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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중섭 ’소’ 애상액 넘어 47억원 낙찰…작가 최고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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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섭 ’소’ 애상액 넘어 47억원 낙찰…작가 최고액

      화가 이중섭의 ‘소’가 8년 만에 경매에 나와 작가 최고가인 47억원에 낙찰됐다. 7일 연합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이날 서울 종로구 서울옥션 본사에서 열린 경매에서는 이중섭 ‘소’가 현장과 전화로 진행된 경합 끝에 새 자리에 걸린다. 서울옥션에 따르면 ‘소’의 경매가는 47억원으로 이중섭 작품 중 최고액을 기록했다. 종전 기록은 2010년 서울옥션 경매에서 35억6000만원에 팔린 ‘황소’였다. 화가 이중섭. 경향신문 자료사진 애초 작품의 경매가는 20억~30원으로 예상됐으나 예상액을 훨씬 상회함으로써 2007년 경매에서 45억2000만원에 낙찰된 박수근 ‘빨래터’ 기록을 넘어섰고 추상화가 김환기 다음으로 최고가 기록을 갖게 됐다. 싸우는 소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으로 왼쪽 상단에 ‘중섭’이라는 사인이 남아 있다. 제작 연도는 기재돼 있지 않아 추정하기 어렵다.

      이선명 기자 2018.03.07 18:34

    • 이중섭 탄생 100주년, 뮤지컬·연극·영화로 되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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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섭 탄생 100주년, 뮤지컬·연극·영화로 되살아난다

      올해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국민화가’ 이중섭(1916~1956)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화가 이중섭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이자 비운의 천재 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예술가로서의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삶은 빈곤과 고난으로 점철되었다. 가족과 떨어져 고통 속에서 살다가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중섭의 그림은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지만, 인간 이중섭의 삶은 드러나지 않은 부분이 더욱 많다. 공연계와 영화계는 다양한 형태로 이중섭을 회고하는 작품을 선보인다. 신시컴퍼니는 이중섭의 일대기를 그린 뮤지컬 <이중섭>(가제)을 제작하고, 연희단거리패는 연극 <길 떠나는 가족>을 공연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이중섭의 아내>도 9월 8일 개봉한다. 이중섭 먼저 극단 연희단거리패는 창단 30주년 기념작의 하나로 9월 10~25일 서울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에서 연극 <길 떠나는 가족>을 무대에 올린다. 1991년 초연한 <길 떠나는 가족>은 지난 4월 별세한 극작가 김의경의 대표작으로 이윤택이 연출한다. <길 떠나는 가족>은 일제강점기 식민지 시대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도 아이 같은 순순한 마음으로 작품 세계를 만든 이중섭의 일대기를 드라마틱하게 그린 작품이다. 초연 당시 이중섭의 유화를 무대에 올려 깊은 인상을 준 작품이다. 무대에 설치된 그림에서 살아움직이는 듯한 소와 아이들 등 당시에는 충격적인 오브제가 화제가 됐다. 23년 만인 2014년 이윤택 연출이 명동예술극장에서 다시 공연해 초연의 감동을 재현했다. 지난달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에서 윤호진 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장과 맺어진 인연으로 다시 무대에 올린다. 이중섭 역에는 연희단거리패의 윤정섭이 연기한다. 이외에도 김소희, 오동식 등 연희단거리패를 대표하는 배우들이 총출동한다. ‘길 떠나는 가족’ 사진 연희단거리패 제공 신시컴퍼니는 이중섭 일대기를 그린 대형뮤지컬 <이중섭>(가제)을 2018년 개막을 목표로 준비중이다. 연출은 지난해 뮤지컬 <아리랑>으로 신시컴퍼니와 작업을 함께 한 고선웅 연출이 맡는다. 고선웅 연출은 현대적 감각으로 고전의 옷을 입은 신파극 <홍도>를 비롯해 지난해 복수의 허망함을 드러내는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으로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대본은 지난해 <환도열차>로 제9회 차범석희곡상을 수상한 장우재 극작가가 맡았다. 뮤지컬 <이중섭>은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견디며 은박지에 그림을 그릴 만큼 가난했던 이중섭의 생애를 그린 작품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이중섭의 아내>는 비운의 천재 화가로 널리 알려진 이중섭의 일본인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가 직접 전하는 이중섭과 함께한 7년의 삶과 사랑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이중섭은 민족의 상징인 ‘소’를 강렬하고 인상적인 붓칠로 그려내며 ‘민족화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등 영예로운 별칭을 얻었지만, 실제 그의 삶은 녹록하지만은 않았다. 전쟁과 가난, 피란, 질병 등으로 점철된 그는 결국 39세의 젊은 나이로 그 일생을 마감했다. <이중섭의 아내>는 그동안 일본인 아내와 비극적인 마지막 순간 등 단편적으로만 알려진 인간 이중섭의 모습을 그의 아내인 야마모토 마사코의 입을 통해 담백하게 그린다. 이중섭은 일본 유학 시절 야마모토 마사코와 사랑에 빠진다. 이중섭이 고국으로 귀국한 뒤 마사코는 사랑을 찾아 한국으로 건너온다. 이중섭은 그런 아내에게 남덕 - 남쪽에서 온 덕이 많은 여자라는 의미의 한국 이름을 붙여준다. 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리고 가정을 꾸리지만, 전쟁과 가난이라는 현실 앞에 헤어진다. 그 시절 헤어진 가족을 이어주는 것은 오로지 편지뿐이었다. 이중섭이 보낸 편지를 중심으로 로맨티시스트 이중섭의 삶과 사랑을 재조명한다.

