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경향신문

  • 레이디경향

    • 유엔 인도적 지원조정실 손귀엽 국장에게 듣는 국제기구 진출기

      화제

      유엔 인도적 지원조정실 손귀엽 국장에게 듣는 국제기구 진출기

      청소년들은 물론 대학생과 직장인들까지 국제기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요즘, 유엔 인도적 지원조정실 손귀엽 총괄기획국장의 이야기는 많은 국제기구 진출 희망자들에게 모범답안을 제시한다. 유엔개발계획(UNDP)의 가장 낮은 직급에서 시작해 18년 동안 소말리아와 라오스, 미국, 동티모르 등에서 근무하고 2011년 유엔 OCHA로 옮겨 관료직 중 가장 높은 직책인 총괄기획국장에 오르기까지, 그녀의 성공 스토리를 들어봤다. 어린 시절 품었던 아프리카를 향한 꿈 작은 키에 까무잡잡한 피부, 허스키한 목소리로 거침없이 말하는 손귀엽(45) 국장의 직업은 국제공무원이다. 유엔 사무국 중 하나인 OCHA의 최고 책임자로,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자연재해나 무력분쟁 등 긴급 상황에 대비해 여러 인도주의 업무 수행 주체들을 조정하고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 아프리카와 중동, 동남아 등의 긴급구호 현장과 분쟁 지역을 누비며 활약하고 있는 손귀엽 국장의 오늘은 어린 시절 아프리카에 대한 꿈으로부터 시작됐다. “어렸을 적 저의 꿈은 세상 곳곳을 최대한 많이 돌아다녀보는 것이었어요. 그중에서도 왠지 모르게 아프리카만큼은 꼭 가보고 싶었죠. 무엇 때문에 이러한 꿈을 갖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꿈은 항상 마음속에 숨쉬고 있었어요.” 아프리카를 향한 꿈은 곧 더 큰 세상을 향한 동경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동경은 고등학교 시절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제가 미국에 유학을 가게 된 건 피아노와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서였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피아노에 재능이 없구나’라는 걸 깨닫게 됐죠. 현실적으로 나에게 재능이 없고 피아니스트로 성공하지 못할 거라는 걸 직시한 거예요. 결국 항상 관심을 가지고 있던 아프리카와 세계 정치를 배우기 위해 음악의 길을 포기하고 정치학을 선택했어요.” 그녀는 영국 우스터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며 오랜 시간 가슴속에서만 품고 있던 열망을 불태웠다. 재학 중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정책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하는 등 당시 정치적 이슈와 연관된 많은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매 여름방학마다 아이티와 케냐 등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는 데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한번은 아이티에 있는 ‘Death and Dying Institutes’라는 시설에서 일을 하게 됐어요.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 중 두 곳인 인도의 캘커타 빈민촌과 아이티의 포트아우프린스 빈민촌에 있는 이곳은 테레사 수녀가 에이즈 환자들이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건립한 시설이에요. 그곳에서의 경험이 저에게 앞으로 무엇을 하며 인생을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게 하는 중요한 의미가 됐어요. 가난한 사람에게 죽음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기본적인 인권으로서의 생존권과 존엄하게 죽을 수 있는 권리가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게 됐고요.” 콜럼비아 대학원 진학 후에는 3개월간 나이지리아에서 가난한 여성들에게 사업의 기반을 마련해주기 위한 대출제도를 설계하는 지역 NGO에서 일하기도 했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저와 같은 경험을 가진 아시아 여성들이 많지 않았어요. 다양한 나라에서 직접 몸으로 부딪쳐 얻은 경험들, 그리고 무엇보다 제 안의 열정이 유엔에 입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나 싶어요.” 리더십과 매니지먼트, 휴머니티에 기반한 전문성 중요 1994년, UNDP에서 가장 낮은 직급으로 처음 일을 시작해 지금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시간이 흘러왔는지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모든 열정을 다 바쳐 일했다. 그녀의 인생을 영화로 찍으면 장르는 아마 스펙터클 스릴러 액션일 것이다. “소말리아에서 일할 때는 직무 중 사망한 지역 유엔 경비원의 가족이 보상금 액수에 항의하며 저를 납치하겠다고 협박한 적이 있어요. 쓰나미가 덮친 직후 인도네시아의 아체를 방문했을 때 받은 충격은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홀로코스트 영화를 보는 듯 시체가 산을 이룬 엄청난 참사의 현장을 목격하기도 했죠. 그곳에서 가족을 모두 잃은 한 할머니를 만난 것이 기억나요. 자식과 손자들을 잃고 혼자 남겨진 절망적인 상황에서 한때 살아갈 이유를 잃어버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항상 희망은 있다’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우리가 이토록 풍요롭고 안전한 환경에서 사는 것은 크나큰 행운이에요. 모든 사람이 이렇게 안전한 환경에서 살고 있지는 않아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그들과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더욱 많은 사람들이 아셨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유엔 내에서 오랜 기간 근무했던 사람으로서 이 분야에서 요구되는 핵심적인 능력으로 리더십과 매니지먼트, 그리고 프로페셔널리즘을 꼽았다. 다양한 실무 경험 역시 중요하다. 무엇보다 실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실수로부터 배울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저 역시 그간 많은 실수들을 했고 그러한 실수들을 통해 저의 처신과 능력을 보다 좋은 방향으로 개선하는 법을 배웠어요. 실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이런 실수들을 통해 더욱더 많은 것을 보다 빠르게 배우게 될 거예요. 지금 저의 위치가 되면 사람들은 제 작은 실수조차 용납하지 않습니다. 젊어서 일을 시작할 때는 배워가는 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해요.” 자기 자신을 잘 알고 무엇이 자신의 성공을 위해 필수적인 요소인지를 자각하는 것 또한 그녀가 강조하는 부분이다. 실수할 수 있는 여유와 창의력, 혹은 혁신을 시험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멘토를 찾는 것도 중요하다. 국제기구 진출을 희망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모든 꿈을 가진 이들에게 해주고픈 조언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세계는 빠르게 변하고 있고, 세계화와 기술의 발달로 변화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습니다. 빠르게 배우고, 빠르게 적응하고, 지식과 정보를 더욱더 빠르게 받아들이는 능력이 요구되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단 사람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잊지 마세요.” 손귀엽 국장에게 듣는 국제기구에 대한 궁금증 일문일답 Q 여성으로서 국제기구 진출과 근무 환경은 어떤가요? A 국제기구는 기본적으로 여성의 비율을 고려한 채용 절차를 밟습니다. 여성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에 선발 과정에서 동점자가 생기면 여성 지원자를 우선적으로 뽑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성 근무자로서 근무 환경에 대해 보자면 출산휴가를 예로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보통 출산휴가가 4개월 주어지는 것으로 보아 다른 여타 직업보다 여성에게 적합한 근무 환경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Q 유엔에 입사하기 위해서는 어떤 언어가 유리할까요? A 절대적으로 영어가 중요하며 또 다른 언어도 하나 정도 할 수 있는 게 좋겠죠. 아프리카 쪽을 생각하면 프랑스어가 중요할 것이고, 스페인계 사람들의 국제기구 진출이 많으므로 스페인어도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랍어는 수요에 비해서 할 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 역시 많이 필요할 듯합니다. Q 봉사활동은 어디에서 하는 것이 좋을까요? A 개발도상국과 같이 많은 도움이 필요한 나라에 봉사활동 가는 것을 추천합니다. 아는 나라보다는 모르는 나라에 가서 경험한다면 물론 처음에는 어렵겠지만 도움이 될 것입니다. Q 선호되는 직업이나 경력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A 유엔에서는 선호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즉 서류상의 경력이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유엔 직원으로서의 자질과 전문지식입니다. 이것은 필기시험과 면접시험으로 확인하게 됩니다. 따라서 모든 관련 분야가 유리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절대적으로 유리하다고도 단정할 수 없습니다. *국제기구 진출 방법 ●JPO(Junior Professional Officer) 정부가 국제기구에 수습 직원을 일정 기간 파견하는 제도로 사회 초년생이 국제기구에 들어갈 수 있는 지름길로 통한다. 매년 1회 외교통상부가 주관하는 JPO 시험에 합격해 최대 2년간 실무 경험을 쌓고, 성과가 우수하면 정규 직원으로 채용될 수 있다. ● YPP(Young Professional Programme) 일부 국제기구에서 미진출 혹은 과소진출 상태에 있는 회원국 국민을 위해 운영하는 특별 프로그램이다. 일정 기간 유능한 젊은이들을 수습 직원으로 근무하게 한 뒤 성과가 우수하면 정규 직원으로 채용한다. ● Internship 정기적 인턴 선발 외에도 필요에 따라 수시로 모집한다. 유엔 사이트(www.un.org/youth)에서 여러 기구의 인턴십 기회를 확인할 수 있다. ● UNV(UN Volunteers) 여러 유엔 기구들의 개발, 인도적 지원, 평화 유지 업무와 연계해 활동하고 있으며 짧으면 3개월에서 길면 2년 정도 봉사하게 된다. 향후 유엔 정규직에 지원하는 데 필요한 업무 경험을 쌓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사이트(www.unv.org)를 방문해 희망자 명부에 자신의 이력과 관심 분야를 등록하면 된다. ● 공석공고 빈자리가 날 때마다 지원자가 직접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전 세계 사람들과 경쟁해야 하므로 전문 분야에서 5~10년 정도의 경력을 쌓고 전문성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박동민>

