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75 건 검색)
- 민주, ‘이재명 1기’ 체제 마지막 최고위…고민정 “다양함 살아있는 단합의 길 가야”
- 2024. 08. 16 10:58 정치|정치
- ... 더불어민주당 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가 16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정청래(왼쪽), 고민정 최고위원과 함께 마지막 회의 인사를 제안하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더불어민주당 지도부가 16일...
- [최병천의 21세기 진보]종부세 폐지 공론화 - 고민정 의원이 옳다
- 2024. 06. 06 20:43 오피니언
- ... 종합부동산세(종부세) 논란이 속도 조절에 들어갔다. 박찬대 원내대표는 실거주 1주택 제외, 고민정 최고위원은 종부세 폐지를 포함한 공론화 필요성을 제기했다. 종부세는 현재 ‘진보의 심장’ 같은...
- 최병천의 21세기 진보최병천의 21세기 진보최병천종부세
- 고민정 ‘종부세 폐지’ 주장에…국민의힘 “야당 변화 대환영”
- 2024. 05. 28 21:14 정치
- ... 28일 고민정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이 제안한 종합부동산세(종부세) 폐지 주장에 대해 “적극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내 갑론을박을 계기로 야당 균열을 부각하는 동시에 22대...
- 고민정 종부세 폐지 주장에···국민의힘 “적극 환영”
- 2024. 05. 28 11:16 정치|정치
- ... 28일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국민의힘이 28일 고민정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이 제안한 종합부동산세(종부세) 폐지 주장에 대해 “적극 환영한다”는 입장을...
스포츠경향(총 42 건 검색)
- 고민정 의원, SNS 가짜영상 유포에 “전혀 무관, 고소할 것”
- 2020. 08. 06 18:52 생활
- 더불어민주당 고민정 의원.더불어민주당 고민정 의원은 6일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자신을 지칭한 가짜 영상이 유포되는 것에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고 의원은 이날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페이스북에서 “고민정이라는 제목의 가짜 영상이 유포되고 있다”며 해당 영상은 본인과 전혀 무관하다고 밝혔다. 고민정 의원이 가리킨 가짜영상은 전북 김제시의회에서 발생한 전직 시의원 간 불륜 폭로 사건과 관련한 영상이다. 고 의원실은 이 영상에 ‘좌파 국회의원 고민정 국회에서 개망신’ 등 악의적 자막이 붙어 있다고 설명했다. 고민정 의원은 “영상 제작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예정”이라며 “‘고민정 동영상’이라며 무차별적으로 유포하는 사람도 처벌을 받을 수 있음을 알린다”고 적었다. 고 의원은 또 “관련 포털에 위와 관련한 ‘고민정 의원’ 연관 검색어와 영상 삭제를 요구한다”고 덧붙였다.
- 고민정
- 고민정 “류호정, 국회 과도한 엄숙주의·권위주의 깨 준 것 감사”
- 2020. 08. 05 19:20 생활
- 고민정 더불어민주당 의원. 연합뉴스.정의당 류호정 의원이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국회 본회의에 참석하자 일각에서 복장 문제를 지적한 것에 대해 더불어민주당 고민정 의원이 “국회의 과도한 엄숙주의와 권위주의를 깨 준 것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고 유 의원을 지지하는 입장을 밝혔다. 고 의원은 5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 SNS(페이스북)에 “나는 류 의원의 모든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와 생각이 다른 점들이 꽤 많기 때문”이라며 “하지만 그녀가 입은 옷으로 과도한 비난을 받는 것에 대해선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고민정 의원은 또 “국회는 그렇게 다른 목소리, 다른 모습, 다른 생각들이 허용되는 곳이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류호정 의원은 지난 4일 국회 본회의에 분홍빛 원피스를 입고 출석했다. 이 모습이 온라인을 통해 퍼진 후 일부 커뮤니티에서 류 의원을 비난하는 글이 이어졌다. 일부 누리꾼은 정치인의 복장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비판을 넘어 류 의원을 성적으로 비하한 표현까지 했다.
- 고민정
- [속보] 서울 광진을, 고민정 49.3 % VS 오세훈 48.8% (지상파3사 출구조사)
- 2020. 04. 15 18:52 생활
- 제21대 총선 서울 광진을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고민정 후보가 49.3%를, 미래통합당 오세훈 후보가 48.8%를 각각 득표할 것으로 15일 KBS, MBC, SBS 등 지상파 3사 출구조사에서 예측됐다.
- 임종석, 2일 고민정 후보와 ‘차튜브’ 유세 나서
- 2020. 04. 01 20:03 연예
- 고민정 후보 측 제공.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4·15 총선 공식 선거운동 개시일인 2일부터 더불어민주당 후보들을 위한 지원 유세에 나선다. 임 전 실장은 이날 방송인 출신으로 청와대 대변인을 역임한 서울 광진을 고민정 후보와 함께 자양사거리에서 ‘차튜브(유세차+유튜브)’ 유세를 한다고 고 후보 측이 1일 밝혔다. 차튜브란 유세차 위에서 유튜브 생방송을 진행하며 온라인·오프라인으로 유권자를 만나는 선거운동 방식이다. 임종석 전 실장은 고 후보 이외에도 요청이 있는 곳에 나서서 지원유세를 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광주 등 호남을 비롯해 수도권, 영남 등 일부 지역구에서 유세를 할것으로 관측된다. 임 전 실장은 지난 달 초 전남 목포를 찾아 민주당 김원이 후보를 응원한 바도 있다. 임종석 전 실장은 지난해 11월 “제도권 정치를 떠나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려 한다”며 “앞으로의 시간은 다시 통일 운동에 매진하고 싶다”고 밝히며 총선 불출마를 공식화했다. 당 지도부가 출마·공동선거대책위원장 역할 수행 등을 제안했지만 그는 고사했다. 임 실장은 이번 고 후보 지원유세를 시작으로 여당의 총선 승리를 위한 측면지원에 나선다.
레이디경향(총 25 건 검색)
-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24) 나마스테, 네팔!
