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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총 340 건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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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고구려 태자가 신라왕에게 ‘무릎 꿇어라’ 했다”…제2광개토대왕비 ‘8자’의 비밀
2024. 11. 19 05:00 문화
... 교수가 글을 토대로 충주비의 전체 내용을 요약해보자. 무릎을 꿇어라‘궤배(?拜·무릎 꿇는 인사법)’는 고구려식 예법(<삼국지>)이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 따르면 396년 58성 700촌을 빼앗긴...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국내 유일 고구려 비석 ‘충주 고구려비’, 광개토왕이 세웠나?
2024. 10. 21 14:36 문화|문화|문화
... 존재, ‘영락7년’이라는 판독의 경위, 후속 연구성과 등을 소개했다. 고 연구위원은 “현재 충주 고구려비 판독에서 가장 큰 문제는 제액의 유무”라며 “새로운 금석문 연구방법인 과학적 조사, 선학들의...
광개토대왕릉비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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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조우관’ 쓴 아프로시압 사절, “연개소문이 파견한 고구려 밀사가 맞다”
2024. 04. 30 05:00 문화
... 루트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학계에 새로운 논쟁점을 던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고구려-서역’ 대결각저총, 무용총, 장천1호분의 씨름 및 수박희 장면 가운데는 고구려-서역인의...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벽화 속 ‘빨간 립스틱의 화장남과 화장녀’…“고구려인은 패션피플”
2024. 01. 23 05:00 문화
..., 옥도리 벽화분처럼 상현달 모양도 그렸을 수 있다. 고구려 독자적인 화장법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남성들이 얼굴에 하얀 분을 바르고 입술에 ‘빨간 립스틱’까지...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스포츠경향(총 42 건 검색)

김무열, 고구려의 최고 지략가로 변신
2024. 08. 02 10:30 연예
티빙 제공 김무열이 왕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파헤친다. 오는 8월 29일 첫 공개될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우씨왕후’는 갑작스러운 왕의 죽음으로 왕위를 노리는 왕자들과 권력을 잡으려는 다섯 부족의 표적이 된 우씨왕후가 24시간 안에 새로운 왕을 세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추격 액션 사극이다. 극 중 김무열은 고구려의 최고 관직이자 제가회의의 수장인 국상 을파소 역을 맡았다. 을파소는 고국천왕 고남무(지창욱 분)의 명으로 귀족들을 이끄는 국상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지략과 처세술은 물론 각 부족들 사이 정치적 흐름을 읽는데도 탁월하여 왕이 오랜 전쟁으로 자리를 비울 때에도 안정적으로 국정을 이끌고 있다.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왕이 갑작스레 사망하자 을파소는 부족간의 왕권 쟁탈을 막기 위해 왕후 우희(전종서 분)에게 취수혼을 제안한다. 이후 굳건하게 궁을 지키며 왕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찾아내고 왕후의 가장 큰 지원군이 된다. 공개된 사진 속에는 고구려를 이끄는 국상의 자리에 오른 을파소의 면면들이 담겨 있다. 장기판 위에 늘어선 말을 바라보며 고심에 빠진 을파소의 눈빛에서는 나라를 이끄는 국상의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과연 을파소가 왕의 죽음으로 인해 벌어지는 왕위 쟁탈의 혼란한 정세를 수습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그런가 하면 고구려의 국상 을파소로 지략 싸움을 선보일 배우 김무열의 열연도 기대되고 있다. 영화와 드라마, 뮤지컬, 연극을 넘나드는 폭 넓은 연기 스펙트럼으로 매 작품 강렬한 인상을 남겨 온 김무열은 ‘우씨왕후’ 속 을파소 캐릭터를 통해 인물의 복잡다단한 심리를 그려내며 왕위 쟁탈전에 긴장감을 불어넣을 예정이다. 국상 김무열의 치열한 심리전이 펼쳐질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우씨왕후’는 오는 8월 29일 티빙에서 첫 공개된다.
고구려 후손’ 일본 멤버, 한국데뷔 앞두다···에볼루션 마유 가문 눈길
2023. 09. 19 15:25 연예
고구려인 후손인 코우마(고마)씨족의 일원으로 한국 데뷔를 앞둔 마유. 모드하우스 제공 고구려 후손 일본 멤버가 한국 데뷔를 앞두고 있어 눈길을 끈다. 연예기획사 모드하우스는 최근 그룹 트리플S(tripleS) 유닛그룹 에볼루션(EVOLution)의 멤버로 데뷔하는 마유(코우마 마유)의 프로필을 공개했다. 2002년 5월 일본 군마현 출신인 마유는 좋아하는 음식을 한글로 삼겹살, 보쌈, 치킨 등을 꼽으며 한국 문화에도 익숙한 모습을 보였다. 오는 10월 11일 발매를 앞둔 미데뷔 멤버에게 국내 누리꾼이 관심을 갖는 이유는 그가 가진 성씨 때문이다. 마유의 이름인 코우마 마유(髙麗 真友)를 한자 독음을 풀이할 경우 ‘고려’성씨를 갖고 있다. 한민족 왕조인 고구려나 고려와 한자가 같다. 코우마(고마)씨는 고구려 왕족 고약광(고마노 ?Y코우)를 씨조로 하는 성씨로 668년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뒤 왜국으로 망명한 고구려인을 기초로 한다. 속일본기에 따르면 고약광은 고구려 마지막 왕인 보장왕의 아들이다. 고약광은 고구려 멸망 직전인 666년 왜국에 파견한 사신단의 부사 자격으로 열도 땅을 밟았으나 고구려가 멸망하자 귀국할 기회를 잃었다. 고약광에게 703년 야마토(大和)정권은 왕(王)이라는 성(姓)을 하사했다. 고구려 망명 후 일본 조정이 마련해 주었다는 고구려 유민촌을 다스린 고려약광(고약광)을 모시는 신사(왼쪽)과 도쿄 근교 사이타마현에 위치한 고약광을 모시는 신사. 경향신문 자료사진 716년 고구려인 1천799명이 무사시노(武藏野) 지방에 이주하면서 고려군(郡)이 새로 설치되자 고약광은 초대군장으로 부임한다. 이후에도 야마토 조정은 여러 차례 고약광을 비롯한 고구려인들에게 한반도 왕족의 자손을 뜻하는 고마노 모니키시(高麗王, 고려왕)의 가바네(성씨)를 내렸고 이들을 극진히 대우했다. 마유가 태어난 군마현은 코우마씨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마유는 군마현에 위치한 토미오카 시립 히가시 중학교를 졸업하며 유년 생활을 보냈다. 이외에도 마유는 일본 명문 대학교 메이지대학교 경제학과 학도인 사실이 알려져 주목받기도 했다. 현재는 휴학 상태다. 마유가 속한 에볼루션은 오는 10월 11일 쇼케이스 무대를 진행하고 본격적인 한국 활동을 펼친다.
