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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총 324 건 검색)

[경향의 눈]김일성 아닌 박정희가 되려는 김정은
2024. 10. 30 21:05오피니언
... 인 채’라는 불길한 수식어와 함께. 역설적인 건 김정은이 박정희를 닮으려 한다면, 윤석열은 김일성을 닮아가는 점이다. 김정은이 김일성 이래의 통일전선전술을 버린 상황에서 윤석열은 그것을...
경향의 눈
북한, 김일성 30주기 추모 분위기 조성…김정은 금수산태양궁전 참배할까
2024. 07. 07 11:01정치
... 기사 게재 보통 정주년에는 대규모 추모 행사 김정은 독자 우상화 작업 속 참배 여부 주목 북한 김일성 주석 30주기(7월 8일)를 맞아 청년학생들의 덕성이야기 모임이 지난 5일 청년중앙회관에서 열렸다고...
김일성 광장에 대형 구조물…북, 푸틴 맞이할 준비 ‘착착’
2024. 06. 14 15:01정치
... 북, 러시아 감싸며 우크라 평화회의 비난 통일부 “국제 사회 비난할 자격 있나” 북한이 9일 0시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정권수립 73주년(9·9절) 경축 민간 및 안전무력 열병식이 열렸다고 조선중앙통신이...
푸틴 방북
김일성·김정일’에서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초상화 정치 시작됐다
2024. 05. 22 16:32정치
... 바 있다. 김 위원장은 준공식에서 “조선로동당 중앙간부학교를 세계적인 학원으로 건설하는 것은 김일성-김정일주의 당의 명맥과 백전백승의 향도력을 천추만대로 이어나가기 위한 최중대사(가장 중요한...

스포츠경향(총 39 건 검색)

‘선녀들’ 남한에 김일성 별장이 있다?!
2021. 05. 09 11:52 연예
MBC ‘선을 넘는 녀석들: 마스터-X’‘선을 넘는 녀석들’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북한 김일성 별장’의 비밀을 밝힌다. 9일(오늘) 방송되는 MBC ‘선을 넘는 녀석들 : 마스터-X’(연출 한승훈/이하 ‘선녀들’) 3회에서는 ‘역사X과학’ 컬래버레이션 배움 여행이 펼쳐진다. 전현무, 김종민, 유병재, ‘역사 마스터’ 심용환은 ‘과학 마스터’ 물리학자 김상욱과 함께 ‘6.25전쟁 당시 한반도에 떨어질 뻔한 핵폭탄’ 역사의 진실을 찾으러 떠난다. 이날 대한민국 최북단 강원도 고성 화진포에 도착한 ‘선녀들’은 그곳에 우뚝 서 있는 이국적인 건축물을 발견했다. 유럽 중세시대 느낌이 나는 성이었다. 이 성은 사연이 있는 듯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며 ‘선녀들’의 호기심을 증폭시켰다고. 무엇보다 이 성의 주인은 상상도 못한 정체로 또 한번 ‘선녀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고 한다. 바로 북한 김일성이었다. 김일성이 별장으로 쓰던 이 성은 김정일 남매가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고. 이에 유병재는 “(북한에 있어야 할) 김일성 별장이 왜 대한민국에 있어요?”라며 휘둥그레 눈을 뜨며 신기해했다고 한다. 본격 성 안으로 들어간 ‘선녀들’은 별장 주인의 정체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역사적 사연을 품은 이 성의 이야기에 푹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는 후문이다. 북한과 가장 가까운 지역 강원도 고성에 위치한 김일성의 별장. 그 ‘시크릿 가든’의 비밀이 밝혀질 MBC ‘선을 넘는 녀석들 : 마스터-X’ 3회는 5월 9일 일요일 밤 9시 10분 방송된다.
영화 ‘김일성의 아이들’, 로마국제무비어워즈 다큐 최우수작품상
2020. 08. 11 08:32 연예
영화 ‘김일성의 아이들’ 포스터.북한 전쟁고아 이야기를 다룬 영화 ‘김일성의 아이들’이 로마국제무비어워즈(Rome International Movie Awards) 다큐멘터리 부문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것으로 11일 확인됐다. 매달 온라인으로 수상작을 선정하는 로마국제무비어워즈는 김덕영 감독(56)의 작품 ‘김일성의 아이들’을 7월의 장편 다큐멘터리 수상작으로 발표했다고 연합뉴스가 보도했다. 김 감독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수상 소식을 알리며 “모든 기쁨과 영광을 이 영화를 지키기 위해서 애쓰고 계시는 모든 의로운 자들과 함께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어 “비록 한국에서 대형 멀티플렉스 극장에서는 막을 내렸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이 진실의 영화를 보실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김일성의 아이들’은 1950년대 북한 전쟁고아들의 동유럽 이주라는 역사적 소재를 다룬 영화다. 올해 프랑스 니스 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도 진출했다.
