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경향신문

  • 경향신문

  • 스포츠경향

    • ‘전원 일본인’ 코스모시, ‘케이팝레이더’ 위클리 팬덤 차트 1위 등극

      연예

      ‘전원 일본인’ 코스모시, ‘케이팝레이더’ 위클리 팬덤 차트 1위 등극

      스페이스오디티 전원 일본인 멤버로 구성된 4인조 걸그룹 코스모시(히메샤, 디하나, 카미온, 에이메이)가 케이팝레이더(K-POP RADAR)’ 위클리 팬덤 차트 1위에 등극하며 성공적인 데뷔를 알렸다. ‘케이팝레이더’의 위클리 팬덤 차트는 아티스트들의 성장 지표를 분석해 매주 발표되며, 코스모시는 지난 11일 발매한 공식 데뷔 싱글 ‘럭키원(Lucky=One)’으로 정상을 꿰찼다. 코스모시 ‘럭키원’ 뮤직비디오는 ‘케이팝레이더’ 4월 3주차 집계 기간(2025년 4월 10일 ~ 4월 16일) 동안 425만뷰를 기록했다. 스포티파이 팔로워 수는 9.1천 명 증가하며, 케이팝 평균인 1.2천 명을 크게 웃돌았다. 같은 기간 인스타그램 팔로워는 3.3만 명, 트위터 팔로워는 2.3천 명 증가했다. 이는 케이팝 아티스트 평균 증가치인 인스타그램 2.1천 명, 트위터 89명과 비교해 눈에 띄는 수치로, 코스모시에 대한 대중의 뜨거운 관심을 보여준다. 케이팝레이더 측은 “코스모시가 가요계 공식 데뷔와 동시에 1위에 오르는 쾌거를 이뤘다”며 “특히, 세계 최대 음원 스트리밍 플랫폼 스포티파이와 다양한 SNS 채널에서 눈에 띄는 성장률을 보이며 강한 존재감을 드러냈다”고 설명했다. 이번 주 위클리 팬덤 차트 TOP 10에는 NCT WISH의 ‘팝팝(poppop)’이 5위에 오르며 상위권에 안착했고, 유니스의 ‘스위시(SWICY)’는 7위에 이름을 올렸다. 이어, 82메이저의 ‘뭘 봐(TAKEOVER)’가 9위, 오드유스의 ‘아이 라이크 유(I Like You)’가 10위로 각각 차트에 진입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위클리 팬덤 차트는 음악 스타트업 스페이스오디티의 팬덤 데이터 서비스인 ‘케이팝레이더(www.kpop-radar.com)’가 제작하는 차트다. 해외 소비 비중이 90% 이상을 차지하는 케이팝의 특성을 반영해, 글로벌 주요 플랫폼들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유일한 케이팝 전용 차트다. 이 차트는 유튜브 뮤직비디오 조회수와 발매일은 물론, 트위터·인스타그램 팔로워 증가량, 스포티파이 팔로워 증가량 등 주요 글로벌 플랫폼에서 발생하는 팬덤의 증감 및 증감률을 반영한다.

      손봉석 기자 2025.04.18 23:05

    • 백승호가 아니라 일본인 파트너가 MVP 후보네···이와타 토모키, 7골·2도움 활약으로 수상 유력

      축구

      백승호가 아니라 일본인 파트너가 MVP 후보네···이와타 토모키, 7골·2도움 활약으로 수상 유력

      버밍엄 미드필더 핵심 백승호(오른쪽)와 이와타. 버밍엄 SNS 백승호(28)가 아닌 그의 일본인 파트너가 잉글리시 풋볼리그(EFL) 리그원 시즌 MVP 후보에 올랐다. EFL은 16일 2024-25시즌 EFL 리그원(3부리그) 시즌 MVP 후보로 버밍엄시티 미드필더 이와타 토모키(28)와 리차드 콘(위컴비), 데이비스 케일러-던(반슬리) 등 3명을 확정, 발표했다. 백승호와 함께 버밍엄의 3선 미드필더로 호흡을 맞춰온 이와타가 시즌 최고의 활약을 펼친 선수 중 한 명으로 꼽혔다. 버밍엄 크리스 데이비스 감독은 리그원 감독상 후보에 올랐다. 지난 여름 스코틀랜드 셀틱에서 버밍엄으로 이적한 이와타는 이번 시즌 내내 인상적인 활약을 했다. 백승호와 함께 버밍엄 중원을 이끌며 40경기에 출전, 7골·2도움을 기록하며 팀 우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백승호가 공수의 연결 고리와 수비적인 역할에 조금 더 치중한 반면, 이와타는 빼어난 패싱과 경기 운영을 앞세워 공격 전개에 큰 역할을 했다. 2024-25 리그원 MVP 후보. EFL SNS 위컴비 공격수 콘은 리그 18골로 득점 2위에 오르며 팀을 3위로 이끌어 MVP 후보에 올랐다. 반슬리의 케일러 던은 15골·6어시스트로 공격에서 맹활약했다. 다만 팀이 리그 11위에 머무른 게 약점이다. 리그 우승을 거둔 버밍엄의 중원을 탄탄하게 이끈 이와타의 수상 가능성이 높게 점쳐진다. 백승호는 올 시즌 정규리그 35경기(32경기 선발)에 출전해 1골·2도움을 기록했다. 공수 연결고리로 보이지 않는 공헌도가 컸지만, 공격포인트가 적은 게 아쉬움으로 남았다. 창단 150주년을 맞은 버밍엄은 지난 시즌 챔피언십에서 24개 팀 중 22위에 그쳐 강등의 수모를 당했지만, 한 시즌 만에 리그원 우승팀 자격으로 2부 리그로 돌아가게 됐다. 버밍엄 백승호. Getty Images코리아

      양승남 기자 2025.04.17 18:33

    • ‘전원 일본인 멤버’ 코스모시, 팬이 추천한 K-문화 체험한다!

      연예

      ‘전원 일본인 멤버’ 코스모시, 팬이 추천한 K-문화 체험한다!

      스페이스오디티 일본인 멤버들로 구성된 4인조 걸그룹 코스모시(cosmosy)의 ‘블립’ 오리지널 콘텐츠 시리즈가 10일 첫 공개됐다. 히메샤(himesha), 디하나(de_hana), 카미온(kamión), 에이메이(a‘mei)로 구성된 코스모시는 지난해 12월 31일 프리데뷔곡 ‘zigy=zigy’를 발표하며 주목을 받았고, 4월 중 정식 데뷔곡 ‘Lucky=One’을 통해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이 콘텐츠는 팬이 직접 추천한 K-문화를 바탕으로 멤버들이 한국 문화를 체험하는 예능형 콘텐츠와 멤버별 프로필 영상으로 구성된다. 예능 콘텐츠는 블립 앱 내 ‘K-List 챌린지’를 기반으로 기획되었으며,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멤버들이 한국 거주 외국인들과 만나 문화 차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한국 문화를 직접 경험하는 과정을 담았다. ‘블립’은 이번 콘텐츠를 통해 멤버들이 자연스럽게 한국 문화에 스며드는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팀의 개성과 매력을 팬과 대중에게 각인시킬 계획이다. 이어 11일에는 각 멤버의 개성을 담은 ‘블립 프로필 영상’도 공개되어, 보다 깊이 있는 멤버별 스토리텔링을 선보일 예정이다. 또, 팬 참여형 프로그램인 ‘성덕 치트키 미션’도 블립 앱에서 진행된다. 팬들은 일일 미션을 통해 코스모시에 대해 알아가며 입덕할 수 있고, 디지털 포토카드 수집과 함께 오프라인 이벤트 참여 기회도 얻을 수 있다. ‘블립’은 이처럼 팬덤 맞춤형 콘텐츠와 앱 기반의 팬 활동 챌린지를 통해, 신인 아티스트와 팬덤 간의 연결을 강화하고 있다. 코스모시의 ‘블립’ 오리지널 콘텐츠 시리즈는 블립 유튜브 채널을 통해 순차적으로 공개된다.

      손봉석 기자 2025.04.11 03:07

    • ‘APEC 개최지’ 경주, 일본인 입맛 유혹 나섰다

      생활

      ‘APEC 개최지’ 경주, 일본인 입맛 유혹 나섰다

      한국관광공사, 일본 언론매체 초청 경주·울산·부산 팸투어 실시 한국관광공사(사장직무대행 서영충, 이하 공사)는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기념해 지난 27~30일 일본 유력 매체 언론인 약 50명을 초청, 경주와 부산 등에서 다채로운 지방관광 콘텐츠를 선보였다. 특히, 이번 행사는 올해 APEC 정상회의 개최지인 경주의 새로운 관광콘텐츠를 소개하기 위해 ‘처음 가보는 경주’를 주제로 일정을 꾸려, 일본인에게 아직은 생소한 신라한복 체험, 대릉원 포토존, 황리단길 등 한국 MZ세대가 선호하는 신규 관광지 등을 선보였다. 또한, ‘대한민국 밤밤곡곡 100’선에 선정된 경주의 대표적인 야경 명소 ‘동궁과 월지’, ‘월정교’와 부산의 드론쇼 등을 통해 당일여행을 넘어서 체류형관광으로 이어질 수 있는 매력을 내보였다. 이번 행사에는 요미우리신문, 마이니치신문 등 일본 현지 주요 일간지 언론인뿐만 아니라 ‘한국여행’ 전문 일본 현지 인플루언서 등을 초청하여 다양한 타깃을 대상으로 한국 동남권의 매력을 알렸다. ‘한국 지방미식 30선’에 실린 경상권 대표 메뉴 육회비빔밥, 낙곱새 등 일본관광객이 가장 선호하는 ‘음식’ 콘텐츠를 필두로 일본 현지에도 진출한 ‘복순도가’ 울산 양조장에서 직접 빚어보는 막걸리 체험도 큰 호응을 얻었다. 오사카에서 온 참가자 츄쿄테레비 추만 요시히토 씨는 “역사가 느껴지는 경주와 현대적인 부산은 서울과 또 다른 매력이 있다”라며, “황리단길은 멋지게 연출된 공간이 많아서 일본의 젊은이들에게도 추천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한국관광공사 정근희 일본팀장은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경주를 일본 언론에 소개하여 관광객의 서울 집중현상을 완화하고자 이번 행사를 마련했다”라며 “이번 팸투어를 시작으로 4월에는 도쿄, 히로시마, 후쿠오카 등 일본 주요 도시에서 로드쇼를 개최해 일본 최대 성수기인 골든위크 방한수요를 극대화하겠다”고 밝혔다.