박명수, 동북공정에 분노 “고구려로 돌아가자”
2022. 02. 11 15:11 연예
방송인 박명수가 중국의 한복공정에 불편함을 드려내며 뼈 있는 농담을 던졌다. 이선명 기자 57km@kyunghyang.com방송인 박명수가 중국의 동북공정에 분노를 드러냈다. 박명수는 11일 방송된 KBS쿨FM ‘박명수의 라디오쇼’에 출연해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식 당시 조선족 소녀가 한복을 입고 나온 것을 다뤘다. 이는 곧 ‘한복공정’ 문제로 불거졌다. 박명수는 “우리 문화가 세계적 문화로 발돋움하고 있지 않나. 답답하다”라며 “이걸 백날 얘기해봐야. 고구려의 기상이 떠오른다. 옛날엔 얼마나 많은 영토를 넓혔나. 아쉽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타임머신이 있으면 고구려로 가고 싶다”며 “이런 얘기하는 것도 피곤하고 짜증난다”고 말했다. 또한 “시기적절한 대응이 필요하다. 예전 걸 가지고 그냥 우길 것이 아니라 우리 문화가 한류로 굉장이 뜨고 있으니 여기에 ‘한복’ 등을 심어 한국 문화임을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무우수갤러리 ‘고구려를 그리다’展
2021. 06. 23 21:40 생활
서울 인사동 무우수갤러리에서는 지난 16일부터 오는 27일까지 이태호 교수의 개인전이 열린다. 이태호 교수의 ‘고구려를 그리다’ 전은 화가 강요배 등과 1998년 8월과 2006년 5월 평양지역 주요 벽화고분 탐사와 남북공동 벽화고분 조사작업에 참여하였던 감동을 되살려 면지에 그린 수묵담채화 35점을 2부로 나누어 구성하였다. 1부는 고구려 진파리 1호 고분의 소나무와 강서대묘의 산수도, 강서중묘의 청룡 백호 주작과 호남리 사신총의 현무 등 사신도와 상상의 도상들을 중심으로 고구려 고분벽화를 모사한 작품들이다. 진파리 고분의 연화나 인동초 문양은 당시 백제의 무녕왕릉 전돌과 닮은꼴이 많아서 동시대 고구려와 백제의 문양을 비교해 보는 기회도 될 것이다.제2부는 고려의 산수표현이나 조선 청화백자의 봉황무늬, 목어 등 고구려 전통을 이은 이미지를 형상화한 작품들을 중심으로 구성하였으며, 평양과 길림 집안의 옛 고구려 땅을 답사하며 만난 무덤 풍경화나 백두산을 스케치한 그림들도 함께 전시하였다. 아울러 출품된 작품들은 순면지에 고구려 벽화와 유사한 수묵과 석채(石彩) 안료를 써서 고구려 전통의 색감과 멋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다양한 형태의 고분 벽화를 남겼다. 고구려 고분 벽화는 고구려 사람들의 생활, 문화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소중한 사료이자 예술 작품으로 세계적인 문화 유산이다. 고구려 고분 벽화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무용총의 고분 벽화는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한 문화 유산이며 ‘무용총 수렵도’는 고구려인의 역동적인 사냥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고구려의 수도였던 현 중국의 집안 지역과 평양 인근, 황해도 일대에 많이 분포하고 있다. 이태호 교수는 2019년 10월 고구려 고분이 산재한 중국 길림지역을 답사하고 ‘고구려의 황홀, 디카에 담다’(덕주출판사, 2020.)라는 저서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전시회는 우리 민족의 기상이 서려 있는 고구려 고분 벽화를 통해서 민족 문화의 원형을 찾고 우리나라 색채의 원류를 탐구하신 이태호 교수님의 열정과 장엄한 고구려 문화의 가치를 느끼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미술사가인 이태호 교수는 전남대학교 교수와 박물관장 등을 역임하였고 현재 서울산수연구소 소장 및 명지대학교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태호 교수는 한국 미술사를 정리한 학자로서 명성이 더 뛰어나지만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출신답게 왕성한 작품 활동을 통해 화가로서의 길도 꾸준히 걷고 있다. ‘고구려를 그리다’ 전은 ‘서울그림전’(노랑, 2017), ‘봄에 만난 대만의 사계절’ 답사그림전(안암동 카페 봄, 2018)에 이은 세 번째 개인전이다. 전시회는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 방역 지침을 준수하며 관람객이 안전하게 전시를 관람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관람비는 무료다.
무우수갤러리

주간경향(총 18 건 검색)

[이기환의 Hi-story](52)중국사에서 고구려는 ‘딱 한줄’ 기록됐다(2022. 09. 30 11:06)
2022. 09. 30 11:06 문화/과학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열리고 있는 한·중·일 청동기 전시회(7월 26일~10월 9일)가 물의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명색이 한중 수교 30주년을 기념하는 친선 특별전인데요. 국립중앙박물관이 제공한 한국사 연표에서 ‘고구려와 발해사’를 삭제한 연표를 전시장에 내걸었답니다. 2019년 편찬돼 그해 가을학기부터 6개 지역에서 시범 운영한 뒤 올해(2022년) 가을학기부터 전국의 고교 1학년 학생들이 배우게 될 중국의 역사국정교과서. 중국사()와 세계사() 등 두 권이다. 그런데 고구려사는 세계사에서는 빠져 있고 중국사에서도 “수나라가 3차례나 고려(고구려)를 정벌했다”는 내용으로 딱 한줄 언급된다. / 권은주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제공 국립중앙박물관이 특별전 개막 후 50여일이나 지난 9월 중순, 그것도 언론보도에서 알게 됐다니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물론 이번 사태의 일차적 책임은 ‘연표만 보내놓고 확인하지 않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져야 하겠죠. 그러나 박물관만 책임지면 끝나는 걸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한국 측이 연표 문제를 제기하자 중국 측은 어떻게 대응했습니까. 수정할 생각은커녕 문제가 된 역사 연표를 치워버렸습니다.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고구려와 발해=중국사’가 명백한데 뭔가 외교문제로 비화할 것 같고…. 그렇다고 한국사로 인정할 수도 없으니 아예 빼버린 겁니다. 중국의 역사 이기주의 ‘동북공정’(2002~ 2007)이라는 낯익은 용어가 떠오르는군요. 2013년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집권 이후 바로 이 동북공정 등에서 축적된 결과물을 토대로 이른바 ‘중국몽(中國夢)’ 실현을 위한 자국 중심의 역사를 창조해냅니다. 우선 중국은 가장 광활했던 청나라 시대와 현재의 영토를 중첩해 중국사를 범주화합니다. 즉 연해주와 타이완, 남해도서까지 아우른다는 겁니다. 참으로 지독한 이기주의 아닙니까. ‘지금의 중국 땅’은 예전에 누가 차지했든지 모두 ‘중국 땅’이다, 예전에 ‘한때 중국 땅’이었던 곳은 지금 누가 차지하고 있건 간에 ‘중국 땅’이다, 뭐 이런 겁니다. 이런 해괴한 논리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 한때 만주 땅을 호령한 고구려와 발해는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국정교과서를 편찬한 이유 이번 특별전 사태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동북공정’의 연구성과가 교과서에 실리고 있고요. 고구려·발해 유적지의 표지판이나 박물관 안내문, 대학 교재 및 교양서 등에까지 수록되고 있습니다. 이른바 ‘동북공정’은 전문학자들의 영역을 벗어나 중국 학생 및 일반인의 상식을 바꾸어가는 단계에 이르고 있습니다. 교과서는 어떨까요. 2017년 시진핑 국가주석의 집권 제2기를 맞아 국정교과서 편찬이 본격 추진됩니다. 역사교과서를 편찬하는 기준은 ‘현재 중국의 영토(분쟁지 포함) 안정, 민족통합, 체제유지’라고 못 박았습니다. ‘세계로 눈을 돌려 인류 운명 공동체 건설을 추진한다’는 기준도 주목되는데요. 중국 중심의 역사 서술로 ‘G2’를 넘어 ‘G1 국가로서 신(新)세계 질서 구축에 나서겠다’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2019년 편찬한 고등학교 국정교과서 중 중국사(<중외역사강요·상>)는 그해 신(가을) 학기에 베이징·상하이(上海) 등 6개 지역의 1학년 학생들에게 배포했고요. 세계사(<중외역사강요·하>)는 2020년 봄학기부터 가르쳤습니다. 올 가을학기부터는 중국 전역의 고교 1학년생들이 새로 편찬된 국정 역사교과서를 배우게 됩니다. 엿가락처럼 늘인 만리장성 교과서에 실린 한국 관련 내용을 한번 볼까요. 중국사(<중외역사강요·상>)에 수록된 ‘전국시대’와 ‘진나라 시대’의 형세도부터 심상치 않습니다. 연·진의 장성이 압록강을 넘어 대령강과 청천강 부근까지 연결돼 있습니다. 한반도 서북부 일부를 중국 영토로 표시하고 있고요. 맞는 얘기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기>는 “진나라가 쌓은 장성의 동쪽 끝이 요동(遼東·랴오둥)”이라 했습니다. <사기>의 주석서인 <사기정의>는 “진시황제가 장성을 쌓아 요하(遼東·랴오허)에 이르렀다”고 풀이했습니다. 진나라가 쌓은 장성이 랴오허(요하)를 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랴오허인 푸신(阜新·부신)에서 보이는 장성의 흔적이 랴오둥(요동)부터는 찾을 수 없습니다. 