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671 건 검색)
- 조태열 “일본, 과거사 문제 진지하게 임해야”, 이와야 “한국과 잘 소통”
- 2025. 01. 13 19:22정치
- ... 기자회견을 진행한 건 2011년 10월 이후 약 14년 만이다. 두 장관은 이날 일본 사도광산 추도식 등 과거사 관련 문제도 논의했다. 조 장관은 “추도식은 희생자를 진심으로 위로하고 역사적 의미를 기억하는...
- 외교부의 태세 전환?…‘2025 일본 개황’에 과거사 왜곡 사례들 다시 수록
- 2025. 01. 05 20:47정치
- .... 외교부는 이번 개황에 1951년부터 지난해까지 일본 총리 등 주요 인사들이 역사를 왜곡하거나 과거사와 관련해 반성하는 내용의 발언을 요약·정리해 실었다. 독도 영유권 주장 등 역사 왜곡 발언은...
- [신년 여론조사] 트럼프와 정상외교 현안은 ‘수출과 관세’…‘일본에 과거사 문제 제기해야’ 우세
- 2024. 12. 31 14:04정치
- ... ‘협력과 함께 미해결 과거사 문제도 적극 제기해야 한다’는 응답이 53%로 과반을 차지했다. ‘과거사 문제보다 미래지향적 협력에 주력해야 한다’는 45%였다. 이념과 지지 정당 등에 따라 답변이...
- 2025 신년기획
- [12·3 비상계엄 사태]진실화해위 위원들, “비상계엄은 과거사 청산 의미 없게 만드는 행위”
- 2024. 12. 05 17:54사회
- ...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야당 추천 위원들이 5일 “12·3 비상계엄은 위헌·위법하며 과거사 청산을 의미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진실화해위...
- 윤석열 탄핵 정국
스포츠경향(총 157 건 검색)
- 최진혁, 사기 당해 전셋집까지 팔았다…母 울린 과거사 (미우새)
- 2024. 12. 27 12:43 연예
- SBS 제공 배우 최진혁의 모친이 아들의 모습을 보며 눈물을 쏟는다. 최근 진행된 SBS 예능프로그램 ‘미운 우리 새끼’ 녹화에서 최진혁은 열기가 가득한 팬미팅 현장을 공개하며 새로운 아시아 프린스의 탄생을 알렸다. 드라마 ‘상속자들’ OST부터, 직접 작사에 참여한 신곡 외에도 팬미팅을 위해 열심히 연습했던 BTS 정국의 ‘Standing Next to You’ 댄스까지 완벽하게 소화해 내는 최진혁의 모습에 스튜디오의 모두가 감탄을 연발했다. 아들의 팬미팅을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라는 진혁 母는 긴장된 마음으로 입장했고, 한국어로 익숙한 듯 “어머니”라고 부르며 사진을 함께 찍어 달라는 팬들의 요청이 쏟아지자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들이 실수할까 긴장했던 진혁 母는 팬미팅 도중 최진혁의 한 마디에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는데, 과연 어머니를 눈물짓게 한 최진혁의 한 마디는 무엇이었을지, 관심이 집중된다. SBS 제공 한편 최진혁 母子는 자카르타 최대 규모의 해산물 요리 식당을 찾았다. 함께 식사하던 도중 진혁 母는 과거를 회상하며 갑자기 눈물을 보여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가수 데뷔를 꿈꾸며 서울에 상경했던 최진혁의 꿈을 미끼로 사기 쳤던 사람 때문에 전셋집까지 팔았던 속 사정을 고백한 진혁 母는 힘들었던 과정들을 겪고 마침내 큰 무대에 선 아들의 모습에 감동해 눈물을 보였다. 최진혁 역시 당시의 심정을 털어놔 모두의 공감을 얻었다. 감동의 순간도 잠시, 해산물의 무게로 가격을 계산하는 식당에서 치명적인 계산 실수를 저지르고 만 최진혁의 모습에 진혁 母는 물론, 스튜디오의 母벤져스 역시 경악하고 마는데, 최진혁이 저지른 실수에 관심이 집중된다. 반전 매력이 넘치는 ‘아시아 프린스’ 최진혁의 자카르타 팬미팅 현장과 母子 여행은 오는 29일 오후 9시 5분 방송되는 ‘미운 우리 새끼’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채널예약] ‘완벽한 가족’ 윤상현 멱살 잡고 흥분한 김병철···김병철 아들 죽음에 얽힌 과거사 밝혀진다!
- 2024. 09. 18 07:56 연예
- 빅토리콘텐츠 ‘완벽한 가족’ 김병철이 윤상현의 멱살을 잡고 분노한다. 18일 방송되는 KBS2 수목드라마 ‘완벽한 가족’(제작 빅토리콘텐츠/ⓒ함창석, 주은/대원씨아이) 11회에서는 경찰서에서 만난 최진혁(김병철 분)과 최현민(윤상현 분)의 대치 상황이 그려진다. 17일 공개된 스틸 속에는 극도로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흥분한 진혁과 상처로 얼룩진 얼굴에서 비열하게 웃고 있는 현민의 모습이 담겨 있다. 두 사람이 경찰서에서 만나게 된 이유가 궁금해지는 가운데, 분노에 가득 찬 진혁과 달리 현민은 여유로운 태도를 하고 있어 상반된 두 사람의 태도가 시선을 끈다. 진혁이 현민에게 이렇게 화를 내는 데에는 진혁의 아들 최상호(박상훈 분)의 죽음과 관련한 숨은 사연이 있다. 오래전부터 이어온 악연의 끈으로 뒤엉킨 두 사람 사이에 얽힌 일은 무엇일지, 이 사건의 발단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궁금해진다. 이후 진혁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된다고 해 그의 가슴 아픈 이야기에도 이목이 집중된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팽팽한 신경전을 벌여왔던 진혁과 현민은 서로를 향해 최후의 칼날을 겨눈다. 어느 때보다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진혁과 계속해서 악행을 저질러왔던 현민이 어떤 결말을 내리게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제작진은 “최종회까지 단 2회만을 남겨두고 있다. 남은 방송에서는 진혁과 현민 사이에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가 풀리고 각자의 자리를 되찾아가는 모습들이 그려질 전망이다”라면서 “마지막까지 예측할 수 없는 극 전개가 펼쳐질 예정이니 끝까지 시청해 달라”고 전했다. 수목드라마 ‘완벽한 가족’ 11회는 오는 18일 밤 9시 50분 방송된다.
