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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총 51 건 검색)

금천구 시흥동 일대 ‘35층 아파트’로 재개발···“관악산 조망 확보”
2023. 04. 11 13:57 지역
... 관악산에 인접한 곳이나 용도지역 상향과 용적률 인센티브로 높은 층수를 올릴 수 있게 됐다. 관악산 주변이 제1종일반주거지에서 제2종일반주거지로 상향돼 최대 13층까지 가능해졌다. 고층인 35층동은...
안양 관악산 삼막사서 불, 1명 사망…주지 스님 추정
2022. 03. 17 20:00 지역
... 석수동 관악산 내 사찰 삼막사에서 불이 났다. 이 불로 1명이 숨졌다. 연합뉴스. 경기 안양의 관악산 삼막사에서 불이나 1명이 숨졌다. 17일 오후 3시14분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관악산 내...
화재삼막사승려
북한산·관악산 맑은 공기 도심으로 끌어온다…서울시 '바람숲길'조성
2020. 10. 14 11:38 사회
... 등 세 가지 유형이 동시에 이뤄진다. 서울시는 산림청과 협업해 총 170억원의 국비를 투입, ‘관악산-안양천 일대’와 ‘북한산-우이천 일대’ 2곳에 ‘도시 바람길 숲’을 조성키로 하고 오는 11월부터...
[서울25]관악산 입구, 광장형 문화공원으로 탈바꿈
2020. 08. 05 10:17 지역
... 입구 으뜸공원 조성사업’을 진행한다고 5일 밝혔다. 관악산 입구는 대중교통과 잘 연계돼 관악산을 방문하는 많은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그러나 만남의 장소나 문화·휴식공간이 부족한...
서울25

스포츠경향(총 11 건 검색)

관악산 으뜸공원서 ‘관광버스 대잔치’ 3일 개최···사물놀이 창시자 김덕수 명인과 지역 예술인들 공연
2024. 11. 02 05:24 연예|연예|생활|생활|생활
관악문화재단 관악문화재단(대표이사 차민태)이 주최하는 문화취약계층을 위한 찾아가는 공연장, ‘관광버스 대잔치’ 특별 공연이 오는 3일, 관악구의 상징적 명소인 관악산 으뜸공원에서 열린다. ‘관광버스’는 ‘관악구 光란의 버스’의 줄임말로 ‘문화예술이 필요한 곳을 예술인과 함께 찾아가는 공연버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문화예술 접근성이 낮은 장소에 직접 찾아가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함으로써, 구민의 문화예술향유 기회를 넓히고 예술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기획되었다. 행사는 ‘관광버스’의 특별 프로그램으로 관악구의 다양한 계층이 관악산 으뜸공원 광장에서 가을을 만끽하며 다양한 장르의 공연 무대를 즐길 수 있도록 마련되었다. ‘관광버스 대잔치’는 오후 1시부터 오후 5시까지 진행되며, 1부에서는 사물놀이 창시자인 김덕수 명인과 함께하는 렉쳐콘서트가 열리며, 2부에서는 바이올리니스트 장한샘, 광신방송예술고등학교 뮤지컬팀, 도토리 합창단, 오드와이 댄스, 한국통기타협회 등 5개 팀의 관악구 예술인들의 다채로운 공연이 펼쳐질 예정이다. 관악문화재단 관악구 예술인 한국통기타협회 최진수는 “관악구의 랜드마크인 관악산 으뜸공원에서 공연을 할 수 있어 더욱 반갑고, 으뜸 공원에서 시민들을 위한 문화 활동이 활발하게 계속되기를 바란다”고 기대감을 전했다. 2024 ‘관광버스’는 관내 데이케어센터, 장애인복지관, 노인복지관 등을 찾아가 문화취약계층을 대상으로 공연을 선물하여, 행복과 위로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을 선사했다. 공연을 관람한 주민들은 “공연장을 가기에 힘들었는데, 직접 찾아와 공연을 해주니 정말 좋았다”, “어르신뿐만 아니라 복지사, 요양사 모두에게 힐링이 되는 시간이었다”라고 만족감을 전했다. 관악문화재단 차민태 대표이사는 “‘관광버스’ 사업을 통해 예술을 필요로 하는 일상 공간에 무대를 만들고, 관악구민과 문화취약계층을 위한 문화복지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세심한 노력을 기울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자세한 정보는 관악문화재단 홈페이지 또는 SNS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관련 문의 사항은 관악문화재단 생활예술팀으로 문의하면 된다.​
미미로즈, 2집 성공 위한 노력 ing “관악산 정상 기운 받아 파이팅”
2023. 06. 23 23:48 연예
예스아이엠엔터테인먼트 걸그룹 미미로즈(mimiirose)가 건강한 2집 활동을 위한 각오를 다졌다. 23일 미미로즈는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우당탕탕 관악산 등산일기’ 영상을 공개, 다이어트 챌린지를 이어갔다. 앞서 진행된 다이어트 개인 미션 실패로 약 600m 높이의 관악산을 등산하게 된 미미로즈는 시작부터 끝까지 흥 가득한 모습을 보여주는가 하면, “아침 운동도 되고 아주 좋다”라며 긍정적인 에너지도 선사했다. 처음으로 다 같이 하는 등산에서, 미미로즈는 서로를 이끌어주며 훈훈한 모습을 보였고, 간식 게임 및 야자타임, 댄스 타임 등을 통해 다채로운 매력까지 선보였다. 미미로즈는 정상에 도착한 후 “열심히 올라온 만큼 정상의 기운을 받아 저희가 더 잘 됐으면 하는 마음이 크다”라며 “2집이 잘 되기 위한 저희의 노력들이 하나하나 빛을 발휘하지 않을까. 미미로즈 2집 파이팅!”이라며 다가올 컴백을 향한 남다른 의지를 보였다. 개인 맞춤형 운동부터 식단 관리, 등산까지 컴백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미미로즈는 다이어트 챌린지 외 공식 SNS 채널을 통해 일상도 공유, 팬들과 소통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2023년 글로벌 팬들의 취향을 다시 한번 저격할 미미로즈는 오는 9월 컴백을 목표로 준비에 한창이다.
관악산 집단폭행’ 10대 가해자들, 1심서 최대 7년 징역형
2018. 11. 30 18:29 생활
또래 고교생을 노래방과 관악산에서 집단폭행하고 성추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중·고교생 9명 중 7명이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나머지 2명에게는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서울북부지법 형사합의13부(강혁성 부장판사)는 30일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특수강제추행), 아동·청소년의 성 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강요행위 등)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가해 학생들 가운데 주동자 ㄱ양에게 장기 7년·단기 5년 징역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ㄱ양과 함께 구속기소된 가해학생들에게 가담 정도에 따라 4명에게는 장기 4년·단기 3년6개월의 징역형을, 2명에게는 장기 3년6개월·단기 3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서울북부지방법원 청사 전경.서울북부지방법원 홈페이지 캡처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담 정도가 덜해 불구속 상태로 기소된 2명에게는 각각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겨진 가해학생 7명은 성폭력치료프로그램 80시간 이수와 함께 아동청소년 관련기관 취업제한 3년도 명령받았다. 만 19세 미만의 소년범죄자가 법정형 2년 이상에 해당하는 범죄를 저지른 경우에는 법원이 기간을 특정하지 않는 부정기형을 선고한다. 장기형과 단기형 기간 안에서 교정 정도에 따라 형기가 결정된다. 이날 재판에서 선고를 받은 가해학생 9명과 가정법원 소년부로 송치된 1명 등 10명은 지난 6월26일 밤부터 다음날 오전 3시쯤까지 평소 알고 지내던 고교 2년생 ㄴ양을 서울 노원구 소재 노래방과 관악산 등지로 끌고 가 집단으로 폭행하고 성추행한 혐의로 지난 8월 재판에 넘겨졌다. 앞서 지난 10월19일과 11월6일 열린 공판에서 검찰은 9명 피고인에게 범죄 가담 정도에 따라 장기 최대 8년, 단기 최대 5년을 구형했다.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 캡처재판부는 “피고인들이 모두 이 사건의 범행을 인정하는 점은 다소 유리한 정상으로 참작하겠다”며 “죄질이 매우 불량하고 피해자가 피고인에 대해 엄벌을 탄원하는 이상 무거운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피고인 9명은 그동안 재판부에 수차례 반성문을 제출한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 7월 피해자 ㄴ양 가족은 청와대 국민청원에 글을 올리며 폭행에 가담한 10명 가운데 1명이 만 14살 미만인 ‘촉법소년’이라는 이유로 서울가정법원 소년부로 송치되면서 ‘형사 미성년자 연령을 조정해야 한다’는 여론을 일으켰다. 청원 동의자가 20만명을 넘자 당시 김상곤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13세 이후 범죄가 급증한다면 형사 미성년자 연령을 13세 미만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답변을 했다.
