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
‘미인도는 위작’ 천경자 딸, 국가배상 소송 2심도 패소... 않았고, 법원에 낸 재정신청도 대법원에서 최종 기각됐다. 이에 유족 측은 2019년 ‘검찰이 위작 의견을 낸 감정위원을 회유하고, 감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허위사실을 감정위원에게 알려 감정...
정대연 기자 2025.04.18 15:59
사회
‘미인도는 위작’ 천경자 딸, 국가배상 소송 2심도 패소... 않았고, 법원에 낸 재정신청도 대법원에서 최종 기각됐다. 이에 유족 측은 2019년 ‘검찰이 위작 의견을 낸 감정위원을 회유하고, 감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허위사실을 감정위원에게 알려 감정...
정대연 기자 2025.04.18 15:59
문화
미국 미술관 전시된 이중섭·박수근 그림 ‘위작’···관장 “도록 발행 취소”.... 라크마는 지난 2월부터 지난 30일까지 열린 ‘한국의 보물’에 전시된 이중섭·박수근 그림에 대해 위작 의혹이 일자 한국 전문가 4명을 초청해 지난 26일 내부 간담회(Study day)를 열었다. 초청된 한국의...
#이중섭 #박수근 #위작
이영경 기자 2024.06.30 21:03
문화
화랑협회, ‘박수근·이중섭 위작의혹’ 미국 미술관에 질의서 보내기로... Collection)전에 출품된 박수근·이중섭 작품의 진품 확인 근거 등을 묻는 내용이 담긴다. 전시작에 위작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는 내용도 포함될 예정이다. 박수근의 유족이자 저작재산권자인 박수근연구소는
#박수근 #이중섭 #화랑협회
이영경 기자 2024.04.05 19:12
국제
‘얼굴 없는 화가’ 뱅크시, 위작 대거 유통에 정체 공개되나... 받지 못하자 계약 위반으로 이 회사를 고소했다. 페스트 컨트롤은 2008년 뱅크시가 세운 회사로, 위작들이 온라인에서 대거 유통되면서 이 회사를 통해 진품 인증서를 발급하고 있다. 소송을 낸 니키...
#뱅크시 #그라피티 #뱅크시정체 #뱅크시위작 #원숭이여왕
선명수 기자 2024.03.10 11:21
생활
‘그것이 알고싶다’ 천경자 화백 미인도 위작 논란과 김재규 파헤쳐<그것이 알고싶다>가 21일 고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의 위작 논란을 통해, 그 출발점이 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환수재산목록과 관련된 미스터리를 파헤친다. 제작진에 따르면 91년 이래 26년간 지속돼온 미인도 위작 사건. 지난 12월 19일. 검찰은 미인도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새로운 사실을 발표했다. “소장 이력의 확인이 아주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요약컨대 미인도는 1980년 계엄사령부가 당시 정보부장이었던 김모 씨로부터 헌납 받아 재무부, 문화공보부를 거쳐 국립현대미술관에 최종 이관된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수사 발표) 1979년 10월 26일.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살해된 박정희 대통령. 그를 살해한 암살범은 박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부장. 당시 신군부는 김재규에 대한 대통령 살해혐의와 별도로 그의 보문동 자택에서 고미술품, 귀금속을 포함한 고서화 1백여 점이 발견됐다고 밝히고 그를 부정축재자로 발표했다. 이후 김재규가 모든 재산은 기부채납형식으로 국가에 환수됐고, 그가 모은 고가 미술품 속에 1977년 작으로 표기된 천경자의 미인도가 있었다는 것. 어렵게 입수한 김재규 환수재산목록을 확인한 결과, 총 다섯 장으로 이루어진 문서에는 천경자의 미인도를 포함해 총 155개의 압수 물품이 적혀 있었다. 이 문서는 누구에 의해 어떻게 작성된 것일까? 제작진은 그동안 방송에 나온 적이 없는 김재규 전 중정부장의 여동생 부부와 사형 선고를 받기 직전까지 그를 보필해 자택 내부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개인 비서 최종대 씨를 만날 수 있었다. 37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미인도를 기억하고 있을까?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은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을 확인했고, 미인도와 김재규에 얽힌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검찰은 80년도 김재규 전 중정부장에게서 환수한 미인도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이관됐다는 소장이력을 근거로 ‘미인도’가 진작임을 주장했다. 또한 과거 그의 보문동 자택을 방문했던 미술전문가 김 모 씨가 응접실 벽면에 걸려있던 ‘미인도’를 본적이 있다는 진술이 문제의 그림이 집에 있었다는 유족들의 진술과 일치한다며 ‘미인도’ 진위에 대한 논란을 일축시키고자 했는데, 그러나 제작진과 만난 유족들과 최종대 씨는 김 모 씨의 주장을 부정하며 신군부가 ‘미인도’를 천경자 화백의 작품이라고 단정한 이유가 김재규 전 중정부장을 부정축재자로 몰아야 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누구의 말이 진실인가. 21일 밤 11시 5분 방송.
