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
‘사랑해, 말순씨’로 해피 바이러스 전파하는 영화감독 박흥식&강민휘
“열두 번의 오디션 끝에 만난, 두 남자의 감동 러브(?) 스토리”
다운증후군 환자로는 최초로 영화배우가 된 청년이 있다. 그를 스크린 속으로 끌어들인 사람은 영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인어공주’의 박흥식 감독. 첫 만남 이후 꼭 1년여 만인 11월 3일 두 사람의 합작 영화가 개봉된다. 장애를 딛고 배우 된 소년 민휘와 이 시대 최고의 휴머니스트 박흥식 감독이 엮어내는 감동 만땅 로드 무비.
Casting Board
대학 졸업 후 사회로 내디딘 첫발… 민휘
장애우로 이 땅에서 산다는 건 남들보다 험한 길을, 더 힘들게, 그리고 더 오랫동안 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장애우의 성공 스토리는 비장애우의 그것보다 감동적이다. 다운증후군이라는 장애를 딛고 배우로 우뚝 선 강민휘(25). 그가 걸어온 길도 그랬다. 생후 6개월 만에 다운아 판정을 받고 평생을 ‘바보’라 손가락질 받으며 살아온 소년. 하지만 소년은 이제 외톨이가 아니다.
소년은 요즘 만인이 우러러보는 ‘배우’라는 새 옷을 입고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영화 ‘사랑해, 말순씨’가 민휘의 스크린 데뷔작. 닮고 싶은 배우는 ‘제8요일’의 다운증후군 연기자 파스칼 뒤켄이다. 뒤켄은 ‘제8요일’로 칸 영화제 특별남우주연상까지 거머쥔 연기파 배우. 민휘는 과연 ‘진짜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이룰 수 있을까?
그때 그 감동을 다시 한번… 박흥식 감독
데뷔작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와 ‘인어공주’를 통해 섬세하고 감각적인 연출 스타일로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은 박흥식 감독(40). 그의 필모그래피는 11월 3일 개봉되는 영화 ‘사랑해, 말순씨’로 이어진다. ‘사랑해, 말순씨’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박흥식 감독 특유의 따뜻한 시선이 담긴 세번째 작품. 열다섯 살 소년 광호(이재응)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소년의 주변에는 모두 네 명의 등장인물이 있다. 싸구려 화장품 냄새를 요란스레 풍기고 다니는 화장품장수 엄마에, 싫다는데도 못 알아듣고 만날 졸졸 따라다니며 귀찮게 하는 다운증후군 형, 늘 사고만 치고 다니는 구제 불능 학교 깡패 친구, 그리고 문간방에 세 들어 사는 간호조무사 누나까지.
광호는 이들을 싫어하고 또 경멸한다. 영화 속엔 일정 부분 박 감독의 어린 시절이 투영돼 있다. 특히 광호와 다운아 형 재명의 에피소드는 대부분 실화다. ‘사랑해, 말순씨’는 한마디로 박 감독의 고해성사와도 같은 작품. 그가 한때 부끄러워하고, 싫어하고, 멸시하던 사람들은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그가 영화로 또 한 번 관객에게 말을 걸어왔다.
# Scene 1 : 회상…
민휘 “바보 아냐, 난 강민휘야!”
이름은 ‘바보’, 별명은 ‘못난이’? 친구들은 나만 보면 놀려댄다. 자기들과 다르게 생겼다고, 수업시간에 노래 부르며 창 밖만 보는 이상한 아이라고…. 오늘도 도시락을 반 친구에게 빼앗겨버렸다. 돌려달라고 외치니 “바보야, 와서 가져가 봐”란다. 다른 건 다 참아도 ‘바보’ 소리만큼은 못 참는다. ‘바보’라는 말에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발로 한 번 뻥~ 그리고 소리쳤다. “바보 아냐, 난… 강민휘란 말야. 강.민.휘.”
왜들 그러는 거지? 난 애들하고 똑같은데… 난 장애우 아닌 것 같은데… 다른 거라곤 스물한번째 염색체가 남들보다 한 개 더 많다는 것뿐인데… 엄마는 내가 가진 또 하나의 염색체가 ‘행복 염색체’라고 했다. 엄마 말이 맞다면 행복해야 되는 거 아냐? 이상한 일이다. 울 엄마는 거짓말 안 하는데… 특별한 선물을 받은 거랬는데….
