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잎이 너희에게 닿기를···’ 세월호 11주기 선상 추모식 [현장 화보]](https://img.khan.co.kr/news/2025/04/16/news-p.v1.20250416.c93cf117a23c4df484309d96021970e8_P1.jpeg)
사회 현장 화보
‘벚꽃잎이 너희에게 닿기를···’ 세월호 11주기 선상 추모식 [현장 화보]... 11년 간 침몰 시간에 맞춰 오고 있다”고 했다. 고 김빛나라양의 어머니 김정화씨도 “처음엔 선상 추모식이 꼭 중요한가, 라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이곳이 온전히 아이들에게 집중할 수 있는 곳이라는 걸...
#추모식 #세월호11주기 #선상추모식 #세월호
세월호 11주기
한수빈 기자 2025.04.16 16:37
사회 현장 화보
‘벚꽃잎이 너희에게 닿기를···’ 세월호 11주기 선상 추모식 [현장 화보]... 11년 간 침몰 시간에 맞춰 오고 있다”고 했다. 고 김빛나라양의 어머니 김정화씨도 “처음엔 선상 추모식이 꼭 중요한가, 라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이곳이 온전히 아이들에게 집중할 수 있는 곳이라는 걸...
#추모식 #세월호11주기 #선상추모식 #세월호
세월호 11주기
한수빈 기자 2025.04.16 16:37
경제
“기억은 약속입니다”…인천서 세월호참사 11주년 일반인 희생자 추모식...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유가족협의회는 16일 인천가족공원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에서 추모식을 열었다고 밝혔다. 인천가족공원 추모관에는 안산 단원고 학생이나 교사가 아닌 일반인 희생자 45명 중...
#인천 #세월호참사 #일반인희생자 #인천가족공원 #추모식
박준철 기자 2025.04.16 14:18
경제
효성 故조석래 회장 1주기 추모식…“혜안·도전정신 이어받아 격랑 헤쳐 가겠다”... 회사, 글로벌 정세에 민첩하게 움직이는 회사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날 회사 추모식 후 가족과 최고경영진은 경기도 선영으로 자리를 옮겨 추모 행사를 이어갔다. 효성은 일반 직원들도...
권재현 선임기자 2025.03.29 16:07
정치
“용기와 헌신 결코 잊지 않겠다”···인천서 천안함 46용사 추모식... 묵념하고 있다. 옹진군 제공 인천 옹진군은 26일 백령도 천안함 위령탑에서 ‘천안함 46용사 추모식’을 진행했다고 밝혔다. 이날 추모식에는 문경복 옹진군수 등이 참석해 천안함 피격 사건으로...
#인천 #옹진군 #천안함 #백령도 #위령탑 #문경복
박준철 기자 2025.03.26 14:04
축구
가봉, 부펜자 기리는 국가 추모식 연다···중국서 유해 송환 후 장례 지원아론 부펜자를 추모한 저장FC 홈페이지 가봉 정부가 중국에서 사망한 축구대표팀 공격수 아론 부펜자의 유해를 송환한 뒤 가봉에서 국가 추모식을 거행할 예정이다. 중국 포털 소후닷컴은 22일 “가봉 정부는 베이징 주재 가봉 대사관을 통해 부펜자의 시신 송환 절차를 시작했다”면서 “가봉 청소년체육부 장관이 부펜자 가족을 방문해 대통령과 정부를 대신해 애도를 표하고 가족의 요구를 전해들었다”고 밝혔다. 부펜자는 지난 16일 자신이 거주하는 아파트 11층에서 떨어져 2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신화통신은 “경찰이 현장 조사, 심문, 영상 분석 등을 통해 사망 원인은 아파트 발코니에서 추락한 것으로 확인했으며, 타살 가능성은 배제했다”고 전했다. 부펜자의 룸메이트인 압둘은 부펜자가 웃음가스로 불리는 이산화질소에 중독된 상태에서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고 증언해 충격을 안겼다. 저장FC 팬들이 사망한 부펜자를 애도하고 있다. 