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81 건 검색)
- 윤 측 “권력자라 피해 봐”…권한쟁의심판·효력정지 가처분 신청
- 2024. 12. 31 20:36사회
- ... 불응한 데 대한 비판을 두고 “일반 형사사건에서도 당사자를 소환할 경우 일정을 조율한다”며 “권력자라서 특혜가 아니라 권력자라서 피해를 보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 측은 공수처에 내란죄...
- 尹 탄핵심판 시작
- [경제직필]권력자는 족쇄를 차야 한다
- 2024. 10. 29 21:19오피니언
- ... 그들의 연구를 설명했다. 이 지점이 중요하다. 권력자들은 각자 그들이 바라보는 곳이 다르다. 권력자들이 국가의 번영을 위해서만 노심초사한다는 것은 정치인들만 하는 얘기다. 권력자가 어디를...
- 경제직필이창민
- 오세훈 등 여당 중진 “권력자 주변 의혹 해소에만 매몰되면 국가 미래 암울”
- 2024. 10. 29 18:32정치
- ... 냈다. 이들은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의 충돌을 ‘정쟁’으로 규정하고, “최고 권력자 주변에서 발생한 국민적 의혹을 해소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이지만, 정치권이 그 문제에만 매몰돼...
- 야권 “김건희,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누가 불소추특권 줬나”
- 2024. 10. 02 17:01정치
- ... 의혹을 받는 대통령 영부인 김건희 여사를 불기소 처분한 것을 두고 “김 여사가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임을 만천하에 드러낸 오욕의 날”이라고 비판했다. 조승래 수석대변인은 브리핑에서 “검찰의...
스포츠경향(총 16 건 검색)
- 안창호 외손자 ‘건국전쟁’ 역사왜곡 비판···“이승만, 독립운동 방해한 권력자”
- 2024. 02. 19 16:34 연예
- 도산 안창호 선생의 외손자 필립 안 커디(Philip Ahn Cuddy)씨가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도산 안창호 선생 외손자 필립 안 커디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권력욕을 품은 지도자’라고 맹비판하며 영화 ‘건국전쟁’의 흥행을 우려했다. 필립 안 커디는 지난 15일 미주 한국일보에 기고한 ‘도산 안창호와 이승만’이라는 글에서 “이승만은 1890년대 독립협회 시절부터 도산 반대 입장에 주로 섰고 그에 대한 거짓 정보를 퍼뜨리기도 하는 등 독립운동 전체 기간 동안 꾸준히 도산과 우리 가족에게 큰 어려움을 끼쳤다”고 밝혔다. 이어 “현재 이승만의 역사적 평가에는 중요한 결합이 있다. 그는 과연 영예로운 독립운동가인가”라며 “독립운동이 활발하던 시절 그는 대한의 이익에 헌신하기보다는 이기적 권력욕을 품은 지도자에 가까웠다. 그가 독립운동을 위해 목숨을 바치던 애국자들을 여러 차례 배신한 것을 그들은 과연 알고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이승만은 동지회를 만들어 대한인국민회, 흥사단, 도산에 대적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보 기금을 횡령하고 상하지 지역 독립운동을 위해 모아진 자금을 빼앗기도 했다”며 “재미한족연합회는 어떻게 이승만이 독립운동을 방해했는가에 대한 많은 공식 리포트를 남겼다”고 했다. 필립 안 커디은 이승만 전 대통령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를 계속해서 높였다. 그는 “1925년 이승만은 미국에 거짓된 보고서를 제출해 도산이 시카고에서 체포되도록 한 일이 있다. 도산이 볼셰비키(공산주의자)라고 허위로 신고했고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이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반미세력이라고 주장했다”며 “이승만과 동지회의 이런 주장은 1932년 홍커우 공원에서 일어난 윤봉길의 폭탄사건 이후 상하히에서 체포된 도산의 처지를 복잡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이뿐 아니라 “1949년 김구가 암살당한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을 때 도산의 가족은 아무도 이승만이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것이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며 “이승만은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과 달리 정직한 인물이 아니었다. 이승만을 옆에서 본 도산과 우리 가족이 알고 있는 역사는 현재 한국 미디어(건국전쟁)에서 나오는 이야기들과 사뭇 다르다”고 했다. 필립 안 커디는 “나의 할아버지(도산 안창호 선생)는 잔악한 일제 식민주의자들에게 체포, 감금 그리고 고문을 당한 끝에 죽음을 맞았다. 지금 한국 존재에 도움이 됐던 것은 도산의 진실된 리더십이지 이승만의 거짓된 행동은 아닐 터다”며 “왜곡된 역사를 사실처럼 믿고 있는 일부 한국인과 한국계 미국인들의 인식이 안타까울 따름”이라고 했다. 필립 안 커디의 이러한 칼럼은 한국에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업적을 중점적으로 다룬 ‘건국전쟁’의 흥행에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 ‘건국전쟁’은 18일 개봉 17일만에 누적 관객 60만명을 돌파하며 다큐멘터리 영화로써는 놀러운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이승만 재조명’과 ‘이승만 미화’라는 반응으로 나뉘어 정치적 이념 대립도 격화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최근 참모들에게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 있었던 이승만 대통령에 관한 진실을 담아내 역사를 올바르게 알 수 있는 기회였다”는 취지의 평가를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 ‘비티파크’ 크래비티, 권력자 할머니→늦둥이 4살까지 ‘과몰입 상황극 고수’ 등극
- 2024. 01. 02 22:57 연예
- 스타쉽엔터테인먼트 아이돌그룹 크래비티(CRAVITY : 세림.앨런.정모.우빈.원진.민희.형준.태영.성민)가 과몰입 연기로 웃음을 자아냈다. 소속사 스타쉽엔터테인먼트는 지난 1일 크래비티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크래비티 파크 : 벌칙 레이스’(이하 ‘비티파크 : 벌칙 레이스’) 영상을 공개했다. 크래비티는 ‘새해맞이 가좍 특집’을 주제로 게임을 펼쳤다. 이에 크래비티는 각자 역할을 정해 상황극에 과몰입한 채로 게임을 진행하기로 했고, 고음 데시벨 게임에서 우승해 권력자 할머니가 된 태영이 가족 역할을 정했다. 태영은 가족 최고 권력자 할머니, 정모는 힙합에 심취한 큰삼촌, 원진은 이중인격 새 신부 고모, 성민은 닭살 민폐 남편 고모부, 우빈은 다정한 아빠, 세림은 크래비티 덕후 엄마, 앨런은 밖에서는 아이돌이지만 집에서는 얌전한 대학생인 큰아들, 민희는 늦둥이 4살, 형준은 사돈의 6촌 총각 역을 맡았다. 스타쉽엔터테인먼트 크래비티는 각자 역할에 맞는 분장과 옷을 입은 채 재등장했다. 이들은 각 인물 설정에 맞는 코믹 연기를 펼쳐 큰 웃음을 안겼다. 시작부터 역할에 빠져든 크래비티는 자신들만의 가족 세계관을 만들어 적재적소 애드리브로 예능감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할머니를 위한 재롱잔치 게임으로 컬러 청기백기 인간 버전을 선보였다. 장난기 가득한 열띤 게임 끝에 우빈이 최종 승리자가 됐고, 벌칙 주인공을 선택하며 더 과열된 다음 주 게임을 예고해 기대감을 더했다. 크래비티는 매주 월요일 오후 9시 자체 콘텐츠 ‘비티파크 : 벌칙 레이스’로 팬들과 만나고 있다.