또 중국 지도는 압록강을 건너 대령강·청천강까지 장성을 그려놓았는데요. 북한의 대령강에서 확인된 성의 흔적(120㎞)은 중국의 침략을 막기 위해 쌓은 고려시대 방어성입니다. 북쪽을 기준으로 강 남쪽에 조성했거든요. 고구려는 세계사에서는 단 한자도 없었고, 중국사에서는 딱 한번 언급됐다. 사라져버린 고조선·고구려·백제 역사 또 고구려·백제·신라·발해사는 외국 역사니까 당연히 세계사(<중외역사강요·하>)에 실려 있어야겠죠. 하지만 고구려와 발해, 백제는 당연히 들어가 있어야 할 세계사에 포함돼 있지 않습니다. 왜냐면 중국의 세계사에서 한국의 역사를 ‘7세기 말 통일신라’부터 서술했기 때문이죠. 짐작은 갑니다. 삼국시대와 그 이전부터 기술할 경우 논란을 일으킬 고구려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부담스러웠겠죠. 그래서 아예 삼국시대와 그 이전의 역사를 통째로 빼버렸습니다. 그와 함께 고조선과 백제의 역사도 사라진 거고요. 중국은 중국의 변방 정권으로 치부하던 고구려와 발해를 처음부터 세계사에 넣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중국사(<중외역사강요·상>)에 고구려·발해가 들어갔겠네요. 고구려의 경우 “수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했다”는 딱 한줄만 기술했습니다. 중국은 고구려 역사를 중국사(상권)와 세계사(하권)에서 사실상 생략해버린 셈이죠. 역시 논란을 피하기 위함이었겠죠. 교묘한 장치를 설치해놓았습니다. ‘삼국 정립 형세도’에 중국 역사 영토 범위 안에 고구려의 영역을 포함시켰습니다. 물론 국명은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또 고구려의 입장에서 수나라의 침공은 명백한 침략전쟁이었는데요. 중국사 교과서는 굳이 ‘정벌’이라는 용어를 썼습니다. 중국 교과서를 분석한 권은주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이는 지방정권인 고구려가 중앙정부(수나라)에 반기를 들어 징벌했다는 차원에서 정벌의 용어를 쓴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고구려·발해사가 중국사가 아닌 증거들 중국사의 서술은 말도 안 됩니다. 3~5세기 역사서인 <삼국지>와 <후한서> 등을 보십시오. 부여·고구려·마한·진한·변한 등의 역사가 ‘동이전’에 포함돼 있습니다. 당나라 때 지은 <주서>, <수서>, <남사>, <북사> 등도 마찬가지로 ‘이역열전’이나 ‘동이전’에 넣었습니다. 고구려·백제·신라 등이 중국 역사라면 왜 당나라 사가들이 이민족의 역사로 표현했을까요. 또 <광개토대왕비문>의 ‘천제지자(天帝之子)’ 등은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고구려의 입장에서 수나라의 침공은 명백한 침략전쟁이었다. 그러나 중국사 교과서는 굳이 ‘정벌’이라는 용어를 썼다. 지방정권인 고구려가 중앙정부(수나라)에 반기를 들거나 잘못을 저질러 정벌했다는 의미다. /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고구려는 ‘신라’를 ‘동이’(東夷·충주 고구려비문)로, 백제를 ‘노객(신하)’(광개토대왕비문)으로 삼는 등 천자의 역할을 자처했습니다. 광개토대왕(재위 391~412)과 장수왕(재위 413~491)은 ‘영락(永樂)’과 ‘연가(延嘉)’라는 독자연호를 사용했고요. 그럼 발해사는 어떻게 처리했을까요. 고구려와 달리 발해는 확실하게 중국의 소수지방정권으로 서술했습니다. 중국사(<중외역사강요·상)는 “당나라가 동북의 말갈족 속말부의 수령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했다”고 기술했습니다. 대조영(?~719)의 출신을 속말부 수령으로 본 것은 “속말말갈로 고구려에 붙은 자”(<신당서>) 등의 기록에 근거합니다. <구당서>는 ‘고구려의 별종(別種)’이라 했습니다. <삼국유사> 등 한국 사서는 “고구려의 옛 장수”라고 했습니다. 여러 학설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대조영의 출신이 아닙니다. 고구려 유민과 고구려계 말갈세력이 당의 지배에 저항한 고구려 부흥운동의 결과로 건국한 독립국이 바로 발해라는 사실이 핵심입니다. 당대의 인물인 신라 최치원(857~?)이 당나라 예부상서에게 보낸 상소문을 볼까요. “고구려 잔여세력이 나타나… 옛날의 고구려가 지금의 발해로 바뀌었습니다.”(<고운집>) 9세기 인물인 최치원이 다른 나라도 아닌 당나라 예부상서에게 ‘발해=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고 명백하게 밝히고 있네요.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자인 까닭 ‘한국사의 시작을 7세기 말 통일신라’로 왜곡한 세계사(<중외역사강요·하>)를 더 볼까요. 10세기 초 ‘신라인’인 왕건이 고려왕조를 세웠다는 부분이 특히 눈에 띕니다. 이것도 어불성설입니다. 993년(성종 12) 거란의 소손녕(생몰년 미상)이 고려를 침공하면서 명분으로 내세운 게 있죠. 중국사()에서 중국 전국시대와 진나라 시대 형세도가 표시된 만리장성. 요동을 넘어 한반도 서북쪽에 이르고 있다. /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너희(고려)가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한 거란을 침탈하기 때문에 정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고려의 외교관인 서희(942~998)가 뭐라 했습니까.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다. 나라 이름을 봐라. 고구려를 계승했다 해서 고려라 하지 않았더냐”고 반문했죠. 서희는 “평양에 도읍(서경)을 둔 것도 그 때문”이라고 매조지했습니다. 거란 소손녕은 ‘고려=고구려의 계승자’라는 논리에 막혀 꼼짝도 못 하고 이른바 강동 6주까지 내주고 말죠.(<고려사절요>) 한나라와의 투쟁 끝에 건국한 고구려 이번에 문제가 된 박물관 전시도 교과서의 인식과 다르지 않습니다. 중국은 2010년대 중반부터 이른바 ‘중화문명 선전공정’을 시작했는데요. 그동안 진행해온 ‘역사 공정’의 결과물을 다양한 방식으로 중국 국민과 외국인들에게 전파했습니다. 저는 2014년 광개토대왕비와 붙어 있는 ‘고구려 28대왕 전시관’ 옆에 세워놓은 안내판을 보고 기절할 뻔했는데요. 안내판에는 “고구려는 조기 중국 북방의 소수민족정권이고, 668년 당나라에서 일어난 ‘국내전쟁’으로 고구려 정권은 철저히 소멸됐다”고 했습니다. 마침 김현숙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중국 동북 지역박물관의 고구려 전시내용(2017~2019)을 분석한 논문(‘박물관 전시를 통해 본 중국의 고구려사 인식’, ‘동북아역사포커스’ 2022년 가을호)을 발표했더군요. 조사대상은 지안(集安)·톄링(鐵嶺)·랴오닝성(遼寧省)박물관 등이었는데요. 눈에 띄는 부분만 추려볼까요. 고구려가 현도군(한사군) 경역 안에서 건국했고, 그 관할을 받았다는 것을 강조했다는군요. 이는 사실과 부합하지 않습니다. <삼국지> 등은 “고구려가 중국 현도군 경계에 성을 쌓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고구려와 중국(현도군)이 별개의 영역이었다는 얘기입니다. 또 <삼국사기> 등을 보면 고구려가 현도군과의 가열찬 투쟁을 거쳐 건국하고 성장한 나라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 측 입장에서 논란을 야기할 고구려사를 빼려다 보니 삼국시대와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가 통째로 생략됐다. /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또 “고구려 멸망 이후 그 유민이 중국 각지로 옮겨가 그 지역 주민들과 융합했다”는 설명(지안박물관)이 있는데요. 고구려가 재기하지 못하도록 3만8000호를 강제 이주시킨 기록(<삼국사기> 등)을 마치 자발적으로 옮겨간 것처럼 견강부회했네요. 고구려 유민들이 보덕국을 세우고 또 발해와 고려를 건국하는 등 고구려의 계승을 실현한 사실을 외면한 거죠. 유물 전시도 눈에 거슬렸는데요. 고구려의 대표유물인 ‘네 귀 달린 항아리’(사이옹·四耳瓮) 대신 중국 토기인 ‘세 발 달린 토기’(삼족기)를 전시하거나, 고구려 벽화인 ‘무용총’의 사냥 그림과 함께 한나라 ‘수렵도’를 게시하는 행태를 보입니다. 고구려 전문이라는 지안박물관을 비롯한 박물관들은 고구려의 역사적 비중과 영역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전시를 기획했습니다. 심지어 톄링박물관은 고구려와 조선족이 서로 전혀 관계가 없다는 내용을 생뚱맞게 별도 패널로 만들어 게시해 놓았답니다. 고구려-한국-조선족의 연관성을 차단하려는 의도가 분명하죠. 어떻습니까. 짧게는 2002년 동북공정이 시작된 이후 20년 동안 진행돼온 각종 ‘공정’을 보면 가슴이 답답해지죠. 최근 일어난 연표 누락 문제가 ‘박물관장의 사과’ 따위로 마무리될 사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죠. 중국이 자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만들려고 역사를 이른바 ‘중국몽’ 실현의 도구로 삼고 있으니까요. 누가 어떤 대책을 세우고, 어떤 조치를 취한다 해도 귀에 담지 않을 겁니다. 그냥 듣는 시늉만 하겠죠. 그럼 또 제풀에 지쳐 넘어갈 거고요. 그사이 ‘중국 인민’은 교과서와 박물관에서 배운 대로 통일적 다민족국가론, 애국주의, 중화민족론 등에 젖어들겠죠. 그사이 고조선·고구려·부여·발해는 중국사의 일부가 되겠고요. 그렇게 되도록 가만두어야 할까요.
