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317 건 검색)
- 영월군, 빈집 새로 단장해 농촌유학생·귀농·귀촌인에 임대
- 2024. 11. 19 13:01 사회|지역
- .... 또 오는 12월부터 리로델링을 마친 옥동리와 마차리 집은 농촌유학생 주거지로, 운학리 집은 귀농·귀농인 주거지로 활용하기로 했다. 영월군 관계자는 “이번 사업은 농촌 지역에서 대두되는 빈집...
- 영월군귀농귀촌농촌유학빈집
- ‘30년 방치 폐건물’ 귀농·귀촌 시설로 조성
- 2024. 10. 21 21:22 경제
- ..., 2028년까지 3곳 계획 30년 넘게 방치된 충남 홍성 지역 폐건물들이 ‘귀농·귀촌 인구 유입 시설’로 탈바꿈한다. 홍성군은 내년부터 2028년까지 광천읍 상정리에 있는 폐아파트 등 3개 폐건축물을...
- 철거방치폐건물귀농귀촌인구미관
- 30년간 방치된 폐건물 ‘귀농·귀촌 인구 유입 시설’로 탈바꿈
- 2024. 10. 21 11:17 경제|사회|지역|라이프
- ... 충남 홍성 광천읍 상정리 폐건물. 충남 홍성군 제공 30년 넘게 방치된 충남 홍성지역 폐건물들이 ‘귀농·귀촌 인구 유입 시설’로 탈바꿈한다. 홍성군은 내년부터 2028년까지 광천읍 상정리에 있는...
- 철거방치폐건물귀농귀촌인구미관
- 귀농 비용 줄여줄 ‘징검다리’…‘농촌체류형 쉼터’ 도입한다
- 2024. 08. 01 20:03 경제
- ... 방안을 발표했다. 쉼터 도입은 일주일 중 4일은 도시에, 3일은 농촌에 각각 머무르는 ‘4도3촌’과 ‘귀농·귀촌’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추진하게 됐다고 농식품부는 설명했다. 쉼터는 규모와 활용도...
- 쉼터농촌체류형농촌농지농촌체류형쉼터
스포츠경향(총 26 건 검색)
- 한가인, 귀농 희망 “아이들 대학 보낸 후”(손 없는 날)
- 2023. 02. 28 10:42 연예
- JTBC ‘손 없는 날’ ‘손 없는 날’ 한가인이 트럭에 이어 트랙터 운전까지 접수하며 베테랑 운전 실력을 뽐낸다. JTBC 예능 ‘손 없는 날’은 결혼 후 분가, 인생 첫 독립, 가족의 증가와 축소 등 삶의 오르막과 내리막의 정점에서의 ‘이사’에 얽힌 현재 진행형 이야기를 담는다. 오늘(28일) 방송되는 13회에서는 시부모와 시간을 함께하기 위해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전남 영암으로 귀농하는 의뢰인 가족의 이주 이야기가 그려질 예정이다. 이날 한가인은 생애 첫 트랙터 운전에 도전장을 내민다. 최근 진행된 녹화에서 한가인은 신동엽과 함께 귀농을 앞둔 의뢰인의 가족이 운영하는 소 축사를 찾은 가운데, 트랙터 운전을 배우고 있는 의뢰인 남편을 보고 “저도 해볼 수 있어요?”라며 호기심 어린 눈빛을 반짝였다. 이어 트랙터에 올라탄 한가인은 승용차와는 또 다른 핸들 그립감에 한껏 들뜬 모습을 보였다. 이어 전진, 후진, 기어 넣기 등 트랙터 작동법을 단번에 이해하고 능수능란하게 해내는 베테랑 운전 실력으로 포스를 발산했다는 후문. 이날 한가인은 “아이들 다 키워 대학 보내고 나서 귀농하면 되게 호젓하고 좋을 것 같다”며 귀농 로망을 드러내기도. 이어 신동엽과 한가인은 평생의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귀농을 결심한 의뢰인의 사연을 듣고 귀농에 대한 솔직한 생각을 나눴다. 전국 각지 시민과 함께 하는 이사 버라이어티 JTBC ‘손 없는 날’은 오늘(28일) 오후 10시 30분에 13회가 방송된다.
- ‘국가부’ 귀농 김동완 “객석+무대 호흡 너무 그리웠다”
- 2022. 05. 26 22:34 연예
- TV CHOSUN 방송 캡처‘국가가 부른다’ 김동완이 객석과 무대가 그리웠다고 말했다. 26일 오후 방송된 TV CHOSUN ‘국가가 부른다’에서는 김동완, 현진영, 김현정, 천명훈, 간미연, 이성욱이 출격했다. 이날 이날 신화 김동완은 ‘I Pray 4 U’를 선곡해 여전한 아이돌 면모를 자랑했다. 베이비복스 비주얼 보컬 간미연은 ‘파파라치’로 시공간을 초월한 미모로 중독성 넘치는 노래를 선사했다. 부캐 예능인으로 활동 중인 NRG 천명훈은 ‘Hit Song’으로 90년대 감성을 폭발시키며 본캐 가수로 변신했다. 1년 치 관절을 모두 사용한 천명훈은 허리를 부여잡으며 “무리했어. 그러지 말았어야 해”라고 말해 웃음을 안겼다. 김현정은 ‘멍’으로 무대를 불태우며 고음 여전사다운 강렬한 고음으로 심장을 터트렸다. 댄스계의 시조새 R.ef 이성욱은 ‘이별공식’으로 그때 그 시절 추억을 선사했다. 현진영은 ‘흐린 기억 속의 그대’로 90년대 기억을 그대로 되살려 흥을 폭발시켰다. TV CHOSUN 방송 캡처그 시절로 돌아간 거 같다는 김동완에 붐은 “정말 모시고 싶었는데 귀농하시면서 서울에 안 나온다”라고 말했다. 그는 “1시간 50분 걸리더라. 자다 깨도 멀었다더라. 관객으로라도 구경하고 싶었다. 객석과 무대가 호흡하는 모습이 너무 그리웠다. 벌써 충전이 된다”라며 관객 호응을 유도했다. 6 대 8로 인원이 맞지 않자 김현정은 박장현을 꼽으며 “선배님들한테도 잘하고 무대에서 호흡도 좋고”라고 말해 그를 빠르게 움직이게 했다. 90년대 현물로 받은 행사가 많지 않냐는 물음에 간미연은 “황태를 그렇게 받았다”, 김현정은 “귤 축제에 가면 귤, 감자 축제가면 감자. 싹 다 트렁크에 받아왔다”라고 회상했다. 한편 TV CHOSUN 예능프로그램 ‘국가가 부른다’는 매주 목요일 오후 10시에 만나볼 수 있다.
- 국가가 부른다
- [종합] ‘와카남’ 안정환, 최용수 귀농 로망에 팩트 폭격
- 2021. 10. 27 08:41 연예
- TV CHOSUN 제공최용수와 이상준이 안방극장에 ‘웃음 보약’을 안겼다. 지난 26일 방송된 TV CHOSUN 가족 예능 ‘와이프 카드 쓰는 남자’(이하 ‘와카남’) 17회 방송에서는 최용수-전윤정 부부-안정환-홍현희의 ‘독수리네 민박’, 이상준-은가은의 ‘우리 진짜 결혼할 수 있을까’ 그리고 한의사 한창으로부터 듣는 ‘발 건강’에 대한 모든 것이 담겼다. 먼저 ‘와카남’ MC인 이휘재와 박명수, 그리고 최용수-이하정-홍현희-박슬기-이상준-은가은-김수영 등은 ‘오징어 게임’ 속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직접 해보며 발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켰다. 이어 장영란의 남편인 한의사 한창이 등장, ‘제 2의 심장’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발에 대해 설명하며 일일이 ‘와카남 패밀리’들의 발 상태를 체크했다. 한창은 박슬기는 심한 평발이어서 관절이나 무지외반증이 올 수 있고, 축구를 많이 한 최용수는 근육이 굳어 족저근막염을 겪을 수 있다고 진단했다. 홍현희는 잘못된 발톱 손질로 인해 내성발톱으로 번질 수 있다는 소견을, 개그맨 김수영은 운동을 하면 발이 3배 정도의 압력을 받게 되는데 과도한 몸무게 때문에 관절에 무리가 올 수 있으니 체중 감량을 하라는 처방을 받았다. 이어 한창은 몸의 균형을 알아보는 족저압 검사를 진행했고 박명수는 오른쪽과 뒤쪽으로 무게중심이 쏠린, 발가락이 전혀 찍혀 나오지 않은 족적 사진으로 웃음을 안겼다. 이하정은 힐을 많이 신은 탓에 몸이 앞으로 쏠려있어 발바닥 모양이 4개로 나뉜 사진을 받아들었고, 홍현희는 앞쪽으로 체중이 60%정도 쏠려있다는 말에 “입이 좀 나와서 그런가요”라고 물어 현장을 포복절도케 했다. ‘엑스레이 검사’ 진단에서 은가은은 허리 쪽이 과도하게 C자형을 이뤄 살찌면 배가 나올 수 있다며 코어운동을, 홍현희는 심한 거북목인 탓에 가슴 근육을 펴주는 운동을 하라는 조언을 받았다. 이하정은 발바닥에 비정상적인 뼈가 자라나면서, 족저근막염이 진행되고 있다고 전했다. 한창은 엑스레이 결과 가장 심각한 사람을 최용수로 꼽으며, 다리 길이가 심하게 차이나는 최용수에게 침을 놓은 후 근육을 풀어줬고, 그 결과 차이가 심했던 최용수의 양쪽 다리 길이가 같아지는 모습을 증명해 환호를 불러일으켰다. 이상준과 은가은은 지난 번 안 좋았던 사주 궁합을 극복하기 위해 직접 점쟁이를 찾아 궁합 투어에 나섰다. 점쟁이는 두 사람은 겉으로 안 맞아 보이지만 부부로는 잘 맞고, 성향이 바뀌어 이상준이 여자 성향, 은가은이 남자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음으로 두 사람은 관상 궁합에 도전했고, 관상전문가는 은가은은 순수하고 진솔하며 결혼을 하면 남편한테 헌신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밝혔다. 이상준은 부와 명예를 얻는 관상이지만 아직도 철이 안 들었고. 잔머리를 많이 쓰며 이성을 쫓아다니는 도화살이 있어 관상을 깎아먹는다는 혹평을 받았다. 결혼을 하냐는 이상준의 질문에 관상전문가는 이상준은 고릴라 상, 은가은은 어린 양이라며 이효리와 이상순의 관상 궁합과 같다면서 이상준이 은가은하고 잘되려면 따뜻한 마음으로 포용, 진실한 마음으로 대하라고 전했다. 이후 둘은 바다로 차박을 떠났고, 이상준이 2시간여에 걸친 요란법석 끝에 준비한 저녁 식사를 먹어본 은가은은 희한하게 맛있다며 어이없어했다. 궁합에 힘입어 이상준은 혼인신고서를 내밀었고 두 사람은 오묘한 기분으로 작성했다. 혼인신고서 작성 기념으로 이상준은 첫 차박에 대한 희망에 부풀어 차 안에 누웠지만 은가은은 주변을 정리하며 한심해하는 표정을 지어 웃음을 자아냈다. 최용수와 전윤정은 평소 귀농 생활을 꿈꿔온 최용수의 바람에 따라 어릴 적 향수가 느껴지는 150년 된 전통가옥을 빌려 ‘시골살이’ 체험에 나섰다. 최용수는 “당신과 함께 노후에 귀농해서 사는 게 로망이야”라며 전윤정을 부추겼지만, 전윤정은 “당신은 입만 떠들고 일은 내가 다 할 거잖아”라며 일침을 날려 폭소케 했다. 최용수는 홍현희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먼저 고구마를 수확한 세 사람은 저녁 요리를 위해 미꾸라지를 잡으러 출동했다. 제대로 걷기도 힘든 뻘에서 우왕좌왕했던 세 사람은 전윤정의 활약으로 푸짐한 양의 미꾸라지를 잡았지만, 최용수는 불을 제대로 피우지 못해 엄청난 양의 연기를 발생시켰다. 심지어 팔딱팔딱 뛰는 미꾸라지를 해감 해야 하는 혼란 속에서 꽃을 들고 나타난 ‘테리우스’ 안정환이 꽃다발을 전윤정에게 전달해 격한 환영을 받았다. 이내 심각한 사태를 감지한 안정환은 자진해 고무장갑을 끼면서 “밥만 먹으면 된다며? 그냥 사먹지 왜 미꾸라지를 잡냐”고 최용수를 향해 분노를 터트렸던 터. 이어 안정환은 “귀농이 꿈”이라는 최용수에게 “귀가나 일찍하세요!”라며 술 마시면 집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최용수의 행태를 폭로했다. 그러나 어느새 두 사람은 서로의 축구 실력을 치켜세웠고, 안정환은 투덜대면서도 요리사처럼 두 손을 걷어붙여 다음 회에 대한 기대감을 드리웠다. 한편 TV CHOSUN 예능 프로그램 ‘와이프 카드 쓰는 남자’는 매주 화요일 밤 10시에 방송된다.
