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
현역 군인 포섭해 군사기밀 유출 시도한 중국인 구속기소...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현관 모습. 정효진 기자 한국 군인을 포섭해 군사기밀을 수집하려 한 중국인이 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겨졌다. 서울중앙지검 공공수사1부(부장검사 이찬규)는 정보기관 요원과 공모해...
정대연 기자 2025.04.25 19:38
정치
현역 군인 포섭해 군사기밀 유출 시도한 중국인 구속기소...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현관 모습. 정효진 기자 한국 군인을 포섭해 군사기밀을 수집하려 한 중국인이 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겨졌다. 서울중앙지검 공공수사1부(부장검사 이찬규)는 정보기관 요원과 공모해...
정대연 기자 2025.04.25 19:38
사회
석방 이틀 만에 또 군시설 찍은 중국인들.... 앞서 지난달 21일 군사시설과 주요 국제공항 인근을 돌아다니며 다량의 사진을 촬영해온 10대 중국인 2명에 이어 중국인들이 또다시 국내 군사시설을 촬영하다 적발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군사기지 및...
김태희 2025.04.24 21:46
사회
국내 군사기지 등 무단촬영한 중국인 잇따라 적발... 붙잡혔다. 앞서 지난달 군사시설과 주요 국제공항 인근을 돌아다니며 다량의 사진을 촬영해온 10대 중국인 2명에 이어 중국인들이 또다시 국내 군사시설을 촬영하다 적발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군사기지...
김태희 기자 2025.04.24 18:20
사회
수원 공군기지 촬영 10대 중국인들 무전기도 소지…도청 여부 조사... 공군기지를 비롯한 주요 군사시설과 국제공항 주변에서 수천여장의 사진을 촬영하다 적발된 10대 중국인들이 범행 당시 무전기도 소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24일 경찰 등에 따르면 군사기지 및...
김태희 기자 2025.04.24 17:56
스포츠종합
린샤오쥔 “나는 중국인, 여기서 살고 소통하기 위해 중국어 열심히 배우는 중”지난 8일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 쇼트트랙 남자 500m 시상식에서 금메달을 따낸 중국 린샤오쥔이 시상대에 오르며 손가락으로 숫자 1을 만들어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2025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에서 중국 남자 선수로는 유일하게 쇼트트랙 금메달을 따낸 린샤오쥔(29)이 이번 대회에서 오성홍기를 내걸어 기뻤다고 밝혔다. 중국으로 귀화한 만큼 중국어를 더 열심히 배워 잘 소통하고 싶다는 의지도 밝혔다. 린샤오쥔은 최근 포트 중국어판과 인터뷰에서 자신이 중국인임을 강조했고,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이유를 밝혔다. 중국 포털 왕이닷컴은 17일 린샤오쥔의 이 매체 인터뷰를 전했다. 린샤오쥔은 하얼빈 동계 아시안게임 쇼트트랙 남자 500m에서 금메달, 남자 1500m에서 은메달, 남자 5000m 계주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린샤오쥔은 중국 남자 선수 중 유일하게 이번 대회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18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한국 대표팀의 에이스로 금메달을 획득했던 린샤오쥔은 2019년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려 대한빙상경기연맹으로부터 선수 자격정지 1년 징계를 받고 2020년 중국으로 귀화했다. 그가 중국 대표팀 일원으로 국제종합대회에 출전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중국 린샤오쥔이 8일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 쇼트트랙 남자 500m 결승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뒤 중국 국기를 들고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가 이번 대회 우승을 차지하자 중국 내에서 소셜미디어 검색 순위 1위에 오르며 큰 관심을 모았다. 그는 이번 인터뷰에서 “중국 팀을 대표해 금메달을 따고, 오성홍기를 시상대에 올려 매우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팬의 큰 응원과 기대를 받는 것에 고마움을 느낀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중국어를 열심히 배우고 있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린샤오쥔은 “나는 완벽주의자”라면서 “중국인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중국어로 미디어와 소통하고 상호 작용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는 “내 중국어 실력이 별로 좋지 않아서 어떤 사람들은 내가 중국인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앞으로 중국에서 살게 될 테니 중국어를 잘 배우기로 결심했다. 그러면 (의심하는 사람들을)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유창한 중국어만 구사한다면 더 이상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8일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 쇼트트랙 남자 500m 시상식에서 금메달을 따낸 중국 린샤오쥔(가운데), 은메달을 획득한 박지원(왼쪽). 동메달을 차지한 장성우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왕이닷컴은 린샤오쥔의 인터뷰 내용을 전하며 “그는 훌륭한 프로 경력을 이어가며 미래를 미리 계획하고 있다”면서 “부상을 잘 극복한다면 내년 밀라노 동계올림픽에서 모든 사람에게 놀라움을 안겨줄 것”이라고 전했다.
양승남 기자 2025.02.17 10:03
연예
[종합] 기승전 차이나…‘멤버 전원 중국인’ 블링원, 케이팝과 씨팝 연결할까블링원 차이나. “케이팝과 씨팝의 가교 역할을 하겠습니다.” 전원 중국인 멤버로 구성된 블링원 차이나가 한국에서의 활동에 강한 포부를 드러냈다. 블링원은 32개국 K팝 프로젝트 ‘클릭더스타’를 통해 탄생한 걸그룹이다. 이번에 데뷔를 하는 블링원 차이나는 이전 걸그룹 블링원 페루에 이어 두 번째 블링원 프로젝트로 탄생했다. 블링원 차이나 멤버들은 두 번? 디지털 싱글 ‘버블검’ 발매를 기념해 12일 서울 중구 월드케이팝센터에서 진행된 쇼케이스에서 중국의 매력을 한국에 전파하겠다고 입맞춰 말했다. 블링원 케시. 이날 블링원 멤버들은 32개국 K팝 프로젝트 ‘클릭더스타’에 참여하게 된 계기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이에 캐시는 “(이번 프로젝트는) 개개인 멤버들에게도 큰 도전이다. 전원 중국 출신이다보니 중국의 음악과 색깔을 보여드리기 위한 기회라고 생각했다”라고 전했다. 바로 옆에 있던 멤버 주니는 “인터넷을 통해 클릭더스타 알게 됐다. 서프라이즈라 생각해 도전했다. 어려서부터 케이팝 좋아했다. 중국인으로서 한국에 와서 한국의 매력을 흡수하는 동시에 중국의 매력을 한국에 전파하고 싶었다”라며 활동 의지를 확고히 했다. 주니가 롤모델로 삼은 케이팝 스타는 블랙핑크와 트와이스였다. 그는 “블랙핑크나 트와이스 선배님처럼 글로벌하게 이름을 알리고 싶다”라면서도 “전원 중국인으로 이뤄진만큼 한국에도 중국 멤버들이 많은 그룹이 있는데 그 분들을 본 받고 싶다. 케이팝에서 흡수한 매력을 보여드리겠다”라고 덧붙였다. 라니는 데뷔 후 팬들과 함께 하고 싶은 것이 뭐냐는 질문에 대해 “일단 팬 분들에게 귀여운 애칭을 정하고 싶다. ‘짜우짜우(발자국)’을 생각하고 있다”라며 “친구들처럼 소통하며 저희의 멋진 에너지 보여드리겠다”라고 강한 포부를 드러냈다. 블링원 클로이. 이날 블링원 멤버들은 한국 활동에서의 목표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다. 클로이는 “클릭더스타 차이나를 통해서 결성된 만큼 중국을 대표하고 있기 ??문에 중국을 홍보하는 홍보대사 느낌이라 생각한다. 데뷔 활동 포함해서 향후 활동 열심히 해서 케이팝과 씨팝을 연결하겠다”라고 전했다. 샌디는 “중국을 대표한다는 점이 의미가 깊다. 마치 케이팝이나 제이팝이 글로벌적으로 사랑을 받은 것처럼 저희의 씨팝이 글로벌적으로 앞장서고 싶다”는 포부를 드러냈다. 이날 이루어진 쇼케이스는 블링원 멤버들의 중국어 발화와 더불어 이를 이해시키기 위한 전문 통역사가 함께했다. 여기에 더해 사회를 맡은 월드케이팝센터 이인수 팀장은 “이번 프로젝트는 케이팝과 씨팝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라며 “한국 것, 중국 것도 될 수 없다. 중국어로 같은 타이틀곡을 녹음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라고 취지를 밝혔다. 월드케이팝센터 제공 이번에 블링원이 발매하는 신곡 ‘버블검’은 고전 클래식 ‘Overture’를 인용해 누구에게나 익숙한 멜로디 테마가 돋보인다. 여기에 에너제닉한 힙한 댄스 비트와 경쾌한 신스 사운드, 그리고 멤버들의 컬러풀한 매력이 더해져 블링원만의 키치한 무드를 완성하고 있다. 한편 ‘버블검’의 음원은 오는 13일 오후 12시에 정식 발매된다. 뮤직비디오 공개도 같은 시각 이루어진다.
