 사퇴했다. 이 사건 이후 인터넷 커뮤니티에 김민욱이 연세대 재학 시절 운동부에서 가혹행위를 일삼았다는 폭로성 글이 올라왔다. 스포츠윤리센터와 KBL 클린바스켓 센터에도 같은 내용의 신고가 접수됐다. 스포츠윤리센터는 이 사안을 조사 중이며, KBL은 프로 입성 전의 사건을 조사할 권한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KBL 관계자는 “프로배구 학교폭력 사건이 아마추어 시절 일어나 징계를 내릴 수 없었던 것과 같은 해석”이라고 설명했다. 소노 구단은 이 문제 처리를 두고 고민하던 상황에서 김민욱이 9일 KBS와 인터뷰에서 학교폭력 의혹 중 일부를 시인하면서 계약 해지에 나서게 됐다. 김민욱은 이 인터뷰에서 “후배 때문에 가혹행위를 당하자, 화가 나서 그 후배를 엎드려뻗쳐 하게 한 다음에 옥상에 있는 아이스하키 채로 때린 적이 있다”고 말했다. 소노 관계자는 “아직 스포츠윤리센터 조사 결과가 나오지 않았으나, 김민욱이 구단과 상의 없이 한 인터뷰를 통해 의혹의 사실관계에서 중요한 부분을 스스로 인정한 만큼 함께 가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말했다. 한편 김민욱이 이번 사건으로 소노를 떠나는 것이 최종적으로 확정될 경우 스포츠윤리센터 조사와는 별개로 코트 복귀에는 최소 반 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 전망이다. KBL에 따르면 시즌 중 계약해지한 선수는 시즌이 끝난 뒤 FA시장이 열렸을 때 새 구단에 입단할 수 있다.
황민국 기자 2024.12.10 16:07
생활
삶의 소중함 더한 ‘죽여주는 이야기’ 제작진 야심작, 연극 ‘죽은시인의 사회’ 20일 개막힐링 콘텐츠 블랙 코메디 분야에서 주목 받아온 ‘죽여주는 이야기’ 제작진이 새로운 연극 ‘죽은시인의 사회’를 오는 20일 개막한다. 연극 ‘죽은시인의 사회’ 20일 개막을 앞두고 있다. 배우들의 라인업도 이목을 끌고 있다. 사진 | ㈜삼형제엔터테인먼트, 극단 틈 내년 2월 2일까지 약 2달 간 대학로 플레이더씨어터에서 공연을 이어 나간다. 이번 공연 주제는 ‘죽음’, ‘자살’ 등 무거운 소재들이나 이를 삶에 대한 애정과 웃음, 유머로 풀어내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시기에 대학로을 찾는 연인 및 가족 관람객 등에게 감동과 웃음을 선사할 전망이다. 이번 작품에 대해 제작사 ㈜삼형제엔터테인먼트는 “현대인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갈등을 묘사해 ‘자살’을 가볍게 여기는 현대 사회를 풍자한 블랙코미디 연극”이라고 전했다. 출연하는 배우들 라인업도 화려하다. ‘죽은시인’ 역에는 영화와 공연을 넘나들며 다양한 활동을 잇고 있는 배우 김대흥과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영화 ‘사람과 사람사이’ 등 여러 작품을 통해 얼굴을 알린 배우 장용석이 맡는다. ㈜삼형제엔터테인먼트 ‘사망보험금’ 역에는 연극 ‘늘근도둑이야기’, ‘망원동브라더스’, 영화 ‘소년들’, ‘블랙머니’ 등 굵직한 작품을 통해 인기를 얻고 있는 배우 노진원과 영화 ‘범죄와의 전쟁’, 드라마 ‘시지프스’ 등을 통해 얼굴을 알린 배우 박재현, 연극, 방송, 영화, 광고 등 다양한 범위에서 활동 중인 배우 원인재가 출연한다. ‘자살천사’ 역에는 배우 강현정, 임도윤, 정이수, 조수민이 ‘킬미업’ 역에는 배우 박수정, 임지안, 차민하, 한유연이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삼형제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이번 공연을 통해 삶에 대한 소중함이 전해지길 바란다”며 제작자, 연출, 출연진, 스텝들 모두 공연 막바지 준비에 열심을 다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또한 공연 연출을 맡은 이훈국 작·연출가는 “죽여주는 이야기의 또 다른 이야기를 준비하게 돼 기쁘다”며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고 전했다. 20일 개막을 앞둔 블랙코미디 연극 ‘죽은시인의 사회’는 인터파크티켓, 네이버예약 등 다양한 예매처에서 예매 가능하다.
손재철 기자 2024.12.05 21:23
축구
‘강철 멘털’ 황의조, 리그 3호골···‘불법 촬영’ 시인 재판 후에 골 신고황의조. 알란야스포르 SNS 불법 촬영 혐의를 시인한 축구대표팀 공격수 출신 황의조(32)가 리그 3호골을 신고했다. 튀르키예 알란야스포르에서 뛰고 있는 황의조는 28일 알라니아의 바쳬세히르 오쿨라르 스타디움에서 끝난 2024-25 튀르키예 프로축구 10라운드 홈 경기에서 전반 25분 오른 측면에서 올라온 크로스를 헤딩으로 연결, 선제골을 터뜨렸다. 지난달 22일 아다나 데미르스포르전(2-0 승)에서 2골을 넣은 후 한 달여 만에 시즌 3호골을 넣었다. 하지만 팀은 황의조의 득점을 지키지 못하고 후반 17분과 30분 연이어 실점해 안방에서 역전패의 쓴맛을 봤다. 시즌 5패(2승 3무)째를 당한 알란야스포르는 리그 16위로 떨어졌다. 황의조는 2022년 8월 노팅엄에 입단하며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무대에 도전했다. 그러나 노팅엄과 계약 직후 곧바로 올림피아코스(그리스)로 임대됐던 황의조는 이후 K리그1 FC서울, 노리치 시티(잉글랜드), 알란야스포르 등을 전전했다. 황의조는 이번 시즌을 앞두고 노팅엄에서 방출 수순을 밟은 뒤 지난 시즌 후반기에 임대로 뛰었던 알란야스포르로 지난달 이적했다. 황의조는 올 시즌 5경기에서 3골째를 올리며 팀 내 최다 득점 공동 1위에 올랐다. 황의조가 16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 혐의 관련 1차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공동취재단 황의조는 성관계를 상대방 동의 없이 촬영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지난 16일 진행된 첫 공판기일에서 공소 사실을 모두 인정했다. 이에 검찰은 황의조에게 징역 4년을 구형했고,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이수 명령과 신상정보 공개 및 고지 명령, 5년간의 취업제한 명령도 부과해 달라고 요청했다. 황의조는 최후진술에서 “제 잘못으로 피해를 본 분들에게 진심 어린 사죄를 드린다”며 “이번 일을 거울삼아 앞으로는 어떤 잘못도 하지 않고, 축구선수로 최선의 노력을 하며 살아가겠다”고 말했다. 황의조의 선고기일은 12월 18일이다.
