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
한국철도공사 사장에 한문희 전 부산교통공사 사장한국철도공사(코레일) 사장에 한문희 전 부산교통공사 사장이 임명됐다. 코레일은 21일 신임 사장으로 한문희 전 부산교통공사 사장을 임명됐다고 밝혔다. 임기는 오는 24일부터 2026년 7월까지 3년이다....
윤지원 기자 2023.07.21 19:42
경제
한국철도공사 사장에 한문희 전 부산교통공사 사장한국철도공사(코레일) 사장에 한문희 전 부산교통공사 사장이 임명됐다. 코레일은 21일 신임 사장으로 한문희 전 부산교통공사 사장을 임명됐다고 밝혔다. 임기는 오는 24일부터 2026년 7월까지 3년이다....
윤지원 기자 2023.07.21 19:42
정치
[속보] 나희승 한국철도공사 사장 해임···문재인 정부인사 첫 해임... 한국철도공사 사장. 연합뉴스 나희승 한국철도공사(코레일) 사장이 해임됐다. 국토교통부는 지난해 오봉역 사망사고를 비롯해 영등포역 열차 궤도이탈사고 등의 책임을 물어 3일 코레일에 해임사실을...
#문재인 #윤석열 #나희승 #한국철도공사 #코레일 #오봉역사고 #원희룡 #대통령재가 #해임
류인하 기자 2023.03.03 20:28
사회
[속보]한국철도공사 노사협상 재개... 중구 서울역에 1일 철도노조 파업 안내문이 붙어 있다. 한수빈 기자 한국철도공사(코레일)와 전국철도노동조합(철도노조)가 1일 오후 11시50분 교섭을 재개했다. 철도노조는 “사측이 교섭재개를...
류인하 기자 2022.12.01 23:56
경제
손병석 한국철도공사 사장 “코레일, SR 통합이 철도 공공성에 더 유리”... 더불어민주당 의원손병석 한국철도공사 사장이 “철도의 공공성이나 비용수익 측면에서 코레일과 SR의 통합안이 유리하다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손 사장은 15일 국회에서 열린 국토교통위원회...
이호준 기자 2020.10.15 16:08
생활
레고랜드 코리아 리조트, 강원도·춘천시·한국철도공사와 테마열차 만든다국내 최초 글로벌 테마파크로 개장 예정인 레고랜드 코리아 리조트가 강원도, 춘천시, 한국철도공사와 손잡고 ‘ITX 레고랜드 테마열차’ 운영을 위한 협약을 체결한다. 이번 협약은 오는 5월 5일 레고랜드 공식개장을 앞두고, 레고랜드와 지자체 및 철도공사의 유기적인 협력을 바탕으로 ITX-청춘열차를 활용해 강원 지역의 관광을 활성화하기 위해 마련됐다. 17일 강원도청에서 진행한 협약식에는 레고랜드 코리아 리조트 김영필 사장을 비롯해 최문순 강원도지사, 이재수 춘천시장, 나희승 한국철도공사 사장 등 각 협력 기관의 주요 인사가 참석했다. 레고랜드는 본 협약에 기반해 레고랜드를 포함한 춘천의 주요 명소 이미지로 랩핑된 레고랜드 테마열차 운영에 적극 협력하고, 특히 레고랜드 테마열차 운영과 연계한 관광상품 개발 등을 함께 추진해 나갈 예정이다. 레고랜드 김영필 사장은 “레고랜드가 위치한 춘천과 다른 도시를 연결하는 주요 교통편인 ITX-청춘열차에 레고랜드 테마열차를 도입하게 되어 매우 뜻깊다. 레고랜드 방문을 고대하는 어린이 및 가족 고객들의 많은 이용을 바란다”고 전하며, “레고랜드 테마열차 운영과 향후 연계 관광 상품 개발로 강원도에 보다 많은 관광객이 유치되고, 지역 상생까지 함께 도모할 수 있길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레고랜드 코리아 리조트는 천혜의 자연이 펼쳐지는 강원도 춘천 중도에 지어져, 섬에 조성되는 최초의 레고랜드다. 약 40여 개의 놀이기구와 어트랙션을 갖춘 테마파크와 지난해 2월부터 공사를 진행 중인 레고랜드 호텔도 모습을 보이고 있다.