      강석봉 기자 2025.04.01 13:16

  • 주간경향

    • “조선인은 일본인? 시대적 맥락 도외시한  주장은 맞지 않다”

      정치 표지 이야기

      “조선인은 일본인? 시대적 맥락 도외시한 주장은 맞지 않다”

      일제강점기 연구한 김강산·김태현 박사 인터뷰 지난 8월 27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김강산(왼쪽), 김태현 박사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김창길 기자 “일제강점기 우리 선조들의 국적은 어디인가.” 누군가에게는 복잡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질문이다. 이 문제를 복잡하게 고민해야 하는 것은 역사 및 국제법 등의 학계다. 일본제국주의의 국권 찬탈이 왜 불법이고, 이것이 무효일 때 그 시대를 살아간 선조들의 귀속적 지위는 어떻게 되는지 등을 다양한 각도에서 연구해야 한다. 이는 향후 국제분쟁이 발생하면 유용한 무기가 될 수 있다. 반면 이 문제가 반드시 단순해야만 하는 집단도 있다.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음을 헌법 전문에 밝혀 둔 대한민국 정부다. 대통령 이하 공무원 모두가 해당한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에는 본인의 지위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선조들의 국적을 대답하지 못하거나 일본이라고 답변하는 이들이다. 일본 국적설의 근거는 국권 피탈이다. 반례는 차고 넘친다. 1945년 해방 직후, 일본에 있던 조선인은 무국적자로 분류됐다. 일본인이라고 보지 않은 것이다. 국민의 기본권리도 완전히 주어지지 않았다. 대신 민족적 구별은 분명했다. 이는 차별로 나타났다. 주간경향은 지난 8월 27일 일제강점기를 연구한 두 명의 젊은 역사학자를 서울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김강산 박사는 1923년 발생한 간토대학살을 연구했다. 김태현 박사는 조선총독부의 임업 정책을 연구했다. 두 사람의 연구는 제국과 식민지,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별을 잘 보여준다. ‘조선인=일본인’이라는 인식의 반례가 될 수 있다. 이제 막 전문 연구자의 길에 들어선 두 사람 앞에 던져진 ‘뉴라이트’라는 변수에 관해서도 들어봤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일본인’이라는 주장은 어떻게 봐야 하나. 김강산(이하 산) : “먼저, 일제강점기 선조들이 조선인이었냐, 일본인이었냐를 이분법적으로 묻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질문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국적 적용에 관해서는 일제의 의도된 모호함이 있었다. 식민지 조선인이 해외로 나갈 땐 일본 여권 등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조선인=일본인’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일제가 일본인에게 적용한 국적법이 조선인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게다가 같은 국민이라면 차별 없이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하는데 참정권이나 의회 구성 등에서 조선인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주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차별적 요소가 다수 발견된다. 일제는 필요에 따라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보기도 했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시대적·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조선인=일본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맞지 않다.” 지난 8월 27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김태현 박사가 인터뷰하고 있다./김창길 기자 당시 ‘국적이 일본이다’까지만 말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국적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으로서 권리, 의무가 발생했느냐다. 당시에는 호적부터 일본적·조선적을 구분해 차별했다. 이에 따라 국민이라면 누려야 할 권리를 얻지 못했다.- -김태현 김태현(이하 현) : “당시 ‘국적이 일본이다’까지만 말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국적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으로서 권리, 의무가 발생했느냐다. 당시에는 호적부터 일본적·조선적을 구분해 차별했다. 이에 따라 국민이라면 누려야 할 권리를 얻지 못했다. 일본 국적이니 창씨개명도 한 것 아니냐고 하는데 창씨개명을 두고도 일본 내에서 ‘앞으로 조선인·일본인을 구별하지 못하면 어떡하냐’는 우려가 나올 정도였다. 그만큼 구분돼 있었다는 의미다. 당시 국적이 어디냐만 따지는 것은 ‘식민지 강제동원 등도 합법이다’라는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조선인=일본인’이라는 주장의 반례가 많지 않나. 산 : “1923년 9월 1일 발생한 일본 간토대학살 관련 연구를 했다. 당시 조선인은 ‘조선인이라서 죽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지진이 일어나고 하루 뒤 내무성이 계엄령을 선포하는데 이때 공식적으로 불령선인 침입을 경계하라고 경고한다. 조선인 폭도들이 찾아갈 테니 방비하라는 유언비어를 유포한 것이다. 이로 인해 계엄군이나 자경단이 조선인을 학살할 명분을 가지게 됐다. 과연 조선인과 일본인이 같은 국적이고 동등한 입장에 있었다면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겠나.” -차별이 존재했다면 ‘일제가 조선을 선의로 근대화했다’고도 볼 수 없는 것 아닌가. 현 : “뉴라이트와 반(反)뉴라이트 세력 간에는 공통점이 있다. 근대화를 반드시 달성해야 할 ‘가치’로 본다는 것이다. 그 결과 한쪽은 ‘근대화를 시켜준 만큼 일제도 좋다’는 결론을 내고, 또 다른 한쪽은 ‘그 좋은 근대화를 일제가 해줬을 리가 없다’로 결론을 낸다. 따지고 보면, 일제가 조선을 근대화했다는 것도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일제는 1926년 목재 대외무역수지 적자가 1억엔을 돌파하면서 각 식민지에서 목재 자원 조달계획을 세웠다. 당시 조선은 산림 자원이 매우 부족했다. 일제는 조선의 목재 부족이 심각해지면 일본으로부터의 목재 이입이 증가할 것을 걱정했다. 이에 따라 자급자족을 기본으로 한 조선 산림 개발을 한다. 이 과정에서 벌채 및 조림 비용은 국유림 벌채 수익으로 충당하기로 했는데 일제가 조선의 사방사업(수력 및 풍력에 의해 토사·자갈이 이동해 발생하는 각종 재해를 예방하고 복구하는 공사) 공채비를 감액하거나 사실상 주지 않아서, 국유림 벌채 수익으로 충당하게 된다. 이로 인해 조림 정책에 투입할 비용은 부족해졌다. 즉 일제는 조선에 근대적 임업 정책을 도입했지만 이를 실시한 이유는 일본의 목재 무역수지 적자 때문이었다. 사업이 부실화된 원인은 일본이 사업 공채 등의 재정적 투자를 사방사업 등에 하지 않고, 철도 등의 군사 관련 시설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이를 보면 중요한 것은 단순히 근대화됐느냐가 아니라 근대화의 성격임을 알 수 있다. 개발이냐, 수탈이냐 식의 이분법만으론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뉴라이트는 수치나 통계를 내세워 정당화 한다. 현 : “쌀 생산량이 늘어나고, 철도가 깔리는 것 등을 수치나 통계로 보여주는 것인데 문제의식이 거기에만 머문다는 것이 한계다. 이들은 식민지에서도 자본주의가 싹틀 수 있고, 자본주의야말로 달성해야 할 최고의 선으로 본다. 이에 따라 당연히 자본주의 성장을 증명할 수 있는 통계에 매몰된다. 성과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해당 연구를 통해 식민지 운영이 ‘원시적 수탈론’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내기도 했다. 다만 이러한 방식이 논박되자 이를 개선하기보다 ‘민족주의가 문제다’란 방향으로 전환했다. 이 시점에서 학문적 논의는 더 이상 불가능해진 것이다. 이들이 맹신하는 경제성장 수치 등을 정립한 미국 경제학자 사이먼 쿠즈네츠 역시 ‘통계가 그 사회의 성격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통계는 역사를 해석하는 데 중요한 참고자료이지, 통계 자체가 역사는 아니다.” 지난 8월 27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김강산 박사가 인터뷰하고 있다./김창길 기자 뉴라이트가 수치나 통계를 내세우는데, 역사 연구하는 데 있어 수치나 통계는 중요한 자료다. 다만 정보에도 맥락이 있다. 그런데 이들은 모든 문제를 경제성장 여부에 집중하고, 이 과정서 발생한 문제는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한다.- -김강산 산 :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수치나 통계는 중요한 자료다. 다만 이러한 정보에도 맥락이 있다. 예를 들어, 간토대학살의 경우 여러 주체로 작성된 학살자 수 통계가 발견되는데 이를 연구할 땐 ‘자료 작성 주체가 누구냐’, ‘과대 혹은 축소했을 가능성이 있나’ 등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단순히 자료를 발굴했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이를 어떤 방식으로 해석할 것이냐까지가 역사학자 몫이란 의미다. 그런데 뉴라이트는 자료 이후 단계를 말하지 않는다. 단순히 ‘이러이러한 수치를 보니 일제강점기 한반도 경제가 성장한 것을 증명했다’로 끝난다. 결국 모든 문제를 경제성장 여부에 집중하고, 이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는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누리는 번영, 자유 등의 토대가 일제강점기에 마련됐다는 결론을 상정하고 연구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른바 ‘뉴라이트’로 분류되는 인물들을 정부 산하 역사 관련 기관 요직에 임명하고 있다. 산 : “꼭 다수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만 기관장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역사 관련 정부기관은 국민의 역사의식을 정립해 가는 곳이다. 이런 자리에 사회가 공유하는 인식과 동떨어진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임명되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런 분이 국민 통합에 앞장서겠다고 말하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연구자 처지에서 볼 땐 이는 연구환경 변화와 직결된다. 지난해가 간토대학살 100주년이었다. 그런데 독립기념관에서 개최 예정이었던 ‘일본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주기 전시회’가 돌연 취소됐다. 최근 언론 보도 등에 따르면 국가보훈부의 압박이 있었다고 한다. 간토대학살은 좌·우의 문제가 아닌 무고한 조선인이 일본에서 살해당한 사건이다. 이러한 사건 관련 전시까지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할 수 없다’는 분위기라면 어디까지 자유롭게 연구가 가능하고, 어디까지가 불가능한지 알 수 없게 된다. 그 경계가 완전히 허물어진 느낌이다.” 현 : “정부의 뉴라이트 인사 임명에 대해서는 학계 성명서에도 서명했고, 언론 비판에도 동의한다. 이렇게까지 문제가 된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다만 한 가지 생각해봤으면 하는 지점이 있다.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임명에는 집중 비판이 나왔지만 동북아역사재단, 한국학중앙연구원, 국사편찬위원회에 유사한 성향 인사가 임명될 때는 이 정도 비판은 없었다. 김 관장은 학계에서 활동한 사람도 아니고, 독립운동 관련 단체에서 활동한 사람도 아니다. 반면 다른 기관에 임명된 인사들은 뉴라이트 성향으로 분류됐지만 서양사, 경제사 등에서 나름의 성과를 낸 인물들이었다. 즉 엘리트 의식이 반영된 학맥과 학력에 따라 선택적 비판을 하는 것은 아닌가 우려스럽다. 독립기념관뿐만 아니라 역사 관련 기관장을 임명할 때는 명확한 평가 기준과 해당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인사가 임명될 경우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한 학계의 의견이 정립될 필요가 있다.” -뉴라이트의 주장은 계속 존속될 수 있다고 보나. 산 : “낙성대경제연구소에서 월례발표회 등을 하는 것을 보면, 연구는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새로운 학자가 등장하기보다는 여전히 안병직, 이영훈 등의 익숙한 이름만 나오는 것 같다. 뉴라이트는 <반일 종족주의> 출간과 함께 스스로 학문적 논의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다. 해당 책에서 주장한 내용 역시 이미 학계에서 논박됐던 것들이다. 즉 뉴라이트는 1970~1980년대 학계가 주장했던 내용과 여전히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역사 연구자들이 더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이런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다면 해소될 문제라고 생각한다.” 현 : “정치적 선동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학문적 재생산 역시 되지 않고 있다. 이들 연구가 학계나 사회에 기여하는 것도 아니고, 친일 논란만 만들지 않나. 뉴라이트는 본인들을 ‘순교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한국이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일본과의 협력이 필수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에 방해되는 반일감정을 뿌리 뽑겠다는 인식 구조다. 그래서 이들이 학자적 양심을 가졌다기보다는 정치적 신념을 가졌다고 평가한다. 더 이상 이러한 뉴라이트를 상대로 우리 사회가 ‘근대화냐, 수탈이냐’라는 이분법적 논의에 매몰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김찬호 기자 2024.09.02 06:00

