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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총 108 건 검색)

[반세기, 기록의 기억] (122) 강화도 용흥궁
2024. 05. 09 20:21오피니언
... 왕위에 오른 것이다. 철종은 할아버지와 이복형이 역모 등으로 사사되는 것을 목격했기에, 강화도에 자신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행렬이 왔을 때 산속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함께 도망치던 형 이욱은...
반세기, 기록의 기억김찬휘
강화도로 별 보러 갈래?…인천 강화천문과학관 내달 1일 개관
2024. 04. 28 10:27경제
폐교를 새로 단장해 조성한 강화천문과학관에 있는 반사망원경. 강화군 제공 100억원 들어 ‘폐교’ 새단장 인천 강화군의 폐교가 천문과학관으로 재탄생했다. 강화군은 5월 1일 강화천문과학관이 문을 연다고...
인천강화도태양우주
“민원 공무원에 대한 위법 행위, 법적 대응 해야”···“민원 처리 역량 강화도
2024. 04. 25 13:57지역
민원공무원 보호방안에 대한 대국민 설문조사. 행정안전부 제공 국민 대다수가 민원공무원에 대한 위법 행위에 대해 법적 대응이 필요하다는 설문 결과가 나왔다. 5명 중 1명은 공무원의 민원처리 역량이...
‘검색’ 활개 사회에서 걷고 사색하며 쓰다···강화도 만행 끝에 나온 박호성의 인간론
2023. 10. 17 16:31문화
... 뒷산인 노고산을 자주 올라갔다. 정년 퇴임 이듬해인 2015년 내가면 고천리로 왔다. 강화도에서 가장 큰 저수지인 고려지(高麗池) 옆에 작은 이층집 하나를 구했다. ‘산책...
박호성인간론혼자걷고먹고강화도

스포츠경향(총 37 건 검색)

이영현 “8년 만의 정규, 강화도 한 달살이하며 작업”
2024. 12. 19 14:37 연예
가수 이영현이 19일 오후 서울 강남구 일지아트홀에서 열린 정규 3집 ‘프라이빗(PRIVATE)’ 발매 기자간담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가수 이영현이 앨범 작업 비화를 전했다. 이영현은 19일 서울 강남구 일지아트홀에서 진행된 정규 3집 ‘프라이빗’ 발매 쇼케이스에서 “이렇게 쇼케이스를 하는 것은 빅마마 4집 쇼케이스를 했던 2007년 때로 기억난다. 솔로로는 처음이라 시간이 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긴장된다”라고 인사를 전했다. 이어 “정규 앨범 욕심은 항상 있었지만 문제는 시기였던 것 같다. 아이도 갖고 빅마마 활동도 있어서 마땅치 않았었다. 이번에 우여곡절 끝에 잘 만들어서 내게 됐다”며 “정규앨범은 가수를 그만둘 때까지 계속 내고 싶다. 다음 앨범은 빨리 내보도록 하겠다”고 8년 만에 정규 앨범을 낸 소감을 전했다. 이어 “작업실이 집 안에 있다. 그래서 아이들 때문에 작업을 할 환경이 안 됐다. 그래서 회사 대표님이 ‘강화도를 가라’고 해서 그곳에서 한 달살이를 하며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결혼 전에는 사랑에 대한 아픔, 이별, 상처 이런 노래를 대부분 만들었다면, 이번에 작업을 하면서는 가족과 떨어지니까 그 품이 그립더라. 그래서 가족과 팬들, 제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녹여내는 앨범이 됐다. 그래서 앨범명도 ‘사적으로’, ‘프라이빗’한 의미를 담아 만들게 됐다”고 밝혔다. ‘프라이빗’에는 총 11곡이 담긴 가운데, 이영현은 ‘빛을 담은 너에게’를 제외한 10곡의 작곡과 작사에 직접 참여했다. 이영현은 “제가 빠른 비트를 잘 못 써서 ‘빛을 담은 너에게’는 다른 분께 곡을 받았고, 나머지는 제가 썼고 또 공동작업을 통해 만들었다”고 밝혔다. ‘프라이빗’은 이영현이 8년 만에 선보이는 솔로 정규 앨범이다. ‘사적인’이라는 의미를 지닌 앨범명처럼, 이영현이 직접 작사·작곡에 참여한 곡들로 본인만의 이야기를 담았다. 특히 11곡 전곡을 타이틀곡으로 내세워, 20년간 걸어온 가수로서의 길에 자신감을 드러내 기대를 높인다. 19일 오후 6시 공개된다.
강화도 새우젓 축제가 6년 만에 열린다
2024. 07. 24 06:41 생활
2018년을 마지막으로 중단됐던 강화도 새우젓 축제가 6년 만에 다시 열린다. 강화도새우젓 축제는 2004년 시작해 인천시를 대표하는 전통 축제로 자리를 잡았으나 그동안 코로나 등으로 인해 개최하지 못한 바 있다. 6년 만에 열리는 이번 새우젓 축제는 ‘새우젓 가요제’를 전국 단위로 확대한다. 10월 초 예선을 거쳐 17명이 본선에 올라가고, 대상 상금은 400만원이며 참가자격은 가수 인증이나 음반 출시 경험이 없는 순수 아마추어로 전 국민 누구에게나 문호가 열려 있다. 박용오 새우젓 축제 추진위원장은 “강화도는 국내 최대 새우젓 생산지로 전국 추젓 생산량의 70%를 생산하고 있고 임금님께 진상할 만큼 그 품질을 인정받은 전국 최고의 새우젓”이라며 “가요제도 즐기고 강화 새우젓도 맛볼 겸 꼭 방문해 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라고 말했다. 이번 행사를 맡은 박혜영 총감독은 “6년 만에 재개하는 축제이니만큼 맛보고 만지고 소리로 느끼는 콘텐츠로 관객을 사로잡겠다.”라며 “새우 이외에도 강화도 순무, 강화섬쌀 등을 소재로 한 프로그램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제16회를 맞이하는 새우젓 축제는 10월 11일(금) 전야제를 시작으로 13일(일)까지 강화도 내가면 외포항에서 열릴 예정이다.
대한불교조계종 강화도 정수사, 진노랑상사화 카메라 사진 콘테스트 개최
2024. 07. 10 07:08 생활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강화도 정수사(주지 무진스님)가 환경부 멸종위기식물 2급 식물인 ‘강화도 정수사 진노랑상사화’ 전문가 사진 및 휴대폰 카메라 사진 콘테스트를 개최한다. 콘테스트 주제는 ‘1300년, 새로운 역사를 잇다’, 부제는 ‘어찌 이리도 이쁠까’다. 정수사는 “7월 28일부터 8월 15일까지 강화도 정수사 진노랑상사화 군락지에서 20일간 진행된다”며 “사진을 찍은 후 강화도 정수사 홈페이지에 진노랑상사화 개인당 1작품과 정수사 풍경 1작품 총 2작품씩 업로드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정수사 계단 올라가는 길 주변에는 진노랑 상사화가 많이 피어 있다. 이 꽃은 봄부터 초여름까지 잎만 자라다가 초가을 무렵 잎이 사라진 자리에 꽃을 피운다.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해 서로 그리워하는 서정이 담긴 상사화 중 하나로 강화도에서만 자라는 희귀종이다. 시상은 프로전문가 부분, 휴대폰 카메라 부문 등 둘로 나뉘어 진행된다. 30만원부터 200만원까지 상금이 주어진다. 시상식은 10월1일 열린다. 주지 무진스님은 “‘어찌 이리도 이쁠까’라는 부제처럼 잠시 시간을 내어 진노랑 상사화를 보고 대자연 속에서 공감과 힐링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며 ““함허동천 마을 사람들과 함께 행사를 준비하고 지역에서 사찰의 문화적 역할과 홍보를 함으로써 지역 경제효과 창출에도 기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수사는 8월 10일 오후 6시 30분부터 정수사 대웅전 앞마당에서 함허동천 마을 사람들과 여름휴가객들이 함께 ‘개회식 및 함허동천 작은음악회’도 개최한다.
제16회 강화도 새우젓 축제 박혜영 총감독 위촉
2024. 06. 28 12:57 생활
참신함과 노련함으로 6년 만의 새로운 변화 예고 전국 추젓 새우젓 70% 이상을 생산하는 강화도에서 올가을엔 강화 추젓처럼 감칠 맛 나는 축제를 즐길 수 있게 됐다. 6월27일 강화도 새우젓 축제 추진위원회 박용오 위원장이 박혜영 총감독을 영입 위촉장을 수여했다. 이로써 코로나19로 중단됐던 강화도 새우젓 축제가 새로운 옷을 입고 새롭게 태어날 전망이다. 위촉장을 수여한 박용오 위원장은 “강화도는 국내 최대 새우젓 생산지로 전국 추젓 생산량의 약 70%를 생산하고 있다”며 “특히 임진강과 예성강, 한강이 합류하는 강화도 앞바다에서 나는 새우는 살이 많고 껍질이 얇아 특유의 감칠맛과 높은 영양가를 자랑한다. 예로부터 한강 마포나루 에 공급되어 임금님께 진상할 정도로 그 품질이 유명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6년 만에 재개되는 이번 축제에서는 많은 방문객이 강화의 맛과 멋을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 준비는 물론 홍보에 주력하겠다. 신임 박혜영 총감독의 역량을 믿는다”고 말했다. 제16회 강화도 새우젓 축제 사령탑을 맡은 박 감독은 사단법인 한국축제문화진흥협회 상임이사로 축제 미다스 손으로 알려진 김종원 사단의 주요 일원이다. 박혜영 총감독은 “중책을 맡아 어깨가 무겁다. 명품 중의 명품 강화도 추젓을 축제로 즐길 수 있게 ‘맛보고 만지고 소리로 느끼는 강화도 고유의 킬러 콘텐츠를 개발하고 홍보에 주력 외포항 활성화에 이바지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박 감독은 양구 배꼽 축제, 마포나루 새우젓 축제, 천안 흥타령 축제, 귀주대첩 1000주년 기념 강감찬 축제 전승 퍼레이드 연출로 역량이 잘 알려져 있다. 제16회 강화도 새우젓 축제는 10월 11일 금요일 전야제를 시작으로 10월 13일 일요일까지 강화도 내가면 외포항에서 열릴 예정이다.

