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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총 597 건 검색)

‘비운의 문화유산’인 국보 ‘지광국사탑’…113년 만에 제모습 찾아 우뚝 서다
2024. 11. 05 15:04 문화|문화|문화|문화
...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큰 수난을 받은 ‘비운’의 문화유산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국보)이 마침내 복원을 마치고 제 모습을 찾았다. 고려시대 승려인 지광국사 해린(984~1070)을 기려 세워진...
지광국사탑지광국사탑비국보원주법천사지복원일제반출국립문화유산연구원원주시
국보법 위반 혐의 ‘충북 간첩단’ 사건 피고인, 징역 14년
2024. 09. 30 16:22 사회|사회|정치
청주지법 전경. 북한 지령을 받고 이적단체를 결성해 간첩 활동을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50대에게 중형이 선고됐다. 청주지법 형사11부(태지영 부장판사)는 30일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된 50대...
혐의충북동지회징역재판북한
국보법위반 남성 재심서 42년 만에 무죄…“불법구금·고문 인정돼”
2024. 09. 03 16:18 사회|지역
대구지법 전경. 백경열 기자 반국가단체 활동 찬양의 글을 작성했다는 등의 이유로 수사기관에 불법 구금돼 가혹행위를 당하고 재판에 넘겨져 실형까지 선고받았던 남성이 42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검찰, ‘국보법 위반’ 전승일 감독 재심 개시 결정에 항고
2024. 09. 01 15:22 사회|사회
...://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406101711001 “범죄자는 국가였다”···‘국보법 위반’ 전승일 감독 재심 열릴까“서울대학교 앞 녹두거리를 걸어가는데 갑자기 차 두 대가 제...
재심전승일국가보안법

스포츠경향(총 106 건 검색)

[로컬] 전남 구례군 지리산 화엄사, 국보 336호 삼신불좌상 개금불사 점안 법회
2024. 12. 09 22:11 생활|생활|생활|생활
화엄사 제공 화엄사 제공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지리산 국립공원 내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19교구 본사 화엄사 주지 덕문스님은 지난 7일 화엄사 대웅전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국보 336호) 개금불사 점안법회 및 2024년 화엄법회 회향식을 가졌다. ‘개금(改金)’은 금박으로 부처님 옷을 새로 입히는 불사(不辭·불가에서 하는 모든 일)를 의미한다. 개금불사를 한 후에는 마지막에 눈을 그려 넣어 생명력을 불어넣는 점안식을 가진다. 대웅전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은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화엄도량을 중창하고자 발심하신 벽암각성스님의 대원력으로 1635년에 조성되었다. 삼신불 중 비로자나불상 크기는 2.7m, 노사나불상 크기는 2.5m, 석가모니불상 크기는 2.4m이다. 최근 발견된 기록에는 1634∼1635년에 17세기 대표 조각승으로 꼽히는 청헌(淸憲), 응원(應元), 인균(印均)이 제자들과 함께 만들었다고 적혀 있다. 화엄사 제공 임진왜란으로 피해를 본 사찰의 중창을 주도한 승려인 벽암 각성(1575∼1660)이 불상 제작을 주관했고, 선조의 여덟째 아들인 의창군 이광(1589∼1645) 부부와 선조 사위 신익성(1588∼1644) 부부 등 왕실 인물과 승려를 포함해 1320명이 시주자로 참여했다. 그 동안 개금불사 점안식은 화엄사 중흥조 도광대종사가1973년 9월 6일, 원로의원 송천 종열대종사가 1997년 3월 하였다.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은 2006년 3월 12일 보물 1548호 지정되었으며, 2021년 6월 23일 보물에서 국보 제336호로 승격 되었다. 그리고 2021년 6월 1일 오전 10시 보제루에서 국가무형문화재 139호 볼복장작법보존회 경암스님이 대웅전 삼신불 복장의식을 대웅전에서 삼신불 복장을 넣은 의식도 봉행 되었다. 삼신불좌상이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된 후 24년 8월 19일에 보존처리 및 개금불사를 위한 제1차 문화유산위원회 자문회의를 실시하고, 동년 8월 22일부터 1차 탈금 작업을 하였고, 9월 10일부터는 호분층 및 배접층을 제거하였으며, 9월13일부터 1차 생칠 작업을 비롯하여 10월 23일까지 6차에 걸쳐 정제칠을 진행하였다. 그후 10월 27일에 2차 자문회의를 실시하고 10월 30일부터 개금을 진행하였으며 11월 3일에는 대좌를 보존 처리하였다. 그리고 11월 11일부터 개안을 진행하여 마침내 11월 15일에 안치하였다. 화엄사 덕문스님은 대웅전 목조비로자나 삼신불좌상 개금불사 점안법회 및 2024년 마지막 화엄법회 회향식식에 대해 “점안법회를 증명해주시는 문중의 원로대덕스님과 국가문화유산의 보존을 위해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 국가유산청, 전남도청, 구례군청 관계자 여러분들께 원만한 불사회향을 맞이하여 지리산 대화엄사 본사를 대표해서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고 밝혔다. 덕문 스님은 “불사의 전 과정에서 문화재위원인 동국대 임영애 교수의 세심한 자문과 시행업체인 한캠 최선숙 이사의 헌신적인 노력, 비로자나인연회를 비롯한 많은 시주들의 수희동참으로 오늘의 여법한 불사회향이 가능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이어 “오랜시간 어려운 조건의 불사현장임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신 목조각장 한봉석 불모와 현장관계자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고 덧붙였다. 화엄사 측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전통문화사찰로서 만생명의 편안한 쉼터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 나갈 것이며, 끝으로 동참해주신 모든 분들의 하시는 일마다에 부처님의 가피가 함께하기를 기원한다”고 전했다. 화엄사 제공 화엄사 제공
‘싱크로유’ 이영현, AI 울린 국보급 보컬
2024. 11. 05 09:05 연예
KBS2 ‘싱크로유’ 가수 이영현이 특급 가창력으로 보컬 디바의 진면목을 다시 한번 보였다. 이영현은 지난 4일 방송된 KBS2 ‘싱크로유’에 출연했다. 이날 1라운드가 시작되기 전 인순이, 거미, 이영현이 드림 아티스트로 공개되자 추리단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디바 3인방의 등장에 깜짝 놀라는 동시에 기대감을 드러냈고 이영현이 1라운드 미션 곡으로 박재정의 ‘헤어지자 말해요’를 선곡하자 조나단은 “너무 딱 맞는 선곡이다. 제가 ‘연’을 정말 많이 들어서 자신이 있는데 실제로 부르실 것 같은 곡이다”고 추측했다. 노래의 일부분을 들은 이용진은 “제가 예전에 하던 프로그램에서 이영현의 노래를 6~7곡 정도를 직접 들어본 적이 있다. 벌스 부를 때 숨소리가, 그때 들었던 그 숨소리가 느껴졌다. 옆에서 노래를 듣다 보니 이렇게 숨을 쉬면서 부르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진짜 가수라고 강하게 확신이 든다”고 추측한 반면 파트리샤는 “첫 소절이 살짝 아쉽고 힘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AI 가수로 확신했다. 이어 무대에 오른 이영현은 세련된 미성과 함께 절제된 고음으로 시작해 클라이맥스에서 후반부로 갈수록 특유의 풍성한 성량과 절절한 감성까지 담은 완벽한 명품 무대를 선보이며 추리단과 현장 관객에게 진한 감동을 안겼다. 이영현은 “무대에서 최대한 AI처럼 불러야 했는데 발라드의 감정이 묻어있다 보니 무대가 쉽지 않았다”며 고백했다. 이영현은 2라운드 미션 곡으로 데이식스의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를 선택했다. 이날 스페셜 게스트로 나선 가비는 “숨소리를 신경 쓰는 느낌”이라고 추측했고 이용진 역시 “앞서 숨소리 이슈가 있어 일부러 컨트롤을 한 느낌이다. 폐활량이 좋아 호흡이 좋으신 분인데 컨트롤을 하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진짜 같다”며 진짜 가수로 의견을 모았다. 다시 한번 무대를 꾸민 이영현은 “앞에 부를 때 되게 무미건조하게 부르려고 노력했지만 노래 음정 자체가 리드미컬하고 무미건조하게 부르기 어려운 곡이었다”고 토로했다. 마지막 3라운드는 듀엣 무대를 보고 진짜 가수를 찾는 미션이 주어졌고 이영현은 세 라운드 연속 라이브 무대를 꾸미며 명품 보컬을 재각인시켰다. 에일리와 함께 인순이의 명곡 ‘밤이면 밤마다’로 미션에 나선 이영현은 경쾌한 사운드에 맞춰 가요계 대표 파워 보컬리스트다운 힘 있는 보이스를 바탕으로 꿈의 듀엣 무대를 만들어냈다.
국보급 보컬’ 이영현 콘서트 온다
2024. 10. 15 15:09 연예
에이치오이엔티(HO ENT) 12월 28일 29일 이틀간 서울 코엑스 오디토리움 가수 이영현이 올 연말 단독 콘서트로 팬들과 만난다. 15일 오후 소속사 에이치오이엔티(HO ENT)는 “이영현이 오는 12월 28일부터 양일간 서울 코엑스 오디토리움에서 단독 콘서트 ‘나의 노래가 필요한 너에게’를 개최한다”고 전했다. 이영현 단독 콘서트 ‘나의 노래가 필요한 너에게’는 이영현이 지난 2021년 개최했던 동명의 콘서트의 연장선이다. 당시 이영현의 음악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 중 사연자를 초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신청곡을 부르는 ‘관객 맞춤형 소규모 콘서트’를 개최했던 만큼 더욱 많은 팬들과 직접 눈을 맞추고 소통하기 위해 다시 한번 콘서트를 진행한다. 이번 공연에서는 많은 대중을 웃고 울린 수많은 히트곡을 비롯해 명품 보컬리스트인 이영현만이 선보일 수 있는 다채로운 세트리스트와 무대 연출, 라이브 밴드와 관객들을 웃고 울리는 토크로 팬들과 함께 한 해를 뜻깊게 마무리할 예정이다. 한편 이영현 단독 콘서트 ‘2024 이영현 콘서트 ‘나의 노래가 필요한 너에게’는 온라인 티켓 플랫폼 인터파크 티켓을 통해 단독 티켓 오픈되며 오는 21일 오후 8시 선예매 오픈, 22일 같은 시간 일반 예매가 진행된다.