관악산 또래 집단폭행’ 10대들 첫 공판…대부분 혐의 시인
2018. 08. 27 11:51 생활
또래 고교생을 노래방과 관악산에서 집단으로 폭행하고 성추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중·고교생들이 대부분 혐의를 인정했으나 일부는 성추행 사실은 부인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서울북부지법 형사합의13부(강혁성 부장판사)는 27일 또래 여고생을 때리고 추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중·고교생 9명에 대한 첫 공판을 열었다. 14∼17세인 이들은 지난달 26일 ㄱ양을 불러내 이틀에 걸쳐 노래방과 관악산에 끌고 다니며 주먹이나 발, 각목으로 여러 차례 때리고 신체 특정 부위를 나뭇가지로 찌르는 등 수치심을 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ㄱ양의 팔에 담뱃불을 대거나 입에 담뱃재를 털어 넣는 등 가혹 행위를 했고, ㄱ양은 극심한 폭행에 전치 5주의 상처를 입었다. 검찰에 따르면 이들은 또 ㄱ양에게 “하루 3번씩 조건만남을 해야 한다”고 강요하고 실제 성매매 알선자와 접촉했으나 ㄱ양이 가까스로 가족과 연락해 탈출하면서 미수에 그쳤다. 기사와 무관한 사진. 게티이미지뱅크이들은 각각 가담한 정도에 따라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특수강제추행), 아동·청소년의 성 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강요행위 등),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공동상해) 혐의가 적용됐다. 폭행·추행에 직접 가담한 7명은 구속됐으며 비교적 가담 정도가 약한 2명은 불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겨졌다. 대부분의 피고인은 이날 법정에서 변호인을 통해 “혐의를 모두 인정하고 깊이 반성한다”고 밝혔지만, 일부는 폭행 혐의를 인정하면서도 추행은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혐의를 부인하는 이들은 “신체 부위를 나뭇가지로 찌르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며 검찰 주장을 반박했다. 다음 재판은 10월 19일에 열린다. 한편 이 사건은 ㄱ양의 가족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피해를 알리며 ‘촉법소년’인 공범도 처벌받게 해 달라고 호소하면서 세간에 알려졌다. 기소된 이들과 공범인 ㄴ양은 만 14세 미만이라는 이유로 서울가정법원 소년부로 송치된 상태다. ㄱ양 가족이 올린 청원이 20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자 김상곤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답변을 통해 “13세 이후 범죄가 급증한다면 형사미성년자 연령을 13세 미만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주간경향(총 4 건 검색)

[언더그라운드 넷]다시 출몰한 관악산 UFO 소동, 정체가 밝혀졌다?(2020. 07. 17 15:45)
2020. 07. 17 15:45 사회
“확인해보니 정말 그날 신고받고 현장에 나간 기록이 있네요.” 서울 관악경찰서 낙성대 지구대 관계자의 말이다. 두 달 전쯤, 이 코너에서 서울 ‘신림동 UFO 목격소동’에 대한 기사를 썼다. 기사에도 일부 반영했지만 기사가 올라간 뒤 포털에 달린 400여 개의 댓글에는 더 구체적인 목격 증언이 나왔다. 봉천동의 낙성대공원에서 한 업체가 기구를 띄웠고, 누군가 신고해 경찰이 출동해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서울시 시범사업의 일환이라고 해명했다는 것이다. 앞서 경찰관계자의 부연. “기록엔 연락처나 업체명은 나오지 않네요. 서울시 미세먼지 관측 사업이라고 하는데….” 한국UFO조사분석센터 유튜브 캡처 이로써 5월 14일 목격된 물체는 규명됐다. 기구다. 굳이 확인을 거친 이유는 비슷한 장소에서 비슷한 물체가 다시 목격됐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휴대폰 촬영 영상이다. 목격자가 촬영한 시간은 6월 9일 오후 4시 23분. 5월 14일 사진을 기구로 판명했던 한국UFO조사분석센터는 이번 영상엔 “여러 각도에서 조사결과 과거 외국에서 채증된 적 있는 ‘해파리형 UFO’일 가능성이 높다”며 분석결과를 7월 14일 유튜브를 통해 공개했다. 그럴까. 꽤 꼼꼼히 검증한 듯싶지만 결정적으로 이 검증 영상엔 약 한 달 전쯤 비슷한 장소에서 비슷한 비행물체가 목격된 전력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만약 5월에 미세먼지 측정기구를 띄운 서울시 측이 6월 9일에도 비슷한 장소에서 기구를 띄웠다면 촬영된 ‘미확인비행물체’의 실체가 규명될 가능성이 크다. “현재의 미세먼지 측정망은 지상에서 약 20m까지만 가능합니다. 상공까지 미세먼지 분포가 확인되면 정확하게 모델링이 가능하겠죠. 이번에 처음으로 시도해보는 건데….” 서울시 기후환경본부 대기정책과 대기정보팀 유성원 주무관의 말이다. “왜 기구를 띄웠는지”에 대한 답이다. 6월 9일에도 띄웠을까. 확인 후 마침내 돌아온 답. “6월 9일 서울시 연구과제로 낙성대공원에서 운용했습니다. 오후 3시부터 이튿날 정오까지 했네요.” 확인 결과에 대해 한국UFO조사분석센터 측은 “기구형 풍선이라면 촬영 영상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이동 등이 해명되어야 한다”며 “차후 모의실험 등을 통해 증빙해야 하는데 협조가 가능할지 모르겠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언더그라운드 넷
[긴조9호세대대탐험](66)‘관악산 루쉰’의 지독한 문학 사랑(2005. 05. 03)
2005. 05. 03 사회
서울대 11·13시위(상) 풀벌레 소리만이 늦가을 밤의 고요를 흩트리고 있었다. 서울 근교의 외딴 자취방은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모두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할 것인가. 답은 없었지만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 각본 없는 드라마가 종막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그 결말이 어떤 모습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주인공들이 어떤 운명에 처하리라는 것을. “우리… 하지 않는 게 좋겠어.” 이윽고 누군가가 침묵을 깨뜨렸다. “전부 포기하는 거야. 여기서 모든 것을 중단하고….” ‘루쉰의 수제자’ 박병태의 고민 침중한 어조로 말을 잇는 사람은 다름 아닌 박병태(작고)였다. 서울대 국문학과 4학년인 그는 1978년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시위의 주동자 중 한 명으로 내정돼 있었다. 부산고·한사·75학번이라면 관악 운동권의 성골 중에 성골이었다. 그런 그가 강하게 ‘시위 불가론’을 폈다. 좌중에는 침묵보다 더 견디기 힘든 긴장감이 흘렀다. 박병태는 긴급조치 9호 세대의 비극적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삶을 살았다.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감옥살이를 하거나 노동현장 등에 투신함으로써 개인적 성취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은 긴조9호 세대에게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 코스였다. 그렇다보니 후유증이 만만치 않다. 이를테면 옥고를 치르면서 신체적 장애나 정신질환을 얻은 경우도 십수 명에 이른다. 개인생활이나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백수로, 나아가서 거의 폐인이나 다름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그 숫자가 훨씬 많다. 