양승남 기자 2024.10.28 07:50
문화/과학 문화캘린더 문화캘린더
[문화캘린더]한국인이 좋아하는 4명의 시인ㆍ전시 : 윤동주와 모-던 종로의 시인들 전시 윤동주와 모-던 종로의 시인들 일시 6월 1일~7월 30일 장소 서울 무계원 별채 전시실 관람료 무료 서울 부암동에 있는 복합문화공간 무계원 별채가 기획전시실로 개관했다. 이를 기념하는 전시로 <윤동주와 모-던 종로의 시인들>이 열린다. 1930~1940년대 경성 종로를 중심으로 활동한 4명의 시인 윤동주, 정지용, 이상, 백석이 전시의 주인공이다. 그들의 작품과 기록을 통해 당시의 문화와 풍습을 살펴볼 수 있다. 윤동주는 산문 ‘종시(終始)’에서 종로 지역을 중심으로 당시의 경성에 대해 기술한 바 있다. 전차와 사람들이 북적이는 정거장, 기차가 다니는 경성역과 이른바 ‘모던걸’을 볼 수 있는 활발한 풍경을 보여줌과 동시에 경복궁 앞으로 펼쳐진 일제의 관청을 대비시키며 당시의 암울함을 전달했다. 당시 종로는 근대화와 식민화라는 이데올로기가 혼재된 복합적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윤동주와 모-던 종로의 시인들>은 ‘종시(終始)’의 자취를 따라가는 영상과 설치물을 통해 당시 종로의 모습을 관람객들이 생생하게 느껴볼 수 있도록 기획됐다. 학생 윤동주가 통학길에 보고 느낀 풍경을 따라가며 시인의 마음을 함께 읽어볼 수 있도록 구성한 ‘윤동주의 종로와 경성’, ‘윤동주와 함께 걷는 길’뿐만 아니라 정지용, 이상, 백석 등 한국인이 좋아하는 시인들의 글을 함께 소개한다. 생활인이자 예술가로 모던 종로를 살아가던 시인들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윤동주가 사랑한 시인들’, ‘모던 시인 경성 산책기’ 등을 전시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암울했던 시대 속에서도 창작 활동을 통해 문화적 자긍심을 지켜온 예술가들의 정신을 느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02-363-8586 ▲연극 | 20세기 블루스 일시 5월 30일~6월 17일 장소 두산아트센터 Space111 관람료 3만5000원 60대에 진입한 여성 4명을 통해 나이 듦의 이야기를 전한다. 날카로운 관찰력으로 존재를 부정당하는 여성들을 섬세하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두산인문극장’의 올해 두 번째 공연이다. 02-708-5001 ▲국악 | 부재 일시 6월 30일 장소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관람료 R석 5만원, S석 3만원, A석 2만원 국립국악관현악단과 안드로이드 로봇 ‘에버6’가 만나 무대를 꾸민다. 빠른 속도로 반복적인 움직임을 정확히 수행하는 에버6의 지휘 아래 국악이 어떻게 재탄생할지 기대를 모은다. 02-2280-4114 ▲콘서트 | 2023 서울파크뮤직페스티벌 일시 6월 24~25일 장소 올림픽공원 88잔디마당 관람료 1일권 9만9000원, 2일권 17만8000원 규현, 10cm, 선우정아, 권진아, 루시, 숀, 크러쉬 등 다양한 장르를 대표하는 가수들이 참여해 음악축제를 연다. 이번 콘서트는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전석 자유석으로 이틀간 열린다. 02-508-0160
김찬호 기자 2023.06.02 11:29
문화/과학 박주연의 메타뷰
[박주연의 메타뷰](26)정호승 시인 “반송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하여”ㆍ등단 50년 맞아 시집 내놓은 정호승 시인 ‘봄길’, ‘고래를 위하여’, ‘슬픔이 기쁨에게’ 등 그의 시는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여러 편이 수록돼 있다. 고 김광석의 ‘부치지 않은 편지’, 고 이동원의 ‘이별노래’, 양희은의 ‘수선화에게’ 등 노랫말이 된 시도 70편이 넘는다. 그만큼 그의 서정시는 탄탄하면서도 읽는 이의 가슴을 흠뻑 적신다. 올해로 등단 50년을 맞은 정호승 시인(72) 얘기다. 올해 등단 50년을 맞은 정호승 시인이 지난 11월 16일 서울 중구 천주교성프란치스코회수도원교육회관 앞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이날 그는 자기 시와 인생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 김창길 기자 그는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1979년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를 시작으로 모두 14권의 시집을 펴냈다. 14번째 시집은 올해 9월 발표한 <슬픔이 택배로 왔다>다. 사랑과 슬픔, 죽음에 대한 깊은 사유와 성찰을 담은 시집이다. 지난 11월 16일 정호승 시인을 만났다. 흰 머리카락을 말끔하게 정돈하고, 단정한 정장 차림으로 나타난 시인은 시종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시와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등단 50년을 맞은 소회가 어떻습니까. “50년간 시인으로서 살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하죠. 제 삶의 가치와 의미를 시를 통해 찾을 수 있으니까요.” -신작 시집 <슬픔이 택배로 왔다> 표제는 이 시집에 실린 ‘택배’라는 시의 첫 문장이에요. 어떤 함의를 담았나요. “우리가 택배문화 속에서 살잖아요. 택배 안내 문자를 받으면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죠. 그런데 살아가면서 행복한 소식만 듣는 게 아니잖아요. 그걸 저는 택배로 은유한 거예요. 정말 받고 싶지 않은 택배는 이별이고, 특히 죽음이라는 이별이에요. 제 경우에는 부모님의 죽음이라는 슬픈 택배를 받았어요. 그 택배는 반송할 수도 없어요. 언젠가는 제 죽음이라는 택배를 받게 될 거고요.” -그러고보면 정 시인은 1979년 출간한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속 시들을 시작으로 슬픔을 담은 시문을 많이 지었어요. ‘슬픔의 시인’으로도 불렸을 정도로요. 시인의 기저에 무엇이 슬픔을 끊임없이 길어올리는 건가요. “저는 인간의 존재와 그 삶이 비극적이라고 생각해요. 개인의 삶에서도, 사회적 삶에서도, 시대의 삶에서도 원하지 않는 비극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니까요. 그래서 모든 예술은 비극에서 꽃피는 거예요. 인간 삶이 비극이 아니었다면 예술은 꽃필 수 없었을지 몰라요. 제 시의 발원을 묻는다면 인간 삶의 비극에서 시를 자연스럽게 발견하게 된다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시도 모든 예술도 비극에서 꽃피어 18년 함께하며 부모님 보내드린 뒤 죽으면 사랑으로 남겨지는 것 깨달아 -새 시집에는 ‘구급차 운전사가 바라본 새벽녘’, ‘부르심’, ‘수의’ 등 죽음에 대한 성찰을 담은 시가 많아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부모님을 비롯해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많이 겪고 있으니까요. 사회적 죽음도 많고요. 제가 직장생활을 하던 ‘샘터’에서 상사와 부하로 만난 인연으로 형제지간처럼 아주 가깝게 지낸 정채봉씨(동화작가·수필가·시인)가 2001년 1월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어느 날 지하철을 탔는데 그가 너무 보고 싶은 거예요. 하지만 세상에 없으니 볼 수 없잖아요. 그러고나서 제 주변을 보니 늙으신 부모님이 계셨어요. 그 길로 부모님 댁의 방 하나를 작업실로 만들어 그곳으로 매일 출퇴근했어요. 아버지는 2013년, 어머니는 2019년에 돌아가셨으니까 18년간 그렇게 살았어요.” -정말 효자였군요. “그렇다고 해서 자식으로서 도리를 다한 것은 아니에요. 같이 식사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아버지와 목욕도 다녔지만, 부모님께 내 마음을 다 바치지 못했고, 제 인생의 시간을 많이 나눠드리지 못했어요. 부모님에게는 인생의 마지막 시기였잖아요. 그런데 죽음을 기다리는 그분들의 외로움, 존재로서의 고독함, 그런 것을 제가 나누는 데 어려움이 있었어요.”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나요. “인생의 완성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언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찾아올지 모를 뿐. 부모님이 마지막으로 가르치는 게 있어요. 바로 당신의 죽음이에요. 그것을 통해 인간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알려주고 떠나시는 거예요. 죽어가는 섬세한 과정과 누구나 종생(終生)을 맞이할 수밖에 없음을 무언으로 가르치시는 거죠. 저는 부모님의 유해를 화장해 공동묘지에 조그만 표지석 하나 세워 묻어드렸어요. 한 달 만에 분해되는 친환경 유골함을 사용했기에 완전히 흙이 돼 어디 계시는지 몰라요. 결국 인간은 생명의 원천인 흙으로 돌아간다는 배움을 얻었어요. 가르침은 또 있어요.” -뭔가요. “부모님의 육체는 소멸했지만 그분들이 제게 주셨던 사랑, 부모님에 대한 제 사랑은 제 가슴 속에 살아 있다는 점이에요. 인간은 결국 사랑을 남기는 거예요.” -정 시인의 시는 종교적 색채가 짙어요. 가톨릭 신자이지요. 모태신앙입니까.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종교적이다’라는 말도 있어요. 생명이 탄생하는 것 자체가 인간의 힘이 아닌 것 같으니까요. 제가 태어나서 어머니가 유아세례를 해줬다고 하시니, 모태신앙은 맞아요. 개신교 신자였죠. 가톨릭 신자가 된 것은 서른 넘어 정채봉씨와 함께 성당에서 영세를 받으면서예요. 계기는 대학 졸업을 앞둔 1975년 졸업시험 대신 제출할 논문 형식의 리포터 작성을 위해 읽은 3권짜리 <한국천주교회사>였어요. 