[SNS는 지금] 아이브 안유진, 국보급 어깨
2024. 08. 05 16:16 연예|연예|연예
안유진. SNS 캡처 아이브 안유진이 과감하게 등을 드러냈다. 안유진은 지난 4일 자신의 SNS 계정에 사진 여러 장을 올렸다. 안유진은 그러면서 “꿈만 같았다. 모두가 즐거웠으면 좋겠다. 롤라팔루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적었다. 사진 속 안유진은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하늘색 크롭톱에 포니 테일로 머리를 묶고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앞서 안유진이 소속된 그룹 아이브는 지난 3일(현지 시각)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그랜트 공원에서 개최된 미국 대형 음악 축제 ‘롤라팔루자 시카고’에 출연해 약 45분 간 무대를 즐겼다. 한편, 아이브는 첫 번째 월드 투어 ‘쇼 왓 아이 해브’(IVE THE 1ST WORLD TOUR ‘SHOW WHAT I HAVE’)를 진행 중이며 오는 10일~11일 국내 ‘KSPO(구: 체조경기장)’과 9월 4일~5일 일본 ‘도쿄돔’에서 앙코르 공연을 이어 나갈 예정이다. 안유진. SNS 캡처 안유진. SNS 캡처
SNS는 지금

주간경향(총 17 건 검색)

[이기환의 Hi-story](101)이순신 장군 ‘큰 칼’은 국보 장검? 쌍룡검?(2023. 09. 15 10:58)
2023. 09. 15 10:58 문화/과학
국보로 지정된 이순신 장검. 길이가 2m에 육박하고 무게만 4.2~4.32㎏에 이르는 검이다. / 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 보관 얼마 전 ‘이순신 장검’(2점)이 국보로 지정됐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이 뉴스를 접한 여러분들은 대번에 이순신 장군(1545~1598)의 ‘한산도가’를 떠올렸을 겁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閑山島月明夜上戍樓)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撫大刀深愁時)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何處一聲羌笛更添愁).” ‘한산도 야음(夜吟·밤에 읊다)’이란 시도 있습니다. “넓은 바다에 가을 햇빛 저무는데(水國秋光暮) 추위에 놀란 기러기 떼 높이 나는구나(驚寒雁陣高). 근심스러운 마음에 잠 못 이루는 밤(憂心輾轉夜) 새벽달은 활과 칼을 비추도다(殘月照弓刀).” 두 시에는 국운을 건 결전을 앞두고 밤잠을 이루지 못한 충무공의 노심초사가 담겨 있습니다. 시를 보면 장군에게 ‘칼’이 있죠. 장군의 상징인 큰 칼(大刀)을 차고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국보로 지정된 이순신 장검이 ‘한산도가’와 ‘한산도 야음’에 등장하는 그 칼일까요. 전통 도검 연구자인 이석재 경인미술관장과 조혁상 홍익대 초빙교수의 도움으로 풀어봅니다. 이순신 장검의 칼날에는 이순신 장군이 손수 지은 시구가 새겨져 있다. “석 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떨고(三尺誓天山河動色)”(왼쪽),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산하를 물들인다(一揮掃蕩血染山河)”는 내용이다. / 문화재청 제공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이순신 장검’ 두 자루 모두 길이가 2m에 가까운 어마 어마한 칼입니다. ‘장검 1’은 196.8㎝(칼날 137.3㎝·칼자루 59.5㎝), ‘장검 2’는 197.2㎝(칼날 137.8㎝·칼자루 59.4㎝)에 이릅니다. 무게는 4.32(장검 1)~4.20㎏(장검 2)입니다. 칼집과 가죽끈까지 합치면 그 무게가 5.72㎏(장검 1)~5.44㎏(장검 2)에 이르죠. 두 장검의 칼날에는 이순신 장군이 손수 지은 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석 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떨고(三尺誓天山河動色)”(장검 1),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산하를 물들인다(一揮掃蕩血染山河)”(장검 2)는 시구입니다. 이 구절은 1795년(정조 19) 왕명에 따라 발간된 <이충무공전서>에 실려 있는 시구 그대로입니다. <이충무공전서>는 “장검 한 쌍이 공(이순신)의 후손 집에 전해오는데 공의 친필이 새겨져 있다”고 전했거든요. 또 칼자루 속 슴베(칼자루와 칼날의 결합부)에는 “갑오년 4월에 태귀련과 이무생이 만들었다(甲午四月日造太貴連李茂生作)”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난중일기> 1595년 7월 21일자는 “태구련(태귀련)과 언복이 만든 칼을 충청수사와 두 조방장에게 한 자루씩 보냈다”고 했습니다. 태귀련·이무생이 장검 두 자루를 이순신 장군에게 바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1955년 채록된 태씨 문중 후손의 증언을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즉 태귀련·이무생은 왜구에게 붙잡혀 일본으로 끌려가 10년간 도검 제작술을 배웠고요. 임진왜란이 터지자 왜군의 길잡이가 돼 귀국했답니다. 하지만 이순신 군대에 붙잡혀 ‘반역자’ 죄목으로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요. 이때 두 사람이 눈물로 억울함을 호소하자 장군은 “그럼 대신 칼을 만들어 보라”고 명했답니다. 두 사람은 10년간 배운 모든 기량을 다해 장검 두 자루를 만들어 바쳤답니다. 이번에 국보가 된 ‘이순신 장검’입니다. 이순신 장검은 왜색? 이순신 장군의 손때와 정신이 담겨 있는 ‘장검’ 두 자루는 왜 지금까지 국보로 지정되지 않았을까요. 이 ‘이순신 장검’이 일본도의 양식을 따랐다는 구설수 때문이었습니다. 그러한 지적이 타당할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이 도검 연구자들의 견해입니다. 물론 이순신 장검이 일본칼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것은 분명합니다. 우선 슴베와 칼자루를 결합해 못을 끼워 고정하기 위해 뚫은 구멍(목정혈·目釘穴), 칼자루 가죽끈을 엑스(X)자로 교차매기한 방식이 그렇고요. 칼날의 ‘휨 정도’나, 피를 흘려보내려고 판 일본식 피홈(혈조·血漕) 등도 그렇습니다. 이석재 경인미술관장은 “칼날에서 칼끝과 칼몸이 이어지는 부분에 급격하게 두께 변화를 준 요코테(橫-よこて)의 완연한 흔적도 일본풍”이라고 전했습니다. 물론 일본풍의 요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손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칼자루 표면에 붙인 금속판, 표면에 은실을 박아 장식한 철제 부속의 전통 무늬 등이 조선풍입니다. 칼날에 새긴 글씨와 물결무늬, 칼집을 차고 다는 장식과 가죽끈 그리고 칼집 상단의 테두리 및 하단의 마개장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순신 장검은 조선칼의 주된 요소에, 일부 일본풍의 요소를 결합한 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칼이 허접했던 이유 그래도 그렇지 다른 분도 아닌 이순신 장군의 칼에 왜색이 가미돼 있다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답니다. 1592년 4월 13일 왜군 30만명이 200년 평화를 구가하던 조선에 물밀듯 쳐들어오죠. 조선은 속수무책, 아무런 대비책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무기도 형편없었습니다. 칼은 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이순신 장검의 슴베 부분에는 “갑오년 4월에 태귀련과 이무생이 만들었다(甲午四月日造太貴連李茂生作)”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 1928년 조선사편수회 유리원판 사진 일본군을 따라 조선에 온 스페인 신부 그레고리오 데 세스테데스(1551~1611)의 평가가 실감납니다. “조선인이 사용하는 무기는 매우 빈약했으며, 특히 칼은 길이도 매우 짧고 가늘었다.”(<예수회 연례보고서>·1592) 당시 조선의 무기가 어떠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만했습니다. 조선 개국 후 200년 동안 전쟁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조선의 주력 병기는 궁시(활과 화살)와 화포였습니다. 칼은 보조 병기였답니다. 반면 일본은 15세기 중반에서 16세기 말까지 150여 년의 전국시대를 거쳤습니다. 특히 근접전에서 반드시 필요한 칼과 창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왜군이 물밀 듯이 쳐들어와 길고 날카로운 칼을 마구 휘둘러대니 어떻게 됐겠습니까. 선택은 3가지였겠죠. 일본군에게 노획한 일본도를 그대로 사용하거나, 일본도의 칼날만 빼내 익숙한 조선검의 외장과 결합해 쓰거나, 아니면 일본도의 칼날 등을 차용해 새로운 칼(일본+조선식 칼)을 제작하거나 하는 방법을 썼겠죠. 일본칼을 개조한 의병장들  실제로 의병장과 의병들은 급한 대로 포획한 왜군의 무기를 그대로, 혹은 개조해 실전 사용했습니다. 곽재우 장군(1552~1617)의 ‘장검’(보물)을 볼까요. 일본도의 칼날과 외장을 그대로 사용했고요. 일본 칼집 특유의 고즈카(小柄·칼집 바깥쪽에 끼는 작은 칼) 및 고가이(?·머리카락 정돈과 귀이개용 도구) 꽂이 부분만 나무로 덧대어 막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조선제 장식으로 바꿔 달았습니다. 이순신 장검의 명문은 에 실려 있는 검명(칼에 새긴 기록) 그대로다. 는 “장검 한 쌍이 공(이순신)의 후손 집에 전해오는데 공의 친필이 새겨져 있다”고 전했다. /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제공 권응수(1546~1608), 정기룡(1562 ~1622), 최진립(1568~1636), 이광악(1557~1608) 장군의 칼도 비슷합니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일본풍 칼의 장점을 조선칼의 제작에 일부 적용했습니다. 