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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총 182 건 검색)

[사설]‘선관위 직무감찰’ 위헌, 계엄군 선관위 투입도 위헌이란 뜻
[사설]‘선관위 직무감찰’ 위헌, 계엄군 선관위 투입도 위헌이란 뜻
2025. 02. 27 18:15오피니언
... 결정은 윤석열 탄핵심판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비상계엄 때 윤석열은 부정선거 증거를 찾으라며 계엄군을 중앙선관위에 난입시켰다. 계엄군은 서버를 반출하고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려 했다. 직원...
[단독]수방사 군사경찰단장, 국회 출동 계엄군에게 “명찰 떼라” 지시···왜?
[단독]수방사 군사경찰단장, 국회 출동 계엄군에게 “명찰 떼라” 지시···왜?
2025. 02. 23 15:44사회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직후인 지난해 12월4일 새벽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도착한 무장군인들이 국회본청 진입을 시도하자 국회 직원 등이 격렬히 막아서고 있다. 성동훈 기자 12·3 비상계엄...
‘계엄군 길라잡이’ 의혹 국방부 국회협력단, 62년째 ‘유령 조직’이다
계엄군 길라잡이’ 의혹 국방부 국회협력단, 62년째 ‘유령 조직’이다
2025. 02. 22 09:00정치
... 국방부 국회협력단은 12·3 비상계엄 사태와 관련한 수사 대상이다. 국방부 국회협력단이 국회에서 계엄군의 ‘길 안내’ 역할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검찰은 지난 2월 18일 용산 국방부의...
권익위원장, 계엄군 국회 투입 증언 곽종근 “공익신고자로 판단”
권익위원장, 계엄군 국회 투입 증언 곽종근 “공익신고자로 판단”
2025. 02. 19 20:22정치
... 출석해 증언하고 있다. 헌법재판소 제공 유철환 권익위원장이 19일 12·3 비상계엄 사태 당시 계엄군 국회 투입에 대해 증언한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관이 공익신고자로 판단했다고 밝혔다. 유...
윤석열 석방 파장

스포츠경향(총 10 건 검색)

‘계엄군 체포명단’ 김제동 “저 잘 살고 있어요” 콘서트 개최
계엄군 체포명단’ 김제동 “저 잘 살고 있어요” 콘서트 개최
2025. 02. 17 11:10 연예
방송인 김제동. 김제동 토크콘서트 ‘THE 김제동’ 주관사 제공 방송인 김제동이 3년 만에 토크 공연으로 돌아온다. 주최 측에 따르면 김제동 토크콘서트 ‘THE 김제동’은 오는 3월 29일과 4월 5일과 6일까지 총 4회에 걸쳐 홍대 앞 H-STAGE에서 진행된다. 3년 만에 진행되는 토크 콘서트인 만큼 김제동은 3번째 챕터로 관객들에게 유쾌한 선물을 안긴다는 계획이다. 더 김제동 답고, 김제동 다운, 김제동 만이 할 수 있는 입담으로 진행된다. 소극장에서 진행되는 만큼 무대와 객석 사이 벽을 허물고 김제동 특유의 강점이 극대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함께 공개된 포스터에는 미소를 짓고 있는 김제동의 모습이 담겨 있다. ‘모처럼 예쁜 제동이는 별일 없이 잘 살고 있어요’라는 문구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특히 김제동이 지난해 12월 3일 계엄 당시 계엄군의 체포 명단에 포함돼 있었다는 소식이 최근 알려져 의미심장함을 더한다. 김제동은 “웃음이 끊이질 않는 따뜻한 시간이 될 것”이라며 “오랜만에 만나서 재미있게 놀겠다. 우리 수다 떱시다”고 했다.
