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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면가왕’ 배우 이유진, 폭풍성장에 감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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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면가왕’ 배우 이유진, 폭풍성장에 감탄

      A2Z엔터테인먼트 배우 이유진이 ‘복명가왕’에 출연해 숨겨왔던 가창력을 선보였다. 이유진은 지난 6일 방송된 MBC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이하 복면가왕)에 ‘뽑기’라는 닉네임으로 출연해 ‘자판기’와 듀엣 경연을 펼쳤다. 두 사람은 동물원의 노래 ‘거리에서’를 선곡해 불렀다. 가을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감성적인 보이스의 듀엣 무대는 패널들의 극찬을 받았다. 소란의 고영배는 ‘자판기’의 정체를 추측하며 “등장하자마자 ‘왔다. 피지컬 좋은 아이돌이다.’라고 생각했다. 예상치 못하게 나오는 뽑기처럼 반전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고 평가하며 “담백한 목소리가 가수보다는 운동선수가 아닐까, 펜싱 선수가 아닐까 추측해본다”고 말했다. 김구라는 “목소리가 익숙하다. 코미디언 후배, 유상무랑 흡사하다. 고도의 연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고 추측했고, 산들은 “오래된 노래라 익숙하지 않은 듯 싶다. 아마도 많이 어린 분인 것 같다”고 말했다. ‘뽑기’는 정체에 힌트를 줄 개인기를 선보이며 라이즈의 ‘러브119’의 안무를 선보이며 패널들을 또 한 번 헷갈리게 했다. 산들은 “춤을 잘 추는 분인데, 오랜만에 추는 것 같다. 힘으로 춤을 춘다”고 말했고, 윤상 역시 “저 정도면 굉장히 잘 추는 편이다. 공백이 있었을 것”이라고 날카로운 추측을 쏟아냈다. ‘뽑기’는 최종 선택에서 26대 73의 차이로 2라운드 진출에 실패하며 정체를 공개하게 됐다. 우원재의 ‘시차’(We Are)를 감각적인 랩과 함께 들려주며 ‘스카이캐슬’의 수한을 연기한 배우 이유진이라는 사실이 정체가 공개되자 유영석은 깜짝 놀라며 “그 어린애가?”라고 놀랐고, 패널들은 하나같이 “너무 잘컸다”고 박수를 보냈다. 정체가 공개된 뒤 이유진은 “‘스카이캐슬’ 당시 보다 20~25cm 정도 더 큰 것 같다. 그때는 부족하고 미숙한 부분이 많았는데 오나라 선배님이 잘 도와주셔서 배우로 여기까지 온 것 같다. 이 자리를 빌려 꼭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전했다. ‘스카이캐슬’에서 오나라와 이유진은 모자로 출연해 사실적이고 유쾌한 캐미를 보여준 바 있다. 이날 이유진은 ‘거리에서’를 직접 선곡했다는 사실을 공개하며 “종종 듣는 노래다. 들을 때마다 위로가 되는 곡이라 ‘복면가왕’에서 꼭 불러보고 싶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유진은 2018년 드라마 ‘스카이캐슬’로 데뷔해 ‘스위트홈’ ‘멜랑꼴리아’ ‘7인의 탈출’, ‘7인의 부활’ 등의 작품에 출연했다. 2022년 ‘왜 오수재인가’로 SBS 연기대상 청소년 연기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최근 연극무대에 도전 연극 ‘은의 밤’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올해 중앙대학교 공연영상창작학부에 진학해 24학번 새내기가 됐다.

      손봉석 기자 2024.10.07 22:24

    • 이유진 “父 이효정과 같은 작품 출연…너무 잘해 충격” (씨네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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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유진 “父 이효정과 같은 작품 출연…너무 잘해 충격” (씨네타운)

      SBS 파워FM ‘박하선의 씨네타운’ 이유진이 부친의 연기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전했다. 27일 방송된 SBS 파워FM ‘박하선의 씨네타운’에는 배우 손호준과 이유진이 게스트로 출연했다. 두 사람은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에서 호흡을 맞추고 있다.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1980년대 보수적인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종교, 인종, 정치, 성향 등 각종 사회 문제와 다양성을 다룬 작품이다. 특히 이유진은 자신의 부친인 배우 이효정과 한 무대에 서며 화제를 모았다. 이유진은 부친의 연기에 대해 “아버지가 연기하는 걸 처음 봤다. 사실 매체에서도 많이 활동하셨지만 그 당시에 너무 어려서 잘 챙겨보지 않았는데, 이번에 리딩을 하고 너무 잘하셔서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이어 “아버지와 술 마시는 걸 잘 안 했는데 본집에 따라가서 한 수 가르쳐달라고 했다”며 조언을 듣기 위해 아버지를 찾아갔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유진은 아버지와 한 무대에 서는 것에 대해 “아빠가 그 걱정을 많이 하셨다. 그런데 오히려 아빠라는 존재를 떠나서 되게 존경하는 선배라고 생각을 하니까 많은 걸 배우고 싶더라. 그래서 더 잘 이입이 됐던 것 같다”고 했다. 한편 이유진이 출연하는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LG아트센터 서울에서 다음달 28일까지 공연한다.

      김희원 온라인기자 2024.08.27 12:01

    • ‘살림남’ 이효정, “子 이유진 배우 한다고 했을 때 내심 기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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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림남’ 이효정, “子 이유진 배우 한다고 했을 때 내심 기뻐”

      KBS 29일 시청률조사회사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전날 KBS2에서 방송된 ‘살림하는 남자들 시즌2’(이하 ‘살림남’) 시청률은 전국 기준 4.7%를 기록했다. 특히 배우 이효정, 이유진 부자가 함께 프로필 사진을 촬영하는 장면이 6.0%의 최고 시청률을 나타냈다. 긴 공백기를 뒤로하고 작품 복귀에 대한 강한 의지를 밝힌 이효정은 아들 이유진과 함께 유명 포토그래퍼가 있는 스튜디오로 향했다. 이유진의 도움을 받아 헤어, 메이크업, 정장까지 갖춘 이효정은 배우 복귀의 첫걸음으로 생애 첫 프로필 사진 촬영을 택했다. 프로필 사진 촬영 경험이 전무한 이효정은 다소 어색해하는 모습을 보였고, 서툰 아버지를 위해 이유진이 몸소 시범을 보이며 화보 장인 수식어를 증명했다. 촬영을 성공적으로 마친 두 사람은 와인바에서 둘만의 추억을 나눴다. 이효정은 “프로필 사진 촬영 중 네가 4살 때 둘이 함께 CF 찍은 게 생각났다”라며 “네가 어린 나이에도 놀라운 재능을 보였다”고 말했다. 이후 “’아빠 따라 배우 할 거냐‘라는 주변 동료들의 물음에 늘 아니라고 대답했던 네가 고등학생 때 배우의 꿈을 밝혀 내심 기분이 좋았다”고 고백했다. 이유진은 처음 들은 아버지의 속마음에 놀랐고, “오랜 시간 아버지가 이효정임을 밝히지 않았던 이유는 나 자체로 봐주길 원해서였다”고 답했다. 이효정의 작품 복귀에 대한 열정과 진정성이 많은 시청자를 감동하게 했다. ‘살림남’ 은 매주 수요일 오후 8시 55분에 방송된다.

      손봉석 기자 2024.03.01 05:01

    • 이효정, 부자 관계 숨긴 이유···“子 이유진, 원치 않아” (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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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효정, 부자 관계 숨긴 이유···“子 이유진, 원치 않아” (라스)

      MBC ‘라디오스타’ 배우 이효정이 아들 이유진을 언급했다. 28일 방송된 MBC ‘라디오스타’(이하 ‘라스’)에서는 ‘현역가족왕’ 특집으로 꾸며진 가운데 이효정이 아들 이유진과 ‘라디오 스타’에 출연하게 된 사연을 밝힌 장면이 전파를 탔다. 이날 이효정은 아들 이유진에 대해 “제 아들 덕분에 제가 세간의 주목을 받는 배우가 됐다”라며 밝혔고, 김구라는 “멋진 아드님을 두셨더라고”라며 칭찬했다. MBC ‘라디오스타’ 이효정은 “아들이 내가 아버지인 게 알려지는 걸 원치 않았다. 본인이. 어느 순간 되니까 본인이 ‘이제는 그걸 밝혀도 될 때가 되지 않았나’라고 본인이 판단했다”라며 밝혔다. 이효정은 “제가 ‘나 혼자 산다’라는 프로에 출연하게 됐는데 거기에 아빠의 근황을 소개를 해도 되겠냐고 아주 조심스럽게 묻더라. 저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바로 오케이 했다”라며 털어놨다. 김구라는 “아버지가 배우로서는 근엄한데 실제로 깨니까 재미있겠다고 판단한 것 같다”라며 너스레를 떨었고, 이효정은 “(‘나 혼자 산다’ 출연을 통해) ‘나도 예능에 쓰임이 있는 배우구나’ 그런 걸 알게 되는 계기가 됐다”라며 자랑했다.

      장정윤 온라인기자 2024.02.29 06:30

  • 주간경향

    • 사회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 -베이징·끝]중국을 상징하는 만리장성과 톈안먼 광장

