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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 찾은 준범이…홍현희♥제이쓴, 폭파 당한 子 계정 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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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찾은 준범이…홍현희♥제이쓴, 폭파 당한 子 계정 복구

      홍현희·제이쓴 부부 자녀 계정 방송인 홍현희와 제이쓴 부부가 폭파 당한 아들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복구시켰다. 20일 제이쓴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준버미 계정 돌려주란 말이야ㅠㅠ”라는 글과 함께 사진을 게재했다. 공개된 사진에는 아들 준범군의 SNS가 일시 차단 됐다는 안내 문구가 적혀있다. 이와 함께 180일 이내에 재고를 요청하지 않으면 계정이 영구 비활성화 된다는 설명도 있었다. 준범 군을 위한 계정이 정지당한 이유는 인스타그램 이용 규정 때문으로 추측된다. 인스타그램은 만 14세 이상 가입을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 계정의 관리자가 부모라는 것이 명확하지 않을 경우 계정 사용은 제한된다. 다행히 현재 제이쓴과 홍현희 아들의 계정은 복구된 상태다. 이에 누리꾼들은 “다시 찾은 준범이. 다행이다”, “돌아왔다”, “준범아 어디갔다 왔어”라는 반응으로 계정 복구를 반겼다. 한편 홍현희는 지난 2018년 인테리어 디자이너 제이쓴과 결혼해 지난 2022년 아들 준범 군을 품에 안았다.

      김희원 온라인기자 2024.11.20 18:09

    • 슈가 탈퇴 ‘결단 촉구’ 대형 팬계정 폭파··· 하이브의 선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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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가 탈퇴 ‘결단 촉구’ 대형 팬계정 폭파··· 하이브의 선택은?

      방탄소년단 슈가. 빅히트 뮤직 방탄소년단 팬덤 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멤버 슈가의 음주운전 혐의로 인해 화환 시위와 계정 폭파 등 팬들의 탈퇴 촉구가 이어진 가운데, ‘빠른 결단을 부탁한다’던 방탄소년단 팬덤 관련 대형 계정까지 폭파되면서 방탄소년단 팬덤은 물론 K팝 팬들도 현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13일 방탄소년단의 음원 정보를 전달하는 ‘방탄소년단 음원정보팀’ 계정이 사라졌다. 해당 계정은 방탄소년단의 음원 및 스트리밍 정보를 전달하고 독려하는 계정으로, 체계적인 시스템과 실용성 있는 정보로 약 29만 명의 팔로워를 확보한 대형 계정이다. 슈가 음주운전 관련 탈퇴 촉구 발언으로 대규모 팔로워를 뒀던 ‘방탄소년단 음원정보팀’ 계정이 폐쇄됐다. SNS 캡처 그러나 이런 계정이 한순간에 사라진 건 슈가 음주운전 논란에 대한 의견 피력 때문이다. 해당 계정은 음주운전 보도 이후 ‘모두가 피해를 입고 있다. 빠른 결단 부탁한다’고 탈퇴를 지지하는 문구를 게재했다. 그러나 슈가의 탈퇴를 지지하지 않는 팬층에서 이에 대해 거세게 비난했고, 결국 해당 계정은 사라지게 됐다. 이에 여타 K팝 팬들은 ‘순덕이었는데 계폭 엔딩 안타깝다’ ‘방탄은 음정팀도 다르구나 했는데 이렇게 사라지네’며 아쉬움을 표했다. 일부에서는 ‘영향력 있는 계정의 치우친 발언은 분열을 일으킨다’고 지적하기도 했지만, 해당 사건으로 인해 슈가의 음주운전이 팬덤 분열을 이끌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일부 아미들이 하이브 사옥 앞에서 펼친 슈가 팀 탈퇴를 요구하는 화환 시위. 독자 제공 그뿐만 아니라 일부 팬이 하이브 사옥 앞에서 화환 시위를 벌이면서, 이 또한 팬덤 내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13일 하이브 사옥 정면에는 ‘민윤기 탈퇴해’ ‘포토라인 서기 전에 탈퇴해’ 등 슈가의 탈퇴를 요구하는 문구가 적힌 화환이 늘어섰다. 이를 반대하는 팬들은 화환 사진을 SNS에 공유하며 ‘불법집회 화환 신고하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화환을 불법 옥외광고물 등 생활불편으로 신고해달라며 안전신문고 링크와 하이브 사옥 주소를 첨부했다. 이에 일부 화환이 수거되기도 했으나, 다시 화환을 보내며 상황은 반복되고 있다. 방탄소년단이 글로벌 스타로 전 세계에 K팝 부흥을 이끌고 있음을 생각하면 몹시 아쉬운 상황이다. 지난 6일 음주 후 전동 스쿠터를 운전한 혐의를 받는 슈가는 현재 경찰 소환 조사를 앞두고 있다. 방탄소년단 최초로 경찰서 포토라인에 서게 될 가능성이 큰 가운데, 하이브 측이 들썩이는 여론을 어떻게 정리해 나갈지 시선이 모인다.

