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1,212 건 검색)
- 조촐하게 지난 김정일 사망 13주기 참배…녹록치 않은 북한 상황 반영한 듯
- 2024. 12. 18 14:45정치
- ... 주석이 사망한 이후 그의 시신을 영구보존하면서 ‘금수산기념궁전’으로 이름을 바꿨다. 2011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하자 그의 시신도 함께 영구보존하면서 금수산태양궁전으로 이름을 다시 바꿨다....
- 김정은, 김정일 13주기 맞아 금수산태양궁전 참배
- 2024. 12. 18 07:29정치
- ... 금수산 태양궁전을 참배했다. 조선중앙통신은 18일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와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의 입상에 김정은 동지께서 드리는 꽃바구니가 진정됐다”며 이렇게 보도했다. 통신은 “위대한...
- ‘김일성·김정일’에서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초상화 정치 시작됐다
- 2024. 05. 22 16:32정치
- ... 노동신문은 소개했다. 당 중앙간부학교 교내 혁명사적관 외벽에는 김 위원장의 초상화가 김일성·김정일 등 선대 지도자와 나란히 진열됐다. 교실 칠판 위에도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초상화가...
- 북, 김정일 생일 ‘광명성절’ 맞아 업적 강조…“김정은이 계승 발전”
- 2024. 02. 16 11:11정치
- ... 지정하고 민족 최대 명절로 기념한다. 북한 공식매체 노동신문은 이날 1면에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는 강국 조선의 존엄과 번영의 만년 초석을 마련하여 주신 절세의 애국자이시다’라는 제목의...
스포츠경향(총 66 건 검색)
- [간밤TV]‘선녀들’ 北김정일 마음 훔친 스파이 ‘흑금성’→사상 초유 ‘북한 무장공비’ 남침 사건
- 2021. 05. 24 08:14 연예
- ‘선을 넘는 녀석들 : 마스터-X’ MBC 제공‘선을 넘는 녀석들’ 우리 역사 속 스파이의 흔적을 찾아 흥미진진한 배움 여행을 펼쳤다. 5월 23일(일) 방송된 MBC ‘선을 넘는 녀석들 : 마스터-X’(연출 한승훈/ 이하 ‘선녀들’) 5회는 ‘스파이(SPY)’ 특집으로 꾸며져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1990년대 세간을 들썩이게 한 ‘북한으로 간 스파이’ 암호명 ‘흑금성’의 이야기부터 1968년 1월 21일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은 북한 무장공비의 청와대 습격 사건 ‘1.21사태’까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실화가 시청자들을 빠져들게 했다. 이날 전현무, 김종민, 유병재와 ‘역사 마스터’ 심용환, ‘심리 마스터’ 김경일은 환상 호흡을 자랑하며 지식 시너지를 높였다. 심용환은 “한반도 위기 속 ‘선을 넘으려는 자’와 ‘선을 지키려는 자’ 사이의 보이지 않는 첩보 전쟁이 있었다”라며 긴장감 넘칠 이번 배움 여행을 소개했고, 김경일은 ‘스파이’ 주제와 딱 맞는 심리학적 시선으로 풀이를 더해 흥미를 자극했다. 먼저 북핵 문제로 한반도 위기가 고조되던 1990년대 등장한 스파이, 암호명 ‘흑금성’ 박채서의 공작 활동은 영화 같은 실화로 눈길을 끌었다. 사업가로 신분을 위장한 흑금성은 북한 최고 지도자 김정일을 만나는 것까지 성공하지만, 북한의 대선 개입을 막기 위한 선택을 하면서 위기에 빠졌다. 이에 언론에 그의 신분이 노출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됐다. 그러나 흑금성은 인맥을 이용해 북한으로부터 가족의 안전을 확보하고, 나아가 대북 사업까지 펼치며 활약했다. 2005년 가수 이효리와 북한 무용수 조명애가 함께 찍은 최초의 남북 합작 광고가 바로 그것. 하지만 흑금성은 민간인 신분으로 북한과 접촉한 것이 문제가 되어, 국가 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는 결말을 맞게 됐다고. 유병재는 실제 황정민, 이성민이 출연한 영화 ‘공작’이 ‘흑금성’을 모티브로 제작됐다고 해 관심을 모았다. 이어 1968년 ‘1.21사태’, 일명 ‘김신조 사건’이 소개됐다. 전현무는 “간첩의 존재는 알고 있었을 텐데, 청와대 기습은 아무도 상상 못했을 것 같다”고 놀라워했다. 특히 인간병기로 훈련된 북한 124부대의 혹독한 훈련법은 충격을 안겼다. 그들은 맨발로도 걸을 수 있도록 굳은살을 의도적으로 만들고, 극강의 정신력을 기르고자 무덤을 파서 시체 옆에 자는 훈련도 했다고. 또 그들은 군사분계선의 철조망을 끊고 발각을 막기 위해 원상 복구시키는 철저함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 무장공비들은 뜻밖의 돌발 변수 ‘나무꾼 우씨 4형제’와 마주치며 당황에 빠지게 됐다. ‘심리 마스터’ 김경일은 이때 북한 무장공비가 나무꾼 우씨 4형제를 살려준 이유에 대해 “군기가 꽉 잡힌 부대일수록 돌발 변수에 취약하다. 규칙에 없던 상황과 마주하며 능동적으로 대처를 못한 거다”라고 해석했다. 구사일생한 나무꾼 우씨 4형제의 신고로 한국군은 북한의 남침 계획을 알 수 있었다고. 이후 31명의 북한 무장공비들은 트렌치코트를 입은 수상한 차림새로 서울 시내까지 내려왔고, 서울 한복판에서 총격전이 벌어지는 사상 초유의 사건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그들을 막은 최규식 종로경찰서장은 순직을 하고, 민간인들이 탄 버스가 수류탄에 맞으며 희생자들도 나오게 됐다. 김경일은 목숨을 던져 북한 무장공비를 막은 최규식 서장에 대해 “만약 개인적 보상을 생각했다면 이런 행동이 안 나왔을 것이다. 막지 못했을 때 위험해질 시민들을 생각했을 것”이라며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선녀들’은 사건 이후 50여 년 만에 개방된 ‘1.21사태’ 교전 흔적이 남은 현장을 찾았다. 소나무에는 당시의 치열했던 상황을 짐작하게 하는 총탄 흔적이 있어 눈길을 끌었다. 당시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는 남한으로 귀순했고, 결국 목사의 길을 걷게 됐다고. 또 ‘1.21’ 사태로 인해 주민등록증이 생기고, 군복무 기간이 연장되는 등 다양한 나비효과가 소개돼 눈길을 끌었다. 한편, 다음 방송에서는 ‘1.21사태’ 이후 비밀리에 시작된 복수 혈전이 예고돼 관심을 집중시켰다. 지옥의 섬 ‘실미도’를 찾는 ‘선녀들’의 모습이 담기며, 이곳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진 것인지 궁금증을 높였다. MBC ‘선을 넘는 녀석들 : 마스터-X’는 매주 일요일 밤 9시 10분 방송된다.
- 간밤TV인간병기 ‘북한 124부대’ 훈련법흑곰성
- 남북정상회담 모의회담서 ‘김정일 대역’ 김달술씨 별세
- 2020. 04. 07 19:36 생활
- 김달술 전 통일부 남북회담본부 상임연구위원 연합뉴스.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준비했던 모의회담 때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대역으로 회담 준비에 참여한 김달술 전 통일부 남북회담본부 상임연구위원이 7일 오전 6시16분쯤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유족이 전했다. 향년 90세. 고인은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후 당시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의 전신)에 들어가면서 남북문제에 관여했다. 1972∼1978년 남북적십자회담 대표 겸 남북회담 사무국장, 1985년 통일원 남북대화사무국 자문위원, 1992∼1996년 남북회담사무국 상임연구위원을 지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9일 앞두고 청와대에서 열린 모의회담에서 고인이 김정일 위원장, 정세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이 김용순 대남담당비서 역할을 각각 맡아 돌발상황에 대비하는 훈련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은 이를 위해 북한 신문과 텔레비전을 보면서 김 위원장의 일거수일투족을 분석하고 똑같이 연기하는 훈련을 했을 뿐 아니라 각종 남북간 현안에 대한 북한의 입장도 연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세현 수석부의장은 “1980년대 남북대화사무국 자문위원으로 있으면서 1970년대 남북대화 경험을 통일원, 통일부 후배들에게 알려주시느라 애썼다”며 “고인이 2000년에 원래는 2시간 하기로 했다가 4시간으로 길어진 모의회담을 끝내고 나오면서 ‘DJ(김대중 당시 대통령)가 빨갱이가 아니구먼. 김정일한테 안 밀리겠어’라고 말한 게 기억난다”고 회고했다. 유족은 부인 박영순씨와 김훈(강원대 교수)·김엽·김국경씨 등 2남 1녀, 사위 박용일(플러스허브 대표)씨, 며느리 서영주(강원도 여성특별보좌관)·김성란씨가 있다. 빈소는 분당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3층 12호실에 마련했지만 유족은 “조문은 정중히 사양한다”고 밝혔다. 발인은 9일 오전 8시. ☎ 031-787-1512
- 자유조선, 김일성·김정일 초상화 훼손 영상 공개
- 2019. 03. 21 11:05 생활
- ‘자유조선’(옛 천리마민방위)이 북한 영내에서 벌어진 일이라며 김일성·김정일 초상화를 훼손하는 34초 분량의 영상을 20일 게시했다. 연합뉴스2017년 피살된 김정남의 아들 김한솔과 가족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켰다고 주장하는 단체 ‘자유조선’(옛 천리마민방위)이 북한 영내에서 벌어진 일이라면서 김일성·김정일의 초상화를 훼손하는 영상을 게시했다. 이 단체는 지난 20일 ‘조국 땅에서’(In Our Homeland)라는 제목으로 34초 분량의 영상을 올렸다. 영상에는 모자이크 처리된 한 남성이 사무실로 보이는 곳 벽에 걸린 김일성·김정일 초상화를 떼어 바닥에 내던지는 장면이 등장한다. 초상화를 감싼 유리가 소리를 내며 깨지면서 파편이 사방에 튀고, 액자는 산산조각이 났다. 이어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신격화를 타도한다. 조국을 위하여 우리는 일어난다”는 자막이 나왔다. 아울러 이 영상은 서두에서 영문 자막을 통해 영상 촬영 시점이 최근이라는 점을 암시하기도 했다. 최근 워싱턴포스트(WP)는 지난달 22일 스페인 주재 북한대사관에 괴한들이 침입해 공관 직원들을 결박하고 컴퓨터와 휴대전화 등을 강탈해간 사건 배후에 이 단체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고 전했다. 이런 정황으로 미뤄 이 단체가 이번 영상 촬영 시점과 장소 등을 명확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스페인 주재 북한대사관에서 해당 영상이 촬영됐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해외의 북한대사관은 북한의 통치권이 미치는 북한 영내다. 또 이 단체가 북한에서 초상화만 들여와 중국 등지에서 촬영하거나 북한 내부에서 촬영된 영상을 입수해 게시했을 수도 있다. 이 단체는 지난 1일부터 이름을 기존 ‘천리마민방위’에서 ‘자유조선’으로 바꾸고, 북한을 대표하는 임시정부 건립을 선언한다고 주장했다.
