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672 건 검색)
- 계엄 당시 군용차 최소 107대 동원…탱크 지휘관도 대기했다
- 2024. 12. 19 21:04정치
- ... 의심이 일고 있다. 19일 백승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방부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계엄 당시 특수전사령부와 수도방위사령부는 총 107대의 군용차량을 운용했다. 병력을 수송하는 45인승 버스...
- 윤석열 탄핵 정국
- [속보]검찰, 경찰청 수사기획조정관실 압수수색···계엄 당시 ‘체포조’ 관련
- 2024. 12. 19 15:53사회
- ... 압수수색했다. 검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본부(본부장 박세현 고검장)는 19일 “비상계엄 당시 체포조 활동 혐의와 관련해 국가수사본부, 영등포경찰서 및 국방부 조사본부 관계자들에 대한...
- 윤석열 탄핵 정국
- 재판 끌기, 박근혜가 쓴 방식…당시 주심은 지연 시도 ‘칼차단’
- 2024. 12. 18 21:31사회
- ... 유리하다고 판단하면 불출석하거나 출석기일을 늦추려고 시도할 가능성이 크다. 박 전 대통령 사건 당시 헌재는 주요 증인이 불출석하면 구인장 발부 의사를 밝히거나 변론기일 일정을 앞당기는 방식으로...
- 윤석열 탄핵 정국
- 5·18 당시 ‘죽음의 행진’ 주역…홍남순 변호사 가옥, 내년 복원한다
- 2024. 12. 16 20:10사회
- ... 변호사 가옥은 고인의 생활 공간이자 1963년 변호사 개업 당시 사무실이기도 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재야 민주 인사들이 드나들며 대책 회의를 한 곳이어서 ‘민주 사랑방’으로 불리기도 했다. 2017년...
스포츠경향(총 707 건 검색)
- [인터뷰②] 공유 “비상계엄 선포 당시 뜬눈으로 밤 지새워”
- 2024. 12. 05 12:03 연예
- 배우 공유, 사진제공|넷플릭스 배우 공유가 이틀 전 비상계엄 선포 당시 생생한 심경을 전했다. 공유는 5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서 진행된 ‘스포츠경향’과 인터뷰에서 지난 3일 윤석열 대통령이 기습발표한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묻자 “TV를 켜고 생중계로 보고 있었는데 영화 속에서 봤었던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했다. 여느 분과 똑같이 조마조마하는 마음으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고 밝혔다. 그는 “토씨 하나 안 빼고 내 상황을 말하자면 어제 오전 다른 스케줄이 있었다. 그래서 당시 내 나름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동료 후배들이 채팅방에서 난리가 났더라”고 말했다. 이어 “계엄령이 해제될 때까지 잠을 못잤다”며 “이 다음에 뭔가 예상치 못한 다음 단계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현재로서도 마찬가지로 어떻게 진행될 지 예측이 안된다”고 덧붙였다. ‘트렁크’는 호숫가에 떠오른 트렁크로 인해 밝혀지기 시작한 비밀스러운 결혼 서비스와 그 안에 놓인 두 남녀의 이상한 결혼 이야기를 그린 미스터리 멜로다. 넷플릭스서 스트리밍 중.
- 교체 당시는 불만, 하지만 금방 다시 돌아왔는데···‘조기 교체’가 아쉬웠던 손흥민, ‘토트넘 선배’의 지적 “솔직히 마음에 안 들어”
- 2024. 11. 06 01:29 축구
- 손흥민. 로이터연합뉴스 부상 복귀전에서 공격포인트를 올렸으나 이른 시간 교체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던 손흥민(토트넘)을 향해 과거 토트넘에서 뛰었던 ‘선배’가 쓴소리를 했다. 토트넘 소식을 전하는 ‘스퍼스 웹’은 4일(현지시간) 토트넘 선배이자 축구전문가로 활동 중인 제이미 레드냅이 손흥민에게 불만을 나타냈다고 전했다. 이 매체에 따르면 레드냅은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히샤를리송이 투입된 뒤 그는 자신의 위치에서 골을 만들어냈다. 손흥민의 행동을 보는 것이 불편했다”고 지적했다. 