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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장FC 넘버9 잊지 않을게”···부펜자 향한 애도 쏟아져, 에이전트는 ‘용병 정신건강’ 지원 필요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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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장FC 넘버9 잊지 않을게”···부펜자 향한 애도 쏟아져, 에이전트는 ‘용병 정신건강’ 지원 필요 역설

      저장FC 팬들이 사망한 부펜자를 애도하고 있다. 저장 홈페이지 중국 프로축구에서 뛰는 가봉 국가대표 공격수 아론 부펜자가 거주지 건물에서 떨어져 2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중국 축구팬들이 부펜자를 향한 추모의 물결을 이루는 가운데, 그의 에이전트가 선수들의 정신건강을 돌볼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가봉축구협회는 17일 성명을 통해 부펜자가 전날 중국의 거주지 아파트 11층에서 추락해 사망했다고 알렸다. 이어 “부펜자는 카메룬에서 열린 2021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 입지를 굳힌 위대한 스트라이커로 기억될 것”이라며 “우리 협회와 가봉 축구계는 그의 가족에게 진심으로 애도를 표한다”고 덧붙였다. 신화통신은 “경찰이 현장 조사, 심문, 영상 분석 등을 통해 사망 원인이 아파트 발코니에서 추락한 것을 확인했으며, 타살 가능성은 배제했다”고 전했다. 1996년생인 부펜자는 자국 클럽 CF무나나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한 뒤 프랑스, 포르투갈, 튀르키예,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미국 등의 팀에서 뛰었다. 저장FC 팬들이 구단 훈련장에 부펜자를 애도하는 꽃과 메시지를 전했다. 저장 홈페이지 프랑스 보르도에서 뛸땐 황의조와 한솥밥을 먹기도 했다. 그는 튀르키예 하타이스포르 소속이던 2020-21시즌에는 쉬페르 리그 36경기에서 22골을 터트려 득점왕을 차지했다. 지난해 미국 FC 신시내티를 떠나 루마니아의 라피드 부쿠레슈티에서 잠시 뛴 부펜자는 올해부터 중국 슈퍼리그 저장 유니폼을 입고 활약 중이었다. 부펜자는 2016년부터 가봉 국가대표로도 활약하며 35경기에 출전해 8골을 넣었다. 중국 항저우를 연고로 하는 저장FC는 부펜자가 사망한 이날, 메이저우와의 슈퍼리그 홈 경기를 정상적으로 치렀다. 저장 홈팬들은 부펜자의 이름을 외치고 그를 추모하며 휴대전화 플래시로 명복을 빌었다. 17일에는 구단 공식 홈페이지에 부펜자를 추모하는 코너를 마련했으며 구단 훈련장 앞에는 많은 팬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모였다. 팬들은 “저장의 영원한 넘버9로 기억하겠다” “저장을 위한 헌신과 땀을 잊지 않겠다” “편히 쉬세요. 우리의 전사” “황룡의 바람이 영원히 당신의 이름을 노래하길 바란다” 등 추모의 메시지를 쏟아내고 있다. 저장FC 부펜자. 왕이닷컴 캡처 한편 부펜자의 에이전트는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부펜자를 애도하면서 선수들의 정신 건강 문제를 더 돌봐야 한다고 썼다. 그는 “아프리카 청소년이 살아남기 위해 해외로 떠났다. (돈을 벌어 보내야할)가족은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고, 클럽은 외국 선수를 꼭두각시처럼 대한다. 언론은 실수를 비난하고, 팬들도 응원 대신 야유를 보낼때 숨쉴 여유가 어디 있겠냐”면서 타지 생활을 힘겹게 하는 외국 선수들의 정신 건강 문제를 살펴 지원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편히 쉬어 아론, 당신이 홀로 견뎌낸 고통을 너무 늦게 알아 미안하다”며 추모했다.

      양승남 기자 2025.04.17 17:02

    • 판타지 보이즈 이한빈, 외조부상으로 스케줄 불참 “깊은 애도와 따뜻한 위로 부탁”

      연예

      판타지 보이즈 이한빈, 외조부상으로 스케줄 불참 “깊은 애도와 따뜻한 위로 부탁”

      판타지 보이즈 이한빈이 외조부상을 당했다. 소속사 포켓돌스튜디오는 “판타지 보이즈 멤버 이한빈의 외조부께서 별세하셨다”며 “깊은 애도를 표하며 안타까운 부고 소식을 전한다”고 밝혔다. 이어 ”이에 따라 이한빈은 12일, 13일 양일간 진행 예정이던 앨범 발매 기념 팬사인회 일정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끝으로 기다려주신 팬 여러분들께 너그러운 양해를 부탁드린다”며 “한빈 군이 충분한 애도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따뜻한 위로와 배려를 부탁드린다”고 덧붙였다. 한편 판타지 보이즈는 최근 네 번째 미니앨범을 발매하고 ’Undeniable‘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강석봉 기자 2025.04.12 21:42

    • R.마드리드 이끈 ‘네덜란드 명장’ 베인하커르 별세···레알 “역사적인 감독 애도”

      축구

      R.마드리드 이끈 ‘네덜란드 명장’ 베인하커르 별세···레알 “역사적인 감독 애도

      레알 마드리드가 베인하커르 전 감독의 사망을 애도했다. 레알 마드리드 SNS 네덜란드를 대표했던 명 감독으로 레알 마드리드 등을 지휘했던 레오 베인하커르가 별세했다. 향년 82세. 레알 마드리드는 11일 “1986년부터 1989년까지, 그리고 1992년 우리 팀을 이끈 역사적인 레알 마드리드 감독 레오 베인하커의 죽음을 깊이 애도한다”면서 “우리는 그의 가족, 그의 클럽, 그리고 그의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애도와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고 밝혔다. 베인하커르는 레알 마드리드에서 4시즌 동안 리그 타이틀 3회, 코파 델 레이 타이틀 1회, 스페인 슈퍼컵 타이틀 2회를 달성하며 감독으로서 최고 전성기를 누렸다. 그는 프로 선수 경력은 없으나 20대 초반부터 지도자를 시작해 40년 넘게 왕성하게 감독으로 활동했다. 1965년 네덜란드 하부리그 SV에페 감독을 시작으로 2007년까지 40년 넘게 수많은 클럽과 국가대표팀을 지도하며 감독으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네덜란드 페예노르트, 아약스 등의 클럽과 네덜란드, 사우디아라비아, 트리니다드 토바고, 폴란드 국가대표팀을 지도했다.

      양승남 기자 2025.04.11 08:43

    • JYP, 미얀마에 3억 기부···“깊은 애도 표해”

      연예

      JYP, 미얀마에 3억 기부···“깊은 애도 표해”

      미얀마 강진 피해 아동 대상 긴급 지원 EDM 사회공헌 누적 아동 지원 3167명 월드비전과 협력 재난 대응 지속 추진 JYP의 수장 박진영. 광고 영상 캡처 JYP엔터테인먼트가 미얀마 강진 피해 지역 아동과 주민을 위한 긴급 구호 활동에 3억원을 기부했다. 이번 기부는 국제구호개발NGO 월드비전을 통해 전달됐다. 기부금은 미얀마 만달레이 주 내 11개 마을을 대상으로 긴급 식량과 생필품 식수 위생 설비 아동 치료비 심리 사회적 지원 등에 사용된다. JYP엔터테인먼트는 “지진으로 희생된 분들과 유가족 그리고 삶의 터전을 잃은 모든 분들에게 깊은 애도를 표한다”며 “아동과 가족이 하루빨리 재난 상황을 벗어나 일상과 건강을 회복하길 바란다”고 했다. JYP엔터테인먼트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활동으로 ‘EDM(Every Dream Matters)’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다. EDM 치료비 지원 사업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국내외 환아와 가족에게 치료비를 지원하는 사회공헌 활동이다. 2020년부터 현재까지 본사 기준 51억5000만원 일본 지사 기준 4800만 엔의 기부금을 통해 총 3167명의 국내외 아동이 지원을 받았다. 지원국에는 몽골 방글라데시 베트남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태국 필리핀 멕시코 브라질 등이 포함된다. JYP엔터테인먼트는 앞서 코로나19 확산 방지 성금 5억원 강원 경북 산불 피해 지원 3억원 튀르키예 시리아 대지진 긴급 구호 5억원 경남 경북 산불 피해 아동 및 이재민 지원 5억원 등 지속적인 기부를 이어왔다. 월드비전은 EDM 치료비 지원 사업의 공식 파트너 기관으로 이번 미얀마 긴급 구호에서도 실질적인 현장 대응을 맡고 있다.