- [간밤TV] ‘인생술집’ 김연자, 6시간 이동해 북한 김정일 본 사연
- 2019. 02. 01 08:14 연예
- 가수 김연자(60)가 솔직한 내면의 이야기를 털어놨다. 김연자는 지난달 31일 방송된 tvN 예능 프로그램 <인생술집>에 출연해 자신의 히트 곡 ‘아모르 파티’를 열창하며 등장했다. 김연자가 ‘인생술집’에서 자신으 인생 이야기를 꺼냈다. tvN 방송 화면 캡처이날 방송에서 김연자는 “‘아모르 파티’가 2013년 발매를 했다. 주위 팬들이 거의 중장년층인데 노래를 어려워했다”며 “나도 힘들어 포기했는데 그룹 엑소와 함께 KBS1 <열린 음악회>에 출연해 ‘아모르 파티’ 무대를 꾸몄고 엑소 팬들이 제발 ‘아모르 파티’ 40초만 들어 봐달라고 호소한 것이 화제가 됐다”고 했다. 그는 북한 노동당 총비서 김정일 본 일화도 전했다. 김연자는 “북한에서 2000명 앞에서 2일 동안 단독 공연을 했다”며 “공연을 마치고 뒤풀이를 가졌는데 갑자기 북 관계자가 호출을 해 ‘갈 데가 있냐’고 물으며 나와 일행을 특급 열차에 태웠다. 6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함흥이었고 어느 큰 문 앞에서 김정일이 등장했다”고 했다. 또한 김연자는 과거 겪었던 우울증도 고백했다. 그는 “50대에 접어들어 인생을 돌아보니 나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다. 돈도 없고 아이도 없었다”며 “20년간 일본 활동을 했는데도 명예밖에 안 남았다. 앞길이 깜깜해 우울해했고 매일을 울었다”고 했다.
- 간밤TV
주간경향(총 39 건 검색)
- 김일성·김정일 부정하는 김정은 ‘두 국가론’…북한 헌법 개정 될까(2024. 10. 14 06:00)
- 2024. 10. 14 06:00 정치
- 김정은 ‘두 국가론’ 강조하면서도 헌법 개정 회의에는 불참 헌법개정 정확한 사실관계 확인 안 돼…소폭 수정보충한 듯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10월 7일 창립 60주년을 맞이한 김정은국방종합대학을 축하 방문하고 연설을 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8일 보도했다./연합뉴스 북한이 ‘조용한’ 헌법(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 개정을 했다. ‘통일’ 문구 삭제, ‘영토’ 명기 등을 할 것이란 정부 예측과 달리 노동 연령과 선거 나이 등에서 소폭의 수정보충(북한식 ‘개정’ 표현)만 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올해 1월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 6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등에 참석해 ‘큰소리’ 친 것과 다르다. 김 위원장은 “헌법에 대한민국을 철두철미 제1의 적대국으로, 불변의 주적으로 확고히 간주하도록 한다”고 말해 왔다. 김 위원장의 의지는 지난 10월 7~8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열린 북한 최고인민회의(한국식 ‘국회’)가 아닌 다른 곳에서 재확인됐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의 10월 8일자 보도에 따르면 최고인민회의가 열린 10월 7일, 김 위원장은 김정은국방종합대학을 찾았다. 이곳에서 “우리가 남녘해방이라는 소리도 많이 했고, 무력통일이라는 말도 했지만 지금은 전혀 이에 관심이 없으며 두 개 국가를 선언하면서부터는 더더욱 그 나라를 의식하지도 않는다”며 “대한민국을 공격할 의사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두 국가론’은 여전히 강조하면서도 이를 위한 헌법 개정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김 위원장의 모순된 행보는 ‘두 국가론’을 둘러싼 북한의 복잡한 속내를 드러낸다. 당장 김 위원장의 ‘두 국가론’은 김일성·김정일이 ‘온갖 노고’와 ‘심혈’을 다 바쳤다는 과업부터 부정해야 한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께서는 나라의 통일을 민족지상의 과업으로 내세우시고 그 실현을 위하여 온갖 로고와 심혈을 다 바치시였다.” 북한 헌법 ‘서문’에 박혀 있는 내용이다(<북한법령집>(상권), 국가정보원, 2024). 김 위원장의 모든 권력은 김일성·김정일의 혈통이란 단순한 사실에서 나왔다. 북한은 지난 10월 7~8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1차 회의를 열어 사회주의헌법 일부 내용을 수정보충(개정)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9일 보도했다. /연합뉴스 북한 헌법은 개정됐나 “객관적 현실을 받아들이고 두 개의 국가를 수용하자.”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지난 9월 19일 열린 ‘9·19 평양공동선언 6주년 기념사’에서 남긴 말이다. 임 전 실장의 발언은 김 위원장의 ‘두 국가론’을 추종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본래 ‘두 국가론’은 북한보다 한국의 통일 방안에 더 가깝다. 1980년대 이후 북한은 ‘1민족 1국가 2제도 2지방정부’라는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을 기본으로 했다. 이를 ‘적화통일’ 시도로 본 한국은 ‘1민족 2국가 2제도 2지방정부’라는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을 주장했다. ‘선평화정착, 후통일논의’가 기본틀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임 전 실장 생각과 달리 김 위원장의 ‘두 국가론’은 통일을 지향하는 ‘잠정적 특수관계’가 아닌 과거 동독이 제시한 ‘적대적 2국가론’에 가깝다는 점이다. 이 경우 통일의 기본단계인 남북 간 화해 협력·평화 공존부터 요원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임 전 실장 발언을 두고 “상황에도 맞지 않고, 현실성도 없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그런데 한국에서 ‘두 국가론’이 비판받는 것처럼 북한 역시 ‘두 국가’로의 전진이 쉬운 것은 아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이번 헌법 개정 상황이다. 결과를 두고 크게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통일’ 문구 삭제 등의 헌법 개정이 있었지만 북한이 공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총장은 “만약 개정을 했음에도 공개하지 않았다면 서해 국경선 문제 때문일 것”이라며 “북한의 서해 국경선은 우리의 북방한계선(NLL)과 겹칠 가능성이 높은데 이 경우 충돌 가능성이 높아진다.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는 것은 ‘한국과 더 마주 서고 싶지 않다’는 김 위원장 뜻과는 다른 상황”이라고 말했다. 둘째는 대대적인 헌법 개정은 없었다는 것이다. 이를 방증하는 정황이 있다. 북한은 지난 10월 9일 남측과 연결되는 도로·철도를 끊고 군사분계선(MDL) 일대에서 요새화 공사를 진행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북한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명의의 보도문이 조선중앙통신에 공개되면서 알려졌다. 북한은 이 보도문에서 “우리 공화국의 ‘주권행사 영역’과 ‘대한민국 영토’를 철저히 분리시키기 위한 실질적인 군사적 조치를 취한다는 것을 공포한다”고 했다. 적어도 북한 헌법에 영토조항이 신설됐다면 ‘공화국 주권행사 영역’과 같은 모호한 표현이 사용되기는 어렵다. 최고인민회의 결정 사항이라는 점 역시 ‘대대적 헌법 개정은 없었다’는 주장에 힘을 싣는다. 홍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최고인민회의는 당 전원회의 등과 달리 북한 주민들이 직접 영향을 받는 입법 활동”이라며 “만약 중폭 이상의 헌법 개정이 이뤄졌다면 김 위원장이 직접 참석하고, 취지를 설명하는 시정연설 등을 진행하는 것이 통상적인데 이 과정이 없었다”고 말했다. 양 총장 역시 “북한은 최고인민회의 결정 사항은 아무리 민감한 사안이라도 최대한 요약해서 보도해왔다”며 “헌법 개정이 보류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고 말했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장이 지난 10월 7일 창립 60주년을 맞이한 김정은국방종합대학을 축하방문하고 연설을 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8일 보도했다./연합뉴스 헌법 개정을 하기에는 ‘시기’가 좋지 않다는 분석도 있다. 오는 11월 미국 대통령선거가 있다. 대외 환경 변화를 앞두고 북한이 불확실한 ‘도박’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홍 위원은 “2019년 선출한 북한의 14기 대의원은 원래 올해 3월 임기가 끝나야 하는데 연장된 상황”이라며 “미국 대선 결과를 보고 필요하면 내년 초 15기 대의원을 구성해 헌법 개정을 하는 것이 정치적 선전 효과가 훨씬 더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북한의 헌법 개정 여부는 정확한 사실관계는 확인되지 않고, 불확실성만 커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무엇을 했든 북한이 ‘조용하다’는 것이다. 헌법에서 ‘통일’ 문구 삭제, ‘영토’ 명기 등은 김 위원장이 공개적으로 ‘큰소리’ 쳐온 사안들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볼 필요가 있다. 헌법을 개정 ‘했냐’, ‘하지 않았냐’가 아닌 ‘왜 조용할 수밖에 없는가’이다. 북한은 왜 조용한가 북한의 헌법 개정이 지향하는 것은 ‘두 국가론’이다. 이는 곧 ‘생존전략’이다. 북한은 한국과 얽힌 민족적 특수관계를 ‘위협’으로 판단한다. 특히 안보와 외교적 측면에서의 갈등이 두드러진다. 실제로 북한의 핵무장에 맞서 미국의 핵전력과 한국의 재래식 전력이 결합한 ‘통합억제’ 구상이 본격화됐다. 북·미관계 정상화, 유엔 제재 해제 등 외교적 측면에서도 ‘당사자’를 주장하는 한국 입장을 배제하기 어렵다. 북한은 차라리 한국과 별개의 국가로 인식되면 생존을 위협하는 변수를 하나 줄일 수 있다고 본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석좌연구위원은 이러한 상황을 두고 ‘방어적 두 국가론’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전략은 김 위원장 발언에서도 확인해볼 수 있다. “(한국을) 의식하는 것조차 소름이 끼치고 그 인간들과는 마주 서고 싶지도 않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핵 사용과 관련해서는 “적들이 우리 국가를 반대하는 무력사용을 기도한다면” 같은 가정을 붙인다. 이를 좀 더 정제된 표현으로 설명할 땐 ‘영토 평정’이라는 단어를 쓴다. ‘상대가 나의 영토를 공격했을 때 방어를 넘어 상대 영토까지 점령한다’는 의미다. 문제는 일부 언론, 전문가들이 이를 ‘국토 완정’과 구분 없이 쓰며 객관적 상황 파악을 어렵게 한다는 점이다. 과거 김일성 주석이 사용한 ‘국토 완정’은 ‘적화통일’을 의미하는데 김 위원장은 이를 사용한 적이 없다. 일각의 주장처럼 두 단어의 의미가 같다면 북한은 ‘적화통일’을 추진하면서 헌법에선 ‘통일’을 삭제하고, 별개의 두 국가임을 주장하는 것이 된다. 이는 논리적 모순이다. 두 국가론을 북한의 ‘생존전략’으로 볼 때 김 위원장이 집착하는 헌법 개정의 필요성도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또 이번 최고인민회의에서 헌법 개정을 하지 않았더라도 북한은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점 역시 알 수 있다. 결국 문제는 ‘왜 조용한가’이다. 답은 두 국가론이 안착하는 데 필요한 정지작업들에서 추론해볼 수 있다. 첫째는 김일성이 북한 체제에 도입한 이른바 ‘민족주의적 공산주의’를 어떻게 넘을 것이냐다. 조 위원은 “김일성이 만든 주체사상의 핵심이 조국 해방, 조국 통일이고 이 체제 안에서 김정일·김정은의 권력승계가 안정적으로 이뤄졌다”며 “이제 와서 김정은이 민족, 통일을 버리겠다고 하면 조국해방전쟁이라고 선전한 6·25전쟁은 뭐라고 설명할 것이고,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활동은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결국 김정은이 하려는 것은 북한 체제를 만든 김일성의 무덤을 파묘해 버리겠다는 것인데 북한 내 반체제 세력만 키우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결국 헌법 개정을 했든 안 했든 북한의 침묵은 주민들이 납득할 설명을 찾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0월 9일 싱가포르 오차드호텔에서 열린 제47회 싱가포르 렉처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둘째는 현상 변경 추진으로 인한 주변국과의 관계다. 국제사회는 70여 년 동안 남북한의 민족적 특수관계 위에 외교정책을 설정하고 있다.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이 ‘한반도 상황의 안정적 관리’를 말하는 것은 안착된 구조의 변경을 바라지 않는다는 의미다. 특히 북한의 시도는 중국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양안 문제 때문이다. 잔더빈(詹德斌) 상해대외경제무역대학 교수(전 환구시보 한국 특파원)는 “대만도 ‘두 국가론’을 추진하고 있는 만큼 중국은 한반도 상황에 관한 관심이 클 수밖에 없다”며 “북한이 한국을 적대국으로 선언하고 통일정책을 변경하면 ‘남북한의 관계 개선과 대화를 통한 상호 신뢰 구축,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통일을 지지한다’는 중국 입장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별개의 국가가 된 북한과 한국 사이에 분쟁이 발생해도 제3자인 중국이 함부로 개입하거나 중재에 나서지 못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북한의 두 국가론이 오히려 외교적 고립을 심화할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다는 의미다. 두 국가론은 비단 북한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정부도 전략적으로 북한의 두 국가론에 어떻게든 대응해야 한다. 윤석열 정부의 통일 정책은 지난 8월 15일 광복절에 나온 ‘8·15 경축사’ 이후 이른바 ‘자유의 북진’이라고 불린다. 당시 윤 대통령은 “자유가 박탈된 동토의 왕국, 빈곤과 기아로 고통받는 북녘땅으로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확장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해당 주장은 남북이 국가 대 국가의 관계가 아닌 상호 인정하는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임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국가 간 관계에서 해당 발언은 내정간섭이 될 수 있다. 일각에서는 북한의 시도만으로 민족적 특수성은 끊어지지 않는다는 주장도 나온다. 한국인이기에 잘 보이지 않는 현실이 있다. “북한이 남한을 국가로 지칭하는 것은 사실 놀라운 일은 아니지 않나. 국제사회 대부분이 북한과 남한을 서로 다른 두 나라로 인식해서 각각 대사급 수교 관계를 맺고 있다.” 잔더빈 교수의 말이다.