천주교회사에 나타난 형벌에 관한 내용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큰 감동을 받았거든요.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를 선택한 선교사들의 모습에 전율했어요.” 정 시인은 1950년 경남 하동군에서 2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대구로 이사했다. 큰외삼촌이 그곳에서 사과과수원을 했다. 정 시인의 가족은 그곳에 기와집을 짓고 살았다. 집 주변은 온통 논밭이었다. 인근에는 범어천이 흘렀다. 소년 정호승은 친구들과 범어천에서 헤엄을 치고 미역을 감고 물고기를 잡았다. 개천이 꽁꽁 어는 겨울에는 썰매를 탔다. 시련이 닥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다. 은행원이던 아버지가 직장을 그만두고 시작한 사업이 연거푸 망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수학여행은커녕 졸업앨범을 살 돈도 없어 포기해야 했다. 장학금을 받고 경북대 의대에 입학한 형은 입주과외를 하며 스스로 학비를 마련했다. 누나는 1960년대 말 파독(派獨) 간호사가 됐다. -가난을 뼈저리게 경험했군요. “매일 집으로 일수를 받으러 온 영감님의 모습이 지금도 뚜렷해요. 어머니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안절부절못하셨어요. 다음에 주겠다고 해도 영감님은 안 가고 버텼어요. 고3 때까지 그런 모습을 지켜봐야 했어요. 제가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때 시인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시인은 가난하다는 통념이 있잖아요. 그래서 저는 시인이 되더라도 기본적인 생활능력은 가져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정호승 시인은 1982년 두 번째 시집 를 발표하고 5년 만인 1987년 를 펴냈다. 그는 “이한열·박종철 사건을 비롯해 시대적 죽음이 많았던 1987년 시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 김창길 기자 -고생하는 어머니를 지켜보는 일이 힘들었겠어요. “어머니도 시를 쓰셨어요. 고1 때 어머니가 가계부에 연필로 써놓은 시들을 우연히 읽었거든요. 힘드실 때마다 남몰래 틈틈이 쓰신 것 같았어요. 돌아가시기 얼마 전, 병석에 누워계신 어머니께 ‘예전에 쓰신 시 중 외우시는 거 있으면 말씀해보세요’라고 하니까 어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시는 슬플 때 쓰는 것이다’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어머니는 시의 비밀을 알고 계셨던 거예요.” -사춘기 때 겪은 가난이 시인의 창작활동에 어떤 영향을 끼쳤습니까. “시는 자기의 삶 속에 있는 건데, 그것이 확대되면 우리의 삶이고 공동체의 삶이잖아요. 저는 가난이 주는 슬픔과 어머니의 고통, 이런 것들 속에서 시를 발견했어요. 한송이 꽃을 봐도 ‘저 꽃이 아름답지만 좀 슬프다’ 하는 시각이 생긴 거죠.” 가난이 주는 슬픔 속에 시를 발견 어머니도 틈틈이 시를 쓰셨는데 “슬플 때 쓰는 거야” 똑같은 깨달음 -문학에 대한 재능이 있음을 처음 자각한 건 언제였나요. “중학교 2학년 때 국어시간에 선생님이 김영랑의 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을 가르치면서 시를 한 편씩 써오라는 숙제를 내주셨어요. 선생님이 ‘호승이 니 숙제해왔나? 해왔으면 한 번 읽어봐라’ 하셨어요. 키가 작아 앞줄에 앉아있던 저는 깜짝 놀라 일어나 읽었죠. 낭독이 끝나자 선생님은 빡빡 깎은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호승이 니는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시인이 될 수 있겠다’. 이 말씀이 제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어요.” -어떤 시를 써갔습니까. “제목은 ‘자갈밭’이에요. 겨울에는 범어천의 물이 말라 자갈이 많이 보였거든요. 나는 이 세상에 왜 태어났나, 우리 집은 왜 이렇게 가난한가, 엄마는 왜 저렇게 고생을 하시는가 하는 소년의 마음을 담았어요. 당시 제 마음이었어요.” -그때부터 시를 창작했나요. “그랬어요. 제가 다닌 학교가 계성중학교인데, 김동리·박목월 선생의 모교예요. 국어선생님 중에 현역 문인들이 많이 계셔서 학생들의 문예창작에 관심이 컸죠. 매달 학생들의 문예작품을 모집해 상을 줬어요. 부상으로는 교내 매점에서 빵이나 학용품을 살 수 있는 상품권을 줬고요. 저는 매번 당선됐어요.” -어느 날 갑자기 글재주가 생긴 건 아닐 텐데요. “아버지가 은행을 퇴직하시기 전에 한국문학전집 33권짜리를 집에 들여놓으셨어요. 중학교 1, 2학년 때였는데 열심히 읽으면서 좋은 문장들은 옮겨 적었어요. 고등학생이 되고서는 어머니가 용돈을 주실 때마다 헌책방에 갔어요. 당시 유일한 문예지가 ‘현대문학’이었고, 발매 시기에 따라 10원, 20원 했어요. 저는 늘 10원을 주고 사봤어요.” 그는 ‘고교문예의 성찰’이라는 평론으로 1968년 경희대 국문학과에 문예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장학금을 계속 받으려면 문단에 등단해야 했지만 쉽지 않았다. 2학년 때 휴학하고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1970년 1월 군에 자원입대했다. 춘천 야전 공병단에 소속돼 1년간 행정직으로 있다가 이후 2년간은 군종병(군대 내에서 이뤄지는 종교 활동을 보조하는 병사)으로 근무했다.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당선된 후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당선됐다. 그의 등단 50년의 기준은 1973년 신춘문예 당선이다. -군 복무 중에 어떻게 시를 썼습니까. “주머니 속에 메모지를 넣고 다니며 불침번을 서거나 보초를 서면서 시를 썼어요. 신춘문예 당선으로 복학 후 장학금을 그대로 받을 수 있었어요.” 그는 유일하게 외우는 자작시라며 ‘첨성대’를 읊었다. “할머님 눈물로 첨성대가 되었다/ 일평생 꺼내 보던 손거울 깨뜨리고/ 소나기 오듯 흘리신 할머니 눈물로/ 밤이면 나는 홀로 첨성대가 되었다// 한단 한단 눈물의 화강암이 되었다/ 할아버지 대피리 밤새 불던 그믐밤/ 첨성대 꼭 껴안고 눈을 감은 할머니/ 수놓던 첨성대의 등장불이 되었다// (하략) -‘첨성대’는 어떻게 나온 시인가요. “외할머니가 경주에서 사셨어요. 어릴 때 경주에 가면 첨성대에 기어오르고 창을 통해 안에도 들어가 놀았죠. 첨성대 부근은 다 논밭이고, 초가집들과 우물이 있었어요. 제가 고등학생일 무렵 그 초가집 중 한 집에 제 사촌형들이 자취를 했어요. 거기에 외할머니가 자주 가셔서 손자들을 위해 밥해주고 빨래를 해주셨어요. 저도 방학 때면 자주 놀러갔어요. 첨성대의 곡선에서 강한 여성성을 느꼈어요. 한복을 입은 여성, 어머니, 또는 외할머니의 모습을요.” 정 시인은 1976년 대학을 졸업했다. 숭실고 교사를 하다 3년 만에 그만뒀다. 이후 ‘주부생활’, ‘샘터’, ‘여성동아’, ‘여성조선’, ‘월간조선’에서 기자생활을 하다 1991년 마흔한 살에 나왔다. 기자로 일하던 1982년 <서울의 예수>, 1987년 <새벽편지>, 1990년 <별들은 따뜻하다>를 각각 펴냈다. 시대의 눈물 닦아야 한다는 생각에 1980~90년대 현실참여적 시 썼지만 2000년대 ‘내 눈물부터 닦자’로 변화 -1976년 김창완, 김명인, 김성영, 이동순 시인과 함께 반시(反詩)동인을 결성했지요. “1960년대 우리나라 시인들의 시는 관념적이고 난해한 시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1970년대 시인인 우리는 쉬운 일상의 우리말로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구체성에 뿌리를 내려서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죠. 제 시의 언어 재료는 일상의 쉬운 우리말이에요. 그런데 한글전용정책은 잘못됐어요. 한자를 병용하지 않으면 의미를 알 수 없는 우리말이 적지 않기 때문이에요.” -반시동인 정신의 영향으로 <서울의 예수>, <새벽편지>, <별들은 따뜻하다> 등 1980~90년대 작품에는 현실참여적 시가 주류를 이루더군요. “시인으로서 시대의 눈물을 닦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2000년대 이후에는 나 자신의 눈물도 닦지 않고 어떻게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을 수 있는가로 변화했어요. 그래서 이번 시집은 저라는 개인의 삶을 통해 다른 사람의 삶이 연결되는, 그럼으로써 인간 존재에 대한 이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할 수 있어요. 과거에는 시집에 사인해줄 때 ‘시는 우리 시대의 눈물을 닦아줍니다’라고 썼지만 요즘은 ‘시는 인간을, 인생을, 사랑을 이해하게 합니다’라고 써요.” 정호승 시인의 시 ‘명동성당’이 새겨진 서울 명동성당의 시비 / 정호승 시인 제공 -바쁜 기자생활 중에는 어떻게 시를 썼습니까. “1982년이면 제가 서른두 살이에요. 한창 감수성이 예민할 때죠. 그런데 그해에 <서울의 예수>를 발표하고 5년간 한 편도 안 쓰다가 1987년에야 한꺼번에 몰아서 썼어요. 그러니 썼다고 말하기 부끄러워요. 제 세 번째 시집인 <새벽편지>는 출근 후 점심식사를 거르고 썼어요. 1987년은 우리 현대사의 격동기잖아요. 이한열·박종철 사건을 비롯해 시대적인 죽음이 많았던 시절이죠. 시를 쓰지 않을 수 없었어요. 이후에는 또 3년이 지나서야 <별들은 따뜻하다>를 발표했고요.” -<새벽편지>에 김광석씨의 유작이 된 ‘부치지 않은 편지’의 노랫말이 된 동명시가 수록돼 있지요. 노래 가사로 쓰인 정 시인의 시가 70곡이 넘는 것으로 알아요. “100만 장 이상 음반이 판매된 이동원씨의 ‘이별노래’가 가장 히트한 곡이고요. 