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경향신문

  • 주간경향

    • [신간] 혼란한 미래 속에서 모색하는 ‘길’

      문화/과학 신간

      [신간] 혼란한 미래 속에서 모색하는 ‘길’

      10년 후 세계사 : 미래의 역습 구정은, 이지선 지음·추수밭·2만2000원 로봇, 자율주행, 인공지능(AI), 유전자편집···. 이미 우리 삶을 바꾸기 시작한 혁신 기술은 10년 후 미래에는 일상이 될지 모른다. 기술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며 낙관론을 펼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기술이 만들어낼 변화와 충격파에 불안해하는 이들도 있다. 저자들은 “(낙관론과 비관론 중에서) 정답을 골라야 하는 건 아니다. 가야 할 길은 ‘갈지(之)’ 자가 될 수밖에 없고 혼란 속에서 모색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말한다. 예컨대 챗GPT 하나만 있으면 누구나 ‘지브리 스튜디오’ 화풍의 이미지를 만들 수 있게 된 시대지만 원작자의 저작권을 침해하고 창작 의지를 꺾는다는 지적도 받는다. AI로 제작한 딥페이크 성착취물과 허위 정보가 담긴 선동물이 유포돼 사회 문제가 되기도 한다. AI 학습과 추론을 위한 데이터센터는 엄청난 양의 냉각수를 사용하는데, 기후변화로 물 부족이 심해지는 상황에서 ‘어디에 데이터센터를 설립할 것인가’를 놓고 심각한 갈등이 생길 수도 있다. ‘인간의 통제를 받지 않는 자율 무기’가 등장할 가능성도 있다. 이 책은 ‘AI는 모두에게 공평할까’, ‘AI가 학습한 원래 정보에 대해 기존 창작자는 저작권을 주장할 수 있을까’, ‘윤리적인 킬러 로봇은 가능할까’, ‘시스템들에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한 결정을 어느 정도까지 맡길 것인가’ 등 AI와 관련한 다양한 질문을 던진다. 이 같은 혼란 속에서 우리는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할까. 저자들이 내린 결론은 이렇다. “낯선 기술들이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갈지 모른다면, 새로운 흐름에 휩쓸려 갈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방향을 잡는 것이 모두를 위한 안전장치가 될 것이다.” 숲을 읽는 사람 허태임 지음·마음산책·1만7000원 식물분류학자 하면 조용한 연구실에 앉아 식물 표본을 들여다보는 모습을 떠올리게 되지만, 저자가 일하는 현장은 그와 달리 때로 여러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험준한 산속이다. 책에는 사라질 위기에 놓인 식물들을 추적하고 기록해 자연을 복원해나가는 여정이 그려진다. 김대중의 국정 노트 박찬수 지음·한겨레출판·2만원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재임 5년간 거의 매일 국정 노트를 썼다. 각종 회의나 기자회견을 앞두고 올라온 자료를 대통령의 언어와 비전으로 재정리했는데 그렇게 쓴 노트가 27권이나 됐다. 대통령이 지녀야 할 자질과 역량이 무엇이며, 국민에게 보여야 할 태도와 철학은 무엇인지 알려준다. 수학의 중력 야우싱퉁, 스티브 네이디스 지음·박초월 옮김·동녘사이언스·2만2000원 물리학의 언어로만 여겨졌던 중력 이론이 사실 수학과 물리학이 긴밀하게 얽혀 태어났음을 밝히며, 일반상대성 이론의 발전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한다. 각각 필즈상 수상자, 과학 저널리스트인 두 저자는 우리가 사는 우주를 더욱더 깊고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이재덕 기자 2025.04.16 06:00