- [투어테인먼트] 권력자와 긴 밤 지샌 ‘청남대’→주권자와 ‘불금’ 지필 ‘흥’ 무대
- 2023. 05. 09 09:28 생활
- 대통령의 ‘밀궁’ 청남대…유일한 대통령 별장 세종의 ‘비궁’ 초정행궁…세조도 기웃 정도전의 ‘노스텔지어’ 도담삼봉…호 삼봉도 여기서 청남대에 재즈 콘서트·전시 등 6월까지 ‘쭈~욱’ 청남대 본관 드론 촬영. 사진제공|트래블팀 충북의 스토리는 ‘충(忠)+분하다’. 권력자의 영욕은 이곳에서 롤러코스터를 탄다. 청남대며 초정행궁, 도담삼봉엔 권력자의 족적이 오롯하다. 하지만 세월에는 장사가 없다. 나라님에 대한 힐난이 일상다반사인 세상이다. 힐링을 바라며 청하는 청남대 여행도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다. 이세상에 박제된 청남대 속 대통령 이야기는, 저세상 여행 떠난 그들에 대한 추억 여행을 무겁게 한다. 이젠 권위마저 위세등등에서 기타등등으로 내려앉았다. 권력자 떠난 곳의 VIP는 두말이 필요없이 주권자인 당신이다. 이곳에서 열릴 국민보고회에 당신을 주빈으로 모신다. 도담삼봉 일출 장면. 사진|김선권(여행작가) 전두환이 만든 ‘밀궁’…힐링과 밀당하는 ‘청남대’ 청남대 전망대 드론 촬영. 사진|트래블팀 역시 전두환(각 대통령, 명칭 생략)이다. 그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때인 1980년, 청남대는 그의 한마디에 1000일 만에 대공사를 마무리했다. 문을 열 당시 봄처럼 맞겠다며 ‘영춘재’라 불렸지만, ‘답정남’ 전두환은 1986년 청남대로 개칭했다. 청남대는 대청댐 부근 약 55만 평에 지어진 대통령 전용별장이다. 말 그대로 ‘남쪽의 청와대’다. 역대 대통령들은 총 88회 방문해 471일간 청남대에 머물렀다. 앞서 대통령 별장은 네 군데였으나, 김영삼이 청남대를 제외한 나머지 별장들의 문을 닫았다. 청남대는 국가 1급 경호 시설로 청와대에서 관리하다가, 2003년 노무현에 의해 충청북도가 관리를 맡았고 그당시 20년 만에 주권자에게 개방됐다. 청남대 본관 집무실. 사진|트래블팀 김대중·노무현이 썼던 가구와, 그 이유에 대한 해설사의 설명이 이어지면 나도 모르게 귀를 쫑긋하게 된다. 건물 내부와 달리 드넓은 청남대의 풍경은 아예 테마파크(?)로 탈바꿈할 기세다. 충북도는 이곳을 ‘레이크파크’로 애드벌룬을 띄우며 관광객 유치 프로젝트를 벌이고 있다. 이를 위해 청남대의 침실 등을 일반 개방하려 하고 있다. 11일까지는 ‘인상파의 거장 모네&르누아르’, 6월11일까지는 ‘빈센트 반 고흐, 그 위대한 여정’의 기획 전시가 있다. 26~28일엔 ‘청남대 재즈토닉 페스티벌 2023’도 열린다. 청남대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에서는 우리의 독립운동사도 한 눈에 볼 수 있다. 청남대 내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전경. 사진|강석봉 기자 세종 치유한 ‘워터파크’ 초정행궁…한글창제의 ‘비궁’ 초정행궁 드론 촬영. 사진|트래블팀 세종이 안질 등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머물렀던 행궁이다. 1444년(세종 26년) 1월에 세웠다. 한글 창제도 이곳에서 마무리했다. 행차횟수는 총 121일에 이른다. 하지만 1448년(세종 30년) 방화로 불에 타 사라졌다. 1464년(세조 10년)에는 세조가 초정 일대에 행차하기도 했다. 초정약수는 애초 우물 3개였지만 현재 전해지는 탄산수 우물은 하나다. 행궁 건너편 가게에서 물통을 사면 약수를 떠갈 수 있다. 초정행궁을 찾는 가족 단위 방문객을 위해 어린이 눈높이에 맞춰 초정행궁의 역사적 의미를 재미있는 스토리로 구성한 13분짜리 2D 애니메이션 ‘초정행궁을 지켜라!’를 행궁 내 집현전(한글관) 영상실에서 상시 상영한다. 어린이의 흥미를 이끌 수 있는 콘텐츠다. 방송 예능 ‘나는 SOLO’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이처럼 초정행궁 체험의 하이라이트는 한옥 숙박 체험이다. 초정행궁은 최근 방송예능 ‘나는 SOLO’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사진|강석봉 기자 ‘이핵관’ 정도전의 향수 서린 도담삼봉 도담삼봉 일출 장면/ 사진|김선권(여행작가) 도담삼봉은 단양팔경의 하나로, 남한강 상류 한가운데에 3개의 기암으로 이루어진 섬을 말한다. 가운데 봉우리가 가장 높고, 큰 봉우리 허리쯤에 수각(水閣)이 있어 절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망루 구실을 한다. 조선왕조의 개국 공신인 정도전이 이곳 중앙봉에 정자를 짓고 경치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이성계의 최측근으로 시쳇말로 ‘이핵관’이던 정도전이, 호를 삼봉이라고 지은 이유도 도담삼봉에서 연유한다. 도담삼봉 선착장 인근에 ‘삼봉’의 전시관이 있을 정도다. 도담삼봉. 사진|강석봉 기자 가장 높은 가운데 봉우리를 장군봉, 북쪽 봉우리를 처봉, 남쪽 봉우리를 첩봉이라 한다. 전설에 따르면 남편이 아들을 얻고자 첩을 들여 아내가 돌아앉은 것이라고 한다. 또다른 ‘썰’에선 각각의 봉우리를 아버지봉, 아들봉, 딸봉이라고 칭한다. 장군봉의 정자는 ‘삼도정’이라는 하는데, 1766년 단양군수가 ‘능영정’이란 정자를 지었다가 민폐를 끼친다며 헐어버렸다. 1807년 김도성이 사각형 모양의 정자를 지었지만, 1972년 대홍수로 유실됐다. 지금의 삼도정은 1976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설화 속 도담삼봉은 옛날이야기의 진수다. 정선군에 있던 삼봉산이 홍수 때 떠내려온 것이라, 정선에서 매년 단양에 세금을 요구했다. 이때 어린 정도전이 나서 “우리가 갖고 싶어서 가져온 것도 아니고 오히려 물길이 막혀 피해를 보니 정선군에서 도로 가져가라”고 주장해 이후로 세금을 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타면 거대한 돌문인 석문, 은주암·자라바위·금굴 등을 볼 수 있다. 도담삼봉 여행선. 사진|강석봉 기자 잔도길+만천하 스카이워크=액티비티 단양강 잔도길 드론 촬영. 사진|트래블팀 철원의 잔도와는 다르지만 이곳에도 잔도가 있다. 잔도는 ‘벼랑에 매달리게 만든 길’이다. 그동안 접근하기 어려웠던 남한강(단양강) 암벽을 따라 잔도가 이어져 있어, 혹두릅나무·붉나무·고욤나무 등주변 경관을 살필 수 있게 됐다. 만천하 스카이워크. 사진|김선권(여행작가) 단양군 보건소 앞에서 시작해서 만천하 스카이워크까 1.1㎞ 길이다.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다. 그 끝에 만천하 스카이워크가 있다. 이곳에 서면 멀리 소백산 연화봉은 물론 폭 2m의 고강도 삼중 유리를 통해 발밑에 흐르는 남한강을 내려다 볼 수 있다. 담력 테스트를 하기에 좋은 곳이다. 만천하 스카이워크. 사진|김선권(여행작가) 이외에도 만천하 짚와이어는 길이 980m 짜리 2개의 고정된 와이어로프를 타고 무동력 활강을 즐기는 이색 익스트림 스포츠다. 알파인코스터는 1인 롤러코스터다. 알파인코스터의 체감속도는 시속 150㎞에 이른다. 만천하 슬라이드와 모노레일도 있다. 만천하 짚라인. 사진|김선권(여행작가)
- ‘조선변호사’ 절대 권력자, 천호진
- 2023. 03. 31 09:44 연예
- MBC 제공 천호진이 ‘조선변호사’ 절대 권력자로 돌아온다. 31일 첫 방송되는 MBC 새 금토드라마 ‘조선변호사’는 부모님을 죽게 한 원수에게 재판으로 복수하는 조선시대 변호사 ‘외지부’의 이야기를 그린다. 진정한 복수는 의로운 일을 할 때 가치 있는 것임을 보여주며 백성을 위하는 진짜 변호사로 성장해가는 유쾌, 통쾌한 조선시대 법정 리벤지 활극 드라마. 오랜만에 사극작품으로 찾아와 반가움을 더한 천호진은 극 중 조정 최고의 권력자로, 국정을 총괄하는 원상으로서 의정부를 대표하는 영의정이자 훈구파 수장 ‘유제세’ 역을 맡았다. 조정은 물론, 왕실, 나라, 사람의 목숨까지 쥐락펴락하는 실세 중의 실세로 활약한다. 자타공인 ‘국민 아버지’ 반열에 오른 천호진의 강렬한 캐릭터 변신은 물론, 유지선(차학연)의 아버지로 분해 어떤 새로운 부자 호흡을 이끌어낼지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한편, MBC 새 금토드라마 ‘조선변호사’는 오늘(31일) 오후 9시 50분 첫 방송된다.