박 감독 “어느 날, 나를 사랑하는 녀석이 나타났다”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우리 앞집엔 ‘바보’ 형이 한 명 살았다. (그땐 다운아를 다들 그렇게 불렀다. ‘바보’라고….) 할 줄 아는 말이라곤 “밥 먹었어”가 전부에 “발길을 돌리려고 바람 부는 데로 걸어도~” 바보처럼 항상 똑같은 노래만 읊어댔다. 싫다는데 내 뒤는 또 왜 그리 졸졸 쫓아다니는지 딱 죽을 것만 같았다. 중국집을 하는 바보네 부모는 가끔 우리집에 팔다 남은 자장 소스를 그릇째 가져다주곤 했다. 하지만 난 “바보네 집에서 가지고 온 거”라며 손도 대지 않았다. 생긴 것도 못생긴 바보가 왜 계속해서 내 모자를 빼앗고 가는 길을 막는지 이해가 안 됐다.
바보네 집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동네 사람들의 항의 방문이 이어졌다. “제발 좀 멀리 이사 가요, 이사 가! 우리 애들 교육에 얼마나 안 좋은데요.” 그러던 어느 날. 방과 후 집으로 향하는 길, 낯선 차가 바보 형 집 앞에 시동을 켠 채 서 있었다. 바보 형을 데리러 온 재활 치료 시설 차였다. 바보 형은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더니 급기야 레슬링을 하는 것처럼 파테르(패시브) 자세로 바닥에 철썩 몸을 붙이는 게 아닌가? 하지만 기골이 장대한 아저씨 셋을 혼자서 무슨 수로 막아내랴. 그날 이후로 바보 형의 모습은 동네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거 참 이상하다. 간절히 바라던 일이 이루어졌는데 기쁘지 않으니. 아니, 오히려 어딘지 모르게 허전했다.
바보 형이 동네에서 자취를 감춘 뒤 한참이 지나서였다. 어느 날 동네 친구가 하는 말. “그 바보가 동생 몰래 교복을 슬쩍 훔쳐 입다가 동생한테 엄청 두들겨 맞았다잖아~.” 다른 아이들처럼 학교에는 가고 싶은 데 받아주는 곳이 없으니 교복이라도 입어보고 싶었나 보다. 동생은 자기 물건에 손도 대지 못하게 하니, 내 모자라도…. 그때 그 앞집 형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다운아들은 선천적으로 면역력이 약해 병에 잘 걸리고 일찍 죽는 경우가 많다는데 살아는 있을까? “미안해, 형. 바보라고 놀려서… 화내고 짜증만 내서….”
# Scene 2 : 첫 만남… 오디션 보던 날!
민휘 “너무 떨려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아”
오늘로 꼭 열두번째다. 매니저 형은 “너무 긴장하면 끼와 재능을 맘껏 펼쳐 보일 수 없으니 긴장을 풀라”고 한다. 하지만 그래도 떨리는 걸?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데 어느덧 열두번째. 역시 오르지 못할 나무였나? 안경 너머로 언뜻언뜻 비치는 감독님의 눈초리는 여전히 날카롭다. 심장이 쿵쾅쿵쾅! 설렘과 두려움으로 가슴이 두방망이질쳤다. 잔뜩 긴장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감독님이 “친구한테 멋진 공연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라”며 용기를 복돋워주신다.
‘그래, 한번 해보는 거야. 잘할 수 있어’ 목청을 가다듬고, 자세를 바로 한 다음 노래도 한가락 뽑고, 열정적으로 춤도 췄다. 얼마나 힘을 쏟았는지 준비한 모든 것을 마친 후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쓰러질 지경이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다 그 자리에서 풀썩! 그런데 오늘도 글렀나 보다. 감독님의 표정이 ‘이게 아닌데’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잘못 들었나? 말은 좀 어눌해도 듣는 건 문제없는데? “민휘야! 우리 잘해보자. 잘 부탁한다. 강민휘!” 이거 혹시 꿈은 아니겠지? “그럼, 나 이제 영화배우 되는 거야?”