김정숙여사가 김일성 부인이라고? 일본 방송이 기막혀!…청와대 “사과·정정”
2020. 05. 04 20:02 연예
BS TV도쿄 닛케이 플러스10 방송 화면 캡처.일본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부인인 김정숙 여사의 사진을 ‘북한 김일성 주석의 부인’이라고 잘못 소개하는 일이 벌어졌다. 해당 방송사는 사과 및 정정보도 의사를 밝혔다. 김애경 해외언론비서관은 이날 공지 문자를 보내 “일본 BS TV 도쿄의 시사프로그램인 ‘닛케이 플러스 10 토요일’이 5월 2일 자 방송에서 김일성 주석 부인 사진에 김정숙 여사 사진을 사용한 것과 관련, 해당 방송사 측에서 4일 문서를 통해 사과 및 정정 보도 의사를 표명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구체적인 사과 표명 방식 및 정정 내용은 협의 중”이라고 전했다. 해당 방송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건강이상설을 다루며 김일성 주석의 부인을 소개하는 그래픽에서 김 여사의 사진을 사용했다.
텅 비어있는 김일성경기장…협회 “오후 5시 현재 관중 없음”
2019. 10. 15 17:30 축구
15일 평앙 김일성경기장에서 몸을 풀고 있는 한국 선수들. 경기장이 텅 비어있다. 대한축구협회 제공2022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예선 조별리그 H조 3차전 한국-북한전을 앞두고 경기장이 텅 비어있다. 대한축구협회는 15일 “오후 5시 현재 경기장에는 관중도 없고 외신기자도 없다”고 전했다. 한국-북한전은 오후 5시30분에 시작한다.

주간경향(총 5 건 검색)

김일성·김정일 부정하는 김정은 ‘두 국가론’…북한 헌법 개정 될까(2024. 10. 14 06:00)
2024. 10. 14 06:00 정치
김정은 ‘두 국가론’ 강조하면서도 헌법 개정 회의에는 불참 헌법개정 정확한 사실관계 확인 안 돼…소폭 수정보충한 듯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10월 7일 창립 60주년을 맞이한 김정은국방종합대학을 축하 방문하고 연설을 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8일 보도했다./연합뉴스 북한이 ‘조용한’ 헌법(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 개정을 했다. ‘통일’ 문구 삭제, ‘영토’ 명기 등을 할 것이란 정부 예측과 달리 노동 연령과 선거 나이 등에서 소폭의 수정보충(북한식 ‘개정’ 표현)만 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올해 1월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 6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등에 참석해 ‘큰소리’ 친 것과 다르다. 김 위원장은 “헌법에 대한민국을 철두철미 제1의 적대국으로, 불변의 주적으로 확고히 간주하도록 한다”고 말해 왔다. 김 위원장의 의지는 지난 10월 7~8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열린 북한 최고인민회의(한국식 ‘국회’)가 아닌 다른 곳에서 재확인됐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의 10월 8일자 보도에 따르면 최고인민회의가 열린 10월 7일, 김 위원장은 김정은국방종합대학을 찾았다. 이곳에서 “우리가 남녘해방이라는 소리도 많이 했고, 무력통일이라는 말도 했지만 지금은 전혀 이에 관심이 없으며 두 개 국가를 선언하면서부터는 더더욱 그 나라를 의식하지도 않는다”며 “대한민국을 공격할 의사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두 국가론’은 여전히 강조하면서도 이를 위한 헌법 개정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김 위원장의 모순된 행보는 ‘두 국가론’을 둘러싼 북한의 복잡한 속내를 드러낸다. 당장 김 위원장의 ‘두 국가론’은 김일성·김정일이 ‘온갖 노고’와 ‘심혈’을 다 바쳤다는 과업부터 부정해야 한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께서는 나라의 통일을 민족지상의 과업으로 내세우시고 그 실현을 위하여 온갖 로고와 심혈을 다 바치시였다.” 북한 헌법 ‘서문’에 박혀 있는 내용이다(<북한법령집>(상권), 국가정보원, 2024). 김 위원장의 모든 권력은 김일성·김정일의 혈통이란 단순한 사실에서 나왔다. 북한은 지난 10월 7~8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1차 회의를 열어 사회주의헌법 일부 내용을 수정보충(개정)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9일 보도했다. /연합뉴스 북한 헌법은 개정됐나 “객관적 현실을 받아들이고 두 개의 국가를 수용하자.”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지난 9월 19일 열린 ‘9·19 평양공동선언 6주년 기념사’에서 남긴 말이다. 임 전 실장의 발언은 김 위원장의 ‘두 국가론’을 추종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본래 ‘두 국가론’은 북한보다 한국의 통일 방안에 더 가깝다. 1980년대 이후 북한은 ‘1민족 1국가 2제도 2지방정부’라는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을 기본으로 했다. 