주간경향(총 5 건 검색)

[미션 임파서블 동네책방](2)“아, 여기 강화도에서 책방이 되겠어?”(2020. 11. 13 15:09)
2020. 11. 13 15:09 문화/과학
“아, 여기서 책방이 되겠어?” “여기 책 사볼 사람 없어.” “여기 막걸릿집할 때, 월 200만원은 벌었어. 책방해서 200만원 벌겠어?” 강화도의 딸기책방을 두고 오간 말들입니다. 직접 가서 지켜보니 정말 맞는 말이었습니다. 반나절 동안 책방에 있었는데 지나가는 사람은 하굣길 학생밖에 없었고, 찾아오는 손님은 두 시간에 한두명밖에 없었습니다. 중학생들은 책방에 관심이 없어 보였고, 방문객도 책을 한두권 사가고 말더군요. 대도시에 있는 서점도 살아남기 어려운데 어떻게 이런 곳에 책방을 내었는지 정말 궁금했습니다. 강화도에 위치한 딸기책방 내부 / 딸기책방 제공 딸기책방 대표는 알튀세르 연구자였습니다. 사회적 지배 가치와 행위 양식에 무의식적으로 편입하도록 하는 것이 ‘이데올로기’의 작용이고, 언어와 대중매체가 주체의 형성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알튀세르죠. 연구자에서 출판 편집자로 전업해서 1995년부터 지금까지 주로 만드는 그림책과 만화책이 가장 독자층이 넓은 대중매체라는 점에서 예사롭지 않은 행보 아닌가 싶습니다. 출판계 정년은 40세? 한국 출판계는 편집자의 정년을 통상 40세로 잡습니다.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40세 이상의 편집자가 많지 않을 겁니다. 매년 베스트셀러를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출판사가 매년 그 전해보다 수익을 더 창출하기 어렵습니다. 회사의 수익이 늘지 않으니 비용을 줄일 수밖에 없죠. 그래서 상대적 고임금자부터 회사를 나가야 하고, 그 자리는 신입의 저임금 편집노동자로 채워집니다. 또 편집 디자이너의 노동 시간은 노동자의 평균 노동 시간보다 현저히 길고, 근골격계질환 등 VDT증후군(장시간 컴퓨터 사용에 따른 부작용)의 높은 유병률 때문에 편집노동을 오래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통상 40세가 되면 퇴사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하게 됩니다. 퇴사 후에도 대부분이 출판으로 다시금 생업을 이어가기 때문에, 1인 출판사가 넘쳐나게 된 것입니다. 딸기책방 대표도 2017년 퇴사하고 1인 출판사를 준비합니다. 사무실 겸 사람들을 편히 만날 수 있는 공간을 찾았는데 마침 강화읍내 오래된 건물이 임대로 나와서 계약했습니다. 1945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한때 막걸릿집이었다가 이제는 쓸모를 못 찾아 창고로 방치돼 있는 강화읍내의 어금버금한 공간 중 하나였습니다. 출판사 이름은 상큼한 딸기책방으로 지었습니다. 강화에서 출판사를 열려니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출판사가 서울 혹은 파주에 있는데 강화도에 생뚱맞게 출판사라니? 가능할까 싶었습니다. 예전이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요즘엔 예전과 달리 데이터를 서울 혹은 근교에 있는 인쇄소로 넘기면, 인쇄해서 바로 파주의 도서 창고로 가는 시스템입니다. 출판사가 지리산에 있건 제주도에 있건 상관없습니다. 책 주문이 들어오면 온라인으로 창고에 지시서를 보내면 바로 출고를 합니다. 딸기책방 출판사에서 출간한 동화책 / 딸기책방 제공 출판사 문을 열고 편집 작업실로 꾸미고서 집에 있는 책을 참고용으로 한권 두권 갖다 놓기 시작했습니다. 신간 동향을 알아야 하기에 신간을 사서 비치하기 시작했습니다. 책방에 즐겨 읽는 책이 들어오고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 꽂히고 그림책과 그래픽노블이 책장 한둘씩 제자리를 잡고 나니 어쩐지 책방처럼 보이더군요. 지인들이 이걸 보더니, 책방을 해보라네요. 추가로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해서 별 고민 없이 2018년 출판사이자 서점인 딸기책방으로 변신을 시도했습니다. 서점으로 변환했을 때, 사업자등록상 취급품목에 도서만 추가하면 되니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임대료는 몇십만원 안 되어서 걱정이 안 되고 여기서 편집과 디자인을 주로 해서 생활비는 벌고 있으니 인건비도 별도로 들 일이 없었습니다. 강화도에 자리 잡은 출판사 겸 서점 보통 사람들에게 그림책은 아이들만 읽는 책이라는 편견이 있습니다. 딸기책방 대표는 어른·아이 불문하고 좋은 그림책을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누고, 제작해 보는 프로그램을 해보자 싶었습니다. 이 사업은 지금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지원을 받아서 시작했습니다. 20대부터 70대까지, 지역의 주민들이 12주 동안 그림책을 읽고 만들어보는 ‘그림책 작가 되기’ 프로젝트. 올해까지 매해 한 번씩 열어서 벌써 세 번째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수업을 열면 매번 기발한 상상력이 녹아든 작품이 나옵니다. 수업에 참여한 한나씨는 얼마 전 <풀이 나다>를 출판까지 했습니다. 인천시, 인천시교육청,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의 공고가 뜰 때마다 지원서 쓴다고 밤을 지새우는 날이 요즘도 이어집니다. 그러다 보니 딸기책방은 이제 ‘좋은 그림책이 많은’ 서점으로 알려졌습니다. 현대미술을 전공한 고진이 작가처럼 강화 여행을 왔다가, 딸기책방에 책 사러 와서 작가의 할머니 이야기로 <섭순>을 출판한 작가도 생겼습니다. 강화도에 사는 문승연 작가는 마실 나들이하듯이 드나들면서 <코코코 초록 잎>, <깜박깜박 스르르르>, <노랑, 파랑, 빨강, 세상을 물들여요>, 벌써 세 권이나 딸기책방에서 출간했습니다. 지역에 출판사가 있다는 것, 책방을 같이 하다 보니 작가를 키우고 작품을 만드는 데도 수월합니다. 또 출판사에서 직접 책 사는 경험을 즐기는 분들도 많이 생겼습니다. 올해는 인디뮤지션 곽푸른하늘, 씨없는수박 김대중, 하헌진, 천용성, 정우를 ‘딸기책방에서 노래 읽기’ 프로그램에 초대했습니다. 홍대에서 활동하는 뮤지션을 강화도의 딸기책방으로 왕창 부른 거죠. 홍대로 나가지 않아도 공연을 즐길 수 있는 공간! “누구보다 뚜렷하고도/ 투명한 색을 가진 너/ 이토록 탐스러운 널 단숨에 낚아채/ 한입 물고파” 노래가 깔리고, 하, 하, 하. 대표님의 유쾌한 웃음으로 가득한 여기는 딸기책방이랍니다.
미션 임파서블 동네책방
[생태줌인]강화도 갯벌 찾아온 두루미 가족(2016. 03. 21 17:51)
2016. 03. 21 17:51 사회
강화도 해안가에 가면 두루미들이 펼쳐진 갯벌에서 가족 단위로 활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 찾아오는 두루미의 많은 무리가 연천과 철원지방으로 찾아와 겨울을 난다. 하지만 매년 강화도 앞바다로 찾아오는 20여 마리의 무리가 따로 있다. 이곳에서 활동하는 두루미는 썰물에 드러나는 갯벌을 따라다니며 먹이활동을 하고, 밀물을 따라 섬 주변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썰물로 드러나는 갯벌에서 두루미 한 가족이 한가로이 먹이활동을 하고 있다. 바다에서 활동하는 두루미이다 보니 바람이 많이 불기라도 하면 깊은 갯골로 내려가 바람을 피한다. 갯골은 두루미가 내려가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다. 그래서인지 이들이 갯골에서 활동을 하다가 다시 갯골 밖으로 올라올 때는 신중하게 행동을 취한다. 먼저 한 마리가 갯골 위쪽으로 올라와 머리를 길게 쳐들고 주변 수평선을 살핀 후 안전하다 싶으면 모두 갯골 밖으로 올라온다. 이처럼 영리한 두루미는 갯가에서 집을 짓고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경계를 하지 않다가도 외지인들이 갯가에 나타나면 멀리 이동을 한다고 한다. 갯벌에서 가족 단위로 흩어져 활동하던 두루미 두 가족이 밀물로 만조가 되자 갯마을 앞으로 모여들었다. 두루미는 온종일 갯벌에서 활동한다. 깃털에 묻은 개흙과 흩어진 깃털을 바닷물에 씻으며 몸단장을 한다. 바다에서 활동하는 두루미도 산간지역 들판이나 강가에서 활동하는 두루미처럼 가족 단위로 활동을 하고, 해가 지면 섬 주변으로 모여든다. 체온을 나누며 함께 수면을 취하면서 은밀하게 다가오는 천적을 미리 알아채고 방어할 수도 있다. 바닷가에서 어린 두루미가 어미 뒤를 따라 이동을 하고 있다. 강화도 앞바다에는 밀물과 썰물의 속도가 빠르지 않고 만조가 되어도 새들이 갯벌에 발을 담그고 활동할 수 있는 수심이 얕은 곳이 많다. 그래서 수영을 못하는 두루미는 물론이고 저어새·도요새·검은머리물떼새 같은 천연기념물의 요람이다. 갯벌이 만조로 깊어지자 두루미가 다른 곳으로 날아가고 있다. 두루미 부부가 썰물로 드러난 갯벌에서 만조 동안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부지런히 무언가를 잡아먹고 있다. 3월 말이면 두루미는 모두 몽골과 시베리아와 중국 동북지방 등 고향으로 돌아간다. 비행을 앞두고 충분한 에너지를 비축하기 위해서인지 요즘은 먹이활동이 더욱 분주해 보인다. 두루미는 천연기념물 제202호로 지정돼 있다. 전 세계에 3000여 마리밖에 남지 않은 멸종위기 종으로 분류돼 있다.