박 감독 “내가 찾던 바로 그 아이”
다운증후군 연기자를 어디서 찾지? 평범한 아역배우로는 안 되는데… 평범한 아이에게선 절대 나올 수 없는 다운아만의 미소가 따로 있는데…. 전국 각지에서 추천을 받아 수십 명을 만나본 뒤였다. 증상이 심각해 대화조차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어느 정도 말은 통해야 작업을 진행할 수 있다. 그렇다고 배우 한 명 때문에 마냥 촬영 일정을 늘릴 순 없는 노릇. 그래도 포기할 순 없었다. 조연이지만 ‘사랑해, 말순씨’에서 바보 형 재명의 캐릭터는 없어선 안 될 중요한 캐릭터니까. ‘오늘은 괜찮은 애가 좀 있으려나?’ 기대 반, 설렘 반 또다시 오디션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안녕하세요, 강민휘입니다.”
웃을 때마다 입가에 보조개가 깊게 파이는 아이. 반달 모양의 눈은 해가지고 웃을 땐 또 얼마나 환하게 웃는지 어금니가 다 보일 정도다. 게다가 착하고 순한 인상까지…. ‘바로 저거야!’ 다른 배우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첫눈에 반했고, 열두 차례에 걸친 오디션을 통해 민휘를 지켜봐온 촬영감독을 비롯한 스태프는 내게 확신을 심어줬다. 노래도 곧잘 하는데다 춤까지 수준급. 촬영감독은 “느낌 너무 좋아요. 꼭 저 친구로 해야 돼요”라며 흥분해 난리였다. 민휘의 맑고 천진한 미소와 마주하고 있으면 누구나 절로 웃게 된다. ‘앞으로 웃을 일 많아지겠는걸? 후훗~.’
# Scene 3 : 레디고, 액션!
민휘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세포가 일제히 깨어났다”
“자,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조용히 해주시고요. 신 넘버 83에 1!”
조연출의 말이 끝난 후 스태프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로 쏠린다. “레디고, 액션!” 감독님의 액션을 외치는 소리가 온 골목을 들썩이며 쩌렁쩌렁하게 울려퍼졌다. ‘차르륵’ 필름 감기는 소리가 긴장감을 더한다. 발가락 끝부터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왔다. ‘긴장부터 풀고… 자, 달려! 힘차게 달려보는 거야’ 마음속으로 주문을 걸고 또 걸었다. 그런데 역시나 감독님 마음에 차진 않았나 보다. 첫술에 배부를 수야 있나? 그냥 열심히 하는 수밖에.
“강민휘, 아까도 잘했는데 이번에는 아까보다 조금 더 잘하는 거야. 연기를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여줘.”
그후로 “레디고! 액션” “컷” 소리가 모르긴 해도 족히 10여 차례는 반복됐나 보다. 달리고 또 달리고… 계속해서 달렸다. 물론 힘은 들었지만 싫진 않았다. “레디고, 액션!” 소리의 짜릿함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지 못한다. 마치 사이다를 먹고 난 후, 코끝으로 싸하게 나오는 거품의 느낌 같다고 할까? 온몸에 잠자고 있는 세포가 그 소리에 하나 둘 깨어나는 듯했다. 그러다 떨어진 “오케이” 사인. 몸이 이렇게 가벼울 수가 없다. 망토 하나만 걸쳤으면 나 그날 하늘로 슈~웅 날았을 거다.
박 감독 “힘들어도 ‘열심히 잘해야 해요’만을 외치는 아이”
첫 촬영 신은 주인공 광호의 팬티를 뺏어들고, 무조건 뛰기만 하면 되는 장면. 민휘가 과연 잘해낼 수 있을까? 내심 걱정도 된 게 사실이다. 그런데 민휘 녀석, 보면 볼수록 진국이다. 테이크를 10회 이상 가는데도 싫은 내색은커녕, 힘들다는 투정 한마디를 안 하니. “힘들지 않아?” 물을 때마다 민휘가 하는 말은 언제나 같다. “아니오. 열심히 최선을 다해야 해요. 할 수 있어요.” 3일 내내 뜀박질만 시킨 적도 있다. 그런데 민휘는 몰랐을 거다. 민휘가 연기를 못해서 같은 신을 연거푸 시킨 게 아니란 사실을. 오히려 그 반대였다. 연기가 재미있고 생동감 넘쳐서, 더 좋은 장면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욕심에 배우를 혹사(?)시켰다.