저장 홈페이지 부펜자는 자국 클럽 CF무나나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한 뒤 프랑스, 포르투갈, 튀르키예,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미국 등의 팀에서 뛰었다. 프랑스 보르도에서 뛸 땐 황의조와 한솥밥을 먹기도 했다. 그는 튀르키예 하타이스포르 소속이던 2020-21시즌에는 쉬페르 리그 36경기에서 22골을 터트려 득점왕을 차지했다. 지난해 미국 FC 신시내티를 떠나 루마니아의 라피드 부쿠레슈티에서 잠시 뛴 부펜자는 올해부터 중국 슈퍼리그 저장FC 유니폼을 입고 활약 중이었다. 부펜자는 2016년부터 가봉 국가대표로도 활약하며 35경기에 출전해 8골을 넣었다. 가봉 정부는 유해 송환과 장례 준비에 본격 나섰다. 가봉 청소년체육부 장관은 “며칠 안에 정부는 관련 부서와 스포츠 조직과 협력하여 가봉 축구의 위대한 대사에게 엄숙한 방식으로 경의를 표하는 국가 추모식을 거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저장FC 주축 공격수로 활약했던 부펜자. 소후닷컴 캡처
양승남 기자 2025.04.22 17:19
축구
죽지 않았는데 추모식?…생존 선수 위해 ‘묵념’ 해프닝아르다 카르잘리 구단 홈페이지 캡쳐 불가리아 프로축구 1부리그 구단 아르다 카르잘리가 과거 팀에서 뛴 선수가 사망한 것으로 착각하고 애도하는 묵념을 진행했다가 생존한 사실을 뒤늦게 알고 황급히 사과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카르잘리는 지난 17일 불가리아 프로리그 레프스키 소피아전을 앞두고 전 선수였던 페트코 간체프를 추모하기 위해 경기장 중앙 원형 서클에 두 팀 선수들을 모이게 했다. 선수들은 머리를 숙이며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간체프를 기렸다. 그런데 경기가 끝나기도 전에 상황이 급반전됐다. 카르잘리는 공식 페이스북을 통해 “잘못된 정보를 전달받았다”며 긴급 사과문을 발표했다. 구단은 “구단 경영진은 전 선수 페트코 간체프 및 그의 가족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며 “클럽은 간체프의 사망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받았으며, 이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고 설명했다. 구단은 이어 “페트코 간체프가 앞으로도 건강하게 오래 살며 카르잘리의 성공을 지켜보기를 기원한다”고 덧붙였다. 사람이 살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공식적인 묵념이 진행된 것은 이례적이다. 클럽이 정확한 확인 절차 없이 성급하게 추모식을 진행한 점이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불가리아 스포츠 매체 ‘스포르트 불가리아’는 “이런 황당한 일이 어떻게 발생할 수 있었는지 클럽 측의 해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간체프 본인은 아직 공식적인 반응을 내놓지 않고 있다. 주변 지인들은 그의 생존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보내며 이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후문이다. 간체프가 어떤 선수인지는 알려진 게 거의 없다. 구글, 챗GPT 등으로 검색해도 정보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유명한 ?太側? 아니라서 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거나 과거 기록이 아예 사라졌을 수도 있다. 페트코 간체프라는 이름이 불가리아에서 흔한 이름에 속한다. 페트코는 불가리아에서 일반적인 남성 이름 중 하나며, 간체프는 흔한 성씨다.