- ‘완벽한 가족’ 김병철X윤상현, 불편한 과거사!···조금씩 풀려가는 이들 만남의 숨은 내막
- 2024. 09. 13 18:19 연예
- KBS ‘완벽한 가족’ 김병철과 윤상현 사이의 불편한 과거사가 드디어 공개됐다. 지난 12일에 방송이 된 KBS2 수목드라마 ‘완벽한 가족’(제작 빅토리콘텐츠/ⓒ함창석, 주은/대원씨아이) 10회에서는 최현민(윤상현 분)이 최진혁(김병철 분)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사실이 드러났다. 특히 현민이 빌린 돈을 갚지 않아 조폭으로부터 폭력을 당하는 장면은 보는 이들을 경악케 했다. 방송에서는 진혁과 현민의 복잡하게 얽힌 과거가 안방극장 시청자들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진혁이 검사 시절 피의자로 만났던 현민과 재회하며 진혁의 인생은 복잡하게 꼬여갔다. 퍽치기를 당한 진혁은 입원하게 됐고 그 병원에서 현민과 마주쳤다. 진혁이 검사를 받으러 간 사이, 아들 최상호(박상훈 분)가 현민의 딸 선희를 돌보며 놀고 있었고, 현민은 이들에게 땅콩 초코바를 건네고는 사라졌다. 잠시 뒤 땅콩 알레르기가 있었던 선희가 과자를 먹고 쓰러져 중환자실에 실려 가게 돼 현민은 망연자실했다. 현민 상황을 지켜본 진혁이 이를 안타까워하며 본인과 후배, 직원 등을 모아서 현민이 일한다는 보험사와 보험 계약을 해줬다. 은주는 우울증 치료를 지원해 주고, 집으로 식사 초대까지 하며 돈독한 사이로 지내곤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현민이 딸과 지인들을 이용해 생명 보험을 들고는 보험료를 자신의 통장으로 입금하게 하는 횡령 수법이었던 것. 게다가 그는 딸 선희를 죽음으로 내몰아 보험금을 타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그러나 현민은 차마 자신의 손으로 딸을 죽음으로 내몰 수는 없었고, 그의 계획 살인은 실패로 돌아갔다. 현민의 끝없는 악행은 시청자의 분노를 유발했다. 현민은 이에 그치지 않고 진혁에게 새로운 일을 시작해 자금이 모자란다며 그를 이용하려 했다. 하지만 진혁은 현민에게 보험료 횡령에 대해서 캐묻는가 하면, 아내 하은주(윤세아 분)에게 현민에 대해 의구심이 든다며 의심하기 시작했다. 방송 말미에는 현민의 뜻밖의 돌발 행동이 보는 이들의 추리력을 자극했다. 현민이 부모에게 알리지 않고 상호의 학교 앞으로 찾아가 자신을 도와달라며 사무실로 데려간 것. 이런 그의 영문을 알 수 없는 행동은 향후 큰 파장을 불러 모은다고 해 향후 전개가 어떻게 흘러갈지 지켜보게 만들었다. ‘완벽한 가족’ 10회는 진혁과 현민의 불편한 관계의 시작점이 된 일들이 그려지며 시청자들의 흥미를 돋웠다. 남은 2회 방송에서 악랄한 과거를 지닌 현민이 어떤 일들을 벌이게 될지 이에 진혁은 무사히 선희를 지킬 수 있을지 끝까지 알 수 없는 스토리의 향방이 더욱 궁금해진다. 수목드라마 ‘완벽한 가족’은 매주 수, 목요일 밤 9시 50분에 안방극장에 배달된다.