손흥민은 지난 3일 영국 런던 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에서 열린 애스턴 빌라와의 2024~2025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10라운드 경기에 선발 출전했따. 지난달 19일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전에서 부상 복귀전을 가졌으나 다시 부상이 재발해 이탈했던 손흥민은 애스턴 빌라전에서 다시 돌아와 0-1로 끌려가던 후반 4분 브레넌 존슨의 동점골을 어시스트하며 공격포인트를 올렸다. 손흥민을 격려하는 안지 포스테코글루 감독. AFP연합뉴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였다. 전반과는 달리 활발한 움직임을 가져간 손흥민이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려고 하는 찰나, 급작스럽게 히샤를리송과 교체됐다. 당시 손흥민은 교체 사인을 이해하지 못하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벤치로 들어어와서는 아쉬움과 짜증이 섞인 강한 아쉬움을 드러내 주목을 끌었다. 손흥민은 평소에도 출전 욕심이 강한 선수다. 이번 시즌은 초반부터 부상으로 여러 경기에 나서지 못해 경기에 뛰고 싶은 마음이 절박한데, 오랜만에 다시 선발로 출전한 경기에서 풀타임을 채우지 못하고 비교적 일찍 교체됐으니 아쉬움이 클법도 했다. 다만, 손흥민을 일찍 교체한 안지 포스테코글루 감독의 선택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 최근 잦은 부상에 시달리는 손흥민을 관리하기 위해 일찍 불러들인 것이었다. 그는 경기 후 “손흥민을 55분 넘게 뛰게 할 생각이 없었다. 지난 경기에서 부상 복귀 후 60분을 넘게 뛰었고 또 부상을 당했다. 하지만 이번 경기에서는 부상 없이 마쳤다”라고 설명했다. 교체 당시에는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경기 후에는 감독과 포옹을 하고 동료 선수들과도 인사를 나누는 등 변함없는 ‘캡틴’의 모습으로 돌아온 손흥민이었다. 다만, ‘토트넘 선배’의 눈에는 아쉬움을 표출한 그 장면이 끝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AFP연합뉴스
- 추신수, 은퇴 비하인드 공개 “美 진출 당시 어머니 원망해” (살림남)
- 2024. 11. 02 12:42 연예
- KBS 2TV 야구 선수 추신수의 은퇴 비하인드가 공개된다. 2일 방송되는 KBS 2TV ‘살림하는 남자들 시즌2’(이하 ‘살림남’)에서는 10개월 만의 ‘살림남’ 재출연 소식으로 화제를 모았던 추신수의 은퇴 여정이 펼쳐진다. 이날 방송에서는 지난 9월 펼쳐진 추신수의 은퇴 전 마지막 부산 원정 경기 비하인드가 최초 및 단독으로 공개된다. 자신의 고향인 부산에서 야구선수의 꿈을 키운 추신수는 마지막 경기를 치르기 위해 야구의 시작점이었던 사직구장으로 향한다. 아침 일찍 남다른 감회로 경기장에 들어선 추신수는 은퇴 사인회를 하며 팬들과 좋은 추억을 남기고, 마지막 경기인만큼 좋은 결과를 기원하며 그라운드에 선다. 경기 이후 추신수는 “그라운드에 조금이라도 발을 더 붙이고 싶었다”라며 사직구장에서의 마지막 타석에 대한 아쉬움을 전한다. 이후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가족들과 만나 식사 자리를 갖는다. 특히 추신수의 어머니가 예능 최초로 ‘살림남’에 모습을 드러내 눈길을 끄는 가운데, 1992년 한국 시리즈에서 롯데자이언츠를 우승으로 이끈 주역이자 레전드 선수인 박정태까지 한 자리에 모여 추신수와 깊은 대화를 나눈다. 추신수는 “삼촌이랑 같이 야구하는 게 꿈이었다”라며 외삼촌이자 야구 은인인 박정태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드러내는가 하면, 야구를 시작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까지 진솔한 속내를 털어놓는다. 특히 박정태와 어머니는 어릴 적 추신수가 야구하는 것을 반대했다고 밝혀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지 궁금증이 더해진다. 이어 추신수 또한 미국 진출 당시 어머니를 원망했었다고 밝혀 이목을 사로잡는다. 2일 오후 9시 20분 방송.