- 2014. 11. 25 15:12 육아/교육
- 아이들을 두고 여행을 다녀왔다. 목적지는 네팔. 그곳의 어머니를, 그곳의 딸들을 만나면서 잠시 아이들 걱정은 접어두기로 했다. 열흘 만에 다시 만난 아이들. 은산이와 은설이는 떨어져 있는 동안 부쩍 성장해 있었다. 때때로 떨어짐은 내 아이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닫게 하고, 엄마 역시 성장하게 한다. 엎친 데 덮친 격 “네팔에 가서 열흘 정도 촬영해야 하는데 괜찮으세요?” “저야 당연히 좋죠!” 섭외를 위해 걸려온 작가의 전화에 워낙 여행을 좋아하는지라 앞뒤 잴 것도 없이 일단 흔쾌히 수락했다. 게다가 남편과 함께 가는 촬영이라고 하니 금상첨화가 아닌가! 호시탐탐 어느 나라를 갈까 궁리하는 내게 해외 촬영 제안은 육아휴직 후 받는 선물이나 다름없었다. 얼굴은 싱글벙글, 벌어진 입은 다물어지지 않고 이미 마음은 인천공항에서 이륙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룰루랄라 하다가 아뿔싸! 아이들 생각이 났다. 세 돌이 얼마 남지 않은 첫째 녀석은 요새 한창 엄마한테 온갖 사랑을 쏟고 있는데 과연 떨어질 수 있을까? 기껏해야 하루 정도 할머니, 할아버지랑 자본 것이 전부인데…. 어디 그뿐인가? 이제 겨우 7개월을 넘긴 둘째 녀석. 이유식을 하루에 두 번 먹긴 하지만 여전히 모유 수유 중인데다 엄마, 아빠랑 단 한순간도 떨어져본 적이 없는데 불안해하지는 않을까? 여러 방법을 고민해봤지만 기댈 곳은 부모님뿐. 결국 양가 부모님께 도움을 요청했고, 당신들은 자식들의 일을 위해 열흘간의 고생을 기꺼이 해주기로 하셨다. 가장 큰 문제가 해결됐으니 ‘이젠 여행 가방만 싸면 되겠지?’ 했다. 그런데 웬걸? 출국 날짜는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가방은커녕 애들 보낼 짐도 챙기지 못했다. 게다가 한 달째 감기를 달고 있던 설이가 고열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폐렴 전 단계까지 갔다는 의사의 진단이었다. “아마 지난주에 고열이 났던 게 폐렴이 살짝 지나갔던 것 같아요. 아이가 아주 강한데요? 보통 아이들 같으면 입원했을 텐데 장하네요. 그래도 고비가 지났을 뿐이지 당분간은 치료를 받아야 해요.” 출국을 4일 앞둔 날이었다. 촬영을 취소할 수도 없고 진퇴양난이었다. 게다가 이유식을 아침, 저녁으로 두 번 먹고 나머지는 모유 수유를 하던 설이. 신생아 때 젖이 돌지 않아 분유를 먹어본 경험이 있어 분유도 당연히 잘 먹겠거니 했는데, 먹지를 않는다. 혹시 맛이 없어서 그런 건가 싶어 다른 종류의 분유를 사다 날랐고, 혹시나 애 엄마인 친구들은 알까 싶어 여기저기 물어보기도 했지만 이런저런 방법을 시도해보기엔 내게 시간이 없었다. 결국 떠나기 전날까지도 설이는 분유를 거부했다. 설상가상 산이는 감기에 중이염까지 겹쳤다. 아이들에게 중이염은 흔한 병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산이가 열흘 동안 지내야 할 곳은 소아과 하나 없는 시골 동네다. 만일 열이라도 나면 응급실이 있는 시내까지 1시간은 가야 하는 곳 말이다. 육아에 대한 정답지까지는 아니어도 참고서쯤은 써서 시부모님께 전달할 생각이었는데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산이는 갈수록 엄마에 대한 사랑이 넘쳐 잘 때도, 일어날 때도 “엄마 사랑해”라고 속삭인다. 내가 없는 동안 매일 밤 엄마에 대한 배신감에 눈물로 베개를 적시면 어쩌나 또 걱정이다. 결국 일어나지도 않은 걱정들에 짓눌려 출국 전날까지 마음속 갈등은 정리되지 않았다. 시간에 떠밀려 출국 전날에야 둘째 설이를 애들 외할머니께, 남편은 첫째 산이를 애들 친할머니께 맡기고 돌아왔다. 집이 무척이나 적막했다. 마음이 물 먹은 솜뭉치처럼 무거웠다. “아까 당신이 산이 데리고 기차역으로 가는 뒷모습을 보는데 울컥하더라고. 꼭 영영 못 볼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결국 운전하면서 한참 울었어. 엉엉거리면서. 설이도 친정집에 데려다주고 나오는데 다행히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랑 잘 놀더라고. 내가 간다고 울지도 않고. 오히려 내 발걸음이 안 떨어지더라고. 당신 올라올 때 은산이는 어땠어?” “할아버지 집에서 열 밤 자면 만날 수 있다고 얘기했더니 알겠다고 하던데? 역시 쿨해. 그런데 이상하게 내 마음은 좀 무지근하더라고.” 우린 그렇게 텅 비어버린 집에서 아이들 얘기로 시간을 채우며 밤을 지새웠다. 그곳에서 만난 어머니 6시간이 걸려 도착한 네팔 카트만두 공항. 히말라야 산맥이 그림처럼 걸려 있는 곳이었다. 시골 간이역 분위기의 공항을 빠져나오면서 아이들 걱정은 내려놓기로 했다. 네팔에서도 마음이 한국에 가 있다면 촬영이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오랜만에 얻은 열흘이 허망하게 흘러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번 촬영은 ‘리얼 체험 세상을 품다’라는 프로그램 촬영차 간 것이었는데, 기본적인 컨셉트는 부부의 배낭여행이다. 거기에 적십자의 초청을 받아 몇몇 마을에서 봉사도 진행하기로 했다. 가장 먼저 간 곳은 카트만두 도심에 위치한 한 빈민가. 그저 얇은 판자로 세운 집들은 비를 겨우 피할 수 있을 정도였고, 전깃불도 없는 집 안은 한낮인데도 어두컴컴했다. 각 집마다 사연 없는 집이 어디 있겠냐마는 그곳 빈민촌의 사연은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이라는 점에서 절망 그 자체였다. 난 그중 남편의 외도로 집과 논밭을 잃고 이곳까지 떠밀려온 한 여인을 만났다. 아픈 시어머니와 딸들을 부양해야 하는 그녀는 눈이 무척 크고 예뻤다. 처음엔 우리의 방문을 웃음으로 맞아줘 마음이 가벼웠는데, 속사정을 이야기하며 이내 눈물을 보여 우리 모두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원망과 그리움, 배신감과 끝이 보이지 않는 가난의 굴레까지 그 모든 것을 한 줄기의 눈물이 말해주는 듯했다. 착잡한 마음으로 그 집을 나서는데 한편에서 남편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촬영 팀에게 물어보니 아마 아이들 때문에 그런 것 같다고 한다. 둘러보니 집앞 마당에서 한 아기가 흙투성이가 된 채로 앉아 있었다. 나이를 물어보니 설이랑 똑같은 7개월이었다. 그리고 아기의 엄마, 아빠는 이제 갓 스무 살쯤 돼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그들도 역시 이곳 빈민가에서 살아왔고, 아이도 이곳 천막 아래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마실 물조차 마땅히 없는 그곳에서 사는 아이의 건강이 걱정됐고, 서울에 있는 설이의 얼굴이 겹쳐 보이며 괜한 미안함마저 들었다. 신이 계시다면 이곳에 있는 아이들에게 더 많은 축복을 내려주시길,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해주시길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반면 아이들에게 더 나은 삶을 선물하기 위해 중국으로, 사우디아라비아로 돈을 벌러 간 사이에 아이들만 두고 온 집이 산사태로 인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한 한 어미의 눈물도 봐야만 했다. 단 열흘 헤어져 있는 건데도 그리움에 눈물을 쏟았던 나인데, 하물며 몇 년씩 떨어져 있어야 했던 그 부모들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생살을 베어내는 아픔으로 비행기를 탔을 텐데, 잠시의 이별이 가족에게 더 큰 안락함과 아이들의 밝은 미래를 보장해준다면 이쯤이야 하면서 이를 악물었을 텐데 그들에게 돌아온 건 아이들의 사망통지서 한 장. 산사태로 한 마을이 폐허가 돼 인근 군부대에서 생활하고 있는 재난 지역에서였다. 그녀에게 남겨진 건 공동묘지가 돼버린 고향 마을과 초점을 잃은 퀭한 눈빛이었다. 도저히 그녀에게 이것저것 물어볼 수가 없어 난 멀찌감치 떨어져 서 있었다. 그러곤 죄어오는 가슴을 손으로 세게 두드려가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슬픔과 괴로움이라는 단어로는 미처 설명이 다 되지 않을 끔찍한 고통이, 더 흘릴 눈물마저 사라져버렸을 어미의 마음이 내게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네팔 소녀, 타미 그렇다고 네팔이 구호단체에서 하는 캠페인 광고처럼 항상 빈곤과 슬픔만 넘쳐흐르는 곳은 절대 아니다. 이번 여행 기간 동안 가장 오래 머물렀던 수수빠체마와티라는 마을은 달랐다. 그곳 역시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지만 웃음과 여유, 행복과 포근함이 가득한 곳이었다. 산이 전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라 상당수의 논밭은 계단식인 다랑논이었다. 