- ‘아침마당’ 태남, 새로운 1승···아픈 과거사 고백
- 2023. 11. 22 20:09 연예
- KBS 방송화면 캡처 태남이 ‘아침마당’ 도전 꿈의 무대 노래 대결에서 1승을 했다. 22일 방송된 KBS1 ‘아침마당’에 가수 태남이 출연했다. ‘도전 꿈의 무대’로 꾸며진 이날 방송에서 태남은 김재이, 조금주, 한혜정, 하태하와 함께 노래 대결을 펼쳤다. 두 번째 참가자로 등장한 태남은 어머니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태남은 “어릴 적 아버지가 도박과 술, 외도로 집안의 돈을 다 탕진했다. 어머니는 저를 위해 낮에는 남의 식당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작은 막창집을 운영하셨다. 당시 시골에서 작은 몸을 가진 엄마가 이혼을 하고 혼자 식당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저는 중학교 때부터 어머니의 경호원이 되어야 했다”고 고백했다. 태남은 이어 “한번은 어머니의 막창집에서 취객들이 술주정을 부려서 문을 닫을 시간이니 가라고 했다. 취객들은 저를 막무가내로 때렸다. 어머니도 때리려고 해서 제가 온몸으로 막았다”라며 옛 기억을 회상했다. 태남은 “저는 가수로 꼭 성공하고 싶다. 어머니가 살 집을 마련해 드리고, 용돈도 한 달에 천만 원을 드리고 싶다”라고 소망하며 어머니에게 큰절을 올리는 등 깊은 효심을 드러냈다. 태남은 “오늘 처음으로 어머니 앞에서 노래를 부른다. 멋지게 부르겠다”라며 가수 박상철 원곡의 ‘울엄마’를 열창했다. 태남은 진심이 묻어나는 보이스와 표현력으로 심사위원들의 눈시울을 촉촉이 적셨다. 감정에 복받혀 오열하며 노래를 부르는 태남을 지켜보며 눈물을 훔치는 태남의 어머니의 모습이 비치며 모두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태남의 무대를 본 심사위원들은 “간절함이 묻어나는 무대가 인상 깊었다”, “어린 나이에 몸과 마음으로 지켜낸 아들이 청년이 되었다”라며 호평했다. 처음으로 태남의 무대를 본 어머니는 “아들이 든든하면서, 어린 나이에 철이 들었다는 생각에 안쓰럽다. 내게는 항상 든든한 아들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태남에게 “너는 항상 나의 지팡이다. 항상 쓰러질 때마다 지팡이의 역할을 해주니 너무 고맙다. 사랑한다”라며 따뜻한 말을 전했다. 태남은 애절한 사연과 진심이 담긴 노래로 가장 많은 표를 받아 1승을 거뒀다. 태남은 “이렇게 부족한 실력임에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하다. 앞으로 더 노력하는 가수가 되겠다”라고 소감을 말했다. 태남은 2021년 MBN ‘보이스킹’에서 이름을 알리며 가요계에 등장했다. 이어 2023년 첫 싱글 ‘First’를 발매하며 트로트 가수로 변신, 각종 라디오와 음악방송을 종횡무진하며 자신만의 다채로운 매력을 선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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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물의 과거사](15)‘이불솜’과 산골 마을의 ‘핏빛 성탄’(2023. 10. 20 10:44)
- 2023. 10. 20 10:44 사회
- 문경양민학살어린이위령비에 새겨진 어린이 희생자 명단 / 진실화해위원회 제공 죽음에서 태어난 아이. 채홍달(1950년생)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조용한 산골 마을을 덮친 ‘학살’의 피바람. 총알은 만삭의 여인도 가리지 않았다. 어머니의 몸을 관통한 총알. 하지만 어머니는 시신 더미 속에서 기적처럼 살아나왔다. 상처에서 계속 뿜어져 나오는 피를 무엇으로든 막아야 했다. 그때 생각난 것이 ‘이불솜’이었다. “(어머니가) 만삭의 몸으로 피를 철철 흘리면서 친정으로 가다가 중간에 고모집이 있어서 들렀는데, 이불솜을 뭉쳐가지고 총상 입은 곳에 집어넣었대요.”(채홍달 인터뷰·2022. 2. 19.) 어머니는 그렇게 지혈을 하고 가까스로 목숨을 지켰다. 그리고 13일 뒤 채홍달을 낳았다. 경북 문경시 산북면 석봉리 석달마을. 24가구 127명의 주민이 오순도순 살아가던 산골 마을이었다. 1949년 12월 24일, 한 무리의 군인이 마을에 나타나면서 ‘사건’은 시작됐다. 국군 제2사단 제25연대 소속 2개 소대 70여명이 그날 정오쯤 석달마을에 들어왔다. 이들의 임무는 ‘공비토벌 작전 중 지역정찰 임무’.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도, 주로 산악지대에 숨어 활동하는 좌익세력을 토벌하기 위한 군·경의 작전은 곳곳에서 행해졌다. 그런데 군인들의 행동이 이상했다. 마을을 포위한 채 주민들을 집 밖으로 불러냈다. 남성들은 대개 일하러 나가고, 마을에는 여성과 어린이, 노인들이 주로 남아 있을 시간이었다. “뒷산에서 호각을 확 부니까 앞에서 ‘질러!’ ‘질러!’. 맨 윗집에 불을 지르니 집마다 (불을 지르러) 안 다녀도 (불이) 내려오면서 타는 거예요. (집 밖으로) 나오라고 막 고함을 질러요.”(생존자 채홍연 진술, KTV <진실 그리고 화해- 문경 석달사건 편> 2020. 8. 31.) 주민들이 선뜻 집 밖으로 나오지 않자, 군인들은 마을에 불을 질렀다. 놀라 뛰쳐나온 주민들을 마을 앞 논에 모았다.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군인들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총소리, 비명소리가 골짜기에 울려퍼졌다. 여기저기 살이 튀고 피가 흘렀다. 학살이었다. 요란하던 총소리가 멈췄다. 쓰러지고 고꾸라진 사람들의 시신이 논바닥에 널려 있었다. 사이사이에, 운 좋게 총알을 피하거나, 가벼운 부상만 입은 사람들이 고개를 숙인 채 벌벌 떨고 있었다. 군인들은 이들에게 “살아남은 사람은 살려줄 테니 일어나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났다. 군인들은 그들을 옆 논으로 다시 모이게 했다. ‘정말 살려주려나?’ 하지만 희망을 짓밟는 총성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도 총알을 피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학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마을 어귀 산모퉁이에서도 총성이 울렸다. 그날은 마을 아이들이 주로 다니던 김룡국민학교 방학식 날이었다. 