서형우 온라인기자 2025.02.12 15:35
축구
“중국인 눈 떠라” “너는 중국인이다”···‘절친’ 이강인 전 소속팀 팬에 인종차별 당한 구보지난 20일 발렌시아전에서 경기 투입을 기다리는 구보 다케후사. 게티이미지코리아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에서 활약하는 일본 국가대표 공격수 구보 다케후사(24·레알 소시에다드)가 경기 중 상대 팬으로부터 인종차별을 당했다. 레알 소시에다드는 21일 구단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성명을 내고 “일부 발렌시아 팬이 우리 선수들에게 인종차별적이고 모욕적인 말을 한 것에 대해 강력히 규탄한다”며 “우리는 이런 것들이 클럽의 위대함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무례하고 남을 모욕하며 증오를 조장하는 사람들이 축구와 스포츠에 설 자리는 없다”고 밝혔다. 이번 일의 발단은 지난 20일 스페인 발렌시아의 메스타야 경기장에서 열린 2024~2025 스페인 라리가 20라운드 발렌시아-레알 소시에다드의 경기 도중 벌어졌다. 발렌시아가 1-0으로 승리한 이날 경기 도중 교체 투입을 준비하던 레알 소시에다드의 구보와 공격수 안데르 바레네체아(23)를 향해 인근 관중석에서 인종차별적이고 모욕적인 말들이 날아들었다. 구보 다케후사. 게티이미지코리아 레알 소시에다드 구단과 스페인 매체 마르카 등이 제시한 당시 영상을 보면 관중석에서 구보를 향해 “치노(중국인) 눈 떠라, 너는 중국인이다”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일본인을 중국인이라고 부르고 아시아인을 비하할 때 쓰는 표현까지 섞으면서 인종차별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말을 한 것이다. 이어 스페인 바스크 지방 산세바스티안 출신인 바레네체아에게는 “ETA(바스크 조국과 자유)의 일원”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이 네게 폭탄을 설치했으면 좋겠다” 등의 말과 함께 욕설을 퍼부었다. ETA는 스페인으로부터 바스크 지역의 분리·독립을 목표로 무장 투쟁을 벌여온 조직으로, 2018년 공식 해산을 선언했다. 이 같은 팬들의 행위가 알려지면서 발렌시아 구단도 SNS를 통해 “이러한 행동은 축구장이든 사회에서든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몇몇 행동이 우리 구단의 가치를 대표하지는 않는다”면서 “우리는 모든 증오의 표현을 비난하며 당국이 요구하는 조처를 할 준비가 돼 있다. 누구라도 확인이 되면 홈 경기장에서의 추방 등 엄격한 처분이 내려질 것”이라고 밝혔다. 경기 직후 관련된 내용이 라리가 사무국에도 보고돼 발렌시아 구단에 대한 징계가 내려질 가능성도 큰 상황이다. 이강인의 전 소속팀이기도 한 발렌시아는 레알 마드리드의 브라질 출신 공격수 비니시우스 주니오르를 향해 인종차별 행위를 한 홈 팬 3명이 지난해 6월 스페인 법원으로부터 징역 8개월에 2년간 축구장 출입 금지 처분을 받는 등 일부 팬들의 몰상식한 행위로 홍역을 치르곤 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윤은용 기자 2025.01.21 16:26
축구
‘이강인 절친’ 구보, 하필 발렌시아서 “중국인, 눈떠” 인종차별 피해···소시에다드 “강력 규탄” 성명레알 소시에다드 구보 다케후사가 20일 발렌시아전에서 무언가를 쳐다보고 있다. Getty Images코리아 일본 축구 에이스 구보 다케후사(24·레알 소시에다드)가 경기 중 관중으로부터 인종차별 발언을 듣는 피해를 봤다. 이강인 절친으로 유명한 구보는 하필 이강인의 친정팀 발렌시아 팬으로부터 모욕적인 발언을 들었다. 레알 소시에다드 구단은 성명을 내고 이를 강하게 비판했다. 레알 소시에다드는 21일 구단 공식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발렌시아 팬들이 우리 선수들에게 행한 인종차별주의와 기타 모욕을 강력히 규탄한다. 우리는 축구와 스포츠에서 무례하고, 모욕하고, 증오를 조장하는 사람들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전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태도를 계속 비난할 것이며 어제와 같은 상황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모두 노력하자”고 발표했다. 발렌시아 구단도 “레알 소시에다드 선수들이 워밍업을 했을 때 받은 모욕에 대해 공개적으로 강한 비난을 표명한다”고 성명을 발표하고 “모든 증오의 표현에 대해 당국에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다. 범인이 특정된 경우, 클럽은 상응하는 조치를 강구하고 엄격한 징계처분을 할 예정”이라고 강조했다. 문제의 사건은 20일 열린 스페인 라리가 20라운드 발렌시아와 레알 소시에다드전이 열린 에스타디오 메스타야에서 나왔다. 레알 소시에다드 구보가 20일 발렌시아전에서 동료에게 엄지를 들어보이고 있다. Getty Images코리아 발렌시아가 전반을 1-0으로 마친 상황에서 발렌시아 일부 팬이 후반전 투입을 위해 몸을 풀던 소시에다드 선수들에게 인종차별 발언을 했다. 특히, 이강인의 절친으로 알려진 일본 출신 공격수 구보를 향해 모욕적인 말을 건넸다. ‘마르카’ 등 스페인 언론들에 따르면 발렌시아 한 팬이 구보를 향해 “중국인, 눈을 떠라”고 말했다. 일본인인 구보를 중국인이라고 한 점, 그리고 동양인 비하 의심을 받을 수 있는 “눈을 떠라”는 말한 부분 등은 명백한 인종차별 발언이다. 경기 후 이를 인지한 소시에다드 구단이 인종차별 피해를 라리가 사무국에 알리고 성명을 발표했다. 레알 소시에다드 구보(가운데)가 20일 발렌시아전에서 양팀 선수들이 신경전을 벌일때 중재하고 있다. Getty Images코리아 올 시즌 극심한 부진으로 경기 전까지 리그 최하위였던 발렌시아는 이날 경기를 1-0으로 이겨 시즌 3승(7무 10패)째를 거두며 승점 16을 쌓았다. 바야돌리드(4승 3무 13패 승점 15)를 제치고 탈꼴찌에 성공했지만 팬의 인종차별 발언이 포착되면서 추후 징계를 받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한편, 구보는 이날 경기에 후반 17분 교체 투입됐다. 하비 로페스를 대신해 그라운드에 나섰으나 공격포인트를 올리지는 못했다. 소시에다드는 0-1로 지면서 시즌 성적 8승 4무 8패 승점 28에 제자리걸음하며 7위에 머물렀다.
