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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미국 ‘빅테크 규제’ 충돌···한국 플랫폼법에도 불똥?트럼프 ‘관세 보복’ 경고 속 EU서 구글·애플 강경 제재로 갈등 증폭 한국, EU 모델로 플랫폼 규제 법안 추진…‘미 압력 올라’ 상황 주시 온라인 플랫폼법 제정 촉구 공동행동을 비롯한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지난 1월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온라인 플랫폼 독점 규제법 및 공정화법’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유럽연합(EU)의 빅테크 규제에 ‘관세 보복’을 경고한 가운데, EU가 구글과 애플을 정조준한 강경 제재를 발표하며 양측의 갈등이 더욱 첨예해지고 있다. EU의 디지털시장법(DMA)을 참고해 플랫폼 규제 법안을 추진해온 한국 역시 미국의 외교·통상적 압력에 직면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EU 집행위원회는 지난 3월 19일(현지시간) 구글이 검색 결과에서 자사의 항공권 및 호텔 예약 서비스를 우선 노출한 ‘자사 우대’ 행위가 디지털시장법을 위반했다고 결론지었다. EU는 구글이 구글플레이 내에서 앱 개발자들에게 자사 결제시스템 사용을 강제하고 이로 인해 소비자와 경쟁 서비스의 선택권을 제한한 점도 문제 삼았다. 애플에 대해서는 아이폰 생태계를 개방해 타사 스마트워치나 헤드폰 등과의 연동이 가능하도록 상호운용성을 강화하라고 요구했다. 이 같은 시정조치는 위반 시 전 세계 매출의 최대 10%에 해당하는 과징금이 부과될 수 있는 중대한 수준으로, 디지털시장법이 규정한 최고 수준의 제재에 해당한다. 폐쇄적이고 통합된 생태계를 자사의 전략이자 정체성으로 삼아온 애플은 EU의 요구에 즉각 반발하며 강경 대응에 나섰다. 애플은 “우리가 개발한 기능을 규제를 받지 않는 경쟁사에 무상으로 넘기라는 요구”라며 “기업의 혁신을 저해하는 과도한 개입”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구글은 블로그 게시글에 “(EU 집행위의 발표는) 유럽의 기업들과 소비자들에게 피해를 주고 혁신을 방해하며 보안을 약화시키고 제품 품질을 저하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트럼프, 빅테크와 관련 이율배반적인 모습 이러한 규제는 지난 2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EU가 비관세 장벽을 통해 미국 기술기업을 갈취하고 있다”며 보복 관세를 경고한 이후 단행된 것으로, EU와 미국 간의 긴장을 한층 더 증폭시키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국내적으로는 빅테크 기업에 대한 규제 기조를 일정 부분 유지하면서도, 해외에서 미국 기업에 대한 규제가 이뤄질 경우에는 강력히 반발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여왔다. 이황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트럼프 정부는 빅테크와 관련해서는 다소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라며 “대내적으로는 당초 예상과 달리 바이든 전 행정부의 구글 반독점 소송 기조를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반면, 외국에서 미국 빅테크 기업에 대한 시정조치를 요구하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런 태도로 볼 때 이번에 발표된 규제에 대해서도 미국 정부가 강하게 반발할 가능성이 높다”라고 말했다. EU와 미국의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디지털시장법을 모델로 플랫폼 규제 법안을 추진해왔던 한국 역시 그 여파와 국제적 반응을 주시하고 있다.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지난 2월 6일 인사청문회에서 한국을 명시적으로 언급하며, 각국의 플랫폼 규제 움직임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미국 기업이 해외 시장에서 차별받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며 자국 기업이 해외 디지털 규제로 인해 차별받을 경우 구체적 대응에 나서겠다고 경고했다. 