      2012.08.20 13:10

    • 화제

      이야기를 가져야 세계를 움직인다! 전 유엔거버넌스센터 김정태

      꿈꾸어 이룬 일을 그만두고 다른 꿈을 위해 떠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드물다. 사회적 기업가로 변신하기 위해 미래가 보장된 국제공무원직을 사임하고 유학을 준비하는 전 유엔거버넌스센터 팀장 김정태의 행보는 그가 걸어갈 길에 대한 기대를 더욱 크게 한다. 김정태(34) 전 팀장은 어렵게 관문을 통과한 유엔거버넌스센터 홍보팀장을 그만두고 곧 영국 유학길에 오를 예정이다. 그래도 백수와는 거리가 멀다. 베스트셀러 「스토리가 스펙을 이긴다」 등 열 권에 달하는 책을 쓰거나 번역한 작가이며 ‘저자 100명 발굴 프로젝트’를 통해 이미 30명가량의 필자를 발굴한 ‘휴먼 벤처’의 운영자이기도 하다. 평범한 오늘의 일상에서 구체적인 스토리를 길어 올리는 재미, 작은 가능성들과 조우하는 경험은 그의 것만이 아니다. 유엔, 반기문 총장과의 각별한 인연 유엔거버넌스센터는 유엔 회원국이 자국 환경을 개선하고 공공 분야의 역량을 강화하도록 돕는 사무기구로 유엔 산하기구 중 유일하게 서울에 본부를 두고 있다(‘거버넌스’는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정부나 기업, 시민사회 등이 함께 결정하고 논의해가는 과정을 말한다). 그는 2007년 입사 당시에도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스토리의 힘으로 뚫은 전력이 있다. 당시 그의 나이가 서른, 대학원을 졸업했지만 유엔본부를 비롯한 인턴 경력 외에는 남다른 스펙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그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최종 선발된 데는 그간 꾸준히 써온 논문과 에세이의 공이 지대했다. 역대 유엔 사무총장에 대해 쓴 그의 논문은 마침 반기문 총장의 유엔 입성으로 주목을 받아 「유엔 사무총장」이란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덕분에 이듬해인 2008년 반기문 총장이 방한했을 때 언론 담당 공식 수행원으로 각별한 연을 맺을 수 있었다. “제 전공은 한국사예요. 사회가 원하는 (스펙을 가진) 인재상은 아니었기 때문에 도전하거나 아니면 물러설 수밖에 없었어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오히려 약이 됐어요. 물론 저도 주목을 받고 최고가 되길 원했지만 장학금은 고사하고 자격증도 하나뿐이었어요. 고민하던 무렵 안도현 시인의 「연어」를 읽게 됐어요. ‘별을 더욱 빛나게 하는 까만 하늘처럼, 꽃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무딘 땅처럼….’ 이 문장이 제 삶의 표어가 됐어요. 모두가 장미고 별이면 아무도 반짝이지 못하지만 기꺼이 황무지가 되면 누군가를 아름답게 할 수 있어요. 누군가의 배경이 되어주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몰라요.” 월드비전 창시자 밥 피어스의 인터뷰도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아이들의 배고픔을 아파하는 마음으로 만들어진 월드비전은 세계 1백여 나라에서 1억 명의 아이들을 돕느라 동분서주하는 국제기구가 되었다. 국제기구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인턴십 경험이 중요하다. 이는 한국의 대학생에게 부족하다고 평가되는 실무 경험을 쌓는 것은 물론, 국내 인턴십과는 달리 곧장 실무에 투입되어 구체적인 업무 경험을 하기 때문에 이후 취업에도 유용하다. 유엔의 경우 연간 3천여 명의 인턴을 뽑고 있으며 기본적으로는 무급이지만 향후 유엔에서 근무하게 될 때 절대적인 도움과 기준이 되며 타이밍만 좋으면 유급 혹은 계약직으로의 전환도 가능하다. “한 번의 고배를 마시고 두 번째 겨우 합격해서 출근했어요. 첫날부터 국제회의를 하는 130여 개국 대표단에게 나눠줄 자료를 복사하라는 임무가 떨어졌는데 건물 지리에 익숙하지 않은데다 복사기 사용도 서툴러서 땀을 좀 흘렸어요. 결국은 복사본 중간에 빠진 부분이 발견되는 바람에 전부 회수해 다시 복사해야 했지요. 그 후에야 전문 직원이 하던 업무를 배정받아 인턴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을 하며 많은 배움과 보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국제기구에 지원하려면 해외 연수나 유학 경험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현지인 수준의 언어구사 능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학 서열화나 학벌지상주의 등의 병폐와 무관하게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고 시험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것을 명심하자. 김 전 팀장의 경우도 국내에서 학부와 대학원을 마치고 두 번의 인턴십을 해외에서 했을 뿐이다. 남을 돕고자 하면 움직이게 된다 원체 내성적이었던 그는 뜻하지 않게 이야기를 하거나 강의할 기회가 많아지면서 어느새 이를 즐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조언을 요청하는 사람들이나 후배를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재미도 쏠쏠했고, 스스로도 매번 새롭게 정리해 말할 수 있게 됐다. 세심한 기획과 투자로 세 명의 베스트셀러 작가를 만들었지만, 출판사와 컨설턴트 일은 월급조차 받지 않는다. 그저 즐겁기 때문에 하는 일이다. 이참에 그는 사회적 기업을 통해 조금 더 체계적으로 남을 돕기 위해 과감히 직장에 사표를 던졌다. 향후 1년간 런던 헐트경영대학원(Hult International Business School)에서 1년의 사회적 기업가 MBA 과정을 이수할 예정이다. 물론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앞으로 10년을 내다봤을 때 결코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직장생활은 당초 3년을 계획했는데 벌써 5년이 됐어요. 근무하는 동안 제 잠재력이나 관심 분야가 사회적 기업가 정신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한 덕분에 과감히 도전하기로 했어요. 자녀들에게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다면 지금의 도전이 설령 실패하더라도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용기가 없어 차마 하지 못했다면 나중에 얼마나 후회하겠어요.” 