생태줌인
[2010 연중기획]강화도에서 생각하는 지나간 100년, 다가올 100년(2010. 10. 20 14:28)
2010. 10. 20 14:28 사회
ㆍ우리세대는 어떤 나라를 남길 것인가 영재 이건창(1852~1898). 매천 황현(1855~1910), 창강 김택영(1850∼1927)과 함께 구한말 조선의 3대 문장가로서 문명을 떨친 지식인이다. 영재는 서세동점의 물결에 맞서 양명학에 기반을 둔 자주적 개혁노선을 추구했으나 시대의 도도한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100년 전과 마찬가지로 또 한 차례 서양에서 거대한 물결이 밀려오고 있는 지금, 강화도 영재 생가를 찾은 김호기 교수는 격변의 시대에 지식인됨의 괴로움에 대해 생각한다. 강화도 사기리 영재 이건창 선생 생가. 그동안 다뤘던 한일병합 100년도 어느덧 마무리해야 할 시점에 도달한 듯하다. 캠퍼스 안 윤동주 시비를 둘러보고, 상해 임시정부와 훙커우 공원을 찾아가고, 지난주에는 강화도에 다녀왔다. 강화도를 찾은 것은 필자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두 명의 지식인 때문이었다. 영재(寧齋) 이건창(1852~1898)과 매천(梅泉) 황현(1855~1910)이 그들이다. 영재와 매천은 식민지 시대의 지식인이 아니다. 영재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매천은 한일병합이 되던 1910년에 순국했다. 그럼에도 식민지 전사(前史)를 살아온 이 두 지식인의 삶은 식민지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이며, 또 식민지가 끝난 지 60여년이 지난 현재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새삼 돌아보게 한다. 영재 이건창에 대한 추억 영재 생가와 묘소가 있는 강화도는 개인적으로 의미가 깊은 곳이기도 하다.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1991년부터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나는 강화도를 자주 찾아갔다. 영재의 생가가 있는 사기리와 묘소가 있는 건평리를 찾아가기도 했고, 지난번 한국전쟁을 다룰 때 언급했던 박완서의 에 나오는 양사면 일대를 둘러보기도 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유학을 시작한 1985년 늦가을 어머님이 쉰여덟 나이로 돌아가셨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그리움으로 바뀌고, 그리움은 다시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이른바 존재의 ‘고향 없음’(homelessness)과 같은 상실감으로 이어졌다. 그리움은 결코 쉽게 채워지지 않는다. 채울 수 없기 때문에 그리움은 부재의 현실을 자각하게 하고, 그것은 다시 ‘고향 없음’의 쓸쓸함을 안겨준다. 귀국 후 영재의 무대인 강화도를 자주 찾아오게 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이었다. 비언표적 영역에 놓인 그리움과 ‘고향 없음’의 감정은 쇠잔하는 국가에 대해 가질 수밖에 없었던 영재의 회한에 대한 심사와 중첩되고, 이런 복합 감정을 마음 한편에 품은 채 강화도 이곳저곳을 혼자 쏘다니면서 위안 아닌 위안을 얻곤 했다. 당시 강화도를 배회할 때 즐겨 듣던 노래들이 몇 곡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피트 시거(Pete Seeger)가 부른 ‘모든 꽃들은 어디로 갔나’(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다. “모든 꽃들은 어디로 갔나…. / 모든 소녀들은 어디로 갔나…. 모든 남편들은 어디로 갔나…. / 모든 병사들은 어디로 갔나…. 모든 무덤들은 어디로 갔나…. / 모든 무덤들은 꽃들이 되었네….” 이 노래는 미하일 숄로호프의 대하소설 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60년대 반전운동과 신사회운동에서 적잖이 불렸던 이 노래는 인간과 자연, 그리고 역사의 위대한 서사시다. 필자에게 이 노래에는 어린 시절 살던 시골의 풍경과 10대에 처음으로 만난 서울의 풍경, 그리고 20대에 이국 땅에서 대면한 낯선 풍경의 기억, 무엇보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살아있다. 자주적 근대화의 좌절과 식민지 시대 고려 후기 대몽항쟁에 이어 강화도가 역사의 전면에 다시 부상한 것은 조선 후기다. 강화읍내에는 철종이 재위 전에 살던 집이 용흥궁이란 이름의 유적지로 남아있는데, 바로 이 철종 때부터 강화도는 열강들의 함선과 포성으로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대원군이 권력을 잡고 있던 고종 재위 초기에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로 절정에 달했다. 바로 이때가 영재가 활동했던 시기다. 영재는 매천, 창강(滄江) 김택영과 함께 구한말 한시 3대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혔을 뿐만 아니라, 유명한 의 저자이기도 하다. 초지진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가다 선두포구를 지나서 쪽실 수로에서 동막 해수욕장 쪽으로 조금 더 가면 사기리가 나오는데, 바로 이 마을에 영재가 태어난 생가가 있다. 영재를 제대로 알게 된 것은 민영규 교수의 을 읽고서였다. 영재가 대면한 상황은 서구의 물결이 빠른 속도로 밀려오는데 전통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는 풍전등화의 조선사회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영재가 선택한 길은 강화학, 즉 양명학에 기반을 둔 자주적 개혁노선이다. 영재의 길은 전통과 근대로의 대전환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결국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돌아보면 당시의 서세동점은 감당하기 결코 쉽지 않은 거대한 물결이었다. 김호기 교수가 영재 생가 문학비 앞에 서있다. 선비로서의 지조와 절개를 지키면서 자주적인 개혁을 모색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역사의 흐름은 이미 근대로 넘어오고 있다는 것, 과거는 지나간 과거일 뿐이라는 것, 연속보다는 단절이 시대의 대세라는 것, 이런 도도한 흐름 앞에 선 비서구사회의 지식인이 가져야 할 진리의 좌표를 찾기란 참으로 지난한 일일 터였다. 영재가 홀연 세상을 떠난 후 동료와 후학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이 땅에서, 어떤 이들은 만주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기품 있는 고투(苦鬪)를 이어 갔다. 민영규 선생에 따르면, 일의 성패가 문제가 아니라 동기의 순수성 여부가 문제일 따름이라는 게 양명학의 가르침이라 한다. 결과의 대소고하(大小高下)를 물을 게 아니라, 질(質)의 참됨만이 지식인의 갈 길이라 한다. 참으로 치열하고 무섭기조차 한 진리에 대한 열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식인의 이런 용기는 영재와 평생을 교유했던 매천의 최후에서도 그대로 볼 수 있다. 영재가 세상을 떠난 후 매천은 고향에 은거해 저술에 몰두했다. 매천이 남긴 역사서 은 말 그대로 ‘들에서 쓴 기록’이다. 들에서 썼다는 이 표현이야말로 역사의 한가운데서 역사에 맞서온 매천의 삶을 상징적으로 압축한다. 1910년 나라가 결국 패망하자 매천은 “나는 죽을 마음이 없다. 그러나… 나라가 망하는 날에 한 사람도 순국하는 자가 없으니 어찌 애통하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전라남도 구례에서 절명시 네 편을 남긴 채 자결했다. “새도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 무궁화 나라는 이미 사라졌구나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옛일을 돌이켜보니 문자 안다는 사람 인간되기 어렵구나” 매천의 절명시 가운데 한 부분이다. 필자는 아직까지 이보다 더 비장한 시를 읽어보지 못했다. 혹자는 매천 역시 봉건시대 지식인의 한계에 갇혀 있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필자 역시 이런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역사를 모두 현재로 환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망국이란 당대의 현실 속에서 매천이 선택한 길은 적어도 자신에게는 최선의 길, 다름 아닌 진리에의 길이었다. 나라의 패망을 죽음으로 맞설 수 있는 용기는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동기의 순수성, 바로 그것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건창과 평생 교유한 매천 황현은 강제병합 소식을 듣고 자결했다. 사진은 매천이 자결하기 전 남긴 절명시. |사진작가 황헌만 매천마저 세상을 떠난 후 일제 식민지배는 더욱 강화됐다. 그리고 36년이 지난 다음에야 무궁화의 나라는 해방을 이뤘지만 국토는 이내 분단됐다. 참혹한 한국전쟁의 폐허 위에서 격렬한 산업화를 경험한 다음 민주화의 도정에서 이제 우리 사회는 또 하나의 거대한 서양의 물결 앞에 망설이고 서성거리고 있다. 2010년 올해 한일병합 100년을 맞이해 새삼 생각하게 되는 것은 지나간 100년과 앞으로의 100년이다. 우리에게 지난 100년은 식민지, 분단, 산업화, 그리고 민주화로 숨가쁘게 이어진 역사였다. 역사는 반복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역사는 비약하지도 않는다. 반복과 비약으로 중첩된 도도한 역사 속에서 이제 우리 사회는, 우리의 집합의지는 무엇을 향해 가야 하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과연 다음 세대에게 어떤 나라, 어떤 사회, 어떤 미래를 남겨줄 수 있을까. 강화도를 오가면서 오랜만에 ‘모든 꽃들은 어디로 갔나’를 다시 들어봤다. 초지대교를 건너 좌회전해 서해바다를 바라보며 영재 생가가 있는 사기리로 향했다. 계절은 늦가을로 향해 가는데 산야는 아직도 푸르렀다. 저 멀리 마니산이 눈에 들어오니 오래 전 이곳을 찾았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모든 꽃들은 어디로 갔나’ 벌써 십년도 한참 지난 어느 여름날 나는 사회학과 후배와 함께 이른 아침에 사기리를 찾았다. 캠퍼스를 오가면서 이야기를 나눠보니 적지 않은 나이 차이가 났지만, 시와 소설, 음악 등 취향이 비슷한 친구였다. 무엇보다 사라져가는 것들과 버려진 것들에 대해 다소 쓸쓸하나 더 없이 따뜻한 시선을 갖고 있는 친구이기도 했다. 우리는 영재 생가 옆의 버스 종점에서 내려 흥왕리로 가는 비포장 길을 걸었다. 오른편엔 마니산 끝자락이 놓여 있고, 왼편엔 썰물이 남겨놓은 갯벌이 펼쳐져 있었다. 동막해수욕장까지 걸어가서 서해 바다를 바라보며 다소 무료하게 산책을 하다가 다시 영재 생가로 돌아왔다.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다. 나는 영재와 매천, 좌절된 자주적 근대화 노선에 대해 두서없이 얘기하고, 후배는 길섶에 핀 야생화들이 만들어놓은 버려진 아름다움과 고향 부산과 다른 서해 바다 풍경에 대해 역시 두서없이 얘기했다. 그리고 잠시 버스를 기다리던 정적의 시간, 아직도 그 초여름 풍경을 나는 잊지 않는다. 저 멀리 선두포구 쪽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후텁지근한, 기다리던 버스가 결코 도착하지 않을 것 같은 적막감이 흐르는, 어느새 따가워지기 시작한 7월의 햇볕 아래 한갓진 풍경 속에, 커졌다 작아지고 다시 커지는 흔들리는 그 풍경 속에 한 여자가 다소 외롭게 서있었다. ‘고향 없음’이란 무엇인가. 진정한 고향은 풍경이 아니라 마음 속에, 타자의 영혼 속에 살아있는 것 아니겠는가. 진정한 사랑이란 “소녀가 꽃을 꺾어 그녀의 남편에게로 가고, 그 남편은 병사가 되고, 그 병사의 무덤에 꽃이 다시 피는” 영겁회귀(永劫回歸)하는 시간의 궤도 위에 위태롭게 서있는 타자 곁으로 조금씩 다가서는 것 아니겠는가. 7월 햇볕이 따가운지 그녀는 손으로 눈을 가리고 이마를 찡그린 채 엷은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나 역시 다소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 그녀 곁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아내와 떠난 첫 번째 여행이었다.