      #이중섭 #하비 와인스타인

      김문석 기자 2016.08.21 14:15

    • [북한작가 김주성의 남한에서 책 읽기] 가족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이중섭의 사랑, 가족’

      생활 북한작가 김주성의 남한에서 책 읽기

      [북한작가 김주성의 남한에서 책 읽기] 가족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이중섭의 사랑, 가족’

      새해를 맞을 때 가족이 제일 그리워진다. 특히 가족과 멀리 떨어져 있다 보면 그리움은 사무치기 마련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별의 아픔이나 그런 사연 하나 없는 인생은 세상에 없지 않을까? 연초부터 이런저런 생각에 먹먹해진 가슴을 안고 서점을 향했다. 우울하거나 마음이 외로울 때 가장 큰 위로를 받을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바로 서점이기 때문이다. 그냥 별 생각 없이 이 책 저 책 뒤적이다 우연히 한 책에 눈길이 박혔다. 바로 <이중섭의 사랑, 가족>이다. 한마디로 정말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그런 책이었다. <이중섭의 사랑, 가족>은 한국 근대미술의 대표 거장 이중섭의 평전이자 서간집이다. 1916년에 태어나 1956년까지 살았던 이중섭은 피식민지 백성이자 피란민으로, 그리고 식민지 지배국인 일본인 여성과 결혼해 가족을 꾸린 가장으로, 또 그림을 그리며 살아온 사내로 살다 갔다. 이 책은 대략 마흔 남짓의 그 길지 않은 인생에서 이중섭이라는 한 사내의 가족과 사랑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연애시절인 1940년 말부터 1943년까지 글 없이 그림으로만 전한 100여 장의 엽서 중 일부와 1953년부터 1955년까지 가난 때문에 일본으로 보내야 했던 아내와 아이들에게 보낸 편지나 그림들이 이 책에 실려 있다. 이 글 속에 담긴 그의 절절한 진심은 우리에게 가족에 대한 행복과 사랑을 다시금 깨우치게 한다. 며칠 전 내 딸이 태어났다. 내가 북한을 탈출해 홀로 첫발을 디뎠던 여기 이 남한 땅에서 말이다. 내 나이 이제 쉰이 넘었으니 꽤나 늦둥이다. ‘이 아이가 어른으로 다 자라는 것을 볼 수나 있을까’ 하는 막막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우선은 싱글벙글 좋기만 하다. 무슨 이름을 지을까 고민을 하던 끝에 넣은 한자가 孝(효자 효)자에 斌(빛날 빈)자다. 빛나게 살되 부모에게 효도를 잘하는 딸로 자라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아무래도 늦둥이다 보니, 커 가면서 이 늙은 아빠를 괄시하지 않을까 하는 자격지심 비슷한 것이 들어 지은 이름이기도 하다. 사실 거론하고 싶지도 않은 나의 과거사이지만, 생모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조부모님 슬하에서 자라난 나에게 있어 가족이란 정말 상상도 못할 만큼 소중한 존재다. 가족. 늘 믿을 수 있고, 서로를 최선을 다해 아껴주며, 그래서 서로에게 가장 강한 의지가 되는 존재다. 그렇다. 나는 가족이 인생의 의미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어떤 식으로든 가족이 해체된다는 것은, 아무 죄 없는 자식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준다는 것을 나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나는 지금 세상에 나온 지 일주일도 되지 않은 딸을 안고 아무 말 없이 눈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렇게 세상에 와주고 내 팔에 안겨 있어 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건넨다. 앞으로 남은 평생 세계 최강의 ‘딸 바보’로 살아갈 것이 분명한 내 꼴이 벌써부터 궁금해진다.(최석태·최혜경 공저 / 디자인하우스 / 196쪽 / 2만원)

