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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주희 ISF 이사장, 아시아 스포츠 앰배서더 위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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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주희 ISF 이사장, 아시아 스포츠 앰배서더 위촉

      박주희 ISF 이사장, 아시아 스포츠 앰배서더 위촉. 대한체육회 제공 박주희 국제스포츠전략위원회(ISF) 이사장이 대한체육회로부터 아시아 스포츠 앰배서더로 위촉됐다. 박 이사장은 지난 2일 서울 방이동 올림픽회관에서 유승민 대한체육회장으로부터 위촉장 전달받았다. 대한체육회 아시아 스포츠 앰배서더는 ▲아시아지역 스포츠 네트워크 확장 도모 ▲아시아 스포츠 교류 활성화 및 국제기구 협력 체계 강화 ▲대한체육회 국제분야 업무 협조 등 활동을 한다. 박주희 이사장은 “국제수영연맹 집행위원, 2030 하계아시아경기대회 유치도시 평가위원,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의무반도핑 부위원장 활동 등 다방면 활동으로 얻은 노하우 및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체육 발전에 이바지하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유승민 회장은 “아시아 지역에서 다양한 활동을 통해 네트워크를 구축한 박주희 아시아 스포츠 앰배서더가 대한체육회의 국제스포츠 영향력 강화를 위해 큰 역할을 해주리리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세훈 기자 2025.04.03 07:11

    • [로컬] 성동문화재단, ‘2025 크리에이티브×성수’ 축제 준비 박차···최준호 교수·윤광식 이사장 공동기획위원장 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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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컬] 성동문화재단, ‘2025 크리에이티브×성수’ 축제 준비 박차···최준호 교수·윤광식 이사장 공동기획위원장 맡아

      ‘2025 크리에이티브×성수’ 공동기획위원장 최준호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명예교수. 성동문화재단 제공 서울 성동구(구청장 정원오) 산하 재단법인 성동문화재단(이사장 윤광식)은 지난달 20일 ‘2025 크리에이티브×성수’ 기획위원 위촉 및 1차 회의를 마무리하며 축제 준비의 신호탄을 울렸다. ‘크리에이티브×성수’는 문화산업과 문화예술이 융합된 복합문화 창조산업축제로 성수동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문화·예술·콘텐츠·사회혁신 등의 창조산업 기업과 지역의 대학들, 성동구와 성동문화재단 등이 모여 민관산학 협력 체계로 운영되며, 기획위원회는 1년간 축제의 기획, 운영, 실행의 핵심 주체로 활동한다. 2025년 기획위원회는 지난해보다 더욱 확대된 33명의 전문가로 구성되었다. 기획위원장은 최준호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명예교수와 윤광식 성동문화재단 이사장이 공동으로 맡았다. 주요 기획위원으로는 김현환 전 문화체육관광부 제47대 1차관, 이호규 에스팩토리 운영사 엘5에이엠씨 대표, 허재형 루트임팩트 대표, 써니킴 SXSW 코리아 대표, 정현섭 크래프톤 실장 등이다. 기획위원들은 9월 15일부터 21일까지, 7일간 성수동 전역에서 개최되는 2025 크리에이티브×성수를 위해 아젠다를 발굴하고, 문화예술의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기 위해 다양한 기획을 선보인다. 또한, 성수동 내 집적된 기업, 예술가, 소상공인이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여 지속가능한 협력 모델을 구축한다. ‘2025 크리에이티브×성수’ 공동기획위원장 성동문화재단 윤광식 이사장 성동문화재단 제공 성동문화재단 윤광식 이사장은 “‘크리에이티브×성수’는 성수동을 창조산업의 글로벌 거점으로 도약시키는 핵심 플랫폼이다. 재단은 기획위원회를 통해 민·관 협력을 강화하고, 문화·예술·콘텐츠 기업, 예술가, 지역사회와 함께 지속가능한 창조산업 생태계를 조성해 나갈 것이며, 이를 통해 성수동이 서울을 넘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창조산업의 중심지로 자리 잡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2024 크리에이티브×성수’는 11개의 사업, 40개 분야, 85개 프로그램을 통해 오프라인 15만여 명, 온라인 71만여 명, 총 87만여 명의 관람객들에게 만족감을 선사했다. 또, 365개 기업과 단체, 1,296명의 연사·예술가 등이 참여하였으며, 생산유발효과 575억, 부가가치유발효과 252억, 취업유발효과 513명, 고용유발효과 320명으로 약 827억 원의 경제적 파급효과를 창출한 것으로 보고 있다. ‘2025 크리에이티브×성수’ 기획위원 위촉 및 1차 회의 모습. 성동문화재단 제공

      손봉석 기자 2025.02.10 22:09

    • ‘언더커버 하이스쿨’ 김신록, 병문고 이사장 서명주 역 낙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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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더커버 하이스쿨’ 김신록, 병문고 이사장 서명주 역 낙점

      MBC 배우 김신록이 ‘언더커버 하이스쿨’에서 파격 변신에 나선다. 오는 2월 21일 오후 9시 50분 첫 방송 예정인 MBC 새 금토드라마 ‘언더커버 하이스쿨’(기획 남궁성우/극본 임영빈/연출 최정인/제작 네오엔터테인먼트, 슬링샷스튜디오) 측은 서강준의 최대 맞수로 돌아온 김신록의 변화무쌍한 스틸컷을 공개했다. ‘언더커버 하이스쿨’은 고종 황제의 사라진 금괴의 행방을 쫓기 위해 고등학생으로 위장 잠입한 국정원 요원의 좌충우돌 N차 고딩 활약기를 담은 드라마다. 김신록은 극 중 넘사벽 카리스마를 지닌 병문재단 및 병문고 이사장 서명주로 분한다. 치밀하고 계획적인 그는 자신의 것을 빼앗거나 망치려 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용서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또한 어떤 상대가 다가와도 기죽지 않는 명주는 결정적인 순간에 한 방을 날리는 노련한 인물이다. 31일 공개가 된 스틸에는 날카로운 눈매와 시크함을 배가시켜주는 칼단발을 장착한 명주의 모습이 담겨 있다. 또한 누군가를 올려다보며 짓는 옅은 미소도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특히 총을 쏘며 집중하는 모습은 보는 이들의 숨을 멎게 만들 만큼 강렬한 임팩트를 선사한다. 김신록은 ‘언더커버 하이스쿨’에서 서강준의 최대 맞수로 등장한다. 김신록이 연기하는 명주는 자신의 계획에 없던 인물인 정해성(서강준 분)이 나타나자, 날을 세우고 팽팽한 신경전을 펼친다고. 과연 그가 자신의 학교에 위장 잠입한 해성과 엮이며 어떤 일들을 벌여나갈지 벌써부터 긴장감이 몰아친다. ‘언더커버 하이스쿨’은 ‘스케치’, ‘진검승부’ 등을 통해 탄탄한 집필력을 인정받은 임영빈 작가와, ‘미치지 않고서야’, ‘밤에 피는 꽃’의 연출을 맡아 안방극장을 제대로 사로잡은 최정인 PD가 뭉쳤다. 변신 귀재 김신록의 활약이 담긴 ‘언더커버 하이스쿨’은 오는 2월 21일 밤 9시 50분 첫 방송된다.

      손봉석 기자 2025.01.31 19:31

    • 축제계 마이스 손 김종원 총감독, (사) 한국축제문화진흥협회 2기 이사장 취임

      생활

      축제계 마이스 손 김종원 총감독, (사) 한국축제문화진흥협회 2기 이사장 취임

      김종원 총감독, (사) 한국축제문화진흥협회 2기 이사장 취임 1월22일 지역축제의 흥행 수표로 불리며 20년 넘게 축제 현장을 누빈 김종원 총감독이 사단법인 한국축제문화진흥협회 대회의실에서 2기 이사장으로 선출되었다.한국축제문화진흥협회는 지역축제를 통한 지역 경제 활성화와 지역 문화 창달, 시민 행복을 추구하고 미래지향적 축제 콘텐츠 개발을 통해 축제 문화의 선도적 역할을 하는 비영리단체다. 출범 6주년을 맞아 전국 지역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과 2기 출범식을 동시에 개최하고, 한국축제문화진흥협회의 지속 발전을 위해 만장일치로 초대 김종원 이사장을 2기 이사장으로 선출하여 간소하게 취임식을 진행했다. 1기에 이어 2기 이사장으로 추대된 김종원 이사장은 “대내외적으로 시국이 불안정한 시기인 만큼 취임식은 간소하게 했다”며 “대신 운동화 끈을 바짝 조여 매고 대전환의 시기인 만큼 지역축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점검하고 지역 맞춤 축제 콘텐츠 개발에 주력하자”는 각오를 다졌다고 밝혔다. 아울러 “한국축제문화진흥협회는 앞으로도 축제를 통해 지역경제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며 콘텐츠 개발과 자문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겠다”고 밝혔다. 연임을 한 김종원 이사장은 지난해 시흥시(임병택 시장) 축제 총감독으로 위촉되어 시흥시 거북섬 사계절 축제와 제19회 시흥 갯골 축제를 성공적으로 마친 바 있다. 2024 시흥시 축제 총괄 감독을 마무리하고 지역 정체성과 시대 트렌드에 맞는 콘텐츠 개발과 강연에 주력하고 있는 만큼 김종원 이사장의 향후 행보가 어디로 향할지 귀추가 주목되고있다.