#11
손재철 기자 2022.03.17 13:54
야구
롯데, 한국철도공사 부산역과 공동프로모션 진행롯데가 6월부터 8월까지 한국철도공사 부산역과 내일로 티켓 공동프로모션을 진행한다고 10일 밝혔다. 이번 프로모션은 부산지역 관광 및 프로야구 활성화를 위한 것으로, 내일로 티켓 소지자 본인에 한하여 사직야구장 홈경기 현장 구매 시 1루, 3루 지정석 및 C석, 자유석을 20% 할인 된 가격에 제공한다. ‘내일로 티켓’ 이란 한국철도공사에서 판매하는 패스형 철도 여행상품으로, 만 25세 이하만 구입 가능한 열차 자유이용 패스다. 추후에도 한국철도공사 부산역과 연계하여 다양한 공동 프로모션을 논의 할 예정이다.
#롯데
김하진 기자 2015.06.10 14:51
화제
한국철도공사 허준영사장 부부의 함께하는 삶ㆍ“철도처럼 바르고 곧게, 나누는 삶 함께하겠습니다” 외무고시 출신 첫 경찰총장을 지낸 공기업 CEO. 한국철도공사(코레일) 허준영 사장은 범상치 않은 경력을 가진 인물이다. 26년간의 공직생활 동안 ‘우직한 원칙주의자’라 불렸던 그는 이제 ‘허철도’라는 닉네임을 얻었다. 한국철도의 수장으로 지낸 2년 8개월, 열차만큼이나 빠르고 쉴 새 없이 달려온 시간을 돌아봤다. 그의 곁엔 30년을 한결같이 동행해온 부인 강경애씨가 있다. 긴장과 환희의 연속이었던 2년 8개월의 시간 겨울이 성큼 다가온 11월의 저녁, 인터뷰를 위해 서울역에 있는 한국철도공사를 찾았다. 유난히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날이었다. 전국을 무대로 이른 아침부터 이어지는 격무에 지쳐있을 법도 한데 집무실에서 만난 허준영 사장(59)은 밝은 표정이었다. 오히려 “피곤하지 않냐”라며 기자에게 먼저 안부를 물어왔다. 허 사장을 처음 만난 사람들은 그의 당당한 풍채에 주눅이 드는 경우가 많다. ‘전 경찰청장’이라는 직함까지 생각하면 더욱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그와 몇 마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경력과 외모에서 오는 선입견은 쉽게 사라진다. 적재적소에 발휘되는 재치와 유연한 사고, 흔들리지 않는 원칙과 신념은 원칙가인 동시에 개혁가로서 허준영식 리더십을 입증해왔다. 2009년 3월 사장 취임 이후 다사다난했던 2년 8개월, 철도 조직의 수장으로서 벌써 세 번째 연말을 보내고 있다. 그는 한국철도공사 사장으로 보낸 그간의 시간들을 “긴장과 환희의 연속”이라고 말했다. “철도는 밖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안에서 겪어보니 할 일도 많고 발전 가능성도 무궁무진한 분야예요. 힘들었겠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돌이켜보면 항상 긴장하며 지냈지만 힘들었다는 생각은 거의 안 듭니다.” 허 사장이 취임할 당시만 해도 철도공사는 몇 가지 과제를 안고 있었다. 계속되는 거액의 적자로 재정난이 이어지고 있었고 임금 협상을 둘러싼 강경 노조와의 갈등도 심화되고 있었다. 그는 결단과 소통을 통해 차근차근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노사 상생경영으로 갈등을 풀고 기술혁신으로 철도를 재정비했다. 에코 철도공사로 친환경적 철도 시대를 열었고 무엇보다 철도가 국민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성과를 인정받아 최근 공기업 경영평가에서 14개 기관 중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현재 철도공사는 2005년 출범 이후 매년 갈등을 빚어오던 노조와 2년 연속 무쟁의 임금 협약 체결을 앞두고 있다. “강성으로 유명한 철도 노조와 맞섰다고 해서 외부에서는 저를 그보다 더한 강성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요. 요즘은 그렇게 해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신뢰 없이는 불가능해요. 철도의 주인은 국민입니다. 사용자 역시 국민이고요. 노동자와 회사가 노조와 사용자의 관계가 아닌 노조와 경영자의 관계가 되어 함께 마음을 모아 국민을 잘 모시는, 그런 관계로 가야 합니다.” 물론 쉽지만은 않았다. 피할 수 없는 인원 감축으로 힘든 결단을 내려야 했지만 회초리 드는 부모 심정이 어찌 편할 수 있었을까. 