“계엄군 한동훈 사살가동” 김어준, 내란선동죄 피고발
계엄군 한동훈 사살가동” 김어준, 내란선동죄 피고발
2024. 12. 18 10:04 연예
내란선동죄 등으로 피고발된 방송인 김어준. 경향신문 자료사진 ‘12·3 비상계엄 사태’ 당시 암살조가 있었다고 주장한 방송인 김어준씨가 내란선동죄 등의 혐의로 고발당했다. 시민단체 서민민생대책위원회(서민위)는 18일 김씨를 내란선동죄,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서울경찰청에 고발했다고 이날 밝혔다. 서민위는 이번 고발장에서 “황당하고 어처구니 없는 주장으로 여야 대표를 충동해 사회적 혼란을 가중시킨 것도 모라자 국제 정세를 흔드는 북한과 미국을 자극, 한반도에 전쟁 위기감을 조성한 기가 막힌 언행은 내란선동죄에 해당한다”고 했다. 김씨는 지난 13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현안 질의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지난 3일 비상계엄 사태 당시 암살조가 가동됐다는 제보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를 체포해 이동 중 사살하고 조국 전 조국혁신당 대표와 김씨 등 체포·호송 부대를 공격하는 시늉을 한 뒤 이를 북한 소행으로 발표한다는 내용이 담겼다고 주장했다. 서민위는 김씨뿐 아니라 조지호 경찰청장과 곽종근 특정사령관을 공무상비밀의 누설,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고발했다. 민주당은 국방위 내부 검토 문건에서 김씨의 주장이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하고 있다. 해당 문건에는 ▲과거의 제한적 지식을 가진 사람이 ▲정보 공개가 제한되는 기관 특성을 악용해 ▲일부 확인된 사실을 바탕으로 상당한 허구를 가미해 구성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봤다.
올해의 ‘범도교육상’에 고려인 김 발레리…‘범도전투상’은 계엄군 저지한 홍성일 보좌관
올해의 ‘범도교육상’에 고려인 김 발레리…‘범도전투상’은 계엄군 저지한 홍성일 보좌관
2024. 12. 13 05:47 생활
올해의 ‘범도교육상’을 수상한 김발레리 고려인민족학교 교사이자 변호사(사진 오른쪽), 소설 ‘범도’의 작가 방현석 교수(왼쪽, 중앙대) 항일무장투쟁역사학교(교장 방현석)는 12월 11일 국회의사당에서 ‘범도상’ 시상식을 열었다. 올해의 ‘범도교육상’은 고려인민족학교 김 발레리 교사가 수상했다. 김 발레리 교사는 홍범도 장군과 최재형 선생이 활약한 우수리스크에서 북을 배우고 상트페테브르크 인문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시상을 맡은 김은경 목사(전 기독교장로회 전 총회장)은 “변호사가 되었지만 우수리스크로 돌아와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고려인민족학교 아리랑예술단 단원들에게 민족혼이 담긴 북 지도를 계속해온 김 발레리 선생은 연해주 고려인사회의 귀감”이라고 치하했다. ‘범도전투상’을 수상한 홍성일 보좌관(사진 오른쪽, 이연희 국회의원실), 시상을 맡은 천도 스님(울산불교환경연대 대표). 올해의 ‘범도전투상’은 지난 12월 4일 밤 국회에 난입한 계엄군을 저지하는 데 앞장선 이연희 국회의원실의 홍성일 보좌관이 수상했다. 시상을 맡은 천도 스님(울산불교환경연대 대표)은 “홍성일 보좌관은 계엄군이 국회에 진입했을 때 야외의 최일선에서 몸싸움을 벌이며 국회 본관 내에서 바리케이트를 치고, 본회의장을 지킬 시간을 벌 수 있게 함으로써 ‘나를 희생해서 우리를 지킨다’는 독립군의 정신을 발휘했다”고 치하했다. 지난 12월 4일 밤 국회에 난입한 계엄군을 저지하는 데 앞장선 ‘범도전투상’ 수상자 홍성일 보좌관(이연희 국회의원실) 올해의 ‘범도인상’은 고려인민족학교의 항일무장투쟁영웅실 지원에 앞장서고, 청소년들의 항일무장투쟁 역사현장 교육을 후원해 온 김창일(고려인민족학교지원단) 선생이 수상했다. 김은경 목사(사진 왼쪽)가 범도인상 상패를 김창일 선생(대리수상)에게 수여하고 있다. 김창일 선생은 암투병 중이다. 한편 항일무장투쟁역사학교는 시상식에 앞서 아리랑예술단의 의상비 500만 원을 전달했다. 이날 오후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400여 석의 좌석을 가득 채운 관객들 앞에서 내한 특별공연을 펼친 아리랑예술단은 고려인민족학교의 교사와 재학생들로 구성된 고려인사회의 대표적인 극단이다. 고려인민족학교의 활동 범도상을 제정 시상하는 항일무장투쟁역사학교는 만주와 연해주, 중앙아시아로 이어지는 홍범도 장군의 무장투쟁 현장을 중심으로 역사교육을 펼치는 ‘길 위의 역사학교-범도루트’를 운영하고 있다. 소설 ‘범도’의 작가인 방현석 교수(중앙대)가 교장을 맡고 있는 이 학교는 고려인민족학교와 아리랑예술단을 꾸준히 지원해오고 있다. 김발레리아 고려인민족학교 교사(산진 오른쪽), 소설 ‘범도’의 작가 방현석 교수(왼쪽, 중앙대)
