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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총 207 건 검색)

여 “김영삼 정신 따라 혁신” 야 “권력에 저항의지 새길 것”…YS 9주기 추모식
2024. 11. 22 15:04 정치|정치
... 말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추모사에서 자신이 강조해온 ‘국민 눈높이에 맞는 혁신’을 ‘김영삼 정신’과 연결지었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힘차게...
김영삼 전 대통령 장남 김은철씨 별세
2024. 08. 07 20:04 정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장남인 김은철씨가 7일 사망했다. 향년 68세. 경찰에 따르면 김씨는 이날 오전 서울 동작구의 김 전 대통령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이 집에 상주하는 주방장이 이날 오전 6시40분쯤...
김영삼김은철장남별세
김영삼 전 대통령 장남 김은철씨 YS 집에서 숨진 채 발견···경찰 “지병 악화”
2024. 08. 07 10:57 정치
... 이사장(오른쪽 세 번째)이 참석해 있다. 연합뉴스 평소 건강 좋지 않아…향년 68세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장남인 김은철씨가 7일 별세했다. 향년 68세. 경찰에 따르면 김씨는 이날 오전 서울 동작구의 김...
김영삼김은철장남별세
김일성 “핵무기 만들 돈 없다” 김영삼 “거짓말”···1차 북핵위기 협상 담긴 외교문서 해제
2024. 03. 29 14:48 정치
... 해 10월 북한을 방문했던 개리 애커먼 미국 하원 외무위원회 동아시아태평양 소위원장은 방북 후 한국에서 김영삼 당시 대통령을 만나 이 같은 내용을 전했다. 이를 전해 들은 김 대통령은 “전적으로...
외교문서북한핵무기해제알권리북한1차핵위기김일성김영삼옐친

스포츠경향(총 54 건 검색)

김영삼 “수업료 1500만원”…사랑니 발치 ‘월클’ 인증(아는형님)
2023. 07. 23 09:05 연예
JTBC 예능 프로그램 ‘아는형님’ 방송화면 개그맨으로도 맹활약했던 치과의사 김영삼이 남다른 근황을 알렸다. 사랑니형 김영삼은 22일 방송된 JTBC 예능 프로그램 ‘아는형님’ 393회에 출연해 의사 3인방으로 꽈추형 홍성우, 탈모형 한상보형과 함께 입담을 펼쳤다. 이날 방송에서 ‘아는형님’ 교실에 등장한 김영삼을 보고 이수근은 반가움을 표했다. 김영삼은 2001년 KBS 개그맨 콘테스트 16기로 데뷔해 개그 프로그램 등에서 활약했다. 이수근보다 선배였던 김영삼은 “선배인데 시험을 같이 봤다. 나만 붙고 수근이는 떨어졌다”고 말했다. 이수근은 “김영삼의 개그가 아직도 기억난다. 의사 가운 입고 나와 ‘못 말리는 개그’라면서 못을 드라이기로 말렸다”고 회상했다. 이를 들은 멤버들은 “의사라서 (시험에)붙은 것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다. 김영삼은 사랑니 전문 치과의사를 선택한 이유도 내놨다. 사랑니 치료 진료비가 저렴하다보니 사랑니 전문 치과의사가 많이 없었다고. 그는 “치대생들은 학교 다닐 때 선배들에게 실습용으로 (사랑니를)뽑힌다”며 “하나 뽑는데 2시간이 걸렸고 너무 아파서 이틀 동안 울었다”고 했다. 김영삼 또한 실습 상대를 택해야 했는데 주변 개그맨들이 그의 눈에 띄었다고 한다. 그는 “수평 사랑니는 개그맨 김인석의 사랑니를 뽑았다”며 “개그우먼 김지혜도 내가 사랑니를 뽑아줬다. 생각보다 잘 뽑혀서 서로 놀랬다”고 했다. 김영삼은 해외 강연 등 잦은 출장으로 인해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는 근황도 공개했다. 그는 “나는 거의 1년 반은 해외에서 사랑니 강의를 하고 반은 진료를 하며 보내고 있다”며 “비행기만 한 해에 한 달 정도 탄다”고 했다. 김영삼은 자신의 비싼 강연료를 공개하기도 했다. 그는 “강의가 비싸다. 한 사람당 100~200만원, 많게는 1500만원을 수강료로 내야 들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강호동은 ‘사랑니 발치 분야 월드클래스’라며 김영삼을 추켜세웠다.