      베이징은 중국의 역대 도읍지 중에서 단연코 각별하다. ‘중심’의 클리셰로 각인되어 있는 자금성과 그 정문인 톈안먼, 21세기 중국은 이를 다시 부활시키는 중이다. “위대한 민족만이 이처럼 위대한 장성을 세울 수 있다!” 1972년 2월 24일,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만리장성에 올라 이렇게 감탄했다. 만리장성에 바친 닉슨의 찬사는 다분히 전략적인 것이었다. 당시 소련 견제라는 공동의 목적이 중국과 미국을 손잡게 만들었다. 돌이켜보면 이는 오늘날 G2 시대를 탄생시킨 씨앗이었던 셈이다. 역사적 운명이 빚어낸 ‘거대한 비극 장성’ 닉슨이 올랐던 곳은 만리장성의 정화라는, 베이징 근교의 바다링(八達嶺)장성이다. 이곳에서 닉슨은 “오늘 장성에 왔으니 마오(毛) 주석이 말씀하신 ‘진정한 남자’가 되었군요”라고 말했다. “장성에 오르지 않으면 진정한 남자가 아니다(不到長城非好漢).” 바다링장성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이 말은 오늘날 중국의 대표적 관광자원인 만리장성의 캐치프레이즈다. 일찍이 마오쩌둥이 1935년에 육반산을 넘으면서, “장성에 오르지 않으면 진정한 남자가 아니지. 이미 2만리를 행군했다네”(‘淸平樂·六盤山’)라고 읊은 바 있다. 당시는 공산당 홍군이 국민당의 추격을 피해 서북부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마오쩌둥은 고난을 극복하고 도달해야 할 목표로서 ‘장성’을 언급했다. 결국 1만2500㎞의 장정(長征, 1934~1936)을 통해 공산당은 살아남았으며, 힘을 키워 국민당을 무찌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게 된다. 2015년 톈안먼 광장에서 거행된 열병식. 1949년 10월 1일, 톈안먼 광장에서 거행된 개국대전(開國大典)에서 오성홍기가 올라가는 가운데 국가 ‘의용군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일어나라! 노예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여! 우리의 피와 살로 우리의 새로운 장성을 쌓자!”로 시작되는 이 노래 역시 1935년에 만들어졌다. 여기서 장성은 정신적 차원으로 전이되는 동시에 ‘민족’이라는 코드로 치환된다. 그 옛날 외적을 막기 위해 쌓았던 장성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담은 채. “위대한 민족만이 이처럼 위대한 장성을 세울 수 있다!”라고 닉슨이 찬사를 보낸 지 16년이 지난 1988년, 다큐멘터리 은 장성을 ‘거대한 비극적 기념비’로 고발한다. “사람들은 장성이 달에 간 우주인이 볼 수 있는 유일한 인공 구조물이라 여기며 자랑스러워한다. 심지어 장성을 통해 중국의 강성함을 상징하고자 한다. 하지만 장성이 말을 할 수 있다면, 화하 자손에게 솔직하게 말해줄 것이다. 자신은 역사적 운명이 빚어낸 거대한 비극적 기념비라고. 장성은 강대·진취·영광을 상징하는 게 아니라 단지 폐쇄와 보수, 무능한 방어와 공격 회피의 비겁을 상징할 뿐이다. 그 거대함과 유구함 때문에 장성은 자만함과 기만성을 우리 민족의 가슴에 깊이 새겨 놓았다. 아, 장성이여! 우리는 왜 아직도 그대를 찬미하려 하는가?” 의 제작진은 전통문화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민주’를 외쳤고, 지식인의 현실참여를 촉구했다. 이 방영된 이듬해(1989)는 5·4운동 7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해 4월 15일, 후야오방이 사망하자 학생들이 톈안먼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추도 시위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운동으로 확대되고 일반 시민도 참여했다. 당국은 이를 ‘폭동’으로 규정했다. 공교롭게도 고르바초프와 덩샤오핑의 회담이 바로 이 시기에 있었다. 소련과 중국의 관계가 정상화되었음을 선포(5.16)한 이튿날 고르바초프는 바다링장성에 올랐다. 베이징에는 폭풍전야의 위기감이 감돌았다. 고르바초프가 돌아간(5.18) 다음 베이징에는 계엄령이 내려진다(5.20). 6월 4일 새벽,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의 유혈 진압으로 민주화의 염원은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70년 전 5·4운동의 현장이었던 톈안먼 광장, 그때 이곳은 민중의 힘을 확인하는 공간이었다. 고르바초프가 바다링장성을 구경하던 시각, 의 작가인 쑤샤오캉(蘇曉康)은 톈안먼 광장의 시위대와 함께하고 있었다. 시위가 진압된 뒤 당국은 지명수배자 명단을 배포했다. 쑤샤오캉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이 ‘6·4 톈안먼 사건’을 촉발한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이 정권 지도자들의 판단이었다. 6·4 톈안먼 사건의 주역들은 중국에서 무탈하게 살아갈 수 없었다. 쑤샤오캉은 미국으로 망명했다. 톈안먼 학생시위 3인방 왕단·우얼카이시·차이링, 톈안먼 4군자 류샤오보·허우더젠·가오신·저우둬, 이들 가운데 류샤오보를 제외하고는 모두 미국이나 타이완으로 망명했다. 류샤오보(劉曉波)는 2008년 중국의 정치적 자유를 요구하는 ‘08헌장’을 주도했다. 이로 인해 그는 2009년 12월 국가전복 선동죄로 11년형을 선고받고 투옥 중이다. 201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그는 “노벨평화상을 톈안먼 희생자에게 돌린다”고 했다. 2015년 12월 28일, 류샤오보는 감옥에서 환갑을 맞았다. 바로 몇 달 전인 2015년 9월 3일은 전승절(중국인민 항일전쟁 승리 기념일) 70주년 행사가 있던 날로, 전 세계의 이목이 톈안먼 광장에 집중되었다. 이날 이곳에서는 역대 15번째 열병식이 거행되었다. 49개국에서 축하사절을 보냈고, 그 중 24개국에서는 국가원수가 참석했다. 이날 열병식에서 중국은 자체 개발한 최첨단 무기를 선보였다. 1만2000명의 병사와 500점이 넘는 최신형 무기가 동원된 이 열병식을 두고, 는 “20세기의 추한 유물(ugly relics)”이라고 비난했다. 는 열병식이 “히틀러와 스탈린, 침략과 독재를 환기시킨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열병식에서 공개된, ‘둥펑(東風·DF)-31A’의 존재를 감안하면 미국 언론의 이런 반응도 이해가 간다. 미국까지 도달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이라니! 그런데 열병식이 “정치적 권위를 군사력과 동일시하는 이데올로기를 환기시킨다”는 의 비판은, 중국만을 겨냥하기에는 매우 비논리적인 언사다. 미국이야말로 ‘군사력 만능주의’의 전형적인 케이스 아니던가. 미국에 의해 세계질서가 유지되는 ‘팍스 아메리카나’에 맞서며 ‘팍스 시니카(Pax Sinica)’를 추구하는 중국, 바야흐로 양자의 힘겨루기가 본격화된 지금이다. 전승절 70주년 행사가 열린 톈안먼 광장에는 ‘장성’을 주제로 삼은 입체 화단이 설치되었다. 장성은 전승절 70주년 로고에도 등장한다. 숫자 70, 1945~2015, 다섯 마리의 비둘기, ‘V’ 형태의 장성으로 이루어진 로고. 다섯 마리의 비둘기는 오대주를 상징한다. 중국의 상징으로 선택된 ‘장성’은 물리적 장성이자 정신적 장성이다. 유형이든 무형이든, 장성은 외부세계와 중국의 경계면으로서 중국의 정체성을 만들어낸다. 1972년, 바다링장성에 오른 닉슨 대통령 일찍이 진시황은 흉노를 막기 위해 장성을 쌓았고, 이를 통해 중국과 비중국의 세계를 나눔으로써 공동체 의식을 확보했다. 장성은 역대로 중국이 자신의 세계를 바깥 세계와 구분하기 위해 애쓴 흔적이다. 명나라가 그러하듯, 장성을 쌓는 데 열을 올린 시기는 방어심리가 팽배한 때였다. 그 방어심리에는 이질적인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멸시가 뒤섞여 있다. 장성이야말로 ‘야만’의 비중국으로부터 ‘문명’의 중국을 보호해주리라는 믿음, 이 ‘장성 심리’의 뿌리는 매우 깊고 그 깊이만큼이나 질긴 생명력을 지닌다. 중국의 인터넷 검열 시스템 ‘장성방화벽(防火長城, the Great Firewall)’은 그 깊이와 생명력의 완벽한 체현이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단어는 검색조차 불가능하고, 중국 당국이 유해하다고 판단한 사이트는 차단·삭제된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도 물론 정부의 감시 아래 있다. 중국에서는 구글·페이스북·트위터를 사용할 수 없다. 광장에 모인 민주화의 염원 끝내 짓밟혀 올해 3월 18일, 페이스북의 최고경영자 마크 저커버그는 톈안먼 광장 앞을 달리는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그가 조깅하던 이날 오전 베이징에는 스모그 황색경보가 발령되었다. 사진 속 저커버그는 해맑은 표정이다. 그의 눈과 목에 어떤 방어막이 작동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2009년 신장위구르자치구에서 발생한 유혈 진압에 항의하는 세력이 페이스북을 통해 자신들의 정당성을 알린 이후, 중국에서는 페이스북 서비스가 중단된 상태다. 지난해 10월, 저커버그는 베이징 칭화대에서 22분간 중국어로 강연했고, 시안(西安)을 방문해 성벽 위에서 조깅하는 사진과 진시황 병마용갱을 관람하는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요컨대 중국 시장으로의 재진입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역시 지난해 10월, 애플의 최고경영자 팀 쿡은 베이징에서 130㎞ 떨어진 진산링(金山嶺)장성에 올랐다. 그는 여기서 찍은 사진을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微博)에 올리면서 “감탄스럽다”고 했다. 이날 새벽 베이징 일대는 스모그로 가득했고, 진산링장성도 스모그에 휩싸여 있었다. 압도적 성장세를 보이는 중국 시장을 잡기 위해서라면 이쯤이야 뭐가 대수랴. 이날은 마침 중양절(음력 9월 9일)로, 높은 곳에 오르는 풍습이 있는 날이다. 중국의 풍습을 이해하고 중국이 자랑스러워하는 장성에 경의를 표하는 팀 쿡의 태도가 중국인에게 호감을 준 것은 사실이다. 사실 베이징에서 며칠간 연속으로 맑은 하늘을 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2015년 전승절 행사 즈음에 이 어려운 일이 실현되었다. 당국의 강력한 규제 덕분에. 차량 홀짝제를 운영하고 공장 가동을 중단시키고 건축 공사장의 작업도 중단시켰다. 임시적이나 전면적인 조치 덕분에 이례적으로 파란 베이징 하늘이 연출되었다. 이를 가리키는 ‘열병식 블루(閱兵藍)’라는 용어는 2015년 중국의 10대 신조어로 선정되기도 했다. 2014년 11월에는 아펙 정상회의를 맞아 베이징에 파란 하늘이 펼쳐져 ‘아펙 블루(APEC藍)’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국제적 행사를 앞두고 하늘의 색깔까지 좌우할 정도로 중국 당국이 공권력을 행사하는 건 일찍이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목도한 바 있지 않은가. 당시 우리가 지켜봤던 베이징의 파란 하늘은 그렇게 연출되었던 것이다. 2022년에는 베이징에서 동계올림픽이 개최된다. 개최 신청을 하면서 중국 당국은 ‘올림픽 블루’를 약속했다. 이번에는 대기환경 개선을 위한 장기계획을 수립한 만큼 ‘반짝 쇼’에 그치지 않길 바라마지 않는다. 문득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바다링장성에 오르기 전날의 일화가 떠오른다. 1972년 2월 23일 저녁, 베이징에는 눈이 많이 내렸다. 이튿날 닉슨은 예정대로 장성에 오를 수 있었다. 밤새 100여대의 차량과 70만명이 동원되어 제설 작업을 했던 것이다. 그 짧은 시간에 그 엄청난 일을 가능하게 만든 건 저우언라이 총리의 전화 한 통! 장성에 오른 닉슨의 모습, 냉전체제의 와해를 상징하는 이 장면은 이렇게 해서 가능했다. 톈안먼 광장 앞을 달리는 마크 저커버그 봉건왕조와 공산주의 상징의 조우 베이징은 중국의 역대 도읍지 중에서 단연코 각별하다. ‘중심’의 클리셰로 각인되어 있는 자금성과 그 정문인 톈안먼, 21세기 중국은 이를 다시 부활시키는 중이다. 일찍이 명나라 영락제는 베이징으로의 천도를 단행한 뒤, 1421년 자금성에서 열린 새해 행사에서 세계 각지의 사절단으로부터 삼궤구고두를 받았다. 자금성(紫禁城)은 천제(天帝)가 머무는 자미궁(紫微宮)을 지상에 재현한 것이다. 황제가 머무는 그곳은 당연히 금지 구역이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는 무너지고 마지막 황제 푸이는 1924년에 자금성에서 쫓겨난다. 이듬해 10월 10일, 자금성은 고궁(故宮)박물원이 되어 모든 이에게 개방된다. 자금성 정문의 명칭은 본래 ‘승천문(承天門)’이었다. 승천이란 “하늘의 명(命)을 이어받는다”는 의미다. 청나라 순치제 때 바뀐 ‘천안문(天安門, 톈안먼)’이라는 명칭은 기존의 의미에 “오래도록 편히 다스린다”는 의미가 더해진 것이다. 이제 그 톈안먼 성루에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중국의 봉건왕조와 공산주의 상징이 기묘하게 조우하고 있는 모습이다. 양자를 관통하는 것은 ‘세계의 중심이고자 하는 중국’이 아닐까. 6월 23일, 영국은 국민투표로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를 결정했다. 이로써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에 지각변동이 예측되는 가운데, 중국과 러시아는 전례 없는 친밀함을 과시하고 있다. 6월 25일 톈안먼 광장 서쪽에 자리한 인민대회당 앞에서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위한 환영의식이 열렸다. 이날 시진핑 주석과 푸틴 대통령은 미국이 추진하는 ‘사드’의 한반도 배치에 반대한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1972년의 중국과 미국은 오늘날 중국의 이런 모습을 과연 상상이나 했을까. 바야흐로 중국으로의 파워 시프트가 진행 중인 지금이다. 베이징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일, 그 일을 겪은 사람들, 그 사연이 깃든 장소, 베이징의 영광과 오욕의 순간, 그리고 희로애락의 역사…. 이것들을 숙제로 남긴 채 베이징 이야기를 마치려 한다. 지난해 6월 16일(1130호) 시안부터 시작해서 뤄양·카이펑·항저우·난징을 거쳐 베이징에 도착한 ‘중국 도읍지 기행’도 이제 작별인사를 드린다. 총 55회에 걸친 기행, 아쉽고 부족하지만 흘린 땀만큼 감회가 남다르다. 그동안 함께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2016.07.04 17:00

    • 사회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난징]정화의 정해사에서 영국군 노고를 달래다

