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
한덕수 대행 4·19기념사 “사회적 갈등·국론분열 심화··· 위기 극복의 열쇠는 ‘통합”...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19일 서울 강북구 국립 4·19민주묘지에서 제65주년 4·19 혁명 기념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19일 4·19혁명 기념사에서 “위기...
이혜인 기자 2025.04.19 13:59
정치
한덕수 대행 4·19기념사 “사회적 갈등·국론분열 심화··· 위기 극복의 열쇠는 ‘통합”...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19일 서울 강북구 국립 4·19민주묘지에서 제65주년 4·19 혁명 기념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19일 4·19혁명 기념사에서 “위기...
이혜인 기자 2025.04.19 13:59
사회 정동길 옆 사진관
고교 친구 묘역에 술 올리는 노년의 추모객...65주년 4·19혁명 기념일 [정동길 옆 사진관]4.19 혁명 65주년을 하루 앞둔 18일 서울 강북구 국립4.19민주묘지에서 한 추모객이 참배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제65주년 4·19 혁명 기념일을 하루 앞둔 18일 서울 강북구 국립 4·19민주묘지에는 이른...
#4.19혁명 #국립4.19민주묘지 #4.19민주묘지 #민주열사 #4.19 #추모객 #참배
문재원 기자 2025.04.18 15:30
정치
국회, ‘국민께 드리는 감사문’ 채택…4·19혁명 이후 65년만... 국민에게 보내는 감사문을 채택한 것은 1960년 4·19혁명 이후 65년 만이다. 국회는 이날 오후... 대한민국과 세계는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1919년 3.1독립운동, 1960년 4...
박용하 기자 2025.04.04 15:30
지역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3.8민주의거’를 아십니까..., 보문고 등의 학생 대표 24명을 연행했다. 이 소식을 들은.... 3.8민주의거는 대구 2.28민주운동, 마산 3.15의거와 함께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충청권 최초의...
이종섭 기자 2025.03.07 10:56
연예
브라이언, 300평 대저택 공개 “19평 수영장, 해외 리조트 스타일”(4인용식탁)채널A ‘절친 토큐멘터리 4인용식탁’ 가수 브라이언이 완공 직전인 300평 규모의 단독 주택을 공개했다. 지난 21일 방송된 채널A ‘절친 토큐멘터리 4인용식탁’에는 가수 솔비가 이민우, 브라이언, 권혁수를 초대했다. 2018년 평택으로 거취를 옮긴 브라이언은 4월 말 약 300평 규모의 단독 주택으로 이사를 갈 것이라고 밝혔다. 브라이언은 “나도 리조트처럼 짓고 싶어서 이렇게 지었는데 빨리 이사 가고 싶다”고 전했다. 이민우는 “19평 정도의 수영장 있는데 완전 미국집처럼 지은 거야”라고 브라이언의 집을 구경한 후기를 들려줬다. 여기에 더해 이민우는 “얘는 해외 여행을 가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해서 자기 집을 휴양지처럼 만드는 거다”라고 설명했다. 이에 권혁수는 “영어가 더 편한데 왜 해외 여행을 안 좋아하냐”고 궁금해했고 브라이언은 “비행기 공포증 있다”고 고백했다. 채널A ‘절친 토큐멘터리 4인용식탁’ 채널A ‘절친 토큐멘터리 4인용식탁’ 채널A ‘절친 토큐멘터리 4인용식탁’ 브라이언은 집 완공 기념 파티를 계획 중이기도 하다. 청소메이트인 권혁수에게는 “청소 잘하니까 미리 와서 셋팅하고..”라고 말했지만 이민우는 “파티를 하면 더럽게 놀아야하는 거 아니냐”며 반박했다. 브라이언은 “밖에선 괜찮다. 집에 들어와서는...”하며 고민했다. 또 브라이언은 “많은 분들이 오해하는 게 집이 크면 청소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는데 이미 청소와 정리가 돼 있으면 손이 별로 안 간다”라며 ‘깔끔남’ 다운 모습을 보였다. “먼지가 계속 쌓이지 않냐”는 이민우의 의문에 브라이언은 “먼지는 공중에 있다가 떨어진다. 떨어진 곳만 정리하면 된다”고 답했다. 수영장 및 잔디 청소와 관련해서는 “수영장 로봇 청소기기가 나왔다. 잔디 로봇 청소기도 있다. 매일 아침 시간 세팅만 하면 얘가 알아서 다 한다”라며 심플한 대답을 내놨다. 한편 채널A ‘절친 토큐멘터리 4인용식탁’는 매수 월요일 오후 8시 10분에 방영된다.