김세훈 기자 2025.03.18 07:20
연예
구준엽, 故서희원 유해 안고 대만 도착…서희제 “추모식은 없을 것”가수 구준엽과 그의 아내 고 서희원. SNS캡처 tvN ‘유퀴즈 온더 블럭’ 클론 구준엽이 아내 서희원(쉬시위안)의 유해를 안고 대만에 도착했다. ET투데이 등 대만 현지 언론에 따르면, 지난 5일 구준엽은 처제 서희제와 함께 고 서희원의 유해를 대만으로 옮겼다. 고인의 유해는 이날 도쿄 하네다 공항에서 비스타젯 전세기에 실려 오후 3시쯤 대만 타이베이 쑹산 공항에 도착했다. 서희제는 에이전시를 통해 “서희원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우리는 서희원의 작별식을 진행하지 않을 예정이다. 그는 항상 겸손한 사람이었기 때문” 이라며 “보고 싶다면 마음 속에 간직해달라. 우리 가족 모두 언니를 향한 사랑에 감사드린다”라고 덧붙여 추모식은 없을 것이라 밝혔다. 대만언론은 전세기에서 내린 구준엽이 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했음에도 눈빛은 슬픔으로 가득했다고 전했다. 구준엽은 서희원의 유해가 담긴 분홍색 유골함을 품에 안고 차량에 탑승하기 전 몰려든 취재진에 “아내가 놀라지 않도록 우산으로 가려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매체에 따르면 서희원의 유골은 북부 신베이시 싼즈 지역의 한 추모공원에 안치될 예정이다. 구준엽의 아내인 대만 스타 서희원이 일본 여행 중 독감에 걸려 폐렴으로 갑작스레 사망한 가운데, 1200억원 상당의 유산과 두 아이의 양육권 을 전남편 왕소비(왕샤오페이)에게 빼앗길 수 있다는 관측이 터져나왔다. 23년만에 재회해 영화처럼 결혼에 골인한 구준엽과 서희원이 대만에선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보도가 나왔기 때문이다. 다만 앞서 구준엽은 국내 방송에 출연해 대만에서 두 사람이 직접 혼인신고를 했다고 밝힌 바 있어 가짜뉴스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가하면 서희원의 전남편인 왕소비와 불륜설에 휩싸였던 모델 장잉잉은 “왕소비 가족은 서희원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트렸다. 그들은 서희원을 방해하고 이용하며 부를 축적했고 피와 살을 빨아먹었다”며 “서희원의 건강이 나빠진 이유는 결국 왕샤오페이가 네 번의 임신을 강요한 것”이라고 폭로해 파문이 인 상태다.
강주일 기자 2025.02.06 14:32
야구
최악의 스캔들, 그러나 신시내티엔 영원한 영웅··· 피트 로즈 14시간의 추모식미국 메이저리그(MLB) 신시내티 홈 구장 그레이트아메리칸볼파크에서 10일(현지시간) 피트 로즈 추모식이 진행되고 있다. AP연합뉴스 메이저리그(MLB) 역사에 피트 로즈라는 이름은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다. 감독으로 이끌었던 신시내티 경기에 수천달러 규모 도박을 한 사실이 적발됐다. MLB 역사상 최악의 스캔들이라는 평가 속에 개인 통산 최다 4256 안타의 주인공은 리그 영구 제명이라는 전례 드문 처분을 받았다. 돈을 걸었던 1987시즌 52경기 중 팀의 패배에 돈을 건 경기는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항변했지만, 현직 감독이 자기 팀 경기에 베팅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지난 9월30일(현지시간) 83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로즈의 복권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가 손가락질을 한다 해도, 신시내티 팬들은 아니었다. 10일 신시내티 홈 구장 그레이트아메리칸볼파크에서 14시간 동안 로즈의 추모식이 열렸다. ‘14’는 현역 시절 그의 등 번호였다. 종일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였지만 수천 명이 구장을 찾아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10일 피트 로즈 추모식에 참석한 신시내티 팬이 고인을 향해 기도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신시내티 팬들이 10일(현지시간) 그레이트아메리칸볼파크에서 열린 피트 로즈 추모식에 참석하기 위해 줄 서서 기다리고 있다. AP연합뉴스 신시내티 팬들에게 로즈는 단순한 프랜차이즈 스타가 아니었다. 