이를 ‘적화통일’ 시도로 본 한국은 ‘1민족 2국가 2제도 2지방정부’라는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을 주장했다. ‘선평화정착, 후통일논의’가 기본틀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임 전 실장 생각과 달리 김 위원장의 ‘두 국가론’은 통일을 지향하는 ‘잠정적 특수관계’가 아닌 과거 동독이 제시한 ‘적대적 2국가론’에 가깝다는 점이다. 이 경우 통일의 기본단계인 남북 간 화해 협력·평화 공존부터 요원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임 전 실장 발언을 두고 “상황에도 맞지 않고, 현실성도 없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그런데 한국에서 ‘두 국가론’이 비판받는 것처럼 북한 역시 ‘두 국가’로의 전진이 쉬운 것은 아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이번 헌법 개정 상황이다. 결과를 두고 크게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통일’ 문구 삭제 등의 헌법 개정이 있었지만 북한이 공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총장은 “만약 개정을 했음에도 공개하지 않았다면 서해 국경선 문제 때문일 것”이라며 “북한의 서해 국경선은 우리의 북방한계선(NLL)과 겹칠 가능성이 높은데 이 경우 충돌 가능성이 높아진다.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는 것은 ‘한국과 더 마주 서고 싶지 않다’는 김 위원장 뜻과는 다른 상황”이라고 말했다. 둘째는 대대적인 헌법 개정은 없었다는 것이다. 이를 방증하는 정황이 있다. 북한은 지난 10월 9일 남측과 연결되는 도로·철도를 끊고 군사분계선(MDL) 일대에서 요새화 공사를 진행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북한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명의의 보도문이 조선중앙통신에 공개되면서 알려졌다. 북한은 이 보도문에서 “우리 공화국의 ‘주권행사 영역’과 ‘대한민국 영토’를 철저히 분리시키기 위한 실질적인 군사적 조치를 취한다는 것을 공포한다”고 했다. 적어도 북한 헌법에 영토조항이 신설됐다면 ‘공화국 주권행사 영역’과 같은 모호한 표현이 사용되기는 어렵다. 최고인민회의 결정 사항이라는 점 역시 ‘대대적 헌법 개정은 없었다’는 주장에 힘을 싣는다. 홍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최고인민회의는 당 전원회의 등과 달리 북한 주민들이 직접 영향을 받는 입법 활동”이라며 “만약 중폭 이상의 헌법 개정이 이뤄졌다면 김 위원장이 직접 참석하고, 취지를 설명하는 시정연설 등을 진행하는 것이 통상적인데 이 과정이 없었다”고 말했다. 양 총장 역시 “북한은 최고인민회의 결정 사항은 아무리 민감한 사안이라도 최대한 요약해서 보도해왔다”며 “헌법 개정이 보류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고 말했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장이 지난 10월 7일 창립 60주년을 맞이한 김정은국방종합대학을 축하방문하고 연설을 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8일 보도했다./연합뉴스 헌법 개정을 하기에는 ‘시기’가 좋지 않다는 분석도 있다. 오는 11월 미국 대통령선거가 있다. 대외 환경 변화를 앞두고 북한이 불확실한 ‘도박’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홍 위원은 “2019년 선출한 북한의 14기 대의원은 원래 올해 3월 임기가 끝나야 하는데 연장된 상황”이라며 “미국 대선 결과를 보고 필요하면 내년 초 15기 대의원을 구성해 헌법 개정을 하는 것이 정치적 선전 효과가 훨씬 더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북한의 헌법 개정 여부는 정확한 사실관계는 확인되지 않고, 불확실성만 커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무엇을 했든 북한이 ‘조용하다’는 것이다. 헌법에서 ‘통일’ 문구 삭제, ‘영토’ 명기 등은 김 위원장이 공개적으로 ‘큰소리’ 쳐온 사안들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볼 필요가 있다. 헌법을 개정 ‘했냐’, ‘하지 않았냐’가 아닌 ‘왜 조용할 수밖에 없는가’이다. 북한은 왜 조용한가 북한의 헌법 개정이 지향하는 것은 ‘두 국가론’이다. 이는 곧 ‘생존전략’이다. 북한은 한국과 얽힌 민족적 특수관계를 ‘위협’으로 판단한다. 특히 안보와 외교적 측면에서의 갈등이 두드러진다. 실제로 북한의 핵무장에 맞서 미국의 핵전력과 한국의 재래식 전력이 결합한 ‘통합억제’ 구상이 본격화됐다. 북·미관계 정상화, 유엔 제재 해제 등 외교적 측면에서도 ‘당사자’를 주장하는 한국 입장을 배제하기 어렵다. 