서형우 온라인기자 2025.04.22 09:38
생활
에이치플러스 양지병원 정중식 교수…‘4.19민주평화상’ 수상카메룬의 슈바이처 정중식 교수, “가난한 죽음 구하는 게 소명” 카메룬 응급의료시스템 씨앗 뿌려, 국립 야운데 응급센터 개원 헌신 에이치플러스 양지병원 중환자의학과 정중식 교수 에이치플러스 양지병원 중환자의학과 정중식 교수(응급의학과 전문의) 가 ‘제6회 4.19 민주평화상’ 을 수상했다. ‘4.19민주평화상’은 2020년 서울대 문리대 총동창회가 4.19 정신 계승을 위해 제정한 상으로 민주주의 정착과 사회 정의, 평화 구현에 기여한 인물과 단체를 매년 선정, 상패와 상금 5,000만원을 수여해 왔다. 4.19 민주혁명 65주년을 맞아 지난 18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4.19민주평화상 시상식에서수상자로 선정된 응급의학과 전문의 정중식 교수는 2006년부터 방글라데시 이주 노동자 의료 봉사를 시작으로 필리핀 안티폴로 빈민 아동 자원봉사에 나섰다. 그의 30대는 노숙인 등 주거 취약 계층 환자 진료를 전담했고, 40대는 아프리카 땅에 응급의료의 씨앗을 심는데 집중했다. 2010년 서울의대 보라매병원 조교수직을 떠난 정교수는 2013년 KOICA ODA 보건전문가와 글로벌 협력의사로 카메룬에 파견 근무하면서 카메룬 국립 야운데 응급센터를 개원, 운영하는 등 카메룬 국가 응급의료 체계 기초를 다지는 데 헌신했다. 특히 그는 ‘카메룬의 슈바이처’로 불리며 현지에서도 깊은 존경을 받고 있다. 제6회4.19민주평화상 수상자 응급의학과 전문의 정중식 교수 (사진 중앙) 4.19 민주평화상 심사위원회는 “4.19 정신 계승과 희망찬 미래사회를 염원하는 취지로 매년 수상자를 선정해 왔다” 며 “정중식 교수는 카메룬 보건의료 인프라 구축, 응급의료체계 기반과 공공의료 체계 기초를 세웠을 뿐 아니라 카메룬 국립응급센터 설립이라는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성과를 이뤄냄으로써 국내외적으로 인권과 평화에 기여하며 대한민국 의료인의 위상을 드높인 ‘참 의료인’ 으로 그 공로를 높이 평가했다”고 밝혔다. 역대 4.19민주평화상 수상자로는 반기문 전UN사무총장, 김정남 전 청와대 교문수석, 김영란 전 대법관, 배우 안성기, 한국항공우주연구원(항우연) 등이 있다. 정 교수는 서울대 의대, 존스홉킨스 보건대학원을 졸업했고, 서울특별시 보라매병원 응급의학과 교수, 카메룬 보건부 야운데 응급센터 부원장, 성남시의료원 중환자의학과를 거쳤다. 또한 그는 ‘2014년 외교부장관’ 표창, ‘2020 대한민국 해외봉사상(국무총리상)’과 ‘이태석상’을,2023년에는 고(故)성산 장기려 박사의 학문적 업적과 이웃 사랑 정신을 본받기 위해 제정한 ‘장기려의도상’을 수상한 바 있다. 지난 2025년 2월 베트남 박칸 지역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는 정중식 교수
강석봉 기자 2025.04.21 09:24
생활 오늘의 운세 나침반
[오늘의 운세 나침반] 2025년 4월 19일쥐 84년생 주장 강하면 거부 반응. 인내 양보로 하루 보내자. 72년생 안심했던 일에 실수. 매사 성급한 결정은 후일에 실패. 관재수. 60년생 이해가 반반. 시작함에 신중히 결정할 때. 인정고란. 건강주의. 48년생 걱정은 욕심 많은 데서 생긴다. 가정에 충실. 계획은 미루자. 행운의 숫자: 5 10 27 소 85년생 애정 불만으로 갈등 심각. 결단 필요. 신경과민으로 날카로운 날. 73년생 뜨거운 사랑 싫증 느껴 용두사미. 변함 빠르면 고통도 빠르다. 61년생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외부에 드러내지 않으니 신경과민. 49년생 행복할 때 친구 모르면 불행할 때 인덕 없다. 과로주의. 행운의 숫자: 2 17 29 호랑이 86년생 사치하면 아무리 넉넉해도 모자란다. 절제력 발동. 실물수 주의. 74년생 의욕 넘치고 하는 일마다 승승장구하는 날. 현명한 판단 할 때. 62년생 타인 간섭 말고 주변 관리 잘해야 하는 날. 마음 넓게 가져야. 50년생 풀어헤쳐진 마음 다시 묶어 새롭게 시작할 때. 피로 극복하자. 행운의 숫자: 7 13 23 토끼 87년생 대인관계가 원만치 못한 시기. 분수 지켜 행동할 때. 금전대길. 75년생 눈에 띄는 것마다 거칠고 처량. 나만의 공간에서 고독 즐길 때. 63년생 자부심이 가득하니 승승장구. 부부간 사랑 만점. 가족 우선. 51년생 계획은 생각뿐 성과 없이 하루 간다. 눈높이 맞는 계획이 필요. 행운의 숫자: 3 11 20 용 88년생 경솔하게 행동하면 친한 사람도 잃는다. 친구 자존심 살려주자. 76년생 한 걸음씩 나아가니 기반이 단단. 감기몸살 주의. 두통주의. 64년생 처하여 있는 환경에 따라 영향을 받아 마음이 변하게 된다. 52년생 보람 없는 날 될 우려 있으니 큰 기대 말고 하루 보내자. 행운의 숫자: 4 19 25 뱀 89년생 거짓 없는 대화할 수 있는 사람 들어오니 솔직한 데이트 즐길 때. 77년생 나른한 날 되기 쉬우니 생기 갖고 추진하여 정리정돈 힘쓸 때. 65년생 수입 들어오나 지출 빠르다. 부부 애정 돈독히 할 때. 부부 청신호. 53년생 주변 인정받는 하루. 이롭게 전개되니 즐거움이 가득한 날. 