안치환씨의 ‘우리가 어느 별에서’, ‘인생은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 ‘풍경 달다’도 제 시로 지은 노래예요. 양희은씨의 ‘수선화에게’, 김원중씨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도 그렇고요.” -저작권료도 꽤 되겠는걸요. “아니에요. 저는 문학인이다 보니 1997년까지는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회원이 아니었어요. 그러다 1997년에 ‘부치지 않은 편지 1·2’를 담은 김광석씨 1주기 추모음반 ‘가객’이 발매됐잖아요. 음반을 기획한 백창우씨가 협회에 가입해야 저작권료를 지급할 수 있다며 가입하라더군요. 그래서 이후부터는 받았지만 이전 곡들에 대해 소급해 주지는 않죠(웃음).” ‘부치지 않은 편지’는 정 시인이 1987년 경찰의 물고문으로 사망한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생각하며 쓴 시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에 추모곡으로 쓰이기도 했다. -기자생활은 왜 그만뒀습니까. “소설에 대한 꿈이 있었어요. 제가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위령제’라는 단편소설을 큰아들 이름으로 출품해 당선됐거든요. 이후 소설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어요. 그러다 퇴직 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는데 잘 안 됐어요. 6~7년간 소설 쓴다며 아까운 시간을 허비한 거예요. 사람마다 자신의 문학적 기질에 맞는 장르가 있다는 것을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서야 깨달은 거예요. 이러다 시도 못 쓰겠다 싶어 IMF 외환위기가 발생한 1997년에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를 발표했어요.” 바지 왼쪽 주머니엔 늘 메모지 지하철·길거리서 시구 등 기록 “나에게 시는 내 영혼의 밥” -제목이 격정적이에요. “중국 당나라 때 임제 선사가 공부하는 선승들에게 하신 말씀이에요.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공부하다가 죽어버려라’라고 했죠. 저는 사랑하다가 죽어버리라는 그 말씀이 가슴에 깊게 와 닿았어요. 언젠가 시집 제목으로 삼으리라 마음먹고 있었어요.” 1998년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2000년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를 펴냈다. 2000년부터 2002년까지 3년간 출판사 ‘현대문학북스’ 대표를 맡아 위탁 경영한 것을 끝으로 그는 더 이상 직장생활은 하지 않았다. 2004년 시집 <이 짧은 시간 동안>을 펴내고부터는 3년 터울로 시집을 발표했다. -지금도 메모를 습관적으로 하나요. “제 바지의 왼쪽 호주머니 속에 항상 메모지가 들어있어요. A4용지 절반만 한 크기의 용지를 접어서 매일 아침 외출할 때 넣어두거든요. 펜은 셔츠 왼쪽 가슴에 꽂고 다니고요. 시구가 아니라도 어떤 생각들이 떠오르면 지하철에서든 길거리에서든 그때그때 기록해둬요. 며칠 지나 앞뒤로 빼곡하게 채워지면 또 다른 종이를 가지고 나가죠. 부족하면 스마트폰 메모창을 이용하고요. 그렇게 적어놓은 것을 파일로 정리해 노트북에 저장해둬요.” -시를 쓸 때 정 시인만의 루틴이 있습니까. “제목부터 정해요. 그리고 마음이 비교적 평온하고 컨디션이 좋을 때 몰아서 써요. 짧게는 3개월, 길게는 6개월 정도 시를 쓸 때의 마음은 아주 고조되거나 긴장돼 있어요. 이 기간에는 꼭 필요한 약속 아니면 외출도 잘 안 해요. 그렇게 100편 정도의 시를 써서 한 권의 시집이 나오는 거예요.” -정 시인에게 시는 한 마디로 뭔가요. “내 영혼의 밥이죠.” 올해 그에게는 뜻깊은 경사가 잇따라 생겼다. 지난 6월 6일 고 김수환 추기경(1922∼2009)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서울 명동성당에 세워진 시비(詩碑)에 정호승 시인의 시 ‘명동성당’이 한글과 영문으로 새겨졌다. 또 대구광역시는 이르면 12월, 늦으면 내년 봄에 정 시인이 고교 때까지 살던 곳에 정호승기념관을 연다.
박주연 선임기자 2022.11.25 14:28
문화/과학 김정수의 시톡
[김정수의 시톡](6)김명기 시인의 세 번째 시집ㆍ“산다는 건 그냥 어디론가 움직이는 일” 한번 오라 하는데도 가지 못한 곳이 있습니다. 그런 곳은 환한 낮이 아닌 어둑어둑 땅거미가 질 무렵 홀로 터덜터덜 찾아가야 합니다. 시인은 미리 통기라도 받은 듯, 처마 끝에 불을 밝힌 채 마루에 앉아 있겠지요. 낯선 이가 나타나도 짖을 줄 모르는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반기고, 시인의 어머니는 급히 술상을 봐 불청객을 맞이하겠지요. 그런 곳은 겉으로 드러내지 말고 마음 깊이 간직해야 마땅하지만, 새해 들어 시집을 한권 받고 보니 문득 그곳에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집니다. 김명기 시인(왼쪽)과 김명기 시인의 세 번째 시집 / 걷는사람 시인은 무엇으로 먹고사는가 경북 울진에 사는 김명기 시인(1969~ )이 세 번째 시집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를 냈습니다. 시인은 시를 쓰고, 시집을 묶는 동안 “중장비 기사에서 유기동물 구조사로 밥벌이가 바뀌었다”고 했습니다. 시만 써서 먹고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럴 수 없는 게 현실이지요. 그동안 시인은 여러 직업을 전전했는데, 그중 최악은 도축장이었다고 합니다. 거기서 시인이 한 일은 막 도축돼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올라온 지육을 거대한 냉장창고에 정리하는 일이었답니다. 지육(枝肉)이란 도축 후 머리와 내장, 족을 제거하고 각을 뜨지 않은 고기를 말합니다. 뒤집어쓴 우의 위로 핏물이 떨어지고, 그 지독하고 역겨운 냄새 때문에 후각을 상실했다고 합니다. 비염과 천식은 군식구쯤 되겠지요. 그만두고 싶어도 돌아갈 곳이 없어 막막했다고 합니다. “볼 때마다 통박을 주던 아버지마저 선산의 산감이 되고서야”(이하 ‘큰사람’) 시인은 고향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장자로 태어난 시인은 집안에서, 아니 마을에서 유일하게 대학에 갔지만 아버지의 기대엔 미치지 못했습니다. 할머니는 손자가 큰사람이 될 것이라고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을 했답니다. 시인은 “큰사람이 되기 위해 객지와 바다 위를 무시로 떠돌았지만 서른이 지나 마흔 넘도록 일에 쫓겨 다니기 일쑤”였다고 하네요. 오십이 넘어 거울 앞에 선 시인은 키 182㎝, 몸무게 100㎏이 넘는 ‘큰사람’을 발견하곤 장탄식을 내뱉었습니다. 고향에 돌아온 지 10여년 동안 시인은 낮엔 구휼미 배달하는 일과 중장비 기사, 유기동물 구조사로 밥을 벌고, 밤엔 시를 쓴 결과 첫 시집 <북평 장날 만난 체 게바라> 이후 2권의 시집을 냈습니다. 두 번째 시집 추천사를 쓴 어머니는 “시를 쓰는 네가 자랑스럽다”며 “길고 어두운 시간을 혼자 보내며 흐트러지지 않은 건 다 시 덕분”이라고 했습니다. 앞집 할매가 “동네 고예이(고양이) 다 거다 멕이고/ 집 나온 개도 거다 멕이고/ 있는 땅도 무단이 놀리고/ 그카마 밥에다 자꾸 꽃만 심는/ 느 어마이도 시인”(‘시인’)이라 했지요. 시적 감수성은 어머니의 피를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이 죽이는 일이라니 시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원양어선 3년, 도축장 1년이 생명을 거두는 일이라면 구휼미 배달 일과 유기동물 구조사는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이 모든 게 우연은 아니겠지요. 시집 2부 13편은 유기동물 구조에 관한 시입니다. 삶이 그대로 시가 된 것이지요. 유기동물 보호소에 버려진 개 한마리를 데려오면 “칠십 마리의 개가 일제히 짖”(이하 ‘유기동물 보호소’)는 것은 “슬픔이 슬픔을 알아”주기 때문이라는군요. “슬픔은 다 같이 슬퍼야 견딜 수 있다”고 합니다. 유기동물 구조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살리겠다고 내민 손을/ 해치는 줄 알고 물어”(‘손의 이력서’)버리기 일쑤라네요. 보호소에 데려온 개는 먹지도 않고 “벽에 머리를 찧으며 끊임없이”(‘악을 쓰며 짖는 개에게’) 짖어댑니다. 그러다가 결국 체념하고 친구 옆에 눕습니다. “수녀원 뒷산 공터에서 만난 파티마”(‘공터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호젓한 골짜기 초입에/ 버려졌던 검은 개 두 녀석”(‘검은 개’), “산속에 버려진 채 거머리투성이가 된 개”(‘리기다소나무 아래에서’) 등 지난해 시인이 구조한 동물이 400여마리나 됩니다. 하루에 “강아지 다섯 마리와 다리 부러진 고양이/ 한 마리를 데려다 놓”(‘버려지는 것들에 대하여’)은 적도 있습니다. 시인은 “바깥 견사에 갇힌/ 개들의 이름을 지어 주다 그만”(‘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두었습니다. 다 부질없는 일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보호소의 동물들은 입양을 기다립니다. 그런 일은 구조의 손길만큼이나 어렵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버림에 대한/ 보호소 준칙”(이하 ‘인도주의적 안락사’)은 인도주의적 안락사를 강요합니다. 