- 예능
- 임현식 근황 “7년 전 급성 심근경색…귀농 17년차”
- 2021. 05. 14 17:43 연예
- TV 조선 ‘골든타임’배우 임현식의 근황이 공개된다. 14일 오후 7시 방송되는 TV CHOSUN 교양프로그램 ‘골든타임’에서는 배우 임현식이 출연해 17년차 귀농라이프를 공개한다. ‘국민 감초 배우’라는 수식어를 갖고 있는 임현식은 인기 드라마 ‘대장금’을 비롯해 다수의 드라마와 영화에서 개성 있는 감초 연기를 보여주며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아 왔다. 현재 2000평이 넘는 밭을 가꾸며 ‘42년째’ 행복한 전원생활을 이어오고 있다고. 임현식 사위들에 따르면 과거 농사일을 척척해내던 장인어른 임현식이 최근 심각한 체력 저하와 허리 통증을 느끼고 있다고. 임현식은 7년 전 급성 심근경색으로 스텐트 시술까지 받았고, 이후 둘째 딸 부부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어느 날부터 임현식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진 탓에, 농사일은 대부분 사위들의 몫이 되었다고. 이날 방송에서는 전화 한 통으로 사위들을 호출한 임현식이 직접 삽질을 하다가도 “아이고, 허리야~”라고 말하며 자연스럽게 사위들에게 삽을 넘기는 모습이 포착돼 웃음을 자아냈다. 사위들이 일하는 동안 임현식은 한편에서 노래 부르고 편히 쉬고 있어 스튜디오에서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임현식의 귀농 라이프뿐 아니라 그을 위한 ‘맞춤 건강 컨설팅’도 이어질 예정이다. 사위들은 임현식의 건강을 위해 카레 삼겹살과 채소볶음을 준비했고, 이에 임현식이 “채소볶음을 즐겨 먹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건강 컨설턴트들은 임현식의 식단에 문제가 있다고 말해 궁금증을 자아냈다. 건강 컨설턴트가 지적한 임현식 식단의 문제점과 해결법이 무엇인지와 노년기에 근육을 유지하고 면역력 강화에 도움을 주는 임현식을 위한 맞춤형 컨설팅이 공개될 예정이다. 방송은 14일 저녁 7시.
- 임현식
주간경향(총 4 건 검색)
- [렌즈로 본 세상]귀농 꿈을 담그는 사람들(2014. 03. 11 16:21)
- 2014. 03. 11 16:21 사회
- 겨울 끝자락 따뜻한 햇살이 산허리를 감싸는 날 귀농을 꿈꾸는 도시인들 몇몇이 강원도 홍천에 모였습니다. 오늘은 이들보다 먼저 주말이면 이곳에 내려와 귀농 준비를 하는 친구의 농막에서 된장 담그기 체험을 합니다. 몇 년 후에는 은퇴를 하는 이들에게 선배의 조언은 금과옥조입니다. 콩을 삶아 메주를 만드는 법부터 색깔 좋게 건조하는 방법, 잘 띄운 메주 구별하는 법 등등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새겨 듣습니다. 도시생활이 편리하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팍팍한 도시의 삶을 벗어나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려고 농촌을 찾습니다. 성공적인 귀농을 꿈꾼다면 은퇴 전부터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준비하는 게 어떨까요.
- 렌즈로 본 세상
- [사회]귀농인구는 뛰는데 정책은 엉금엉금(2011. 09. 07 11:55)
- 2011. 09. 07 11:55 사회
- ㆍ‘제2의 삶’ 희망자 크게 늘어… 홈스테이식 현장실습 지원해야 IMF 이후 생겨난 생계형 귀농과 2000년대 유행한 은퇴 귀농과 달리 최근에는 전문직 종사자, 대기업 및 관료 출신의 고학력자 귀농자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귀농자들의 연령대 또한 내려가고 있다. 농림수산식품부(이하 농식품부)가 올 4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귀농인구는 4067가구, 9732명으로 정부의 귀농정책사업이 본격 시행된 2009년 이후 꾸준히 증가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사업 시행 이전에도 귀농은 있었지만 그 숫자가 아주 미미한 수준이었다. 지난해 3월 경기 군포의 도시농부학교 실습장에서 실습생들이 거름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있다. / 정지윤 기자 농식품부 농어촌정책국 경영인력과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각 지자체에서 약 600억원의 귀농 관련 예산을 집행할 정도로 일반인의 관심이 컸다”며 “특히 농업기술 습득을 통해 생산 활동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60세 이하의 귀농인구가 상대적으로 높았다”고 밝혔다. 실제로 지난해 귀농인구 중 50대 35.8%, 40대 30.2%로 각각 조사돼 연령층이 점차 낮아지는 추세다. 귀농 관련 전문상담 인력 부족 농식품부는 은퇴 이후 다양한 삶의 가치 추구를 원하는 일반의 인식 전환과 정부의 귀농정책이 귀농인구 증가에 일조를 한 것으로 자체 평가했지만, 좀 더 안을 들여다보면 현실은 다르다. 농촌의 고령화 및 생산인력 부족, WTO와 FTA 발효로 인해 국내 농업 현실은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지만, 정부는 현실을 외면한 채 귀농정책으로 농촌의 문제점을 희석시키고 있다고 일부 단체는 지적한다. 각 지자체가 정부의 귀농정책사업의 주체가 되기 위해 귀농 관련 조례를 서둘러 마련하는 등 매년 사업신청을 하는 이유도 바로 농촌의 고령화 및 생산인력 부족 해소를 위해서다. 지난해 귀농한 4067가구가 농촌의 문제를 어느 정도 해소시킬지 두고 볼 일이다. 정부의 일관성 없는 정책도 도마에 올랐다. 현재 농촌진흥청에서 귀농귀촌 관련 상담사로 근무하는 김진국씨는 “정부의 귀농대책이 나온 직후 일반인의 관심이 부쩍 늘어난 반면 상담에 즉각 대응할 수 있는 인력이 태부족”이라며 “사업 시행 초창기만 하더라도 농식품부는 의욕적으로 귀농 전담인력을 따로 배치했지만, 장관 교체와 공무원 감원 등으로 지금은 경영인력과 직원 1명이 전국의 귀농 관련 정책을 담당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 농촌진흥원 내 귀농 전문 상담사는 김씨 혼자다. 고위직 공무원으로 은퇴한 김 씨가 올 상반기와 지난해 각각 상담했던 예비 귀농인만 수백명을 넘어선다. 이처럼 귀농 희망자가 꾸준히 늘고 있지만 현장 대응능력 차원에서 인력이 부족하다는 게 김씨의 주장이다. 농식품부가 귀농정책사업 시행 원년에 설치한 귀농귀촌종합센터 역시 실효성 측면에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현재 농협중앙회 직원 60여명이 센터를 관리·운영하고 있지만 하루 상담 희망자가 4~5명이 채 안 되는 실정이다. 상담내역도 귀농 관련 교육일정을 알려주는 수준에 그치고 있어 귀농 희망자에게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지역 귀농교육센터 희망자 넘쳐 정부의 귀농정책이 올해로 3년차에 접어들었다. 정부의 의욕적인 귀농대책이 사업시행 초기에 비해 다소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은 사실이지만, 귀농희망자의 열정은 오히려 더 뜨겁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사전준비 없이 귀농을 밀어붙일 수도 없는 상황이다. 생활환경의 전반적인 변화를 각오해야 되기 때문이다. 농촌진흥청 농촌환경자원과 최윤지 박사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겠다는 마음가짐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귀농에 있어서 현장 실습은 정착이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며 “귀농 현장 실습장 확대 등 교육환경 개선을 위한 정부의 예산 확보가 힘들다면 농촌에서 수개월간 머물며 직접 현장체험을 할 수 있는 홈스테이식 현장실습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최 박사는 또 임시 방편으로 편성되는 정부의 귀농 관련 추경예산을 사업의 영속성 측면에서 선행(실행)예산으로 확정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현재 각 지역의 농업기술원과 농업기술센터는 귀농교육센터를 별도 마련, 상담부터 교육·현장실습까지 원스톱 귀농정책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넘쳐나는 귀농교육 희망자로 인해 교육시간을 배로 늘리는 상황이다. 농협중앙회 귀농귀촌종합센터의 움직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농식품부와 농업인재개발원은 귀농희망자의 안정적인 정착을 위해 매년 공모과정을 통해 교육기관을 선정, 온라인 및 오프라인 귀농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현재 전국적으로 수십개가 넘는 귀농전문 교육기관이 정부의 귀농 관련 교육을 위탁하고 있으며, 향후 그 숫자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귀농 관련 교육을 3주 또는 100시간 이상 이수해야만 ‘귀농 창업지원 및 주택구입’ 등 정책지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프라인 교육기관은 실습형과 합숙형으로 구분된다. 실습형은 10시간 이상을 기본으로 하며 현장체험실습을 통한 귀농탐색 및 준비과정 위주의 과목으로 교육된다. 실습형 교육기관을 선택할 경우 과정별 차등 적용되는 총 교육비의 30%를 부담해야 한다. 합숙형은 3개월이 기본이며 귀농실행전 생산기술, 경영마인드 등이 주 교육내용이다. 2~3개월 교육의 자부담 비용은 각각 40만~50만원이다. 특히 온라인과 오프라인 교육기관 선택은 자유지만, 온라인을 선택할 경우 수료시간의 50%만 인정되기 때문에 100시간의 귀농 의무교육을 이수하기 위해선 200시간 이상의 온라인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김영욱 kyw68104@gmail.com
- [추석특집]귀농을 꿈꾸는 이들에게 좋은 곳(2008. 09. 10)
- 2008. 09. 10 사회