민휘는 특별한 아이다. 의사 표현도 정확한데다 생각도 어른스러워 ‘정말 다운아 맞나?’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다. 첫 촬영이 있던 날,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민휘의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적당히 풀어줄 필요가 있겠다 판단됐다. 낯선 사람이 제각각 다른 소리로 지시를 하면 혹여라도 긴장을 더할까 싶어 강민휘 전담 조감독까지 따로 현장에 두고 진행했다. 민휘의 현장 적응력은 상상한 것 이상이었다. 민휘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자신을 풀어놓을 줄도 알았다. 영화는 많은 사람의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자신이 잘못하면 그 모든 사람이 힘들어한다는 의식이 민휘의 머릿속엔 또렷이 박혀 있는 듯했다. 결국 당초 8신으로 시작된 민휘의 출연분은 12신으로 늘었다. 처음의 우려와 걱정을 말끔히 씻어준 민휘의 연기에 박수를, 민휘의 영화를 향한 열정에 찬사를….
# Production Note
민휘 “어? 감독님, 안 돼요. 담배 피우면 일찍 죽어요”
담배는 나쁜 거다. 나도 고등학생 때 호기심에 한 번 물어본 적은 있지만 피워보니 더욱 이해가 안 됐다. ‘맛도 쓰고, 냄새도 나고… 이런 걸 대체 왜 피우지?’
어느 정도 생각은 했지만 영화를 만든다는 건 참으로 고된 일인가 보다. 박 감독님도 그렇고, 촬영감독님도 그렇고… 대부분의 스태프는 촬영장에서 담배를 물고 사신다. 저러다 큰일 나지 싶을 정도로. ‘담배 피우면 일찍 죽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촬영장에 담배만 보이면 무조건 압수, 수거부터 하고 봤다. 특히 감독님 앞에서는 그 누구도 담배를 피울 수 없다. 촬영장에선 감독님이 최고 연장자. 어른 앞에서 맞담배를 피우는 건 아랫사람으로서 도리가 아니라고들 배우지 않나. 그것만큼은 용납할 수가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우리 스태프, 나 때문에 최소 몇 달은 더 살 거다. 최근엔 스태프에게 담배 못 피우게 한 걸로 금연홍보대사 타이틀까지 얻었다. “촬영 끝났다고 또 다들 줄 담배 피우시는 건 아니겠죠? 민휘한테 걸리면 혼나요~.”
박 감독 “민휘는 배꼽시계라도 달고 사는 걸까?”
영화 촬영을 하다 보면 식사 때를 놓치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는 밥 때를 놓쳐본 기억이 거의 없다. “감독님 배 많이 고픈데… 밥 먹고 하면 안 돼요?” 다른 건 다 참아도 배고픈 것만큼은 못 참는 아이. 민휘의 한마디는 마치 식사 때를 알리는 자명종처럼 정확한 시간에 시끄럽게 울려댄다. 민휘는 배꼽시계라도 달고 사는 걸까? 보면 볼수록 귀엽고 재미난 녀석이다.
하루는 개와 함께 민휘가 집 앞 골목길을 달리는 장면을 찍을 때였다. 그런데 사람도 아닌 동물과 호흡을 맞춘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개가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며 속 썩이길 수차례. 찍고 또 찍고, 찍고 또 찍고…. 그런데 민휘의 행동이 이상하다. 갑자기 개 앞으로 다가가더니 개에게 말을 거는 게 아닌가. “너! 잘해야 돼. 열심히 해야 돼.
너 때문에 자꾸 찍고 또 찍고 하잖아. 네가 잘해야 하는 거야.” 마치 사람에게 얘기하듯 개를 대하는 민휘. 그 모습이 얼마나 예뻤는지 모른다. 그런데 신기한 건 개도 민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보였다는 거다. 민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 전까지 꿈쩍도 않던 개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우리가 지시하는 방향대로 움직여주는 게 아닌가? 촬영이 끝난 후 민휘는 “잘했어, 수고했어”라며 개를 따뜻하게 안아줬다.
‘사랑해, 말순씨’의 촬영 내내 민휘가 있어 행복했다. 민휘의 말대로 민휘가 남들보다 하나 더 가진 스물한번째 염색체는 ‘행복 염색체’가 맞다.
글 / 최은영 기자 사진 / 손경현
2005.11.01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