북한은 차라리 한국과 별개의 국가로 인식되면 생존을 위협하는 변수를 하나 줄일 수 있다고 본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석좌연구위원은 이러한 상황을 두고 ‘방어적 두 국가론’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전략은 김 위원장 발언에서도 확인해볼 수 있다. “(한국을) 의식하는 것조차 소름이 끼치고 그 인간들과는 마주 서고 싶지도 않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핵 사용과 관련해서는 “적들이 우리 국가를 반대하는 무력사용을 기도한다면” 같은 가정을 붙인다. 이를 좀 더 정제된 표현으로 설명할 땐 ‘영토 평정’이라는 단어를 쓴다. ‘상대가 나의 영토를 공격했을 때 방어를 넘어 상대 영토까지 점령한다’는 의미다. 문제는 일부 언론, 전문가들이 이를 ‘국토 완정’과 구분 없이 쓰며 객관적 상황 파악을 어렵게 한다는 점이다. 과거 김일성 주석이 사용한 ‘국토 완정’은 ‘적화통일’을 의미하는데 김 위원장은 이를 사용한 적이 없다. 일각의 주장처럼 두 단어의 의미가 같다면 북한은 ‘적화통일’을 추진하면서 헌법에선 ‘통일’을 삭제하고, 별개의 두 국가임을 주장하는 것이 된다. 이는 논리적 모순이다. 두 국가론을 북한의 ‘생존전략’으로 볼 때 김 위원장이 집착하는 헌법 개정의 필요성도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또 이번 최고인민회의에서 헌법 개정을 하지 않았더라도 북한은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점 역시 알 수 있다. 결국 문제는 ‘왜 조용한가’이다. 답은 두 국가론이 안착하는 데 필요한 정지작업들에서 추론해볼 수 있다. 첫째는 김일성이 북한 체제에 도입한 이른바 ‘민족주의적 공산주의’를 어떻게 넘을 것이냐다. 조 위원은 “김일성이 만든 주체사상의 핵심이 조국 해방, 조국 통일이고 이 체제 안에서 김정일·김정은의 권력승계가 안정적으로 이뤄졌다”며 “이제 와서 김정은이 민족, 통일을 버리겠다고 하면 조국해방전쟁이라고 선전한 6·25전쟁은 뭐라고 설명할 것이고,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활동은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결국 김정은이 하려는 것은 북한 체제를 만든 김일성의 무덤을 파묘해 버리겠다는 것인데 북한 내 반체제 세력만 키우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결국 헌법 개정을 했든 안 했든 북한의 침묵은 주민들이 납득할 설명을 찾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0월 9일 싱가포르 오차드호텔에서 열린 제47회 싱가포르 렉처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둘째는 현상 변경 추진으로 인한 주변국과의 관계다. 국제사회는 70여 년 동안 남북한의 민족적 특수관계 위에 외교정책을 설정하고 있다.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이 ‘한반도 상황의 안정적 관리’를 말하는 것은 안착된 구조의 변경을 바라지 않는다는 의미다. 특히 북한의 시도는 중국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양안 문제 때문이다. 잔더빈(詹德斌) 상해대외경제무역대학 교수(전 환구시보 한국 특파원)는 “대만도 ‘두 국가론’을 추진하고 있는 만큼 중국은 한반도 상황에 관한 관심이 클 수밖에 없다”며 “북한이 한국을 적대국으로 선언하고 통일정책을 변경하면 ‘남북한의 관계 개선과 대화를 통한 상호 신뢰 구축,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통일을 지지한다’는 중국 입장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별개의 국가가 된 북한과 한국 사이에 분쟁이 발생해도 제3자인 중국이 함부로 개입하거나 중재에 나서지 못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북한의 두 국가론이 오히려 외교적 고립을 심화할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다는 의미다. 두 국가론은 비단 북한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정부도 전략적으로 북한의 두 국가론에 어떻게든 대응해야 한다. 윤석열 정부의 통일 정책은 지난 8월 15일 광복절에 나온 ‘8·15 경축사’ 이후 이른바 ‘자유의 북진’이라고 불린다. 당시 윤 대통령은 “자유가 박탈된 동토의 왕국, 빈곤과 기아로 고통받는 북녘땅으로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확장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해당 주장은 남북이 국가 대 국가의 관계가 아닌 상호 인정하는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임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국가 간 관계에서 해당 발언은 내정간섭이 될 수 있다. 일각에서는 북한의 시도만으로 민족적 특수성은 끊어지지 않는다는 주장도 나온다. 한국인이기에 잘 보이지 않는 현실이 있다. “북한이 남한을 국가로 지칭하는 것은 사실 놀라운 일은 아니지 않나. 국제사회 대부분이 북한과 남한을 서로 다른 두 나라로 인식해서 각각 대사급 수교 관계를 맺고 있다.” 잔더빈 교수의 말이다.