      강석봉 기자 2025.01.23 07:03

  • 주간경향

    • 사회 주목! 이 사람

      [주목! 이 사람]최재왕 한국물문화연구소 이사장 “먹는 샘물로 음용수 문제 해결해야”

      “이제 우리 국민에게도 먹는 물 선택권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최재왕 한국물문화연구소 이사장(59)은 자칭타칭 ‘천연광천수’ 전도사다. 천연광천수라고 하면 색다르게 들리지만 사실 ‘생수’ 또는 ‘먹는샘물’을 뜻하는 ‘내추럴 미네랄 워터’를 직역했을 뿐이다. 과거에 비해 상수원 보호와 원수 취득 및 정수과정이 크게 개선됐음에도 여전히 국민 사이에서는 불신이 적지 않은 수돗물 대신 또 하나의 음용수 선택권을 보장하자는 뜻에서 새롭게 내건 표현이다. 한편에선 수돗물이 안전한 식수원이라고 외치고 있지만, 여전히 직접 마시거나 조리를 할 때는 정수기로 거른 물이나 마트에서 사온 생수를 사용하는 현실이 공존하는 모순을 해결해보고자 최 이사장이 머리를 싸맨 결과다. 본인 제공 특히 내년 대선을 앞두고 대선주자들 간의 정책 대결에 이목이 집중되는 요즘 최 이사장은 더욱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불과 수십년 전만 하더라도 마을마다 우물이 있어 공동체 구성원끼리 소통하고 결속하게 하는 창구가 되지 않았습니까.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물이 매개가 돼 그 역할을 다한 것이죠.” 아직도 연배가 높은 세대에선 우물이나 지하수에 대한 선입견이 있지만, 최 이사장은 천연광천수가 땅속을 흐르며 오염물질이 걸러진 탓에 오히려 현재의 상수원인 하천 등 지표수보다 깨끗하다고 말한다. 98%가 넘는 상수도보급률을 자랑하고, 그것도 모자라 집마다 정수기까지 다는 이 시대에 그가 새로운 음용수로 천연광천수를 제안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정수기를 쓰거나 먹는샘물을 사먹는 비용은 고스란히 각 가계의 부담으로 전가되지만, 천연광천수를 쓰는 일종의 공동 약수터는 초기 설치 과정에 드는 예산만 집행하고 나면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큰 액수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 전국 6000여곳에 설치된 민방위 비상급수 시설이 여전히 관리 중이라 이용하기 위해 약간의 개선만 거치면 됩니다. 추가로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전국에 도합 2만여곳이 있는 각급 학교에 먼저 이 약수터를 세우면 우선 학생들부터 지역주민까지 바로 맑고 깨끗한 음용수를 공짜로 활용할 수 있지요.” 최 이사장은 언론인 출신이다. 1991년 낙동강 페놀 오염 사태를 겪은 뒤부터 물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고 더 깨끗한 물을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왔다. 언론사 사장까지 지낸 뒤 좋은 물에 대한 자문을 구하려 국내외의 물 전문가를 만나고, 관련 자료와 논문을 독파하며 찾은 대안이 천연광천수를 음용수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전국의 연간 지하수 사용량이 약 40억t, 수돗물이 약 60억t인데 음용·조리용으로 넉넉하게 써도 전 국민이 연간 2억t이면 충분히 쓰거든요. 무엇보다 건강에 직결되는 정책인 음용수 개선 대책 역시 이번 대선에서 함께 국민의 판단을 받으면 한층 더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을 겁니다.”