우리는 마을로 가기 위해선 등산을 하거나 지프차로 곡예를 하며 올라가야 했다. 추수가 한창이어서인지 온 집안사람들이 다 모여 벼를 베고 이삭을 줍고 새참을 먹는 모습들이 곳곳에서 보였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나마스테” 하고 먼저 인사를 건네면 모두들 밝게 웃으며 “나마스테”로 화답을 해주었다. 마을에 수로를 놓기 위해 여자들은 흙을 나르고 남자들은 돌을 부수고 옮긴다. 갓난아이는 바구니에 담겨 일하는 엄마 옆에 누워 쌔근쌔근 잠들어 있고, 여인들이 모인 곳에선 여지없이 웃음과 수다가 경쾌하게 울려 퍼진다. 학교에선 국어시간인지 저학년 아이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운동장까지 새어 나오고, 좀 더 큰 남학생들은 흙먼지를 날리며 규칙도 없어 보이는 축구를 하느라 열심이다. 구멍가게에선 시간이 멈춘 듯 주인 할아버지가 꾸벅꾸벅 졸고 계시고, 가게 앞 한쪽에서는 연신 닭이 울어댄다. 그야말로 평화가 깃든 동네다. 며칠 머무는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건 단연 아이들이었다. 우리가 방문했다고 마을 주민들은 성대한 잔치를 벌여주었다. 이슬이 채 떨어지지 않은 싱싱한 금잔화를 하나하나 실에 엮어 우리들 목에 걸어주었다. 대표로 누군가 한 사람이 걸어주는 것이 아니라 일일이 모두 걸어주니 수십 개는 목에 건 듯하다. 나중엔 꽃목걸이의 무게에 못 이겨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러곤 이어지는 각종 공연. 그중 열세 살 타미라는 소녀가 그들의 전통춤을 보여주었는데 몸동작이 예사롭지 않았다. 태생적으로 리듬이 몸에 익은 듯한 춤사위랄까? 덕분에 우린 조금 친해졌고 같이 산길을 오르내리기도 했다. 나이상으론 우리가 아줌마, 아저씨로 불려야 마땅하나 난 언니, 오빠라는 단어를 가르쳐줬다. 그랬더니 우리가 떠나는 날에도 언니, 오빠를 크게 외치며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다. 우리가 언제 또 언니, 오빠 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 그리고 또 한 명의 타미가 있었는데 그녀는 열여덟 살 여고생이었다. 수로 만드는 공사장에서 처음 만났는데, 어느 정도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해 함께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친해졌다. 나보다 한참 어린데도 되레 내 걱정을 해주었다. 큰 돌은 무겁다며 작은 돌만 갖다 주고, 자신은 슬리퍼를 신었으면서 등산화 신은 내가 미끄러질까 노심초사했다. 그녀의 눈빛, 몸짓, 손길 하나하나에는 배려의 마음이 그득했다. 그러던 어느 날 타미가 잘 있는지 궁금해 집으로 놀러 갔다가 다친 손을 보게 됐다. 전날 낫으로 벼를 베다가 다쳤다고 했다. 별다른 의약품이 없는지라 그저 천으로 동여맸을 뿐이었다. 난 약이라도 발라줘야겠다는 생각에 헝겊을 풀고 한국에서 가져온 밴드를 붙였는데 생각보다 상처가 깊어 피가 밴드를 빨갛게 물들였다. 그때부터였다. 손을 치료해주겠다고 오래 쭈그리고 앉아 있었던데다, 며칠간의 피로 누적 그리고 엉겨 붙은 피를 보고 쇼크를 받았나 보다. 지금도 내 증상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응급 상황이었다. 갑자기 내가 쓰러져버린 것이다. 피가 쏠리면서 심한 현기증이 나더니 급기야는 서 있을 수 없을 정도였고 손발이 심하게 떨려왔다. 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심하게 떨렸고 열 손가락이 곱아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배 속 내장까지 저려오고 굳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스태프뿐만 아니라 온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모든 일이 순식간이었다. 남편은 연신 뜨거운 물로 손을 녹여주었고, 난 정신을 놓지 않기 위해 라마즈 호흡을 계속했다. 출산할 때 하던 호흡법이 이런 응급 상황에서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스태프는 자신들이 입고 있던 겉옷을 모두 벗어 내게 덮어주었고, 동네 주민들은 전기 포트는커녕 가스레인지조차 없어 장작불로 물을 끓여 날라주었다. 작은 보건소라도 가려면 1시간에 걸쳐 험한 산길을 내려가야 하는 산골 마을이었기에 앰뷸런스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스태프는 헬기로 이송해야 한다며 서울과 카트만두 등 비상망을 가동했고, 난 이를 악물며 고통을 견뎌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굳었던 손가락이 펴지기 시작하더니 점점 호흡이 편안해졌고 체온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때 끝까지 내 곁을 지켰던 사람이 바로 열여덟 살 타미였다. 혹시 자신의 상처 때문에 내가 쓰러진 건 아닌지, 만일 잘못되면 어쩌나 하고 계속 걱정하며 내 곁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마치 잘 짜인 영화처럼 타미가 나와 똑같은 증상을 보이며 쓰러진 것이다. 1년에 한두 번 있는 의료봉사진이 와서 낫에 베인 상처를 치료받으러 갔는데, 피를 많이 흘리지 않았는데도 심하게 떨며 호흡곤란 증상을 보이는 것이었다. 아마도 극심한 통증으로 인한 쇼크가 아니었을까. 이번엔 내가 그녀의 곁을 지켰다. 그러면서 우리는 서로 마음을 나눈 사이가 됐다. 지금도 내 손엔 그녀가 준 반지가 끼워져 있다. 그 마을을 떠나는 마지막 날 난 내가 입고 갔던 후드 티셔츠를 선물로 줬다. 나를 기억할 수 있는 내 물건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옷 한 벌 살 수 없는 가난한 살림일 텐데도 자신의 손에 있던 은반지를 기꺼이 내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아마 나와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그렇게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음을 알기에 더욱 아쉬운 헤어짐을 해야만 했다. 다시 고마운 일상으로 열흘간의 일정을 끝내고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할머니들은 손주 한 명씩을 집으로 데려다 주셨다. 집 현관을 열자마자 “엄마” 하고 달려와 내 품에 안기며 다시는 가지 말라고 울부짖을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 애들이 남다른 건지, 내가 너무 영화를 많이 봐서 그런 건지 울기는커녕 한 번씩 깊게 포옹을 하고는 끝이다. 한마디로 ‘분리불안’ 같은 건 없구나 하면서 안심이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무척 쿨한 녀석들의 반응에 살짝 서운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마음도 잠시. 부쩍 자란 아이들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분유를 안 먹었던 설이는 하루에 이유식을 세 번이나 먹고도 분유를 200ml씩 벌컥벌컥 마신단다. 감기도 다 나아 약을 안 먹는 건 물론이고 잘 웃던 녀석이 아프면서 웃음이 줄어 신경이 쓰였는데, 이젠 눈만 마주치면 방긋방긋 함박웃음을 짓는다. 산이는 노인 회관 어르신들께 꼬박꼬박 존댓말을 써가며 온갖 사랑을 독차지했단다. 할머니가 해주신 밥도 척척 잘 먹고, 자기 전에 엄마가 보고 싶다고 몇 번 말하긴 했지만 울거나 그러진 않았다고. 지금도 가끔 시골 할머니 집에 갈까 하고 물어보면 냉큼 그러겠다고 말하는 걸 보면 진심으로 잘 지내고 온 것 같다. 여행은 떠나기 전 자료를 찾으며 한 달은 들뜬 기분으로 지낼 수 있어 좋다. 현지에선 낯선 사람들, 낯선 풍경이 주는 느낌이 신선해서 좋다. 다녀와선 내가 살고 있는 집도, 지루하게 여겼던 일상도 또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어 좋다. 설이 이유식을 먹이고 있다 보면 아기바구니에 누워 나와 눈을 마주치던 네팔의 아기가 생각난다. 잠자리에 들려고 이불 속으로 들어갈 때면 열여덟 살 타미 손은 다 나았는지, 추위 때문에 더 고생하는 건 아닌지 자꾸 떠오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아이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달은 건 물론이고, 더 나아가 자신만을 생각하는 아이들이 아닌 어려운 나라에 있는 또래의 친구들과도 함께 살아가야 함을 아는 아이들로 자라주길 희망하게 됐다. 그렇게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네팔은 날 한 뼘 더 자라게 해주었고 내게 풍요로운 마음을 선물했다. Profile 고민정은 … KBS 30기 공채 아나운서. 대학 선배이자 열한 살 연상인 시인 조기영과 결혼해 6년 만에 아들 은산이가 태어났고 지난 3월, 둘째 딸 은설이를 만났다. 저서로는 「샹그릴라는 거기 없었다」, 「그 사람 더 사랑해서 미안해」가 있다. *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는 이달을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기획 / 김지윤 기자 ■글&사진 / 고민정>