행운의 숫자: 8 15 21 말 90년생 즉흥적인 교우관계나 교제는 실패작 된다. 결정은 오후에 할 것. 78년생 환경 좋아도 계획 세워 노력해야 성취되는 날이다. 인정고란. 66년생 겉모습 변한 것을 속까지 변했다 판단치 말고 자상히 대할 때. 54년생 매사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자제하여 침묵으로 일관하는 날. 행운의 숫자: 2 12 28 양 79년생 싱그러운 소개팅 받으니 기분만점. 가족의 조언 받아들일 때. 67년생 재수 대통하고 명석한 두뇌 발휘하는 날. 의식주 변동수. 55년생 오랜 기간 쌓은 공덕이 빛을 본다. 승승장구하는 날. 횡재수. 43년생 자녀의 경사 있으니 키운 보람 있는 날. 막혔던 계약매매 성립. 행운의 숫자: 1 13 26 원숭이 80년생 험난한 길 잘 헤쳐 가는 날. 친구나 동료와 협조하니 성과 큰 날. 68년생 내일 위하여 좀 더 긴장하여 계획 차분히 진행. 스트레스 주의. 56년생 계획 성공하는 기회 오니 매사 순조롭다. 신경성 위장병 주의. 44년생 묵은 계획 버리고 새 계획 세울 때. 아침 일찍 출행수. 금전지출 . 행운의 숫자: 9 18 20 닭 81년생 단 말은 병 쓴 말은 약. 주변 조언 듣는 것이 후일에 입신양명. 69년생 남에게 줄때 흡족히 주어 인심 잃지 않도록 할 때. 친구와 회포. 57년생 손아랫사람과의 구설수 유의. 신체리듬 깨지니 과음조심. 45년생 자녀와의 불화 사랑으로 극복. 가족 외식하는 날. 영양보충. 행운의 숫자: 6 10 24 개 82년생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 지혜 샘솟고 창의력 돋보인다. 상사도움. 70년생 경솔한 행동하면 곤란 생기니 신중히 처신. 확인하고 계획. 58년생 부모 형제 모여 단합대회 갖자. 여럿 의견 모아 지혜 짜자. 46년생 내키는 대로 움직이면 인정고란. 내실 충실하자. 건강조심. 행운의 숫자: 4 19 24 돼지 83년생 먼 길도 가까운 곳부터 시작. 차분히 순서 있게 진행하는 하루. 71년생 사람 잘못 만나면 대들보 무너진다. 장래 보는 안목 갖자. 59년생 주관적 판단으로 결과는 좋은 날. 직업 인정받는 날. 용기 갖자. 47년생 손아래사람 충고도 받아들이자. 오늘 계획은 내일의 회복제. 행운의 숫자: 8 16 22
온라인뉴스팀 기자 2025.04.18 19:00
생활
‘킹솔로몬 메드줄 데이츠’ 대추야자X최유라 쇼, 4월 19일 방송킹 솔로몬 대추야자, 건강한 단맛으로 가정의 달을 채운다 이스라엘산 프리미엄 대추야자 브랜드 ‘킹 솔로몬(King Solomon) 메드줄 데이츠’가 오는 4월 19일(토) 오전 10시 20분, 롯데홈쇼핑 ‘최유라쇼’를 통해 가정의 달 기획 상품을 선보인다. ‘킹 솔로몬 데이츠’는 지난 1월 ‘최유라쇼’ 첫 방송에서 완판을 기록하며 소비자들의 앵콜 요청을 받았고, 이에 힘입어 이번 가정의 달 방송을 통해 한층 더 풍성한 구성을 마련했다. 이번 방송에서는 씨 있는 대추야자 350g 3팩, 씨 없는 대추야자 200g 3팩으로 총 1.45kg을 구성한 대용량 실속 세트가 최유라쇼 단독 구성으로 소개된다. 가성비와 대용량을 중시하는 최근 소비 트렌드와 얇아진 소비자 지갑 사정을 고려한 실속형 구성이다. 또한 대추야자가 생소한 소비자들을 위해 간편하게 요리할 수 있는 레시피북도 함께 제공되며, 이를 통해 베이킹, 스무디, 홈 파티 요리 등 가정에서의 다양한 활용도를 높였다. ‘킹 솔로몬 데이츠’는 전 세계 50여 개국에 수출되는 프리미엄 메드줄(Medjool) 품종으로, 이스라엘의 청정 사막 기후에서 재배된 대추야자다. 자연 그대로의 당도와 풍부한 식이섬유, 칼륨, 마그네슘 등이 함유되어 건강 간식으로 각광받고 있다. 중동을 대표하는 과일인 대추야자는 흑곶감이나 푸룬(말린 자두) 과 유사한 식감을 지니며, 버터를 더한 듯한 크리미한 풍미와 건강한 단맛이 특징이다. ‘킹 솔로몬 데이츠’는, 최근 ‘한 입을 먹어도 럭셔리하게’라는 소비 트렌드와 헬시 디저트를 찾는 소비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고 있다. 또한 천연 당분이 풍부해 에너지를 빠르게 보충할 수 있으며, 사과나 바나나보다 풍부한 미네랄과 칼륨 함량으로 운동 후, 야외 활동 시, 나른한 오후의 에너지 부스터 간식으로도 제격이다. 혈당을 걱정하는 소비자들도 안심하고 즐길 수 있는 낮은 글라이세믹 지수(GI) 역시 킹 솔로몬 데이츠의 강점이다.당분은 충분히 있으나 혈당을 천천히 올리기 때문에 건강한 단맛으로 평가받고 있다. ㈜플레이버365의 이재연 대표는 “고물가로 어려움을 겪는 소비자들이 가정의 달을 맞아 온 가족이 부담 없이 즐기실 수 있도록 대용량 구성을 기획했습니다. 씨를 제거한 제품도 포함해 봄나들이에서 간편히 섭취하거나 홈 파티 요리 재료로도 활용도를 높였습니다. 킹 솔로몬 데이츠는 따뜻한 봄날, 몸과 마음을 다독이는 건강한 간식이자 디저트입니다.” 라고 전했다. ‘킹 솔로몬 데이츠’는 최근 커피, 홍차, 버번 등과의 페어링으로도 주목받고 있으며, 차 애호가와 위스키 마니아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는 제품이다. 이번 방송에서는 킹 솔로몬 데이츠를 활용한 다양한 요리 연출법이 생생하게 소개될 예정이며, 방송 중 구매 고객을 위한 특별 혜택도 마련된다.