조선왕조실록 ‘평양 반출’은 김일성이 직접 지시했다(2014. 09. 16 13:42)
2014. 09. 16 13:42 문화/과학
창경궁 장서각에는 무주 적상산 사고에서 보관해오던 조선왕조실록이 있었다. 실록은 북한의 남침 후 혼란스러운 과정에서 아무도 관리하지 않은 채 남아 있다가 북한으로 반출된 것으로 추론된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김일성이 조선왕조실록을 평양으로 가져오라고 직접 지시한 것으로 밝혀졌다. 은 김일성(당시 직함은 내각수상)이 서울을 점령한 지 열흘 뒤인 7월 8일 ‘리조실록을 구출할 데 대하여’라는 지시를 내린 문건의 전문을 확인했다. 그동안 북한발 소식통을 통해 김일성이 지시를 내렸다고 알려져 왔으나 지시문건이 직접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북한은 한국전쟁 때 서울에 있던 조선왕조실록 전질 원본을 평양으로 가져간 후 1975년부터 이를 국역해 1991년 완역본을 발간했다. 김일성의 조선왕조실록 반출 지시문건은 2012년 평양의 조선노동당출판사에서 발행한 라는 김일성 저서에 들어 있다. 한국전쟁 전후 김일성이 내린 지시를 모아놓은 이 책에서 조선왕조실록 반출에 대한 지시는 ‘리조실록을 구출할 데 대하여’라는 제목 아래 전체 내용이 실려 있다. 이 문건에서는 ‘도 피해를 입거나 없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에 대하여 절대로 수수방관할 수 없습니다’라는 내용으로 조선왕조실록 반출의 정당성을 강변하고 있다. 또 ‘을 후방의 안전한 장소에 옮기고 잘 보관하여야 합니다’라고 지시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당시 창경궁 장서각에는 무주 적상산 사고에서 보관해오던 조선왕조실록이 있었다. 실록은 북한의 남침 후 혼란스러운 과정에서 아무도 관리하지 않은 채 남아 있다가 북한으로 반출된 것으로 추론된다. 이 지시문건에는 조선왕조실록이 있는 장소를 구체적으로 적지 않았다. 다만 ‘근 1800권’이라는 분량을 적시해 놓았다. 이성무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전 국사편찬위원장)은 “적상산 사고본이 언제 어디를 통해 운반돼 갔는지 알 수 없고, 지금은 적상산 사고본이 북한에서 국역돼 나와 추론만 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실록 원본은 현재 평양의 김일성대학 도서관에 보관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국립도서관 서고에 꽂혀 있는 북한의 . | 윤호우 기자 현재 김일성대학 도서관에 보관 지시문건은 김일성이 교육상에게 내린 지시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1950년 7월 8일이라는 날짜도 적혀 있다. 서울이 북한에 의해 점령된 6월 28일 이후 불과 열흘 만에 조선왕조실록을 갖고 오라는 지시가 신속하게 내려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초 남한의 학계에서는 조선왕조실록의 반출이 7월 또는 7월 초로 알려져 왔으나 김일성이 7월 8일 지시했다는 날짜가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다. 한 페이지 분량인 이 지시문건에는 교육성에서 조선왕조실록을 반출할 수 있는 인력을 뽑아 빨리 서울에 파견하라는 내용이 담겨져 있고, 모든 기관과 인민군 부대에서 이 반출을 보장할 수 있도록 김일성 명의로 된 신임장을 준다는 내용이 있다. 운반을 위해서는 군용차를 동원하고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인민군 부대에 조선왕조실록의 운반을 적극 돕도록 하라는 지시도 담겨 있다. 지난 2010년 북한이 발행한 제3호에는 이 같은 문건의 내용과 일치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비전향 장기수였던 손성모씨가 쓴 ‘에 깃든 위인의 숭고한 뜻을 새겨 본다’라는 글에서다. 손씨는 이 글에서 2010년 7월 8일이 ‘을 구출하도록 해주신 60년이 되는 날’이라고 적어놓았다. 손씨의 글에는 또 당시 서울대 학생으로 인민군에 입대한 자신의 경험담이 실려 있다. 인민군 부대에서 특별명령을 받고 떠나는 인민군 구분대를 만났는데 전투임무를 받은 줄 알고 있었으나 실은 조선왕조실록을 반출하는 작전에 동원된 구분대였다는 것이다. 