    • 문화/과학 이기환의 Hi-story

      [이기환의 Hi-story](96)일본인의 석탑 반출, 총독부가 막은 까닭

      1911년 9월 강원 원주 법천사터에서 반출돼 서울 명동 무라카미 병원으로 옮겨진 지광국사탑. 이 탑은 일본인 사업가(와다 쓰네이치·和田常市)를 거쳐 일본 오사카에 거주하는 남작 후지타 헤이타로(藤田平太郞)에게 3만1500원이라는 거액에 팔린 뒤 일본으로 반출됐다가 돌아왔다.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원주-서울(명동)-서울(남창동)-일본 오사카-서울(경복궁)-대전(국립문화재연구원)-원주. 무려 1975㎞를 떠돌다가 ‘112년 만의 귀향’을 이룬 문화유산이 있습니다. 강원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입니다. 예전엔 ‘미인박명’ 소리를 들었던 문화유산입니다. 탑이 지극히 아름다워 ‘미인’이라 했습니다.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시대에 활약한 왕사인 지광(해린·984~1070)의 사리와 유골을 봉안한 승탑인데요. 독특한 구조와 화려한 조각, 뛰어난 장엄 장식 등이 돋보인다는 평을 받고 있죠. 이 탑은 그러나 ‘박명’ 소리도 들었습니다. 일본인에 의해 오사카로 밀반출된 이후 이리저리 떠도는 신세가 된 것은 물론이고요. 한국전쟁 때는 미군의 폭격으로 무려 1만2000조각으로 박살 나는 비운을 맞거든요. 그래서 ‘미인박명’이라 했던 겁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등이 10여 차례에 걸친 보존처리 및 복원작업을 마무리 짓고 이번에 원래 자리인 강원 원주 부론면 법천사터로 옮겼습니다. 미인박명의 지광국사탑 이런 파란만장한 역정을 겪은 국보 석탑이 지광국사탑 1기만이 아닙니다. 생각할수록 속 터지는 경천사 10층 석탑은 물론이고요. 기막힌 산청 범학리 3층 석탑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먼저 지광국사탑 이야기를 잠깐 해보죠. 때는 바야흐로 1911년 9월이었습니다. 강원 원주 부론면 법천사터에 한 일본인(모리무라 타로·森村太郞)이 찾아옵니다. 모리무라는 땅주인(정주섭)과 흥정을 벌여 이곳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지광국사탑을 사들이는데요. 이 탑은 곧 해체돼 서울의 일본인 사업가(와다 쓰네이치·和田常市)에게 팔리고요. 와다는 이 탑을 명동 무라카미(村上) 병원을 거쳐 자신의 집(남창동) 정원으로 옮겨두었는데요. 다시 이 탑은 일본 오사카(大阪)에 거주하는 남작 후지타 헤이타로(藤田平太郞)에게 3만1500원이라는 거액에 팔립니다. 결국 1912년 5월 31일 오사카로 반출되는데요. 그런데 그해 10월쯤이었습니다. 탑의 일본 본토 반출 소식이 전해지자 당시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재임 1910~1916)가 앙앙불락합니다. 데라우치는 “폐사지는 원래 국유지로 봐야 하고 그 폐사지에 있는 탑 역시 국유물”이라면서 모리무라와 와다 등을 구류에 처하고 소환하는 등 수사에 나섰습니다. 모리무라에게 탑을 사 일본의 후지타에게 되판 와다는 데라우치 총독의 서슬에 전전긍긍하죠. 결국 와다는 일본의 후지타에게 팔았던 탑을 다시 사서 총독부에 기증하는 형식으로 사건을 일단락시키는데요. 이때가 1912년 12월 6일쯤입니다. 이 탑은 1915년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조선물산공진회의 전시장(경복궁)을 꾸미는 장식물로 활용됐는데요. 공진회가 끝난 뒤에도 지광국사탑 등은 그대로 경복궁 안에 놓여 있었고요. 그러다가 한국전쟁의 와중(1950)에 폭격(유탄)을 맞아 1만2000개로 산산조각이 난 겁니다. 이후 10여 차례 정밀복원 끝에 원모습을 찾게 된 것이고요. 일제강점기 파란만장한 역정을 겪은 국보 석탑 3기. 경천사 10층 석탑과 법천사 지광국사탑은 일본으로 반출됐다가 귀환하는 우여곡절을 겪었고, 범학리 3층 석탑은 단돈 100엔에 팔린 뒤 일본으로 반출되기 전에 압수됐다./국립중앙박물관·국립문화재연구소·국립진주박물관 제공 가토 기요마사가 군침 흘린 걸작 탑 지광국사탑 스토리는 1907년 일어난 경천사지 10층 석탑 강탈사건과 비교하면 새 발의 피입니다. 그 강탈의 역사 또한 엄청 뿌리가 깊습니다. 경천사탑 사건이 국내외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던 1907년 4월 23일 대한매일신문은 일본의 오사카 아사히신문(大阪 朝日新聞)의 보도를 인용했는데요. 이런 내용입니다. “예부터 조선에 유명한 탑이 둘 있었다. 하나는 서울 종로의 원각사터에, 나머지 하나는 개성 풍덕군의 경천사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그 탑들을 일본에 가져오고 싶었다’는 설이 다나카 궁내대신에게 들어가…. 그중 하나를 일본으로 옮겨오면 비할 데 없는 진귀품이 될 것으로 여겨….”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임진왜란과 가토 기요마사까지 소환되고, 궁내부대신(장관) 다나카가 등장하네요. 이게 무슨 사건인지 잠깐 돌아보겠습니다. 예부터 개성에서 서남쪽으로 50리쯤 떨어진 부소산 기슭의 옛 절터(경천사터)에는 특이한 탑 하나가 서 있었습니다. 대리석으로 조성된 경천사 10층 석탑입니다. 1층 옥개석 밑에 새긴 발원문에는 “(원나라 간섭기인) 1348년 원나라 황실을 위해 조성했다”고 기록했습니다. 때문에 ‘원나라풍’이 경천사탑에 반영돼 있습니다. 탑의 기단부에는 사자 같은 동물과 꽃, 현장법사와 손오공이 등장하는 서유기의 내용, 나한상을 조각했고요. 탑신부 1~4층엔 각종 불회도와 여래상, 호법신을 가득 채웠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인물이 살아 있는 듯하고 정교하게 만든 것이 천하에 둘도 없다”고 기록했어요. 1902년 일본 도쿄대(東京大) 교수인 세키노 다다시(關野貞·1867~1935)가 조선 전역을 답사하며 문화유산 전반을 조사했습니다. 세키노는 그 결과물을 토대로 1904년 <조선건축조사보고서>(동경제대 공대 학술보고 6호)로 펴냈는데요. 이 보고서는 당시 한국문화재에 눈독을 들이는 자들에게 아주 유용한 정보제공서가 됐습니다. 지광국사탑 부재가 전시될 강원 원주 법천사지 유적전시관. 복원 위치가 확정될 때까지 상설 전시할 계획이다./국립문화재연구원 제공 궁내부대신의 경천사탑 강탈사건 세키노의 보고서를 보고 “이거다!” 하며 군침을 흘린 자가 있었는데요. 그자가 바로 일본의 궁내대신인 다나카 미쓰야키(田中光顯·1843~1939)였습니다. 다나카는 300년 전 가토 기요마사가 눈독을 들였다는 ‘전설적인 탑’ 두 기(경천사탑과 원각사탑)를 보고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마침 다나카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1907년 1월 순종 황제의 결혼 가례에 일본 정부의 특사 자격으로 조선을 방문할 기회를 얻은 겁니다. 다나카가 지목한 약탈대상은 경천사탑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서울 시내 한복판에 서 있는 원각사탑보다는 지방의 폐사지에 덩그러니 놓인 경천사탑이 ‘쉬운 목표’였겠죠. 서울을 방문한 다나카는 골동품상을 운영하던 곤도 사고로(近藤佐五郞)에게 경천사탑의 무단반출을 지시했습니다. 그때가 1907년 2월 4일이었습니다. 곤도가 고용한 일본인들과 인부들은 다짜고짜로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면서 탑을 140조각으로 해체했습니다. 그런 뒤 10여 대의 달구지로 실어갔습니다. 그 커다란 탑을 해치우는 데 하루 밤낮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코 베어 가는 식으로 엄청난 경천사탑을 약탈당한 겁니다. 이 경천사탑 약탈은 바람 앞 등불 같은 대한제국의 운명을 상징하는 사건이었죠. 눈앞에서 멀쩡히 서 있는 나라의 보물(탑)을 빼앗기고도 속수무책 바라만 봐야 했으니까요. 강탈사건을 고발한 두 외국인 그런 꼴을 도저히 볼 수 없다는 듯 분연히 일어난 두 분이 있었습니다. 두 분 다 외국인인데요.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한국명 배설·1872~1909)과 미국인 호머 헐버트(1863~1949)였습니다. 헐버트는 1886년 왕립영어학교(육영공원) 교사로 초빙된 이후 한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인물입니다. 천인공노할 경천사탑 강탈 소식을 전해 들은 헐버트는 현장으로 달려가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사진까지 찍었습니다. 