      북한망명작가 2015.01.11 15:10

    • 구글에 이중섭 화백 ‘흰 소’가 떴다.

      생활

      구글에 이중섭 화백 ‘흰 소’가 떴다.

      세계적인 검색엔진 구글에 이중섭 화백의 ‘흰 소’가 떴다. 구글은 10일 한국 근대서양화의 거목인 이 화백의 탄생일을 기념해 대표작인 ‘흰 소’를 이용한 로고를 선보였다. 구글이 한국 서양화가 탄생일에 주목할 수 있었던 것은 구글의 로고 디자이너 황정목(데니스황)씨의 영향이 크다. 스탠퍼드대학교 순수미술과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황 씨는 2007년부터 인터내셔널 웹마스터로 세계 여러나라의 구글 사이트를 담당하며 로고 디자인을 맡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전 세계의 기념일을 맞아 200가지 이상의 다양한 로고를 디자인해왔다. 특히 한국의 기념일 중 광복절, 월드컵, 추석 등을 구글 로고에 담아왔다. 구글은 매일 전세계 유명인, 특별한 날 등 기념할 만한 날을 선정해 ‘기념일 로고’를 내보내고 있다. 한국 예술가로는 백남준, 윤동주, 박완서, 이효석 등 구글 홈페이지를 장식한 바 있다