- 지자체 11곳 귀농자 조례 마련… 사업보조비 등 재정지원 혜택 귀농학교가 개최한 ‘농촌취업박람회’에서 참가자들이 표고버섯 재배 농가를 방문해 설명을 듣고 있다. 은퇴 후 귀농을 꿈꾸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2005년 10월 농어업·농어촌특별대책위원회가 도시민 3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도시민 중 56.1%가 농어촌으로 이주할 의향이 있다고 밝혀 귀농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것을 보여줬다. 하지만 정작 귀농을 실행하는 사람은 조사 결과에 비해 훨씬 적다. 불편함이 많기 때문이다. 귀농을 계획하는 이들은 귀농을 망설이게 하는 불편사항으로 ‘의료 시설 미비’ ‘교육 환경 열악’ ‘생활 편의 시설 부족’ 등을 꼽았다. 정부와 지자체는 농촌의 급격한 인구 감소와 고령화를 막기 위해 귀농을 계획하는 사람을 지원하는 제도와 여러 가지 혜택을 준비하고 있다. 또 귀농을 가로막는 불편사항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05년 정부는 농촌 생활환경과 교육·복지·문화 여건을 개선하는 ‘농림어업인 삶의 질 향상 5개년 기본계획’을 수립했다. 또한 전남 강진을 시작으로 지자체들은 ‘귀농자 지원 조례’를 마련해 귀농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제도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2008년 9월 현재, 귀농자 지원 조례를 마련한 곳은 전북 고창, 전남 곡성, 전남 나주, 전북 무주, 충남 부여, 전북 순창, 경북 영양, 전북 장수, 전남 화순, 제주도로 모두 11곳이다. 상주 등 4곳엔 귀농지원센터 귀농을 계획한다면 지자체가 조례를 마련한 곳을 우선 선택하는 것이 좋다. 11곳의 지자체가 마련한 귀농자 지원 조례는 강진의 사례를 참고한 것이어서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전국귀농운동본부 안동균 간사는 “조례에 따르면 귀농한 사람들은 연령에 관계없이 이사비와 집 수리비, 귀농 교육비 정도의 혜택을 받는다”면서 “재정적인 지원도 좋지만, 무엇보다 조례가 제정된 지자체의 공무원들이 귀농인에게 논스톱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혜택”이라고 설명했다. 귀농 후 농사를 전문적으로 하는 귀농인에게는 최고 3000만 원 한도에서 사업보조비도 받을 수 있다. 선배 귀농인이 설립한 ‘귀농지원센터’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귀농학교를 졸업하고 귀농한 후 귀농을 계획하는 이들을 위해 마련한 센터다. 2008년 9월 현재 경북 상주, 충남 홍성, 전북 완주, 충북 괴산 4곳에 설치되어 있다. 경북 상주에 있는 제1호 귀농지원센터는 귀농학교 출신의 이명학씨가 만든 곳으로 귀농을 계획한 이들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있다. 풀무학교, 풀무생협, 오리농법 등으로 널리 알려진 충남 홍성은 귀농 1번지로 유명하다. 이곳에 2호 귀농지원센터가 마련되어 있는데, 귀농학교 출신의 이환의씨가 맡고 있다. 전북 완주에는 부안에서 농사를 짓다가 완주로 이주한 송광섭씨가 3호 귀농지원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면 단위 동네에서 보기 힘든 ‘친환경 농산물 직판장’까지 갖추고 있다. 정기적인 귀농자 모임이 꾸준히 지속되는 대표적인 곳은 충북 괴산이다. 이곳에는 차광주씨가 운영하는 4호 귀농지원센터가 마련되어 있다. 괴산은 귀농자 모임이 군 전체를 관할하고 면 단위별로 연락책이 있을 정도로 귀농자 모임이 활발히 운영되는 지역이다. 귀농을 계획한다면 ‘귀농자 지원 조례’가 마련된 곳이나 귀농학교 출신의 귀농인이 운영하고 있는 귀농지원센터가 설치된 곳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귀농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으려면 전국귀농운동본부(02-2281-4611, www.refarm.org)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
- [라이프 테크]귀농생활에 ‘부가가치’를 높여라(2006. 10. 17)
- 2006. 10. 17 사회
- 웰빙사업 아이템 잘 고르면 도시보다 잘 살 수 있다 귀농박람회를 찾은 예비 농부들이 표고버섯 재배 농가를 방문해 설명을 듣고 있다. 귀농 얘기가 아니다. 자연이 마케팅의 중요한 모티브가 된 것은 이미 오래 전 이야기다. 도시를 떠나서 자연 마케팅을 할 수도 있고 도시 안에서 그럴 수도 있다. 유기농 야채상을 차리는 것, 설록 찻집을 하는 것, 아웃도어웨어 대리점을 차리는 일이 다 자연 마케팅의 도시 모드다. 시골에 가서 살면서 도시보다 2배 잘 사는 원리는 매우 간단하다. 첫째 시골은 생활비가 들지 않는다. 집이 있는 부부의 한 달 생활비가 60만 원이면 된다. 정말 아껴 쓰면 40만 원으로도 살 수 있다. 여기에 자녀 사교육비 정도가 추가된다고 보면 된다. 미국의 컨설팅회사 머서 휴먼리소스 컨설팅 조사 결과에 따르면 서울은 세계에서 모스크바에 이어 두 번째로 생활비가 많이 드는 곳이다. 뉴욕의 물가지수를 100으로 놓고 볼 때 모스크바가 123.9, 서울이 121.7이다. 굳이 이런 수치를 갖다 붙이지 않더라도 우리의 라이프 스타일을 스스로 생각해보면 도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소비 유혹 속에 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도시인의 라이프사이클을 보면 역시 소비와 함께 이어진다. 아이 둘 데리고 도시에서 살려면 한 달 생활비가 최소 250만 원이 든다. 그런데 60만 원이라니. 시골생활이 도시에 비해 2배 잘 살 수 있는 이유는 시골의 시계는 도시의 그것보다 훨씬 천천히 간다는 것 때문이다. 인생의 길이가 늘어나니 더 잘 살 수밖에. 시계가 천천히 간다는 것은, 하루 스물네 시간 대부분이 내가 계획한 그대로 갈 수 있다는 말이다. 길이 막혀 길바닥에 버리는 시간이 없으며 눈이 보이는 게 많지 않으므로 뇌의 용량도 널널해진다. 이것은 진실이다. 김성환씨는 지금 도시 생활의 2배, 3배가 넘는 시간을 소유하게 됐다. 요즘 시골에서 뜨는 사업들 귀농인구가 늘면서 펜션도 인기를 끌고 있다. 우리나라는 특이하게도 국민소득 3만 달러가 되기도 전에 웰빙 라이프를 선택한 경우다. 먹고살기도 만만치 않은 나라에서 웰빙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도시든 농어촌이든 산촌이든 웰빙과 관련된 사업이 트렌드요 돈벌이다. 웰빙 농산물 재배 상황버섯, 동충하초, 우리콩된장, 우리콩메주, 야생차, 특수달걀 등을 재배해 일정한 물류 거래선을 확보, 납품하는 사업이다. 최근에 화제가 됐던 장흥의 홍미는 60㎏ 한 가마니에 200만 원을 호가하고 있다. 그나마 추수하기도 전에 몽땅 팔려버렸다. 안화자 이성운 부부는 1992년 지리산 골짜기로 들어가 화엄사식 된장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유명 브랜드가 됐다. ‘만수동콩된장’은 본인은 물론 동네 사람의 삶까지 바꿔놓았으니 자연 비즈니스의 대단함을 보여준 케이스다. 그들의 성공비결은 간단했다. 좋은 스승(화엄사 지정암 이정 스님)을 만나 그의 된장 비법을 그대로 전수했으며, 원칙을 지키며 메주를 떴으며, 그 일을 자기끼리 하지 않고 현지인과 함께 함으로써 흙의 진실을 실천했다. 만수동 콩된장은 사업 초기부터 이미 그 마을의 중요한 수입원이 됐으며 지금은 콩된장은 물론 만소동콩간장, 만수동찹쌀고추장, 만수동전통장아찌, 깻잎, 콩잎, 무, 솔잎 엑기스 등 제품 다각화를 통해 부가가치를 높이고 있다. 그들에게 농업 개방이나 FTA는 사회적 시각 외 그 어떤 의미도 없는 일이다. 컨셉트 펜션 펜션이 변하고 있다. 초창기 숙박 위주의 형태에서 이제는 주제가 분명한 문화공간 개념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당연히 펜션 소비자의 욕구에 의한 일이다. 따라서 주제가 있는 펜션의 부가가치가 단순 숙박시설로서의 펜션보다 높아지는 것도 사실이다. 주말농장 스타일의 펜션, 항공스포츠와 연계된 펜션, 해양스포츠를 바로 앞에서 즐길 수 있는 펜션, 기막힌 돼지목살 바비큐를 제공하는 펜션, 앵무새를 분양하는 펜션 등등…. 이런 특화 펜션의 마케팅 핵심은 사회 동호인과 예비 동호인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서 취향을 모으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핵심은 비수기에 대비한 대체 수익구조의 창출이다. 펜션의 시즌은 봄에 시작되어 가을에 끝나고 꽤 긴 시간을 비수기로 지내야 한다. 그 기간을 대비한 마케팅을 펜션 사업자들이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비수기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의 궁극적 이유는 펜션을 오래 운영하기 위한 것이다. 귀농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그들의 말처럼 귀농은 철저한 공부가 우선되어야하며, 역시 발빠른 사람에 의해 귀농학교들이 운영되고 있다. 귀농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햄·소시지·베이컨 만들기, 옷 만들기, 묘목심기와 옮겨심기, 목조액 만들기, 산나물 공부, 생태뒷간 만들기, 양봉, 잠사, 흙집짓기 등등 농촌생활의 기본이 되는 전반적인 것과 귀농 정보 등이다. 귀농학교 홈페이지를 꼼꼼히 서핑하다 보면 귀농이 내게 맞는 일인지, 맞는다면 어떤 일이 자신있는지,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지 등등 감을 잡게 된다. 대표적인 귀농학교로는 전국귀농운동본부(www.refarm.org), 부산귀농학교(www.busanrefarm.org), 불교귀농이 컨셉트인 인드라망생명공동체(www.indramang.org) 등이 있다. 동호인 모임이나 카페 등에 가입해도 실질적인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다. 강원도 둔내 슈바르츠발트 펜션 김성환씨 “음악과 소리가 있는 쉼터로 특화 전략” 올해 49세인 김성환씨의 직장 경력은 대학을 졸업하고 4년 간 근무한 무역회사가 전부였다. 그는 도전적 사업가였다. 직장을 그만둔 그는 우리나라에 택배 개념이 처음 들어왔던 1990년대 초에 평택에 대리점을 만들어 운영했고 유럽전문 여행사를 창업해 해외를 떠돌기도 했다. 그가 펜션을 생각한 것은 2000년. 트렌드 사업만 좇던 그는 보다 오래 전개할 수 있는 사업을 생각했는데 공교롭게 그 새로운 아이템 역시 펜션이라는 트렌드였다. 그러나 그는 트렌트로서의 펜션을 장기 사업으로 구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강원도 둔내에 슈바르츠발트 펜션을 오픈한 지 4년, 그리고 앵무새 사육장을 만든지 1년… 아직은 수익보다 투자 비율이 크지만 2007년부터는 역전될 확실한 근거로 마련해뒀다. - 수익을 낼 확실한 근거라는 게 무엇인가요. “보이스 펜션으로서의 컨셉트가 완성됐고, 그에 따른 고객 안정화 작업도 어느 정도 정리됐습니다. 보이스 펜션이 조금 생소하겠습니다만, 음악캠프, 공연, 앵무새 사육이라는 세 가지 사업이 모두 ‘소리’라는 말로 집약될 수 있거든요.” -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음악캠프란 말 그대로 음악하는 사람의 캠프를 말하는 것입니다. 미국 콜로라도주 록키산맥에 아스펜 음악캠프가 있어요. 여기는 그저 음악가들이 비슷한 날에 이곳에 모여 음악을 얘기하고 서로 연주를 감상하고 또는 일상의 수다를 떨기도 하고 사랑에 빠진 후배를 격려하기도 하는 곳입니다. 지금은 아스펜 음악제에 10만 명이 참가하는 큰 도시가 되었습니다만… 저도 큰 딸이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있는데, 캠프를 가면 꼭 호텔에서 자고 스케줄에 맞춰 연습하고 합주하는 사이클을 갖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펜션 생각을 하면서, 이곳에 딸이 와서 자유롭게 연습하고 때로는 산책도 하고 근처 여행도 하면서 폭넓은 감성을 가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개인적인 일을 떠나 이 사업과 어떻게 연결됐나요. “저희 공연 담당 이사의 생각입니다만, 조용필씨가 공연 준비를 위한 워크숍을 열 때 답답한 서울의 스튜디오에서 하지 않고 이곳에 와서 며칠 주무시면서 음악을 맞춰보시고, 사색도 하시고, 골프 좋아하시니까 성우나 휘닉스파크에 가셔서 골프도 즐기고, 또 바다가 보고 싶으면 한 시간이면 도달하는 동해도 가고… 그야말로 음악 캠프가 되는 것입니다.” - 현재 그런 사례가 있나. “지금은 캠프보다는 공연에 치중하고 있지요. 