그에게는 텔레비전도, 차도 없다. 그렇다고 언제나 일만 하는 건 아니고 편리함과 순간의 즐거움을 포기하는 대신, 자신의 삶에 조금 더 주체적으로 다가가기 위해 노력한다. 5년여의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1시간 정도의 거리를 매일 걸어서 출퇴근하며 업무는 물론이고 상념을 가다듬었다. 그래서 남들보다 더 효율적으로 근무 시간을 활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얘깃거리가 없어졌다면 책을 읽거나 재능을 계발하는 데 투자하세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그저 사는 대로 살 수밖에 없으니까요. 남이 정해놓은 길이 아니라 각자의 삶을 디자인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걸으면서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삶을 이끌어가는 시간을 확보했어요. 작은 변화들이 모여서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는 거지요.” 남과 다른 삶은 언제나 듣는 이를 매혹시키는 힘이 있다. 그가 자신을,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에 게으르지 않은 까닭이다. 남들처럼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다. 연합동아리 활동을 통해 알게 된 부인 오사라씨와 결혼식 대신 아름다운가게의 공정무역 커피를 하객들과 함께 나누는 자리를 가졌다. 티백과 공정무역 커피 안내서를 함께 선물 포장하고, 시음 행사까지 진행했다. 그렇게 결혼식 아닌 결혼식이 무사히 끝나고 난 후에는 커피 구입 문의가 빗발치는 바람에 하객들의 ‘구매 대행’을 하느라 바빴다며 웃음을 지었다. “공정무역이라는 가치가 저희의 결혼과 개인적인 스토리를 통해 큰 호응을 얻은 셈이지요. 이렇게 가치 있는 ‘무언가’일수록 ‘이야기’라는 접촉점을 필요로 합니다. 사실 아내와 저는 거의 극과 극이라고 할 만큼 달라요. 아내는 암벽 등반을 좋아하고 국기원에 다니며 여자 축구단활동도 하는 열혈 여성이거든요(웃음). 결혼 초기엔 많이 싸우기도 하고 힘들었지만 지금은 타협점을 찾고 또 서로의 좋은 점을 본받는 중이에요.” 자상한 아빠가 아들에게 줄 수 있는 것 그래도 집에서 아이와 놀아주는 일에는 시간을 아끼지 않는 편이다. 이제 22개월 된 어린 아들에게 특별한 추억을 선물하기 위해 출장차 방문한 30여 개국에서 엽서를 써 보내기도 했다. “아이가 세계의 어떤 일이든 잘 반응할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아직은 글을 못 읽지만 나중에 좋은 추억이 되겠지요. 얼마 전 말라위(아프리카 남동부의 내륙국가)에서도 ‘여기는 초등학교에도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아. 너는 축복된 삶을 살고 있단다’라고 썼어요.” 그도 선물 같은 추억이 있기 때문에 아들에게는 더 좋은 추억을 선물하고 싶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글쓰기에 소질이 있으니 열심히 하라”라며 선물한 5단 자동 필통은 그의 잠재력에 불을 붙인 촉매제가 되었다. 글 쓰고 책 읽는 건 좋아했지만 우등생은 아니었다. 고교 시절 노력한 덕에 턱걸이로 명문대에 진학할 수 있었지만, 사실 뛰어나다고 할 만한 스펙도 갖추지 못했다. 그보다 훨씬 돋보이는 것이 바로 그의 ‘이야기’다. 좋아하는 일에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스스로 길을 정해왔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가진 사람은 스펙도 갖춰지는 것 같아요. 잘하는 것을 정하고 거기에 집중하다 보면 자연히 이뤄지니까요. 스펙을 얻는 것이 목적이 되는 순간 방황하게 되고 오히려 제대로 된 결과를 얻기가 어렵지요. 스펙은 미래에 뭘 할 수 있는지를 말해주지는 않으니까요.” 사람들이 유엔(UN)에 대해 자주 묻는 몇 가지 나중에 유엔에서 일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 - 유엔에 몸담고 싶다면 먼저 유엔에 대해 공부하고, 친구가 되세요. 그러고 나면 결코 힘든 일이 아닐 겁니다. 가난, 에이즈, 기근, 물 부족, 무장 분쟁, 난민, 인권 문제 등 그 어떤 나라의 어떤 기관도 유엔만큼 인류의 진실을 대면하려고 애쓰는 곳은 없습니다. 다그 함마르셸드 2대 유엔 사무총장이 “유엔은 인류를 천국으로 이끌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서 구출하기 위해 존재한다”라고 말했던 것처럼요. 현장 경험은 어떻게 쌓을 수 있나요? - 해외 현장 탐방도 좋지만 여의치 않다면 한국에서 진행되는 국제적인 프로젝트에 참여해 실질적 경험을 쌓으세요. 이를 토대로 얻은 문화적 감수성과 경험을 스토리로 잘 녹여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온라인 카페나 외교통상부, 유엔 관련 사이트 등을 통해 사례를 접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으니 잘 활용하면 됩니다. 영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해야 하나요? - 국제적인 기구이니만큼 해외 근무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영어 구사력은 필수인 셈이지요. 유엔 본부에서는 영어와 프랑스어를 공용으로 사용하지만 사무실에서는 대부분 영어를 쓰기 때문에 적어도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없는 정도가 되어야겠지요. 국제기구 초급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공식 영어 성적을 제출해야 함은 물론이고 국문 인터뷰, 영문 인터뷰 및 논술, 제2외국어 면접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김정태씨는… 고려대에서 한국사를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국제기구를 공부했다. 헤리티지재단 객원연구원, 유엔 사무국 컨설턴트 등을 역임했으며 2007년부터 지난 8월까지 유엔거버넌스센터 홍보팀장으로 근무했다. 비전과 리더십, 청년 역량 개발 등을 주제로 강의를 해왔고 「최신 유엔 가이드북」, 「유엔사무총장」, 「스토리가 스펙을 이긴다」 등 다수의 책을 썼다. 국제활동가, 사회적 출판기획가 등 다양한 포지션에서 이야기를 써 나가고 있는 이 시대의 젊은 리더 중 한 사람이다. 트위터 @theUNtoday <■글 / 위성은(객원기자) ■사진 / 이성원 ■장소협찬 / 작은숲(02-734-9465) ■참고서적 /「스토리가 스펙을 이긴다」(갤리온), 「최신 유엔 가이드북」(럭스미디어)>