      조진호 기자 2012.04.10 11:28

  • 주간경향

    • 경제 우정이야기

      [우정(郵政)이야기]이중섭 탄생 100주년, ‘게와 가족’ 담은 우편

      서울의 동쪽 끝에 망우산공원이 있다. 공원묘지다. 이 공원에는 ‘사잇길’이 있다. 무덤과 무덤 사이에 난 길이다. 이 길은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준다. 무덤이 주는 감상이다. 죽음에 대한 생각, 세월의 무상함, 인생의 허탈감…. “무덤은 고인의 삶을 가장 축약적으로 드러낸 곳이다.” 망우리공원에 묻혀 있는 역사를 발굴해 을 쓴 김영식 작가의 말이다. 그의 말처럼 망우리공원 묘지 한편에 자리잡은 천재화가 이중섭의 무덤도 그랬다. 고독하고 고단했던 그의 삶을 닮아 있다. 정신분열증으로 병원을 떠돌다가 홀로 죽어간 그의 인생처럼 외롭다. 망우산 산책길, 일명 ‘사색의 길’을 따라 20분쯤 걷다 보면 데크형 나무계단이 나온다. 그것이 이중섭을 만나려 가는 숲길임을 알려주는 유일한 표지다. 그의 무덤으로 안내하는 이정표는 없다. 이곳 공원묘지에 안장된 유명인 묘지에는 연보비나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것과는 달랐다. 100여개의 나무계단을 내려오면 잡목과 묘지번호만 적힌 무덤의 행렬이 나온다. 여기저기를 헤매다가 천재화가 이중섭의 무덤을 어렵게 찾았다. 묘지번호 103535. 묘지는 북향이었다. 하늘로 뻗은 적송 한 그루가 묘지에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산 밑의 중랑벌판은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묘지 주변은 어두웠다. 무덤도 장발을 하고 있었다. 무덤의 떼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늘어져 있었다. 벌초한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난 듯했다. 흔하디흔한 조화 한 송이 없었다. 옆에 있는 조각상 하단에 있는 구멍에는 누구가 꽂아 놓은 야생화가 말라비틀어진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무연고 무덤과 다르지 않았다. 이 무덤을 관리하던 조카 이영진씨가 지난달 영면(8월 14일)에 든 탓일까. 우정사업본부가 9월 1일 이중섭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작품 ‘게와 가족’으로 디자인해 발행한 기념우표. 무덤의 주인을 알려주는 것은 무덤 옆으로 비켜 세워진 조각상이다. 비운의 조각가 차근호의 작품이다. 까만 돌을 깎아 만든 조각상에는 ‘대향이중섭화백묘비’라고 적혀 있다. ‘대향(大鄕)’은 이중섭의 호다. 큰 고을이라는 뜻이다. 이중섭은 ‘덕지덕지 아들딸 많이 낳아서 그놈들과 대향촌(큰 고을)을 만들고 싶다’고 늘 말했다. 자신의 호, 대향에 가족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는 죽어서도 가족을 그리워하게 됐다. 아니 혼백의 절반만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친지들의 도움으로 화장된 이중섭의 육신은 절반만 망우리에 묻혔다. 나머지는 부인 야마모토 마사코가 있는 일본으로 보내졌다. 조각상에는 2명의 아이가 팔을 뻗어 서로 안고 있는 그림이 새겨져 있다. 두 아들 태현과 태성에 대한 그리움을 사후에서라도 풀라는 염원을 담은 것 같다. 차근호는 이중섭의 고향(평안남도 평원)의 후배이자 유일한 제자다. 무연고 시신으로 발견된 이중섭의 유골을 수습해 망우리에 묻을 때도 차근호가 함께했다. 그는 장례식 때 이중섭을 따라가겠다며 소동을 피운 일화를 남겼다. 차근호의 작품에서 이중섭에 대한 그리움의 절규가 들려오는 듯하다.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 그 슬픔을 아는 법이다. 올해는 이중섭 탄생 100주년이다. 그의 작품에 대한 재조명의 기회가 되고 있다. 수많은 전시회와 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그의 작품에 환호한다. 하지만 그 환호 뒤에 가려진, 그리움에 슬퍼하던 화가 이중섭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움이 그의 작품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우정사업본부가 이중섭 탄생 100주년을 맞아 9월 1일 기념우편을 발행했다. ‘게와 가족’을 담았다. 이들 작품은 이중섭이 가족과 떨어져 사는 동안 그리워했던 가족에 대한 마음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중섭이 차디찬 무덤 속에서나마 그리움에 대한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

      김경은 편집위원 2016.09.05 17:49

  • 레이디경향

    • 근현대 거장 윤중식, 박수근, 이중섭 3인전 개최

      문화/생활

      근현대 거장 윤중식, 박수근, 이중섭 3인전 개최

      박수근 _인물화.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 소장. 근현대미술사를 대표하는 윤중식, 박수근, 이중섭 작가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3인전 ‘화가의 벗: 시대공감’ 展이 오는 27일부터 6월 30일까지 서울 성북구립미술관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지난 2022년 3월 윤중식 작가의 유족이 성북구립미술관에 기증한 윤중식 컬렉션 500점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지난해 3월부터 7월까지 개최된 ‘회향(懷鄕)’전에 이어 새롭게 기획된 전시다. 이중섭_해변의 가족. 서귀포시 이중섭미술관 소장 이번 전시는 한국 근대 서양화 도입기에 해당하는 윤중식(1913-2012)과 함께 동시대 화가이자 벗이었던 박수근(1914-1965), 이중섭(1916-1956)이 작품 초기 서양화를 받아들이며 시도했던 다양한 조형적 실험을 새롭게 조명해보고자 마련됐다. ‘화가의 벗: 시대공감’ 포스터 윤중식의 ‘고목’. ‘장미 한 송이’, 박수근의 ‘인물화’, ‘임화 피카소’, 이중섭의 ‘해변의 가족’, ‘물고기와 게와 아이들’ 등이 전시된다. 윤중식의 ‘서대문 풍경’ 등과 같이 일제강점기와 해방, 6.25 한국전쟁 등 격동과 변화의 근현대사 속에서 그들이 공유했던 시대적 감성과 화풍을 볼 수 있는 기회다. 또한 3인 화가의 예술적 동지로서의 교류 관계 등도 살펴볼 수 있다. 작가들의 주요 작품 외에도 관련 자료 등 100여 점이 전시장을 채운다. 관람료는 무료이며 온라인(네이버) 사전 예약 후 방문하면 된다. 매주 월요일 휴관.