      사해를 평정한다’는 의미가 담긴 정해사, 일찍이 중국의 강성기에 세워졌던 이곳, 400여년 뒤 중국이 제국주의 열강의 먹잇감으로 전락하는 시발점이 된 난징조약 회담이 이루어졌던 곳이다. 1842년 8월 29일, 영국 군함 콘월리스(Cornwalis)호에서 난징조약이 체결된다. 청나라와 영국 측은 정해사(靜海寺)와 콘월리스호에서 보름이 넘도록 회담을 가졌다. 아편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강철군함을 내세운 영국의 요구가 거의 그대로 관철되었다. 청나라는 더 많은 항구를 개항하고 영국이 원하는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홍콩을 할양한 것도 바로 이때다. 난징조약 조인 이후, 청나라 흠차대신 기영(耆英)과 이리포(伊里布)는 영국군의 노고를 달래기 위한 잔치를 정해사에서 열었다. 영국의 군함에도 술과 음식이 전해졌다. 중국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라는 난징조약, 정작 당사자는 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서양 오랑캐를 어르고 달래서 성가신 상황을 얼른 끝내려 했을 따름이다. 1997년, 난징 시민들의 모금으로 정해사 내에 청동종이 안치되었다. 이름하여 ‘경세종’! 종의 앞면에는 ‘경세종(警世鐘)’이라는 글자가 주조되어 있다. 뒷면에는 의 글귀가 주조되어 있다. ‘전사불망(前事不忘) 후사지사(後事之師)’. “지난일을 잊지 않고 훗일의 본보기로 삼는다”는 의미다. 종의 높이는 1.842m, 난징조약이 체결된 1842년을 상징한다. 종의 꼭대기 7.1㎝ 높이의 화구(火球)는 홍콩 반환 일자인 7월 1일을 상징한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기 전날이었던 1997년 6월 30일, 경세종 타종 의식이 거행되었다. 해마다 난징조약 체결일인 8월 29일이 되면 경세종 타종행사가 열린다. 뼈아픈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 아이러니하게도 애초에 정해사는 중국이 세계 최고의 해상강국을 구가하던 당시의 주인공 정화(鄭和, 1371~1433)를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영락제의 명으로 파견된 정화의 함대는 동남아시아·인도·아프리카를 누비며 명나라의 위세를 떨쳤다. 현재 정해사에는 ‘정화 기념관’과 ‘난징조약 사료 진열관’이 동시에 존재한다. ‘사해를 평정한다’는 의미가 담긴 정해사, 일찍이 중국의 강성기에 세워졌던 이곳, 400여년 뒤 중국이 제국주의 열강의 먹잇감으로 전락하는 시발점이 된 난징조약 회담이 이루어졌던 이곳, 바로 이곳에 지금은 홍콩 반환을 기념하여 만든 경세종이 자리하고 있다. 위안소 기념관 앞의 위안부 동상 홍콩 할양과 배상금 지불한 난징조약 하나의 장소이되 여러 의미가 겹쳐진 겹겹의 공간, 난징에는 유난히도 이런 곳이 많다. 대보은사(大報恩寺)도 그런 곳이다. 2008년, 대보은사 유적지에서 발굴 작업을 하던 중 ‘진링장간사탑신장사리석함기(金陵長干寺塔身藏舍利石函記)’라고 새겨진 1.5m 높이의 돌함이 발견된다. 돌함의 명문에 따르면, 대중상부(大中祥符) 4년(1011)에 가정(可政) 스님이 송 진종의 윤허를 받아 장간사(대보은사의 전신) 9층탑을 재건하면서 그 아래 지궁에다 부처의 정골(頂骨)사리를 모셨다. 명문의 내용대로라면 돌함 안에는 철함, 철함 안에는 아육왕(아쇼카왕) 탑, 아육왕 탑 안에는 은곽, 은곽 안에는 금관, 그리고 금관 안에 바로 부처의 정골사리가 있을 터였다. 과연 그랬다! 베이징 올림픽이 열리기 직전(2008.8.6)에 철함이 개봉된 것을 시작으로 마침내 2010년 6월 12일, 은곽과 금관이 개봉되고 부처의 정골사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를 모시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곳이 바로 우수산(牛首山)의 불정궁(佛頂宮)이다. 부처의 정골사리가 불정궁에 안치되던 날(2015.10.27), 세계 각지의 불교신자가 이곳에 운집했다. 부처의 정골사리 덕분에 난징은 불교문화의 성지로 부각될 듯하다. 대보은사 유적지는 일찍이 당 현장의 정골사리가 발굴된 곳이기도 하다. 1942년 11월, 난징을 점거하고 있던 일본군이 신사(神社)를 만들려고 기초공사를 하다가 우연히 돌함을 발견한다. 돌함의 명문에 따르면, 그 안에 있는 것은 현장의 정골사리! 일본군은 교수들을 잡아다가 그것을 고증하게 한다. 비밀리에 진행되었지만 결국 관련 기사가 보도되었다. 여론이 들끓자, 일본군은 현장의 정골사리를 왕징웨이 정부에 넘긴다. 이후 현장의 정골사리는 난징·베이징·일본에 나뉘어 모셔진다. 그 중 난징에 남겨진 정골사리는 중앙문물보관위원회와 구화산(九華山)의 현장탑에 나뉘어 보관된다. 현재 난징 영곡사(靈谷寺)에 모셔진 현장의 정골사리는 바로 중앙문물보관위원회에서 보관하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창안(시안)에 장사 지내진 현장의 정골사리가 어떻게 난징까지 오게 된 것일까? 현장의 정골사리가 들어 있던 돌함의 명문에 따르면, 당나라 말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 현종의 사리탑이 파괴되었는데, 송나라 가정 스님이 창안에 들렀다가 현종의 정골사리를 가지고 난징으로 돌아와서 장간사에 안치한 것(1027)이다. 요하네스 니호프가 그린 대보은사 9층 유리탑 장간사가 있던 자리에 대보은사를 지은 이는 명나라 영락제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기념하기 위해 대보은사를 지었다. 19년(1412~1431)에 걸쳐 10만명이 동원되었을 정도로 큰 규모였다. 특히 9층 유리탑은 난징을 방문했던 유럽 여행자들에 의해 ‘중세시대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힐 만큼 예술성이 뛰어났다. 대보은사 유리탑에 대해 “큰 규모였다” “뛰어났다”라고 ‘과거형’으로 서술한 이유는 그것이 이미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1856년에 벌어진 태평천국의 내분으로 인해 그토록 아름다운 탑이 파괴된 것이다. 우리로서는 박물관에 전시된 탑의 부분들만 볼 수 있을 뿐, 146개의 등잔이 80m에 달하는 유리탑과 어우러져 뿜어내던 아우라를 느낄 수 없게 되었다. 일찍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서 파견한 사절단을 따라서 난징에 왔던 요하네스 니호프(Johannes Nieuhof, 1618~1672)는 그의 여행기에 중국의 여러 건축물과 더불어 대보은사 유리탑을 그림으로 남겼다. 그의 여행기가 출간되자 당시 유럽인은 대보은사 유리탑에 매료되었다. 니호프는 이 유리탑을 자기탑(Porcelain Tower)으로 소개했다. 17세기 유럽을 풍미한 중국풍의 중심에 도자기가 있었던 걸 감안하면, 유리탑이 자기탑으로 오역되었기에 오히려 그들에게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림으로만 남은 대보은사 9층 유리탑 대보은사가 파괴된 지 150여년이 지난 2015년 12월, 대보은사유적지공원이 개방되었다. 2010년부터 추진된 대보은사 복원 사업의 결과다. 이 복원 사업을 위해 완다(萬達) 그룹의 왕젠린(王健林) 회장이 10억 위안(한화로 약 1700억원)을 기부해 세계적인 화제가 되기도 했다. 불교신자도 아닌 그가 중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부를 한 이유는 중국의 전통문화 성지를 선양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일찍이 유럽이 선망했던 유리탑은 이제 인공지능 LED 조명 시스템이 적용된 탑으로 복원되었다. 대보은사의 복원은 21세기 ‘중화의 부활’을 상징한다. 어떤 역사는 영광의 기억을 소환하고, 또 어떤 역사는 뼈아픈 기억을 소환한다. 난징뿐 아니라 중국의 모든 역사, 나아가 인류의 모든 역사를 통틀어서 보다 참혹한 경우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끝으로 난징을 떠나려 한다. 난징대학살, 1937년 12월 13일부터 6주 동안 무려 30만명이 학살된 아시아의 홀로코스트! 산 채로 묻기, 사지 절단, 불태우기, 동사시키기, 사나운 개의 먹이로 던져주기, 염산에 담그기…. 대체 난징에서 무슨 일이 왜 어떻게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1997)의 일독을 권해드린다. 난징대학살의 참상을 낱낱이 고발한 최초의 영문 논픽션인 이 책의 저자는 중국계 미국인 아이리스 장(Iris Chang)이다. 그녀는 자신의 책이 ‘두 가지’ 잔학행위에 관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는 일본이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빼앗은 난징대학살 자체다. 다른 하나는 일본이 이 대학살의 기억을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지우려 하는 행위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과거를 되풀이한다”(조지 산타야나)는 경고를 책을 쓰는 내내 마음 깊이 새겼다는 아이리스 장, 그녀는 서른여섯이던 2004년에 자살하고 말았다. 출간 이후 일본 극우세력으로부터 지속적인 협박을 받으며 공포와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생을 마감한 것이다. 정직하게 과거와 대면하기를 거부하는 일본이야말로 그 죽음의 궁극적 원인이리라. 아이리스 장이 난징대학살의 진상을 세상에 알리고자 한 것은 ‘기억의 의무’ 때문일 것이다. 그 의무를 잊는다면, 대학살에 관한 온당한 역사적 평가가 이루어질 수 없을 뿐더러 비극이 되풀이될 수 있기에. 난징대학살 기념관 난징대학살 기념관과 위안소 기념관 ‘난징대학살 기념관’은 바로 ‘기억의 의무’를 상기시켜주는 공간이다. 이곳이 개관한 날은 1985년 8월 15일, 항일전쟁 승리 40주년이 되는 때였다. 기념관 설립의 직접적 계기가 된 건 1982년에 벌어진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이다. 중국 ‘침략’을 ‘진입’으로 기술하는 등 역사의 왜곡이 중국인의 분노를 자아냈고, 그 결과 기념관 설립이 추진되었던 것이다. 난징대학살 기념관 정문 좌측에는 ‘침화일군남경대도살우난동포기념관(侵華日軍南京大屠殺遇難同胞紀念館)’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난징대학살 기념관의 정식 명칭으로, 덩샤오핑의 글씨다. 기념관 입구에는 12.13m 높이의 십자가 모양 표지비가 세워져 있다. 난징이 함락된 12월 13일을 의미하는 것이다. 표지비에 새겨진 ‘1937.12.13~1938.1’이라는 숫자는 대학살이 자행된 기간을 나타낸다. 난징대학살 기념관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광장, 희생자의 유골 전시실, 대학살 관련 자료 전시실이다. 난징대학살 기념관을 관통하는 콘셉트는 ‘삶과 죽음’ ‘고통과 한’이다. 광장 구역에서는 죽음을 상징하는 자갈, 생명을 상징하는 풀과 나무, 양자의 선명한 대비 속에서 고난에 빠진 희생자들의 조형물이 그 고통과 한을 고스란히 전달하고 있다. 유골 전시실에는 법의학·고고학·역사학 전문가들이 난징대학살로 희생당한 이들의 것이라고 검증한 유골이 전시되어 있다. 이들이야말로 일본이 대학살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다. 기념관이 세워진 강동문(江東門) 일대는 대학살이 자행된 대표적인 지역 중 한 곳이기도 하다. 사료 전시실에서는 일본이 상하이를 함락한 때부터 일본이 패망한 이후 난징전범재판이 열리기까지의 역사를 만나볼 수 있다. 30만, 난징대학살 기념관 곳곳에서는 ‘30만’이라는 희생자 수를 환기시키고 있다. 일본이 난징을 침략했을 당시 난징 시민의 절반은 이미 피난을 떠난 상태였다. 남은 50만명 대부분은 사회적 약자였다. 바로 이들을 상대로 일본군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잔혹한 방법으로 살인과 강간을 저질렀던 것이다. 12월 13일은 난징대학살로 희생된 30만명의 넋을 기리는 국가추모일이다. 이날을 국가 차원에서 공식으로 추모하기 시작한 2014년, 중국 정부는 난징대학살 관련 자료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신청했다. ‘위안부’ 관련 자료와 함께! 2015년 10월, 난징대학살 자료는 등재되었으나 위안부 자료는 등재되지 못했다. 올해 중국·한국·일본·필리핀·인도네시아·동티모르·네덜란드·영국·오스트레일리아·미국 10개국의 민간단체가 연합해 위안부 자료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신청한 상태다. 난징대학살마저 정직하게 인정하지 않는 일본은 이번에도 역시 반발하고 있다. 하지만 위안부 제도가 강제성을 띤 국가적 동원이었음은 너무나 명백하다. 난징대학살 기념관에서 동쪽으로 6㎞ 되는 곳에 위안소 기념관(利濟巷慰安所舊址陳列館)이 있다. 동운(東雲)위안소와 고향루(故鄕樓)위안소가 있던 곳이다. 평안남도 출신 박영심이 일본군 성노예로 지냈던 곳이 동운위안소다. 2003년, 박 할머니는 난징을 찾아 여기가 바로 자신이 3년 동안 갇혀 지낸 곳이라고 증언했다. 윈난 쿤밍의 미군 관할 포로수용소에서 촬영된 사진 속 위안부 4명 중 임산부가 바로 박영심이다. 위안소 기념관 앞의 위안부 동상 셋 중에서 가운데 임신한 이가 바로 박영심이다. 기념관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듯한 ‘눈물방울’ 조형은 수많은 박영심의 피맺힌 원한의 눈물일 터. 박영심은 2006년 세상을 떠났다. 자신의 인생을 나락으로 몰아넣은 일본 당국의 사과조차 받지 못한 채. 2015년 12월 1일, 위안소 기념관이 개관하던 이날 서울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은 더욱 처연해 보였다. 몇 주 뒤인 12월 28일, 일본 정부는 10억 엔을 출현키로 했고 대한민국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합의에 동의했다. 일본은 “더 이상 사과는 없다”고 한다. 언제 그들이 제대로 된 사과를 한 적이 있기나 했던가. 올해 6월, 독일 헤센주(州) 정부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운영에 관여했던 이들의 재판 관련 자료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한다고 밝혔다. 아 참, 내년도 정부 예산에서 위안부 기록물 세계기록유산 등재사업 예산이 전액 삭감되었다고 한다. “민간단체에서 추진하는 일”이라는 게 여가부의 입장이란다. 역사를 ‘왜’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난징이 던지는 질문을 되새기며 이제 이곳을 떠난다.

      2016.06.27 15:19

    • 사회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난징]주원장이 묻힌 효릉, ‘참배정치’ 성지되다