하지만 이 모든 비극도 박병태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1957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그는 부산중·고를 거쳐 서울대에 입학했다. 그는 친가와 외가로부터 강직한 선비 기질과 지조 높은 독립운동가의 가풍을 물려받았지만 성장 환경은 매우 불우했다. 5살 때 아버지가 실종돼 영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혼자 된 어머니가 어린 그와 젖먹이 동생을 어렵게 거뒀다. 대학생이 된 그는 홀어머니를 대신해 동생을 공부시키는 가장 노릇을 해야 했다. 이런 집안 사정으로 볼 때 그는 데모를 해서 감옥에 가서는 안 되는 처지였다. 하지만 이 점이 그를 주저하게 한 결정적 이유는 아니었다. 긴조9호 시대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와 비슷한 사정을 가진 활동가가 많았다. 그들이 ‘결단’을 내리는데 장애가 된 것은 감옥살이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부모의 기대를 배반한다는 것, 그로 인해 집안이 풍비박산되는 데 대한 괴로움이었다. 자식의 투옥으로 부모가 병을 얻어 세상을 뜨거나 집안이 몰락한 사례를 긴조9호 세대에게서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1977년 서울대 3·28시위를 주동한 양춘승(현 관악민주포럼 회장, 지환테크 대표이사)은 옥중에서 부친을 잃었다. 기대를 하고 있던 아들이 구속되고 그 여파로 다른 아들마저 직장에서 쫓겨나자 크게 상심해서 울화병을 얻은 것이다. 1979년 7월 17일 마산교도소에서 출소할 때까지 그는 아버지가 세상을 버린 줄 몰랐다. 가족들은 옥중에 있는 그에게 부고를 전하지 않은 대신 그가 나올 때까지 빈소를 치우지 않고 있었다. 홀어머니와 어린 동생이 박병태의 결단에 어느 정도 걸림돌이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임무’를 피하지는 않았다. 그는 4학년 1학기 초 부산고·한사 동기이자 75학번 언더그룹 수장인 김수천(현 아시아나항공 이사)에게 가을에 데모를 주동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10월 하순 경기도 구리 이흥국(현 오티스LG엘리베이터 상무)의 자취방 모임에서 거사 불가론을 펼 때까지 그 약속을 충실히 이행했다. 필요할 때마다 유인물 작업에 참여하면서 2학기 거사 준비를 해왔던 것이다. 뒷날 그가 남긴 일기나 기록, 주변 인물의 증언으로 볼 때 그를 가장 고민하게 만든 것은 감옥에 대한 두려움이나 가족문제에 대한 걱정이 아니었다. 그를 어렵게 한 것은 다른 데 있었다. 그것은 문학에 대한 ‘지독한’ 사랑이었다. 지인들은 그를 ‘작은 루쉰(魯迅)’ ‘루쉰의 수제자’라고 부른다. 중국의 위대한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루쉰을 존경하고, 루쉰의 사상과 문학세계에 조예가 깊으며, 외모와 생각과 언행이 루쉰과 많이 닮아서였다. 10월 17일 광화문은 조용했다 가족들은 그가 죽은 뒤 라면 상자 2개 분량의 유고를 발견했다. 일기와 시, 소설, 루쉰의 ‘양지서(兩地書)’ ‘삼한집(三閑集)’ ‘이심집(二心集)’ 등을 번역한 원고였다. 대학 재학 시절이나 관악경찰서 유치장에서, 그리고 군복무 중에 틈틈이 한 작업들이었다. 뒷날 동료들은 이 원고를 모아 ‘벗이여, 흙바람 부는 이곳에’(청사, 1982년), ‘루쉰 선생님’(청사, 1983년)을 출간했다. 이렇듯 문학적으로 이미 깊은 경지에 들었으니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거기에 쏟아붓고 싶었을 것이다. 경찰서 유치장에서 취조를 기다리면서 노트의 여백에 밤새워 소설을 쓰고, 군복무 중 내무반에서 루쉰을 번역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다시 말해 문학은 그가 가장 집착한 것이었고, 그의 모든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처한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루쉰적 인간형’이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긴조9호라는 억압 상황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이런 모순된 현실이 그를 끝없이 고뇌케 한 원흉이었다. 그의 국문학과 동기 박희병(현 서울대 교수)은 유고집 후기에 ‘낡은 사회의 철벽을 깨뜨리다 스스로 피투성이가 된 인간에게서 간간이 새어나오는 신음과 같은 것’이라고 그의 글에 대한 느낌을 밝혔다. 이를 더 인용하면…. “고 박병태형, 그는 맑고 깨끗한 혼을 간직한 이 시대에 드물게 보는 인간이었으며, 벗들과 이웃의 고통을 마치 자신의 아픔처럼 괴로워 한 그런 인간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현실과의 타협을 모르는 지독한 경골(硬骨)이었고, 스스로 헐벗은 자로 생활하면서, 부패한 사회가 허여하는 어떠한 기쁨도 거부한 채, 스스로와 싸우고 현실과 싸우면서 죽어갔다.” 1978년 10월 그는 그토록 사랑하던 문학과 잠시 결별해야 했다. 광화문연합시위일인 10월 17일 학내 데모를 주동, 시위대를 광화문으로 유도하는 임무를 맡은 것이다. 더 이상 글을 쓸 수도 없고 언제 나올지 기약도 없는 감옥으로 가는 일이었다. 함께 ‘동’을 뜰 동지는 75학번 이필렬(현 한국방송통신대 교수, 에너지대안센터 대표)과 76학번 김용흠(현 연세대 강사)이었다. 이미 보도한 대로 10·17거사는 불발됐다. 판을 크게 벌이려고 여러 갈래에서 공들여 준비하던 팀의 핵심들이 10월 10일부터 12일 사이에 일망타진됐다. 나머지 종범도 10월 15일에는 대부분 검거됐다. 당국은 15일로 예정된 민방공훈련을 17일로 연기, 등화관제훈련으로 대체했다. 17일 밤 광화문과 종로 일대는 모든 교통이 차단되고 암흑천지로 변했다. 이날 서울시내에 산발적인 시위가 있었다는 일부 증언이 있긴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어떤 시위도 일어나지 않았다(이재오, ‘해방 후 한국 학생운동사’ 형성사, 1984년). 광화문거사팀과 별도로 학내 시위를 준비했던 이필렬·박병태·김용흠은 다행히 검거를 면했다. 이필렬이 유종성(현 하버드대 박사과정, 전 경실련 사무총장)팀과 소통한 것이 조사 과정에 드러나 지명수배된 게 전부였다. 이필렬은 인천 본가에 형사가 들이닥쳤다는 연락을 받고 수배된 사실을 알았다. 그는 서울 흑석동에 은신처 겸 거사 준비 장소로 새로 방을 얻었다. 경기도 구리 이흥국의 방에 이필렬·박병태·김용흠이 회합한 때는 10·17거사 불발 직후, 이필렬이 흑석동에 새 아지트를 마련하기 직전으로 추정된다. 재판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10월 12일 이흥국의 자취방에서 10·17학내시위에 사용할 플래카드 제작과 유인물 초안 작업을 한 것으로 돼 있다. 이필렬·김용흠은 3마 길이의 옥양목에 ‘타도 유신독재’라고 매직잉크로 써 플래카드를 만들었고, 시위에 사용할 3종의 유인물 초안 작업을 분담했다. 박병태는 ‘학원자유화투쟁선언’, 이필렬은 ‘국회의원 선거를 거부하자’, 김용흠은 ‘우리들의 나아갈 바에 대하여’를 초안했다. 하지만 광화문 거사 준비팀이 사전에 궤멸되자 이들은 계획을 폐기하거나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병태가 ‘거사 불가론’을 들고나온 것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였다. “하지만….” 이필렬이 박병태의 말을 잠시 끊었다. “나는 생각이 달라.” 단호한 어조였다. 그는 거사 강행을 주장했다. 김용흠도 그의 편에 섰다. ‘관악의 루쉰’도 이필렬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박병태는 그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입을 닫았다. 이필렬도 구차하게 더 설명하지 않았다. 다시 침묵…. 갑자기 풀벌레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감옥에 간 75학번 활동가 중에 유일하게 자연대(화학과) 소속인 이필렬은 특이한 배경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운동권 리스트에 오른 학회나 서클 출신이 아니었다. 