      김원희 기자 2024.08.13 17:36

    • 29만 팬 계정 폭파…BTS 슈가 음주 운전, 팬덤 분열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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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만 팬 계정 폭파…BTS 슈가 음주 운전, 팬덤 분열ing

      BTS 슈가. 연합뉴스 BTS 슈가의 음주 운전 여파로 29만 팬 계정이 사라지는 등 팬덤 분열이 심화되고 있다. 13일 기준 엑스(X· 구 트위터)에서 29만 팔로워를 보유 중인 BTS 팬 계정이 사라진 것으로 확인된다. 앞서 ‘방탄소년단 음원정보팀(방탄 음정팀)’으로 활동했던 이 계정은 지난 9일 엑스에 “모두가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빠른 결단 부탁드립니다”라고 적었다. 슈가의 음주 운전 파문으로 BTS 멤버들에게도 불똥이 튀자 목소리를 낸 것. 이 게시글은 2600만 조회수를 기록하며 크게 화제가 됐다. 그러나 해당 게시글은 일부 아미(BTS 팬덤명)들의 역풍을 맞게 됐다. 일부 아미들은 “음정팀이 저럴 정도의 사건인가”, “좀 선 넘은듯”, “나대네” 등의 댓글을 달며 방탄 음정팀을 향한 비판을 이어갔다. 슈가를 저격한 이후 팔로워 수도 1만이 줄어 28만이 됐다. 같은 날 일부 아미를 중심으로 ‘슈가 탈퇴’ 취지의 해시 태그 총 공격을 벌였지만 해당 해시태그가 한꺼번에 사라지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12일 11시 기준 실시간 트렌드 2위, 3위, 4위에 ‘#민윤기_자진탈퇴’, ‘#음주운전자_민윤기_탈퇴해’, ‘#SUGA_자진탈퇴’가 올랐다. 이를 두고 누리꾼들은 일부 강성 아미들의 ‘해시태그 신고’ 총공으로 해당 해시태그가 내려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앞서 지난 7일 서울 용산경찰서는 슈가를 도로교통법 위반(음주운전) 혐의로 입건해 조사했다고 밝혔다. 슈가는 전날 용산구 일대에서 음주 상태에서 전동 스쿠터를 몰다 혼자 넘어진 채로 발견됐다. 이에 슈가와 슈가의 소속사 빅히트뮤직은 공식 입장을 냈지만 ‘전동 스쿠터’를 ‘전동 킥보드’로, ‘750m 이동’을 ‘직선 거리 500m’로, ‘인명이나 재산상의 손실이 없었다’ 등의 표현을 써 사건을 급하게 무마하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여기에 더해 지난 9일 서울 용산 경찰서를 통해 사건 당시 슈가의 혈중 알코올농도가 0.227%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경찰서에서 ‘맥주 한잔’ 마셨다는 슈가의 진술이 거짓말이었음이 들통나 다시 한번 파문이 일게 됐다.

      서형우 온라인기자 2024.08.13 10:14

    • ‘화인가 스캔들’ 고태진, 김하늘·정지훈과 차량 폭파 테러 사건 휘말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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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인가 스캔들’ 고태진, 김하늘·정지훈과 차량 폭파 테러 사건 휘말려

      배우 고태진 티앤아이컬쳐스 배우 고태진이 김하늘, 정지훈과 함께 차량 폭파 테러 사건에 휘말렸다. 지난 17일 공개된 글로벌 OTT 디즈니+의 오리지널 시리즈 ‘화인가 스캔들’ 6화에서 배우 고태진은 ‘Q2’ 역으로 출연했다. 극 중 Q2(고태진 분)는 서도윤(정지훈 분)과 오완수(김하늘 분)와 함께 조용히 차를 타고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었다. 도윤은 평화롭게 운전하던 중 공격용 드론이 이들의 뒤를 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드론들을 따돌리기 위해 곡예 운전을 시작했다. 공격용 드론들은 계속해서 이들을 쫓으며 폭파했고, 계속된 공격에 결국 차량 아래에서 드론이 폭파하며 이들이 탄 차량은 전복됐다. 충격으로 세 사람은 모두 의식이 없는 채 불이 점점 번져가는 차에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정신을 겨우 차린 Q2는 몸을 겨우 차 밖으로 기어 나오다 다시 의식을 잃었다. 정신을 차린 도윤은 완수를 차에서 끌어내 멀리 피하던 중 차량이 폭파되며 잔해들이 등에 꽂혀 치명상을 입었다. Q2의 생사가 걱정되는 가운데 병원에 입원해 회복중인 모습이 드러나 고태진의 생사가 궁금했던 시청자들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했다. ‘화인가 스캔들’(연출: 박홍균, 각본: 최윤정, 제작: 태원엔터테인먼트, 스튜디오앤뉴)는 대한민국 상위 1% 화인가를 둘러싼 상속 전쟁으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받는 나우재단 이사장 ‘오완수’와 그녀의 경호원 ‘서도윤’이 화인가의 비밀을 마주하게 되는 치명적 스캔들 드라마다. 폭탄 테러로 정지훈과 함께 목숨의 위협을 받은 고태진이 출연하는 ‘화인가 스캔들’은 매주 수요일 오직 디즈니+를 통해 2편씩 공개된다.