- 밀라논나, 삼풍 백화점 피해자였다…“붕괴 당시 동료·친구 잃어” (라스)
- 2024. 10. 29 14:18 연예
- MBC ‘라디오스타’ 패션 디자이너이자 대한민국 1호 이탈리아 밀라노 유학생인 밀라논나가 ‘라스’에 출연한다. 30일 방송되는 MBC ‘라디오스타’는 밀라논나, 최현석, 권율, 임우일이 출연하는 ‘흑백 글로벌좌’ 특집으로 꾸며진다. 밀라논나는 1978년 한국인 최초로 밀라노로 유학을 간 뒤 1986년 아시안 게임의 개-폐회식 공식 의상 디자이너로 활약한 바 있다. 패션 디자이너인 그는 이탈리아의 명품 브랜드를 한국에 론칭 시킨 패션 바이어 역할까지 하며 다양한 활동을 이어왔다. 이날 ‘라디오스타’에서는 그가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이탈리아 밀라노로 유학을 하게 된 사연이 공개된다. 또한 그는 과거 해외 유명 명품 브랜드 수입을 위해 특사로 파견된 비화까지 풀어 모두의 감탄을 불러 일으킨다. 삼풍백화점에서 바이어로 근무할 당시, 이탈리아로 출장을 가게 된 그는 살바토레 페라가모와 막스마라의 회장을 만났던 당시를 회상한다. 예술품과 패션에 남다른 조예를 가지고 있는 그들과 대면하기 위해 한껏 차려입고 특별한 액세서리를 했다고 밝히며,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를 삼풍백화점에 입점시킬 수 있었던 사연을 풀었다. 밀라논나는 막스마라 회장을 만날 당시 착용하고 갔던 목걸이와 브로치를 시작으로, 다양한 패션 아이템들을 공개해 눈길을 끈다. 그 중에는100년가량 된 셔츠부터 이탈리아 대사에게 받은 액세서리까지 포함돼 있다고 해 호기심을 높인다. 삼풍백화점 붕괴와 관련한 가슴 아픈 사연도 전한다. 그의 직장 동료를 비롯해 친구들이 안타까운 붕괴 사고의 희생자가 된 것. 비슷한 시기에 첫째 아들의 뇌수술로 인생의 큰 시련을 경험했던 가슴 아픈 스토리도 공개한다. 그런가 하면 밀라논나가 70대에 유튜버가 된 사연도 공개된다. 그는 말 그대로 ‘길거리 캐스팅’을 당했다면서 셀프로 머리를 자르는 영상부터 특별한 소품들이 가득한 집 소개 브이로그 등의 유튜브 콘텐츠를 찍게 된 사연을 소개한다. 오후 10시 30분 방송.
주간경향(총 7 건 검색)
- [만화로 본 세상]투쟁에 참여한 당시 여성들의 다양한 서사(2020. 04. 24 15:42)
- 2020. 04. 24 15:42 문화/과학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기획한 <만화로 보는 민주화운동>이 출간됐다. 김홍모·윤태호·마영신·유승하 작가가 참여한 이번 시리즈는 각각 제주 4·3,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을 다뤘다. 나란히 한 케이스에 꽂힌 네 권의 책 중 유승하 작가의 <1987 그날>을 먼저 꺼내들었다. 당연히 영화 <1987> 개봉 후 있었던 논쟁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유승하 작가의 <1987 그날> 표지 / 창비 영화 <1987>은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사건과 이한열 열사의 최루탄 피격사건을 중심으로 1987년 대투쟁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인지에 대한 답을 써내려간 영화다. 결집한 민중의 위대한 힘을 웅변하는 작품답게 영화는 다수의 인물로 주연을 구성한다. 모두 실존했던 남성들 사이에 김태리 배우가 분한 ‘연희’는 유일하게 여성이자 허구의 인물이었다. 진실의 무게와 시대의 아픔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인 남성들 사이에서 연희는 정치도, 역사도 관심 없는 ‘평범한’ 시민의 얼굴을 표상했다. ‘잘생긴 운동권 오빠’에게 반해 이 역사의 흐름에 뛰어든 연희 모습에 불편함을 느낀 여성들이 많았다. 영화 <1987>이 여성들을 지웠느냐, 아니냐의 논란이 분분했다. 황진미 평론가는 연희가 강렬하진 않지만 영화 내에서 유일하게 성장하는 캐릭터라는 점을 높이 샀다. 그의 말처럼 물론 영화 속에도 당시 여성들이 투쟁의 주체로 움직였음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들은 등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는 사람 눈에나 또렷이 보일 뿐이다. 이 영화에서 ‘여성’이 도드라지는 건 연희일 수밖에 없다. 유승하 작가가 그러한 논란을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유승하 작가 또한 그 당시 투쟁의 흐름에 참여한 여성이었으니, 그가 어떻게 다른 ‘1987’을 써낼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책장을 열어 가장 먼저 보게 되는 작중 인물소개란에서 ‘이름’을 가지고 서로 다른 얼굴을 한 여럿의 ‘여성들’을 보았을 때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것은 안도였고, 어쩐지 뭉클함이었고, 왠지 모를 서글픔이었고, 무엇보다 기대감이었다. 영화 <1987>의 연희라는 캐릭터에서 느낀 아쉬움 중 하나는 여성은 왜 남성을 매개로 해서만 자신의 역사성을 드러낼 수 있게 되는 것인가라는 질문이었다. 만화 <1987 그날>은 당시 투쟁에 참여한 여성들의 다양한 서사를 드러낸다. 대학생 진주는 사회적 책임과 불의를 눈감을 수 없어 운동에 동참한다. 그의 친구 혜승은 가족과 운동 사이에서 갈등하다 스스로 세상을 등진 언니의 죽음을 사유하며 시대에 다가간다. 가난 속에서도 미대에 진학하려 애쓰다 좌절하는 나리는 민중미술을 통해 ‘그날’의 작은 물결이 된다. <1987 그날> 역시 박종철·이한열 열사의 이야기가 뼈대를 이루지만 상계동 강제철거, 신촌 벽화 사건 등 철거민 운동, 민중미술의 역사가 1987년의 흐름에 어떻게 함께했는지 놓치지 않는다. 혜승의 언니의 모델로 삼은 ‘박혜정 열사’의 죽음과 같이 ‘열사’가 되지 못한 죽음이 이 역사 속에 무수히 함께했음을 이야기하는 것도 유승하라서 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서사가 종종걸음을 치는 듯한 느낌은 조금 아쉽지만, 한편으론 그 종종거림이 ‘여성의 목소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력도, 역사도 되지 못한 채 내 안에만 구겨 넣어진 분투의 기억이 작은 물꼬를 만날 때 내는 소리 말이다.