그가 속한 휴머니스트회는 자연대 운동권의 본류라고 볼 수 없었다. 휴머니스트회는 1960년대부터 존재한 범대학 교양서클로서 1970년대 후반 그를 비롯한 자연대생이 대거 입회하면서 자연대 중심 서클이 됐다. 이 서클은 1980년 ‘서울의 봄’에 자연대 시위 조직의 산실이 되는데, 자연대 학생회장 배명규(현 삼성화재 노원지점장, 78학번)가 바로 이 서클 출신이다. 자연대가 나설 수 없는 이유 자연대는 서울대 단과대 중에서도 운동의 뿌리가 없는 곳이었다. 1975년 캠퍼스의 관악 이전과 함께 문리대 이학부가 분리돼 생긴 것이 자연과학대학이다. 문리대라면 학생운동에서 최고 명문으로 꼽히지만 거기서 자연대만 따로 떼어내서 보면 아무 것도 없다. 운동의 기반이 되는 학회나 서클도, 운동의 맥을 이어줄 선배도 존재하지 않는 신생 단과대학인 것이다. 물론 운동을 한 선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박인배(물리학과, 현 민예총 기획실장)·박우섭(미생물학과, 현 인천 남구청장)·연성수(미생물학과, 현 두레생활문화원장) 등이 1970년대 중반에 맹활약한 자연대 운동권 선배였다. 하지만 이들은 과거의 문리대적 전통과 연극반·탈춤반 등과 같은 인문대적 조직을 기반으로 활동한 것이지, 자연대에 뿌리를 갖고 있지 않았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옛 문리대 출신 운동권은 인문·사회·자연대에 문리대적 맥을 가진 학회를 하나씩 조직하려고 했다. 양관수(현 고려대 객원교수, 동북아평화발전포럼 상임대표) 등은 인문대에 역철회, 사회대에 사복회, 자연대에 과사회(과학사상연구회)를 만들어 문리대의 맥을 잇는 운동의 중심으로 삼고자 했다. 하지만 이 가운데 과사회는 그의 뜻대로 조직되지 않았다. 자연대 운동권의 양축을 이루는 과사회와 ‘과학세대’ 편집실은 선배의 영향 없이 거의 자생적으로 형성된 것이었다. 동숭동 시대를 경험하지 않은 ‘관악세대’인 74·75학번에 의해서다. 74학번은 계열별로 입학해 공릉동캠퍼스에서 교양과정부를 마친 뒤 2학년부터 관악캠퍼스에서 공부했다. 자연계열에서 곧바로 자연대생이 된 것이다. 따라서 문리대에 소속된 적이 없었다. 자연대 운동권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은 74학번 채수찬(현 열린우리당 의원)·성하운(현 동아일보 심의팀 부장)이다. 채수찬은 전주고 3학년 시절 유신반대 시위로 제적된 뒤 재수해 서울대 자연계열에 수석합격한 수재였다. 채수찬은 자연대 교지인 ‘과학세대’ 편집실을, 성하운은 자연대 이념서클 과사회를 조직하는 데 중심이 됐다. 두 사람은 아무런 조직적 기반이 없는 자연대에 이 두 조직을 만들고, 이를 근거지로 삼아 후진을 양성했다. 73학번 중에는 군에 갔다가 복학한 김주언(화학과, 전 한국언론재단 연구이사), 교회운동권에서 활동한 한승호(미생물학과, 현 한화석유화학 이사보·환경연구소장) 등이 후배를 키우는데 일조했다. 자연대 운동권 형성기에 재학한 75학번의 핵은 박창기(현 세이코아 대표이사, 전 팍스넷 사장)·이한주(현 경원대 교수)였다. 박창기는 채수찬의 뒤를 이어 ‘과학세대’ 편집장을 지냈고, 이한주는 교회운동권에서 활동했다. 학교 당국과 사찰기관은 이필렬보다 이 두 사람을 더 주목했다. 75학번 활동가 중에 박인규(해양학과, 현 프레시안 대표이사)가 있었으나 그는 자연대보다 탈춤반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자연대 75학번 가운데 안팎으로 가장 돋보이는 활동을 한 박창기·이필렬은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었다. 박창기는 인천중-제물포고, 이필렬은 인천중-경복고를 나왔다. 즉 중학교 동기동창이다. 1978년 학생운동의 ‘히어로’인 이우재(전 인사련 부의장)와 중학교 동기다. 이들 인천중 트리오 중에 감옥에 안 간 사람이 박창기다. 투옥 경력으로만 학생운동가의 역량을 평가하는 것은 부족한 면이 있다. 자연대라는 독특한 토양에서는 운동의 주력군이 투쟁의 전면에 나설 수 없었다. 그보다 더 급한 것이 토양을 조성하고 인자를 키우는 작업이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겁이 많았고, 집안이 어려웠으며, 감시가 너무 심했다”며 “생존하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고 최근 말했다. 그는 반공개 조직인 6개대 교지 편집실 모임의 일원이었다. 인문대 ‘지양’(장석만), 사회대 ‘사회대평론’(김용관), 법대 ‘피데스’(김태현), 사대 ‘청량원’(김종철), 가정대 ‘아람’(박애령) 등 6개 단과대 교지 편집장 모임이 이 시기에 학생회의 기능을 했다. 학도호국단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 합법기구인 편집실 모임이 제한적으로나마 학생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었다. 26동 사건의 단초가 된 학도호국단 간선제 추진 서명작업도 이 모임이 주도한 것이었다. 그가 자연대의 핵으로 기관원의 집중 마크 대상이 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모두가 안 했으면 좋겠지만” 이필렬이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은 것은 박창기라는 강력한 바람막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박창기에 비해 자유로웠다. 휴머니스트회는 블랙리스트에 없었고, 과학세대·과사회·자연철학연구회 등 요시찰 조직과 긴밀히 교류하고 있었지만 드러난 것이 아니었다. 이흥국 자취방에서 박병태의 불가론에 충분히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처지였다. 6·12데모를 주동하고도 노출되지 않고 이우재·유종성팀과 긴밀히 소통하면서 활동을 계속한 이필렬의 반박 논리는 간단했다. 이미 준비한 것이고,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있으며, 개인적으로 수배중이라는 것이 ‘출사’의 근거였다. 아마 자신의 투옥이 자연대 학생운동의 밑거름이 될 것이라는 고려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박병태의 불가론을 공박한 게 아니라 자신의 출사 불가피론을 주장했다. 박병태의 불가론도 충분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최근 회고. “잘 기억나지 않지만 박병태의 얘기가 설득력이 있었다. 우리는 이흥국팀을 잘 몰랐다. 박병태는 잘 아니까 아마 그 팀의 활동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시위를 하게 되면 그 팀은 금방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가장 걱정한 것이 이 점이었다.” 박병태와 이필렬은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둘 다 맞는 얘기였기 때문에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를 기대할 수 없었다. 양쪽이 양보해 절충점을 찾아야 했다. “그럼….” 박병태가 말했다. “나는 빠지겠어. 모두가 안 했으면 좋겠지만 나 혼자라도….” 이필렬도 거기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계획대로 거사는 하되 박병태는 ‘동’으로 참여하지 않는다는 쪽으로 정리된 것이다. 그런데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박병태를 대체할 동이 한 명 있어야 했다. 2학기 말이라 75학번 자원자는 당연히 씨가 말랐다. 사람이 없어 6·12, 9·13시위에 3학년인 김종복(현 캐나다 토론토 비버리힐스연합교회 목사)을 참여시켰고, 이번에도 다음 해에 활동해야 할 김용흠을 미리 끌어다 쓰고 있지 않은가. 그는 촉수를 곤두세웠다. 잡힐 듯하면서도 정체가 불분명한 신호를 포착한 것은 ‘구리 모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족보가 확실한 모든 가문을 이 잡듯이 뒤져도 찾지 못했던 예비전사가 뜻밖의 조직에서 나타났다. 그것도 75학번이었다. 얼굴도 익지 않고 이름도 몰랐던 무역학과 4학년 천윤배(현 굿모닝신한증권 부장)였다.