시인의 고민과 갈등이 머무는 지점입니다. “버려진 목숨을 앗아 가는 일이/ 어떻게 인도주의인지 알 수 없”습니다. “사는 건 늘 그랬지” 자조하지만, 시인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구조라는 명목하에 잡아와 비좁은 견사에 가둔 생명이 “너는 (버린 놈보다) 더 나은 놈이냐 묻는 것”(이하‘검은 개’) 같습니다. “폐허 아닌 폐허”에서 “서로 낯을 익”히던 시인은 결국 지난 연말 구조사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2022년 1월 1일 ‘걷는사람’에서 세 번째 시집을 낸 시인은 요즘 걷기에 빠져 있습니다. 매일 동해안과 남해안, 섬진강변을 찾아 짧게는 2㎞, 길게는 20㎞를 걷습니다. 시인은 이를 ‘생존운동’이라 부릅니다. 살기 위해 걷는 것이지요. 시인에게 “산다는 건 그냥 어디론가/ 움직이는 일”(‘직진금지’)입니다. 오늘도 시인은 어딘가를 걷고 있겠지요. 다음 시집은 걸으며 만난 풍경과 사람들 이야기로 한층 깊어지겠지요. 시인의 말 ▲그 뼈가 아파서 울었다 이영춘 지음·실천문학사·1만원 유서 쓰듯, 혈서 쓰듯 그 한 마디를 쓰려고 애썼다. 그러나 아득했다. 시(詩)라는 신(神) 앞에서. ▲나의 머랭 선생님 김륭 지음·시인의일요일·1만원 요양병원 화단에 앉아 있던 맨드라미가 엄마, 하고 불렀다.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떠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책장 사이에 귀뚜라미가 산다 김황흠 지음·문학들·1만원 강과 나무와 풀과 귀뚜라미와 여치와 한통속으로 어울려 논다. 거기에 당신도 함께 숨 쉬고 있다. ▲침침한 저녁이 더듬어 오던 시간 김영희 지음·달아실·8000원 문장의 행간마다 시간을 역류한 언어들이 상처난 지느러미 같은 아픔이었다는 것을. ▲반과 반 사이의 여자 우중화 지음·리토피아·1만원 지나간 모든 기억에 용서를 구한다. 화해의 몸짓이 충돌한다. 그래도 여전히 흐르는 것들, 사랑하기로 한다. ▲소금의 혈연 박미영 지음·예맥·1만원 시를 알고부터 시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나를 만나기 위해 나를 흔들기 위해 나를 넘어서기 위해 시를 썼습니다.
김정수 시인 2022.01.14 15:04
문화/과학 김정수의 시톡
[김정수의 시톡](4)이 가을에 창간한 문학잡지 ‘청색종이’와 ‘한국시인’ㆍ잡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한자 잡(雜)은 참 복잡한 글자입니다. ‘섞이다, 만나다, 모으다, 함께’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한그루의 나무에 여러마리의 새가 뒤섞여 앉아 있는 모습을 본뜬 글자라 합니다. 잡종, 잡식, 잡학, 잡념, 잡담, 잡음, 잡초 등 잡은 긍정보다 부정적인 의미로 많이 쓰입니다. 순수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잡스럽고 천한 것 취급을 당했습니다. 민초(民草)의 모습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요. 문학에선 시나 소설 이외에는 잡문 취급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순수한 그것’을 잡지(雜誌)에 담았으니 참 아이러니하지요. 순수문학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둘레에 방어막을 치고는 잡의 개입을 경계했습니다. 순수에서도 수준을 나눠 끼리끼리 어울렸지요. 조선시대로 보면, 스스로 양반 행세를 하며 차별한 것이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킨 것은 잡이 아닐까요. 순수혈통을 고집하다 도태되고, 쇄국으로 나라가 망한 것은 역사가 증명하지요. 이번 가을에 창간한 문학잡지 ‘청색종이’와 ‘한국시인’이 어떤 모습을 보일지 참 궁금합니다. 청색종이 /청색종이, 한국시인 / 한국시인협회 불가능한 목적에 투신한 ‘청색종이’ 시 전문 계간지 ‘청색종이’가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창간 목적이 중요하겠지요. 발행인 김태형 시인은 “새로운 문예지를 시작하는 것은 도달할 수 없는 불가능한 목적에 투신하는 일”이라며 “불가능성을 인지하면서도 그 뒤를 쫓는 것 또한 시적인 것이라는 믿음”으로 창간했다고 밝혔습니다. 불가능한 목적이 무엇일까요? 시가 어려워지면서 독자들과 점점 멀어진다는 말을 들은 지 꽤 됐지만, 여전히 우리 삶을 따스하게 해주고 시로 위로를 받습니다. 시와 시집이 시인과 독자의 일 대 일 대화라면 잡지는 시인들과 독자들의 다 대 다 대화라 할 수 있습니다. ‘청색종이’는 “시를 통해 공동체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실천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지향한다네요. 단순히 독자들과 대화의 장(場)을 마련하는 것에서 더 나은 방향으로 공동체를 변화시키려는 목적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청색종이’가 불가능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는 지켜볼 일입니다. 창간호에 어떤 내용을 담았는지를 살펴보면 ‘청색종이’의 정체성이 어느 정도 드러납니다. 문예지의 꽃인 기획특집은 ‘시는 어떻게 새로워지는가’입니다. 시인들의 다양한 존재양식과 이들을 수용하고 연결하는 ‘시-플랫폼’의 변화를 진단하고 미래의 시의 가능성을 모색했다고 합니다. 신작소시집인 ‘시인’에서는 나희덕 시인의 신작시와 작가론을, ‘번역시’에서는 프랑시스 퐁주를 다뤘습니다. 시인들의 신작시와 시집 리뷰, 시창작 강의 등은 문학잡지의 단골 메뉴입니다. 다른 문학잡지와 차별화된 새로운 기획이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파격을 선택하기보다 기본에 충실한 문학잡지라는 뜻이지요. 내용보다는 형식이 더 눈에 띕니다. ‘시’와 ‘시학’, ‘문학’이 들어가 있지 않은 ‘청색종이’라는 제호는 신선합니다. 표지를 보면 유화 바탕에 통권 제1호와 창간호를 한자로 썼습니다. 칼럼 제목과 인용시를 2도 별색으로 인쇄를 했고요. 편집디자인에 근대적 취향을 반영했습니다. 현대의 첨단보다는 조금 거칠지만, 복고적인 편집을 반영해보고 싶었답니다. 주춧돌 하나 놓은 그 자리 ‘한국시인’ 한국시인협회는 국내 최초로 시인들이 모여 만든 단체입니다. 조지훈, 박남수, 박목월 등이 앞장섰지요. 이번에 창간한 반연간지 ‘한국시인’은 한국시인협회 기관지 겸 문예지입니다. 창간호를 표방했지만, 1957년 한국시인협회 발족과 함께 기관지 ‘현대시’를 2호까지 발간했고, 비정기적으로 ‘한국시인’을 소책자 형식으로 펴냈으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1호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그래도 의미 있는 일일 건 분명합니다. 회장 나태주 시인은 ‘창간사’에서 오랫동안 협회 기관지가 없었지만, 선뜻 나서서 만든 사람이 없었다며 “이참에 누군가 무모한 사람 하나 있어 주춧돌 하나 놓”는다고 했습니다. “세상은 세찬 강물이고 우리는 조그만 배”라고도 했습니다. 거센 물결에 배가 부서질 수 있으니 함께 힘을 보태 강을 건너자는 것이겠지요. 각 단체장의 축사도 있습니다. 구중서 전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김규화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 김용제 국제PEN한국본부 이사장, 김호운 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김후란 문학의집·서울 이사장, 이광복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이근배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이상국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최원현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등 쟁쟁한 여러 문학단체장의 자필 축사가 실려 있습니다. 김남조 시인은 ‘축시’에서 “삶이란/ 어떤 것이던가요/ 낯설은 심연에서 부침하곤/ 다음 날 그 바다로/ 또 다시 출항하던 일 아닌가요”라고 했습니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힘든 것이 삶이고 잡지 창간 또한 이와 다르지 않으니 중간에 포기하지 말라는 뜻이겠지요. 64년의 역사를 담다 보니 앞보다는 뒤를 더 돌아보게 됩니다. ‘나와 한국시인협회’에서는 이건청·신달자 전 회장의 회고담과 ‘작고시인을 그리워하며’, ‘사진 한 컷’도 과거에 손을 내밉니다. 회원들의 신작시와 신작시조, 시인의 산문, 문학관 탐방 등은 회원들의 현재를 가름할 수 있는 척도입니다. 내적 결속도 중요하겠지요. 하지만 문을 열어 잡(雜)을 수용하는 것이 어쩌면 더 중요할지 모릅니다. “남들이 보기엔/ 저 사람은 늘 저 얼굴이라 하겠지/ 적어도 내 속엔 얼굴이 여럿”이라는 이생진 시인의 시 ‘두 개의 얼굴’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시인의 말 ▲베라, 나는 아직도 울지 않네 임혜신 지음·상상인·1만원 나의 이야기를 해 주었으니 이제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비 긋는 저녁에 도착할 수 있을까? 박미라 지음·현대시학사·1만원 이루 적을 수 없는 죄가 쌓여서 나는, 제목도 없는 반성문을 쓰고 또 쓰는 어깨 처진 시인으로 복역 중이다. ▲몽실 탁구장 이동훈·학이사·1만1000원 詩도 탁구도 폼이다. 걱정이라면 폼 잡다가 재미 놓칠까 하는. ▲살어리랏다 박일만·달아실·8000원 민족상잔 때 치열한 전투도 겪었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마을, 사람은 적고 꽃들은 지천인 거기에 뼈를 묻고 싶다. ▲대티를 솔티라고 불렀다 윤희경 지음·천년의시작·1만원 매듭을 잘 풀지 못한, 몹시 불편한 채로 보낸다. 아직 발화되지 못한 기억과 사랑을 한구석에 푹 심어 두었다. 훗날, 또 꺼내 쓸 ‘좋은 약속’들이다. ▲흐르는 나비 그리고 거짓말 임상요 지음·문학의전당·1만원 동선을 바꾸고 자세를 고쳐 앉는다. 설렌다, 나 아닌 누군가도 설레게 할 수 있기를.