      이선명 기자 2025.04.09 10:45

  • 주간경향

    • [꼬다리] 애도, 추모 그리고 시작

      사회 꼬다리

      [꼬다리] 애도, 추모 그리고 시작

      지난 1월 3일 전남 무안국제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현장 / 권도현 기자 지금도 눈에 아른거리는 후배가 지난해 12월 29일 참사가 난 제주항공 여객기에 타고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이어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다. 그리고 일주일이 흘렀다. 지난해 12월 29일은 여객기 참사로 아침을 시작했다. 사망자 숫자가 늘어나는 속보를 보면서 생존자도 더 늘어나길 그저 바랐다. 참사 희생자 중 지인이 있다는 소식은 누군가에게 머리를 심하게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었다. 취업준비생 시절 원하던 바를 이루기 위해 밤을 새워가며 준비하던 후배였다. 너무 많은 인원이 타고 있었으니 뭔가 잘못 파악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아직 신원 확인이 되지 않았다는 말에 더욱 그렇게 믿고 싶었다. 후배에게 전화하니 응답은 없고 연결음만 무심히 울렸다. 원하던 바를 이룬 후배와는 일하는 지역이 멀어지면서 어느샌가 안부가 뜸했다. 목소리가 참 듣고 싶었다. 신원 확인 등 수습작업 때문에 유족들은 마냥 슬퍼할 수도 없었다. 후배의 신원 확인도 하루가 꼬박 걸렸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나서야 빈소가 마련됐다. 유족들은 마지막 남은 이성의 끈을 부여잡고 정부와 원활한 소통, 참사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온전히 애도하고 추모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해결하고 지켜봐야 할 사안이 많다. 참사 원인과 책임규명 등이다. 마음속의 애도 기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후배가 사고가 난 여객기에 탑승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 3시간 20여분이 지났을 때 할아버지의 부고를 들었다. 후배 소식만큼이나 갑작스러운 부고였다. 고령이었어도 돌아가실 정도로 건강이 나빴는지 몰랐다. 노인병원으로 옮긴 지 보름쯤 됐다. 나는 12·3 비상계엄 사태로 온 신경을 취재에 집중하고 있을 때라 할아버지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는 것도 몰랐다. 파도처럼 밀려온 슬픈 감정은 어릴 때 할아버지와 함께한 추억이 떠올라서라기보다 세월이 흘러 바쁘다는 이유로 찾아뵌 기억마저 가물가물해졌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떠나고 20여년 동안 성당에 나가셨다고 했다. 그전에는 한 번도 나간 적 없는 성당을 열심히 다니셨다고 했다. 할머니를 떠나보내고 어딘가 기댈 곳이 필요하셨구나, 마음을 헤아려 봤다. 도토리묵을 좋아하시는 줄 알았는데 그건 치아가 성치 않아서였단다. 신경숙 작가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에서 엄마의 실종 사실을 알리려고 엄마에 대한 기억을 되새기다 그제야 알고 있는 게 너무 없음을 깨닫는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연이은 비보를 접하면서 주변을 더 둘러보게 된다. 영화 <오베라는 남자>에서 어린 오베는 처음으로 엄마의 죽음을 맞이한다. 교회에서 엄마를 추모하고 나오면서 오베가 본 장면은 같은 공간에서 결혼하는 한 쌍의 부부 모습이다. 한 공간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하기도 하고 저물기도 한다. 오베가 읊조린 것처럼 영원한 건 없다. 그러니 이 순간을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나아가는 수밖에. 감정을 덜어낸 끝에는 시작이 있을 거다. 떠난 이들을 온 마음 다해 애도하면서 다음 단계로 건강하게 나아갈 수 있기를, 또 그런 여건이 이른 시일 내에 마련되길 바란다. 마침 한 해가 저물고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됐다.