[긴조9호세대대탐험](56)관악산 중턱의 6인 전략회의(2005. 02. 22)
2005. 02. 22 사회
서울대 3차시위(중) 개찰구를 통과하는 순간 시계는 정확히 10시 30초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역 구내를 둘러보았다. 일행을 기다리는 주말 등산객과 행락객 틈에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두 명이 부족했다. 대합실에서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뭔가 생각난 듯 출구 쪽으로 다가갔다. 콘크리트 바닥에 반사된 초가을의 강한 햇살이 그의 눈에 작열했다. 그는 이마에 손을 얹고 밖을 응시했다. 넷... 그리고 다섯. 계단을 오르는 마지막 한 사람을 셈한 뒤 시계를 보았다. 10시 30초를 막 지나고 있었다. '됐어.'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접선'은 오차범위 30초 이내에 완료돼야 한다. 불가피하게 공공장소에 얼굴을 드러내는 시간은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 그래서 검거되거나 미행당할 위험이 가장 큰 접선 시간을 1분으로 엄격하게 제한해왔다. '±30초 룰', 그것은 후배들과의 수많은 비밀 회합을 통해 그에게 체질화된 것이었다. 운동권과 유신의 정면대결 시간은 생명이다. 일상에서나 작전에서나 시간이 성패를 좌우한다. 약속 장소에서 노출 시간을 줄이는 것, 초동 시위에서 합류 타이밍을 맞추는 것은 '운동'의 기본이다. 그는 그것이 초 단위로 이뤄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 만큼 오늘 만남은 예감이 좋다. '이번 작전은 성공할 것이다. 반드시....' 지하철 1호선 관악역에 나타난 이 수상쩍은 남자는 서울대 종교학과 73학번 주대환(현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이다. 긴급조치 9호 시대 서울대 학생운동의 최고 배후이자 1980년 '서울의 봄'을 주도한 무림세력의 최상층부에 위치하는 인물이다. 2학년 때 민청학련 사건으로 조사를 받고 강제징집됐다가 1977년 가을에 복학한 그는 그 무렵 뒷날 무림세력의 코어그룹이 되는 76학번 '10인 지하 지도부'를 이끌고 있었다. 관악역 구내를 빠져나온 그는 곧바로 안양유원지 쪽으로 향했다. 역사 주변과 안에 있던 몇 명의 젊은이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그와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100m 가량 지났을 때 그를 포함한 6명이 완전히 한 무리를 이뤄 안양유원지 쪽으로 사라졌다. 1978년 9월 9일 토요일. 5-8시위, 6-12시위에 이은 서울대 3차시위의 작전이 완성되는 이날은 그해 10월의 '대사건'이 시작되는 날이기도 하다. 학생을 중심으로 한 반정부 운동 역량과 긴급조치 9호로 상징되는 유신체제의 수사력이 정면승부이자 명승부전(?)을 펼치는 출발점이라고 할까. 그런데 양 진영의 명운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시간'일 줄이야.... 주대환이 역사를 빠져나온 지 약 한 시간쯤 지나 이들 일행은 관악산 2분의 1 능선의 한적한 터에 자리잡고 있었다. 땀을 훔치느라 장발을 쓸어올리는 얼굴 중에는 낯익은 인물이 있었다. 6-12시위를 주동하고 종적을 감춘 이우재(전 인사련 부의장)-성욱(현 청양농촌체험학교장)-김종복(현 캐나다 토론토 비벌리힐즈연합교회 목사)이었다. 하지만 '6인 전략회의'의 핵심 인물은 주대환과 이들 도망자 삼총사가 아니라 다른 두 사람이었다. 이우재의 동양사학과 동기인 양민호(현 대한광업진흥공사 감사)-조성을(현 아주대 교수)이었다. 9-13 서울대 3차 거사팀의 팀장이 양민호이고, 조성을은 이날 회의에서 현장지휘자의 '임무'를 부여받게 되니까. 뒷날의 '독일병정' 양민호는 당시 '용달차'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키가 작은 데다 어디든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활동 반경이 넓어서였다. 그의 운동 배경은 특이했다. 한사와 같은 유력 패밀리 소속도 아닐 뿐 아니라 다른 특별한 백그라운드 없이 활동하는 데도 학내에서 손꼽히는 주목 인물이었다. 학회 → 야학 → 학내운동 광주(당시 전남 광산군) 태생에 광주일고 출신인 그는 '도 아니면 모'가 될 집안 내력을 갖고 있었다. 좌익활동을 하다가 비명횡사하거나 월북한 선대 형제들의 전력 때문이었다. 전형적인 소농인 그의 아버지는 그가 이러한 불행한 가족사를 털어버리고 집안을 일으킬 거라고 기대했다. 두 딸은 중학교에도 보내지 않으면서 장남인 그는 대학에 보냈고, 공부 이외에 다른 데 빠지지 말라고 늘 그에게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아버지와 달랐다. 법-상대는 아예 체질에 맞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회과학'에 빠져든 것도 아니었다. 서울대 입학 후 한사에 들어갔으나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그에게 한사는 너무 권위적이고 교조적이었다. 게다가 광주일고 동기가 너무 많았다. 그는 한사 패밀리가 되기를 거부하고 후경회(후진국경제연구회)에 입회했다. 그런데 후경회는 그가 들어가자마자 터진 '오둘둘 사건'으로 유명무실해지고 만다. 살아남은 선배들마저 학회 활동을 포기해버리기 때문이다. 현무환(현 웅진미디어 대표이사 전무 )-기춘(현 청와대 행정관) 등 쟁쟁한 인물을 배출하면서 서울대 학생운동의 주력군 가운데 하나로 등장하는 뒷날의 후경회는 당시 1학년생인 그와 김동철(현 동아일보 디지털뉴스팀장) 등이 폐허에서 새로 일으켜 세운 것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용달차' 양민호의 운동 기반은 후경회에만 있지 않았다. 1학년 2학기 들어 고교 선배인 김성재(현 동북아평화센터 사무국장)와 함께 신림동 B지구에 겨레터야학을 시작한 것이다. 국민대 한문학과 74학번인 김성재는 야학운동의 산증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뒷날 야학운동이 확산되면서 야학 교사를 '강학(講學)'이라고 부르게 되는데, 이는 김성재-양민호가 만든 말이다. 교사를 강사(講師)가 아니라 강학이라고 한 데에는 '(민중을)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운동적 의미가 숨어 있다. 겨레터야학은 1980년 광주민중항쟁의 '신화'로 타오른 광주 들불야학의 불씨 역할을 하기도 했다. 김성재는 "1976년 윤상원 선배가 겨레터야학에 와서 노동법 강의를 하면서 '광주에 가서 이런 야학을 해야겠다'고 말했다"고 최근 회고했다. 전남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주택은행 봉천동지점에서 근무하던 윤상원(1980년 광주항쟁 시민군 대변인, 계엄군 진압 과정에 총상으로 사망)은 겨레터야학을 벤치마킹한 뒤 광주에 내려가 1979년 들불야학을 열었다. 양민호는 김성재에 이어 겨레터야학의 2대 강학장을 맡았다. 김수천(현 아시아나항공 이사)-부윤경(현 삼성물산 부장)-김용관(현 성균관대 교수)-박관석(현 목포대 교수)-이창호(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부장)-배남효(현 관악민주포럼 부회장)-홍윤기(현 동국대 교수) 등 수많은 긴급조치 9호 투사들이 겨레터야학의 강학을 거쳐갔는데, 이들을 끌어들인 사람이 바로 양민호였다. 그는 3학년 때부터 학생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강학장 자리를 홍윤기에게 넘겨준다. 그가 본격적으로 블랙리스트에 오른 것은 26동 사건의 도화선이 된 학도호국단 간선제 추진 모임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면서였다. 이때 연성만(현 그린콜닷컴 이사)은 무기정학, 그는 유기정학을 당한다. 대학 생활 대부분을 학회→야학→학내운동으로 보내고 4학년 2학기가 됐을 때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는 형국이 됐다. 그와 관계를 맺은 동지는 모두 구속됐거나 도피 중이었다. 그는 이우재-배남효와 함께 '인문대 소인(小人) 삼총사'로 통했다. 키는 작지만 활동력이 뛰어나 '작은 거인'으로 불리기도 한 이들 중 그만 멀쩡했다. 배남효는 구속됐고, 이우재는 수배중이었다. 이 즈음 그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이제 자신의 차례라는 것을. 