      손봉석 기자 2024.07.19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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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경의선·동해선 남북 연결도로’ 폭파

      정치

      북한, ‘경의선·동해선 남북 연결도로’ 폭파

      10월 15일 오전 인천 옹진군 대연평도에서 해병대원이 해안선 수색정찰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북한이 10월 15일 경의선·동해선 남북 연결도로를 폭파했다고 합동참모본부가 밝혔다. 합참은 이날 국방부 출입기자단에 보낸 문자메시지를 통해 “북한은 오늘 정오께 경의선 및 동해선 남북 연결도로 군사분계선(MDL) 이북 일부 구간을 폭파했다”며 “우리 군은 감시 및 경계태세 강화 중”이라고 밝혔다. 앞서 북한군 총참모부는 지난 10월 9일 보도문을 통해 “9일부터 대한민국과 연결된 우리 측 지역의 도로와 철길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견고한 방어축성물들로 요새화하는 공사를 진행되게 된다”고 발표했다. 북한은 같은 날 유엔사-북한군 통신선을 통해 보낸 통지문에서도 “우리 측은 10월 9일부터 남쪽 국경선 일대에 우리 측 지역에서 대한민국과 연결됐던 동·서부의 도로와 철길을 완전히 끊어버리기 위한 공사를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성준 합동참모본부 공보실장은 지난 10월 14일 정례브리핑에서 “도로에 가림막을 설치해 놓고 그 뒤에서 도로를 폭파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하는 것이 식별되고 있다”고 밝혔다. 북한은 지난해 말부터 남북 육로 단절을 위해 도로 주변 지뢰 매설과 가로등 제거, 철로 제거, 인접 부속 건물 철거 등을 진행해왔다. 남북 연결 육로에는 철도 및 도로인 동해선과 경의선, 화살머리고지 및 공동경비구역(JSA) 통로 등이 있다. 합참에 따르면 북한은 지난해 11월 경의선 도로 인근에 나뭇잎 지뢰를 살포했고 같은 해 12월 동해선에 지뢰를 매설했다. 올해 3월에는 동해선 도로 펜스, 4월엔 경의선 도로 가로등을 철거했다. 이어 5월에는 동해선 철도 레일 및 침목을 제거했고 6월에 동해선 도로 가로등을 철거다. 또 7월엔 경의선 철도 레일 및 침목을 제거한 뒤 8월엔 경의선 열차 보관소를 해체했다. 김명수 합참의장은 지난 10월 10일 국회 국방위원회의 합동참모본부 국정감사에서 “경의선과 동해선은 (지난) 8월에 차단됐다”며 “이런 움직임은 사전에 감시되고 있었다”고 밝혔다.

      홍진수 기자 2024.10.15 13:15

    • 경제 우정이야기

      [우정이야기]‘종로서 폭파’ 김상옥 의사 순국 100주년 우표

      김상옥 의사 순국 100주년 기념우표. 우정사업본부 제공 1889년 1월 5일 서울 효제동에서 출생. 여덟 살 때부터 부친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일을 돕기 시작. 열네 살 때 대장간 일 시작. 열여섯 살 때 신군야학 설립. 가정 형편이 좋지 않은 청소년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고 본인도 공부함. 열여덟 살이 되자 동흥야학 설립. 동흥야학은 서울 종로구 효제초등학교의 전신. 스물세 살이 되던 1912년에는 철물점 개점. 훗날 철물점이 크게 번창해 독립항쟁에 쓰일 자금을 마련하는 데 보탬이 됨. 이듬해에는 대한광복단 조직. 올해로 순국 100주년을 맞는 김상옥 의사의 어린 시절 일대기다. 우정사업본부는 1월 27일부터 김상옥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기념우표 64만 장을 발행한다. 기념우표에는 김상옥 의사 초상화와 의거 당시 장면이 담겨 있다. 김상옥은 1913년 대한광복단 조직 이후 독립운동에 치열하게 참여한 인사다. 1916년에는 조성헌병대를 기습했고, 1919년 3·1운동에도 참여했다. 같은해 4월 항일비밀결사조직 ‘혁신단’을 통해 혁신공보를 발행했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혀 40일간 고문을 당했다. 서른한 살인 1920년에는 암살단을 조직해 일제 고관 처단에도 나섰다. 김원봉, 조소앙과 교류했고 김구, 신익희 등과 함께 임시정부 독립자금 모금도 계획했다고 한다. 1922년 김상옥 의사가 서울 용산구 후암동으로 잠입했다. 권총 4정과 폭탄 6개, 실탄 800발을 챙긴 상태였다. 본격적인 거사 활동은 이듬해 1월 시작했다. 김상옥 의사는 1923년 1월 12일 독립운동 탄압의 본거지였던 종로경찰서를 폭파했다. 종로경찰서는 독립운동가를 고문하던 곳으로 악명이 높았다. 김상옥 의사의 의거로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사원 최소 5명이 상처를 입었다. 건물 유리창이 깨지고 게시판과 벽이 파손됐다. 당시 민심의 동요가 두려웠던 조선총독부는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경력과 병력을 동원해 범인 색출에 나섰다. 취재 제한을 둬 언론마저 통제했다. 닷새 뒤에는 일제 사이토 총독을 서울역에서 암살하려 했으나 일제 형사들의 기습을 받았다. 김상옥 의사는 일제 형사들을 피해 남산을 종단해 탈출했다. 당시 일제 군경 1000여명의 포위를 뚫었다고 전해진다. 김상옥 의사는 이후 왕십리, 수유리, 효제동으로 은신처를 바꿔가며 몸을 숨겼다. 1923년 1월 22일 일제 군경 1000명이 다시 포위망을 좁혀왔다. 김상옥 의사는 양손에 권총을 들고 가옥 5개를 옮겨가며 저항했다. 최소 16명의 일제 군경을 사살했다고 전해진다. 김상옥 의사는 3시간가량 전투를 벌이다가 남은 실탄 1발로 자결했다. 순국 당시, 그의 나이 서른네 살이었다. 정부는 1962년 김상옥 의사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김원진 전국사회부 기자 2023.01.27 14:26