      장회정 기자 2023.04.25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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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가 이중섭 다시 보기

      내년은 이중섭 탄생 100주기이자 사망 60주기가 되는 해다. 이중섭미술관을 비롯한 여러 화랑에서 이를 기념하기 위한 전시를 기획하고 있는 요즘. 이중섭과 아내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가 담긴 편지가 공개되며 그의 인간적인 면모 또한 재조명받고 있다. 의미 있는 해를 앞두고 한 걸음 먼저 이중섭의 삶과 사랑, 그림을 다시 한번 돌아봤다. 흰 소 합판에 유채. 30 x 41.7cm 화가 이중섭의 생애 1916년 평안남도 평원에서 대지주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이중섭의 유년 시절은 유복했다.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설립한 오산학교를 다니며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다. 당시 미술 교사로 부임한, 한국인 최초로 미국 유학을 다녀온 서양화가 임용련의 지도는 그가 화가의 길을 가는 데 큰 영향을 끼친다. 졸업 후 일본 유학을 떠나 사립 미술대학 분카 학원에 입학했고, 여러 미술전에 출품해 수상하며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지병으로 2년간 휴학했다가 복학하면서 후배였던 그의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1945년 결혼해 슬하에 2남을 뒀다. 원산 시외인 송도원에 가정을 꾸렸던 이중섭.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갔고 이듬해에는 제주도 서귀포로 거처를 옮겼다. 이 과정에서 아내가 폐결핵을 앓게 되고 아이들이 영양실조에 걸리는 등 힘든 상황이 계속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본에서 장인이 돌아가셨다는 비보까지 전해진다. 고민 끝에 아내는 두 아들과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다. 나중에 이중섭이 일본으로 가 함께 생활한다는 계획을 세우지만, 그가 숨을 거둘 때까지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한다. 가족과 떨어져 가난과 싸우며 예술혼을 불태우던 이중섭은 마흔한 살 젊은 나이에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고통받다 쓸쓸히 숨을 거둔다. 도원 종이에 유채. 1954년. 65 x 76cm 아내에게 부친 아련한 그리움의 편지들 아내와 아이들이 일본으로 떠난 뒤 이중섭은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글에 담을 수 없는 마음을 전하고자 편지지 귀퉁이에는 그림을 그렸다. 아이가 아프다는 소식에 복숭아를 그려 얼른 낫기를 빌었고, 운동회를 앞둔 첫째 아들을 생각하며 달리기 하는 남자아이를 그려 넣었다. 가족이 모두 모여 얼굴을 부비고 있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다. 떨어져 지내느라 정을 주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무엇이라도 주고 싶은 마음이었으리라. ‘전시회를 열어서 돈을 벌면 일본에 가서 장난감을 사 줄게요’라고 몇 번이나 반복해서 적어 내려간 대목에서는 화가 이중섭이 아닌 아버지로서의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이중섭이 가족에게 보낸 편지 중 현재 우리가 읽을 수 있는 편지는 60편 정도. 지극히 개인적인 이중섭의 생각과 내면이 담긴 편지들은 그를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열쇠다. 아빠가 오늘 엄마, 태성이, 태현이가 소달구지를 타고 따스한 남쪽 나라로 가는 그림을 그렸어요. 소 위에는 구름이 떠 있네요. 그럼 건강히 잘 지내요. 