    • [가깝고도 먼 아세안] (45) 트럼프 2.0, 혼란스러운 아세안

      국제 가깝고도 먼 아세안

      [가깝고도 먼 아세안] (45) 트럼프 2.0, 혼란스러운 아세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임기를 시작하면서 새롭게 단장된 미국 백악관 인터넷 홈페이지 메인 화면/미국 백악관 홈페이지 지난 1월 14일(현지시간) 미국 상원 군사위원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 지명자는 ‘아세안이 몇 개 회원국으로 이루어졌는지’ 답하지 못해 전 세계 조롱거리가 됐다. 아세안 회원국은 단순하게 웃고 넘어갈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한 심경이었을 것이다. 조만간 미국에 패싱(무시) 당할 아세안의 미래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기 체제(2017~2021) 동안 아세안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2017년 11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세안 정상회담이 트럼프 대통령이 참석한 처음이자 마지막 아세안회의였다. 대통령이 참석하지 못하면 부통령이나 국무장관이 대신 참석하는 것이 관례지만, 2019년 태국에서 열린 아세안회의에는 로버트 오브라이언 백악관 안보 보좌관을 보냈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아세안 7개국 정상은 미국과 회담에 불참하며 강하게 불만 표시를 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있는 아세안 본부에 주재해야 하는 미국 대사도 임기 내내 임명하지 않았다. 트럼프 양자 협상으로 미국 이익 극대화 꾀해 트럼프는 왜 이렇게 아세안을 무시했을까? 싱가포르의 싱크탱크인 유소프 이삭 동남아시아연구소는 트럼프 2.0 체제를 앞두고 아세안 전문가 6명과 함께한 ‘트럼프 복귀와 아세안-미국 관계에 대한 대담’ 내용을 지난 1월 2일 공개했다. 이 자리에 모인 전문가들은 공통으로 ‘트럼프는 미국 우선주의를 추구하기 때문에 다자주의 협정보다는 양자 협정을 선호한다’고 분석했다. 여러 나라 연합체와 공동으로 협상하기보다는 개별로 협상해서 미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려 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의 말처럼 트럼프는 아세안 집단공동체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개별 국가’ 베트남과는 경제적·군사적으로 매우 밀접한 교류를 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역사적으로 아세안에서 중국과 가장 대척점에 있고, 베트남 동해(남중국해)에서 영토 분쟁을 겪고 있는 베트남을 적극 옹호했다. 미국은 베트남의 동해 영유권과 자주권을 지지하며 미 해군 구축함이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인공섬 주변 12해리 이내를 항해하는 ‘항행의 자유 작전’을 감행하기도 했다. 국제 해양법에 따라 이 지역이 중국의 영토가 아닌 국제 수역이라고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2024년 10월 10일 라오스에서 열린 아세안과 중국의 정상회담/ASEAN 페이스북 페이지 미국은 해상 안보 역량 강화를 위해 베트남에 길이 115m의 3250t급 고속경비함과 고속정 수십척을 무상으로 제공하기도 했다. 또한 통신장비, 해양 탐색 레이더와 감시시스템, 정찰 드론 등을 베트남 해군과 해경에 제공하고 각종 훈련도 지원했다. 미국과 베트남의 군사 교류 절정은 2018년 3월 미 항공모함 칼빈슨호의 다낭 정박이었다. 1975년 미국과 전쟁이 끝난 이후 처음으로 미 항공모함이 베트남 영토에 입항한 것은 미국과 베트남의 군사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사건이었다. 베트남과 중국이 동해(남중국해)에서 영토 분쟁을 겪으면 미 항공모함전대가 개입할 수 있다는 무력시위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도 2020년, 2023년 미 항공모함은 정기적으로 다낭에 입항하고 있다. 미국은 경제적으로도 베트남과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트럼프는 베트남을 미·중 무역 전쟁의 대안 시장으로 낙점했다. 베트남은 트럼프 집권기 미·중 갈등으로 가장 큰 경제적 수혜를 입었다. 중국에 진출한 글로벌 기업들이 미국의 대중국 보복 관세를 피해 베트남으로 이전하기 시작한 것이 이때다. 베트남과 미국의 무역 규모는 꾸준히 늘어 트럼프 집권기인 2020년 처음으로 미국의 10대 교역국으로 등극했다. 트럼프는 대미 무역 흑자국들에 보복 관세 폭탄을 부과했지만, 베트남은 언제나 대상에서 제외되는 특혜를 받아왔다. 반면 트럼프 대통령과 달리 조 바이든 대통령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아세안 전체와 적극적으로 손잡았다. 바이든 행정부 임기 첫해인 2021년 아세안은 뒤늦은 코로나19 팬데믹을 맞아 감염병 위협에 관한 우려가 극심했지만, 미국은 적극적으로 아세안 끌어안기에 나섰다. 2021년 7월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은 싱가포르, 베트남, 필리핀을 연달아 방문해 군사 협력을 강화했다. 이어 같은 해 8월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싱가포르와 베트남을 방문해 남중국해에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각종 방위 협력을 체결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이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를 연이어 방문하며 트럼프 대통령 때 불편해진 아세안 주요 국가들과 관계 개선에 공을 들였다. 바이든 행정부는 이러한 외교 활동을 바탕으로 2022년 2월 ‘인도-태평양 전략’을 발표하며 ‘아세안이 지역 내 정치·경제·안보 협력의 중심축임을 존중하겠다’고 명시했다. 경제적으로는 아세안이 중국에 집중된 공급망 일부를 대체할 것이라 인정하고 지속가능한 경제성장을 위한 협력을 약속했다. 미·중 화해 분위기는 아세안에 동전의 양면 이와 함께 아세안이 지역의 기후변화 문제에 대응할 수 있도록 태양광, 풍력, 수소 등 청정에너지 전환 지원책을 제시했다. 2021년 ‘미국-아세안 기후 미래 이니셔티브’(1억200만달러)를 시작으로 ‘클린 파워 아시아 프로그램’(7억5000만달러), ‘아세안 인도-태평양 포럼’(30억달러) 등 다양하고 큼지막한 선물 보따리를 연달아 내놓았다. 하지만 트럼프 2.0 체제가 시작되며 아세안 대한 기후변화 대응 지원은 중단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1월 20일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연설에서 ‘국가 에너지 비상사태’를 선포하며 화석연료 인프라 개발을 가속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어서 첫 행정명령으로 파리기후변화 협정에서 다시 탈퇴한다는 문서에 서명했다. 트럼프는 2017년에도 파리기후변화 협정에 탈퇴하며 청정에너지를 노골적으로 부정했다. 이제 미국의 지원으로 아세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태양광·풍력과 같은 청정에너지 사업이 불투명해질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2.0 체제에서 예상 밖의 미·중 화해 분위기는 아세안에 안도감과 위기감을 동시에 주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취임식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초청하고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틱톡 금지 유예’와 같은 상징적인 조치를 했다. 지난 1월 18일 월스트리트저널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는 ‘취임 100일 이내 중국을 방문하고 싶다’고 말하는 등 적극적인 화해 신호를 보내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아세안의 앞마당인 남중국해에서 안정감을 줄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아세안이 미국과 중국의 주요 정책에서 후순위로 밀려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간 미·중 갈등 속에서 부각된 아세안의 전략적 가치는 급격히 감소할 수 있다. 또한 그간 미·중 양국에서 받아왔던 경제적·외교적 지원은 대폭 축소될 가능성도 크다. 트럼프 2.0 체제에서 아세안은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호찌민 | 유영국 <베트남 라이징>·<왜 베트남 시장인가> 저자 2025.01.24 15:00