양승남 기자 2025.01.21 08:21
문화/과학 이기환의 Hi-story
[이기환의 Hi-story](53)금제 띠고리의 ‘낙랑인’, 중국인일까 한국인일까국립중앙박물관 소장자료(41만3000여점) 가운데 유독 낙랑 관련 유물과 사진이 눈에 밟힙니다. 일제강점기에 조사하고 촬영한 1만7000여점의 유물과 4053점에 이르는 유리건판 사진이 그것입니다. 그동안 국립중앙박물관이 관련 자료를 재검토한 뒤 특별전(‘낙랑’·2001)도 열고, 발굴보고서(<평양 정백리 8·13호분>·2002), <평양 석암리 9호분>·2018)도 펴냈는데요. 그 과정에서 흥미로운 명문 자료 하나를 읽어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알코올로 닦자 2000년 전 글씨가 그것이 평양 석암리 9호분 출토 노기(弩機·원거리용 화살 발사 장치)에 적힌 묵서명(‘조자릉 용·趙子陵 用’)이었습니다. 명문 발견은 극적이었습니다. 박물관 보존과학부가 2018년 <평양 석암리 9호분> 보고서를 펴낸 뒤 유물을 정리할 때인데요. 문제의 쇠뇌(쇠로 된 발사 장치가 달린 활)를 알코올로 닦는 과정에서 희미한 글씨를 본 겁니다. 예서(중국 한나라 시대의 서체)로 쓰인 ‘조자릉 용’이었습니다. 손환일 한국서화연구소장은 “‘조자릉 용’ 명문은 한나라 시대 생활 서체로 보인다”고 설명했습니다. 박물관 측은 “<후한서> 등 중국 사서에 ‘자릉’이라는 자를 쓰는 인물들이 여럿 보인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조자릉’은 한반도로 넘어온 중국 망명자이거나, 한나라가 낙랑군에 파견한 관리로 파악했습니다. 자연히 명문 노기의 소유자(혹은 사용자)는 ‘조자릉’일 가능성이 크겠네요. 박물관 측은 ‘석암리 9호분의 주인공=조자릉’이라는 결론은 내리지 않았습니다.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조자릉’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걸립니다. 기원후 1~2세기에 ‘조(趙)’와 같은 성을 썼다면 아무래도 중국인일 가능성이 크다는 선입관 때문입니다. 그럼 ‘조자릉 용’ 명문은 평양이 중국(한나라)이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낙랑군의 치소’임을 입증하는 예일까요. ‘왕(王)x’는 중국 ‘왕서방’ 이름? 시계를 1909년 9월로 돌려봅니다. 당시 통감부 고건축 담당 촉탁이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1868~1935)가 대동강 변의 고분을 발굴합니다. 발굴결과 고분의 무덤방에서 2점의 청동거울과 오수전 등이 쏟아져 나왔습니다(석암리 벽돌분). 두 달 뒤(11월) 이마니시 류(今西龍·1875~1932) 등이 이끄는 발굴단도 똑같은 형식의 무덤을 조사했습니다(석암리 을분). 이곳에서는 ‘왕(王)x’명 칠기 부품과 청동거울 등이 확인됐습니다. 두 발굴단은 고분 2곳 모두를 ‘고구려 고분’으로 판단했습니다. 2년 뒤(1911) 이마니시 류가 입장을 바꿉니다. 석암리 을분에서 나온 칠기 부품의 ‘왕(王)x’ 명문을 중국인인 ‘낙랑 왕씨’와 관련시킨 겁니다. ‘낙랑 왕씨’는 <후한서> ‘왕경’전에 등장하는 ‘왕경’ 가문을 가리키는데요. <후한서>는 “왕경의 8대 조상인 왕중이 재북왕 흥거의 반란(기원전 177년)을 피해 동쪽 바다를 건너 낙랑 산중으로 피했다”고 했습니다. 이마니시는 <후한서>의 낙랑인 왕경이 바로 석암리 을분에 등장하는 ‘왕(王)x’라고 본 겁니다. 1916년 평양 석암리 9호분에서 출토된 순금제 띠고리. 보고서에는 7마리 용을 표현했다고 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큰 용 2마리, 작은 용 6마리 등 총 8마리로 보인다. 오른쪽 부분에서 얼굴을 밑으로 굽힌 듯한 큰 용 한마리가 표현돼 있음을 알 수 있다. / 이한상 대전대 교수 설명 1년 뒤인 1913년 낙랑토성에서는 ‘낙랑예관(樂浪禮官)’과 ‘낙랑태수장(樂浪太守長)’을 새긴 명문 기와와 봉니(문서류를 밀봉할 때 쓴 점토)가 잇따라 발견됩니다. 이어 평남 용강군 어을동에서 토성과 함께 ‘점제현 신사비’가 발견됩니다. 명문 내용 중 ‘점제’가 낙랑군에 속한 25개 현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 부각됐습니다. 눈·코·입에 항문까지 막았던 장례용품 일본학계는 ‘낙랑’이라는 단어에 ‘혹’했습니다. 낙랑이라면 한나라가 기원전 108년 고조선을 멸하고 세운 한사군 중 하나가 아닌가. 313년(미천왕 14)까지 무려 421년이나 한반도 서북쪽을 지배해왔던…. 뭐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런 탓이겠죠. 조선총독부는 1916년부터 5개년 계획으로 벌인 고적조사 사업에 ‘평양 일대의 낙랑고분 조사’를 0순위로 꼽았습니다. “…단군의 건국설화는 근거를 찾을 수 없다…. 후세에 견강부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반도 역사상 비교적 연대가 명백한 것은 한치군의 시기가 처음이다…. 그래서 한치군 유적부터….”(‘고적조사 개요’) 이중 석암리 9호분은 1916년 1차로 조사한 10기 중 1기였답니다. 이 조사가 시쳇말로 ‘대박발굴’이었습니다. 무덤 주인공이 묻힌 나무관 안에서 각종 장신구가 실제 착용한 그 모습, 그 위치대로 노출됐습니다. 칼 손잡이와 칼집 일부를 옥으로 장식한 ‘철제장검(일명 옥구검)’과 금장식철제모자환두소도(금장식 고리 자루가 달린 작은 어미칼 및 자식칼 세트)가 확인됐고요. 주인공의 가슴과 눈, 코, 입, 귀, 항문, 손 등에 삽입했거나 놓았던 장례용 옥(玉) 세트가 나왔습니다. 무엇보다 화려한 순금제 띠고리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덧널(나무곽)의 안쪽에서도 유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향을 피우는 박산로, 음식 조리용 취사기와 식기, 술을 담은 그릇 등 각종 청동 및 금속 용기가 8점 나왔고요. 옻칠한 소반(작은 밥상) 등 다양한 칠기 29점이 출토됐습니다. 출토유물은 총 100건 365점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군계일학은 순금제 띠고리였다 그중 군계일학은 ‘순금제 띠고리’(국보)였습니다. 얇은 금판을 두드려 표면에 용 문양을 표현한 후, 푸른색의 터키석과 붉은색의 안료로 장식해 만든 허리띠 장신구였습니다. 금의 순도는 순금(24K)에 가까운 22.8~23.8K였는데요. 조선총독부가 1916년 5개년 계획으로 시작한 조선고적사업의 1차 대상은 평양 일대의 낙랑고분 발굴이었다. 조선총독부는 “단군 건국설화는 믿을 수 없어서 대상에서 빼고 한반도 사상 연대가 확실한 역사는 한치군(한사군) 시대가 처음”이라면서 “따라서 이 시기를 1차연도 조사에 넣는다”고 못 박았다. / 국립중앙박물관 (2018) 보고서 금판 한장을 말발굽 형태로 제작했습니다. 테두리 부분을 높이 5㎜ 정도로 접어 입체감 있게 만들었죠. 바탕 금판의 두께는 0.3~0.7㎜, 표면을 장식한 금선의 두께는 0.2~1.1㎜입니다. 각각의 용은 금선과 금알갱이로 눈, 코, 뿔 그리고 발가락 등을 표현했습니다. 중심 뼈대 부분은 금선과 굵은 금알갱이를 띠처럼 이어붙여 표현했습니다. 금알갱이의 지름은 0.3~1.6㎜에 불과합니다. 띠고리에 표현된 용은 몇마리일까요. <평양 석암리 9호분> 보고서는 “얇은 금판을 작은 정으로 두들겨 7마리의 용을 표현했다”고 설명했는데요. 금공예 연구자인 이한상 대전대 교수가 이의를 제기하네요. “밑으로 급격하게 튼 얼굴이 보이지 않아 그렇지 오른쪽 부분에서 큰 용 한마리가 표현돼 있다”는 겁니다. 아닌 게 아니라 띠고리의 오른쪽 부분에 금알갱이로 뼈대를 표현한 큰 용의 몸통과 발톱이 보입니다. 숨어 있던 한마리가 나타났으니 모두 8마리가 되는 거네요. 또한 띠고리 표면에는 터키석을 끼운 물방울 모양의 알집 40개가 남아 있습니다. 현재 7개만 남아 있습니다. 또 하나의 핵심 유물은 ‘거섭(居攝) 3년명’ 옻칠 쟁반입니다. ‘거섭’은 전한의 마지막 군주인 유영(5~25·재위 6~8)의 연호(6~8년 사용)입니다. 석암리 9호분의 연대가 기원후 8년 무렵이라는 사실을 웅변해줍니다. 평양 석암리 9호분은 1916년 조선총독부가 1차로 조사한 고분 10기 중 하나였다. 석암리 9호분에서는 모두 100건 365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온 것으로 파악됐다.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기부금까지 받아 낙랑고분에 집착 석암리 9호분의 발굴 성과가 전해지자 어떻게 됐을까요. 일제는 석암리 9호분 발굴과 1913년 조사된 낙랑토성까지의 발굴결과를 포함해 ‘평양 대동강 남안=낙랑군의 치소’로 비정했습니다. 그러자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한 일대에 ‘낙랑 광풍(狂風)’이 불어닥쳤습니다. 가뜩이나 한국 역사의 타율성과 정체성을 강조하려 했던 일제는 ‘옳다구나’ 싶었겠죠. 그때부터 ‘중국(한나라)의 지배를 받은 낙랑의 옛땅’을 파헤치는 데 혈안이 됩니다. 일제가 패망 직전인 1944년까지 ‘발굴조사’의 명목으로 파헤친 낙랑고분은 무려 93기에 이릅니다. 고비도 있었습니다. 1923년 간토(關東) 대지진의 여파에 따른 예산 절감 차원에서 조선총독부의 조직이 줄어들게 된 겁니다. 총독부를 대신한 건 바로 ‘조선고적연구회’라는 외곽 단체입니다. 연구회는 1931년 일본의 미쓰비시(三菱) 합자회사 사장인 이와사키 고야타(岩崎小彌太·1879~1945)의 찬조금(6000원)으로 시작했는데요. 