#그것이 알고싶다…‘천경자 화백 미인도 위작 논란과 김재규…’ 파헤쳐
온라인뉴스팀 2017.01.21 10:23
생활
국립현대미술관, 미인도 위작 감정에 “성급한 결론” 반박…누리꾼 반응은 냉대국립현대미술관은 프랑스 감정단이 천경자의 <미인도>에 대해 위작 의견을 낸 것과 관련해 “화면 표층 분석만으로 성급히 결론을 내렸다”고 강하게 반박했다고 연합뉴스가 보도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4일 <프랑스 감정단의 미인도 감정 결과 보도에 대한 입장> 자료를 내고 “프랑스 감정단이 도출했다는 감정 결과는 종합적인 검증 등을 통한 결론이 아니라 부분적 내용을 침소봉대한 것에 불과하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지난 9월 방한한 프랑스 감정단은 <미인도>와 천 화백이 그린 다른 작품을 특수 카메라로 촬영해 대조하는 방식으로 감정을 진행했다. 이들은 얼굴의 주요 포인트를 1천600여개 부분으로 나눈 뒤 비교했다. 그 결과 <미인도>의 진품일 확률이 0.0002%로, 사실상 천 화백의 작품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 중인 ‘미인도’. 자료|나무위키 이에 국립현대미술관은 곧바로 프랑스 감정단의 감정 결과에 대한 신빙성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프랑스 감정단이 감정에 필수적인 고려 요소를 무시한 채 화면의 표층적 묘사 패턴에 대한 분석만으로 성급하게 위작 결론 도출을 내렸다는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프랑스 감정단이 감정 개시 전 브리핑에선 캔버스 화면의 층위조사를 통해 보이지 않는 이미지와 붓질, 작업방식 등의 패턴을 종합적으로 규명한다고 했으나 조사 결과를 보면 당초 공언한 바와는 반대로 극히 일부 자료에 대한 통계적, 인상적 분석 결과만 내놨다”고 주장했다. 특히 <미인도>는 도안화된 인물을 그린 작품이 아니라 천 화백이 차녀인 김정희 씨를 보고 그린 것이어서 프랑스 감정단이 제시한 패턴화 분석은 의미 없는 ‘난센스’라고 강조했다. 미술품 감정 시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요소인 작가에 대한 전반적 배경지식, 작품에 대한 미술사적 분석자료, 재료 분석자료, 소장 경위 자료, 전문가 의견 등이 배제된 점도 문제로 지적했다. 수정과 덧칠, 작업 과정에서 ‘압인선’(押引線·눌러서 긋는 방식)을 활용해 형태를 완성해가는 독특한 기법에 대한 파악이 없었다는 점도 거론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아울러 프랑스 감정단이 <미인도>가 천 화백의 1981년작 <장미와 여인>을 보고 그린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는데 국립현대미술관이 <미인도>를 입수한 시기는 1980년 4월로, 이듬해 그려진 ‘장미와 여인’을 보고 그릴 수 없다고 말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이에 대해 “성립 불가능한 모순된 결론이며 결정적으로 감정 결과의 신빙성을 스스로 떨어뜨리고 있다”고 강조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또 현재 검찰과 대검찰청의 과학분석팀, 미술전문가 등이 검증을 진행 중인 상황에서 천 화백 유족 측이 선정한 감정단 자료가 일방적으로 공개된 데 대해 유감을 표명하고 “감정단 보고서에 미인도와 다른 천경자 화백 작품과의 차이점만 기술되고 공통점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는 것은 위작 결론을 전제로 한 감정과 분석임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천경자 <미인도>에 대한 첫 진위시비는 1991년에 일어났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움직이는 미술관’을 운영하면서 원작을 복제해 판매하던 중 복제에 의구심을 가진 작가가 원작을 직접 보고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시작되었다. 