    • [주간 舌전]“본의 아니게 자금 시장에 혼란…매우 유감”

      정치 주간 舌전

      [주간 舌전]“본의 아니게 자금 시장에 혼란…매우 유감”

      김진태 강원도지사 / 국회사진기자단 “본의 아니게,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자금 시장에 불필요한 혼란과 오해가 초래돼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김진태 강원도지사가 지난 10월 24일 채무보증 불이행 선언으로 발생한 이른바 ‘레고랜드 사태’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강원도가 레고랜드 조성을 위해 발행한 2050억원 규모의 프로젝트파이낸싱(PF) 자산유동화기업어음에 대한 지급보증을 철회하면서 회사채·국채 등을 포함한 채권시장 전반에 불신이 높아졌다. 이로 인해 정부는 시장에 50조원 이상의 유동성 공급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로 했다. 김 지사는 “(전임 도정이) 많은 빚을 남겼는데 가만히 있으면 전임 도정이 빚을 갚아주냐”며 사태의 원인을 최문순 전 강원도지사의 잘못으로 돌렸다. 최 전 지사는 “(김 지사가) 정확한 실체적 진실을 파악하지 않고 그냥 정치적 목적으로 발표한 것”이라며 “그 회사(강원중도개발공사)를 그냥 뒀으면 연장해가면서 차차 빚을 갚아나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김 지사도 문제지만 조정해야 할 정부가 방치해놓고 지금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고 비판했다. 여당에서조차 비판이 나온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강원도가 불신을 키운 점에 대해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찬호 기자 2022.10.28 11:00

    • [취재 후]혼란은 이제 시작일지도

      정치 취재 후

      [취재 후]혼란은 이제 시작일지도

      지난해 3월 3일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은 더불어민주당이 추진하려는 ‘검찰수사권 완전 박탈(검수완박)’을 두고 “부패를 완전히 판치게 하는 ‘부패완판’”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윤 총장은 이튿날 자진 사퇴했습니다. 그리고 1년 뒤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대선에서 졌지만 민주당은 국회 다수당입니다. 민주당은 대선이 끝나자 다시 검수완박 관련 법안 처리를 꺼내들었습니다. 추진 여부와 시기를 두고 당내 의견이 갈리는 상황입니다. 강성 지지자들은 검수완박을 통한 검찰개혁 완수를 압박하고 있습니다. 윤석열 정권이 검찰을 통해, 혹은 검찰이 알아서 ‘정치 보복’에 나설 수 있다는 우려감도 기저에 깔려 있습니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은 공개적으로 윤 당선인의 검찰개혁 공약을 직격했습니다. 공약은 법무부 장관의 수사지휘권 폐지, 검찰에 독립적 예산 편성권 부여, 검찰수사권 확대 등입니다. 대통령직인수위는 이들 공약이 “검찰권 강화가 아니다”고 밝혔지만, 법조계와 시민사회에서는 검찰의 힘이 강해질 거란 관측이 나옵니다. 새 정부가 출범도 안 했는데 검찰개혁을 둘러싼 힘겨루기가 벌써부터 혼전 양상입니다. 문재인 정부에서 검찰개혁을 둘러싼 논란과 그 연장선에서 나타난 ‘추(미애)·윤(석열)’ 갈등이 모든 이슈를 집어삼킨 ‘블랙홀’로 작용한 적이 있습니다. 피로감을 감당해야 하는 건 시민들의 몫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청와대 집무실의 용산 이전, 공기업 인사 등을 두고 신구 권력의 날선 신경전이 계속됐습니다. 오는 6·1 지방선거에서 민심이 어떻게 나타날지 주목됩니다. 국제정세도 심상찮습니다. 북한이 지난 3월 4년여 만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발사하면서 한반도의 긴장이 높아졌습니다. 앞으로가 더 걱정입니다. 한미는 조만간 정례 연합훈련을 시행합니다. 게다가 오는 4월 15일은 북한 김일성 주석의 생일 110주년입니다. 북한이 조만간 7차 핵실험을 감행하리란 관측이 나오는 배경입니다. 2018년 북한의 평창동계올림픽 참가를 계기로 훈풍이 불던 한반도의 시계가 다시 4년 전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한미도 대응책으로 실기동 연합훈련을 재개하고, 전략폭격기와 핵추진 항공모함 등 전략무기를 한반도에 배치할 수 있습니다. 긴장 고조의 악순환 재연입니다. 혼란은 어쩌면 이제 시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정희완 기자 2022.04.08 14:53