707 출신 배우 이관훈, 계엄군 설득 “형이 너희 선배다”
707 출신 배우 이관훈, 계엄군 설득 “형이 너희 선배다”
2024. 12. 04 10:49 연예
배우 이관훈 SNS캡처 배우 이관훈(44)이 계엄군을 직접 설득하는 모습이 여의도 국회 현장에서 포착돼 화제다. 계엄령이 선포된 3일 유튜브 채널 황기자TV에는 배우 이관훈의 모습이 포착됐다. 제707특수임무단 출신인 배우 이관훈은 노란색 점퍼를 입고 국회로 진입한 계엄군 앞에 서서 이들을 직접 설득했다. 영상에서 이관훈은 차분한 말투로 “형이 707 선배야”라면서 “제대한지 20년 정도 됐고, 이관훈 중사라고 너희 선배이고 배우이기도 하다”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이씨는 “형 동기와 통화했다. 헬기 타고 다 넘어오고 있다는 얘기 듣고 걱정돼서 왔다”고 했다. 이관훈은 그러면서 “명령 받아서 온거 안다. 너희들이 진정해야 한다”면서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더라도 몸쓰고 막지 말아라. 너희도 다 판단할 수 있을거로 믿는다”고 부탁했다. 부산출신인 이관훈은 특전사 출신으로 5년간 직업군인으로 복무하다 2004년 중사로 전역했다. 각종 기업 브랜드 모델로 활동하다 배우 활동을 이으며 드라마 ‘대조영’ ‘선덕여왕’ ‘마의’ ‘로맨스는 별책부록’ ‘빅이슈’ 지난해 ‘꽃선비 열애사’ 등에 출연했다. 베우 이관훈. SNS캡처 한편, 윤석렬 대통령은 지난 3일 오후 10시 30분쯤 용산 대통령실에서 비상계엄령을 내렸다. 이후 무장계엄군이 계엄령 해제를 위한 투표를 위해 국회에 모여든 국회의원의 출입을 막고, 이재명 민주당대표 등을 체포하기 위해 건물 유리창을 깨고 시민들과 몸싸움을 하며 국회로 진입했다. 현장에선 국회의원 보좌진들이 의자와 집기 등으로 바리케이트를 쌓고 소화기를 뿌리며 계엄군을 막아섯으며, 국회는 191명 찬성으로 비상계엄해제 요구결의안을 가결했다. 이후 윤 대통령은 4일 오전 4시 27분쯤 비상계엄을 해제하고 군을 철수시켰다.

주간경향(총 6 건 검색)

[오늘을 생각한다] 계엄군이 피해자인가?
[오늘을 생각한다] 계엄군이 피해자인가?(2025. 02. 28 15:00)
2025. 02. 28 15:00 오피니언
김형남 군인권센터 사무국장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로부터 6일이 지난 2024년 12월 9일, 한 군인이 서울 용산 국방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김현태 특수전사령부 707특수임무단장이다. 그는 카메라 앞에서 자신과 부하들이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에게 이용당한 ‘피해자’라 규정하며 울먹였다. 그가 지휘했던 707특임단은 12월 3일 밤 국회의사당 창문을 깨고 안으로 진입한 부대다. 많은 이들이 김 단장을 진실을 얘기하는 용기 있는 군인, 참군인이라 추켜세웠고 공익제보자로 지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로부터 2개월이 지난 뒤 김현태 단장이 다시 언론에 등장했다. 그는 몇몇 국민의힘 의원과 보조를 맞춰 자신과 곽종근 특수전사령관이 야당에 의해 이용당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국회 안에서 소화기를 뿌려가며 계엄군을 막았던 야당 보좌진들을 두고 “마치 저희를 이용해 폭동을 일으키려는 느낌을 받았다”는 주장도 펼쳤다. 이번에도 그는 ‘피해자’였다. 가해자가 김용현에서 야당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젠 아무도 김현태를 참군인이라 부르지 않는다. 진실을 얘기하는 공익제보자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도리어 그는 국회와 헌법재판소에서 거짓말을 한 사실이 속속 드러나 위증죄로 처벌받을 처지에 놓여 있다. 이처럼 180도 뒤바뀐 그의 모습에 배신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는 원래부터 피해자가 아니라 피의자였다. 중무장한 김현태의 부하들이 국회 창문을 깨고 의사당으로 난입하던 모습을 전 국민이 생중계로 지켜봤다. 누가 이용했건, 회유했건 시작부터 김현태는 내란의 주요 임무 종사자였다. 다만 기자들을 불러놓고 눈물을 흘리던 내란죄 피의자 김현태의 피해자 코스프레에 모두 농락당했을 뿐이다. 