      유선희 기자 2025.01.10 15:30

    • [이주영의 연뮤덕질기](36) 조각난 꿈에 대한 애도와 위로

      문화/과학 이주영의 연뮤 덕질기

      [이주영의 연뮤덕질기](36) 조각난 꿈에 대한 애도와 위로

      연극 <붉은 웃음>·<전시의 공무원>, 뮤지컬 <홀리 이노센트> 등 연극 <붉은 웃음>의 120년 시공간이 융합된 무대 위에서 1인다역 중인 윤성원 배우. 더줌아트센터 ‘청운(靑雲)’은 ‘이상(理想)’을 의미한다. ‘청운의 꿈’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청년기의 보석 같은 가능성이다. 누구나 한번은 큰 포부를 품고 나아간다. 그러나 한국 청년들의 현실은 암울하다. 청년 세대(19∼34세)의 5%인 54만여명이 고립·은둔자(한국보건사회연구원 고립·은둔 청년 실태조사 연구, 2021)에 속한다. 1인 가구 급증과 만연한 전세사기, 주식과 비트코인 급등락 등 불안정한 경제·사회 속 장기화한 고용불안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들 중 ‘청년 고독사’로 이어지는 경우도 매년 늘어 국가 차원의 대책 마련도 시급하다. ‘청운의 꿈’을 꾸어야 할 청년세대가 도대체 왜 고독사로 몰리고 있는 것일까? 창작 초연 연극 <붉은 웃음>(김정 연출·하수민 재창작·남경식 무대)은 2024년 11월 은둔·고립 청년의 심연을 들여다보면서 시작한다. <붉은 웃음>은 전쟁의 참상을 세밀하게 느낀 레오니트 안드레예프(1871~1919)의 소설을 2024년 한국에 빗대어 재창작한 1인극이다. 흙이 가득 채워진, 원초적이고 회화적인 무대는 두 개의 시공간으로 나뉜다. 왼쪽은 2024년 한국 청년의 고독사 현장으로 검은 봉지가 산처럼 쌓여 있다. 오른쪽은 1904년 러·일전쟁에서 두 다리를 잃고 생환한 러시아 장교의 고독사 현장으로 백지 원고가 쌓여 있다. 120년의 시공간을 넘나들며 배우 윤성원은 과거와 현재 청년들의 심연을 여러 캐릭터로 대변한다. 극단적 개인화의 늪과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전쟁의 광기가 폭력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이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행사했는지 감각적으로 파고든다. 마치 그 시대, 그 캐릭터에 접신한 듯 냉철하고 광적이다. 새로운 양식의 예술적 씻김 2024년 유품 관리사로 분한 윤성원 배우는 흙더미 깊숙이 파묻힌 고인의 유품을 발굴하며 그의 고독과 공포를 되새긴다. 무대 뒤 가득 ‘내가 없어지면 누가 날 찾을까, 지금 보고 싶은 사람 없음, 먹고 싶은 것 던킨도너츠’ 등 고독사한 청년들의 파편이 여러 필체로 영사된다. ‘가장 하고 싶은 것은 버스 타고 출근해서 일하는 것’이라는 속내가 드러나자 관객들은 비애를 삼킨다. 러·일전쟁에서 아군끼리 싸워 두 다리를 잃고 말라 죽어간 장교의 동생으로 분한 윤성원 배우는 잉크 없는 펜으로 수십장 기록한 형의 ‘백지 절규’를 흡입한다. 각 시공간의 폭력적 현실에 자아를 놓아버린 청년들의 심연은 윤성원 배우를 매개로 강렬한 신체 움직임과 발성을 통해 관객들의 심연과 맞닿는다. 흙더미를 파헤치며 구르거나 박차고 뛰어오르는 현대무용처럼, 혹은 발작처럼 반복되는 움직임은 천장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 속에서 전환기를 맞는다. 관객과 상호작용을 통해 매회 조금씩 다르게 재해석되는 (이승에 맺힌 원한을 씻고 극락에 가도록 이끄는) ‘예술적 씻김’이다. 연극 <전시의 공무원>에서 본분에 충실하려는 말단공무원 갑순(김려은 분)과 갑돌(김시유 분). ㈜파인플레이 연극 <전시의 공무원>(오세혁 작·변영진 연출·박성민 무대)에도 특별한 씻김이 등장한다. 여기서 애도하는 대상은 국가가 학살한 민간인과 위선 속에서 꿈을 상실한 주인공이다. 해방된 한반도에서 청운의 꿈을 안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갑돌(김시유 분)과 갑순(김려은 분)은 일제강점기 공무원으로 살며 회한만 남긴 부모 세대의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으리라 결심한다. 한국전쟁 발발과 동시에 대통령 포함 고위 공직자들이 탄 피란 열차에 탑승해 위선으로 가득한 그들의 지시에 따르던 갑돌과 갑순은 보도연맹 명단에 있는 농부들을 학살하라는 지시에 고민하던 중 그들의 무고함을 깨닫는다. 성실하고 순박한 갑순과 갑돌은 장애가 있는 양민들을 부축하고 서로 부족한 것을 메꾸며 온기 가득한 피란 행렬을 이끌던 중 연합군의 경북 칠곡 다리 폭파 작전에 휩쓸린다. 민간인들이 모두 연합군과 국군에게 학살되는 현장을 목도해야 했던 갑순과 갑돌은 이들을 대신하는 무명천 인형들의 조각난 신체를 이어붙이며 통곡의 씻김을 수행한다. 기밀문서를 보관해 위정자의 기만을 폭로하려 한 갑순에게 위에서 시키는 대로 총구를 겨눈 갑돌의 딜레마도 잠깐, 결국 모두 죽음에 이른다. 출연진들이 관객과 무릎을 맞대며 격렬한 신체 연극으로 풀어낸 비애의 마당극은 모든 악기가 총동원되는 장엄한 한판으로 애도의 퍼포먼스를 마무리한다. 스크린으로 확장된 청춘의 비애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최양현 작·영상, 이태린 연출)는 일제강점기, 태평양전쟁을 배경으로 전북 남원 서도리 출신 스무 살 소년의 꿈이 어떻게 상실되는지 ‘극중극’으로 담아낸다. 첫 장면은 2023년 북 토크 현장이다. 노년의 최영우가 남긴 육필 원고를 다듬어 출간한 현재의 작가이며 최영우 외손자 이경현(김세환 분)이 최영우(김세환 1인2역)의 파란만장한 삶을 전하며 본격적인 라이브 필름 퍼포먼스 공간으로 전환된다. 사방에 라이브 캠을 들고 있는 카메라맨이 돌아다니고 배우들과 건물 및 인체 모형을 섬세하게 재현한 디오라마(diorama)와 무대 위 등장인물, 자료화면이 스크린에 실시간 상연된다. 일반 연극과 달리 등장인물의 감정이 시시각각 클로즈업돼 80여년 전 인도네시아 포로수용소와 재판정, 태평양 함선이 생동감 있게 와닿는다. 일본 패망과 함께 일본인으로 취급돼 전범 재판을 받고 인도네시아 형무소에 수감된 청년 최영우의 삶은 고향을 떠난 지 5년 만에 피골이 상접해 귀향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창작 초연 뮤지컬 <홀리 이노센트>(천유정·한재림 대본, 천유정 연출, 이나오 작곡, 김장연 영상)는 길버트 아데어의 동명 소설 원작 영화 <몽상가들>(2005)을 재해석한 작품이다. 1968년 프랑스 68혁명을 배경으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영화관에 상주하다시피 하는 영화 마니아이자 자유로운 영혼인 쌍둥이 남매 테오와 이사벨, 미국 유학생 매튜의 자아 찾기 탐색전이 시작이다. 혁명의 물결 속 폭력과 학살을 목도하며 침잠한 그들은 서로를 탐닉하고 방탕에 빠지지만 결국 세상의 부조리에 항거하는 것을 택한다. 일련의 갈등과 화합, 성찰의 미장센(화면구성)은 무대 전체를 감싼 하얀색 커튼에 영사되는, 시네필(영화광)이 사랑하는 영화들이다. 창작진들은 원작 소설에 언급된 영화의 편집 영상을 이용해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과도기 청년의 방황을 그렸다. 마지막 바리케이드에서 부조리에 저항하는 시위 중 스러진 매튜가 미국인 유학생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원작 소설, 영화와 다른 뮤지컬 창작진들의 재해석이기도 하다. <붉은 웃음>의 ‘붉은 웃음’은 광기와 허상이 점철된 기괴함이다. 죽은 자 위의 산 자, 산 자 위의 죽은 자가 뒤엉켜 공존하는 인간사에서 <전시의 공무원> 갑순과 갑돌이 반복해서 되뇌며 울부짖는 “밟지 마세요. 아버지가 밟히고 있네. 죽어서도 밟히고 있네”에 담긴 염원은 무엇일까. 나의 선의와 작은 꿈에 대한 바람을 알아달라는 아우성은 아닐까.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고 외치는 <홀리 이노센트>의 청년들과 꿈에서도 그리는 고향으로 향하는 기차 시간을 뇌리에 새기며 사는 조선인 최영우의 심연에 자리하고 있는 희망은 오로지 꿈을 향한 자유가 보장된 삶이다. 2024년 11월 현재 한국은 청년들의 소박한 바람에 응답할 준비가 돼 있는가. ‘청운의 꿈’에는 짝꿍처럼 따라붙는 요건이 있다. 바로 ‘자중자애(自重自愛)’다. 자기의 몸을 소중히 해 스스로 아끼고 가꾼다는 의미다. <붉은 웃음>·<전시의 공무원>·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는 오는 12월 1일, <홀리 이노센트>는 12월 8일까지 상연한다.