    • [이 한권의 책] 퇴색된 젊은 날의 열정, 중년의 혼란과 회의

      문화/과학 이 한권의 책

      [이 한권의 책] 퇴색된 젊은 날의 열정, 중년의 혼란과 회의

      제목으로 한 시절을 풍미한 책이 있다. 1989년에 번역된 <상실의 시대>다. 당시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냉전은 종말을 고하고 6월 항쟁이 빚어낸 ‘여소야대’는 공안정국의 펀치를 맞으며 3당 합당으로 와해됐다. 물질적 급성장에 반비례해서 정신적 상실감이 커지던 시대적 분위기는 일종의 ‘묻지마 베스트셀러’를 만들었다. 애초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었다면? 블록버스터급 소설이 되기는 힘들었을 듯하다. 저자인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려낸 1960년대는 ‘상실’이다. 이념 투쟁으로 과열됐던 일본의 대학생들에게 학생운동이 퇴색하고 혁명의 불꽃은 사그라졌다. 갑자기 넥타이를 매고 회사원이 되어야 했던 ‘투사’들은 삶의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기 위해 젊은 날의 가치와 이상을 버려야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유유정 옮김·문학사상사 실제로 1960년대 지구는 뜨거웠다. 68 학생운동, 여성해방, 흑인 민권운동의 열기는 화산처럼 분출했다. 그러나 확 달아오르는 다혈질은 팍 식어버리는 무기질로 바뀌는 법이다. ‘잘 가라, 청춘이여’. 가장 뜨거웠던 시간과 사랑을 그리워하는 것은 만국 공통의 심리이기에 일본의 애니메이션과 만화만큼이나 하루키의 작품이 세계인의 정서에 호소력을 가지는 것일까. 줄거리는 딱 네 줄이다. 고교 시절 ‘절친’이 자살을 한다. 죽은 친구의 ‘여친’과 대학에서 재회해 연인이 된다. 이런저런 사정 끝에 연인도 목숨을 끊는다. 새로운 사람과 삶을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어떻게 보면 민담의 구조와 흡사하다. 누군가가 사라지고 주인공은 잃어버린 사람을 찾기 위한 모험을 떠났다가 복귀한다는 도식이다. 도입부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다. 독일에 도착한 비행기 안에서 흘러나온 비틀즈의 노래 <노르웨이의 숲>을 들으면서 잊혔던 과거로 시간이 역진한다. 어른으로 가는 입사식(initiation)은 재일학자 강상중의 비유처럼 절벽을 가로지르는 외나무다리 건너기다. 범상한 삶 한가운데 죽음의 덫이 놓여 있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되는 것이다. 두렵다고 마냥 미성년으로 머무를 수만은 없다. 만만하게 보다가는 막막한 인생으로 전락한다. 두려움과 어지러움이 뒤따라오는 청춘의 인간관계는 그래서 삼각형이다. ‘외로움, 괴로움, 그리움’은 세 개의 꼭짓점이다. 지금 여기에 없는 것들이다. 상실의 키워드로 시대를 집약했다는 상찬에 맞서 비판도 거세다.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상실의 시대>야말로 감상적 허무주의를 바탕으로 한 특이한 음담패설집이며 예술이 아닌 언어 상품이라고 단정했다. 소설이 시작되는 무대인 함부르크야말로 유럽 최대의 환락가라는 지적도 ‘도색소설’의 혐의를 강화한다. 성적 일탈을 다룬 이 같은 작품이 자칫 고전과 문학의 본령을 오도하는 사태는 막아야겠다는 교육자로서의 고언이 와닿는다. 그럼에도 <상실의 시대>는 시장에서의 교환가치 이상으로 통과의례로서의 사용가치 또한 상당하다. 감상과 열정의 도가니에서 들끓던 20대의 나날이 순식간에 끝나고 사회의 일원으로 어느새 냉각될 때 혼란과 회의는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지금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가’라는 중년의 주인공 와타나베의 자문(自問)이 마음에 묻은 상실감을 닦아주는 미덕을 부인할 수는 없다.