      1912년 2월 15일, 쑨원은 임시정부 관료들을 대동하고 효릉을 참배했다. 당시 쑨원은 국민을 대표하는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의 자격으로 주원장의 영령 앞에서 청나라가 무너졌음을 고했다. 난징에 있는 명나라 황제의 능은 단 하나, 바로 주원장이 묻힌 ‘효릉(孝陵)’이다. 홍무(洪武) 15년(1382), 마황후가 세상을 뜨고 이곳에 묻혔다. 16년 뒤, 주원장도 세상을 뜨고 이곳에 묻혔다. 효릉은 마황후의 시호 ‘효자(孝慈)’에서 비롯된 명칭이다. 이 명칭은 ‘효’로 천하를 다스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주원장이 세상을 떴을 때 그의 아들은 모두 장례에 참석하지 못했다. “다들 임지에 그대로 머물고 수도로 오지 말라”는 주원장의 뜻이었다. 일찍이 주원장은 명나라를 세운 뒤 자신의 여러 아들을 번왕(藩王)에 봉하여 각지를 지키도록 했다. 주원장은 생전에 26명의 아들을 두었다. 주원장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은 첫째·둘째·셋째를 포함해 모두 7명, 그가 사망할 당시 19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모두 장례에 참석하지 못했다. ‘효’를 그토록 중시했던 주원장이 이런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건 자신의 아들들이 제위에 오를 손자 주윤문에게 위협이 될 것을 우려해서였다. 효릉의 ‘치륭당송비’ 한족 지도자들 찾아와 이민족 퇴치 다짐 하지만 1402년, 주원장의 넷째아들 주체가 결국 난징을 함락하고 황제의 자리를 차지한다. 효릉의 ‘대명효릉신공성덕비(大明孝陵神功聖德碑)’는 주체가 세운 것으로, 비문의 2746자는 주원장의 일생을 담고 있다. 이 비석이 세워진 1413년은 바로 효릉의 공사가 완전히 마무리된 해이기도 하다. 효릉은 명나라의 뿌리를 상징하는 장소로서 명나라 내내 존중을 받았다.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들어선 청나라 역시 효릉을 중시했다. 효릉의 ‘치륭당송비(治隆唐宋碑)’는 주원장이 당시 어떤 지위를 누렸는지 잘 말해준다. ‘치륭당송’이란, 명 태조 주원장의 다스림이 당 태종 이세민과 송 태조 조광윤보다 뛰어나다는 의미다. 치륭당송비를 세운 사람은 강희제다. 그는 여섯 차례 강남 지역을 순시했는데, 그 중 다섯 번이나 효릉을 참배했다. 게다가 신하가 황제에게 행하는 ‘삼궤구고’의 예를 올렸다. 강희제가 주원장을 이토록 받든 이유는 명확하다. 만주족 출신 황제로서 절대다수의 한족을 통치하려면, 고압적 정책만으로는 부족하고 그들의 마음을 얻어야 했다. 한족의 왕조를 세웠던 주원장을 적대시하는 것보다는 끌어안는 게 이득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효릉은 역대로 ‘참배 정치’의 장이었다. 이민족의 원나라를 무너뜨리고 한족의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기에, 그가 묻힌 이곳은 한족 지도자에게 더더욱 중요한 곳이었다. 만주족 왕조를 악마로 규정했던 태평천국의 홍수전은 효릉에 지어 올린 제문(‘祭明太祖陵寢文’)에서 자신을 ‘불초한 자손’이라고 표현했다. 그의 제문에 의하면, 중국은 ‘한족’의 것인데 이민족이 중국을 차지함으로써 종족이 멸망의 위기에 빠졌다. 홍수전은 주원장의 영령 앞에서 “이민족을 몰아내고 우리의 신주(神州, 중국)를 되찾겠다”고 다짐한다. 태평천국은 만주족 왕조를 무너뜨리지 못한 채 멸망한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50년이 되기도 전에 청나라 역시 멸망한다.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진 이듬해인 1912년 2월 12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가 퇴위를 선포한다. 사흘 뒤인 2월 15일, 쑨원은 임시정부 관료들을 대동하고 효릉을 참배했다. 당시 쑨원은 국민을 대표하는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의 자격으로 주원장의 영령 앞에서 청나라가 무너졌음을 고했다. 이날 효릉에 지어 올린 제문(‘祭明陵文’)에서 쑨원은 “중화민국의 완전한 통일”을 강조했다. 일찍이 그는 1912년 1월 1일에 발표한 ‘임시대총통선언서’에서 한족·만주족·몽골족·회족·티베트족의 통합을 주장하는 ‘오족공화론(五族共和論)’을 발표한 바 있다. 청나라가 무너진 상황에서 ‘한족’만의 중국을 주장하는 것은 결국 중국이 차지하고 있는 영토의 분할을 초래할 터, 쑨원은 발 빠르게 기존의 배만(排滿)에서 오족공화로 급선회했다. 하지만 기존의 배만 의식과 한족주의는 한순간에 떨쳐버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효릉에 지어 올린 제문에서 쑨원은 청나라가 지배한 268년을 원통한 시간으로 규정했다. 또한 그는 주원장이 몽골족을 물리치고 명나라를 건국한 것을 해와 달이 다시 밝아진 광복에 빗대었다. 그의 논리에 따르자면, 주원장이 원나라를 무너뜨린 것은 청나라를 무너뜨린 신해혁명의 선구였던 셈이다. ‘박애(博愛)’라고 적힌 중산릉 패방. 쑨원이 효릉을 참배한 날은 그가 임시대총통 자리를 내놓기 직전이었다. 이날 난징에서는 중화민국 임시대총통 선거가 열렸다. 여기서 위안스카이가 임시대총통으로 선출된다. 3월 10일, 위안스카이는 베이징에서 임시대총통에 취임한다. 이후 위안스카이는 공화제에 대한 약속을 저버린다. 쑨원은 위안스카이에 맞서야 했고, 이어서 여러 군벌을 상대해야 했다. 결국 그는 뜻을 이루지 못한 채 1925년 3월 12일, 베이징에서 간암으로 사망한다.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으니, 동지들은 계속 노력하라”는 유언을 남긴 채. 베이징 벽운사(碧雲寺)에 임시로 안치되어 있던 쑨원의 유해가 난징으로 옮겨져 묻힌 건 1929년 6월 1일이다. 쑨원이 잠들어 있는 곳을 ‘중산릉’이라고 한다. 일찍이 쑨원은 일본 망명시절에 중산초(中山樵)라는 가명을 썼는데, 이후 ‘중산’은 그의 여러 이름 중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 중산릉은 쑨원이 생전에 자신이 죽은 뒤 묻히길 바랐던 장소다. 광둥에서 태어나 베이징에서 사망한 그가 왜 난징에 묻힌 것일까? 임시대총통에서 사임한 1912년 어느 봄날, 쑨원은 이곳에 사냥을 하러 왔다가 사방을 둘러본 뒤 훗날 자신이 죽으면 이 땅에 안장해 달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쑨원이 난징에서 머문 기간은 오래지 않지만 그에게 난징은 어느 곳보다 의미 있는 곳이었으리라.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던 곳, 신해혁명의 의미를 상기시키는 곳이 바로 난징 아닌가. 베이징에서 죽은 쑨원도 중산릉에 묻혀 중산릉은 쑨원이 서거한 지 1주년이 되는 해(1926)에 기공식을 거행한 이래 1929년 봄이 되어서야 준공되었다. 쑨원의 유해를 맞이하기 위해서 이 해에 난징에는 첫 번째 아스팔트 도로인 ‘중산로’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또한 명나라 때의 동쪽 성문인 조양문을 개축하고 ‘중산문’이라 개칭했다. 중산릉은 중국 전통의 건축 구조를 따르고 있는데, 가운데 중심선을 따라서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일직선상에 주요 건축이 자리한다. 중산릉은 산세에 의지해서 조성되었기 때문에 패방·묘도·능문·비정·제당·묘실로 가는 길이 조금씩 높아진다. 또한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중산릉의 전체 모양은 마치 ‘종’과 같다. 이를 두고 ‘자유의 종’이라고도 하고, 세상을 일깨우는 ‘경세종(警世鐘)’이라고도 한다. 중산릉의 패방부터 묘실까지 모든 것에 쑨원의 정신, 그리고 그를 존경하는 중국인의 마음이 담겨 있다. 패방에 적힌 ‘박애(博愛)’라는 글자는 쑨원의 일생을 개괄하는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 한다. 패방을 지나 설송(雪松)과 향나무가 늘어선 400m가 넘는 묘도가 끝나는 자리에 ‘능문’이 자리하고 있다. 능문의 위쪽에 적힌 글자는 ‘천하위공(天下爲公)’이다. 천하는 모두의 것이라는 의미다. 이는 쑨원이 평생 분투했던 이상이기도 하다. 능문을 지나면 비정이다. 비정 안의 9m나 되는 커다란 비석에는 다음 24개의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다. ‘중국국민당이 총리 쑨 선생을 이곳에 안장하다, 중화민국 18년 6월 1일(中國國民黨葬總理孫先生於此, 中華民國十八年六月一日)’. 원래는 쑨원의 공적을 담은 비문을 새길 계획이었지만 결국엔 이렇게만 새겼다. 그의 공적을 비문에 제대로 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비정을 지나면 제당까지 이어진 돌계단이다. 비정에서 제당까지 돌계단의 개수는 339개, 당시 국민당 의원의 수를 상징한다. 패방부터 제당까지 돌계단의 개수는 392개, 당시 중국의 인구 3억9200만명을 상징한다. 쑨원에 대한 중국인 모두의 존경을 담은 돌계단이 끝나는 곳에 제당이 있다. 제당 입구의 문미에는 ‘민족(民族), 민생(民生), 민권(民權)’이라고 적혀 있다. 쑨원의 삼민주의를 표현한 것이다. 제당에는 2.1m 높이의 기단 위에 4.6m에 달하는 쑨원의 좌상이 놓여 있다. 제당 뒤편 묘실에는 묘혈 위로 쑨원의 와상이 놓여 있다. 쑨원의 모습을 일대 일 비율 그대로 재현한 이 와상 아래 5m 지점에 쑨원의 관이 안치되어 있다. 제당의 좌상과 묘실의 와상 모두 흰색 대리석 조각이다. 그런데 제당의 쑨원은 중국 전통의 마고자 차림인데, 묘실의 쑨원은 중산복 차림이다. 이는 국민당 우파와 좌파의 갈등 때문에 빚어진 결과다. 쑨원의 조각상에 대해 국민당 우파는 전통 복장을 주장한 반면 국민당 좌파는 중산복을 주장했다. 결국 양측은 합의를 보지 못했고, 쑨원의 좌상과 와상의 차림새가 제각각이 된 것이다. 중산릉 제당으로 향하는 쑨원의 운구 행렬. 쑨원의 유해를 중산릉에 안장하는 ‘봉안대전(奉安大典)’이 거행된 1929년 6월 1일, 정오를 기해 전국의 교통이 3분 동안 멈추었고 전 국민이 3분 동안 애도를 표했다. 국부(國父)에 대한 최고의 예를 표한 것이다. 이후 수많은 이들이 사후에 중산릉 곁에 묻히길 바랐다. 장제스 역시 중산릉 서쪽에 자신의 묏자리를 봐둔 적이 있다. 만약 훗날에 벌어졌던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승리했다면 장제스는 바로 그곳에 묻혔을 것이다. 쑨원의 부인과 장제스와의 대립 1929년 6월 1일, 이날의 주인공은 단연코 장제스였다. 바로 전해에 그는 북벌을 완수하고 군벌 세력을 잠재웠다. 국민정부의 지도자로서 장제스는 쑨원의 이장과 관련된 모든 것을 주관했다. 장제스는 국가 수장이자 쑨원의 동서였으며, 쑨원의 후계자였다. 그런데 봉안대전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장제스를 쑨원의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쑨원의 부인 쑹칭링이다. 쑨원이 세상을 떠난 뒤 쑹칭링은 장제스와 대립하며 국민당 좌파를 지지했다. 그녀는 장제스가 쑨원과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권력을 차지하려는 것에 반대하며 중국을 떠나 모스크바로 갔다가 나중에는 베를린에서 지냈다. ‘봉안대전’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은 쑹칭링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그녀의 귀국은 자칫 장제스를 쑨원의 명실상부한 ‘후계자’로 인정하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쑨원의 아내로서 봉안대전에 참석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그녀는 귀국을 결정하는 한편 성명서를 발표한다. 중앙집행위원회의 정책과 활동은 반혁명적이기에 국민당의 일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겠다는 기존의 입장을 거듭 강조하면서, 자신이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이 결코 기존의 입장에 변화가 있는 게 아님을 밝혔다. 봉안대전이 거행된 당일 저녁, 쑹칭링은 난징을 떠나 상하이로 갔다. 장제스는 그녀가 묵을 곳을 마련해 놓았고, 쑹메이링은 그녀에게 남아 있길 간청했음에도. 장제스가 자신을 이용할 그 어떤 빌미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장제스 앞에는 해결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었다. 복잡한 당내 분쟁, 여전히 딴마음을 품고 있는 군벌, 중국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열강, 게다가 눈엣가시인 공산당. 이런 상황에서 쑨원은 그에게 ‘정통성’을 보장해주는 버팀목과 같았다. 그가 봉안대전에 온갖 심혈을 기울인 것도 당연한 일이다. 쑹칭링과 장제스, 두 사람은 쑨원으로 인해 서로 대립하면서도 쑨원으로 인해 그날 한 장소에 모였다. 훗날 쑹칭링은 중국 대륙에 남고 장제스는 타이완으로 쫓겨 간다. 이후 중산릉은 중화인민공화국 주요 인사들의 참배 장소가 되었음은 물론, 2005년에 타이완의 국민당 주석 롄잔(連戰)이 참배한 것을 필두로 타이완 주요 인사들의 참배 장소가 되었다. 올해 타이완에서는 민진당 주석 차이잉원(蔡英文)이 총통에 취임했다. 그녀는 5월 20일, 타이베이 총통부에 걸린 쑨원의 초상화 앞에서 취임선서를 했다. 차이잉원은 역대 그 누구보다 탈중국화와 타이완 정체성을 강조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중국이 내세우는 ‘하나의 중국’이라는 원칙은 매우 견고해 보인다. 쑨원의 유해가 안치된 자동관(紫銅棺)은 시멘트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일찍이 항일전쟁 시기에 국민당 정부는 쑨원의 유해를 충칭으로 옮기려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묘혈을 폭파할 경우 유해가 손상되기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장제스가 쑨원의 유해를 타이완으로 옮겨가지 못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먼 훗날 타이완 총통이 쑨원의 초상화 앞에서 취임선서를 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올는지 사뭇 궁금하다.

      2016.06.20 16:47

    • 사회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난징]주원장이 세운 성벽 ‘13개 성문의 사연’