마음은 아프지만 국민을 모시는 입장에서 내린 최선이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경찰 시절부터 유명했던 우직함과 뚝심은 철도공사가 위기를 넘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는 밑바탕이 됐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고난을 고난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올 초 광명역에서 열차 탈선 사고가 발생했을 때도 비상체제에 돌입해 문제를 해결하고 기술력 보완에 총력을 기울이는 한편, CEO 입장에서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조직의 수장이 흔들리면 직원들의 사기가 저하되고 오히려 그로 인해 상황이 더 악화될 수 있거든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직원들이 지나치게 위축되지 않도록, 그리고 국민이 불안하지 않도록 위로해야 하는 책임이 있어요. 그걸 동시에 하려면 항상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고 전화위복으로 만들어 나아가는 긍정적인 자세가 필요해요. 힘들었다는 생각보다는 우리나라 철도가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우리나라 철도는 상상을 추월하는 투자와 발전이 예약되어 있어요. 그에 걸맞는 준비를 하려면 할 일이 많습니다. 지금이 중요한 시점이라고 봐요. 하루하루 가슴 벅찹니다.” 30년을 한결같이, 아내는 ‘내조의 여왕’ 그의 하루 일과는 새벽 다섯 시에 시작된다. 보통 네 시쯤 일어나 자전거로 여의도를 한 바퀴 돌고 여섯 시 전에 출근하는데 철도공사 본사가 있는 대전에서 회의가 열리는 날엔 KTX를 타고 일곱 시 반쯤 대전에 도착한다. 서울과 대전을 오가던 일상에 얼마 전 철도공사가 공항철도를 인수하며 인천까지 추가됐다. 취임 이후 기차 이동거리만 10만km, 하루가 짧게 부지런히 전국을 누볐다. “될 수 있으면 적게 자려고 해요. 잠은 죽은 뒤에 실컷 잘 수 있잖아요. 보통 네다섯 시간 정도 자는데 중간에 잠이 깨도 다시 잠을 청하지는 않아요. 젊은 시절부터 시작된 습관이에요. 젊었을 땐 새벽 두세 시에 눈이 떠지면 밖에 나가 조깅을 했는데 영양경찰서장 시절에는 새벽에 조깅하다 파출소 순찰차에 검문도 당하고 그랬어요(웃음).” 1980년 외무고시에 합격해 프랑스와 영국에서 외교관 생활을 하던 그는 1984년 고시생 특채로 경찰이 됐다. 당시에도 외교관은 선망의 직업이었다. 보통사람들이 누리기 힘든 멋과 낭만이 가득한 도시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경찰에 투신한 이유는 바로 어릴 적부터 간직해온 꿈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어른들이 장래희망을 물으면 다른 아이들은 대통령, 장군을 이야기하는데 저는 교통순경이 되고 싶다고 했어요. 어린 마음에 단순히 교통순경이 멋있어 보여 그랬을 수도 있지만 나이가 들면서 경찰만큼 숭고한 사명을 가진 직업이 없다는 생각이 확고해지더군요.” 결국 그는 외무부에서 일하던 중 고등고시 출신 경찰 특채에 응모해 당당히 경찰에 임명된다. 당시 “많은 이들이 선망하는 직업인 외교관을 그만두고 왜 경찰이 되려 하느냐”라는 면접관의 물음에 그는 “외교관보다 경찰이 더 좋습니다”라고 대답했고 그 말은 진심이었다. 물론 주위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경찰이 된 직후 처가에 갔는데 장모님께 친구분이 사위 직업을 물어봤나 봐요. ‘우리 사위 내무부에서 일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걸 듣고 ‘장모님께서 제 직업을 부인하신다면 이 결혼 무르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어요. 장모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경찰직은 자긍심과 사명감 없이는 수행하기 힘든 직업이거든요.’ 가까운 이들에게 먼저 인정받아야겠다는 생각에 단호하게 말씀드렸고 다행히 장모님도 그의 뜻을 따라주셨다. 그보다 외교관에서 때론 위험한 범죄와 맞서야 하는 경찰이 된 남편을 아내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남편이 오랜 시간 생각해온 일이고 또 사명으로 시작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반대하지 않았어요. 