      정승민 독서팟캐스트 일당백 진행자 2019.12.27 16:04

    • 국제

      이라크 총리 사퇴, 또 다른 혼란의 시작

      아델 압둘 마흐디 이라크 총리가 격화되는 반정부 시위에 책임을 지고 사퇴하겠다고 지난 11월 29일(현지시간) 밝혔다. 이라크 의회는 12월 1일 정부 실권자인 총리 불신임 투표를 통과시켰다. 대통령이 새 총리 후보를 지명할 때까지 압둘 마흐디는 과도정부 기능을 유지·관리하는 역할만 하게 된다. 그럼에도 두 달 넘게 이어지고 있는 시위는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라크 남부의 시아파 성지인 나자프에 있는 이란 영사관이 11월 27일(현지시간) 이라크 반정부 시위대의 방화로 불에 타고 있는 모습을 시민들이 지켜보고 있다. / 로이터연합뉴스 총리가 사퇴 의사를 밝힌 다음 날인 11월 30일에도 수도 바그다드를 비롯해 이슬람 시아파 성지인 남부 도시 나자프, 압둘 마흐디 총리의 고향인 나시리야 등에서 시위가 이어졌다. 특히 나시리야에서는 반정부 시위대를 향해 진압군이 실탄 사격을 하면서 최소 20명이 부상했다. 이라크 당국은 더 큰 소요사태를 막기 위해 나시리야와 나자프, 시아파 제2성지 도시인 카발라 지역 공무원들에 대한 휴가를 선포했다. 반정부 시위대 “이란도 물러가라” 총리가 사퇴하겠다고 밝혔음에도 시위가 진정되지 않는 이유는 이라크 국민이 혼란상의 근본 원인을 이란의 내정간섭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란은 미국이 2003년 이라크 침공으로 사담 후세인 수니파 정부를 물러나게 한 뒤 시아파 정부를 세우며 영향력을 강화했다. 이란은 이라크의 시아파 정치 엘리트들을 후원하고, 이라크에 전력을 공급해줬다. 하지만 관료들의 부정부패만 심각해지고 국민의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았다. 이라크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2위의 산유국이지만 2003년 미국 침공, 이슬람국가(IS)와의 잇단 전쟁으로 도로·댐·발전소 등 인프라 시설이 붕괴됐다. 정전은 일상화됐고 전력공급 시간은 하루 채 4시간이 안 되는 지역이 허다하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청년실업률은 25%에 육박한다. 이번 시위는 주도한 정파나 중심 조직이 없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시위라는 점에서 종파 간 갈등으로 몰아갈 수도 없다. 시위 초기 진보 성향의 현지 일간 <알바이나알자지다>는 “시위대는 처음으로 어떤 깃발도, 어떤 정당의 슬로건도 없이 등장했다”고 했다. 11월 27일에는 시아파 성지 나자프 주재 이란 영사관에서 방화 사건까지 발생했다. 이란에 대한 적개심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앞서 11월 3일에도 시아파의 제2성지 카발라 주재 영사관에서 방화가 있었다. 방화 당시 시위대는 “이란은 물러가라”고 외쳤고, 최근에는 이라크 전역에서 이 구호를 들을 수 있다. 시아파 최고 성직자로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보다 이슬람법 해석에 더 높은 권위를 인정받는 알리 알시스타니까지 나서 압둘 마흐디 총리 퇴진을 요구했다. 압둘 마흐디는 알시스타니가 입장을 밝힌 지 몇 시간 만에 사퇴를 선언했다. 지난 10월 초부터 최근 두 달 동안 이라크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이란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최근 레바논 반정부 시위 국면에서 시아파 벨트의 한 축인 레바논 무장정파 헤즈볼라에 대한 반감도 커지고 있는데다 자국 이란에서도 반정부 시위가 거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델 압둘 마흐디 이라크 총리 / 로이터연합뉴스 이란은 이라크 시위 초기부터 깊숙이 개입했다. 시위가 발발한 지 며칠 뒤 이란 정예군 혁명수비대의 특수부대 고드스 사령관 가셈 솔레이마니는 바그다드를 방문해 이라크 보안당국 관계자와 회의를 주재했다. 10월에만 최소 두 차례 바그다드를 방문한 것으로 파악된다. 문제는 이란이 시아파 정부를 지켜내기 위해 무력지원을 강화할 경우 시위가 내전으로까지 번질 수 있다는 데 있다. <알자지라>는 이라크 소식통을 인용해 솔레이마니 사령관이 바그다드 방문 당시 압둘 마흐디 총리에게 시리아의 독재자 바샤르 알아사드를 보호해줬던 것처럼 지원을 약속했다고 전했다. 이란은 이라크 내 친이란계 무장조직인 인민동원군(PMF)을 이용해 시위대를 강경 진압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불안해진 이란, 더 위험해지는 이라크 이란의 위험한 개입 움직임과 맞물려 이라크 정파들의 복잡한 이해관계는 총리 사퇴 이후에도 이라크 정국 불안을 장기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압둘 마흐디 총리 사퇴 요구는 시위 초기부터 나왔다. 하지만 사퇴 요구만큼이나 압둘 마흐디에게 자리를 지키라는 압박 또한 거셌다. 시위 초·중반까지만 해도 알시스타니와 쿠르드 자치정부(KRG)는 대안이 없다며 압둘 마흐디가 총리직을 유지하길 바랐다. 특히 KRG는 압둘 마흐디가 그나마 이전 총리들보다는 협상의 여지가 있다고 보고 압둘 마흐디를 지지했다. KRG은 바그다드 중앙정부와 예산 배분, 석유 판매 등 자치권 확대문제를 두고 5년 넘게 협상 중이다. 압둘 마흐디 사퇴로 그만큼 불확실성이 높아진 셈이다. KRG로선 양보를 이끌어낼 수 있는 지도자를 세우는 것이 급선무다. 의회 내에서는 확실하게 우위를 점하는 세력이 없고, 여전히 친이란계 세력의 입김이 강해 새 내각을 구성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포퓰리스트 시아파 성직자로 의회 내 최대 정파인 ‘알사이룬’을 이끌고 있는 무크타다 알사드르는 반정부 시위대를 대표하는 지도자로 자리매김하려고 했지만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한다. 민족주의 색채를 강화하며 이란 세력 배척을 주장하는 그는 정작 이란의 지원을 등에 업은 실력자들을 쳐내지도 못했다. 그동안 이라크 정부에서 실권자는 압둘 마흐디 총리가 아니라 이란 지원을 받는 아부 지하드 알하시미 총리실장, 아부 문타자르 알후세이니 방위청장이란 말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두 사람 모두 친이란 무장조직 PMF와 연결고리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어느 세력도 확실하게 우위를 점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누구도 꺼리지 않는 인물이 새 총리가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각자 이해관계가 미묘하게 엇갈리는 만큼 압둘 마흐디의 대안을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설사 새 총리를 찾는다 해도 정부 구성까지는 또 험로가 예상된다. 압둘 마흐디는 지난해 10월 총리에 오른 뒤 의회로부터 국방·내무·법무장관 등 정부 요직 임명 동의를 얻는 데만 8개월이 걸렸다. 압둘 마흐디 총리 사퇴는 또 다른 혼란의 시작일 뿐이다.