      이주영 문화칼럼니스트·영상학 박사 2024.11.22 15:30

    • 빈곤 탓 늘어난 무연고사…“남의 일 아냐” 사회적 애도

      사회 표지 이야기

      빈곤 탓 늘어난 무연고사…“남의 일 아냐” 사회적 애도

      무연고자 공영장례에서 고인의 이름이 쓰인 지방을 태우고 있다. 나눔과나눔 제공 지난 10월 9일 44세의 남성 이원호씨(가명)가 광주광역시 북구의 한 고시원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의 죽음을 알린 건 ‘냄새’였다. 고시원을 관리하는 A씨가 이씨의 방에서 부패한 냄새가 나자 마스터키로 문을 열어 시신을 확인했다. “TV가 켜져 있고, 화장실 불도 켜져 있어서 들어가 보니 화장실에 쓰러져 있었어요. 지난달 말에 고시원비를 내지 않아서 전화해봤더니 ‘병원에 있다’고, 곧 내겠다고 했거든요. 그 후론 마주친 적이 없었죠. 죽은 지 며칠은 된 것 같았어요.” 이원호씨가 이 고시원으로 들어온 것은 약 8개월 전. 고시원의 다른 입주자들과 교류도 많지 않아 그의 행방을 궁금해하는 이는 없었다. 관리인 A씨는 지난 10월 21일 기자와 통화에서 피곤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고시원에서 4년째 일하는데 사람이 죽은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입실할 때 눈여겨보긴 하는데, 몸이 안 좋아 보인다고 ‘딴 데 가라’ 할 수도 없지요.” 시신 발견 8일 후 이원호씨에 관한 ‘마지막 기록’이 보건복지부의 장사정보서비스 포털 ‘e-하늘장사’에 올라왔다. “무연고 사망자에 대한 장제 사무를 처리하고 다음과 같이 공고하오니, 연고자는 유골을 인수하시기 바랍니다.” 이씨가 공영장례로 화장된 뒤 광주광역시의 영락공원에 봉안됐다는 내용이었다. 결혼과 혈연 등으로 맺어진 법적 연고자가 없거나 연고자들이 장례를 포기한 ‘무연고 사망자’가 급증하고 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장종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보건복지부에서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지난해 무연고 사망자는 5415명. 3년 전(2020년 3136명)보다 72.7% 늘었다. ‘한 해 무연고 사망자 5000명’은 병든 한국사회를 드러내는 지표다. 지난해 한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약 4700만원. 국내총생산(GDP·1조6733달러)은 세계 13위를 기록했다. 경제 성장은 가팔랐으나 IMF 외환위기(1997년), 글로벌 금융위기(2007~2008년), 코로나19 등의 위기 때마다 누군가는 ‘패자’가 되어 ‘정상의 삶’으로부터 밀려나야 했다. 실업과 질병, 가족불화와 해체, 빈곤의 대물림이 반복된 결과가 ‘무연고사의 급증’이다. 인천의 부귀후원회 관계자들이 무연고자 공영장례를 진행하고 있다. 이혜리 기자 늘어나는 무연고 사망이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이 사회의 실패라면, 이들에게도 사회적 애도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약 95%의 지자체가 공영장례 조례를 만들어 예산을 편성하고 무연고자 장례식을 치르고 있다. 그리고 한국사회의 모든 ‘산 자’들을 대신해 이들의 공영장례에 참여하고 무연고자와 그 가족들을 위로하는 이들이 있다. 2011년 ‘위안부’ 할머니들의 장례를 위해 결성된 뒤 무연고자 장례 모델을 만들어 확산시켜 온 ‘나눔과나눔’은 서울시의 모든 공영장례를 장례의전 업체와 함께 진행하고 상담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부산시에서 공영장례 조례 운동을 펼쳤던 ‘부산반빈곤센터’는 조례 제정 뒤 부산 시민들로 구성된 조문단을 만들어 조문 운동을 벌이고 있다. 장례지도사들로 구성된 인천시의 ‘부귀후원회’는 공영장례를 돈벌이 수단으로 여기는 업체들을 비판하며 무연고 사망자를 진심으로 애도하는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들이 공영장례 현장에서 바라보는 한국사회의 풍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당신을 무연고자 공영장례식으로 초대한다. ■“배웅해드릴 수 있어 다행입니다” “지금부터 고 박남주(가명)의 장례를 진행하겠습니다. 운명하기 전 미추홀구에 신고되어 있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주거지인 자택에서 홀로 외로운 죽음을 맞이하였고,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발견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가족들은 오랜 단절이나 장례식의 경제적 부담으로 인하여 미추홀구청에 시신을 위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지난 10월 26일 오전 10시 40분 인천시립 장사시설인 인천가족공원의 별빛당 1층 ‘인천시립 공영장례실’. 기자를 포함한 성인 5명이 고 박남주씨의 위패 앞에 섰다. 백합과 흰 장미로 꾸며진 제단 앞엔 고사리와 도라지나물, 북엇국 등의 음식과 배, 대추, 사과, 곶감, 약과가 놓였다. 장례지도사들의 모임 ‘부귀후원회’가 진행하는 인천시의 공영장례였다. 고인이 다음 생에서는 부귀하게 태어나길 바란다는 뜻을 담아서 ‘부귀후원회’로 이름 지었다고 한다. 가기환 부귀후원회 대표가 고인의 사망진단서 등에 담긴 최소한의 정보를 토대로 고인을 소개한 데 이어 상주를 맡은 또 다른 봉사자가 술 한잔을 올리고 음식에 수저를 꽂았다. ‘마지막 식사’를 올린다는 의미였다. 기자도 술 한잔을 올렸다. 가 대표가 이어 조사를 읽어내려갔다. “외롭고 힘들었을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이제 영원히 가시는 길이 아쉬워 이렇게 술 한잔 올려드렸습니다. (중략) 늦게나마 위로해드리려 우리가 여기 이렇게 모였습니다. 배웅해드릴 수 있어 참 다행입니다. 부디 먼 길 편히 가십시오.” 가 대표와 봉사자들은 화장장으로 이동했다. 고인을 모신 관을 화장로로 옮기는 운구 절차가 이어졌다. 화장로마다 유족들이 빼곡하게 줄지어 선 모습이 들어왔다. “엄마, 엄마~” 고인을 부르짖는 소리가 화장장에 울려퍼졌다. 그러나 박남주씨의 관이 옮겨진 화장로만은 텅 비어 있었다. “그 사람들, 가족이 버린 거 아닌가요?” 문득 공영장례 빈소로 오는 동안 택시 기사가 한 말이 떠올랐다. 인천 부귀후원회 관계자들이 무연고자의 시신이 화장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이혜리 기자 다수의 무연고 사망자에게 가족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 5년간의 무연고 사망자(2만609명) 10명 중 7명(73.1%·1만5069명)은 연고자가 시신 인수를 거부하거나 피해 무연고자로 분류됐다. 시신 인수 거부·기피는 장례를 포기했다는 의미다. 이유를 들여다보면 죽음까지 파고든 빈곤 현실을 만나게 된다. 무연고자 유족들의 시신위임 사유를 분석해온 나눔과나눔 박진옥 이사는 말한다. “위임서상의 사유를 보면 대개 가족관계 단절과 경제적 사정 두 가지로 나뉘어요. 그런데 유족을 만나 사연을 들어보면 단절보다는 경제적 문제가 큽니다. 많은 사람이 장례엔 돈이 안 들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2015년 한국소비자원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평균 장례비용은 약 1300만원이다. 빈소를 차리지 않고 시신 안치·입관·염습·운구·화장만 한다 해도 대략 300만원은 필요하다. 고인이 오래 투병해 밀린 병원비까지 있다면,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처지에선 엄두 내기가 쉽지 않다. 이날 장례를 진행한 가 대표 역시 ‘장례빈곤’을 목격하고 장례봉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큰 상조회사에서 일하면서 돈이 없어 발인을 못 해 발을 동동 구르는 걸 자주 봤어요. 한번은 이런 경우가 있었죠. 남편이 대학병원에서 두 번 수술했는데 실패했대요. 그런데 의사가 한 번만 더 수술하면 살 수 있다고 해서, 아내가 집을 팔았다고 해요. 아들 둘이 있는데 장애인이고요. 병원비랑 시신 처리비용이 1000만원이 넘게 나왔어요. 장례지도사들끼리 돈을 모으고, 장례업체와 흥정을 해서 겨우 고인을 모셨죠.” ■“제가 형의 시신을 포기했습니다” 공영장례를 치르는 이들은 때로 장례 현장에서 유족을 만난다. 아직 공영장례가 널리 알려지지 않은 탓에 대개는 “화장하는 것이라도 보려고” 화장장을 찾은 가족들이다. 3년 전, 서울에 살던 60대 초반 남성의 공영장례가 치러졌을 때다. 자신을 고인의 막냇동생이라고 밝힌 이가 장례에 찾아와 서럽게 울며 말했다고 한다. “제가 형의 시신을 포기하고 왔습니다.” 그가 나눔과나눔 활동가들에게 전한 사연은 이랬다. 막내가 열한 살 때 어머니를 잃은 네 형제는 일찍부터 경제활동을 하며 각자 살았다. 막냇동생은 시각장애인인 아버지와 함께 지냈고 운수업으로 생계를 이어왔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와 큰형이 사망했을 때 둘의 장례는 막냇동생이 치렀다. 그러나 둘째 형이 세상을 떴을 때는 그럴 수가 없었다. 코로나19로 일감이 없어 생활고를 겪고 있었다. 사망자의 연고자가 장례를 포기하고 시신처리를 지자체에 위임한다는 내용의 위임서. 이유란에 ‘경제적 어려움’이라고 쓰여 있다. 시신 위임 현황과 이유 등을 분석해 온 나눔과나눔 박진옥 이사는 “장례를 포기하는 가장 큰 이유는 빈곤”이라면서 “장례는 돈이 안 든다는 것은 실제와 다르다. 빈곤층에게는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의 돈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고 했다. 나눔과나눔 제공 활동가들이 접하는 무연고 사망자와 그 가족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한국 현대사다. 