      2011.10.07 11:32

    • [자녀교육 특집]세계에서 ‘가장 신뢰받는 지도자’로 선정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화제

      [자녀교육 특집]세계에서 ‘가장 신뢰받는 지도자’로 선정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한국인으로선 최초로, 역대 여덟 번째로 유엔을 이끌고 있는 반기문 사무총장이 취임 1년 6개월 만에 고국을 찾았다. 어려운 학창 시절을 거쳐 유엔 사무총장이 된 그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전하는 당부의 메시지.세계에서 가장 신뢰받는 지도자 한국인으로 최고 국제기구의 최고위직에 오른 반기문(64) 총장은 1백91개국 회원국이 가입해 있는 유엔과 1만4천8백 명의 다국적 직원을 거느린 유엔 사무국을 이끌고 있다. 그는 얼마 전 세계에서 ‘가장 신뢰받는 지도자’로 뽑히기도 했다. 지난 5월, 미국 메릴랜드대학의 국제정책태도프로그램(PIPA)이 운영하는 월드 퍼블릭 오피니언이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다. 20개국 국민을 대상으로 세계 주요 지도자 8명에 대한 신뢰도 조사를 실시한 결과, 반 총장이 유일하게 절반이 넘는 국가에서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로 뽑혔다. 비교 대상 8명의 세계 지도자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전 러시아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마흐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 페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 등이다. 반 총장 취임 후 1년 반을 돌이켜볼 때 누구나 이야기하는 건 그의 외교 활동이다. 불과 1년 반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상황을 미루어 짐작컨대, 그가 역대 유엔 사무총장 중 가장 많은 외교 현장을 돌아다닌 총장으로 이름을 남길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반 총장은 작년 1년 동안 6대륙 40개국을 방문했다. 올 들어서도 벌써 지구를 여섯 바퀴 돈 거리인 15만5천 마일을 날아다녔다. 반 총장은 세계 최악의 분쟁 지역으로 꼽힌 수단 다르푸르부터 지구 온난화 문제의 현장인 남극과 아마존에 이르기까지, 직접 발로 뛰며 국제 사회의 주목을 촉구했다. 그는 또 재난 지역을 찾아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하고 지원책을 모색했고, 식량 위기의 해결을 위해 로마에서 식량안보정상회의를 열기도 했다. 실로 눈부신 활약이다.1년 6개월 만의 고국 방문 지난 7월 초, 반기문 총장이 한국을 방문한다는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그가 유엔 사무총장으로 취임한 뒤 18개월 만에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한 것이다. 반 총장은 4박 5일 일정으로 한국을 찾았다. 7월 3일 오후 1시, 베이징에서 특별기 편으로 경기도 성남에 위치한 서울공항에 도착한 반 총장. 부인 유순택 여사와 함께 특별기에서 내린 그는 “정든 고국을 찾아와 국민들께 인사드릴 수 있어 너무 기쁘고 감개무량하다”는 소감을 밝혔다. 반 총장은 방한 기간 동안 이명박 대통령을 예방하고, 한승수 국무총리, 유명환 장관 등과 회담을 가졌다. 그는 한국과 유엔의 협력 관계와 국제 식량 문제 등에 대해 폭넓은 의견을 교환했고, 국제 사회 문제에 대해 우리나라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청했다. 반 총장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시장 개방으로 불거진 촛불 집회가 두 달 이상 지속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꺼냈다. 7월 4일 이뤄진 한승수 총리와의 공동 기자회견에서였다. “국민들이 정부를 적극적으로 믿고 정부가 정책을 추진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해요. 한국 정부와 국민이 이런 문제를 슬기롭게 잘 해결해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반기문 총장의 특별 연설을 경청하고 있는 부인 유순택 여사의 모습.방한 기간 동안 반 총장은 고향을 방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고향인 충북 음성에는 그의 노모가 머물고 있다. 고향을 방문한 반 총장은 어머니를 만나 얼싸안았다. 짧은 시간 동안 이뤄진 고향 방문이 많이 아쉬웠는지, 그는 “다음에 공식 방문이 아니고 휴가차 방문하면 많은 시간을 갖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속내를 내비쳤다. 나의 학창 시절 이야기 반 총장은 지난 7월 5일, 청주대학교에서 열린 ‘제14회 전국 대학생 모의유엔대회’에서 특별 연설을 했다. 당일 청주대학교는 반 총장의 연설을 듣기 위해 모여든 학생들과 반 총장의 방문을 축하하기 위해 참석한 지역 주민들로 붐볐다. 부인 유순택 여사와 함께 청주대학교를 찾은 그는 “젊은 얼굴들을 마주하고 보니 수십 년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라고 운을 뗀 뒤 자신의 학창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제가 대학교 1학년이던 1962년은 지금 여러분들이 보는 세상과는 많이 달랐어요. 그때는 문자 메시지가 아닌 편지를 주고받았고, 텔레비전은 흑백으로 채널도 한 개뿐이었어요. 전화기도 유선 전화기밖에 없었고, 유선 전화기마저 사용할 기회가 거의 없었죠. 음악은 검은 비닐로 된 둥근 디스크 판에서 흘러나왔고요. 컴퓨터도 없었고 인터넷도 없었어요. 그래도 우리에겐 꿈과 이상이 있었어요. 전쟁 세대였지만 마음속에는 평화와 안정, 그리고 밝은 미래에 대한 큰 희망을 품고 있었죠.” 학창 시절, 그저 열심히 공부하면 어떤 일도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다는 반 총장. 그는 이미 고등학교 3학년 때 그러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 반 총장이 충주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일 때, 대한적십자사 주관 전국학생영어웅변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해 백악관을 방문, 케네디 대통령을 만났다는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 경험은 당시 고등학생이던 반 총장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당시 저는 ‘미래의 나와 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생각했어요. 그때 외교관이 되면 조국을 위해서 훌륭하게 봉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을 먹게 됐죠. 