    • [주간 舌전]“포로 폭파 안 한 게 어디냐”

      정치 주간 舌전

      [주간 舌전]“포로 폭파 안 한 게 어디냐”

      북한의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에 대해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한 말이다.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인 송 의원의 발언은 삽시간에 논란의 중심에 섰다. 비난 여론이 높아지자 송 의원은 페이스북을 통해 “남북 간의 공동연락사무소는 엄연한 대한민국의 재산”이라며 “북한이 대포로 폭파하든 다이너마이트로 하든 대한민국의 재산에 대한 파괴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고 수습에 나섰다. 발언 다음 날인 6월 17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는 자신의 발언이 “‘불행 중 다행이다’라는 의미”라고 해명했다.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의원 / 김창길 기자 하지만 야당은 송 의원의 발언을 두고 비판을 이어갔다. 미래통합당 황규환 부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국민의 불안감과 국가 안위는 생각지 않은, 귀를 의심케 하는 발언”이라며 “대체 어느 나라 국회의원이냐”고 말했다. 북한의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에 따른 정부 비판이 쏟아졌다. 미래통합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은 6월 17일 “그동안 문재인 정부의 남북관계 자체가 다 허구였다는 사실이 입증됐다”고 말했다. 미래통합당 유승민 전 의원 역시 페이스북을 통해 “지난 3년 동안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이 한없이 ‘비굴하고 굴종적인’ 저자세의 대북유화책을 쓴 결말”이라며 “이게 평화냐”고 비판했다. 한편 김연철 통일부 장관은 6월 17일 최근 남북관계 악화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며 사의를 표명했다. 김 장관은 “남북관계 악화에 대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반기웅 기자 2020.06.19 15:22

    • 사회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항저우…폭파 운명을 안고 개통한 ‘첸탕장대교’