주간경향(총 4 건 검색)
- [편집실에서]권력자 식의 말하기 시대는 끝났다(2017. 01. 17 15:50)
- 2017. 01. 17 15:50 오피니언
- 말은 권력이었다. 고대 도시국가 아테네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용어가 있다. 이세고리아와 파레시아다. 이세고리아는 평등한 말하기다.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페르시아전쟁에서 아테네가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꼽은 것이 바로 이세고리아다. 참주제, 독재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볼 수 있다. 파레시아는 자유롭게 말하기 또는 진실 말하기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진실, 자유, 비판을 파레시아의 3요소로 꼽았다.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는 죽음까지 껴안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말하기 역사는 정치권력이 신에서 영웅(왕)으로, 영웅에서 다시 시민으로 바뀐 것과 같은 궤적을 보인다. 물론 시민은 오늘날의 시민이 아니다. 아테네에서 태어난 남성으로, 여성과 외국인, 노예는 포함되지 않는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을 ‘진실 말하기’라는 관점에서 해석한 이가 푸코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잠자리를 하는 오이디푸스는 부친 살해와 근친상간을 뒤늦게 알고, 자신의 눈을 파내고 유배를 떠난다. 푸코는 에서 이 진실이 밝혀지기까지 세 단계의 진실 말하기 과정을 거친다고 해석한다. 첫째, 신(아폴론)과 예언자(테이레시아스)다. 둘째는 영웅(오이디푸스), 셋째는 시민(양치기와 하인)이다. 일본의 푸코 연구자 나카야마 겐은 (그린비·2016)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최후의 진실을 말하는 것은 양치기와 하인이라는 극히 낮은 신분의 시민과 노예들이다. 진실은 이제 영웅이 말하는 것이라기보다 시민이 말해야 하는 것이 된 것이다.” 이 말은 권력자 방식의 말하기는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에 끝났음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말의 힘을 보여주는 데 연설만한 것은 없다. 그래서 연설은 때로는 부드러우면서도 과격하거나 격정적이다. 말의 힘은 포장술과 미사여구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성에 있다. 서툴고 투박한 연설이 감동을 주는 이유다. 이틀새 두 연설이 관심을 끌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고별연설과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귀국연설이다. 퇴임 열흘을 앞두고 한 오바마의 연설 가운데 한 문장만 고르라고 한다면 주저없이 이것을 선택하겠다. “시민으로 언제나 여러분 곁에 있겠다.” 오바마 임기 8년을 연설로만 평가하면 매력남 그 자체다. 그의 연설에는 늘 유머와 위트가 넘치고, 소통과 공감이 흐른다. 무엇보다도 진정성이 있다. 고별연설에서 그가 강조한 단어는 민주주의와 시민이다. 그는 불평등과 인종문제, 편가르기로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고 했다. 이를 극복하려면 시민의 자발적인 참여가 필요하다고 했다. 10년간 유엔 사무총장 임기를 마치고 귀국한 반기문은 “국민·국가를 위해 한 몸 불사르겠다”고 했다. 귀국연설에는 국가, 국민, 애국심, 권력의지와 같은 권력자의 말이 넘쳐났다. 대권 도전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기 위함이었지만 한마디로 권력자로서 말하기의 전형이었다. 반기문의 가세로 대권주자들의 말의 향연이 본격적으로 펼쳐질 날이 머지 않았다. 그들의 민낯이 드러날 시간이기도 하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는 과장과 왜곡, 거짓과 선동, 진실이 뒤섞여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유통기한이 지난 권력자의 말하기 방식에 매달려 진실을 감추려는 시대착오적 대권주자가 있을 것이다. 이미 박근혜 대통령의 일방적인 말하기에 충분히 지쳤다. 더 이상 대권주자들은 대놓고 거짓말하거나 뻔뻔하고도 반성과 참회가 없는, 몰염치한 작태를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선거철만 되면 등장하는 ‘서민 코스프레’도 사절이다. 권력자 식의 말하기가 통하던 시대는 끝났다.
- 편집실에서
- [박상미의 공감 스토리텔링]“권력자의 뿌리 콤플렉스, 역사교육 망친다”(2015. 06. 02 11:36)
- 2015. 06. 02 11:36 사회
- ‘역사교과서’ 문제를 거론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 주진오 교수. 친일·우편향 논란을 빚었던 교학사 역사교과서를 앞장서 비판했다는 이유로 작년에는 KBS 촬영 후에 출연자가 교체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당시 KBS PD들이 벌인 시위에서는 보수진영에 불편한 인물에 대한 ‘블랙리스트’라는 주장도 나왔고, KBS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의 이력과 현재 활동영역을 보면, 역사교과서 문제에 개입하는 것이 그에게 하등 이익될 것이 없다. 그는 왜 이 일에 앞장서게 되었을까. 상명대학교 역사콘텐츠학과에서 그를 만났다. 한국근대사를 전공하셨고, 여러 역사교과서를 대표 집필해 오셨습니다. 사범대 출신도 아니고 교수가 아닌 학자에게 도움 되는 실적도 아닌데요. 왜 앞장서게 되셨습니까. “2000년에 한국근현대사 검정교과서를 대표 집필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처음에는 완강히 거절했습니다. 아직 교과서를 쓸 만한 연륜이 되지 못했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국정교과서의 오류와 문제를 지적한 글을 몇 편 쓴 것이 족쇄가 되어 결국 참여하게 되었습니다.(웃음)” 한국의 중학교와 고등학교 검정 역사교과서를 모두 대표 집필했고, 100% 합격한 유일한 역사학자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역사교과서 집필자협의회를 이끄는 역할을 해오셨구요. “만약에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시비만 없었으면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금성교과서가 주 대상이 된 논란에 역사학자로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나섰다가 대표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들에게 굴복할 수 없다는 생각에 계속해서 역사교과서를 대표 집필하게 되었어요. 뉴라이트의 역사 공세에 전면으로 나서 대응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그 과정에서 보수세력들의 표적이 되어 피해를 많이 입었지요. 그래도 직장에서 쫓겨나고 고문과 죽음을 당해야 했던 분들에 비하면 이건 고통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주진오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 박상미 2018학년도부터 도입되는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서 근현대사 비중이 줄어든다고 합니다. 한국사 부분에서는 근현대사의 비중을 기존 50%에서 40%로 조정하는 방안이 포함됐는데요, 근현대사 강화가 세계적인 추세인데 우리 역사교과서는 왜 거꾸로 가는 겁니까. “근현대사 공부는 ‘지금 여기의 우리’를 둘러싼 모습들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알려주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리고 과거에 대한 반성을 통해 바람직한 미래를 전망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식민지배와 분단, 독재와 민주화, 산업화와 경제성장 등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야만 우리가 또다시 그런 잘못을 범하지 않고 주변국과의 역사분쟁에 대해서 제대로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현재 정부는 자꾸 거꾸로 가는 역사교육 정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권력을 가지고 있는 세력들이 자신들의 뿌리에 대해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급적 학생들이 근현대사를 자세하게 배우는 것을 꺼리고 있는 것이지요.”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독재를 미화하는 방향 등으로 수정하도록 강요한 것은 부당하다며 집필진이 교육부를 상대로 낸 소송이 기각됐습니다. ‘판결문이 교육부 홍보자료인지 헷갈릴 정도이다’라고 쓰신 글을 읽었습니다. “서울행정법원이 교육부의 수정명령이 적법하다고 판결했죠. 