방학을 맞아 들뜬 마음으로 하교하던 어린이들, 이웃마을에 일 보러 갔다가 돌아오던 청장년들이 산모퉁이에서 또 희생됐다. 희생자는 86명. 전체 주민의 약 3분의 2가 한날한시에 목숨을 잃었다. 가옥 24채가 전소됐다. 채아기(여·1세), 정아기(여·1세), 황아기(남·1세), 남아기(남·1세), 박아기(남·1세). 희생자 명단에서 유독 눈에 띄는 이름, ‘아기’.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이름도 짓지 못한 젖먹이들이다. 전체 희생자 중 10세 이하가 무려 22명. 20세 이하는 모두 43명으로, 전체 희생자의 절반이 아동·청소년이었다. 학살의 무차별성은 여기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어째서, 이렇게 한 마을을 ‘초토화’하는 끔찍한 학살을 저질렀을까. 그것도 우리 국군이. “주민들에게 공산주의자들에게 협조했다는 죄를 뒤집어씌워 일을 저질렀다. (…) 지휘관은 군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하여 지방경찰서장과 결탁해 고위층 관리들에게는 70명의 게릴라가 학살을 저지른 것이라고 허위보고 했다.”(1950. 1. 16. 미 극동군 사령부 정보일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문경 석달사건 조사보고서> 재인용) 학살의 진실은 철저히 왜곡됐다. 국군이 아니라 ‘공비’의 소행으로, 가해자가 뒤바뀌었다. 희생자들의 제적부에도 “공비 출몰 총살로 인하야 사망”이라 기록됐다. 당시 언론도 “공비의 최후적 만행으로서 국군을 가장하고 부락에 침입해 살인방화 등을 감행한” 사건으로 보도했다. 사건 이후 신성모 당시 국방부 장관이 김룡국민학교를 직접 방문한 일은 “주민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일일이 친절하게 위문하였으며, (…) 위로금까지 주어 동 지구 재건의 길을 열어준 바 있다”(이상 1950. 1. 26. 연합신문)고 보도됐다. 당시 미군은 그러나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사건의 규모가 정부를 당혹하게 할 만큼 위협적이어서 (…) 신문보도를 금하고 사건 관련 군 지휘관들을 처벌했으며 관련 부대의 지휘체계도 재편성하였다”(1950. 1. 24. 미 극동군 사령부 정보 요약)는 기록을 남겼다. 국가가 문경 석달사건의 진실을 ‘공식적으로’ 규명한 것은 2007년이었다. 국가조사기구인 진실화해위원회는 “군이 비교전상태의 비무장 민간인을 (…) 무차별적이고 무자비하게 살해한 행위는 실체법적으로나 절차법적으로나 명백히 위반한 행위”라고 결론지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사과 권고에 따라 국방부는 이듬해 희생자 위령제에 맞춰 사과문을 발표한다. 문경지역 군부대 부대장이 참석해 “당시 사정과 사건 본질이 여하했든지간에 많은 분이 피해를 입은 데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다”(2008. 12. 24.)는 사과문을 대독했다. “장관이 직접 온 것도 아니고 지역 부대장이 대신 왔어요. 국방부에서 내려온 것, 그게 사과예요? 내가 그걸 보고 ‘이게 사과문이냐, 사기문이냐?’ 그랬어요.”(채홍달 인터뷰) 60여 년 만에 받은 사과 아닌 사과. 보상을 위한 길은 더 험난했다. 보상을 위해서는 유족 한 사람 한 사람이 직접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내야 했다. 심지어 그렇게 어렵게 시작한 소송마저 민사상 ‘소멸시효’를 이유로 패소하는 사례도 있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09년 대통령과 국회에 ‘민간인 집단희생 배·보상 특별법’ 제정을 제1항으로 건의했다. 이후 1기 진실화해위원회가 활동을 마치며 펴낸 <종합보고서>에서도 이 건의를 ‘정책권고’의 맨 앞에 제시했다. 그러나 이 건의는 아직까지도 실현되지 않았다. 2020년 출범한 2기 진실화해위원회 역시 지난해 11월 ‘진실규명 결정 사건에 대한 배·보상 법안 입법’을 다시 한 번 정책권고한 바 있다. 현재 국회에 발의돼 있는 배·보상 관련 법안은 4건이다(이개호·김용판·서영교·윤영덕 각 대표발의). “(진실이 밝혀지면) 국가에서 알아서 보상까지 해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알아서 챙겨주는 건 전혀 없잖아요.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해야 하는데) 혼자 하기도 벅차요.”(채홍달 인터뷰) 한국전쟁 전후 피학살자는 최대 100만명까지 추산된다. 7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국가는 대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국민이 있다. 국가의 책임에 ‘소멸시효’는 없다. ※이번 호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 사물의 과거사
- [사물의 과거사](14)식어버린 ‘생일밥’…‘머리 센 소년들’은 괭이바다가 서럽다(2023. 09. 08 11:24)
- 2023. 09. 08 11:24 사회
- 마산형무소터임을 알리는 안내판 / 진실화해위원회 제공 “그때는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땐데, 언젠가는 (아버지가) 돌아올 끼다, 생일날 되거든 밥이라도 한 그릇 떠놓고 기다려보자…. 그렇게 ‘살아 있다’ 하는 희망만 가지고 살다가….”(경남 창녕군 보도연맹 학살사건 유족 노원렬 인터뷰, 유튜브 <다큐몹> 2023. 6. 8.) 정성껏 지은 생일밥 한 그릇이 다 식어가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해, 그다음 해도 마찬가지였다. 주인 없는 생일밥을 한쪽에 챙겨두고, 가족들은 텅 빈 그리움만 수저로 떠올렸다. 세월이 약이라는 말도 소용없었다. 할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이제 생일밥이 아니라 제삿밥을 올려야 하는 것 아니냐는 소리는 차마 아무도 꺼내지 못했다. 1950년 여름. 노원렬은 열세 살, 아버지는 서른 살이었다. 이들이 살던 곳은 경남 창녕군 고암면 우천리. 아버지가 논에서 구슬땀을 쏟고 있을 때, 아버지를 찾아온 남자들이 있었다. 알고 지내던 순경과 형사들이 데려간 뒤 “아버지는 면사무소에서 일하다가 6·25사변 나기 전에 그만두고 농사를 지었죠. 면 직원으로 있었기 때문에 지서 순경들도 잘 알고 형사들도 친분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논에서 일하는데 형사 세 사람이 찾아와서 ‘경찰서에 좀 갈 일이 있다’ 했답니다. 