      경성 성벽의 13개 성문은 끝이 없는 이야깃거리를 품고 있다. 마치 하늘의 수많은 별처럼. 그러고 보면 난징의 13개 성문은 하늘의 별을 본떠 만든 것이다. 심각한 가뭄이 들었다. 이어진 메뚜기 피해와 돌림병. 반년 만에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큰형까지 모두 잃은 이 가련한 소년, 관을 마련할 돈조차 없어 낡은 옷으로 유해를 수습해 이웃집 땅에다 안장했다.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하기만 하다. 갈 곳은 절밖에 없었다. 얼마 뒤 절에서도 식량이 동났다. 소년은 이곳저곳을 떠돌며 탁발승 노릇을 하며 지냈다. 그렇게 몇 년을 떠돌다가 다시 절로 돌아온 게 1348년. 스무 해가 지난 1368년, 그는 난징에서 제위에 올라 명나라 건국을 선포한다. 4중 구조로 건설된 세계 최대의 성벽 그의 이름은 주중팔(朱重八), 바로 주원장(1328~1398)이다. 주중팔은 홍건군(紅巾軍)의 우두머리 곽자흥(郭子興)의 휘하로 들어갔을 때 주원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주(朱)는 주살의 주(誅)를 의미하고, 원(元)은 원나라를 의미하며, 옥으로 만든 홀(笏)인 장(璋)은 인재를 의미한다. 주원장은 그 이름처럼 ‘원나라를 멸망시킬 인재’였다. 그는 원나라 군대를 거듭 격파했다. 곽자흥은 자신의 양녀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1355년에 곽자흥이 병사하자 그 뒤를 이은 주원장은 강남 지역에서 세력을 키웠다. 한족의 부흥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원나라와 대적하는 지도자로 부상한 주원장, 그는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인재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말에 귀기울였다. 주원장이 난징을 근거지로 삼은 것은 책사 풍국용(馮國用)의 견해를 받아들인 것이다. 주승(朱升)이라는 책사는 “성벽을 높이 쌓고, 식량을 많이 저장하고, 왕위에는 천천히 오르십시오”라고 했다. 주원장은 이 말을 그대로 실천한다. 라이벌이었던 또 다른 반란군의 지도자 진우량이 한왕(漢王)을 자칭하고 장사성이 오왕(吳王)을 자칭할 때도, 주원장은 왕위에 오르는 데 급급해 하지 않았다. 그는 소명왕(小明王) 한림아를 계속 받들면서 자신의 실력을 키웠다. 1366년, 홍건군의 기반인 백련교의 지도자 한림아는 난징으로 가던 길에 배가 뒤집혀 강물에 빠져 죽고 만다. 아마도 그의 죽음은 주원장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듬해 주원장은 오왕을 자칭했으며, 마지막 라이벌인 장사성도 죽였다. 그리고 1368년, 주원장은 황제가 된다. 국호는 대명(大明), 소명왕 한림아를 계승하는 의미가 담긴 것이다. 일찍이 백련교를 기반으로 일어났던 홍건군은 “천하가 어지러워지면 미륵불이 강생하고 명왕(明王)이 세상에 나올 것”이라고 선전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대명을 건국한 주원장이 예언의 명왕이었던 셈이다. “성벽을 높이 쌓으라”는 주승의 권고는 난징에서 착실히 이행되었다. 난징의 명나라 성벽은 궁성·황성·경성·외곽성의 4중 구조로 건설되었다. 외곽성까지 모두 완공된 건 1393년으로, 처음 궁성을 건설하기 시작한 때(1366)로부터 무려 28년이 걸렸다. 명나라 성벽의 규모가 어느 정도나 될까? “두 사람이 각각 말을 타고서 성벽의 반대 방향으로 하루 종일 가야만 만날 수 있다.” 16세기 중엽에 난징에 세 번이나 왔던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의 에 나오는 말이다. 물론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명나라 성벽은 명실상부 세계 최대의 규모였다. 외곽성이 60㎞, 경성이 35㎞에 달했다고 한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건 경성 성벽(약 25㎞)이다. 신책문(화평문) 경성 성벽의 13개 성문을 동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면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동쪽 성문은 조양문이다. 남쪽 3개의 성문은 정양문·통제문·취보문이다. 서쪽 5개의 성문은 삼산문·석성문·청량문·정회문·의봉문이다. 북쪽 4개의 문은 종부문·금천문·신책문·태평문이다. 13개의 성문 중 상당수가 사라졌고, 일부는 이름이 바뀌었으며, 또 일부는 철거되었다가 다시 세워졌다. 한편 청나라, 민국시대, 중화인민공화국에 걸쳐서 새로운 성문이 많이 생겨나기도 했다. 부자들에 대한 주원장의 경계와 의심 난징의 성문은 끝이 없는 이야깃거리를 품고 있다. 마치 하늘의 수많은 별처럼. 그러고 보면 난징의 13개 성문은 하늘의 별을 본떠 만든 것이다. 난징을 둘러싼 성벽의 북서쪽 귀퉁이(의봉문)와 동남쪽 귀퉁이(통제문)에 각각 점을 찍은 뒤 두 점을 선으로 연결해보자. 취보문·삼산문·석성문·청량문·정회문·의봉문은 ‘남두육성’에 해당한다. 그리고 통제문·정양문·조양문·태평문·신책문·금천문·종부문은 ‘북두칠성’에 해당한다. 난징의 성벽을 만든 주원장의 효릉(孝陵)은 북두칠성 영역에 자리한다. 게다가 황릉의 신도는 모두 직선 형태인데, 효릉의 신도는 북두칠성 형태로 굽어 있다. 예로부터 남두육성은 삶을 관장하고 북두칠성은 죽음을 관장하는 별자리로 믿어졌다. 난징의 13개 성문에는 자신이 세운 나라의 수도에 우주를 구현하고자 했던 주원장의 의지가 담긴 것이다. 또한 북두칠성 형태의 신도는 그가 우주의 중심 북두칠성에 묻힘으로써 영원을 기약하고자 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그런데 주원장은 엄청난 축성 자금을 어떻게 조달한 것일까? 에 의하면, 강남의 부자 심만삼(沈萬三)이 난징 성의 3분의 1을 쌓는 비용을 댔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군대의 노고를 위로하는 자금까지 내놓겠노라고 했다. 일개 필부가 천자의 군대를 위로하겠다니! 주원장은 분노하며 그를 죽이려 했다. 이때 마(馬)황후가 이렇게 말하며 주원장을 말린다. “법률이란 불법을 저지른 자를 죽이기 위함이지, 불길한 자를 죽이기 위함이 아닙니다. 나라에 대적할 정도로 부유한 자는 불길하고, 불길한 자는 하늘이 재앙을 내릴 것이니 폐하께서 그를 죽일 필요는 없습니다.” 결국 주원장은 심만삼을 죽이는 대신 윈난(雲南)으로 유배를 보냈다. 1937년 12월 13일, 중화문으로 돌격하는 일본군 명나라 초에 강남 일대의 부자는 죄다 주원장의 고향인 펑양(鳳陽)으로 이주당하기도 했다. 이는 한나라 고조가 부자를 죄다 관중(關中)으로 이주시킨 사례를 따른 것으로, 주원장은 자신의 고향을 수도로 삼고자 14만 호에 달하는 강남 백성을 펑양으로 이주시켰다. 결국 펑양으로의 천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하들의 반대도 있었거니와, 그곳은 자신뿐 아니라 개국공신들의 고향인지라 권력의 누수가 발생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에 대한 경계와 의심을 떨칠 수 없는 게 일인자의 숙명이긴 하지만 주원장은 그 정도가 너무도 심했다. 그런 그가 심만삼과 같은 이를 그냥 두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이치다. 게다가 심만삼은 일찍이 주원장의 라이벌 장사성을 도운 전력까지 있다. 장사성을 도운 부자가 어디 심만삼뿐이랴. 장사성이 세력을 발휘할 때 누구든 그를 도울 수밖에 없었던 게, 주원장이 황제가 된 상황에서는 원죄가 되어버린 것일 따름이다. 주원장은 이 부자들을 죄다 강제 이주시킴으로써 경계와 의심을 해소했다. 그리고 부자에 대한 분풀이까지 해낸 것이다. 앞에서 소개한 13개의 성문 중에서 ‘취보문(聚寶門)’에는 심만삼과 관련된 재미난 이야기가 전해진다. 취보문을 세울 때 계속해서 지반이 무너져서 점을 봤더니, 성문 아래에 취보분(聚寶盆)을 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취보분은 재물이 계속해서 나오는 일종의 화수분이다. 주원장은 심만삼이 가지고 있던 취보분을 가져다 성문 아래에 묻게 한다. 그랬더니 더 이상 지반이 무너지지 않았고 성문을 세울 수 있었단다. 물론 이 이야기는 전설이지만, 취보분의 소유자로 말해질 정도로 심만삼이 부자였다는 사실, 그리고 그의 부를 주원장이 앗아갔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취보문은 ‘천하제일의 옹성(甕城)’이라 불릴 정도로 완벽한 옹성을 갖추고 있는데, 1931년 국민정부에 의해 중화문으로 개칭되었다. 성문에 새겨진 ‘중화문(中華門)’은 장제스의 글씨다. 주원장의 지나친 경계와 의심이 도리어 그의 의도와 어긋난 결과를 가져온 경우도 있다. 황태자 주표가 한창 나이에 죽자 주표의 장자 주윤문을 후계자로 지명한 뒤 단행한 대규모 숙청이 대표적인 예다. 주윤문이 숙청의 이유를 묻자 주원장은 그에게 가시가 가득한 나뭇가지를 쥐어보라고 한다. 머뭇거리는 주윤문에게 주원장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이 가시 돋친 나뭇가지를 쥐지 못하니, 내가 너를 위해 가시를 죄다 없애주려는 것이다.” 주원장은 이렇듯 손자를 위해 가시를 없애주고자 했으나, 능력 있는 이들이 모두 제거됨으로써 도리어 손자의 명을 재촉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주원장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1399)에 넷째아들 연왕(燕王) 주체가 ‘정난(靖難)의 변’을 일으킨다. 1402년, 주체의 군대가 난징에 이르자 주혜와 이경륭은 성문을 열고 투항한다. 난징은 함락되고 건문제(주윤문)의 행방은 미궁에 빠진 채 주체가 영락제로 즉위한다. 주체의 군대가 들어왔던 성문이 바로 ‘금천문(金川門)’이다. 일찍이 주원장이 잔인한 숙청을 단행하지 않았다면, 혹시 그들 중 목숨 걸고 금천문을 지켰을 사람이 있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책임자의 이름이 찍힌 난징 성벽의 벽돌 성벽에 쓰인 벽돌의 책임실명제 13개의 성문 중에서 사연 많기로는 신책문(神策門)과 태평문(太平門)을 능가할 게 없을 것이다. 먼저 신책문의 사연부터 알아보자. 남명의 정성공이 반청복명(反淸復明)을 기치로 10만 대군을 이끌고 난징을 공격했을 때 난징을 지키고 있던 청나라 군대는 1만여명에 불과했다. 청나라의 양강 총독은 신책문을 굳게 닫고 지연작전을 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성문 밖으로 나가 싸워서 큰 승리를 거둔다. 순치제는 이를 기념해서 신책문을 ‘득승문(得勝門)’이라 명명하기도 했다. 난징이 태평천국의 수도였을 때, 청나라 군대가 내내 공격의 목표로 삼았던 곳도 바로 신책문이다. 결국 신책문도 태평천국도 청나라 군대에 함락되고 말았다. 신책문의 ‘화평문(和平門)’이라는 글씨는, 민국시기에 화평문으로 개칭되면서 새겨진 것이다. 당시 화평문 안에는 아시아 석유회사(Asiatic Petroleum Company)의 유류창고가 들어섰다. 이후 일본이 난징을 점령했을 때도 이곳에 유류창고를 두었다. 화평문은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선 이후에도 내내 유류창고의 기능을 하면서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었다. 화평문이 군에서 인민정부로 넘어오고 시민에게 개방된 것은 2001년, 비로소 평화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된 것이다. 태평문이야말로 그 이름과의 불일치가 가장 심한 성문이다. 1864년 7월 19일, 태평천국의 최후 보루였던 태평문과 주변 성벽이 20여 장(丈)이나 무너져 내렸다. 태평천국 진압에 나선 상군(湘軍)이 성벽 아래 매설한 600여 포대의 화약이 폭발한 것이다. 조열문(趙烈文)의 에서는 난징이 함락된 이후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성이 함락된 날 전군이 성을 약탈했다.” “사흘 동안 10여만명을 죽였고 진회하에는 시체가 가득했다.” “마흔 이하로는 한 명도 살아남은 이가 없고 노인은 부상당하지 않은 이가 없는데, 칼에 십여 번 혹은 수십 번을 찔렸으며 울부짖는 소리가 사방으로 멀리 퍼졌다.” 그로부터 70여 년 뒤, 태평문에서 가장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1937년 11월 상하이를 함락한 일본군은 난징을 향했다. 12월 8일, 장제스는 비행기로 난징을 떠났다. 난징 사수를 강력히 주장했던 탕성즈(唐生智) 역시 퇴각 명령을 받고서 12월 12일에 배를 타고 난징에서 빠져나갔다. 이튿날, 태평문 부근에서 무려 1300여명이 학살된다. 일본군은 항복한 중국군과 시민을 이곳에 모아 놓고 주위에 철조망을 둘러쳤다. 이들의 발아래는 일본군이 매설해 둔 지뢰가 있었다. 도화선에 불이 붙었고 철조망 안에 갇힌 이들은 굉음과 함께 폭사했다. 살아남은 사람은 일본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 일본군은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다. 70년이 지난 2007년 12월, 끔찍한 살육의 현장이었던 태평문 근방에는 이날을 기억하고자 하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그날의 학살에서 생존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날을 증언한 이는 당시 학살 현장에 있었던 일본 병사다. 인터뷰 당시(1999) 그는 이미 여든 중반을 넘어선 노인이었다. 난징 성벽의 벽돌은 ‘책임’의 막중함을 묻는다. 성벽을 쌓는 데 쓰인 벽돌에는, 관리부터 인부에 이르기까지 해당 벽돌의 제조와 관련된 이들의 이름이 선명히 찍혀 있다. 검사에 불합격하면 관련자는 처벌을 받았다. 사형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엄격한 ‘품질보증제’ 덕분에 난징의 성벽이 지금까지도 건재한 것일 터. 성벽의 벽돌조차 책임자를 찾아 문책할 수 있었건만, 뼈아픈 역사의 과오에 대한 책임자에게 그 대가를 치르게 했다는 소식은 왜 들리지 않는가. 1366년을 기점으로, 올해는 난징 성벽이 세워진 지 650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해서 올해 9월부터 성벽 위에서 다양한 행사가 펼쳐질 예정이라고 한다. 게다가 10월 즈음에는 타이청(臺城)에 있던 난징성벽박물관이 확장 이전을 마치고 정식으로 개방한다. 새 박물관의 전시공간이 1만㎡에 달한다니, 어떤 모습일지 자못 궁금하다. 새롭게 탄생할 난징성벽박물관은 취보문(중화문) 동북쪽에 있던 ‘심만삼 기념관’을 기반으로 세워지는 것이란다. 정말 취보문 아래 어딘가에 취보분이 묻혀 있는 게 아닐까.