      김태훈 기자 2021.11.26 20:58

    • 스포츠 김재현의 생각있는 스타톡

      [김재현의 생각있는 스타톡]김주영 한국복싱진흥원 이사장·김정주 국가대표 남자복싱 코치

      ㆍ“복싱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많은 사람이 복싱에 울고 웃던 시절이 있었다. 홍수환, 박찬희, 장정구, 유명우 등 세계챔피언들은 어렵던 시절, 국민을 TV 앞에 모여들도록 했다. 복싱은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의 대표적인 메달밭이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영웅은 사라졌고 관객도 떠나갔다. 복싱은 이제 엘리트 스포츠에서 생활체육으로 바뀌고 있다. 복싱은 주짓수, UFC 등 다른 격투기나 무도스포츠와도 겨뤄야 한다. 김주영 한국복싱진흥원 이사장과 2004·2008년 올림픽 동메달리스트인 김정주 국가대표 남자복싱 코치를 만났다. 인터뷰는 국내 유일의 복싱전용운동장인 경북 영주시 대한복싱훈련장에서 이뤄졌다. 김주영 한국복싱진흥원 이사장이 복싱 기술을 설명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선수단이 모여 운동하기도 힘든 것으로 알고 있다. 복싱부는 현재 집합을 한 상태인가. 김정주 “오늘 집합해 코로나19 검사를 받은 상황이다. 검사를 받고 하루 격리했다가 음성반응이 나오면 훈련에 돌입한다. 딱 3주가 넘어가면 선수들이 많이 힘들어한다. 한달을 다 채우기는 힘들 것 같고 3주 정도 훈련하고 보름 정도 휴식하는 방식으로 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김주영 이사장님은 용인대 교수이기도 하다. 제자 함상명 선수가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지 않았나. 김주영 “함 선수가 중학교 때부터 상당히 복싱에 재능이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대학진학이라든지 실업팀 진출을 앞두고 스카우트 경쟁이 붙었다. 중학교 코치님이 함 선수의 이모부다. 그분도 과거에 복싱 국가대표를 하고 시드니올림픽 국가대표까지 했다. 게다가 용인대 출신이라 적극적으로 추천해주셨다. 그 이후에 특별히 내가 지도를 한 건 아니고 관리만 했는데 함 선수가 잘해 대한민국을 빛낼 수 있었던 것 같다.” -한국복싱진흥원은 어떤 곳인가. 김주영 “복싱선수 출신으로 어떻게 하면 복싱이 활성화될까 고민을 했다. 그때 트렌드가 생활체육 활성화였다. 생활체육으로 복싱 저변을 확대하고 유능한 친구들을 선발하면 복싱이 활성화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한국복싱진흥원을 하게 됐다. 생활체육 활성화를 시도했는데 고맙게도 많이 호응해주시는 것 같다.” -김정주 코치님은 평생 국가대표로 살아왔는데 예전과 지금 선수들은 많이 다른가. 김정주 “내가 운동을 처음 할 때는 1년 동안 기본기만 했다. 모든 스포츠는 기초가 탄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학교 선생님을 하고 있는 친구에게 물어보니 ‘정주야, 그렇게 하면 다 도망간다. 복싱부 없어진다’ 그러더라. 요즘에는 뭐든지 빠르게 습득하는 걸 좋아한다. 빨리 더 좋은 정보를 선수들에게 공유해 동기부여를 시켜줘야 한다.” -현재 한국 복싱은 아시아권에서 선두주자는 아닌 것 같은데. 김정주 “딱 한가지 문제점이 기본기다. 지금 대표팀에서도 기본기를 먼저 시작하고 모든 운동을 소화한다. 나도 운동할 때는 기본기를 왜 해야 하나 생각했다. 그런데 지도자가 돼보니 기본기가 제일 중요하다는 걸 느꼈다.” -김 코치님은 올림픽이라는 숙제가 있다. 선수들의 컨디션은 어떤가. 김정주 “5월에 아시아선수권이 있다. 코로나19가 심각한데도 ‘나가고 싶은 사람?’ 했더니 다 손을 들었다. 올림픽 출전에 대한 꿈이 있고, 나도 그 꿈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6월에는 최종 발표가 난다고 하는데 그전까지는 전진해야 한다.” 김주영 한국복싱진흥원 이사장이 필리핀 복싱영웅 파퀴아오 상원의원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본인 제공 -엘리트 선수들은 대학 졸업 후에 어떤 활동을 하나. 김정주 “80% 정도는 실업팀에 바로 가는 것 같다. 20% 정도는 상무를 가든, 군대에 가든, 그만두든 한다. 실업팀에 간 선수들의 연봉 같은 경우는 나 때와 비교해 크게 올랐다.” -최고 수준의 선수가 됐을 때 연봉은 얼마나 받나. 김주영 “탑을 찍는 친구들이 몇명 있는데 그 친구들 같은 경우에는 2년 연봉, 많게는 3년 연봉을 모으면 서울까지는 안 돼도 용인에 있는 아파트는 충분히 살 수 있다.” -연금제도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국위선양한 선수들이 사회로 나왔을 때 어떤 도움이 있어야 하지 않나. 김주영 “대한민국을 대표한 선수들, 세계를 빛냈던 스타들은 사후에 국립현충원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연금은 현시점에 맞춰 올라가야 한다. 다만 재사회화는 돈을 준다고 해결되지는 않는다. 무도경찰, 환경미화원, 소방관, 공무원, 체육교사 등 지금은 가산점이 별로 없다. 무도 경찰채용도 몇몇 종목에 국한돼 있었다. 국가차원에서 제도적으로 일정 부분 점수제로 포인트를 부여해준다든지 제한경쟁을 통해 몇명씩 뽑아주면 이 친구들이 더 봉사를 할 수 있고, 국가를 위해 헌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김 코치님은 10년 가까이 세계를 제패했는데 신체적 한계는 어떻게 극복했나. 김정주 “중학교 때는 42㎏급을 뛰다가 고등학교 1학년 때는 54㎏급을 뛰었다. 고등학교 때 감독님이 라이트헤비급으로 올려보라 했다. 라이트헤비급은 67㎏을 넘겨야 한다. 살을 찌워야 하니 밤마다 많이 먹었다. 아래 체급에서 올라왔기 때문에 스피드와 순발력에서 강점이 있었다. 이걸로 승부를 보려고 머리를 썼다. 원래라면 인파이팅을 해야 하지만 나는 안 들어갔다. 상대선수가 들어오는 걸 훅으로 감아뺐다. 그런데 국제시합에 나가면 이 기술이 안 통한다. 피지컬에서 완전 밀리니깐 죽어라고 웨이트했다.” 김정주 국가대표 남자복싱 코치가 한국 복싱에 대한 생각을 밝히고 있다. -운동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나. 김정주 “한 번 도망간 적은 있다. 한달 정도 다른 분야 일을 해봤다. 그런데 한달 하니깐 다시 운동이 하고 싶어졌다. 한번 슬럼프가 오니 이겨내기가 힘들었다. 주먹이 보이면 피해야 하는데 눈만 감았다. 주먹이 무서운 것도 아닌데. ‘아, 이게 슬럼프구나’ 생각했다. 심리치료를 받고 극복했다.” -평소 롤모델로 삼았던 선수가 있나. 김정주 “박시헌 감독님이 롤모델이다. 내 주특기가 레프트 훅인데 박시헌 감독님이 레프트 훅을 잘 쳤다. 박시헌 감독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낸 것이다.” -박시헌 감독님에게 배운 기술을 지금 후배 선수들에게 전수하나. 김정주 “전수를 많이 한다. 선수들도 팔로 치는 게 아니라 어깨로 치는 걸 이제 다 터득했다.” -요즘 UFC에 진출해 돈방석에 앉는 경우가 많다. 그런 유혹이나 콜이 없었나. 김정주 “로드FC 정문홍 대표도 친분이 있다. 가고 싶은 생각도 솔직히 있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았다. 사람들이 욕하는 것도 싫고.” -김주영 이사장님은 용인대 무도스포츠학과 교수이기도 하다. 용인대 제자 중 주목해야 할 선수는. 김주영 “용인대 복싱부는 성공에 초점이 아니라 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3등을 하든 1등을 하든 꿈을 향한 성장을 지향한다. 현재 우리 남자 국가대표팀을 보면 대학선수가 한명도 없다. 대학교에서 최선을 다해 1등을 하고 국가대표가 되면 좋지만 못하더라도 실업팀에서 성장해 국가대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약 30명의 선수가 있는데 누구 하나 꼽기는 좀 그럴 것 같고 전체적으로 모두가 복싱 유망주라고 생각한다.” -스포츠 지도자로서 현시대에 갖춰야 할 덕목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김주영 “전문지식은 지도자라면 누구나 갖춰야 하고, 이외에 선수들과 소통하는 부분이 중요하다. 커뮤니케이션이 안 되면 내가 100개를 가지고 있어도 선수에게 30개밖에 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SNS도 많이 한다. 선수들 감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카톡 프로필에 들어간다든지 페이스북이나 인스타에 들어가 이 친구들의 감정을 파악하고 있다.” -선수들이 시합을 나갔을 때 목이 터져라 사인을 주는데 경기할 때 도움이 되나. 김정주 “도움이 많이 된다. 솔직히 시합을 관중석에서 보면 잘 안 보인다. 세컨드 자리에서 보면 다 보이는데 어떤 선수와 경기를 할 때 잘 맞는 게 있으면 그 기술을 쓰게 한다.” -파퀴아오와도 친분이 있지 않나. 김주영 “파퀴아오 선수는 필리핀의 영웅으로 세계적인 선수다. 이 친구가 활동했던 시합 영상도 보고 했는데 한국에서 만남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 이후 필리핀에서 초청해 상원의원실에도 가보고 파퀴아오의 본가에도 갔다. 그 이후 한국에 방문할 때마다 만난다. 지금도 종종 SNS로 소통하고 있다.” -복싱은 너무 힘들고 위험한 운동이라 생각해 배우기를 주저하는 분들이 많은데. 김정주 “복싱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안 되는 기술을 하나씩 마스터해 가면서 공격을 할 수 있게 됐을 때 복싱에 대한 재미를 느낀다.” -한국 복싱 꿈나무들에게 한마디 해달라. 김주영 “너무 성공이라는 단어에 얽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성공에 얽매이다 보면 자괴감이나 부정적인 요소가 너무 많다. 흘리는 땀방울이 모여 결국에는 큰 바다가 된다. 힘들다고 포기하지 말고 자신의 꿈을 위해 열심히 하면 나중에는 어떠한 분야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

      글·진행 김재현 한국문화스포츠마케팅진흥원 이사장 사진·동영상 청년서포터스 ‘젊은나래’ 2021.05.17 15:06

    • 사회 주목! 이 사람

      [주목! 이 사람]대마초 연구하는 노의현 이사장 “대마는 유익한 풀, 죄가 없습니다”

      “대마는 죄가 없습니다.” 노의현 한국협동조합발전연구원 이사장(76)이 기자에게 건넨 책의 앞장에 적어 놓은 문구다. <대마와 대마초>. 지난 2000년 통합농협 초대 농협경제대표(CEO)를 역임했던 노 이사장의 첫 책이다. “식물 중 대마초가 가장 유익한 풀인데 왜 불법화했는지 추적해보고 싶었어요. 막상 도전해보니 우리나라에 관련 자료가 별로 없더라고요.” 완성까지 10여년 넘게 걸린 역작이다. 그렇다고 내용의 퀄리티가 떨어지진 않는다. 최신 연구성과와 쟁점·논의까지 꾸역꾸역 다 담아냈다. 사진/이준헌 기자 “대한민국만 너무 뒤처지는 것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지난해 11월 미국 대통령선거가 있었잖아요? 이때 미국 4개주도 돌아섰습니다. 지난해 중반까지 대마초를 합법화한 주가 11개였다면 지금은 15개가 된 거죠. 미국은 연방법상으로는 금지했지만, 캐나다와 우루과이 같은 나라는 완전히 풀렸습니다. 담배 사듯이 살 수 있어요. 캐나다나 미국 캘리포니아 같은 큰 주에 바보 같은 사람들만 살아서 합법화했겠어요.” 노 이사장이 ‘대한민국만 뒤처져 있다’고 하는 것은 대마초의 오락적 사용, 끽연을 풀자는 것이 아니다. 대마의 산업적 이용이다. “대마의 의학적 효능은 크게 2가지가 규명됐습니다. 테트라하이드로칸나비놀(THC)이라고 도취를 일으키는 성분과 CBD로 약칭되는 칸나비디올이라는 성분입니다. CBD는 통증이나 진통을 완화하는 한편, 특히 소아 뇌전증에 효과가 있다는 것이 수십년 전부터 알려져 있어요. 전 세계 각국에서 이 대마에서 추출한 CBD 성분에 주목하면서 산업화하고 있는데, 한국은 ‘대마는 마약이다’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다 막고 있는 겁니다. 그게 안타깝다는 것이죠.” 그에 따르면 실제 미국은 2018년 농업법을 개정하면서 THC의 비중이 0.3%인 대마 재배가 전국적으로 허용했고, 일본도 THC가 안 들어간 CBD 제품들을 개발해 인터넷 등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데 비해 유독 한국만 낡은 규제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 ‘대마=마약’의 도식이 한국에서 만들어진 것은 1970년대 중반 박정희 정권 시절 가수·연예인들을 중심으로 대마초 파동이 벌어지면서부터라고 그는 덧붙인다. 그 전까지는 대마초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었다는 것. 한국이나 일본과 같은 동북아에서 재배되는 종은 THC 성분이 낮아 대마초를 피는 문화가 없었다는 것이다. 대마의 다른 이름은 삼이다. 동북아에서는 보통 베옷을 해입거나 밧줄을 만드는 등의 용도로 재배됐다. 대마초가 마약류로 분류되기 시작한 것은 대공황기 미국에서인데, 다분히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 노 이사장의 주장이다. 일본이나 한국에서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대마초=마약’ 규정이 그대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적어도 THC까지는 아니더라도 CBD 오일이나 대마 관련 산업 기회를 놓치는 것 같아 아쉬워 이렇게 책도 내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당장 CBD 의약품뿐 아니라 종이, 생분해 플라스틱 등 다양하게 산업화할 기회를 놓치는 것이 제일 아쉽다는 주장이다.