김정수 시인 2021.11.05 14:49
문화/생활
“시대가 스승이었다” 김남조 시인, 마지막 인터뷰 공개월간지 ‘우먼센스’는 16일 지난 7월 고인과 진행한 인터뷰를 공개했다. 김남조 시인이 지난 10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6세. 월간지 ‘우먼센스’는 16일 지난 7월 고인과 진행한 인터뷰를 공개했다. 고인은 “기억이 예전 같지 않지만 생각은 끝없이 이어져 그런대로 괜찮다. 아직도 시를 구걸하고 시에 목마르다”며 “나는 문학 공부를 한 적이 없는데도 시대가 스승이었고, 역사적 사건들이 시를 쓰도록 내 마음을 움직였다”고 말했다. 모윤숙, 노천명을 이어 해방 후 ‘여류시인’의 계보를 구축했던 시인은 구순에 이르러서도 창작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그는 “시는 어휘로 쓰는 게 아니라 뿌리까지 사유하는 힘으로 쓰는 일이며, 문학적인 책임이 뒤따른다. 시를 쓴다는 것은 타고난 재능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위대한 작가는 돌을 쪼듯이 작품들을 끊임없이 고친다”며 “나 역시 지금도 고치는 중이다. 창작의 원동력은 절실함에서 오고, 그 절실함으로 인해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다”고 전했다. 아흔이 넘은 삶에 대해서도 고백했다. 그는 “나이가 많다고 다 어른스럽다고 말할 수는 없다”며 “다른 이들의 다양한 삶을 보면서 조금씩 성숙해진 것 같다. 지금은 넘치거나 부족해도 순간순간이 다 소중하고 아름답다”고 했다. 또한 고인은 “삶은 날마다 ‘새로운 학교’라는 말이 있다. 쉽고도 바른말”이라며 “지금 시대의 젊은이들은 조급하게 무언가를 얻으려고 서두르곤 한다. 밤의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새벽이 오는 걸 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며 인생 후배들에게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한편 1927년 10월 대구에서 태어난 김남조 시인은 전쟁 중인 1951년 서울대 사범대(국문학)를 졸업했고 이후 마산고와 이화여고, 숙명여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50년 연합신문에 <성수>, <잔상>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으며 1953년 첫 시집 <목숨>을 출판하며 우리나라 문단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70년 넘게 활동했다.
김지윤 기자 2023.10.16 11:27
연예
배우 강하늘, 시인 윤동주 되다1945년으로 뛰어들어 일제강점기 속 청춘의 자화상을 그렸다. 화려한 기교나 과장 없는 그의 연기는 언제나 정직하고 담백하다. 20대의 젊은 배우 강하늘(26). 상위 1% 상속자, 빈틈없는 무역회사 신입사원부터 실존 인물인 ‘쎄시봉’ 윤형주까지. 지금껏 그가 보여준 캐릭터는 나이에 비해 매우 다양하다. 최근 tvN ‘꽃보다 청춘-아이슬란드’ 편에서 싹싹한 막내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 그가 또 한 번 실존 인물로 분했다. 이준익 감독의 신작 ‘동주’에서 그는 짧은 생을 살다 간 시인 윤동주를 연기했다. “‘다음에 윤동주 선생님을 만나뵙게 됐을 때 창피해하진 말자’라는 마음으로 임했어요. 제가 느끼고 그리며 생각한 대로 표현하려고 나름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극을 이끌어가는 중심인물은 윤동주와 그의 사촌 송몽규(박정민 분). 시인을 꿈꾸는 청년 동주에게 신념을 위해 거침없이 행동하는 청년 몽규는 가장 가까운 벗이면서도 넘기 힘든 산처럼 느껴진다.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혼란스러운 나라를 떠나 일본 유학길에 오른 두 사람. 일본으로 건너간 뒤 몽규는 더욱 독립운동에 매진하게 되고, 절망적인 순간에도 시를 쓰며 시대의 비극을 아파하던 동주와의 갈등은 점점 깊어진다. “‘실존 인물’을 연기한다는 부담감이 굉장히 컸습니다. 실존 인물이 따로 있는 상태에서 스스로도 정답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연기하는데, 보는 분들에게는 정답처럼 느껴지게 해야 한다는 게 가장 어려웠어요.” 그는 촬영 전부터 익숙지 않은 일본어와 북간도 사투리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대사에 감정을 담기 위해 외우는 게 먼저였기 때문에 냉장고 앞에 대본을 붙여놓고 일본어와 사투리가 입에 붙도록 연습에 열을 올렸다. 후쿠오카 형무소에 갇혀 점점 수척해지는 동주를 표현하기 위해 혹독한 다이어트까지 감행했다. 일본군에게 강제로 머리카락이 잘리는 장면에서는 삭발을 자처하기도 했다. “삭발에 대한 부담은 딱히 없었어요. 윤동주 선생님을 연기하는 데 있어 고작 머리 미는 것 때문에 고민할 이유가 전혀 없었죠. 다만 진짜 삭발을 하는 만큼 다시 촬영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감정으로 임할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습니다.”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매 순간 강하늘은 ‘동주’였다”라는 이 감독의 말처럼, 그는 온전히 윤동주가 돼 깊은 울림이 있는 연기를 해냈다. <■글 / 노도현 기자 ■사진 / 이소현>
2016.01.25 17:02
문화/생활
흑백영화로 만나는 시인 윤동주‘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윤동주, 그는 시인이기 이전에 빛나던 청춘이었다. ‘왕의남자’, ‘사도’의 이준익 감독이 열한 번째 연출작의 주인공으로 윤동주를 불러냈다. 영화 ‘동주’는 일제강점기 스물여덟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한 시인 윤동주의 청년기를 그린다. 아픈 역사를 관통하는 서사 속에는 ‘젊음’이 있다. 윤동주 역을 맡은 배우 강하늘.드라마 ‘미생’, 영화 ‘쎄씨봉’에서 매끄러운 연기를 보여준 배우 강하늘이 윤동주로 분한다. 시대의 아픔을 시로 써내려간 윤동주의 결연한 눈빛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그의 짧은 일생 동안 가장 가까이에서 교감했던 독립운동가 송몽규 역은 신예 박정민이 맡았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사실을 바탕으로 하지만 약간의 허구가 가미됐다. 대학시절 이성과 ‘썸’을 타고 세 남녀가 삼각관계를 이룬다는 설정이 그렇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평생의 친구이자 맞수였다. 조금 낯선 인물인 송몽규는 윤동주의 고종사촌이다. 동갑내기인 둘은 유독 죽이 잘 맞았다.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를 같이 다녔고 일본 유학생활을 할 때도 함께였다. 주권 없는 나라의 국민으로 산다는 것은 그들에게 상당한 고민을 안겨줬다. 1943년 두 사람은 조선 독립과 민족문화 수호를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돼 이듬해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됐다.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옥사했고, 그가 떠난 지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은 3월 7일 송몽규 역시 옥중에서 생을 마감했다. 왼쪽부터 배우 박정민, 강하늘, 이준익 감독.이 영화는 화려한 색감을 자랑하는 영화들이 속속 등장하는 요즘 세상에 흑백 화면으로 제작된 점이 독특하다. 이준익 감독은 “흑백 사진으로만 봐오던 윤동주 시인과 송몽규 열사의 모습을 최대한 담백하고 정중하게 표현하기 위해 흑백 화면을 선택했다”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평생을 함께한 두 사람이 시대를 이겨낸 과정을 영화로 담고 싶다는 바람 하나로 시작했다. 71년 전 아파하고 고민했던 청년 윤동주와 그의 오랜 벗 송몽규의 이야기가 오늘을 살아가는 청춘들에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갈 것이라 생각한다”라는 말도 함께 전했다. 영화는 2월 18일 개봉한다. <■글 / 노도현 기자 ■사진 제공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2016.01.12 17:40