강석봉 기자 2025.04.16 11:33
사회
한여름에 다시 마스크 써야 하나···코로나19 환자 4주간 6배 증가최근 코로나19 입원 환자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방역당국은 코로나19 치료제 공급량을 늘리고 자가검사키트 수급 상황을 면밀히 살피는 한편, 국민에게 기침 예절과 손 씻기 등 예방 수칙을 준수해달라고 당부했다. 질병관리청은 지난 8월 8일 보건복지부, 식품의약품안전처, 행정안전부 등 관계부처 합동으로 코로나19 유행 동향을 공유하고 대응 방안을 점검했다고 8월 9일 밝혔다. 질병청이 병원급 의료기관 220곳을 표본 감시한 결과 올해 코로나19 입원환자 수는 2월 첫째 주(875명) 이후 지속해서 감소하다가 6월 말부터 다시 증가했다. 최근 4주간 코로나19 입원환자 수는 지난 7월 둘째 주 148명, 셋째 주 226명, 넷째 주 475명이었고 8월 첫째 주까지 5.8배로 불어났다. 나이별로는 65세 이상이 전체 입원환자 수 1만2407명의 65.2%(8087명)를 차지했다. 50∼64세가 18.1%(2251명), 19∼49세가 10.3%(1283명) 순이었다. 질병청은 지난 2년간의 유행 추세를 고려해 8월 말까지는 코로나19 환자가 증가할 것으로 예측했다. 국내 인플루엔자 및 호흡기 바이러스 병원체 표본감시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 검출률은 지난 7월 둘째 주 13.6%에서 8월 첫째 주 39.2%로 4주 연속 상승했다. 최근 코로나19 유행은 오미크론 세부계통인 KP.3 변이바이러스가 주도하고 있다. KP.3 변이 점유율은 지난 7월 기준 45.5%로 6월 대비 33.4%포인트 늘었다. KP.3 변이는 올해 상반기 유행한 오미크론 JN.1에서 유래한 변이로 JN.1보다 S단백질에 3개의 추가 변이를 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유행하고 있어 세계보건기구(WHO)에서도 모니터링 중이다. 전파력과 중증도가 증가했다는 보고는 아직 없다. 정부는 코로나19 환자가 증가하고 있으나, 중등증(중증과 경증 사이) 환자가 93.8%를 차지해 기존 의료체계로 대응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8월 첫째 주 평일 응급실 하루평균 내원 환자 1만9521명 중 코로나 환자는 5.1%(996명)이고, 이 중 중증 환자는 6.2%(62명)로 대다수는 중등증 또는 경증 환자다. 다만 65세 이상 노인이나 기저질환자 등 고위험군은 코로나19 감염 시 중증으로 악화할 수 있으므로 적시에 치료받을 수 있도록 관리 체계를 강화하기로 했다. 정부는 코로나19 치료제와 자가검사키트가 수요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도 적극 대응할 방침이다. 질병청은 지난 7월 시도 보건소와 병원, 약국에 코로나19 치료제 7만6043명분을 공급했다. 직전 달인 6월(737명분)보다 약 103배, 지난 5월(1천812명분)보다는 약 42배로 치료제 공급량이 늘어났다. 질병청은 코로나19 치료제를 추가 구매해 이달 내로 신속히 공급할 예정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코로나19 자가검사키트 생산·유통 등 수급 상황을 점검하고, 원활하게 공급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로 했다. 이달 내 약 500만개의 자가검사키트가 공급될 것으로 식약처는 파악하고 있다. 오는 10월에는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재개된다. 65세 이상 노인과 면역저하자, 요양병원과 같은 감염취약시설 입원·입소자 등 고위험군은 무료로 접종할 수 있다. 고위험군이 아닌 12세 이상 일반 국민은 본인이 접종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정부는 국민에게 기침, 발열 등 코로나19 증상이 있으면 가까운 의료기관에서 적절한 처방을 받고 회복될 때까지 충분한 휴식을 취해달라고 권고했다. 지영미 질병청장은 “여름철에는 에어컨 사용으로 실내 환기가 부족하고, 휴가 기간 사람 간 접촉이 증가하기 때문에 호흡기 감염병 유행 위험이 커진다”며 “실내 환기, 손 씻기, 마스크 착용 등 감염병 예방 수칙 준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당부했다.
홍진수 기자 2024.08.09 14:27
사회 원희복의 인물탐구
[원희복의 인물탐구]4·19혁명 59년 조영건- 혁명과 한평생, 한국혁명의 산증인1960년 4월 19일 오후 2시쯤. 서울 경무대(현 청와대) 앞. 학생 시위대는 1차 저지선인 중앙청(현 광화문)과, 2·3차 저지선을 뚫고 경무대 앞까지 다가섰다. 학생들은 바리케이드로 활용된 소방차를 탈취해 올라탔다. 소방차를 앞세운 시위대는 마지막 경찰 저지선 코앞까지 갔다. 그 순간, 소방차를 향해 경찰의 일제사격이 시작됐다. 소방차에 매달려 있던 학생들이 낙엽처럼 떨어졌다. 한 대학생이 총에 맞아 도로에 널브러진 중학생을 끌어안고 뛰었다. 주변의 몇몇 학생들이 그를 부축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경찰의 사격권에서 벗어나자 시민들이 부상당한 중학생을 병원으로 옮겼다. 이 순간은 이문열의 소설 <변경> 3권에 아주 자세하게 묘사돼 있다. 부상당한 중학생을 안고 뛰던 이 장면은 한 미국 기자의 카메라에 잡혔다. 이 사진은 전세계로 타전돼 동아시아 작은 나라에서 일어난 민주학생혁명의 상징으로 부각됐다. 이 사진은 후에 ‘대한뉴스’에 삽입되면서 전국 영화관에서 상영됐다. 그 사진의 주인공은 조영건 당시 서울대 법대 3학년생이다. 4·19혁명 당시 사진 속 주인공 꼬박 59년이 지난 지금 그 조영건은 ‘여전히’ 거리에 서 있었다. 2019년 4월 11일 오후 2시, 그는 서울 탑골공원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연설을 하고 있었다. 목에 보라색 머플러를 맨 그는 “양심을 가졌다고, 민주를 요구했다고, 통일을 외쳤다고 감옥에 가두는 법이 어디 있는가”라며 “양심수를 석방하라”고 외쳤다. 이 자리는 민주화운동가족협의회, 양심수후원회, 구속노동자후원회 등이 매주 목요일 오후 2시에 여는 목요집회다. 구속노동자 후원회장인 그의 선창에 따라 “양심수 석방하라, 국가보안법 폐지하라”를 외치는 사람 중에는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어머니 김정숙 여사도 있었다. 59년 전 새파란 나이에 경무대 앞에서 시위를 하던 4·19학생혁명의 주인공 조영건이 지팡이에 의지하는 ‘중늙은이’가 다 된 지금까지 거리에서 시위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세상이 달라져도 여섯 번이나 달라질 세월이 흘렀지만 그는 왜 여전히 거리에 서 있을까. 우리 역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정체돼 있다는 말인가. -사진 속 장면 4월 19일 당시 경무대 앞에 간 상황을 설명해달라. “오늘(4월 11일)이 바로 3·15 부정선거 시위 때 경찰이 쏜 최루탄을 눈에 맞고 죽은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항에서 떠오른 날이다. 