지역에서 나고 자란 고향의 영웅이었다. 로즈는 1941년 4월14일 신시내티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바로 신시내티에 입단했다. 1963년 데뷔 시즌부터 1978년까지 활약했고, 이적 이후 타향살이가 길었지만 1984년부터 1986년까지 현역 마지막 3년을 다시 고향에서 보냈다. 1985년 9월11일 신시내티 유니폼을 입고 통산 최다 신기록인 4192번째 안타를 때렸고, 1986년 8월17일 현역 마지막인 4256번째 안타를 때린 것도 신시내티 유니폼을 입고서였다. 쉴 새 없이 안타를 때렸고, ‘찰리 허슬’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몸을 사리지 않는 플레이로 현역 시절 그는 지역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로즈가 현역 생활을 마친지 이미 40년 가까이 지났고, 그를 지켜봤던 이들도 대부분 나이가 지긋해졌지만 팬들의 기억 속에 찰리 허슬은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추모식에 참석한 트래비스 펠트너는 지역지 ‘신시내티 인콰이어러’에 “우리 모두 피트를 사랑한다. 그는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신시내티의 일부”라고 했다. 로즈가 졸업한 신시내티 웨스턴힐스 고등학교 교사 몰리 굿은 “학생들이 그런 유명한 선수와 같은 건물을 쓴다는 것은 정말 큰 의미다. 우리는 대가족과 같다. 로즈는 우리 가족 중 한 명”이라고 했다. 로즈의 영구퇴출 2년 후, 미국 야구 명예의전당은 그의 입회를 영구 금지하기로 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처분이었다. 그러나 신시내티 팬들은 그를 구단의 영웅으로 기억하고 대우했다. 2016년 신시내티는 로즈를 구단 명예의전당에 헌액하고, 등 번호 14번을 영구결번했다. 적지 않은 신시내티 팬들은 여전히 그가 리그 전체 명예의전당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심진용 기자 2024.11.11 10:18
문화/과학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신영복 추모식, 차마 다 못 부른 ‘시냇물’누군가가 노래 하나씩 하자고 해서 신영복의 차례까지 오게 되는데 한사코 사양하다가 어쩔 수 없이 노래를 하게 된다. 감옥살이 20년간 만기 출소하는 사람을 위해 그가 부른 노래는 동요 ‘시냇물’이다. 나는 노래를 잘 못한다. 이것이 일차적인 문제다. 인생의 걱정거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못하는 것보다는 잘하는 게 낫지 않은가. 더 큰 문제는 잘 못하면서 자꾸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분위기는 잘 띄운다. 안 가본 지 10년도 더 넘었지만, 옛날의 회식이나 음주 풍습에 따라 2차로 노래방에 가자면 못 이기는 척하고 일어나고, 에라 모르겠다, 메들리로 몇 곡씩 불렀다. 그러다 보면 누군가 중간에 끊었다. 음악을 집중적으로 들으면서 산 지 어언 30여년이 넘는다. 그저 어디선가 들려오는 공기의 흔들림을 듣는 게 아니라, 집중적으로 찾아서 듣고, 모아서 듣고, 골라서 들은 지 30여년. 그러다보니 그동안 들은 음악들이 몸속에 배어 있어서 그 음악들이 스스로 새어나오는 수가 있다. 연구실에 혼자 있을 때, 황량한 벌판에 혼자 있을 때, 천천히 혼자 걸어갈 때, 그러니까 나 혼자 있을 때, 그렇게 한다. 오랫동안 들은 음악들, 그것이 지닌 정치·사회적 의미와 문화사적 가치를 나름 궁구하여 책을 쓰고 강의도 한다. 강의를 하다보면 어떤 음악가의 어떤 작품에 대해, 만약 그것이 존 콜트레인의 색소폰처럼 가사 없는 연주음악이라면 허밍으로 흥얼거리고, 만약 그것이 바흐의 미사곡이거나 슈베르트의 가곡이라면 주요 소절 몇 마디를 직접 부르면서 강의를 하는데, 가르치는 사람 체면 봐서 들어주는 시늉은 하지만 어서 빨리 음반을 틀어줬으면 하는 수강생들의 얼굴이 갑자기 떠오른다. “노래만 안 했어도 명강의라는 소릴 들을 텐데” 하며 걱정해주던 그 표정들 말이다. 성공회대학교 성미가엘성당에서 15일 열린 신영복 선생 1주기 추도식에서 참석자들이 고인을 추모하고 있다. / 정윤수 음악학자 노동은, 음악평론가 강헌, 남미 역사와 음악의 최고수 이성형 등도 강의하면서 이따금 흥얼거리거나 직접 노래를 했는데, 장안 최고의 명강의임에도 노래실력이 꼭 그렇지는 않았던 듯싶다. 