사랑, 그 간절함에 대해 몇 해 전 종영한 SBS-TV 드라마 ‘결혼의 여신’에서 이중섭 생가를 방문한 주인공들은 이런 대화를 나눈다. “왜 이중섭하고 이중섭 부인의 사랑이 이렇게 책으로 남고 기념으로 남았겠어요. 없으니까 이렇게 된 거죠. 지금 이 시대에는 없는 사랑이니까.”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도 그들의 사랑은 회자되고 있다. 일제강점기, 국경을 넘어 사랑을 나눈 이들은 ‘소울 메이트’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을 만큼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졌지만, 민족주의자였던 이중섭이 식민지 종주국인 일본 여성을 받아들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사랑하면 안 될 사람을 사랑한 그는 열병을 앓아 생사를 오가기도 했다. 일본 재벌 미츠이 재단 사장의 딸이었던 그의 아내 역시 가난한 화가 이중섭과의 결혼을 결정하기까지 수많은 어려움을 헤쳐왔을 것이다. 고난 속에서 꽃 피워낸 사랑에 둘은 서로를 전심으로 아꼈다. 이중섭은 일본인 아내에게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온 덕이 많은 여자라는 뜻의 ‘남덕’이라는 이름을 선물했다. 편지에서 그는 아내를 남덕이라는 이름이 아닌 ‘발가락’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곤 하는데, 유난히 발가락이 크고 못생긴 아내를 놀리는 것이라고 한다. 이중섭이 쓴 일본어 편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아내를 향한 애틋함과 절절함이 여실히 묻어난다. 어서 편지를 보내달라고 아내를 조르고, 사흘에 한 통씩 편지를 보내달라고도 하고, 왜 제때 보내지 않느냐며 윽박지르는 아이 같은 모습일 때도 있다. 욱하고 화를 낸 것이 미안해 사과하고, 짧은 일본어 실력으로나마 애교를 부리기도 한다. 자화상 종이에 연필, 1955년. 48.5 x 31cm 이중섭은 마지막까지 아내와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다 떠나갔다. 외롭고 배고팠던 한 예술가의 그림이 그토록 힘 있고 밝을 수 있었던 것은, 광복과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결코 절망하거나 허무에 빠지지 않은 것은, 아내를 향한 사랑의 힘 덕분이 아니었을까. 태현이에게. 귀여운 태현아. 잘 지내나요? 학교 갈 때 춥지는 않나요? 지난번에 엄마랑 태성이랑 태현이 셋이서 이노카시라 공원에 놀러 갔다면서요. 연못 속에는 커다란 잉어가 많이 살지요. 아빠가 학교 다닐 때는 그 공원 근처에 살아서 매일 주변을 산책하면서 커다란 잉어가 노니는 모습을 보았어요. 이번에 아빠가 빨리 가서 보트 태워줄게요. 아빠는 닷새나 감기에 걸려 누워 있었지만 오늘 건강해져서… 또 열심히 그림을 그려서 빨리 전시회를 열어… 그림 팔아서 돈과 선물 많이 사들고 갈 테니까 건강한 모습으로 기다려주세요. 위 아빠는 약을 먹고 건강해졌습니다. 약, 아빠가 감기에 걸려 누워 있습니다. 왼쪽 엄마랑 태현이랑 태성이가 이노카시라 공원에 갑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고 그리운 태현이에게. 잘 지내나요? 아빠는 건강하게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아빠가 보낸 그림을 보고 “아빠한테 편지를 보내야지” 하고 말했다면서요? 아빠가 보낸 그림을 보고 그렇게 좋아했다니… 아빠는 너무 좋아서 견딜 수가 없어요. 다음에 편지 보낼 때는 학교에서 있었던 재미난 일 많이 적어주세요. 아빠가 씩씩한 태현이와 태성이를 그렸어요. 나만의 아름답고 상냥한 천사여… 더욱더 힘을 내서 더욱더 건강하게 지내줘요. 화공 이중섭은 반드시 가장 사랑하는 현처 남덕씨를 행복한 천사로 하여 드높고 아름답고 끝없이 넓게 이 세상에 돋을 새김해 보이겠어요. 자신만만 자신만만. 나는 우리 가족과 선량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진실로 새로운 표현을, 위대한 표현을 계속할 것이라고. 내 사랑하는 아내 남덕 천사 만세. 내가 제일 좋아하고 늘 보고 싶은 태현아, 잘 지내지요? 오늘 엄마한테 편지를 받았어요. 태현이가 매일 운동회 연습을 하느라 새까맣게 타서 온다고. 