백영규, 임지훈, 소리새, 와이키키브라더스, 신현대, 여행스케치 등 쟁쟁한 통기타 가수들이 공연을 했거나 일정이 확정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분은 이런 숲 공연을 통해 공연문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고 있고, 저희는 저희 펜션의 특화사업에 큰 도움이 되니 감사한 일이지요.” - 앵무새 사육장을 만든 이유는. “펜션을 만들고 지속적인 투자를 하다보니, 무언가 부가가치가 있는 부대사업이 필요하더라고요. 이왕이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로 했고, 그래서 앵무새를 생각했는데,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과학적인 앵무새 사육장을 만들었습니다. 앵무새는 원래 남방조거든요. 그래서 환경이 매주 중요합니다. 제대로 만들어놓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지요. 그리고 앵무새가 구관조이고, 애완견 대안으로 사업성도 좋다는 게 제 판단이었고, 그 생각이 옳았다는 게 확인되고 있습니다. 당연히 사업으로서의 가치도 좋을 것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 앵무새 사육을 통해 수익이 발생하고 있나요. 강원도 둔내 수바르츠발트 펜션의 앵무새. “2005년에 사육장을 만들어 건강하고 혈통 좋은 앵무새 20쌍을 들여왔습니다. 지금은 100여 마리로 늘었는데, 2007년부터 분양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얼마 전에는 전국 앵무새 동호인이 우리 펜션에서 엠티를 즐기셨는데, 그게 다 앵무새 덕이었습니다. 그분들도 굉장히 좋아하셨어요.” - 앵무새 분양가는. “천차만별입니다만, 우리는 50만 원에서 100만 원 사이에서 이뤄질 것이고, 소수이나마 5만 원 선 또는 100만 원 이상 하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 재원 조달은 어떻게 했나요. “사업체 정리한 동산과 부동산 등을 정리했고 모자라는 돈은 처남에게 지분투자를 받았습니다. 초기에 6억 투자했고 추가로 4억 정도 투자 중입니다.” - 앞으로 계획은 어떤 것이 있나요. “일단 슈바르츠발트 펜션을 음악과 소리가 있는 캠프로 잘 키워야지요. 그리고 제가 일구고 있는 일에 관심있는 분들을 모셔와서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지리산 야생녹차 농원 붓당골 김종열씨 부부 “아이들이 자연에서 더 많이 배워요” 붓당골은 경남 하동에 있는 야생녹차 농원이다. 이곳의 사장 김종열씨는 부산에서 치기공사로 직장생활을 하다 부모님이 계신 이곳으로 들어와 가업을 이어받아 성공의 길을 걷고 있는 자연인이다.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 그의 연봉은 2000만 원 조금 웃도는 정도였다. 그리고 그 연봉은 도시 생활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연봉은 전액 생활비로 소비됐으며 저축도 제대로 못하고 미래도 내다볼 수 없는 하루하루의 연속이었다. 그렇다고 도시 생활을 못 견뎌 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시간은 너무 빨리 흘러가고 있다. 적어도 김종열씨의 시간은 그랬다. - 부산에서의 생활은 어땠나요. “그냥 평범한 직장인, 애 아빠, 남편… 그랬습니다.” - 귀향의 시점을 결정하는 게 무슨 동기라도 있나. “없어요. 시간이 억수로 빨리 흘러가니까, 더 늦으면 안되겠다 싶은 초조함이 있었죠. 고향에 부모님이 야생차 농원을 하고 계셨지만, 제가 고향에 가서 부모님 그늘에서 살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가업을 이어받더라도 다시 공부도 해야 하고 준비할 것도 많으니까 시간이 많은 건 아니었거든요.” - 도시 생활을 접는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 “그럼요. 일단 여자는 농촌을 무서워합니다. 애들도 그렇고요. 아내가 처음에는 반대했어요. 애들 교육을 어떻게 시키겠냐고 걱정을 많이 했어요. 만만치 않았죠. 고향으로 돌아가서 5년 안에 성공하겠다는 청사진을 구체적으로 작성해서 설득한 끝에 3년 만에 허락을 받았어요.” - 지금은 어떤가요. “아내, 애들 모두 대만족입니다. 애들 교육이 중요한 일이지만, 시골 학교라고 도시에서 가르치는 것 생략하지 않고, 오히려 비오면 비 맞으며 뛰어 놀고, 눈 오면 좋아라 날뛰고, 사계절 뚜렷하게 느끼며, 개인적인 호기심들은 인터넷을 통해 얼마든지 검색할 수 있으니 뭐가 문제겠습니까. 저는 제 두 명의 공주님이 자기 인생 잘 꾸려나갈 것을 믿고 또 믿고 있습니다. 아내도 좋아해요. 제가 부족한 게 많은 사람인데, 영민한 아내가 잘 챙겨주고 격려하고 함께 계획세우며 잘 살고 있습니다.” - 붓당골 야생차는 어떤 것인가요. “하동은 녹차가 처음 재배된 곳이거든요. 시배지라고 합니다만, 아무튼 그 시배지에서 자란 어린 녹차잎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든 고급 녹차지요. 녹차도 있고 발효차, 엽차, 뽕잎차 등이 있어요.” - 판매는 어떤가요? 매출액을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김종열씨의 두 자녀가 농촌생활에 만족해하며 활짝 웃고 있다. “판매는 좋은 편입니다. 공판을 통해 판매하기도 하고 인터넷으로도 판매하고 이곳에 직접 와서 사가시는 분도 있지요. 매출액을 밝힐 수는 없지만, 잘 먹고 잘 살 만큼 주십니다.” - 민박 간판이 보이던데요. “관광객이 많은 지역이다보니 우리 차 판매도 할 겸, 자연친화적인 공간으로 손님이 편안하고 건강한 하룻밤을 보내라고 솔잎황토방민박을 열었습니다. 이런 데에서 자봤나요? 참 좋습니다. 밤이 내리면 산이 숨쉬는 소리가 들리고 어둠이 세상을 뒤덮는 기운을 느낄 수 있어요. 서울이나 대도시에서는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매일 그런 순간을 맞고 사니 참 행복한 거죠.” - 1년 사이클을 설명하면. “2~3월에는 고로쇠수액 채취합니다. 4~6월에는 녹차 수확하고 가공하고 판매하는 일에 매진합니다. 가장 중요하고 또 가장 좋은 돈벌이지요. 그리고 솔잎황토민박은 여름 피서철이 성수기예요. 손님 받는 일로 바쁜 여름을 보낸답니다. 그리고 9~10월에는 밤 수확하고, 차밭 관리해서 내년 농사 준비하고… 그렇게 지냅니다.” - 전원 생활, 귀농 또는 농업 진출을 생각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이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목가적 생활이라는 게 단어가 주는 꿈이 있지만, 맨땅에 발 딛고 산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허리 펼 시간도 별로 없고요. 가장 큰 어려움은 자립하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거예요. 짧아야 3년이고 보통 5년 넘게 고생해야 슬슬 무언가 잡히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전원에서의 사업에 대한 공부를 철저히 하고 난 다음 결심을 해도 해야 합니다.” 글/이영근〈객원기자·나비콘텐츠플래닝〉 blog.naver.com/ichek007 사진/안동수〈프로듀서〉·이영근
레이디경향(총 15 건 검색)
- [김진세의 행복 실천]김미화의 귀농, 자연에서 만끽하는 축제 한마당
- 2014. 09. 26 16:39 연예
- ‘집’은 행복을 담는 공간이다. 한때는 편리하고 화려한 도시의 아파트를 염원했지만, 요즘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살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정작 실천은 쉽지 않은 귀촌. 다행히 우리 곁에는 10년 넘게 귀촌을 실천하고 있는 순악질 여사 김미화가 있다. 그녀에게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노하우를 들어보았다. 서울에서 1시간 반가량 고속도를 달려 경기도 용인의 ‘카페 호미’에 도착했다. 정겨운 이름의 이 카페는 언뜻 봐서는 생뚱맞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주변에 집은커녕 논과 밭으로만 둘러싸인 국도변에 있는 것. 카페라면서, 다른 문화 시설이라곤 전혀 없는 외진 이곳에 어느 누가 오기나 할까? 의구심을 떨치지 못한 채, 한 발짝 들어서니 밀짚모자를 쓴 중년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김미화의 남편, 윤승호 성균관대 교수였다. 나보다 높은 연배임에도 건강한 체형에 밝은 인상이었다. 무슨 작업을 하고 있었던지 목장갑을 낀 윤 교수는 필자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근처 어디에 있을 겁니다. 아침에 인터뷰 있는 거 알고 있거든요.” 공기도 좋고 사람도 좋고 카페를 기웃거리다 한편에서 테이블과 의자를 열심히 정돈하고 있는 김미화를 발견했다. 5년 전쯤, 도심의 고층 빌딩에서 세련된 의상을 갖추고 만났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내심 촌부의 패션을 상상하기도 했지만, 기대와는 달리 캐주얼한 ‘젊은 아줌마’의 차림새였다. “아이고, 선생님! 반갑습니다.” 이전 인터뷰 뒤에도 공적인 자리에서 두어 번 얼굴을 마주하고, 트위터를 통해 늘 보아와서인지 낯설지 않았다. 세월이 바뀌었지만 예전의 친밀감과 배려는 여전했다. “운동요? 저 양반 운동 안 해요. 숨쉬기 운동 하나? 하하하.” 꾸준한 운동으로 다져진 듯한 윤 교수의 몸매를 칭찬하자, 그녀의 유머가 시작됐다. 그런데 이어지는 설명을 듣고 나니 남편의 잘록한 허리와 떡 벌어진 어깨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일 많이 해서 그런가? 하루 종일 일하고 살아요. 힘들 법도 할 텐데. 뭐, 좋아하는 일이니까 부지런히 하더라고요. 공기도 좋고, 음식도 좋고, 사람도 좋고…. 다시 보니 건강해 보이기는 하네요(웃음).” 여기저기 꽃과 나무를 가리키며 모두 부부의 손으로 직접 키운 것이라고 자랑했다. 잎사귀를 만지며 살펴보는 손길에서 농부의 기운이 느껴졌다. 농사를 지은 지는 2년, 그리고 카페 호미는 문을 연 지 1년이 됐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의 귀촌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동안 방송일 때문이라도 매일 서울까지 출퇴근해야 했는데, 그녀 말로는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고 한다. “의외로 가까워요. 