2010 연중기획
[사람@세상]강화도 옥토끼우주센터 안경회 대표(2007. 08. 07)
2007. 08. 07 사회
“꿈을 가지세요” 항공우주과학 체험 제공 강화도 불은면의 옥토끼우주센터(대표 안경회)는 과학의 현재와 미래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첨단 항공우주과학기술의 전모를 볼 수 있는 이곳은 한 개인의 노력과 투자로 만들어졌다. 우주센터를 세운 안경회 대표는 국내 전시 모형 제작 분야에서 30년을 일해 왔다. 그 분야에서 최고 전문가임을 자타가 공인한다. 남의 전시물을 만들어 오다 자신의 꿈과 능력을 담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 시작한 것이 옥토끼우주센터다. 설계와 제작에 꼬박 5년이 걸렸다. “우주는 인류의 미래입니다. 우리 아이들도 우주로 눈을 돌려 관심을 갖고 꿈을 키워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이곳은 청소년들이 꿈을 꾸는 장소였으면 좋겠습니다.” 국내 항공우주분야는 이제 겨우 첫걸음을 뗀 상태다. 따라서 대부분 전시물은 우주개발의 선진국인 미국과 러시아 등지에서 가져오거나 설계도면을 구해 직접 만든 것이다. 안 대표는 미국 케네디우주센터, 미항공우주국, 러시아 항공우주센터 등을 찾아가 관계자를 만나 설득하고 협력을 구했다. 미항공우주국에서 일하는 한국인 연구원 3명은 흔쾌히 그를 도와주어 화성탐사에 대한 귀한 자료와 전시물을 얻어올 수 있었다. 이제 막 문을 열어 세상에 첫선을 보인 상태지만 하루 평균 500여 명이 방문할 정도로 반응이 좋다. 특히 선생님과 학부모의 찬사와 호평은 안경회 대표를 감동시켰다. 그는 미국 러시아의 전시관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일본 후쿠오카의 월드스페이스 공원보다는 내용이나 프로그램이 훨씬 낫다고 자부한다. “우주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겸손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실감할 수 있고 또 그 한계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 청소년들도 우주과학이 보여주는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고 꿈과 비전을 실현시킬 날을 기대합니다.” 옥토끼우주센터를 다녀간 청소년들이 미래를 꿈꾸고 이 땅에도 세계적인 우주과학자가 많이 나오기를 바라는 그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김천 mindtemple@gmail.com
사람@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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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독서] 강화도- 붉은 연꽃 질 무렵, 아득히 그리운 당신이 지나갔다
2016. 01. 28 17:51 레저/여행
산과 바다, 갯벌을 두루 품어 낚시며 등산이며 즐길거리가 쏠쏠한 강화도엔 그냥 걷기만 해도 좋은 길이 숱하다. 선사시대 돌무덤부터 조선 왕의 첫사랑까지, 역사의 면면이 깃든 길 위의 이야기가 풍성하다. 빙어를 낚으러 갔다가 붉은 연꽃 같은 절집의 우련한 잔영만 품고 돌아왔건만 빈손이 아쉽지 않았다. 낙조를 바라보며 적석사가 한 송이 붉은 연꽃으로 피어날 즈음 저녁 예불이 시작된다. 빙어 낚시를 목적 삼아 떠난 여행이었건만 저수지 앞에서 차를 돌려 나왔다. 얼음 두께가 기준치 이하라 저수지 입장이 불가능하다 했다. 견지대를 위, 아래로 톡- 톡- 들었다 놨다…. 글로 익힌 ‘겨울 호수의 요정을 유인하는 기술’은 써먹어볼 기회도 없었다. 손가락만 한 물고기를 낚겠다고 손바닥만 한 얼음 구멍 앞에서 종일토록 묵상하는 건 애당초 내 취향이 아니었노라, 애써 미련을 갈무리했다. 관광지도를 펼치니, 국내에서 다섯 번째 큰 섬이라는 강화는 생각보다 넓고 갈 곳도 많았다. 산과 바다, 갯벌을 고루 품고 있는데다 고조선부터 고구려, 고려, 조선의 유적과 유물이 널려 있어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고도 불린다. 청동기시대의 고인돌과 단군이 제를 지낸 참성단이 남아 있는가 하면, 39년간 고려의 수도로 자리매김한 터라 고려 궁지도 있다.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도읍을 개경에서 강화로 옮긴 1232년부터 다시 환도한 1270년까지 38년간 사용된 고려 궁궐터.읍내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군청 인근에 용흥궁, 고려궁지, 강화산성 등의 문화재들이 모여 있기도 하거니와 일단 맛있는 밥부터 먹고 싶었다. 여행 중 가장 신중한 순간이라 할 맛집 검색으로 찾아낸 강화도 향토음식은 젓국갈비. 돼지갈비에 두부, 호박, 버섯 등을 곁들여 새우젓으로 간한 맑은 탕국으로, 돼지고기와 새우젓의 궁합이 좋아서인지 시원하고 감칠맛 도는 국물이 입에 착 감겼다. 쌉싸래한 순무김치에 강화섬쌀로 지은 차진 밥, 따끈한 손두부까지 두루 만족스러웠다. 마그네슘 함량이 높은 토양에서 청정수로 재배된 강화섬쌀은 밥맛 좋은 쌀로 손꼽힌다.국물을 훌훌 마시다 문득 새우젓의 까만 눈동자가 눈에 밟혔다. 푹 삭힌 젓갈에도 눈알은 삭지 않는다더니만, 의식하기 시작하자 숟가락을 퍼 올릴 때마다 작디작은 삶의 마침표들이 동동 떠올랐다. 기실, 함민복 시인 때문이었다. 모 방송에서 그의 시집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이었다. “눈물이 잘라지던가요?” 진행자가 물었고, 시인은 수줍게 “눈물은 끊는 거지요”라고 답했다. 이어 그가 “눈에 관한 것은 잘 잘라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라며, 그 근거로 든 이야기들이 강렬했다. 개 사료에 들어갈 닭 머리를 분쇄하는 공정을 봤는데, 무수한 닭의 눈알이 날카로운 커터 날을 피해 가더라는 것. 새우젓만 해도 몸체는 삭을지언정 눈동자는 그대로 남지 않느냐는 부연 설명까지 조곤조곤 곁들였다. 오소소 돋는 소름을 쓸어내리며 생각했더랬다. 새우젓의 눈동자와도 눈을 마주치는 시인이란, 저토록 섬세한 통각이란 대체 무슨 천형인가. ‘새들도 먹이를 먹지 않는 하늘길에서 / 음식을 먹으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는, ‘차마, 하늘에서, 불경스러워, 소변이나 참아보았다’(‘하늘길’ 중에서)는 사람이다. 이와 같은 시들이 수록된 시집을 여행 가방에 챙겨 넣을 때만 해도, 새우젓의 눈동자와 눈을 마주칠 줄은 몰랐다. 함민복 시인이 살고 있는 강화에 가는 길이니, 강화도 출입증인 것처럼 그의 시집을 챙겼을 뿐. 임진강과 예성강, 한강이 합류하는 강화도 앞바다에서 생산된 새우젓은 내륙에서 유입되는 풍부한 영양염류를 섭취해 감칠맛과 높은 영양가를 자랑한다.강화도령의 첫사랑을 따라가는 나들길 제주에 올레길이 있고 지리산에 둘레길이 있듯, 강화엔 ‘나들길’이라는 도보 여행 코스가 있다. ‘나들이 가듯 걷는 길’이란 뜻을 지닌 강화 나들길 19개 코스는 선사시대의 흔적부터 자연 생태계의 속결까지, 강화에 깃든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그중 길 이름부터 호기심을 자아내는 14코스 ‘강화도령 첫사랑길’의 출발점인 용흥궁을 찾았다. 적석사 낙조대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강화팔경의 하나로 꼽힐 만큼 아름답다. 용흥궁은 조선 제25대 임금인 철종의 잠저다. 잠저는 왕세자와 같이 정상법통이 아닌 다른 루트로 임금에 오른 이가 궁으로 옮기기 전에 살던 거처를 이르는 말로, ‘강화도령’은 19세까지 강화도에 살았던 철종의 별명이다. 본명은 이원범.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의 후손이다. 모반 사건에 휘말려 가족이 모두 강화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천주교 탄압으로 양친을 잃고 농사일을 하며 혼자 살다가 순조의 양자로 입적해 왕위에 올랐다. 하루아침에 신분이 바뀐 철종의 생애는 「왕자와 거지」 이상으로 드라마틱하지만, 동화가 아닌 현실의 이야기는 씁쓸하다. 강화도 시절, 철종에겐 혼인을 약속한 마을 처녀가 있었다고 한다. 철종은 “강화에 있을 때가 좋았다”라고 자주 되뇌며, 종종 강화로 신하를 보내 찬우물 약수로 만든 막걸리와 순무김치, 젓국갈비 등을 궁궐로 들였다고 한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에 눌려 제 뜻을 펴지 못한 울분과 정인에 대한 그리움은 방탕한 생활로 이어졌고, 이에 병을 얻어 서른셋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청하동약수터-남장대-찬우물약수터-철종 외가로 이어지는 ‘강화도령 첫사랑길’은 철종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재구성한 길이다. 용흥궁 마당에 깃든 이른 봄소식. 용흥궁은 강화도령으로 불린 조선의 25대 왕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살았던 집이다. 용흥궁 뒷문은 1900년에 완공된 성공회 강화성당으로 이어진다. 외관은 전통 한옥이지만 내부에 바실리카 양식이 접목됐다. 세상을 구원하는 ‘방주’로서의 의미를 담아 야트막한 언덕 위에 배의 형상을 따라 터를 잡았다. 동서로 10칸, 남북으로 4칸, 총 40칸 규모로 지어진 성당의 팔작지붕을 올려다보면 ‘천주성전(天主聖殿)’이란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정면 기둥에는 사찰의 주련처럼 성경 구절을 한자로 내려 쓴 현판을 걸었다. 범종과 종각에, 마당에는 우람한 보리수나무까지, 사찰로 오해하기 십상이지만 용마루와 벽면을 장식한 십자가가 은은하게 종교 색을 드러낸다. 