      정용인 기자 2021.02.19 14:40

    • [주목! 이 사람]이상근 문화유산회복재단 이사장 “해외 우리 문화유산 돌아와야”

      문화/과학 주목! 이 사람

      [주목! 이 사람]이상근 문화유산회복재단 이사장 “해외 우리 문화유산 돌아와야”

      조선 최고의 회화작품으로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한국에 있지 않다. 일본 텐리대학이 소장하고 있다. ‘몽유도원도’는 세종의 셋째아들 안평대군이 꾼 무릉도원 꿈 이야기를 듣고 안견이 3일 동안 그려낸 것이다. 안평대군이 쓴 <감지금니묘법연화경>은 미국 하버드대에 있고, 세종의 또 다른 아들 광평대군의 건강을 빌며 만든 <원각경>, <변상도>는 프랑스 국립기메아시아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왜 우리의 문화유산들이 뿔뿔이 흩어졌을까. <돌아온, 돌아와야 할 우리 문화유산>(김정윤 공저)은 이상근 문화유산회복재단 이사장(56)이 낸 첫 책이다. 문화재환수운동에서 이 이사장이 차지하는 위상에 비해서는 의외다. 이 이사장은 전란 등으로 나라 상황이 어지러웠을 때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말한다. “현재 외국에 있는 우리 유물은 약 19만점으로 추산됩니다. 매년 새롭게 발굴 조사하고 있는 것이 있으니 그 숫자는 더 늘어날 겁니다. 현재까지 분포를 보면 아무래도 일본이 약 43%를 차지하고 미국은 6만여점으로 약 30%를 차지합니다. 두 나라에 거의 60~70%가 있습니다. 근세에서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6·25전쟁의 혼란스러운 시기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겠죠. 거슬러 올라가면 임진왜란과 고려시대 왜구들의 약탈이 있었고요.” 합법적으로 유통된 경우도 있지만 상당수는 약탈된 문화재들이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약탈해간 외규장각 조선왕실 의궤가 대표적이다. 1975년 박병선 선생이 발견할 때까지 프랑스 국립도서관 서고에 머물러 있던 이 의궤는 2011년 대여 방식으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145년 만의 귀환이다. 문제는 약탈 여부를 확인할 기록이 없는 경우다. 지금도 재판 중인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이 대표적이다. 불상이 충남 서산 부석사에서 있었다는 것은 명확하지만 일본 쓰시마의 신사가 어떻게 입수했는지 경위는 불명확하다. 한국인 절도단들이 훔쳐간 것은 명백하지만 반환의무가 있는지에 대해 거듭 재판결과가 뒤집히는 까닭이다. 책에는 우여곡절 끝에 환수한 문화재와 아직도 환수를 기다리고 있는 해외소재 문화재에 얽힌 생생한 이야기들이 기술돼 있다. <소용돌이의 한국정치>로 유명한 정치학자 그레고리 헨더슨이 ‘알고 보니’ 한국문화재 콜렉터였고, 하버드대에서 잠깐 전시된 적 있는 그의 수집품이 국보급이었다는 스토리는 그동안 문화재환수운동 바깥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다. “어떤 분이 말씀하길 ‘해외에 19만점이 조사되어 있는데, 당신은 몇점 정도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은 적 있습니다. 한 1만점 정도? 실제 1945년부터 지금까지 75년간 돌려받은 것이 1만점 정도인데, 돌려받은 것 중 한일협정 때 돌려받은 우체부 막도장, 짚신, 의복 이런 것은 허수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 그레고리 헨더슨의 컬렉션 중 가야 토기나 신라 뱀장식 토기는 국내에도 없는 거예요. 사실 운동이 제대로 되려면 끈질긴 관심과 추적이 필요합니다. 관 차원에서는 한계가 있어요. 예를 들어 관에서 리스트를 만들면 상대방이 가격을 올리게 되는 딜레마가 있습니다. 민간이 나서야 할 이유죠.”