유족들 사연의 공통점을 묻자 나눔과나눔의 김민석 사무국장이 답했다. “한국사회가 IMF를 잘 겪어냈다고 자부하잖아요. 저는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이런 이야기를 많이 접해요. IMF 때 실직해 무너졌다가 재기해보려 했지만 잘 안돼서 술에 의존하고, 가족과 멀어지게 되고, 고시원이나 쪽방, 여관에서 홀로 생활하다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요. 코로나19의 영향도 앞으로 10~20년은 모니터링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봐요.” IMF와 무연고 사망 간 관계는 통계로도 드러난다. 2015년에는 서울시 무연고 사망자 가운데 50대(386명·29.6%)가 가장 많았는데 지난해에는 60대(431명·35%)가 가장 많았다(나눔과나눔 ‘나이로 본 무연고 사망자 통계’). 무연고 사망이 가장 많은 연령대가 ‘늙어가고’ 있는 것이다. 박진옥 이사는 “IMF 때 30~40대였던 이들이 가장 많이 무연고 사망을 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거 아니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서 “우리가 이제까지 확인한 IMF의 충격은 일부였고, 수면 아래에 있던 빙산이 이제야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고 했다. 무연고자 공영장례를 치르는 사람들의 모임 ‘나눔과나눔’ 활동가들이 지난 10월 30일 서울 마포구의 사무실에서 회의를 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무연고자 공영장례를 치르는 사람들의 모임 ‘나눔과나눔’ 활동가들이 지난 10월 30일 서울 마포구의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마친 후 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임예원 팀장, 김민석 사무국장, 박진옥 상임이사 / 서성일 선임기자 ■공영장례가 돈벌이? 무연고 사망자는 장례를 치르지 않아도 되는 사람인가. 2010년대에 나눔과나눔이 공영장례 운동을 하며 사회에 던진 질문이었다. 이들의 질문에 많은 지자체가 ‘응답’했다. 2018년 서울시가 광역지자체 최초로 공영장례 조례를 만든 후 지금은 전국 대부분의 지자체가 공영장례 제도를 도입했다. 하지만 인식 변화가 느리면 제도는 겉돌기도 한다. 지자체 지원금이 나오는 무연고 장례를 돈벌이로 활용하는 사례가 이를 보여준다. 가기환 부귀후원회 대표는 조례 제정 뒤 장례업체와 갈등을 겪은 얘기를 들려줬다. “예전에 조례도 없고 예산도 없었을 때는 저희가 장례식장을 쫓아다니면서 부탁했어요. 무연고 사망자들이 있으면 연락을 달라고, 저희가 장례를 치르겠다고요. 몇몇 장례식장은 ‘그래 봉사한다는데 도와줄게’ 했죠. 하지만 조례가 생기고 나서 장례식장들이 등을 돌렸어요. 자기들이 직접 하면 지원금이 나오니까요.” 무연고 사망자를 ‘돈’으로 보는 업자들이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를 리 없었다. 모형음식을 올려 상을 차리거나, 장례가 끝난 빈소에 들어가 위패만 갈아 끼워 구청 제출용 사진을 찍는 일도 있었다. 가 대표는 “장례식장과 갈등이 깊어지니까 실망하고 돌아간 봉사자들도 있었다”면서 “우리는 제물상과 제단을 다른 장례와 똑같이 마련하려 노력하고, 5시간에 걸쳐 유골 봉안까지 직접 마치지만 ‘쓸데없는 짓’이라고 대놓고 말하는 업체도 많다. 공영장례를 그저 돈벌이 수단으로만 보기 때문”이라고 했다. 기자가 참석한 지난 10월 26일의 공영장례 현장에서도 타 업체가 받아 가지 않은 유골함을 부귀후원회 봉사자들이 대신 봉안했다. 무연고 사망자 장례를 ‘장례지도사 실습용’으로 활용하는 사례도 있었다. 부산반빈곤센터를 통해 공영장례 조문 운동을 하는 맹정은씨는 지난 8월 찾은 장례 현장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위패가 모셔져 있고 장례가 진행 중인 것 같은데, 학생들한테 ‘상 놔 봐, 젓가락 놔 봐, 어디에다가 놔야 해, 거기 놓으면 옛말에 XX라고 했어, 너 이거 어디에 놓는지 몰라?’ 이렇게 가르치고 계시더라고요. 공영장례 현장에서 예비 장례지도사 교육을 할 수는 있겠지만, 고인에 대한 예의를 이렇게 갖추지 않아도 되나요.” 학생들을 가르치던 장례지도사는 조문단에게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사망자가) 치료비가 많이 나와서 유족이 (장례를) 포기했어요. 이분들 사실 못 와요.” 부산반빈곤센터의 ‘부산시민 공영장례 조문단 양성과정’을 수료한 시민들 / 부산반빈곤센터 제공 ■시민들의 조문 운동 돈벌이 수단으로 치부되는 일부 공영장례 현장을 들여다보면,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공영장례를 장례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부산반빈곤센터는 시민들의 ‘사회적 애도’에서 그 답을 찾았다. 지난해 5월부터 부산시민 공영장례 조문단을 꾸려 공영장례 조문 운동을 벌이는 이유다. 임기헌 활동가는 “올해의 경우 신청자 대다수가 기존 회원이나 인권 활동가들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었다. ‘우리만 관심 있는 게 아니구나’ 싶어 놀랐다”고 했다. 아이 둘을 키우며 대학에 다니고 있는 이민영씨는 “인간이 태어나면 환대를 위한 각종 복지제도가 있는데, 반대로 죽음과 관련해선 왜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있던 차에 공영장례를 알게 됐다”면서 “알지 못했던 사람이지만, 우리 사회 공동체를 함께 살다간 분이니까 나의 이웃에게 인사드린다는 마음으로 조문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얼마 전 큰아들의 생일에 무연고자 빈소를 함께 찾기도 했다. “와보니까 어떠냐고 물으니 아들이 ‘아무도 없어서 너무 안타까워’라고 하더라고요. 아들에게 이렇게 말 해줬어요. ‘(고인은) 우리가 원래 알던 분은 아니지만 우리랑 상관없는 분이 아니야. 우리와 함께 살다간 분이야. 앞으로 이렇게 홀로 돌아가시는 분들이 더 많아질 텐데, 우리가 이런 분들을 잘 보내드릴 수 있도록,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은 우리 몫이야’라고요.” 반빈곤센터는 고인을 제대로 추모하기 위해 가까웠던 지인을 수소문해 공영장례에 초대하기도 했다. “매달 찾아뵈면서 신뢰감이 쌓여서일까. 고인은 조금씩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대 초 사회운동하는 학생을 숨겨주었다가 고문당한 이야기, 그러면서 이혼을 하게 됐고 2명의 자녀와 연락이 끊긴 이야기…. 저에게 항상 좋은 말씀을 해주셨고, 본인 상황은 우울하지만 남 탓을 하지 않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호스피스 센터 간호사가 자신이 돌보던 노인의 공영장례에 참석해 발표했던 글 일부다. 서울의 나눔과나눔 역시 사망자가 오래 머물던 고시원, 요양병원에 전화하거나, 직접 방문해 친밀한 지인들이 공영장례에 참석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공영장례 조문단으로 활동하는 이민영씨가 무연고자 공영장례 제물상에 올린 추모 엽서 / 반빈곤센터 제공 ■애도의 권리 공영장례를 치르는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종종 받는다. ‘장례 치를 돈으로 살아 있는 사람을 지원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공영장례는 ‘누구나 삶을 존엄하게 마무리할 권리’ 측면에서 보자면 고인을 위한 것이지만 활동가들은 그것만큼이나 고인 가족이나 친구, 동료들의 ‘애도할 권리’를 강조한다. 내 가족이, 혹은 가깝게 지낸 지인이 무연고 사망자로 ‘처리’돼 증발하듯 사라져버린다면 느끼게 될 심리적 충격을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빈소 없이 화장되던 과거보다는 나아졌지만, 공영장례가 애도의 공간으로 자리 잡기엔 아직 갈 길이 멀다. 공영장례식이 치러져도 시신을 포기한 가족들은 죄책감과 낙인 때문에 나오지 못하고, 친밀했던 지인들은 ‘법적 연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장례 일정조차 알기 어렵다. 박진옥 이사는 “한 해 5000명의 무연고 사망자에게 가족이 4명씩만 있다고 쳐도 2만명이고, 거기에 친밀했던 지인들까지 합하면 매해 수만명이 충분히 애도하지 못한 채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박탈된 애도’를 경험하고 있다”면서 “애도의 박탈을 막기 위해서는 모두에게 최소한의 장례 절차를 보장하는 보편적인 장례복지 제도의 도입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생전 친밀했던 이들이 장례에서 배제되지 않도록, 고인이 장례에 대한 유언을 남길 수 있도록 하는 등의 법적 보완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아가 공영장례는 우리에게 누구나 존엄하다는 것을 일깨우는 현장이기도 하다. 이유나 가족구성권연구소 공동대표는 “무연고자 장례는 빈소 없이 대충 치러도 된다는 생각엔 빈곤과 질병, 성 정체성, 관계 단절 등으로 차별받고 배제됐던 이들의 죽음은 ‘충분히 애도할 만하지 않다’는 평가가 들어 있는 것”이라면서 “장례와 애도 과정에서의 차별을 해소한다는 것은 이 사람의 삶에 대한 평가를 바꾸는 일”이라고 말했다. “저는 공영장례 조문을 다녀오면 사회가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느껴요. 그리고 앞으로 더 좋아질 거라 믿고요. 공영장례에 오는 다른 분들도 그렇게 느끼실 거라 생각합니다. 장례는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는 공간이라면, 그걸로도 의미는 충분하지 않을까요.” 공영장례 조문 운동에 참여하는 시민 이민영씨의 말이다.