목재는 백두산 원시림에서 구해오고, 건물 설계는 경복궁 중건 공사에 참여했던 목수가 맡았다고 한다. 타국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며 복음을 전하고자 한 선교사들의 의지와 노력을 엿볼 수 있다. 붉은 연꽃으로 피어나는 산사의 저녁 강화읍 서쪽, 고려산 중턱에 고구려 장수왕 때 창건됐다는 적석사란 고찰이 있다. ‘쌓을 적(積)’에 ‘돌 석(石)’ 자를 쓴 적석사의 원래 이름은 ‘붉을 적(赤)’에 ‘연꽃 련(蓮)’ 자를 쓴 적련사다. 창건 설화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인도의 한 승려가 진나라를 거쳐 고구려에 들어와 절터를 물색하던 중, 강화도 고려산에 이르러 다섯 빛깔의 연꽃이 만발한 연지(蓮池)를 발견한다. 그는 다섯 송이의 연꽃을 공중에 날려 연꽃이 떨어진 곳마다 사찰을 지었는데, 붉은 연꽃이 떨어진 자리에 지은 절이 적련사(赤蓮寺)다. 적련사가 적석사로 이름을 바꾼 데는 그만한 사정이 있다. 산과 절에 불이 자주 나는 바람에 불을 연상시키는 ‘붉을 적(赤)’ 자를 지웠다는 것. 그럼에도 맑은 저녁, 낙조에 물든 절집은 한 송이 붉은 연꽃으로 피어난다. 젓갈수산시장이 위치한 외포항. 석모도로 가는 배편도 이곳에서 출발한다.적석사 옆 샛길로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강화팔경 중 으뜸으로 손꼽히는 낙조대가 나온다. 적석사 낙조대는 정동진과 일직선에 위치한 정서진으로 일몰뿐 아니라 일출 명소이기도 하다. 낙조대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장쾌하기 그지없다. 마니산을 포함한 8개 산자락의 파도치는 능선과 너른 들판, 저수지와 바다가 하나의 화폭에 담기고 그리로 해가 진다. 해 뜨고 해 지는 풍경은 기다림 끝에 한순간이라, 지켜보는 이들에게 골똘한 집중력을 요한다. 일몰이 진행되는 동안 기념 촬영을 하느라 떠들썩했던 단체 관광객도 해가 완전히 잠기는 순간엔 말을 멈췄다. 여럿이 어우러져 쏟아내는 말과 말 사이에 틈이 벌어지는 순간이 있다. 불현듯 찾아드는 그 침묵을, 프랑스인들은 ‘천사가 지나간다’라고 표현한다. 적석사 낙조대에서 맞은 일몰의 순간, 찰나의 고요 속에 무언가 지나갔다. 붉은 연꽃 위 관음보살이거나, 어쩌다 꿈결에 만나는 아득히 그리운 당신인지도 모르겠다. 낙조대에서 내려오자 적석사의 저녁 예불이 시작됐다. 산중의 어둠은 쏜살같아서 먼 하늘엔 일몰의 여운이 남아 있건만 절집 마당은 이미 별을 헤아릴 만큼 깜깜하다. 범종각을 장식한 연등이 점화되고 타종이 시작됐다. 종소리는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듣는 것임을 새삼 느끼며, 가슴께로 파고드는 떨림 위로 두 손을 모았다. 강화성당의 종을 멀리서 보면 사찰의 범종과 다를 바 없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십자가와 성경 구절이 새겨져 있다.암자에서 종이 운다 종소리가 멀리 울려 퍼지는 것은 종이 속으로 울기 때문이라네 외부의 충격에 겉으로 맞서는 소리라면 그것은 종소리가 아닌 쇳소리일 뿐 종은 문득 가슴으로 깨어나 내부로 향하는 소리로 가슴 소리를 내고 그 소리로 다시 가슴을 쳐 울음을 낸다네 그렇게 종이 울면 큰 산도 따라 울어 큰 산도 종이 되어주어 종소리는 멀리 퍼져 나아간다네 -함민복 「詩人 2」 <■글 / 고우정(여행작가) ■사진 / 현일수(리빙룸스튜디오)>
길 위의 독서
[주말에 떠나는 테마여행]지붕 없는 박물관, 강화도에서 1박 2일
2012. 09. 25 17:16 레저/여행
강화도는 언제나 역사의 현장이었다. 단군에게 제사를 지내는 참성단이 그랬고, 몽골의 침략에 항전 의지를 불태웠던 고려궁이 그랬으며, 구한말 열강의 입김에 몸서리도 쳤다. 아름다운 자연은 물론 살아 있는 역사 교육을 할 수 있는 강화도에서 1박 2일간 여행을 즐길 수 있는 알짜 코스를 소개한다. 1Day 나들이 가듯 편하게 다녀오는 길, 강화나들길 말뚝, 리본, 화살표를 따라 가는 나들길 강화나들길은 나들이 가듯 걷는 길이라는 뜻이다. 강화 본섬에 9개 코스, 그 외 교동도와 석모도 등에 5개 코스, 모두 14개 코스가 복원·연결됐다. 이 중에서 1코스에 해당하는 심도역사문화길은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역사 유적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무엇보다 서울에서 대중교통으로 한 번에 갈 수 있는 유일한 구간으로 찾는 이가 많다. 1코스는 강화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해서 전체 거리 18km, 소요 시간 여섯 시간의 만만찮은 코스다. 버스터미널을 지나면 먼발치에 강화의 특산품 인삼을 판매하는 인삼센터가 보인다. 군청, 수협, 우체국이 있는 사거리에서 우체국 방향으로 우회전을 하면 시장의 번잡스러움이 잦아든다. 읍내에 위치한 고려궁지, 용흥궁, 성공회 강화성당은 강화나들길의 첫 출발점과 같은 곳이다. 저마다 각기 다른 역사적 배경을 품고 있어 그 어느 곳보다 다채로움을 즐길 수 있다. 또 화장실을 비롯한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구간마다 설치된 말뚝, 리본, 화살표가 낯선 여행자의 가이드 역할을 한다. 이정표를 찾지 못할 때는 인근 주민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쉽게 길을 찾을 수 있다. 단군에게 제사를 지내는 참성단. 짧은 구간에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는 곳 언덕 높은 곳에 자리한 강화도 성공회 성당 건물은 흔히 볼 수 없는 외관에 낯섦이 먼저 다가온다. 영국인 선교사가 1900년에 세운 건물로 동양의 건축양식과 서양의 종교가 한 몸이 된 곳이다. 건물에 사용된 목재는 백두산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하니 더 마음이 간다. 성당을 한 바퀴를 돌아보면 불교 사찰 건축양식을 차용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사찰의 일주문과 천왕문을 연상시키는 외삼문과 내삼문이다. 팔작지붕 옆에는 불교 사찰에 있을 법한 범종을 확인할 수 있다. 실내 공간은 로마 건물을 닮았다. 외부 모습이 철저히 현지화된 반면 내부는 나름의 서양기법을 도입했다. 강화8경에 속하는 연미정.성공회 성당과 이웃한 용흥궁으로 발길을 돌려본다. 이곳은 조선 25대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살았던 집으로 원래는 초가였으나 1853년(철종4년)에 지금과 같은 집을 짓고 용흥궁이라 부르게 됐다. ‘궁’이란 명칭을 사용했지만 마을 민가에 자리한 탓에 일반 한옥과 구별하기 어렵다. 성당과 초등학교 앞길을 올라가면 고려궁지에 이른다. 고려시대 몽골의 침략에 맞서 수도를 송도(개성)에서 강화로 옮긴 뒤 39년간 머물렀다. 현재 고려궁궐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지만 당시에는 송도의 궁궐인 만월대와 비슷한 모양을 갖췄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야트막한 뒷산의 이름도 송악산이라 부르는 등 나름 왕궁으로서의 모양새를 갖추려고 노력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고려왕궁을 축소한 고려궁지. 지겨운 듯하면 새로운 길이 나오는 나들길 고려궁과 향교를 지나면 ‘은수물’이란 우물이 나오는데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이 은가루를 풀어놓은 듯 은빛을 발한다. 이곳에서 휴식을 취한 뒤 강화여중·고 뒷산 오솔길을 따라 걸어가면 상쾌한 숲 속을 걷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수령이 오래된 나무는 없지만 솔 향을 맡을 수 있는 구간이라 나름 깊은 산에 들어온 듯 청량함을 느낄 수 있다. 20여 분을 솔 내음에 취해 오솔길을 걷다 보면 강화성 북문에 다다른다. 북문에 안녕을 고하고 길을 재촉해 북장대 높은 곳에 올라서면 시원한 전망을 만날 수 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어슴푸레 북한 땅 개풍군을 볼 수도 있단다. 북장대를 정점으로 나들길은 내리막길에 접어든다. 험준한 산길은 아니지만 다소 경사가 있어 조심해야 할 구간이다. 강화나들길의 길잡이표.이어 오읍약수를 지나면 아스팔트길을 만나게 되고, 이후 대월초등학교 뒷산과 마을길을 지나 야트막한 능선길을 접하게 된다. 도보 여행자마저 없다면 이곳을 오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과언이 아니다. 다소 외로운 포장길이 이어진다. 단조로운 풍경에 지겨움을 느낄 때쯤 강화8경에 속하는 연미정에 이른다. 군사 지역이라 성곽 근처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돼 있다. 성곽에 올라서면 경계 보초를 서고 있는 군인을 만날 수 있다. 사면이 뻥 뚫려 있어 시원한 바람에 몸을 맡기고 휴식을 취하기 좋은 곳이다. 준비한 도시락이 있다면 이곳에서 해결하는 게 좋다. 맞은편에 슈퍼마켓이 있어 편리하다. 연미정을 지나 염하(강화해협) 옆 도로를 따라 걷다가 오른쪽에 옥계방죽으로 들어선다. 처음엔 낯선 풍경에 신선했지만 어느새 뚝방길이 지겨워진다. 인내심을 발휘하며 걸음을 재촉하면 산길로 접어든다. 힘든 구간은 모두 지났지만 아직 종점까지는 꽤 걸어야 한다. 먼발치에 강화대교가 보인다면 얼굴에 미소를 머금어도 좋다. 다리 밑을 지나 갑곶성지와 갑곶돈에 이르면 장장 여섯 시간의 강화나들길 1구간을 완주한 것이다. 아침 8시부터 시작한 도보 여행이 오후 3시경에 끝을 보게 된 것이다. 구간이 힘들다면 연미정 맞은편 버스정류장에서 강화읍내로 향하는 버스를 이용할 수도 있다. 2Day 강화도의 명물 탐험 가족과 함께 오르기 좋은 산, 마니산 강화나들길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여행객.마니산 정상을 오르는 길은 세 가지 코스가 있다. 