그게 바로 제가 여기 서 있는 이유이고, 지금의 저를 있게 한 원동력이기도 해요.”한승수 국무총리와의 인연 반 총장은 젊었을 때 꿈과 열망을 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관한 또 하나의 사례를 들려주었다. 한승수 국무총리 이야기다. 그는 한 총리가 2001~2002년 유엔 총회 의장으로 지낼 당시 비서실장으로 함께 일한 바 있다. “한승수 총리가 유엔 총회 의장이었을 때 그분과 함께 일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어요. 그때 저는 그분이 국제 공동체에 봉사하겠다는 강한 열망을 갖고 얼마나 열심히 노력해서 그 자리까지 오게 됐는지를 알 수 있었어요. 그분은 1940년대, 춘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당시에 언젠가 유엔 총회의 의장이 되겠다는 꿈을 품었다고 해요.” 당시 한국은 유엔 회원국조차 가입되지 않았을 때이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꿈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유엔 옵서버로 참가한 뒤 30, 40년이 흐른 1991년이 돼서야 유엔 정회원국이 됐 다. 한승수 총리는 2000년, 유엔 총회 의장으로 선출됐다. “저와 그분 세대는 유엔이 우리나라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를 보며 자란 세대죠. 전쟁으로 찢겨진 가난한 한국에서 자랄 때 유엔은 우리에게 희망과 양식을 주었고, 안전과 존엄을 보장해주었어요. 이러한 경험이 공적인 봉사를 통해 우리가 받은 도움을 조금이나마 돌려주고 싶어 하는 한승수 총리나 저 같은 대한민국 국민을 키워낸 것이라고 생각해요.” 반 총장은 이날, 청주대학교에서 진행된 모의유엔대회에 대한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이 대회는 정말 좋은 훈련의 장이에요. 여러분은 어느 한 나라의 대표가 되어 그 나라의 입장에서는 동의할 수 없는 의견을 내세우는 여러 나라 대표와 회의를 해야 할 거예요. 여러분은 자신이 반대하는 의견들까지 분석하고 모든 당사자들에게 이익이 되는 건설적인 해결책을 이끌어내는 과정을 통해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는 훈련을 할 수 있어요. 미래에 필요한 리더십을 준비하는 데 외교적 기술을 기르는 것은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여러분이 실제로 일을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했으면 해요. 여러분과 저의 차이가 있다면, 저는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일을 하는 것이고 여러분은 유엔에서 논쟁 중인 여러 주제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뿐이니까요.” 이어 그는 젊은이들이 어떤 길을 선택하든, 관심을 유엔에 두고 유엔의 높은 목표를 지원할 수 있는 일을 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평화 유지 활동, 빈곤 구제, 기후 변화, 세계 보건에서 안보와 인권의 위협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은 사실 매우 해결하기 어려운 것들이에요. 그러나 유엔은 새로운 도전들에 잘 대처할 수 있다는 점을 계속해서 증명해왔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세계가 항상 의지할 수 있는 유엔을 만들어 가기로 결심했어요.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지원이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날 세계가 그 무엇보다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여러분의 에너지와 지성이에요.”한국의 젊은이들을 위한 조언 연설 말미, 반 총장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진심 어린 당부의 말을 전했다. 그 가운데 하나는 ‘현재에 안주하지 말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여러분은 안정적이고 부유한 나라에서 자라고 있어서 그런 환경에 안주하기가 쉬울 수 있어요. 하지만 여러분들의 현재와 하고 있는 일에 안주하거나 만족하지 말았으면 해요. 세계는 훨씬 넓고 커요. 여러분들이 여기 앉아서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도전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여러분은 변화의 세대예요. 변화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자신을 변화시킴으로써 세계를 변화시켜야 해요. 여러분이 혁신적인 방법을 고안해서 지구 공동체가 직면하고 있는 도전들에 맞서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거예요.” ‘변화’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던 그는 뒤이어 ‘세계 시민’이 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러분은 한국인이지만 그 경계를 넘어 또 세계 시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한국은 아직 세계 강대국이 아닐지 모르지만 앞으로 세계적인 국가가 될 수 있어요. 그리고 한국인은 세계 시민이 될 수 있죠. 여러분 나이에는 세계가 어떠해야 하고 그것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하고 싶다는, 여러분 자신의 꿈과 생각을 가져야 해요. 현실이라는 땅바닥에 두 발을 굳건히 딛고, 하늘의 별들(이상)에 두 손을 뻗어야 해요. 그런 뒤 하늘의 별들을 향해 날아올라가야 하는 거예요.” 반 총장의 특별 연설은 비록 길진 않았지만 강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그의 말은 미래를 이끌어갈 젊은이들에게 귀감이 되고도 남았다. 그의 연설을 들은 한 학생은 반 총장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일지 궁금하다고 했다. 반 총장은 예의 그 옅은 미소를 지은 뒤 답변했다. “누구나 자신의 영웅이 있을 거예요. 모든 사람은 자신이 닮고 싶은 역할 모델이 있죠. 물론 저도 있어요. 그러나 밝히지 않을 거예요. 여러분에게 영향을 끼치고 싶지 않거든요. 저는 유엔 사무총장으로 세계의 매우 많은 곳을 돌아보았고, 제가 갔던 거의 모든 장소에서 인류를 위해서 어떤 조건도 없이 헌신적으로 일하는 분들을 만났어요. 그분들은 어떤 이득을 보고자 혹은 개인적인 안락을 위해서 일하지 않아요. 인류를 위해 일을 하는 거죠. 저는 그분들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인류를 위해 조건 없이, 헌신적이고 인도주의적으로 일하는 모든 사람을 존경한다는 반기문 총장. 우리가 반기문 총장을 존경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글 / 김민정 기자 ■사진 / 이성훈, 경향신문 포토뱅크