다 아는 사람들이니까 의심도 없이 가신 거죠. 그런데 돌아오지도 못하고, 끝이라, 그게.”(앞 인터뷰) 아버지를 잡아간 이유는 나중에야 알았다. 국민보도연맹.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여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받아들인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국민보도연맹은 법률에 근거한 단체는 아니지만, 당시 내무부 장관이 총재를 맡는 등 정부가 주도한 관변단체였다. 가입 대상은 ‘좌익 전향자’라 했지만, 실제로는 공비들에게 밥을 해줬다고 해서, 과거 징역을 산 적이 있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 도장 한번 잘못 찍어서 가입된 사람도 많았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전국에서 보도연맹원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들이 적군에 동조해 후방을 교란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 때문. ‘국민으로 받아들이겠다’던 보도연맹원 명단은, 오히려 국민과 ‘비국민’을 구분하는 살생부(殺生簿)가 돼버리고 말았다. 가족들은 아버지가 왜 잡혀갔는지 아무 이유도 듣지 못했다. 경찰서에 있다고는 하지만 면회조차 할 수 없었다. 열흘 남짓 시간이 흐르고, 할아버지 앞으로 쪽지 하나가 왔다. “아버지가 쪽지를 보냈다 카는 거라. 내용이 ‘아버지(노원렬에게는 할아버지), 돈을 좀 써서 나를 나가게 해주세요’ 그런 연락이 왔대. 그런데 쪽지는 받았는데, 돈을 어디로 줘야 하는지 통로를 알아야 할 거 아이가? 면회도 안 시켜주는데…. 그래서 또 하루하루 흘러가 버려서 돈을 못 부쳤다 이러더라꼬, 우리 할아버지가. 그게 너무 원통한 기라.”(앞 인터뷰) 창녕경찰서에 구금된 사람 중 일부는 창녕읍 송현동 솔터마을 뒷산으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많은 수는 그에 앞서 군용트럭에 실려 마산형무소로 이송됐다. 이들은 마산형무소에서 ‘괭이바다’(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원전마을과 거제시 장목면 칠천도 사이의 바다)로 다시 한 번 옮겨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수장(水葬)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매년 생일밥을 떠놓고 기다렸지만, 노원렬의 아버지가 돌아오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1950년 7월부터 9월까지, 마산형무소 재소자와 인근 지역에서 잡혀온 보도연맹원들이 마산지구CIC(첩보부대), 마산지구헌병대, 마산경찰서 경찰들에 의해 괭이바다에서 희생됐다. 2009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는 최소 717명의 희생자를 확인했다. 학살에는 LST, ‘전차양륙함’까지 동원됐다. 당시 목격자의 진술이 책 <토호세력의 뿌리-마산현대사를 통해 본 지역사회의 지배구조>(김주완, 불휘, 2006)에 실려 있다. “GMC 트럭이 줄줄이 해안가로 들어왔다. 평소처럼 동양주류 건물 벽에 피란민들이 죽 기댄 채 누워 있었는데 헌병들이 이들을 일으켜 쫓아버렸다. 트럭이 열몇 대는 족히 돼 보였다. (…) 상륙함(LST) 두 척이 왔다. 1개 연대병력이 탈 정도로 큰 배였다. 트럭에서 내린 사람들은 곧장 LST에 옮겨 탔다. 나중에 들으니 괭이바다에서 총살 수장했다고 했다.”(2009년 진실화해위원회 <부산·경남지역 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 조사보고서> 재인용) 괭이바다 아래 그대로 잠든 사람들 일부 시신들은 파도를 타고 바닷가로 떠밀려왔다. 마을 사람들은 이름도 고향도 알 수 없는 그들을 수습해 바다 가까운 땅에 묻어줬다. 시신들이 멀리 쓰시마섬(대마도)까지 떠내려갔다는 증언도 있었다. 대부분은 괭이바다 아래에 그대로 가라앉아 잠들었다. 717명이라는 희생자 수는 1960년 10월 23일 마산매일신문에 실린 피학살자 282명의 명단과 마산형무소 관련 자료를 종합한 것. 하지만 1960년 피학살자 명단은 불과 일주일간 유족들의 신고를 받아 만든 것임을 생각하면, 실제 희생 규모는 그보다 훨씬 클 것이다. “산 사람을 갖다가 바로 물에 집어넣는 이것은 짐승들이 하는 짓입니다, 짐승들이. 인간으로서 왜 사람을 물에 잡아넣습니까?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을 갖다가 보도연맹 가입시키고 수장시키는 그것은 야만인입니다, 야만인. 정부가 절대적으로 책임져야 합니다.”(거제시민간인학살유족회 서철암 인터뷰, 영화 <레드툼>, 구자환 감독, 2013년) 진실화해위원회는 ‘괭이바다’ 학살을 비롯한 부산·경남지역 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국가가 형무소에 수감된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을 집단살해하고 (…) 적법절차를 거치지 않은 군법회의를 통해 사형시킨 범죄행위”로 봤다. 그리고 “비록 전시였다고는 하나, 국가가 좌익사범이라는 이유로 수감된 재소자들을 적법한 절차 없이 집단처형한 행위는 정치적 살해”라고 그 불법성을 분명히 밝혔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우리 아버지 이름을 부르면서 ‘와 이리 안 돌아오노… 자식을 못 보고 내가 죽는갑다’ 하셨던 말씀이 가슴에 남고…. (아버지가 잡혀가신 뒤에) 어머니가 한평생 홀로 지내면서 고생하신 게, 그런 게 가슴에 남아가지고….”(노원렬, 앞 인터뷰) ‘이제야 생일밥 대신 제삿밥을 올립니다’ 이제야 아들은 아버지의 생일밥 대신 제삿밥을 지어 올린다. 돌아가신 날짜도 정확히 알 수 없으니 음력 9월 9일, 무주고혼이나 객사혼령을 모신다는 구구절에 제사를 모신다. 지난 6월 10일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창원위령탑’(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가포동 산73번지) 앞에서 합동추모제가 열렸다. 소년들의 몸은 73년 세월만큼 늙어버렸지만, 마음속 그리움은 그대로였다. 추모제에 모인 ‘머리 하얀 소년들’이 아버지를 목 놓아 부르며 운다. 울음을 삼킨 바다는 73년 전 그때처럼 말없이 일렁일 뿐이다.