이성무 원장은 “그동안 조선왕조실록이 어떻게 북한으로 넘어갔는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없다”면서 “(비전향장기수의) 전쟁 때 실제 경험담이라면 지금까지 여러 이야기 중 역사적 사실에 가장 가까운 내용이 아닐까 생각된다”고 설명했다. 손씨는 반출된 조선왕조실록이 평양의 최고사령부에 보관됐다는 사실도 밝혀 놓았다. 또 하나 관심을 끄는 대목은 김일성이 1948년 남북 연석회의 때 북한으로 간 벽초 홍명희에게 서울에 있는 조선왕조실록의 관리에 대해 걱정했다는 내용이다. 손씨는 이 이유로 한국전쟁이 일어나자마자 조선왕조실록 반출을 바로 할 수 있었다고 밝혀 놓았다. 한국전쟁 이전의 신문기사를 보면 북한에서 조선왕조실록을 몰래 가져가려다 실패한 사건이 나타나 있다. 1949년 11월 26일자 일간지에는 월북한 백남운 학자의 지령으로 백남운의 비서가 창경궁 장서각에 있던 조선왕조실록 원본을 훔쳤다가 체포돼 책을 압수당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때 실록을 가져가려다 실패한 북한이 한국전쟁 후 곧바로 반출작업에 착수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전쟁 이전에도 반출 시도 한국전쟁 때의 반출에는 월북 학자들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임채욱 극동문제연구소 전 연구위원은 ‘조선왕조실록 번역사업’(2001년)이라는 논문에서 “일설에 의하면 이 반출을 가장 주장한 것은 경제사학자 백남운이었다지만 (…) 실록의 존재와 가치를 아는 모든 북한학자들이 탐내었으니 실록 확보가 북한 학자들로서는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양완 전 정신문화연구원 교수도 ‘국역 에 대하여’(1994년)라는 논문에서 “영구보존 대책까지 강구하도록 한 진정한 제안자는 아마도 월북한 학자들이 아니었을까 한다”고 추론했다. 이렇게 반출한 조선왕조실록의 국역에 벽초 홍명희의 아들인 홍기문 박사가 중심 역할을 했다는 것에서도 월북학자들의 조선왕조실록에 대한 애착을 엿볼 수 있다. 홍 박사 역시 부친인 홍명희를 따라 월북한 대표적인 학자다.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 간사로 활동했던 혜문 스님은 평양으로의 실록 반출에 대해 “북한으로서도 조선왕조실록이 역사적 사료로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북한에 소장하려고 노력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조선왕조실록 반출에 대한 북한의 기록에는 ‘미국과 남한이 도발한 전쟁으로 문화유산이 적들에 의해 파괴, 소각되거나 도난당한다’는 북한식 억지 논리가 전개돼 있다. 평상시 정당한 방법의 운반이 아닌 전쟁 때의 반출을 ‘구출’이라고 이름 붙인 데에서 북한식 논리를 읽을 수 있다. 북한의 사회과학출판사에서 1991년 발간한 라는 책에는 조선왕조실록이 ‘총 1763권(근 900책)’이라고 밝혀놓은 뒤 김일성의 명령서를 받은 역사학자들이 서울에 도착하니 조선왕조실록이 ‘포연과 흙더미 속에 여기저기 날리며 나뒹굴고 있었다’고 표현해 놓았다. 임채욱 극동문제연구소 전 연구위원은 ‘조선왕조실록 번역사업’이라는 논문에서 북측 학자인 박동진이 ‘이 세상에서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비참한 운명’이라고 표현한 데 대해 “이 운명에 처하게 된 원인 제공자는 누구인가”라고 반문했다. 이런 이유로 임 전 연구위원은 논문에서 “전쟁 중에 나라와 나라 사이에 물건을 빼앗아가는 것을 약탈이라 하지만 북한이 실록을 북으로 가져간 것은 약탈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라면서 “같은 조상의 문화유산을 가져간 것이라 할 때 반출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성무 원장은 “반출이란 용어는 점잖게 가져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어 적당한 표현은 아닌 것 같다”면서 “북한이 어떻게 가져갔는지 역사적 사실로 밝히는 것이 중요하지 반출·운송 등의 용어 표현은 차후의 문제”라고 말했다.