판결문을 읽어보면 일관해서 교육부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원래 6종 교과서 집필자들은 수정명령이 헌법에서 정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위배한 것이며, 절차적으로도 문제가 있는 위법한 처분이라고 보고 취소소송을 제기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재판부는 ‘교육부의 교과서 수정명령의 필요성이 존재하며 교육부 재량 범위 내에서 적절히 이뤄진 것’이라고 판단했더군요. 이는 ‘수정심의’의 실질적인 절차와 내용을 보지 않고 형식만을 보아 현행 검인정 제도의 정신을 지킬 수 없도록 한 판결입니다. 당시 교육부가 여러 기관에 공문을 보내 수정심의위원을 추천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러한 시도에 반대하는 단체에서는 추천을 거부했습니다. 수정심의회에서 모든 사안에 대해서 만장일치로 결정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자신들과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들로 구성해서, 정식의 임명장 수여도 없이 졸속하게 진행한 수정심의회가 검정에 준하는 절차를 밟았다니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도 교육부는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 내용을 수정하라고 또다시 약식의 심의회를 구성해서 추진할 수 있겠군요. “검정은 왜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초·중등교육법 및 교과용 도서에 관한 규정에서 정한 수정의 범위는 표기·표현·오류 및 내용상 사실관계의 명백한 오류 등의 객관적 사실 오류에 한하고 있습니다. 당시 교육부가 내린 수정명령은 근거규정의 수정범위를 넘어설 뿐 아니라 사실상 특정 사관의 반영을 강요하는 내용의 변경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분명히 2013년 금성출판사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재판에서 대법원이 ‘이미 검정을 마친 교과서의 내용을 실질적으로 변경하는 것’이기 때문에 ‘검정절차상 교과용 도서심의회의 심의에 준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확인한 바도 있지요. 하지만 통상 6~8개월 걸리는 검정심의에 비해 단 2주일 만에 급조해서 비밀리에 운영한 수정심의회가 그에 준한다는 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그들의 판단대로라면, 앞으로 정부가 선호하는 입장에 부합하지 않는 교과서는 교육부가 언제든지 수정심의회를 구성해 손쉽게 수정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검인정 제도가 유명무실해지는 것인가요. “정부가 일방적으로 제작, 배포하는 국정교과서 제도의 한계점을 극복하기 위해 검정 권한을 교육의 이해당사자들이 참여하여 일정한 견제와 균형을 행사하도록 한 검인정제도는 이제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 판결이 헌법에서 천명한 교육의 중립성을 해쳤다고 평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게다가 수정명령의 내용에 대해서 일일이 문제가 하나도 없다는 판결을 내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정치적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도 아닌 고대사 분야에 대해서까지도 판사가 판단을 내리고 있어요. 도대체 어떻게 법조인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을 좌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지요.” 항소했다고 들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사실 한국근현대사 재판 때에도 1심과 2심의 판결이 상반되었고 결국 대법원에서 원고 승소로 최종적인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절차가 끝났을 때, 이미 한국근현대사가 교육과정에서 사라지고 난 다음이었지요. 소송만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인생에서 원고든 피고든 소송의 당사자가 되어본 것이 처음입니다. 여러 일로 바쁘다 보니 소송에 신경을 쓸 겨를이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정권의 입맛에 따른 일방적 행정을 방치할 수도 없어 할 수 없이 시작한 재판이었습니다. 이제 그것을 또한 편파적으로 손들어주는 1심 판결을 보면서 참담한 심정입니다.” 승소 가능성은 있습니까. “사실 금성출판사 필자들이 한국근현대사 소송에서 승소했지만 시간이 많이 흘러 이미 과목도 없어지는 바람에 실익이 전혀 없었지요. 하지만 그 판례가 있기에 저희들이 맞설 수 있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저희도 승소하게 될지 패소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승소한다 하더라도 아무 실익도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부가 구성한 검정위원회를 통과한 교과서를 자신의 입맛대로 수정하려는 시도를 방치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학자와 교사들은 역사를 가르치는 존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주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교과서에 대한 불신이 커질 것 같습니다. 역사학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기여하는 실천적 학문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해 오셨는데요, 역사교육은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프랑스 역사학자 쟝 셰노가 쓴 를 번역해서 이라는 책을 낸 적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장 셰노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역동적인 관계’라는 표현을 쓰는데, 역사는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지나간 죽은 과거를 절대적인 진리로 만들어 암기하는 것만으로는 역사를 공부하는 의미가 없습니다.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주체는 인간이고, 내가 과거를 통해 현실을 이해하고 미래를 전망해 보기 위해 역사를 배우는 것이어야 합니다.”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제자들이 건넨 감사편지 앞에서 주진오 교수가 웃고 있다. / 박상미 주진오 교수의 모의재판 수업, 여성사 강의는 독특하다고 알려져 있던데요. “저는 역사인물 재판이나 역사의 쟁점토론 같은 방식을 강의에 도입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인물이나 사건의 역사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만장일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재판이나 토론의 방식을 통해 역사 해석에 다양한 관점이 존재하며 그들 나름의 논리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가운데 자신의 생각을 확립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미 20년 전부터 시작했던 여성사 수업은 과거의 여성들의 역사를 바탕으로 현재의 여성문제를 생각하는 기회를 갖도록 합니다. 예를 들어 선사시대의 인골 유적에서 나타나는 짧은 여성 수명의 문제를 통해 임신과 출산, 나아가 현재 나타나고 있는 출산율 저하의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지요. 고려의 결혼 풍습인 ‘서류부가혼’(처가살이 형태)을 설명하면서 현재의 결혼문화를 비판적으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아울러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여성사 전시관 또는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을 다녀오면 가산점을 주고 있습니다. 학생들 대부분은 이런 영화제나 전시관이 있는지 몰랐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국여성사를 강의하는 유일한 남자교수라고 하더군요. 그러다 보니 라는 책을 대표 집필하기도 했습니다.” 과거와 현실을 넘나드는 재미있는 수업이겠습니다. 과제도 색다르다고 들었어요. “가장 사랑하는 여성에 대한 인터뷰 기사를 쓰도록 합니다. 어머니를 대상으로 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지요. 그런데 많은 학생들이 ‘엄마’로서가 아닌 하나의 이름을 가진 여성으로 생각해본 적도, 그분의 인생에 대해 관심을 가져본 것도 처음이었다는 학생이 많습니다.” 진보 경제학자이자 평화운동가 주종환 선생이 2014년에 별세하셨어요. 80년대부터 재벌 중심의 경제가 가져올 폐해를 지적했는데 그 예언은 적중했지요. 1994년 동국대학교 교수 퇴임 후 더욱 활발하게 시민사회운동에 참여했습니다. 2008년,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꼿꼿하게 앞자리를 지키던 모습을 기억합니다. ‘함께하는 평화, 함께하는 시민공동체’를 주장하셨고, 팔순이 넘어서도 를 집필하고, ‘제주 해군기지 건설의 정치경제학’ 등 많은 시사평론을 발표했습니다. 