해마다 민간기업과 도쿄(東京)제실박물관 등의 거액 자금 지원을 받아가면서까지 낙랑고분 등의 조사에 집착하게 됩니다. 한번 따져봐야겠죠. 낙랑 발굴을 주도한 세키노 다다시는 “조선은 예부터 중국 문화의 은혜를 입었고 그 침략을 받아 항상 복속해왔다”면서 “자연히 사대주의와 퇴영 고식주의(낡은 형식에 집착하는 낡아빠진 습성 등)에 빠져 국민의 원기도 없어졌다”(<조선의 건축과 예술>·1941)고 했습니다. 정체성과 타율성을 강조한 겁니다. ‘너희는 영원히 남의 나라 속국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과연 낙랑고분은 100% 중국 한나라의 문화를 대변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석암리 9호분의 덧널(나무곽)에서 출토된 철제장검(긴 칼) / 국립중앙박물관 (2018) 보고서 낙랑의 치소가 존재했다는 평양 대동강 남안의 고분들을 살펴볼까요. 한사군 설치 직후(기원전 1세기 무렵) 평양 일대의 무덤형식은 단순한 덧널(나무곽)무덤이었는데요. 기원전후에서 1세기 무렵부터 새로운 무덤이 등장합니다. 하나의 무덤 구덩이 속에 사각형 형태의 덧널(나무곽)을 만든 뒤 그 안에 다시 2개 이상의 나무관을 두는 다소 복잡한 무덤이었죠. 그래서 ‘귀틀묘’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가운데서도 ‘순금제 허리띠 장식’ 같은 국보급 유물이 쏟아진 ‘석암리 9호분’은 특히 심상치 않습니다. 기원후 8년 무렵에 조성한 이 고분 역시 귀틀묘인데요. 다른 귀틀묘와 견줘도 구조가 특이합니다. 무덤 구덩이 바닥에 돌을 깐 것은 물론이고요. 무덤 구덩이와 덧널 사이에도 냇돌을 채워넣었습니다. 고인돌, 즉 적석총이 전통적인 무덤형식인 고조선의 향기를 짙게 풍기고 있습니다. 또 보통 귀틀묘는 하나의 덧널 안에 나무관을 2개 이상 넣는 합장묘의 형태를 취하는데요. 석암리 9호분의 주인공은 한명뿐입니다. 물씬 풍기는 고조선의 향기 무덤 주인공의 신분이 지극히 높은 분이라는 얘기죠. 일본학자 이마니시 류는 석암리 을분에서 출토된 ‘왕(王)x’ 명문을 두고 뭐라 했습니까. <후한서> ‘왕경’전의 기록대로 ‘낙랑 왕씨’, 즉 한나라에서 망명한 인물(왕중)의 8대손(왕경)으로 보았죠. 그 말대로 설령 ‘왕x’이 ‘중국인=왕경’이라 칩시다. 그래도 8대, 즉 200년 이상 한반도에서 대를 이으며 살아온 인물(귀화인)을 중국인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또 같은 <후한서>는 “토인(土人)인 왕조가 낙랑태수를 죽이고 6년간(기원후 25~30) 낙랑군을 장악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토인(土人)’은 고조선계 재지(在地)세력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주인공의 가슴, 눈, 코, 입, 귀, 항문, 손에 삽입했거나 놓았던 장례용 옥(玉) 세트가 나왔다. / 국립중앙박물관 (2018) 보고서 그렇다면 한때 낙랑태수를 자처한 ‘왕조’는 토착세력을 대표하는 고조선계 인물일 수 있습니다. 물론 ‘왕경’처럼 먼 옛날 한반도로 넘어와 완전히 고조선화한 인물일 수도 있겠죠. 어떤 경우든 ‘중국인’으로 단정해버리고 넘길 일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최근 석암리 9호분 유물(화살 발사 장치 부품)의 보존처리 과정에서 확인한 ‘조자릉’ 명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조(趙)씨=중국인’으로 해석하면 고조선의 체취가 나는 고분의 특성과 왕경 및 왕조 관련 역사 기록을 무시 혹은 오독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낙랑인이 중국인일까 국보인 ‘순금제 허리띠고리’는 어떨까요. 중국제를 굳이 대한민국 국보로 대접하는 것이 옳으냐는 의문이 생길 법하죠. 이 국보 허리띠와 비슷한 출토품이 평양의 낙랑고분 7기에서 나왔습니다. 2000년 전 이 땅에 터전을 잡고 살았던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받고 유행한 명품 허리띠였다는 겁니다. 그것이 중국제품이든, 고조선제품이든 국보의 대접을 받을 만합니다. 어떻습니까. 앞서 지적했듯이 덧널무덤에서 기원전후 귀틀무덤으로 바뀌는 와중에도 보이는 세형동검과 돌무덤의 전통, 정교하고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띠고리 문화는 무엇을 말해줄까요. ‘낙랑인=중국인’으로 도식화할 수 없는 증거가 됩니다. 그럼 낙랑과 낙랑문화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낙랑연구자인 오영찬 이화여대 교수는 “낙랑문화는 중국과 고조선 세력의 영향력이 교차하고 융합해 이룬 독특한 문화”라고 해석합니다. 이른바 ‘낙랑인’이라는 새로운 ‘종족집단(ethnic group)’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이제 ‘낙랑인’은 한국사의 당당한 주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겠네요.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2022.10.07 14:00
사회 언더그라운드 넷
[언더그라운드 넷]K똥, 중국인 학자를 기절시키다?“이젠 똥으로도 전 세계가 뒤집어짐.” 12월 12일 인터넷커뮤니티에 올라온 ‘갈 데까지 가버린 국뽕튜브 근황…jpg’라는 사진에 달린 코멘트다. 사진은 한 유튜브채널 영상 섬네일 이미지다. 흰 가운을 입은 학자가 뭔가를 들고 살펴보고 있는 사진엔 이런 캡션이 달려 있다. “50년 동안 중국인 똥만 연구하던 중국 과학자가 태어나 처음으로 한국인 똥을 분석해보더니…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기절한 이유/ ‘왜 한국인 똥에는 oo가 없지?’”(실제 발언) 유튜브 궁금하긴 하다. 저 oo에 들어갈 말은 무엇일까. 회충, 요충 같은 것이 답이라면 ‘가’라는 주격조사가 붙을 수 없다. 기생충이라면 세글자이고. 실제 영상을 찾아봤다. 48만여 구독자를 보유한 퍼플튜브라는 유튜브 채널이 12월 5일 게시한 영상이다. 영상을 재생하면 “우리나라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제국주의 일본에 짓밟혀 이 땅의 모든 자원을 빼앗겼고, 1950년부터 약 3년간 북한 김일성의 불법남침으로…”와 같은 근현대사에 대한 장광설로 시작한다. 반면 중국은 경제적으로 잘살게 됐지만 전 세계적으로 중국을 존경하고 닮고 싶다는 나라는 없는데, 그건 국민성 때문이라는 것이 영상의 주장이다. 영상은 그 근거로 아직도 아이들이 거리나 지하철에서 똥을 누며, 중국인 관광객을 받는 나라에서도 거리에서 용변 금지 등을 내거는 등 중국사람들의 불결한 위생 상태와 관념을 들고 있다. 물론 화장실문화가 정착된 것은 서구에서도 근대에 이르러서이며…. 잠깐, 애초 스크린숏에서 언급한 ‘50년 동안 중국인 똥만 연구하다 한국인 똥을 보고 기절한 중국학자’ 이야기가 나와야 할 타이밍인데? 총 12분 46초 분량의 영상이다. 후반부는 그에 비해 한국의 위생 상황은 기생충박멸협회의 활약으로 1970년대 80%에 달하던 기생충 감염률이 1997년에 이르면 2%에 불과할 정도로 줄어들었고, 또 한국의 공중보건은 세계 최고수준이며 이를 전수하기 위해 세계화장실협회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한국에 입국한 외국인은 인천공항 화장실에서부터 ‘이곳이 한국이구나’라고 느끼게 될 것이며,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나라를 넘어 그것을 관광적 요소로 특화한 것이 대한민국이라는 주장으로 영상은 마무리된다. 결국 ‘왜 한국인 똥에는 oo가 없지?’라며 기절한 중국인 학자는 온데간데없다. 실제 저런 학자가 있기는 할까. 영상에서 언급한 세계화장실협회 등의 단서로 검색해봐도 중국 참가자를 포함한 국제콘퍼런스를 열었다는 소식 이외에 딱히 잡히는 결과가 없다. 영상 제작자가 섬네일 사진에서 ‘실제로 한 말’이라고 한 걸 보면 뭔가 있을 수도 있는데. 볼일을 보고 뒤를 덜 닦은 것처럼 찝찝한 마음만 남는다(채널에 공개된 e메일로 문의해도 12월 16일 현재 답이 돌아오진 않고 있다. 생각해보면 애초 영상의 더빙도 실제 목소리가 아닌 TTS 합성 음성이다). 비판을 의식한 듯 이 채널 운영자는 “국뽕을 싫어하는 분들의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이 영상이 그저 ‘똥까지 빠는 영상’이라고 단순하게 해석하는 분들도 있어 안타깝다”라며 “똥은 내용전개를 위한 매개체에 불과하다. 결국엔 한국이 국민건강을 증진하기 위해 어떻게 기생충을 박멸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라고 고정 댓글로 주장했다. 댓글 중에도 “그런데 그 한국인 똥을 보고 기절한 중국인 학자는 어디로 갔나”라는 질문이 나오지만 이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물론 과거보다 높아진 국격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수는 있다. 하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과 문화를 깎아내린다고 국격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인정해야 비로소 국격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 결국 누군가에게는 잘 팔리니 만든 영상이겠지만.