- [표지이야기]김정일 사망, 51시간 동안 무슨 일이(2011. 12. 27 20:33)
- 2011. 12. 27 20:33 정치
- ㆍ김정은 체제’ 공식화를 위한 준비 시간… “권력투쟁 일어날 시기 아니다” 51시간 동안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사망 소식이 외부에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사망 후 51시간 만이었다.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을 때 22시간 후 소식이 전해졌던 것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난다. 김 위원장 사망 후 51시간 동안 북한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궁금증이 높아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장례식 준비와 ‘김정은 체제’ 공식화를 위한 준비 시간”이라고 분석했다. 12월 19일 정오에 북한 조선중앙TV 아나운서가 검은 상복을 입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7일 8시30분 과로로 열차에서 사망했다고 발표하고 있다. 김 위원장 사망이 51시간 만에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이다. /연합뉴스 12월 17일 오후 북한의 지방 도시를 방문했던 중국 소식통의 휴대전화가 불통이 됐다. 평양으로 통하는 일반회선 전화는 하루 종일 연결되지 않았다. 평양과 지방 도시를 연결하던 열차 운행은 중단됐고, 지방정부·군 고위간부들이 차량으로 평양으로 이동하는 모습이 목격됐다. 12월 22일 아사히신문이 중국 소식통을 인용한 12월 17일 북한의 모습이다.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김 위원장의 사망 소식이 유출되지 않도록 통제가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김 위원장의 사망 소식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상 동향 없는 건 체제 안정화 의미 김 위원장의 사망 소식이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사망 후 51시간 만이었다. 12월 19일 정오 조선중앙TV와 조선중앙방송은 ‘특별방송’을 통해 김 위원장이 지난 17일 오전 8시30분 현지지도를 하다가 갑자기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51시간의 공백 동안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부검’을 했다는 사실 뿐이다.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일 동지의 질병과 서거원인에 대한 의학적 결론서’에서 “(12월)18일에 진행된 병리해부검사에서는 질병의 진단이 완전히 확정됐다”고 발표했다. 사인은 중증급성심근경색과 심장성 쇼크 합병이다.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 사망 때도 부검을 했다. 경남대 김근식 교수(정치외교학과)는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최고지도자가 죽으면 사망 원인을 투명하게 하기 위해 부검을 한다”고 설명했다. 부검은 간략하게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날 북한은 발 빠르게 232명의 ‘장의위원’ 명단도 발표했다. 1번은 후계자 김정은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고, 2번이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었다. 북한의 권력 서열을 보여주는 리스트이기도 하다. 232명이라는 구체적인 장의위원을 발표한 것은 장례식 준비가 잘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경남대 이수훈 교수(정치사회학)는 “장의위원이 232명이다. 200명도 아니고, 232명이라는 구체적인 숫자가 제시된 것은 51시간 동안 장례식 준비를 철저하게 했음을 보여준다”면서 “232명에 들어간 이들은 북한의 권력층이라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후 북한은 김 위원장의 시신을 공개했고, 김정은 부위원장이 조문객을 받는 모습을 공개했다. 김 위원장의 장례식을 통해 김정은 부위원장의 시대로 넘어갔음을 보여준 것이다. 북한 지도부가 장례식 준비와 부검 등을 하면서 51시간을 사용했지만, 가장 중요했던 것은 김정은 체제 안정화를 위한 준비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지난해 9월 북한 노동당 대표자회에서 김정은은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에 오르면서 후계자라는 사실을 대내외에 알렸다.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은 역설적이게도 1년 동안 김정은 체제가 안정화 됐다는 평가를 받는 계기가 됐다. 김 위원장 사망이라는 큰 사건이 일어났지만, 북한 체제 내에서 이상 동향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년 동안 김정은 체제가 자리 잡지 못한 상태였다면 51시간 안에 체제를 안정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12월 20일 오후 평양 금수산기념궁전에서 유리관에 싸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시신이 공개됐다. /연합뉴스 세종연구소 백학순 수석연구위원은 “김 위원장 사망 이후 곧바로 위대한 영도자로 김정은을 표현했다. 김정은이 약했다면 그런 식으로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51시간 동안 김정은 체제를 공고화한 것이 아니라, 실세들 사이에서 김정은을 지도자로 합의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런 합의가 가능한 것은 1년 동안 그런 준비를 쭉 해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북한 내부에서 권력 투쟁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는 질문에 백 수석연구위원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권력투쟁이 일어날 시기가 아니다”면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는데도 경제가 엉망이라면 그때서나 권력투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근식 교수도 “권력이 집중화된 나라에서 51시간 동안 쿠데타나 권력 저항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체제 정비가 어느 정도 된 것”이라며 “51시간 동안 김정은 체제가 성공적으로 준비됐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권력이라는 것은 초기에 단합을 하게 된다”고 분석했다. ‘사망 시점·장소 발표와 달라’ 의혹 김정일 위원장 사망 이후 김정은 부위원장이 차기 지도자로 인정받았다는 정황도 나왔다. 12월 19일 김 위원장 사망 소식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직전 김 부위원장은 군에 ‘김정은 대장 명령 1호’를 보냈다. 훈련을 중지하고 즉각 소속 부대로 복귀하라는 지시였다. 이 명령은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명의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당 중앙군사위는 2010년 9월 44년 만에 열린 당대표자회의에서 당 규약 개정을 통해 상설 최고군사기관으로 격상됐다. 김정은 체제의 권력 핵심기관이 당 중앙군사위가 될 것임을 보여준다. 김 위원장 사망 사실이 북한 내부의 핵심 인물들에게 전달됐다는 외신 보도도 나왔다. 12월 23일 일본 아사히신문은 북한 소식통을 인용해 김 위원장이 사망했던 12월 17일 저녁 때까지 30여 명의 당 정치국원과 중국 주재 대사 등에게 전달했다고 보도했다.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은 22시간 만에 알려졌다. 51시간과 22시간의 차이는 어떻게 봐야 할까. 전문가들은 체제 안정성의 차이라고 설명했다. 이수훈 교수는 “김정은 체제가 김정일 체제보다는 취약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정은 체제에 대해 측근들이 논의를 해야 할 시간이 더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51시간보다 더 많은 공백 시간이 있었다는 설도 일부에서는 제기되고 있다. 김 위원장 사망 시점과 장소가 북한 공식 발표와 다르다는 주장이 외신에서 흘러 나왔다. 12월 22일 일본 아사히TV가 소식통을 인용해 “김 위원장이 평양에서 약 40km 떨어진 별장 집무실에서 의식불명 상태로 발견됐다”고 전했다. 일본 요미우리신문도 김 위원장이 12월 16일 밤 평양 관저에서 사망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내놓았다.