- 사물의 과거사
- [사물의 과거사](13)‘비석 파편’이 품은 그해 여름(2023. 08. 04 11:21)
- 2023. 08. 04 11:21 사회
- 5·16 군사정권이 파괴한 ‘백조일손지지’ 위령비 조각을 담아놓은 보관함 / 전호일 제공 조각난 돌무더기가 들어 있는 유리함.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한자’가 새겨진 돌덩이들도 보인다. 오른쪽에는 멀쩡한 모습의 위령비가 서 있고, 유리함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5·16군사정권에 의해 파괴된 ‘百祖一孫之地(백조일손지지)’ 묘비의 파편.”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직후부터 예비검속(혐의자를 미리 잡아 놓는 일)과 민간인 학살이 자행됐다. 적에게 부역할 잠재적 가능성이 있는 자들을 미리 ‘정리’한다는 명분. 하지만 좌익 활동과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들도 ‘의심’만으로, 때로는 사적인 원한이나 복수심만으로 희생됐다. 구금에서 처형까지 이어지는 과정 역시 적법절차를 무시한 채 진행됐다. 조직적이고 전국적인 ‘전쟁범죄’로 희생된 민간인의 수는 100만 명까지 추산된다. 제주도 역시 피바람을 피하지 못했다. 예비검속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한 제주 ‘섯알오름’(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학살은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1차 총살은 1950년 7월 16~20일경. 2차 총살은 그로부터 약 한 달이 더 지난 1950년 8월 20일 집행됐다. 2007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한 희생자만 218명에 이른다. ‘빨갱이’로 몰려 목숨을 잃은 사람들. 유족들은 그 시신도 제때 수습하지 못했다. 학살이 일어난 지 6년 만인 1956년 5월에야 132기의 유골을 수습해 분묘를 세웠다. ‘조상이 다른 100여명의 뼈가 서로 엉켜서 하나가 됐다’는 의미로 ‘백조일손지지’라는 이름이 붙었다. 2년밖에 서 있지 못한 위령비 3년이 더 지난 1959년에는 희생자들의 이름과 처형 경위를 새겨넣은 위령비를 세웠다. 그것이 바로 지금 유리함 안에 들어 있는 ‘돌무더기’의 정체. 위령비가 위령비로 서 있었던 시간은 고작 2년밖에 되지 못했다. 1961년 5월 16일 ‘쿠데타’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5월 17일 ‘용공분자 색출’을 지시했다. 이철희 육군방첩부대장은 다음 날인 5월 18일부터 전국 경찰과 군(헌병)의 협조를 통해 18개 정당 및 사회단체 등 당시 ‘혁신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예비검속을 단행했다. 그 타깃 중 하나가 바로 ‘피학살자유족회’였다.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으로 끌려간 뒤 학살당한 가족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전국에서 모인 유족들. 그들 역시 5·16 쿠데타 이후 용공세력으로 몰려 예비검속을 당했다. 억울함을 풀어달라던 그들의 활동은 어느새 ‘반국가행위’가 돼 있었다. 억울한 유족들 용공세력 내몰아 “‘젊은이는 무슨 죄를 지었노?’ 묻길래 ‘죄지은 거 없습니다’ 그랬습니다. 푯말에 보니, 반공법도 집시법도 아니고 ‘반국가행위’라고 써놨어요. 반국가행위라니! 조선시대 같으면 역적이나 받을 죄명 아닙니까?”(진실화해위원회 소식지 ‘진실화해’ 3호 2021. 10.) 김하종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경주유족회 회장의 회고다. 1961년 8월 당시 28세의 나이로 구속된 김하종은 경찰서 지하에 40일 동안 구금된 뒤, 서울형무소 즉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졌다. 그는 법정에서 “김하종의 죄는 극형에 처할 것이로되 청춘이 아까워서 무기징역을 구형한다”라고 하던 검사의 말을, 구순의 노인이 된 지금까지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김하종은 옥중에서 혈서까지 쓰면서 줄곧 무죄를 주장했다. 혁명재판소는 재판에 넘겨진 피학살자유족회 주요 인사들에게 ‘북한을 이롭게 하려는 목적’이 있다며 사형과 징역 15년 등 중형까지 선고했다. 김하종도 1962년 1월 ‘혁명재판소’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예비검속과 처벌의 정당성은 쿠데타 세력이 세운 혁명재판소에서조차 논쟁거리가 됐다. 당시 주임검찰관이었던 이○○은 훗날 이렇게 진술했다. “‘전쟁 중에 억울하게 가족을 잃고 신원(伸寃)을 요구한 것인데 또 그 가족들마저 잡아들여 구속하고 반국가행위자로 만들면 그 자손이 그 일을 되풀이할 것 아닌가’라고 말한 이□□ 심판관이 속한 심판부 제5부는 일부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 무죄가 선고되자 박창암 혁명검찰부부장과 심판부 제5부 재판장이 혁명재판소 건물 복도에서 치고받으며 싸웠습니다.”(2009년 진실화해위원회 ‘5·16 쿠데타 직후 인권침해 사건 조사보고서’) 쿠데타 세력은 사람부터 먼저 잡아들여 놓고, 이들을 처벌할 법을 만들었다. 