      중일전쟁이 전면화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첸탕장대교가 1937년 11월 17일 개통되었다. 그러나 다리의 운명은 일본군이 항저우를 침입하는 그날에 폭파되어야 했다. 결국 그날은 오고야 말았다. 12월 23일 오후, 다리를 폭파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1937년 11월 17일, 첸탕장(錢塘江)대교가 전면 개통했다. 첫 차량이 대교를 지나가자 이를 지켜보던 수많은 이들이 박수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첸탕장대교는 중국이 자력으로 만든 최초의 대교였다. 당시만 해도 중국의 현대식 대교는 죄다 외국인이 만든 것이었다. 황허(黃河)대교는 벨기에인, 화이허(淮河)대교는 영국인, 쑹화장(松花江)대교는 러시아인이 만들었다. 첸탕장대교는 무려 1453m에 달한다. 조수가 거세기로 유명한 첸탕장에 다리를 놓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첸탕장 바닥에는 40m에 달하는 진흙층이 있다. 이 진흙층을 뚫어야만, 다리를 지탱해줄 말뚝을 강바닥의 암석층에 박을 수 있다. 첸탕장대교 전 구간에 걸쳐 1400개나 되는 말뚝을 촘촘히 박아야 했다. 이밖에도 많은 난제를 극복하고 첸탕장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놓인 것이다. 그것도 아래층에는 기차가 달리고 위층에는 자동차가 달릴 수 있는 다리! 이 일을 해낼 중국의 엔지니어는 없다고 장담하던 이들을 무색하게 만든 사람, 바로 마오이성(茅以升, 1896~1989)이다. 마오이성은 열여섯에 탕산(唐山) 노광학당 예과에 입학했다. 그해(1911)에 신해혁명이 일어났다. 이듬해 가을 마오이성은 학교를 방문한 쑨원의 강연을 듣게 된다. 쑨원은 학생들에게 강조하길, 중국의 혁명이 성공하려면 군사적 무장뿐 아니라 건설도 필요하다고 했다. 이때 마오이성은 교량 전문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마침내 중국 교량사의 이정표가 되는 첸탕장대교 건설의 주역이 되었다. 육화탑 중국이 자력으로 만든 최초의 대교 1937년 9월 26일에 첸탕장대교의 아래층인 철도교가 우선 개통된 데 이어서, 11월 17일에는 위층의 도로교까지 개통되었다. 이날, 박수치며 환호성을 지르는 군중 속에서 마오이성의 마음은 어둡기만 하다. 정작 누구보다도 기뻐해야 할 사람인데 말이다. 바로 전날에 그는 매우 비밀스런 일을 했다. 첸탕장대교를 언제든 폭파시킬 수 있는 준비를 해놓으라는 정부의 명령을 받고 밤새워 100여개의 도화선을 설치한 것이다. 몇 달 전 7월 7일의 노구교(蘆溝橋) 사건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불길함을 직감한 마오이성은 다리 아래에 폭약을 설치할 공간을 마련해 두었다. 원래 설계에는 없었던 것이다. 8월 13일 쑹후 전투로 중일전쟁이 전면화된다. 결국 상하이가 함락되고, 항저우도 코앞에 위험이 닥쳤다. 이 긴박한 상황 속에서 첸탕장대교가 개통되었던 것이다. 도화선까지 연결된 폭약이 다리 아래에 설치되어 있던 1937년 11월 17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첸탕장대교의 탄생을 축하했지만 마오이성은 눈물을 삼켰다. 자신의 손으로 탄생시켰으나 곧 자신의 손으로 소멸시켜야만 하는 다리의 운명 때문에. 일본군이 항저우를 침입하는 그날에 다리는 폭파되어야 했다. 결국 그날은 오고야 말았다. 12월 23일 오후, 다리를 폭파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도화선이 타들어가고 굉음이 나고 다리는 파괴됐다. 마오이성은 이 일을 두고 지은 시(눈물을 흘리면서 첸탕과 이별하며(灑淚別錢塘))에서 이렇게 말했다. “눈물 흘리며 다리를 폭파해 길을 끊었네. 오행에서 화(火)가 부족했는데 정말 화가 왔구나. 다리를 복원하지 않으면 사내가 아닐지니.” 첸탕장다리를 나타내는 전당강교(錢塘江橋)라는 글자에 오행의 금(金)·토(土)·수(水)·목(木)은 있는데, 화(火)만 없다. “정말 화가 왔다”는 건 다리의 폭파(爆破)로 오행이 다 갖추어졌다는 의미다. 시에는 다리를 복원하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드러난다. 실제로 중국이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마오이성은 첸탕장대교 복원을 주도했다. 이 다리는 지금까지도 건재하다. 첸탕장대교 북쪽 기슭의 첸탕장대교기념관에서는 이 다리의 역사와 마오이성에 관한 자료를 살펴볼 수 있다. 기념관 근방의 동상은 바로 마오이성이다. 1937년에 폭파된 첸탕장대교 대교를 내려다보는 육화탑의 전설 드넓은 첸탕장과 그 위를 가로지르는 첸탕장대교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서호의 남쪽 월륜산(月輪山)에 세워진 육화탑(六和塔)이다. 