헐버트는 자신의 취재내용을 대한매일신보에 제보했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영국 언론인인 베델이 창간한 신문이죠. 대한매일신보는 3월 7일 이 충격적인 뉴스를 특종 보도합니다. “일본의 특사 다나카 자작(궁내대신)의 흉계로 무기를 가진 일본인들이 경천사탑을 급습해 탑을 해체한 뒤 실어갔다.” 대한매일신보는 정말 집요했습니다. 6월까지 3개월 동안 경천사탑 약탈사건을 집중적으로 보도했습니다. “고종 황제의 허락을 얻었다는 것은 거짓”(4월 13일) “석탑을 빨리 되돌려보내 잘못을 사죄하라…. 일본으로선 역사의 무한한 수치가 될 것…”(6월 5일)이라는 등 끈질기게 파고들었습니다. 헐버트 또한 적극 나섰습니다. 자신이 발행하는 코리아 리뷰는 물론이고, 일본 고베(神戶)의 저팬 크로니클 1907년 4월 4일자에 경천사탑 탈취 사실을 기고했습니다. 뉴욕포스트 등에 이 천인공노할 사건의 전말을 기고해 미국 내 여론을 환기시켰고요. 이 문제를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그까지 끌고 갔습니다. 고종의 밀사로 파견된 헐버트는 1907년 7월 헤이그 평화클럽 연설에서 일본의 야만성을 폭로하면서 경천사탑 약탈사건을 거론했습니다. 데라우치가 조선문화재를 사랑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일본 내 여론도 다나카에게 등을 돌렸고요. 마지막 통감 및 초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2대 총독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1916~1919)도 다나카를 궁지에 몰아넣었습니다. 경천사탑은 급기야 1918년 11월 15일 무자비하게 해체돼 포장된 바로 그 상태 그대로 반환됩니다. 11년 9개월 만에 서울에 도착한 탑재의 포장을 뜯어본 이들은 참담한 몰골에 고개를 돌려야 했습니다. 해체된 탑부재는 당대의 기술로는 복원조립이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가 심했습니다. 결국 경천사탑의 부재는 경복궁 회랑에서 40여 년간 방치될 수밖에 없었고요. 급기야 1960년 이후 2차례 수리 및 재수리를 거쳐 복원돼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중앙홀에 전시 중입니다. 경천사탑과 지광국사탑의 일본 반출 및 귀환 스토리를 할 때마다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우선 한가지 궁금증이 들죠. 일본인들은 왜 그토록 부피가 크고 무겁고, 옮기기에도 번거로운 조선의 탑을 뜯어갔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정원 꾸미기를 좋아하는 일본인들은 조선의 폐사지에 서 있는 탑과 불상에 군침을 흘렸습니다. 국립진주박물관에 있는 경남 산청 범학리 3층 석탑. 1941년 제자리를 떠나 대구로 반출된 지 77년 만인 2018년 제 모습으로 복원돼 국립진주박물관으로 돌아왔다./ 국립진주박물관 제공 그러자 보다 못한 조선총독부가 나섰습니다. 총독부는 ‘경천사탑’(1907년 2월) 및 ‘지광국사탑’(1911년 9월)의 일본 반출 사건이 잇달아 터지자 각 지방에 다음과 같은 ‘관통첩’(행정지침서)을 내립니다(1911년 11월 29일). ‘폐사지 및 빈터에 놓여 있는 석탑과 불상, 비석 등은 국유물이므로 매매 및 반출 등을 금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한가지 고개를 갸웃거릴 이야기가 있죠. 아시다시피 1·2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치와 하세가와는 1910년대 무단통치의 원흉으로 꼽히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이 왜 경천사탑과 지광국사탑의 귀환에 적극 나섰을까요. 뭐 그자들의 행태를 그렇게 가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 데라우치나 하세가와는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영영 남을 것으로 철석같이 믿었겠죠. 그러니 굳이 ‘식민지 조선’의 문화유산이 일본 본토에 있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한국의 문화유산은 본인이 총독으로 다스리는 ‘식민지 조선’에 있어야 했던 겁니다. 그래야 식민지 통치의 정당성도 확보하고, 한국인들의 불만도 무마할 수 있었으니까요. 100엔에 바꾼 국보탑 지금 국립진주박물관 경내에 서 있는 경남 산청 범학리 3층 석탑은 어떨까요. 통일 신라 양식을 계승한 범학리 석탑은 정교한 부조상이 새겨져 국보로 지정(1962)된 걸작입니다. 섬장암(閃長岩·반짝이는 장석으로 된 암석)을 다듬어 만든 유일한 석탑이기도 하죠. 이렇게 희귀암석으로 만든 범학리 3층 석탑의 역정 또한 파란만장했습니다. 1940년 11월 무렵이었는데요. 경남 진주에 살던 정정도라는 인물이 범학리를 찾아 땅주인과 마을 주민들을 꼬드겼습니다. 무너져 방치된 석탑 1기를 지목하며 “석탑을 팔라”고 요구한 겁니다. 그러나 아까 언급했듯이 폐사지나 공터의 탑비 및 불상을 매매하는 것은 불법에 속했습니다. 주민들이 주저하자 정정도는 마을회관 건립비로 100원(엔)을 제시했습니다. “매각에 동의하지 않아도 좋다. 석탑의 반출을 묵인해주기만 하면 된다”고 꾀었습니다. 주민들은 솔깃했습니다. ‘정식매매는 꺼림칙하지만, 회관 건립비라면 괜찮겠지’ 하는 생각이었겠죠. 결국 범학리탑은 마을주민의 방조 묵인 아래 이듬해인 1941년 1월 진주를 거쳐 대구로 반출됩니다. 석탑은 대구의 골동품상인 오쿠 지스케(奧治助)에게 매각됐는데요. 경북지사가 조선총독부에 보낸 보고서는 ‘석탑의 평가액=1만원’이라 했습니다. 오쿠-정정도 같은 거간꾼이 평가액의 100분의 1 가격으로 ‘후려쳐’ 국보급 석탑을 수중에 넣은 셈입니다. 이렇게 오쿠의 수중에 들어간 범학리 3층 석탑은 대구 동운정(동인동) 이소가이(磯貝) 제면공장 구내 공터에 해체된 채 놓여 있었습니다. 4개월 뒤(1941년 5월) 석탑의 불법 반출 사실이 적발됐고요. 석탑 부재들도 회수됐습니다. 일본 반출 미수사건 연구자들은 정정도-오쿠 같은 거간꾼 위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있었다고 입을 모으는데요. 오쿠를 사주한 자로 지목된 인물은 바로 그 악명높은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1870~1964)입니다. 오구라는 대구에서 부동산 투기로 떼돈을 번 뒤 전기사업에 뛰어든 재력가인데요. 가격 불문, 장르 불문으로 닥치는 대로 한국문화재를 사들인 큰손으로도 악명이 높았죠. 그가 수집한 유물 중 금동관모와 새날개모양관식, 금동신발 등 8건은 일본 중요문화재로, 견갑형 동기와 고운무늬거울(정문경) 등 31건은 일본 중요미술품으로 각각 지정됐답니다. 국립도쿄(東京)박물관은 오구라가 기증한 한국문화재 1030점 등을 이른바 ‘오구라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소장하고 있습니다. 그런 인물이니만큼 범학리 석탑의 반출을 사주한 유력한 용의자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렇든 저렇든 만약 범학리 석탑의 반출이 조기에 적발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아마 오구라든 누구든 그 탑을 일본으로 가져가 제집 정원을 꾸미는 데 장식용으로 사용했을 겁니다. 어쨌든 대구 제면공장 공터에서 극적으로 회수된 석탑은 서울 경복궁(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 옮겨졌고요. 해방 후인 1946년 재건해 국보로 지정됐다가(1962), 1994년 경복궁 복원정비 때 다시 17개 부재(조각)로 해체돼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는 신세가 됐죠. 그러다 2018년 국립진주박물관 경내에 옮겨 지금 이 순간 전시되고 있습니다. 물론 원위치(산청 범학리) 이전이 이상적이었겠죠. 범학리 현장은 밭농사를 짓는 개인소유의 땅이고, 물이 차는 지형이랍니다. 때문에 박물관 야외전시장이 차선책이었답니다. 어떻습니까. 국보 석탑 3기가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문자 그대로 ‘간난신고(艱難辛苦)’를 겪었습니다. 그 3기 중 2기(경천사탑·범학리탑)는 이런저런 이유로 박물관 홀 안(경천사탑)과 야외(범학리 석탑)에 복원·전시 중인데요. 완전한 귀향은 아니었죠. 이번에 보존처리 및 복원작업이 끝난 지광국사탑은 원위치(원주)로 옮겨갔네요. 명실상부한 112년 만의 귀향입니다. 아직 어떻게, 어느 위치에 전시할지는 결정하지 않았다는데요. 마무리까지 모두에게 축복받는 이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2023.08.11 15:03