쿠데타 세력은 불법기관인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설치하고, 스스로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제정했다. 그 법에 따라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면서 3년 6개월 전의 일까지 소급해 처벌하도록 정했다. 이는 헌법상 ‘소급효금지의 원칙’에 정면으로 위반되는 것이었다. 먼저 잡아들이고, 후에 법 만들고 반대세력에 대한 예비검속은 5·16 쿠데타 직후인 5월 18일부터 진행됐지만,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이 공포된 것은 그로부터 한 달 이상이 지난 6월 22일이었다. 그 기간 동안 예비검속된 사람들은 아무런 근거 법률이 없는 상태로 ‘불법’ 구금돼 있었던 셈이다. 탄압은 주요 인사들에 대한 처벌로만 끝나지 않았다. 유족회가 세운 합동묘와 위령비까지 훼손했다. 거창양민학살사건 유족회는 희생자들의 유골을 남자, 여자, 어린이로 나눠 3기의 합동묘를 만들었다. 그러나 5·16 쿠데타 직후 경남도지사가 개장 명령을 하달해 경찰이 합동묘를 훼손했다. 위령비 역시 정으로 쪼아 글자를 지운 뒤, 비석 허리를 끊어 땅에 묻어버렸다. “한국전쟁 중 국군이 양민을 살해한 잘못을 은폐하려고 억지를 부린 것이며 예부터 묘는 함부로 손대지 않는데 국가기관이 강제로 억울한 희생자들의 무덤을 파헤친 것이며 이는 부관참시에 해당하는 야만행위입니다.”(거창양민학살사건 유족 문병현 진술, 위 보고서) 경남 김해시 진영읍 설창리(금창피학살자장의위원회)에서도, 부산 연제구 거제동 화지산(동래피학살자유족회)에서도 같은 일이 자행됐다. 제주 서귀포 ‘백조일손지지’의 위령비가 산산이 조각난 것도 이때였다. 이후 유족들은 묘역 근처에 버려진 위령비 조각들을 찾아 다시 한곳에 모아뒀다. 지금은 새로 건립된 위령비 옆에, 유리함에 담긴 모습으로 보존되고 있다. ‘빨갱이’로 몰려 죽은 가족들의 한을 풀어달라 외치던 사람들마저 ‘빨갱이’로 몰렸다. 전국 곳곳에서 유족회 인사들이 잡혀 들어갔다. 거창에서, 김해에서, 부산에서, 서귀포에서 묘가 파헤쳐지고 묘비가 깨어졌다. 겁에 질린 유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평생 입을 열지 못하고 원한 속에 살았다. 62년 전 그해 여름, 학살의 진실은 또 한 번 살해당했다. 1961년 당시 혁명재판소 심판관이었던 이□□이 훗날 남긴 말 한마디가 마음에 남는다. 비록 수십 년 세월이 흐른 뒤에 한 증언이지만, 지금까지도 많은 것을 돌아보게 하는 말이다. “학살행위 그 자체가 비극인데 그것을 법대(法臺)에 올려놓고 평가한 것은 불행이며,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일로 국가는 유가족들의 마음을 달래줄 수 있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2009년 진실화해위원회 ‘5·16 쿠데타 직후 인권침해 사건 조사보고서’)
- 사물의 과거사
- [사물의 과거사](12)또렷한 ‘은반지’와 서산 부역혐의자 학살(2023. 07. 07 11:29)
- 2023. 07. 07 11:29 사회
- 충남 서산시 봉화산 교통호 ‘서산 부역혐의 희생사건’ 유해발굴 현장에서 은반지가 발견됐다. / 진실화해위원회 제공 세월이 흘렀지만, 그 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73년 만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비록 그 옛날의 반짝임은 사라졌지만, 흙도 아니고 ‘뼈’도 아닌 빛깔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은반지. 어느 집 여인이었을까. 상류층 집안 아니었을까. 어쩌다 이곳까지 와서 땅속에 묻혔을까. 은반지가 끼워져 있던 손가락은 이미 뼈까지 썩어 사라졌다. 남아 있는 은반지의 주인은, 사라진 손가락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대답할 리 없는 질문을 마음으로 던져본다. 충남 서산시 갈산동 176-4번지, 봉화산 교통호 현장.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 5월 10일부터 약 20일간 이곳에서 유해발굴 조사를 진행했다. 1950년 한국전쟁 중 인민군 점령기에 인민군이 전투를 대비해 파놓은 교통호. 하지만 군·경이 서산 지역을 수복한 뒤, ‘부역혐의자’로 지목된 민간인들이 이곳에서 학살됐다. “모퉁이에 호(교통호)를 파논 데가 있어요. 신작로서 끌고 올라가 하나 갖다 놓고 ‘팡’ 하고 총 쏘고 또 하나 놓고 ‘팡’ 하고 총 쏘고 몇 번을 그랬어요. 경찰들이 쐈지요. (중략) 처음에 ‘뜨르르르’ 갈기고, 도망간 사람이 있으니께 나중에 하나씩 세밀하게 죽이더구만요.”(참고인 이○○ 진실화해위원회 진술, 이하 <서산 8228; 태안 부역혐의 희생 사건 조사보고서> 2008. 인용) 현장에서 발굴된 유해의 모습은 당시의 ‘생지옥’을 떠올리게 했다. 폭과 깊이가 1m도 안 되는 좁은 교통호를 따라 유해가 빽빽하게 발견됐다. 오랜 시간이 흘러 작은 뼈들은 썩어 없어졌지만, 굵은 다리뼈뿐만 아니라 척추뼈와 갈비뼈까지 남아 있는 상태였다. 희생자들은 주로 옆으로 눕거나 고꾸라져 있었다. 학살 당시 희생자들을 고개 숙이게 한 뒤, 총으로 머리 뒤를 쐈으리라 추정된다. 일부 구역에서는 유해 다리 사이에 다른 유해가 또 발견돼 과거 시신이 위아래로 겹겹이 쌓여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이번에 발굴된 유해는 약 60구. 