학자 ‘주진오’가 볼 때 주종환 선생은 어떤 사람입니까. “한국의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현실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분이었죠. 자신이 가진 지적 능력을 농민을 비롯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바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디서나 대우를 받기보다 소탈하고 겸손하게 살다 가신 분이었고요. 그래서 옆에서 보기에 늘 힘들었고 외로웠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앞뒤를 재지 않고 그대로 말하고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이 한국적 풍토에서 쉽지 않은 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께 받은 영향이 클 것 같습니다. 주종환 선생의 활동과 업적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그분의 아들이 역사학자가 된 걸 의아해 하는 사람이 없을 것 같아요. “아버지가 저에게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강요하신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저도 아버지의 말씀을 순순히 따르는 착한 아들도 아니었고요. 반항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자연스럽게 제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써야 한다는 생각,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의식 같은 것은 자연스럽게 닮아간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항상 아버지와 다른, 아버지보다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늘 제가 잘 하는 일이 있어도 주종환 아들인데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주변 분들의 말씀이 너무 싫었습니다. 그래서 경제학과에 가서 경제사를 하면 되지 않느냐는 아버지의 권유를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한다’고 하면서 거부하고 사학과를 지원했지요. 마침 지도교수가 한국 역사학계에서 경제사의 태두이신 김용섭 교수였습니다. 따라서 경제사를 전공하면 성공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었는데도 저는 일부러 정치사상사를 택했습니다. 아버지와 다른 길을 가서 제힘으로 성공해 보이겠다는 생각이었지요. 그 후에도 저의 인생은 저 스스로 결정하는 방식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결국 아버지의 그늘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어디가나 주종환 교수 아들이라는 말을 오늘날까지도 듣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주변을 보면 아버지와 아들이 비슷한 생각을 갖는 것만은 아니더군요. 그런 점에서 부족하지만 저의 활동에 대해 늘 응원해 주셨고, 다른 진보적 학자들이 아버지를 부러워한다고 하셨습니다.” 광복 70주년입니다. 진정한 친일 청산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수업에서 가르칩니까. “저는 친일문제가 ‘역사의 빚’이라고 생각합니다. 70주년이 지나도록 아직까지 친일문제를 거론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 잘못된 현실입니다. 빨리 청산하지 못하니까 빚이 자꾸 쌓여가는 것이 아닐까요? 어떤 분들은 그러니까 그냥 덮어두자고 합니다. 하지만 친일문제는 빨리 드러내서 사실 파악을 명확히 한 후, 잘못한 사람들이 반성하고 이를 국민적으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과정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연좌제를 통해 후손들을 모욕하고 끌어내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친일만이 한 인간을 평가하는 유일한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앞으로 역사학자로서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저는 그동안 제가 무엇을 하겠다고 생각하지 못한 일들을 하고 있는 저의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동안 어느 진영에 서서 생각하고 행동해 오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의미 있다고 판단되면 그냥 해 왔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저도 모르겠지만, 힘들고 지친 사람들에게 역사를 통해 위로와 기쁨을 드릴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주진오. 30세에 교수가 되었고, 33세부터 TV 역사 다큐멘터리에 출연하면서 대중에게 친숙한 역사학자로 알려졌다. 40세 때 미국에 방문학자로 갔을 때는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의 연구가 이루어지는 것을 참을 수 없어서 영어공부를 열심히 했고, 미국생활 1년 만에 텍사스대학에서 영어로 한국사 강의를 했다. 역사를 콘텐츠와 결합시키는 작업을 선도해 왔으며, 지금은 코이카(KOICA) 콩고 국립박물관 건립사업의 단장을 맡아 아프리카를 오가고 있다. 몇 번에 걸쳐서 그를 만나는 동안, 그는 여러 번 같은 말을 거듭했다. ‘나는 공감 스토리텔링 인터뷰의 대상이 될 자격이 없다. 나는 아주 많이 빚진 자다. 항상 부당할 정도로 좋은 조건 속에서 살아 왔다. 나의 태만과 부주의로 제대로 갚지 못해 부끄러울 뿐이다. 앞으로 사회에 갚을 빚이 태산이다.’
- 박상미의 공감 스토리텔링
- [정동마당]권력자들의 ‘X파일’(2005. 08. 09)
- 2005. 08. 09 사회
- 어딘가에 비열하고 소름끼치는 음모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테이프를 내밀고 흥정을 벌였다는데 과연 얼마나 불렀을까. 슬쩍 지워졌다는 내용은 또 어떤 것일까. 이른바 ‘X파일’을 둘러싸고 갖가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지만 드러난 사실만큼은 확실하다. 삼성그룹이 돈뭉치를 앞세워 대선 후보들을 구워삶으려 했다는 점이다. 외환위기를 촉발시킨 기아차 사태의 빌미가 엿보이기도 한다. 이를 불법 도청한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의 작태도 그냥 지나칠 문제가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고 보면 역시 삼성그룹이고, 또 국정원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얘기가 그렇게 틀린 말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정치판을 마음껏 주물러대려 한 것이 삼성이라면, 그런 의도를 감쪽 같이 테이프에 담아낸 것이 국정원이다. 각 후보들 진영에 건네주었다고 거론되는 금액이 그렇고, 그런 식으로 몰래 녹음해둔 테이프의 숫자가 또한 그렇다. 하지만 문제가 거기서 그치지 않는 모양이다. “전모가 공개되면 나라가 흔들린다”는 발언이 단순한 엄포로 들리지만은 않는다. 그들의 숨겨놓은 여자와 자식들, 정경유착, 해외로 빼돌린 재산들…. 가끔씩 흘러나오는 소문들보다 더욱 원색적인 내용이 아닐까 하는 묘한 호기심마저 자극한다. 하긴, 돈과 권력을 한손에 주무르는 권세가들이 어두컴컴한 밀실에서 주고받는 음습한 귓속말을 일반인들로서야 어떻게 감히 엿들을 수 있겠는가. 사실은, 등장인물들 자체가 관심의 대상이다. 대권 후보들은 물론 그룹 회장, 언론사 사주, 경제부총리 등등. 돈 심부름을 했다는 주변 정치인들과 정기적으로 떡값을 챙겼다는 검찰 간부들도 조연으로 등장한다. 과거 어느 정치 드라마에서도 이처럼 화끈한 배역들을 출연시킨 적은 거의 없을 것이다. 드라마의 기획·연출진도 보통은 아니다.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던 대통령의 아들을 비롯해 청와대 정무수석, 국정원장 등이 두루 거론된다. 흥미로운 것은 국민의 반응이다. 도청이나 몰카, 신용정보 유출 등과 관련한 얘기가 나올 때마다 마치 스스로 피해자인 양 흠칫 놀라며 당장 뿌리뽑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대부분 국민들이 도청의 불법성보다 테이프 내용에 더 관심을 보인다는 점이다. 이런 식으로라도 권력층의 비리가 한꺼풀씩 벗겨진다는 게 다행이라고 여기는 것일까.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번 사태의 전모가 밝혀지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대통령을 빼놓고는 모두 도청했다”니 서로가 당사자인 셈이기 때문이다. 권력의 핵심 당사자가 테이프를 넘겨받고도 처리를 미루고 어물쩍 넘어갔다는 얘기에서도 그런 정황이 충분히 읽혀진다. 너나 할 것 없이 꼭꼭 감춰야 할 추접스런 얘기들이 가득 담겨 있다는 추측이 그렇게 틀리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여기에 그럴듯한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아예 도청행위에 대한 제한을 풀어 완전 합법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비밀이 없도록 서로 엿들으면 된다. 국가 당국에서 제멋대로 도청하는 상황에서 구태여 국민들이라고 막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당장이라도 그때의 후보자들은 물론 국정원과 그룹 책임자 등 당사자들에게 도청장치를 다시 들이대보라. 그렇게 해서라도 골방에서 이뤄지는 그들의 은밀한 대책회의를 엿들을 수 있다면 적어도 어느 정도는 의혹의 실마리가 풀릴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런 식으로 누군가에 의해 도청이 이뤄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대한민국에서는 그런 일이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어느 누가 자신있게 장담하고 나서겠는가. 허영섭