      2008.08.22 00:00

    • 화제

      자선공연 어디든 달려가는 ‘독수리 5형제’ 남성중창단 ‘유엔젤’

      클래식 공연을 즐기는 계층이 얼마 되지 않는 현실임에도 최근 주목할 만한 남성 중창단이 등장했다. 늦가을에 만난 환상적인 화음과 하모니의 주인공은 올 2월 창단된 남성 중창단 유엔젤이다. 연예인급의 비주얼과 성악가다운 실력을 겸비한 이들은 소외된 곳에 사랑을 전하고 가는 곳마다 아름다운 추억을 선사한다.발군의 실력 자랑하는 클래식 남성 중창단 경기도 분당의 한적한 어느 주택. 가정집이 아니라 유엔젤 남성 중창단의 연습실이다. 이곳에서 흘러나오는 청명한 화음이 늦가을 낙엽과 어우러져 근사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언뜻 보아도 ‘시커먼’ 남성 5명으로 이뤄진 중창단 멤버들의 포스가 예사롭지 않다. 이들은 지난해 10월부터 약 6개월간 수차례의 오디션과 콩쿠르를 통과한 성악 전공자 중에서도 실력을 갖춘 이들로만 구성된 남성 중창단 유엔젤(U ANGEL)이다. 추계예술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다른 프로팀에서도 활동했던 맏형 신상진(29)씨가 리더 역할을 맡고 있다. 맡은 파트는 베이스. 연세대학교에 재학 중인 허영민(28)씨, 서울대 김유중(23)씨, 추계예술대학 김영우(22)씨가 함께 테너를 맡고 있다. 장신대학교 성악과 3학년인 지현식(24)씨는 바리톤. 중창단 멤버는 5명이고 반주까지 도맡은 박지향 단장이 이들과 그림자처럼 함께한다. 2월 말 창단됐으니 아직은 팀 컬러를 만들어가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유엔젤 중창단은 기업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고 문화 소외지역 방문 공연으로 음악을 통해 어두운 곳에 빛을 비추려는 뜻으로 만들었습니다. 지난 2월 26일 창단했으니 열 달도 채 되지 않았지요.” 박 단장이 중창단의 설립 배경을 설명한다. 유엔젤 남성 중창단의 모체가 된 (주)유엔젤은 국내 이동통신망과무선인터넷 솔루션 부문의 선두자리를 지켜온 벤처기업이다. 해외시장에서도 뛰어난 기술력을 인정받으며 2003년 벤처기업으로는 최초로 거래소에 상장했다. 박지향 단장(490페이지 사진 가운데)은 최충열 대표이사의 부인이기도 하다. 유엔젤 중창단은 음악을 통해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자 하는 뜻에서 창단한 이래 4월 27일 중국 나환자 돕기 자선음악회를 시작으로,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불러주는 곳 어디든 달려가고 있다. 일본과 중국, 러시아, 미국 등 해외 초청 음악회 외에도 병원, 군부대, 분기별 자선음악회, 중증 장애인 시설, 교회 등을 돌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리더로 ‘잡일’을 도맡고 있다는 신상진씨는 “제가 가진 재능으로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좋은 점”이라고 한다. 노래 실력을 뽐내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듣는 이들에게 훌륭한 노래 이상의 것을 줄 수 있다는 자부심이 묻어났다. “러시아 우수리스크 시 창립 기념 음악회에 초대받아 간 적이 있는데요. 시청 광장에 설치된 무대와 음향시설이 좀 열악했어요. 그곳 분들이 우리 노래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고 현지 스태프에게 아쉬움을 토로했을 때, ‘이렇게 먼 곳에서도 우리 노래를 듣고 싶어 하는 구나’ 무척 보람을 느꼈지요.” 유엔젤은 일개 중창단이지만 봉사활동에 더욱 매진하고픈 꿈을 갖고 있다. 때문에 일체 공연 출연료를 받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차비를 극구 사양하지 못할 때는 적립해두었다가 해비타트(Habitat:사랑의 집짓기 운동본부) 같은 공익단체에 기부한다고. 가족 같은 팀워크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하모니 지난 11월에는 그간의 활동이 작은 결실을 맺기도 했다. 유엔젤 중창단이 세계적인 구호 단체인 선린회의 홍보대사로 위촉된 것. 박 단장은 “창단 후의 여러 활동을 인정받은 것도 기뻤지만 앞으로 더욱 ‘음악을 통한 봉사’에 비전을 품는 계기가 됐다”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김유중씨는 “클래식으로 승부하는 중창단은 흔하지 않아요. 더 다양한 레퍼토리와 기획으로 문화 소외지역에 다가가려고 한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동안 일본 여러 지역의 한인 음악회와 미국 순회 연주, 러시아 초청 음악회 등을 통해 멤버들의 실력과 경험이 나날이 쌓이고 있다. 해외 연주가 처음이어서 더 기억에 남는다는 바리톤 지현식씨. “아직 학생이기 때문에 바쁘고 힘들 때도 있어요. 하지만 의미 있는 일들을 통해 오히려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더 많은 것을 배우지요. 장차 할 뮤지컬 공부에도 큰 도움이 되고요.” 테너 허영민씨도 첫 사회활동을 통해 배우는 것이 무척 많아 감사할 뿐이라고. “제가 가진 달란트(재능)가 노래밖에 없으니까요. 노래를 통해 맺어진 공동체인 유엔젤 활동이 제겐 생활의 큰 부분이지요. 다들 학교생활에 바빠서 주중에는 얼굴 보기 힘들지만 그동안 함께 지내면서 정도 많이 들었구요.” 막내 김영우씨도 “스스로도 그렇지만, 유엔젤이 점점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마냥 즐겁다”고 한다. 함께 호흡을 맞춘 지 1년이 되어가는 지금은 눈빛만 봐도 통하는 사이가 됐다. 틈날 때마다 모여 연습과 공연을 반복하다 보니 이제는 가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자녀가 없는 박지향 단장은 뒤늦게 다섯이나 생긴 아들들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다. 반주하랴, 매니지먼트 하랴, 보호자 노릇 하랴 눈코 뜰 새 없지만 언제부턴가 ‘엄마’라 부르면서 친엄마처럼 따르는 멤버들이 예쁘기만 하다. 오는 12월 6일에는 유엔젤 창단 음악회를 열고 더욱 활동에 박차를 가하려 한다. 먼 훗날 구호재단 설립의 초석이 될 유엔젤 중창단의 날갯짓이 궁금하다면 이들의 공연을 기대해봄 직하다. 공연 문의 010-9055-8885 ■ 기획 / 장회정 기자 ■글 / 위성은 객원기자 ■사진 / 이성훈