한번 마음먹은 것은 해내고야 마는 사람이거든요.” 부드러운 목소리, 온화한 인상. 잠시 동안의 마주침에도 따뜻함이 느껴지는 부인 강경애씨는 스물여섯 살에 허준영 사장을 만나 이제껏 그의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왔다. 미국 유학파 출신의 커리어우먼이었던 그녀는 결혼 후 30년 동안 전업주부로 묵묵히 가정을 지킨 ‘내조의 여왕’이기도 하다. “결혼 당시 기업체에 근무하던 아내는 월급이 50만원이 넘는 고소득자였어요. 반면 외무부 사무관이던 저는 월급이 18만원 정도였죠. 장남인지라 아내가 맏며느리 역할을 잘해주었으면 하고 바랐는데 그런 제 뜻을 따라서 결혼하자마자 직장을 그만두고 봉천동에서 시집살이를 시작했어요.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였던 탓에 집사람 마음을 헤아리지도 않고 시집살이를 시킨 게 아닌가 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데 자기는 가정주부가 더 좋다며 미안해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항상 고마워요.” 든든한 버팀목, 사랑하는 가족 해외에서 생활할 당시, 미국에서 대학을 다닌 덕분에 남편보다 영어를 더 잘했지만 늘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배려 깊은 아내였다. 경찰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는 1, 2년에 한 번꼴로 이사를 다녔고 생전 살아보지 않았던 첩첩산중에 가 시골 아줌마로 살면서도 불평 한 번 하지 않았다. “경북 영양군 경찰서장으로 발령이 났을 때 가족과 함께 그곳으로 이사를 했어요. 당시 영양군은 전국에서 가장 외진 곳이었기에 가족까지 이사하는 예가 거의 없었거든요. 군민들과 좀 더 가까워지려면 관할 지역에 정착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이사를 가자고 했고 아내와 아이들이 따라주었죠.” 프랑스에서 태어나 영국을 거쳐 홍콩에서 학교를 다니던 큰아이는 한국에 돌아와 이제 막 한국 학교에 적응하려던 참이었고 둘째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다. 자신의 일 때문에 어린 아이들에게 또 한 번 환경의 변화를 겪게 했던 것이 지금도 미안한 마음이지만 강경애씨에게는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경험으로 기억되고 있다. “도시에서만 살던 아이들이 처음 시골 생활을 하며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영양에서 보낸 기간은 참 행복했고 교육적으로도 좋았어요. 경제적으로 풍요롭진 않았지만 순박하게 살아가는 지역민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됐고요. 영양에 고추가 유명하잖아요. 서울에서 사 먹을 땐 몰랐는데 하나하나가 귀하지 않은 것이 없어요. 동네분들과 반찬도 나눠 먹고 미장원도 같이 다니고, 참 즐겁고 행복했던 경험이에요.” 현재 큰딸은 금융기관에 취직해 사회생활을 하고 있고 둘째 딸은 베이징에서 공부 중이다. 결혼할 나이가 되어 종종 선을 보곤 하는데 맞선 상대자로 공직자가 나올 때면 지방근무가 많을까 걱정되면서도 집안 내력인가 싶어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고. “아이들이 고등학교 때였나, 어느 날 저한테 그러더군요. 자기들은 공부만 열심히 할 테니까 결혼은 아빠가 책임지라고요. 그땐 아빠가 책임질 테니 염려 말라고 큰소리 쳤는데 지금은 알아서들 연애도 하고 사윗감도 데리고 와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네요(웃음). 언젠가 아내에게 왜 나와 결혼했냐고 물었는데 저의 유머감각에 반했다고 하더군요. 저와 아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도 만나서 웃을 수 있는 사람과 결혼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26년 경륜의 스페셜 제너럴리스트, 사회에 환원하는 삶 살고파 신념과 원칙을 지키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변화와 도전을 추구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안정과 안전을 추구하는 공무원이라는 직업적 특성상 변화 지향적 삶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지만 그는 이러한 통념을 벗어나는 삶을 살았다. 