- [BOOK]권력자들의 만찬(2005. 04. 12)
- 2005. 04. 12 문화/과학
- 그들은 왜 먹는 데 집착할까 ◇권력자들의 만찬 상류층의 호화찬란한 식사·연회문화는 비단 오늘날만의 일은 아니다. 이미 기원전 바빌로니아에서는 소수의 사람들만을 위해 열흘간이나 성대한 향연을 벌인 바 있으며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 때에도 상류층은 자기들만의 독특한 연회문화를 향유했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화려한 연회가 문명인과 반문명인을 구분짓는 기준 중 하나였다고 한다. 권력을 차지하고 있는 몇몇 사람들만이 모여 식사를 즐겼다. 그들 잣대로 따진다면 그들은 문명인이었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반문명인이었던 것이다. ‘문명인’들은 ‘반문명인’들에게 아주 멀리에서 음식을 가져오게 했다. 쉽게 말해 특산음식을 공물받은 것인데 이것은 그들의 힘을 과시하는 한 형태이기도 했다. 권력자들은 여러 사람이 어울린 식사자리를 수시로 마련했다.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여럿 모이므로 그 자리에서 교류와 정보교환, 사적인 관계 등이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결속력을 다지는 데도 연회는 큰 역할을 했다. 이같은 형태가 매우 구체적으로 드러난 시기는 8~9세기이다. 또한 이때에는 기독교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면서 채식 위주의 금욕적인 식사문화가 생겨났다. 그렇지만 탐욕스러운 고기 식사와 사치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왕과 권력자들 사이에서는 호사스러움이 여전했다. 식사나 연회자리 하면 연상되는 것 중에 비즈니스도 빼놓을 수 없다. 식사와 연회자리를 마련한 주인이 그것을 본격적으로 비즈니스의 수단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단순히 결속력과 권력을 과시하는 데에서 나아가 식사와 연회에 목적이 끼어든 것이다. 이때에는 정치적인 목적을 음식에 표현하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인 음식이 앙트르메이다.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는 앙트르메를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후식으로 나오는 과자’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15세기 권력자들은 앙트르메에 각종 장식과 문양을 새겨넣고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르네상스 시대 권력자들의 연회는 그 시대 유럽을 수놓았던 문화만큼이나 화려했다. 음식재료가 좋았고 그에 따라 자연히 요리도 최상이었으며 음식을 담는 식기도 눈부셨다.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최고의 쾌락을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궁중에서 식사와 연회만 따로 관리·감독하는 궁중관리가 등장할 정도였다. 식기세트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이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요리는 점점 예술적인 색채를 띠어갔다. 눈과 입을 모두 즐겁게 하는 연회도 계속되었다. 한편 프랑스혁명 후에는 오히려 자기들만의 연회문화를 더욱 공고히 하기 시작했다. 암암리에 행동수칙을 강화해나갔고 새로운 인물은 좀처럼 따라하기 힘든 불문율 같은 것을 확고히 해 배타성을 견고하게 다져나갔다. 이는 아마도 평등사상이 널리 퍼지는 가운데 자기들만의 지위를 유지하고픈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저자는 이같은 상류층의 식사와 연회문화가 걸어다니면서 패스트푸드를 먹거나 혼자만의 식탁이 많아진 오늘날에도 여전함을 암시한다. 일반인들은 범접할 수 없는, 접근하더라도 배격하기 일쑤인 그들만의 문화는 우리나라에도 있다. 그렇다면 거기엔 어떤 의미가 배어 있을까. 과시, 우월감, 쾌락, 비즈니스…. 앞서 말한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자신을 향한 칼날은 더 날카롭게 ◇패러다임에 갇힌 지성 28년간의 기자생활, 뉴욕특파원, 편집국장, 대기자…. 저자의 약력만으로도 이 책에 실려 있는 글들이 얼마나 탄탄하고 논리적인지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다 2004년에는 종군기자로 이라크 현장을 누볐다.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거쳐 대기자를 마지막으로 경향신문을 떠난 뒤 그동안 발표했던 칼럼과 미발표 글들을 모아 책으로 엮었다. 언론인으로서 사회 각 분야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지만 저자가 특히 관심을 기울이는 쪽은 국제정세와 국내 정치문제다. 현 정부를 공격하는 사람들의 논리를 반박함으로써 이따금 현 정부에 우호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하지만 무조건 감싸거나 대변인 노릇을 하는 것은 아니다. 잘못한 부분이 있으면 호되게 지적한다. 책의 맨 앞에 실린 ‘우파를 공격하는 좌파’라는 제목의 칼럼은 지금의 경제불황이 참여정부의 좌파적 정책 때문이라는 일부 학자들과 언론의 주장이 비논리적이고 허구임을 조목조목 증명한다. 이 책에는 저자의 진보적인 면이 짙게 배어 있다. 너도나도 ‘상생’을 말하는 현실에서 저자는 같은 상생이라도 ‘진보적 상생의 길’을 모색하고 있으며 미군과 관련된 문제를 언급할 때에는 매서운 면을 보여준다. 또한 자신이 언론인이면서도 언론개혁의 당위성을 누구보다 앞장서서 외친다. 한편 ‘글 쓰는 직업’을 이용해 하고 싶은 말을 함부로 내뱉는 것에 대해서는 철저히 경계한다. 저자는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고 사회의 균형을 추구하는 언론상을 원하고 있다. 28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언론인으로 있으면서 저자의 생각이 한결 같았다는 점도 평가할 만하다.
- BOOK
레이디경향(총 2 건 검색)
- [책 읽는 레이디] 여인·아내·어미·왕비···권력자로 살다간 명성황후
- 2020. 12. 03 11:23 문화/생활
- ‘한 권으로 읽는 실록’ 시리즈로 널리 알려진 대중역사가 박영규. 그가 기획부터 탈고까지 무려 8년의 산통 끝에 장편 역사소설 하나를 세상 밖으로 내놓았다. 열여섯 살에 왕비에 간택됐지만 이후 단 하루도 편할 날이 없던 명성황후를 주인공으로 한 ‘건청궁일기’(교유서가)로, 역사적 사실과 소설적 상상력을 잘 버무려 읽는 재미와 함께 역사에 대한 지적 흥미를 자극한다. 특히 작가는 일인칭 시점으로 명성황후의 일대기를 그리며 그의 삶을 대변한다. 명성황후에 고착돼 있는 편견을 흔들어 놓음으로써 명성황후를 거칠고 암울한 시대를 살다간 한 사람으로, 여인으로, 아내로, 어미로, 왕비로, 권력자로 다각화한다. “1908년 12월 26일 건청궁 해체공사 중 과거 왕비의 처소였던 곤녕합에서 신무문으로 이어지는 지하 통로가 발견된다. 그곳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백골의 시신 두 구가 나온다. 1895년 곤녕합에서 명성황후가 살해됐던 터라 혹여 그 시신이 왕비가 아닌지 의구심이 들지만 입증할 만한 그 어떤 증거도 찾지 못한다. 그러나 백골의 시신 중 궁녀 복장을 한 여인의 품에서 비단보자기에 싸인, 제목이 쓰여 있지 않은 책과 함께 그 주변에서 맹독이 들어 있는 호리병이 발견된다. 그들은 누구이기에 그곳에서 죽어 있던 것일까?” 이 책은 액자소설 형식으로 한국통감부 특임 학예관 호소카와 이치로가 유골의 주인을 찾기 위해 이토 통감의 명을 받고 비밀리에 조선 왕비 살해와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하는 과정을 그리면서 명성황후가 겪은 임오군란에서 을미사변까지의 일들을 왕비의 시점으로 촘촘히 엮어낸다. 그리하여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인식과 평가가 이루어지며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명성황후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림으로써 새로운 시각으로 그를 바라보게 한다.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과 무엇 때문에 정치적으로 대립했는지,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 왜 청국에 도움을 요청해야 했는지 등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 책 읽는 레이디
- 권력자들을 둘러싼 끝없는 스캔들의 유혹!