부모님이 마산, 그것도 부정개표를 한 시청 바로 옆에 살았다. 방학이라 집에 내려갔던 나는 3·15 부정선거 항의시위 그 현장에 있었다. 마산에서 ‘실전경험’이 있던 나는 곧장 서울로 올라와 경무대 앞 시위에 참여했다.” -외국 기자가 찍은 그 사진이 영화관 ‘대한뉴스’에도 나오면서 유명해졌다. “그 사진은 미국 통신사 기자가 찍었다는데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당시 화보에도 나오고 많이 회자됐다.” -그때 경무대 앞에서 연행된 학생들은 어떻게 됐는가. “모두 마포경찰서로 연행됐다. 눈앞에서 총에 맞고 쓰러진 동료를 목격했던 연행 학생들은 자신들도 ‘즉결처분’될지 모른다는 공포에 떨었다. 이들은 이승만 박사가 하야하고 나서야 풀려났다.” -4·19학생혁명 정신은 무엇인가. “프랑스혁명이 서유럽의 시민혁명이라면, 4·19혁명은 신생국가의 시민혁명이다. 프랑스혁명과 차이점은 우리 4·19혁명은 피압박·분단된 민족의 봉기였기 때문에 ‘자주’라는 개념이 들어간다. 르페브르가 감옥에서 쓴 <프랑스혁명>에는 프랑스혁명이 삼부회 귀족-시민-농민-노동자 혁명 4단계로 이어졌다고 나와 있다. 마찬가지로 4·19혁명도 13개월 동안 학생-시민-노동자로 발전됐다. 특히 전국 대학에 학생통일연맹이 결성되면서 61년 4월 19일 제2차 4·19선언에서 반외세·통일선언으로 발전한다. 그래서 4·19혁명 정신은 민주·자주·통일이다. 이 세 가지가 우리 사월혁명회 정관에 명시돼 있다.” 1960년 4월 19일 조영건 구속노동자후원회장(가운데 안경 낀 학생)이 경무대 앞에서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쓰러진 중학생을 옮기고 있다. 조 회장은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양심수 석방과 통일운동이 4·19정신의 연장선이라고 말했다. 세상을 살다보면 초심을 지키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안다. 파란만장한 우리 현대사에서 학생시절 신념을 60년 가까이 지키고 또 직접 행동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4·19혁명은 우리 사회변혁운동에서 ‘세대구분’이라는 독특한 문화를 낳았다. 4·19세대, 60년대 중반의 6·3세대, 70년대 유신세대, 80년대 386세대 등이 그것이다. 그는 “서울대 58학번인 우리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사정권의 관료와 테크노클라트로 대거 영입됐다”면서 “우리 4·19세대 300명 중 230명이 고등고시(사법과·행정과)에 합격한 변절의 세대였다”고 말했다. 그는 4·19혁명 정신과 군사정권은 도저히 같이 해선 안될 관계라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삶은 4·19혁명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남대 교수 부임하자 부마항쟁 터져 조 회장은 1940년 경남 창녕 출신이다. 부친은 교육공무원으로 박원순 서울시장의 선친과 죽마고우였다. 경남중·고를 나와 1958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그는 “대학에 들어가보니 완전히 고시학원이었다”면서 “나는 법 과목보다 문리대로 가 정치학과 강의를 들었다”고 말했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군복무를 마치고, 한국노총에서 만드는 <한국노동운동사> 편찬위원으로 취직했다. 해방 이전 노동운동사는 역사학자인 건국대 강동진 교수가 쓰고, 그는 해방 이후 노동운동사를 집필했다. 그때 강 교수가 ‘대학원에 들어와 더 공부하라’는 조언에 대학원에 진학했다. 석사는 역사학으로, 박사학위는 경제사로 받았다. 1971년부터 건국대에서 시간강사를 하면서 ‘운동권’과 교류하다가 남산 중앙정보부에 두 번이나 연행됐다. 그는 1975년 청주대 전임교수로 갔다가 79년 3월 ‘고향에서 훈장을 하고 싶어’ 경남대로 옮겼다. 경남대 교수에 가자마자 마주친 것이 바로 10월 부마항쟁이었다. 그는 경찰에 끌려가는 제자들을 바라보다 결국 시위대에 동참했다. 그 덕분에 그는 제자들에 의해 부마항쟁기념사업회 공동대표에 추대됐다. 마산은 그가, 부산은 송기인 신부가 공동대표를 맡았다. 이때 만난 사람이 바로 노무현·문재인 변호사다. 특히 문 변호사는 고교 13년 후배로 각별히 지냈다. 그는 경남대 경제학과 교수로 1982년 노동복지연구소를 설립했다. 이는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를 포함에 전국에서 두 번째, 지방에 설립한 첫 노동문제연구소였다. 상경대 학장도 지냈고, 영국 런던대 연구교수,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사범대 강의교수, 상하이 푸단대 초빙교수 등을 지내며 연구와 강의에 매진했다. 1988년 서울대 김진균·부산대 하일민 교수 등 그나마 ‘정권에 빌붙지 않은’ 학계·문화계·언론계 동기들과 ‘사월혁명연구소’를 만들었다. 그는 소장을 오래 지냈다. 사월혁명연구소는 사월혁명회로 이름을 바꿨지만 지금도 100여명의 회원이 사월혁명 정신을 알리고 있다. 그는 한국경제사학회 부회장, 한국사회경제학회 회장 등의 학술활동과 죽산 조봉암기념사업회 학술위원장, 몽양 여운형기념사업회 고문 등의 사회참여활동도 했다. 그는 “이런 활동 역시 민주·자주·통일이라는 4·19혁명정신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1987년 6월항쟁에는 직접 참여하지 못했다. 영국 런던대에서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0년 만든 6월항쟁기념사업회 공동대표를 맡았다. 학교와 사회활동에 그치던 그의 활동반경은 1997년 신창균·권영길 등과 함께 진보정당 창당 10인 준비위원에 가담하면서 정치로 확대됐다. 그리고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 이후 그는 6·15 공동선언실천 남측공동대표, 6·15 공동선언 학술위원회 상임공동위원장 등 통일운동에 매진했다. 2006년 대학에서 정년퇴직을 한 후 진보정당의 진보정치연구원 이사장을 지냈고, 지금도 진보정당 고문을 지내고 있다. 정년퇴직 이후 진보정당 활동 그는 지난 촛불혁명에서도 ‘개근’했다. 보통 촛불 개근이란 2016년 10월 29일 민중총궐기투쟁본부가 주도해 3만명이 모인 촛불시위를 시작으로 23번 이어진 촛불시위를 의미한다. 그러나 진정한 촛불시위는 그 1년 전 2015년 11월 14일 제1차 민중총궐기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때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에 맞아 쓰러졌다. 이때부터 촛불시위에 나선 사람이 진짜 ‘촛불 개근’이다. 조영건 구속노동자후원회장이 지난 4월 11일 탑골공원 앞에서 양심수 석방을 외치고 있다. -이번 촛불시위에 진짜 개근했다. 