      송윤경 기자, 이혜리 기자 2024.11.04 06:00

    • 사회 사물의 과거사

      [사물의 과거사](6)보도연맹 학살과 ‘고무신’···애도에 자격이 필요한가

      2007년 충북 청원군 ‘분터골’ 유해발굴 현장. 57년 만에 땅 위로 나온 고무신 한짝에 사람들의 눈길이 집중됐다. 밑창에 선명하게 찍힌 세 글자 ‘大同江(대동강)’. 고무신의 상표였다. 이 상표를 추적하면, 57년 전 이 고무신을 신고 분터골까지 와서 이곳에 삶의 마지막 발자국을 남긴 ‘그 사람’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 터였다. 1950년 7월 청주·청원지역 국민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된 충북 청원군(지금의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고은리 분터골에 사망자들을 기리는 원혼비가 박혀 있다. / 최규화 전 주무관 ‘대동강’의 정체는 1956년 발간된 <충북연감>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당시 청주에 있던 ‘청주합동고무신공업사’의 상표. 1948년 개업한 이 공업사는 직원 약 160명 규모의 큰 공장이었다. ‘大同江’ 세 글자가 찍힌 고무신 한짝은 분터골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이 청주 주민이거나 그 가까이에 살았을 거라는 점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물증’이 됐다.(<청원 국민보도연맹 사건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2008) 충북 청원군(지금의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고은리에 있는 분터골.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4일부터 11일까지 청주경찰서와 청주형무소에 수감된 재소자들과 청주·청원지역 보도연맹원들이 경찰과 헌병대, CIC(방첩대) 등에 의해 이곳 분터골에서 학살됐다. “후퇴하기 전에 죽였어. 옛날 트럭이야. 하얀 윗도리를 입었는데 형무소에서 끌려나온 것 같더라고. 경찰들이 장총 들고, 정장 모자(턱에 끈이 달린 모자) 쓰고, 죄 엮어서 오더라고. 줄로 엮어서 20명씩을 한데다 묶었어. 그러니까 앞에 있는 사람 허리를 묶으면, 또 묶고, 또 묶고 해서 도망을 못 갔어.”(<2007년 유해발굴 보고서> 제2권·진실화해위원회·2008) 학살 목격자 이재우 옹(가명·당시 15세)이 기억하는 1950년 ‘그날’의 풍경이다. 2006년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진상규명 충북대책위원회는 300~400명의 청주형무소 재소자들이 트럭에 실려가 분터골에서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또 청주·청원지역 보도연맹원 약 700명도 같은 곳에서 학살당했고, 시신을 흙으로 덮어 가매장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청주·청원지역에서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희생자 수는 약 1500명. 그중 분터골에서 희생된 수만 약 1000명에 이른다. 분터골은 충북지역 최대의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지다. 추정 희생자 1000명… 충북지역 최대 학살지 1949년 좌익 전향자를 ‘바른길로 이끈다’는 명목으로 만들어진 국민보도연맹. 가입자 중에는 실제 남로당원도 일부 있었지만, 당국의 강요로 강제 가입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보도연맹의 성격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그 때문에 자신이 죽을 거라고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래서 소집명령에 바로 응했고, 구금 중에도 탈주하지 않고 석방을 기다렸다. “거기(분터골) 가니께 경찰관들이 보초를 서 있어. 고 언저리에 수천명이 피란민이 서 있어. 못 가게 막았나봐. 하거나 말거나 자전거를 타고 고개 7부쯤인가 8부쯤에 올라갔더니, GMC 자동차 두 대가 청주 쪽을 앞을 두고 서 있더라고. 그래 ‘어떻게 되었느냐’고 하니까, ‘다 끝났어요’ 하길래, ‘하이고 살릴 사람이 있는데’ 그랬더니 ‘할 수 없죠’ 그래. 드문드문 총소리가 나는데, 저게 확인사살 하는 거라고 그래.”(<2007년 유해발굴 보고서>) 당시 청주에서 우익 청년단체 활동을 한 장풍연 옹(가명·당시 25세)은 ‘분터골에 가봤느냐’는 조사관의 물음에 위와 같이 답했다. 57년이 지났지만 ‘그날’의 기억만은 생생했다. 그날의 총소리가 남긴 참상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가 2007년과 2008년 진행한 유해발굴을 통해 세상에 드러났다. 2007년 118구, 2008년 214구의 유해가 발굴됐다. M1·카빈총 소총의 총탄과 옷감, 단추, 고무줄, 신발 등이 출토됐다.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는 분터골 학살 조사결과를 포함해 ‘청원 국민보도연맹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165명. 92%가 20~30대였다. “여기(분터골)가 충북 도내 최대의 학살지라면 저거(안내판) 달랑 하나 세워놓는 게 아니라 역사의 아픔이 서려 있는 현장이라는 걸 알 수 있게 만들어놔야 하는데…. 몇십억 들여 위령비를 세우자,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시민들에게 알리는 일을 전혀 안 하는 거예요. (돈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예요, 의지의 문제.”(박만순 충북역사문화연대 대표, 유튜브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허락되지 않은 기억을 찾아서-분터골’ 2022. 1. 14.) 직접 분터골을 찾아가 보니 박만순 대표의 분노가 이해됐다. 지난 10월 30일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가 주최한 ‘예술과 함께하는 한국전쟁 기억여행’ 답사에 함께했다. 국도변 식당 앞에 차를 대고, 차가 갈 수 없는 좁은 길을 걸어 올랐다. 200m쯤 걸으니 좁은 길조차 아예 사라졌다. 펜션촌을 짓느라 세워놓은 낮은 옹벽을 타고 올라 현장에 도착했다. 무성히 자란 풀밭 사이 진실화해위원회 안내판이 보였다. 그 발치에는 높이가 두뼘 정도 될까,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전국유족회가 세운 작은 원혼비가 살짝 기울어진 채 ‘박혀’ 있었다. 보이는 건 그게 전부였다. 분터골의 오늘은 너무도 초라하고 쓸쓸했다. 마침 그날은 10월 30일. 자고 일어난 사람들의 귀에 이태원 참사의 소식이 들려온 날이었다. 답사에 참가한 사람들도 충격과 놀라움, 추모와 애도의 말들을 서로 나눴다. 그리고 다시 이곳 분터골로 눈을 돌렸을 때, 우리는 한없는 비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을 다룬 기사에는 늘 ‘빨갱이라서 죽었는데 무슨 애도를 하고 무슨 보상을 하나’ 하는 댓글이 달린다. 학살의 가해자인 국가의 태도 또한 다를 바 없다는 점은 충북 최대 학살지, 분터골의 ‘폐허’가 말해주고 있다. 아직도 이 사회는 분터골의 원혼들을 향해 ‘애도 받을 자격’을 의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난 72년간 그래왔듯이. 1950년 당시에는 없었을 것 같은 어린나무에 가지고 간 실을 걸어두고 왔다. 죽음의 땅을 뚫고 올라온 새로운 생명. 실은 기억과 감정을 엮고 잇는다. 분터골, 그날의 참극과 오늘의 애도가 이어지기를. 그리고 마침내 그날의 원한과 내일의 화해가 이어지기를. ※청원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1950년 6월 말부터 충북 청주·청원지역 보도연맹원을 포함한 예비검속자들이 청주경찰서 경찰과 헌병대, 청주CIC에 의해 경찰서와 각 지서, 형무소 등에 소집·구금됐다가 7월 초부터 7월 중순까지 청원군과 보은군 일부 지역에서 사살된 사건이다.