      정용인 기자 2020.12.11 14:12

  • 레이디경향

    • 화제

      2011년 새로운 도약 준비하는 한국장학재단 이경숙 이사장

      ㆍ“우리나라는 사람이 재산인 나라입니다. ㆍ인재양성, 가장 값진 투자가 아닐까요?” 2009년 5월, 많은 이들의 관심 속에 설립된 한국장학재단이 어느덧 설립 1년 8개월을 맞았다. 2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한국장학재단을 통해 학자금 대출을 받은 학생은 약 80만 명. 든든한 초석을 다지고 2011년 더 큰 도약을 준비하는 이경숙 이사장을 만났다. 3조 규모 정부보조금 채권 발행하는 학자금 전문 금융기관 단정하면서도 힘 있는 말투, 부드러운 미소 속에서 느껴지는 에너지. 지난 12월 16일, 서울역 앞 한국장학재단에서 만난 이경숙 이사장(67)은 여전한 모습이었다. 지난 2008년, 16년간 몸담았던 숙명여대를 떠나온 그는 한국장학재단 초대 이사장으로 1년 8개월 동안 재단을 이끌고 있다. “1년 동안 많은 일을 했어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보니 하나하나 새로 시작하지 않은 일이 없었죠. 그동안 80만 명 학생들에게 학자금 대출을, 25만 명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줬어요. 대학 총장으로서 학교에서 했던 일과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학자금 대출과 장학금 수여, 인재 육성 등 비교적 업무는 단순해졌지만 전문성을 요하는 금융 업무가 더해져 새로운 도전이 많았어요.” 한국장학재단은 ‘맞춤형 국가장학제도 구축’이라는 국정 과제의 일환으로 설립된 기관이다. ‘의지와 능력이 있는데도 돈이 없어 공부를 못하는 학생이 없도록 하겠다’는 철학에 맞춰 장학금과 학자금 대출을 지원하고 인재 육성을 위한 기틀 마련에 역점을 두고 있다. 이를 위해 기존 한국주택금융공사의 국가 학자금 대출사업과 한국학술진흥재단, 한국과학재단 등의 국가장학사업이 하나로 모아졌다. “전체 업무의 80%가 금융 업무예요. 이름이 ‘한국장학재단’이다 보니 많은 분들이 일정 장학기금을 바탕으로 소규모 장학금 제도를 운영하는 일반적인 장학재단들이 하는 일과 비슷할 거라 오해하는 경우가 많아요. 저희 재단은 연간 3조5천억원에 달하는 학자금 지원을 위해 3조원 규모의 정부보증 채권을 발행하는 학자금 전문 금융기관의 역할을 하고 있어요. 단순한 재단 업무에서 벗어나 인재육성 지원을 위한 국가 장학금제도를 운영하고 다양한 인재육성 지원제도도 시행하고 있고요. 학생들에게 학자금이나 장학금만 지급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인재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신설기관의 기관장은 뭐든 새롭게 만들고 안정시켜야 하는 부담이 있는 자리다. 그럼에도 그는 숙명여대 총장 시절 인정받은 탁월한 운영 감각을 발휘해 온라인 직접대출과 든든학자금제도 등 눈에 띄는 성과를 이루어냈다. “15개 은행, 5천여 지점에서 시행하던 대출을 인터넷을 통한 온라인 직접대출 방식으로 전환했어요. 이를 통해 한 학기에 40만 명에게 학자금 대출을 해주고, 11만5천 명에게 장학금을 줄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죠. 각종 부대 수수료를 절감해서 7%대의 학자금 대출 금리를 5.2%까지 내린 것이 가장 보람을 느끼는 일입니다. 등록금으로 인한 학생과 학부모님들의 부담을 실질적으로 덜어드릴 수 있게 됐으니까요.” 대출받은 등록금을 갚지 못해 생기는 신용불량자 발생을 방지하는 ‘든든학자금제도’ 도입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과다. 현행 학자금 직접대출제도에서는 대출을 받은 학생이 재학기간 중에도 매월 대출이자를 갚아야 한다. 또 졸업 후에 취업이 안 되어 소득이 없더라도 상환기간이 되면 매월 원리금을 상환해야 한다. 요즘같이 취업난이 심각한 시기에 원리금을 갚지 못해 생기는 신용불량자가 늘어나고 있는 실정. 신용불량자로 등록되면 취업에도 불이익을 받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게 된다. 자녀의 학자금 대출 때문에 부모가 떠안는 부채도 큰 문제. 든든학자금제도는 이러한 현행 학자금제도의 문제점을 보완하고 개선한 제도다. “이러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대상 학생들에게 등록금 전액을 대출해주고 취직 이후 소득이 발생하면 원리금을 나누어 갚도록 하는 제도예요. 재학 중에는 물론 졸업 후에도 취업을 하기 전까지는 대출 원리금 상환이 유예되기 때문에 학업과 취업활동에 보다 전념할 수 있죠. 자식의 대학 등록금 마련을 위해 노후를 대비 할 여력도 없이 빚을 짊어졌던 부모님들의 부담도 한층 가벼워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양한 인재육성 지원사업 통해 사회적 리더 기른다 아직은 ‘이사장’보다 ‘총장’이라는 호칭이 더 익숙하다는 그다. 30년 넘는 세월 동안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아온 만큼 인재육성에 대한 그의 열정은 여전히 뜨겁다. 학생들이 지식과 사회적 경쟁력을 갖추는 것은 물론, 사회에 공헌하고 봉사의 미덕을 함양한 리더로 성장했으면 하는 바람은 그의 오래된 교육철학이기도 하다. “당장 대학만 졸업하는 것이 목표는 아니잖아요. 사회에 나가서 더 큰 인재가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어요. 재단이 출범할 때부터 학생들이 지식과 사회적 경쟁력을 갖추는 것은 물론, 봉사의 미덕을 가진 리더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인재육성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사회 저명인사 멘토와 대학생 멘티를 연결시켜주는 멘토링 프로그램은 그러한 취지에서 만든 프로그램이에요.” 한국장학재단에서는 좀 더 통합적인 인재육성 지원을 위해 2010년 2학기부터 몇 가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지식과 경험이라는 사회적 자산을 생산적으로 승계한다는 취지로 선배 세대들이 후배들의 멘토가 되어 인재육성에 참여하는 멘토링 프로그램, 장학금 수혜 학생들이 베푸는 삶을 통해 봉사의 참된 의미를 아는 지식 봉사 프로그램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인재육성 사업들을 빠른 시일 내에 궤도에 올려 금융과 인성 양쪽 측면에서 통합적인 지원체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이경숙 이사장의 목표다. 멘토링 프로그램에는 현재 기업 최고경영자와 석학 등 각 분야의 저명인사 100명이 멘토로 참여하고 있다. 대학생 멘티들은 기업 CEO나 사회 저명인사들과의 멘토링을 통해 취업에 대한 조언뿐 아니라 더 큰 꿈을 꿀 수 있는 넓은 시각을 가지게 된다. “처음에는 취업에 도움이 될까 해서 참여했다가 멘토링 프로그램을 통해 더 큰 꿈을 꾸게 된 친구들이 많아요. 어려움을 딛고 성공한 멘토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하나하나 자극이 되지 않을 수 없거든요. 멘토링을 통해 용기와 자신감을 얻었다는 멘티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뿌듯해요. 이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들이 눈앞의 취업에 매달리기보다 좀 더 넓은 시각으로 자기 꿈을 찾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멘토링 프로그램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사회 저명인사들에게 멘토링을 받은 대학생 멘티들이 어려운 여건의 초·중·고등학생들에게 진로상담과 학습지도를 해주며 멘토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대학생 지식 봉사단도 함께 운영되고 있다. “현재 카이스트와 포항공대 등 이공계 중점 4개 대학에서 시범적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지난 여름방학 때 4개 대학 200명의 학생들과 전국의 고등학생 1천여 명을 멘토와 멘티로 연결해 아주 반응이 좋았어요. 지식 봉사단에 참여한 어느 대학생의 후기를 보니 멘토로서 아이들을 만나며 스스로를 돌이켜볼 시간과 기회를 갖게 됐다고 하더라고요. 스스로 부족한 점과 고쳐나가야 할 점을 알았고 아이들과 함께 성장할 수 있는 무척이나 값진 경험이었다고요. 한국장학재단의 인재육성 지원사업은 이제 첫걸음을 뗀 단계입니다. 앞으로 더 많은 대학들과 이 같은 멘토링 사업을 더욱 확대해나갈 계획이에요.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사명이 있기에 빛나는 삶 올 겨울 한국장학재단에는 ‘사명서’ 작성 바람이 불었다. 사명서는 말 그대로 자신의 사명과 삶의 목표를 문서로 작성하는 것. 서로에 대해 알고 좀 더 가까이 소통하기 위해 이경숙 이사장이 제안한 방법이다. “사람들과 좀 더 빨리 친해지는 방법이에요. 처음 만난 사람과 금방 친해지기 어렵잖아요. 오랫동안 알고 지냈다 하더라도 표면적인 관계가 많은데, 이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왜 사는지,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 알면 더 가깝게 소통할 수가 있어요. 상대방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도와줄 수도 있고요. 사명서에 ‘난 이런 핵심 가치를 가지고 살아요. 난 이런 목표를 달성하고 싶어요’를 적어놓으면 다른 사람과 좀 더 빨리 가까워질 수 있을 뿐 아니라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알 수도 있고요. 삶에 대한 가치와 사명을 잊지 않도록 스스로에게 일깨워주는 자명종과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이경숙 이사장은 사명을 갖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은 인생의 가치가 달라진다고 말하며 어느 벽돌공의 이야기를 꺼냈다. “벽돌공에게 벽돌로 무얼 하냐고 물었을 때 그저 벽돌을 만들고 있다고 말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사람들이 기도하는 교회를 짓고 있다고 말하는 이가 있어요. 자신의 사명에 따라 같은 벽돌이 그저 돌멩이가 될 수도, 교회가 될 수도 있는 거예요. 사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의 가치와 즐거움을 압니다. 공부든 일이든 사명을 가진 사람들은 눈에서 반짝반짝 빛이 나요. 우리 재단의 도움을 받은 학생들이 그런 사람들로 성장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일차적으로 우리 직원 선생님들이 사명서를 작성했어요. 부서별로 액자로 만들어서 매일 보고 노력할 수 있도록. 인생의 목표와 사명을 가지라는 말, 공부하는 학생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하고 싶은 말입니다.” 인터뷰 내내 그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와 밝은 빛이 가득했다. 예순일곱.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열정과 에너지 가득한 삶을 사는 이경숙 이사장. 그에게 젊음의 비결을 물었다. “비결이 어디 있겠어요(웃음). 혹시 그렇게 보인다면 제 꿈에 맞는 일을 하고 있는 게 그 비결이 아닐까 싶어요. 사람들에게 비전을 수립해주고 그것을 달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통로가 되고 싶어요. 그게 제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줄 수 있는 삶이 참 좋은 것 같아요. 가진 것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짧지 않은 세월을 살아오며 보고 배우고 느낀 것이 재산으로 남아 있어요. 그 재산을 많은 후배들에게 넘겨주고 도와줘서 그들이 성공하는 것을 보는 게 제 삶의 보람입니다.” 우리 사회에 좀 더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며 새해 소망을 밝힌 이경숙 이사장. 그의 소망만으로도 2011년 한 해가 더욱 밝아지는 듯 하다.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강은호>

      2011.01.10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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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이 말하는 느림의 미학