아무한테나 참군인 딱지를 붙여주고, 계엄군을 피해자처럼 딱하게 여기다 보면 내란 가담은 김현태 주장처럼 ‘어쩔 수 없었던’ 일이 되고 만다. 국민에게 총을 들이대라는 끔찍한 명령을 따라놓고 자기도 피해자라 생각하며 사는 군인이 가득한 군대는 얼마나 위험한가. 계엄군의 트라우마를 관리하기 위한 대책이 필요하지 않으냐는 언론인들의 문의를 종종 받는다. 12월 3일 직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받고 있는 이 문의는 동의하기 어려운 문제의식이다. 계엄에 관여한 군인 개개인이 피해자인지, 피의자인지는 하나하나 수사를 해봐야 알 수 있다. 수사도 해보지 않고 섣불리 계엄군을 피해자로 규정하려는 시도는 자칫 잘못하면 위험한 면죄부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우려에 화를 내는 이들도 있다. 윤석열과 상관의 지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끌려간 이들을 범죄자 취급하는 건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럴 때면 묻는다. “끌려갔는지 따라갔는지 어떻게 아시나요?” 12·3 내란의 진상을 규명하는 일은 이제 막 첫걸음을 뗀 수준이다. 기소된 사람이라 해봐야 고위급 장성 몇몇이 고작이다. 계엄군을 지휘했던 영관급 장교들은 기소는 고사하고 대부분 직무배제조차 되지 않은 채 버젓이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밝혀진 건 적고 갈 길은 멀다. 이 와중에 아무한테나 참군인 딱지를 붙여주고, 계엄군을 피해자처럼 딱하게 여기다 보면 내란 가담은 김현태 주장처럼 ‘어쩔 수 없었던’ 일이 되고 만다. 국민에게 총을 들이대라는 끔찍한 명령을 따라놓고 자기도 피해자라 생각하며 사는 군인들이 가득한 군대는 얼마나 위험한가. 지금은 용서와 이해의 시간이 아니다. 정상참작에도 다 때가 있는 법이다.
오늘을 생각한다
[박성진의 국방 B컷] (26) ‘계엄군 길라잡이’ 의혹 국방부 국회협력단은 62년째 ‘임시 조직’
[박성진의 국방 B컷] (26) ‘계엄군 길라잡이’ 의혹 국방부 국회협력단은 62년째 ‘임시 조직’(2025. 02. 24 06:00)
2025. 02. 24 06:00 정치
검찰이 12·3 비상계엄 사태와 관련해 국방부 국회협력단 사무실 등을 압수수색한 지난 2월 18일 국회 내에 있는 국방부 국회협력단 사무실 문이 굳게 닫혀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국회와의 연락·협조 업무를 담당하는 국방부 국회협력단은 12·3 비상계엄 사태와 관련한 수사 대상이다. 국방부 국회협력단이 국회에서 계엄군의 ‘길 안내’ 역할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검찰은 지난 2월 18일 용산 국방부의 국회협력단장 사무실을 압수수색하는 등 수사에 나섰다. 국회 본청에 있는 국방부 국회협력단 사무실에는 ‘비상계엄령 수사 종료 시까지 출입을 금함’이라는 국회 사무총장 명의의 경고 안내문이 붙어 있다. ■5·16의 유산 국방부 국회협력단은 1963년 ‘국방부 국회연락단’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했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 출신 국회의원들이 국회 국방위원회를 장악하면서 국방위원들의 편의를 도모하는 한편 군이 정치권 동향을 살피기 위한 방편으로 만든 조직이었다. 5·16 군사쿠데타의 잔재인 셈이다. 국방부 국회협력단에 근무하는 장교들은 국방위원들을 깍듯이 모신다. 12·3 비상계엄의 핵심 인물인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도 2004년 국회연락단 육군담당관(대령)을 지냈다. 그 역시 국방위원들을 직속상관 모시듯 했다고 군 관계자들은 말한다. 국방부 국회연락단과 비슷한 조직인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와 국군기무사령부(현 국군방첩사령부), 경찰청 등이 운영하던 연락단은 1988년에 모두 사라졌지만, 국방부 조직만은 세월이 가면서 외려 규모가 커졌다. 영관급이던 단장 계급까지 장군으로 상향됐다. 현재 국방부 국회협력단은 육군 준장이 단장, 국방부 소속 중령이 총괄담당이다. 또 협력관이란 명칭의 육·해·공·합참·방사청·해병대 소속 대령들과 주무관, 위관 장교 등 10명이 국회 사무실에 상주한다. 국회협력단을 운용하는 정부 부처는 국방부가 유일하다. 국방부는 국회와 국방정책 현안에 대한 연락 협조 임무를 수행하는 조직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국회협력단은 법적 근거가 없는 ‘비공식 편제 기구’(임시 조직)로 ‘유령 조직’이나 마찬가지다. 