천경자의 위작 주장에 대해 국립현대미술관은 진위를 가리기 위해 X-ray, 적외선, 자외선 촬영등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하였고, 한국화랑협회 미술품감정위원회는 1991년 4월 11일 진품이라고 판정하였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앞으로 위작임을 확증할 수 있는 증거가 밝혀지면 받아들이겠다”는 단서를 붙인 끝에 진품임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 소식을 접한 누리꾼들의 의견은 서늘하다. 한 누리꾼은 “천경자 화백은 이 사건으로 작품 활동을 그만뒀으며, 위조범은 이미 자백했다”며 “국립중앙미술관과 화랑협회만이 이 작품을 진품이라 말한다”고 말했다. 이 누리꾼은 “더러운 권위주의에 침을 뱉고 싶은 마음”이라고 말했다. 다른 누리꾼은 “‘내 그림도 못 알아보겠냐’며 붓을 꺾으셨던 천경자 화백을 생각하면 너무 어이없고 화가 나는 사건”이라고 평했다. 누리꾼은 “그냥 위조범 권춘식의 작품이었다”며 “권춘식은 한 차례 진술을 바꿔 본인이 <미인도>를 그리지 않았다고 주장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화랑협회 임원의 회유 때문”이라는 글을 남겼다. 이 누리꾼은 “화단권력 전부가 한 화가를 매장시켰다”고 말했다. 또 다른 누리꾼은 “작가 본인이 아니라는데, 그리고 그리는 방식이 완전 다르다는데 자존심이나 세우려고 한다”고 말했다. 온라인 커뮤니티 사용자들은 “본인이 아니라는데 우길 걸 우겨야지” “천경자 작가를 얼마나 더 욕보일 셈인가” 등의 반응을 보였다.
#논란 #천경자 #위작 #미인도
온라인뉴스팀 2016.11.05 10:58
연예
‘리얼스토리 눈’ 천경자 죽음...위작 논란 다시 불붙어천경자 화백의 큰딸이 왜 그의 죽음을 숨겼을까. 3일 오후 방송된 MBC <리얼스토리눈>에서는 최근 천경자 화백의 큰 딸이 그의 죽음을 알리지 않아 논란을 불러일으킨 사건에 대한 내용을 그렸다. 위작사건 등으로 한국에서 큰 영향력을 불러일으켰던 천경자 화백은 지난 1998년 미국으로 건너가 큰딸과 지내면서 외부와 접촉하지 않고 살았었다. 그런 그가 지난 8월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져 화제를 불러일으켰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지낸 것으로 알려진 큰 딸은 다른 가족들에게 어머니 천경자의 사망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또한 시신이 어디에 묻혔는지도 알리지 않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 큰딸 외에 다른 유족들은 “이런 상황이 얼마나 기가 막히냐”고 심경을 밝혔다. 지난 8월 천경자의 큰딸은 관람객이 없는 시간을 틈타 그의 작품이 전시된 서울시립미술관을 찾았다. 그는 홀로 유골함을 들고 그 곳에서 작품을 관찰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그의 죽음이 알려지고, 다른 유족들은 기자회견을 열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리얼스토리 눈
엔터팀 2015.11.03 22:25
생활