어떤 이유에서였나. “나는 사월혁명회원으로, 구속노동자후원회장으로, 6·15 남측본부 공동대표 등에 속해 있었다. 이들 단체가 모두 민중총궐기 때부터 촛불시위에 참여했기 때문에 자연히 촛불시위 개근을 했다.” -이번 촛불혁명 때 현장에 있으면서 59년 전 4·19혁명 때 경무대 앞을 기억하고, 또 비교했을 것이다. 어떤 생각이 들었나. “59년 전 4·19혁명과 이번 촛불을 비교하면 성숙한 시민들의 의식과 행동이 돋보였다. 그러나 민중총궐기 때도 폭력적이지 않았다. 민중총궐기는 집회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이 성립이 안 되는 합법적인 집회였다.” -박근혜 정권의 대응태도는 과거와 비교하면 차이가 있나. “한상균을 가두고, 백남기를 죽였어도 촛불혁명은 의연했다. 그런 민중의 역량에 겁을 먹고 박근혜가 군대를 동원하지 못한 것 아닌가. 1979년 부마항쟁 때도 궁정동에서 계엄을 선포해 무력진압하자는 경호실장 차지철과 안 된다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싸우다 박정희가 총에 맞았다. 이번에도 계엄을 검토했지만, 오히려 큰 역효과가 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못한 것이다. 그만큼 민중의 힘이 커졌다. 4·19 때처럼 총을 쏘지 못한다.” -촛불혁명 정신은 어떻게 계승·발전돼야 하나. “4·19혁명은 이후 터키와 필리핀 혁명으로 파급됐다. 촛불혁명은 내년 4월혁명 60주년을 맞아 ‘4월혁명의 완결판’이 돼야 한다. 일시적인 수구패악을 청산하는 것에 멈춰선 안 된다. 촛불혁명은 탈냉전, 평화와 화해, 상생과 번영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양극화된 민생경제와 피폐해진 민중의 삶, 평등·복지에 혁신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 말로만 남북화해를 외치지 말고 통일된 한반도를 위해 미국의 간섭을 국민의 힘으로 돌파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촛불혁명의 의미를 통찰해야 한다.” 그는 1960년 마산 3·15 부정선거 시위현장에, 그해 4월 경무대 앞 4·19혁명 현장에 있었다. 그리고 1979년 부마항쟁의 현장을 거쳐, 지난 촛불혁명까지. 그는 대한민국 현대사 격변의 순간마다 그 현장에 있었다. 그러기를 근 60년. 그는 처음 외쳤던 민주·자주·통일을 지금까지 외치고 있다. 그도 변하지 않았지만 세상 역시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자가 ‘평생 혁명의 현장을 지키는 것이 힘들고 스스로 불행한 운명이라 생각하지 않나’라고 물었다. 그러나 그는 의외의 답변을 했다. “평생 대학교수로 살아온 나는 노동자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이제 중늙은이가 되어 구속노동자후원회 일을 하며 그 빚을 갚고 있다. 촛불혁명 이후 3년간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양심수를 석방하라고 외쳤다. 59년 전 4·19혁명 때 경무대 앞 바로 그 자리다. 거리에서 구호를 외치는 것보다 민주화 투쟁을 같이 한 문재인 정권이 이렇게 우유부단한 것이 서글프다. 나는 촛불민중이 보여준 청년의 힘에서 삶의 활력을 얻고 있다. 감사하고 행복하게 생각한다.”
글·원희복 선임기자 사진·이석우 기자 2019.04.22 13:40
사회 광복 70년 역사르포
[광복 70년 역사르포](8)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창립-천도교 중앙대교당…4·19의 열망 ‘평화통일’로 승화1961년 2월 25일 서울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 중앙대교당. 전국에서 모인 1000여명의 대의원들이 의자도 없어 멍석 위에 앉았다. 단상 양쪽에는 ‘뭉치자 민족 주체세력’ ‘배격하자 외세 의존세력’이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상해임시정부 외무차장 출신의 장건상은 감격스런 표정으로 “민족통일의 주체세력이 되는 이 대회는 역사적 모임이므로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열정적으로 운동하자”고 개회사를 했다. 민주·자유·자주를 표방하는 민간통일단체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의 결성 순간이다. 각계각층의 통일 열망 모아 결성 1910년대 당시로서는 드물게 미국 유학까지 마친 장건상은 상해임정 외무차장, 해방 직후 여운형의 근로인민당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여운형이 암살되자 근로인민당 위원장 대리로 1948년 평양에서 열린 조선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여하기도 했다. 민자통 의장은 성균관 대표인 김창숙이 맡았고, 민족종교 천도교도 참여했다. 여기에 혁신정당, 교원노조 등의 진보적 사회·노동·학생 등이 가세, 민자통은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결합한 모양새였다. 3·15 부정선거로 촉발된 이승만 체제는 4·19혁명으로 무너졌다. 권력구조를 내각책임제로 바꾸고 치러진 7·29 총선에서 민주당은 민의원 233명 중 175명(75.1%)을 차지하는 압도적 승리로 집권당이 됐다. 총리 장면, 대통령 윤보선 체제의 제2공화국이 출범했다. 하지만 집권 민주당은 초장부터 구파와 신파로 나뉘어 싸웠다. 1921년 준공된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독립운동과 통일운동 행사가 자주 열리는 등 우리 근현대사의 현장을 묵묵히 지켜온 현장이다. 4월혁명의 주역인 학생 입장에서 민주당은 과거 자유당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특히 혁명으로 이승만은 쫓아냈지만 사회의 구조적 빈곤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실망을 딛고 새로운 탈출구로 등장한 것이 바로 ‘평화통일론’이다. 그동안 평화통일 세력은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에 눌려, 조봉암 처형으로 잠복한 상태였다. 잠복한 이것을 다시 일깨운 세력은 역시 대학생들이다. 1960년 10월 15일 서울대 민족통일전선에서 시작된 대학 통일운동 세력은 전국 대학으로 확대됐고, 다시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민통련)이라는 이름으로 결집했다. 정치권에서도 혁신정당을 중심으로 통일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졌고, 청년·사회단체도 이에 가세했다. 결국 정계·종교계·학계·청년계·지역대표 등 각계각층의 통일 열망을 모은 것이 바로 민자통이다. 