      2016.06.14 10:24

  • 레이디경향

    • 화제

      향기로운 차와 함께 행복을 꿈꾸는 이유진

      ‘한 잔의 차는 몸을 따뜻하게 해주고, 우울할 때는 힘을 주며, 기쁠 때는 차분하게 해준다.’ 19세기 영국 총리 윌리엄 글래드스턴의 말처럼 깊고 그윽한 향으로 일상을 윤택하게 만드는 차. 혼자만의 고요한 사색을 위한 시간이자, 가족과 행복한 시간을 나누는 도구가 되기도 하는 차에 푹 빠진 이유진씨의 우아한 티타임에 함께했다. 차를 통해 비우고, 버리고, 채우는 행복을 찾다 2004년부터 영상 번역 일을 해오던 이유진씨(35). 쇼 프로그램 ‘마스터 셰프’, 미국 드라마 ‘미디엄’과 ‘슈퍼내추럴’ 등 케이블 채널에서 방송하던 각종 영화와 미국 드라마, 쇼 프로그램 대부분이 그녀의 손을 거쳤다. 그렇게 잘나가는 영상 번역가에서 홍차 전문가로 드라마틱한 변화를 하게 된 것은, 바로 아이들 때문이었다. “큰아이가 태어났을 때만 해도 나의 삶과 일 그리고 집안일과 엄마로서의 생활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러다 보니 결국 모든 것에 소홀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진정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죠. 정답은 아이였어요. 늘 아이들과 함께 있어주는 엄마가 되고 싶었거든요.” 둘째 아이가 생기면서 스케줄이 타이트하게 진행되는 케이블 채널 일을 조금씩 줄이고 부산국제영화제 같은 큼직한 영화 영상 번역을 맡으면서 삶의 여유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 노력은 곧 홍차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원래 커피와 와인에 관심이 많았는데, 임신과 함께 자연스럽게 커피 대신 홍차로 눈을 돌리게 됐고 무궁무진한 차의 세계에 매력을 느끼게 된 것. 그렇게 원광디지털대 차문화경영학과에서 티 마스터 과정을 공부하고 2011년에는 「오후 4시, 홍차에 빠지다」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또 홍차를 어렵게만 느끼는 이들을 위해 ‘포도맘’이라는 닉네임으로 블로그에서 다양한 정보를 전해주는 파워 블로거로도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1주일에 두세 번 다양한 티 클래스 강의를 하며 두 번째 홍차 책을 준비하고 있다. “제가 행복을 찾기 위해 생각했던 것은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다’라는 마음이었어요. 가질 수 없는 것을 갖기 위해 아웅다웅하는 것보다 비우고 버렸을 때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있는 여유를 찾는 것이 중요했죠. 저에게는 그게 바로 홍차였어요.” 차와 함께 삶을 풍성하게 채우다 많은 사람들이 ‘티타임’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지나치게 우아하거나 격식을 차려야 한다고 짐작한다. 물론 영국에서 오후 4시에 차를 마시는 애프터눈 티타임은 그런 인식이 강하지만 사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격식을 갖출 필요는 없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다. “차는 커피보다 더 오랫동안 인류가 마셔온 음료예요. 커피는 일상적으로 쉽게 마시면서도, 차는 쓰기만 하고 어렵다는 인식이 강하죠. 하지만 차도 기호 식품일 뿐이에요. 내 입맛에 맞지 않는다면 수백 가지 차 중에서 나에게 맞는 것을 찾으면 그만이죠. 우아한 티웨어가 없어도 돼요. 때로는 종이컵으로 마시는 차가 가장 맛있기도 하니까요.” 그녀가 차에 푹 빠지면서 또 하나의 변화가 생겼다. 바로 다양한 티웨어를 모으기 시작한 것. 원래 찻잔을 좋아해서 조금씩 모으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방대한 컬렉션이 됐다. 찻잔의 종류만 해도 수십 가지. 여기에 차를 우려낼 때 사용하는 티포트나 밀크저그, 슈거볼, 티스푼, 인퓨저 등 다양한 아이템이 그녀의 주방에 빼곡히 차 있다. 아이들을 위한 작은 크기의 티웨어를 모으는 것도 잊지 않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사치품이라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그녀가 모으는 컬렉션은 소박한 것도 많다. 빈티지 제품을 좋아하는데,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 빈티지 아이템을 찾는 것은 보물찾기 하는 듯한 재미가 있다고. 해외에서 직거래하는 판매자들을 찾으면 국내에서 구입하는 것보다 훨씬 저렴하게 살 수 있다는 귀띔도 잊지 않았다. 1·2 다양한 차를 즐기면서 하나 둘씩 모으다 보니 어느새 방대한 컬렉션이 된 티웨어들. 3 클래식한 티웨어도 좋아하지만 가끔은 비비드한 컬러나 독특한 북유럽 패턴의 제품을 선택해 재미를 준다. 아이들이 더 좋아하는 그녀의 티웨어 컬렉션. 4 홍차 브랜드는 종류마다 맛이 다 다르고 패키지도 예뻐 수집하는 재미가 있다. 5 차를 많이 마셔보지 않았다면 티백부터 시작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는 그녀는 자신이 마셔본 티백을 이렇게 모아둔다고 한다. 6·7 평소 빈티지한 느낌을 좋아하는 이유진씨가 수입 셀러들에게 직접 공수해온 찻잔들. 아이들과 함께하는 티타임으로 ‘힐링’하다 집안일과 육아, 사회활동을 병행하는 워킹 맘의 하루는 결코 여유롭지 않다. 하지만 그녀는 매일 아침, 자신만의 티타임에서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남편과 아이가 자고 있는 아침, 그 고요한 시간에 차를 마시며 자신을 되돌아보고 내면과 소통하는 시간이 가장 즐겁다고. 지금은 이 티타임에 사랑스러운 두 아이가 함께한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저희 부부가 차와 함께하는 모습을 봐왔잖아요.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이들도 차에 대한 거부감 없이 좋아하게 됐어요. 특히 둘째는 태교가 바로 차였기 때문에 남자아이지만 티타임을 참 좋아해요.” 유치원에 가기 전 아이들은 엄마와 함께 차를 마시면서 책을 읽거나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 가장 좋아하는 차로 일곱 살짜리 큰딸 기연이는 다즐링을, 네 살짜리 아들 기준이는 녹차를 꼽는다. 아이들은 차의 종류에 맞춰 자신이 좋아하는 찻잔을 직접 고르기도 한다. 그녀는 아이들이 뜨거운 차를 쏟거나 찻잔을 깨트리면 어쩌나 하는 염려는 하지 않는다. 대신 차의 깊고 풍부한 맛을 설명해주고, 그와 어울리는 티푸드를 내오며 아이들이 차에 대해 알아가기를 원한다. 이렇게 하루에 두세 번 아이들과 티타임을 갖는데, 차를 마시는 동안에는 아이들과 오롯이 함께하기 때문에 정서적으로 더 가까워진 기분이라고. “저에게 차는 힐링이자 일상의 작은 선물이에요. 차가 없는 삶은 상상할 수조차 없죠. 주말에는 남편까지 모여 가족이 둘러 앉아 차를 마시는데 이 시간이 가장 행복해요. 혼자만의 티타임보다 삶이 더 풍성해진 느낌이거든요.” <■기획 / 이서연 기자 ■진행 / 박경화(프리랜서) ■사진 / 김영길 ■의상 협찬 / 나이스크랍(02-548-3956) ■스타일리스트 / 김유미>

      2014.01.27 15:35

    • 문화/생활

      주부 기자 이유진, TV 없이 살기 1주일 체험

      아침에 일어나면, 혹은 집에 들어오면 습관적으로 리모컨을 찾는다. 그렇다고 꼭 챙겨 보는 TV 프로그램이 있는 것은 아니다. 비교적 보편적인 ‘TV 시청 패턴’을 가진 이유진 기자가 TV를 보지 않고 1주일을 보내는 생활을 체험했다. 이것은 단순한 체험기가 아닌, 도전기였다는 사실을 미리 말해둔다. TV가 있는 삶 AM 7:30 세 살배기 아이와 함께 눈을 뜬다. 기저귀를 갈아주고 간단하게 세수를 한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기 전 미션 클리어 중 하나는 아침 식사다. 결혼 전이나 아이가 없던 신혼 때는 푹 자고 출근하기 30분 전에 일어나 대충 준비하고 나가는 심플한 생활이었다. 그러나 아이가 생긴 후론 아침 식사를 꼭 챙겨야 한다. 한창 두뇌 성장과 발육기에 접어든 아이의 아침은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5대까지는 아니더라도 3대 영양소에 맞춰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요리와 씨름하느라 놀아주지 못하는 초보 엄마는 아이를 위해 EBS 아침 프로그램을 켜준다. 뽀로로가 나오는 월요일, 화요일에 가장 집중도가 높다. 엄마로서도 아이의 시선을 가져가주는 뽀로로가 반갑기 그지없다. AM 8:00 아이는 역시나 TV를 시청하며 아침을 먹는다. 한창 자동차에 관심이 많은 시기라 TV에서 자동차 CF만 나오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작 운동을 멈추기 일쑤다. “맘마 먹고 봐야지!” 하고 주의를 주면 한두 번 씹는 척하다가 다시 TV로 시선 고정. 이걸 그냥 확 꺼버리고 싶지만 마음 약한 엄마는 아이 입장이 돼 다시 생각해본다. ‘나도 재밌는 프로그램 보다가 갑자기 꺼버리면 화가 나는데, 폭력성 테스트도 아니고 아이 성격 형성에도 좋지 않을 거야.’ 잠시 고민하다가 ‘참을 인’자를 세 번 새기고 묵묵히 TV와 함께 맘마 먹이기에 열중한다. pM 7:00 퇴근을 했다. 먼저 집에 온 아이가 엄마를 반긴다. 엄마랑 떨어져 있었던 낮 시간에 대한 보상심리인지 아이는 엄마를 보자마자 두 손을 뻗으며 “안아줘”를 외친다. 저녁 준비를 해야 하지만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뤄 30분에서 1시간 정도는 아이를 끼고 앉아 놀아줘야 한다. 그래야 칭얼대는 짜증이 없다. 또 TV를 켜주면? 그럼 너무 불쌍하잖아! 게다가 저녁 예능 프로그램은 아이에게 아직은 매력적이지 않은 것 같다. EBS에서도 저녁에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주로 방영한다. 참고로 기자의 집은 따로 케이블 방송을 신청하지 않았다. 오직 지상파 방송만 볼 수 있다. 사실 새로운 종편 채널이나 전문 케이블 채널들이 재미있는지 잘 모르겠다. 반복 편성이 많아 ‘안 봐도 그만’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거나 같이 자동차 역할놀이를 하다 보면 남편이 퇴근한다. 그 이후로는 아이를 남편에게 맡기고 부엌으로 들어가 저녁을 준비한다. pM 8:00 어느샌가 TV 소리가 들린다. 분명 남편이 또 TV를 켰구나. 국자를 든 채로 거실로 달려가보니 예상했던 광경이 펼쳐진다. 남편의 시선은 이미 TV로 향해 있고 아이와 함께 놀아주려던, 손에 든 자동차는 형식적으로 바닥에 쓱쓱 문대고만 있다. 아이는 아빠의 성의 없는 놀이 참여에 이미 실망한 눈빛이 역력하다. “하루에 그 몇 시간을 못 놀아줘?! TV가 그렇게 재밌어?” 하고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남편은 “왜? 잘 놀고 있잖아” 하며 그제야 아이에게 비행기를 태워준다. 아오! 속 터져. 내가 저 TV 없애버려야지. 그렇게 늘 마음속으로 생각만 했던 일을 비로소 실천에 옮긴다. 우선 1주일 체험으로 TV 없는 삶을 살아보기로 결정했다. 드디어 TV가 없는 삶 첫째 날 TV가 없는 첫날을 앞두고 긴장이 된다. 지난밤 잠자리에서 아침의 동선을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시뮬레이션했다. 반찬을 하는 시간이 문제다. 심심해진 아이가 TV를 켜달라고 칭얼거리는 것이 가장 두렵기 때문이다. 저녁에 미리 아침 반찬을 단단히 해뒀다. 전자레인지에 데우기만 하면 된다. 또 아이를 혼자 둬야 하는 샤워나 샴푸하는 시간도 문제다. 늘 아이와 같이 일어났지만 이날은 30분 먼저 일어나야겠다. 아이가 자는 동안 씻어야지. 덕분에 아침은 좀 여유로워진 느낌이다. 아이도 엄마가 충분히 책을 읽어주고 놀아주니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다. 그냥 TV의 힘을 빌리지 않고 아침을 순조롭게 보낸 내 만족인가? 어쨌든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어린이집으로 갔다.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TV가 집안일을 해주는 것도 아닌데 TV가 없으면 좀 더 부지런한 엄마가 돼야 한다는 것. 둘째 날 남편 역시 TV 없는 삶을 체험하는 데 동의했다. “그동안 별 재미없이 습관적으로 TV를 봐왔다”라는 고백과 함께. 따지고 보면 함께 부부로 살고 있다고 해도 대화의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아침엔 서로 출근하기 바쁘고 저녁 식사 때나 그 이후 한두 시간밖에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 한쪽이 야근을 하면 퇴근 상황을 체크하는 간단한 전화 통화만이 하루 대화의 전부인 날도 많다. TV는 그 대화 시간마저 빼앗고 있었다. TV 소리 없는 정적은 가족의 대화로 채워졌다. 아이와 역할놀이도 했다가 숨바꼭질 같은 격한 놀이도 했다. ‘이것이 이상적인 가족의 저녁 풍경’이란 생각에 뿌듯하기만 하다. 상대성 이론인가? 어쨌든 시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 같다. 오늘 저녁 시간은 참 길다. 셋째 날 아이가 TV 없이 지낸 이틀간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더니 아침에도 일찍 일어난다. 그 탓에 오늘은 좀 허둥지둥했다. 결국 아이가 “튀비, 튀비” 하며 손가락으로 TV를 가리키며 켜달라고 칭얼댄다. 한번쯤 예상했던 일이지만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간신히 새로운 장난감으로 시선을 돌렸다. 회사에 도착해서는 그 전날 밤 화제가 됐던 예능 프로그램을 놓고 동료들의 이야기꽃이 한창이나 그 대화에 끼지 못했다. 그거야 인터넷 검색 등으로 해소 가능한 문제지만 TV를 켜달라고 요구하는 아이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 모르겠다. 넷째 날 셋째 날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어쨌든 아이보다 일찍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다. 화장까지 마친 상태로 아이와 말 타기에 미끄럼틀 놀이도 했다. 그렇게 놀다가 점점 지루한지 아이는 슬슬 TV에 눈이 간다. 또 울까 싶어 평소보다 1시간 일찍 어린이집에 데려다줬다. 아이가 이제 엄마가 억지로 TV 시청을 막는다는 걸 안 것 같다. 당장 오늘 저녁은 남편도 야근이라 늦게 들어오는데, 아이가 떼를 쓰면 나 혼자 어떡하나 덜컥 겁이 난다. 넷째 날 저녁 아이가 엄마와 자동차 놀이를 하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자차 트러조(자동차 틀어줘)”라고 한다. 평소 즐겨 보던 장난감 자동차 애니메이션 DVD를 말하는 것이다. “안 돼. 이제 엄마는 TV를 안 볼 거야”라고 했더니 TV 앞으로 다가가 “자차~” 하며 울부짖는다. ‘이번에는 반드시 보겠다’라는 결의에 찬 울음이다. 아이와 놀아주느라 저녁도 굶은 나 역시 며칠 동안의 ‘TV를 절대 보지 말자’라는 생각이 그동안 스트레스였던 모양이다. 뒷목이 뻐근하다. 다 포기하고 아이에게 DVD를 틀어주고 싶은 마음이 절실하다. 결국 DVD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넷째 날 저녁, ‘TV 없이 1주일 살기 체험기’는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TV 시청에 대한 장단점은 분명히 있고 개인이 취사선택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TV를 보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극단적으로 끊는 건 확실히 무리가 있다. TV를 즐겨 보지 않음에도 늘 보던 것을 못 보는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다. 다음부터는 체계적이 매뉴얼에 따라 TV 시청 시간을 줄여나가는 방법으로 체험해보고 싶다. 혹은 가족끼리 1주일에 이틀 정도 ‘TV 안 보는 날’을 정해볼 작정이다. 서로 그동안 쌓였던 대화를 나누며 TV 없이 보낸 이틀간의 저녁은 참 좋은 기억이었기 때문이다.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안진형(프리랜서)>