아, 이렇게 쓰고 나니, 그가 남긴 책 제목처럼 ‘배를 타고 아바나’를 떠나는 고독한 여행자처럼 중남미의 피에 물든 역사와 바로 그 피가 만들어낸 위대한 노래들을 직접 불러주면서 강의했던 고 이성형 선생님이 갑자기 생각난다. 그래서 자제한다. 노래를 시켜도 안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꾹 참는다. 국가주의, 승리지상주의, 스포츠상업주의 등등의 이유이기도 하지만 2002 월드컵 때 이후로 그 흔한 ‘대~한민국’이라는 구호나 노래도 안 부른다. 어쩔 수 없이 1년에 한두 번? 집안 어른들의 회갑연? 다만 그뿐, 노래를 부르는 삶이 아니라는 걸 내가 잘 안다. 그랬는데, 지난주에 노래를 불렀다. 실은 다 부르지도 못하고 울먹거렸다. 그 얘기를 하고 싶다.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신영복의 은 그밖의 여러 저서들과 더불어 일종의 ‘감옥 문학’, ‘유배 문학’의 높은 성취다. 대체로는 정치적인 이유로 감옥에 갇히거나 권력으로부터 멀리 추방당하여 쓴 책들, 그런 책들은 각별하다. 언젠가 그런 상황이 닥치겠지 하고 대비는 할 수 있어도 일부러 책 한 권을 쓰자고 감옥을 간다거나 유배를 자처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응당 해야만 하는 일을 확신에 차서 결행한 끝에 피치 못하여 감옥에 갇히고 추방을 당하게 되는데, 그 절박한 상황에 임하여 간신히 구한 최소한의 집필도구로 한 글자 한 글자 써내려간 그 기록들은 그야말로 피의 기록, 최후의 기록, 몸으로 쓴 기록이라고 하겠다. 인류사의 고전들 중에 그런 상황의 위엄 있는 결실들이 숱하다. 법정의 최후 진술 및 그 이후의 수감 및 사형 상황에서 남겨진 소크라테스의 을 포함한 기록들을 시작으로 하여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쓰여진 단테의 , 밀턴의 , 마르코 폴로의 , 스피노자의 , 그람시의 등 이루 셀 수가 없으며, 우리의 경우에도 조선의 빛나는 고전들이 대개는 왕으로부터 배척을 받아 실각하고 낙향하여 썼거나 정약용의 강진 기록이나 정약전의 흑산 기록들처럼 철저히 추방되어 고립된 상황에서 이뤄진 성취들이 한둘이 아니다. 일제와 독재를 거치면서 우리의 현대사에 남겨진 고결한 기록들이 서대문형무소를 집필실로 삼은 것임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이상의 기록들이, 그러나, 감옥이나 유배지에서 멀리 떠나온 권력의 중심을 향하여 고언을 하고 질책을 하고 새로운 사상과 상상을 펼쳤다는 공통점이 있다면, 몇몇의 경우는 바로 그 감옥 안의 상황을 주목하고 그 안의 절박한 삶을 묘사하여 그 안의 속박된 삶에서 최후의 상황에 처한 인간의 밑바닥 모습을 그려내는가 하면, 바로 그것을 통해 감옥의 안이나 밖이나 인간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양상이나 보편의 가치를 밝혀냈는데, 그 중 대표작으로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과 신영복의 을 가장 높은 자리의 결실로 여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기록은 그가 황제 암살 및 혁명 기도 등의 정치범이 되어 유형을 살게 된 시베리아의 검은 체험이다. 감옥살이 5년 동안 인류의 구원자이자 기록자인 도스토예프스키는 정치적인 이유로 시베리아 유형을 살게 된 귀족이나 추문과 횡령으로 끌려온 관리들, 그리고 사사로운 일이 확대되어 결국 감옥살이를 하게 된 하층민 잡법들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수많은 인간들, 수많은 사건들, 수많은 피와 죽음들, 수많은 사연과 원망들이 얽혀 있다. 하루하루의 자잘한 이야기를 통해 온갖 인간들이 짐승우리 같은 데서 벌이는 처절하면서도 희극적인 일들, 이를테면 거위나 독수리나 염소 같은 동물들까지 끼어드는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삶의 가장 비참함과 가장 고결함 사이가 그리 멀지 않음을 깨닫는다. 깨달음의 이야기 이런 깨달음의 이야기가 거의 모든 페이지마다 깊이 있게 배어 있는 책이 신영복의 이다. 이를테면 이런 이야기. 마흔쯤 된 죄수인데, 집도 절도 없어 접견(면회)도 오지 않는 고립자. 그런데 어느 날 접견 호출을 받게 된다. 본인도 놀라고 동료 죄수들도 다 놀란다. 나중에 물으니 대꾸를 하지 않고 침울하다. 