세금 75억 들어간 김영삼 도서관, 간부가 40억원 횡령
2016. 07. 19 08:32 생활
김영삼 도서관 공사비 일부를 사단법인 ‘김영삼 민주센터’ 간부가 가로챘다는 고발장이 접수돼 경찰이 18일 김영삼 민주센터 사무국장 ㄱ씨의 자택과 사무실을 18일 압수수색했다. 경찰은 사무국장 ㄱ씨가 공사비를 부풀리는 수법으로 40억원을 횡령한 정황을 포착했다. 특히 도서관 건립 비용 265억원 중 75억원이 세금으로 충당되는 것으로 알려져 공분을 사고 있다. 서울 동작구 상도동 ‘김영삼 대통령 기념도서관’ 앞을 한 시민이 걸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김영삼 도서관은 김 전 대통령이 살던 서울 동작구 상도동에 건립되며 2013년 완공을 목표로 했지만 계속 미뤄져 왔다. #김영삼 도서관 #공사비 일부 횡령
김영삼 도서관국정교과서 철회
김영삼 전 대통령 묘비 제막식 거행
2016. 05. 26 17:26 생활
김영삼 전 대통령(YS)의 묘비 제막식이 26일 오후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서 거행됐다. 묘비 제막식은 지난해 11월 서거한 김 전 대통령의 장례의 마지막 절차로, 묘비는 관련 규정에 따라 2개가 만들어져 묘소 좌우에 세워졌다. 고 김영삼 전 대통령 묘비 제막식이 26일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리고 있다. |강윤중 기자 왼쪽에 세워진 ‘김영삼 민주주의 기념비’에는 앞면에 “닭의 목을 비틀지라도 민주주의의 새벽은 오고 있습니다”, “나는 잠시 살기 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지 않고, 잠시 죽는 것 같지만 영원히 살 길을 선택할 것 입니다” 등 김 전 대통령의 생전 어록이, 오른쪽 묘비에는 ‘대통령 김영삼의 묘’라는 글귀와 약력, 가족사항이 새겨졌다. 또 기념비의 두 측면에는 김 전 대통령이 직접 쓴 ‘民主主義(민주주의)’와 ‘大道無門(대도무문)’ 휘호가 적혔고, 뒷면에는 김정남 전 대통령 교육문화수석비서관이 작성하고 서예가 신두영이 쓴 추모글도 담겼다. 정부 주관으로 열린 제막식에는 차남 현철씨를 비롯한 유족과 정·관계 인사 500여 명이 참석했다. 김수한 전 국회의장, 정의화 국회의장,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대위 대표, 국민의당 안철수 상임공동대표 등이 26일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故 김영삼 전 대통령 묘비 제막식에서 묘비를 바라보고 있다. |강윤중 기자 이날 제막식에는 아내 손명순 여사, 장손 성민씨 등 유족과 정의화 국회의장,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국민의당 안철수 상임공동대표, 현기환 청와대 정무수석, 홍윤식 행정자치부 장관, 박희태·박관용 전 의장 등 정·관계 인사 500여명이 참석했다. YS 측근 그룹인 ‘상도동계’에서는 새누리당 김무성 전 대표와 서청원 이인제 전 최고위원, 김수한 전 국회의장, 김덕룡 민주화 추진협의회 이사장, 최형우 전 내무부장관, 김봉조 민주동지회 회장, 이원종 전 청와대 정무수석 등이 참석했다.