      박효재 국제부 기자 2019.12.06 16:04

    • 사회 렌즈로 본 세상

      [렌즈로 본 세상]급식 혼란, 오히려 의젓한 아이들

      지난 7월 3일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어린 학생이 도시락 가방을 들고 등교하고 있습니다. 급식조리원을 비롯한 전국의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 2만2000여명이 임금인상과 차별 해소 등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이날 일부 학교에서 급식과 돌봄교실 운영에 적잖은 차질이 빚어졌습니다. 빵과 주스,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하거나, 오전 수업이 끝난 후 집에 들러 밥을 먹고 학교에 다시 온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의젓했습니다. 불편을 겪으면서도 급식조리원들의 어려운 사정을 이해한다며 응원한다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적지 않았습니다.

      사진·글 이준헌 기자 2019.07.05 15:19

    • [시네프리뷰]비스트-강렬하지만 혼란스러운 범죄 스릴러

      문화/과학 시네프리뷰

      [시네프리뷰]비스트-강렬하지만 혼란스러운 범죄 스릴러

      인상적인 화면 구성이나 강렬한 사건들이 쉴 새 없이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지만 모든 것들이 분절되어 일관성 있는 정서로 규합되지는 못한다. 제목 비스트 (The Beast) 제작연도 2019 제작국 한국 러닝타임 130분 장르 범죄, 스릴러 감독 이정호 출연 이성민, 유재명, 전혜진, 최다니엘, 김은혜 개봉 2019년 6월 26일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NEW/(주)스튜디오앤뉴 한 연출가의 재능과 세계관을 유추하려면 최소한 장편 3편 이상은 지켜봐야 한다. 적잖은 영화들을 보며 개인적으로 규정하고 신뢰하게 된 ‘삼세편’의 법칙이다. 영화 <비스트>는 감독 이정호의 세 번째 장편영화다. 그는 2010년 본인이 직접 각본을 쓴 미스터리 스릴러 <베스트셀러>로 장편 데뷔했다. 엄정화, 류승룡, 조진웅이 출연한 이 작품은 당시 유행했던 반전 심령물과 범죄 스릴러가 혼재된 독특한 전개를 펼친다. 첫 작품치고는 힘 있게 밀고 나가는 뚝심이 인상적인데, 문제는 모든 것이 너무 ‘과잉’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물도 사건도 너무 격앙되어 관객들의 공감이 비집고 들어갈 여지조차 주지 않는다. 2014년 발표한 두 번째 작품인 <방황하는 칼날>은 일본의 유명작가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일본에서도 앞서 영화화가 이루어졌던 이 작품은 청소년들의 묻지 마 범죄와 그로 인해 딸을 잃은 한 아버지의 사적(私的) 복수를 그리고 있다. 범죄 스릴러의 장르에 충실한 전개를 보이면서도 원작이 진지하게 묻고 있는 윤리적 문제와 사회적 메시지를 함께 담고 있는데, 냉정하고 사색적인 원작의 분위기에 충실한 일본판과 달리 한국판은 여러모로 감정적이고 드세게 각색되었다는 중평이다. 이후 5년간의 공백 끝에 감독은 세 번째 장편 <비스트>를 내놓았다. 살인마를 잡기 위해 살인을 감추다 경찰이지만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강력계 팀장 정한수(이성민 분)와 그가 이끄는 1팀은 최근 발생한 엽기적 토막살인사건 수사를 지원하기 위해 투입된다. 한수의 오랜 라이벌이자 곧 다가올 인사를 앞두고 이 사건에 사활을 걸고 있던 강력 2팀장 한민태(유재명 분)에게는 1팀의 공조가 반갑지만은 않다. 이즈음 한수는 마약 브로커이자 과거 연락책으로, 현재는 수감 중인 춘배(전혜진 분)의 전화를 받는다. 이후 피할 수 없는 거래에 발을 들이게 된 그는 살인사건의 해결에 가까이 다가서지만 한수의 검은 거래를 눈치챈 민태는 노골적으로 동료의 목을 죄어오기 시작한다. 공들인 티가 역력한 인상적인 화면이나 신뢰를 얻고 있는 배우들의 연기는 충분히 즐길 만하다. 전국 각지의 인상적인 장소에서 로케이션이 이루어졌는데 특별히 아나모픽 렌즈를 사용해 피사체를 강조하고 원색의 조명과 스모그 효과가 맞물린 몇몇 장면들은 꽤나 강렬한 느낌으로 와닿는다. 1팀 팀장 한수 역을 맡은 이성민은 감독의 전작 두 편 모두에서 함께 작업을 해왔다. 이번 작품에서는 계산보다 본능에 입각해 연기했다는 그는 여전히 자신이 가진 장점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어 보인다. 그동안 TV와 중소 영화들을 통해 신뢰를 쌓아온 배우 유재명은 한수의 동료이자 경쟁자인 2팀 팀장 민태를 연기한다. 그에게는 이번 작품이 대규모 상업영화로서는 사실상 첫 주연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지라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국과수 부검의이자 한수의 아내 ‘정연’ 역을 맡은 안시아의 존재감도 즐거운 발견이다. 이미 뮤지컬계에서는 유명인인 그녀는 그리 큰 비중은 아님에도 첫 영화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안정적이고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관습을 넘어선 새로운 영역을 욕심내다 하지만 총체적으로 이 영화는 가시적 화려함만큼이나 혼란스럽다. 극의 중심에 배치된 엽기적 연쇄살인사건의 미스터리에 더해진 두 남자의 경쟁의식과 충돌로 빚어지는 갈등도 버거운데 사건을 파국으로 이끄는 제보자의 존재와 각자 자잘한 사연을 지닌 주변 인물들까지 보는 내내 숨이 차다. 인상적인 화면 구성이나 강렬한 사건들이 쉴 새 없이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지만 모든 것들이 분절되어 일관성 있는 정서로 규합되지는 못한다. 과거 유명 작품들의 기시감을 유발하는 몇몇 설정과 장면들은 영화가 쌓아올린 장점들까지 맥빠지게 만든다. 세 번째 영화까지 이정호 감독의 작품들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격앙된 감정’이다. 한국 관객들에게는 익숙한 정서지만 보는 이에 따라서는 변함없는 ‘과잉’으로 해석될 여지가 다분한 요소이기도 하다. 바로 이 지점이 이번 작품이 관객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궁금한 이유다. 분명하게 인정해야 할 것은 영화 <비스트>가 그동안 관습적인 형태를 넘어서지 못했던 한국 상업영화들과 비교해 새로운 영역을 욕심내고 있는 작품이라는 점이다. 더불어 감독 이정호는 장르영화 감독으로서 자신만의 세계를 뚜렷하게, 더불어 다채롭게 확장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다음 작품이 궁금하다. 원작은 프랑스 영화 <오르페브르 36번가> 영화 <비스트> 역시 원작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원작영화는 2005년 올리비에 마샬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프랑스 작품 <오르페브르 36번가(36 Quai des Orfevres)>. 비디오와 DVD 시장이 호황이던 2000년대 중반에 KBS가 세계적 화제작들을 엄선해 TV 방영과 극장 개봉을 동시 진행한다는 파격적인 기획으로 진행했던 ‘KBS 프리미어 영화 페스티벌’을 통해 국내에 소개됐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두 남자배우 다니엘 오퇴유와 제라르 드파르디외가 모처럼 동반 출연해 연기 대결을 펼치기도 했던 이 작품은 범죄 스릴러라기보다는 두 남자의 욕망과 복수에 초점을 맞춘 누아르의 분위기가 강한 드라마였다. 현금 수송 차량을 노린 강도단을 잡기 위해 경쟁하던 두 경찰은 결국 각자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만다. 선과 악의 위치가 분명한 인물들의 경쟁과 갈등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결말 역시 뚜렷한 복수로 마무리된다. 녹록지 않은 정서를 다루는 작품임에도 지금 보면 영화 <비스트>와 비교해 여러 가지로 단순한 작품으로 보일 수도 있을 텐데, 이는 반대로 <비스트>가 너무 많은 사건과 갈등을 담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최원균 무비가이더 2019.06.21 15:16