자기도 모르는 사람이란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이 죄수가 두세 살 때 누이동생과 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살 길이 없어 어머니는 아이들을 삼촌댁에 맡기고 돈 벌러 가셨다가 못 돌아오고, 결국 재가(再嫁)하게 된다. 재가한 집에도 이미 어머니를 잃은 어린아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자기 자식은 키우지 못하고 남이 낳은 자식을 키우며 살았다. 바로 그 아이가 나름대로 성장하여 교도소까지 면회 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만약, 당신 어머니를 우리 어머니로 모시고 오지 않았다면, 내가 그 속에 있고, 당신이 밖에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이런 이야기. 어느 죄수는 한밤에 변소를 다녀오면서 문을 쾅 닫았다. 시끄럽다고 매번 핀잔을 받았다. “다른 사람이 다 싫어하는데, 왜 그래?”라고 물으니 이렇게 답하더란다. “제가 야간에 주거침입을 하고 달아나다 축대 위에서 떨어져서 다리를 다쳤어요. 쪼그렸다 일어나면 완전히 마비가 돼요. 변소 가서 앉아 있다 나오면 마비가 와서 늘 문이 꽝 닫히는 걸 놓쳐요.” 그래서 신영복은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하고, 양해를 구하라”고 했더니, 이 죄수가 하는 말, “어떻게 그렇게 세세한 것까지 이해를 받고 사나요. 그냥 욕먹고 살아야죠.” 그밖에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어느 죄수가 만기 출소를 하게 되면 건빵이라도 사서 조촐하게 파티를 하게 된다. 건빵 한 봉지씩 나눠받으면 훈훈해진다. 누군가가 노래 하나씩 하자고 해서 결국 신영복의 차례까지 오게 되는데 한사코 사양하다가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노래를 하게 된다. 감옥살이 20년간 만기 출소하는 사람을 위해 그가 부른 노래는 동요 ‘시냇물’이다.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강물 따라 가고 싶어 강으로 간다 강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 지난 15일 오후, 신영복 타계 1주기 추모식이 열렸고 그 자리에 참례했다. 엄숙하게 진행된 추모식의 맨 마지막 순서는 고인의 생전 영상을 잠깐 보는 것이었고, 그 영상 속에서 고인은 ‘시냇물’ 이야기를 했다. 그 영상 후에 추모객 모두가 ‘시냇물’을 함께 불렀다. 나도 불렀다. 따라 부르다가, 2절을 차마 다 못 부르고 말았다. 꼭 노래를 잘 못 불러서 그런 것은 아니다.
2017.01.24 15:26
사회 비상식의 사회
[비상식의 사회]이소선 여사 4주년 추모식, 달라지지 않는 세상더 이상 죽지 말라, 살아서 싸우자는 우리의 외침에도, 누군가가 세상을 버리고 있습니다. 아니 세상이 그들을 버리고 있습니다. 어머님의 말씀대로, 또 우리 유가족들의 소원인 혈육들의 뜻을 이어, 그들이 바라던 세상을 이루어 내는 것을, 아직껏 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9월 3일)은 이소선 어머니 돌아가신 지 4년이 되는 날,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 어머니 계신 곳은 완연한 가을빛이었다. 철 늦은 매미소리가 가끔 들리기는 해도 그렇게 그악스럽지 않았다. 지난여름은 정말 후덥지근하고 답답했다. 세월호 참사는 1년을 넘기고도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에 재발방지책 마련은커녕 대통령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600만명 이상의 서명과 유가족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천신만고 끝에 마련된 특별법은 위원회 구성과 시행령 마련에서부터 박근혜 정부의 조직적 방해 속에 걸레가 돼버렸다. 이렇게 국민 안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대책 마련의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린 가운데 세월호 참사의 재판인 메르스 사태를 맞게 됐다. 국가적 재난에 컨트롤타워도 없이 우왕좌왕하다가 수많은 무고한 생명과 계산하기조차 어려운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그렇게 내세우던 나라 체면도 처참하게 시궁창에 떨어졌는데, 최고책임자인 박근혜 대통령은 사과는커녕 그 흔한 유감표시 한마디도 없이 모든 책임은 국민에게 있다면서 노동개혁을 부르짖으며 노동자들에게 덤터기를 씌우고 있다. 