- [표지이야기]외신이 본 김정일 사망(2011. 12. 27 20:33)
- 2011. 12. 27 20:33 정치
- ㆍ미·중·러·일 전통적 대결구도에 따라 향후 전망 달라 12월 19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69)의 사망 소식이 북한 조선중앙방송을 통해 알려진 뒤, 한반도 주변 4개국(미국·중국·일본·러시아)의 언론은 일제히 이 사실을 대서특필했다. 또한 사설과 기사를 통해 김 위원장 사망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알렸다. 국적은 다르지만 각 언론사는 북한에 급변사태가 없을 것이라는 점에는 같은 의견을 보였다. 하지만 전통적인 대결구도에 따라 각국의 전망은 조금씩 달랐다. 중국과 러시아의 언론은 북한에 비교적 우호적인 논평을 냈으며, 자신들과 북한의 협력관계가 지속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반면 일본과 미국의 언론은 김 위원장을 ‘독재자’로 묘사했다. 국제사회의 대북지원 중단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20일 후진타오 중국 공산당 주석(왼쪽)이 주중 북한대사관을 방문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사망에 애도를 표하고 있다. 환구시보는 “중국이 북한의 확고한 지지자가 되어야 한다”고 논평했다. /신화통신 중·러, ‘우호관계 유지’ 중국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의 자매지 환구시보(環球時報)는 20일 사설을 통해 “중국은 북한의 매끄러운 권력 교체에 있어 강력하고 확고한 지지자가 되어야 한다”고 썼다. 또한 환구시보는 “중국은 단호히 북한의 독립을 유지시키고, 외부 개입으로부터 북한의 권력 교체를 지키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북한이 스스로의 길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고 썼다. 환구시보는 북한에 호의적이지만은 않은 중국 내 일부 여론을 함께 소개하면서도 “이는 속좁은 시각이다. 아무리 비싼 대가를 치르더라도 악화된 전략적 환경을 상대하는 것보다 주변국들과 친밀하게 지내는 것이 낫다”고 논평했다. 환구시보의 시각은 북한에 대한 ‘무조건 지지’보다 중국의 국익을 고려한 관점에 가깝다. “북한은 중국의 특별한 전략적 파트너다. 이 관계를 유지시키는 것이 동북아에서 중국의 주도력을 높이고, 중국 주변 환경을 안정시키는 데 결정적인 요소다.” 중국 정부 소유의 통신사 신화통신(新華通訊은 김 위원장이 사망한 19일 당일 홈페이지에 큰 글씨로 ‘조선 최고지도자 김정일 17일 별세’라는 제목을 걸기도 했다. 러시아의 국영방송 ‘로씨야의 소리’는 김 위원장 사망 직후인 19일 오후, “러시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거가 양국의 친선관계 발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라는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의 말을 전했다. 이 방송은 러시아 내 북한 전문가들의 입을 빌려 김 위원장의 후계자로 지목된 김정은 노동당 군사위 부위원장 시대를 전망했다. 알렉산드르 워론조프 러시아과학원 동방학연구소 한국몽골과장은 방송을 통해 “김 부위원장은 혼자가 아니며 노혁명가들이 그의 주변에 있다. 나는 정세가 안정적일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게오르기 톨로라야 러시아경제연구소 한국연구소장은 방송을 통해 “남한이 북한에 압력을 가해 체제를 전복할 수 있는 기회가 조성되었다고 생각할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일본 언론들은 공통적으로 북한의 일본인 납북자 문제를 거론했다. 요미우리 신문은 20일 사설을 통해 “북한이 납치 문제 해결에 협력하길 거부하고, 핵무기에 대한 생각을 바꾸지 않는 한 무너진 경제를 재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정은 체제에 대해서 “북한이 심각한 무질서로 즉각 빠지리라곤 상상할 수 없다”면서도 “3대 지도자로 권력을 이양하는 과정은 여전히 초기 단계이며, 군 내의 김정은의 지지기반 역시 확고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또한 요미우리 신문은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포격을 거론하며 “국제사회는 북한의 군사적 도발이나 다른 위험한 행동에 대한 경계심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국에는 “중국이 북한의 핵개발 프로그램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면서 경제적 지원을 늘린다면, 북한의 핵 능력을 향상시켜줄 뿐”이라며, 북한의 핵개발 저지에 동참해줄 것을 촉구했다. 비교적 진보 성향의 색채를 띠는 아사히 신문은 20일 사설을 통해 “북한의 혼란을 막기 위한 협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지만, 납북자 문제에 대한 해결도 촉구했다. 하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해서는 “독재자”라 부르며 “북한은 납북자들의 생사를 다시 조사하겠다는 3년 전의 약속에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산케이, ‘국제 사회 대북지원 철회’ 요구 아사히 신문은 “일본은 납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질적 진전을 만들어야 하며, 이를 위한 새로운 전략을 개발해야 한다” “일본은 향후 북한에 일어날 수도 있는 변화에 대해 유연하면서도 단호한 대책을 만들 수 있도록 스스로 준비해야 한다”며 사설을 마쳤다. 극우보수진영을 대표하는 산케이 신문은 20일 발표한 ‘주장’에서 김 위원장을 “테러와 핵으로 국제사회의 평화를 위협하는 위험한 독재자”라 칭했다. 또한 “일본처럼 자유, 민주주의, 인권의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는 북조선의 체제 변혁을 위해 힘을 합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산케이 신문은 23일 한층 발언 수위를 높여 국제사회의 대북지원 철회를 요구했다. “김일성 사후 북조선은 ‘급격한 변화’를 두려워한 국제사회의 지원 때문에 붕괴하지 않고 독재체제가 유지됐다. 국제사회는 속은 것이다.” 또한 산케이 신문은 26일 예정된 중·일 정상회담에 참가하는 노다 요시히코 총리에게 “후진타오 주석에게 대북 압력노선으로의 전환을 요구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산케이 신문은 “국제사회는 과거의 실패를 거울삼아 ‘급격한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북한에 대한 지원을 삼가야 한다. 과도기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며 글을 맺었다. 미국의 뉴욕타임스(NYT)는 19일 사설 ‘북한 독재자의 죽음’에서 국제사회의 공조를 주문했다. NYT는 “조선중앙방송은 군인과 주민들이 김정은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보도했지만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다”며 “군사 경험이 없는 김정은이 대내외적인 인정을 받기 위해 도발적인 행동을 할 수 있을지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고 썼다. NYT는 미 정부가 김 위원장 사망 직후 한국, 일본의 최고지도부와 신속히 연락을 취했던 것처럼 중국과의 긴밀한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데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이야말로 “북한이 무책임하게 움직이는 데 대해 경고할 수 있는 가장 강한 영향력을 가진 국가”이기 때문이다. 사설 말미에 NYT는 “김정일의 죽음은 김정은에게 방향을 바꿀 기회를 주었다”며 “미국과 동맹국들은 강력한 제재조치를 유지하면서도 북한과 대화의지가 있음을 명확히 보여야 한다”고 썼다. 워싱턴포스트(WP)는 20일 발표한 사설 ‘3대 괴물이 북한의 운명인가’에서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비난에 절반 이상의 분량을 할애했다. WP는 “기근에 시달리거나 수용소로 보내진 주민의 비율로 볼 때 김정일은 히틀러, 마오쩌둥, 스탈린, 폴 포트와 동급이다”라고 썼다. 또한 WP는 한국은 엄청난 통일비용 때문에, 중국은 인근에 강력한 친서방 국가의 성립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북한 정권의 붕괴를 원하지 않을 것으로 봤다. 김정은 부위원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도, 검증된 바도 없이 엽기적으로 국가를 상속받으려 하는 독재자의 아들”이라고 평가했다.
- 표지 이야기
- [표지이야기]절대권력 ‘김정일 시대’ 저물다(2011. 12. 27 20:33)
- 2011. 12. 27 20:33 정치
- 2011년 12월 23일 오후 화물을 실은 트럭이 중국 랴오닝성 단둥에서 조·중우의교를 통해 북한 신의주 쪽으로 줄지어 들어가고 있다. /정지윤 기자 2011년 12월 22일 평양 시민들이 눈을 맞으며 김정일 위원장을 추모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사망했다. 북한 매체들은 김 위원장이 이날 오전 8시 30분 특별열차 안에서 심근경색과 심장쇼크가 일어나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17년 동안 절대권력을 행사해온 김정일의 시대는 그의 급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막을 내렸다. 김 위원장이 통치하던 시기 북한은 ‘고난의 행군’이라 불리는 강도 높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군부를 국가 통치의 중심에 두는 ‘선군정치’로 이 어려움을 돌파하려 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대외적으로는 화해와 대결 사이를 오고 갔다. 김 위원장은 1994년 김일성 주석 유고라는 비상상황에서도 북·미 기본합의를 이뤄내고 2000년에는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 직전까지 갔지만, 핵을 포기하지 않은 대가는 미국의 경제제재로 이어져 북한의 경제적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북한 인민들의 민생고 해결에 실패하고 북·미관계에서도 확실한 진전을 이뤄내지 못했지만, 남북 교류·협력에서는 괄목할 성과를 남겼다. 김 위원장은 2000년과 2007년 각기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나 남북정상회담을 했다. 남북 교류사의 획기적 성과다.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도 그의 업적이다. 그러나 2010년 11월에는 연평도 포격사건을 일으켜 한반도를 군사적 긴장상태로 몰아넣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11년 8월 24일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후 회담장을 떠나면서 차에 앉아 손을 흔들고 있다. 블룸버그/연합뉴스 2011년 12월 22일 판문점의 공동경비구역 북한군 병사가 남쪽 자유의 집의 동향을 살펴보며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김기남 기자 2011년 12월 22일 평양시 외곽에 설치된 김정일 위원장의 대형 모자이크 벽화 앞에서 북한 어린이들이 머리를 숙이고 있다. AP/연합뉴스 2011년 12월 21일 김일성광장에서 평양시민 수천명이 추모행렬을 이루고 있다. AP/조선중앙통신 2011년 12월 19일 베이징 주재 북한대사관 직원들이 조기를 게양하고 있다. AP/연합뉴스
- 표지 이야기
레이디경향(총 7 건 검색)
- [심영규·김정일의 남성 대담]성범죄의 민낯을 들추다
- 2016. 01. 06 16:17 화제