    • 경제 정창수의 ‘나라살림을 제대로 바꾸는 법’

      [정창수의 ‘나라살림을 제대로 바꾸는 법’]기재부와 신재민의 혼란스런 진실게임

      정부는 구체적으로 반박해야 한다. 적자국채 추가발행에 장단점이 존재한다는 식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는 신뢰를 떨어뜨릴 뿐이다. 한 사람의 사소한 과잉행위가 자칫 정권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다. 구윤철 기획재정부 2차관이 지난해 12월 31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의 주장에 대해 긴급 브리핑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의 선언이 정국을 흔들고 있다. 이 중 ‘국가부채 고의 증대 의혹’ 부분만을 살펴보자. 첫째는 2017년 1조원 규모의 국채 조기상환(바이백) 취소사건이다. 이는 2017년 11월 15일로 예정된 국채 조기상환 입찰 하루 전에 취소된 사건이다. 신 전 사무관은 적자국채 규모를 늘리고자 하는 청와대(혹은 부총리)의 부당한 압력에 의해 하루 전 바이백이 취소되고 채권시장에 큰 혼란을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기재부는 적자국채의 추가발행 규모가 확정되지 않아 바이백 계획을 취소했다고 해명했다. 결국 신 전 사무관이나 기재부의 주장을 종합해 보면 청와대 또는 기재부 고위 간부가 국고국에 바이백 취소를 요청했다는 사실은 다툼이 없는 부분이다. 하루 전에 취소를 단행해 시장에 어느 정도 혼란을 초래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시장의 혼란을 상쇄할 정도의 정책적·절차적·정무적 정당성이 있는지 여부가 관건이다. 둘째, 2017년 적자국채 추가발행 부당지시 사건이다. 우선 적자국채의 개념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국채와 적자국채는 다른 개념이다. 국채는 국가가 자금이 필요할 때 채권을 발행해 시장에 판매하고 자금을 조달하는 채권이다. 적자국채는 각종 기금의 여유자금을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공적자금관리기금’에서 일반회계가 돈을 차입하는 것을 뜻한다. 양측이 합의된 사실은 다음과 같다. 2017년 국회가 승인한 적자국채 발행 한도는 여유분이 8.7조원 있었는데, 8.7조원 전액을 발행하지 말자는 의견과 일부 발행하자는 의견이 충돌했고, 결국 발행하지 않는 것으로 최종 합의를 봤다는 것이다. 적자국채를 추가발행하지 않았을 때 장점은 명확하다. 적자국채 이자비용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추가로 발행할 경우에 어떠한 장점이 있는지는 기재부도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경기 불확실성을 대비할 수 있다” 정도의 답변만 반복할 뿐이다. 다만 이자 지출규모는 신 전 사무관이 주장하는 것만큼 발생하지는 않는다. 정리하자면, 청와대의 지시라는 측면은 특별히 문제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고, 장관을 인사청문회를 통해 정무직으로 임명하는 이유는 선출된 권력이 관료에 대한 통제를 하기 위해서이다. 다만 의사소통 과정에 세심하지 않았던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만약 2017년 국가채무 비율을 악화시키고자 한다거나, 다음해의 추경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미리 국채를 발행하고자 하는 정무적 판단이 있었다면 잘못이다. 국채는 추경을 할 때 발행해야 한다. 추경을 위해 미리 적자국채를 발행해 놓고 ‘국채가 아닌 여윳돈’이라고 야당과 국민을 설득하는 것은 눈속임에 불과하다. 바이백 취소에 대해서는 정책적 의견이 엇갈린다. 다만 적자국채 추가발행 시도는 정책적 의미가 없다. 정책적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적자국채 추가발행 시도는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정무적 판단에 따른 것이라는 신 전 사무관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된다. 정부는 구체적으로 반박해야 한다. 적자국채 추가발행에 장단점이 존재한다는 식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는 신뢰를 떨어뜨릴 뿐이다. 지금 국민은 혼란스러워 한다. 이로 인해 위험한 확증편향만 확대되고 있다. 한 사람의 사소한 과잉행위가 자칫 정권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다. 무능도 부패만큼 심각하다.