육화탑이 세워진 시기는 오월(吳越)의 마지막 왕 전홍숙 때다. 첸탕장의 거센 조수를 진압하고자 세운 것이라고 한다. 육화탑이라는 명칭은 불교의 ‘육화경(六和敬)’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육화탑을 육합탑(六合塔)이라고도 하는데, 동서남북 사방과 위아래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다. 신기하게도 육화탑을 세운 이후 거센 조수가 많이 진정되었다고 한다. 또 육화탑은 첸탕장을 비추는 등대 역할까지 했다. 육화탑의 높이는 60m에 달한다. 겉으로는 13층처럼 보이지만 실제 내부는 7층이다. 각층마다 걸린 편액이 매우 인상적이다. 청나라 건륭제가 육화탑을 찾았을 때(1751) 남긴 것이라고 한다. 초지견고(初地堅固), 이체구융(二諦俱融), 삼명정역(三明淨域), 사천보망(四天寶網), 오운부개(五雲扶蓋), 육오부대(六鰲負戴), 칠보장엄(七寶莊嚴). 이상의 편액은 모두 불교의 가르침과 관계가 있다. 건륭제가 이곳에 남긴 자취는 이뿐만이 아니다. 육화탑 근처의 비정 안에 세워진 어비 역시 건륭제의 친필이다. 13줄에 달하는 비문은 육화탑의 역사, 건륭제가 첸탕장을 노닐며 느낀 감회 등을 담고 있다. 육화탑에는 많은 이야기가 얽혀 있다. 먼저 육화탑 근처에 있는 남자아이 석상의 사연부터 알아보자. 오른손에 커다란 돌덩이를 쥐고 있는 이 아이, 노려보는 표정이 심상찮다. 전설에 의하면, 육화라는 아이의 아버지가 고기잡이하러 나갔다가 첸탕장에 빠져 죽었다. 이윽고 어머니 역시 해일에 휩쓸려갔다. 이에 육화는 첸탕장을 메워버리겠다며 날마다 강을 향해 돌을 던졌다. 돌 때문에 용궁은 평안한 날이 없었다. 결국 용왕은 육화의 어머니를 돌려보냈다. 그 이후로 첸탕장의 해일도 많이 잠잠해졌다. 이를 기념해서 사람들이 탑을 세웠는데, 그게 바로 육화탑이라고 한다. 첸탕장과 맞짱 뜬 사람이 또 있다. 바로 오월을 세운 전류다. 그는 첸탕장에 방조제를 쌓으려 했다. 하지만 거센 조수로 인해 쌓기만 하면 무너지고 말았다. 시종이 말하길, 조수의 신 때문이라고 했다. 전류는 조수가 가장 크게 일어나는 날을 기다렸다. 조수의 신의 생일이라는 음력 8월 18일, 전류는 궁수들을 이끌고 일제히 조수를 향해 화살을 쏘았다. 화살이 빗발치듯 쏟아져 내렸고 조수는 물러갔다. 이후 전류는 무사히 방조제를 쌓을 수 있었다. 백성들은 전류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서 이 방조제를 ‘전당’이라고 명명했다. 전류의 ‘전(錢)’에 제방을 의미하는 ‘당(塘)’이다. 전당강(첸탕장)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조수의 신에 관한 이야기는 물론 전설이다. 어쩌면 전류는 실제로 조수를 향해 활을 쏘았을지도 모른다. 일종의 주술 의식으로서 말이다. 아무튼 전류의 수리사업을 통해 항저우가 큰 혜택을 누린 것은 사실이다. 서호 동남쪽의 ‘전왕사(錢王祠)’는 바로 전류를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전왕사는 유랑문앵공원 경내에 있다. ‘유랑문앵(柳浪聞鶯)’은 버드나무가 파도치고 꾀꼬리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의미다. 서호십경의 하나인 이곳을 둘러보면서 전왕사도 놓치지 말고 들러보시길. 다시 육화탑 이야기로 돌아가기로 한다. 이곳에는 유독 인물상이 많은데, 청동좌상의 스님이 누군지 먼저 알아보자. 바로 육화탑을 중건했던 지담(智曇) 스님이다. 북송 휘종 선화 3년(1121)에 육화탑은 전화에 소실되고 만다. 남송이 들어서고 고종이 육화탑을 중건하고자 했을 때(1152) 지담 스님이 그 일을 떠맡겠다고 자원했다. 지담 스님은 조정의 돈을 일절 받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고 사방에서 자금을 모아 10년 동안 애쓴 끝에 마침내 육화탑을 다시 준공(1163)했다. 이후에도 육화탑은 천재 혹은 인재로 여러 차례 파괴되었다. 하지만 늘 재건·보수되며 그 자리를 지켰다. 970년에 처음 세워졌던 육화탑이 지금도 육화탑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탑을 지켜온 많은 이들 덕분이다. 지담 스님의 청동좌상은 바로 그들의 노력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리라. 첸탕장 조수를 향해 활을 당기는 전류의 동상 지담 스님의 청동좌상이 있는 곳에서 더 올라가면 ‘육화 전고(典故)’라고 명명된 곳이 나온다. 여기에는 서로 다른 재료로 만든 인물상 세 개가 있다. 용맹하게 활을 당기고 있는 청동상이 바로 전류다. 한백옥상과 화강암상은 각각 의 노지심과 무송이다. 양산박의 이 두 호걸은 조정에서 주는 벼슬을 마다하고 육화사로 들어왔다. 특히 노지심은 첸탕장의 조수와 깊은 인연이 있다. 