-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
-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22) 엄마의 보물찾기
- 2014. 11. 03 11:45 육아/교육
- 잘한다, 잘한다. 오늘도 아이는 엄마의 칭찬으로 자란다. 작은 단점보다 꼭꼭 숨어 있는 아이의 장점을 발견해 크게 키우는 능력, 오직 엄마만이 할 수 있는 보물찾기다. 은산이는 소심하지만, 세심하고 부끄러움이 많지만 집중력이 강하다. 그리고 누구보다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다. 소심해도 괜찮아 얼마 전부터 주말마다 첫째 은산이를 데리고 동네 문화센터에 다니고 있다. 하루 종일 뭘 하고 놀아줘야 하는지에 대한 부담도 덜고, 아이가 좋아하는 놀이도 찾을 겸 시작한 주말 나들이다. 우리가 간 곳은 은산이 또래의 아이들이 모여 그저 춤추고 뛰어노는 신체 놀이 프로그램이 주를 이뤘는데, 과정을 등록하면서 은산이가 마음껏 뛰어노는 모습을 상상했다. 난 역시 멋진 엄마라는 자부심과 함께 말이다. “어린이 여러분, 안녕하세요! 선생님하고 파이팅할까요? 이리 나오세요.” 기대감으로 가득했던 첫 번째 시간. 30개월 안팎의 아이들은 해맑은 모습으로 선생님께 달려가 손뼉을 부딪치고 안기는 등 활기가 넘쳤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은산이는 내게 엉덩이를 붙인 채 꼼짝하지 않는 것이다. “은산아, 너도 가서 파이팅하고 와.” 엉덩이에 접착제라도 붙여놓은 건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어나라고 밀어내는 내 손을 온몸으로 저항한다. 음악을 틀어놓고 폴짝폴짝 뛰며 율동을 하는 시간에도 녀석은 그저 다른 친구들을 쳐다만 볼 뿐 일어서지 않는다. 이런 아이의 모습이 걱정스러웠는지 수업이 끝나자 선생님께서 내게 오셨다. “다른 아이들은 이미 몇 달 동안 저랑 이 프로그램을 해와서 친숙한 거예요. 은산이도 조금만 지나면 익숙해져서 괜찮을 거예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 정말 선생님 말씀대로 두 번째, 세 번째 시간이 되자 조금씩 엉덩이를 떼더니 지금은 제법 방방 뛰며 논다. 물론 아직 두 눈엔 수줍음, 몸짓엔 쑥스러움이 가득 차 있지만 말이다. 아이의 숫기 없는 모습을 본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쇼핑을 하다 가게 점원이 예쁘다고 말을 걸면 내 치마 뒤로 숨어버리곤 했다. 그리고 그 가게를 나올 때쯤 돼서야 방긋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요즘은 어린이집 선생님 앞에서도 뭐가 그리 쑥스러운지 내 뒤로 숨는 일이 종종 있다. 배시시 웃으면서 말이다. 그런 아이의 모습에서 초등학교 1학년 때 무척 쑥스러운 몸짓으로 선생님 손을 잡고 있던 사진 속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어릴 적 내성적이었던 난 외향적인 아이들이 참 부러웠다. 그보다 먼저 억지로 뭔가를 시키려는 어른들이 참 미웠다. 노래해봐라, 춤춰봐라, 넌 왜 이렇게 조용하니 등등. 나도 무대에 올라가 노래도 잘 불러보고 싶었고, 좌중을 압도할 만큼 재미난 이야기로 친구를 웃겨보고도 싶었다. 하지만 내 입에서 나간 노래는 평범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상하게 똑같은 이야기도 내가 하면 재미가 없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더더욱 움츠러들고 소심해졌다. 수업 첫 시간에 장기자랑이라도 하라고 하면 고개를 책상에 푹 처박고 있었고, 발표는 선생님이 시켜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때만 하는 일이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아나운서가 됐는지 가끔은 내가 봐도 신기하다. 하지만 이렇듯 철저한 ‘소심녀’도 여러 사람의 격려와 칭찬, 관심으로 지금 이렇게 무대에 설 수 있게 됐다. 날 일으킨 칭찬의 힘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유일하게 결혼하지 않은 젊은 여선생님이 우리 반 담임이셨다. 도회적으로 생긴 이목구비 때문에 때론 차갑게 보이기도 했지만 5학년인 우리들에게 젊고 예쁜 선생님은 우리의 자랑이었다. 어느 날 음악 시간. 노래에 별다른 소질이 없는데다 그날 역시 혹시 날 시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책상만 보고 있는데 나를 지목하셨다. “고민정, 도라지 타령 한 번 불러볼까?” 소심한 아이들의 공통점 중 하나가 시키면 요령 피우지 않고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 난 조그마한 목소리로 최선을 다했다. “박수! 민정이가 노래를 아주 잘하는데?” 당시 선생님께서는 별 뜻 없이 으레 한 말일 수도 있다. 자라나는 새싹에게 그것도 성악을 전공하는 아이도 아닌 그냥 일반적인 아이에게 굳이 타박을 늘어놓을 이유는 없었을 테다. 하지만 선생님의 그 말 한마디는 내게 큰 용기가 됐고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한 장면으로 내 머릿속에 저장돼 있다. 그림에 얽힌 사연도 있다. 난 왜 이리도 예체능에 소질이 없는지…. 음악, 미술, 체육 뭐 하나 잘하는 게 없었다. 다른 아이들은 예체능 시간을 놀이 시간으로 간주해 기다리곤 했지만 난 차라리 국어, 영어, 수학 시간이 더 좋았다. 뭘 하든 잘하지를 못하니 재미가 없고 재미가 없으니 더욱 흥미가 떨어지고, 악순환이 따로 없었다. 그때 이런 나를 미술학원에라도 보냈더라면 흥미라도 끌어낼 수 있었을 텐데 부모님 두 분 다 직장일로 바쁘신데다 셋째 딸이니 그런 세심한 부분까지는 신경 쓰지 못하셨을 거다. 그렇게 일상이 지속되던 어느 날 중학교 미술 시간이었다. 수채화를 그리면 매번 스케치북이 물의 과다한 사용으로 울룩불룩해지곤 했는데 이번엔 유화를 그린단다. 그것도 명화 따라 그리기. 초등학생의 그림 실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난 다른 건 몰라도 그대로 보고 따라 하는 건 곧잘 했다. 게다가 잘못되면 다시 덧칠하면 되니 금상첨화가 따로 없었다. 난 또 성실하게,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 내 그림이 우수상을 타게 된 것이다. 그림으로 많은 상을 타본 사람들에게 우수상은 그저 참가상과 같을 테지만, 그림으로 단 한 번도 상이라곤 타보지 못한 내게 그 상은 전국대회 대상 못지않았다. 내 그림은 학교 복도에 턱하니 걸렸고 그 이후 수많은 이사 속에서도 버려지지 않고 지금까지 우리 집에 잘 ‘모셔놓았다’. 물론 그때 그 상을 받은 이후로 다시는 상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지만, 그 일은 내게 그림 그리는 솜씨가 아예 없는 건 아니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계기가 됐다. 한 사람의 작은 칭찬, 작은 상은 내 인생에 큰 전환점까진 아니더라도 용기가 되고 긍정의 힘이 됐다. 움츠린 가슴을 펴게 해주었고, 열심히 하면 나도 할 수 있구나, 라는 걸 스스로 느끼게 해줬다. 만일 누군가 내 소심한 노래를 듣고 목소리가 왜 이렇게 기어 들어가느냐는 둥 그것밖에 못하느냐는 둥 이런 말을 했더라면, 내 그림을 보고 넌 왜 이렇게 표현을 못하느냐는 둥 창의력이 그게 다냐는 둥 이런 말을 했더라면 난 더 안으로 침잠했을 것이다. 더불어 나의 쑥스러움 많은 성격을 미워하며 자책했을 게 뻔하다. 끝으로 난 초·중·고, 대학까지 16년 동안 글로 칭찬받아본 적도 한 번 없었다. 글이라고 해봤자 일기나 독후감 정도였지만 언제나 글쓰기는 귀찮은 일이었다. 일기는 개학하기 하루 이틀 전에 몽땅 몰아서 썼고, 독후감은 위인전 제일 뒤에 나오는 요약 글을 짜깁기해서 써가곤 했다. 남편과 연애 시절 썼던 편지를 보면 유치하기 이를 데가 없다. 그 정도로 글쓰기에 전혀 소질이 없었는데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 책을 읽기 시작하고 한 문장, 두 문장 조금씩 글을 써 버릇하자 어느새 짧았던 글들은 두 권의 책이 됐고, 지금은 이렇듯 지면에 글을 연재하게 됐다. 내겐 천지가 개벽할 만한 일들의 연속이다. 