당연히 ‘국회협력단장’이라는 직위도 공식적으로 없는 자리다. 입법기관인 국회가 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정부조직법상 공식 직제와 정원에 포함돼 있지 않은 ‘임시 조직’을 통해 62년 동안 정부 행정부처인 국방부와 업무 협조를 하고 있는 꼴이다. 국방부가 국회협력단장을 국회 소속의 ‘정원 외’ 군 장성으로 운용하고 있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다. 장성 수를 줄이는 게 국방개혁의 한 축이라고 한 정부 설명과도 맞지 않는다. 국방부는 국회협력단실에 군과 관련된 기밀자료를 비치해 의원들이 수시로 열람할 수 있게 하거나 연락관들이 상주하면서 국방위의 요청이 있을 때마다 현안을 실시간으로 보고하는 역할을 해왔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국회협력단이 꼭 필요하다면 법으로 설립 근거를 만들어야 한다. 단장 계급도 장군이어서는 안 된다. 대령 계급으로도 그 역할을 하기에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굳이 현역 장성을 국회 소속으로 하겠다면 법으로 그 근거를 만들고, 미국처럼 국회의장의 안보보좌관 역할이어야 하는 게 맞다. 지금처럼 군부의 ‘로비스트’라든지, 정치권의 ‘민원 해결사’로 인식돼서는 곤란하다. 2008년에 벌어진 사건은 국회 국방위와 국방부가 어떤 관계였는지를 보여준다. 당시 국회 사무처는 국회 국방위원회 요청으로 45년간 유지돼오던 국방부 국회연락단 철수를 요구했다. 결국 대령급 단장을 비롯한 군 장교 6명의 사무실 출입이 봉쇄됐다. 당시 국방위는 국회연락단 철수 요구 배경으로 국방부 장관의 국정감사 답변 내용 및 태도와 국방 현안에 대한 국방부의 무성의를 내세웠다. 또 국방부 국회연락단 자체가 ‘그 어떤 법적 근거가 없는 기구’라는 점을 들었다. 하지만 국회연락단 폐쇄는 당시 국방위 차원에서 요구한 국회연락단장 정모 대령의 장군 진급을 이상희 국방부 장관이 거부한 데 따른 후폭풍이었다. 1년 후 국회 국방위는 ‘국방부 국회연락단’ 부활을 국방부에 요구했다. 국방부 장관이 바뀐 만큼 국회와 국방부의 가교 역할을 잘하도록 하자는 게 취지였다. 그러나 실제 이유는 ‘민원 창구’가 없어진 데 따른 국회 국방위원들의 불편함이 더 컸던 탓이었다. 이후 국방부 국회연락단은 국회협력단이란 이름으로 다시 국회 본청에 자리 잡았다. 협력단장의 계급은 대령급에서 장군으로 높아졌다. 문제의 정 대령도 나중에 준장으로 진급했다. 1년간의 국회연락단 폐쇄는 국회 국방위의 ‘국방부 길들이기’였다. 지난 2월 18일 국회 내에 있는 국방부 국회협력단 사무실 문이 굳게 닫혀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악어와 악어새 국회 국방위와 군의 관계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군사독재 시절에는 국회 국방위원들보다 군 장성들이 더 큰소리를 쳤다. 1986년 3월 21일 벌어졌던 ‘국방위 회식 사건’이라는 전대미문 사건이 그 사례다. 당시 임시국회를 마치고 육군 수뇌부는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국회의원들을 서울 회현동의 요정 ‘회림’으로 초청해 폭탄주 술자리를 가졌다. 참모총장을 비롯한 육군 참석자들 대부분이 하나회 소속인 신군부 쿠데타 주역들이었고, 국방위원 상당수가 여야 중진이었다. 여야 원내총무가 약속 시간에 늦으면서 싸늘하게 시작된 폭탄주 술자리는 국회의원들과 군인들 간의 감정싸움으로 번지면서 난투극으로 변질했다. 말이 난투극이지 많이 다친 사람들은 국회의원이었다. 참석자들은 ‘술자리의 일이니 술자리에서 풀기’로 했으나 정치 사건으로 비화했다. 이후 육군참모차장은 예편 조치됐지만, 공천을 받고 13·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인사참모부장은 좌천 형식을 취했지만, 나중에 중장으로 진급했다. 이 사건은 군부의 권력이 다른 권력보다 우세했던 시절의 한 단면이다. 국회협력단을 바라보는 군내 시선은 그리 곱지 않다. 군 조직과 국회의 소통 창구로 만들어진 국회협력단을 오히려 국방위원과 보좌진들의 ‘민원 창구’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국회협력단 출신 군 간부는 “정치권의 민원의 범위는 넓은 편”이라며 “상당수 민원은 규정상으로 이행이 가능해 절차상 편의를 봐주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난감한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과거 국회연락단은 사실상 국방위원들의 ‘심부름꾼’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국회연락단 장교들은 국방위원이나 보좌관들의 군 골프장 예약까지 대행했다. 