이기환의 Hi-story
[이기환의 Hi-story](51)북한군과 고구려 기마병의 공통점, 연천 호로고루(2022. 09. 23 14:25)
2022. 09. 23 14:25 문화/과학
지난 주말에 경기 연천 장남면 호로고루 주변에 심어놓은 해바라기를 실컷 보고 돌아왔습니다. 6만송이의 해바라기밭에서 연신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는 관람객들로 북적댔습니다. 오는 10월 4일까지 열리는 행사가 ‘통일바라기 축제’인데요. ‘해만 바라보고 돈다’는 해바라기를 따서 ‘통일바라기’, 즉 ‘통일을 바라는 축제’라 한 겁니다. 6만송이 해바라기를 심어놓고 통일바라기 축제를 벌이고 있는 경기 연천 장남 호로고루. 호로고루는 5~6세기 고구려군의 최전방 사령부로 추정된다. /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참으로 절묘한 작명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다른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연천이 북한과의 접경지역이니까, 판에 박힌 발상에서 ‘통일’ 자를 붙인 것이 아니냐고요. 해바라기와 통일바라기 축제 호로고루가 어떤 곳인지 알게 되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호로고루(瓠瀘古壘)’, 그 이름부터가 낯설죠. ‘호로’는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임진강의 구간 이름인 ‘호로하’에서 따왔고요. ‘고루’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던 ‘옛 보루’를 뜻하죠. 보루가 있었다면 엄청난 요충지였겠네요. 임진강과 한탄강은 강원 평강 오리산·검불랑 등에서 분출한 용암이 흘러내려 만들어진 하천인데요. 용암이 굳어져 생긴 현무암 지대를 따라 형성된 높이 10m가 넘는 두 강의 단애가 상류부터 끊임없이 펼쳐져 내려옵니다. 그중 두 강의 합류지점(연천 전곡 도감포), 칠중하(파주 적성 구간), 호로하(연천 장남면 구간) 등은 깎아지른 단애가 없고 수심마저 얕아 쉽게 건널 수 있는 몇 안 되는 지점입니다. 이중 호로하가 도보로 건널 수 있는 마지막 구간이었습니다. 이 호로하에서 약 500m 하류 쪽으로 가면 한국전쟁 이전까지 번성했던 고랑포구가 있었습니다. 서해안에서 거슬러 올라온 조기·새우·소금 배들이 파주·연천의 대표적인 특산물이던 콩·땔감·곡물 등과 교역한 포구였죠. 그러니 고랑포~임진강 하류~서해안 구간은 수심이 깊어 사람이, 혹은 기마부대나 전차부대가 건널 수 없죠. 북한군의 남침로, 무장공비 침투로 1950년 6월 25일 남침한 북한군의 주력 전차부대가 개성~문산이 아니라 20㎞나 우회한 곳이 호로하와 칠중하 쪽 임진강 구간이었습니다. 1968년 북한군 특수부대의 1·12사태 침투로가 이곳에서 멀지 않고요. 1974년 발견된 고랑포(제1) 땅굴도 8㎞가량 북동쪽에 있습니다. 장마철이 아니면 수심이 무릎까지밖에 올라가지 않는 곳이니 호로고루 부근을 침투로(남하로)로 삼은 겁니다. 예전에는 어땠을까요. 지형이 바뀌지 않은 이상 마찬가지였겠죠. 이곳은 삼국시대부터 한반도를 경영하려면 반드시 차지해야 할 요충지였습니다. 호로하, 즉 호로고루 부근은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누린 백제의 영역이었을 겁니다. 최근 호로고루 인근의 파주 적성 육계토성이 3세기 후반~4세기 전반에 축조된 백제성이라는 발굴성과가 나왔는데요. 생긴 것도 한성백제의 도성인 풍납토성과 닮아서 ‘리틀 풍납토성’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개풍 장학리(북한)~연천 횡산리~삼곶리~삼거리~우정리 1·2호분~동이리~학곡리 적석총 등 기원후 1~2세기에 축조된 백제 적석총이 8기나 확인됐습니다. 그러다 광개토대왕(재위 391~412)부터 이 땅은 고구려 영역으로 바뀌죠. ‘광개토대왕비문’에 따르면 396년(광개토대왕 5) 남침작전을 벌인 고구려가 58성 700촌을 빼앗고 ‘백제왕을 영원한 노객(奴客·신하)으로 삼은 뒤’ 돌아왔습니다. 발굴조사 당시의 호로고루 항공사진. 임진강의 수직 단애에 접해 성을 조성했으며 삼면이 급경사와 절벽으로 이뤄져 천혜의 요새로 기능했다. / 토지주택박물관 제공 고구려는 천자, 백제·신라는 제후? <삼국사기> 등에는 기록되지 않았는데요. 475년(고구려 장수왕 63·백제 개로왕 21) 장수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의 남침로도 바로 이 호로하와 칠중하 쪽이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북한군이 그랬듯 호로고루 쪽이야말로 고구려 주력인 기마병 부대가 건널 수 있는 여울목이었을 테니까요. 고구려군은 이후 동두천~의정부~상계동 등을 거쳐 아차산에 이르렀고 한강을 건너 한성백제의 도성인 풍납토성을 7일간 공격한 끝에 함락시켰을 겁니다. 그 루트를 따라 조성된 38곳의 고구려 보루 및 성이 고구려군의 남하 과정을 웅변해주고 있습니다. 이 고구려 성과 보루는 대부분 둘레 400m 안팎의 소규모인데요. 여기서 고구려의 점령지 통치방식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행정관을 둬 점령지역을 다스리고, 조세를 받는 형식이 아니라 전진·후퇴의 루트만을 확보했다는 겁니다. 이 대목에서 “(396년) 광개토대왕이… 백제왕을 영원한 노객으로 삼고 돌아왔다”는 ‘광개토대왕비문’이 눈에 띄는데요. 또 “475년 한성 함락 후 백제 문주왕(재위 475~477)이 신라가 보낸 원군 1만명과 함께 돌아와 보니 고구려군이 이미 물러갔다”는 <삼국사기> ‘문주왕’조도 주목거리입니다. 5세기 말에 작성된 충주 고구려비문에 “고려 태왕이 신라 매금(왕)과 (더불어) 세세토록 형제와 같이(如兄如弟)… 화합한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렇게 5~6세기 전반 남진정책을 펼친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노객’ 혹은 ‘형제국’으로 삼은 뒤 장기간 점령하지 않고 돌아갔다는 것이 심상치 않답니다. 이 때문에 만주벌판을 호령한 고구려가 스스로 황제국을 칭하면서 한반도 남부의 백제·신라까지 조공국가, 즉 제후국으로 삼았다는 유력한 해석이 등장한 겁니다. 대식가였던 고구려군의 ‘짬밥’ 4세기 말까지 백제, 그리고 5~6세기 중반까지 고구려의 ‘리즈 시절’을 상징하던 임진강 유역은 553년(신라 진흥왕 14) 다시 격동의 시기를 맞게 됩니다. 한강유역을 점령한 신라가 거침없이 북진합니다. 이때부터 임진강은 고구려-신라의 국경선으로 변합니다. 고구려는 강 북안에 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 무등리 1·2보루 등 크고 작은 보루와 성을 고쳐 쌓거나 새로 구축했습니다. 그중에서도 호로고루는 고구려의 최전방사령부 역할을 했습니다.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요. 1998년 토지주택박물관의 정밀지표조사 결과 호로고루에서 고구려 기와 조각들이 대거 확인되면서 정식 조사가 시작됐는데요. 그 결과 임진강이 굽이굽이 돌아가면서 이뤄진 삼각형 형태의 천연 단애부에 접해 둘레 401m의 성벽을 조성한 사실을 확인했고요. ‘한들벌’로 이어지는 동쪽만 높게 성벽을 쌓았고요. 