천경자 화백 추도식, “미인도 위작사건 논란 안타까운 사건”…추도위원장 추모사천경자 화백 추도식 30일 오전 10시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고 천경자 화백의 추도식이 열렸다. 1층 로비에는 250여 명의 추도객이 모여 명복을 빌고 헌화를 했다. 추도위원장을 맡은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은 “천경자 선생님은 근대 학파를 대표하는 여류 화가로서 추앙받아왔다”며 “시간을 초월한 이국적이고 환상적인 그림들은 글과 교류하며 참으로 아름다운 시절을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지난 8월 6일 91세로 별세한 고 천경자 화백 추도식이 30일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열렸다. 장녀 이혜선 씨를 제외한 고 천화백 유족들의 주최로 열린 추도식에서 유가족들이 헌화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이어 “1991년 미인도 위작사건 논란은 천 화백의 화가로서의 생명을 잃게 한 참으로 안타까운 사건이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 화백이 한평생을 통해 보여준 예술에 대한 애정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후대에게 남을 것”이라고 추모했다. 유가족 대표로 나선 장남 이남훈씨는 “오로지 바라는 것은 어머니께서 그토록 돌아가고 싶어하던 한국으로 돌아오셨으니 편히 쉬시는 것”이라며 천 화백의 회고록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마지막 인사를 갈음했다. “서울에 새 눈이 내리고, 내가 적당히 가난하고, 이 땅에 꽃이 피고, 내 마음속에 환상이 사는 이상 나는 어떤 비극에도 지치지 않고 살고 싶어질 것이다. 나의 삶은 그림과 함께 인생의 고달픈 길동무처럼 멀리 이어질 것이다.” 지난 8월 6일 91세로 별세한 고 천경자 화백 추도식이 30일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열리고 있다.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천경자 화백 추도식
#천경자 화백 추도식
온라인뉴스팀 기자 2015.10.30 19:09
문화/과학 문화내시경
[문화내시경]위작 논란, 미술계 고질병 드러나사실 3년 전부터 이우환의 위작이 대량 유통되고 있다는 루머는 각종 아트페어와 전시장을 통해 알음알음 나돌았다. 하지만 미술계는 침묵했다. 그러던 중 지난해 12월 K옥션 경매에서 그의 그림 이 약 5억원이라는 고가에 낙찰되면서 위작 논란은 재점화됐다. 감정서가 조작되었음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미술계가 발칵 뒤집혔다. 일련번호가 중복된 또 다른 작품이 등장하는가 하면 감정을 맡은 한국화랑협회가 감정서 위조를 알고도 묵인했다는 주장까지 제기되면서 사건은 일파만파 번졌다. 경찰이 수사에 나섰고, 압수수색과 함께 화랑 관계자들이 줄줄이 입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경찰은 이미 진위 감정을 맡긴 10여점의 작품을 포함해 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분석을 의뢰했다. 허나 이우환은 지금까지 “내 작품은 고유의 호흡으로 그리기에 모방하기 어렵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채 자신의 모든 그림에 가짜는 없다고 못 박아 왔다. 반면, 주변 분위기는 왠지 위작에 기우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터질 게 터졌다는 표정도 없지 않다. 위작 논란에 휩싸인 이우환 작가의 작품 . / K옥션 제공 어쨌든 이미 오래전부터 거론되어 온 이우환 작품 위작 유통 논란은 다음과 같은 3개의 과제를 표면화시켰다. 즉, 경매사와 특정 화랑이 유착되어 미술시장을 주도하는 기이한 구조, 공인감정기구 없이 신뢰하기 힘든 상업화랑 중심의 감정기관 및 부실한 진위 감정 시스템, 작가 이력에 대한 데이터 부족과 유통환경의 불투명성 등의 고질적인 병폐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위 세 가지는 위작 논란 때마다 판박이처럼 되풀이된 것이기도 했다. 