      2007.12.20 00:00

    • 화제

      유엔사무총장 된 반기문장관의 어제와 오늘

      학창 시절부터 외교관이 되는 게 꿈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꿈대로 36년간 외교관의 길을 걸었고, 이제 막 외교관으로 오를 수 있는 최정점에 섰다. 한국시간으로 지난 14일 새벽, 제8대 유엔 사무총장으로 공식 선출된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 개인적 영예를 떠나 전세계에 한국의 위상을 드높인 온 국민이 기뻐해야할 쾌거가 아닐 수 없다.유엔 창설 61년 만에 분단국가 출신의 첫 유엔 사무총장 탄생 반 장관의 UN 수장 임명으로 세계 속에 우뚝 선 한국 외교 사람들은 반기문 장관(62)이 차기 유엔 사무총장에 선출되던 날을 또렷이 기억한다. 각국을 대표하는 외교 수장들이 한데 모인 자리에서 그는 박수를 받으며 차기 유엔 사무총장에 추인됐다. 이 소식을 접한 우리 국민은 마치 내 일처럼 기뻐했고, 늘 으르렁대며 얼굴을 붉히던 국회의원들마저도 이날만큼은 당을 떠나 한목소리로 반 장관이 이뤄낸 역사적 쾌거를 진심으로 축하했다. 그렇다면 반 장관은 어떤 사람이고, 또 어떻게 ‘세계 정부의 대통령’이라는 UN 사무총장 직까지 오를 수 있었을까? ‘한국 외교가의 거울’이라는 평가를 받는 반기문 장관. 그가 35년 동안 몸담은 외교통상부 안에서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말이 있다. “반(반 장관)의 반(半)만 해도 제몫은 하는 거다”라는 말이다. 김영삼 정부 때 반 장관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으로 모신 전봉근 외교안보연구원 북한연구부장은 “반 장관의 트레이드마크는 ‘성실성과 공손함’”이라면서 “그는 한국 외교관 사회에선 ‘조용한 영웅’으로 통했다”고 말했다. 전 부장은 “외교관은 업무 이외에도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역량이 있어야 한다”며 “반 장관은 그런 감동을 몰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 상대방에게 정성을 다해 대하는 진실한 성품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반 장관과 배터리를 이루고 있는 유명환 외교부 제1차관도 반 장관을 “한마디로 나이스하다”고 평가했다. 이 같은 성품은 외교관 직 수행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대외관계 속에서 철저히 국익을 다투도록 훈련받은 외교관으로서 자존심과 본분을 버리지 않았다. 그의 지론은 ‘외교관은 일하는 사람’이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 오해를 살 일도, 원한을 살 일도 없다는 뜻이다. 40여 개 나라의 외교부 장관이 그와 절친한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생활태도에서 비롯된다. 폭넓은 교류가 유엔 사무총장 선거 캠페인에도 큰 힘이 됐다. 누구보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의 호감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시아권에서 라이스 장관이 속내를 드러내고 막역하게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가 반 장관뿐이라고 한다. 이같이 ‘적이 없는’ 반 장관을 영국 BBC 방송은 “지나치게 자제하는 스타일”(10월 2일)이라고 평가했다. 어떻든 늘 국익을 앞세워 제3국 출신의 유엔 사무총장을 지지하던 미국이 OECD 회원국인 한국 출신의 반 장관을 지지한 것 자체도 이례적인 일이다. 이런 그의 성품은 노영신 전 국무총리의 눈에 띄었다. 노 전 총리는 1985년 국무총리에 임명되자 반 장관을 의전비서관에 임명했다. 당시 1급이 담당하던 관례였던 자리에 3급을 임명한 파격 인사였다. 1987년에는 이사관(2급)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반 장관은 자신의 선후배, 동기 1백여 명에게 “너무 빨리 승진해서 미안하다”는 내용의 친필서한을 보냈다. 반 장관을 대미외교의 실무 책임자인 미주국장에 기용한 사람은 최호중 전 장관이다. 그가 ‘미국통’으로 성장하게 되는 길이 열린 것이다. 차기 사무총장으로 선출된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이 현 사무총장인 코피 아난 사무총장과 만나 환담을 나누고 있다.후임인 공로명 전 장관도 재직 시절 반 장관을 특별히 중용했다. 외교정책실장에 발탁한 지 5개월 만에 다시 제1차관보로 승진시켰다. 반 장관은 다시 한 달 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으로 발탁되는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그가 이렇게 상사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일을 대하는 태도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그가 얼마나 일처리를 깔끔하게 하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이정빈 전 외교부 장관은 반 장관을 직속 부하로 뒀다. 이 전 장관은 당시 “내가 참 복이 많은 사람이야, 반기문이를 차관으로 데리고 장관을 하다니…. 앞으로 장관은 그냥 하는 거야”라고 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반 장관은 또한 철저한 공무의식으로 유명하다. 그는 김영삼 정부에서 1996년 3월부터 1998년 2월까지 대통령의 전수석비서관과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을 지냈다. 당시 그를 아끼는 사람에게 “정권이 바뀌면 피해를 볼지 모르니 청와대를 떠나라”는 권유를 자주 받았다. 그는 “공무원이 어떻게 부여된 임무를 거부하느냐”며 지론대로 움직였다고 한다. 2001년 반 장관에게 고비가 왔을 때 일이다. 그해 2월 한·러 정상회담 합의문에 실무진의 실수로, 부시 행정부가 추진하던 미사일방어체제에 한국이 반대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미국으로부터 김대중 대통령이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비판을 받아야 했던 ‘심각한 외교 사고’였다. 그 심각성은 ‘그 문제로 얼마나 많이 (미국에) 사과를 했는지 모른다’고 한 김 전 대통령의 회고에서도 알 수 있다. 당시 차관이던 반 장관이 문책 인사를 당하자 “죽고 싶다. 내가 단 1시간도 나를 위해 쓴 적이 없는데…”라며 연락을 끊었다. 하지만 반 장관의 관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한승수 전 외교부 장관이 제56차 유엔총회 의장이 되자 그를 의장 비서실장(유엔본부 부대사)으로 부른 것이다. 그 자리는 국장급이다. 그는 “국가의 녹을 먹은 사람이 나라의 부름을 저버릴 수 없다”며 뉴욕으로 떠났다. 외교가에서는 ‘장관감인데, 저렇게 공직을 그만두는구나’라며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유엔의장 비서실장은 IAEA(국제원자력기구)와 UNIDO(국제연합공업개발기구) 등 국제기구 본부가 있는 오스트리아 파견 대사를 지낸 경력과 함께 유엔 사무총장 출마의 밑거름이 됐다. 본부 대사로 뒤로 물러나 있던 반 장관은 2003년 2월 노무현 대통령의 외교보좌관 그리고 한국의 외교 사령탑으로 임명됐다. 노 대통령은 외교적 현안에 대해서 반 장관의 조언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만큼 두터운 신임을 보냈다. 그러나 ‘대미자주파’와 ‘한·미동맹파’의 갈등 논란 속에서 반 장관은 적지 않은 속앓이도 해야 했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유엔의 수장 자리까지 오른 반기문 장관. 유엔 총회의 최종 인준을 받은 반기문 사무총장 지명자는 곧바로 인수팀을 구성해 취임 준비에 들어갈 예정이다. 새 사무총장의 임기는 내년 1월 1일부터 시작된다. 반 장관은 이후 향후 5년간 UN 사무총장 직을 수행하며 세계 평화와 발전을 위해 앞장서게 된다. 