임진강, 즉 호로하에 면하는 곳은 30m의 절벽으로 곧장 이어지고, 북쪽 역시 40~60도가량 아찔한 급경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니 동벽만 막을 수 있다면 적의 침입이 불가능한 요새로 기능했을 겁니다. 성 내부의 전체 규모는 2000평 정도 됐습니다. 이곳에서는 임진강·한강 유역의 40여개 고구려 유적 가운데 가장 많은 양의 고구려 기와와 토기편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심지어는 한성백제의 도성 체계에 있던 몽촌토성보다 많이 출토됐는데요. 그만큼 규모가 큰 건물이 존재했다는 얘기입니다. 2006년 확인된 지하보급창고에서도 흥미로운 유물이 쏟아졌습니다. 소·말·개·사슴·멧돼지 등 6종의 동물뼈와 불에 탄 쌀·콩·조·팥 등 곡물들이 출토됐습니다. 1300g들이 밥공기도 나왔는데요. 요즘의 밥공기가 200g 정도 되니까 고구려 병사들은 엄청난 양의 ‘짬밥’을 먹은 겁니다. ‘흙으로 만든 북(鼓)’도 출토됐는데요. 적의 습격을 알리거나 아군의 진격을 독려할 때의 두들겼던 ‘변방의 북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호로고루 원경. 임진강의 연천 장남 구간인 호로하 인근에는 징검다리 식으로 모래톱이 드러날 정도로 수심이 낮아 기마부대가 쉽게 건널 수 있었다. 한국전쟁 때는 북한군 전차부대의 지원을 받은 1사단이 이 부근으로 남침했다. / 토지주택박물관 제공 호로고루와 동쪽으로 20㎞쯤 떨어진 무등산 보루에서 수백가마니에 달하는 탄화 곡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5~7세기 고구려군의 군량미 창고였습니다. 연구결과 고구려군이 먹은 쌀의 품종이 ‘인디카(Indica)’가 아니라 ‘자포니카(Japonica)’였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인디카’는 지금 동남아 등지에서 먹고 있는 ‘메진’ 쌀이고, ‘자포니카’는 현재 우리가 먹고 있는 ‘차진’ 쌀이죠. 5~7세기 고구려가 양질의 군량미를 군사들에게 제공할 만큼 부강한 나라였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삼국시대 군사분계선 저는 호로고루에만 가면 임진강 맞은편, 즉 남쪽에 있는 또 하나의 성터를 바라보고 상념에 잠기곤 합니다. 그곳이 ‘이잔미성’인데요. 정식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지만, 일부 남아 있는 석축으로 미뤄보면 신라성일 가능성이 큰데요. 호로고루와 이잔미성은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 고구려-신라의 최전선 사령부였겠죠. 그렇다면 임진강은 삼국시대판 군사분계선, 혹은 휴전선이겠네요. 강 양쪽의 성에 주둔한 병사들은 어땠을까요.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지만, 때로는 “밥은 잘 먹었냐”, “고향 생각은 안 나냐”고 큰 소리로 소통하지는 않았을까요. 가끔은 그렇게라도 숨 막히는 대치국면을 풀지 않았을까요. 그랬을 것 같습니다. 신라를 똥개 취급한 당나라 이와 같은 신라~고구려의 살얼음판 대치국면(553~660)은 백제 멸망(660)으로 완전히 바뀝니다. 고구려가 공격 목표가 되면서 혈전의 무대로 변하죠. 662년(문무왕 2) 정월의 전투를 기록한 <삼국사기> ‘문무왕’조를 봅시다. 신라는 “보급품을 평양으로 보내라”는 당나라군의 요구에 따라 김유신 장군(595~673)의 지휘 아래 군량미를 운송합니다. 한 달 넘게 눈보라와 함께 강추위가 불어닥쳐 사람과 말이 얼어 죽어갔습니다. 결국 당나라군과 신라군이 철군을 결정합니다. “철군하던 신라군이 호로하에 이르렀을 때 고구려군이 쫓아와 강 언덕에 나란히 진을 쳤다. 신라군은 고구려군이 미처 강을 건너기 전에 먼저 기습했다.”(<삼국사기> ‘신라본기·문무왕’조) <삼국사기> ‘열전·김유신’조는 “이때 신라는 고구려군의 수급을 1만이나 베고, 5000명을 사로잡았다”고 했습니다. 호로고루와 이잔미성이 치열한 전쟁터가 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나라군의 과도한 요구가 계속됐습니다. ‘오라 가라’는 당나라군의 ‘똥개 취급’에 신라의 괴로움은 극에 달했습니다. 호로고루에서 켜켜이 쌓인 채 확인된 고구려 기와류. 40여곳의 고구려 유적 가운데 가장 많은 기와가 확인됐다. / 토지주택박물관 제공 667년(문무왕 7) 신라군이 당나라군을 위해 칠중성(호로고루 인근 성)을 막 함락시킬 무렵이었습니다. 갑자기 당나라 사자가 달려와 “칠중성은 됐으니 빨리 평양성으로 군량미를 보내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김이 빠진 신라군이 공격하다 말고 군사를 돌려 수곡성(황해도 신계)까지 군량미를 싣고 진격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신라군에게 “당나라군이 이미 철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장안(당나라 수도)으로 철군한 당나라군은 문책이 두려워 황제(고종·재위 649~683)에게 “신라가 군사를 늦게 보내는 바람에 철군했으니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고해바쳤답니다. 문무왕과 신라 조정의 분노가 켜켜이 쌓여갔습니다. 당나라·말갈·거란 연합군에 전승 백제에 이어 고구려까지 멸망시킨(668) 당나라는 한반도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냅니다. 신라도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임진강 호로하와 칠중하는 신라-당나라군의 격전지로 변합니다. 673년(문무왕 11) 5월 당나라 총관 이근행(?~682)이 호로하 서쪽에서 고구려 유민들을 치고 수천명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그러자 남은 고구려 유민들이 신라로 모두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4개월 뒤인 9월에는 신라군이 당나라·말갈·거란 연합군을 역시 호로하에서 격퇴했습니다. 호로고루 내부에서 확인된 지하창고는 고구려군의 보급창고였다. / 토지주택박물관 제공 <삼국사기> ‘문무왕’조는 “호로하에서 왕봉(경기 고양)까지 치른 9차례의 전투에서 당나라군 2000여명의 목을 베었다”면서 “두 강에 빠져죽은 당나라군이 셀 수 없이 많았다”고 기록했습니다. 신라는 이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기를 잡고 당나라를 내쫓는 기반을 닦았습니다. 오랜만에 찾아본 호로고루에 해가 저물고 있었는데요. 해바라기밭을 앞에 두고 호로고루 위로 넘어가는 일몰과 붉은 노을을 찍으려는 카메라가 장사진을 치고 있더라고요. 예부터 호로고루 주변의 임진강 절경을 ‘고호팔경(皐湖八景)’이라 했거든요. “낚시터에 비치는 깊은 밤 고운 달빛(釣臺暮月)… 자미성(호로고루) 위로 떠오르는 초승달(嵋城初月)… 저물녘 고랑포 선창으로 돌아오는 돛단배(石浦歸帆), 장단 석벽 좌우로 펼쳐지는 가을 단풍의 절경(赤壁丹楓), 경순왕릉에 비치는 저녁햇빛(羅陵落照)….” 호로고루라는 심상치 않은 이름 속에 담겨 있는 ‘심상치 않은 역사’의 사연을 한번쯤 기억해주기 바랍니다. ‘통일바라기’라는 이름의 축제를 여는 뜻도 한번쯤 새겨 두기를….