한국에서는 배달 수수료 논란, 쿠팡의 자사 우대, 카카오 모빌리티의 ‘콜 몰아주기’ 등 플랫폼 기업의 불공정 관행이 누적되면서 자영업자 등 시장 참여자들의 피해가 커졌고, 이에 따라 플랫폼 독점을 규제하는 입법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현재 국회에는 주로 야당 주도로 플랫폼 사업자의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 방지에 관한 ‘온라인 플랫폼 독점규제’ 법안과 플랫폼과 이용사업자와의 관계를 규율한 ‘온라인 플랫폼 중개거래 공정화’ 법안 등 총 17개의 법안이 발의돼 있다. ‘플랫폼 독점 규제’ 법안은 플랫폼 사업자가 시장지배적 지위를 남용하지 못하도록 자사 우대, 끼워팔기, 멀티호밍(여러 플랫폼 동시 사용) 제한, 최혜대우 요구 등 4대 반경쟁적 행위를 금지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정부는 당초 야당의 법안대로 시장지배적 사업자를 사전에 지정하는 방식의 규제를 도입하려 했으나, 재계 반발에 부딪혀 기존 공정거래법 개정으로 방향을 조정했다. 이에 따라 4대 반경쟁 행위를 규제하되, 지배적 플랫폼을 사전 지정하지 않고 사후에 추정하는 방식을 택했다. ‘온라인 플랫폼 중개거래 공정화법’은 플랫폼 사업자와 입점업체 간 불균형한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계약서 교부 의무, 계약 해지 시 사전 통지, 이용사업자 단체 구성권 등을 규정하고 있다. 플랫폼 규제 입법은 문재인 정부 시절부터 추진됐으나 여야 간 입장 차이와 업계의 반발 등으로 표류하다 현재 국회 정무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더불어민주당은 해당 법안을 패스트트랙으로 처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나 트럼프 행정부가 플랫폼 규제를 비관세 장벽으로 간주할 가능성을 의식해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정무위 간사인 강준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은 “국제 정세와 국가 간 관계를 면밀히 검토할 필요는 있다”면서도 “그렇다고 해서 현재 추진 중인 입법안에 대한 의지를 후퇴시킨 것은 아니다. 해당 법안은 예정대로 추진하겠다는 입장에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미국 내 상황 다층적으로 해석할 필요” 지적도 플랫폼 규제 입법을 오랫동안 요구해온 시민사회는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서치원 민변 변호사는 “최근 배민이 포장 주문에도 수수료를 부과하겠다고 하면서 수익 극대화에 나서 논란이 커지고 있고, 이에 반발한 이들이 현재 배민 본사 앞에서 50일 가까이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라며 “이같이 갈등이 첨예한 상황에서 온라인 플랫폼 공정화법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하다. 현재 플랫폼 독점 규제법은 통상 압력 등의 이유로 책임 있게 추진되지 못한 채 표류 중이며, 온라인 플랫폼 공정화법 역시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크다”라고 전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통상 이슈를 강하게 제기하고는 있지만, 미국 내 상황을 보다 다층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남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미국의 입장을 단선적으로 해석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과거 의원실에 퀄컴이 찾아온 적이 있는데 한국이나 유럽의 독점규제법에 미국 기업들도 찬성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면서 “미국 내 기업 간에도 입장이 다르다”고 밝혔다. 이어 “독과점 규제를 강화하면 미국 기업들에도 새로운 사업 기회나 일자리가 생길 수 있다. 통상 이슈가 제기되고 있더라도 미국 내부의 목소리는 다양하다는 점을 정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은 4월 2일 각국의 비관세 장벽을 반영한 상호관세 계획을 발표할 예정으로, 미국 기업들로부터 자국 기업에 불리하게 작용한 해외 규제 사례를 수집 중이다. 디지털 통상 이슈도 협상 의제로 다뤄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거대 플랫폼과 영세 자영업자 간의 구조적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국내 규제가 새로운 통상 질서와 충돌하는 국면에 접어들게 될지가 주요한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 관계자는 “대외 환경 변화와 통상 이슈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할 시점이며 산업부와 협력해 관련 동향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송이 기자 2025.03.31 0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