태현이가 건강하게 지낸다는 것을 알고 아빠는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져도 이겨도 다 좋으니 씩씩하게 운동하세요. 아빠는 오늘도 태현이와 태성이가 물고기와 노는 모습을 그렸어요. 왼쪽 아빠하고 태현이가 뽀뽀를 하며 볼을 부비고 있네요. 아래 태현이가 열심히 운동회 준비를 하고 있네요. 미술평론가 최석태가 말하는 이중섭 탄생 100주기, 사망 60주기를 맞는 내년을 위해 지금 이중섭을 기리기 위한 다양한 전시가 기획되고 있다고 들었어요. 네. 저도 요즘 내년에 있을 전시들을 준비하느라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아직 국립기관에서 이중섭 전시를 연 적이 없다는 거예요. 서울 지역의 화랑에서만 전시회가 열리는데, 내년에는 지방에서도 이중섭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길 바랍니다. 길지 않은 삶이었지만 이중섭은 꽤 많은 작품을 남기고 떠나갔죠. 부지런한 화가였던 것 같아요. 불같은 구석이 있던 분이에요. 몇 날 며칠을 밤새워 그림을 그리고는 앓아누울 정도로. 예술가로서 열정이나 창의성이 대단한 사람이죠. 그런 예술가로서의 면모는 오산학교 시절 스승이었던 임용련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임용련은 보스턴 미술대학교에 입학해 미술을 전공했고, 이후 예일대학교를 수석 졸업했다고 알려졌는데요. 이런 분이 고등학교 교사로 오산학교에 부임한 거예요. 임용련 덕분에 이중섭은 1920년대에 자유로운 미국식 교육을 경험한 겁니다. 이중섭이 가지고 있는 창의성이나 자유로움은 거기서부터 출발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이중섭이 쓴 편지를 보면서 성품이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이중섭은 다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경제적으로는 부유한 집안이었지만 어머니에 대한 애잔함,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품고 살아왔죠. 그래서 가정에 대한 책임감과 사랑이 더욱 견고해졌을 겁니다. 그랬기에 이별 후 아내와 아이들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감당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가난과 이별, 그런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예술혼을 불태웠기 때문에 이중섭이 더욱 사랑받고 존경받지 않나 생각해요. 맞아요. 하지만 이중섭을 떠올렸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우와” 하고 감탄하는 식으로 반응하고 끝내요. 그분의 작품 중 어떤 것이 수작이고, 어떤 것이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상황입니다. 옥석을 가려야 수작이 더욱 빛날 수 있을 텐데 말이에요. 앞으로 그 작업에 더욱 노력을 기울일 계획입니다. 국내에서 이중섭 연구로는 가장 권위자로 알려져 있으세요. 선생님께 이중섭은 어떤 존재 인가요? 저는 화가 이중섭도 좋지만 그의 인간적인 모습을 참 좋아해요. 사람과 미술을 열렬히 사랑하고 떠난 그 순수함을 존경하고요. 뛰어난 화가이자 진실한 인간으로서 이중섭이 더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만난 이중섭 김춘수 광복동에서 만난 이중섭은 머리에 바다를 이고 있었다. 동경에서 아내가 온다고 바다보다도 진한 빛깔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눈을 씻고 보아도 길 위에 발자국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뒤에 나는 또 남포동 어느 찻집에서 이중섭을 보았다. 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진한 어둠이 깔린 바다를 그는 한 뼘 한 뼘 지우고 있었다. 동경에서 아내는 오지 않는다고. <■글 / 서미정 기자 ■사진 / 김석영(프리랜서) ■자료&사진 제공 / 최석태, 현실문화사 ■참고 서적 / 「이중섭의 편지」(이중섭 저, 현실문화사)>

      2015.06.29 10: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