단적으로 전형적인 일본풍인 칼자루의 ‘X자 줄매기’는 1813년 발간된 군사교범(<융원필비>)에 수록된 환도(조선칼)의 도해에 등장합니다. 그 정도로 보편화했습니다. 이순신 장검은 실전용인가 이 대목에서 또 한가지 궁금증을 해소해봅시다. 이순신 장군은 과연 이 장검을 직접 차고 전투에 임했을까요. ‘한산도가’에도 “큰 칼(大刀) 옆에 차고…”라는 구절이 있잖습니까. 천하의 이순신 장군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2m에 근접하고 칼의 무게만 5㎏에 육박하는 칼을 자유자재로 휘두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잡는 지점에 따라 실제로 느끼는 체감 무게가 2~3배 증가합니다. 더구나 힘을 실어 휘두를 때는 순간적으로 칼끝에 실리는 무게가 수십㎏ 이상이 될 겁니다. 만약 실전에서 이순신 장검을 휘두르게 되면 어찌 될까요. 사람이 칼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칼이 사람을 휘두르는 격이 되겠지요. 이석재 관장은 “이순신 장검 두 자루에는 실전에 사용한 격검흔(칼날끼리 부딪쳐 이가 어긋난 흔적)과 균열, 휨, 뒤틀림 같은 칼날의 변형 현상도 보이지 않는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순신 쌍룡검의 출현 그렇다면 이순신 장군이 찼다는 ‘큰 칼’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그 단서가 있었습니다. 일제가 설립한 조선고서간행회가 발간한 <조선미술대관>(1910)에 이순신 장군이 차고 다녔다는 칼 사진이 나옵니다. 순조 연간에 훈련도감을 역임한 박종경의 에는 이순신의 쌍룡검을 얻은 일화와 함께 검등에 새겨진 명문을 소개했다. 1910년 에 나온 시와 같은 내용이다. /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이번에 국보로 지정된 장검은 아니고, ‘쌍룡검’의 사진과 함께 설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소장처는 궁내부박물관(1908년 설립·이왕가박물관)이라고 했고요. 설명문은 “…이 칼은 우리(일본) 군대와 싸웠던 명나라 이순신이 패용했던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칼등에 새겨진 시를 소개했습니다. “쌍룡검을 만들어 얻으니(鑄得雙龍劒) 천추에 기상이 웅장하도다(千秋氣尙雄). 산과 바다에 맹세한 뜻이 있으니(盟山誓海意) 충성스러운 의분은 고금에 같다(忠憤古今同).” 이 시구가 주목을 끌었습니다. 순조 연간(1800~1834)에 훈련도감을 지낸 박종경(1765~1817)의 문집(<돈암집> ‘원융검기’)에도 이 시와 함께 이순신 쌍룡검이 등장합니다. “1811년(순조11) 어느 날 병조판서 심상규(1766~1838)가 찾아와 ‘이충무공이 차고 다닌 검’이라면서 ‘난 서생이라 쓸 데가 없으니 상장군이 된 자에게나 어울리겠다’면서 나(박종경)에게 주었다…”는 겁니다. 박종경은 그러면서 “칼등에 ‘쌍룡검을 만들어 얻으니(鑄得雙龍劒)’하는 시구가 있다”고 소개합니다. 훗날 발간된 <조선미술대관> (1910)에 등장하는 바로 그 시입니다. 박종경은 그렇게 얻은 쌍룡검 한 자루를 걸어놓고 있었는데요. 그런데 10여 일 뒤 지인이 찾아와 ‘똑같은 검을 찾았다’고 전했습니다. “제가 충남 아산에서 온 사람한테서 샀는데, 장군이 아끼는 검과 어찌 그리 똑같다는 말입니까.” 박종경도 “과연 벽에 걸어놓은 검을 비교해보니 쌍둥이처럼 같았다”고 했습니다. 감쪽같이 사라진 쌍룡검은 어디? 이순신 장군이 차고 있던 쌍룡검이 정말로 존재했다는 얘기네요. 아마 이 쌍룡검은 박종경이 근무했던 훈련도감을 거쳐 궁내부박물관(훗날 이왕가박물관)으로 들어갔을 겁니다. 그럼 지금 국립고궁박물관이나 국립중앙박물관, 어디엔가 남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게 안타깝습니다. 그 쌍룡검은 지금 행방이 묘연합니다. 의 쌍룡검을 보면 상단 칼이 43도 정도 뒤로 누워 있다. 바로 세우면 두 칼의 휨 정도를 파악할 수 있다. / 이석재 경인미술관장 설명 국권침탈 직전인 1910년 4월 12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창경궁에 충무공이 쓰던 칼이 있는데 이 비상시국에 그 칼을 쓸 자가 누구냐”고 꼬집는 시조가 실립니다. 창경궁 궁내부박물관에 존재했다는 얘기죠. 그런데 2년여 뒤인 1912년 5월 26일자 권업신문은 “일제가 창경궁 박물관에 전시돼 있던 이충무공의 원융검(쌍룡검)을 치워버렸다”고 개탄하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이후 ‘쌍룡검’이 감쪽같이 사라집니다. 그사이 ‘이순신 쌍룡검은 원래 없었다’, ‘쌍룡검은 이충무공의 충혼을 기려 후세의 인물이 만든 칼’이라는 등의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쌍룡검이 맞나 최근에는 <조선미술대관>의 사진에 등장하는 두 칼이 박종경의 ‘원융검기’에서 “어쩌면 그렇게 똑같냐”고 감탄했던 쌍둥이칼과 다른 칼이라는 견해가 등장했습니다. <조선미술대관>에 등장하는 두 자루의 칼을 한번 자세히 보라는 겁니다. 과연 칼등 명문 20자만 같을 뿐 뜯어놓고 보면 모든 부위에서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칼날의 ‘휨 정도(곡률)’를 보십시오. 아래 칼을 기준으로 위 칼이 43도 정도 뒤로 누워(기울어져) 있는데요. 그렇게 누운 위 칼을 바로 올렸다고 치고 계산하면 위 칼은 아래 칼보다 70%(1 대 1.71) 이상 더 ‘휨의 정도(곡률)’가 큽니다. 이 정도의 휨 차이라면 두 칼은 전혀 다른 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조선미술대관>의 쌍룡검 사진설명은 ‘이순신=명나라 장수’로 소개했습니다. 간과할 수 없는 오류입니다. 정리하자면 박종경의 ‘원융검기’와 <조선미술대관>에 등장하는 쌍룡검은 서로 같은 칼이라 단정할 수 없다는 겁니다. 물론 각각 두 자루의 칼이 이순신 장군의 것이 맞니, 아니니 딱 잘라 말할 수도 없습니다. ‘이순신 장검’의 국보 승격을 계기로 어딘가에 존재할 수 있는 장군의 칼을 한번 뒤져보면 어떨까요.
이기환의 Hi-story
[이기환의 Hi-story](74)흠결 가득한 달항아리, 국보 즐비한 곳에 왜?(2023. 03. 10 11:13)
2023. 03. 10 11:13 문화/과학
“너희 중에 뉘에 ‘군자의 기개’가 담겼느냐”(경향신문) “‘백자’쟁명 청화-철화-동화…조선백자 대표 다 모인 챔피언스리그”(동아일보) “불멍·물멍 이어 자기멍…눈 뗄 수 없는 조선백자”(서울신문) “어둠을 몰아내는 ‘조선백자의 스펙터클’”(조선일보)…. ‘국보 달항아리’. 이 달항아리는 군데군데 누런 얼룩이 묻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항아리에 담겨 있는 기름이 밖으로 배어난 건지, 혹은 항아리가 엎어져서 옆에 쏟아져 있던 기름에 밑부분이 젖어든 건지 확실치는 않다. 이런 흔적이 오히려 달항아리의 가치를 높였다. / 리움미술관 제공 요 며칠 사이 각 언론이 편집자의 감각을 마음껏 뽐낸 온갖 수식어와 함께 앞다퉈 소개한 특별전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리움미술관의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 특별전(2월 28~5월 28일)입니다. 국가지정문화재 59점(국보 18점·보물 41점) 중 절반이 넘는 31점(국보 10점·보물 21점)과 일본에 있는 34점 등 총 185점의 백자가 총출동한 특별전이랍니다. 군자와 백자 특별전에서 조선백자의 매력을 ‘군자’의 덕목과 연결해 해석한 것이 눈에 띄더군요. 조선백자에서 군자의 모습이 떠오른다는 겁니다. 하나만 예로 들죠. 양란(임진왜란·병자호란) 후 곤궁해진 조선의 실정이 백자에도 영향을 끼치는데요. 이때부터 페르시아산 코발트(Co) 성분의 값비싼 청화안료를 상대적으로 저렴한 철안료가 대신합니다. 이를 두고 특별전 기획자(이준광 리움미술관 책임연구원)는 <논어> ‘위령공’편을 인용합니다. 즉 공자의 제자인 자로가 어느 나라에서도 쓰임 받지 못하고 곤궁한 처지에 빠진 공자에게 묻죠. “군자도 곤궁함이 있습니까(君子亦有窮乎).” 그러자 공자는 “군자는 곤궁 속에서도 굳세지만, 소인은 궁하면 멋대로 군다(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고 응수했답니다. 이런 ‘공자 왈’이 조선의 백자에도 통한다는 겁니다. 즉 전란 후 조선의 경제 사정 때문에 청화안료를 쓴 백자를 만들기 어려워졌다, 그러나 조선의 도공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대체원료인 철안료를 써서 특유의 강렬함과 변화무쌍한 색 변화가 돋보이는 새로운 미의 세계를 창출했다, 뭐 이런 겁니다. 흠결 있는 국가대표? 특별전의 백미는 조선백자의 명품 베스트 42점을 한 공간에 전시했다는 겁니다. 당당한 형태와 화려한 그림이 돋보이는 ‘백자청화매죽문호’와 고려 매병에서 조선 항아리로 변해가는 특징을 보이는 ‘백자청화 홍치명(1489) 송죽문 호(항아리)’, 강렬한 색과 묵직한 힘을 과시하는 ‘백자철화 포도문 호’ 등이 보이고요. 절제미와 창의미가 조화를 이룬 ‘백자청화철채동채 초충난국문 병’, 순백미와 품격미를 겸비한 ‘백자 개호(뚜껑 있는 항아리)’, 생활용품이면서 풍만한 자태를 풍기는 ‘백자 달항아리’ 등도 한눈에 감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저마다 빼어난 자태를 뽐내는 ‘베스트 42’ 가운데 그래도 달항아리 3점에 관심이 꽂히더군요. 그중에서도 흠결이 있는 두 점의 달항아리에 눈길이 머물렀습니다. 그중 국보 한 점의 몸통 전체에 커다란 누런 얼룩이 져 있습니다. 순백색의 아름다움을 가치로 친다면 흠결이 이만저만한 백자 항아리가 아니죠. 아닌 게 아니라 이 백자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쳤고, 또 매물로 나왔을 당시에도 골동품상이 여럿 걸쳐 있었다고 합니다. 1995년 절도범이 일본 나라(奈良) 도다이지(東大寺) 간논인(觀音院)에 소장돼 있던 달항아리를 내동댕이쳐 무려 300여편으로 산산조각 났다. 오사카 시립동양도자미술관에 기증된 달항아리 파편은 복원과정을 거쳐 완벽한 형태로 재탄생했다. / 오사카 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리움 미술관 구입 당시 미술관 관계자가 고 이건희 회장(1942~2020)의 출근길을 막아서서 결재 처리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당시 아파트 한 채 값을 치렀답니다. 