      ㆍ“제 고향 제주도에서 시작한 올레길이 아버지의 고향인 ㆍ함경북도까지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길’을 만들어서 유명해진 사람이 있다.「시사저널」 편집장과 「오마이뉴스」 편집장을 역임한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 그녀는 사람들이 쉽게 보고 지나칠 수 있던 곳에 ‘길’을 만들어 새로운 세상을 보여준 주인공이다. 제주의 올레길을 통해 인생의 참맛을 느끼고 있다는 그녀를 만났다. 살아 숨쉬는 ‘길’을 만들다 제주도의 관광문화가 바뀌고 있다. 비행기를 타고 전용 관광버스를 타고 다니며, 일부 유명한 곳만 구경한 뒤 다시 우르르 버스를 타고 이동하던 ‘제주 관광’의 시대는 지나갔다. 더 이상 사람들은 감귤이나 돌하르방을 구경하기 위해 제주를 찾지 않는다. 대신, 관광객들은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을 느끼며 해안가를 따라서 천천히 걷는다. 이렇게 제주의 관광문화가 바뀐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제주 올레’ 때문이다. 올레란, 제주도 말로 자신의 집에서 마을까지 나가는 골목길을 뜻한다. 이 올레길이 조성된 지는 이제 막 2년 정도가 지났고, 15개의 전 코스를 걸으려면 열흘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하지만 제주 올레는 ‘빨리 빨리’를 외치던 현대인들에게 ‘느리게 걷는 여유’의 의미를 알게 해줬고, 덕분에 패키지 여행상품이 많이 출시되며 뜨거운 관심을 얻고 있다. 이 길을 발굴한 사람은 바로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다. 「시사저널」과 「오마이뉴스」 편집장을 역임했던 그녀. 삶에 지쳐 고향으로 돌아온 그녀는 제주도에서 새로운 인생의 즐거움과 활력을 찾았다. 지난 9월 말에는 제주 올레 덕분에 대통령상까지 받았다. 남들이 쉽게 지나칠 수 있었던 단순했던 ‘길’에 영혼을 불어넣어 ‘살아 숨쉬는 길’로 만들기까지 그녀에게 어떤 마음의 변화가 있었던 걸까. 서명숙 이사장은 언론에 23년 동안 몸담고 있던 언론인 생활에 서서히 염증을 느꼈던 것 같다고 밝혔다. 중학교 때부터 그토록 꿈꾸던 기자였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매일 반복된 뉴스가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무거운 짐으로 느껴졌다는 것. “정치부 기자 생활을 너무 오랫동안 해서 뉴스를 봐도 더 이상 가슴이 뛰지 않았어요. 매일 똑같은 정치 뉴스에 질린 것 같았죠. 매너리즘에 빠졌어요. 특히 체력 하나는 자신 있던 제가 40대가 되면서 몸이 굉장히 나빠졌어요. 아침에 일어나기도 힘들었고, 온몸의 배터리가 모두 방전된 느낌이었죠. 아, 쉴 때가 됐구나 생각했어요.” 걸으면서 나 자신을 수없이 반성했다 결국 서 이사장은 오랜 세월 몸담았던 「시사저널」을 그만두고 인생을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일을 그만두고 시작한 것은 운동이었다. 몸에 무리가 오면서 40대 후반에 처음으로 운동을 했다. 재즈댄스, 요가, 수영, 단학 등. 하지만 모두 적성(?)에 맞지 않았고, 결국 그녀가 선택한 운동은 ‘걷기’였다. 처음에는 15분 걷기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계속 걷다 보니 마음이 안정되고 차분해지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됐다. “미운 사람, 화가 나는 일, 스트레스 등 답답한 마음이 걸으면서 서서히 풀리는 느낌을 받았어요. 저 자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고 잘못도 반성할 수 있게 됐죠. 그래서 걷기 여행을 많이 다니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대한민국엔 마음 편히 걸을 만한 길이 별로 없었다. 수직으로 된 등산로는 있지만, 걷기 좋은 평평한 길은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것. 그러던 중 ‘산티아고’에 대한 책이 눈에 띄었다. 서 이사장은 그 책을 보면서 ‘산티아고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때마침, 「오마이뉴스」에서 편집국장 제의가 들어왔고 인터넷 매체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호기심이 있던 그녀는 산티아고행을 뒤로 미룬 채 다시 언론계에 발을 들였다. 하지만 「오마이뉴스」에서의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년여가 지나자, 산티아고에 대한 열망이 너무 커져버려서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던 것. 그녀는 더 이상 일을 하는 게 무의미하다고 판단해 회사에 사표를 제출하고 산티아고로 떠났다. “친정엄마가 저보고 미쳤다고 했죠. 콩나물 팔아가면서 대학 보내놨더니,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고요. 산티아고를 가기 위해 매일 한강변을 20km씩 걸어요. 하지만 떠난 사람만이 목적지에 이를 수 있는 법이죠. 주위 사람들의 말은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죠. 전 그냥 떠나야만 했어요.” 산티아고의 길은 총 800km였고, 서 이사장이 이 길을 걸었던 기간은 2006년 9월 10일부터 2006년 10월 15일까지 총 36일이었다. 이 시간 동안 그녀는 수없이 많은 생각을 했다. 과거 잘못했던 일, 부족했던 부분, 무엇을 좋아하는지 등 끊임없이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걸으면서는 부정적인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게 바로 그녀가 꼽는 걷기의 매력이었다. 산티아고를 걷는 동안 「순례자」의 저자 파울로 코엘류도 만났다. 그러나 가장 뜻 깊은 인연은 바로 NGO에서 일하는 영국 여자 헤니와의 만남이다. 우연한 길동무 헤니. 그녀는 밝고, 긍정적이며 진취적이고 마음 따뜻한 여자였다. “저는 산티아고를 걸으면서 5년마다 한 번씩 돈을 모아서 산티아고에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헤니는 이 행복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눠줘야 한다고 생각하더라고요. 그러면서 ‘나는 나의 길을 만들 테니까, 너는 너희 나라에 가서 너의 길을 만들라’고 했죠. 헤니의 말에 큰 감명을 받고 나도 제주도에 가서 한번 길을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산티아고에서 ‘제주의 길’을 생각 제주도가 고향인 그녀, 산티아고를 36일 동안 걸으면서 제주 생각을 정말 많이 했다. 걷는 내내 산티아고보다 고향인 제주도의 자연 풍광이 훨씬 아름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국에 온 뒤, 「중앙일보」에 산티아고에 관한 기사를 10회 연재하면서 ‘고향인 제주에 길을 내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그랬더니, 주위에서 ‘언제 제주도에 내려가서 길을 낼 거냐’며 재촉을 해왔다. 좀 더 나이가 든 후에, 천천히 생각해볼 요량이었는데 주위 사람들의 재촉에 결국 계획보다 빨리 제주도로 내려왔다. 우선, 그녀와 친분이 돈독한 한비야, 양희은, 허영선 시인 등과 함께 먼저 제주도의 해안길을 걸어봤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지인들의 격려로 한껏 고무된 서 이사장은 드디어 제주에 ‘올레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2007년 9월, 사단법인 제주올레 발족식을 갖고, 서귀포시 말미오름-섭지코지에 이르는 제1코스를 개방하면서 세상에 올레의 탄생을 알렸다. 그렇게 시작된 제주 올레는 2년 만에 15코스로 늘어났고 길의 총거리도 270km에 달한다. “길이라는 게 사람이 다닐 때 진짜 길이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제주에는 오랫동안 다니지 않아서 없어진 길들이 많았어요. 없어져가는 길들을 복원해놓고 사람들이 다니면서 완벽하게 재생된 모습을 보면 얼마나 가슴이 벅차고 뿌듯한지 몰라요.” 제주 올레를 만들어가면서 서 이사장이 지킨 원칙은 딱 하나다. ‘자연 그대로’ 길을 만드는 것. 끝까지 최신 장비와 자재 사용을 경계했다. 길을 안내해주는 것은 파란색 화살표와 리본이 전부. 화장실과 편의점도 일부러 두지 않았다. 대신 인근 마을에 ‘열린 화장실’로 총 92개를 준비해두었다. “길을 만들 때 돈을 들이면, 자연의 색깔이 없어져요. 도시처럼 회색이 되는 거죠. 길에 이상한 시설을 만들지 못하게 하려고 애썼죠.” 올레길에는 올레를 걷다가 쉬어가는 ‘게스트 하우스’도 있다. 하루 숙박료 1만원. 여자는 여자끼리, 남자는 남자끼리 한방에서 여럿이 잘 수 있도록 한 것. 서 이사장이 홀로 적적하게 살고 있는 할머니들의 집에서 민박을 하도록 아이디어를 냈는데, 이 역시 반응이 뜨겁다. 할머니들은 젊은 사람들과 어울려 지낼 수 있어 외롭지 않고, 올레꾼들은 저렴한 비용으로 하룻밤을 쉴 수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다. “처음에는 제가 제주도에 걷는 길을 만든다고 했을 때 고향 사람들이 반신반의했어요. 특히 택시 기사 분들이 매우 싫어했죠. 하지만 관광객들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되니까 이제는 무척 좋아하세요. 이제 어떤 분들은 자신들의 집 앞에도 올레길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할 정도예요(웃음).” 반대하던 주민들이 올레길 홍보 역할 주민들은 자신들의 집 근처에 올레길을 만들기 위해 스스로 나서서 길을 개척하기도 한다. 그리고 행여 길을 잘못 들어선 관광객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나서서 길을 알려준다. 사람들은 올레길을 걸으면서 끊임없는 자아 성찰을 한다. 덕분에 길을 걷다 보면 ‘우울증’과 ‘스트레스’가 저절로 해소되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서 이사장에게 한결같이 “이런 길을 만들어줘서 정말 고맙다. 길을 걷는 동안 진심으로 행복했다”고 말한다. 사람들로부터 이런 말을 들을 때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자연은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어요. 사람의 천 마디 위로의 말보다, 말없이 묵묵히 받아주는 자연이 훨씬 큰 위안이 되거든요. 사람들이 올레길을 걸으면서 위로를 받고 마음의 평화를 얻으면서 돌아가면 그것보다 뿌듯한 건 없어요.” 때론 이 엄청난 일을 왜 벌였을까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고향인 제주도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고 올레길이 사람들에게 위로가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길을 만들기 위해 힘들었던 기억들도 눈 녹듯 사라진다. 앞으로도 그녀는 수많은 일을 할 예정이다. 제주도를 한 바퀴 돌 수 있도록 끊임없이 올레길을 개척할 예정이고 간혹 아스팔트로 된 길을 자연 상태로 되돌리는 작업도 할 예정이다. 또 서 이사장은 다른 지역에서 길을 만들 때 ‘올레’라는 이름을 쓸 수 있도록 허가해주고 있다. 꼭 제주도를 찾지 않아도, 다른 곳에서라도 온 국민이 길을 걸으면서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렇게 이름 붙여진 강화의 올레길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이렇게 그녀는 고향인 제주도에서 시작한 올레길이 아버지의 고향인 함경북도까지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그리고 그 꿈을 위해 그녀는 오늘도 또 다른 올레 코스를 만들기 위해 바쁘게 걷고 있다. ■글 / 김민주 기자 ■사진 / 이성원 ■사진 제공 / 제주올레