      최규화 전 진실화해위원회 언론홍보팀 주무관 2022.11.18 11:20

  • 레이디경향

    • 네이버·카카오 사이버 추모공간 애도 행렬 줄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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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카카오 사이버 추모공간 애도 행렬 줄이어

      네이버의 이태원 사고 사망자를 위한 사이버 애도 공간. 31일 오전 서울광장 서울도서관 정문 앞에 마련된 ‘이태원 사고 사망자 합동분향소’에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네이버와 카카오는 분향소를 찾지 못하는 시민들을 위해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온라인 공간을 운영하고 있다. 31일 개설된 네이버의 사이버 추모관에는 31일 오전 10시 40분 현재 17만명이 넘는 방문자가 추모 리본으로 애도를 표했다. 네이버는 메인 화면 검색창 우측에 ‘깊이 애도합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검은 리본을 게시하고 이를 클릭하면 바로 추모 게시판과 관련 실시간 뉴스 등에 바로 접속할 수 있도록 했다. 추모 게시판에는 흑백 국화 이미지와 함께 ‘이태원 사고 사망자를 애도합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추모리본을 달 수 있도록 했다. ‘추모 리본 달기’를 누르는 방식으로 추모에 참여할 수 있으며, 별도의 댓글 작성 기능은 없다. 카카오 메신저 앱의 이태원 참사 추모 공간. 카카오는 댓글로 이태원 핼러윈 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메신저 앱 카카오톡의 하단 맨 오른쪽 ‘더 보기’ 탭을 선택하면 화면 하단에 나타나는 ‘카카오 나우’에 추모 페이지가 나타난다. ‘온 마음을 다해 애도의 뜻을 전합니다. 추모의 마음을 남겨주세요’라는 이미지를 누르면 추모 댓글을 작성할 수 있는 페이지가 열린다. 카카오는 “혹시 모를 2차 피해 방지를 위해, 정해진 추모 문구로만 작성 가능하다”고 안내하고 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정해진 문구로만 댓글을 남길 수 있다. 31일 오전 10시 40분 현재 2만 개가 넘는 추모 댓글이 달렸다. 서울 곳곳에 이태원 참사 희생자의 명복을 비는 분향소가 마련됐다. 31일 오전 10시에 문을 연 서울광장 분향소는 국가애도기간인 11월 5일까지 서울광장에서 운영된다. 매일 오전 8시∼오후 10시 조문객을 받을 예정이다. 참사가 발생한 용산구는 11월 5일까지 녹사평역 광장에 합동분향소를 24시간 운영한다. 이외 양천구는 청사 1층에 합동분향소를 만들어 31일 오후 2시부터 조문을 받을 예정이다. 성북구는 구청 앞 잔디마당에 합동분향소를 설치했다. 서대문구도 구청 1층에 분향소를 설치하고 국가애도기간 조문을 받기로 했다.

      장회정 기자 2022.10.31 10:52

    • 부모 잃은 슬픔, 잃어버린 자연을 담아 애도의 작품 집필한 작가 김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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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 잃은 슬픔, 잃어버린 자연을 담아 애도의 작품 집필한 작가 김형경