이 흠결 있는 달항아리가 어떻게 해서 이런 대접을 받아 국보가 됐을까요. 우선 약간은 비대칭이지만 거의 풍만한 정원을 그린 완벽한 달항아리라는 점에서 점수를 얻었답니다. 또 몸통에 가득한 얼룩 또한 국보로서의 가치를 한껏 높였는데요. 분석결과 식물성 기름인 것으로 추정됐습니다. 이 항아리에 담겨 있는 기름이 밖으로 배어난 건지, 혹은 항아리가 엎어져 옆에 쏟아져 있던 기름에 젖어든 건지 확실치는 않습니다. 어쨌거나 이 달항아리는 감상용이 아니고 기름때가 묻은 생활용기였다는 것 덕분에 가치가 더 높아졌습니다. 백자 항아리가 생활용기로 제작됐다는 기록(<승정원일기> 1630년 2월 19일조)이 보입니다. “제사용 술과 참기름을 담는 도기는 공조에서… 꿀을 담는 흰 항아리(白缸)는 사옹원에서 진배해야 하는데….” 또 일본 와세다대(早稻田大) 아이즈야이치(會津八一) 기념박물관 소장 ‘웃밧쇼’명 백자도 흥미로운데요. ‘웃’은 ‘위(上)’를, ‘밧쇼’는 ‘바깥 소주방’을 각각 가리킵니다. ‘웃밧쇼’ 항아리는 ‘웃전에 딸린 외소주방’을 나타내는 거죠. 그런 사례가 또 있습니다. 개인 소장인 ‘연령군 겻쥬방’명 백자 항아리가 그것인데요. 숙종의 여섯째 아들인 연령군 이훤(1699~1719)의 자택 ‘곁 주방’에 쓰인 생활용기였던 겁니다. 그리고 이 ‘국보 얼룩 항아리’에는 또 다른 숨겨진 가치가 있습니다. 얼룩이 백색의 도화지에 그린 한 폭의 추상화 같다고 할까, 혹은 구름에 걸친 달을 연상케 한다 할까, 이런 갖가지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다는 겁니다. 한가지 여담은 이 항아리를 들고 온 이가 “얼룩을 지우면 어떠냐”고 했다는 겁니다. 미술관 관계자가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답니다. 만약 순백색의 자기를 만든다고 얼룩을 지웠다면 어찌됐을까요. 그 백자의 역사성은 송두리째 사라졌을 겁니다. 김환기 화백은 도자기 중에서도 유독 찌그러진 둥근 항아리, 즉 달항아리를 좋아했다. / 환기재단·환기미술관 300조각 난 달항아리가 대표선수로 발탁 이번에 ‘베스트 42’에 뽑혀 전시장을 장식한 ‘흠결 있는 달항아리’가 또 있는데요. 일본 오사카(大阪) 시립 동양도자미술관 소장품입니다. 자그마치 300조각으로 박살 난 항아리였습니다. 사연인즉슨 이 항아리는 ‘소설의 신’으로 유명한 시가 나오야(志賀直哉·1883~1971)와 관계가 있는 백자입니다. 즉 시가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나라(奈良) 도다이지(東大寺) 관음원(觀音院)에 머물며 신세를 지고 돌아갔는데요. 이후 시가가 이 절의 주지인 가미츠카사 카이운(上司海雲)에게 감사의 뜻으로 백자 항아리를 주었답니다. 그래서 ‘시가의 항아리’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이 항아리는 이후 관음전의 응접실에 보관돼 있었는데요. 1995년 7월 4일 사달이 벌어집니다. 대낮에 사찰에 침입한 한 남자가 달항아리를 들고 도망가다가 발각된 겁니다. 그러자 범인이 달항아리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도망갔습니다. 사찰 측은 산산이 조각난 항아리를 가루까지 솔로 쓸어담았답니다. 셀 수 있는 도자기 편만 300조각이 넘었답니다. 이 항아리 조각 및 가루는 오사카 시립 동양도자박물관에 그대로 기증됐는데요. 박물관 측은 고심 끝에 ‘가능한 형태만이라도 남겨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수리·복원 전문가들은 ‘불가능한 미션’이라며 손사래를 쳤는데요. 그중 한 전문가가 손을 들고 나섰답니다. 6개월 후 그 전문가가 복원 중인 달항아리를 들고 왔는데요. 300조각 난 항아리가 거의 완벽한 형태로 복원된 상태였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복원 전문가가 한마디 했다는데요. “앞으로의 복원 방향은 두 가지입니다. 복원한 흔적까지 완전히 지울 수도 있고, 혹은 자세히 보면 복원한 흔적을 알게 할 수도 있습니다. 두 가지 방법 중 어떤 것을 고르시겠습니까.” 박물관 측은 서슴없이 “두 번째, 복원 사실을 알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답니다. 이렇게 ‘시가의 항아리’가 완전 복원됐습니다. 저는 ‘자세히 보아야 알 수 있다’는 수리 흔적을 찾으려고 눈을 씻고 들여다보았는데요. 결국 찾지 못해 전시기획자의 설명을 듣고서야 흔적을 분간할 수 있었습니다. 이 두 점 외에도 ‘베스트 40’에 선발된 ‘보물’ 달항아리 또한 나름의 특징이 있답니다. 가운데 부분에 아래위를 따로 만들어 붙인 흔적이 보이죠. 달항아리의 제작특성이 단적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습니다. 백자가 ‘제사용 술(祭酒)’과 ‘참기름(眞油)’을 담는 용도 등 생활용기로 쓰였다는 사실은 등에서 보인다. /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중력을 거스르는 도공의 분투 재미있죠. 화려하고 예쁜 백자도 많고, 그런 백자들도 절정의 예술성을 뽐내죠. 그런데 왠지 살이 좀 찐 듯하고, 또 조금은 비대칭이면서 아무런 무늬도 없는 달항아리에 마음이 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조선조 성종(재위 1469~1494)이 그 순백의 의미를 알았던 것 같아요. 성종은 안료를 사용하지 않은 순백자 잔을 승정원에 하사한 뒤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이 술잔은 맑고 티가 없다. 술을 따르면 티끌이나 찌꺼기가 다 보인다. 사람에게 비유하면 ‘대단히 공평하고 지극히 바르다(大公至正)’고 할 수 있다.”(<성종실록> 1491년 12월 7일) 하지만 성종이라면 몰라도 웬만한 사람들은 조선백자의 멋과 흥취를 깨닫지 못했던 것 같아요. 심지어 북학파 실학자인 박제가(1750~1805)조차 “중국 자기는 정교하고 화려하지만 조선 자기는 몹시 거칠다”(<북학의> ‘내편·자’)며 ‘디스’했답니다. 그런 마당에 17세기 후반(숙종 말)~18세기(영·정조)까지 100년 남짓 동안 반짝 생산됐던 달항아리는 더군다나 ‘관심 밖’이었겠죠. 또 생각해보십시오. 높이가 40㎝가 훌쩍 넘는 대형 백자를 만들기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큰 항아리를 한 번에 물레로 성형하려 하다가는 스르르 무너져 버리기 십상이었겠죠. 그래서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따로 만들어 붙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큰 항아리를 구워내는 과정에서 갈라지거나 틀어진 부분을 완벽하게 원형으로 마무리 짓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생활용기로 제작했기 때문에 정교하게 다듬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날렵한 대칭과 깔끔한 몸체를 자랑하는 중국·일본의 수출용 도자기와는 달랐겠죠. ‘잘생긴 며느리?’ 그와 같은 인식은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 직후까지 이어집니다. 새삼스럽게 따져 볼 것이 바로 ‘달항아리’의 명칭입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백자대호(白瓷大壺)’라는 무미건조한 이름을 썼는데요. 해방 이후 화가 김환기(1913~1974)와 미술사학자인 혜곡 최순우(1916~1984)가 멋들어진 이름을 지었습니다. 한자리에 모아둔 백자 베스트 42점 가운데는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백자들이 즐비하다. / 리움미술관 제공 ‘밤하늘에 둥실 떠 있는 보름달 같은 백자’라 해서 ‘달항아리’라는 이름을 붙인 겁니다. 고미술상이었던 홍기대(1921~2019)는 “김환기 화백은 찌그러진 백자 항아리를 좋아했는데, 특히 일제강점기 마루츠보(圓壺)라 일컬어졌던 항아리를 특별히 ‘달항아리’라 했다”고 전했습니다. 김 화백은 1949년 ‘신천지’에 “지평선 위에 항아리가 둥그렇게 앉아 있다. 굽이 좁다 못해 둥실 떠 있다. 둥근 하늘과 둥근 항아리와…”(‘이조 항아리’)라고 읊을 만큼 ‘달항아리’에 매료된 분이죠. 김 화백과 교유했던 최순우 선생도 1963년 4월 17일 동아일보에 ‘달항아리 예찬론’을 펼칩니다. “오늘 노감상가 한분이 찾아와 시원하고 부드럽게 생긴 큰 유백색 ‘달항아리’를 어루만져보고는 ‘잘생긴 며느리 같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그저 느껴야 하오.” 얼마나 절묘한 표현입니까. 원형을 이루다가 곧 이지러지는 달이 백자 항아리를 쏙 빼닮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같은 달이지만 달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달을 보죠. 달항아리를 보면서 저마다 다른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저마다 다른 상상의 나래를 펴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멋들어진 ‘달항아리’ 이름은 2000년대 초까지는 학술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터부시됐습니다. 그러다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의 개관 첫 전시 제목을 ‘백자 달항아리’ 특별전으로 붙일 만큼 인식이 바뀌었고요. 마침내 2011년 국보 명칭을 ‘백자대호’에서 ‘백자 달항아리’로 바꾸었습니다. 만약 지금까지 어려운 한자인 ‘백자대호’니 ‘백자대항’이니 했다면 어찌 됐겠습니까. 달항아리는 지금처럼 대중에게 사랑받는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의 달항아리 감상평 중 고고미술사학자 김원룡 선생(1922~1993)의 한마디가 백미인 것 같습니다. “조선백자… 이것은 그저 느껴야 하오. 느껴서 모르면 아예 말을 마시오…. 여기에 무엇 새삼스러이 이론을 캐고 미를 따지오….” 그래서 저도 <조용히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 특별전을 ‘그저 느끼고’ 왔습니다.