정용인 기자 2021.12.17 13:22
사회 골목 내시경
[골목 내시경]대림동 골목-조선족·중국인은 왜 대림동에 몰려들까서울 지하철 2호선과 7호선이 만나는 대림역, 12번 출구를 나서면 보고 들리는 것이 달라진다. 휴대폰으로 목청 높여 통화하는 젊은이는 중국말을 쓴다. 간판엔 중국식 간자체가 보이고, 용어도 중국식이다. 좌판에서 파는 간식은 해바라기씨와 호박씨이고, 빵집에선 중국식 호떡과 꽃빵, 튀긴 꽈배기를 판다.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일대는 어느새 작은 중국이 됐고, 우리 이웃이 된 중국인들이 골목골목 살고 있다. 대림동 일대는 작은 중국이 됐다. 대림동에 조선족 동포와 중국인들이 몰려든 것은 대략 20여 년 전부터다. 가리봉동 일대 쪽방촌에 살던 이들이 그 동네가 개발되면서 시나브로 대림동으로 이동했다. 처음 800명 정도이던 중국 출신 거주자들은 이제 대림동에만 2만여 명이 산다고 한다. 이 지역을 선호하는 이유는 첫째가 일자리고, 둘째는 주거비, 셋째로 편리한 교통을 꼽는다. 대림동은 아직도 2~3층의 오래된 주택이 많고 대부분은 집 전체의 방을 나누어 세를 놓고 있다. 처음에는 반지하방과 옥탑으로 이사했다가 점점 조선족과 중국인이 집과 동네 전체에 스며들었다. 그들을 위해 가게가 열리고, 이제는 모두 중국식 업종이 점령하게 됐다. 덕분에 이 동네 부동산 시장은 호황이란다. 월세도 점점 올라 싼 방값은 옛말이 됐다. 그럼에도 좋은 조건의 빈방이나 가게 자리는 나오는 즉시 나간단다. 초등학교는 교실마다 학생들로 가득 찬다. 골목길엔 갓난아이를 안은 부부의 모습도 흔히 볼 수 있고, 손잡고 걷는 신혼부부도 자주 보인다. 이 일대의 골목은 살아 있다. 대림동 골목 환전소는 다양한 민원사무도 함께 처리하고 있다. 대림역을 나와 골목에 접어들기 전 우선 보게 되는 것은 벽을 가득 메운 구인 광고판이다. 공장부터 농장, 주유소와 도축공장. 20대부터 60대 이후의 일자리까지 일손이 필요한 모든 직종의 직업들이 벽보로 붙어 있다. 중국 문화대혁명 당시의 대자보처럼 ‘인민이여, 와서 일하라’는 외침이 벽마다 빼곡하다. 게시물을 살피던 사람에게 물어보니 코로나19 사태 이후 해외에서 오는 인력이 줄면서 일손은 더 부족해졌단다. 서울보다는 지방에서 사람 구하는 내용이 많았고, 임금과 근로조건 숙식 제공 여부 등이 상세히 적혀 있다. 비계·철근·거푸집·미장·도배 등 전문직 만남의 광장이라는 대림역 12번 출구에서 대림시장으로 향하는 골목길 어귀에는 환전소들이 여러 곳 있다. 단순히 환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으로 돈을 보내거나 비자서류를 대행해주고 각종 민원사항도 처리하는 고충 처리 상담소 역할을 하는 곳도 있다. 행정사 사무소와 여행사도 눈에 띄는데 적어놓은 업무 내용에 영주권과 비자갱신은 물론이고 친자확인 광고도 붙어 있다. 나이든 직원은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 어디나 속고 속이고 얽힌 애정사가 골칫거리 아니냐”며 웃었다. 중국식 간자체 간판이 대부분이다. 직업교육소도 눈에 띄는데 요새 인기 있는 직종은 여자는 간병인, 남자는 건설현장 전문 기능인이라고 했다. 건설현장에서 일할 수 있는 자격증이 있으면 취업비자나 영주권을 얻는 데도 유리하단다. 이제는 단순 노동직보다 비계(飛階)·철근·거푸집·미장·온수·보일러·도배 등 전문직이 몸값도 비싸고 서로 모셔가려는 추세라고 한다. 서비스 업종은 중국에서 온 인력이 대세가 된 지 오래다. 대림시장 주변 골목에도 건설현장에서 일하기 위해 안전화며 작업복을 사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발에 딱 맞는 안전화를 고르려고 하자 동료 세 명이 나서서 그를 말렸다. 노련해 보이는 50대 노동자는 “신발은 한 치수 큰 걸 신어야 한다. 현장에서 조금 지나면 발이 부어서 일 못 한다”며 신발을 골라주고 있었다. 그에게 분위기를 묻자 “요즘 남자들은 건설현장 일이 많다. 기술 있으면 돈도 더 벌어 좋고, 아는 사람들끼리 팀을 만들어 현장에 같이 들어가면 의지도 되고 작업도 수월하다”고 설명했다. 연고가 없으면 인근 남구로역 5번 출구 새벽 인력시장으로 가서 일당 일을 구할 수도 있고, 자신처럼 10여 년 이상 현장을 떠돌면 함께 일하자는 연락이 여러 군데서 온다고 했다. 건설현장에 “요즘 조선족하고 중국 사람 없이는 일 못 한다”고 장담했다. 대림시장은 전통시장임에도 보기 드물게 붐비고 번창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시장골목을 가득 메우고, 물건을 사고파는 소리가 활기찼다. 시장 초입에 채소를 파는 오래된 좌판과 드문드문 퍼진 마른버짐처럼 내국인 가게가 있을 뿐, 상점 대부분은 한족과 조선족이 지배한 지 오래다. 대림동은 서울에서 가장 붐비는 골목 중 하나이다. 파는 물건들도 국내시장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것이다. 돼지 꼬리부터 삶은 돼지코, 오리 튀김과 개고기 수육. 옌볜식 순대와 쓰촨식 채소절임. 어느 것 하나 흔한 물건들이 아니다. 주인과 손님은 태연히 중국말로 대화하고 있다. 채소가게에서 파는 오이는 짧고 뚱뚱한 모양이다. 값은 하나에 1500원을 달라고 한다. 국산 오이의 두 배 이상이나 비싼 값이다. 주인은 “이게 중국 오이인데 껍질이 얇고 맛있다. 그냥 먹어도 좋고, 채로 무쳐먹어도 맛있다”고 강조한다. 한 입 베어 먹어보니 우리 입맛엔 우리 오이가 맛있다. 그 옆에는 색깔도 옅고 모양도 제멋대로인 중국 참외를 함께 팔고 있다. 돈벌이 좋고 살기도 좋은 ‘작은 중국’ 가게 주인에게 언제 왔느냐고 묻자 그는 “나는 국적자다. 온 지 20년 됐고, 일가친척이 다 와서 이제는 여기가 고향이다”라고 했다. 국적자란 귀화해서 대한민국 국적을 얻은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란다. 대림동 주민 중 대한민국 국적자의 절반 정도가 그처럼 귀화한 사람이라고 한다. 가게 주인은 자신이 떠나온 중국 지린성 시골마을보다 여기가 돈 벌기도 좋고, 살기도 불편이 없으니 아예 옮겨왔다고 했다. 그는 아파트도 한 채 마련했고, 장사는 나날이 잘돼서 옮겨오길 잘했다고 이야기한다. 식품점에서 파는 식자재 대부분은 중국식이다. 시장 한편 길 위에 크게 사람 얼굴을 그려놓은 간판에 눈길이 갔다. 좌판 의자에 앉은 노인에게 묻자 “얼굴에 난 점과 주근깨 사마귀를 감쪽같이 빼준다”고 설명한다. 지금 뺄 수 있느냐고 하니 노인도 좌판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실력이 좋다는 부추김에 간판을 한 번 더 들여다보았다. 얼굴 곳곳의 혈자리와 그곳의 점이 어쩌면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단다. 시장골목에서 벌어지는 모습과 오가는 이들의 정경은 이곳이 지린성이나 헤이룽장성 혹은 옌볜의 장터거리라 해도 믿을 만했다. 시장통으로 이어진 샛골목엔 다세대 주택들이 어깨를 이어 빽빽이 들어서 있다. 골목에서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다가 소리를 지르며 시장통으로 뛰어간다. 아이들의 엄마는 살살 뛰라고 고함치다가 옆 가게 주인과 극성스러운 아이들 흉을 보며 웃는다. 흔히 1970년대 서울의 골목에서 볼 수 있는 모습들이 대림동에는 아직도 살아 있다. 갓난아이를 안고 3대가 함께 시장을 걷던 가족 중 할아버지가 저녁엔 냉면을 먹자고 했다. 국수가게 앞에서 그들이 고른 것은 옥수숫가루로 만든 노란 냉면국수. 옌볜에서 왔다는 국수공장 사장은 서너 명의 직원들과 함께 부지런히 면을 뽑아내고 있다. 면 다발을 담던 주인이 “면은 옥수수 냉면이 진짜 시원하고 맛있다. 한국 냉면은 별맛이 없다”고 설명한다. 만두와 칼국수 가락을 파는 식당은 주방장부터 종업원 모두가 일가족이라고 했다. 식당 테이블에서 만두피와 속을 열심히 빚는데 한눈에도 그 양이 만만치 않아 보인다. “많아 보여도 다 팔린다. 일일이 손으로 빚어서 맛있다”며 권해준 음식은 수제 물만두였다. 대부분의 가게는 만둣가게처럼 가족 단위로 일하고 있었다. 우리 주변에서 보기 힘들어진 가업으로 장사하는 형태가 대림동에선 흔한 모습이다. 