우에노 주리김영삼신동엽이성경ys묘비 제막식
김영삼, 바둑학원 개설…부인 현미진 프로도 선생님 합류
2016. 05. 02 18:24 생활
‘바둑 대통령’ 김영삼 9단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바둑학원을 개설해 눈길을 끈다. “어린이 위주의 바둑학원이지만 여성과 성인 등도 수강할 수 있다”고 밝힌 김9단은 “현미진 5단과 함께 입문반부터 고급반까지 다양한 과정을 개설해 운영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김영삼 바둑학원의 개업식은 3일 오후 6시 열린다. 1993년 제67회 입단대회를 통해 ‘수졸’이 된 김영삼 9단은 2011년 ‘입신’에 올랐다. 1997년 제1기 SK가스배 신예프로10걸전에서 준우승한 김9단은 2000년 제1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에 한국 대표선수로 출전해 중국의 뤄시허 9단을 꺾으며 한국팀 우승에 일조했다. 2004년에는 현미진 5단과 가정을 꾸려 국내 첫 프로기사 부부로 화제를 모았고, 현재 부부 모두 감독으로 활약 중이다. 김9단은 2011년 ‘영남일보’ 감독으로 KB국민은행 바둑리그 감독에 데뷔했으며 2012년부터 올시즌까지 5년째 ‘정관장 황진단’ 감독을 맡아 팀을 이끌고 있다. 현미진 5단은 지난해부터 MDM 한국여자바둑리그 ‘인제 하늘내린’의 감독직을 맡고 있다.
바둑

주간경향(총 2 건 검색)

[광복 70년 역사르포](26)상도동 김영삼 전 대통령 사저… 군정을 종식시키고 문민시대를 열다(2015. 09. 01 16:49)
2015. 09. 01 16:49 사회
1992년 12월 20일 서울 동작구 상도동. 꽹과리와 장구 소리가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적막한 새벽을 깨웠다. 상도동 마을 주민들이 김영삼 대통령(YS) 당선을 축하하러 온 것이다. YS는 주민들에게 휩싸여 집 아래 마을 놀이터까지 내려왔다. 그리고 ‘우리의 대통령 김영삼 만세’라는 급히 만든 피켓을 든 주민들과 격의없는 축하잔치를 벌였다. 당시 그 현장에 있던 기자는 ‘현직이 아닌 대통령 당선자 신분이지만 저렇게 경찰이 경호를 하지 않아도 되는가?’라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로부터 23년이 지난 지금, 마을 잔치가 벌어졌던 상도동 그 놀이터에는 경찰 캠프가 들어서 있다. 그리고 상도동 골목 처음과 끝에도 경찰 초소가 있다. 이곳을 경비하던 경찰은 “사진촬영을 할 수 없다”며 제지한다. 아마 집에 있는 YS의 건강이 매우 좋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시 동작구 상도동. 요즘 도로명 주소로 매봉로 2가길 11. 흰색 바탕의 문패에는 한자 이름 ‘김영삼’이 선명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상도동 사저는 가택연금과 단식 등을 통해 문민시대를 연 현대사의 중요한 현장이다. 현재 김 전 대통령은 이곳에서 힘겨운 투병을 하고 있다. 동교동과 함께 우리나라 야당사에 한 축 이곳은 한국정치사에서 아주 중요한 장소다. 우리 현대사에서 YS의 ‘상도동’은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동교동’과 함께 단순한 지명이 아닌, 하나의 정치세력의 중심지라는 고유명사로 정착됐다. 무엇보다 ‘군정을 종식시키고 문민화의 시대’를 연 현장이 바로 이곳이다. 군인이 정치를 농락한 우리의 후진적 현대사를 마감하고 문민시대를 열었다는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이곳의 정치·역사적 평가는 충분하다. 과거에는 상도동 YS 사저 주변은 단층건물이어서 2층인 상도동 집이 특히 높아 보였다. 하지만 지금 주변 단독주택은 모두 4~5층 빌라로 재개발됐지만 YS 사저만 그대로여서 오히려 왜소하게 느껴질 정도다. 좁은 앞마당의 향나무만 담장을 넘어 훌쩍 컸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 이곳에서는 격정의 현대사를 살았던 거산(巨山·YS의 호)이 힘겨운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 최근 야당 새정치민주연합이 9월 18일 창당 60주년 선포식 때 YS를 초청하는 등 상도동계까지 ‘야당 60년사 족보’에 아우르기로 했다고 한다. 