남편이 끊임없이 용기를 북돋워주고 못난 내 글에 살뜰한 관심을 가져줬기에 가능한 일이다. 있는 그대로 사랑해 이런 경험들 때문인지 난 아이가 자신 없어 하고 쑥스러워하더라도 왜 그러냐고 타박하기보다 기다려주고 한 번이라도 더 칭찬해주곤 한다. “은산아, 쑥스러워서 그래? 그럼 엄마랑 같이 일어나서 율동하자.” “괜찮아. 안 해도 돼. 다음에 하면 되지.” 소심한 엄마가 이럴 땐 도움이 된다. 은산이의 마음을 깊이 공감하기에 억지로 끌어내지 않는다.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이 있듯 성격 또한 제각각이다. 예쁜 얼굴, 못생긴 얼굴은 있을지 몰라도 좋은 얼굴, 나쁜 얼굴은 없듯 모든 성격 또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조금만 건드려도 울음을 터트리는 성격, 한 가지에 몰두해 ‘오타쿠’ 기질이 있는 성격, 혼자 있는 시간이 제일 행복한 성격, 사람들을 웃기지 않으면 못 참는 성격,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는 성격 등 사람 수만큼 성격의 종류도 수억 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대개는 리더십이 있고 유머 감각도 있으며 명랑한 성격을 기준으로 삼는다. 마치 드라마 속 만들어진 캐릭터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네 삶은 누군가 쓴 각본이 아니다. 대범한 사람이 있으면 소심한 사람도 있어야 하고, 유머가 넘치는 사람이 있으면 진지한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숫기가 없는 은산이는 대신 세심한 성격을 가진 아이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꼼꼼히 관찰한다. 책 속 캐릭터들도 두어 번만 보면 다 기억해내고, 집 안에 있는 물건들도 평소와 다른 곳에 위치해 있으면 이게 왜 여기 있느냐며 내게 묻곤 한다. 나도 발견하지 못한 것들까지도 말이다. 그런 점들이 특히 더 발휘되는 놀이가 퍼즐이다. 아직 세 돌도 안 된 녀석이 80개짜리 퍼즐도 두어 번만 해보면 혼자서도 척척 해낸다. 그러곤 퍼즐 속 작은 그림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관심을 보인다. 또 무척 조심성이 많은 녀석이다. 자석으로 된 놀이기구인 ‘맥포머스’로 자동차를 만들어주면 다른 아이들은 금세 손으로 팍 눌러 부수기 일쑤지만 은산이는 끝까지 잘 가지고 논다. 소꿉놀이 음료 병도 가벼운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입으로 후 하고 불기만 해도 툭툭 쓰러지는데, 은산이는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좋아한다. 오히려 옆에서 지켜보는 내가 신경 쓰여 원목으로 된 튼튼한 걸로 바꿔줄까 고민한다. 또 7개월 동생이 신기해 보이는 구멍마다 손가락을 넣어볼 만도 한데 조심스럽게 토닥거리며 살살 어루만져준다. 무언가에 집중하는 시간이 꽤 길다. 책은 주로 엄마나 아빠에게 읽어달라고 하지만 하루에 한 번씩은 꼭 혼자서 책을 본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것도 앉은 자리에서 수십 권의 책을 꼼짝도 않고 읽어내려간다. 그때는 아무리 밥 먹는 게 급해도, 자야 할 시간이어도 간섭하지 않고 집중할 수 있도록 내버려둔다. 그러면 대략 30~40분은 소리 내어 읽기도 했다가, 눈으로만 보기도 했다가 하면서 자신만의 시간을 즐긴다. 퍼즐도 10개가 넘는 종류들을 앉은 자리에서 다 완성될 때까지 집중한다. 아이가 수줍음이 많다는 것에만 신경 썼다면 아이의 이런 보물 같은 장점들을 짚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스스로에 대해 아는 일은 참 힘들다. 그래서 우리는 성인이 돼서도 ‘내 꿈이 뭐지? 내가 잘하는 게 뭐지?’ 하며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는다. 하지만 옆에 있는 사람은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알 수 있다. 내성적인 내게서 아나운서의 기질을 발견하고 글 쓰는 소질을 끄집어낸 내 남편처럼 말이다. 엄마로서 나의 역할이 아이의 장단점을 찾아내 알려주는 데 있다면, 아이는 자신의 기질, 성격을 정확히 파악함과 동시에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다. 스스로를 귀히 여기는 것과 남을 귀히 여기는 것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스케줄로 녹초가 돼 집에 들어온 날이었다. 안 자고 밖으로 나왔다고 아빠한테 혼날 것 같았는지 문틈으로 고개를 빠끔히 내민다. 괜찮으니 이리 나오라고 하자 내게 쪼르르 달려와 안기는 은산이. 그러면서 마치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엄마 예쁘다.” 이어서 힘들어 한숨을 푹 쉬는 내 모습을 놓치지 않고 내 볼에 쪽 하고 뽀뽀를 한다. 그러곤 이렇게 말한다. “엄마 이제 기분 좋아?” 난 이렇게 매일 아들에게서 세심한 배려로 치유받는다. profile 고민정은 … KBS 30기 공채 아나운서. 대학 선배이자 열한 살 연상인 시인 조기영과 결혼해 6년 만에 아들 은산이가 태어났고 지난 3월, 둘째 딸 은설이를 만났다. 저서로는 「샹그릴라는 거기 없었다」, 「그 사람 더 사랑해서 미안해」가 있다. <■기획 / 김지윤 기자 ■글 / 고민정 ■사진 / 박재찬 ■의상 협찬 / 모이몰른(02-3215-0017)>
-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
-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22) 여행은, 엄마의 환상이다
- 2014. 09. 29 11:15 육아/교육
- 부푼 기대를 안고 1년 만에 다시 찾은 제주도. 이번 가족 여행은 정말이지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겼다. 아들과의 오붓한 물놀이를 꿈꾸며 수영을 배운 엄마의 노력은 파도와 함께 물거품이 됐고, 연신 옹알이를 하는 딸 덕에 당분간 외식은 금기 사항이 됐다. 개구쟁이가 된 은산이, 돌고래가 된 은설이. 이들 가족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다시 만난 제주도 1년 전쯤 이 지면에 제주 여행을 다녀오고 쓴 글이 생각난다. 돌이 갓 지난 은산이와 함께 떠난 가족 여행에서 난 걱정했던 것에 비해 큰 문제없이 집으로 돌아왔고 그에 감동해 글을 써내려갔다. 처음 타는 비행기에 겁먹지 않을까,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여행한다는 게 아이에겐 정신적, 육체적으로 스트레스가 되지 않을까 등등의 걱정을 했지만 녀석은 매번 내 걱정을 파도가 모래 위 낙서를 지우듯 말끔히 지워버리곤 했다. 그런 녀석을 보며 남편과 나는 아이가 잠든 밤이면 뿌듯한 미소와 함께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 기억으로 인해 기대치가 높아졌던 것일까. 아니면 내가 갖고 있는 일명 ‘지랄 총량’ 가운데 일부를 소비한 것일까. 단정 지을 순 없지만 제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마지막 날 난 나름 결론을 내렸다. 아이와의 여행은 환상을 깨는 여행이라고. 난 그야말로 서울 토박이다. KBS 입사 후 지역 순환 근무 때 빼고는 서울에서 벗어나 살아본 적이 없다. 태어날 때부터 아스팔트를 밟으며 걸었고, 바다는 가끔 떠나는 여름휴가 때나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난 농촌에서 나고 자란 남편이 꽃과 나무 이름을 읊으며 그에 얽힌 추억을 되새기는 모습을 보면 부러웠다. 바닷가에서 자란 화가의 그림 속에서 풍기는 바다 냄새를 보고 맡으며 그러한 풍부한 색감을 온몸으로 체득하고 있음에 내 자신이 작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릴 적부터 내가 그린 그림의 바다는 그저 파란색일 뿐이었으니까. 이렇듯 시골에서의 삶을 꿈꾸던 내게 남편이 그랬다. “어쩌면 당신 같은 도시 태생들이 오히려 더 시골을 동경하는 것 같아. 나도 물론 도시보다 시골에서 살고 싶긴 하지만 적어도 그곳이 가끔 휴가 때 가서 느끼는 낙원은 아니라는 건 알거든. 나 같은 시골 태생들에게 자연은 끝없이 노동해야 하는 삶의 현장이거든. 그래서 나도 어렸을 땐 도시로 가고자 하는 욕망이 컸고. 일단 당신은 바퀴벌레만 봐도 기겁을 하잖아. 귀뚜라미를 보고 바퀴벌레 같다고 했지? 나로선 상상이 안 가는 발상이라고. 그저 글이나 그림 속에 나오는 풍경의 시골만 생각하다간 실패하기 쉽지.” 하긴 아프리카에서의 삶을 꿈꾸다가 다양한 곤충에 관한 얘기를 듣고 심하게 흔들렸던 나이다. 하지만 인간이란 모름지기 다 닥치면 하지 않을까? 4년 전 중국 소수민족들의 마을로 배낭여행을 다녀온 후로 생긴 막연한 자신감이다. 