시장사람 대부분은 10년 이상 이곳에 뿌리를 내려 활착에 성공한 사람들이다. 다른 이들보다 수완도 좋고 적응도 빨랐던 영민한 사람들이다. 시장골목을 벗어나면 대림역 12번 출구에서 곧장 난 골목길과 만나게 되는데, 이 거리가 대림동의 중심인 셈이다. 곳곳에 중국식 카페인 커피호프집이 눈에 띄고 유난히 많은 노래방을 볼 수 있다. 마작을 치는 마작방도 대림동이나 구로구 일대에서나 볼 수 있는 오락실이다. 거리의 과일상도 용과와 망고, 더불어 두리안을 쌓아두고 팔고 있다. 서울의 골목길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과일들이다. 젊은이들은 무엇인가에 화가 나 있고, 신혼부부는 깨가 쏟아지며 아이를 앞세운 부인은 흐뭇한 표정이다. 한낮 이렇게 골목길을 꽉 메운 인파를 보기는 근래 들어 대림동이 처음이다. 만둣가게·커피호프집·마작방 즐비 골목에 사람이 많다 보니 어딘가 수심 깊은 모습도 보인다. 한가한 빵집 주인은 북적거리는 옆 가게를 부럽게 바라본다. 그 앞쪽 좌판에 담뱃잎 가루를 놓고 가치담배를 말아서 파는 중년의 상인이나 그에게 담배 한 개비를 받아 든 초로의 사내도 대림동의 활기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마트 안에선 소주 한 병을 들었다 놓았다 반복하며 아쉽고 서러운 표정을 짓는 깡마른 남자도 볼 수 있었다. 어떤 사연인지 그는 불편한 한쪽 다리를 끌고 주류 판매대 근처를 유령처럼 맴돌았다. 빠르게 중국말로 응답하는 계산원은 피곤하고 지친 표정이다. 골목에서 파는 튀긴 메뚜기처럼 꼼짝달싹 못 하고 자본 앞에서 무력한 운명을 경험하는 이들도 대림동 골목길을 걷는다. 구로동 일대와 대림동 지역에 대한 인식은 그다지 좋지 못하다. 영화 <아저씨>의 통나무 장수와 마약공장이며 개미굴이 있는 곳으로, <범죄도시>에서 장첸이 범죄조직으로 공포를 휘두르는 동네로 대중들을 만났다. 대낮에도 칼부림이 나고 해가 지면 으레 패싸움이 흔한 지역으로 깊은 오해를 샀다. 하지만 대림동 골목은 평화롭다. 활기차고 어린아이들이 예쁘게 자라며 사람들은 바쁘게 살아간다. 말투와 국적을 제거하면 모두 우리의 모습이다. 바람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발이 있으니 인간의 발걸음은 어디든 가서 닿을 수 있다. 시류를 타고 사람도 뿌리를 옮겨 정들면 고향이고, 마음 주면 사랑인 것이다. 20년 전 침체된 주택가로 기울어가는 달의 운명을 따르던 대림동은 작은 중국으로 다시 활기를 얻었다. 우리 옆에서 우리와 함께 일하며, 희로애락을 나누는 이웃 마을이다. 얄궂은 바이러스 하나에 세상의 국경이 거의 닫혀버린 오늘 대림동에서 중국 본토 맛의 훠궈 한 그릇을 해치우고, 돌아오는 길에 동북식 순대 한 줄을 사 오는 것도 즐거운 행보이다. 대림동에 가면 살아 있는 골목길을 만날 수 있다.
김천 자유기고가 2020.05.22 14:40
국제
중국인들, 축구 이어 영화서도 공한증‘공한증(恐韓症).’ 중국인이 한국 축구에 대해 가지고 있는 두려움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단어다. 1978년 12월 방콕아시안게임에서 중국 축구대표팀이 한국에 0대1로 패한 후 32년간 중국은 A매치에서 한국을 이기지 못했다. 치우미(球迷·축구팬)인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공개적으로 “중국의 월드컵 진출, 월드컵 개최, 월드컵 우승이 축구에 대한 세 가지 소망”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공한증이라는 단어에는 14억 인구를 가진 세계 2위 경제대국 중국이 못한 월드컵 4강 진출을 해낸 한국에 질투와 경외감, 좌절감이 묻어 있다. 은 중국 본토에서는 원제목인 으로 부르지만, 대만에서는 로, 홍콩에서는 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홍콩의 개봉 포스터. / AM 한국 영화 <기생충>이 비영어권 영화로는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최고 영예인 작품상을 받는 등 4관왕을 달성하자 공한증은 영화계로 번질 분위기다. 중국은 10조원에 달하는 거대 박스오피스 시장을 가지고 있고, 할리우드 영화산업을 좌지우지하는 ‘큰 손’이다. 그러나 세계에서 인정받는 자국 영화를 만들 수 있느냐의 문제에서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해 보인다. 그렇다보니 5000만 인구의 작은 이웃나라 한국이 세계 영화계를 뒤흔들고 있는 데 대해 부러움과 좌절감이 뒤섞여 표출되고 있다. <기생충> 성과에 놀란 ‘영화 큰 손’ 중국 중국 온라인 매체 <펑파이>는 “<기생충>의 수상 소식은 갑작스러웠지만 이상하고 놀랄 일도 아니다. 한국 영화의 굴기(우뚝 서는 것)는 2∼3일 사이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라면서 “중국은 초기에만 해도 한국 드라마에 나오는 삼보(三寶·자동차 사고, 불치병, 기억상실)를 비웃었지만 최근 한국 영화의 강세는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한국 영화가 현실 문제를 파고들면서 관객들의 보편적 공감을 끌어내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예로 든 영화는 <소원>·<도가니>·<82년생 김지영>·<감기> 등의 작품이다. 이 작품들은 실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사회 문제를 다룬다. <소원>은 잔혹한 아동 성폭력 조두순 사건을 소재로, <도가니>는 장애인 성폭력 사건인 광주인화학교 사건을 바탕으로 한다. <82년생 김지영>은 사회에 만연한 여성 차별에 대해, <감기>는 바이러스 유행에 대해 다루고 있다. 한국에서 일어난 일을 다루지만, 중국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일어나 큰 공감을 얻은 작품들이다. <펑파이>는 “중국 누리꾼들은 사회적 이슈를 논하면서 한국 영화를 논거로 삼고 있다”면서 “한국 영화 시장의 규모와 인재는 제한적이지만 한국 영화인들은 극도로 민감한 예술적 후각, 현실 생활과 사회 문제의 높은 관심으로 이를 극복한다”고 했다. 1980년대 한국과 중국 영화가 동시에 중흥기를 맞았지만, 한국과 달리 중국은 검열과 스크린 쿼터 등을 유지하면서 두 나라 영화산업에 큰 격차가 벌어졌다는 것이 내부 목소리다. 중국 영화 블로거 위니는 “중국인들은 <기생충>의 아카데미 4관왕뿐 아니라 한국의 자유로운 정치적·사회적 분위기를 부러워하고 있다”며 “영화산업의 번영을 이끌 수 있는 것은 바로 건강한 사회 분위기”라고 지적했다. 중국의 한 영화관 매표소의 모습(사진 위) / 금세계영화관, 중국 베이징 차오양구의 한 영화관. 코로나19 영향으로 중국의 대부분 영화관이 영업을 중단했다. 대만 <연합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양극화와 빈부격차를 다룬 <기생충>은 한국 배경이지만 능숙한 위트와 유머로 전 세계에 통했다”면서 “이 작품은 지난 수십 년간 한국 영화산업이 어떻게 국제무대로 도약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됐는지 전 세계에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했다. <기생충>의 중국 본토 판권은 판매된 상태지만 개봉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기생충>이 지난해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후 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으며, <베이징청년보> 등 주요 관영 매체가 관련 논평을 쓰기도 했다. 2017년 중국 정부가 한국의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에 대한 반발로 한한령(限韓領·한류 콘텐츠 금지령)을 내렸지만 여전히 여러 경로로 한국 콘텐츠가 소비되고 있다. 