제1코스는 1시간 20분 정도 소요되는 구간이다. 이 구간은 마니산 관광지 입구에서 시작해 참성로를 거쳐 참성단을 지나 정상에 이르는 코스다. 제2코스는 마니산 관광지 입구를 시작으로 단군로, 참성단, 정상, 정수사, 사기리로 하산하는 3시간 20분이 소요되는 종주 코스다. 함허동천 시범야영장을 들머리로 할 경우 3시간 30분이 소요되며, 제1코스에 비해 길이 험하고 암릉 구간이 많아 초보자나 어린이가 등산하기엔 다소 위험하다. 온 가족이 함께 등산을 즐기고 싶다면 제1코스를 추천한다. 등산할 때는 1코스를, 하산할 때는 단군로를 선택하는 것도 방법이다. 참성로는 돌계단이 많아 내려오는 길에 자칫 무릎을 상하기 쉽다. 또 단군로 구간은 서해를 조망하며 능선길을 따라 내려올 수 있기 때문에 전망이 탁월하다. 마니산은 468m의 낮은 산이지만 섬에 자리한 덕에 멋진 조망을 감상할 수 있다. 게다가 용의 척추 뼈처럼 암릉이 구불구불하게 용트림을 하고 있어 짙은 수목과 암릉이 만들어내는 조화가 한 폭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등산이 싫다면 매표소를 지나서 있는 푸른 잔디마당에서 소풍을 즐겨도 좋다. 넉넉한 공간에 데크까지 마련돼 여유롭게 자연을 벗 삼을 수 있다. 개울로 내려가면 많은 수량은 아니지만 발을 담그고 물장난 정도는 칠 수도 있다. 문의 032-930-7068 북한 땅이 손에 잡힐 것 같은 평화전망대 장화리 낙조는 강화도의 참멋을 보여준다.평화전망대는 강화도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북한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 가기 위해서는 검문소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다소 긴장된 마음으로 들어서게 된다. 주차장을 지나 높은 언덕에 올라서면 전망대가 떡하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망대에 들어서면 소리 없이 흐르는 한강이 보이고, 그 너머 북한의 마을이 거짓말처럼 내려다보인다. 봄가을 농번기에는 모내기를 하거나 추수하는 농부의 모습까지 볼 수 있다고 한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사내아이가 “엄마, 나 북한 사람 봤어요” 하며 호들갑을 떤다. 운이 좋았다. 초지진 성곽에 올라서면 초지대교가 보인다.다른 사람들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망원경을 뚫어져라 응시한다. 1층 통일염원소에는 통일을 염원하는 탐방객들의 깨알 같은 글씨가 넓은 벽면을 가득 채우고 소원나무를 자라게 했다. 야외에는 장갑차 두 대가 전시돼 있으며, 가곡 ‘그리운 금강산’의 작곡가 최영섭 선생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버튼을 누르면 소프라노 조수미를 비롯해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부르는 ‘그리운 금강산’을 들을 수 있다. 문의 032-930-7062 전통을 이어가는 화문석문화관 어릴 때 시골집에 가면 대청마루에는 으레 왕골자리가 깔려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자취를 감추더니 이제는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는 생활문화재 취급을 받고 있다. 이처럼 우리 곁을 떠난 왕골, 화문석이 강화군 송해면 양오리 화문석문화관에서 그 명맥을 잇고 있다. 2005년 11월에 개관한 화문석문화관은 지하 1층~지상 2층 규모로 화문석은 물론 왕골공예품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다양한 변천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생활 공예품부터 고가의 작품까지 다양한 화문석의 세계를 접할 수 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좋은 전시공간이 될 것이다. 또 아이들이 체험학습을 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왕골을 이용한 목걸이, 휴대전화 고리 등 왕골 공예 소품을 직접 만들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문의 032-930-7060 이색적인 외관의 성공회 강화성당. 마니산을 오르는 길에 작은 개울을 만날 수 있다. 강화도의 맛있는 음식 비빔국수집은 국수만 50년을 팔았다. 어머니의 손맛을 이어 지금은 아들이 운영하고 있다. 간편하게 부담없이 먹을 수 있는 국수는 여행길에 지치고 허기진 배를 순식간에 든든하게 채워준다. 비빔국수를 먹다가 멸치를 진하게 우려낸 국물을 흥건하게 부어 먹는 맛이 일품이다. 문의 032-933-7337(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490) 강화도 별미 젓국갈비. 순무로 담근김치도 인기다. 화문석문화관에 전시된 공예품. 신아리랑식당에 가면 젓국갈비라는 다소 생소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 각종 채소와 돼지갈비를 넣은 전골인데, 새우젓으로 국물 맛을 내는 게 특징이다. 고려 중종 때부터 내려오는 강화 전통 음식으로 이곳에서만 먹을 수 있다. 고기는 부드럽지 않고 질기다. 문의 032-933-2005(강화군 강화읍 신문리 105) 강화도 순무김치는 강화도를 대표하는 음식이다. 마니산 등 관광지는 물론 강화도 어디를 가도 쉽게 구입할 수 있다. 봄철에 담근 김치가 가장 맛있다. 순무김치와 잘 어울리는 강화도 속노랑고구마는 맛이 달고 호박 맛이 나는 게 특징. 순무김치처럼 강화도 어디에서든 쉽게 구입할 수 있다. 갯벌 체험을 할 수 있는 동막해변의 풍경.>> 강화나들길 가이드 출발지 강화버스터미널 관광안내소 도착지 갑곶돈대 관광안내소(완주도장 받는 곳) 편의시설(화장실과 휴식공간) 용흥궁공원, 고려궁지, 오읍약수터, 연미정, 갑곶돈대 문의 강화군 문화관광홈페이지(tour.ganghwa.incheon.kr), 강화나들길 인터넷 카페(cafe.daum.net/vita-walk) 여행작가 임운석은… 2001년 본인보다 여행을 1% 더 좋아하는 아내와 결혼해 평생 여행만 하며 살자고 약속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니던 외국계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전업 여행작가의 길을 걷고 있다. 20대 때는 연극배우로 활동하면서 신인상 후보에 올랐으며,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문화부장관상을 수상하는 등 문화와 예술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현재 한국여행작가협회 회원이며 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 사진작가, 국내 아웃도어 전문 업체의 로드플래너와 사진작가로 활동 중이다. 블로그 ‘빛과 바람 그리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나라(http://roomno1.blog.me/)’를 통해 독자들과 소통하고 있다. <■글&사진 / 여행작가 임운석>
주말에 떠나는 테마여행
[자전거로 찾아가는 문화 기행]역사의 보고 강화도를 가다
2009. 02. 19 재테크
고려 시대는 항몽의 도읍이었고 조선 시대에는 서구 열강의 침략을 가장 먼저 당한 곳 강화도. 지난해 9월 북한 땅을 조망할 수 있는 평화전망대 개관으로 한결 가까워진 강화도 북부 지역을 비롯해 한반도의 역사 궤적을 오롯이 접할 수 있는 강화 곳곳을 자전거로 되짚어봤다. (편집자 주)석모도행 배를 타는 외포리 앞 바다. 강화도는 수도권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하지만 정작 강화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강화도 북부 지역은 더더욱 그렇다. 그도 그럴 것이 강화도를 자주 찾는 사람들조차 북쪽으로 발길을 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그 이유는 민간인 통제선이 있는 군사 지역이기 때문이다. 북쪽의 양사면, 송해면 일대가 북한 땅과 마주하고 있어 검문소를 통과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다행스럽게도 지난해 9월 양사면 철산리에 북한 땅을 조망할 수 있는 평화전망대가 개관하면서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줄을 잇고 있다. 이러한 개방적 분위기와 때를 같이해 이번에는 강화도 북부 지역의 문화와 역사 탐방에 나섰다. 자전거로 가는 길은 작년 가을 경인 지역 철인3종 동호회를 따라 섬 전체를 라이딩한 적이 있어 그리 낯설지 않다. 강화도 북부 답사 라이딩 코스는 이렇다. 용흥궁 공원(성공회 성당, 철종 잠저 용흥궁, 고려궁지) - 1.5km - 강화산성 북문 - 4.5km - 월곶 연미정 - 5.5km - 송해면 전원미술관 - 3km - 강화지석묘 - 4km - 화문석문화관, 은암자연사박물관 - 5km - 평화전망대 - 9km - 심은미술관 - 10km - 외포리 선착장 - 1km(선박) - 석모도 석포리 선착장 - 8.5km - 보문사에 이르는 반환점까지의 거리가 52km이며, 다시 보문사에서 강화읍까지 가는 길은 선원면 인산저수지 방향으로 곧장 가는 길로 23km. 총 라이딩 거리가 75km 정도될 것으로 예상되는 긴 여정이다. 총 라이딩 거리가 75km에 이르는 강화도 라이딩 여정. 강화 읍내 용흥궁 공원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성공회 강화성당이다. 강화읍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 잡은 이 성당이 중요 사적지로 지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00년 건축된 이 성당은 자재로 백두산송을 사용했으며, 서양 바실리카 양식을 한옥에 적용한 대단히 특이한 건물이다. 