이중섭이나 박수근, 백남준 작품 위작 사건이 불거졌던 과거에도 동일하게 지적받은 문제였다. 하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미술계는 그때마다 대충 봉합했고, 딱히 뚜렷한 책임과 결과, 실질적 대안조차 제시하지 못했다. 그저 입으로만 신뢰도 회복을 외치며 시간의 망각 속에 기대는 게 전부였다. 하면 이번엔 확연히 나아질까. 아닐 것이다. 지금이야 야단법석 소란스럽지만 그래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 자명하다. 언제나 그러했듯 잘못된 것을 바꿀 의지도, 노력도, 조직도 없는 탓이다. 믿기지 않을 만큼 한심한 형국이나 한국 미술계는 원래 그렇다는 ‘체념’이 정답 아닌 정답이다. 이는 단지 위작 문제를 넘어 다양한 부분에서 늘 도돌이표를 그리고 있는 역사만 봐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린 여전히 청년작가들에게 공정한 기회를 주고 있지 않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의 대상이자 수단이다. ‘갑질’도 중단되지 않았다. 지원기금을 이용한 정부의 ‘갑질’만큼 독하진 않으나 인건비도 주는 않는 미술계의 ‘갑질 사슬’은 고래심줄처럼 질기게 이어지고 있다. 이뿐 아니다. 작가를 대상으로 한 화랑들의 불공정한 관행 역시 청산되지 못했으며, 하루가 멀다 하고 운명을 달리하는 예술가들이 존재하지만 예술인복지는 생각보다 가깝지 않다. 그럼에도 미술인을 대변하는 단체는 드물다. 사익과 욕망의 화로로 변질된 지 오래다. 이밖에도 한 줄기 희망마저 거세하는 현재진행형 ‘흑역사’는 넓고도 짙다. 그만큼 개선 요구도 숱했다. 하지만 바뀐 건 거의 없다. 대신 그 자리엔 밥그릇, 소탐대실, 근시안, 이기주의가 들어섰고, 재능기부, 생존, 배타성, 외빈내빈이 자라났다. 끝없는 신뢰도 추락과 럭셔리 코스프레라는 양대 키워드도 동시대 한국미술계를 이해할 수 있는 슬픈 명사다.
2016.01.25 16:32
문화/과학 우정이야기
[우정이야기]우표전시회에 위작 전시국내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대한민국 우표전시회가 지난 7월 말 서울 코엑스에서 열렸다. 매년 열리는 행사지만 53번째를 맞은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관람객이 많았다. 코엑스 전시장에 전시된 1억6000만원짜리 전지우표에 몰린 사람들과 위작 논란을 부른 문위우표 초일봉투. 우표 좋아하는 사람들 눈에는 그저 반가울 따름인 이런 분위기는 어떻게 생겨난 걸까. 관람인파는 한마디로 홍보 덕택이다. “이번 전시회에 가면 1억6000만원짜리 국내 최고가 우표전지를 볼 수 있다”고 신문·방송에서 일제히 보도한 것이다. 기사의 근거가 된 우정사업본부 발표자료를 보자. “평가액이 1억6000만원에 달하는 우리나라 최고가 희귀우표인 ‘산업도안 보통우표 20환 물결무늬 투문전지’의 실물이 일반인에게 최초 공개된다”고 돼 있다. “이 우표는 1955년에 발행돼 완전한 전지 형태로 남아 있는 유일한 우표”라는 설명도 붙어 있다. 국내에도 고급 아우디 한 대 값의 우표가 있다는 사실에 국민들은 놀라고 신기해했다. 그런데 우표전지를 보면서 한 번쯤 의문을 떠올릴 법하다. ‘1억6000만원’이라는 가격은 누가 어떻게 매긴 걸까. 통상 가격은 수요 공급의 법칙에 의해 결정된다. 매도자와 매수자가 합의해 거래가 이뤄지는 지점이 시장가격이다. 그러나 1억6000만원은 시장의 거래가가 아니다. 전문가들이 도감(圖鑑)에 적어놓은 평가액으로 실제 거래가와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우표 전문수집가인 장세영씨는 “실제 거래가 이뤄진다면 2억원 이상 갈 것”이라고 했고, 익명을 요구한 다른 전문가는 “도감가는 부풀리기가 심해 그보다 적을 것”이라고 했다. 시장가격을 가늠하기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쉽지 않은 것이다. 