만만한 게 노동자인가. 비정규직은 정책 부재 속에 자본의 탐욕으로 저희들이 다 만들어놓고, 정규직을 무슨 죄인처럼 몰아세우며 비정규직 몫을 내놓으라고 으르렁대고 있다. 9월 3일,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4주기 추도식’이 경기 마석 모란공원묘역에서 열렸다. / 이요상 제공 이제 몇 명 남지 않은 전태일 친구들 어머니 묘소로 가는 길 왼쪽 언덕 위에는 문익환 목사님과 조영래 변호사가 있고, 오른쪽 언덕 위에는 김진균 교수님이 계신다. 이 골짜기 저 언덕에 누워 계신 수백의 열사님들이 어느 한 분 특별하지 않은 분들이 있을까만, 위의 세 분은 어머니 살아계실 때 혈육보다도 더 살갑게 지내시던 분들이다. 정말 천당이나 극락이 있다면 거기서도 함께 오순도순 노동자들의 삶을 걱정하며 이 가을날 하루를 보내고 계실 것 같다. 이소선 어머니 4주기 추모식은 따뜻한 가을 햇살 아래, 어머니와 태일이 묘를 중심으로 둘러선 많은 분들의 민중의례로부터 시작됐다. 이소선 합창단의 선창에 따라 함께 부르는 ‘님을 위한 행진곡’은 언제 불러도 우리들을 숙연하게 하며 새로운 다짐을 하게 한다. 전태일이 떠난 지 올해로 45년, 어머니 가신 지도 4년이 됐다. 태일이 평화시장 앞에서 분신 항거할 때 함께했던 태일이 친구가 이제 몇 명 남지 않았다. 태일이 죽자 이소선 어머니를 친어머니처럼 모시고 평생을 제자리를 지켜온 분들이다.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이제 고아가 됐다며 슬피 울며 태일이와 어머니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분들이다. 그런데 봉제업 관련 사업을 하는 그 중 한 분이 제안을 해 왔다. 태일이 친구로 평생을 살면서 어떻게 하면 태일이의 뜻을 세상에 남길까 생각하다가, 우리나라에 노동자를 보내는 우리보다 가난한 나라에 학교를 지어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관련 단체를 찾아 바로 시행에 들어갔다. 1억원 이상을 들여 캄보디아의 어느 마을에 멋진 학교를 짓고 있다. 또 한 친구는 얼마 전 나를 찾아와 10년 동안 적금을 부어 마련한 1억원을 장학금으로 썼으면 좋겠다며 내놓는 것이었다. 오죽하면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나온 태일이가 배움에 한이 돼 ‘대학생 친구 한 명만 있었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했겠냐며, 어머니도 살아계실 때 ‘돈 때문에 배우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늘 말씀하셨다며, 그 한을 풀어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우선 이 돈으로 꼭 필요한 장학사업을 시작하면 자기는 다시 10년 계획으로 또 1억짜리 적금을 붓고, 다른 친구들에게도 얘기해서 힘을 모아 장학재단이라도 만들어 보겠다며, 전태일재단에서 잘 관리해 달라는 것이었다.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으로 남아 있는 이소선 여사의 사진.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한 전태일 열사의 장례식에서 오열하는 이소선 여사. / 경향신문 자료사진 모자의 ‘손잡음’ 정신을 계승 다짐 저쪽 언덕으로부터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추모사가 이어지고 있었다. 전태일재단 이사장에 이어 유가협 장남수 회장이 흐느끼듯 절규한다. 한국노총 김동만 위원장이 뒤를 잇는다. 김동만 위원장은 어머님 살아계실 때 어머님과의 사이가 남달랐던 터라 더욱 애잔하다. 마지막으로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이 나설 차례다. 그런데 정부의 탄압으로 수배 중이라 수석부위원장이 대신 읽는다. 어머니의 소원대로 한국노총, 민주노총, 시민단체 등이 하나 되어 만든 이소선 합창단의 아름다운 선율이 어머니의 목소리가 되어 더 낮은 곳으로, 탄압이 있는 곳으로, 차별이 있는 곳으로, 소외가 있는 곳으로, 분열이 있는 곳으로, 착취가 있는 곳으로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2015.09.07 1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