여기서 강남까지 딱 1시간 걸려요. 목동까지 가면 1시간 30분? 새벽 일찍 출발하고 저녁 늦게 들어오면, 출퇴근 시간은 생각보다 많이 걸리지 않아요. 10년을 하면서도 전혀 힘들다고 느끼지 못했으니까요.” 왜 하필 용인에 자리를 잡았을까? 서울로 출퇴근이 가능한 가까운 지역이라는 이유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친정아버지 고향이 신갈이에요. 어려서 서울에 올라왔고, 또 일찍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그리움이 깊지요. 아버지만 그리운 것이 아니고 고향 마을에 대한 그리움이 컸어요. 그런데 신갈은 너무나 도시화돼 향수를 채울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는데, 그나마 이곳이 제가 기억하는 고향과 가장 비슷하더라고요.” 그녀의 눈에는 어릴 적 뛰어놀던 신갈과 가장 비슷한 곳이 이곳 목신리였다고 한다. 주민의 80% 이상이 여전히 농사를 짓고 있고, 그만큼 도시화가 덜 된 이곳에는 인심과 정이 넘쳐난다고 했다. “살다 보니 예전의 모습이 보이는 거예요. 아직 두레, 품앗이 같은 전통이 남아 있어요. 이전의 제 삶은 디지털화된 도시에서, 그것도 세련된 첨단의 방송인들과 함께했잖아요. 그런데 제 마음에서는 아날로그적인 감정이 떠나질 못했나 봐요. 그 시절에 대한 갈망 같은 것이 여기서 채워지더라고요. 행복하지요.” 하늘과 땅을 벗 삼아 마을 공동체 속에서 그녀는 행복을 느낀다고 했다. 물론 계산에 의해 움직이기도 하겠지만,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하늘과 땅을 벗 삼아 사는 농부들이어서 그런지, 베풀고 싶어 하고 자기의 이득보다는 남을 먼저 배려하는 마음씨를 갖고 있다고 했다. 그리 친하지 않은데도 맛있는 음식을 만들었으니 함께 먹자며 초대를 하거나, 식재료를 나눠주는 것은 물론이고, 산에서 캔 나물을 비닐봉투에 넣어서 아무 말 없이 마당에 툭 던져놓고 가기도 한다. “제가 사회복지를 공부한 이유가 이웃들과 함께하고 싶어서였거든요. 나중에 인기가 없어서 아무도 나를 몰라볼 때가 되면 남을 돕고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그때가 됐는데 남을 돕는 법을 몰라서는 안 되잖아요! 그런데 와서 함께 부대끼며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남을 돕는 법을 배우게 되더라고요. 마음속 깊숙이에서 감동하니까 자연스럽게 몸에 배 학습이 되는 거 같더라고요. (갑자기) 다연아! 엄마 못 봤어?” 사실 이번처럼 산만한 인터뷰는 처음이었다. 인터뷰 장소가 야외라서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왔고, 또 몇 번의 야외 인터뷰 경험이 있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번은 차원이 달랐다. 그녀가 유명한 개그맨이자 방송인이어서가 아니고 마음씨 좋고 친근감 있는 아줌마라서였다. 인터뷰 내내 ‘고구마 캐기’ 행사에 참가한 아이들과 가족들을 신경 쓰느라고 진행이 수월치 않았다. 아이들도 전혀 거리낌 없이 그녀에게 말을 걸고 안기곤 했다. 정신은 없었지만, 시골집 이모와 같은 그녀의 모습에서 가공하지 않은 순수한 행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문득 나도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싶어졌다. “일단 살아보고 결정하세요. 그런데 여기서 직접 지켜보니 은퇴하고 내려오는 분들 중에서 기껏해야 6개월이나 1년 정도 사는 둥 마는 둥 하고 돌아가시는 경우가 적지 않아요. 물론 동네 사람들이 배타적인 점도 없지는 않지만, 자신들이 적응을 잘하지 못해요.”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농사는 전쟁이라고 했다. 잡초와의 전쟁 말이다. 나이가 들면 힘도 없고 귀찮기도 한데다, 집을 지으면서 지나치게 푸른 초원을 강조하다 보니 그것을 온전히 지키려면 하루 종일 쪼그리고 앉아서 잡초를 솎아내야만 한다. 도시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노역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사실 시골에는 놀 만한 것이 없잖아요. 당연히 술자리가 잦아지지요. 적응하느라 마시고, 농사일 힘들어 마시고…. 그뿐만 아니라 물이 좋고 공기가 좋고 먹을거리가 풍부해서 안주마저 든든하니, 웬만큼 마셔도 취하질 않잖아요. 매일 말술을 먹게 되고, 결국 주독에 빠지는 거고요.” 물론 실패하는 경우도 있지만 적응을 잘해서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도 많다고 했다. 그녀는 특히 젊은 시절부터 귀촌을 시작해보기를 권했다. “도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차로 1시간 정도 되는 곳이라면 좋을 거 같아요. 우선 세를 얻어서 주말에만 살아보는 거예요. 하루 종일 온전히 자연과 벗해서 살다 보면 저절로 행복해지게 돼요.” 농사의 맛 프랑스에는 시골집 문화가 대중적이다. 아주 부유한 사람들이 아니어도 웬만한 사람들은 근교에 작은 정원이 딸린 집이 한 채씩은 있다. 주로 주말에 휴식을 취하기 위한 용도이고, 바캉스 시즌이면 노인들이 자식들 내외가 여행을 가면서 맡긴 손주들을 돌보는 곳이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주들의 방학 내내 함께 지내면서 공부도 봐주고 주변 여행도 하며 세대 간의 격차를 줄이는 역할을 한다. “들꽃 하나를 보더라도 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다양한 즐길거리가 있거든요. 꽃을 눌러 압화를 만들기도 하고, 술도 담가 먹을 수 있고, 요즘 유행인 효소 제조도 가능하잖아요. 처음에는 심심풀이로 하다가 취미가 되고 좀 더 파고들게 되면 전문가가 되는 거지요. 실제로 공방을 만들어 남들에게 가르쳐주기도 하고 작품을 판매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주말 귀촌 생활을 하면서 시골의 삶이 자신들에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 때 완전한 귀촌과 귀농을 생각해도 늦지 않다고 했다. 그러고 나면 먹고사는 문제와 아이들 학교 문제를 곰곰이 따져봐야 하는 단계에 이른다. “이곳에서 뭘 하면 먹고살 수 있을까, 하는 고민도 반드시 해봐야 하죠. 농사를 짓기로 마음먹었다고 해서 바로 논 사고 밭 사고 하지 말고요. 일단 남의 땅을 빌려서 해보는 거예요. 도지를 이용해 농사하는 맛을 보는 것도 괜찮고요. 제 생각에 학교는 오히려 시골이 더 나은 거 같아요. 어릴 적 올챙이 잡고 개나리 꺾으면서 배운 것이 더 소중한 거 아닌가요?” 현재 그녀도 임대한 논과 밭을 일구고 있다. 1천2백 평 땅을 빌려 동네 농부들에게 대신 경작을 부탁했다. 또 친환경 재배법으로 벼를 키우기 위해 우렁이 30만원어치를 사서 논에 풀었다. 이렇게 하나하나 만들어가는 것들이 무척이나 “재미지다”라고 했다. 마침 달걀 예닐곱 판을 들고 들어오는 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저 친구 보이시지요? 우리 카페에 방사유정란을 가져오는 친구거든요. 젊어서 시골에 내려오면 또 달리 보이나 봐요. 서른 중반쯤인데, 수입이 적잖은 거 같아요. 얼굴이 점점 좋아지고 있어요. 하하하.” 소통, 우리가 좋아하는 일 그녀의 카페 호미는 농부들과 도시민들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도시민들은 건강에 좋은 먹을거리를 원하고, 농부들은 정성으로 키운 좋은 농산물들을 제값 받고 팔길 원한다. 서로의 마음과 이해가 딱 맞아떨어지는 곳이 바로 카페 호미인 셈이다. “만약 돈을 벌고 싶었다면 강남 도심에 카페를 차렸겠지요. 보시다시피 여기는 논밭 한가운데에 컨테이너박스 4개로 만들었잖아요. 도시민들이 내려와주었으면 하는 마음과 이곳의 농민들을 돕고 싶은 마음, 이 두 가지 마음이 합쳐진 곳이에요. 일종의 직판장 같은 곳이지요. 처음 이곳을 열면서 동네분들 모셔다 잔치하면서 일종의 설명회 같은 것도 가졌어요. 여러분이 정성스럽게 키운 농작물을 원하는 값에 팔아보겠다고 말이에요.” 10년간의 시골 생활에서 변한 것은 없을까? 정말 아무 불편함 없이 즐겁기만 한 것일까? “글쎄요. 정말 불편한 것은 없는데… 기미? 주근깨? (한참 생각 끝에) 아! 도심에 못 나가는 사실 자체가 처음에는 불편함이었네요. 그런데 살다 보면 이곳이 더 재미있잖아요. 그래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점차 줄어들던데요. 또 있다면, 친구들 만나기가 좀 어렵다는 정도? 그렇지만 제가 여기 있는 걸 좋아하는 친구들도 많거든요. 저를 만나러 이곳에 와서 친구도 보고, 자연도 즐기고, 맛있는 커피도 마시고, 고구마도 캐고. 임도 보고 뽕도 따고 아니겠어요(웃음).” 그 10년이 정말 후딱 지나갔다고 했다. 특히 최근 2년 농사를 짓는 동안에는 더더욱 그랬다. 손에 흙을 묻히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니 세월 가는 줄 몰랐단다. 끝으로 귀농에 대한 관심이 많을 주부들을 위한 조언을 청했다. 볕 좋은 토요일 오전, 지난해 고구마 캐기 행사에 참가한 이후 친해진 한 주부의 추진으로 급작스럽게 열 가족의 체험단이 꾸려졌다. 소담스럽게 자란 고구마가 하나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수확되는 동안 아이들의 탄성과 함박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생각만 하면 아무것도 안 돼요. 실천을 해야 해요. 저도 시작할 때 무지 고민하고 떨었거든요. 하지만 남편과 우리가 좋아하는 일을 해보자고 결심했어요. 남편은 연주하고 문화예술인과 교류하는 것을 좋아하고, 저는 사회복지 마인드로 농부님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좋아하고. 이런 욕구를 충족시키려면 무엇인가 행동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으로 실천한 거지요. 돈만 좇으며 사는 것은 아닌 거 같아요. 사람들과 소통하고 함께 사는 것, 그게 진정한 행복 아닌가요?” 그녀는 정말 행복해 보였다. 비록 브라운관 속에서 활약하는 그녀를 보지 못하는 서운함은 있지만, 자연과 농부의 곁에서 더 빛나고 행복해 보였다. 카페 호미라는 공간을 통해 서로 소통하고, 정성스럽게 키운 작물을 나누고, 즐겁게 놀고 즐기는 일. 그녀에게 귀농은 축제와도 같았다. 그녀를 부러워하는 필자의 마음을 눈치 챘는지 그녀가 큰 소리로 말했다. “김 박사님도 전원주택이 꿈이라면서요? 언제 내려오실 거예요? 생각만 하시면 안 돼요. 행복은 실천이라면서요!” ‘행복 디렉터 김진세의 행복 실천’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세상 모든 질병이 행복을 갉아먹지만, 우울증만큼이나 깊은 불행의 늪으로 빠지게 하는 병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적절히 도움을 받으면 우울증은 완치돼 행복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울증 치료에 대한 오해와 편견으로 불행을 떨쳐내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이유로 불행의 병, 우울증에 당당히 맞서는 ‘행복 실천’을 다루어보고자 독자 여러분께 도움을 청합니다. 