심지어 국방위원의 요구로 지역구까지 군 헬기를 타고 갈 수 있도록 절차를 밟아주는 사례도 있었다. 현재 국회협력단은 국방부 장관이 정치권의 눈치를 살피는 창구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국회 국방위와 군 당국이 국회협력단을 통해 ‘악어-악어새’와 같은 공생 관계를 유지하면서 정치군인의 토양이 커졌다는 비판이 나온다. 심지어 국방위원들의 군부대 시찰 방문과 전투기 시승 안내 등을 잘 챙겨야 유능한 국회협력단이라는 말을 듣는다. 국방위원들이 타는 헬기 배치도 잘하고, 추후 선거 홍보물로 사용할 수 있는 사진도 잘 나오도록 해야 한다. 거꾸로 일부 장성급 부대장이 국회협력단에 국회의원들이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를 방문할 수 있도록 부탁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진급을 위해 정치인에게 ‘눈도장’을 찍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군 안팎에서는 이번 불법 계엄 사태를 계기로 법적 근거가 없는 비편제 조직인 국방부 국회협력단을 해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박성진의 국방 B컷
[취재 후] 계엄군은 왜 충정로에도 출동했을까
[취재 후] 계엄군은 왜 충정로에도 출동했을까(2024. 12. 11 06:00)
2024. 12. 11 06:00 정치
김어준의 겸손은힘들다 뉴스공장 화면 캡쳐 ‘2024년에 비상계엄이라니.’ 대부분 비슷한 심경이었을 겁니다. 저 역시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해서 유튜브로 생중계되는 대통령 긴급브리핑을 켰습니다. 아래에 달린 자막에 ‘비상계엄 선포’가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진짜였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던 시간, 회사에 있었습니다. 회사 편집국이 술렁이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큰소리도 나왔습니다. 아마도 회사 인근에 있었을 기자들이 하나둘씩 복귀해 긴급사태 취재에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습니다. 한 시간쯤 지나 이른바 ‘계엄사령부 포고문(제1호)’이라는 게 나왔는데, 제3항은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라고 돼 있었습니다. 자정 무렵 퇴근했는데, 신문사 문을 나서면 군대나 적어도 경찰이라도 와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휑했습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건 뭐지?’라는 생각을 하며 버스정류장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런데 이날 이른바 소위 ‘계엄군’이 출동한 현장은 국회만이 아니었습니다. ‘겸손은힘들다 뉴스공장’을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딴지방송국의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사옥 앞에도 20여 명 이상의 군인이 완전무장하고 들이닥쳤습니다. 이 유튜브 방송을 진행하는 김어준씨 주장에 따르면 자신의 집에도 체포조가 출동했다고 합니다(사진). 이번 ‘계엄 사태’ 취재를 하며 들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밤에 전격적으로 이뤄진 윤석열 비상계엄의 ‘전조’가 낮에 있었다는 겁니다. 서울 영등포에 있는 인터넷 언론사 서울의소리 압수수색입니다. 수십 명의 경찰이 출동한 과잉수사라는 것이 서울의소리 측 주장입니다. 정용인 기자 한 정치평론가는 서울의소리와 김어준 방송의 공통점은 그들이 “국정운영에 심각한 걸림돌이라기보다 ‘여사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원흉”이라고 말합니다. 서울의소리는 대선 전에는 김건희 여사 7시간 녹취록, 그리고 대선 이후에는 김건희 여사 명품 가방 의혹을 제기한 매체입니다. 이 평론가의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김건희 여사의 한을 풀어주기 위한 계엄일 수도 있다. 윤석열의 권력 장악을 위한 친위 쿠데타라기보다 영부인 민원 해결용 쿠데타일 가능성이 있다는 거다. ‘오빠 쟤네 손 봐줘’ 하는.” 당장은 심증에 불과하지만, 국회와 별도로 김어준씨 집이나 충정로 병력 출동을 명령한 자가 누구인지, 실제 그런 체포계획이 있었는지 확인되면 진짜 쿠데타의 ‘몸통’은 밝혀지리라는 것이 이 평론가의 주장입니다. 독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취재 후