사실 YS는 1955년 신익희·조병옥 등 야당 세력이 만든 민주당 창당발기인 33인에 포함될 정도로 야당생활을 오래 한 정치인이다. 특히 1970~80년대 유신과 군사독재 정권 때 민주화 운동의 최전선에 섰던 빼놓을 수 없는 야당 지도자다. YS의 정치적 후배인 상도동계가 만든 김영삼민주센터도 ‘한국야당사 60년 구술 프로젝트’를 주요 사업으로 꼽고 있다. YS의 상도동계가 ‘한국야당사 60’년을 기획하고 있다는 얘기는 자신의 뿌리와 줄기가 야당이라는 것을 스스로 자부하는 것이다. 사실 상도동은 DJ의 동교동과 함께 우리나라 야당의 한 줄기이며, 민주화 운동 추동세력의 본산으로 꼽혔다. 굳이 구별한다면 YS는 민주당 구파이고 DJ는 민주당 신파로, 출신 계보가 조금 달랐다는 점뿐이다. YS는 1954년 5월 제3대 국회에 여당인 자유당으로 국회의원이 됐지만, 1년도 안 된 1955년 4월 이승만의 3선 개헌(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해 자유당을 탈당, 야당인 민주당 창당발기인으로 야당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1958년 4대 총선에서 야당으로 출마했으나 자유당의 극심한 부정선거로 낙선했다. 4·19 학생혁명으로 치러진 5대 총선에서 YS는 민주당으로 당선해 여당이 됐지만 민주당 구파로 탈당, 신민당에 합류했다. 따라서 YS의 여당생활은 불과 4개월에 불과했다. 동료 DJ가 민주당 신파로 대변인 등 여당 주요 당직을 맡은 것과 대비된다. 그리고 5·16 쿠데타를 통해 두 사람은 다시 야당의 신분이 됐다. 민주당-민중당 등 분열된 야당을 거쳐 1967년 통합 야당 신민당에서 다시 만났다. YS는 1968년 ‘향토예비군 폐지’를 주장해 공화당으로부터 좌파라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진보적 정치인이었다. 1983년 5월 경찰이 상도동 김영삼 전 신민당 총재 자택으로 통하는 통로를 차단한 상태에서(사진 위) YS는 단식투쟁에 돌입했다.(사진 아래) 이 23일간의 단식투쟁은 민주화추진협의회 결성, 신당 창당 등을 거쳐 결국 6·10항쟁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됐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YS는 1969년 11월 8일 지지부진한 야당에서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 1971년 야당 대통령선거 경선에 나섰다. YS는 1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으나 과반에 못 미쳐 2차 투표에서 DJ에게 역전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YS는 묵묵히 DJ 선거를 도왔고, 유신 반대 투쟁을 함께했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외유와 정치활동이 중지됐을 때도 두 사람은 민주화의 동지로 일관되게 투쟁했다. DJ가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미국의 도움으로 석방돼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할 때 YS는 가택연금으로 바로 이 상도동에서 갇혀 지냈다. 행동의 제약은 아마 YS가 더 심했을 것이다. 민추협 만들어 정통야당 복원시켜 YS는 1983년 5월 18일 광주 민중항쟁 4주년을 맞아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민주화 5개 항을 내건 상도동 단식은 5월 25일 서울대병원으로 이어져 6월 9일까지 계속됐다. YS는 의사의 권유로 단식을 끝내며 “나의 투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겨우 시작을 알렸을 뿐이다”라고 일갈했다. 결국 그는 상도동 단식을 통해 가택연금 해제를 얻어냈다. 그리고 민주산악회를 조직, 세력을 늘리다 1985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을 만들어 신민당 돌풍을 일으켰다. 