      2009.12.03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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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령 전 육영재단 이사장 시집가던 날! 결혼식 현장 중계

      양가 부모님 자리는 비어 있었지만, 준비된 좌석을 꽉 채우고도 복도까지 들어찬 하객들 덕분에 나이 든 신랑 신부는 그나마 위안을 얻었다. 박근령 전 육영재단 이사장과 신동욱 백석문화대 교수의 결혼식 풍경과 함께 가족의 소감을 직접 들어봤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차녀 박근령 전 육영재단 이사장(54)이 지난 10월 13일 서울 여의도의 한 웨딩홀에서 신동욱 백석문화대 교수(40)와 결혼식을 올렸다. 이날 식장에는 1천여 명의 하객이 몰려 성황을 이뤘다. 주례는 고(故) 박정희 대통령 부부의 영정이 봉안된 서울 삼각산 도선사 주지인 혜자 스님이 맡았다. 이날 결혼식 진행을 담당한 웨딩컨설팅 업체 알앤디클럽의 대표인 개그맨 권영찬이 사회를 보고, 신랑 신부의 지인들과의 친분으로 한 달 전 제안을 받았다는 가수 이규석이 축가를 불렀다. 결혼 발표 직후부터 참석 여부에 관심을 모았던 언니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결국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남동생 박지만 EG 회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박 전 대표는 동생의 결혼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공공연히 밝혀왔으며, 최측근들에게도 결혼식 참석 자제를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일부 기자들에게는 “내가 결혼식에 가면 일이 더 곤란해질 수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고. 결혼식장에는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박태준 전 총리, 김형오 국회의장, 캐서린 스티븐스 주한 미국대사 등의 이름으로 보내온 축하 화환이 눈에 띄었으나, 참석한 정치인은 한나라당 홍사덕 의원이 유일했다. 결혼식에 앞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박 전 이사장은 “(언니와 남동생이) 함께하지 못해 모든 하객에게 죄송하다”며 눈물을 훔쳤다. 기자회견 전 신 교수에게 “박근혜 전 대표로부터 따로 연락이 왔느냐”고 질문하자, 그는 이렇다 할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오늘 참석하지 못한 동생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동생의 나이보다 어린 매형을 얻은 점도 누나로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모두 우리를 걱정하느라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한 것으로 압니다. 동생도 누나가 행복하길 바랄 겁니다. 잘 살아서 인정받겠습니다.” 박 전 대표가 동생의 결혼식에 불참한 이유는 신 교수가 정치적인 의도를 품고 박근령 전 이사장과 결혼하는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으로 전해진다. 신 교수는 지난 18대 총선 당시 친박계 후보임을 자처하며 한나라당 공천 신청을 했다가 탈락했다. 참석 정치인은 홍사덕 의원이 유일 신 교수는 “박 전 이사장을 만나기 전부터 이미 한나라당 네티즌중앙당 전국위원, 한나라당 디지털정당위원회 위원 등 당원으로 활동해왔다. 당원이라면 당연히 정치적 야망이 있는 것 아니겠느냐”며 “정치적 야망을 채우기 위해 결혼한다는 오해를 받는 것이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아울러 신 교수는 “우리 부모님이 특별한 직업을 가진 분들이 아니라 농사를 짓는 분들이어서 죄송하고, 명문대를 나오지 못해 죄송하고, 유명 대학 교수가 아니라 죄송하다. 하지만 인연이라는 건 나도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다분히 두 사람의 결혼을 향한 곱지 않은 시선을 의식한 발언이었다. 두 사람의 교제 사실이 알려진 것은 지난해 2월 관악산에서 가진 산상 약혼 소식이 알려지면서부터다. 2007년 10월 육영재단 관련 소송건의 자문을 위해 만남을 가져오다가 결혼에 이르게 됐다. 박 전 이사장과 신 교수 모두 재혼이다. 기자회견장에서 신 교수는 전처 소생 딸과 아들의 이름을 일일이 언급하며 “두 아이가 성인이 되면 아빠를 이해해주리라 믿는다”며 미안한 감정을 전하기도 했다. “박 전 이사장님을 직접 뵙고 보니 그동안 제가 가졌던 편견과는 다른 삶을 살고 계셨습니다. 오늘 결혼식장에 입고 온 옷과 신발을 다 따져도 5만원이 채 안 될 정도로 검소한 분입니다. 전 대통령의 딸이 개인 명의로 된 땅이 단 한 평도 없다고 하면 믿겠습니까. 이렇게 착하고 훌륭한 분이라는 걸 세상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신 교수는 그동안 박 전 이사장이 내내 선글라스를 쓴 이유는 갑상선 수술 후유증으로 인한 안구돌출증 때문이었다는 사실도 밝혔다. 이날 부부는 한복 디자이너 박술녀씨가 특별히 디자인한 전통 예복을 입었다. 당의에 면사포를 쓰고 부케를 든 박 전 이사장의 모습은 이색적이었다. 열네 살 연하 신랑, 신동욱 교수는 누구? 결혼식 도중 마이크를 잡은 신동욱 교수는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셔서 안타깝다”며 “지리산 산골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세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어머니가 내내 강조하신 점은 ‘정직하게 살아라’였다”고 말했다. 이날 결혼식에서 눈에 띈 것은 양가 부모님들을 위해 따로 마련한 좌석 4개가 고스란히 비어 있던 점이었다. 이미 고인이 된 부모님을 대신해 집안 어른들이 앉게 마련이지만, 식이 끝나는 순간까지 빈 자리는 채워지지 않았다. 결혼식 당일 오전 신동욱 교수의 본가가 있는 부산과 밀양에 살고 있는 가족이 대거 상경했다. 하지만 전면으로 나서는 인물은 없었다. 여섯 번째 누나인 신동임씨 부부가 식장 입구에서 하객 안내를 맡았을 뿐이다. 밀양에 살고 있는 누나 신동임씨는 “신 교수가 초등학교 때부터 전교 어린이 회장을 맡는 등 리더십이 남달랐다”고 전했다. 이어 “박 전 이사장께서 이제 평범한 집안으로 시집오셨으니 두 사람 모두 잘 살기를 바란다. 우리 가족으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소감을 밝혔다. 신씨에 따르면, 이날 식을 올린 부부는 신혼여행을 마친 뒤 부산 본가를 방문해 일가 친척과 인사를 나누고 신 교수의 부모님 묘소를 찾을 예정이라고 한다.■글 / 장회정 기자 ■사진 / 이성훈