스스로 우울증이 있다고 생각되시는 본인 혹은 주변의 사연을 들려주세요. 애독자 엽서와 이메일(ladykh@khan.kr)로 10월 10일까지 연락처와 함께 보내시면 됩니다. 1 사연이 채택되신 분은 간단한 검사를 통해 우울증 평가를 받습니다. 2 전문의에 의해 우울증으로 진단된 3분은 현재 가장 효과적이라고 평가받고 있는 3종류의 우울증 치료를 받게 됩니다. 3 치료 전후 행복에 대해 인터뷰를 하게 됩니다. 4 진단과 인터뷰 종료시까지 치료에 관련된 비용 부담은 없으며, 치료가 진행되는 동안 참가 독자의 비밀은 보장됩니다. 5 사전 협의를 거쳐 노출 가능한 내용을 토대로 2014년 12월호 ‘행복 디렉터 김진세의 행복 실천’에 치료 과정과 결과를 공개합니다. profile 행복 디렉터 김진세 박사는… 여자보다 여자 마음을 더 잘 아는 여성 심리 전문가로 유명한 정신과 전문의. 고려제일정신건강의학과에서 일상의 스트레스에 지친 이들을 위한 상담을 하는 한편, ‘행복연구소 해피언스’를 통해 행복 찾기를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행복 멘토’라 불리고 있다. 본지에 2008년 1월호부터 3년간 ‘김진세의 인터뷰_ 긍정의 힘’을 진행했으며 2012년부터 2년간 ‘행복학 개론’을 통해 명사들의 행복법을 전해왔다. 「이코노믹 리뷰」 전문가 칼럼을 통해서도 그의 세심한 글을 만날 수 있다. 저서로는 「마흔의 심리학」(공저), 역서 「뜨겁게 사랑하거나 쿨하게 떠나거나」, 「심리학 초콜릿」, 「스타트 신드롬」, 「애티튜드」가 있다. 트위터 @happy_mentor <■기획 / 장회정기자 ■글 / 김진세 ■사진 / 김정원, 장회정>
- 김진세의 행복 실천
- [행복한 귀농일기]방 안에 들어앉은 호박
- 2012. 12. 11 16:11 화제
- 넉넉한 자태를 뽐내며 덩그러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누런 호박을 보고 있자니 영 남의 호박 같지만은 않다. 귀농, 귀향을 마음에만 두고 살던 독자들에게 햇살 한 줌, 바람 한 자락이 되어주던 오 변호사의 에세이가 이번 호로 끝을 맺는다. 봄이 오고 고운 새순이 돋을 무렵, 그의 사려 깊은 글이 몹시 그리워질 듯하다. (편집자 주) 자연의 시인 주로 법조인들이 보는 법률 신문이 있다. 법조계에 관련된 기사나 판례 등이 실린다. 이것도 신문인지라 사설, 칼럼이 있기는 하나 보통은 무미건조해 읽는 맛이 없다. 법을 다루는 신문의 특성이기도 하고, 평소 경직돼 부드럽지 못한 법조인의 사고 탓 때문이기도 하다. 읽지는 못하고, 그래서 차마 버리지도 못하는 신문들이 사무실 한쪽에 두껍게 먼지를 이고 쌓이는 때가 많다. 그런데 오늘 뜻밖에도 눈에 확 들어오는 칼럼을 만났다. 박철 변호사가 ‘자연에 대한 철학’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이다. 글은 설악산이 세계자연유산 등재에 실패한 이유를 적는 것으로 시작한다.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면 개발에 제약이 많아 재산가치가 떨어질 것이라는 생각에서 강원도 의회가 등재를 반대하고 주민들도 이에 동조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박 변호사는 현대의 자연철학에 대해, 인간이 뛰어난 능력으로 지구라는 한정된 자원을 너무 많이 이용하고 있다는 반성에서 출발하는데, 인간의 더 좋은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는 다른 종의 동식물들의 공간을 더 이상 빼앗지 않아야 한다는 새로운 윤리와 지구 그 자체에 대해서도 존경과 경외감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고 소개했다. 그는 갈라파고스 제도를 세계자연유산으로 보호하는 이유는 가급적 인간의 간섭 없이 오래 이어온 진화 과정이 자연 그대로 계속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했다. 박 변호사의 이 같은 생각은 내가 텃밭 농사를 지으면서 느낀 것과 거의 같다. 뽑아도뽑아도 계속 나오는 풀, 지렁이를 비롯한 땅속의 온갖 벌레, 수많은 발짐승과 날짐승, 그들은 인간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길 위기에 놓여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친다. 만일 인간이 그들을 귀찮게 여겨 농약, 제초제 등으로 박멸한다면 우선은 좋을지 모르지만 다양성의 토양을 잃은 인간도 언젠가 무기력하게 쓰러지고 말 것이다. 이처럼 다른 동식물들은 우리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야 할 대상이므로 인간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도 그들에게 미치는 피해는 최소화해야 한다. 시인 도종환은 ‘내 안의 시인’이라는 시에서 ‘제비꽃만 보아도 걸음을 멈추고 쪼그려 앉아 / 어쩔 줄 몰라 하며 손끝 살짝살짝 대보던 / 눈빛 여린 시인’이라고 표현했다. 여러분은 어떤가? 길에서 자라는 풀 한 포기를 바라보며 그것을 어루만지면서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느낄 수 있는 시인의 마음이 있는가? 난 텃밭 농사지만, 이를 통해 내 안에서 시인을 키우고 있다. 새벽에 간 밭에서 만나는 이슬 머금은 풀 한 포기, 거미줄 한 가닥도 내겐 벅찬 기쁨이다. 농부의 땅, 개발자의 땅 그런데 요즘 우리 밭은 난리가 났다. 전에도 말했지만 주변에서 택지 조성 공사가 한창이다. 원래 동쪽과 남쪽으로는 나지막한 산이 있고, 나머지 방향으로는 다른 사람들의 논밭이 있었는데, 이제는 사방이 다 황폐해졌다. 중장비를 동원해 순식간에 산을 깎고 논밭을 메웠다. 침입자들은 그 옆에 있는 밭주인인 할머니에게 땅을 팔라고 했으나 할머니는 거절했다. 할머니는 거의 매일같이 밭에 와 일을 했는데, 그것이 할머니에게는 커다란 낙이었다. 자식들 키우듯, 농작물을 키우는 것이 말년의 그녀에게는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즐거움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의 저항은 오래 가지 못했다. 택지를 만드는 사람들이 할머니의 밭 남쪽으로 4, 5m 되는 축대를 쌓은 것이다. 햇볕과 바람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데 어떻게 농사를 짓겠는가. 장인어른께 전해 들으니, 할머니는 그 축대를 보고 울었다고 한다. 어느 날부터 그 할머니의 밭도 흙으로 메워지고 있었다. 업자들은 장인어른께도 땅을 팔라고 했으나 장인어른은 거부했다. 그들은 경계를 분명히 한다며 측량을 새로 했는데, 내가 지은 생태뒷간이 있는 부분이 그들이 구입한 번지의 땅에 들어 있었다. 뒷간을 헐어야 했다. 뒷간을 부수는데, 지난 봄 비를 쫄딱 맞으며 산에서 솔가지를 꺾어와 지붕에 꽂던 생각이 떠오르며 마음이 울컥해졌다. 우리 땅이 아니니 당연히 비워줘야 하는데도 괜히 억울했다. 그나마 다른 곳에 터전이 있는 우리도 이럴진대, 마구잡이 개발로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긴 산과 밭의 동식물들의 비명과 절규는 어떠했을까? 업자들은 그런 것에는 전혀 아랑곳없이 이번에는 장인어른 밭의 동쪽과 남쪽을 따라서 높은 축대를 쌓았다. 이제 우리 밭에서 산을 바라볼 수 없게 됐다. 우리 밭은 인공물로 둘러싸인 섬이 돼버렸다. 앞으로 전원주택 같은 것들이 본격적으로 들어서기 시작하면 또 얼마나 시끄러울까? 장인어른은 언제까지 그곳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을까? 나는? 미소를 자아내는 누런 호박 뒷간을 허물기 전, 짙은 갈색으로 바뀐 솔가지 지붕 위로 자리를 잡은 누런 호박을 땄다. 한아름 됐다. 올 농사에서 멋은 이 호박이 다 부린 것 같다. 일찌감치 지붕 위로 올라가 뒷산과 하늘을 배경 삼아 덩치를 키우고 색깔을 바꾸며 농사철 내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렇게 내게 사랑을 받던 녀석은 지금은 우리 집 거실 그릇장 위에 올라가 있다. 밭에서와 마찬가지로 녀석은 우리 집에서도 최고의 장식품이다. 녀석을 바라볼 때마다 입가에 미소가 절로 떠오른다. 그 커다란 녀석의 몸 안에 있을 무수한 씨앗들을 생각하면 금방이라도 껍질을 뚫고 새 생명이 터져 나올 것 같다. 처음 그 호박을 집에 가져올 때 아이들에게 밭 뒷간 지붕에 있던 것이라고 하니, 호박에서 냄새라도 나는 것처럼 코를 잡고는 치우라고 했다. 아이들도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그 호박을 미소 지으며 바라볼 날이 올 것이다. 요즘 밭에는 무, 당근, 쪽파, 양파 같은 것들이 있다. 가을이 한창 깊어가도록 크기가 작아 언제 다 크나 싶던 무는 싸늘해지는 날씨에 맞춰 뒤늦게 무럭무럭 덩치를 키운다. 몸통의 절반 가까이가 땅 위로 솟아 있는데도 잘 자라는 것을 보면 신기하다. 당근은 늦게 심은 탓에 뿌리가 가느다랗다. 그래도 깨물어 먹으면 당근 특유의 향긋함이 그대로 느껴진다. 낼모레 아침에는 기온이 크게 떨어진다고 한다. 내일 아침 출근 전 일찍 밭에 가 무와 당근을 뽑을 예정이다. 때론 즐겁고, 때론 힘겹고, 때론 쫓겼던 한 해 농사가 이렇게 저물어간다. 이제 ‘행복한 귀농 일기’를 마치게 됐다. 그동안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매달 글을 쓰는 것이 쉽지 않았다. 변호사 일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탓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귀농 일기’란 표현이 실제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1백 평 정도의 텃밭 농사를 짓고 있을 뿐인데 ‘귀농’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 않은가? 이미 지난 2월호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편집자께서 내 직업을 ‘농부’라고 소개한 것도 부담스러웠다. 언젠가는 ‘농부’라고 불리는 것이 소원이지만, 아직 ‘농부’라고 말하기는 부끄러운 수준이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농업에만 전념하는 분들이 내 글을 어떻게 볼지도 두려웠다. 꾸미거나 숨기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내공 있는 농부의 눈에는 아기의 걸음마 정도로 보였을 것이다. 남 앞에 나를 드러내는 것은 자기 점검의 좋은 기회다. 1년 동안 이 지면에 글을 쓰면서 나는 왜 귀농하려고 하는지, 정말로 귀농할 수 있는지, 언제 귀농할 것인지를 끊임없이 살펴야 했다. 지금은 귀농에 대한 마음이 시작할 때보다는 한층 더 구체화됐다. 내가 10년간 한 검사를 그만두지 않고는 배겨낼 수 없었던 것처럼, 완전히 귀농하는 순간도 그렇게 다가오리라.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를 준 장회정 팀장님에게도 감사드린다. 필자 오원근은… 1996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10년간 검찰에 몸담았던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들은 뒤 돌연 사직서를 제출했다.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조직이 더 이상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이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변호사 겸 농부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농사일을 거들며 자연 속에서 느꼈던 행복을 되찾은 그는 지금도 농사 공부를 하며 마음 수련에 한창이다. <■글&사진 / 오원근(변호사·농부)>