[2010 연중기획] 계엄군 총소리, 겁에 질려 울었다(2010. 05. 12 16:18)
2010. 05. 12 16:18 사회
ㆍ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 ㆍ1980년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던 본지 기자가 경험한 5·18 1980년 광주. 기자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그해 5월, 두 가지를 처음으로 알게 됐다. 하나는 최루탄. 이러다가 숨이 막혀 죽는 게 아니냐는 공포감이다. 또 하나는 진짜 총소리다. 같은 TV 프로그램 속 효과음과 ‘진짜’는 달랐다. 무지막지하게 큰 소리였다. 1980년 5·18 직후 광주시 금남로 4가 일대. 계엄군이 거리에 배치돼 있는 가운데 시민들이 오가고 있다. |경향신문 5월 18일은 일요일이었다. 교회를 다녀온 뒤 광주 시내를 쏘다녔다. 이상한 복장의 군인들을 봤다. 대인시장 옆 시민극장에서 본 영화 속 제국군대 같은 복장이었다. 그들이 쓴 투구는 기자가 다니던 초등학교 지붕 밑 다락에 먼지 쌓인 채로 방치된 일본 무사의 투구 같기도 했다. 전투경찰이었다. 충장로 파출소 앞, 한국은행 앞 시내 곳곳에 그들이 배치돼 있었다. 어디선가 대학생들이 뛰어왔다. 그들은 금남로와 중앙로가 마주치는 사거리에 주저앉았다. 100~200명 규모였다. 전남대 앞에서 군인들이 학생들을 닥치는대로 잡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불안과 공포. 전투경찰들이 몰려왔다. 최루탄이 터졌다. 구경하다가 최루탄을 맞은 나는 정신없이 하얀 페퍼포그 안개 속을 헤맸다. 숨이 막히면서 겁이 덜컥 났다. 금남로 옆 금남맨션 앞에서 수돗가를 발견했다. 그곳에서 눈을 닦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기자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광주 중앙국민학교(현 초등학교)였다. 금남로 도청에서 가장 가까운 초등학교다. 이튿날 수업이 제대로 될 수 없었다. 밖에서는 함성과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오전 수업만 마치고 학교 수업은 끝났다.   집에 돌아가야 했지만 집에 가지 않았다. 금남로 2가 쪽에는 대한항공사와 조선일보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대치선은 맞은편 관광호텔 쪽으로 이어졌다. 금남로는 수많은 군중으로 가득 찼다. 최루탄이 터졌다. 사람들은 도망쳤다. 최루탄 연기 사이로 방독면을 쓰고 몽둥이를 든 공수부대가 쫓아왔다. 도망치며 뒤를 돌아보니 10m 쯤 뒤에 한 시민이 머리에 최루탄 깡통(?)을 맞고 쓰러졌다. 쓰러지며 나뒹구는 남자의 머리에서 불꽃이 일었다. 1980년 5월, 금남로에서 본 것 그날 나는 언제까지 거기 있었는지 모른다. 지난해 돌아가신 아버지는 1980년 5월 이야기를 하신 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 그날의 ‘사건’과 관련해 생전에 딱 한 번 들을 기회가 있었다. “학교는 끝났다고 하는데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고… 걱정이 돼 관광호텔 앞 쪽으로 나가 보니 사람들이 장갑차를 불태운다고 지푸라기를 차 밑에 집어넣고 있는데, ‘펑’하고 폭발하니 글쎄 사람들에 섞여 저 놈(기자)이 만세를 부르고 있더라니까.” 금남로는 아수라장이었다. 시멘트로 만들어진 화단은 바리케이트가 됐고, 깨진 보도블록이 나뒹굴었다. 초저녁, 전투경찰들이 우리 집 앞 금남로를 가로질러 앉아 있었다. 지휘관쯤으로 보이는 군인이 동네 사람들에게 귀가를 종용하고 있었다. 나는 물었다. “군인 아저씨들이 왜 여기에 있어요?” 그들은 “서울에서 연세·고려대생들이 데모하러 내려왔다, 데모를 막으러 출동한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통금은 오후 8시부터였다. MBC 건물이 불탄 것은 5월 20일 밤이었다. 당시 MBC에서는 해인사 팔만대장경과 관련한 다큐멘터리가 방송 중이었다. 