      2008.11.17 00:00

    • [지구 끌어안기 캠페인]⑥에코생협 안병덕 이사장이 전하는 로컬 푸드 이야기

      재테크 지구 끌어안기

      [지구 끌어안기 캠페인]⑥에코생협 안병덕 이사장이 전하는 로컬 푸드 이야기

      칠레에서 온 포도, 필리핀에서 온 바나나, 미국에서 온 오렌지…. 마트에는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수입 농산물이 가득하다. 우리가 바다 건너 먼 길 온 농산물들을 먹는 ‘호사’를 누리는 동안 지구의 기온은 더 올라가고 우리 건강은 더욱 위협받는다. 이제는 로컬 푸드를 먹을 때다. 로컬 푸드, 건강을 위한 가장 가까운 음식 음식이 생산지를 떠나 우리 입에 들어오기까지 이동한 총거리를 ‘푸드 마일리지’라고 한다. 이동 거리가 길면 이동 시간도 길어지고 보관과 품질에 문제가 생기기 쉽다. 푸드 마일리지가 적은 음식일수록 안전하고 건강한 식품이다. 2000년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1인당 푸드 마일리지는 3228t·km. 일본보다는 적은 수치지만 미국의 푸드 마일리지보다 무려 6배나 높다. 그만큼 우리는 먼 곳에서 온 ‘고단한’ 음식을 먹는 셈이다. “만약 100년 후에 ‘인류가 한 가장 바보 같은 짓’이라는 책이 나온다면 우리나라가 지구 반대편에서 포도를 가져와 먹은 것이 1등을 할 거예요.” 에코생협 안병덕 이사장의 뼈 있는 농담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가까운 곳에서 나는 음식을 먹는 것이 경제적일 텐데 왜 그동안 우리는 굳이 멀리서 음식을 수입해 먹었을까. “한창 농산물 수입이 활성화되던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어요. 대량 생산지에서 오는 농산물이 가격은 분명 더 저렴할 수 있지만 문제는 에너지죠. 에너지의 가격은 점점 더 높아질 거예요. 우리가 먹는 것의 가치는 일정하지만 그것을 이동시키는 데 필요한 원료는 갈수록 비싸지기 때문에 앞으로 더 큰 돈을 지불하게 될 겁니다.” 부산에 살고 있다면, 미국에서 온 것보다는 아시아에서 온 것, 아시아에서 온 것보다는 서울에서 온 것, 서울에서 온 것보다는 대전에서 온 것이 더 좋다. 식품의 이동 거리가 짧을수록, 즉 내가 사는 지역에서 생산되는 식품을 먹는 것이 가장 좋다. 여기서 ‘좋다’의 의미는 스스로의 건강과 지역 사회의 건강 그리고 지구의 건강에 모두 적용된다. 먹을거리가 이동할 때는 트럭이나 선박, 비행기 등의 운송 수단을 사용하게 되는데 이때 반드시 배출되는 것이 이산화탄소다. 먹을거리의 이동 거리가 길수록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늘어난다는 말. 결국 멀리서 먹을거리를 옮겨와 먹을수록 지구 온난화를 가속시키는 것이다. 일반 식품은 로컬 푸드에 비해 온실가스를 적게는 4배에서 많게는 17배나 배출한다니 날이 덥다고 투정하기 전에 장바구니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로컬 푸드는 나와 지구의 건강뿐 아니라 지역 경제와 문화에도 도움을 줍니다. 영국 어느 동네에 사는 한 농부는 딸기밭 30평을 가지고도 평생을 먹고 산대요. 그 조그만 딸기밭이 그 동네의 상징이 돼 관광객이 생겨나면서 지역 경제와 문화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거죠. 우리나라는 지나친 세계화뿐만 아니라 수도권에 집중된 부분이 너무 많아요. 인구와 자본 모두가 블랙홀처럼 수도권으로 빨려 들어간 거죠. 바로 옆 동네에서 재배한 먹을거리보다 집 앞 슈퍼마켓에 있는 수도권에서 건너온 음식을 사기가 더 쉬운 게 현실입니다.” 다행히 요즘에는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로컬 푸드에 대한 관심도 늘어나고 있다. 직거래로 먹을거리를 구입하거나 친환경 농산물을 판매하는 생활협동조합을 찾는 주부들도 크게 늘었다. 에코생협에서는 시설 재배 이외에 유류를 직접 사용해 가온 재배한 농산물을 배제하고 화학 합성 농약과 제초제, 살균제, 성장촉진제, 화학 비료의 사용을 최소화한 친환경 농산물을 농장이나 지방 생산지와 직거래로 운영하고 있다. 양은 많지 않지만 철에 맞는 안전한 유기농 재료를 구할 수 있다. 안병덕 이사장도 직접 농장을 가꿔 유기농 농산물을 재배하는 8년 차 농부다. “생협에 처음 오시는 분들이 가끔 생협에서 파는 벌레 먹은 감자나 배추를 보고 깜짝 놀라세요. ‘이거 먹어도 되느냐’고 물어요. 마트에서 파는 채소들은 모두 반듯한 것들이거든요. 사람들은 이제 벌레 먹은 채소는 버려야 하는 걸로 생각해요. 저도 농사를 지으며 느낀 건데 존재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벌레 먹은 감자를 보면 감자가 벌레와 싸웠다고 보면 돼요. 농약의 힘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싸워 이긴 감자는 그만큼 건강하고 맛있는 감자랍니다.”농산물, 가격보다는 가치를 따지자 요즘 마트에서 파는 채소들을 보면 하나같이 크고 잘생겼다. 배와 감자는 어찌나 크며 또 오이는 어찌나 곧게 뻗었는지. 보기에 좋아 자연스레 손이 가지만 안병덕 이사장이 보기에는 체격은 좋지만 체력은 약한 요즘 아이들 같다. “가끔 그런 얘기를 해요. ‘고추가 매운 것은 우리를 위해 매운 것이 아니고, 들깨는 우리를 위해 향기로운 것이 아니다’라고요. 제초제를 써서 벌레를 다 없애고 인위적으로 보온을 해주면 고추가 매운맛을 내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어요. 들깨도 씨만 뿌리면 되지 향까지 뿜을 필요가 없고요. 사람들이 자꾸 인위적으로 가꾸려고 하면 결국 자연은 유전자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유기농 자연에서 자란 오이 중 길게 쭉 뻗는 것은 10개 중에 4, 5개밖에 안 된다. 나머지 6개를 똑바로 자라게 하기 위해 사람들은 튜브를 끼워 오이를 키운다. 튜브 속에 갇혀 자란 오이는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을까. 결국 우리는 화난 오이를 먹게 되는 것이다. 아이들이 난폭해지는 것이 먹을거리와 무관하지 않다는 말이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안전한 먹을거리를 위해 소비자들의 감시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생산자의 마음가짐이 중요하죠. 생산자가 바르면 먹을거리에 대한 의심이나 두려움 따위는 생겨나지 않을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생겨난 것이 유기농, 친환경 농사에요. 친환경 농사를 짓는 분들은 최대한 자연을 존중하고 인위적인 힘을 가하지 않는 것이 생명과 자연, 사람을 생각하는 ‘바른 농사’라는 철학을 가지고 계세요. 제초제를 뿌리면 한 시간 만에 끝날 일을 나흘 밤낮 동안 직접 손으로 하는 이유가 바로 그런 철학 때문이죠.” 직접 농사를 짓고 있는 입장에서 유기농 쌀은 관행 쌀에 비해 4배 이상의 농사 비용이 들어간다. 현재 시중에서 판매되는 친환경 농산물의 경우 일반 농산물보다 20~30% 정도 비싸지만 농부들이 손수 벌레 잡고 김매며 쏟은 땀의 가치는 그 몇 배가 될 수도 있다. “유기농, 친환경 농산물은 부자들만을 위한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세요. 저도 막상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에 가면 10원이라도 싼 것에 손이 가게 되죠. 특히 친환경 쌀 같은 경우 관행 쌀에 비해 2배 정도 비싸거든요.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관행 쌀을 드실 경우 하루에 먹는 쌀이 1천원 정도라면 친환경 쌀은 2천원이 되는 거죠. 어찌 보면 큰 차이 같지만 휴대폰 한 통화, 담배 한 갑 아끼면 되는 값이에요. 많은 분들이 필요 없는 소비에는 아낌이 없고 정작 건강과 직결되는 것에는 인색하세요. 매일 먹는 쌀만큼은 좋은 걸로 먹어야죠.” 농산물은 ‘가격’이라는 눈앞의 가치뿐만 아니라 그것이 나오기까지의 가치가 모두 포함된 것이다. 음식의 성분이나 칼로리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생산자의 정성을 한 번쯤 떠올려봤으면 한다. 우유를 마실 때 단백질로만 생각하지 말고, 새끼 소를 위해 젖을 만드는 어미 소의 마음도 한번 생각해보자. “꼭 돈을 내는 것만이 기부가 아닙니다. 우리 농산물, 친환경 농산물 사먹는 것도 우리 농촌, 우리 건강, 우리 자연을 살리는 기부입니다.”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이성훈

      2008.1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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