정통 야당을 복원시킨 YS는 1987년 6·10항쟁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이뤄냈다. 사실 이 시기 상도동은 거의 유일한 민주화 투쟁의 거점이었다. DJ는 미국 망명 중이었기 때문이다. 상도동 사저 인근에 김영삼기념도서관이 9월 10일 준공을 목표로 막바지 공사 중이다. 도서관은 내부 자료가 갖춰지는 올 연말 개관할 예정이다. 어떻든 YS는 군정을 종식시키고 문민정부를 탄생시켰다. 상도동 세력이 만든 ‘김영삼민주센터’도 YS의 업적에 대해 ‘문민시대 개막’을 단연 첫 번째로 꼽고 있다. 이 센터는 문민정부의 업적으로 ‘군사정권을 실질적으로 종식하고, 금융 및 부동산실명제 실시, 공직자 재산공개제도 도입, 지방자치제 전면 시행, 군사독재 시대의 역사적 청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군 평시작전통제권 회수,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정상회담 합의와 추진,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경수로 지원’ 등을 나열하고 있다. 사실 나열된 것 하나하나가 매우 중요하고 의미있는 사안이다. 하지만 YS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우호적이기보다 야박하기까지 하다. 그 부정적 평가 요인은 3당 합당과 IMF 경제위기를 초래한 장본인이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정치컨설팅회사 ‘폴컴’ 대표 윤경주는 이를 ‘3당 합당 콤플렉스’라고 표현했다. 그는 “한국 정치를 근본적으로 왜곡시킨 3당 합당을 통해 집권한 것이 민주세력임을 자부하는 그에게 집권 내내 콤플렉스로 작용했다”고 지적했다. 김호진 고려대 명예교수는 이라는 책에서 ‘1990년 3당 합당 등의 승부사적 기질은 외아들 특유의 소영웅주의적 충동성’에서 나왔다고 평가했다. 따지고 보면 한국 정치의 왜곡은 3당 합당보다 1987년 양김의 분열에서 시작됐다. 1987년 대선에서 YS는 DJ의 양보를 기대했다. 1972년 자신이 패배를 인정하고 그를 도왔던 것에 대한 반대급부를 기대했고, 여론조사에서도 앞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DJ는 어설픈 ‘4자 필승론’으로 독자 출마했다. 물론 노태우의 분열공작도 작용했다. 결국 YS는 DJ보다 23만표를 더 얻었지만 정권을 신군부세력에 헌납하고 말았다. YS는 1990년 1월 22일 3당 합당과 1992년 대선 승리를 거쳐 1995년 11월 16일 ‘역사바로 세우기’를 앞세워 5·18특별법을 제정하며 신군부세력과 결별할 때까지 5년을 제외하면 민주화 세력의 길을 걸었다. YS는 DJ와 달리 끝까지 박정희 정권과 화해하지 않고 박근혜 정부에 대해서도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YS의 ‘정치적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아들 김현철씨가 지난 대선에서 사실상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45년 정치역정에 YS가 반민주세력과 동거해 여당생활을 한 것은 5~6년 정도에 불과하다. 김영삼기념도서관 안내판 사처 근처에 ‘김영삼기념도서관’ 들어서 이는 사실 DJ와 엇비슷하다. DJ도 1996년 중순부터 쿠데타 세력인 김종필(JP)과 정책공조를 하다 1997년 대선에서 DJP연합으로 정권을 잡았다. ‘반민주 세력과의 동침’인 DJP연대는 2001년 9월까지 계속됐다. DJ도 마찬가지 였는데 유독 YS에게만 3당 합당의 ‘굴레’를 씌워 비난하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 이것은 YS의 상도동 후배들이 선배의 민주화 정신을 잃은 변신과 변절 때문일 것이다. 이제 YS는 정치학자·역사학자들의 평가 대상, 즉 역사적 평결의 장으로 넘어가고 있다. 2010년 설립한 김영삼민주센터 김수한 이사장(전 국회의장)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줄기찬 민주화운동 과정과 문민정부의 역사적 업적과 자료 일체를 수집, 정리하기 위해 설립했다”고 밝혔다. 사료와 증언을 모아 YS의 역사적 평가에 본격 대비하겠다는 의미로 보인다. 