이에 대해 소장자인 갑신우표회 심재만 회장은 “우정사업본부의 요청이 있어 일반에 공개했을 뿐 당분간 팔 생각이 없다”고 말해 궁금증은 한동안 이어지게 됐다. 문제는 전지우표와 함께 전시된 문위우표 봉투에 있다. ‘문위우표가 첩부(貼付)된 봉투-1884년 11월 18일‘이라는 제목 아래 전시된 흰 종이봉투에는 5문짜리와 10문짜리 문위우표가 붙어 있고, 그 우표 위에 당시 한성을 뜻하는 ‘京’자와 날짜 도장이 찍혀 있다. 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행된 우표와 우편인이 소인된 봉투’라는 소제목 아래 “문위우표는 갑신정변의 실패로 말미암아 20여일의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우편인이 찍혀 사용된 것은 극히 소량 발견되었다. 특히 우표가 붙어 있는 봉투는 본 전시물 이전 발견된 바 없으며, 2002년 모 방송국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처음으로 알려졌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우정사업본부 발표대로 이 전시물이 “문위우표가 발행된 첫날 날짜 도장을 찍은 초일봉투”라는 것이다. 문위우표 초일봉투는 한국의 우표수집가라면 꿈에서라도 보고싶어 하는 귀중품이다. 지금까지 공식 확인된 적이 없어 나오는 순간 한국 우정사를 새로 써야 할 만큼 중대한 발견이다. 평가액도 10억원은 족히 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그러니까 만약 이번 전시물이 진짜 문위우표 초일봉투라면 홍보의 초점은 1억6000만원짜리 전지우표가 아니라 여기에 맞춰졌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 봉투가 부각되지 않은 것은 주최측에서 그런 의미를 몰랐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사정이 있어서일까. 문위우표 초일봉투는 2002년 KBS ‘진품명품’ 프로그램에 50대 남자가 가지고 나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당시 방송에선 ‘진품’으로 판정하며 평가액을 1억원으로 산정했지만, 다수의 전문가들은 그 판정이 잘못됐다고 보고 있다. 흔해 빠진 미사용 문위우표 위에다 누군가가 날짜 도장을 임의로 찍은 ‘위작’ 봉투라는 것이다. 실제 진위가 공식 확인된 적은 없지만 그걸 진품으로 믿는 전문가는 현재 없다. 전시 주최측의 설명에 따르면 그때 그 봉투라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대한민국 우표전시회에서 위작을 내놓은 셈이 된다. 한국전통우취연구회의 한 회원은 “결코 전시되어서는 안 될 것이 전시됐다”고 말했다. 큰 망신이라는 것이다.
이종탁 출판국장 2011.08.10 15:54
사회 우정이야기
[우정이야기]국내 첫 ‘위작우표’ 감정 나왔다"108~110년 전 소인이 찍힌 우표는 진품이 아니다.” 한국 우취계(郵趣界)의 해묵은 숙제인 ‘공문우편 미스터리’에 대해 우표 실물이 위조됐다는 한국우취연합의 감정 결과가 나왔다. 문제의 우표가 위조됐다면 이 우표로부터 제기되는 근대 우정의 풀리지 않는 의문은 모두 의미를 잃는다. 우정 역사를 새로 쓰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같은 우표를 놓고 외국 전문가는 진품이라고 판정한 적이 있고, 의뢰자 측에서 감정 결과에 승복하는 것도 아니어서 논란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 (왼쪽) 우취연합이 의뢰자에 보낸 감정통지문. (오른쪽 위) 위작 판정이 난 공문용 우표. (오른쪽 아래) 스위스의 전문가가 진품이라고 판정한 감정서. 우취연합은 한국 우취계를 대내외적으로 대표하는 공식 기관이다. 이곳에서 감정위원회를 구성해 내린 결론은 공적 권위가 있다. 