      사랑하는 대상을 잃었을 때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슬퍼하고,방황하고, 또 그것을 극복해가는 과정을 ‘애도’라 한다. 작가 김형경은 아름다운 환경을 잃었을 때 역시 애도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작가를 인터뷰하고 나서 기사를 쓰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가장 무서운 독자는 바로 그 인터뷰 대상자인데, 그가 바로 작가라면 부담은 백배로 커질 수밖에 없다. 김형경은 기자의 가장 큰 고민을 다 알고 있다는 듯 “글 잘 쓰고 싶죠?”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데뷔하고 나서 경제적인 바탕을 마련하기 위해 회사생활을 했어요. 출판사에도 있었고, 잡지사에도 있었죠. 그리고 10년 만에 소설을 쓴다고 그만뒀죠. 그만둔다고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의 반응은 ‘무모하다’거나 ‘용감하다’였어요. 회사에 다닌 건 경제적인 이유였는데, 10년 동안 내가 세상을 배웠더라고요. 미디어 특성상 세상을 보는 눈을 배웠고, 사람 대하는 것 등 소설 쓰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배운 거예요. 그렇게 보낸 20대는 나를 확장시킨 시간이었어요.” 김형경의 신작 「꽃피는 고래」는 작가의 이러한 배경이 충만하게 반영된 소설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고래나 장생포(처용포) 이야기는 그가 기자 시절 실력을 발휘해 취재해 얻은 것들이다. 그리고 이 소재를 10년이란 시간 동안 숙성시켜 보편적인 정서의 소설로 탄생시켰다. 이러한 노력 덕분일까. 환경오염과 소녀의 상실을 절묘하게 엮어 하나의 주제로 매듭짓는 작가의 역량은 감탄할 정도다.고향의 강이 오염된 모습 보고 충격받아 열일곱의 소녀 ‘니은’은 한순간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는다. 아무 예고 없이 닥친 불행 앞에 소녀는 몸이 여기저기 아프기도 하고, 익숙한 등굣길에서 길을 잃기도 한다. 니은은 아버지의 고향인 처용포로 내려간다. 처용포는 과거 고래잡이가 성업했던 포구지만, 고래잡이가 금지된 후에는 공업단지로 변했다. 공업단지로 변한 후 많은 것들이 변했다. 흙도 물고 공기도 변했다. 소녀는 처용포에서 고래잡이 명수였던 장포수 할아버지와 버려진 고양이와 개를 돌보는 왕고래집 할머니를 만난다. 소녀의 성장소설인 것 같기도, 환경오염을 다루는 환경소설 같기도 하다. 작가는 애도(哀悼)의 소설이라 한다. ‘애도’라는 단어 안에는 소녀의 성장과 환경오염이 모두 들어 있다. “대상을 잘 떠나보내고,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 그것을 애도라고 해요. 말 그대로 슬퍼하기의 과정이에요. 애도의 개념이 사회적으로 보편화되어 있지 않아요. 애도의 대상이 환경이나 부모일 수 있고, 이데올로기나 지위, 권위일 수 있어요. 이런 것들을 잃으면 일련의 과정을 거치게 되죠.” 애도는 정신분석학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연구되고 있으며, 심지어 애도의 개념으로 작품을 읽거나 사회, 정치, 윤리 등 인문학까지 애도를 통해 풀고 있다고 한다. 「꽃피는 고래」는 애도의 과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애도를 잘하면 더 좋아져요. 성장하는 계기가 되죠.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면서 한 단계 성장하는 거예요. 그러니 자연스럽게 이 소설이 성장소설이 된 것 같아요.” 특히 이 소설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작가가 환경을 애도했다는 것이다. 환경오염에 대한 심각함을 알리고 비판하는 것이 아닌, 환경오염에 대한 아픔 그리고 회복되기까지 이어지는 과정은 소녀의 감정 변화와 대구(對句)를 이루고 있다. 이는 실제로 작가가 느꼈던 엄청난 상실감에서 기인했다. “고향 마을의 강물이 더러워졌을 때 너무 큰 충격을 받았어요. 제가 들어가 온몸으로 사용했던 곳인데, 손을 담글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워졌더라고요. 항상 그 강을 생각하면 기쁨으로 가득하곤 했거든요. 그때 받은 충격, 감정이 바로 애도였던 것 같아요.” 소설 속 배경이 되는 처용포는 작가가 만든 가상의 공간이다. 물론 모델은 있다. 울산에 있는 작은 포구 장생포다. 고래잡이로 유명하고 환경오염이 심각한 점은 처용포와 같다. 그러나 소설 속 처용포는 환경이 회복되어가는 중이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장생포는 그대로다. “장생포는 여전히 방치되어 있어요. 매립된 땅은 터가면서 마르고 있고, 뒷산에는 나무가 거의 없어요. 겨우 소규모 어업만 하는 실정이에요. 이러한 환경을 소설 속에서나마 회복시키고 싶었어요.” 10년 전에 썼더라면 환경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생각은 바뀌었다. 환경을 좀 더 편안하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시간을 통해 얻은 지혜다.콤플렉스 없는 요즘 세대 부러워 소설의 화자는 열일곱 살 소녀다. 성인이 되기 전 혼자 자립하는 모습이나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따뜻한 감정 등 많은 부분, 작가의 자전적 소설 「세월」과 겹쳐진다. “특별히 그 시절을 생각한 건 아니에요. 열일곱이라는 주민등록증을 처음 발급받았을 때 느꼈던 어떤 특별한 느낌, 그때의 정서를 유지하려고 했죠. 아무리 세상이 변한다고 해도 인간의 기본적인 바탕은 똑같으니까요. 30년 전에 에밀 아자르가 쓴 14살짜리 아이 이야기를 읽으면 공감하거든요. 어린이의 원형, 소년의 원형이 있어요. 어른 같지도 않고, 아이 같지도 않은 그 원형적인 느낌만 살리려고 애썼죠.” 정서는 원형을 갖고 있다지만, 언어는 또 다른 문제였다. 언어는 세대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자신의 언어를 인식하고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것이 가장 힘든 문제였다. “글을 쓰다 보면 나도 모르게 40대 후반의 언어가 나오는 거예요. 퇴고를 할 때 많이 고쳤죠. 쉬운 단어, 짧은 문장으로. 그 작업에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출판사에 원고가 넘어간 다음에도 출판사로부터 ‘이건 너무 전문 용어예요, 이건 너무 어려워요’라는 말을 많이 들었죠.” 열일곱 살의 김형경은 어떤 소녀였을까. 주인공 니은과 달리 전형적인 모범생이었지만, 분위기가 엄했던 학교 내에서는 평범치 않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강릉여고를 졸업했어요. 이름 있는 학교인 만큼 정말 죽도록 공부를 시켰죠. 그런 분위기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기행은 수업을 빼먹거나 영화관에 가는 거였죠. 한번은 소풍날 일찍 끝나서 친구들과 영화관에 갔는데, 선생님께 걸린 거예요. 일주일 동안 반성문을 썼어요. 그 정도로도 저는 학교에서 굉장히 튀는 학생이었죠.” 이야기는 요즘 시대 젊은이들로 이어졌다. 굴곡진 역사를 경험했던 그에게 자유로운 요즘의 젊은이들은 마냥 부럽기만 하다. “아이들을 보면 부러워요. 콤플렉스 없는 자유로운 세대잖아요. 우리 세대는 아직도 머릿속에 ‘국산품 애용’이라는 표어가 있어서 외제는 불편해요. 요즘에는 시위하면서 한 손에 ‘이명박 아웃’, 다른 손엔 에비앙 물병을 들고, 어깨에는 프라다 가방을 메고 있어요. 부러워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구나, 하고요.”흔들리지 않는 사람에 대한 믿음 소설에서 장포수 할아버지와 왕고래집 할머니는 주인공을 돌보는 역할로 나온다. 혈육도 아닌 고향 어른들인 이들은 소녀의 방황하는 모습을 보고 정신 차리라고 화를 내지도 부담스럽게 호들갑을 떨지도 않는다. 이는 그저 작가가 만들어낸 이상향만은 아니다. 그는 실제로 사람을 믿는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선량하고 서로 도움을 준다고 믿어요. 사람들이 일상에서 만나면 경쟁하고 속여 먹으려고 하잖아요. 그러나 그런 건 피상적인 현상이나 사건일 뿐이고, 본질로 들어가면 인간은 서로 돕고 살거든요. 그런 믿음이 있으면 세상사는 게 정말 편해져요.” 김형경은 그 기적의 산증인이다. 이번 소설을 쓸 때도 예상치 못했던 사람의 도움을 받기도 했으니 그는 여전히 그 기적을 누리고 있었다. “이유 없이, 별 기대 없이 선행을 베풀 때가 있잖아요. 그러면 꼭 언젠가는 돌아오는 거예요. 그것도 제가 딱 필요한 시점에요. 그런 경험을 많이 했어요. 후배 중에 특별히 사람을 끄는 힘이 있는 아이가 있어요. 친하지는 않지만 이상하게 생의 고비마다 저와 고민을 나누던 후배였어요. 어느 날 문득 후배가 공연에 오라는 거예요. 사실 그런 곳에 절대 안 가는데, 거기는 가보고 싶더라고요.” 한창 소설의 긴장 해소 부분, 즉 주인공이 새로운 삶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을 구상 중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날의 공연은 이 소설의 한 페이지에 그대로 담겨졌다. “그날은 그냥 재미있게 보고 왔어요. 그런데 자고 일어났더니, 그 공연 장면과 공연 후 붙은 문자 메시지 경매(한 달간 매일 문자 메시지를 보내주고, 한 달 후 두 통의 엽서를 보내준다는 상품)에서 해법이 보이더라고요. 즉시 문자 메시지를 사겠다고 연락해서 문자를 받았죠. 그런데 신기한 건 그 문자 내용이 제가 생각했던 상황과 딱 맞는 거예요. 마지막에 보낸 엽서까지. ‘결국 이런 도움을 받으려고 그랬구나. 하느님 감사합니다’ 했죠.” 가장 고민스러운 문제를 단박에 속 시원하게 풀어준 이는 그가 오랫동안 상담해주었던 후배였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다시 한 번 믿음을 갖게 되었다. “서로 돕고 산다는 것을 믿어요. 그래서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죠. 역시 세상은 그런 거예요. 이걸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의심하지 말고 한번 믿어보세요.” 우울증 이겨내고 더 좋은 삶 찾아 소설 「성에」,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에세이 「천 개의 공감」, 「사람풍경」에 이어 이번 소설 「꽃피는 고래」까지, 모두 그가 정신분석학을 기반으로 쓴 책이다. 이쯤 되면 정신분석학 전문가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직장생활을 시작했던 초반에 심리학 공부를 시작했어요. 사회생활을 시작해보니 조직에 적응하기가 무척 힘들더라고요. 제가 그 안에서 제일 튀었어요. 직장생활하기가 너무 힘들었고 심지어 사람들의 농담에도 웃을 수가 없는 거예요. 왜 나는 저들과 다를까? 인간의 마음은 어떤 건가? 궁금해서 무작정 정신분석학 책을 읽기 시작했죠. 읽다 보니 제게 정말 문제가 많더라고요.” 책을 읽으면서 그는 많이 좋아졌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 겉잡을 수 없이 깊은 우울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나는 이제 괜찮아’라고 생각할 무렵, 갑자기 삶이 멈추는 상태가 되더라고요. 우울증이었어요. 단순히 우울한 것이 아니라 정신상태가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 생체 에너지가 바닥을 드러내는 것이었죠. 그런 날들이 몇 달째 계속됐어요. 처음에는 이게 뭔가 싶었죠. 그리고 정신과 상담을 받았어요. 전문가 상담은 책으로 읽는 것과는 정말 달라요. 상담을 받으면서 인생을 완전히 다시 되찾았죠.” 김형경은 참 잘 웃는다. 유난히 많은 일을 겪은 그지만, 충분히 애도했기 때문인가. 그의 웃음소리는 티 없이 맑고 신선하기만 하다. ■ 글 / 두경아 기자 ■사진 / 이성훈

      2008.07.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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