이들은 상도동 사저에서 조금 떨어진 상도동 로터리에 지하 4층, 지상 8층의 ‘김영삼기념도서관’도 건립하고 있다. 공연장과 전시관, 연구공간, 집무실 등이 들어서는 이 도서관은 오는 9월 10일 준공한다. 김영삼민주센터 김정렬 사무국장은 “건물은 거의 됐는데 도서관 3개층에 전시물, 즉 아카이브를 채우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면서 “기록을 모아 올해 안에 명실상부한 개관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념도서관 운영은 대학에 의뢰하는 것으로 내부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미 정치학자들은 양김 시대에 대해 다양한 연구를 하고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1987년 체제’ 논쟁이다. 그런데 연구자들은 87년 체제를 제왕적 대통령 중심제 극복이라는 측면만 바라본다. 87년 체제의 본질적 문제인 민주세력의 분열은 외면하는 분위기다. 87년 단일화 실패는 노태우의 ‘분할 전략’도 한 원인이었지만 누가 뭐라든 YS와 DJ의 ‘권력욕’ 때문이다. 당시 두 사람의 분열은 안 된다며 삭발까지 한 박찬종 등 몇몇 정치인을 ‘이단아’로 취급했다. 그 결과는 정권을 신군부의 연장세력에게 ‘헌납’한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1987년 단일화 실패는 정치권은 물론 학생운동권, 노동계, 재야 민주세력까지 철저하게 양분시켰다. 이렇게 대권욕에 의해 정치적 이합집산이 이뤄지다 보니 원칙이나 신념, 명분 등의 고유가치는 사라지고 ‘정치는 생물’이라는 정체 모를 논리로 변절과 야합이 합리화됐다. 1987년 체제가 남긴 유산은 지금도 고스란히 진행형이다. 노동·통일운동가 출신 김문수와 역시 학생 통일운동가 김부겸이 당을 달리해 한 지역구에서 싸워야 하는 현실이 이를 웅변한다. 손학규는 YS에게 갔다가 다시 DJ에게로 오는 혼란을 겪어야 했다. YS의 측근 김덕룡은 지난 대선에서 야당후보를 지지했다. 사실 지금 여야 대표인 김무성과 문재인을 정치로 끌어들인 선배를 따지면 모두 YS다. 결국 87년 체제의 극복은 원칙과 노선, 태생에 따른 정당의 역사성 회복이 아닐까. 그것은 이곳 상도동을 동교동과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광복 70년 역사르포
[커버스토리]노태우·김영삼 정부 통계 왜 지금와서 잡나?(2007. 11. 13)
2007. 11. 13 정치
3 세금 증가 ‘세금폭탄’ 에 대한 참여정부와 한나라당의 주장은 극명하게 엇갈린다. 서울 종로세무서 직원들이 종합부동산세 신고 안내서를 분류하고 있다. 세금에 대한 한나라당의 공격은 ‘세금폭탄’이라는 말로 압축된다. 한나라당은 “도시 근로자의 저소득층마저 100원을 벌어서 15원을 세금으로 낼 정도로 우리 국민은 참여정부 들어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세금폭탄에 시달리고 있다”며 2006년 조세부담률 증가 및 국민부담률 증가가 각각 21.2%, 26.8%로, 이 추세라면 2008년에는 국민 1인당 434만 원의 세금을 내야 한다고 내다봤다. 또 “최근 4년간 소득은 20% 증가한 데 비해 세금·부담금은 40% 증가했다”며 “세금 탓에 국민은 저축할 돈도 먹고 쓸 돈도 줄었고, 그 때문에 내수 경기는 침몰상태”라고 지적했다. 특히 30개 OECD 회원국 중 재산과세 수준은 미국 다음으로 높은 단계이며, 투기와 무관한 1주택 장기보유자와 소득 없는 고령자들도 빚을 내서 세금을 내야 할 형편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나라 빚도 10년간 잃어버린 경제의 한 축이라고 공격한다. 한나라당은 “1948년부터 2002년 사이의 국가 채무보다 지난 5년간 국가 채무가 더 많이 증가했다”며 그 근거로 1948년 정부 수립부터 김대중 정부까지 국가 채무가 133.6조 원이었으나 현 정부 출범 후 증가한 국가 채무만 185.2조 원으로 최고 수준이라고 밝혔다. 그 때문에 노무현 정권 출범 이후 5년 만에 국가 부채는 2.3배가 증가해 302조 원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다른 대응에 비해 단호하다. 