- [행복한 귀농일기]살아 있음에 대한 확신
- 2012. 11. 06 17:39 화제
- 평소 오 변호사의 팬이 아닌 독자라도 이달은 이 칼럼을 꼭 눈여겨봤으면 좋겠다. 그 어떤 대단한 자기계발서보다 가치 있는 귀한 깨달음이 담긴 지상 강연으로 독자 여러분을 초대한다. (편집자 주) 오늘 청주 복대중학교에 강연을 다녀왔다. 가보니 나 말고도 교사, 경찰관, 소방관, 소설가, 기업인 등 강연할 사람들이 많이 와 있었다. 학생들에게 장래 희망 직업을 물어보고 숫자가 많이 나온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각각 섭외한 것이었다. 법조인을 선택한 학생들이 많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의외로 20여 명에 불과했다. 학생들에게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난 성장기에 굉장히 소심했다. 중학교 2학년 국어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나를 불러 일으켜 세우더니, 전날 텔레비전에서 본 ‘전설의 고향’ 줄거리를 이야기해보라고 하셨다. 평소 성적은 좋지만 지나치게 소극적인 내 성격을 한번 바꿔보려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난 한마디도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끝내는 선생님도 포기했다. 내가 그렇게 소심했던 것은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소작농으로 가난했고, 아버지의 술버릇 때문에 집안 분위기도 어둡고 우울했다. 어머니는 그런 속에서도 자식들을 가르치기 위해 오일장에서 곡물 노점을 하며 무던히 애를 쓰셨다. 그런 어머니에게 꼭 보답을 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공부에 매진했다. 고입 연합고사에서 충북 차석을 할 정도로 성적이 좋았지만, 정서적으로는 불안이 커져갔다. 정상적인 사회인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한 회의가 생겼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자율학습, 보충학습을 거부하고, 기말고사 때 전혀 공부를 하지 않고 시험을 봤다. 칼로 팔뚝에 자해를 하기도 했다. 3학년 때는 마음을 다잡고 공부를 했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해 지방 대학에 4년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대학에서도 방황을 하다가 군대를 다녀온 뒤 3학년에 복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사법시험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겨울방학 때 충남 조치원에 있는 한 고시원에 들어갔다. 열심히 공부했는데 한 달 정도 지나면서 정서적으로 어려움이 생겼다. 자꾸만 책 위로 어머니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고생하는 어머니에게 보상을 해야 한다는 강한 부담이 그렇게 나타난 것 같았다. 보다 본질적으로는 어릴 때부터 억압됐던 정서가 그런 식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일 게다.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스트레스가 무척 심했다. 심지어 하혈까지 할 정도였다. 다행히 어떤 분의 도움을 받았는데, 공부를 놓으면 더 불안하니 제대로 되지 않더라도 책을 놓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불안을 억누르려고 하지 말고 그냥 지켜보라고 했다. 정말 원하는 삶을 살자 어느 순간 산책을 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약 3개월간 매일 오후 5시면 어김없이 고시원에서 왕복 50분 걸리는 절까지 올라갔다 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단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그 산책이 내 불안한 정서를 달래주었다. 그렇게 규칙적으로 산책을 하면서 자연을 관찰하게 됐다. 한겨울을 나면서 바라본 나뭇가지들은 너무나 앙상하고 추워 보였다.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봄이 되면 당연히 싹이 나겠지만) ‘정말로 싹이 날까’ 하는 의심이 자꾸 들었다. 흘러가는 시간만큼 나의 의심도 그렇게 반복되며 흘러갔다. 봄이 왔다. 어느 날 죽은 것만 같았던 나뭇가지에서 연초록 새싹이 터져 나왔다. 3개월여 의심 끝에 그 나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한 난 무척이나 기뻤다. 내 얼굴이 환해졌다. ‘아, 나도 살 수 있겠구나, 변할 수 있겠구나’ 하는 분명한 믿음이 내 안에서 생겨났다. 살아 있음, 변화에 대한 강한 믿음. 그것은 내게 엄청난 깨달음이었다. 자꾸 움츠러들기만 했던 내 삶은 그때부터 확장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내가 부담을 느꼈던 책 위로 떠오르는 어머니는 실재하는 어머니가 아니라 내 강박관념이 만들어낸 거짓 어머니임을 깨닫고 그 어머니를 버렸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비롯한 다른 가족과의 인연에서 겪는 문제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임에도, 그 전에는 내가 그것을 다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은 하고, 안 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이렇게 마음을 정리하니, 책 위에서 어머니가 사라졌고 공부에 더 집중할 수 있었으며 대인관계도 한층 원만해졌다. 정서적으로 건강해지면서 사법시험에 자신 있게 합격하고, 아내와의 만남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이러한 자연스러운 삶의 태도가 2009년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셨을 때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검사 옷을 벗고 1백 일간 출가해 행자생활까지 하게 한 것 같다. 학생들에게 “학교, 부모, 책 등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 하기보다는 그것이 정말로 맞을까 하고 의심하면서 정말로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법조인도 그런 과정에서 선택해야 행복하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내가 법조인을 택한 것은 동기가 불순했다. 정말로 내가 원했다기보다는 어머니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시작한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을 키우는 방법 살아 있다는 것은 변화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도시에서는 이 변화를 제대로 경험할 수 없다. 콘크리트 건물, 아스팔트 도로도 모자라 학교 운동장까지 인조 잔디로 도배한다. 이렇게 획일적인 도시에서 어떻게 생명이 제대로 살아가겠는가. 어떤 때는 내가 정말로 살아 있는지 의심이 들 때도 있다. 등산 인구가 폭발적으로 느는 것도 자연과 함께하면서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려는 본능적인 욕구 때문은 아닐까?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농사는 정말로 제대로 사는 것이다. 무수한 변화를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살아 있음을 의심할 필요가 없을뿐더러 그럴 여유도 없다. 밭에 있는 작물들과 함께 변화해가니 말이다. 요즘 가을 들판은 점점 높아져가는 하늘과 반대로 무겁게 가라앉고 있다. 그런데 그 무거움은 부담스러운 무거움이 아니라 속이 여물어 꽉 채워져가는 흐뭇한 결실의 무거움이다. 싸늘해진 날씨 탓에 대기의 기운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데, 한여름의 들뜸이 정리되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지 않다. 오랜 기간 서리태 콩깍지의 안이 차지 않아 콩 농사 망치는 것 아닌가 걱정했는데, 어느 날부터 조금씩 굵어져가는 알이 만져졌다. 생태뒷간 화장실 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은 호박은 푸르게 무성했던 잎들과 노란 꽃이 사라진 뒤 홀로 남아 한결 짙어진 색깔로 연륜을 과시하면서 생명의 씨앗들을 속으로, 깊고 두텁게 보듬는다. 생태뒷간에서 만든 오줌 거름을 받은 무와 당근도 싱싱하게 자란다. 이른 새벽 자전거를 타고 밭에 다녀오면서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을 지날 때면 눈이, 아니 내 영혼이 황홀해진다. 새벽의 싸늘한 기운은 그 황홀함을 더욱더 절절하게 느끼게 만든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이 기가 막힌 아름다움. 이 아름다움을 정말로 내 것으로 간절하게 느낄 수만 있다면 속세에서 추구하는 돈, 명예, 권력이란 너무나도 하찮은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이렇게 흙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자연(생명)의 무궁무진한 변화를 제대로 경험하지 못하고 죽는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우리 밭에는 새로운 생명들도 자라나고 있다. 새로 심은 시금치, 쪽파, 아욱 등이다. 여름과 달리 금방 자라지는 않지만 흙을 뚫고 생명을 틔워낸 모습이 신기하기 그지없다.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밭에 갈 충분한 이유가 되고도 남는다. 어저께 새벽, 밭에서 파, 상추, 고들빼기, 양배추를 뜯어 내가 만든 의자에 나란히 올려놓고 사진을 찍어 카카오스토리에 올렸다. ‘아,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 ‘이른 아침에 아기자기~ 행복이 느껴지네요’ 등의 반응이 올라왔다. 부러워하지만 말자. 바로 내년부터 조그만 평수의 주말농장이라도 분양받아 시작해보시라. 흙을 만지고 땀을 흘린 만큼 행복도 커질 것이다. 스스로 살아 있음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필자 오원근은… 1996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10년간 검찰에 몸담았던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들은 뒤 돌연 사직서를 제출했다.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조직이 더 이상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이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변호사 겸 농부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농사일을 거들며 자연 속에서 느꼈던 행복을 되찾은 그는 지금도 농사 공부를 하며 마음 수련에 한창이다. <■글&사진 / 오원근(변호사·농부)>