      2013.10.09 17:14

    • 화제

      [이유진기자가 만난 理想한 사람들]한국 최초의 슬럿워크 ‘잡년행진’

      이번 달 理想한 사람들은 한국판 슬럿워크에 참가한 사람들이다. 슬럿워크(Slut Walk)는 캐나다의 한 경찰관이 강연 중 “성폭행을 당하지 않으려면, 여자들이 슬럿(헤픈 여자)처럼 옷을 입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한 데 대해 여성들은 되레 노출이 심한 옷을 입은 채 거리를 활보하며 ‘몸에 대한 권리’를 부르짖었다. 지난 4월 캐나다에서 시작된 뒤 세계 곳곳으로 퍼져 한국에도 ‘잡년행진’이란 이름으로 슬럿워크가 펼쳐졌다. 지난 7월 16일 오후 3시 종로. 몸에 딱 붙는 블랙 원피스, 새빨간 립스틱, 가슴골이 훤히 보이는 티셔츠를 입은 여자들이 춤을 추며 행진한다. 도심 한복판에는 여성용 속옷인 브래지어가 아무렇지 않게 널려 있다. 그들은 자신을 ‘잡년’이라고 칭한다. “잡년이 뭐 어때서? 내 몸이야! 손대지 마!” 잡년이라니…, 포털 사이트에서도 성인 인증을 하지 않으면 검색할 수 없는 단어다. 과격하다! 그러나 그들이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메시지를 생각하면 과격해야 마땅한지도 모르겠다. 스키니 진을 입었다는 이유로 강간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판결이나 음주 심신미약이란 이유로 행해지는 감경, 성폭력을 여성의 단정치 못한 행실로 돌리는 은근한 시선 등. 한국의 남성 중심적 사고는 더욱 과격하기 이를 데 없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기자가 만난 첫 번째 이상한 사람은, 영화 ‘조선명탐정’의 제작자인 김조광수 감독(46)이다. 그는 얼마 전 커밍아웃을 한 후, 7년간 사귄 동성 애인과 내년에 결혼 계획을 발표해 화제를 일으켰다. 그는 속옷이 보일 듯 말 듯한 오렌지색 하와이안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레이디경향(이하 LADY) 감독님, 옷이 멋집니다. 김조광수 멋지긴요 뭘…. LADY 어떤 계기로 슬럿워크에 참여한 건가요? 김조광수 트위터를 통해서 행사를 한다는 소식을 접했어요. ‘슬럿워크’가 무슨 행사인가 하고 검색해보니 외국에서 비롯된 시위더군요. 마침 진행자들로부터 참석해달라는 요청이 와서 기꺼이 응했죠. LADY 감독님은 평소에 사회 약자와 관련된 행사에 종종 참여하셨잖아요? 김조광수 네. 매년 성적 소수자들의 축제 ‘퀴어 퍼레이드’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는데 이번 행사 역시 사회적 약자 편에 서는 전체적인 취지가 비슷하잖아요? 제가 힘이 됐다면 좋겠어요. LADY 직접 참여해보니 어땠나요? 준비 과정에서 몇몇 남성들의 악성 댓글 때문에 여의치 않았던 걸로 아는데요. 김조광수 많은 여성들이 악성 댓글을 달던 남성들이 집회장에 와서 방해할까봐 꽤 걱정했어요. 그런데 저의 경험상, 그런 지질한 사람들은 오프라인에 멈춰선 채 나서지 않으니 안심하라고 했죠. 사람들도 많이 참여했고 처음 한 것치고는 매우 원활하게 진행됐어요. LADY 얼굴이 알려진 사람으로서 시위 현장에 직접 나가기가 부담스럽지 않았나요? 김조광수 그런 건 전혀 없었어요. 스스로 정당한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참여한 겁니다. LADY ‘야한 옷차림과 성폭력’ 관계 어떻게 보세요? 김조광수 우리 사회에서 간혹 성폭력 피해자들의 옷차림이나 행실이 문제라고 하고, 법원에서조차 그런 식의 판결을 내린다는 게 이해되지 않아요. 그런 인식은 잘못된 권력에서부터 나온다고 생각해요. LADY 감독님은 얼마 전 커밍아웃을 해서 화제가 됐는데 그 이후 달라진 점이 있나요? 김조광수 일단 숨기지 않아도 되니까 저는 참 밝고 긍정적인 성격이 됐어요. 일도 더 잘되고 있고요. 제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니까 용인됐지, 일반 직장인이었으면 참 불편했겠죠. 저는 괜찮은데 가족이 불편해합니다. 특히 어머니께서 성당에 다니시는데 나이 많으신 분들이 걱정스러운 말씀을 하시는 모양이에요. 어쨌든 어머니께서 듣지 않아도 될 말들을 들으면서 본인도 받아들일 수 없는 아들을 감싸줘야 하는 위치니까 힘드시겠지요. LADY 다음 신작으로 퀴어 영화를 준비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김조광수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이라는 영화입니다. 캐스팅은 거의 마무리가 됐고요. 올 10월부터 찍을 예정입니다. LADY 내년에 교제하는 분과 결혼식을 하신다면서요? 김조광수 아직 구체적으로 진행된 건 없지만 결혼식을 공연처럼 크게 할 계획이어서 올 가을부터 준비위원회를 구성하려고 합니다. LADY 감독님이 꿈꾸는 ‘이상’은 뭔가요? 김조광수 저한테는 큰 목표가 있어요. ‘무지개센터’를 짓는 거예요. 층마다 색을 다르게 해서 퀴어센터, 인권센터를 만들고 싶습니다.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 ‘언젠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장기적인 목표죠. 제가 우울한 청소년기를 보냈기 때문에 어린 동생들, 후배들은 아름다운 청소년기를 망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기자가 만난 두 번째 이상한 사람은, 금발과 몸에 딱 붙는 붉은색 원피스의 강렬한 색상으로 시위 현장에서도 단연 한눈에 들어온 여성이다. 그녀는 전업 미술작가 양은주씨(32)로 ‘1인시위닷컴’이라는 웹 사이트의 대표이기도 하다. ‘1인시위닷컴’은 서울대 미대 박사과정을 밟던 중 뜻이 맞는 이들과 만든 웹 사이트라고 한다. 각종 사회적 이슈에 대한 1인 시위에 예술적 퍼포먼스를 가미해 메시지를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일을 하고 있다. LADY 그 옷은 평소에도 입는 옷인가요? 양은주씨 일부러 이번 행사를 위해 준비했습니다. 평소에는 작업하는 사람이라 지극히 평범한 옷을 입습니다. LADY 어떤 작업을 하시나요? 생업으로 하는 일이 있나요? 양은주씨 미대를 나온 전업 작가입니다. 그리고 ‘1인시위닷컴’이란 웹 사이트를 통해 사회활동도 하고 있어요. LADY 이번 행사는 개인적으로 혼자 참여한 건가요? 양은주씨 네. 혼자 왔어요. 슬럿워크의 주제 자체가 여성의 한 사람으로서 굉장히 공감이 가기 때문이죠. 원래 퍼포먼스하는 걸 즐기기 때문에 행사 소식을 듣고 ‘꼭 가야지’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LADY 운영하고 있다는 ‘1인시위닷컴’은 어떤 웹 사이트인가요? 양은주씨 사회적 이슈를 선정해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1인 시위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사회적 기업입니다. 1인 시위에 참여하고 싶어도 시간이나 여건의 제약으로 못하는 사람들이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에 의견을 남기면 ‘1인시위닷컴’이 주제에 맞는 메시지와 시위 방식, 참여자 등을 결정해 대신 시위를 해주기도 해요. LADY 예술을 가미한 1인 시위라니, 획기적인 생각이네요. 양은주씨 박사과정을 하면서 만난 선생님들과 뜻이 맞아 함께 만들었어요. 각자 관심이 가는 주제별로 다양한 1인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LADY 그동안 어떤 1인 시위를 해왔나요? 양은주씨 최근에는 홍대와 롯데 손해보험 청소 노동자 관련 1인 시위를 했어요. 그리고 원전 반대, 최저임금 인상, 4대강 사업 반대, 고엽제 피해자 관련 시위를 했어요. 일주일에 한 번꼴로 하고 있죠. LADY 언뜻 미술과 시위는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데요? 양은주씨 미대 커리큘럼에 현대미술이란 과목이 있어요. 페인팅만 하는 게 아니라 영상 퍼포먼스, 설치예술, 행위예술 등을 모두 배우죠. 대부분의 주제가 사회적 이슈예요. 공연하다가 시사적인 문제에 눈을 뜨는 친구들이 많아요. 낸시 랭 아시죠? 그분이 서양화 전공인데, 런던에서 행위예술을 하면서 유명세를 떨쳤잖아요. 그런 분과 비슷한 일을 하는 거죠. LADY 1인 시위에 시각적인 효과를 더하는 거군요? 양은주씨 네, 맞습니다. 보통 1인 시위 하시는 분들을 보면 내용은 좋은데 시각적인 호소력이 부족해요. 눈도 가지 않고 오히려 빽빽하게 적힌 빨간 글씨들이 부정적인 인식을 주는 경우가 있죠. 저희가 기획하는 1인 시위는 때로는 귀엽게, 때로는 멋있게 하면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해요. LADY 양은주씨가 꿈꾸는 ‘이상’은 뭔가요? 양은주씨 다 같이 평등하고 행복하게 사는 겁니다. 말은 단순하고 쉬워 보이지만 우리 사회의 내면을 들춰보면 볼수록 그야말로 이상적인 거죠. 이런 슬럿워크 행사나 1인 시위처럼 사회적 약자가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면 언젠간 이뤄질 거라고 생각해요. 기자가 만난 세 번째 이상한 사람은, 이번 행사를 준비한 위원회의 멤버다(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웹 닉네임인 ‘도둑괭이’로 대신했다). 행사 후 사람들의 반응이나 상황이 궁금해 다음날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인터뷰했다. 그녀는 지쳐 있었다. 행사 내내 비를 맞으며 마이크를 잡고 진행하기도 했지만 행사가 언론에 보도되면서 맞은 후폭풍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LADY 행사를 진행하게 된 계기가 고대 의대생 성추행 사건이었다고요? 도둑괭이 사건이 일어난 후 ‘여성이 성추행당할 만한 행동을 했다’라는 소문이 인터넷상에 떠돌았어요. 이에 대한 항의로 슬럿워크 1인 시위가 진행됐고 트위터를 통해 젊은 여성들이 ‘잡년행진’이란 제목으로 시위를 주도했어요. LADY 여성단체 등이 아니라 익명의 여성들이 모였다는 게 신선하군요. 도둑괭이 모두 자발적으로 뜻을 모아 준비한 행사예요. 다양한 연령대와 직업군의 여성 스무 명이 모였죠. 그리고 점점 커져서 1백50여 명이 참여했어요. 준비위원회 진행자 도둑괭이LADY 본인도 직장인인가요? 도둑괭이 네. 평범한 직장인이에요. 그런데 행사 후 일상으로 돌아가기 힘들 정도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피폐해졌어요. LADY 정신적으로 힘든 건 왜죠? 도둑괭이 행사 관련 뉴스에 달린 댓글들이 7백 개가 넘는데 다들 비난 일색이에요. 외모 비하부터 성추행 수준의 댓글들이 너무 많아서 거의 정신 붕괴 수준이에요. 행사가 잘 끝났다고 자축할 시간도 없이 앓아누운 친구들이 많아요. LADY 악성 댓글이야 준비 과정에서도 많이 받지 않았나요? 도둑괭이 악성 댓글을 다는 남성들은 온라인에서만 활동하는 일부 ‘키보드워리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한국 남성들의 80~90%가 슬럿워크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런 점이 굉장히 슬퍼요. LADY 그래도 여성들은 대부분 지지하지 않나요? 도둑괭이 같은 여성들도 ‘잡년’이라는 말에 거부감이 드는 모양이에요. ‘저런 행사를 굳이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라며 난색을 표하는 글도 있었어요. 또 ‘부드럽게 여성성을 살려서 시위를 할 수 있지 않냐’라는 의견도 있고요. LADY 그런 의견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도둑괭이 성범죄자라는 것이 특별히 정신병이 있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성폭력 뉴스만 조금 들여다봐도 쉽게 알 수 있죠. 그들은 남성 의욕에 도취된 주변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에요. 여성들은 조금 과격한 방법을 쓰더라도 온몸으로 막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슬럿워크가 왜 찬반논의 대상이 돼야 하는지 자체를 이해할 수 없네요. LADY 슬럿워크가 논란의 중심이 됐군요. 어떻게 대처해나갈 생각인가요? 도둑괭이 일단 후속 조치가 시급해요. 악의적 댓글에 대해서는 사법적 처리가 필요할 거예요. 이번 사태를 계기로 수면 위로 떠오른 잘못된 인터넷 성 인식에 대해서도 논쟁할 겁니다. 기사에 달린 댓글들이야말로 우리 사회에 슬럿워크가 필요하다는 방증이 아닐까요? 1회성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2회, 3회 이어져야 하는 행사입니다. LADY 다음에 기획하고 있는 시위가 있나요? 도둑괭이 여성이 나서야 할 시위가 아직도 많다는 것이 슬픈 현실이죠. 현대차 협력업체 성희롱 사건(비정규직 여성 노동자가 2009년 4월께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사내 하청업체 금양물류 관리자 2명에게 수차례 성희롱당한 사건) 관련 시위를 기획하고 있어요. 정작 피해자는 해고되고 가해자들은 전원이 타 기업으로 고용 승계돼 현재까지 근무하고 있답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죠.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여성가족부와 관련 기업체를 방문할 예정입니다. LADY 당신이 꿈꾸는 ‘이상’은 뭔가요? 도둑괭이 ‘여성들 스스로 야한 옷차림을 해 성폭행의 원인 제공을 하는 것 아니냐’라는 주장은 비상식적이고 몰지각한 생각입니다. 여성과 남성이 이분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어요. 나의 몸은 나의 것이고 내가 입는 옷은 나의 선택일 뿐이니까요. * ‘이유진 기자가 만난 理想한 사람들’ 시리즈는 이달을 끝으로 마칩니다.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이성원>