자발적 참여에서 조직적 시위로 "3학년 말에서 4학년 초 7~8명이 모인 전략회의에서 순번이 정해졌다. 75학번의 역량으로는 3팀 정도를 짤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5월에 한 번 치고, 김수천이 한 번, 그리고 세 번째는 2학기에 내가 하기로 한 것이다. 원래 사람이 없어 빠듯한 형편이었다. 그래서 '놀고' 있는 이우재팀을 합류시키기로...." 양민호의 최근 회고. 9월 9일 관악산 회합은 바로 양민호가 책임지기로 한 3차 거사팀의 마지막 전략회의였던 것이다. 이 회합에 참여한 조성을은 운동권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중산층 집안에 경기고 출신의 학자풍이었고, 활동 영역도 중도적 교양서클인 고전연구회였다. 운동이나 데모와는 거리가 먼 인물로 보였다. 양민호는 2학기 거사를 함께 할 사람을 찾으면서 답답한 마음에 과 동기인 조성을을 넌지시 떠보았다. 그런데 뜻밖에 "하겠다"는 게 아닌가. 그는 망설였다. 조성을까지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조성을은 갈 길이 따로 있었다. 대학원에 가서 학자가 되는 게 맞다고 보았다. 그는 '조성을 카드'는 가능한 한 쓰지 않기로 하고 사람을 더 물색했다. 경찰 조서에는 조성을이 3차 시위팀에 참여하기로 최종적으로 결심한 때는 관악산 전략회의 하루 전인 9월 8일로 되어 있다. 이미 내락을 받은 상태에서 대안을 모색했다는 양민호의 증언과 일치한다. 이날 양민호는 "사람이 없으니 이우재와 같이 하자"고 제의했고, 조성을은 이를 수락했다. 두 사람은 합의 후 구로공단 옆 중국집 태흥루에서 성욱-이우재-김종복을 만나 자장면과 고량주, 군만두를 먹으면서(식대 및 주대는 3000~4000원으로 양민호가 부담) 5인이 주동해 거사하기로 확정하고 다음날 오전 10시 관악역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이뤄진 관악산 전략회의는 학내 데모인 3차시위의 구체적인 작전뿐 아니라 1978년 하반기 학생운동의 큰 그림까지 그린 중요한 자리였다. 5인 주동자 외에 주대환이 참여한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주대환은 한사 1기 선배인 72학번 정태윤(전 한나라당 사이버위원장)과 함께 학내 운동을 후원하며 학외세력과도 소통하고 있었다. 그는 백삼철(현 세명대 한의학과 재학)-유종성(현 하버드대 공공정책학 박사과정, 전 경실련 사무총장) 등이 관계하는 대학연합팀과도 연결돼 있었고, 시위 동원령을 하달할 하부조직인 76-77학번 언더지도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우선 이날 확정된 3차시위의 작전 개요는 다음과 같다. ①조성을이 마이크를 잡고 ②이우재-성욱-김종복이 유인물을 제작하고 ③유인물 살포는 강의실에서 시작한다 다시 말하면 6-12시위처럼 군중을 아크로폴리스에 집중시킨 뒤 조성을이 1동 난간에 나가 시위를 지휘하는 방식이었다. 한 번 써먹은 작전을 다시 구사한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6-12에서 6-26으로 이어진 김수천의 작전이 예상 밖의 큰 성과를 거둔 만큼 약발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1동 난간은 한 번 정도는 더 이용해도 괜찮을 정도로 훌륭한 작전 포인트라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이유가 따로 있었다. 3차시위는 시위 그 자체의 성공이 목표가 아니라 10-17거사라는 큰 틀 속에 있었다. 거사팀은 3차시위 선언문에도 6-12데모 때처럼 광화문시위를 예고하기로 했다. 날짜는 유신선포 6주년인 10월 17일, 시간은 오후 6시였다.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한 6월 예고시위와 다른 점이라면 이번에는 조직적인 시위를 시도한다는 것이었다. 즉 3차시위는 10-17거사를 위한 위계(僞計)의 의미도 있었던 것이다. 양민호의 말을 들어보면... "중요한 것은 10-17이었다. 모든 작전의 목표가 거기에 있었다. 우리도 1동 난간은 한 번 한 곳이라 오래 버틸 수 있다고는 보지 않았다. 선언문 읽고 군중을 모을 시간만 벌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는 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될 수 있는 한 잡히지 않기로 하고...." 다소 논란의 소지는 있지만 3차시위 작전의 숨은 포인트는 바로 주동자를 안전하게 도피시키는 것이었다. 특히 6-12데모를 성공시킨 뒤 잠적함으로써 다른 대학에서도 '영웅적' 학생운동가로 알려진 이우재-성욱-김종복은 3차시위에서는 유인물만 뿌리게 한 뒤 10-17거사의 '야사'(야전사령관, 즉 현장지휘자)로 빼돌린다는 게 배후그룹의 생각이었다. 물론 9-13 서울대 3차시위 주동자들은 이런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우재는 "도망갈 걸 염두에 두고 데모를 주동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며 "우리는 하나하나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당면한 임무에 모든 힘을 쏟았다"고 최근 말했다. 완벽한 시나리오 그러나... 어쨌든 9월 13일로 잡힌 3차시위의 작전은 표면적으로는 6-12데모와 비슷했다. 거사 당일의 행동개시 시간은 오전 11시 50분. 양민호는 5-6-7동에 유인물을 살포하고 H아워에 5동 앞에서 사람을 모아 1동 앞으로 내려오기로 했다. 김종복도 1-2-3동에서 유인물을 살포한 뒤 마찬가지로 H아워를 기해 5동 앞에서 사람을 모아 1동 앞으로 내려오기로 했다. 성욱-이우재는 같은 시각 자연대 쪽에서 떠서 학생회관 식당을 경유, 중앙도서관 앞 계단에 사람을 모은다는 것이었다. 조성을이 1동 난간으로 나가는 시각은 11시 52분. 바로 양민호-김종복이 1동 앞에 도착하는 때다. 그렇게 되면 조성을이 '민주구국선언'을 낭독하고 있을 즈음인 11시 54분에 성욱-이우재가 아크로폴리스에 입성, 1동 앞은 자연스럽게 '해방'될 터였다. 흠잡을 데 없는 작전에다 실전 경험까지 갖춘 '선수'들이 출전하는 것이니 걱정할 게 없었다. 게다가 장기 도피생활에 지친 성욱-이우재-김종복은 잡혀도 여한이 없고, 양민호 또한 친구들이 있는 감옥이 마음 편할 것 같은 심정이니... 조성을마저 이미 사기충천한 전사가 돼 있었다. D데이인 9월 13일 아침,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수배중인 성욱-이우재-김종복은 캠퍼스 서편의 개천으로 들어가 '개구멍'을 통해 무사히 학내에 잠입했다. 양민호-조성을도 시위용품을 교내에 반입하는 데 성공했다. 날씨도 이들의 거사를 방해할 생각이 없는지 쾌청하기 이를 데 없었다. 11시 50분. 조성을은 메가폰과 유인물을 들고 1동 2층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11시 30분께부터 1동과 2동 복도를 오가며 동정을 살폈지만 그를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동 복도에서 유인물을 돌리던 김종복이 5동 앞에서 떴을 타이밍이다. 그는 2분을 기다린 뒤 정확히 52분에 복도에 있는 의자로 유리창을 깨고 난간으로 나갔다. "유신체제 타도하자! 긴급조치 철폐하라!" 1동 주변에는 꼭 3개월 하루 전에 있었던 것과 똑같은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이 시각, 28동 앞을 비롯한 자연대 주변은 텅 비어 있었다. 성욱-이우재가 보이지 않았다. 예정대로라면 학생들과 함께 학생회관으로 뛰어가야 했다. 이미 타이밍을 놓친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제서야 강의동을 황급히 빠져나오는 그들이 보였다. 다시 1동 앞. 김종복은 학생들 틈 속에서 연신 아크로폴리스 쪽을 돌아보았다. "젠장, 왜 안 오는 거지!" 그는 짜증스런 몸짓으로 사복형사들의 손아귀를 뿌리쳤다. 난간에서 선언문을 읽고 있는 조성을과 혼란스런 군중 속에 몸을 숨긴 양민호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이우재-성욱팀이 아크로폴리스 계단에 도달한 것은 예정시간보다 약 3분 늦은 때였다. 이들은 이날 서두르는 바람에 그만 시계를 두고 나왔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경우가 있는 법이다. 물어서 들은 시간과 감에 의존한 타이밍 조절이 엄청난 오차를 만든 것이다. 다행인 점은 뒤늦게나마 성공적으로 아크로폴리스에 군중을 형성한 덕에 이날 시위가 무산되지 않은 것이다. 비록 6-12데모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목표했던 바는 넉넉하게 넘어선 규모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시위 그 자체가 아니었다. 시위에 참여한 학생은 물론 주동자 스스로도 느끼지 못한 위험요소가 '시간의 오차'가 만든 상황 속에서 배태되고 있었으니... 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긴조 9호세대 비화]관악산 유격대 '삼우일승'(2004. 08. 19)