검정 때가 꼬질꼬질 낀 손으로 빚은 만두도 척척 잘 먹었고, 허름한 게스트 하우스의 시커멓게 전 이불 위에서도 잘 잤으니까. 어쨌든 도시를 벗어난 삶을 완전히 져버릴 순 없었다. 그런 내게 제주도는 살고 싶은 지역 중 한 곳이다. “우리 제주도에서 살까? 아이들이 항상 바다를 보며 느낄 수 있다는 건 정말 축복이잖아. 10분만 달리면 바다고, 또 10분만 달리면 산이고. 집 앞 놀이터에서만 놀던 아이보단 바다에서 놀던 아이들의 정서가 더 풍요롭지 않을까?” 여행 가방을 싸면서도 만일 은산이가 바다를 정말 좋아한다면 그냥 눌러앉을까? 경제활동은 어디에서 할 수 있을까? 학교는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 등등 구체적인 생각들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조각난 엄마의 꿈 제주에 도착한 첫날, 우리는 해수욕장 인근에 위치한 게스트 하우스에 짐을 풀었다.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추의 작은집’이라는 곳이었는데 오픈한 지 얼마 안 돼 깨끗한데다 수심이 얕아 아이들이 물놀이하기 좋은 금능 해수욕장과 가까워 이것저것 따져보지도 않고 정한 숙소였다. 그곳에서 거의 1주일을 머물면서 우린 여러 번 바닷가에서 하루 온종일을 허비했다. 1 나는야, 모래성 쌓는 은산 왕자! 2 은산아, 은설아…, 엄마, 아빠는 어디서 자라고? 3 힘들었지만 그래도 기념사진은 필수! 아이를 갖기로 마음먹었을 때쯤 혹시나 아이가 물에 빠졌을 때 구하러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다. 띄엄띄엄 배워 멋진 자세와 날렵한 몸놀림은 아니지만 아무런 장비 없이도 물 위에 뜬다는 사실, 느리긴 하지만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은 내게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15년 동안 단 한 번도 수영장에 가지 않았고, 해외 배낭여행 중에 만난 멋진 계곡에선 남들 다 수영할 때 난 그저 물 밖에서 구경만 했다. 그런 내가 수영을 배웠으니 어깨에 얼마나 힘이 들어갔겠는가. 제주 바다에 가면 쪽빛 바다에서 멋들어지게 수영을 해볼 참으로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은산이를 튜브에 태우고, 난 그걸 잡고 헤엄쳐 나가면 은산이가 신기해하겠지? 진짜 좋아할 거야.’ 에메랄드빛 바다에서 배영을 하고 바다 밑으로 잠수해 들어가 조개를 주워오는 상상을 했던 건 무리였던 걸까? 나의 기대는 단번에 무너져버렸다. “은산아! 바다야! 우와. 파도가 밀려오네. 우리 파도타기 할까?” 바다를 보자마자 물에 뛰어들 거라 생각하고 아예 수영복을 입혀 왔는데 은산이는 모래사장에 우두커니 선 채 물에 들어오지 않았다. 평소에 감탄사를 잘 연발하는 아이인데 드넓은 바다 앞에선 그저 무덤덤하다. “이리 와봐.” “나 모래놀이 할 거야!” 아프리카 여행을 위해 아들을 낳고 싶다던 내게 누군가 그랬다. 여행을 싫어하고 곤충을 무지 무서워하는 아들이 태어날 수도 있다고. 날파리만 봐도 기겁을 하는 아들이 태어났다. 바다에서 노는 걸 무척 좋아해서 자꾸 바다 가자고 하면 어쩌지, 하던 내 말에 또 누군가 그랬다. 물을 무서워할 수도 있다고. 1주일 동안 바닷물에 발목만 담근 아들이 태어났다. 누가 그랬나! 아이들은 다 물을 좋아한다고. 은산이는 평소에도 깔끔한 녀석이다. 밥풀이 손가락에 묻으면 꼭 떼어달라고 했고, 머리카락이며 먼지를 내 눈엔 잘 보이지도 않는데 꼭 집어서 버려달라고 내게 주곤 했다. 그런데 그 ‘깔끔’을 제주 바다에서 떨고 있는 게 아닌가. 어쩌다 파도가 크게 쳐 바지에 튀면 마치 구정물이라도 튀어 옷이 더러워진 아이처럼 잔뜩 찡그렸다. 그래도 집에서 목욕할 땐 첨벙첨벙하며 곧잘 노는 편이라 좋아할 줄 알았는데 반전이다. 예상치 못한 은산이의 반응에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데 남편이 그런다. “나도 그랬어. 바닷물이 몸에 묻으면 끈적끈적하기도 하지만 그냥 왠지 온몸에 묻히고 싶진 않았거든.” 어쩜 저런 것까지 아빠를 닮았을까. 그래, 누군가 그랬지. 원래 자식은 안 닮았으면 하는 것만 꼭 골라서 닮는다고. 결국 제주의 바다를 눈앞에 두고 그저 백사장 위에서 장난감 그릇들로 상을 폈다 접었다만을 반복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은 온몸에 모래를 묻혀가며 철퍼덕 앉아 노는데 은산이는 모래 묻는다며 끝까지 쪼그려 앉아서 놀았다. 난 그날로 제주를 비롯한 바닷가 인근에서 사는 꿈은 접기로 했다. 정말 오랫동안 꿔온 꿈이었는데 이렇게 한순간에 정리되다니…. ‘설핀’ 은설이 난 굳이 출산을 장려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출산과 육아는 분명 어려운 일이고 많은 걸 포기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누구에게도 쉽게 애 낳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 또한 아이가 없던 시절 아이를 왜 낳지 않느냐는 말에 언어폭력이란 이런 것이구나, 라고 느꼈기에 더더욱 그렇다. 난 그저 보여주고 싶었다. 아이와 사는 모습, 아이로 인해 생기는 추억들, 아이와 함께여서 더 풍성해지는 내 삶이라는 스케치북의 그림들을 말이다. 그리고 그 모습이 아름다워 보인다면 아이를 낳을 테고 그렇지 않다면 낳지 않을 테고. 선택은 온전히 그들에게 맡기고 싶다. 어쩌면 이 지면에 아이와 가족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이유도 내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고 선택하게 하고 싶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름 이런 심오한 개똥철학을 가지고 있는데 녀석들이 영 도와주질 않는다. 아이와 함께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 입도 입인지라 일단 맛집을 찾긴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개구쟁이 31개월 아들이랑 뒤집기와 옹알이를 시작했지만 아직 혼자 앉아 있지도 못하는 6개월 딸을 대동해야 하니 따져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일단 유모차가 들어갈 수 있는 넓은 곳이거나 아기가 누울 수 있는 마루가 있는 곳이어야 한다. 요즘은 맛집들이 소규모가 많아 유모차 부대들에겐 그림의 떡이다. 뭔가를 구워 먹는 집도 우리에겐 굉장한 모험이 필요한 곳이다. 연기가 아이들에게 안 좋은 건 물론이고 가끔씩 기름이 튀기 때문에 여간 위험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제주에 있을 때 이 집에서만큼은 꼭 먹어봐야 한다고 해서 갔다가 핼쑥해진 얼굴로 나온 일도 있었다. 남편과 둘이었지만 은산이 먹이랴, 고기 구우랴, 연기 쫓으랴, 우는 은설이 안아주랴…. 뭘 먹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 밖에도 너무 조용하면 우리가 방해될까 봐 안 되고, 아이도 먹어야 하니 매운 음식만 있는 집도 안 된다. 그래도 아이를 키운 햇수가 늘수록 요령도 생겨 나름 이 집 저 집을 다니며 먹는 욕구를 해소해왔다. 하지만 이것도 이젠 과거 일. 제주 여행을 기점으로 당분간은 다 함께하는 외식은 자제하기로 했다. 그 이유는 얼마 전부터 옹알이를 시작한 은설이가 마치 득음이라도 하려는 건지 엄청나게 소리를 질러대기 때문이다. 그래서 별명도 붙였다. ‘설핀’. 발음은 ‘썰퓐’. 마치 돌고래 소리처럼 고음의 소리를 내기에 은설+돌핀=설핀. 은산이가 말이 많은 거야 아나운서 엄마를 둬서 그렇다 치자. 마치 확성기로 소리를 내는 듯 높게 찌르는 은설이의 목소리는 식당에 있는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처음엔 머리숱이 많네요, 애기가 정말 순하네요, 어쩜 이렇게 귀여워요, 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그날 이후 요즘엔 목청이 정말 좋네요, 라는 말을 참 많이 듣는다. 그래서 남편과 난 옆자리 손님들에게 끼치는 민폐를 최소화하기 위해 밥을 먹는 게 아니라 초고속으로 음식을 입에 들이붓고 쫓기듯 빠져나왔다. 우리를 보며 아이를 낳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하는데 이건 오히려 반대일 것이다. 아…, 개똥철학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워서야. 드라마에서 보듯 네 식구가 화목한 모습으로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며 식사를 하는 때는 과연 언제쯤 올까. 아이들과의 외식은 그야말로 전쟁이 따로 없다. 여행의 재발견 아이들과의 여행, 그것도 환상의 섬 제주도 여행은 날 환상 속에서 끄집어내 현실로 끌어내린 여행이었다. 바닷가에서 살겠다는 엄마의 꿈을 깔끔하게 정리해준 은산이, 가는 식당마다 득음의 경지를 보여준 은설이. 