코로나19로 올해 농사 망친 중국 영화계 중국 영화산업은 양적으로는 세계 최대 수준까지 팽창했다. 국가영화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 영화 박스오피스는 총 642억660만 위안(약 10조9542억원)으로 전년 대비 5.4% 증가했다. 이중 중국산 영화 박스오피스가 시장 점유율 64.07%를 차지한다. 지난해 영화 관람객 수는 총 17억 명을 넘었다. 중국산 애니메이션 영화 <너자(Ne Zha)>가 중국에서 <어벤져스: 엔드게임>(어벤져스 4)의 기록을 깨고 흥행했다. 중국은 자국에서는 메가 히트작을 쏟아내고 있지만, 검열에 따른 소재적 한계, 애국심을 고취하는 내용 때문에 내수용에 그치고 있다. 갈 길은 먼데 코로나19까지 닥치면서 ‘영화계의 시계’는 두 달째 멈췄다. <남방주말>은 “코로나19는 대형 영화사와 배급사, 톱스타뿐 아니라 중소형 제작사와 마케팅 회사, 단역 배우들에 이르는 영화산업의 말초신경까지 강타했다”고 했다. 중국 저장(浙江)성의 헝뎬(橫店)촬영소는 규모가 3000만㎡에 달하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영화 세트장이다. 베이징 자금성을 80% 크기로 재현한 건축물을 비롯해 진시황궁 등 5000년 역사를 아우르는 10여 개의 세트장을 갖췄다. 낮에는 스타를 보고, 밤에는 쇼를 본다는 헝뎬에는 호텔도 50개가 넘는다. 지난해 12월만 해도 200개 스튜디오를 동시에 운영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지만 코로나19로 지난 1월 25일부터 폐쇄됐다. 영화 제작자 허빈(賀斌)은 <남방주말>에 “사전 작업을 거쳐 2월 3일 일본으로 출국해 촬영을 시작할 예정이었지만 1월 30일부로 모든 것이 멈췄다”면서 “위약금도 문제지만 앞으로 영화를 찍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했다. 배우들의 스케줄 등 통제 불능 요소가 많아지면서 영화 제작이 아예 취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소형 영화 마케팅 회사 대표는 “임금·월세를 고려할 때 6개월간 버틸 수 있는데 이미 두 달이 지났다”고 한숨을 쉬었다. 현재 대부분의 영화관도 폐점이거나 개점 휴점 상태다. 춘제(중국 설) 대목에 개봉될 예정이던 대작 영화도 개봉이 취소됐다. 올해 영화 농사는 망쳤다는 말까지 나온다.
박은경 베이징 특파원 2020.02.21 16:00
화제
중국인 커플 “6개월간 변기용 물 마시고 살았다”중국 베이징 한 커플이 반년 동안 화장실 물을 마시고 살았다는 것을 최근 알게 됐다고 주장해 논란이 일고 있다. SNS 캡처 중국 베이징의 한 커플은 최근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됐다. 반년 동안 임대 아파트에서 거주하는 동안 화장실 변기용 물을 마시고 살았다는 것이다. 미국 매체 넥스트샤크에 따르면 중국인 탄과 그의 여자친구는 지난 5월 베이징의 한 아파트로 이사했다. 이들은 한 달에 1만위안(약 181만 원)의 임대료를 지불하고 살고 있었다. 이들은 이 집에 거주하는 동안 이상증세를 느끼기 시작했다. 탄은 탈모와 여드름이 생겼고 여자친구는 가슴 통증과 지속적인 기침에 시달렸다. 6개월 가량이 지난 후, 이들은 물을 계속 쓰고 있지만 수도 요금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탄은 매체에 “수도 계량기 테스트를 해봤지만 아파트에서 물을 사용할 때도 움직임이 감지되지 않아 전문 배관공을 불러 무슨 문제인지 확인하자 경악스러운 결과가 나왔다”고 전했다. 이들이 식수와 목욕, 요리에 사용한 물은 모두 화장실용 물이었다. 배관공은 화장실과 수돗물 파이프가 연결된 부위의 파이프를 찾아냈다. 커플은 임대아파트 관리 업체를 상대로 악화된 건강으로 인한 금전적 손해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커플의 소식이 알려지자 업체 측은 “주민들이 식수와 비식용 목적의 우물물 중 사용할 물을 선택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성명서를 통해 밝혔다. 커플이 식수로 사용한, 수도 요금이 부과되지 않았던 우물물은 지난 3월 수질 검사를 통해 ‘수세식 화장실 변기용으로만 적합하다’라는 결과를 받았다. 커플은 “우리가 먹는 물이 화장실 변기용이라는 사실을 통보받지 못했다”며 임대 업체와의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유진 기자 2023.12.01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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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엄마의 딸, 한국인 딸의 엄마 취환수치상 한국과 중국의 정치·경제적 교류는 활발하지만, 그렇다고 양국이 친밀한 사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아직 서로를 잘 모른다. 양국의 문화는 닮은 듯 닮지 않았다. 한중문화우호협회 취환 회장의 생각이다. 중국, 장님 코끼리 만지듯 알고 있던 나라 민간 차원에서 한국과 중국의 문화 교류 사업을 위해 만들어진 한중문화우호협회. 취환(45) 회장은 스스로를 ‘민간 외교관’이라고 부른다. 매년 서울과 베이징을 오가며 ‘한중연’, ‘중화연’이라는 이름의 어학·무술 대회를 열고, 한중 청소년단합대회를 비롯해 ‘한중연 문화축제’, ‘중국의 날’ 등의 각종 행사를 주최하며 양국의 문화를 알리기 위해 힘쓰고 있다. “한국에 와보니 사람들이 중국을 장님 코끼리 만지듯 알고 있더군요. 베이징이나 상하이를 다녀온 사람들은 화려하다고 하고, 시골 변두리를 다녀온 사람들은 가난하다고 해요. 전체를 보지 못하고 자신이 본 모습 그대로만 중국을 이해하는 모습이 답답했어요. 그동안 경제 교류에만 치중했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겼다고 봐요.” 아시아 대륙을 공유하고, 서해를 사이에 두고 얼굴을 맞대고 있는 중국과 한국. 한자 문화를 향유하고 유교 문화권에 속하는 양국은 겉으로 봤을 때는 닮은 것 같지만 속속들이 살펴보면 달라도 무척 다르다는 게 그녀의 견해다. “한국과 중국의 음주 문화도 비슷한 듯 달라요. 공통점은 양국 모두 술을 좋아한다는 것 정도(웃음). 중국은 상대에게 술을 권하는 게 예의이자 관심의 표현이에요. 잔이 차 있어도 술을 더 따라줘요. 그게 정중히 대하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반면 한국 사람은 잔을 다 비우는 게 예의더군요. 그래서 한국 사람과 중국 사람이 함께 술을 마시다 보면 재미있는 광경이 연출돼요. 한국 사람은 잔 비우느라 바쁘고, 중국 사람은 술 따르느라 바쁘고(웃음).” 식습관도 마찬가지다. 정성 담긴 국과 찌개, 몇 가지 반찬으로 상을 차리는 한국과 달리 중국은 요리 가짓수가 많아야 잘 차린 밥상이다. 가끔 중국에서 온 손님들이 일반 식당에 가면 먹을 게 별로 없다며 불만스러워하는 이유다. “사실, 한국 음식은 단순해 보이지만 그 안에 들어가는 정성이 대단해요. 갈비찜 하나만 보더라도 손이 정말 많이 가잖아요. 고기도 재워야 하고 양념도 여러 가지 들어가고, 채소도 예쁘게 썰어 넣고. 대부분 기름에 볶거나 튀겨 나오는 중국 음식에 비해 찌고, 삶고, 끓이고, 지지고 등 조리 방법도 다양해요. 음식 문화가 아기자기하고 정갈하죠.” 문화의 숨은 매력까지 보는 심안을 키우는 것. 그녀가 생각하는 진정한 문화 교류다. 중국 관광객이 백화점이나 면세점에서 얼마만큼의 매출을 올렸는지가 양국 교류의 지표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1 한중 청소년 교류 행사 ‘한마음 한뜻’. 2 한중연문화축제 국악 공연. 문화 교류를 통해 얻는 성취감 지금은 한국인보다도 우리나라를 더 잘 이해하고 있는 그녀지만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속상한 일도 많았다. 