2004. 08. 19 사회
양춘승(현 지환테크 대표, 관악민주포럼 회장)은 논리가 명쾌하고 사리 판단이 분명했다. '4년 시한부 학생운동은 한계가 있다. 단발 희생타로 끝나버리는 시위로는 사회의 근본을 바꾸는 것은 고사하고 눈앞의 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혁명은 결코 4년짜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 역시 관악 언더그룹의 메인스트림과 인식을 같이하고 있었다. '학생운동은 혁명이라는 장기전을 준비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깨어 있는 학생 역량이 민중 속으로 구석구석 스며들어 혁명의 불씨가 되도록 해야 한다. 하방(下放). 대학 4년은 이를 준비하기에도 충분하지 않은 기간이다.' 그런데... 그는 혼란스러웠다. 흔들리고 있었다. 3년 동안 금과옥조처럼 지켜온 신념, 그 자신은 물론 그가 속한 패밀리가 공유해온 '모범답안'을 버려야 하는 상황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느꼈다. "학교가 너무 조용하지 않아?" 1974년 광주고를 졸업하고 그해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한 그는 농촌법학회(농법회)의 식구가 됐다. 그는 농법회 1년 선배이자 리더인 이범영(전 민청협 의장, 작고)과는 '계급'부터 달랐다. 깡촌(전남 장흥군 장평면) 출신이고, 빈농의 아들이었다. 몸속에 흐르는 '피'가 더 뜨겁고, 더 빨리 끌어오를 수밖에 없는 훌륭한(?) 성분이었다. 1학년 가을 민청학련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학내 시위가 불붙었을 때 그는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연설, 활동가의 '싹수'를 보여주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시류를 읽는 데도 남다른 감각을 갖고 있었고, 현실을 타개하는 지략과 사람을 모으는 수완도 돋보였다. 3학년이 되었을 때 그는 자연스럽게 패밀리의 리더가 돼 있었다. 당시 학내에 향토개척단이라는 연합서클이 있었다. 법대 농법회, 상대 농업경제학회(농경회), 사대 향토개발회, 자연대 황토, 약대 소(牛)모임, 공대 향토공학회, 농대 농연(한얼-농사단-개척농사회의 연합조직) 등 농촌 관련 서클을 망라한 것이었다. 양춘승은 이 향토개척단의 단장을 맡았다. 일반적으로 캠(학생운동)의 지휘권은 3학년이 갖는다. 1~2학년 때는 '공부'에 전념하다가 3학년이 되면 후배를 지도하고 '집안'을 건사하고 운동을 지휘하는 등 전권을 행사한다. 74학번이 3학년이 된 1976년 서울대 내에는 운동성 있는 서클을 중심으로 언더그룹이 구축돼 있었다. 한국사회연구회(한사)-농법회-농경회-국제경제학회(국경회)-이론경제학회(이경회)-역사철학회(역철회)-흥사단아카데미(아카데미) 등 10여개 패밀리 대표가 비밀 회합을 통해 활동을 조율하고 있었다. 농법회와 향토개척단을 대표하고 있는 그도 이 그룹의 일원이었다. 양춘승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1학기가 '조용히' 지나간 1976년 여름이었다. 아무리 조직이니 민중이니 현장이니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학교가 이렇게 조용해서야 되겠느냐는 얘기가 운동권 내부에서 조금씩 흘러나오는 시점이었다. 그의 예민한 귀가 이를 놓칠 리 없었다. 그리고 그 소리는 몇 십배 증폭돼 그의 내면을 뒤흔들었다. 그의 이런 마음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경제학과 동기 김창우(전 부산지역일반노동조합 집행위원)였다. 그는 가장 선진적인 이론으로 무장한 그룹인 한사의 리더였다. 그러니만큼 이론에서 당할 자가 없을 정도로 예리하고 철저한 면이 느껴지는 친구였다. 교문 앞에서 그의 '콜'을 받은 양춘승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학교가 너무 조용하지 않아?" 지나가는 말투였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 말이 무얼 뜻하는지를. 그 역시 지나가는 말처럼 되받았다. "어디 할 놈이 있을까." 그것은 사실이었다. 뭔가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는 분위기는 분명 있었지만, 움직일 사람을 찾아내고 규합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그런데 김창우의 말이 그의 귓전을 때렸다. "내가 좀 알아볼게." 선문답 같지만 무서운 뜻이 담긴 대화였다. 이제 데모를 할 때다, 내가 총대를 멜 텐데 너도 하겠느냐, 좋다, 그렇다면 사람을 더 모아보자... 이런 내용이었다. 당시 서울대 이념서클은 대부분 이중구조를 채택하고 있었다. 서클을 책임지는 실질적인 리더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게 일반적이었다. 공식적인 회장은 기관원의 주목을 받지 않는 사람으로 등록하고 실제로 서클을 꾸려나갈 사람은 따로 두는 식이었다. 김창우는 한사의 살림과 대외 활동을 책임지는 실질적인 수장이었다. 하급공무원 집안의 4남1녀 중 장남으로 제주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부산에 정착해 부산고를 나온 그는 이론에도 강했지만 실천력 또한 강했다. 74학번 언더그룹의 일원이면서 73학번 선배와도 긴밀한 커넥션을 맺고 있는 핵심 인물이었다. 한여름의 '도원결의' '사람을 모으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자신은 결단을 내렸어도 남의 인생을 망치라고 권유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괴로운 일일 수밖에 없다. 또 의식과 의지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다. 깔끔하게 일을 치를 수 있는 능력 또한 갖고 있어야 하며, 그 뒤에 닥칠 가혹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극복할 수 있는 '프로'여야 한다. 박형규 목사(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의 제일교회 팀에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사대 역사학과 74학번 박찬우(전 여수YMCA 파견간사)였다. 기질이 강하고 드세 보이지만 한없이 순한 구석도 있는 그는 선배그룹이 촉망하는 재목이었다. 체구가 건장하고 강단이 만만치 않은 데다 검도 유단자였다. 그것만이 아니다. 머리가 영민했고 특히 기억력이 비상했다. 언변 또한 '박구라'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좋았다. 전남 나주 출신으로 광주에서 영세 자영업을 하는 집안의 6남2녀 중 3남인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자라 자립심이 강했다. 광주일고를 거쳐 서울대에 입학한 그가 새로운 세상에 눈뜬 것은 제일교회와 인연을 맺으면서였다. 선배의 소개로 용산 바울학사에 들어간 그는 제일교회의 중랑천변 빈민촌 야학에 참여했다. 그는 철거민들의 피눈물나는 삶과 그 가운데서도 피어나는 따뜻한 정을 체험하고 스스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깨쳤다. "이런 세상은 안 된다"며 고뇌하던 그는 뒤늦게 학내 기반을 갖기 위해 사대 향토개발회에 입회, 향토개척단의 일원이 됐다. 1976년 여름, 그의 마음은 이미 '정리'돼 있었다. 양춘승-김창우가 바울학사를 찾아왔을 때 그는 '혁명가의 길'을 걷기로 작심하고 있던 참이었다. 뜻밖의 인물이 또 한 사람 있었다. 제주일고 출신의 김천우(현 강창일의원 보좌관, 전 SK글로벌 상무). 3학년 1학기까지 맡고 있던 아카데미 회장 자리를 다음 사람에게 넘기고 개인의 진로를 모색중인 법학도였다. 74학번 언더그룹의 아카데미 대표였던 그는 내부 논의를 거쳐 사법시험 준비를 하기로 잠정결정한 상태였다. 