최근에 보수를 했으나 그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으며 지금도 사용 중인 성당이다. 언덕 아래서 볼 때는 마치 방주를 연상시키는 형태로 지었다 한다. 때마침 젊은 청년 교인들이 방문을 했는데, 그들은 이곳을 성지로 여기고 있는 듯했다. 조선 철종이 즉위하기 전까지 살았던 잠저 용흥궁은 성공회당과 골목 하나를 두고 있으나 용흥궁으로 가기 위해서는 좀 우회해서 식당이 밀집해 있는 골목길로 들어가야 한다. 철종(이원범)이 정조의 형제로서 비록 귀양이나 다름 없는 삶을 살며 나무꾼으로 평범하게 지냈다 해도 그의 거처가 관청 강화부 근처에 있던 것을 보면 모종의 감시 혹은 보호를 어느 정도 받으면서 지낸 것으로 보인다. ‘강화 도령’이라는 별명이 어딘지 모르게 냉소적으로 들린다. 비록 안동 김씨 일가의 세도 정치에 이용된 허수아비 왕이었다지만, 강화도 사람들만큼은 그를 친한 이웃으로 대한다는 별명이 아니었을까. 산 쪽으로 좀 더 올라가면 고려궁지가 나온다. 고려 1232년 실권자 최우가 대몽항전을 위해 개성에서 천도해 39년간 궁궐로 삼은 곳이다. 적의 공격을 피하기 위한 궁인 까닭에 규모야 그리 크지는 않았으나, 이곳에 궁궐이 있었다는 것은 강화도 역사에 커다란 전기가 됐을 것이다. 분단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강화는 서울보다 개성과 더 밀접했다. 6·25 이후 강화가 고려인삼의 본고장이 될 수 있던 것도 바로 개성인삼 농가들이 대거 강화도로 유입해왔기에 가능했다. 물론 토양의 문제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이처럼 강화도의 역사는 한반도의 역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연을 맺고 있다. 월곶 연미정-외포리 강화산성 북문을 통과해 동북 방향 산책로가 있어 자전거 다운힐의 스릴을 느끼며 월곶 연미정을 향해 달렸다. 제비 꼬리를 닮았다 하여 붙은 연미정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됐다. 고려 고종이 사립 교육기관인 구재(九齋)의 학생들을 공부시킨 정자로 알려진 이곳은 한강으로 들어가는 선박과 물 건너 땅을 조망하기가 아주 좋은 자리다. 하지만 정묘호란시 조인식을 가진 치욕의 역사를 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해안을 따라 인근에 많은 돈대(墩臺)가 있다. 오래 전부터 해상 적의 침입과 한양으로 들어가는 외국 배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한 군사 거점이다. 강화도는 조금만 둘러보면 돈대와 고인돌이 지천으로 널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쉽게도 북부에서는 대부분의 돈대들이 군 초소와 중복되어 있어 일반인이 접근하기 쉽지 않은 실정이다. 월곶에서 다시 48번 국도로 가야 한다. 송해면 사무소 인근에 전원미술관이 있다. 한국화가 유광상 화백이 설립해서 자신의 호를 본뜬 이름이면서도, 그야말로 이름 그대로 전원 속의 미술관이다. 작가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바로 지석묘로 향했다. 1 월곶 연미정, 고려 고종이 친히 구재의 학생들을 공부시켰다고 한다. 2 북녘 땅을 굽어보고 있는 강화 평화전망대. 국도를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오른쪽에 지석묘가 나온다. 구릉이면서도 넓은 개활지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고인돌이 나온다. 고인돌의 고장답게 강화도에서는 고인돌을 무척이나 흔하게 볼 수 있다. 오죽하면 어떤 민가에서는 고인돌을 마치 조형물처럼 그대로 모셔둔 상태에서 마당을 조성해 살고 있는 경우도 있다. 아닌 게 아니라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 최고의 첨단적 조형 감각과 기술력이 반영된 무덤이자 공동체의 제단이다. 그 많은 고인돌 중 규모나 구조 면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이 바로 강화지석묘이다. 인근 휴게소에서 잠시 쉬고 난 후, 송해면 양오리에 있는 화문석문화관으로 향했다. 과거 같으면 없어서는 안 될 생활필수품이지만, 오늘날 환경에서는 많이 잊혀진 화문석을 만날 수 있었다. 강화도가 인삼으로 유명해지기 훨씬 전부터 화문석은 강화도의 대표적 산물이었다. 오늘의 현실과 더불어 앞으로의 전망이 어떠할지가 궁금하다. 화문석의 주재료인 왕골의 사촌이라 할 수 있는 파피루스는 지금도 이집트를 대표하는 문화상품으로 활용되고 있다. 요즘같이 친환경 생활을 강조하는 때에 파피루스 못지않은 새로운 수요를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은 분명히 있다. 실제로 문화관을 살펴보니 아파트 공간 내에서 다양한 기능과 쓰임새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창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점이 엿보였다. 1 지석묘. 청동기 시대의 유적으로 덮개돌의 길이가 6m가 넘는다(사적 137호). 2 조선 철종의 잠저인 용흥궁 입구. 3 강화산성 북문인 진송루. 4 109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강화 성공회 성당. 5,6 강화 특산물 화문석의 전당 화문석문화관에 전시된 화문석 공예품과 고려인삼의 맥을 잇는 강화 특산물 6년 근 인삼.평화전망대는 작년 9월 강화 섬 최북단 해안에 세워졌다. 가장 높은 곳에서 북한 땅을 널리 관찰할 수 있는 곳으로 실향민뿐만 아니라 일반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급경사의 오르막길이지만 쌀쌀한 날씨를 이기기 위해 페달을 힘차게 밟았다. 숨이 차긴 하지만 삭풍을 시원하게 맞을 수 있어 얼마나 좋은가. 바람을 느끼기 위해 자전거를 끌고 망배단 쪽으로 올라가 북녘 땅을 바라본다. 엄동설한이기는 마찬가지일 텐데 왜 유독 그 쪽만이 춥게 느껴지는 것일까. 외포리-석모도 이제 석모도를 가기 위해 내려가는 길이다. 삭풍을 가르며 내려가는 길의 쾌감을 느끼며 17번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향한다. 외포리까지 거리가 제법 멀다. 가는 길 중간쯤에서 별립산 기슭 도로변에 있는 심은미술관에 들러 잠시 휴식을 취한다. 폐교를 활용한 미술관으로 주로 서예 작품을 취급하고 있다. 미술관에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이색적인 교회 건축을 볼 수 있던 것도 의외의 수확이다. 망월리에 있는 망월교회는 외관이 종이학을 닮았다. 내가교회는 멀리서 볼 때 마치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를 연상시키는 모습을 하고 있다. 망월교회는 신축 건물이지만 교회의 역사는 100년이 넘었으며, 내가교회 역시 1940년대 설립된 역사를 갖고 있다. 외포리에서 석모도로 가는 배를 탔다. 새우깡 한 봉지를 사들고 승선해 가는 동안 갈매기들과 함께 어울리는 즐거움도 빠트릴 수 없다. 석포리 선착장에서 보문사 가는 길은 해명산 고개를 넘어야 하는 차도가 있지만 비탈이 심하고 갓길이 좁아 농로로 진입했다. 보문사는 낙가산 기슭에 자리 잡은 신비스러운 사찰이다. 635년 신라 선덕여왕 4년에 건립된 이 사찰엔 독특한 요소가 많다. 입구에 도착하니 다시 경사가 심한 오르막이다. 돌아갈 길을 생각해서 더 이상 무리하면 곤란할 것 같아, 매표소에 자전거를 맡기고 도보로 등산을 했다. 물론 걸어 올라가기에도 숨이 차는 경사다. 아름다운 경내를 둘러보고, 신비감을 주는 석실을 거쳐 서해를 굽어보기 좋은 눈썹바위로 올라갔다. 보문사 석실만큼이나 특이한 지형이다. 특히 오후 서쪽으로 기울어가는 석양이 비치는 석벽은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긴 석벽 한가운데에 20세기 초에 새겨진 마애석불이 있다. 바위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없음이 아쉽다. 에필로그 6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 발을 디뎠을 때의 인상이 그랬다. 서 있는 자리의 땅을 파면 역사의 지층이 떡시루 단면처럼 나타나고, 또 광야조차 몇 걸음만 옮겨도 역사의 무대가 아닌 곳이 없었다. 그러한 인상이 바로 우리나라에서는 강화에서 재현된다. 강화는 가는 곳마다 시대별 유적과 유산이 즐비하다. 고려 시대 한때는 항몽의 도읍이기도 했고, 조선 시대에는 서구 열강의 침략을 가장 먼저 당했는데,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엄청난 문화재의 보고였던 것을 그들은 알고 있던 것이다. 읍내로 다시 돌아왔을 때의 인상은… 뭐랄까, 마무리가 산뜻하지 못한 느낌이다. 강화다운 무언가가 아쉽다. 멀쩡하게 있던 성을 잘라 도로를 낸 것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해도, 도심 속 풍경을 강화답게 가꿀 수는 정말 없는 것일까. 필자 이재언은 1958년생. 강원대 미술교육과를 졸업하고 홍익대 대학원 미학과 석·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상명대 겸임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선갤러리 아트디렉터 및 한국공예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1989년부터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는 한편 2006년부터 인천-서울, 일산-서울 장거리 ‘자전거 출근’과 함께 자전거 문화와 미술을 접목한 집필 및 강연 활동을 해오고 있다. 역서 「존 듀이 경험으로서의 예술」(책세상)■글 / 이재언(미술평론가) ■사진 / 이재언, 이범원