조수가 크게 밀려오던 날, 노지심은 그 소리를 듣고 전쟁의 북소리라고 생각했다. 타향 출신이라서 이곳의 조수에 대해서 몰랐던 것이다. 그 소리가 첸탕장의 조수 소리인 것을 안 그는 깜짝 놀랐다. 일찍이 그의 사부가 일러준 말 때문이다. “하(夏)를 만나 사로잡고 납(臘)을 만나 사로잡는다”라는 사부의 말대로, 일찍이 노지심은 적장 하후성을 사로잡았으며 농민 기의를 일으킨 방랍 역시 생포한 바 있다. 사부는 노지심이 “조신(潮信)의 소리를 들으면 원적(圓寂)할 것”이라고도 했는데, 이제 그때가 된 것이다. 조신이란 일정한 시기에 생겨나는 조수를 의미하고, 원적이란 스님의 죽음을 뜻한다. 과연 바로 이날 노지심은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천하제일의 조수’ 육화탑의 주소는 ‘항저우시 서호구(區) 지강로(路) 16호’다. ‘지강’은 바로 첸탕장이다. 첸탕장은 저장성에서 가장 큰 강이다. 강물의 흐름이 구불구불하기 때문에 지강(之江), 절강(折江), 절강(浙江)이라고도 했다. 저장성이라는 성의 이름 역시 저장(절강)이라는 강의 명칭에서 유래한 것이다. 안후이성에서 발원해 저장성을 가로질러 항저우만(灣)으로 흘러드는 첸탕장의 총길이는 589㎞에 달한다. 첸탕장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서 생겨나는 조수는 ‘천하제일의 조수’라고 불릴 정도로 장관이다. 바닷물이 육지를 향해 밀려오면서 생겨나는 이곳의 해일은 아마존 강의 ‘포로로카’에 비견된다. 첸탕장의 해일은 달과 태양의 인력, 지구의 자전으로 인한 원심력, 항저우만의 특수한 지형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이다. 지구를 끌어당기는 천체의 인력 중에서도 달의 영향이 가장 크다. 때문에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조수간만의 차가 유난히 크다. 첸탕장의 해일을 구경하기에 가장 적당한 시기는 음력 8월 18일 즈음이다. 이때 첸탕장에서 그토록 큰 해일이 발생하는 것은 나팔 형태의 지형 때문이다. 하만(河灣)의 입구는 폭이 100㎞에 달하는데, 강의 상류는 폭이 불과 2㎞다. 때문에 역류하는 바닷물의 유속이 빨라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나팔 형태의 구간에서 강의 상류 쪽 바닥에 모래 둔덕이 형성되어 있다. 바다와 만나는 지점의 수심은 10m인데, 강폭이 급격히 좁아지는 상류의 수심은 2m에 불과하다. 밀려드는 바닷물이 이 둔덕에 이르면 마치 벽에 부딪친 듯 파고가 높이 일게 마련이다. 첸탕장 해일의 굉음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음력 8월 18일 즈음이면 첸탕장 해일을 보기 위해 각지에서 수많은 인파가 몰려든다. ‘관조절(觀潮節)’ 혹은 ‘조신절(潮神節)’이라고 하는 이때,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항저우에서 50㎞ 떨어진 곳의 하이닝(海寧)이다. 청나라 때 강의 흐름이 바뀌면서, 첸탕장의 해일을 구경하기 가장 좋은 곳 역시 항저우에서 하이닝으로 바뀐 것이다. 일찍이 남송의 고종은 첸탕장 해일 소리를 듣고 금나라 병사가 쳐들어온 줄 알고 혼비백산한 적이 있다. 이후 그는 첸탕장 조수를 즐겨 구경했다. 흥미롭게도 남송 말에 원나라 군대가 수도 항저우로 쳐들어왔을 때, 마침 첸탕장의 대역류가 발생할 시기였다고 한다. 원나라 측에서는 첸탕장의 조수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첸탕장 가에 주둔했다. 남송 조정에서는 곧 조수가 밀려와 원나라 병사를 죄다 휩쓸어갈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사흘이 지나도록 대역류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첸탕장의 조수는 주기대로 생겨나게 마련이다. 다만 그 크기에 차이가 있는데, 당시에 원나라 병사들을 휩쓸어갈 정도의 대역류는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왕조의 운명이 다할 징조로 여겨졌고, 과연 남송은 멸망하고 말았다. 첸탕장의 조수는 이제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다. 현대인의 마음속에 조수의 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첸탕장을 메워버리겠다며 돌을 던진 육화, 첸탕장을 향해 화살을 쏘았던 전류, 육화탑을 세웠던 이들, 그들이 두려워하고 이겨내고자 했던 첸탕장에 놓인 다리 위로 기차와 자동차가 내달린다. 첸탕장대교가 전면 개통하던 날, 다리 아래는 폭약이 있었다. 일본군이 항저우에 침입하던 날, 다리는 폭파되었다. 인간이 대자연의 위협을 몰아낸 그 자리에 스스로 불러들인 것, 그것의 본질을 우리는 과연 얼마나 자각하고 있을까.