- 2010년 당시 모델 에이전시의 대표로 ‘착한 글래머’를 유행시키며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던 심영규씨. 2011년 그는 또 다른 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소속 여성 모델에게 강제 성추행 혐의로 고소당하고 법정 공방끝에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것. 그로부터 5년 후, 다시는 재기하지 못할 것 같았던 그가 한 권의 책을 출간했다. 김정일건강의학과의원 원장과의 공저다.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성(性)을 토로하다 기자가 심영규씨(42)를 처음 만났을 때는 그가 막 성장하고 있는 모델 에이전시의 대표로 있던 시점이다. 자신감과 패기가 넘쳤고, 자기 주관이 뚜렷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만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불미스러운 사건에 그의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성추행으로 유죄를 선고받을 때까지 모습을 지켜보며 ‘사람, 보기와는 다르네!’ 하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5년 후, 우연히 개인 SNS에서 그가 최근 자전 에세이를 출간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무슨 할 말이 남았을까? 반신반의하며 5년 전 그의 휴대전화 번호로 전화를 했고, 그렇게 김정일(58) 원장과 심영규씨의 대담이 성사됐다. 먼저, 출간한 책이 어떤 내용인지 말씀해주세요. 심영규 성추행 혐의를 받고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의 제 심경을 그대로 쓴 책이에요. “유죄 선고까지 받은 성범죄자가 무슨 자랑이라고 책을 내냐”라고 질타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 일로 인해 저는 모든 것을 잃었고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받았어요. 다른 남성들도 제 경우를 보고 경각심을 느끼고 조심하라는 의미에서 쓴 책입니다. 김정일 원장님도 함께하셨는데, 두 분은 어떤 계기로 인연이 됐나요? 심영규 원장님은 2010년에 tvN ‘백지연의 끝장토론’에 출연해 만났습니다. 주제는 ‘걸 그룹 섹시 코드 이대로 좋은가?’라는 것이었고 저는 그라비아 아이돌 기획사 대표로 찬성 쪽, 원장님은 반대쪽 패널이셨죠. 당시에는 서로 싸우듯 토론을 했는데, 이렇게 친해졌으니 아이러니하죠.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끼리 친해진 것이 신기하네요. 김정일 토론 특성상 반대편에 섰지만 저도 ‘가벼운 성적 자극(mild Sexual Arousal)’은 남성들에게 꼭 필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는 주의입니다. 사회가 경쟁을 부추기며 모두를 지치게 하는 구조에서 가벼운 성은 원기를 자극하고 상처를 치유하죠. 너무 적나라하거나 하드코어적인 포르노가 아니라면, 예를 들어 심영규씨가 기획했던 그라비아 수영복 화보 등을 보는 것으로 남성들의 긴장을 어느 정도 해소시킬 수 있는 거죠. 자극은 자극으로 끝내야 하는데 그걸 실천으로 옮기는 바람에 문제가 되는 것이겠죠? 김정일 그렇죠. 지인 중에 은행 지점장이 있는데, 고된 업무에 지칠 때마다 이상하게 대학 시절 데이트했던 여인이 떠오른다는 말을 해요. 일종의 자정 능력처럼 그런 가벼운 성적인 상상들이 치유 역할을 하는 거죠. 단, 상상에 그쳐야겠죠. 심영규 원장님, 저는 그 간극이 매우 궁금합니다. 그라비아 사업을 할 때는 사람들에게 “할 일이 없어서 이런 일을 하냐?”라며 별의별 이야기를 다 들었어요. 우리가 성적으로 너무 억압됐다는 느낌이 들어요. OECD 국가 중 포르노가 불법인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어요. 얼마 전 일본 포르노 제작사들이 일명 ‘야동’을 불법으로 다운받을 수 있는 국내 비투비나 웹하드 업체들을 다 고소했어요. 그런데 우리 법원은 야동 자체가 불법 제작물이어서 법적인 보호를 못해준다고 판결했죠. 그래서 여전히 처벌받지 않는 불법행위로 누구나 다운로드를 받고 있죠. 참 이상한 경우 아닌가요? 김정일 성적 억압이 심해지면 오히려 성에 사로잡혀버리기 쉬워요. 억압하면 할수록 원시적이고 극단적인 성을 깨우게 마련이지요. 이야기를 하다 보니 위험수위로 가는 것이 아닌가 싶네요. 여성 단체들에서 항의가 들어올 수도 있겠어요. 우리 조심합시다(웃음). 착각은 자유? 금물! 남녀가 서로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성희롱 기준에 대한 입장차 때문이다. 남성은 그저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한 농담으로 성적인 이야기를 꺼내지만 그 말에 여성은 깊은 수치심을 느낀다. 남성들은 시대가 바뀌면 모든 시각의 기준도 바뀐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고소를 당하고 억울하다고 주장한다면 너무 늦은 변명이 될 뿐이다. 심영규 요즘은 SNS 등 감시 역할을 하는 것들이 많아서 옛날처럼 가벼운 성적 농담이나 욕설에 대한 자유가 차단된 시대예요. 그뿐 아니라 누구나 어떤 이슈든 의견이 다를 수 있는데 대중의 인민재판이 두려워 쉽게 이야기를 못해요. 김정일 최근에 가수 아이유에게 ‘제제’ 논란이 있었죠? 어느 기자가 저에게 의견을 묻는 전화를 하셨어요. 여기저기 연락했지만 의견을 받지 못하고 결국 저한테 하신 거 같더라고요. “기사 나가죠?”라고 물었더니 “그렇다”라고 해서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노코멘트했습니다. 제 생각이 대중에게 전해졌을 때 혹여 난도질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죠. 심영규 섹시 성인 화보 제작사에, 성추행 전력까지 있는 저는 어떻겠습니까? 스스로 위축돼 저와 의견이 다른 이들을 만나는 것이 두려워요. 요즘은 정말 믿을 만한 소수의 사람과 술집도 아는 곳만 다녀요. 점점 단절되고 외로워져요. 김정일 그저 조심하는 것밖에 없어요. 저는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되도록 아내와 함께 다녀요. 혹여 불미스러운 일에 엮일 수도 있으니까요. 때로는 진료 중 어떤 순간에 단추를 누르면 카메라로 녹화되는 시설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심각하게 고민해요. 그런데 상담 장면을 찍는 것은 의료법으로 불법이라 불가능하죠. 심영규 여자가 만취해 쓰러져 있어도 도와주면 안 되는 사회예요. 실제로 아는 사람이 겪은 일이에요. 쓰러진 여자를 도와주려다 주변 사람들이 그걸 보고 오해해 신고해버렸죠. 경찰이 여자에게 “만약에 저 사람이 성추행을 했다면 처벌을 원하냐”라고 묻더래요. 기억을 못하는 여자는 당연히 원한다고 했겠죠. 그 이후로 바로 고소인과 피고소인으로 몰고 가버린 거죠. 그 사람이 하도 억울해서 시민 단체를 찾아갔지만 피해자가 아니면 도와줄 수 없다는 답변만 받았어요. 결국 큰돈을 주고 합의했더라고요. 성범죄는 정말 자신이 그러지 않았다면 그걸 증명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은 거예요. 심영규씨의 경우는 어땠나요? 실제로 유죄를 받았잖아요. 심영규 저는 유죄를 받았기에 할 말은 없지만 성추행이나 성희롱 사건에 엮이는 것만으로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받는다는 걸 아셨으면 좋겠어요. 시시비비를 따지는 데만 오랜 시간이 걸리죠. 1심은 보통 고소인 위주이고 2심으로 갈 때까지 1년이 꼬박 걸려요. 또 한두 번도 아니고 시도 때도 없이 경찰 조사로 불려 다니는데 가정이나 사회생활이 온전할 수 있을까요? 애초에 조심해야 돼요, 정말. 어떤 점이 가장 힘들었나요? 심영규 가장 친한 친구들이라고 믿었던 사람들까지 모두 등을 돌렸던 일이죠. 그때 사귀고 있던 여자친구는 여전히 제 곁에 있지만 그녀가 가만히 있어도 주변 시선에 견딜 수 없을 때가 많나 봐요. 저는 신앙으로 이겨내고 있고 여자친구는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어요. 정말 미안할 따름이죠. 김정일 남성조차 남성을 옹호하지 못하는 심리가 있어요. 누군가가 성희롱을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남성은 그를 비난함으로써 자신은 조금이라도 깨끗해 보일 수 있잖아요. 대부분의 남성들은 성에 대해 한두 가지 정도는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원죄 의식이 있어요. 관련된 사람을 비난하면서 성적 도덕성의 우위를 표하는 거죠. 두 분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갑자기 남성 심리에 대한 궁금증이 생깁니다. 성적 수치심은 여성만의 전유물인가요? 여성이 엉덩이를 친다든지 야한 사진을 보낸다든지, 남성들은 그런 일을 당했을 때 어떤가요? 심영규 대부분의 남성들이 수치심보다는 그냥 웃어버릴 거 같은데요? 김정일 요즘은 남자들도 바뀌고 있어요. 마초나 터프한 성향이 줄어들고 다소 여성적인 섬세한 남성들은 때에 따라 수치심을 느낄 수 있겠죠. 심영규 법이 변하는 시대상을 잘 반영해서 남성 인권도 존중해줬으면 좋겠어요. 김정일 바뀌겠죠. 요즘은 무고죄도 엄중히 처벌하잖아요. 신기한 것이 미국은 우리만큼 엄격한 도덕성을 요구하는 동시에 다양한 문화가 존재해요. 그렇게 도덕과 성은 균형을 맞추며 나름의 질서가 잡힐 거라고 생각해요. 과거의 낭만? 현재의 범죄! 심영규씨는 책에 불미스러운 일 이후 피폐해진 자신의 삶을 고스란히 담았다. 영원히 자신의 치부가 될 수 있는 기록들. 그는 숨기고 감추기보다 공개를 통해 자유로워지는 것을 택했다. 자신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남성들에게 성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주자는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 있다. 성희롱 예방 교육 강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그가 세컨드 찬스를 잡을 수 있을까? 책을 내기까지 두려움이나 부담감은 없었나요? 심영규 대인기피증으로 무척 힘들 때 중국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어요. 만리장성을 올라가는데 사람들이 정말 많더군요. 순간적으로 ‘이 세상에 나를 아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라는 생각이 스치더군요. 나만 생각을 바꾸면 모든 것이 편해진다는 주문을 외웠어요. 김정일 심영규씨는 재판 때부터 봐왔지만 몰골이 말이 아니었죠. 점점 볼수록 나아지고 있다는 걸 느껴요.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대로 주저앉을 수만은 없잖아요. 자신의 경험을 많은 이들과 공유해 좀 더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삶을 이어나갔으면 좋겠어요. 남성들에게 어떤 말을 가장 해주고 싶은가요? 심영규 과거의 낭만(결과적으로 낭만은 아니지만)이 지금은 범죄가 되는 세상입니다. 물론 성범죄 가해자는 강력한 처벌로 다스려야 한다는 데 동의해요. 다만 말씀드리고 싶은 건, 성범죄 대부분의 가해자가 남성이기에 남성의 시각에서 범죄를 예방할 수 있는 방법 또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범죄를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이요? 심영규 학교나 직장 내에서 마음에 드는 이성이 있을 수 있어요. 스킨십 생각도 들 수 있겠죠. 마음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상대방이 자신을 보고 몇 번 웃어줬다거나 베푼 친절을 이성적 호감으로 받아들여 상대방이 원치 않은 행동을 한다면 그것이 성범죄예요. 정말 위험한 행동입니다. ‘용기 있는 자만이 미인을 얻는다’는 말은 이미 옛말이 됐습니다. 그럼 이성에게 어떻게 호감을 표시해야 할까요? 심영규 키다리 아저씨가 되는 거죠.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말고 그저 그녀 곁에서 오랫동안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해주면서 그녀의 마음을 얻는 것만이, 한순간의 실수로 성범죄자가 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성범죄는 더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네요. 심영규 어쩔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예요. 이런 이야기를 누가 진정성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나락으로 떨어져본 사람만이 그 절실함을 알 수 있죠. 성범죄가 나쁘다고들 하지만 막상 연루가 되면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야 해요. 그는 마지막으로 「이솝우화」에 나오는 ‘바람과 해님의 내기’ 이야기로 남녀의 관계를 빗댔다. 길을 걷는 나그네의 옷을 벗긴 것은 강한 바람이 아닌 따뜻한 온기라는 것을 다시 한번 모든 남성들에게 강조한다. 화성 남자와 금성 여자가 서로 상처받지 않고 공존하는 세상을 위한 두 남자의 대담이었다. Profile 심영규는… 국내 최초 그라비아 아이돌 화보집 ‘착한 글래머’의 기획자. 수많은 화제를 낳으며 일본 진출까지 확정했으나 돌연 성추행 혐의로 고소당하고 유죄를 선고받았다. 현재는 저서 「낭만과 범죄 사이」를 출간하고 성희롱 예방 교육 강사로 제2의 인생을 설계 중이다. Profile 김정일은… 김정일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사회현상 전반에 대한 자신만의 뚜렷한 견해로 주요 방송과 언론 매체에서 활약 중이다. 「나는 다만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을 뿐이다」, 「어떻게 태어난 인생인데」, 「남자의 마흔: 새로운 출발을 시작할 나이」, 「누군가 내 사랑을 노리고 있다」 등 30여 편의 저서를 펴내며, 특히 중년 남성의 심리에 대한 남다른 통찰력을 발휘하고 있다.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김동연(프리랜서)>