연합이 생긴 이래 우표의 진위를 판정하기 위해 감정위원회를 구성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역사적 의미도 크다. 공문용 우표 논란이 처음 제기된 것은 1990년대 중반이다. 재독 우취전문가 이기열씨가 프랑스 경매장에서 구입한 것이라며 의문의 우표를 제시한 것이다. 이씨가 말하는 공문용 우표는 근대 우정의 문헌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우표 발행기록은 문위우표(1884년)-태극우표(1895년)-대한가쇄우표(1897년)-이화보통우표(1900년 1월)-일자첨쇄우표(1900년 2월) 순으로 돼 있다. 그런데 이씨는 대한가쇄와 이화보통 사이에 또 하나의 우표를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가쇄(加刷)우표는 1897년 국호를 조선국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면서 종전에 쓰다 남은 태극우표에 글자를 덧씌워 인쇄한 우표다. 태극우표에 씌인 ‘朝鮮’이란 글씨 위에 ‘大韓’을, ‘죠선’ 위에 ‘대한’을 날인했다. 일자첨쇄(壹字添刷) 우표는 신문발송 우편요금으로 규정된 2리(1푼)짜리 우표가 없자 태극우표에 한자로 壹, 한글로 일, 아라비아숫자로 1자를 붉은색 또는 흑색으로 찍어 사용한 우표다. 그런데 이 두 종 외에 가쇄와 일자첨쇄를 동시에 한 우표가 있으며, 그게 공문우편에 쓰였다는 게 이기열씨의 주장이다. 일자첨쇄가 공식기록보다 2년 앞선 1898년(광무2년) 이미 나왔다는 것이다. 이씨는 그 증거로 ‘춘천 광무2년 10월’ 등의 일부인이 찍힌 우표 이미지를 공개했다. 한국 우취계는 발칵 뒤집혔다. 사실이라면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온 한국 우정사는 엉터리란 얘기다. 정부의 공식 간행물인 ‘한국우정100년사’ 등의 사료도 모두 고쳐 써야 한다. 우정사의 근본이 흔들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우취계는 지난 10여 년간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뭔가 주장하려면 문제의 우표에 대한 진위 판단이 전제돼야 하는데, 100년도 더 된 우표를 감정할 전문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기열씨는 문제의 우표를 내보이며 수차례 “감정해달라”고 촉구했으나 우취연합은 번번이 묵살했다. 그러던 중 이씨 주장에 동조하는 재미 과학자 이강욱씨(2008년 한미학술대회 대회장이기도 하다)가 2006년 우취연합의 간행물인 우표지에 공문우편에 관한 논문을 5회에 걸쳐 연재했다. 이에 우취전문가인 김요치씨가 반박 글을 싣는 등 논쟁이 뜨거워졌다. 더 이상 두고볼 수 없다고 판단한 우취연합은 이씨에게 “실물을 보내면 감정하겠다”고 했고, 이씨는 우표 8장을 제출해 사상 최초로 공식 감정이 이뤄진 것이다. 우취연합이 의뢰자 이씨에게 보낸 감정 결과 통지문은 딱 두 줄이다. “대한제국 일자첨쇄 우표는 법적 제원 및 준용기준에 불합치한다”는 것과, “의뢰품의 가쇄 및 첨쇄는 후날(後捺)되었다”는 것이다. 전자는 그 당시 일자첨쇄 우표가 나올 수 없으므로 역사적으로 모순된다는 뜻이고, 후자는 누군가 원래의 우표에 훗날 덧칠했다는 뜻이다. 강윤홍 감정위원장은 “사진 판독 결과 가짜라는 결론을 얻었다”며 “상세한 내용은 추후에 밝히겠다”고 했다. 이에 대해 이기열씨는 “이의신청을 하고 싶으나 공정하고 과학적인 재감정이 어렵고, 우취연합이 틀려도 틀렸다고 할 기관이 없어 걱정”이라며 불만을 나타냈다. 이 우표는 국내에도 일부 소장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이번 가짜 판정은 막대한 재산상 손실을 의미한다. 이 우표의 현재 가격은 알려진 바 없으나, 1980년대 말 2500달러에 한 쌍이 팔린 적이 있다고 이기열씨는 전했다. 그로부터 20년도 더 지났으니 어마어마한 액수가 걸린 진위 논쟁인 셈이다. jtlee@kyunghyang.com