- 2005. 01. 01 재테크
- 권력과 섹스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당나라의 현종, 존 F. 케네디, 예카테리나 여제 등 권력을 이용해 섹스를 취해온 이들이 있는 반면, 에바 페론이나 양귀비처럼 섹스를 이용해 권력을 취해온 이들도 있다. 또 역사 속엔 사랑과 결혼을 위해 권력을 버린 사람들도 있다. 권력과 섹스가 만나면? 최근 발간된 「스캔들의 역사」는 부와 권력을 가졌던 이들의 감춰진 사생활과 섹스 스캔들을 통해 권력과 성의 상관관계를 새롭게 조망한다. 1 양귀비는 당나라 현종의 첩으로 환갑에 달한 황제가 한눈에 매혹된 여성이었다. 현종은 권력으로 성을 샀고, 양귀비는 성을 팔아 권력을 얻었다. 2·3·4 언론에 포착된 케네디와 재클린 부부의 모습은 케네디의 참모들에 의해 주도면밀하게 조작된 케네디의 젊음과 활력, 행복한 가정생활에 대한 이미지 중 하나였다. 5 케네디는 성인이 되고 난 후 아주 문란한 성생활을 했다. 그의 상대는 마릴린 먼로 같은 유명인부터 이름 모를 낯선 여자들까지 다양했다고 전해진다. 1·2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성적 매력을 이용하여 적들마저 굴복시켰고, 물려받은 왕국을 통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집트의 영광을 재현하려 했던 야심만만한 군주였다. 그녀는 담요에 숨어 카이사르의 숙소에 숨어들어가 하룻밤 사이에 카이사르와 연인 사이가 되었고 결국 프톨레마이오스와의 왕권 경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3 예카테리나 대제의 사생활에 관한 통속적인 이야기는 그녀의 위대한 업적을 훼손시키기 위한 음모로도 볼 수 있다. 사실 그녀만큼 ‘정상에 서면 외롭다’라는 금언이 어울리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4·5·6·7·8 에바 페론은 성을 이용하여 성공에 이른 20세기 가장 위대한 사업가였다. 9 찰스 스튜어트 파넬은 10년 가까이 내연의 관계를 지속해오던 캐서린 오세이 부인의 이혼이 확정된 후 정치적 생명을 잃었고, 그가 추구했던 아일랜드의 자치라는 정치적 이상도 연기되었다. 섹스를 위한 권력, 권력을 위한 섹스!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 당나라 현종과 그의 애첩 양귀비의 이야기는 권력과 섹스의 긴밀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양귀비는 원래 황제의 열여덟째 아들의 첩이었다. 어느 날 황제는 양귀비가 목욕하는 광경을 보고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료되고 만다. 언제나 황제를 기쁘게 해주려는 내시는 환갑에 달한 황제와 10대 소녀의 은밀한 만남을 주선했다. 황제는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졌고, 아들에게서 그녀를 빼앗아 자신의 첩으로 삼았다. 양귀비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조금 뚱뚱하긴 했으나 아름다웠고, 탁월한 이야기꾼이었으며, 사치스러웠다. 현종은 양귀비가 원하고 좋아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현종과 양귀비는 서로 깊이 사랑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물론 둘 사이가 항상 이상적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양귀비는 황제의 측근과 염문을 뿌렸으며, 현종의 동생과 오럴섹스를 하기도 했다. 이런 사실을 눈치 챈 황제는 그녀를 궁궐에서 쫓아냈으나 곧 용서해주고 만다.) 아마 당나라가 몰락하지 않았다면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는 영원히 계속되었을지 모른다. 변방의 장수인 안녹산이 군대를 이끌고 수도를 점령했을 때 현종은 자신이 양귀비를 빼앗아왔던 바로 그 아들에게 권좌를 넘겨줘야 할 상황에 처한다. 군사들의 반란에 직면한 황제는 양귀비에게 자결을 권할 수밖에 없었다.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양귀비는 변방으로 귀양살이를 떠나 생을 마쳤다고 하지만, 오래된 자료들을 보면 그녀는 궁궐에서 자살한 것으로 되어 있다. 현종은 그녀를 잃은 슬픔 때문에 식음을 전폐하고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섹스와 권력의 복잡하고도 역동적인 관계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현종이 그녀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한 것은 우선 그의 권력이었지만, 양귀비는 현종과 맺은 관계를 통해 권력에 접근할 수 있었다. 현종은 섹스를 위해 권력을 사용했고, 양귀비는 권력을 얻기 위해 섹스를 이용한 것이다. 미국 역대 대통령 중 최고의 바람둥이는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들의 스캔들 역사는 뿌리가 깊다. 43명의 미국 대통령 가운데 현재까지 바람을 피운 것으로 알려진 대통령은 존 F. 케네디를 포함해 최소 14명.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결혼하기 전날 절친한 친구의 아내 샐리 패어팩스와 바람을 피웠으며, 독립선언문을 만든 미국의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28세 연하의 흑인 노예 샐리 허밍스와 36년간 사랑을 나누었다. 제퍼슨이 처음 샐리와 관계를 가질 때 샐리의 나이 14세였다니, 우리나라로 따지면 원조교제 혐의까지 받아 사회에서 완전히 매장당했을지 모를 일이다. 뉴 프런티어의 기수 케네디 대통령은 말 그대로 ‘종마’였다. 케네디는 성인이 되고 나서 재클린과 결혼한 1953년 전후, 하원과 상원의원, 대통령 재임 시절을 막론하고 아주 문란한 성생활을 즐겼다. 여기저기서 이런 일을 문제 삼았지만, 위험한 일에 말려들 수 있다는 사실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케네디는 계속해서 여자에 탐닉했다. 케네디의 여인으로 거론된 이는 마릴린 먼로, 앤지 디킨슨, 제인 맨스필드 등 다수의 유명 여배우와 프리실라 웨이어, 질 코완 같은 백악관 스태프들을 비롯, 스트립 댄서 블레이즈 스테어, 악명 높은 마피아 샘 지아카나의 정부 주디스 엑스너 켐벨에 이르기까지 많다.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답게 모든 계층의 여성들을 다 ‘소화’해낸 케네디는 백악관에 입성한 역대 대통령 중 최고의 바람둥이로 손꼽히고 있다.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해 우리나라의 기미독립운동에 힘을 실어주었던 우드로 윌슨 대통령 또한 전형적인 바람둥이. 그는 신혼여행 와중에 바람을 피웠고, 그뒤로 두번째 부인 이디스를 맞이해서도 유부녀 메리 헐버트 팩과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했다.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루스벨트 대통령의 경우는 소아마비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집권 기간 동안 여러 여성들과 섹스 스캔들을 일으켜 화제를 모았다. 그는 아내의 비서부터 자신의 비서, 백악관의 사무요원들은 물론, 2차 세계대전 당시 백악관에서 기거했던 노르웨이 왕세자비까지 섭렵할 정도로 왕성한 정력을 자랑했다. 이밖에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자신의 여성 운전사와 뜨거운 사랑을 나눴으며, 빌 클린턴은 ‘지퍼 게이트’로 법정에 서는 수모를 겪었다. 대통령은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과 관련된 섹스 스캔들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권력 지향점의 끝에는 늘 섹스가 함께 했다. 팜므 파탈의 신화! 클레오파트라&예카테리나 여제 권력을 섹스의 도구이자 수단으로 삼은 예는 비단 남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제 등은 남성 권력자들과 마찬가지로 권력을 이용해 자신들만의 성생활을 즐겼다. 18세에 남동생과 함께 이집트의 공동 통치자가 된 클레오파트라. 그녀는 타고난 지도자이자 야심만만한 군주였다. 