깨물어주고 싶은 내 자식들이다. 이 두 녀석의 일화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분명 집에 있을 땐 밤에 8시간쯤은 쭉 자서 새벽에 깨본 적이 없어 숙소 주인에게도 우리 애가 새벽에 울 일은 없을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건만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새벽마다 돌고래 소리로 울어댔다. 아기 변기가 있을 리 만무한 여행지에서 은산이는 마지막 날 결혼 안 한 주인 이모에게 마치 강아지처럼 마당에 종이 깔고 응가 하는 모습을 보이는가 하면, 은설이는 김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등까지 적실만큼 엄청난 양의 응가를 방출해 화장실 세면대에서 거의 목욕을 하는 기염을 내뿜었다. 난 그때 이상한 눈빛으로 날 힐끔 쳐다보던 외국인을 잊을 수가 없다. 정말이지 출발하는 날부터 도착하는 날까지 깨알 같은 추억을 안겨준 내 자식들이다. 친한 친구에게 기나긴 이야기들을 요약해 ‘아이와의 여행은 환상을 깨는 여행’이라고 문자를 보냈더니 이런 답장이 왔다. ‘아이들과의 여행은 그냥 여행지에서 애 보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명언이다. profile 고민정은 … KBS 30기 공채 아나운서. 대학 선배이자 열한 살 연상인 시인 조기영과 결혼해 6년 만에 아들 은산이가 태어났고 지난 3월, 둘째 딸 은설이를 만났다. 저서로는 「샹그릴라는 거기 없었다」, 「그 사람 더 사랑해서 미안해」가 있다. <■기획 / 김지윤 기자 ■글 / 고민정 ■사진 / 박재찬 ■사진 제공 / 고민정 ■의상 협찬 / 모이몰른(02-3215-0017)>
-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
-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21) 내 마음에 사랑이 싹트네요
- 2014. 08. 27 11:52 육아/교육
- 가끔씩 상상해본다. 아이가 어른이 되면 어떤 모습일까? 나아가 그림을 더 그려본다. 아이가 사랑하게 될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나를 꼭 닮은 사람일까, 아니면 나와 정반대의 사람일까? 두근두근 고백을 앞두고 떨리던 바로 그 순간처럼 궁금하고 기대된다. 아마도 부모란, 평생 아이를 짝사랑하는 존재인가 보다. 애교쟁이 은산이 산이는 엄마, 아빠를 닮아서인지 아침잠이 많은 편이다. 그래서 평소에는 아침 먹을 시간도 없이 어린이집 가자고 어르다 보면 이미 등원 시간을 훌쩍 넘기곤 했다. 그런데 그날 아침은 평소보다 일찌감치 눈을 뜨더니 엄마, 아빠까지 다 깨웠고, 아침을 먹었는데도 아직 여유가 있었다. 이것저것 책을 읽어주고 있었는데 문득 이러다간 집에서 계속 놀겠다며 어린이집 등원을 거부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시간 상관없이 나갈 채비를 했다. 그러곤 조금 이르긴 했지만 어린이집에 보냈다. “산이 오늘 일찍 왔네?” 평소 은산이가 천사 같다며 잘 따르던 선생님이 계시는데 그날 역시 그 선생님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그런데 은산이가 대뜸 엄마가 시킨 것도 아닌데 이러는 것이다. “선생님 보려고 일찍 왔잖아요.” 그 옛날 남편도 내게 자주 들려주지 않던 말을 녀석이 하는 것이다. 선생님의 얼굴엔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사람들한테 하는 걸 보면 참 다정다감하다. 하루가 다 지나고 오후가 돼 하원시키러 갔더니 이번엔 복도에서 선생님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넘쳐났다. “은산아 너, 여자 여럿 울리겠다. 아무한테나 하면 안 돼.” 녀석이 선생님들에게 윙크를 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보면 애굣덩어리인 줄 알겠다. 산이는 옹알이를 하던 갓난아이 때부터 웃음을 잘 보여주는 아기가 아니었다. 동생 설이가 태어나 엄마, 아빠 눈만 마주쳐도 방긋방긋 웃는 걸 보고 나서야 산이가 마냥 잘 웃어주는 아기는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산이만 키웠을 때는 원래 아기 웃기는 게 무척 힘든 일이라고만 생각했을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시크한 녀석인데 자기 맘에 쏙 드는 사람이 있거나 기분이 무척 좋을 때는 저런 애교를 떤다. 게다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쪽 눈 윙크가 안 돼 양쪽 눈을 다 질끈 감아야 했는데 이젠 완벽히 한쪽 눈만 찡긋하는 게 되던 참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어머니, 오전에 산책을 하는데 은산이가 글쎄 민들레꽃을 한 송이 딱 꺾더니 저한테 주는 거 있죠?”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거다. 지금으로부터 십수 년 전 남편은 장미꽃으로 화관을 만들어 머리에 씌워주며 나의 성년의 날을 축하해줬다. 탐스러운 장미꽃 스무 송이로 만든 화관이었는데 적어도 그 순간 나는 영화 속 여주인공이 부럽지 않았다. 만들어진 화관을 받았어도 좋았을 텐데 한 송이 한 송이 직접 엮은 화관이라니…. 그날 밤 그 화관을 조심스럽게 집으로 가져와 내 방에 걸어두었다. 그 후로도 화관은 먼지 쌓인다고 버리라는 엄마의 성화에도 몇 년 동안 계속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화관 말고도 내 방에 걸려 있던 게 또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하얀 조개껍데기로 엮은 목걸이였다. 인사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메이드 인 차이나’가 아닌 ‘메이드 인 조기영’인 핸드메이드 목걸이. 서로의 마음을 정확히 가늠하지 못하고 있던 때 바람 쐬러 우리는 인천에서 가까운 용유도에 갔다. 하얗게 부서지던 파도, 새끼손톱만 한 소라껍데기, 바닷물에 바스락거리는 모래알갱이까지 내 감성을 자극하던 날이었다. 저 사람이 날 사랑하는 걸까? 두근두근대며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 없어 애가 타던 때 그 사람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노끈에 주위에 하얗게 널려 있는 조개껍데기들을 엮어 내 목에 걸어주었다.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없었다면 아마 그 목걸이를 내 목에 걸어보지도 않았으려니와 집에 들어가기 전에 바로 쓰레기통에 버렸을 것이다. 난 유난히도 이성에게 받은 물건에 민감하다. 나름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그냥 쓸 법도 한데 왠지 몸에 지니고 있으면 내가 그 사람의 마음을 받아준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상대방에게 쓸데없는 여지를 남겨두는 것 같아 아예 집 안에 들이지 않는다. 약간 오버인 듯싶지만 어쨌든 내 몸에 밴 습성 중 하나다. 이런 나인데도 그때 난 마치 값비싼 목걸이인 것처럼 조금이라도 부서질까 봐 조심스럽게 집으로 가져와 내 방 한쪽에 걸어두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사람은 그때에도 내게 최선을 다했고, 내게 최상의 존재였다. 방 안 가득 촛불을 밝혀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는가 하면, 멀리 떨어져 있을 땐 노트 한 권을 그리움과 사랑의 편지로 가득 채워 보내주기도 했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값비싼 명품은 한 번도 선물하지 않았지만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모두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만이 차지할 수 있는 선물들이었으니까. 이런 남편의 행동들로 미뤄보건대 산이가 선생님께 사랑을 표현하는 건 어찌 보면 참 당연한 결과다. 그 유전자가 어디 가겠는가. 사랑하는 여인을 대하는 다정다감함은 세월이 흘러도, 세대가 바뀌어도 대물림되며 변함없이 이어져간다. 단, 그 사랑을 받아온 나의 입장만 달라졌을 뿐. 남편에게서 그런 대접을 받을 땐 호사를 누린다며 좋아했는데 이젠 거꾸로 그런 대접을 받는 다른 여자를 봐야 하는 입장이 되다니…. 사뭇 시어머니께서도 지금 나와 비슷한 심정이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에 죄송한 마음이 살짝 든다. 