화제
문정희·유인경, 시인 대표와 기자 대표가 만나 여자의 몸을 이야기하다앉은 자리에서 커피 넉 잔은 기본으로 마시면서 지난겨울 주말을 눈물과 웃음으로 함께했던 두 사람은 아직도 할 말이 많은지 마주한 두 눈에서 창창한 빛이 났다. 실컷 전화 통화를 하고는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하자”라는 엄마의 익숙한 인사말처럼 두 사람의 ‘가성비’ 높은 대화는 앞으로도 죽 이어질 거라는 바람 섞인 예상을 던져본다. 수차례 진행된 대담이 이렇게 한 계절 만에 책으로 나오는 건 출판계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다. 묵히고 고치고 되쓰기를 반복하는 보통 작가들의 버릇은 말해 무엇 할까. 그러나 준비는 진작부터 돼 있었다. 아는 것만큼 쌓인 무수한 경험을 능란하게 꺼내놓을 줄 아는 시인 문정희(68)와 평생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 인터뷰를 하고 마감과 사투를 벌이면서도 활발한 저작 활동을 해온 부지런한 기자 유인경(56)이 만났으니, 의기투합의 그 순간 이미 도화선에 불이 붙은 셈이었다. 믿음직한 의기투합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시를 쓰는 시인이시잖아요? 선생님의 시는 남녀 모두에게 애송되는데, 어쩌면 너무 편한 말로 묘사를 하니 ‘맞아 맞아’ 하는 공감에서 끝나는 점이 아쉬웠어요. 그 속에 담긴 함의나 상징, 시대를 파악하는 힘에 대해 함께 얘기해보고 싶어서 프러포즈를 했죠.” (유인경) 올해로 등단 46주년을 맞은 문정희 시인은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맡아 바쁜 와중에도 “어느 문학 기자보다 시를 읽을 줄 아는, 예쁘고 머리가 좋은” 유인경 기자와 손을 맞잡았다. 그렇게 해서 여자의 몸에 대한 두 여자의 유쾌한 탐구가 담긴 책 「여자의 몸」이 탄생할 수 있었다. “그동안 여성의 몸을 주제로 여성의 삶에 대해 썼고 그것이 때로는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생명주의라는 이름으로 기술되곤 했지만 최근에야말로 여성의 몸이 정말 중요한 테마가 됐어요. 여성의 몸이 본래의 생명성을 유지하지 못한 채 자본주의 시각에 의해 폭력 당하고 상처 입은 존재로 회자되고 있거든요.” (문정희) 모처럼 만나 서로에 대한 칭찬으로 점잖게 시작됐던 대화는 이내 만연한 성형의 대상, 과도한 다이어트와 성도구로 인식되는 여자의 몸에 대한 대중문화 전반에 걸친 왜곡을 향한 성토로 이어졌다. 한국사와 세계사, 문학사, 여성학, 미술사 등의 경계를 솜씨좋게 넘나드는 영양가 높은 대화 속에 귀를 솔깃하게 하는 ‘비편집용’ 수다까지, 언니들의 이야기는 책 속에서든 책 밖에서든 거침이 없었다. “사실 이 책은 편집이 너무 우아하게 됐어요”라고 말하는 문정희 시인의 의중을 어렵잖게 알 수 있었다. “10분 일하고 50분 떠들고 갔다”라고 할 정도로 지난겨울의 대담은 공과 사를 리듬감있게 오가며 스스로 속력을 냈다. 특유의 내밀함 탓에 누구에게도 녹취 작업을 맡길 수 없었던 대화록은 ‘마감 전문가’ 유인경 기자에 의해 단 하루 만에 요약 정리돼 다시 문정희 시인에게 전해졌다. 입에서 단내가 나는 고된 작업이었지만, 중독된 듯 주말을 기다리는 시간이 이어졌다. 빙판길에 넘어져 뇌진탕 증세가 나타났음에도 유인경 기자가 어김없이 약속 장소로 달려간 데에는 다 그럴 만한 흥이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께서 기억력이 어마어마하게 좋으세요. 놀라운 데이터를 가지고 계시죠. 첫 인터뷰를 하고 나서 제가 딸내미에게 ‘엄마가 얼마나 무식한지 뼈저리게 느꼈어. 족집게 과외 선생님 모셔다가 공부하는 기분이야’라고 했어요. 행복한 충격이죠. 이 나이에 이렇게 행복을 자극받을 수 있다는 건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유인경) 데시벨을 높이며 세상을 향한 쓴소리를 함께 던지기도 했지만, 가장 격한 대화가 오갔던 대목은 모성을 주제로 한 대목이었다. 각각 어엿한 사회인으로 성장한 자녀들을 두고 있지만 아직도 엄마 이야기는 중년을 울컥하게 한다. 그날도 셰에라자드 저리 가라 할 문정희 시인이 꺼내놓은 우화를 듣던 유인경 기자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 제자로 받아주길 청하는 여우와 원숭이, 토끼에게 부처가 먹을 것을 가져오라고 하자 원숭이는 도토리를, 여우는 나물을 뜯어왔는데 토끼는 “부처님, 제가 익거든 드시지요”라며 모닥불에 뛰어들었고 그 순간 부처가 됐다는 내용이었다. “우리가 뛰어들기를 바라는 모닥불이 꽤 있어요. 뛰어들어서 먹혀야만 될 때도 있더라고요. 결혼생활도, 사회생활도 그렇고요. 아마 그때 뭔가 욱 했었나 봐요.” (유인경) 대화 잘 통하는 상대와 마주하면 나도 모르게 꿍쳐뒀던 속내를 꺼내놓게 된다. 그리고 그 힘은 어떠한 치유의 능력보다 강력할 때가 있다. 성과 에로스를 주제로 시작한 대화는 모성, 억압을 거쳐 생명 주체로 이어지는 가운데 틈틈이 의외의 고백도 툭툭 튀어나온다. 스물여덟 살에 맞선을 본 남자와 첫 키스를 했는데, 그가 지금의 남편이라든가. 합리적인 결혼 제도를 통과했듯이 합리적인 이혼 제도를 통과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이번 생은 그냥 덮기로 했다든가…. 닮고 싶은 언니가 들려주는 우리의 이야기 「여자의 몸」의 매력으로 단언컨대 시인의 코멘트와 함께 문정희 시인의 시를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을 들고 싶다. 시를 즐겨 읽지 않는 이들도 금세 마음의 빗장을 풀고 쉬 동화되는 시를 쓰는 시인의 화법은 딱 그 시만큼 재치 있고 담백하다. 여기에 다년간 방송을 통해 인정받은 유인경 기자의 유효적절한 입담은 환상의 호흡이란 이런 것이란 걸 보여준다. “삶의 태도를 배울 수 있는 정말 매력적인 선배를 한 분 아는 거잖아요? 정말 지혜로운 분이라는 건 느꼈어도 저보다 나이 많은 분이라는 건 못 느꼈던 거 같아요. 방어벽이 생기면 얘기가 잘 안 나오거든요. 내가 이 얘기를 하면 선생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라는 방어기제가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었어요. 물론 우리는 만나면 ‘선생님, 요즘 무슨 책 읽으세요?’가 아닌 ‘반지 새로 사셨네요?’를 먼저 묻기는 해요(웃음).” (유인경) 공통분모를 굳이 나열하자면, 다섯 손가락 이상은 너끈히 꼽을 수 있겠지만 이번 인터뷰를 통해 확인한 닮은 모양은 두 사람 모두 각자의 직업이 가진 프레임을 깨는 인물이라는 점이었다. 후배라는 특혜 덕분에 “지금껏 이런 여기자는 없었잖아요!”라고 면전에서 말할 수 있었지만, 유인경 기자만큼 다양한 세대와 계층을 아우르는 공감의 수다력을 가진 신문기자는 한동안 찾기 힘들 것이다. 이미 30년 전 한여름에 부츠를 신고 볼드한 팔찌를 하고 나섰다가 ‘간통죄에 걸려 수갑 찼느냐?’라는 동료들의 웃기지도 않는 농담을 받아왔던 문정희 시인 역시 문학계의 돌연변이이다. 어쩌면 선배 세대가 불안해했던 후배들이었던 그녀들은 애초부터 뻔한 훈계는 사절이었다. 멋을 아는 패셔너블한 선배들이라서, 다시 태어나도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는 언니들이라서, “여자라서 행복하다”라는 말이 진심으로 들린다. “전에 「대한민국 남자들이 원하는 것」이란 책을 썼어요. 