병원에서 아픈 증세를 설명할 때가 제일 곤혹스러웠다고. 배가 콕콕 쑤실 때도 있고, 쥐어짜듯 아프거나 눅신하게 아플 때도 있는 법인데,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돌이켜보면 제가 느꼈던 소외감이나 문화 차이에서 오는 당혹감을 극복하기 위해 교류 활동을 더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요즘 한국에서 다문화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글쎄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한국 사회가 다양한 문화를 편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저 또한 최선을 다해 돕고 싶습니다.” 한중문화우호협회에서 하는 일은 크게 3가지다. 첫째, 한중연문화축제를 개최해 양국의 전통문화를 알리는 것. 둘째, 중국으로 가서 한국의 사물놀이, 판소리, 부채춤과 같은 공연을 하거나 중국 소수민족을 초청해 전통음악을 연주하는 것. 셋째, 한중 청소년들을 초청해 역사 탐방을 지원하거나 한중 지자체가 자매결연 맺는 일을 돕는 것이다. “여러 사업을 운영하고 있지만 가장 뿌듯함을 느끼는 건 청소년들이 양국을 탐방할 때예요. 한 해는 중국 학생들을 초청하고, 이듬해에는 한국 학생들을 중국으로 보내죠. 규모는 30~50명 정도로 많지 않지만, 그 경험을 통해 아이들은 양국에 대해 친근하고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더라고요. ‘카더라’ 하는 편견 없이 말이죠. 이들이 커서 한국과 중국 사이에서 든든한 교량 역할을 해줄 거라고 믿어요.” 문화 교류는 결과물이 당장 눈에 보이는 작업이 아니다. 그저 우공이 산을 옮기듯 묵묵히 여러 가지 분야의 교류를 시도할 뿐이다. 요즘 그녀가 특히 주목하고 있는 분야는 바로 서예. 중국 운대산에서 한중 서예가 13명이 15m 길이의 캔버스에 우정을 약속하는 글을 남기는 퍼포먼스를 기획하기도 했다. 중국 운대산 한중 서예 교류 행사. “한국과 중국은 오랜 서예 문화의 역사를 가지고 있죠. 언어는 통하지 않지만 먹과 붓으로 통하는 그 무언가가 있어요. 앞으로 붓으로 양국의 미래를 함께 써나갔으면 해요.” 그녀는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주관하는 제33회 세종문화상(국제협력·봉사 부문)을 수상했다. 중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수상으로, 한국과 중국이 조금이나마 더 가까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비를 털어 시작한 문화 교류 사업에서 일궈낸 눈부신 성과다. “텐진에 있는 아파트를 팔아서 시작한 활동이에요. 지금이야 정부의 지원을 받지만, 당시에는 고정적인 수입이 없어서 어려움이 많았죠. 그래도 의미 있는 일에 투자했으니 아깝지 않아요. 그래도 의미 있는 일에 투자했으니 아깝지 않아요(웃음).” 한국인 딸을 둔 중국인 엄마 취환 회장이 대학 졸업 후 홍콩에서 일할 때였다. 한국 출장이 잦던 그녀는 서울에서, 회사원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각자의 언어를 몰라 영어로 대화하며 시작한 연애. 듬직하고 성실한 이 남자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결혼을 결심하고 중국을 떠나 한국으로 가겠다고 했다. 그날, 아버지께서는 자신과 한국의 남다른 인연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알고 보니 할아버지께서 오래전 한국에서 서예 사업을 하셨더라고요. 그래서 아버지도 한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셨대요. 한중 수교가 단절되면서 다시 중국으로 돌아오셨고, 중국 문화대혁명 때 아버지가 한국과 인연이 있었다는 사실로 고초를 겪으면서 자식들에게 관련된 얘기를 안 하신 거였어요.” 한국말이 서툴러 싸울 일도 없다는 남편과 올해 중학교 3학년이 되는 딸 영서. 이 둘은 그녀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자 한국 생활의 버팀목이다. 남편과는 한국어로 대화하지만, 영서와는 중국어로 의사소통을 한다. “딸은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한국말을 잘 못한다고 생각했대요(웃음). 아이가 어려서 4년 정도 중국에 살다 온 이후로는 줄곧 중국어로 대화하고 있어요. 제 한국어 실력보다 영서의 중국어 실력이 뛰어난 것, 인정합니다(웃음).” 한국인 아빠와 중국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딸. 영서는 오랜 시간 한국에 있었고 한국 학교를 다니다 보니 스스로 한국인이라는 의식이 강하다. 다만 중국을 아주 많이 사랑하는 한국인이란다. “학교에 입학할 때 이웃 어른들이 딸아이한테 그러더라고요. 학교 가서 엄마가 중국인이라는 걸 굳이 이야기할 필요 없다고. 친구들에게 따돌림이라도 당할까 봐 걱정스러운 마음에 하신 말씀인 건 잘 알지만 속상했죠. 아직도 혼혈아에 대한 인식이 그렇게 부정적일 줄은 몰랐어요.” 그래도 기특한 딸은 자기소개 시간에 엄마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요즘은 친구들이 중국에 대해 궁금해하고 이것저것 물어본단다. 하지만 질문 중 절반은 중국에 대한 오해에 관한 것이다. “어떤 친구가 ‘중국 화장실 더럽지?’라고 묻더래요. 그래서 ‘당연히 더러운 데도 있지. 물론 아닌 곳도 많고!’라고 했대요. 맞는 말이에요. 중국이라는 나라가 워낙 넓잖아요. 좋은 곳도 있고 당연히 아닌 곳도 있어요. 좋지 않은 모습으로 중국을 일반화시켜서 생각하는 게 안타까워요. 이럴 때 문화 교류의 중요성을 더 절실히 느끼죠.” 한국인 딸을 둔 중국인 엄마로서 요즘 그녀가 가장 걱정하는 건 교육 문제다. 공교육을 신뢰하는 중국과 달리 사교육에 의존성이 큰 한국의 교육 시스템과 엄마들의 치맛바람은 선뜻 이해가 가질 않는다. “중국 여자들은 대부분이 워킹 맘이에요. 일하느라 바쁘다 보니 교육은 전적으로 학교에 맡기죠. 한국 엄마들은 아이들 학원 스케줄까지 일일이 관리할 정도로 관심을 쏟던데, 놀라울 정도예요. 그리고 중국은 아이들이 대부분 학원을 다니지 않아요. 저도 그렇게 컸고요. 당연히 학원은 안 가도 되는 건 줄 알았는데, 한국에서는 그걸 이상하게 보더라고요(웃음). 지금은 영어와 수학 과목만 배우고 있는데, 공부하느라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적어서 안타까워요.” 협회 활동을 도맡아서 하다 보니 늘 시간에 쫓겨 사는 그녀. 딸과 보내는 시간이 넉넉하지 않아 늘 미안함을 품고 산다. “엄마가 전업주부였으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다행히 아니래요. 바깥에서 열심히 일해서 한국과 중국이 편견 없이 서로 잘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달래요. 이러니 제가 어떻게 열심히 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웃음) 다음 세대 아이들이 진짜 다문화 사회에서 살 수 있도록 초석을 잘 닦아놔야죠.” 물리적 거리는 가깝지만 정서적 거리는 멀게만 느껴지던 나라 중국. 두 나라를 반반씩 공평하게 사랑한다는, 그래서 양국의 문화를 전달하고 싶다는 그녀 덕분에 우리는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고 있다. 그렇게 조금씩 천천히,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서로를 깊이 이해하는 지교(至交)가 되지 않겠는가. <■글 / 서미정 기자 ■사진 / 이상헌 ■사진 제공 / 한중문화우호협회>
2014.12.29 1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