- 행복한 귀농일기
- [행복한 귀농 일기]초보 도시 농부, 제대로 한 방 먹다
- 2012. 10. 15 16:35 화제
- 우려하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 강풍이 창문을 마구 뒤흔들던 그날, 태풍 볼라벤이 충청도를 지난다는 뉴스를 들으면서 문득 오 변호사네 밭 걱정을 했었는데 말이다. 찢겨진 비닐하우스를 보니 마음이 아프다. 어서 툭툭 털고 행복한 가을걷이를 하길 바라본다. 정성을 듬뿍 받고 자란 농작물이니만큼 회복도 빠르리라. (편집자 주) 올해는 지난봄에 지은 비닐하우스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작년엔 베어낸 참깨를 비를 피해 말릴 곳이 없어 세워놓은 채로 그 위에 비닐을 덮었는데, 그 비닐이 비바람에 날아가면 참깨가 비를 쫄딱 맞곤 했다. 그래서 바람이 심하게 불면 마음이 불안했다. 평일 낮에는 직장에 가야 하는 도시 농부라 주로 새벽에 밭에 가는데, 참깨를 털라치면 내려앉은 이슬 때문에 쉽지 않았다. 올해는 비닐하우스가 이 같은 고민을 말끔히 씻어주었다. 비닐하우스 안에서 참깨는 비나 이슬에 구애받지 않고 잘 마르고, 비가 오는 날에도 참깨를 털 수 있게 됐다. 갓 베어낸 참깨를 털다 보면 참깨뿐만 아니라 참깨에 붙어살던 기거나, 걷거나, 나는 온갖 벌레들이 다 떨어진다. 그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참깨는 우리 인간 외에도 뭇 생명들의 터전임을 실감한다. 어디 참깨뿐이랴. 이 지구상 어느 곳이라도 숱한 생명들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간다. 그 조화를 생각하니 참깨 열매를 헤집고 꿈틀거리는 그들의 생명력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비닐하우스는 농작물을 말리는 것 외에 창고 기능도 한다. 손쟁기를 비롯해 여러 농기구, 뒷간에서 쓰는 왕겨도 보관한다. 밭에서 뽑거나 벤 풀들도 그곳에서 말려 퇴비를 만들 때 사용한다. 비 오는 날 장인어른과 나무토막 같은 것에 걸터앉아 막걸리를 주고받을 때는 나름대로 운치 있는 주막이 되기도 한다. 태풍이 할퀸 상처 지난번에 다녀간 태풍 볼라벤이 비닐하우스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우리 비닐하우스는 자연성을 최대한 살린다고 쇠파이프가 아닌 대나무를 사용해 만들었고, 또 대나무와 대나무의 연결 부분을 짚으로 꼰 새끼로 묶었기 때문에 그리 튼튼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래도 대나무 뼈대 위로 비닐을 덮고 그 가장자리를 흙으로 두텁게 덮은 다음 다시 가장자리를 따라 말뚝을 박고 그 말뚝에 끈을 매어 하우스의 비닐을 고정시키는 방법으로 안전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동안 웬만한 바람에는 피해가 전혀 없었다. 그것이 나를 방심하게 만들었나 보다. 시간이 지나다 보니 말뚝에 매어 하우스의 비닐을 고정시키던 끈이 비, 바람, 햇볕에 삭아 끊어졌다. 태풍 볼라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끊어진 끈을 다시 매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으나 ‘이번에도 괜찮겠지’하는 안이한 마음에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사실 끈으로 다시 묶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길어야 20분이다. 태풍 볼라벤은 유독 바람이 셌다. 사무실 부근 건물에 붙어 있던 커다란 간판이 떨어질 정도였다. 집이나 사무실에서 태풍 소식을 들으면서 내 마음은 비닐하우스에 가 있었다. 과연 무사할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괜찮을 거야, 이제까지도 괜찮았는데 뭘’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했다. 태풍이 조금 가라앉은 틈을 타 밭으로 갔다. 근무시간 중이라 양복 차림이었다. 멀리서 우리 밭을 보는데 하우스의 비닐이 바람에 ‘힘차게’ 날리고 있었다. 설마 했는데, 그렇게 바람에 날리는 비닐을 보니 가슴 한쪽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그 하우스를 만들기 위해 대나무를 사고, 혼자서 낑낑대며 대나무를 휘어 새끼와 철사로 묶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런 노력들이 한순간에 무너져내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 ‘태풍이 오기 전 말뚝 끈이라도 묶어놓을 것을’ 하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가까이 가서 보니 상황은 더 심각했다. 대나무를 고정시켰던 철사나 새끼가 힘을 쓰지 못하고 풀리면서 대나무가 튀어나와 비닐을 사정없이 찢어놓았다. 출입문도 고정시켜놓았던 대나무와 분리돼 넘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와이셔츠에 장화를 신은 도시 농부의 입장에서 그 순간에는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막막했다. 마침 이웃 밭에서 양봉을 하는 아저씨가 지나가면서 “바람이 너무 강했어”라는 말로 어깨가 축 처진 나를 위로해주었다. 태풍이 물러간 지 한참이 지났어도 난 아직도 비닐하우스 피해를 제대로 손보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비닐이 찢어진 곳이 하우스 출입문 쪽이라 가운데 부분은 비가 새지 않아 우선은 사용이 가능하다. 앞으로 대나무를 굵은 철사로 보다 강하게 고정시키고 비닐도 새로 사 덮어야 할 것 같다. 아무튼 이번 태풍 볼라벤은 순진한 초보 농부에게 제대로 한 방 먹였다. 타격이 컸는지 아직도 얼얼하다. 다시 최고의 정원으로 지금 우리 밭은 비닐하우스가 찢어진 것뿐만 아니라 이웃 공사 현장에서 밀려온 토사의 피해도 입어 엉망진창이다. 밭 바로 옆에는 나지막한 산이 있었다. 현재 그곳에 전원주택지 등을 만들기 위해 토목 공사가 한창이다. 처음 벌채만 했을 때는 나도 베어놓은 나무를 가져와 뒷간을 짓는 덕을 입었다. 그런데 흙을 파내는 토목 공사가 본격화되면서 조용하던 우리 밭의 평화가 깨지기 시작했다. 분주하게 오가는 대형 중장비들은 온종일 소음과 먼지를 일으켰다. 산에서 나온 흙으로 주변 농경지를 메웠는데, 비만 오면 그 흙들이 농로로 밀려나와 진흙탕을 만들었다. 전에는 밭에 가면 고요함 속에서 흙 밟는 소리, 김매는 소리를 느끼며 마음이 평안해지는 경험을 하곤 했는데 이젠 그것이 쉽지 않다. 농사가 주는 즐거움이 반감됐다. 그러던 중 더 큰 문제가 생겼다. 공사 현장에서 배수구가 막힌 것을 그대로 방치해놓아 큰비가 왔을 때 출구를 찾지 못한 그곳의 토사가 우리 밭으로 밀려든 것이다. 그 흙들은 내가 공들여 키운 고추, 고구마, 콩 밭의 고랑을 다 메웠다. 이제 우리 밭은 이랑(두둑)과 고랑(이랑과 이랑 사이의 낮은 부분)이 없이 평평하게 되어버렸다. 농작물은 바람이 잘 통하고 물이 잘 빠져야 한다. 고랑과 이랑이 그 역할을 하는데, 이제 우리 밭은 당분간 그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됐다. 난 그동안 밭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만들기 위해 흙 위로 비닐을 덮지 않았고 짚이나 새끼를 이용함으로써 비닐 끈 사용도 최대한 자제해왔다. 밭고랑은 수시로 손쟁기질을 해 풀을 매는 것은 물론 밭 모양을 예쁘게 잡아왔다. 생태뒷간의 지붕을 솔가지로 덮고 그 위로 호박을 올렸다. 그렇게 가꾼 우리 밭은 내 딴에는 최고로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그 때문에 밭에 갈 때마다 흐뭇한 마음이 들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태풍과 토사 피해를 입고 난 지금은 농사를 짓고자 하는 마음이 많이 가라앉았다. 참깨를 심었던 곳에 무와 당근 씨를 뿌려 싹이 나오고 있지만 왠지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최근에 입은 상처가 크긴 큰 모양이다. 오늘은 장인어른 밭에 가서 고구마를 몇 개 캤다. 그곳은 토사 피해 없이 이랑과 고랑을 잘 유지해 비 온 직후임에도 흙에 물기가 많지 않았다. 흙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빨간색 고구마가 무척 예뻤다. 우리 고구마는 장인어른 것보다 늦게 심어 아직 캘 때가 되지는 않았지만 얼마나 자랐는지 궁금했다. 고구마를 캐려고 어미 줄기를 찾으려고 했으나 밀려온 토사가 다른 줄기들까지 다 덮어 제대로 찾을 수 없었다. 간신히 하나 찾았는데 흙에 물기가 듬뿍해 끈적거렸다. 캐낸 고구마는 진흙이 잔뜩 묻어 본래의 색깔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올 농사는 고구마, 콩을 거둔 다음 새로 밭을 제대로 만들어 마늘과 양파를 심을 때가 되어야 기운이 날 것 같다. 필자 오원근은… 1996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10년간 검찰에 몸담았던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들은 뒤 돌연 사직서를 제출했다.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조직이 더 이상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이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변호사 겸 농부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농사일을 거들며 자연 속에서 느꼈던 행복을 되찾은 그는 지금도 농사 공부를 하며 마음 수련에 한창이다. <■글&사진 / 오원근(변호사·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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