- ‘37년 철권통치’ 김정일의 시대 저물다
- 2011. 12. 29 14:35 화제
- ㆍ김정은, 출생에 얽힌 사연과 성장 배경, 후계자로 지목되기까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지난 12월 17일 급성심근경색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향년 69세. 1994년 김일성 주석 사후 권력의 전면에 나선 지 13년 만에, 또 1974년 후계가 공식화된 지 37년 만이다. 총 여섯 명의 자녀 중 셋째 아들 김정은 조선노동당 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 후계자로 지명됐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본명조차 알려지지 않았을 정도로 베일에 싸여 있던 이 청년에게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첫 만남에서 이 일곱 살짜리 어린 대장은, 마흔 살 어른인 나를 노려보며 등골에서 식은땀을 흘리게 했다. 이때 느꼈던 강한 인상이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서 마음속에 ‘김정은이야말로 언젠가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될 만한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생각을 심어놓은 것 같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 심지어 북한 문제 전문가들까지 나의 예측을 무시하고 심지어 비웃기까지 했다.” ‘김정일의 요리사’로 잘 알려진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씨가 펴낸 「북한의 후계자 왜 김정은인가?」에 소개된 김정은과의 첫 만남에 대한 인상이다. 어린 나이임에도 강한 기질을 숨길 수 없었나 보다. 이후 이 요리사의 예상처럼 꼬마는 북한의 최고 지도자로 낙점된다. ‘작은 대장’이라 불리니 불같이 화를 내 김정일 자녀들은 ‘왕자들’ 혹은 ‘큰 대장’, ‘작은 대장’으로 불렸다. 김정은의 형인 김정철은 ‘큰 대장’으로 동생인 김정은은 ‘작은 대장’으로 부르는 식이다. 이나마도 친인척과 같은 최측근들만 부를 수 있는 호칭이었고, 대부분은 ‘왕자들’이란 호칭을 사용했다고 한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김정은이 채 스무 살이 되기 전이었는데 김정은의 이모가 평소 부르는 대로 ‘작은 대장’이라는 호칭을 쓰자 “내가 아직도 유치원생 어린아이로 보여!” 하면서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형인 김정철과는 매우 사이가 좋았지만 ‘작은 대장’이라고 불리는 것은 몹시 싫어했다고 한다. 고집이 세고, 승부욕이 강하며 대장 기질이 다분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 북한의 젊은 영도자의 알려지지 않은 성격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그의 형 김정철은 부드럽고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한다. 게다가 형제 사이가 좋아서 둘 사이에 권력 싸움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주변의 추측처럼 김정은은 별 잡음 없이 예비 지도자 자리를 꿰찼다. 김정철은 향후에도 동생 김정은을 보필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10대 후반이 되면서 김정은은 놀이를 할 때도 유감없이 리더십을 발휘했다. 농구 시합을 할 때도 자기 팀 선수들에게 당근과 채찍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알았다. 일본인 요리사 후지모토의 증언에 따르면 김정은은 단순히 남들의 선두에 서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기술을 터득한 것으로 보였다고. 게다가 김정은 형 김정철과는 달리 사회적인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김일성 종합대학을 졸업한 김정은은 중·고교 과정을 스위스 베른 공립학교와 리베펠트-슈타인휠츨리 공립학교에서 마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기간에 김정은은 서구적인 사고와 문화를 익혔을 것으로 보인다. 유학 당시인 10대 시절에 북한과 외국의 사정을 비교해가며 나라 걱정을 종종 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외국의 백화점에 가서 보니 물자와 식품들이 넘쳐나는데 자신의 나라는 왜 그렇지 못한지, 다른 나라에 비해 한참 뒤떨어진 공업기술의 해결 방법은 무엇이며, 턱없이 부족한 전력은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지 진지하게 측근들과 토론하기를 즐겼다. 외국 생활을 통해 영어의 중요성에도 눈을 떠 2000년께에는 영어 공부에 몰두하기도 했다. 할아버지 김일성의 외모를 꼭 닮은 김정은을 오래전부터 후계자로 낙점한 것인지, 아버지 김정일은 평소에도 당이나 군 간부들 앞에서도 김정은에 대해 “나를 닮았다”라며 만족스럽게 이야기해왔다고. 반면 김정철에 대해서는 “그 녀석은 안 돼. 계집애 같아서”라고 일축하곤 했다고. 생모 고영희의 출신 성분은 북한에서 일급비밀 김정일에게는 공식적으로 네 명의 부인이 있다. 먼저 배우 출신 성혜림은 1960년대 말 김 위원장과의 사이에서 장남인 정남을 낳았다. 그러나 성혜림은 유부녀로 김정일과는 불륜인 셈이었다. 때문인지 북한사회에서는 철저히 숨겨진 여자 취급을 받았다. 두 번째 여인인 김영숙과는 고(故) 김일성 주석의 정식 허락을 받아 결혼식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는데 아들을 낳지 못하고 2녀(설송·춘송)만 낳아 관심에서 멀어졌다. 세 번째 부인이 바로 김정은의 생모 고영희다. 정철·정은 형제를 낳은 그녀는 아들이 후계자가 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일찍 생을 마쳤다. 마지막 여인은 최근까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던 김옥이다. 김씨는 1980년대 초부터 김정은의 생모 고영희가 사망하던 2004년까지 김 위원장의 서기실(비서실)에서 과장 직함을 갖고 김 위원장을 보좌하다 최근에는 부인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김옥은 김정은이 후계자로 등극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영희와는 오랫동안 잘 아는 사이로 슬하에 자녀는 없다. 김정은의 생모 고영희의 출신 성분에 대해서는 북한에서는 일급비밀이다. 고영희라는 이름만 알려졌을 뿐 그녀가 조총련계 재일교포 출신이고 한때 만수대 예술단의 무용수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이미 착수한 김정은 우상화 작업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귀국자’는 조총련 출신 재일교포 중 북한으로 이주한 사람을 일컫는 공식적인 표현이지만, 주민들 사이에서는 대개 ‘째뽀’라고 비하해서 부르곤 한다. 북한은 출신 성분과 토대를 무엇보다 중시해 남한 출신이나 재일 조총련 출신, 심지어 중국에 친인척이 있는 사람들까지도 당이나 군 간부 같은 요직에 임용되기는 불가능하다. 일반 주민이라면 모친이 귀국자일 경우, 초급 당 간부도 될 수 없을 판인데 언감생심 국가의 최고 영도자가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충격적 사실이 되는 것이다. 김정은과 고모 부부가 ‘포스트 김정일’ 김정은의 현재 공식 직함은 조선노동당 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다. 갑작스러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 이후 북측에서는 ‘김정은 동지의 영도’라는 표현을 쓰고, 또 232명으로 꾸려진 김 위원장 장의위원회에서도 맨 앞에 이름을 올리며 공식적인 서열 1위임을 확인시켰다. 12월 28일 영결식을 마친 김 위원장의 시신은 김일성 주석의 시신이 보존되어 있는 금수산기념궁전에 안치됐다. 외부의 불안한 전망과는 달리 아직까지 북한 내부에서는 김정은을 중심으로 차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김정은은 김 위원장의 와병설이 사그라질 무렵인 2010년 9월 2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 명령으로 인민군 대장에 임명되며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실명이 처음 알려진 것도 이때였을 정도로 그동안 그의 존재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만 26세에 불과했다. 아버지 김정일이 32세의 나이에 정치위원회 위원에 임명된 이래 20년간 단계적으로 후계자로서의 권력 이양 단계를 밟아 52세에 국방위원장 자리에 오른 것과 비교하면 김정은의 등장은 그 속도와 방식 모두 파격 그 자체였다. 국제사회에서는 3대 권력세습이라는 근대 사상 초유의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으나, 정작 북한 내부의 후계자 지명엔 별다른 갈등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파격적인 행보로 서방 언론에 관심을 끌었던 장남 김정남은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친모를 둔 관계로 일찍이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나 유랑 생활을 하는 신세로 전락했으며, 고영희의 장남인 김정철은 애초에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인물이다. 김정은 후계 체제는 김정일의 선택, 고모 김경희와 고모부인 장성택의 후견인 자청, 여기에 김옥의 지지가 가세하며 비로소 완성될 수 있었다. 특히 고 김정일 위원장의 여동생 김경희는 오래전부터 권력세습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로 남편 장성택은 김정은의 후견인으로서 권력 기반을 넓혀가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포스트 김정일 시대의 권력 축은 ‘김정은-김경희-장성택’으로 구성된 가족 3인방이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불안한 권력세습 과정에서 안정적인 체제 구축을 위해 가장 믿을 수 있는 가족을 활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 북한 지도층의 현실이기도 하다. 조부인 김일성 전 주석의 외모를 빼닮은 것으로도 관심을 모았던 김정은은 특유의 강한 리더십과 승부욕으로 두 형을 제치고 후계자가 됐다. 현재 그 이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데다가 부친인 김 위원장이 현지 지도 중 과로사했다는 점, 2012년이 김일성 주석의 탄생 100주년이라는 점도 그가 최고 권력자로 뿌리를 내리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또 그가 이미 당뿐만 아니라 군대와 공안기관까지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권력 승계도 무난할 거라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체제를 안정시키고 제대로 된 지도자로서 역량을 발휘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글 / 강은진(프리랜서)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참고 서적 /「북한의 후계자 왜 김정은인가?」(후지모토 겐지 저, 맥스미디어)>