작업의 정석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적어도 한 번쯤은 다양한 종류의 ‘작업’을 걸고 받고 했을 것이다. 꼬마 시절 옆집 오빠에게 받은 ‘작업’부터 결혼에 골인하기 전까지 받은 ‘작업’까지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하면 한두 시간 쯤은 훌쩍 지나가지 않을까? 스물한 살 때 열한 살 연상의 남자에게 푹 빠져 꽃 같은 20대를 온통 한 남자에게 바쳤으니 다양한 연애 경험을 갖고 있지는 못하지만 나도 한때는 이러저러한 ‘작업’이란 걸 받아본 ‘여자’였다. 정확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이었다. 같이 몰려다녔던 친구들은 학교 다닐 때에도 가끔 나이트클럽을 들락날락거렸다. 그에 비해 좀 고지식했던 나는 나이트클럽은 스무 살이 되면 가겠다고 선포하고 친구들의 모임에 빠지곤 했다. 아마 그때 같이 몰려다녔더라면 영화 ‘써니’에서처럼 친구들과 진한 추억을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긴 하지만 소심한 내가 어디 가겠나. 시간을 돌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게 고등학교 3년을 보내고 스무 살이 되던 1월 1일, 드디어 나이트클럽에 갔다. 통조림 과일과 우유, 얼음이 적당히 섞인 안주에 병맥주를 마시며 춤 잘 추던 친구들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가끔 웨이터의 강제 연행에 이끌려 처음 보는 남자 옆에 앉아 이야기를 나눠보기도 했지만 할 말도 딱히 없고 쑥스럽기도 해 1분도 채 안 돼 제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결국 난 음악에 몸을 제대로 실어보지도 못한 채 귀를 때리는 음악과 현란한 조명 그리고 내가 봐도 예뻤던 친구들의 몸짓을 보는 데 시간을 다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한 장의 종이와 함께. 춤이라고 할 순 없고 친구들의 성화에 못 이겨 몸을 흐느적거리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스케치북 한 장을 손에 쥐어주고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내 모습이 스케치돼 있었다. 당시엔 휴대전화 대신 대부분 삐삐를 가지고 다녔는데 그 삐삐 번호조차 없이 그저 내 그림과 잘 기억나진 않지만 ‘그녀를 그리며’와 같은 짧은 글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 괜찮은 ‘작업’이고 장면인데 난 받으면 안 될 그림을 받은 사람처럼 그 그림을 경계했다. 그마저도 난 나이트클럽에 그냥 두고 오려는 걸 친구들이 기념으로라도 가져가라고 해서 억지로 들고 나왔고, 결국 집 앞 쓰레기통에 버렸다. 액자까지 할 건 아니지만 어디 책꽂이 귀퉁이에라도 꽂아두었더라면 애 둘 낳고 아줌마가 된 지금 꺼내 보면서 나의 ‘한때’를 흐뭇하게 회상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금할 수가 없다. 이렇듯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으로 작업을 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애장품으로 작업을 걸어온 이도 있었다. 대학에 갓 입학한 난 햇병아리처럼 삐약삐약대며 교정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다른 단과대는 물론 동아리 중에서 조금이라도 끈이 있는 곳이라면 내 취향과 관계없이 고개를 들이밀곤 했다. 그중 어느 동아리에 있던 1년 선배였다. 스포츠를 전공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으레 떠올리게 되는 모습과 참 잘 들어맞는 사람이었다. 겉으론 강해 보이지만 속은 은근 여리고 단순한 만큼 뒤끝이 없는 그런 사람 말이다. 그런데 내가 그 동아리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내게 고백을 해오는 것이었다. “민정아, 이거 받아줄래?” 그 선배가 내게 건넨 건 축구 유니폼과 옥반지였다. “이 옷은 내가 아끼는 유니폼이고 이 반지는 어머니가 물려주신 거야. 좋아하는 여자 생기면 주라고 그러셨거든. 물론 네가 지금 당장 내 마음을 안 받아줄 수도 있겠지. 나도 곧 군대 가야 하고. 그냥 네가 잘 간직하고 있다가 나중에 제대하고 나서 마음이 있다면 그때 대답해줬으면 좋겠어. 물론 내 마음을 제대하고 나서 털어놔도 되지만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때 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No’. 일단 나이 차 많은 오빠 둘이 있어서 그런지 웬만큼 나이가 많지 않고서는 별로 오빠라고 느끼지 못하던 나였다. 게다가 내가 원하던 사람은 나보다 세상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는 사람인데 아쉽게도 그는 책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쨌든 내 마음과 상관없이 일단 보관하고 있어달라고 하니 집에 가져오기는 했는데 참 처치 곤란이었다. 나름 그 사람에게는 소중한 물건인데 함부로 버릴 수도 없고…. 결국 내 옷장 깊숙한 곳에 꽤나 오랫동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가 졸업할 때쯤 처리했던 걸로 기억한다. 제대하고 가져가면 좋으련만 그때는 또 일단 내가 가지고 갔으니 그냥 가지란다. 이렇게 무책임할 수가! 아무튼 난 그 선배에게 정말로 다른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면 전해줄 생각에 가지고 있긴 했으나 결국 제 주인을 찾지 못했다. 이런 작업들 외에도 이메일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사람도 있었고, 후배 시켜 내 휴대전화 번호를 알아오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이는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적극적이지 않아 미적지근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너무 들이대 부담스러웠다. 이랬던 내게 지금의 남편은 미지근하지도 뜨겁지도 않게 서서히 다가왔고 결국 한 여자의 20대를 그리고 인생 전체를 차지했다. 멋진 글씨와 글솜씨라는 재능으로 1차 작업을 했고 적당히 완급 조절을 하며 내게 다가왔다. 그 사람은 나름 많은 나이 때문에 천천히 다가왔던 건데 난 그 조심스러움이 날 소중히 여겨주는 것 같아 좋았다. 날 일방적으로 끌고 가지도, 그렇다고 무작정 기다리지도 않았던 그는 의도치 않게 ‘밀당’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애장품을 줄 때도 어디선가 본 듯한 뻔한 물건들이 아닌 정말 자신의 손때가 묻은 것들을 건네주었다. 자신이 재미있게 봤던 책이나 직접 써내려간 엽서 한 장 등등. 때론 영화 시작을 기다리면서 티켓에 시를 한 편 써주기도 했는데 그 티켓은 아직도 잘 보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살며시 내 어깨에 올라온 손은 내 가슴을 떨리게 했고, 날 안아주던 품은 사랑의 감정 그 이상을 느끼게 했다. 누구를 닮았을까? 우리 딸 설이는 어떤 작업을 받게 될까? 어떤 남자에게 자신의 인생을 함께하자고 말할까? 아니 그 이전에 어떤 남자친구들을 만날까? 아들 산이는 어떤 여자에게 매력을 느낄까? 엄마인 날 닮은 사람을 좋아할까, 반대로 나에게 없는 걸 가진 여자를 좋아할까? 어떤 방식으로 사랑하는 이에게 작업을 걸까? 첫 데이트를 기다리는 심정만큼이나 궁금하고 기대된다. ‘은산이가 날 잘 따르는 걸 보면 날 닮은 여자를 만나지 않을까? 아니지, 엄마만 한 여자는 없다고 그러는 건 아닐까?’ 혼자 상상하며 킥킥대고 있는데 거실에서 은산이의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싹트네, 싹터요. 내 마음에 사랑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내 마음에 사랑이….” profile 고민정은 … KBS 30기 공채 아나운서. 대학 선배이자 열한 살 연상인 시인 조기영과 결혼해 6년 만에 아들 은산이가 태어났고 지난 3월, 둘째 딸 은설이를 만났다. 저서로는 「샹그릴라는 거기 없었다」, 「그 사람 더 사랑해서 미안해」가 있다. <■기획 / 김지윤 기자 ■글 / 고민정 ■사진&장소 협찬 / 서주성, 박소현, 정상진(스튜디오 숲 홍대점, 02-334-9598, www.soopstudio.co.kr) ■의상 협찬 / 게스 키즈(02-516-5611),트라이 크리켓(02-3485-6052)>
-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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