부산 남부경찰서 대공과장을 시작으로 홍콩주재관, 경북 영양경찰서장, 남대문경찰서장 등을 거쳐 제12대 경찰청장까지, 경찰로 산 22년 동안 무려 서른 번이나 보직을 이동했다. 잦은 보직 이동, 항상 일에 매진하는 남편 때문에 부인 입장에서 외로웠을 법도 한데 워낙 일을 열심히 하니 불평할 수가 없었단다. 오히려 오랜만에 같이 시간을 보낼 때면 이제 막 결혼한 부부처럼 신혼 기분을 내며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았다고 한다. “아이들 중·고등학교 때는 주말 부부였고 남편이 서울에 있을 때도 경찰서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모처럼 외식을 하거나 함께 외출을 하면 설레요. 덕분에 30년을 살았지만 부부간의 권태기를 느낄 겨를이 없었어요.” 경찰 시절 그는 남들이 기피하는 보직도 마다하지 않았다. 자기 발전을 위해서는 더 힘들고 험한 일을 택해서라도 한 단계씩 스스로 성장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민간기업과는 달리 국가기관은 자신이 선택해서 다양한 분야를 경험하기 힘들어요. 대신 남들이 기피하는 보직을 자청할 경우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면 자기 역량의 한계를 시험하고 발전하는 기회로 만들 수 있어요. 외교관에서 경찰 공직자로, 또 그 안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며 어느 자리에서든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부분이 얼마든지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철도공사에 부임해서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직한 뚝심과 투철한 직업의식으로 승승장구해온 듯한 인생이지만 그에게도 크고 작은 시련이 있었다. 2005년 경찰청장 재직 시절,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 때 시위 농민이 사망하는 사건으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던 일도 그중 하나다. 20년 넘게 삶의 전부였던 경찰조직을 뒤로하고 땀과 눈물이 밴 제복을 벗어야 했던 아픈 기억은 자신의 쓰임새가 발휘될 수 있는 일을 찾아 국민에게 봉사하겠다는 다짐을 가슴에 새기는 계기가 됐다. “특정 전문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스페셜리스트가 있는가 하면 어느 조직, 어느 분야에서든 역량을 발휘하는 제너럴리스트가 있습니다. CEO로서 제가 할 일은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직원들이 가진 전문성을 아우르고 경청하면서 그 능력들이 십분 발휘되도록 조율하고 이끄는 스페셜 제너럴리스트라고 생각해요. 세계적으로 향후 고속철 시장은 눈부신 발전이 예고되고 있어요. 그에 대비해 직원들의 실력과 그에 걸맞는 긍지와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저의 역할이죠. 우리나라가 명실상부한 선진국으로 거듭나고 지금보다 더 바르고 부드러운 사회공동체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 앞으로 제가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철도를 사랑하는 국민께 계속 애정을 갖고 지켜봐달라는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강경애씨 역시 남은 인생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남편을 따라 나누는 삶을 살겠다는 마음이다. 곧고 바르게, 한 곳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모습이 철도와 닮았다. <■글 / 노정연 기자 ■사진&제공 / 이주석, 한국철도공사>
2011.12.13 17: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