이기환의 Hi-story
국보법 있다고 북의 군사위협 막아지나요”(2022. 09. 23 14:26)
2022. 09. 23 14:26 사회
ㆍ민변 ‘국가보안법 폐지 TF 단장’ 장경욱 변호사 인터뷰 “그 낡은 유물은 폐기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칼집에 넣어서 박물관으로 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4년 국가보안법(국보법) 폐지를 주장하며 한 말이다. 이후 국보법의 존폐를 논할 때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됐다. 사진/ 권도현 기자 국보법은 과거 냉전 시대의 대표적인 산물이다. 1948년 12월 제헌국회에서 제정됐다. 1950년 1월 전면 개정하면서 최대 처벌 수위에 사형을 추가했다. 당시 개정 이유는 이렇다. “건국사업을 적극 방해하고 있는 좌익공산분자들을 박멸하기 위해 국가를 파괴하고 전복하려는 대음모죄에 대해 사형 또는 무기형을 과할 수 있도록 하여(후략).” 국보법은 1980년 반공법(1961년 제정)과 통합돼 현재의 구조를 갖췄다. 국내외에서 국보법이 표현·사상·양심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지적은 꾸준히 제기돼왔다. 특히 유엔 인권이사회,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 국제앰네스티 등 국제사회는 여러차례 국보법 폐지를 한국 정부에 권고했다. 한국 국가인권위원회도 국보법 폐지를 권고하거나 의견을 표명해왔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9월 15일 국보법 제7조 등에 관한 위헌법률심판제청 및 헌법소원 사건을 두고 공개변론을 열었다. 국보법 사건과 관련한 공개변론은 처음이다. 구체적인 조항은 제7조 제1·3·5항 등이다. 국보법 중에서도 대표적인 독소 조항으로 꼽힌다. 제7조 1항은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고무·선전 또는 이에 동조한 자” 등을 처벌한다. 제5항은 “제1항·제3항 또는 제4항의 행위를 할 목적으로 문서·도화 기타의 표현물을 제작·수입·복사·소지·운반·반포·판매 또는 취득한” 행위를 처벌한다. 이선애 헌법재판관이 내년 3월 임기 만료로 퇴임하고 이석태 재판관도 4월 정년을 맞아 퇴임할 예정인 만큼 그 전에 헌재가 국보법 사건의 선고를 내릴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장경욱 변호사(54·법무법인 상록)는 다수의 국보법 사건을 변호한 경험을 갖고 있다. 현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내 ‘국가보안법 폐지 태스크포스(TF)’의 단장을 맡고 있다. 장 변호사는 “국보법의 가장 큰 문제는 자의적 적용을 통해 기본권의 핵심인 표현의 자유 등을 침해한다는 것”이라며 “국보법으로 처벌받지 않더라도 국민은 위축효과(냉각효과)로 인해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을 제대로 향유하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 9월 19일 서울 서초동 사무실에서 장 변호사를 만났다. -헌재의 공개변론은 처음이다. 어땠나. “이번에 헌재에서 심리하는 건 수원지법과 대전지법이 2017·2019년 피고인들의 신청을 받아들여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한 2건과 헌법소원 9건 등 11건을 병합한 사건이다. 공개변론을 연 것은 우리 사회의 뜨거운 현안을 두고 국민이 논의의 쟁점을 잘 알 수 있도록 공론화한 다음에 신중하게 결정하겠다는 취지로 보인다.” -결과는 어떻게 예상하나. “결과 예측은 헌재에 실례가 되는 일이다. 2015년 국보법 제7조 제1항에 ‘동조’ 부분이 합헌 결정이 나왔는데, 재판관 9명 가운데 1명이 위헌 의견을 냈다. 제7조 제5항의 ‘취득·소지’는 합헌 6명, 위헌 3명이었다. 2018년 국보법 제14조(자격정지 병과)의 위헌 여부를 다루면서 ‘소지’ 부분을 판단한 적도 있다. 당시 소지를 두고 합헌은 4명인데 반해 위헌은 5명으로 더 많았다(위헌 결정이 나려면 6명 이상이 동의해야 한다).” -위헌 주장의 근거는. “국보법 제7조(찬양·고무) 제1항의 위헌성 여부가 핵심이다. 제5항도 결국 제1항을 목적으로 ‘문서·도화 기타의 표현물을 제작·수입·복사·소지·운반·반포·판매 또는 취득’한 행위를 처벌한다. 제7조의 다른 조항들도 모두 제1항의 목적을 전제로 처벌한다. 국보법은 죄형법정주의와 명확성의 원칙에 위배된다. 수사기관이 광범위하게 적용할 수 있고 자의적으로 남용할 수 있다. 행위자의 내심의 사상과 이념을 처벌하는데, 기본권의 핵심인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 양심, 사상, 학문·예술의 자유도 제한한다. 정치적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데 국보법이 걸림돌이 되고 있다.” -‘헌법 위의 악법’이라고도 부르는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핵심은 국민이 국가의 정책이나 권력자를 비판하고, 의견 교환을 통한 숙의 과정을 거쳐 사상의 자유시장을 형성하는 것이다. 국보법은 사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권리를 형해화한다. 헌법에서 보장하는 본질적인 기본권 자체를 행사하지 못하게 막는 법으로 군림해왔다. 그래서 악법이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헌재는 1990년 당시 국보법 제7조 제1항 등을 두고 ‘한정합헌’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1991년 개정 국보법에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라는 주관적 구성요건을 추가했다. 헌재는 제7조 제1항의 ‘구성원’, ‘활동’, ‘동조’ 등도 문제로 지적했다. 개념이 너무 포괄적이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 요소는 지금까지 남아 있다. -1991년 법을 개정하면서 오남용의 소지가 줄었다는 주장도 있다. “국민이 어떤 행위를 했을 때 처벌 여부, 처벌의 수준 등을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명확성의 원칙이다. 형별권의 자의적 행사를 방지하기 위함이다. 국보법은 여전히 모호하고 추상적이다.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라는 주관적 구성요건은 미필적 인식만으로도 성립한다. 위험성과 관련한 인과관계의 명백성 요건도 제대로 충족되지 않은 표현의 행위·내용을 자의적으로 처벌하는 것이 현실이다. 또 수사기관은 이적(利敵)의 목적을 입증할 직접적인 증거가 없으면 정황증거나 간접사실로 입증하려 하는데, 이는 행위자의 내심을 추정하고 재단하는 것이다. 법원도 마찬가지다. 수사기관은 온갖 개인의 동향을 사찰해 증거를 수집한다. 사생활의 비밀과 양심·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더욱 옥죄게 된다.”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지난 9월 15일 국가보안법 위헌 결정을 요구하는 국가보안법폐지 국민행동(아래)과 국가보안법에 찬성하는 대한민국 애국순찰팀 등 보수단체 회원들(위)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 연합뉴스 -법무부는 개정 이후 범죄 혐의가 뚜렷한 사건만 유죄를 선고하고 있다고 말한다. “법무부의 자기 논리에 불과하다. 단순히 숫자가 아니라 법이 내포하는 문제점을 봐야 하는 것 아닌가. 언제든 오남용의 가능성이 있다. 기소 건수가 줄었다는데, 그 이유도 고민해봐야 한다. 기본권을 대상으로 한 국민의 의식이 성숙했고, 국보법 남용을 막기 위해 싸워온 이들의 견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북관계 등 국제정세도 요인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건 바로 위축효과이다. 국민은 처벌 위험을 느껴 표현의 자유 등 기본권을 제대로 향유하지 못한다. 우리 사회는 국보법으로 처벌받은 기억과 경험이 내재화돼 있다. 국보법을 의식해 스스로 검열하고 위축된다. ‘종북몰이’도 여전하지 않은가.” 장 변호사는 대법원이 2008년 4월 선고한 국보법 위반 사건의 판결문을 제시했다. 이 가운데 소수의견을 주목하라고 했다. 당시 소수의견을 낸 박시환 대법관은 “대법원은 판결마다 ‘실질적 해악을 끼칠 명백한 위험성’이라는 기준을 제시하면서도, 실제로는 실질적이지도 않고 명백하지도 않은 추정된 위험이나 단순한 위험의 개연성만을 가지고 유죄로 인정하는 판결을 계속했다”고 지적했다. 박 대법관은 사람의 생각을 규제하기 위한 요건인 ‘위험성’의 의미와 기준을 설시했다. ‘명백하게 현존하는 것이어야 한다’, ‘직접적인 위험이어야 한다’, ‘당장 급박하게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현존하는 위험이어야 한다’, ‘중대한 위험이어야 한다’ 등이다. 그는 이런 조건을 모두 갖춘 ‘위험한 생각’이라도 “생각 그 자체는 절대적 자유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제한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분단 상태에서 불가피하다는 주장은. “북한이 개최한 행사에서 연설을 들으며 박수를 치거나 동상에 경례를 하면 국보법 제7조 제1항의 ‘동조’가 된다. 이런 행위가 군사적·사상적·정치적으로 위협이 된다고 처벌한다. 이게 실질적인 위협인지 묻고 싶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발전에 대해 스스로 신뢰 결여를 보여주는 것이다. 국보법이 있어서 북의 군사적 위험성이 억제되는 것도 아니다. 인과관계도 없는 논리를 가지고 헛된 논쟁을 벌이면서 남남갈등만 초래한다.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경쟁을 통해 자연스럽게 정리될 수 있다.” -법무부는 공개변론에서 “마약, 무기, 아동성착취물의 소지의 경우에도 처벌하고 있고, 국보법상 소지행위를 처벌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전혀 유사하지 않은 걸 유사한 것처럼 얘기한 것이다. 마약, 무기, 아동성착취물은 그 자체의 소지를 원칙적으로 금지한다. 마약, 무기, 성착취물이 헌법의 어떤 기본권과 연관이 있나. 양심의 자유에 따른 사상과 등치시키는 게 옳은가.” -폐지 논리 중에는 남북의 체제 경쟁에서 이미 한국이 승리했다는 것도 있다. “개인적으로 이 논리는 경계해야 한다고 본다. 국보법이 주는 무서운, 대결적 논리이다. 국보법 폐지를 향한 국민적 반발과 위기의식, 남남갈등 등을 불식하기 위해 이 논리를 사용하고 있다. 당장은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궁극적으로 국보법 문제 해결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체제 경쟁이 끝났다고 하는데, 북한은 핵보유국이고 전술핵까지 거론하고 있다’고 나오면 뭐라고 반박할 것인가. 논쟁이 도돌이표가 되는 셈이다.” -다른 조항들은 어떤가. “기존에 있는 법률로 충분히 대체할 수 있다.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 형법에 따라 처벌하면 된다.” -국보법 제2조도 심판 대상에 올랐는데. “제2조는 소위 북한으로 해석하는 ‘반국가단체’의 정의를 담은 조항이다. ‘이 법에서 반국가단체라 함은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국내외 결사 또는 집단으로서 지휘통솔체제를 갖춘 단체를 말한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헌법 전문과 제4조는 ‘평화통일’을 규정하고 있다. 북한은 평화통일을 위한 동반자로 여겨야 한다는 취지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보는 국보법은 헌법 원칙에 위배된다는 게 우리의 주장이다. 국내에선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지만, 유엔은 북한을 공인된 국가로 본다. 국제법적으로 분쟁은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는 건 국제평화주의에도 위배된다.” -제2조가 위헌이면 국보법 자체가 흔들릴 수 있겠다. “그렇다. 헌재가 제2조를 위헌 선언하면 전부 위헌을 선언해야 한다.” -국회에도 국보법 폐지 법안이 발의돼 있다. “지난해 5~6월 국보법 폐지와 폐지 반대 청원이 10만명의 동의를 받았다. 그러면 국회는 소관 위원회에서 해당 청원을 심사, 처리해야 한다. 최장 5개월 내이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이를 2024년 5월 29일, 21대 국회 마지막 날까지로 연장했다. 국회의 책무 방기다.”