클레오파트라는 하룻밤 만에 카이사르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또 카이사르 암살 이후에는 안토니우스의 연인이 되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에게서 과거 식민지들을 되찾았고, 마침내 그와 결혼했지만 로마는 클레오파트라에게 빠져버린 안토니우스를 용납하지 않았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군대는 로마에서 보낸 옥타비아누스 군대에 대패했고, 두 사람은 결국 자살을 택하고 만다. 클레오파트라는 용모와 자태에서 드러나는 여성적 매력과 몇 개 국어를 자유로이 구사하는 외교 수완을 발휘,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 두 사람의 로마 영웅을 자유자재로 조종하여 격동기의 왕국을 능란하게 유지해나간 여왕이었다. 클레오파트라와 비슷한 경우로는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제를 들 수 있다. 1729년 5월 2일, 독일 왕자의 딸로 태어난 예카테리나 여제(원래 이름은 소피 프레데리케 아우구스테 폰 안할트-체르브스트). 14세에 러시아로 가서 예카테리나란 세례명을 받고 16세에 훗날 표트르 3세가 되는 카를 울리히와 결혼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정략 결혼이 그러하듯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표트르는 예카테리나에게 관심이 없었고, 예카테리나 역시 그런 표트르에게 애정을 가질 수 없었다. 명목상 황태자와 황태자비인 채로 두 사람은 각자 정부를 두고 18년간을 함께 살았다. 예카테리나가 낳은 세 아이도 모두 정부의 소생으로 아버지가 각각 달랐다. 예카테리나의 남편 표트르는 황제의 자질을 갖춘 인물이 아니었다. 1762년 왕위를 계승받긴 했지만 변덕스런 행동과 정치적 무능력 탓에 그 해 7월 9일 왕위에서 쫓겨나고 만다. 황실 경호대는 예카테리나를 여제로 추대했고 며칠 뒤에 표트르는 살해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남편의 시해를 사주했다고도 한다.) 이렇게 해서 외국 태생의 공주가 러시아의 최고 통치자가 된 것이다. 예카테리나 여제의 생애 후반기 동안 왕실과 외교 클럽에서는 그녀 주변의 젊고 매력적인 남자들에 관한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일각에선 그녀와 잠자리를 함께 한 남자가 족히 3백 명은 넘는다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잘 알려진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의 양 옆에는 섹스 파트너가 될 남자의 성적 능력을 시험해보기 위해 검사기 역할을 하는 여자 둘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녀의 기마호위병 장교였던 알렉산더 란스코이는 23세의 나이에 고열로 죽었는데, 정통한 소식통들은 그가 성욕을 촉진시키는 최음제를 과다 복용하고 ‘예카테리나와 섹스를 하던 중에 죽었다’고 주장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녀의 이런 생활이 그녀의 목숨과 통치 기간을 단축시킬 것이라고 추측했지만, 실제로 그녀는 34년간이나 통치했고 67세에 자연사했다. 그녀의 죽음은 수십 년 동안 외설적인 흥밋거리가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은 그녀의 죽음이 지나친 성행위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믿고 있다. 살해된 남편과 대조적으로 예카테리나는 빈틈없는 정치가였다. 비록 그녀의 통치에 대한 평가가 다르긴 하지만 어떤 기준에 따르더라도 그녀는 매우 강력하고 열정적인 지도자였다. 하지만 그녀가 여러 분야에서 이룬 업적들은 때때로 궁정의 젊은 남자들을 총애하던 그녀의 사생활에 가려져 잘 드러나지 않는다. 잠자리를 통해 정상에 오르다! 에바 페론 과거 권력을 가진 남자들이 섹스 대상을 얻는 데 그 힘을 이용했다면, 여자들은 권력에 접근하기 위한 도구로 섹스를 이용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에바 페론. 그녀는 잠자리를 통해 정상에 오른 대표적 사례로 손꼽힌다. 1919년 5월 7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작은 마을 로스 톨도스의 농장에서 요리사 미혼모가 여자아이를 낳았다. 아버지 이름은 후앙 두아르테. 농장주인 그는 죽을 때까지 그 아이뿐 아니라 아이의 세 언니 중 어느 한 명도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장례식에서도 거부당해야 했던 어린 소녀의 눈에 비친 ‘남성’은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소녀가 12세가 됐을 때 가족은 후닌이란 도시로 이사를 한다. 그곳에서 어머니는 한 정치인을 만났다. 이후 어머니를 ‘보살펴주기’ 시작한 그는 어머니와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하숙집을 장만해준다. 이것이 단순한 하숙집이 아니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많은 남자들은 ‘하숙집’을 통해 위안을 얻는다. 하지만 하숙집의 ‘소녀들’ 역시 투숙객을 통해 위안을 얻는다. 소녀의 세 언니들은 ‘하숙집’에서 묵고 간 장교, 변호사, 승강기 기사와 각각 결혼을 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소녀는 ‘남자와의 성관계를 통해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소녀에게 ‘남성’은 이제 중요한 수단으로 부각됐다. 10대 초반이었지만 ‘필요한 각종 기술’은 이미 익혀둔 상태. 그녀는 보다 높은 곳에 뜻을 두기 시작한다. 이후 ‘소녀를’ 거쳐간 사람들, 아니 ‘소녀가’ 거쳐간 사람들은 가수, 영화배우, 광고주, 사업가, 육군 대령 등 그녀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사람이면 모두 해당됐다. 소녀는 그들의 몸뚱이, 아니 자신의 몸뚱이를 돌다리 삼아 원하는 것을 하나씩 얻어냈다. 소녀는 상대를 고를 때 실패하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24세 때 ‘마지막 상대’를 만난다. 긴 여정 후에 도착한 ‘종착역’의 이름은 후앙 페론. 최고 권력자와 결혼한 소녀가 ‘에바 마리아 두아르테’에서 ‘에바 페론’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 것이다. 에바는 꾸준히 파트너를 디딤돌 삼아 정상에 올라섰다. 그녀에게 페론은 단지 마지막 상대였을 뿐이다. 페론이 에바에게 권력을 향한 길을 열어주었다면, 그녀는 노동자와 빈민들을 본능적으로 이해하여 그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페론 부부는 세계 역사상 가장 큰 권력을 지녔으면서 가장 논쟁의 여지가 많은 커플로 기억된다. 사랑과 권력의 제로섬 게임, 파넬과 오셰이 19세기 후반 아일랜드 민족자치운동의 기수 파넬은 영국 여성이며 자기 당원의 아내 캐서린 오셰이를 보자마자 반해버렸다. 당시 여러 차례 불륜을 저지른 남편과 별거하던 캐서린은 향후 5년 동안 파넬의 아이 셋을 나았다. 부인의 부정을 안 오셰이 대위는 파넬에게 정치적 보상과 돈을 보장받고 두 사람의 관계를 묵인한다. 거의 10년간 유지되던 이 관계는 돈 많은 캐서린의 숙모가 죽으면서 오셰이 대위에게 유산을 남겨주지 않자 그가 이혼 소송을 제기해 공론화되었다. 파넬과 캐서린이 침묵하는 가운데 자신을 철저하게 희생자로 몰아간 오셰이 대위는 결국 재판에서 승리한다.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이혼 소송은 가장 인기 있는 뉴스거리였고, 파넬은 가정파괴범으로 매도당했다. 이 사건은 일차적으로 가족과 도덕성에 관한 문제로 인식되었지만, 결국 파넬은 이 사건에 연루되면서 정치적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그는 사랑을 얻는 대신 권력을 잃었다. 기획·정리 / 최은영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자료 제공 / 「스캔들의 역사」(도서출판 이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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