영어 잘하던 공부벌레 ‘타고난 외교관’ ‘복주머니’로 맺어진 인연, 아내의 ‘조용한 내조’는 든든한 힘 반 장관은 1944년 충북 음성군에서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처음 UN과 연을 맺은 건 지난 195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헝가리 국민봉기가 일어났을 때 당시 초등학생이던 그는 학교 대표로 다그 함마슐트 당시 유엔 사무총장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낭독한 바 있다. 그것이 반 장관이 기억하는 UN과의 첫 인연이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열세 살이었던 걸 감안하면 그는 어쩌면 UN 수장이 될 운명을 타고났는지 모른다. 그는 어릴 적부터 공부 잘하는 아이로 통했다. 충북 음성에서 태어나 청주에 살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충주로 옮겨간 반 장관은 학창 시절 내내 1등과 반장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고교 생활기록부를 살펴보면 ‘은’은 찾아보기 어렵다. 3년 내내 올 수만을 받은 장학생. 특히 영어 실력은 신동에 가까웠다 전해진다. 고등학교 때에도 서울대 외교학과에 재학 중일 때에도, 심지어는 1984년 미국 하버드대 행정대학원인 케네디 스쿨에서 연수 중에 있을 때도 그는 특유의 학업욕을 불태우며 졸업식 때 우수상을 거머줬다. 그의 아버지는(반명환, 92년 작고)는 공부 잘하는 아들이 내심 의사가 되길 바라셨다고 한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 맛본 특별한 경험은 그를 외교관으로 성장케 했다. 충주고에 재학 중이던 1962년의 일이다. 그는 미국 정부가 주최한 한 영어웅변대회에 출전해 1등을 차지하는데, 당시 부상으로는 미국 여행의 기회가 주어졌고 그렇게 떠난 미국 여행길에서 소년 반 장관은 당시 미 대통령이던 존 F 케네디를 만나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반 장관은 “케네디 대통령이 꿈이 뭐냐고 물었는데 자연스럽게 외교관이라는 말이 툭 하고 튀어나왔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당시 반 장관의 미국행은 그로 하여금 ‘직업 외교관’의 꿈을 키우게 한 것 외에도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지금의 부인인 유순택 여사를 만난 것도 바로 그가 미국을 방문하기 직전인 1963년의 일. 반 장관의 미국 출발을 앞두고 이웃의 충주여고 학생들은 반 장관에게 미국 체류 중 사용하라며 특별히 제작한 복주머니와 함께 꽃다발을 전달했는데 이 선물을 반 장관에게 대표로 전달한 사람이 바로 당시 충주여고 학생회장이던 유순택 여사였다. 그러고 보면 인연이 참 무섭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생에 있어 그 짧은 한순간에 반 장관의 안팎으로 미래는 결정된 것이다. 반 장관과 부인 유순택 여사는 그렇게 인연을 쌓아 결혼을 했고 43년이라는 긴 세월을 인생의 동반자로 한길을 걷고 있다. 결혼 직전 유순택 여사의 어머니는 딸을 불러 이런 당부의 말을 했다고 한다. “남자가 해지기 전에 집에 오는 것은 직업이 없거나 큰 병을 앓고 있을 때이니 반 서방이 늦게 들어오는 것에 대해 뭐라 하지 말아라” 유순택 여사는 어머니의 당부를 결혼 기간 내내 잊지 않았고, 늘 조용한 내조로 남편이 마음 놓고 업무에 매진할 수 있도록 성심성의껏 도왔다. 반 장관이 사무총장으로 임명된 지금까지도 마찬가지다. 각 언론들로부터 인터뷰 요청이 쇄도 중이지만 유 여사는 밖으로 나서지 않고 반 장관의 내조에만 전념하고 있다. 반 장관과 유순택 여사는 슬하에 1남 2녀를 뒀다. 맏딸 선용씨(36)는 현재 아시아재단 사업부장으로 근무 중이고, 막내 딸 현희씨(31)는 유엔아동기금(UNICEF) 케냐 사무소에서 국제기구초급전문가(JPO)로 일하고 있다. 반 장관의 딸들은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짓는 아버지 때문에 모두 비밀 결혼식을 올려야 했다. 반 장관이 차관과 비서관에게 업무와 관련된 모든 사람이 딸들의 결혼식을 몰라야 한다며 비밀에 부칠 것을 지시했기 때문이다. 딸 선용씨 밑으로는 아직 결혼 안 한 맏아들 우현씨(33)가 있다. 아들 우현씨는 현재 미 캘리포니아주립대(UCLA)에서 MBA 과정을 밟고 있다. 유엔 사무총장은 2억원의 연봉에 국가원수 대접을 받는 자리 유엔 헌장에 정해진 임기는 5년이지만 관례상 연임도 가능 40여 년 품어온 외교관의 꿈은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뉴욕 맨해튼 중심 유엔본부 사무총장 집무실에서 1년에 단 1달러 ‘임대료’를 내고 연봉을 2억원 넘게 받으며 국가원수의 대접을 받는 유엔 사무총장. 우리의 반 장관이 그런 유엔 사무총장 집무실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1945년 유엔 출범 후 지금까지 사무총장을 지낸 인물은 코피 아난 현 사무총장을 포함해 모두 7명이다. 그 가운데 단임에 그친 사람은 이집트 출신의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 총장이 유일하고, 그 밖에 역대 여섯 명의 총장이 총장 직을 한 차례씩 연임한 바 있다. 관례상 살펴본다면 반기문 장관도 원래 유엔 헌장이 정한 총장 임기는 5년이지만 10년간 유엔 사무총장의 자리를 지키게 될 공산이 크다. 유엔 사무총장의 공식 연봉은 22만 7천2백54달러로 우리 돈으로 약 2억원 정도다. 1997년 이래 한 번도 인상된 적이 없는 이 금액은 현 노무현 대통령(1억 6천1백42만원)보다는 많고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 연봉(40만 달러)보다는 적다. 그러나 사무총장 연봉은 정해진 금액 이외에 개인 활동을 위한 판공비와 경호 비용 등 추가로 지급되는 돈이 많아 실제로는 이보다 높은 3억원가량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또 유엔 사무총장은 세계 최고의 외교관으로 국제사회에서 국가 원수 내지는 행정수반에 준하는 예우를 받게 된다. 이 같은 예우는 전 세계 모든 국가가 유엔을 하나의 국가와 같은 수준으로 보기 때문에 가능한 일. 별도 보안 검색 없이 각국의 공항을 드나들며 외국을 방문할 수 있는 외교관 이상의 면책특권이 부여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 밖에 사무총장이 지닌 권한은 또 있다. 일단 총회가 정한 규칙에 따라 1만6천 명의 사무국 직원을 임명할 수 있다. 산하기관까지 포함하면 총 4만 명에 대한 인사권을 손에 쥐고 있는 셈이다. 또 유엔 사무총장은 유엔 내 모든 기관과 협의하며 권고할 수 있는 권한과 국제분쟁 예방을 위한 조정과 중재 업무도 맡는다. 내년 1월 1일 반 장관의 유엔 사무총장 임기가 시작되면 반 장관은 한국을 떠나 미국 맨해튼 지역에 자리한 유엔 소유 사무총장 관저에 머물게 된다. 하지만 업무 특성상 외국 출장이 잦을 수밖에 없다. 반 장관은 임기 중 세계 각국을 돌며 세계 평화와 안정에 기여하는 활동을 펼치게 된다. 반 장관은 당선의 기쁨을 만끽할 새가 없다. 당장 북한의 핵실험 파문을 비롯해 차기 유엔 수장으로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다르푸르 사태, 이란 핵문제, 중동 평화 정착 문제 등 어느 것 하나 뒤로 미뤄둘 수가 없는 형편이다. 최근 들어 평화유지군(PKO)의 성추문 사건과 이라크 석유-식량 교환 프로그램을 둘러싼 비리 등으로 상처 입은 유엔의 위상을 재정립하는 일도 그가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저력을 믿고 있다. 어린 시절 영어 신동으로 불리던 소년이 커서 이제 지구촌 평화기구의 수장으로 우뚝 섰다. 전세계의 평화의 안녕을 기원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그가 다시 한번 전세계인의 마음을 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 글 / 김경은 기자(뉴스메이커)·최은영 기자 ■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외교통상부 제공

      2006.11.01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