[원희복의 인물탐구]세 번 해직교사 박미자 “국보법 7조 폐지가 교육적 가치다”(2020. 03. 13 15:12)
2020. 03. 13 15:12 사회
남자들이 결혼 선호도 1위로 꼽는 여성의 직업은 교사다. ‘방학이 있는 안정적 직장’이라는 점 때문이다. 국공립교사는 모두 국가공무원 신분이고, 은퇴 후 연금도 적지 않다. 게다가 법외노조지만 노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까지 있어 신분보장이 거의 완벽하다. 그래서 교사는 자의든 타의든 해직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세 번의 해직과 복직 반복 이런 신분보장에도 불구하고 해직과 복직을 세 번이나 반복한 교사가 있다. 중학교 국어선생으로 있다가 해직, 현재 전교조 연수원장으로 있는 박미자 교사(60)가 그 주인공이다. 도대체 그는 어떤 ‘대역죄’를 지었길래 교사에서 세 번이나 해직과 복직을 반복했을까. 지난 3월 5일 그를 전교조 사무실에서 만났다. -1월 9일 대법원의 징역 1년 6월, 집유 2년 확정판결로 세 번째 해직됐다. 국가보안법 7조 5항 이적표현물 소지 혐의다. 촛불정부의 대법원이 이런 판결을 내릴 것으로 예상은 했나. “촛불정부 대법원이기도 하지만 최근 남북정상회담을 몇 차례 하지 않았나. 게다가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도 있고.(웃음) 참담을 넘어 판사들이 참 세상 변화에 둔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유튜브에 북한의 선전자료가 얼마나 넘치나. 집에 책이 수천 권 있다. 교사가 북한과 관련된 책 몇 권을 가지고 있다고 내 사상이 바뀌나? 그게 국가 존립에 위협이 되나?” -국가보안법 7조 폐지는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사항이고, 심지어 야당도 15년 전에 폐지에 동의했던 조항이다. “이 판결을 받고 절망하기보다 ‘뭐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아이들에게 4차 산업혁명, 상상력을 가르치라는 이 시대에 ‘교사에게 뭘 가르치라는 것인가’라는 교육적 질문을 하게 됐다. 우리가 일상 가르치는 것이 ‘다름에 대한 존중’이다. 교사는 ‘너와 다른 사람을 경청하고 존중하라’고 가르친다. 교육적으로도 자기와 다른 것을 이해하려는 노력 속에서 창의·상상력이 생긴다. 북한은 칭찬하면 안 되나? 그게 죄가 되는 세상인가? 아이들에게 북한을 계속 욕하고 증오하라고 가르쳐야 하나?” -우리 헌법에는 평화통일을 명시하고 대통령에게 평화통일 의무를 선서하도록 강조하고 있다, 당연히 교육도 증오나 혐오 교육이 아닌, 화해와 평화 교육을 하는 것이 헌법정신에도 맞다. “그렇다. 우리는 국가보안법 7조가 헌법 위반이라고 헌재에 냈다. 그런데 대법원은 이를 헌재에 제청하지 않은 채 그냥 기각하고 확정판결을 내렸다. 2017년부터 수원지법·울산지법 등에서 국보법 7조 위헌 제청이 헌재에 계속 올라가고 있다. 그러나 헌재는 이를 심리하지 않고 있다.” 박 원장은 1989년 전교조 설립 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가 처음 해직됐다. 그때 형사들이 하숙집 주인에게 “빨갱이 교사 내보내라”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전교조가 합법화되고 심지어 민주화운동으로 평가되면서 복직했다. 전교조 수석부위원장 시절인 2013년 2월 전격 기소돼 2015년 4월 두 번째로 교단을 떠났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 들어 2018년 10월 다시 복직했지만, 이번 대법 확정판결로 세 번째로 해직 통보를 받았다. 당초 그를 기소했던 ‘이적단체 결성·회합통신·이적표현물 제작 반포’ 등 무시무시한 죄목은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가장 가벼운 국보법 7조 이적표현물 소지죄만 유죄판결을 받았다. 정년(62세)을 약 3년 남기고 그는 다시 해직됐다. 사실 그에 대한 기소는 전교조 법외노조의 신호탄이었다. 그를 포함한 전교조 교사 4명이 만든 새시대교육운동 모임을 이적단체로 규정해 기소하고, 국정원 댓글작업을 통한 박근혜 정권은 전교조 교사 285명을 국가공무원법 위반혐의로 고발했다. 그리고 2013년 9월 23일 고용노동부는 ‘해직조합원 9명을 탈퇴시키지 않으면 노조설립을 취소하겠다’고 통보했다. 박근혜 정권은 국정원 댓글사건의 관심을 돌리고, 교학사 교과서 도입에 가장 치열하게 반대하는 전교조를 와해하기 위해 치밀한 작업을 폈다. 뒤늦게 밝혀졌지만 일련의 이런 조치는 청와대가 직접 지휘했다. 고 김영한 민정수석 업무수첩에는 170일간 무려 42일이나 전교조 문제가 청와대에서 논의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또 국가기록원에서 필사된 ‘이병기 청와대 비서실장 지시사항(안)’ 문건에는 수석과 교육부 차관이 참여하는 전교조 대응방안이 청와대에서 수시로 열린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당시 법원행정처 임종헌 기조실장이 작성한 대법원 문건에는 “청와대는 전교조 문제를 통진당 위헌정당 해산 심판과 함께 가장 중요한 현안으로 취급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구체적 내용은 2018년 출간된 <촛불민중혁명사>에 자세히 정리돼 있다. 전교조 설립 발기인 참여했다 첫 해직 문 대통령은 스스로 전교조 명예회원이라고 할 정도로 전교조에 애정을 가지고 있다. 대선 전 전교조 합법화를 공약했고, 문 정부 들어 2018년 노동부 적폐청산 기구인 고용노동행정개혁위원회도 ‘전교조 법외노조 조치를 즉시 직권 취소할 것’을 장관에게 권고했다. 그러나 청와대는 ‘대법원 판례변경’과 ‘국회 특별법 제정’으로 책임을 미루어 왔다. 국회는 특별법을 만들지 않았고,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5월 20일 판례변경을 놓고 공개변론을 할 예정이다. 박 원장은 문재인 정부가 전교조 합법화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한 섭섭함보다 오히려 변호하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그는 “문 대통령은 전교조를 합법화하겠다는 원래 마음이 바뀌지 않았다고 믿는다”면서 “그러나 우리 사법부와 검찰 등이 하나도 바뀌지 않아 대통령도 맘대로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제왕적’이라는 대통령이 왜 합법화 조치를 못 할까. 고용노동행정개혁위원회도 ‘즉시 직권 취소할 것’이라고 권고까지 했다. 박미자 교사가 전교조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문 대통령이 신사라서 못할 것이다.” -신사라서? 공무원들이 규정을 들어 ‘안 된다’고 하기 때문 아닐까. 공무원들은 나중에 정권이 바뀌었을 때 감사원 감사 등을 두려워한다. 그런 실무 공무원을 배제하고 장관이 전결 처리하면 되는데 못 하는 것은 공무원을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나도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현 여당이 다수당 시절에도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지 못했다.” -그럼 대통령도 못 하는 국보법 7조 폐지운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 “시민운동으로 해야 한다. 전 국민이 들고 일어서야 한다. 촛불로 대통령을 끌어내리고 바꾼 시민이다.” 보통 약속을 안 지키면 원망이라도 할 법하고 게다가 세 번이나 해직됐으면 거의 ‘독기’만 남았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박 원장은 매우 ‘여유’롭다. 낮은 말씨나 조용한 태도를 보면 그는 ‘자상한 중학교 선생님’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런 그를 ‘빨갱이가 이적단체를 결성해 국가 전복을 꾀했다’는 국가정보원과 검찰의 억지는 애당초 사람 선택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 원장이 문재인 정부에 애착을 ‘매달고’ 있는 것은 2018년 4·27 및 9·19 남북정상회담인 듯했다. 적어도 남북 화해와 평화에 그나마 문재인 정부가 가장 적합하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남북 화해와 평화는 남북의 정치적 만남만으로 힘을 받을 수 없다”면서 “다음 세대에 인성을 교정하는 구체적인 평화통일 교육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옳은 판단이다. 아래로부터, 젊은 세대의 지지와 성원 없는 정상회담은 사상누각이다. 그는 “북한에 대한 맹목적 증오와 불신은 분단뿐 아니라 개인의 인성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면서 “평화통일 교육은 우리 공동체 내에서 폭넓은 품성을 가질 수 있게 한다”고 말했다. 남북 화해와 평화교육에서 가장 걸림돌이 국가보안법 7조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는 “국보법 7조가 존재하는 한 맹목적 비난과 증오 교육만 할 수밖에 없다”면서 “그렇지 않으면 아예 북한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아 ‘북맹(北盲)’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 원장은 1960년생 전북 순창 출신으로 전주여상을 나와 직장을 다니다 뒤늦게 대학에 들어갔다. 여상에 간 것은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서다. 1981년 전북대 국문과에 입학했다. 정치적으로 암울한 시기였지만 그는 그 흔한 운동권 학생이 아니었다. 그는 “학생운동을 하지 않은 열심히 공부만 한 순진한 여학생이었다”고 말했다.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그는 정교사 자격을 따고 졸업과 동시에 서울 공항중학교 국어선생이 됐다. 사회나 역사선생도 아닌 평범한 국어선생이 왜 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됐을까. 이 질문에 그는 ‘반가운 질문’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85년 교사가 됐는데, 당시 교원단체총연합회가 만든 방학책을 학생들에게 팔고, 교사는 책값을 걷어야 했다. 양심적 선생은 이 책값 걷기가 좀 껄끄러웠다. 그런데 책값을 제대로 걷지 못하면 ‘불만 있나,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얘기가 돌아왔다. 도대체 방학책과 사상이 무슨 관계 있나. 두 번째는 논술을 위해 학생 읽기 자료를 선정하는 데 내 스스로 검열을 하고 있더라. 그래서 분단이 국토분단과 정치분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깊숙이 들어와 있음을 절감했다.” 지난해 ‘한경희 통일평화상’ 받아 그는 전교조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특히 전교조의 ‘민족의 자주성 확보와 평화통일을 앞당기기 위한 교육을 실천한다’는 실천강령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초대 여성 지회장을 거쳐 통일위원장이 됐다. 2001년 북한이 ‘고난의 행군’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북녘제자 교과서 종이 보내기 운동’을 추진했다. 그는 2002년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여성대회에 전교조 지회장 자격으로 참석한 것을 시작으로, 2004년 전교조 통일정책국장으로 남북교육자 통일대회를 성사시켰다. 2005년 전교조와 한국교총, 그리고 북측의 조선교육문화직업동맹 중앙위원회(교직동)와 함께 6·15교육본부를 만들고 남북 공동수업을 이뤄냈다. 그는 수없이 남북을 오갔고, 이 모든 것은 교육부와 통일부 승인·허가를 통해 이뤄졌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이전 노무현 정부의 남북교류를 ‘이적단체의 불순행위’로 몰았고, 이때 받아 보관하던 자료 몇 권이 문제가 된 것이다. 그는 1993년 ‘겨레하나되기 운동본부’에서 활동하던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지난해 그는 ‘한경희 통일평화상’을 받았다. 한경희 통일평화상은 월북한 남편 때문에 고난의 삶을 산 한경희 여사 유족이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고 만든 상이다. 2016년부터 성공회대가 평화·통일에 기여한 인물을 골라 시상한다. 당시 김기석 성공회대 총장은 “두 번 해직을 당하면서도 교육자로서 통일의 중요성과 관련 교육에 매진해 왔다”면서 “남북이 분단된 현실에서 이념의 잣대로 만들어진 국가보안법 등이 아직도 남아 있는 상태에서 교육현장을 지켰다”고 선정이유를 밝혔다. 두 번 해직됐다고 큰 상을 받았는데, 세 번 해직된 그에게 무슨 상을 줘야 할까. 그는 3월 10일 전교조 공식회의를 통해 진보 시민단체와 함께 국보법 7조 폐지에 돌입한다고 말했다. 그는 되도록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도록 다양한 문화·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폐지운동을 벌일 것이라 말했다. 그는 “아이들 마음을 갈라놓고, 민주시민의식을 저해하는 국보법 7조 폐지는 다음 세대에게 가르쳐야 할 진정한 교육적 가치”라고 주장했다.