청와대는 국정 브리핑을 통해 “2004년 국회가 경기활성화를 위해 법인세율을 2%p 인하했지만 기업들이 기대만큼 투자를 늘리지 않았다”며 “법인세를 깎아준다고 기업의 투자가 늘고 일자리가 창출되는 등 서민 경제가 좋아진다는 주장은 왜곡된 것”이라고 반박하고, 종부세에 대해서도 “상위 2%를 위해 부동산 안정을 흔들어선 안 된다”고 못박았다. 국가 채무도 “과거 노태우·김영삼 정부 때부터 잉태된 것이 이제 와서 통계로 잡히는 것”이라며 그나마 현재의 국가 채무도 OECD 회원국의 평균 채무비율보다 낮다고 주장했다. 재경부가 국회 재정경제위원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정부가 거둔 부동산 관련 세금(양도소득세, 종합부동산세, 상속·증여세, 재산세, 취득·등록세 등)은 총 100조5957억 원인 것으로 집계됐다. 같은 기간 정부가 거둔 유류세(교통세, 특별소비세, 주행세, 교육세, 부가가치세)는 85조9721억 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즉 참여정부가 부동산·유류세 명목으로 총 186조5678억 원을 거둔 셈이며, 이는 지난해 국세청이 거둔 총 국세수입 179조3000억 원을 뛰어넘는 액수다. 이에 대해 최광 한국외국어대 경제학부 교수는 “현 참여정부는 좌파적인 복지정책과 국토 균형발전, 대북포용정책 등으로 재정지출을 크게 늘려 국가채무 부담을 가중시킨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기업들의 투자 의욕을 위축시키는 법인세를 단계적으로 폐지해야 하며, 그 대신 부가가치세와 술·담배·휘발유 등에 대한 세율은 세원을 확보하기 위해 대폭 인상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또 “공평성의 명분과 정치논리에 사로잡혀 지금과 같은 조세정책을 추진하면 우리나라는 선진국 문턱에서 주저앉게 될 것”이라며 “앞으로 최소 3년간은 세출예산을 동결해 각종 낭비와 비효율을 제거하고 세제를 대대적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기원 방송통신대 경제학 교수의 분석은 다르다. 김 교수는 “참여정부 들어 오히려 법인세와 소득세 등은 줄었다”며 “부동산 투기를 억제하기 위해 종부세를 강화한 것이 많은 저항을 받았는데, 이는 일부 부유층의 부담일 뿐 국가 전체적으로 세금이 강화됐다는 주장엔 동의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국가 채무가 늘었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 시절부터 누적된 폐해가 IMF 외환위기를 만나면서 외형화한 것이지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가 만들어낸 빚이 아니다”라며 “IMF 외환위기 이후 정부가 공적자금을 조성하면서 국채가 아닌 공채를 발행했는데 참여정부 들어 이를 국채로 다시 전환하는 과정에 국가 채무가 늘어난 것으로, 이는 단순히 숫자의 변화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한나라당이 주장하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의 복지정책 강화 탓에 국가 채무가 늘어난 것이 아니라는 판단이다. 그는 또 “세금을 늘려 복지예산을 늘리는 것은 선진국의 전형적인 정책”이라며 “세금을 낮추겠다면서 복지는 늘리겠다는 한나라당의 공약은 모순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최근엔 전경련·경총·대한상의 등이 한나라당과 보조를 맞춘 듯 각종 세금과 규제를 축소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대도 거세다. 우리 정부의 사회투자적 지출은 OECD 중 최하위권으로 초라한 수준이라는 지적인데, “우리는 국가 주도의 사회투자에 여전히 목마르다”(김연명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종부세 등을 낮추겠다는 공약은 승자독식, 약육강식의 시대로 가겠다는 것”(김기원 교수)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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