    • 문화/과학 이기환의 Hi-story

      [이기환의 Hi-story](76)왜란 때 조선 위해 싸운 일본인들이 있었으니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는 얼마나 될까요. 2만~3만명(일본 측 자료)에서 10만~40만명(조선 측 자료)으로 추정됩니다. 그렇다면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어땠을까요. 항왜(귀화 혹은 항복한 일본인)의 수가 1만명을 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인 1593년 1월 평양성 전투를 그린 ‘평양성 탈환도’. 이후 임진왜란은 장기전의 양상으로 접어든다.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597년(선조 30) 5월 18일 도원수 권율(1537~1599)이 적진에 밀파된 첩자들의 보고를 정리해서 조정에 알렸는데요. “왜군의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항왜의 수가 이미 1만명에 이르렀는데, 이들이 일본의 용병술을 다 털어놓았을 테니 심히 걱정된다고 수군거린답니다.”(<선조실록>) 한 연구자가 <실록>에 등장하는 항왜의 수를 집계했는데요. 모두 42건에 600명에 달합니다. 기록된 숫자만 이 정도이니, 항복 혹은 귀화한 왜인들이 꽤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실록에는 일본 이름이 상당수 보입니다. 사야가, 사고소우, 연노고, 산여문, 요질기, 훤도목병위, 평구로, 요시지로, 조사랑, 노고여문, 사백구, 세이소…. 또 김귀순(金歸順), 김향의(金向義), 이귀명(李歸命) 등의 이름이 보입니다. 귀순하고(귀순), 의를 좇았으며(향의), 천명에 귀의했다(귀명)는 뜻에서 조선 조정이 하사한 이름임이 분명하죠. 사야가 김충선 가장 유명한 이는 사야가(沙也加·김충선)라 할 수 있습니다. 사야가, 즉 김충선의 문집인 <모하당집>은 “임진왜란 발발 당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1562~1611)가 이끄는 왜군 2진의 선봉을 맡아 부산포에 상륙했다가 곧바로 부하들과 함께 귀순했다”고 썼습니다. <모하당집>은 사야가가 출정 전부터 “의롭지 못한 전쟁에 나섰지만, 동방예의지국인 조선에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고 전했습니다. 조선 조정은 사야가에게 자헌대부(정2품)를 제수했고요. 그러면서 김해 김씨의 성과 함께 ‘충성스럽고 착하다’는 뜻의 ‘충선(忠善)’이란 이름을 내렸답니다. 임진왜란 때 무공을 세운 김충선은 조선군에 조총과 화포, 화약제조법을 전수했고요. 이괄의 난(1624년)과 병자호란(1636년) 때도 공을 세웠답니다. 심지어 훗날 정조 임금은 ‘김충선=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외손’이라는 가짜뉴스를 철석같이 믿게 됩니다. “왜인 김충선은 평수길(平秀吉·도요토미)의 외손이다. 임진왜란 때 선봉에 서서… 충성을 다했다. 김씨 성을 하사받고… 호는 모하당이라 한다. 사실이 맞는가.”(<승정원일기> 1797년 10월 17일) 근거 없는 뉴스였죠. 김충선은 정조 임금마저 도요토미의 외손이라고 여길 만큼 ‘전설적인 인물’이었던 겁니다. ‘평양성 탈환도’의 부분. 왜군들이 조·명 연합군에 쫓기는 모습을 그렸다. 임진왜란 개전 초기 전세는 왜군의 파죽지세였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고 이순신 장군이 제해권을 움켜쥔 데다 명나라군까지 참전하자 장기전의 양상을 띤다. 오랜 전쟁에 지친 왜군들은 설상가상으로 군량미 부족에 시달리게 됐다.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왜군의 항복을 적극 유도하라! 물론 사야가, 즉 김충선처럼 처음부터 귀순을 염두에 두고 참전한 왜인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장기전의 양상을 띠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자연 군량미도 부족해졌죠. 1594년(선조 27) 4월 17일 접대도감 이덕형(1561~1613)의 언급이 의미심장합니다. “왜적들의 한 끼 식사가 작은 종지 하나의 밥이 전부인데, 그나마 절반이 껍질째였습니다. 일은 고달프고 배가 고파 항복하려는 자가 매우 많다고 합니다.”(<선조실록>) 포악한 왜장의 휘하 장졸일수록 투항한 자가 많았죠. ‘악귀’라는 악명을 떨친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병졸들이 특히 그랬습니다. 예컨대 1597년(선조 30) 항복한 왜인 세이소(世伊所)와 마다사지(馬多時之)를 다시 적진에 보내 가토의 휘하 군관을 5명이나 귀순시켰는데요(4월 21일), 귀순자들은 “사역이 과중하고 장수의 명령이 너무도 혹독해 견디다 못해 도망쳤다”고 했습니다. 귀순자들은 “요즘 가등청정(가토)이 사졸들의 마음을 크게 잃어 일본으로 귀국하려는 자들이 하루에 100명에 이른다”고 알렸습니다. 이들에게 당상관(3품 이상)의 관직을 내리며 후대한 선조의 ‘항왜 정책’도 한몫 단단히 했습니다. 선조는 “항왜 가운데 검술과 병기제작에 능한 자를 꾀어내면 파격적인 상을 내려야 한다”(1595년 6월 11일)고 했고요. 심지어 “지금 항왜들만이… 성 위로 올라가 죽을힘을 다해 적병을 죽인다”(1597년 8월)고 칭찬합니다. “우리 조선”이라 한 왜인 여여문 항왜 가운데 첫손으로 꼽히는 인물은 바로 여여문(呂汝文)입니다. 1595년(선조 28) 6월 19일 <선조실록>에 의미심장한 기사가 보입니다. “내가 항왜 여여문을 각별히 후대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실행하고 있는가. 요사이 이 자가 병이 났다가 차도가 있다고 하는데 이는 보통 왜인이 아니다. 후하게 대우하라.” 여여문이 누구이기에 선조 임금으로부터 특별대우를 받았을까요. 여여문은 훈련도감에서 결성한 ‘아동대(兒童隊)’를 조련한 책임자였는데요. 그 성과가 대단했습니다. 여여문이 훈련한 아동대 인원 50여명 중 19명이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여여문은 일본군의 진법과 전술을 조선 진영에 가르쳐 주었고요. 전쟁터로 달려가 죽을 각오가 있음을 피력했습니다. “현장으로 내려가 산성을 쌓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아니면 저를 요해처로 보내주십시오. 죽음으로 보답하겠습니다.”(<선조실록> 1597년 1월 4일) ‘동래부순절도’(국보·육군박물관 소장). 1592년(선조 25) 4월 15일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에서 왜군의 침략에 대응하다 순절한 부사 송상현과 군민들의 항전 내용을 묘사한 그림이다. / 육군박물관 소장 여여문은 “일본군을 꾀어 적장을 모살하면 성공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계책을 올렸습니다. 여여문은 이때 ‘우리(我) 조선’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뼛속까지 조선인이 됐던 겁니다. “우리 조선사람들 하는 것을 보면 한갓 계획만 세우고 의논은 많지만 실행은 적습니다. 날짜만 기다린다면….” 이 말을 전해들은 선조는 장탄식하며 “우리나라 일이 부끄럽다”고 했습니다. 허무한 죽음 여여문의 활약은 이어지는데요. 1597년(선조 30년) 12월 명나라군 총사령관인 양호(?~1629)가 여여문을 적진에 밀파해 적정을 살피라는 임무를 맡깁니다. 적진에 잠입한 여여문은 적진 3곳의 적병 숫자를 파악해 손수 형세도를 그린 뒤 빠져나왔는데요. 여여문의 형세도를 본 명나라군 양호 총사령관은 은 10냥을 내려주었고요. 명나라군은 여여문의 형세도대로 작전을 짰습니다. 명나라군의 마귀 제독(생몰년 미상)은 여여문을 다시 적진에 침투시켰고요. 이때 여여문이 왜군 4명의 수급을 베어 가지고 나왔는데요. 여기서 비극이 일어납니다. 마귀가 전공을 세우고 돌아온 여여문을 죽이고는 그가 가지고 있던 왜적의 수급마저 다 빼앗은 겁니다. <선조실록>은 1598년(선조 31) 3월 27일 여여문의 죽음을 알리면서 “여여문이 베어낸 왜적 4명의 수급을 (마귀의 수하장수인) 파귀가 빼앗는 것을 똑똑히 본 사람이 많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여여문의 공을 가로챈 혐의가 짙습니다. ‘우리 조선’이라고 하면서 조선에 충성을 다한 항왜 여여문의 허무한 죽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1598년(선조 31) 5월 17일 우의정 이덕형은 “여여문은 임진란 이후로 종군하지 않은 날이 없었고, 처자식도 모두 적의 손에 죽었다”면서 “여여문을 논상함으로써 격려하는 뜻을 보여야 한다”고 촉구합니다. 울산왜성에 포위된 왜군이 물을 길으러 나오는 모습을 그린 기록화 / 국립진주박물관 제공 조선 장수 가족을 구한 일본인 사백구라는 인물도 있습니다. <선조실록> 1597년(선조 30) 9월 8일자에 경상우병사 김응서(1564~1624)의 보고서가 실렸는데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백구는 가토 기요마사 휘하에서 투항한 왜인인데, 일단 김해부사 백사림의 휘하로 보냈답니다. 마침 왜군이 황석산성(함양)을 공격했고요. 이때 백사림을 따라 출전한 사백구가 조총으로 왜병 4명을 죽였답니다. 산성은 함락됐고, 몸이 뚱뚱해 탈출이 어려웠던 백사림은 포로가 될 운명이었답니다. 이때 사백구가 성을 지키던 왜병들을 위협해 백사림을 성 밖으로 탈출시켰습니다. 사백구는 백사림을 산속에 숨겨놓고는 먹을 것을 구하려 왜병이 점령한 산성으로 다시 들어갔는데요. 그사이 백사림은 사백구가 배신한 줄 알고 몸을 숨겼습니다. 사백구는 백사림이 보이지 않자 “어디 갔느냐”고 애타게 불러댔고요. 사백구는 겨우 찾아낸 백사림의 허리를 끌어안고 “대체 어디 갔다 왔냐”고 반가워했답니다. 사백구는 백사림에게 옷을 입혀주고 밥을 먹이면서 눈물을 흘렸답니다. 사백구와 백사림의 일화를 전하던 김응서의 한탄이 심금을 울립니다. “조선의 유식한 무리도 처자식을 구제하지 못하는데, 사백구 같은 오랑캐가 지극정성으로 김해부사를 피신시켰습니다. 사람으로서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선조실록>) 명량대첩에 도움을 준 왜인 이순신(1545 ~1598) 장군의 명량대첩(1597년 9월 16일)에서 한몫 단단히 한 항왜 ‘준사’도 유명하죠. 1593년 안골포에서 투항한 준사는 이순신 장군이 단 13척의 배로 일본 수군을 격파할 때 장군의 배에 타고 있었죠. 준사는 바다에 빠진 왜군들을 내려다보면서 “저 무늬 있는 붉은 비단옷을 입은 자가 적장 마다시(馬多時)”(<난중일기>)라고 지목했습니다. 이에 이순신 장군이 마다시의 목을 내다 걸어 왜적의 사기를 꺾었고요. 준사가 지목한 마다시는 왜장인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1561~1597)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왜병들이 조·명 연합군에 항복하는 사례가 많았다. / 일본 혼묘지(本妙寺) 소장 적장 가토 기요마사의 암살계획을 모의한 ‘항왜’도 있습니다. <선조실록> 1595년 2월 29일자에 나와 있는데요. 경상좌병사 고언백(?~1608)에게 ‘항왜’ 주질지와 학사이가 쫓아왔습니다. 두 사람이 은밀하게 고한 내용은 놀라웠습니다. “우린 본국(일본)을 등졌으니 이미 조선사람입니다. 마땅히 적의 괴수(가토 기요마사)를 베어야 합니다.” 가등청정 암살 모의사건 두 사람의 암살계획은 아주 구체적이었습니다.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은 다른 장수와 만날 때 거느리는 군사가 10여명에 불과합니다…. 이때 일본인 중 내응하고 있는 자와 살해를 도모한다면 손바닥 뒤집듯 쉬울 것입니다.” 고언백이 이들의 말을 믿지 않자 더욱 치밀한 계획까지 일러주었다. “지금 우리와 함께 항복한 구질기의 종형(고로비)이 청정(가토)의 가장 가까운 군관으로 있습니다. 고로비 또한 조선 진영으로 귀순하려 합니다. 그 사람과 내응하면 성사될 겁니다.” 이 암살계획은 그러나 끝내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명나라와 왜와의 강화 계획이 틀어질까 걱정했기 때문입니다(<선조실록> 1595년 3월 24일), 이뿐이 아니죠. 1597년(선조 30) 11월 벌어진 정진 전투에서도 항왜들의 활약이 컸습니다. 아군이 왜군의 포위로 전멸의 위기에 몰렸지만 항왜들의 맹활약으로 사지를 겨우 탈출했는데요. 권율 도원수는 이 전투에 참전한 항왜들의 이름과 벼슬명, 공적을 구체적으로 나열하고 있습니다. “왜적 70명을 죽였습니다. 사고여무는 왜적의 목을 두 급, 요질기, 사야가(김충선), 염지는 각 한 급씩을 베었습니다. 손시로는 중상을 입었으며, 연시로는 전사했습니다. 왜기와 창, 칼, 조총 등을 노획했고, 우리나라 포로 100여명을 탈출시켰습니다.” 이밖에도 1597년(선조 30) 남원성 전투와 상주 전투, 가덕도 전투, 그리고 1598년(선조 31) 10월 사천 전투에서도 항왜들의 활약상이 보입니다. 여여문, 사백구, 주질지, 학사이… 항왜들은 전투나 적정탐지 외에도 기술전수에 혁혁한 공을 세웠는데요. 조선은 그들에게서 총검을 주조하고 염초를 굽는 방법을 배웠고요. 조총의 사격술과 검술도 익혔습니다. 그 덕분일까요. 1597년(선조 30) 1월 “김응서 휘하의 항왜 중 조총 기술자가 많으니 상경시켜 배우자”는 건의에 선조는 자신 있게 밝힙니다. “이제 조선에도 조총을 잘 만드는 자가 많다. 상경시킬 필요가 없다.” 이렇게 항왜의 도움이 컸습니다. 하지만 이 기사를 쓰면서 걸리는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 조선!’이라 하며 충성을 바치고자 했던 여여문이 너무나도 허무한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죠.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래도 여여문이나 사백구 같은 이들은 실록에 이름자를 남겼죠. 나머지 1만명에 달한다는 항왜들의 자취는 찾을 수 없네요. 그들 역시 조선인으로 뼈를 묻고 살면서 후손을 남겼을 텐데 말입니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2023.03.24 12:50

    • 문화/과학 이기환의 Hi-story

      [이기환의 Hi-story](73)측우기 발명자는 장영실 아닌 문종···일본인도 ‘엄지 척’