법학 전공이니 인권변호사의 길을 가는 게 좋다는 이너그룹의 의견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그는 차분하고 심지가 굳은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운동뿐 아니라 일상 활동에서도 모범적이었으며, 고향 제주에서 기대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가 사법시험을 준비하면 오래지 않아 금의환향할 것을 그를 아는 사람은 별로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사시 공부는 일주일을 넘기지 못한다. 3일째 김창우가 찾아와 흔들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생각했다. 피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하방도 좋고 인권변호사도 좋지만 필요할 때 치고나가지 못하면서 어떻게 민중을 말할 수 있는가. 이런 마음으로 헌법을 보니 더 부아가 치밀었다. 5일째 되는 날 그는 법전을 팽개쳐버렸다. 그리고는 김창우에게 달려갔다. 양춘승과 김창우-김천우-박찬우. 이름 끝자를 따서 뒷날 '삼우일승'으로 불리는 거사팀이 조직된 때는 한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1976년 7월 말이었다. 이 사실은 박석운(현 전국민중연대 집행위원장)-백계문(현 한국증권금융 상임감사)-이범영 등 73학번 선배그룹에도 전해졌다. 8월 중순 이들 7명은 비밀리에 경기 송추로 떠났다. 거사를 위한 작전회의이자 향후 학생운동의 방향을 설정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세상 일이란 계획한 대로 척척 결과가 나오지 않는 법. '송추작전' 역시 그런 세상사의 이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73학번 삼총사와 74학번 4인방의 계획은 예기치 못한 변수 때문에 뒤죽박죽돼버린다. 작전이 종료되기까지 무려 7개월이 소요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 중단과 재시도, 수정, 반복 등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송추 7인 회합에서 애초에 수립된 작전은 다음과 같다. *73학번은 데모를 하지 않는다. *양춘승-김천우-박찬우 3인이 첫 테이프를 끊는다. *김창우는 남아서 후속 시위를 조직한다. *D데이는 10월 축제 전후로 한다. 송추에서 돌아온 거사팀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일단 주변 정리를 깨끗이 하는 것이었다. 가족 등 사적인 부분은 물론 자신이 소속한 조직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그 다음은 은인자중하는 것이었다. 3명이 모든 책임을 지려면 주변과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 바람직했다. 이들은 송추 모임 이후 73학번 삼총사와도 '거래'를 끊었다. 길고 긴 7개월의 대장정 주변 정리를 완료한 뒤 이들이 잡은 D데이는 10월 22일. 이때부터 이들은 동선을 극도로 제한하고 시간대별로 알리바이를 맞췄다. 불가피하게 거사팀 외의 인물을 만날 경우 알리바이를 조작해서 기억 속에 각인시켰다. 이런 가운데 불거진 뜻밖의 변수가 바로 10-15축제데모, 이른바 감나무골 사건이었다. "데모 자체는 우발적이고 자연발생적이라 문제가 없었지만 그 일로 박찬우가 경찰에 연행된 것이 치명타였다. 만에 하나라도 우리 계획을 불기라도 하면 일을 하기도 전에 일망타진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무조건 도망칠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거사 계획도 일단 접어야 했다. 다음을 기약하면서..." 양춘승의 최근 회고다. 다행히 박찬우가 무사히 풀려나면서 거사팀은 복원됐지만 작전을 다시 짜야 했다. 이미 학기가 마무리되는 시점이라 해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거사 일정이 재조정됐다. 다음해 새 학기가 시작되면 맨 먼저 치고나가기로... 삼우일승팀의 첫 번째 거사 실패가 낳은 결과가 73학번 삼총사의 12-8시위였다. 데모를 하지 않기로 한 박석운-백계문-이범영이 졸업시험을 끝내고 전격적으로 시위에 나섬으로써 기대 이상의 극적 효과를 연출한 셈이었다. 양춘승 등 74학번 거사팀은 선배들의 거사를 먼 발치에서 지켜보았다. 이렇게 해서 학생운동의 주력인 74학번이 한 번도 거사를 하지 못하고 해가 저물자 언더그룹 내부 분위기가 심상찮게 돌아갔다. 2학기부터 양춘승으로부터 지휘봉을 넘겨받아 향토개척단을 이끌고 있던 오세범(전 내일신문 업무기획실장)이 '공개적'으로 불만을 터뜨린 것이다. 양춘승이 오세범에게 향토개척단장을 넘겨줄 때 둘 사이에 나눈 은밀한 얘기가 있었다. 농경회 소속인 오세범은 군 입대를 앞두고 있었고, 제대 후 노동현장으로 가기로 진로를 설정하고 있었다. 이를 아는 양춘승은 "내가 뭔가를 하기로 했으니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군대에 갔다 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의 거사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뒤 겨울방학 때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그 얘기를 꺼낸 것이다. "춘승이 넌 하기로 해놓고 왜 안하는 거야?" "아, 그건... 하려고 했는데 용기가 안 나 포기했어." 임기응변으로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상황은 간단치 않았다. 오세범이 독자적으로 뭔가 일을 꾸미는 움직임이 감지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왕 하기로 했으면 서로 일정을 조정하는 게 낫기 때문이다. 그는 오세범을 만나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고 "3월 24일경에 우리가 먼저 나갈 것이니 후속타를 쳐라"고 말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1977년 3월 새학기가 열렸다. 아무리 굳은 결심도 너무 오래 끌면 물렁해지는 게 사람이다. 하지만 양춘승-김천우-박찬우는 그럴 수 없었다. 관악에 봄이 다시 찾아오면서 반년 넘게 표류해온 이들의 거사도 가부간 결말을 내야 할 상황에 내몰렸다. 이들은 지치고 느슨해진 마음을 다잡고 막바지 준비에 돌입했다. 이미 한 차례 도상연습을 한 셈이라 별다른 시행착오는 없었다. 그들에게 닥친 불길한 기운 판결문에 따르면 이들은 3월 20일 김천우의 사당동 자취방에서 시위에 사용할 유인물인 '민주구국선언문' 초안을 작성하고 23일 확성기와 플래카드 제작에 필요한 페인트와 포목, 종이 등 시위용품을 구입했다. 거사 일시는 24일 점심시간. 이들은 거사 당일 플래카드와 유인물 등을 각자 가방에 나눠 학교로 운반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이번에는 하늘이 말썽이었다. 관악골을 온통 진눈깨비가 뒤덮고 있는 것이었다. 이들은 철통 같은 학내 사찰망을 뚫고 시위에 성공하더라도 그 효과는 아주 미미하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진눈깨비를 향해 구호를 외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두 번째 거사마저 불발되자 세 사람은 허탈한 마음으로 사당동 아지트에 돌아왔다. 이제는 지푸라기도 잡아야 할 판이었다. 이들은 도로 가져온 시위용품을 놓고 막걸리를 따랐다. 기우제를 지낸다는 얘기는 들었어도 그 반대되는 제를 지내는 경우는 들어보지 못했지만 이들은 하늘에다 빌었다. 맑은 날을 기원하는 '청명제'였다. 1차 시도... 실패. 2차 반복... 실패. 그래도 포기할 수 없다. 이들은 곧바로 3차 반복에 들어갔다. D데이는 4일 후인 3월 28일. H아워는 학생들이 점심식사를 마칠 무렵인 낮 12시 45분. 장소는 5동과 8동 사이의 계단. 유인물과 현수막, 확성기는 이미 준비돼 있고 청명제까지 지냈으니... 이들은 성공을 확신했다. 막걸리의 기분 좋은 취기가 가슴 구석에 숨어 있는 일말의 불길한 생각까지도 말끔히 걷어내 주었다. '1977년 대투쟁'의 막을 연 서울대 1차 시위는 이런 우여곡절 끝에 성사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시위의 전개 과정은 학생들에게 또 다른 충격을 안겨주었다. 충분히 예상했던 것이라고 하더라도 막상 그것이 현실로 나타났을 때는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그런 것이었다. 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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