원희복의 인물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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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것을 만지다](3) 이도다완, 일본 국보가 되다
2014. 03. 05 17:05 문화/생활
직경 15cm, 높이 약 9cm. 그릇의 굽은 사람 손으로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높고 구연부가 밖으로 눕지 않아 차를 마시면 옆으로 새지 않는다. 바닥은 달걀이 세워질 정도로 움푹하게 들어가 말차 거품을 내기 쉽다. 크기에 비해 가벼워 찻잔으로 더없이 좋다. 일본이 더 사랑했던 우리의 백자 사발, 이도다완. 그 숨겨진 이야기를 전한다. 일본의 국보인 이도다완(井戶茶碗)이란 찻잔은 우리나라 조선 초기 백자 사발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군인들이 전리품으로 가져간 것으로 그 전까지 ‘막 사용한다’라는 의미로 ‘막사발’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런 그릇이 일본으로 건너가 차 문화의 정수로 꼽히며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렇다고 조선 초기의 모든 사발이 이도다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도다완은 진주 지역 지리산 자락 부근에서 만든 사발로 다른 지역의 것보다 직경이 2cm가량 적어 그 크기와 무게가 찻잔으로 쓰기 매우 적당한 형태를 띠고 있다. 또 사용하면 할수록 찻물의 색이 잔의 몸체에 배어 찻잔에 마치 그림을 그린 듯 아름다운 경치를 이룬다 했다. 그래서 많은 전통 도예가들이 이 찻잔을 재현하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이 투박한 백자 사발에 온 인생을 거는 이들도 많다. 아름다운 역사를 재현하는 그들의 노력이 헛된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다. 일본에서 국보로 지정된 이도다완, ‘기자애몽’은 찻잔의 미적 형태만으로 보물이 된 것은 아니다. 그 주인이 찻잔과 그 사용 내역을 기록한 ‘찻잔 족보’를 함께 남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오늘은 누구와 이 찻잔에 무슨 차를 마시며 어떤 이야기를 했다’라는 내용이 족보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찻잔 하나에 얽힌 수백 년에 걸친 스토리의 가치를 높이 평가해 ‘기자애몽’은 국보로 지정받은 것이다. 만약 이 똑같은 형태의 당시 찻잔이 지금 출토된다고 해도 국보로 지정될 수 있을까? 족보가 없다면 불가능하다. 큰 값으로 거래되지도 않는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족보가 있는 찻잔’은 수억 원에 팔리고 족보가 없는 찻잔은 천만 원 정도로 시세 형성이 돼 있다. 이상문의 고미술품 올바로 보기 재현 도자기, 냉정히 따져보자 오래된 물건을 시대별로 분류해 연구하면 그 시대의 생활상과 정치, 경제를 알 수 있다.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울수록 모든 기물이 뛰어난 예술성을 갖고 있다. 이는 그림이나 글씨도 마찬가지다. 가끔 감정 하다 보면 고려청자, 조선백자를 그대로 만든 재현품 도자기의 가격을 묻는 고객들을 만날 수 있는데, 그 값어치는 측정할 수가 없다. 시대적 가치가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구시대의 물건을 그대로 흉내 낸 것은 대단할 이유가 없다. 가끔 외국인 고미술 애호가들을 만나면 하는 말이 있었다. “한국에는 고려청자와 조선백자가 있지만 한국자기는 없는 것 같다.” 고미술품은 역사와 세월을 견디며 그 시대를 알려주는 유물로서 평가받는 것이다. 지금 고려청자와 똑같은 그릇을 만들지 못해서 고려청자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북한에서 외화벌이를 위해 만들어내는 고려청자는 과거의 것과 무척이나 똑같아 감정하는 나 자신도 구별하기 어려워 걱정스러울 정도다. 고려청자는 고려시대에 끝이 났다. 조선백자도 마찬가지다. 재현품은 5백 년, 1천 년이 지나도 문화재가 될 수 없다. 물론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통해 도자기를 만드는 도예가들도 많다. 그들을 응원한다. 그들의 작품은 언젠가 한국의 훌륭한 문화재가 되고 청자, 백자처럼 세계적으로도 그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을 것이다.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안진형(프리랜서) ■도움말 / 이상문(고미술품 감정사)>
옛것을 만지다
[새희망 새터민]북한 국보 악기 ‘소해금’ 연주자 박성진
2009. 01. 16 화제
박성진은 2006년에 들어온 새터민이다. 그는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평양예술학교에서 소해금을 전공한 음악가다. 그의 아버지는 경상도 출신이다. 남쪽이 고향인 아버지 때문에 학교를 졸업해도 출신 성분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예술단에 제대로 배치가 되지 않았다. 희망을 잃은 그는 탈북을 결심했다. 아득한 몽골 사막을 건너서 박성진(38)을 만난 것은 지난 12월. 연말이 되니 여기저기 그를 찾는 곳이 많다. 인터뷰를 하는 날도 군 관련 단체 송년파티에 초대를 받았다. 그가 연주하는 소해금에서는 애절하면서도 힘이 있는 소리가 난다. 그는 평양예술학교에서 소해금이라는 악기를 전공했다. “소해금은 1960년대 북한이 복고주의를 없애자는 운동에서 만들어진 악기예요. 해금을 개량한 것으로 민족적 소리를 가지면서도 바이올린 소리와 유사한 음색을 내죠.” 북한에서는 국보로 지정하기도 했다. 해금과 바이올린의 중간 소리를 내며 다른 악기와도 융합이 잘 된다. 특히 마이크와 상성이 좋아서 스튜디오 녹음 작업에 자주 이용된다. “남한에서는 재즈와 국악의 퓨전 공연이 많잖아요. 그래서인지 재즈 뮤지션들이 합주해보자고 꽤 제의를 해와요.” 그가 북한을 탈북한 계기 중 하나도 음악이었다. 남쪽이 고향인 아버지 탓에 명문 음악학교를 졸업해도 예술단에 들어가지 못했다. 북한의 ‘출신 성분’이란 사회 전반에 흐르는, 벗어나기 힘든 엄격한 신분 제도와 같다. “아버지가 경상도 출신이라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있었어요. 부모님, 삼촌, 누이 세 명과 2005년에 중국으로 탈북했죠. 몽골을 통해 2006년에 한국으로 들어왔어요.” 브로커들의 말만 듣고 몽골 사막을 횡단해야 했다. 이정표도, 불빛도 보이지 않는 아득한 사막이었다. “남자 보통 걸음으로 1시간 가다가 90도로 꺾어 또 30분 동안 직진하면 몽골 국경이 나온다는 거예요. 말이 쉽지, 사막 한가운데서 곧바로 직진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아요. 게다가 보통 걸음으로 1시간 걷는다는 게 너무 막연한 표현이잖아요.” 결국 길을 잃은 그는 밤 9시에 출발했지만 다음날 아침 7시가 돼도 도착지를 알리는 이정표는 보이지 않았다. 식량도 물도 없는 상황이었다. 함께 간 사람들 사이에서 ‘이쪽이다. 저쪽이다’ 의견이 분분했다.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하면 이대로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희미한 불빛이 눈앞에 보이더군요. 국경 초소인지 민간인의 집인지 모르지만 죽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어서 아버지와 제가 들어갔어요. 하늘이 도왔는지 사막 양치기의 집이더군요. 그 사람은 일 년에 한 번 그곳에 오는데 바로 그날이었던 거죠.” 양치기의 도움으로 무사히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 실제로 몽골 사막을 통해 탈북하는 사람들 중에는 물과 식량이 없어 굶어 죽거나 얼어 죽는 사람들이 많단다. 가수의 꿈 그리고 결혼 한국에 온 박성진에게 북한과 가장 큰 차이점을 물었더니 대중가요의 자유로운 노랫말을 꼽았다. 생활하는 것에 질적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비슷하단다. “대중음악은 생활상을 반영하는 수단이잖아요. 한국은 노래 주제가 다양해요. 반면 북한은 노래 주제가 정해져 있어요. 수령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죠. 차이는 그 정도예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어디나 결국 비슷하지 않을까요?” 그에게 가장 많이 묻는 것 중 하나가 북한에도 연애가 가능하느냐는 질문이다. 북한도 나름의 범위에서 하고 싶은 건 다 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자유 연애는 물론 이혼조차 가능하단다. 우리는 북한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고 무지했던 것이 아닐까. “저도 북한에 있을 때는 남한에 대해 오해가 많았어요. 남한은 자본주의니까 막연히 돈을 위해서는 뭐든 다 하는 곳인 줄 알았어요. 막상 와보니 발달된 복지정책에 많이 놀랐어요. 개인의 이익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불우한 이웃이나 독거노인을 위해 연탄도 나르고 봉사도 하더군요. 그는 남북한이 서로 오해하고 있는 부분과 반 세기 동안 벌어진 틈을 조금이나마 좁히는 일을 하고 싶다. “제가 정기적으로 판문점에서 공연을 해요. 판문점 관광객을 위해 30분 정도 연주를 하고 북한에 대한 이야기도 해요. 저는 민족의 분단이라는 현실과 아픔에 대해 객관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입장이잖아요. 뿌듯하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이루고 싶은 소망은 북한에서 못다 이룬 꿈을 한국에서 이루는 일이다. 그는 트로트 가수 장윤정의 ‘첫사랑’이란 노래를 소해금으로 연주해주면서 가수에 대한 꿈을 키웠다. 기획사를 통해 음반 준비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 북한의 미사일 실험 뉴스가 터지면서 남북관계가 냉각되기 시작했다. 자연히 박성진의 앨범 작업이 무기한 미뤄지고 말았다. “이미 곡은 다 받아놓은 상태예요. 남북한 정세에 따라 영향이 많더라고요. 기회를 기다리고 있어요. 운이 따라주면 하는 거고, 아니면 부담없이 제가 좋아하는 음악을 하려 해요.” 박성진은 자신이 무사히 한국에 도착한 데는 하늘의 뜻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는 국내 유일한 소해금 연주자다. 새해에는 한국의 전통 악기와 소해금과 결합하는 작업도 생각하고 있다. “1월부터 장윤정씨가 일본 투어를 간대요. 함께 참여해야 할 것 같고요. 기회가 되면 국악하는 분과 함께 어울려보고 싶어요.” 혼기가 꽉 찬 나이니 결혼도 해야겠다. 그는 현재 교제 중인 여자친구가 있다. “결혼해야죠. 2009년 화창한 날을 하루 잡아서 할 겁니다. 결혼은 둘이 만드는 하나의 작품이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긴 해요. 부모님도 벌써 일흔이신데 외아들이 빨리 손자들 안겨드려야죠.” 그는 앞으로도 남북간의 문화적 이질감과 거리감을 좁히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싶단다. 소해금 연주도 중요하지만 가수로서 자신의 노랫소리도 들려주고 싶다. 3년 차 새터민 박성진의 새해 소망이다.■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이성훈