유해뿐만 아니라 총살의 흔적인 탄피와 단추, 고무줄 그리고 ‘은반지’도 발견됐다. 이것들은 죽은 자와 죽인 자를 밝히는 중요한 증거다. “(경찰이) ‘고개 다 땅에 대라’고 하더만. (중략) 요기다가(손가락으로 뒤통수를 가리키며) 그러니까 짹소리 못하지. ‘퍽’ 하면 그만이여. 한 명씩, 한 명씩 해야지. M1…. 아이! (머리가) 없어요. 그 양반 나중에 시체 찾아가라고 해서 도장집 보고 찾았어. (머리가) 아주 쫙 뻐그러졌어. 아주 윷가락처럼. 피 한 모금도 없어.”(당시 면 치안대원 최○○ 진실화해위원회 진술) 이들을 끔찍한 죽음으로 몰고 간 ‘부역혐의’란 대체 뭐였을까. 말 그대로 하면 인민군이 지역을 점령했을 때 인민군과 내통해 도운 혐의라는 뜻. 그런데 그 실체가 참 허망했다. 인민군에게 밥 한번 해줬다고, 사랑방 한번 내줬다고 부역혐의자가 되기도 했다. 이웃사람 부탁으로 뭔지 모를 서류에 도장 한번 찍어줬다가 좌익 명단에 이름이 오르기도 하고, 그냥 어느 집안과 사이가 나빠서 일가가 모두 ‘빨갱이’로 몰리기도 했다. “흑백을 분류하려니까(실제 부역행위자와 아닌 자를 구분한다는 뜻-필자 주) 함장이 오더니 ‘지금 무엇을 하는 거지?’ 내가 ‘흑백을 대별하려고 합니다’ 하니까. ‘흑백? 흑백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전부 일어서’ 하면서 다 끌고 나가는 겨. (…) 조금 지나니까 ‘탕탕’ 소리가 나더라고.”(당시 면 치안대장 최○○ 진실화해위원회 진술) 부역혐의자에 대한 학살은 어느 날 갑자기 터져나온 사건이 아니었다. 하나의 죽음이 또 하나의 죽음을 낳고, 그 죽음이 결국 참혹한 학살로 이어지는 ‘증오의 고리’가 존재했다. 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12일, 서산 지역 경찰들은 인민군에 밀려 후퇴하면서 보도연맹원들을 집단 살해했다. 그들이 향후 인민군에 협조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 7월 18일 인민군이 서산을 점령하자, 이번에는 좌익세력에 의한 학살이 일어났다. 하지만 전세가 또 뒤집어져 10월 8일 군·경이 서산을 수복하자, 부역혐의자에 대한 학살이 일어난 것이다. 전쟁 발발 직후의 보도연맹 학살과 인민군 점령기 좌익세력에 의한 학살을 거치면서 주민들 사이에 갈등과 반목은 크게 쌓여갔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다시 저쪽에서 이쪽으로 학살이 반복되면서 ‘보복성’이 더 강해졌다. 이런 성격은 수복 이후 경찰의 부역자 처리 과정에 그대로 반영됐고, 부역과 관계없는 불특정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되는 원인이 됐다. “좌익들 잡아다가 면사무소 창고에 가득가득 잡아다 놓았지. (중략) (경찰) 지서 직원이나 근흥면 유지들을 앞에 놓고서 내가 ‘이 사람은 어떻게 할 거냐? 이렇게(손가락으로 총을 쏘는 모양을 하면서) 할 것이냐, 아니면 석방을 할 것이냐?’라고 하면 (지서 경찰과 유지들이) ‘이렇게 하자’라고 (후략).”(참고인 최○○ 진실화해위원회 진술) ‘빨갱이’라 믿으면 ‘빨갱이’가 됐다. ‘손가락총’ 한 번으로 살고 죽는 것이 갈라졌다. 학살 현장은 이번에 유해발굴이 이뤄진 봉화산 교통호 등 최소 30여 곳.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는 희생자 977명과 희생추정자를 포함한 1865명의 신원을 확인했다. 기록에 누락된 다수 희생자가 있기 때문에 실제 희생자는 2000명을 웃돌 것으로 진실화해위원회는 추정했다. 73년 만에 지상으로 나온 은반지의 주인 역시 그중 하나일 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르겠다. 주인이 누군지도 모르는 그깟 반지 하나 꺼낸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왜 거기에 아까운 국민의 세금을 써야 하냐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대신해준 이가 있다. “발밑에 그분들(희생자들)을 두고,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됐다고 자랑하고 있잖아요. 그분들을 밟고 선 대한민국이 과연 자랑스럽나요? 저는 별로 자랑스럽지 않아요. 그런 비극들을 억지로 지워버리고 없는 척했기 때문에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소위 ‘빨갱이’ 담론이 망령처럼 우리를 괴롭히고 있잖아요.”(진실화해위원회 소식지 ‘진실화해’ 4호, 2021. 12) 다큐멘터리 영화 <206: 사라지지 않는>(2023. 6. 21 개봉)을 만든 허철녕 감독의 말이다. 시민들의 힘으로 이끌어온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의 발걸음을 기록한 영화다. 세월이 흘렀지만, 반지의 은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땅속에 잠들어 있던 진실 역시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들을 ‘지워버리고 없는 척’하고 싶었던 부끄러운 우리가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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