- 김정일의 3남 ‘김정운’으로 몰려 고초 겪은 배석범씨의 기막힌 사연
- 2009. 10. 14 16:48 화제
- ㆍ“스트레스로 음식을 입에 대지 못한 3개월, ㆍ그러나 일본 방송국과 끝까지 싸울 겁니다” 지난 6월의 일이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건강 악화와 함께 후계자설이 확산될 무렵, 일본 아사히TV가 김정일의 3남, 김정운의 최근 사진을 확보해 특종 보도한 바 있다. 그러나 확인 결과, 사진 속 인물은 북한과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평범한 대한민국 국민 배석범씨였던 것. 황당하기만 한 이 사건은 명백한 오보이며 무자비한 인권침해였다. 배씨는 현재 일본 방송국과의 소송을 준비 중이다. 스트레스로 식음 전폐한 그간의 시간 배석범씨(39)를 만난 건 사건이 벌어지고, 3개월 뒤였다. 북한이라는 민감한 사안에 비춰보면 그가 당한 일은 심각한 인권침해였다. 일본 아사히TV가 그의 사진을 두고 김정운이라고 보도한 후에, 우리나라 인터넷 언론들은 사실 확인 없이 수십 건의 관련 기사를 앞 다투어 게재했다. 포털 사이트의 인물 정보란에는 김정운의 프로필에 배씨의 사진이 발 빠르게 소개되기도 했다. 3개월이 지난 후, 어디에서도 배석범씨의 현재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이미 마음의 상처를 입은 그가 언론과 연락을 두절하고 인터뷰 요청을 거절해왔던 것이다. 「레이디경향」은 배씨와 몇 차례 메일을 주고받으며 설득한 끝에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기자 앞에 등장한 배석범씨는 김정운으로 오인했던 그 사진 속의 인물이 아니었다. 통통하던 뺨은 야위었고 풍채 좋던 모습도 사라진 채였다. 몸이 좋지 않은지 연신 기침을 해댔다. “도무지 음식을 입에 댈 수 없어서 한의원에 갔더니 횡격막의 기능이 원활하지 않다는 진단을 받았어요. 그러면 심장, 폐, 위 등 장기에도 혈액 공급이 잘 안 된다더군요. 일이 벌어진 후 급격히 살이 빠졌어요. 한의사는 ‘지금까지 어떻게 참았느냐’며 놀라더군요.” 평소 한 끼 식사에 밥 세 공기는 거뜬히 먹을 정도로 식성이 좋았던 그다. 사건이 터지고 하루에 반 공기도 먹지 못하고 겨우 미숫가루만 입에 댈 수 있었다. 그의 몸무게는 3개월 만에 85kg에서 69kg으로 급격하게 빠졌다. 처음에는 열이 오르고 기침이 나기에 감기인 줄 알았으나 폐가 원활히 움직이지 못해 자꾸 기침이 났던 것이다. 모든 것이 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생긴 병이었다. “이후에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언론기관에서 전화가 쇄도했어요. 미국 CNN에서도 인터뷰 요청 전화가 왔으니까요.” 더 황당했던 일은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다. ‘일본 방송국과 큰 돈을 받고 합의했다’는 거짓 소문을 듣고 연락이 끊겼던 지인에게조차 전화가 걸려왔다. “30억, 40억원에 합의를 했다라는 당치도 않은 소문이 나는 바람에 사람들로부터 밤낮없이 전화가 왔어요. ‘너, 돈 좀 받았다더라’며 마치 로또에 당첨된 사람으로 취급하더군요. 그게 가장 큰 스트레스였어요. 부모님은 아무 말도 못하고 가슴만 치셨죠.” 배석범씨는 애초부터 일본 방송국과 합의할 생각이 없었다. 사건이 터지고 난 뒤 국내 유명 법률사무소에서 수십억 원에 합의를 해주겠다며 제안서를 가져오기도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당시만 해도 그저 황당한 사건이었고 그가 바라는 건 아사히TV의 진심 어린 사과뿐이었다. 한국인의 자존심을 위해 끝까지 싸울 결심 그는 사건 당일, 자신의 사진 한 장으로 일본과 한국의 언론, 그리고 인터넷 사이트가 들썩였던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는 전날 야근까지 한 탓에 그저 태평하게 낮잠을 자고 있었다. “전화가 왔는데 대뜸 방송국이래요. 그러고는 ‘사건을 아세요?’ 하는 거예요. ‘무슨 사건이요?’ 했더니 일단 인터넷을 보라고 하더군요. 인터넷에 접속하는 순간, 온통 제 사진인 겁니다. 뒤로 넘어갈 만큼 굉장히 놀랐어요.” 인터넷에 도배된 문제의 사진은 지난여름, 그가 운영하고 있는 동호회 회원들과 친목 도모를 위해 시골로 MT를 갔을 때 찍은 것이다. MT를 다녀온 후에 원두막에서 닭볶음탕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사진을 인터넷 카페 회원방에 올렸다. 한 회원이 그의 사진을 보고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닮았다’고 하며 비교 사진을 함께 올려놓은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평소에도 배석범씨와 회원들은 그의 닮은꼴 외모를 두고 “동지, 수령 동지” 하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처음에는 웃었어요. 평소에도 그런 소리를 자주 들었으니까요. 그게 우리끼리의 장난이었지 이렇게 크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래도 저는 최소한 일본 방송국이 진심 어린 사과를 할 줄 알았어요. 일반 사람도 아니고 북한에 관련된 일은 무엇이든 민감한 사항 아닙니까? 막말로 제가 큰 위험에 처할지도 모르고요.” 아사히TV 측에서는 한국지사장도 아닌, 명함도 없는 직원을 시켜 그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사과 한마디를 했을 뿐이다. 배석범씨는 그때까지만 해도 소송 같은 큰일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안일한 대처에 모멸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들의 태도에 굉장히 불쾌했어요. 그냥 ‘돈이나 받고 끝내라’는 식이었죠. 저는 그 돈, 있어도 살고, 없어도 살아요. 돈이 문제가 아니에요. 일본 언론이 한국을 우습게 보지 않았다면 저를 이렇게 괄시할 수는 없죠. 잘잘못을 떠나서 너무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는 일본 아사히TV와 그쪽에 사진을 제공한 군관계자 그리고 우리 정부, 세 곳을 상대로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합의를 하면 돈을 많이 받아낼 수 있다는 사실은 그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아사히TV의 태도와 정부의 무관심에 화가 났다. “중요한 것은 어느 누구도 제게 진심 어린 사과를 안 한다는 겁니다. 저는 사진 제공자가 누군지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일본 방송국에서 말했듯이 한국 현역 부사관이라는 것밖에 몰라요. 그게 사실이라면 더 심각한 일 아닌가요? 국가 공무원이 저지른 일에 대해 국가에서도 입장을 밝혀야 하는데 그런 게 없어요. 일본 방송국도 제가 국가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일반 소시민이라고 생각하니까 무시하는 겁니다.” 만약 사건이 일어난 후 아사히TV가 국내 언론에 나와 한국 국민에게 사과를 했다면 어땠을까? 그런 성의를 보여줬다면 그는 이번 일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거라고 말한다. “소송을 하고 증인 출석을 요구하면 제 사진을 일본 측에 제공한 인물이 밝혀질 겁니다. 왜, 어떤 의도로 사진을 제공했는지 저도 알고 싶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한 가지다. 한국 법정에 아사히TV 관계자를 세워 사과를 받는 것이다. “그저 일본 방송에서 자기들끼리 ‘오보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 진심으로 한국에 와서 고개 숙여 사과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금전 같은 건 생각 안 합니다.” 그의 태도는 단호하다. 이 싸움이 2년, 3년으로 길어져도 끝까지 일본 방송국 측의 진심 어린 사과를 요구할 것이라고 거듭 이야기 한다. 나라를, 국민을 위한 기도, 대동제 배석범씨는 1만5천여 명의 회원을 두고 있는 국내 최대 무속 카페를 4년째 운영 중이다. 직접 무속 활동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대동제 같은 무속인들의 큰 행사를 도와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 “건축업을 했는데 어릴 때부터 무속에 관심이 많았어요. 구체적으로 참여할 길이 없어 인터넷 사이트에 카페를 만들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동참해주시고 바빠지면서 본업을 접고 본격적으로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비영리 목적으로 만든 모임이라 회원 수가 많아요. 무속인이 서로 정보 공유를 하고 있죠. 저는 음지에 있는 무속을 양지로 이끌고 발전시키고 싶어요.” 일본 아사히TV가 오보한 화면과 배석범씨의 사진 원본.국회의원들이나 기업체 사장들도 무속인을 찾아 앞날을 상의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힘들고 어려울 때는 무속인을 찾으면서도 한편으론 이들을 비하하는 문화는 여전하다. 특히 최근에는 무속인을 대상으로 한 케이블 방송 프로그램이 많이 방영되고 있다. 마치 무속인을 테스트하는 것 같다. 그의 마음이 영 불편하다. “이번에 한국관광공사 사장을 맡은 이참씨도 ‘한국 최고의 상품은 무속이다’라고 하셨잖아요. 그만큼 무속은 개발하고 연구하면 좋은 관광상품이 될 수 있는 전통문화라고 생각해요.” 그는 카페 회원들과 오는 10월 25일, 대전에서 대동제를 열 계획이다. 올해 서거하신 두 전직 대통령을 위한 위령제도 열 것이다. 대동제는 참가자들이 전국에서 모인 만큼 각 지역의 특색에 맞는 공연으로 열린다. 그가 이번 사건에 휘말리지 않았더라면 원래 9월에 진행될 행사였다. 그는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아프다. “한국의 내로라하는 유명한 무속인들이 올가을만 넘어가면 잘될 거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제가 운영하는 ‘산신각’이라는 모임도 앞으로 더욱 발전한다고 하니 그 말씀에 크게 위안받고 있습니다.” 전국 무속인의 수는 정부 추산 60만 명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신고 절차도 없이 무속 활동을 하는 사람들까지 치면 80만 명은 거뜬히 넘을 것이라는 게 배씨의 해석이다. 배석범씨는 이들의 권리를 보호해줄 협회나 장치가 마땅히 없어 안타깝다고. 이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무속 특유의 성격 때문일 것이다. 배석범씨의 목표는 모든 것을 터놓고 교류하는 건강한 무속인의 모임을 만드는 것이다. 또 그는 이번 ‘김정운 오보 사건’에 대해 일본 방송국으로부터 사과를 받아낼 것이라고 한다. 그것이 사실 확인 보도에 대한 언론에 경각심을 주고 제2의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는 길이기 때문이다.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이성훈 ■장소 협찬 / Cafe 풍금자리(031-908-4232)
- 北김정일 부인 성혜림의 친구 김영순의 탈북스토리
- 2009. 03. 10 화제