      5월 19일은 정부가 정한 ‘발명의 날’입니다. 왜 하필 이날일까요.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고안·실험한 날이 1441년(세종 23) 음력 4월 29일인데요. 이것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5월 19일’이라 이날을 ‘발명의 날’로 삼은 겁니다. 이상하죠. 훈민정음, 거북선, 앙부일구, 자격루, 금속활자 등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최초·최고의 발명품이 많은데 왜 굳이 ‘측우기 고안·실험 일자’를 ‘발명의 날’로 삼았을까요. 이유가 있답니다. 1957년 ‘발명의 날’ 제정 때 이병도(1896~1989) 등 심의위원들이 “발명 날짜와 발명자(세자 이향·문종)가 분명히 기록된 측우기가 가장 적당하다”고 주장했다는 겁니다. 이상한 것은 지금도 포털사이트의 각종 지식백과에서 대부분이 ‘측우기 발명=장영실’로 검색됩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조선에 자랑할 것이 없는데…” 1917년 일본의 기상학자인 와다 유지(和田雄治·1859~1918)는 ‘조선 고대 관측기록 조사보고’(조선총독부)라는 논문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이 논문에 조선총독부 관측소장이었던 히라타 도쿠타로(平田德太郞)가 맹랑한 서문을 씁니다. “조선이 자랑할 만한 것은 그다지 많지 않으나… 세종 때의 강우량 관측은… 유럽보다 200년 앞서고(1639년 이탈리아의 베네데토 카스텔리) 중국에서도 없었다…. 놀랍게도 조선인의 뇌리에서 솟아나온 독창적인 사업… 탁월함을 보여주기에 족하다.” 한국의 측우제도를 연구하고 국제적으로 알린 와다도 이 논문에서 ‘세종대왕=명군’으로 칭하며 감탄사를 연발합니다. “460년 전에 측우제도를 구축해 지금까지 전국에 보급한 것은 일대 특필해야 하며… ‘명군’ 세종의 거룩한 뜻에 의한 것….” 대체 측우기가 뭐기에 조선문화를 깔본 일본인들까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을까요. 하나하나 따져보죠. 요즘도 일부 어른들은 ‘비가 내린다’고 하지 않고 ‘비가 오신다’는 존댓말을 쓰죠. 그 이유가 있습니다. 세종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며 먹는 것을 하늘처럼 우러러보는 사람들(民惟邦本 食爲民天)”이라고 말씀하셨죠. 그런데 가뭄이 들면 어찌 되겠습니까. “제발 비 좀 내려달라”고 기우제를 지냈죠. 그때 비가 내려 보십시오. “비가 오신다”고 했고, 그렇게 내리는 비를 ‘단비(甘雨)’라 했죠. 해마다 음력 5월 10일에 내리는 비를 ‘태종우’라 했는데요. 이유원(1814~1888)의 <임하필기>에 일화가 나와 있습니다. 태종(재위 1400~1418)이 승하하기 직전에 극심한 가뭄이 들었다는데요. 이때 죽음을 앞둔 태종이 “내가 하늘에 올라가(죽어) 천제에게 ‘즉시 단비를 내려달라’고 고하겠다”고 했습니다. 과연 다음날(1422년 5월 10일) 태종이 승하했고, 곧 하늘에서 단비가 내렸답니다. 이후 ‘해마다 5월 10일엔 단비가 내린다’는 ‘태종우’ 일화는 조선시대 내내 정설처럼 전해졌습니다. 이렇듯 ‘비에 왕조의 명운’을 거는 판국이었으니 체계적인 강우량 측정 또한 절실했습니다. 그때까지는 어떻게 강우량을 측정했을까요. 비가 흠뻑 오면 눈대중으로도 파악할 수 있었죠. 하지만 가뭄 끝에 찔끔 와서 메마른 땅에 스며들었다면 어떨까요. 그때는 ‘물이 흙에 스며든 깊이(入土深)’로 측정했던 것 같아요. <증보문헌비고>는 “‘쟁기가 들어갈 정도’(일리·一犁)와 ‘호미가 들어갈 정도’(일서·一鋤)라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측우기는 얼핏 단순한 도구로 보이지만, 그 원통 안에는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세종을 비롯한 조선 임금들의 노심초사가 담겨 있다. / 기상청·국립고궁박물관 제공 1441년 4월 29일 무슨 일이… 이렇게 주먹구구식이었습니다. 앞서 인용한 1441년(세종 23) 4월 29일자 <세종실록>에 심상치 않은 기록이 보입니다. “근년 이래로 세자가 가뭄을 근심해 땅을 파서 비가 올 때마다 젖어 들어간 깊이를 재보았다. 그러나 적확하지 못해 ‘구리를 부어 그릇을 만들어 궁중에 두어(鑄銅爲器 置於宮中) 그릇에 고인 정도를 실험했다(以驗雨水盛器分數)….” 가만, 여기서 한번 짚어봅시다. 세자는 다름 아닌 세종의 맏아들인 이향(문종·재위 1450~1452)을 가리키는데요. 그럼 어릴 적부터 눈과 귀가 닳도록 보고 들었던 ‘측우기=장영실 발명’ 이야기는 대체 뭔가요. 사실 <세종실록>뿐 아니라 어떤 사료에도 ‘측우기 발명자=장영실’이라는 이야기는 찾을 수 없습니다. <연려실기술> ‘세종조 고사본말·찬술 및 제작’조는 “장영실이 1432년(세종 14)부터 간의대, 혼의혼상, 앙부일구, 일성정시의, 자격루 등의 제작을 주도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측우기는 쏙 빠져 있죠. 세자 이향(문종)의 창안으로 시험 제작·운용된 ‘구리제 우량계’는 4개월여 만인 1441년 8월 18일 정식으로 제작됩니다. 세종은 “쇠로 길이 2척, 지름 8촌의 우량계를 만들어 대(臺) 위에 올려놓고 강우량을 측정한다”는 호조의 구체안을 승인합니다. ‘측우기’라는 명칭은 1442년(세종 24) 5월 8일 <세종실록> 기사에 처음 등장합니다. “쇠를 주조한 측우기를 제작… 서운관(기상청) 관원이 강우량을 측정 보고하고…. 각 지방에도 측우기를 보내….” 이 무렵 장영실은 곤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세종의 안여(임금이 타는 수레)가 부서지는 불상사의 책임을 지고 의금부로부터 국문을 받고 있었습니다. 결국 곤장형의 처벌을 받았는데요(1442년 5월 3일), 그런 장영실이 측우기를 발명할 여력이 있었을까요. 천문 기후 관측에 밝았던 세자 문종 그렇다면 세자 시절 문종(1414~1452)은 어떨까요. “세자가 강우량을 재는 구리그릇을 만들어 시험 운영했다”는 기록은 <세종실록> 1441년 4월 29일자에 등장하죠. 세자가 ‘강우량 측정’을 고민했던 때가 ‘근년이래’, 즉 ‘요 몇 년 사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1441년보다 앞선 시기부터 측우기를 연구하고 실험한 이가 다름 아닌 세자(문종)였다는 겁니다. 1770년(영조 46) 측우기를 제작한 영조는 “측우기를 서운관과 각 지방에 비치해두고 강우량을 측정해서 보고하라”는 명을 내린다. / 한수당 연구원 블로그 <연려실기술>은 “문종이 천문을 잘 관측하고 기후(氣候)에 정교해 우레가 어느 때 치고 어느 방위에서 일어난다고 예언하면, 뒤에 반드시 맞았다”(‘문종조 고사본말’)고 했습니다. 정식 임금으로서 문종의 치세는 2년 3개월(1450년 2월~1452년 5월)에 불과합니다. 서른아홉 살 젊은 나이에 승하했죠. 본래 병약했던데다 아버지(세종·재위 1418~1450)와 어머니(소헌왕후·1395~1446)의 삼년상을 잇달아 치르는 바람에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됐습니다. 그러나 문종이 조선을 다스린 것은 사실상 10년에 달합니다. 1443년(세종 25) 4월 17일 세종이 대리청정을 명하는 교지를 내렸는데요. 1년 전인 1442년부터 이 ‘똘똘한 세자’가 조선의 국정을 실질적으로 이끌기 시작했습니다. 문종의 업적을 논해볼까요. 6품 이상까지 윤대(輪對·문무 관원이 교대로 임금의 질문에 응대)를 허락함으로써 언로를 열었다는 평을 받고 있어요. 이민족과의 전쟁사인 <동국병감>을 펴냈고,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편찬하기도 했습니다. 또 태종 때 만들었던 화차를 새롭게 개발해 유사시에 대비했습니다. 만만치 않은 업적이 아닙니까. 측우기뿐 아니라 청계천과 한강의 수위를 재는 수표도 설치해두었다. 요즘의 풍항계인 풍기대도 임금의 집무실 지근거리에 배치해두었다. / 한수당 연구원 블로그 영조가 깜짝 놀라 주저앉은 이유는? 그런 문종이 창안한 측우기는 서울과 지방 각지의 체계적인 강우량 측정에 활용됐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에는 쓰이지 않다가 1770년(영조 46)이 돼서야 재등장합니다. <증보문헌비고>는 “1770년 5월 영조가 <세종실록>에 측우기 관련 기사가 있다는 소식을 알고 본인도 모르게 엎어지듯 앉으시며…(기뻐했다)”고 소개했습니다. 영조는 창덕궁과 경희궁은 물론 8도와 양도 등 각 지방에 측우기를 설치·운용했습니다. 정조(재위 1776~1800) 역시 측우제도 발전에 공을 들입니다. 이후의 임금들은 영·정조 때 보급한 측우기로 강우량을 측정했습니다. 국왕의 업무일지인 <승정원일기>(영조~순종)에서 ‘측우기’ 단어가 무려 8129건이나 검색되더군요. ‘비가 내렸다. 몇 시에서 몇 시 사이에 내린 비로 측우기의 수심은 몇 푼이었다’는 측정기록을 계속 쌓아둔 겁니다. 궁금증이 생기죠. 강우량 측정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요. <정조실록> 1799년(정조 23) 5월 22일자를 볼까요. “1791년 이후 비의 많고 적음을 반드시 기록했다. 1년치의 통계를 보았더니…. 지난해 이달에는 측우기 물 깊이가 거의 1자 남짓인데… 이번 달은 겨우 2치… 백성의 실정이 딱하기만….” 장기 강우량의 측정으로 농사일을 살피고 미래에 대비한다는 의미죠. 실례로 정조는 “측우기 측정 등으로 비가 오고 안 오고를 잘 파악해 만약 가뭄이 심해지면 벼 대신 다른 작물을 심으라”(<정조실록> 1798년 6월 7일)고 당부했습니다. 측우기뿐이 아니죠. 세종 시대부터 청계천변과 한강변에 설치해놓은 것이 수표입니다(<세종실록> 1441년 8월 18일조). 하천의 수위를 측정해 홍수에 대비하고자 한 겁니다. 요즘의 풍향계라 할 수 있는 ‘풍기대’도 궁궐에 설치했습니다. 측우기의 채취오차는 0.51%로 국제기상기구(WMO)의 허용측정오차(1%)를 안정적으로 충족시켰다. 또 물의 깊이를 쉽게 측정하기 위해 3단 조립식으로 제작했다. / 이하상의 소와당, 2012 현대 측우기와 비교해도 손색없다 현재 남아 있는 측우기는 딱 1대입니다. 충청 감영(금영)에 있었던 ‘금영 측우기(1837년·헌종 3)’인데요. 기상학자 와다가 일본으로 가져가 일본 기상청에 보관돼 있었는데, 끈질긴 교섭 끝에 환수(1971년 4월)한 겁니다. 그동안 ‘진품’임을 주장하는 몇몇 측우기가 등장했지만 모두 가짜로 판명됐습니다. 1987년에는 시중에서 제작한 3만원짜리 우산꽂이가 ‘세계 최고의 측우기’로 둔갑한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습니다. 측우기를 설치했던 측우대는 5기 정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종 때 발명됐다는 측우기를 보면서 궁금한 점이 생겼습니다. 얼핏 보기에 간단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측우기가 어떤 과학성을 갖고 있다는 걸까요. 현전하는 금영 측우기의 지름은 140㎜ 정도인데요. 이것은 현재 세계 13개국의 우량계(127㎜)와 8개국 우량계(159㎜)의 중간 정도 됩니다. 580년 전에 제작한 측우기인데도 현대 측우기의 규격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측우기가 없었을 때는 ‘쟁기날이 들어갈 정도’와 ‘호미날이 들어갈 정도’ 등으로 강우량을 측정했다. / 국립민속박물관·국회도서관 소장 3단 조립식 측우기의 비밀 측우기 모습이 간단하지만, 허투루 보면 안 됩니다. 빗물을 받는 면적이 너무 넓거나 좁으면 측정오차가 커집니다. 면적이 너무 넓으면 비가 적게 내릴 때 측정하기가 어렵고요. 반면 너무 좁으면 바람이 불 때 빗물을 받기 힘들게 되죠. 비의 평균 반지름이 1㎜이고, 단위 시간당 강우량 10㎜ 정도라는데요. 이 경우 지름이 140㎜인 금영 측우기의 채취 오차는 0.51%에 불과하답니다. 현재 세계기상기구(WMO)의 강우 채취 표본 오차범위는 1% 이내라는데요. 그렇다면 금영 측우기는 현대 우량계의 국제규격에도 합치되는 크기라 할 수 있죠. 또 금영 측우기(깊이 316㎜)는 세 부분으로 나눠 조립할 수 있게 만들었는데요. 여기에도 과학적인 고려가 담겨 있습니다. 원통이 너무 깊으면 밑바닥에 고인 물을 측정하기 힘들잖아요. 그럴 때는 윗부분의 한 토막이나 두 토막 용기를 떼어내고 빗물의 깊이를 잴 수 있잖습니까. 3단 조립으로 제작한 이유지요. 측우기에는 이렇게 강우량의 정밀 측정을 위한 역대 임금들의 노심초사가 담겨 있습니다. 일본 기상학자 와다는 1770(영조 46)~1907년(고종 광무 11)의 강우량을 월별로 정리하고, 1671(현종 12)~1907년의 237년간 강수·강설일수를 정리했는데요. 바로 이겁니다. 즉 조선은 측우기라는 우량계를 발명해 국가 주도로 연중 전국 단위로 정밀 측정했다, 그리고 그 측정값을 농사에 활용했다, 무엇보다 그 통계의 일부가 남아 있다, 뭐 이런 얘기죠. 기상과학 기술을 농사현장에 활용해 농업생산을 구현한 조선의 국가적 역량이 측우기를 통해 재현된 겁니다. 조선 후기 시인인 박윤묵(1771~1849)은 “어진 임금님의 하늘을 공경하는 뜻을 알고 싶다면 돌에 새긴 측우대의 명문을 살펴보시라”(<존재집>)고 했습니다. 그 명문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임금은 가뭄 때 백성과 더불어 근심하고, 비가 내릴 때 백성과 함께 기뻐한다. 측우기에 임금과 백성의 기쁨과 걱정이 매이었으니, 만세토록 알맞은 비가 내려주기를….”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2023.03.03 11:28