      2016.05.10 16:15

  • 레이디경향

    • 12년 만에 공개 석상에 모습 드러낸 KAL기 폭파범 김현희

      화제

      12년 만에 공개 석상에 모습 드러낸 KAL기 폭파범 김현희

      1987년 11월 발생한 KAL 858기 폭파 사건의 범인 김현희. 그간 철저히 모습을 감추고 숨어 살던 그녀는 최근 언론에 나와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지난 3월 11일에는 북한에 납치돼 그녀에게 일본어를 가르친 다구치 야에코(북한명 이은혜)의 일본 가족들과 만났다. 12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김현희는 다소 여윈 모습이었으나‘화제의 미모’는 여전했다.일본 납치 피해자와 상봉한 김현희 지난 3월 11일 부산은 때 아닌 한국과 일본 언론의 취재 열기로 들썩였다. 그간 자취를 감추고 살던 KAL 858기 테러리스트 김현희(47)가 12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21년 전에 일어난 KAL기 폭파 사건은 115명의 희생자를 냈다. 북한의 테러라는 점에서 온 나라는 충격에 휩싸였다. 문제는 대형 참사임에도 불구하고 희생자들의 시체나 비행기의 블랙박스 등 사건을 입증할 만한 물증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희생자의 유족들은 지금도 이 사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의문이 풀리지 않는 이상 사건의 핵심 인물인 김현희는 늘 언론의 타깃이 됐다. 사형 판결을 받은 지 불과 16일 만에 사면받은 김현희와 언론의 숨바꼭질은 끊임없이 계속돼왔다. 그녀의 입으로도 그간의 생활을 ‘피난 생활’이라고 표현할 만큼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세간의 이목을 피했다. 그런 그녀가 12년 만에 갑자기 자청해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이유일까? 김현희는 지난 1월, 한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에서 일본어를 가르친 다구치 야에코의 가족을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다구치 야에코는 1978년 니가타에서 22세의 나이에 북한에 납치되어 ‘이은혜’라는 이름으로 북한 공작원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쳤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다구치의 가족이 그녀의 요청을 수용하면서 이번 상봉이 성사된 것이다. 김현희와 다구치 가족의 상봉 및 기자회견이 진행되는 현장의 경계는 매우 삼엄했다. 장소와 시간은 회견을 시작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기자들에게 통보됐다. 경찰이 3중 경비망을 편 가운데 입장하는 기자들과 소지품을 검사하기 위해 금속 탐지기가 설치됐다. 액체가 담긴 용기는 휴대가 불가능했다. 사복 경찰 100여 명이 삼엄한 경비를 펼친 장소에 김현희가 탄 승합차가 도착했다. 경찰 특공대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회견장으로 들어선 김현희는 다구치 가족과 상봉했다. 그녀는 다구치의 장남인 고이치로를 보고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후 90분가량 비공개 면담이 이뤄졌다. 김현희는 1978년 6월 다구치씨가 북한으로 납치된 이후 생활에 대해 비교적 소상하게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은 그동안 다구치가 1978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밝혔지만 김현희는 1987년까지도 생존했다고 주장했다. 이번 기자회견은 KAL기 사건 진상뿐만 아니라 일본 납치 피해자에 대한 문제를 이슈화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비공개 면담 후 다시 회견장으로 등장한 두 사람은 팔짱을 낀 다정스러운 모습이었다. 김현희는 회견에 앞서 소감을 표명하며 한일 정부가 인도적 문제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만남이 성사됐다고 말했다. “어려운 조건에서도 다구치씨의 가족을 만나게 해줘 한일 양국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북한에서 일본어를 가르쳐준 다구치씨의 아들과 가족을 만난다는 사실에 며칠 전부터 잠을 못 이뤘어요. 아들이 어머니를 닮아서 핸섬하네요. 다구치가 가족을 만난 걸 알면 얼마나 기뻐할까요. 여기 함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합니다.” 1 김현희는 경찰 특공대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12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2 일본 대사관은 일본 납치 피해자들에 관한 정보 자료들을 참석한 기자들에게 배포했다. 3 김현희는 “안아봐도 되겠습니까? 희망을 가지세요, 어머니는 살아 있을 거예요”라며 다구치의 장남을 위로했다. 4 김현희를 취재하기 위해 3백 여 명의 기자가 참석했다. 5 90분간의 면담을 마치고 김현희와 다구치의 장남이 한결 여유로운 모습으로 회견장에 돌아왔다이후 김현희는 일본 언론의 취재에 응하며 다구치 야에코, 요코다 메구미 등 납치 피해자들의 생사 여부에 대한 자신의 소견을 밝혔다. 김현희, 그간 어떻게 살아왔나 1997년 12월 김현희는 전직 안기부 직원 정 모씨와 극비리에 결혼했다. 이후 그녀는 언론이나 공개 석상에 나온 적이 없다. 두 자녀를 낳았고 남편 정 모씨는 안기부를 그만두고 형과 함께 사업 등을 해왔다고 알려졌다. “저는 결혼 이후, 사회와는 거리를 둔 채 살아왔습니다. 돌아가신 분과 유가족 분들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서 조용히 살려고 했습니다. 다 아시다시피 지난 정부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데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는 좀 그렇습니다. 아무튼 현 정부가 지난 정부(노무현 정부)에 있었던 일을 조사하고 있다고 하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녀가 언급한 ‘그런 일’이란 무엇인가. 최근 김현희는 “노무현 정권이던 2003년에 국정원이 KAL기 폭파 조작설을 퍼뜨리기 위한 목적으로 나를 방송에 출연시키려 했다. ‘KAL기 폭파를 북한 김정일이 지시하지 않았다’는 취지의 고백을 하도록 강압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번 기자회견에선 ‘그런 일’이라는 표현을 쓰며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를 꺼려했다. 그러나 ‘KAL기 폭파 조작설’에 대한 질문만큼은 목소리가 격앙되고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북한이 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아직까지 의혹이라고 얘기하는 건 좀 그렇습니다. 20년이나 지난 사건을 누가 한지도 모른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일 뿐입니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KAL기 폭파는 북한이 한 테러이고 저는 더 이상 가짜가 아닙니다.” 현재도 부모, 형제의 유품 한 조각 발견하지 못한 유가족들은 실낱같은 희망을 잡고 김현희에게 면담 요청을 계속하고 있다. 그녀에게 앞으로 그들과 면담할 계획이 있는지 물었다. “유가족들이 KAL기 폭파 사건이 북한이 저지른 테러 사건이라는 걸 인정한다면, 면담 이외에 다른 목적이 없다면, 그들 요구에 응할 수 있습니다.” 김현희는 짧은 기자회견을 끝내고 현장을 빠져나갔다. 그녀는 일본인 납치 사건에 대한 답변을 제외하고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대부분 분명하지 않았다. 두루뭉술한 답변과 곤란한 질문에는 회피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그간 쌓여온 의문을 풀기에는 역부족이다.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김현희는 어느 하나 확실해진 것 없이 쟁점만을 남기고 돌아섰다. 수면 위로 떠오르는 쟁점은 두 가지다. KAL 858기 폭파 사건의 진실. 그리고 노무현 정부가 그녀에게 ‘조작 발언’을 강요당했는지 여부다. 기자회견 이후 그녀 발언의 진위 여부를 위해 국회 차원의 청문회를 추진하기로 했다. 이미 한나라당 소속 구상찬 의원이 청문회 준비를 위해 김현희 측과 접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청문회로 유가족들의 마음이 위로될 수 있도록 사건의 진상이 조금이나마 규명될 것인지, 아니면 지난 정부와 현 정부의 정치적 공방으로 막을 내릴지 좀 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모든 쟁점의 한가운데에 김현희가 있다.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이성훈

      2009.04.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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