읽어본 사람들은 재미있다고 하는데, 남자들은 좀 불편해했어요. ‘당신들은 겉으로는 왕자처럼 보이지만 속은 아기야’라고 위로를 해줘도 그렇더라고요. 마치 기분 나쁜 건강진단서를 받은 것 같다는 거예요. 여성들도 읽었으면 했는데, 정작 여자들은 남편으로서 남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요. 반면 ‘남자에게 사랑받는 법’을 담은 책은 불티 나요.” (유인경) 그럼 남자의 몸에 대한 책도 나오는 거냐는 질문에 두 사람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많은 남자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자격 미달이라나. 우리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 베스트셀러 목록을 채웠던 숱한 자기계발서와 인문학 열풍을 타고 출간된 영양가 있다는 책들은 대부분 남성 저자의 남성 시각의 글이었다. 여성 자기계발서에는 왜 그리 결혼과 연애와 커리어에 대한 얘기투성이인지. 「여자의 몸」을 보면서 노는 듯이 공부할 수 있는 책을 만난 것 같았던 건 순전히 기자 혼자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듯한 명쾌한 대담 틈틈이 등장하는 시 전문과 그림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참 많은 책을 읽고, 많은 생각을 하고, 많은 세계를 돌아보고 온 사람다운 묵직함이 고스란히 책의 무게로 느껴졌는데, 그나마도 ‘잘난 척해서 잘 읽히지 않을 것 같은 부분’은 많이 들어낸 것이라고. 유인경 기자는 “서로 오래 살아오면서 채워온 저장고에서 하나씩 꺼낸 것 같다”라고 거들었다. 어쩌면 젊은 독자들이 기대하는 것은 언니들의 조언일 텐데, 오히려 두 사람은 그 점을 경계했다고 입을 모았다. “여성의 몸이라는 게 인류의 대지이고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을 얘기하면 여성의 몸을 함부로 다루지 않고 여성 스스로도 그렇게 (자본주의 시각에 의해 휘둘리는) 치졸한 삶을 안 살지 않겠나, 하는 것이 궁극적인 제 대담의 목적이죠. 하지만 대담 형식이다 보니 계몽과 교훈을 내포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엄청 경계했어요.” (문정희) 하지만 포인트를 콕 집어주는 이가 없어도 마지막까지 책장을 넘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저마다의 가슴에 담아가게 된다. 대담을 마치며 문정희 시인은 “유인경 기자께서 현재의 시간을 이해하고 공감해주셨다”라고 말했다. 대담의 시간은 그들만의 과거도, 계몽의 미래도 아닌 현재였다. 진작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을 꺼내놓았다. 50대가 넘으면 좀 편해지나요? “출산, 육아 등에서 편해질 수도 있을 거고, 남편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다가 편해지는 것도 있을 거고, 내 몸을 포기하는 것도 있겠지만… 50대쯤 되니까 내가 나를 받아들이게 된다고 할까요? 다른 사람과의 싸움이 아니라 나와의 싸움은 하염없이 있어요. 그런데 50이 넘어가면서 ‘세상이 이렇게 나에게 상처를 주는데 왜 나까지 나를 괴롭히는 거지? 괴롭혀도 발전이 없는데?’ 하고 바뀌었어요. 나라도 나를 좀 괜찮다고 해줘야겠다고, 이 정도면 잘하고 있다고 다독여주는 거죠.” (유인경) 예전에는 맨날 최선이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살았는데, 요새는 한 가지면 된다고 짐짓 모든 욕심을 내려놓은 듯 말하는 문정희 시인. 그 한 가지는 ‘시 제일 잘 쓰는 여자’다. 그 점에서는 아직 해방이 안 됐다며 샐쭉 엷은 미소를 지었다. “젊음이라는 걸 나이나 외형에만 두면 우리는 무척이나 짧은 삶을 살 수밖에 없어요. 스물아홉을 넘으면 누구나 젊다고 큰 소리로 얘기할 수 없는 세상. 그럼 그때까지만 짧게 젊음을 살고 그 이후부터 70, 80년을 늙음과 열등감과 그늘에서 살아야 하나요? 이게 무슨 어리석은 짓이에요?” (문정희) 인간이 성장하는 방식은 많다. 경험이 인간을 성장시킬 수도 있고 시간이 인간에게 주는 지혜도 크다.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청했다. 문정희 시인은 그 시간을 통해 오면서 활자매체, 문자를 통해 닦인 사람이 제일 아름답다고 말했다. “어떠한 실패나 좌절을 통해서도 정신의 내공은 얻어지지만 그것을 문체화하는 과정이 중요해요. 언어의 용량을 키우려면, 독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젊었을 때는 젊음에 가려져서 잘 모르겠지만 나이가 들수록 문어체에 의해 닦인 사람이 향기가 묻어나요. 안 그러면 수다에 불과하기 십상이지요.” (문정희)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 몸을 옷감처럼 잘랐다가 붙였다가 하는 세상에서 영혼까지 잃어가는데, 그럼에도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정형화된 여자로 살지 말고 자유로운 존재로 살자는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우리 스스로에게 다짐한 얘기이기도 하고요.” (유인경) 인터뷰 내내 분당 100번 이상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다. 「여자의 몸」의 책장을 덮으며 슬슬 테이블을 정리할 무렵, 유인경 기자는 혼자 듣기 아까웠던 문정희 시인의 말을 같이 들을 수 있게 돼 좋다며 예의 상대까지 따라 웃게 만드는 그 웃음을 터뜨렸다. 남편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문정희 시인은… 고교 시절 각종 백일장을 석권하며 일찌감치 문단의 전설이 됐다. 여고생으로 한국 최초로 시집 「꽃숨」을 내놓은 이후 「응」, 「다산의 처녀」, 「남자를 위하여」 등을 펴냈고 다수의 시가 독일, 프랑스, 스페인 등에서 번역됐다. 2010년에는 스웨덴의 문학상인 시카다상을 수상했고 곧 러시아판 시집 출간을 앞두고 있다. 고려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에 이어 현재 한국시인협회 회장과 동국대학교 석좌교수를 맡고 있다. “유인경이라고 하면 이 시대 대표적인 여기자이고, 이 시대가 갖고 있는 감수성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면서 굉장히 적절한 언어로 각계각층의 수많은 인물을 인터뷰해오고 있는 기자죠. 그런데 실제로 만나보니 얼마나 겸손하고 심할 정도로 자기를 낮추던지, 자칫 방심하다가는 거기에 속겠더라고요(웃음).” 유인경 기자는… 경향신문 편집국 부국장 겸 선임기자. 30여 년을 현장에서 뛴 공력은 각계각층 어떤 인물을 만나도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기명 인터뷰 칼럼에서 빛을 발한다. 「내일도 출근하는 딸에게」, 「이제는 나를 위해서만」 등의 저작 활동뿐만 아니라 방송 출연과 강의 활동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며 젊은 여성들이 닮고 싶은 멘토로 자리 잡았다. “‘찔레꽃’부터 시작해서 선생님의 시는 다루지 않은 주제가 없는데 왜 그에 합당한 평가가 안 나올까. 여성 시인이어서 그럴까, 하고 내내 아쉬웠는데 결론은 시대를 너무 앞서가신 거예요. ‘공항에서 쓴 편지’를 보면 일찌감치 주부 안식년을 다뤘어요. 몇 년 뒤에 ‘엄마가 뿔났다’라는 드라마로 나오기도 했죠. 또 ‘유방’, ‘탯줄’, ‘거웃’ 등 여성 몸의 부위부위 잔혹한 여성사가 다 담긴 시를 쓰셨고요. 선생님의 시를 본격적으로 다루다 보니 온갖 주제가 다 들어가게 된 거죠.” <■글 / 장회정 기자 ■사진 / 박재찬 ■장소 협찬 / 그랜드하얏트 서울>
2015.06.29 10: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