2008.04.03 00:00
사회
[간도를 되찾자]"백두산정계비는 후인의 위작"청나라 조정은 19세기 말 조선인의 간도 거주가 크게 늘어나자, 조선-청나라 간 국경담판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인식했다. 국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양국은 1885(을유)년과 1887(정해)년 두 차례 담판과정을 거쳤으나 명확한 결론을 얻지 못했다. 1885년 1차 담판 시 양국은 세 가지 점에서 이견을 보였다. ▲청조는 도문강(圖們江)을, 조선은 목극등의 정계비를 중심으로 정계를 하려고 했다. ▲청조는 토문(土門)과 도문 을 같은 강으로, 조선은 서로 다른 강이라고 했다. ▲도문강의 발원지를 청조는 홍단수(紅丹水)로, 조선은 홍토수(紅土水)로 보았다. 1차 담판의 핵심은 토문과 도문이 같은 강일까 다른 강일까라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청조는 토문-도문-두만(豆滿)이 같은 강이라는 것을 확증하기 위해 다양한 증거를 들었다. 1887년 2차 담판에 대해 중국은 ▲양국이 토문과 도문이 같은 강이라고 인정했다고 주장했다. ▲도문강은 무산 이동(茂山 以東)에서 녹둔도(鹿屯島)로 이어지는 것임을 확인했다고 한다. ▲도문강 상류는 무산 이서에서 석을수(石乙水)와 홍토수(紅土水)가 합류하는 것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청조는 석을수를, 조선은 홍토수를 발원지로 주장해 양국은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1차 회담 시 조선은 토문강 답사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정계비를 조사하고 난 후에 감계회담을 하려고 한 반면, 청조는 도문강이 양국의 국경임을 전제로 해 강의 여러 지류 가운데 어느 것을 본류로 하는 것만 정하려는 태도를 취했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회담에 임하는 양국의 기본 자세가 매우 상이했다는 것을 강조했다. 담판에서 청조는 양국의 완충지대가 청조의 영토라고 기정사실화하고 백두산정계비도 후인의 위작이 아니면 당시의 착오라는 것을 강조했지만, 조선은 토문강 이남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토문-도문-두만은 같은 강" 2차 담판에서의 성과에 대해 한국에서는 당시 조선 대표 이중하가 청조의 강압에 의해 도문과 두만이 동일한 강임에 동의했으나 토문과 두만이 동일한 강이라고 인정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청조는 조선인이 정계비를 옮겨놓았다고 하면서 무산 이하 두만강을 경계로 하고 두만강의 지류 중 가장 남쪽에 있는 서두수(西豆水)로 경계를 삼으려고 하자, 이중하는 두만강의 발원지를 정계비와 가장 가깝고 제일 북쪽에 위치한 홍토수로 주장, 결론을 얻지 못했다. 조선 정부는 담판 시 청조의 강압에 의해 이중하가 홍토수를 주장한 것으로 보고, 1887년 조선 대표 이중하의 홍토수 주장은 정부의 의견이 아니므로 이를 부정한다는 것과 새로 국경회담을 열어야 한다는 것을 1888년 5월 16일 청에 통보했다. 김노규의 〈북여요선(北輿要選)〉(1903)에서는 양국의 의견 차이가 현격했기 때문에 2차 담판도 결론을 얻지 못했다고 했다. 1, 2차 국경담판에 대해 양국이 중점을 두어 강조하고자 하는 내용은 분명 차이가 있다. 중국은 양국이 합의에 이른 것처럼 주장하고, 조선은 결론을 얻지 못한 것을 강조하고 있다. 양국 사이의 이견 없는 공개적인 국경담판은 역사적인 미해결 과제로 남겨져 있는 셈이다. 이는 한국(통일한국)이 관심을 갖고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이다. 박선영〈포항공대 교수-중국 근현대사〉
2004.04.29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