      2011.08.05 17:26

    • 연예

      [이유진 기자가 만난 理想한 사람들]한국을 사랑한 일본 배우 시오다 사다하루

      ‘이달 理想한 사람들’은 친한파 일본 배우 시오다 사다하루다. 그는 2002년 우연히 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전라북도 정읍에서 농촌 체험을 한 뒤 한국 사랑에 푹 빠졌다. 그 후 연예인이라는 본업을 2년이나 중단하고 한국으로 와 대학에서 어학연수를 받기도 했다. 한류가 미처 자리 잡기도 전의 일이다. 남들이 보면 이상할 만큼 맹목적인 그의 한국 사랑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는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한류 붐을 타고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교두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뜻한 한국, 한국인 시오다 사다하루(35)를 덕수궁에서 만났다. 기자가 대학생 때 한 번 와보고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라고 하자 그는 “에~” 하며 깜짝 놀란다. 자신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와본 장소라는 거다. 오히려 그의 안내를 받으며 덕수궁에 들어섰다. 이 어색한 뒤바뀜이라니, 참 묘한 기분이었다. 레이디경향(이하 LADY) 한국에 처음 온 게 언제였나요? 시오다 사다하루(이하 사다하루) 2002년에 일본 TBS의 ‘세계 우루룬 체재기’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했어요. 연예인이 외국에 가서 체류하는 컨셉트의 방송이었는데 저는 전라북도 정읍의 한 농가에서 홈스테이를 하게 됐어요. 그때가 저의 첫 한국 방문이었어요. LADY 그때는 한국에 전혀 관심이 없었죠? 사다하루 네. 당시는 저뿐 아니라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한국에 관심이 없었어요. 그저 막연하게 무서운 나라라는 이미지가 있었죠. 한국인들은 역사적 관계 때문에 일본인들에게 적대적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일주일간의 한국행이 결정됐을 때는 그곳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절 싫어할까봐 걱정이 많았어요. 더구나 저는 한국어를 한마디도 못했으니까요. LADY 직접 와보니 어땠나요? 사다하루 괜한 걱정을 한 거였어요. 모두 저를 마치 아이처럼 챙겨주셨어요. 덕분에 한국인의 정을 톡톡히 느끼게 됐죠. 음식도 좋았어요. 밥에 고추장만 넣고 비벼 ‘빨간 밥’을 만들어 먹었는데 그것도 맛있었어요. 채소도 모두 유기농이라 맛있었고요. LADY 당시 의사소통은 어떻게 했죠? 사다하루 제가 가장 먼저 배운 한국어는 ‘덥다’예요. 하루 종일 논일을 하다 보니 너무 더운 거예요. 그리고 생존에 필요한 ‘물’이란 단어도 배웠어요. 당시에는 발음이 좋지 않아 ‘무루’라고 했죠. LADY 일주일간의 촬영을 무사히 끝냈나요? 사다하루 촬영은 둘째치고 전 이미 한국분들의 깊은 정에 빠져버렸어요. 고작 일주일 지내고 일본으로 돌아가버리는 건 그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받은 정을 농사일도 도우며 돌려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방송 스태프들에게 2개월 더 체류하고 싶다고 이야기했죠. 일본에서 발간된 사다하루의 서울 가이드북 「IT’S SEOUL」. LADY 왜 2개월이라고 정했죠? 사다하루 벼농사를 도와드렸는데 2개월 후면 수확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결정했어요. 제가 직접 키운 쌀로 밥을 지어 먹어보고 싶었고요. LADY 결국 밥을 먹었나요? 사다하루 그럼요. 제가 키운 쌀이잖아요(웃음). 하얀 쌀밥을 한 숟가락 뜨니 지난 2개월간의 일이 눈앞에 스쳐가는 거예요. 함께 지낸 분들께 고맙고 감동스러워서 밥상 앞에서 울어버렸어요.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왜 울어? 울지 마! 남자는 울면 안 돼”라고 하셨어요. 그때 제 별명이 울보였어요(웃음). 사다하루 정읍의 가족들이 보고 싶겠어요. 사다하루 네. 그래서 요즘도 종종 찾아봬요. 특히 일제 시대 때 일본 사람들에게 변을 당해 한쪽 팔이 없는 할아버지가 계셨어요. 그분이 한국어도 가르쳐주시고 참 잘해주셨어요. 절 ‘타잔’이라고 부르셨죠. LADY 왜 타잔이죠? 사다하루 일본어를 모르니까 한자나 그림으로 의사소통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제가 ‘아~ 아~’를 반복하니까 저를 타잔이라고 하시더라고요. 막걸리를 좋아하셔서 늘 몰래 드시다가 가족의 원성을 사시곤 하셨어요. 아, 보고 싶네요. 일본 친구보다 한국 친구가 더 많은 이유 정읍에서 몇 달을 생활한 후 사다하루는 본업을 위해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일본에서도 정읍에서 보낸 기억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계속 뭔가 허전하고 마음에 걸렸다. 그때부터 그는 한국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했다. LADY 일본에 돌아가서도 한국이 계속 떠오르던가요? 사다하루 네. 아무래도 전 한국과 인연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한국에서 헤어 메이크업 일을 하는 일본분을 우연히 만났는데 그분이 한국 활동을 도와주겠다고 하셨죠. 일단 제게 한국어를 배우라고 조언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일본 활동을 접고 2004년에 다시 한국에 와서 2년간 경희대학교에서 어학연수를 했어요. LADY 그래서 한국어가 이렇게 자연스러운 거군요? 특히 발음이 좋아요. 사다하루 한국 친구를 많이 사귀고 열심히 논 덕분인 것 같아요(웃음). 학교에서는 공부를 별로 안 했어요. LADY 한국 친구와 일본 친구, 차이점이 있나요? 사다하루 한국인들과 더 쉽게 친해져요. 일본인들은 사람을 대할 때 서로 의식하는 탐색전 같은 시간이 있어요. 한국인들은 그런 게 없죠. 사람들이 편하게 대하니 저도 마음을 열게 되고 금세 친해지죠. LADY 외국인이 타지에서 친구를 만들기는 쉽지 않은데, 주로 어떤 계기로 친구를 사귀었나요? 사다하루 특별한 계기 없이 자연스럽게 만났어요. 찜질방에서 서로 이야기하다가 친해질 수도 있고 또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비행기 안에서 친해지기도 하고요. 정말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면 그 가게 주인이나 주방장과도 친구가 됐어요. LADY 제가 보기엔 사다하루씨가 경계심이 없는 것 같은데…. 사다하루 그런가요? 전 여러모로 일본보다 한국과 잘 맞는 사람인가 봐요(웃음). LADY 한국에서 힘든 점은 없었나요? 사다하루 음…, 호기심으로 다가왔다가 그냥 가버리는 사람들 때문에 좀 상처를 받기도 했어요. 제가 연예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신기해 보여 다가온 사람들이 간혹 있었죠. 전 친구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털어놓았는데 상대방은 그렇지 않았어요. LADY 그건 문화의 차이일까요? 사다하루 그럴지도 몰라요. 한국어 중에 그런 말이 있잖아요. “이따가 보자”. 대부분 그렇게 이야기하고 헤어지는데 저는 처음에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하루 종일 그 친구의 연락을 기다린 적이 있어요. 또 “언제 밥 한 번 먹자”라는 말도 ‘도대체 언제 먹자는 얘기지?’ 하고 고민한 적도 있고요. LADY 예의상 하는 말이 외국인에게는 오해를 일으킬 수 있군요. 사다하루 맞아요. 한국이 좋아서 왔다가 그런 것에 상처받고 돌아가는 일본인들도 많이 봤어요. 문화의 차이죠. 한국에 있으니 문화로 받아들이고 맞춰서 살아야 해요. 나쁜 것이 아니라 단지 ‘차이’에 불과하니까요. 한국은 넓고 할 일은 많다 사다하루는 욕심이 많다. 때문에 그의 일은 방송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최근에는 자신이 일본에서 진행하고 있는 한국 소개 프로그램과 동명인 서울 가이드북도 출판했다. 또 문화센터에서 한국 문화에 대한 강의도 하고 있다. 오는 10월에는 ‘하루의 한국 투어’라는 이름의 관광 관련 프로젝트도 예정돼 있다. 친한 친구와 한국 화장품에 관련한 프로모션도 준비 중이다. 이렇듯 그에게 한국은 무한한 가능성을 주는 나라다. LADY ‘공항남녀’라는 한국 독립 영화에도 출연했는데 계기가 무엇이었나요? 사다하루 그때도 우연이었어요. 처음 한국에 와서 자취를 하는데 아침에 누군가가 벨을 눌러요. 문을 열어보니 집을 소개해준 부동산 중개업소 아저씨였죠. 근데 그 옆에 한 여자가 서 있는 거예요. 아저씨는 “이 여자분도 일본 사람인데, 여기 가까이 살고 있으니 친하게 지내!” 하고는 가버리셨어요. 전 부스스한 머리에 파자마 차림으로 그 여자분하고 첫인사를 나눴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여자분은 한국에서 캐스팅 작업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이었어요. 일본 사람이 필요한 영화를 기획하고 있던 차에 제게 오디션을 권했고 그래서 출연하게 됐죠. LADY 일본에서는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요? 사다하루 대부분 한국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어요. 나고야 TV에서 서울을 소개하는 ‘It’s Seoul’이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죠. 나고야에서는 시청률 1위 프로그램이라 곧 지상파(전국방송) 프로그램이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최근에 프로그램과 같은 이름으로 가이드북을 냈는데 베스트셀러가 될 만큼 반응이 좋아요. 지금 2탄을 준비 중이에요. LADY 뭔가 차별화된 책이었나 봐요. 사다하루 책을 준비하면서 여러 종류의 가이드북을 봤어요. 일단 너무 많은 정보가 실려 있더라고요. 여행을 와서 그 많은 곳을 다 돌아볼 수는 없어요. 한국 여행은 보통 2박 3일이니까요. 전 제가 직접 돌아보면서 정말 좋은 곳이라 생각되는 곳을 엄선해서 넣었어요. 또 책을 완성하는 건 독자라는 기획으로 만들었더니 다들 만족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LADY 앞으로 한국에서 어떤 활동들이 예정돼 있나요? 사다하루 저는 일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한국 문화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어요. 그것과 관련해 여행사에서 제 이름을 걸고 서울 투어 상품을 만들자는 제의가 들어왔죠. LADY 한국의 어느곳을 소개할 예정인가요? 사다하루 구태의연한 관광보다는 진짜 한국인들이 가는 명소를 보여줄 생각이에요. 예를 들어 한국의 멋진 남자를 보고 싶다면 신사동 가로수길에 잘생긴 남자들이 많은 카페에 데리고 갈 겁니다(웃음). LADY 저도 가고 싶군요. 사다하루 물론 여기 덕수궁 같은 한국 전통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곳도 봐야 하죠. 그렇지만 한국 사람들의 생활 속에 들어가보는 것도 좋은 여행이라고 생각해요. 전 일본 관광객들과 한국인들이 대화를 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싶어요. 나중에 그분이 따로 관광을 오게 되더라도 ‘한국에 아는 사람이 있지’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말이죠. LADY 한국에 대한 아이디어가 굉장히 많군요? 사다하루 제가 좀 욕심쟁이예요. 언젠가 한국에 카페도 만들고 싶어요. 저는 대학교에서 요리를 전공했어요. 일본인, 한국인이 모두 만족할 수 있는 한국식 디저트들을 개발해보고 싶어요. 최근에 실제로 유자차를 이용한 사이다 젤리를 만들기도 했어요. LADY 한국에서의 방송활동에 대한 욕심은 없나요? 사다하루 있죠. 그런데 쉽지는 않을 것 같아요. 일단 한국은 연예활동을 할 수 있는 비자가 쉽게 나오지 않아요. 배우 유민씨도 고민하던 문제죠. 또 저 같은 캐릭터를 한국 방송에서 원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드라마에 나오는 일본인 역할은 일본어가 좀 이상하게 들리긴 하지만 모두 한국 배우들이 소화하고 있으니까요. LADY 요즘 한국 스타들이 일본 진출을 많이 하는데, 반대로 일본 배우의 한국 진출은 현실적으로 어렵군요? 사다하루 네. 일본은 외국 배우들이 진출하기 쉬운 나라예요. 이방인에 대한 거부감이 없거든요. 그래서 요즘 일본에 진출하는 한국 아이돌들이 성공하는 거 같아요. LADY 앞으로 한국에서 방송 일이 없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사다하루 지금까지 결정한 일에 대해서는 뒤돌아보지 않고 열심히 해왔어요. 그래서 이룬 것들도 많고요. 10년, 20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하다 보면 이뤄질 거라고 생각해요. 전 일본과 한국이 모두 가족이라고 생각해요. 두 나라를 오가면서라도 활동을 계속 하고 싶어요. LADY 마지막으로 한국의 가장 큰 매력은 뭐라고 생각하나요? 사다하루 제가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지 10년 가까이 됐어요. 한국 체험을 시골에서 시작해서 그런지 그때 이미지가 각인돼 있어요. 한국의 매력은 특유의 정과 예의라고 생각해요. 요즘 젊은이들에게서는 그런 점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 아쉬울 때가 많아요. 개인적으로 한국만의 장점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시오다 사다하루에게 한국은 그야말로 ‘다이내믹 코리아’다. 한국을 알고 난 후 그의 인생은 풍요로워졌고, 역동적이고, 행복해졌다. 한류 바람보다 더 강한 ‘한국인의 정 파워’를 일본에 알리기 위해 현재 그는 분주하게 한국과 일본을 오가고 있다. 그의 끈끈한 한국 사랑을 응원한다. “한국의 매력은 특유의 정과 예의라고 생각해요. 요즘 젊은이들에게서는 그런 점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 아쉬울 때가 많아요. 개인적으로 한국만의 장점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이성원>

      2011.07.07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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