갑자기 화면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은 고층빌딩으로 가로막혀 있지만 당시 기자가 다니던 초등학교 위쪽에 자리 잡았던 MBC 건물이 우리 집 2층에서 보였다. “MBC가 불타고 있다”는 형의 말에 2층으로 올라갔다. MBC 건물은 화염에 휩싸여 밤하늘을 훤히 비추고 있었다. 금남로 변 골목 끝에 위치하고 있어 우리 집은 많은 사람의 피란처였다. 이름 모를 수많은 시민이 우리 집으로 들어와 몸도 씻고 밥도 먹고 피신도 했다. 10여 년 지난 1990년대 초에 할머니에게 장롱 속 옷가지가 뭐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광주사태’ 때 사람들이 갈아입고 간 옷”이라고 말했다. 막힌 골목이었지만 담을 두 개 정도 넘으면 광주공용터미널 쪽으로 빠져나갈 수가 있었다. 5·18 기간 내내 나는 슬쩍 들떠 있었다. 당시 우리 집은 개축공사를 하고 있었다. 그때 일하던 인부들 및 공수부대에게 쫓겨 들어온 시민 몇 명과 함께 지하실에 숨어 있기도 했다. 광주시 금남로에서 시민군이 탄 버스들이 이동하고 있다. 가운데 오른편으로 멀리 보이는 9층짜리 건물이 당시 기자의 집 맞은편에 있던 광주중앙교회다. |경향신문 5월 21일, 아버지는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로부터 10여 일을 학교에 가지 않았다.(그런데도 개근상을 받았다) 어머니는 양동이 하나 가득 쇠갈비를 받아 왔다. ‘우래옥’ 음식점에서 못 팔게 됐다는 걸 싸게 사 왔다는 것이다. 계엄군과의 격렬한 총격전이 있던 날에 우리 삼 형제는 집에서 놀았다. 5월 22일부터는 비교적 자유롭게 나갈 수 있었다. 아버지는 형제들을 자전거에 태워 시내에 나갔다. 초여름에 가까운 날씨였다. 도청 앞 상무관에는 시신을 담은 관이 있었다.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열린 문 너머로 눈에 들어온 푸르뎅뎅한 시신의 발들이 기억난다. 도청 앞을 지나 노동청을 거쳐 불에 탄 광주세무서까지 돌아본 게 그날의 여정이었다. 라디오에서는 “광주 일원의 사태는 고정간첩과 불순분자, 깡패들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는 방송만 반복해 나왔다. 그런데 배경음악이 ‘훌라송’의 원곡인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튿날 즈음에 대인시장 인근에서 군용트럭에 탄 시민군들과 조우했다. 그때 KBS 뉴스에 나온 사람을 봤다. “TV에 나온 사람이다”라고 소리쳤다.(나중에 에서 그 시민군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회고담을 읽은 적이 있다. 최근 다시 찾아봤지만 찾진 못했다) 진압되던 새벽에 들은 총소리 계엄군 헬리콥터는 부단히 광주 상공을 선회하며 전단을 뿌렸다. ‘폭도들의 행패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계엄군은 부득이하게 소탕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었다. 5월 26일 저녁. “광주 시민 여러분, 계엄군이 쳐들어 오고 있습니다.” 확성기를 장착한 트럭이 금남로 인근을 돌아다녔다. 나중에 학교에 돌아가 만난 아이들은 ‘그 가두방송을 한 여자가 북한 간첩’이라는 소문을 전했다. 가두방송의 주인공은 전옥주씨였고, 물론 간첩은 아니었다. 그리고 진압. 새벽에 나는 잠에서 깼다. 집안 사람들은 모두 잠에 들지 못하고 있었다.   모두 불도 켜지 않고 앉아 있었다. 우리 집에서는 광주 중앙교회 9층 건물이 올려다보였다. 달 밝은 밤이었다. 7~8층쯤에서 번쩍번쩍 불꽃이 일었다. 진압당하는 순간이다. 총소리는 거기서 들렸다. 총소리는 상상 이상으로 컸다.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나는 겁에 질려 울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할머니는 “괜찮다”며 등을 쓰다듬어 줬다.이튿날 아버지는 마당에도 못 나가게 했다. 부엌 창문으로 내다봤다. 집 뒤편 남선빌딩 8층 꼭대기는 계엄군들이 시내를 향해 총을 겨눈 채 경계를 서고 있었다. 학교는 정상화됐다. 몇몇 아이들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금남로 주변의 상점들은 오랫동안 닫힌 채 방치된 곳이 많았다. 많은 사람이 광주를 떠났다. 긴 침묵이었다.
2010 연중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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