[2030세상읽기]‘김일성 사망’ 그 때의 기억들(2011. 12. 27 17:37)
2011. 12. 27 17:37 오피니언
‘김정일 사망’ 소식을 듣고 1994년을 떠올린다. ‘김일성 사망’이란 소식이 남한에 던져졌던 그때다. 채 20년이 지나지 않았건만 다른 사회처럼 낯설다.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 당시 부대로 복귀하는 장병들. /박민규 기자충분히 그의 죽음을 예상할 수 있었지만 사람들에겐 예기치 못한 사건이었다. 김일성은 북한에서만 신격화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남한에서도 ‘체제의 적’으로, 북한 체제 그 자체로 여겨졌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한 시대의 끝으로 여겼고, 단숨에 통일이 앞당겨지리라고 믿었다. 무속인들은 제각기 한 번 긁어본 날짜를 내세우며 그의 죽음을 예측했다고 말했고, 그런 예측은 공중파 뉴스 방송에서도 소개되었다. 그해 여름이 지나자 서점가에는 섣불리 통일을 예측하는 소설들이 배치되기 시작했다. 실존인물들이 등장했지만, 그것들은 사실상 ‘환상소설’이었다.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활동 당시 소년경호원 출신으로 당시 호위총국장을 맡고 있던 이을설, 김정일의 매제인 장성택, 빨치산 1세대 오종흠의 아들인 오극렬 등의 이름이 소설에 등장했다. 그들은 각 소설에서 쿠데타의 주역이 되거나 그것을 진압하는 역할을 맡았다. 심지어는 사마달·유청림이 쓴 정치 패러디 무협지 <대도무문>에도 그들의 이름이 중국식으로 각색되어 등장했다. 어린 마음에 이런 소설들이 너무 많이 나오면 그들의 북한 내 입지가 곤란해지지 않을까 쓸데없는 걱정을 했던 기억이 난다. 기억에 있는 이 이름들을 검색하니 놀랍게도 그들은 여전히 살아남아 ‘김정일 사후’ 북한 정계를 예측하는 글들에 등장한다. 남한 사람들은 그들이 다투고 분열하기를 바랐지만, ‘김일성 사후’에는 이들이 일치단결하여 김정일 체제를 만들어갔던 것이다. 소설만 ‘설레발’이었던 것이 아니라 당시 남한 사회 전체가 설레발이었다. 어쩌면 90년대라는 시대 자체가 그랬는지도 모른다. 경제력이나 국제사회에서의 입지로 볼 때 지금의 ‘대한민국’과 당시의 ‘남한’을 비교하기 힘들지만, 당시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근거 없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갑자기 북한이 붕괴되고 흡수통일이 시작된다면 좋겠느냐?”고 물었을 때 “그거 좋은 상황이지!”라고 소리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전면전이나 국지전의 우려 때문이 아니라도, 순전히 경제적인 부담만으로 보더라도 모두들 그런 상황은 피곤하다고 여길 것이다.  한국 사회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는데 북한 사회의 문제가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것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엔 감상적 통일론자들이 많아서 그랬건, 북한지역을 체제 경쟁 승리의 전리품쯤으로 취급해서 그랬건, 어찌됐든 통일은 해야 한다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그 통일과정에 있을 수 있는 정치·군사적 갈등을 예측하기 위해 예의 그 ‘환상소설’들도 나왔던 것이다. 이 좋았던 시절은 모두가 알다시피 1997년에 끝난다. 미국이 북한을 폭격해 전쟁이 일어날 뻔했다는 사실을 모른 채 ‘통일 환상소설’과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서에 빠져 세기말을 즐기던 우리는, 느닷없이 꿈에서 깨어나 21세기로 질주하게 되었다. IMF 당시 서울역에 모인 수백명의 노숙자들 때문에 충격을 받았던 한국 사회는 2000년대 들어 코스닥 열풍에 휩싸이며 사회적 약자들을 외면하는 방법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잊힌 것은 한국 사회의 약자들뿐만이 아니라 북한 사회이기도 했다. 햇볕정책을 지지하든 강경책을 원하든 오늘날 남한 사람들이 북한을 대하는 태도는 사실상 “너희가 없었으면 좋겠어”란 것이다. 한 쪽이 북한이 푼돈이나 받아들고 조용히 하기를 원한다면, 다른 쪽은 그걸로는 달래지지 않는 그들을 윽박질러 조용히 시키기를 원한다. 그리고 천안함이나 연평도 포격이나 김정일 사망 같은 사건이 터져야, 우리는 잠깐 새로운 꿈에서 깨어나 그들의 실존을 직시한다. 한윤형<자유기고가>
2030세상읽기
[북한읽기]북한 “김일성경기장에서 질 순 없다”(2008. 03. 27)
2008. 03. 27 정치