이기환의 Hi-story
고구려-아즈텍 친연 가설’ KBS 다큐 왜곡 논란(2017. 02. 07 10:26)
2017. 02. 07 10:26 사회
ㆍ손성태 배재대 교수 가설 뒷받침 위해 애먼 학자 등장시켜 동조한 듯 ‘억지 편집’ 지난 설 연휴 기간 동안 KBS는 특집 다큐멘터리 를 이틀간 방영했다. 이 다큐는 고대 멕시코의 아즈텍인이 고구려 유민의 후손이며, 아즈텍인이 사용한 나와틀어와 한국어가 뜻이 통한다는 주장을 담았다. 한민족이 동떨어진 다른 민족과 친연관계에 있다는 가설은 재야사학(또는 유사역사학)의 대표적 소재다. KBS에서 유사역사학의 주제를 가지고 역사 방송을 만든 것은 오랜만의 일이다. 과거 KBS의 역사프로그램인 의 경우 이따금 고대사의 유사역사학 주제를 다뤘다. 열풍의 실체나 신라왕족이 흉노족이었다는 설 등을 담았다. 하지만 의 뒤를 이은 에서는 유사역사학 주제가 자취를 감췄다. 은 대체로 고려, 조선시대를 소재로 했다. KBS에서 지난해부터 선보이고 있는 팩추얼 드라마 시리즈 와 역시 정통 역사가들의 연구성과를 반영하고 있다. KBS 설날 특집 다큐멘터리 홍보 영상의 일부 / KBS 공식유투브 손 교수 “인간생활 전 분야 일치한다” 이번 다큐멘터리의 이론적 배경을 제공한 사람은 손성태 배재대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다. 손 교수는 10년 전부터 언어학·민속학 학술지나 언론을 통해 ‘고구려-아즈텍 가설’을 주장해 왔다. 손 교수의 생각을 정리하면 이렇다.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한 이후 만주지역의 주류 민족은 고구려계에서 여진계로 교체됐다. 손 교수는 고구려 유민 중 상당수가 고구려 북방으로 이동해 최종적으로는 북아메리카 대륙 서부해안을 거쳐 멕시코에 정착해 아즈텍인이 됐을 것이라 본다. 손 교수는 문헌 증거, 언어, 문화 등 여러 가지 관점에서 ‘고구려-아즈텍 가설’이 증명된다고 설명했다. 손 교수는 중국의 사서 에 등장한 부상국(扶桑國)에 주목했다. 양서에는 499년 승려 혜심이 중국에서 2만 리 이상 동쪽에 위치한 부상국을 설명한 기록이 남아 있다. 혜심에 따르면 부상은 을기라는 왕과 대대로(大對盧), 소대로(小對盧), 납돌사라는 귀인들이 다스리는 나라다. 부상의 위치가 지금의 멕시코 일대로 추정되며, 부상의 ‘대대로’라는 관직이 고구려에서도 왕 다음 가는 최고 관등의 지위라는 점이 고구려인과 아즈텍인의 연관성을 설명하는 증거라는 게 손 교수의 설명이다. 손 교수는 “어쩌다 한두 가지가 우연히 같은 것이 아니라 언어, 민속문화를 포함해 인간생활 전 분야에서 한국인과 아즈텍인의 생활상은 일치한다”고 말했다. 손 교수의 주장에 대한 학계와 대중의 반응은 싸늘하다. 극히 드문 예외가 있다면 유영익 전 국사편찬위원장을 들 수 있다. 2014년 손 교수는 자신의 학설을 집대성한 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후 손 교수는 자신의 책을 학계 곳곳에 보냈는데, 2014년 9월 15일 유 전 위원장이 손 교수에게 답장을 보냈다. 답장에서 유 전 위원장은 “저는 1960년대 하버드대에 재학할 당시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우리 민족의 일부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며 “손 교수님께서는 과학적 방법을 동원해 한민족-아메리칸 인디언 관련설을 입증하신 것 같다”고 말했다. 다큐 자체에도 손 교수의 주장에 신뢰성을 더하는 장치가 있다. 다큐가 손 교수의 가설을 설명하고 역사학자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다큐에서 그래픽으로 부상국과 고구려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리고 박대재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가 등장한다. 박 교수는 “중국 여러 문헌에는 고구려의 최고 관등 벼슬을 대대로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원론적인 설명만 한다. 다큐멘터리 내레이터가 ‘멕시코 고대유적에 고리 문양이 많이 발견되는 것은 그들이 고리족의 후손이기 때문이다’라는 식의 설명을 한 다음엔 복기대 인하대 융합고고학과 교수가 등장한다. 복 교수 역시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사람들이 사방에 흩어져서 훗날 부여와 고구려를 세운다. 이들이 자체적으로 고리라고 불렀던 것 같다”고 말한다. 역사학자들의 출연은 손 교수의 주장에 신뢰도를 더해줬다. 기성 사학계에서도 손 교수의 연구성과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인상도 줬다. 하지만 다큐에 출연한 학자들은 자신이 손 교수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처럼 오해를 사고 있다며 억울해했다. 특히 제작진은 인터뷰에 응한 학자들에게 프로그램의 취지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박 교수는 “인터뷰를 할 때 멕시코 이야기도 전혀 없었고, 부상국과 고구려를 연결시킬 것이라면 내 인터뷰를 방송하지 말라고 당부했는데 마음대로 편집, 방송했다. 괜히 내가 손 교수의 주장에 힘을 실어준 꼴이 된 것 같아 어이가 없다”고 말했다. 복 교수 역시 “1월 중순 인터뷰 할 당시 다큐의 정확한 취지나 멕시코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다. 제작진은 설날 특집으로 편성할 역사 프로그램 때문에 민족이동 관련한 인터뷰를 해달라고만 말했다”고 전했다. KBS 다큐 제작진은 시간이 없어서 잘못이 발생했으며 다큐에 출연한 교수들에게는 전화를 드려 사과 표시도 했다고 밝혔다. 다큐 제작진 관계자는 “지난 4년간 멕시코뿐만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 전역의 인디언 이야기를 담은 4부작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1월 10일 정도 설날 휴일에 2회분으로 편성한다는 말을 듣고 일정에 쫓겨가며 편집을 하다 보니 부족한 점이 많았다”고 말했다. “사료적 근거 없고 황당한 논리에 입각” 이번 일을 계기로 공영 다큐멘터리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보자는 의견도 있었다. 고려대 박 교수는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연구할 수 있지만, 그걸 공영방송에서 비중 있게 다루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학문의 자유는 있지만 그것을 공영방송에서 특집 다큐멘터리로 만들기 위해서는 학계의 검토와 자문이 필요하다”며 “방송 프로그램의 정확한 제목과 취지를 말하지 않고 간단한 질문에 답변만 해주면 된다고 하면서 인터뷰를 해간 뒤 마음대로 편집해서 쓰는 건 양심이 없는 행동이다. 공영방송 PD가 억지스러운 가설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인터뷰를 편집해서 사용해도 되는 건가”라고 말했다. 손 교수도 방송이나 인터넷이 아니 역시 자신의 주장에 대해 ‘학계의 검토와 자문’을 받길 원했다. 그는 “내 주장을 공개적으로 검증해달라고 한국고대사학회에 글을 올렸지만 반응이 없었다. 학회에 논문도 제출했지만 학회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고 말했다. 손 교수의 ‘고구려-아즈텍 가설’은 주로 환단고기 등 유사역사학을 믿는 이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그는 “저도 ‘신라가 사실은 양자강에 있었다’는 주장을 하는 분들이 주로 저를 지지한다는 걸 안다. 저도 그 때문에 곤란한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손 교수는 “오히려 멕시코 학자들은 고대 한국과 고대 멕시코가 만난다는 말에 많은 흥미를 가졌다. 멕시코 등 아메리카 대륙의 학자들과 공동연구를 진행하기 위해서라도 동북아역사재단 같은 국책연구소를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다큐에 담긴 ‘고구려-아즈텍 가설’에 대해 역사학자들의 생각은 어떨까. 박대재 교수는 “사료적 근거가 없고 황당한 논리에 입각한 가설이다. 고구려와 아즈텍은 시기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거리가 너무 멀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중국 문헌에 나오는 ‘맥이’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 ‘메히코’(멕시코)가 됐다는 다큐의 묘사에 대해 “만약 KBS에서 멕시코를 맥이와 관련시킬 수 있냐고 질문했다면 맥이는 ‘맥’의 오기라고 보는 게 일반적이라는 설명을 추가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복기대 교수는 “손성태 교수의 글을 읽어본 적이 있는데, 수많은 유적 중에 몇 가지를 예로 들면서 사실상 결과를 정해놓고 하는 귀납적인 연구방법은 옳은 방법론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다큐에서는 아즈텍 유적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고리 모양이 고대 멕시코(아즈텍)과 한민족(고리족)이 동족임을 강화해주는 증거 중 하나로 소개하고 있다. 복 교수는 “고리 모양을 쉽게 말하면 끝이 둥그런 모양인데,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여러 문명권에서도 끝이 둥그런 무늬가 발견된다”고 말했다. KBS 다큐 제작팀 관계자는 “시청자가 보기엔 비판적인 내용이 없으니까 일방적으로 손 교수의 말을 지지하는 것처럼 비쳤을 수 있다. “올해 봄이나 여름에 나오는 3·4부에서는 여러 비판적인 의견을 적극 수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길에서 만난 사람]고구려의 기상 드높인 ‘진달래 산천’(2014. 11. 04 14:35)