  • 레이디경향

    • 아베 전 日총리 총격…용의자는 42세 일본인 남성

      화제

      아베 전 日총리 총격…용의자는 42세 일본인 남성

      NHK등 현지 매체에 따르면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유세 중 총에 맞아 쓰러져 의식불명 상태로 응급 이송됐다. 교도통신 제공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거리 선거 유세 중 등 뒤에서 총격을 당해 쓰러졌다. NHK는 8일 아베 전 총리가 이날 오전 11시경 일본 나라시 긴테쓰 야마토 니시이지 역 앞에서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유세하던 중, 두 발의 총성과 같은 소리가 들렸다고 보도했다. 소리가 난 후 아베 전 총리는 쓰러졌다. 교도통신은 자민당 관계자의 말을 빌어 용의자가 아베의 배후에서 왼쪽 가슴을 향해 총을 쐈다고 보도했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총격 소식과 용의자 야마가미 테츠야 검거 소식을 전하고 있는 일본 방송. 나라시 소방국에 따르면 아베 전 총리는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응급 이송됐으며 심폐정지 상태라고 알려졌다. 아직 일본 정부의 공식 발표는 없는 상태다. 경찰 당국에 따르면 용의자는 나라시에 거주하는 42세 일본인 야마가미 테츠야(山上徹也)로 살인 미수 혐의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이유진 기자 2022.07.08 13:10

    • 연예

      일본인 야마키와 ‘거짓 결혼’ 12년 만에 털어놓은 방실이의 충격고백

      “나는 독신주의자! 거짓 결혼으로 12년간 일본인 남편을 둔 유부녀로 살았다”  ‘12년 전 자고 있는 사이에 결혼 발표가 났고, 결혼식 후 남편과 단 하루도 같이 산 적이 없다’. 트로트 가수 방실이의 해묵은 고백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전 소속사의 횡포로 결혼을 결심, 유부녀 아닌 유부녀 생활을 12년 동안이나 한 가수 방실이. 그녀는 왜 거짓 결혼을 택해야 했고, 12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 사실을 털어놓는 것일까? 방실이와 일본인 킥복싱 프로모터 야마키씨의 가짜 사랑, 그리고 결혼 뒤에 숨겨진 진실.  혼인 신고도 않고, 신혼여행도 생략… 오로지 식만 “결혼 후 하루도 같이 산 적 없다” 가수 방실이(42)가 지닌 12년간 거짓 결혼 생활을 했다고 밝혀 충격을 주고 있다. 그녀는 1994년 일본인 킥복싱 프로모터 야마키 도시히로씨와 결혼해 지금까지 잘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왔다. 방실이의 거짓 결혼의 시작은 1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3년 2월, 모 일간지에 ‘육체파 트로트 가수 방실이, 일본으로 시집간다’는 타이틀 아래 결혼 기사가 보도된 것. 당시 기사는 ‘예비 신랑은 킥복싱 프로모터로 활동중인 일본인 야마키 도시히로씨로 방실이와는 1992년 12월 작곡가 방모씨의 소개로 만나 교제를 시작, 불과 두 달 만에 백년가약을 맺게 됐다’고 싣고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결혼 당사자인 방실이는 금시초문이었다. 더구나 상대로 지목된 일본인은 일본어에 능통한 방실이가 사무실 일로 통역을 하면서 딱 한번 만난 남자. 기암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루는 자고 있는데 친오빠한테서 전화가 걸려왔어요. 대뜸 하는 말이 ‘너 결혼하냐?’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제 결혼 기사가 난 것을 알게 됐죠. 본인도 모르는 결혼식이라니, 그게 있을 수나 있는 일인지… 무언가에 얻어 맞은 듯 어리둥절했어요.” 당시의 결혼 보도 헤프닝은 방실이가 10년간 함께 일하던 소속사와 결별한 직후 불거진 일이기에 그녀는 자신을 괘씸히 여긴 소속사의 음모라고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너무 놀라서 사무실도 찾아가 보고, 전화도 해봤지만 어느 한 사람 연락이 닿질 않았어요. 그 당시 전 새로운 소속사를 찾던 때라 매니저도 없이 혼자서 방송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결혼 기사 이후에 제가 어떤 액션을 취하질 않으니 `방실이 남편이 레슬링 선수다, 유도선수다부터 야쿠자까지 부풀려져 걷잡을 수 없을 정도가 됐죠. 전 영문도 모른 채 그냥 당할 수밖에 없었어요.”  오보 기사 하나에 결혼까지 하게 됐단 설명이다. 하지만 스캔들 때문에 꼭 결혼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결혼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인 만큼 본인이 아니라고 해명만 하면 그뿐이다. 그런데 그녀는 적극적인 해명의 기회 한번 마련해볼 생각을 않고, 거짓 결혼을 결심했다. 이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방법이 꼭 결혼밖에 없었느냐?”는 질문에 방실이는 “웃기고 말도 안 되는 얘기라는 거 안다. 하지만 당시 연예계의 풍토, 기획사와 연예인의 관계는 그만큼 엄격했다”고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당시 전 소속사 사장은 어렵고 무서운 존재였어요. 감히 맞설 용기가 나지 않았죠. 그런데 나중에는 어떤 오기 같은 게 생겼어요. `너희들이 나한테 이랬어? 좋아. 그럼 나도 너희들 뜻대로 결혼해 가수로 잘나가는 모습을 보여줄게” 식으로 말이죠. 그래서 결혼식을 하게 된 거예요. 당시엔 그게 복수라고 생각했죠.” ‘가짜 남편’ 야마키는 희생양 “고맙고 또 미안해요. 그 친구가 행복하길 빕니다” 방실이는 결혼식을 올린 후 단 하루도 같이 산 적이 없는 ‘가짜 남편’ 야마키씨를 ‘친구’라 소개했다. 더불어 자신의 이기적인 부탁을 거절하지 않고, 알면서도 그렇게 해준 야마키에게 고맙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방실이는 자신도 피해자지만 야마키씨 또한 피해자라고 했다. “그에게 전화를 걸어 앞뒤 상황을 설명한 뒤 ‘결혼식’만 치러달라고 부탁했어요. 처음엔 거절했죠. 그러다 넉 달 만에 힘들게 답을 얻어낼 수 있었어요. 그 친구도 일본 스포츠계에서는 나름 유명한 사람이거든요. 그렇다 보니 공인으로서 제가 처한 상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도와준 게 아닐까 생각해요. 둘 다 독신주의자여서 가능했는지도 모르겠구요. 그러고 보니 결혼 후 딱 세 번 만났네요. 어느 날인가는 “미안하다”고 했더니 그 친구가 “지나간 일이니까 이제 그만 잊으라”더군요. “결혼식 올리고 4~5년 후 그 사람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가를 알게 됐어요. 제겐 정말 고마운 친구죠.” 12년 전 그녀에겐 일이 인생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소중했다. 게다가 결혼기사가 보도됐을 땐 소속사와 결별 후 ‘서울 탱고’로 최고의 주가를 올릴 때였다. 전 소속사에서 몸담은 10년 동안 번 수익보다 ‘서울 탱고’로 1년간 벌어들인 돈이 더 많았을 정도로 당시 방실이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방실이의 입장에선 10년 계약 기간이 끝나 소속사를 나온 것뿐이지만 소속사 측에선 어떻게 해서라도 그녀를 다시 붙잡고 싶었을 터. 방실이는 “모르긴 해도 소속사에서 나를 다시 돌아오게 하려고 그런 기사를 퍼뜨린 것 같다”며 결혼 기사가 나가게 된 배경을 추측했다.  무엇보다도 방실이는 자신의 음악 인생에 오점을 남기기가 싫었다. 그녀는 철저한 독신주의자. 결혼식은 그녀에게 일종의 쇼에 불과했다. 식구들도 ‘형식뿐인 결혼’이라는 것을 알고 결혼식장에 그녀와 동행했다. 결혼식을 세 차례나 치렀다. 1994년 3월 고향인 강화에서 전통혼례식을, 4월엔 서울 여의도에서 웨딩마치를 울린데 이어 5월엔 일본 동경 산롯트플라자 호텔서 기모노를 입고 혼례를 올렸다. 결혼식을 모두 마친 후, 방실이와 야마키씨는 신혼여행을 떠났다. 당시 언론에 알려진 사실은 여기까지다. 물론 신혼여행을 함께 떠나기는 했다. 하지만 괌에 도착한 후 두 사람은 공항에서 헤어져 각자 일을 겸한 여행을 즐겼다고 한다. “저희 두 사람 모두 당시 괌에서 일이 있었어요. 저는 공연이, 그 사람은 세미나가. 말하자면 일에 맞춰 신혼여행 일정을 짠 거죠. 재미난 에피소드 하나 알려드릴까요? 제가 괌에 도착한 다음날 (조)갑경이 부부가 제가 묵은 호텔로 신혼여행을 왔어요.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 싶어 그들과 동행했죠. 혹처럼 붙어 다녔어요.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게 뭔 줄 아세요? 제가 한시도 그들 부부 곁을 떠나질 않았는데 글쎄 허니문 베이비가 다 생긴 거예요. 신기해 죽겠다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이 제게 ‘결혼한 지 얼마나 됐냐’고 물으면 ‘갑경이 부부 첫째가 몇 살이더라’를 먼저 떠올려요. 지난 12년간 어디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그뿐이었겠습니까.” ‘거짓 결혼’꾸민 전 소속사 사장의 충격적인 자살 “용서한다 말도 못했는데… 가슴을 쓸며 울었어요” 12년간을 숨겨왔다. 이제 와서 거짓 결혼에 대한 진실을 밝히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돌아온 그녀의 답은 “신랑에 대해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데 한계를 느꼈고, 이제 시간도 흘러 아플 만큼 아팠으니 홀가분해지고 싶다”는 것. 대화 도중 방실이는 뭔가 아픈 기억이 되살아났는지 살짝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작년부터 조금씩 ‘이젠 얘기를 해도 좋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들더라구요. 그러다 3개월 전 독도 문제로 한·일 감정이 극에 달했을 때 모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에잇. 이참에 남편하고 확 헤어져버려’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툭 튀어 나왔어요. 이젠 정말 진실을 밝혀야 될 때가 됐구나 싶었죠. 사실을 털어놓기 하루 전 그래도 상황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인데 그 분도 알아야지 싶어 이전 소속사 사장님을 찾아갔어요. 그리고 나흘 뒤 전화가 왔는데 소속사 사장이 돌아가셨다고 하더군요. 사고도 아니고 아파서도 아니었어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석 달 동안 우울증에 빠져 아무 일도 못했어요. ‘내가 미처 용서도 못했는데 그렇게 떠나가면 어떻게 하냐’며 울고 또 울었죠. 사는 게 이렇게 허망해요.” 결혼 후 혼인신고조차 하지 않고 싱글 생활을 한 그녀에게 이혼이라는 거추장스런 절차는 필요치 않다. 이젠 일본인 남편과의 별거설로 기자들에게 시달리는 일도 더이상 없을 것이다. 고해성사를 한 것처럼, 홀가분 할 법도 한데 방실이는 “한 20% 정도는 들 풀린 느낌인데 그 답답함의 정체를 모르겠다”며 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방실이는 한 달 전 새 앨범 「아! 사루비아」를 발표했다. 대중에게 적잖은 사랑을 받은 ‘뭐야뭐야’ 이후 3년 만에 낸 작품이다. 타이틀곡은 팬들 사이에서 ‘앗싸라비아’로 통하는 ‘아! 사루비아’. 12년간 남모를 아픔을 간직한 채 걸출한 입담으로 시청자를 웃기고,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흥을 돋워준 가수 방실이. 가수 인생은 노래 따라 간다는 말이 있다. 그녀의 앞날도 언젠가 “앗싸라비아” 외칠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글 / 최은영 기자  사진 / 백성우