- 북한에서 상위 1%의 초호화 엘리트 생활을 하던 김영순씨. 그녀는 북한을 탈출해, 지난 2003년 11월 25일 대한민국 땅을 밟았다. 엘리트로 살다가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는 요덕수용소에서 10년이란 세월을 보내고, 자유를 얻기 위해 과감히 탈출을 감행한 그가 눈물로 쏟아낸 탈북 비하인드 스토리를 공개한다.부모는 영양실조로 사망, 아들은 총살당해 김영순씨(73)가 북한을 떠나 대한민국의 땅을 밟은 지 만 5년 3개월이 지났다. 북한에서 상위 1%의 엘리트 계층으로 모든 것을 누리고 살았던 김씨가 위험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어 대한민국으로 온 이유는 바로 ‘자유’를 얻고 싶어서였다. 김영순씨의 친오빠는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장군이었다. 때문에 김씨 일가족은 상위 1% 계층으로 북한 당국의 보호와 김일성의 배려 등 많은 혜택을 누리면서 살았다. 김씨는 일반 북한 사람은 엄두도 못 내는 밍크코트를 서른 살부터 입기 시작했고, 하루에 2번 이상 옷을 갈아입을 만큼 멋쟁이로 이름을 날렸다. 그렇게 평탄한 삶을 살던 어느 날, 김씨는 가족들과 함께 영문도 모른 채 ‘반동’이라는 죄명을 쓰고 인권유린의 온상이라 불리던 ‘요덕수용소’로 끌려갔다. 1970년의 일이다. “어느 날 갑자기 보위부 312호 예심과(김일성 가계와 관련된 정치범 수사과)로 끌려갔다가, 이유도 모르고 수용소로 갔죠. 연좌제 때문에 부모님과 아이들 4명이 함께 갔어요. 북한에서 정치범은 재판도 없이 바로 수용소로 갑니다. 끌려가는 동안은 마치 환각제를 먹은 사람처럼 멍멍했어요. 흑 같은 새벽, 수용소에 우릴 내려주면서 ‘빨리 빨리 내리라’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죠. 일을 잘하면 나가고 일을 못하면 영원히 있어야 한다고 했죠. 맨땅 위에 지은 초가집에서 멀건 소금국과 강냉이 죽으로 끼니를 해결해 짐승 같은 생활을 무려 10년이나 했어요.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눈물이 나요.” 요덕수용소에서의 생활은 지옥과도 같았다. 새벽에 일어나서 밤늦게까지 죽도록 일하고 받은 대가는 통강냉이 200g이 전부. 그곳에서는 영양실조로 죽는 사람들이 많았다. 먹을 것이 없어서 들쥐를 잡아먹었으나, 나중에는 쥐를 구하기도 힘들었다. 영양실조로 죽는 사람, 탈출을 시도하다가 총살당하는 사람, 동상 등의 병으로 죽는 사람까지 수용소에서 매일 수십 명씩 죽어나갔다. 김씨의 어머니와 아버지도 극심한 영양실조로 모두 그곳에서 숨을 거뒀다. 특히 삶의 희망이었던 큰아들마저 요덕수용소에서 사고로 죽었다. 남편은 그녀가 요덕수용소로 붙잡혀 가기 한 달 전에 실종됐는데, 나중에서야 탈북을 시도하다 잡혀서 영원히 나오지 못하는 수용소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막내아들도 훗날 탈북을 하려다가 총살을 당했다. “시체를 너무 많이 봐서 하나도 무섭지 않았어요. 큰아들이 죽고, 아버지 어머니를 하늘로 보내고 정말 북한 당국을 용서할 수 없어서 치를 떨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남한 사람들이 조그마한 것에도 슬퍼서 눈물을 흘리는 거 보면, 이해가 안 될 때가 많아요.”성혜림은 김정일의 처도 아니고, 아들도 낳지 않았다?! 1979년 어느 날, 김씨는 요덕수용소에서 풀려났다. 그리고 그때서야 자신이 왜 10년 동안 요덕수용소에 갇혀 있었는지를 알게 됐다. 바로 김정일의 부인, 성혜림과의 친분 때문이었던 것이다. 어느 날 보위부 직원이 찾아와 “성혜림은 김정일의 처도 아니고 아들도 낳지 않았다. 이 말을 어디서 들었다고 하거나 유포할 때는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간 것이다. 김씨는 이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왜 요덕수용소에 끌려갔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성혜림은 중학교 때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동기동창이며 친구였어요. 성혜림의 남편은 월북작가 이기영의 맏아들 이평이었죠. 영화배우였던 혜림이는 마음씨가 착하고 키도 크고 늘씬했어요. 웃으면 보조개가 쏙 들어가서 예쁘고, 눈웃음이 귀여웠죠. 그런데 어느 날 저에게 ‘나 5호댁(김정일 가계, 김일성은 1호댁이라 불린다)에 시집간다’고 말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거기 들어가면 이제 못 보겠구나’라며 인사를 나누며 헤어졌고, 그게 혜림이를 본 마지막이었어요.” 당시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에게 유부녀였던 성혜림과의 관계를 숨기고, 동거를 시작했다. 때문에 아버지에게 이런 사실이 드러나길 원치 않았던 김정일은 성혜림과 자신의 관계를 알고 있는 주변 사람들을 모두 사회에서 격리시키거나 제거했다. 김씨가 수용소에서 풀려난 시점은 성혜림 이후, 고영희가 김정일의 부인이 된 시점과 비슷했다. 수용소에서 나온 후 김씨는 요덕에 대한 비밀을 간직하며,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살았다. 급기야 나중에는 문소리만 들려도 놀라고, 공포에 질려서 한 발짝도 못 움직이는 ‘심장 신경증’에 걸렸다. 결국 당국의 감시에 괴로워하다가, 탈북을 결심했다. 1990년이 되면서 북한은 뇌물 문화가 팽배해졌고, 뇌물만 주면 국경도 넘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김씨 역시 뇌물을 이용해 안전하게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 2002년 중국으로 탈북한 김씨는 베트남, 캄보디아를 거쳐 2003년 11월 25일 대한민국 땅에 첫발을 디뎠다. 그리고 그 순간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인천공항에 도착했는데, 불바다처럼 휘황찬란한 불빛들이 가득한 걸 보고 정말 대한민국은 축복받은 곳이라고 생각했어요. 십자가가 굉장히 많아서 그랬을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곳이라고 생각했죠. 애국가를 마음껏 부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감개무량했죠.”자유민주주의의 행복을 말하고 싶었다 북한에서도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던 김씨는 남한에서의 삶에 곧바로 적응했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사 먹을 수 있고, 하루 종일 불려 다니면서 북한 당국이 만들어놓은 시스템대로 움직이지 않아도 됐다. “정말 황홀한 거예요. 자유가 있잖아요. 누군가의 감시를 받지 않는다는 게 말이죠. TV도 마음대로 볼 수 있고요. 게다가 이곳은 기회가 있는 나라잖아요. 자유와 행복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곳이라는 게 얼마나 좋아요. 북한 사람들은 다음날 자기 스케줄을 모르고 살아요. 하지만 여기는 하루 24시간이 전부 저에게 주어진 시간이잖아요. 능력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요. 정말 행복한 곳이죠. 북한은 지옥이고, 여기는 천국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김씨는 어떻게 보면, 요덕에 갔다 왔기 때문에 인생의 참맛을 느낄 줄 알게 됐다고 말한다. 북한 당국이 정해주는 대로 살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비전과 꿈을 갖고 삶을 살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살았던 지난 5년은 북한에서 살았던 68년 인생과 바꿔도 전혀 아깝지 않아요. 만약 제가 요덕에 가지 않았으면, 평양이 좋은 줄 알고 그 곳에서 열심히 살았겠죠.” 북한종합예술학교를 졸업한 김씨는 한국 춤의 대가인 최승희에게서 춤을 사사했다. 2006년 그 능력을 살려 뮤지컬 ‘요덕스토리’의 안무를 맡기도 했다. 그리고 미국, 일본, 스위스, 영국, 벨기에 등 세계를 돌아다니며 인권 활동을 했다. 세계를 돌아다닐수록 북한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60년 동안 북한 사람들을 기근과 가난으로 허덕이게 만들고, 열등 민족으로 만든 북한 당국을 생각하면 기가 막히죠. 먹이지도 않고, 입히지도 않지만 김일성과 김정일을 우상숭배하게 만들죠. 요즘 같은 정보화 시대에 세상을 볼 수 없게 TV와 컴퓨터가 차단되고, 극도로 폐쇄된 삶을 살고 있죠. 북한 사람들은 이런 세상이 있다는 것도 모르죠. 그러니까 그 체제에서 행복한 줄 알고 사는 거죠. 거기서 70평생을 살았다는 게, 그리고 한창 젊은 시절을 요덕수용소에서 보냈다는 게 너무 속상해서 잠도 못 잘 정도예요.” 북한에서는 지금까지 굶어 죽은 사람의 숫자만 3백만 명이 넘고, 요즘에도 배고픔을 못 이겨 탈북을 시도하고 있다. 북한 군인들도 못 먹고 살기는 마찬가지. 서로의 안부 인사가 ‘강영실 안 걸렸나’다. 강영실이란, 강한 영양실조의 약자다. 북한 국민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단적인 예다. 하지만 김씨는 북한은 절대 ‘통일’이나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먹이고 입히지 않아도 잘 따르는 국민이 있는데, 왜 통일을 하느냐는 것. 영원히 인민들을 다스리면서 수령 제일주의, 인간 우상숭배를 원할 것이라는 게 김씨의 생각이다. 전 세계가 북한을 욕하지만, 정작 북한의 모든 국민들은 세뇌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상황에 만족하면서 살고 있다. “북한은 공산주의, 사회주의, 분배 원칙을 주장하잖아요. 북한 사회주의 경제는 부의 창출이 없기 때문에 게으름뱅이 양성소가 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결국 망한 거죠. 빈부격차와 사상 대립은 인간이 생존하는 한 영원한 거예요. 평화 속에서 경제가 발전해야죠. 인간은 무한한 창조력을 지녔잖아요.” 김씨는 김정일이 최근 후계자를 고영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3남 김정운으로 지정한 것을 두고, 아직 김정일 본인이 10년 이상은 정권을 유지할 능력이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일 거라고 설명했다. 스물다섯 살의 김정운이 정권을 잡기에는 아직 어리다는 게 그 이유다. 하지만 정권을 잡는 사람이 아들로 바뀐다고 해도 북한의 개혁과 개방은 이루어지기 힘들 것이라고 말한다. 최고의 무희, 최승희 춤을 전수시키고 싶어 최근 김씨는 북한 요덕수용소에서의 생활을 포함한 자전 수기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를 책으로 써냈다. 김씨는 대한민국에 오는 순간부터, 자전 수기를 쓰려고 마음먹었다. 북한에서의 파란만장했던 삶과 자유민주주의의 우월성에 대해 알리고 싶었다고 한다. “제가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제도의 차이로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려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말해주고 싶었죠.” 김씨도 북한이 아닌, 남한에서 살았다면 그토록 좋아한 춤을 가르치며 살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북한종합예술학교 무용학부 1기생으로 최승희 선생으로부터 스파르타 교육을 받은 김씨. 평소 제자 훈련이 엄격했던 최승희 선생 덕분에 김씨는 여전히 최승희의 아름다운 춤가락으로 춤을 출 수 있는 실력을 지녔다. “저에게 작은 공간이 생긴다면, 제자들을 키워서 최승희 선생님의 춤사위를 가르치는 게 소원이에요. 최승희 선생님은 대한민국이 낳은 세계적인 무희잖아요. 그분의 춤이 후세에 영원히 남았으면 좋겠어요. 저도 앞으로 80세까지는 거뜬히 춤을 출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하지만 김씨는 조그마한 연습실 빌릴 돈을 마련하기 쉽지 않다. 월 40만원가량이었던 정부 정착금 지원은 5년이 지난 지금 끝이 났고, 현재는 생활 기초 보장금으로 근근이 살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당장은 먹고사는 것을 걱정해야 할 지경이다. 그래도 북한에 비하면, 밥은 먹고 사니까 불평은 하지 않는다. 다만, 북한이 아닌 남한에서 자유롭게 살았다면 다른 남한 사람들처럼 부를 축적하고 창출하면서 살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을 뿐이다. 김씨는 앞으로 대한민국 국민이 북한 문제에 대해 좀 더 알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한다. “대한민국이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부강해져야 북한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또 남한에 온 탈북자들이 지금까지 1만5천 명 정도 되는데, 그들이 이곳에 정착해서 잘 살 수 있게 도와준 국민들께 감사드려요. 앞으로 탈북자들이 비전을 갖고 대한민국에 기여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김씨의 또 다른 꿈은 바로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가 해체되는 것이다. 과거 김씨가 겪었던 요덕에서의 처절했던 삶을 공개하고, 인간 이하의 삶을 살고 있는 북한 국민들이 자유를 갖도록 도와주고 싶은 게 생의 마지막 바람이다. 때문에 김씨는 여전히 세계 인권 단체들을 만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내가 가진 자유를 지금도 북한에서 고통받고 있는 국민들도 함께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제가 죽는 날까지 노력하겠습니다.”■글 / 김민주 기자 ■사진 / 이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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