민자통이 창립된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곳이다. 1860년 창도된 동학은 3대 교주 손병희에 의해 천도교로 이름을 바꿔 중흥의 기회를 맞는다. 손병희는 신도들의 성금을 모아 1921년 2월 28일 이 중앙대교당을 준공했다. 당시 이 건물은 명동성당과 조선총독부 청사와 함께 경성의 3대 건물로 손꼽혔다. 천도교 측 설명에 따르면 “일제시대 주요 민족적 집회와 해방 이후 귀국한 해외 독립지사들의 귀국인사, 강연 및 집회가 이곳에서 이뤄질 정도로 권위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곳 대교당을 관리하는 김경규씨(73)는 “이곳이 독립선언서를 처음 배부한 곳이며, 개벽사(일제시대 최대 발행부수 잡지) 터가 있고, 세계 어린이운동 발상지”라며 “대교당은 문화재(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6호)로 문화재청에서 관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우리 근현대사의 현장을 묵묵히 지켜온 현장인 것이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4·19혁명의 ‘공통의 욕구’인 민자통이 결성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실 최근에는 천주교나 개신교 등이 남북문제와 통일에 관심이 많지만 당시 민족종교 천도교의 통일에 대한 역할은 컸다. 그 이유는 천도교의 ‘교정쌍전’ 교리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동학민족통일회 임형진 공동의장(경희대 교수)은 “교정쌍전은 종교와 정치가 대등한 입장에서 조화하는 것으로, 천도교는 현실정치를 매우 중시한다”며 “해방 이후 천도교가 다른 어느 종단보다 더욱 열성적으로 민족통일에 앞장서고 또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진력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1961년 2월 25일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민간통일단체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가 결성됐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신도 성금으로 지은 경성의 3대 건물 1961년 4월 12일 유엔 정치위원회는 ‘한국문제 토의를 위해 투표권 없이 남한과 북한을 유엔에 초청한다’는 한국 통일에 관한 결의서를 가결했다. 유엔이 한반도 통일문제에 대한 공론의 장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장면 총리는 처음에 ‘북한이 이에 동의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해 한국 외교의 승리라고 자찬했다. 그러나 북한이 ‘유엔 결정을 받아들이겠다’고 나서자 당황했다. 장면 총리는 “용공통일보다 분단 지속이 낫고 유엔 결의라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불리하다면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 같은 원칙 없는 정부의 태도에 정치권과 민간이 반발했다. 당시 소장파였던 김영삼 의원(후에 대통령 역임)은 “이승만 독재도 통일을 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분단상황 지속 운운은 용서 못할 망언이다”라면서 “국내외 정서를 거역하지 말고 공산당을 이겨내는 자체 역량을 강화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YS의 55년 전 이 발언은 지금 곱씹어 보아도 의미가 있다. 55년 후인 현재의 중앙대교당 내부 정부의 통일방안이 무원칙하게 흔들릴 때 민간 차원에서의 통일운동은 확산됐다. 민주·자유·자주적인 민자통의 통일운동은 각지로 파급됐다. 물론 민자통이 통일 논의를 모으는 과정에서 이탈하는 세력도 있었다. 민자통 창립을 코앞에 둔 2월 21일 일부 세력이 이탈해 중립화조국통일운동총연맹을 발기한 것이다. 이유는 통일방안의 구체성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논란이었지만, 내부적으로 통일방안이 급진적이냐 아니냐에 대한 논란이 그 핵심이다. 사실 이 논란은 지금도 진보세력의 분열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1961년 4월 19일 정부의 4·19혁명 1주년 기념식과 달리 학생들은 별도 기념식을 열었다. 이들은 “조국의 자주통일을 방해하는 외압세력과 이에 결탁하는 사대주의 세력을 일절 배격한다”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전국 대학교수 연합체인 한국교수협의회도 4월 25일 교수단 시위 1주년을 맞아 “다급해진 통일의 과업에 대해 우리들이 진심을 토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을 스스로 다행하고 흔쾌하게 생각한다”는 대북 메시지를 발표했다. 남한 사회는 온통 평화통일, 남북협상으로 물결쳤다. 5월 5일 북한은 서울 대학생들의 제의를 수용하면서 서울과 평양에서 회담을 개최하자고 제의했다. 논란은 더욱 격화됐다. 정부는 남북 학생회담을 불허하고, 대학생들은 강행하겠다고 맞섰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판문점에서’라는 구호는 이 시대 상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민자통을 비롯한 민간 통일세력은 정부에 학생회담 허용을 촉구했다. 1919년 3월 1일 인쇄된 기미독립선언서가 이곳에서 시민에게 배부됐고, 인근 탑골공원에서 낭독됐다. 5·16 쿠데타로 통일 열기 깊은 동면에 양측이 물러서지 않고 대립하는 가운데 1961년 5월 16일 새벽이 밝았다. 그리고 쿠데타 세력은 남북 학생회담을 추진한 대학생은 물론, 민자통을 주도한 사람들까지 모조리 구속했다. 혁명검찰부라는 간판이 달리고, 영장도 없이 연행·구속이 이어졌다. 진보정당, 사회단체, 언론사 기자 모두 구속됐고, 이들 대부분은 혁명재판소에서 중형이 구형됐다. 그리고 진보세력의 평화통일론은 다시 깊은 동면에 들어갔다. 일부 학자들은 당시 학생들의 무분별한 통일론이 5·16 쿠데타에 빌미를 줬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성균관대 교수 서중석은 “쿠데타 세력은 훨씬 이전부터 계획을 세워놓았다는 점에서 이것 때문에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고 볼 수 없다”면서 “(나중에) 좋은 핑곗거리를 줬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당시 학생들의 통일 열망은 혁명의 좌절에 따른 자연스러운 분출이었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전북대 교수 강준만은 에서 “4월혁명이 일어나게 된 배경도 그랬지만, 5·16 쿠데타가 나기까지의 13개월간 보상에 대한 기대욕구를 변화가 따르지 못함으로써 4월혁명의 주체들은 내내 좌절감을 맛보았다”면서 “5·16 쿠데타는 그 좌절감을 이용함으로써 성공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4월혁명은 5·16으로 인해 ‘빼앗긴 혁명’이 된다”고 평가했다. 4월 혁명 이후 13개월 공간에서 벌어졌던 통일 열기는 1987년 6월항쟁 이후 잠깐 재연되기도 했다. 