      정창수 나라살림연구소 소장,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 2019.01.07 15:16

    • [터치스크린]치매에 걸린 연쇄살인범의 혼란

      문화/과학 터치스크린

      [터치스크린]치매에 걸린 연쇄살인범의 혼란

      (주)쇼박스 제목 살인자의 기억법 (Memoir Of A Murderer) 제작연도 2017년 제작국 한국 러닝타임 118분 장르 범죄, 스릴러 감독 원신연 출연 설경구, 김남길, 설현, 오달수, 길해연 개봉 2017년 9월 7일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개인적인 취향이겠지만 누군가의 ‘기억’ 또는 ‘고백’을 중요 모티브로 전면에 내건 작품들은 그리 호감이 가지 않는다. 오랫동안 적잖은 영화들을 봐오며 시나브로 쌓인 후천적 방어본능이라고나 할까. 돌이켜보면 당대 걸작 칭호를 받았던 유사 소재 영화들에서 그리 큰 감흥을 받지 못한 탓이 클 것이다.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는 시리즈를 연출한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초기작 (1995)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범죄현장의 유일한 생존자가 털어놓는 진술과 회고로 진행되는 이 영화는 성공한 저예산 상업영화의 전형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이후 숱한 영화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기발한 반전으로 평가받는 마지막 장면은 앞서 장황하게 늘어놓았던 이야기에 집중해 귀 기울였던 관객들의 맥을 빼고 기만하는 무책임함으로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지금은 장인의 경지로 대접받고 있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초기작 (2000) 역시 독창성과 기교는 인정하지만 작품에 부여된 화려하고 과도한 평가는 다소 극성스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평행선상의 시간을 분해해 재조립하는 의 과감한 실험성이 동반한 생경함과 위태로움은 최근작 에서 규모는 다르지만 다시 한 번 반복된다. 영화 자체가 이미 허구이지만 ‘기억’과 ‘고백’을 소재로 전면에 내건 작품들이란 허구의 영화가 동반하는 현실적 허무함을 시작부터 대놓고 인정하는, 또는 작정하고 이용하는 작품들이다. 전부는 아니라 해도 대부분이 그렇다. 이런 작품들과 비교하자면 차라리 아예 허무맹랑한 판타지나 공포영화가 더 현실적으로 보이고, 적어도 관객들을 배려하는 작품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작가 김영하가 2013년 내놓은 동명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 역시 치매에 걸린 연쇄살인범의 혼란스런 사고능력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주인공이 자신의 혼란스런 기억에 대해 느끼는 불안과 불신은 스크린 밖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심정과 다르지 않다. 두 시간 남짓 진행되는 이야기는 언제든지 망상이나 거짓으로 돌변할 수 있고, 때로는 반전이라는 이름으로 뒤통수를 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행히 영화는 우려 이상의 만용까지 발휘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획기적 혁신으로 나아가지도 않는다. 특별한 소재의 장단점이 두루두루 예상했던 만큼 공존하는 작품이다. 독특한 설정이나 배우들의 노력한 연기,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분위기는 눈에 띄지만 매력으로까지 치환되지는 않아 아쉽다. 어린 시절의 아픈 과거로 인해 한때는 사회악을 처단하겠다는 명목 하에 연쇄살인을 일삼았던 병수(설경구 분)는 17년 전 뜻밖의 사고를 당한 후 살인을 멈췄다. 이후 지방 소도시에서 동물병원을 운영하며 금지옥엽 외동딸 은희(설현 분)와 조용히 살고 있던 그가 치매 판정을 받으면서 평온한 일상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우연히 마주친 태주(김남길 분)가 또 다른 연쇄살인자임을 직감한 뒤부터 위태롭던 그의 영혼은 더 깊은 나락으로 추락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는 몸부림은 잊고 있던 과거의 쓰라린 진실로 그를 이끈다. 여담으로 한 주 앞서 개봉한 와 연계해 왜 한국영화 속에는 연쇄살인범, 또는 잔인한 살인 장면이 이리도 많이 등장하는지 새삼 진지하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2017.09.04 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