2014. 11. 04 14:35 사회
아쉽게도 장군총에는 벽화도, 그 어떤 부장 유물도 남아 있지 않다. 무덤을 천천히 돌아보니 층층이 쌓아올려진 바위틈으로, 천년 세월을 지켜온 이끼가 자라고 있다.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 꽃 펴 있고, / 바위 모서리엔 /이름 모를 나비 하나 / 머물고 있었어요. 잔디밭엔 장총(長銃)을 버려 던진 채 / 당신은 / 잠이 들었죠. / 햇빛 맑은 그 옛날 후고구려적 장수들이 / 의형제를 묻던, / 거기가 바로 / 그 바위라 하더군요. /(중략)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 꽃 펴 있고, / 바위 그늘 밑엔 / 얼굴 고운 사람 하나 / 서늘히 잠들어 있었어요. / (중략) 말 달리던 고구려인의 기상이 한 점 구름처럼. 환도산성서 멀리 보이는 통구하 물줄기 우리 민족의 드높던 기상과 신화를 떠오르게 하는 시구로, 겨레 사랑이 뜨거웠던 민족시인 신동엽의 ‘진달래 산천(山川)’이다. 환도산성 아래 옛 고구려적 무덤군을 찾아가며 위대했던 태왕의 신화를 떠올린다. 이제 남의 땅이 되어버린 광막한 대지에서 시인이 읊조렸던 ‘옛 고구려적 진달래 산천’은 과연 어디련가. 고구려 유리왕이 국내성의 쌍성으로 쌓아올린 중국 길림성 집안현에 위치한 환도산성에 오른다. 산성하무덤군이 발 아래 펼쳐지고 멀리 국내성과 압록으로 흘러드는 통구하의 물줄기가 모두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집안현의 지기는 드넓고도 편안하다. 북쪽으로 장백산맥의 지맥인 노령산맥의 준봉들이 마치 옛 고구려적 장수들이 무리를 이루어 진을 형성한 듯 도시를 감싸안고 있는데, 위풍당당 북풍을 막아선 위용이 든든하다. 압록강으로 흘러드는 통구(通溝)하의 물길이 역사를 잊은 채 유유히 흐른다. 장군총. 옛 고구려의 신화를 간직한 광개토왕비와 태왕의 무덤, 장군총은 이곳 환도산성에서 멀지 않다. 두 무덤은 모두 옛 고구려적 무덤이다. 무덤의 주인을 알지 못하나 그 거대한 축묘의 규모로 ‘총’이라 불리는 장군총과 조금 떨어져 자리한 광개토왕비와 광개토왕릉까지 둘러볼 셈이다. 시인의 말대로라면, 햇빛 맑은 날이면 후고구려적 의형제를 묻던 바로 그 바윗가에 진달래 몇 뿌리 피어나고, 이름 모를 나비가 날아들 것이다. 바람 따뜻한 날이면, 그 바위 그늘 밑에 얼굴 고운 사람 서늘히 잠들어 뼛섬이 썩은 무덤가에 꽃죽이 널려 있을 것이다. 장군총은 국내성에서 5.5㎞ 떨어져 있으며, 통구평야 동쪽 용산(龍山) 기슭에 위치한다. 광개토왕릉비는 이 장군총에서 서남쪽 1.3㎞ 지점에 위치하고 다시 500여m 남짓의 거리에 호태왕릉으로 불리는 광개토대왕릉이 자리하고 있다. 장군총을 ‘능’이라 하지 않고 ‘총’이라 하는 이유는 이 무덤이 누구의 것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일제시대 이전에 이미 많은 유물들이 도굴되면서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없기 때문인데, 북한 역사학자들은 이를 두고 장수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다. 옛 고구려인의 기상이 어린 거대한 장군총을 마주한다. 호태왕릉으로 불리는 광개토대왕릉. 동방의 피라미드라 불리는 이 거대한 무덤은 웅장하고도 견고하다. 장군총은 그 위용과 축묘방식으로 광개토왕비 등 집안시의 고구려 유적과 함께 지난 200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모두 1100개의 거대한 암석을 쌓아서 만든 이 무덤은 계단 형식으로 쌓아올린 방단계제식 적석무덤이다. 아래부터 모두 7단의 계단을 쌓아올려 19층으로 축묘되었는데, 그 축묘에 있어 중국의 방식과 다르게 쌓은 것이 눈에 띈다. 이러한 점이 고구려의 무덤이라 판단되는 근거다. 장군총 돌 하나의 무게는 가벼운 것은 15t, 큰 경우 25t에 이른다. 특히 정상부에 올려진 돌은 무려 50t으로 추정되어진다. 이 돌은 사방을 빙둘러 홈을 파놓은 흔적이 나타나는데, 기둥을 세워 건물을 올렸던 흔적으로 판단한다. 삼국사기의 ‘묘상유옥’이란 기록에 근거해 무덤 상단에 가옥 또는 지붕을 올렸을 것으로 짐작한다. 정면에서 가까이 다가서니 무덤 정면에 구멍이 뚫려 있다. 무덤칸이라 하는데, 안으로 들어가면 관을 모셨던 관대가 나타난다. 천장과 벽 사이에 큰 통돌을 쌓아서 무덤칸을 만들고 크고 작은 2개의 관대를 배치했다. 큰 관대는 왕의 관대, 작은 관대는 왕후의 것으로 추정된다. 장군총을 왕의 무덤이라 추측하는 이유 중 하나다. 하지만 아쉽게도 장군총에는 벽화도, 그 어떤 부장 유물도 남아 있지 않다. 무덤을 천천히 돌아보니 층층이 쌓아올려진 바위틈으로, 천년 세월을 지켜온 이끼가 자라고 있다. 광개토대왕비. 세계문화유산 장군총의 거대한 위용 다시 호태왕릉비라 불리는 광개토대왕비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이 비는 장수왕 2년(414)에 선왕의 공적을 기리고자 세운 것이다. 높이 6.39m, 너비는 좁은 쪽은 1.34m, 넓은 쪽은 2m, 무게는 37t에 이른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와 함께 커다란 투명유리로 보호되어지고, 내부에서의 사진 촬영은 통제되고 있다. 장수왕은 고구려 건국부터 호태왕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선왕의 업적을 중심으로 커다란 바위에 한 글자 한 글자 비문으로 새겼다. 웅대한 자연석을 다듬어 비문을 새겼는데, 이러한 방식이 중국의 비석 형식과 구별되어지는 것이다. 중국의 당, 수, 한나라의 경우 자연석을 다듬어 문자를 새기고 그 꼭대기에 비액을 만들어 올린다. 하지만 태왕의 비석에는 비액을 세워둔 흔적이 없다. 후손에게 각인된 광개토왕의 위대함 아쉬운 점은 비석의 비문이 고구려의 패망 이후 많이 훼손되면서 일부 글자는 판독이 불가하다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비는 19세기 청나라 강희제 때 발견됐다. 비석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 현지의 마을 주민들은 이를 예사롭지 않다며 신성시하였다. 때문에 비석 주위의 잡초와 수목들을 불을 질러 태웠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오히려 비석까지 손상되어 글자가 훼손되었다. 비석의 4면에 새겨진 글자수는 모두 1755자이다. 그 중 판독되어진 글자는 1570여자이다. 나머지 150자는 판독하지 못하고 있다. 비록 바위에 새겨진 글자는 일부 훼손됐지만 고구려인의 기상과 신화는 더 선명한 가치로 후손에게 각인되어질 것이다. 비석을 돌아보고, 태왕릉이라 불리는 광개토왕릉으로 발길을 돌린다. 이 능은 국내성에서 동쪽으로 4㎞ 떨어진 우산의 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이 능을 광개토대왕릉으로 짐작하는 이유는 바로 500m 거리에 광개토왕비가 자리하고 있으며, 이 무덤에서 ‘태왕무덤’이라 새겨진 돌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북한과 경계로 흐르는 압록강. 고구려인들에게 무덤은 현세적 공간이 아니었다. 천제의 후손이라 믿었던 고구려인들은 현세와 내세를 분리하지 않았다. 망자의 주검 앞에서는 눈물을 보였으나 장례를 치르는 상례에서는 울지 않고 잔치를 벌였다. 이러한 뜻으로 장수왕은 선왕인 광개토왕의 사후에도 창대한 만년의 꿈을 비문에 새겨 후세에 남겨두었다. 장수왕은 후세가 이 땅과 역사를 잃어버린 것을 알고 있을까. 고구려와 발해 등 북방의 역사는 단순한 과거가 아닌 지금의 우리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밑거름이 된다. 우리 스스로 역사인식을 확고히 다질 때, 새로운 민족의 이정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저기 말 달리던 옛 고구려적 왕이 백마 탄 형상으로 한 점 구름이 되어 하늘로 솟구친다. 대륙을 말 달리던 고구려 장수들의 말발굽 소리가 이명으로 흩어진다.