      2005.07.01 00:00

    • 연예

      일본인 의붓어머니의 전시회 참석한 연극배우 손숙

      “의붓어머니도 기구한 인생, 미워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연극배우이자 사회단체 ‘아름다운 가게’의 공동 대표 손숙씨가 아픈 가정사를 극복하고 상처를 보듬어 안았다. 지난 10월 29일, 서울 관훈동에서 있었던 일본인 의붓어머니, 하라 미쓰코씨의 전시회 오픈식에 참석한 손숙씨는 환한 미소로 축하의 마음을 전했다. “50년을 한결같이 아버지 곁을 지켜주셨지요” 지난 10월 29일부터 11월 4일까지 서울 관훈동 모로 갤러리에서는 손숙씨(59)의 의붓어머니 하라 미쓰코씨(68)의 첫 개인전이 열렸다. 전시회 첫날 꽃다발을 들고 찾아와 축하의 인사를 전한 손숙씨에게 아버지 손태목씨(88)와 의붓어머니 하라 미쓰코씨는 내내 고마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정을 모르고 자란 손숙씨는 사춘기 시절, 야속한 아버지를 참 많이도 원망했었다. 어머니와 3남매만을 남겨둔 채 타지를 떠돌았던 아버지의 부재가 그녀에게는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았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백발이 성성한 아버지와, 그 아버지 곁을 50년 동안 한결같이 지켜온 의붓어머니를 바라보는 지금, 그녀에게 원망이라고는 이제 남아 있지 않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는 바람 같은 분이셨어요. 일년에 한 두 번, 명절 때나 제사 때 바람처럼 살며시 왔다 가시던 모습 정도만 기억할 뿐이에요. 제 결혼식 때도 전 아버지 대신 할아버지 손을 잡고 입장했어요. 결혼식 올리고 나서 남편과 함께 일본으로 아버지를 만나러 갔는데 혹여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하면 어쩔까 걱정이 됐죠. 그런데 일본 공항에 내리자마자 한눈에 아버지를 알아볼 수 있더라구요. 그런게 아마도 핏줄이라는 거겠지요.” 손숙씨는 아버지의 정이 무엇인지를 거의 모르고 자랐다. 경남 밀양 천석꾼 집안의 2대 독자인 아버지는 열여섯에 장가들어, 어머니와의 사이에 3남매를 낳았다. 그 후 일본 유학길에 오른 아버지는 공부한다는 구실로 계속 밖으로만 돌았다. 그러다가 영화 관련 사업에 뛰어들면서 당시 신인 여배우였던 지금의 의붓어머니를 만났다. 의붓어머니는 일본 산케이신문이 주최한 ‘꽃의 여왕’ 대회에서 최고의 미인으로 뽑혔던 촉망받는 영화배우였다. 주목받는 신인배우로 약 2년 정도 배우 생활을 하던 당시 손숙씨의 아버지를 만났고, 슬하에 아들 둘을 두며 평생을 함께 살고 있다.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상이었던 손씨의 모친은 평생을 종갓집 층층시하에서 온갖 제사를 다 모시며 3남매를 혼자 키웠다. 남편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자식에게 대신 쏟아 부으며 평생을 희생했던 것이다. 예민하던 사춘기 시절, 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고, 답답하게 사시는 엄마 모습이 너무 못나 보여서 왜 이렇게 사느냐며 대든 적도 있었단다. “아버지 역시 아버지대로 참 괴로운 인생을 사셨다고 생각해요. 고향에도 못 오시고 참 외로우셨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일본 어머니에 대한 원망은 없었어요. 그분도 그분대로 참 기가 막힌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나이 스물에 우리 아버지를 만나셔서 50년을 모시고 사셨으니까. 평생 면사포 한 번 못 써보고 늙으신 셈이잖아요.” “‘숙상’은 빛이 나는 자랑스런 딸입니다” 손씨는 94년 폐암으로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해 절절한 그리움을 안고 있다. “살아 생전에 어머니 뜻대로 따른 것이 하나도 없었고 불효만 많이 한 딸”이었기 때문이다. 완고한 종갓집의 맏며느리로 평생을 사신 어머니는 딸이 배우가 되는 것을 무척이나 반대하셨다. 평생 그녀의 공연을 한 번도 보러 오지 않았을 정도. 그래서 손씨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라도 고향분들 앞에서 어머니 위신을 세워드리고 싶어 자신의 대표작 ‘어머니’를 고향인 밀양에서 무대에 올렸다. “당시 공연중에 관객 한 구석에서 어머니의 환영을 너무나 뚜렷하고 강렬하게 만났어요.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내가 지금 어떻게 연기를 하고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아찔한 순간이 이어졌죠. 막이 내리고 연극이 끝나자 연출자 이윤택 선생이 여태까지 했던 ‘어머니’ 공연 중 가장 연기가 좋았다고 칭찬을 하더군요. 아마도 이제사 딸이 연극하는 걸 받아들이시게 됐는가봐요.” 손씨의 모친은 94년 세상을 뜰 때까지 남편에 대한 기다림의 끈을 놓지 않았다. 어쩌면 남편이 다시 돌아올지 모른다는 희망 때문이었으리라. 그때마다 손숙씨는 절대 어머니처럼 살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임종을 앞둔 순간 어머니는, “아버지를 모셔올까요?”하는 자식들의 말에 그저 고개를 가로저었다고 한다. 의붓어머니는 97년 아버지와 함께 한국에 들어와 생활하고 있다. 더 연세가 들기 전에 고국에 와서 편히 사시라는 자식들의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 모두에게 손숙은 자랑스럽고 고맙기만 한 딸이다. 일흔이 다 된 나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고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하라 미쓰코씨는 매우 상냥하고 우아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의붓딸 손숙을 ‘숙상’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또, “사회적으로 맹활약하고 있는 빛나는 여성으로서 그녀를 존경하고, 두 사람 모두 연기와 예술에 대한 이해가 있기 때문에 서로 좋은 선후배 사이이자, 모녀지간”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아직 한국말이 서툰 그녀는 남편의 통역으로 자신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처음에 한국에 올 때만 해도 일종의 공포가 있었어요. 말도 다르고 풍속도 다른데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었지요. 그런데 와서 살아보니 한국 사람들은 마음이 참 따뜻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한국 사람들 특유의 활력 있는 모습이 매력적이에요. 일본에 있을 때는 취미 정도로만 그림을 그리는 정도였다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한국에 온 이후예요. 한국이 주는 특유의 열정과 활력이 영감을 불어넣어줬다고 할까요.(웃음)” 최근 몇 년 동안 손숙씨 가족은 친어머니 소생 3남매와 의붓어머니 소생 2형제가 일년에 한두 차례 만나 가족모임을 가져왔다고 한다. 마치 개화기 시절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속의 이야기처럼 사연 많은 가족사지만 세월의 흐름과 함께 미움도 원망도 바람에 깎이는 바위처럼 용서와 화해의 이름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요즘 손숙씨는… ‘아름다운 가게’ 운영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녀가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는 ‘아름다운 가게’는 헌 옷, 쓰던 가전제품, 중고 책 등 기증받은 중고품을 손질한 뒤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고, 그 수익금으로 불우이웃을 돕는 실천의 장이다. 지난해 10월 18일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1호 매장을 열면서 시작된 아름다운 가게 운동은 1년 동안 1만9백여 명의 개인 기증자가 내놓은 재활용품을 팔았다. 그 수익금으로 모두 52개 단체에 5천5백만원을 지원했다.‘아름다운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상근자와 3백30여 명의 자원 활동가들로 구성된다. 이들은 물건을 기증받아 운반하고 분류하며, 손질하고 수선한다. ‘아름다운 가게’는 연말까지 20개 지점으로 늘어날 예정이다. 지난 11월 8~9일 서울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열린 ‘2003 지상 최대 벼룩시장’은 쓰지 않는 물건들을 가져와 싸게 팔고 판매수익금 일부를 불우이웃에 기부하는 행사였다. 이날 행사는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20만 명에 이르는 인파가 몰려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글/박연정 기자  사진/박남식·경향신문포토뱅크

      2003.12.01 00:00

  • 화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