직선제 개헌을 쟁취했으나 야권의 분열로 문민정부 수립에 실패한 학생들의 좌절은 6월항쟁 1주기를 맞아 통일 열기로 분출됐다. 1988년 6월 10일 수만명의 대학생들은 27년 전 선배들이 외쳤던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구호를 다시 외치며 임진각으로 향했다. 경찰의 저지로 회담 접촉은 무산됐지만 다음해 1989년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임수경(현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이 참석하면서 통일 열기는 재연됐다. 문민정부 들어 남북교류가 다시 활성화되고, 김대중 정부 들어 정부 차원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됐다. 노무현 정부에서 다시 정상회담은 이어졌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에서 남북정상회담은 중단되고, 박근혜 정부에서 남북관계는 경색됐다. 이러는 가운데 진보정치 세력과 평화통일 세력은 다시 고개를 들고 결집했다. 통합진보당을 만들어 나름 약진했지만 결국 갈라지고 말았다. 분당의 이유로 내부 경선문제를 내세우지만, 더 큰 원인은 통일방법을 놓고 벌이는 해묵은 논쟁이다. 분당으로 약해진 진보세력은 정권의 손쉬운 타깃이 됐고, 결국 해산되는 운명이 됐다. 지금 평화통일 논의는 ‘종북 논란’으로 다시 수면으로 잠복했다. 2012년 6월 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8부(부장 김상환)는 민자통 사건으로 사형을 구형받고 혁명재판소에서 징역 15년이 선고됐던 사건에 대한 재심에서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남북간 교류 증진 등 민자통의 주장이 북한이 제안하고 있었던 내용과 동일하지만,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이상 그 전제로서 남북교류가 선행돼야 한다는 주장 자체는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1961년 4월혁명의 열망을 모았던 평화통일 운동, 민자통의 행위는 역사적으로 복권된 것이다.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 2015.04.14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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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4·19혁명과 5·16쿠데타 ‘실업’ 때문에 일어났다ㆍ영혼이라도 팔아 취직하고 싶다 강준만 지음·개마고원·1만2000원강준만 교수는 기본적으로 강단의 학자이지만, 그 나름의 방식으로 저널리즘 활동을 성실하게 수행해온 저널리스트이기도 하다. 본격적 실명비판의 포문을 연 <인물과 사상>의 발행이나 신문 칼럼니스트로서의 활동이 동시대를 기록하는 공시적 저널리즘 활동이었다면, 시대와 시대를 특정 주제어로 꿰어내 사회적 변화의 흐름을 드러낸 일련의 저술작업들은 통시적 저널리즘 활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혼이라도 팔아 취직하고 싶다>는 언론 보도를 기초로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변동을 ‘실업’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살핀 책이다. 해방 직후 김구와 이승만을 지지하는 우익 청년단체 조직원은 총 323만여명에 이를 정도로 많았다. 강 교수는 이를 실업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일자리가 없었던 청년들과 행동대원을 필요로 했던 정치인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라는 것이다. 한국 현대사의 주요 국면을 이룬 상황이나 사건들의 배후에 실업이라는 구조적 요인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그의 분석은 4·19혁명과 5·16쿠데타에도 적용된다. 책에 따르면 1952년에서 1960년까지 대학생 연평균 증가율은 14.5%였다. 이 같은 대학생의 양적 증가는 혁명을 추동한 원인들 중 하나였다. 1960년에 10만명에 육박했던 대학생들의 30%가 실업자 신세로 전락하면서 이들의 사회적 불만이 임계치에 도달해 있었다는 얘기다. 강 교수는 5·16쿠데타가 일어난 것도 실업과 무관하지 않았다고 본다. 예편 대상 1순위로 곧 군복을 벗게 될 처지였던 박정희는 4·19 직후의 혼란상을 지켜보며 쿠데타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었고, 항명사건으로 이미 반강제적으로 예편한 상태였던 김종필이 실업 기간 중 실제적인 쿠데타 준비를 마쳤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일자리 문제는 도시화와 대졸자 수의 증가에 따라 요동쳤다. 한국 경제가 본격적인 산업화의 길을 걷게 된 이후 농촌을 빠져나와 도시로 집중된 인구는 만성적인 실업문제를 야기했다. 전두환 정권 당시 졸업정원제 실시로 대학생 수가 크게 증가하자 고용시장에서 대기업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이는 또다시 좋은 직장의 전제조건으로서 명문대 입학 경쟁을 부추기는 동력이 됐다. 1990년대 중반부터 흔들리기 시작해 점점 파괴적 양상으로 치달아온 전 세대에 걸친 고용불안은 이제 손쉽게 해결할 수 없는 상황으로까지 악화됐다. 강 교수는 이런 상황을 만들어낸 가장 결정적인 동력은 한국 사회의 고질적 ‘승자독식주의’라고 분석한다. 공기업과 정부 산하단체를 보은인사의 전리품으로 여기는 정권으로부터 전통적 자영업자들의 영역으로까지 무한증식하려는 대기업, 아파트 관리비를 줄이기 위해 아파트 경비원을 없애자고 주장하는 아파트 부녀회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만들어낸 합작품이라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일자리 문제는 구조개혁의 문제가 아니라 의식개혁의 문제로 넘어간다. 이 개혁을 성공시킬 수 있는 방법론이나 정치세력을 쉽게 찾을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비극이다.
정원식 기자 2010.12.22 1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