국보급 투수 만든 아버지를 하늘로 떠나보낸 선동렬의 회한
2006. 03. 01 화제
“아버지… 마지막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임종을 못 지킬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국보급 투수’ ‘나고야의 태양’ ‘무등산 폭격기’ 등 영광스런 별명을 가지고 있는 선동렬 감독. 그를 현재의 자리까지 오르게 한 사람은 아버지 선판규씨다. 간암 투병중이던 아버지는 곁을 지키려는 아들을 만류했고 결국 선동렬 감독은 먼 타국에서 부음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 임종도 못 지킨 슬픈 아들 위대한 스포츠 선수 뒤에는 헌신적인 뒷바라지를 하는 가족들의 희생이 있다. 얼마 전 미국을 들끓게 했던 미시축구 선수 하인즈 워드의 뒤에는 한국인 어머니의 희생이 있었고, 세계적인 골프 여왕 박세리 선수의 뒤에는 딸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아버지 박**씨가 있었다. 현역 시절 ‘국보급 투수’로 불린 선동렬(43) 현 삼성 라이온즈 감독에게는 아버지 선판규씨의 희생이 있었다. 마치 ‘바늘과 실’처럼, 선동렬 감독과 나란히 하던 아버지 선판규씨가 지난 2월 10일,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왜 제가 오키나와에 있을 때마다 일이 생기는지 모르겠어요. 어머니도 오키나와 전지훈련 중에 돌아가셨는데, 아버지마저….” 지난 2월 11일, 일본 오키나와에서 전지훈련 중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급히 귀국한 선동렬 감독은 아버지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귀국 비행기가 없어 하루 늦게 장례식장에 오게 된 것이 한스러운 듯 오열을 토했다. 장례식장에 놓여 있는 아버지 선판규씨의 영정을 보자마자 선 감독은 한탄에 잠긴 모습을 보여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그는 지난 1996년 오키나와 전지훈련 중에 어머니의 부고를 받은 기억을 떠올리는 듯 장례식장에 들어서는 발걸음이 무겁기 그지없었다. 하늘 나라로 떠난 아버지에게 두 번 절을 하고, 말없이 영정을 바라보는 선 감독의 모습은 너무도 쓸쓸해 보였다. 고인의 장례식장은 야구인들과 선 감독의 지인이 보내온 조화로 뒤덮였다. 프로야구단 대부분이 해외 전지 훈련 중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야구인들은 직접 장례식장에 찾아오지 못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많은 이들이 장례식장을 찾았고 일본에서도 조문객이 올 정도였다. 선동렬 감독과 의형제를 맺은 일본 스모 챔피언 출신인 호쿠 도우미가 장례식장을 직접 찾았고, 한신 타이거즈의 고문 호시노 감독과 나고야 시장 및 나고야 관광협회에서는 조화를 보내왔다. “지난 1월 24일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괌 전지 훈련장에서 귀국했을 때,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임종을 못 볼 것이라는 예상은 못했어요.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아버지는 야구인인 저를 만들어준 분이세요. 부디 좋은 곳으로 가셨으면 좋겠어요.” 아들 위해서 트레이너 역할까지 자청했던 아버지 선동렬 감독은 2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하지만 야구 선수로 활동 했던 형이 일찍 세상을 떠난 후에 아버지는 막내 아들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선 감독이 선수로서 많은 기록을 만들어냈다면, 아버지는 아들에 관련된 수많은 일화를 만들기도 했다. 선동렬 감독은 광주 송정 동초등학교 5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유격수로 출발했지만, 송정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투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송정중학교에 진학하자 집 근처의 땅을 고르고, 등불을 달아서 야간 훈련을 할 수 있게 했고 아들이 거액의 계약금을 뿌리치고, 고려대에 진학하게 된 것도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들의 체력관리는 아버지의 몫이었다. 한 달에 2번 정도 특별 보약을 만들어 아들에게 먹이고, 겨울에는 노루 피를 마시게 할 정도였다. 1980년대, 보약값으로 한 달에 50만원 정도를 쓸 만큼 아버지는 지극정성이었다. 아버지의 뒷바라지에 힘입어 선동렬 감독은 고려대에 입학해 대학교 2학년 때부터 국가대표 선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지난 1982년 9월 서울에서 열린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미국, 대만, 일본과의 경기에서 모두 완투승을 거두고, MVP로 선정되기도 했다. 대학교 4학년 때는 쿠바에서 열린 제28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최우수 투수로 선정되었다. 당시 미국 LA 다저스 구단에서는 선동렬 선수를 입단시키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하지만 그는 85년 해태타이거스에 입단해 프로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선판규씨의 이름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해태 입단 전부터 아버지는 입단 계약금을 두고 구단과 줄다리기를 벌였다. 그리고 그해 겨울 아들의 성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트레이너로 자청해 새벽 체력단련을 도맡아서 했다. 아들의 공을 받는 포수 역할을 할 정도로 열성이었고 아들의 연봉 계약도 아버지가 전담했다. 해태에 입단한 지 3년째인 1987년에는 아들의 연봉 문제로 구단과 줄다리기를 하다가 소위 ‘무료 입장’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아들은 입단 2년째 24승 6패 6세이브라는 엄청난 성적을 올렸다. 아버지 그 후에 구단과 연봉 협상을 4개월째 지지부진하게 이어나갔다. 특히 선판규씨는 당시에는 보기 힘들었던 옵션 계약 형태의 특약 계약서를 구단에 제시하기도 했다. “190이닝 이상을 투구할 경우 1이닝당 연봉의 2%를 88년도 보너스로 보장한다” “위 계약서 특약 조항은 5년간 유효하다”는 등의 시대를 앞선 요구조건이었다. 선판규씨는 구단에서 자신의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않자, “올 시즌은 연봉 없이 백지 계약을 하고 무료 봉사를 한다. 대신 아들이 등판하는 경기에는 관중도 무료 입장시켜야 한다”는 제안을 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해태는 KBO에 임의탈퇴 선수로 신청서를 넣었고, 선동렬 선수가 직접 협상에 나서고 당시 김응룡 감독이 중재를 한 후에야 ‘무료 입장’ 사태는 진정됐다. 이후 선동렬 선수가 아버지를 대신해 연봉협상을 했고 선판규씨는 아들의 전면에서 퇴장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들을 뒷바라지했다. 1990년 1월 아들이 스튜어디스 출신인 김현미씨와 결혼을 한 후에도 봄, 가을로 철마다 녹용과 잉어 등 보약을 준비하는 일은 여전히 아버지 선판규씨의 몫이었다. 아버지의 묵묵한 뒷바라지 덕분에 선동렬은 ‘국보급 투수’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대학가에는 ‘성적이 선동렬 방어율’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돌 정도였다. 1.70, 0.99, 0.89, 1.21, 1.17 등 선동렬 감독이 프로생활을 하면서 올린 방어율은 지금도 깨기 힘든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런 뛰어난 활약을 펼친 후, 95년도에 이적료 3억엔, 연봉 1억 5천만엔을 받고 일본 주니치 구단으로 이적했다. 그후 선동렬은 일본에서도 뛰어난 성적을 올려 ‘나고야의 태양’이라는 별명을 얻고 성공적인 선수 활동을 했다. 그는 1999년 일본에서 98세이브를 올린 후 은퇴를 결심했다. 선수 생활 15년 동안 529경기에서 156승 230세이브 44패라는 뛰어난 기록을 남기고 현재는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으로 변신해 성공적인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선동렬 감독이 뛰어난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선판규씨의 희생 어린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고인은 자신의 마지막 가는 길보다도 아들의 전지훈련이 더 중요했던 듯, 끝까지 타국에 있는 아들에게 자신의 곁을 지켜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버지는 마지막까지도 아들에 대한 사랑을 놓지 않았다. mini interview 선동렬 감독 부인 김현미 “갑자기 돌아가셔서 유언도 없었어요” 선동렬 감독은 지난 1월 24일 아버지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했다가 다시 해외전지 훈련장으로 떠났다. 고인의 병세가 좋아진 것이 아니었나? 아버님의 병세에 차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간암 말기였기 때문에, 병세는 계속 나빠지고 있었다. 하지만 감독이라는 자리가 자주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기 때문에, 전지 훈련장으로 다시 떠난 것이다. 아버님 역시 남편에게 오지 말라고 하셨고. 임종 때 선 감독에게 남긴 유언이 있었는지? 유언을 하지 못하셨다. 어떤 말씀을 남기실 상황이 아니었다. 고인과 선 감독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였는데? 민우 아빠에게는 항상 ‘똑바로 살아라’라는 말씀을 하셨다. 아들을 최고로 여기는 분이셨고, 엄하지는 않으셨다. 남편과 아버지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 서로 너무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님은 마음이 너무 좋으셨던 분이다. 선 감독은 일본 오키나와에서 전지 훈련을 할 때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의 부고를 듣게 됐는데. 어머님과 아버님의 기일이 1주일 차이밖에 안 된다. 남편이 부모님의 임종을 못 본 것이 너무 안타깝다. 글 / 최영진 기자 사진 / 이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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