월드컵 예선 남북대결 평양 개최 무산된 속사정… 패배할 경우 북한 관중 ‘실망감’ 우려 남북한이 3월 26일 중국 상하이 훙커우 스타디움에서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아시아 지역 3차 예선전을 치른다. 온 국민이 기대했던 남북을 오가며 경기를 펼치는 ‘코리안 더비’가 성사되지 않아 안타깝다. 우여곡절 끝에 월드컵 예선 경기 장소로 중국이 결정됐다. 지난 2월 중국 충칭에서 열린 동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에서 남북한의 대결 장면. 남북한은 2010 남아공월드컵축구 아시아 예선 대진표에서 요르단, 투르크메니스탄과 함께 C조에 속했다. 월드컵 예선은 홈 앤드 어웨이 방식이다. 그 때문에 남한은 3월 26일 평양을 방문해 원정경기를 치르도록 돼 있었다. 하지만 뜻밖의 암초로 평양 경기가 무산됐다. 북한은 월드컵 경기 실무 협상에서 시종일관 남한의 북한 방문 경기 시 김일성경기장에서 태극기를 걸 수 없으며, 애국가 대신 아리랑을 연주하자고 주장했다. 그뿐 아니라 남한의 축구 팬인 ‘붉은 악마’의 응원도 불허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월드컵 경기는 국제축구연맹(FIFA)이 주관하는 경기로 상대국의 국가와 국기를 게양하도록 하고 있다. 이에 따라 남북한이 끝내 합의를 보지 못해 FIFA의 중재로 남북한의 월드컵 예선이 제3의 장소인 중국에서 열리게 된 것이다. 평양 한복판에 태극기·애국가 용납 못해 북한은 왜 국제적인 룰을 무시하고 남한의 국기와 국가를 거부했을까. 북한의 상징인 김일성경기장에서 그동안 태극기가 펄럭이고, 애국가가 연주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평양 모란봉 기슭에 있는 김일성경기장은 원래는 평양공설운동장이라고 불렸다. 김일성 주석은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중국에서 귀국해 바로 이곳에서 청중들에게 모습을 보이며, 첫 연설을 했다. 당시 평양 시민들은 김일성 주석을 보고 “항일 무장군대를 이끌었다는 김일성 장군이라는 사람이 저렇게 젊을까” 하는 감탄사를 연발했다고 한다. 이후 평양공설운동장은 1982년 4월 김주석의 80회 생일을 맞아 현재의 규모(수용인원 10만 명)로 증·개축하고 이름도 김일성경기장으로 바꿨다. 북한은 대내적으로 남한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남한은 아직도 미수복된 지역으로 통일의 대상이다. 이렇게 볼 때 10여 만 명의 북한 관중이 운집한 평양의 한복판에서 태극기가 휘날리고 애국가가 울려퍼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노릇이다. 더구나 객관적인 전력상 남한이 북한보다 한 수 위여서 남한이 경기에서 이긴다면 북한 관중들의 실망감은 더 클 것이다. 통제사회인 북한에 유럽과 같은 훌리건은 없지만 순간적으로 관중들이 게임에 져 흥분한다면 감당하기 어렵다. 실제로 북한은 2005년 3월 김일성 경기장에서 치른 독일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 예선 B조 3차전 이란과 홈경기에서 심판 판정에 격분한 관중들이 병과 의자 등을 그라운드에 내던지는 난동을 부렸다. 그 후 북한은 제3국(태국)에서 일본과 무관중 경기를 치르는 중징계를 받기도 했다. 북한 주민뿐 아니라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축구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에는 남한의 프로 리그와 비슷한 1, 2, 3부 리그와 청년 리그, 각 공장팀이 있다. 1부 리그에는 4.25팀, 소백수팀, 기관차팀, 압록강팀 등 실력 있는 15개 팀이 있으며, 2부와 3부에는 각각 40개, 80개 팀이 있다. 세계 상위권 대열에 있는 북한 여자팀도 선수층이 두텁다. 북한은 주요 체육단에 여자 축구팀 보유를 의무화하고있다. 평양에 6개 팀이 있으며 전국적으로 12개 여자 축구팀이 있다. 김정훈 감독이 이끄는 북한 대표팀은 최강 클럽팀인 4.25팀 소속 선수들이 주축이며, 보스니아 리그에서 뛰고 있는 홍영조와 일본에서 뛰고 있는 정대세(가와사키)가 결합해 최강의 라인업을 구축하고 있다. 북한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아시아 최초로 8강 신화를 이룩했고, 남한은 2002년 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기록했다. 3월 26일은 남북한 중 한 쪽의 꿈(★)이 이뤄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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