자전거로 찾아가는 문화기행
[프런트 에세이]강화도 시인 함민복과 함께 떠나는 이른 봄 산책
2006. 03. 01 문화/생활
암수 정답게 노니는 콩새를 보니 마음이 흔들린다 봄인가보다. 봄은 흔들림이다 바깥마당 고욤나무에 콩새들이 앉아 있다. 하나 둘 셋… 여섯 마리다. 콩새는 콩처럼 작은 새가 아니다. 참새보다 크고 비둘기보다 작다. 콩새들아, 봄이 왔다고 울음소리 한 옥타브 올라간 콩새들아. 거기 고욤나무가 너희들 미팅 장소냐. 격식을 좀 갖춰야 하는 너희들 레스토랑이냐. 아니면 내숭을 지나 낭만을 넘어 현실적으로 선택한 중국집이냐 순대국밥집이냐. 뭐라고? 우리 자기가 입덧을 하고 있다고? 그만해라 그만 울어라 콩새들아. 거긴 한평생 혼자 사는 달이 걸리기도 하는 곳이다. 혼자 사는 달 말없이 머물다 가는 달의 정거장이기도 하다. 너희들보다 큰 몸으로 고욤나무 잔가지 하나 흔들지 않고 지나는 달을, 혼자 사는 내가 익은 기침을 하며 우두커니 서서 바라다보던 곳이다. 내 추억의 식탁이다. 고욤나무 큰 가지에 묶여 있던 빨랫줄을 팔 올려 풀어 주었었는데. 10년이란 세월이 흘러 그 가지는 두 팔 정도 높이 자랐고 껴안으면 폭 안기던 몸통은 이제 굵어져 한 아름에 안기 버겁다. 내가 살아오며 제일 많이 바라다본 나무이며 내게 제일 많이 그림자를 베풀어준 나무다. 그 나무에 기대 달을 보며 고향에 혼자 사시는 어머니를 떠올렸고 쓸쓸함을 달랬었다. 그러다가 나무 그림자가 어떻게 어둠 속으로 들어가나 세 시간을 지켜보기도 했었다. 잔가지에서 점점 굵은 가지 순으로 어둠에 지워지다가 몸통이 어! 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내 유년의 추억에 대한 기억과 비교해보며 지켜보았었다. 고욤 익었다고 너구리가 사슴처럼 끽익-끽익- 울던 가을이 엊그제 같은데 겨우내 얼어 있던 고욤이 쪼글쪼글 녹아 달고 먹기 좋다고 콩새가 시끄럽다. 암수 정답게 노니는 콩새를 보니 마음이 흔들린다. 봄인가보다. 봄은 흔들림이다. 지푸라기 타는 냄새, 찔레꽃 향기, 소똥 냄새… 죽 이어지는 냄새의 스펙트럼 읽던 책을 접고 집을 나선다. 얼었던 땅이 녹아 질척거린다. 사방에서 새소리가 들려온다. 고개 들어 어느 곳을 보든 새 몇 마리가 날고 있던 어린 시절 고향이 떠오른다. 이맘때쯤이면 이랴- 워- 어뗘뗘뗘- 밭 갈며 소 모는 소리 온 동네에 쩡쩡 울려 퍼지지 않았던가. 밭에 낸 두엄냄새가 낮게 깔리고 굴렁쇠를 굴리며 논둑길을 달리다가 멈춰서면 어지럽게 피어오르던 온 세상 아지랑이 아지랑이. 길을 건너 아랫집 비닐하우스로 향한다. 하우스 속이 보이지 않는다. 다섯 손가락을 갈퀴처럼 구부리고 톡톡 쳐본다. 습기들이 뭉쳐져 물방울이 되며 또르륵 흘러내린다. 하우스 속에 또 작은 하우스가 있다. 고추 어린 모종들 보고 싶은데 보이지 않는다. 모종들 보며 너희들은 어찌 요리 여린 것들이 자라 매운 고추를 맺느냐고 물어 볼 참인데 낭패다. 하우스 문을 열고 들어가보려다 어린것들 걱정에 문을 돌멩이로 고여 놓은 농부의 마음을 헤아려 그만둔다. 다시 바닷가 쪽으로 난 길을 따라 걷는다. 아랫집 팬션 울타리로 심어 놓은 벚나무에 앉아 있던 참새가 난다. ‘참새의 얼굴을 / 자세히 보라 / 모두들 / 얘기하고 싶은 / 얼굴이다 /’ 박목월의 동시를 떠올리며 벚나무 쪽으로 다가가 길을 비켜선다. 팬션에서 산책 나온 젊은 연인이 속삭이며 지나간다. 벚나무에 새싹 눈이 맺혀 있다. 새 부리 같다. 새 발가락처럼 세 가락이다. 다시 걷다 방죽에 멈춰 서서 갈대들을 본다. 얼음 속에 박혀서도 머리에 씨앗을 이고 있는 한 허리 꺾이지 않는 갈대들. 이 땅의 에미들 같은 갈대들을 봄바람이 어루만져주며 지나간다. 제방에 올라선다. 훅 갯내음이 난다. 언 뻘이 빛나던 겨울 바다가 아니다. 콧구멍에 힘을 주고 갯내음을 맡는다. 냄새의 스펙트럼. 도시에서의 냄새는 비슷비슷하다. 타이어 타는 냄새와 음식물들 냄새가 어디를 가나 엇비슷하다. 시골은 그렇지 않다. 논을 지나면 지푸라기 타는 냄새, 고개를 넘으면 찔레꽃 향기, 소 울음소리 들리면 소똥 냄새, 죽 이어지는 냄새의 스펙트럼. 달리는 버스 창을 열고 입을 아 벌리고 맡아보는 봄 냄새들. 그 신나는 냄새의 사열. 제방엔 벌써 풀들이 푸릇푸릇하다. 겨울 동안 제방 쪽으로 바싹 당겨 매 있던 배에 나무 말뚝이 실려 있다. 부지런한 어부가 물 나간 뻘에 그물 친다는 표시로 꽂아 놓은 붉은 깃발 입성이 펄럭인다. 곧 저 배도 기지개를 켜고 퉁퉁퉁 엔진 소리를 내며 맘껏 흔들리리라. 봄은 흔들림이 아니던가. 꿩이 운다. 진달래가 튀어나올 것 같다 봄은 낳는다. 봄은 어머니다 집으로 돌아오다 고개를 넘는다. 동네 형님 텃밭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동네 형님 세 명과 동네 아저씨 한 분이 모여 섰다. 형님 한 분이 쪼갠 아카시아 나무를 손도끼로 다듬는다. 깎아 놓은 고추 말뚝이 수북이 쌓여있다. 타고 있는 모닥불에 나무 조각을 집어 던진다. 연기가 난다. 이놈의 연기가 왜 왔다갔다해. 힘 센 사람한테 간다고 하잖아. 힘 센 사람 찾기가 힘드나 왜 자꾸 왔다갔다하지? 아무래도 묵은 어른 것이 낫겠지요. 에이, 이 사람아. 힘 센 사람이 아무도 없는지 똑바로 올라가는데요? 웃음소리와 농담이 불 쬐는 손바닥처럼 따듯하다. 달다. 말뚝을 깎던 형이 손도끼를 못탕에 탁 꼽는다. 우리 국수나 한 그릇씩 사먹고 등산이나 가지. 더 바빠지기 전에 다리 힘이나 기르자고. 그래야 어떤 농사든 짓지. 등산화를 신으러 다시 고개를 넘어 온다. 길가 밭에서 꼬부랑 할아버지가 고추 대궁을 태우고 매운 내에 코를 움켜쥐며 꼬부랑 할머니가 냉이를 캐고 있다. 꿩이 운다. 목에 무엇이 걸렸는지 꿔엉 꿔엉 운다. 진달래가 튀어나올 것 같다.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봄은 낳는다. 봄은 어머니다. 어머니인 봄이 내 머리 속에 시 한 편을 낳아주신다. 봄의 냄새 섬진강에 김용택 시인이 있다면 강화도에는 함민복 시인이 있다. 섬의 남쪽 끝 동막해수욕장 너머에 그가 홀로 사는 낡은 집이 있다. 짠내 나는 바닷가에 둥지를 튼 그를 두고 혹자는 ‘전원 시인’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실상 그의 처음 사정은 좀 달랐다. ‘강호에 병이 깊어’ 그곳에 갔다기보다는 지긋지긋한 가난을 피해 거기까지 찾아 들어간 것이었으니. 대산문화재단에서 지원 받은 창작지원금 500만원을 들고 그가 강화도로 흘러 들어간 지도 어느덧 10년이 넘었다. 보증금 없는 월세 10만원짜리 폐가를 얻어 살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갑갑함을 못견뎌 종일토록 뻘밭을 휘젓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안빈낙도’까진 몰라도 그곳 어부들과 한가지로 바다에 나갔다가 물고기 몇 마리 건져 올리는 수완도 생겼다. 뻘밭을 바라보며 문명을 향해 반성어린 성찰의 시간을 갖고 그것을 시로 풀어 쓰며 시인 본연으로 돌아가는 일만큼이나,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소주 한잔 거나히 걸치는 일 또한 그에게는 익숙한 일상이다. 시인이 보내온 글귀들에 이른 봄내음이 물씬 배어 있다. 봄의 냄새. 때로 어떤 기억들은 냄새와 함께 뇌리에 남는다. 향긋한 꽃향기로 기억되는 봄도 좋지만 짠내 나는 초봄의 바다 냄새도 나쁘지 않다. 혼자 떠나는 여행에 대한 다소 치기 어린 동경으로 이곳저곳 발길 닿는 대로 돌아치던 몇 해 전, 아마도 2002년 이른 봄이던가. 평일 오후, 그것도 초봄의 바닷가를 혼자서 찾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바다 곁에 앉아 고막이 터지도록 요란한 파도 소리를 듣다가 곧 청각이 마비가 됐는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은 상태가 됐다. 한 가지 냄새를 오래 맡으면 이내 냄새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이내 까무룩 잠이 들었고 손에 들고 있던 책자를 떨구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 잠이 깼을 때는 적이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해방감일지 불안감일지 모를 짧은 쾌감을 느끼며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던 기억이 난다. 경건한 약속처럼 계절은 다시 돌아온다. 봄 좋은 줄 모르겠더니 해가 갈수록 봄이 좋아진다. 어딘지 짝이 맞지 않는 조합 같기도 하지만 봄바다로의 상춘도 더러 해볼 만한 일이다. 진행 / 박연정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꿩 꿩은 목구멍에 무엇이 걸렸는지 꿔엉 꿔엉 야단이다 미련하긴 작년 봄에도 그래 놓곤 토해 붉은 진달래 노란 민들레 등 두드려주는 봄바람 믿고 상습적이라니까 고욤 따 놓았다가 먹으면 맛있는데… 항아리에 재워났다가 한겨울에 숟가락으로 떠먹으면… 엄동설한에 새들이나 먹게 그냥 두고 새 울음소리나 듣지 뭐. Profile 시인 함민복 1962년 충북 중원군 노은면 출생 / 수도전기공업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월성 원자력발전소에서 4년간 근무 / 1988년 ‘세계의 문학’에 「성선설」 등을 발표하며 등단 / 1989년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 / 1990년 첫 시집 ‘우울 氏의 一日’ / 1993년 두 번째 시집 ‘자본주의의 약속’ / 1996년 세 번째 시집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 2005년 네 번째 시집 ‘말랑말랑한 힘’ / 1998년 ‘오늘의 젊은 예술가 상’ 수상 / 2005년 제24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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