길에서 만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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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간 준비한 창작오페라‘아, 고구려’ 막올리는 홍지원 단장
2005. 03. 01 화제
문화, 예술을 사랑한 고구려인의 위상을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에 펼치고 싶어요! 새로운 일을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뉴서울 오페라단의 홍지원 단장은 ‘창작은 끊임없는 수정의 반복’이라고 한다. 인내심과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약 4백 명의 스태프들과 함께 3년째 창작 오페라 ‘아, 고구려’를 준비중인 그녀. 이번 작품이 ‘명품 창작 오페라’로 평가 받기 위해 홍단장은 마무리 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다.  ‘아, 고구려’ 서울과 지방 공연 후 해외공연도 준비 중 일요일 오후 2시. 서울의 중심가에 위치한 세종문화회관에서 홍지원(40) 단장을 만났다. 약속 시간을 조심 지나 도착한 그녀는 “휴일 오후에도 창작 오페라 ‘아, 고구려’의 마무리 작업을 하느라 약속 시간이 지나는 줄도 몰랐다”며 숨도 돌리지 않은 채 ‘아, 고구려’에 대한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았다.  “막이 오르기 까지 이제 한 달 가량이 남았어요. 햇수로 3년을 준비해온 작품인데 지금도 대본을 고치고 음악을 보강하고 안무를 바꾸는 등 새로운 시도를 계속하고 있어요. 창작이라는 건 ‘끊임없는 수정 작업의 반복’이거든요. 기존에 있었던 작품을 재연하는 것이라면 이미 짜여진 틀이 있기에 그것에 맞춰가며 조금 업그레이드를 시키면 되지만 창작이라는 건 디테일한 부분까지 일일이 만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든다고 생각해요.” 오는 3월 30일부터 4일 동안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펼쳐지는 창작 오페라 ‘아, 고구려’의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 총 스태프는 약 4백 명 가량. 이뿐 아니라 광개토대왕 역에 바리톤 우주호, 대왕을 사랑하다가 오히려 그의 칼에 죽음을 맞이하는 비운의 여인 ‘다주’ 역에 소프라노 김향란, 질투심에 사로잡혀 음모를 꾸미는 장군 ‘지평’ 역에 테너 이현 등 기라성같은 오페라 가수들이 34명 출연한다. 한 작품을 위해 4백 명이 넘는 인원이 동원된다는 것과 3년 전부터 준비해온 작품이라는 것에서 창작 오페라 ‘아, 고구려’의 스케일을 느낄 수 있다. 홍지원 단장은 세종대 음악대학과 이태리 AIDM 아카데미에서 성악을 전공한 후 지난 96년부터 공연기획을 시작했다. 그녀가 국내 창작 오페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이태리 유학시절이라고 한다.  “이태리에서 유학할 때 느낀 건데 우리나라 오페라 가수들의 실력은 세계 정상급이에요. 성악을 배우겠다고 세계 곳곳에서 몰려든 이들과 겨뤄 결코 빠지지 않거든요. 근데 우리의 언어가 아니라 남의 나라 말로만 그 훌륭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언젠가는 창작 오페라를 해서 그 작품으로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고 싶었어요. 그게 이제 결실을 맺게 된 거죠.” 홍지원 단장은 창작 오페라를 준비하며 어떤 소재를 선택해야 할 지 많은 고민을 했다. 내용이 어렵지 않아 대중들의 시선을 잡을 수 있고, 세계무대에서 우리민족의 우수성을 펼칠 수 있으며, 심금을 울리는 감동과 사랑이 있는 작품이 바로 홍단장이 무대에 올리고 싶은 창작 오페라였다. 홍단장은 현재 준비중인 작품을 단지 국내 무대에만 올릴 것이 아니라 해외 무대로의 진출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스케일이 커졌고 그만큼 부담감도 더했다. 화려한 군무와 합창 그리고 1천개의 촛불로 꾸미는 환상의 무대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 홍단장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큰 국토를 형성했던 고구려인들이 훌륭한 기백 못지않게 아름다운 문화와 예술을 꽃피웠던 민족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아, 고구려’라는 창작 오페라를 구상했다. “고구려는 정치뿐 아니라 문화에서도 강국이었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국내에는 고구려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지 않아 정확한 자료를 수집하는데 애를 먹었어요. 훌륭한 작품을 완성해 해외에서도 우리민족의 우수성을 펼치고 싶은데 자료 수집부터 난항을 겪어 쉽지 않게 준비한 작품이에요. 그래도 ‘이제는 우리의 창작 오페라도 해외에서 막을 올려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만든 작품이에요. 근데 햇수로 3년을 준비해 온 지난 시간보다 이제 막을 올리기까지 한 달 남짓 남은 요즘이 더 불안하고 긴장돼요.” 창작 오페라 ‘아, 고구려’는 총 2시간 10분 가량이 무대에 올려진다. 총 3막으로 이뤄지며 기존의 오페라들에 비해 비교적 빠른 장면전환이 전개된다. 홍단장은 ‘아, 고구려’에서 큰 볼거리로 군무(群舞)와 합창을 꼽으며 “1백 명의 합창단과 40명의 무용단이 무대에 올라 화려하고 율동적인 무대를 선보일 것”이라고 한다. 또한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평가받기 위해 무용가 정재만(무형문화재 27호·숙명여대 교수)씨의 안무로 고구려의 검무와 횃불 춤 등을 선보이며 고구려 벽화와 광개토대왕비를 형상화한 무대, 당시의 옷차림을 고증한 출연진의 화려한 의상 등도 볼거리 중 하나로 꼽힌다. 이외에도 여성 관객들을 위해 광개토왕과 ‘다주’의 운명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사랑을 환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무대 위에 1천 개의 촛불을 등장시킬 예정이다. “관객들과 만날 날이 하루하루 다가오니까 설렘과 두려움, 기대감 등 말할 수 없이 복잡한 감정에 휩싸이고 있어요. 이번 작품을 보신 관객들이 좋은 평가를 해준다면 조금씩 수정하고 보완해서 오래도록 무대에 오르는 우리나라의 ‘명품 창작 오페라’로 키워나가겠습니다. 물론 해외공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 국내 관객들께 사랑받는 작품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오페라를 사랑하는 홍지원 단장의 마음은 오는 3월, 따뜻한 봄바람이 되어 관객들의 가슴에 머물 것으로 기대된다. 글 / 경영오 기자  사진 / 지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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