- 만화로 본 세상
- 일본, 정유재란 당시 왜성 40여개 쌓았다(2019. 03. 11 14:50)
- 2019. 03. 11 14:50 문화/과학
- 일본이 우리나라에 쌓은 왜성의 현황 지도가 발견됐다. 박종평 연구가는 “다양한 왜성의 존재와 형태를 보면 일본군이 우리나라 남쪽 지역을 영구 지배하려는 야욕을 가졌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유재란 당시 일본이 우리나라에 쌓은 왜성의 현황 지도가 발견됐다. 이 지도는 중국 국가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목판본 <조선일본도설(朝鮮日本圖說)>에 실려 있다. 책 제목은 ‘조선과 일본의 지도와 해설’이라는 뜻이다. 이 책의 존재는 2014년에 처음으로 중국 학자인 정지에시(鄭潔西) 박사가 일본 가나가와대에서 발간하는 <비문자자료연구(非文字資料硏究)>에 소개한 바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지금까지 이 책을 소개한 사례가 없다. 속에 있는 ‘사로왜채총도(四路倭寨總圖)’. 모두 17개의 왜성이 그려져 있다. 이순신 연구가인 박종평씨가 중국 국가도서관을 통해 책의 전문을 입수했다. 이 책에는 정유재란 때 왜성의 전체적인 위치와 구체적인 형태의 그림이 실려 있다. 정유재란 당시의 그림으로서 왜성의 위치가 모두 나타난 그림은 <조선일본도설>이 최초라고 할 수 있다. 박종평 연구가는 “우리나라에서는 이 책처럼 왜성에 대한 전체적인 위치를 그린 지도가 없어 자료가치가 아주 크다”며 “경남과 전남지역에 세워진 다양한 왜성의 존재와 형태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책에 그려진 주요 거점의 왜성에 대한 묘사는 아주 상세하다. 이중삼중으로 성곽, 성곽 앞뒤에 설치된 나무울타리와 해자가 있다. 성가퀴(몸을 숨겨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성 위에 낮게 덧쌓은 담) 등의 방어시설이 그려져 있다. <선조실록>이나 진경문의 <예교진병일록>, 조경남의 <난중잡록> 등에서 울산·사천·순천왜성 전투 기록을 살펴보면, 조·명연합군이 적극적으로 공격해 왜성을 함락시킨 사례가 없다. 왜성의 방어시스템이 조·명연합군의 공격 능력보다 훨씬 우세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국가도서관 소장 <조선일본도설> 그림 속 왜성의 모습 중 일부는 기존에 알려졌던 그림과 거의 일치한다. 순천(예교·왜교)왜성의 경우는 <정왜기공도병(征倭紀功圖屛)>(국립중앙박물관 소장)과 비교해 볼 수 있다. 울산(도산)왜성은 <울산성 전투도>(일본 나베시마보효회 소장)와 대부분 일치한다. 특히 사천왜성과 부산왜성의 경우 기존에는 그 전모를 확인할 수 있는 그림이 없었다. 이 책 속의 그림으로 전모를 파악할 수 있게 됐다. 또한 이 책에는 그동안 학계에서 알려지지 않은 왜성의 존재를 그려놓았다. 기존의 여러 연구 결과물을 살펴보면, 남쪽에 존재했던 왜성은 31~34개 정도가 된다. <조선일본도설>에서는 이들 연구물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8개의 왜성을 새롭게 확인할 수 있다. 순천·구례·한산·김해·곤양·광양·목창·영춘왜성이다. 박 연구가는 “순천은 순천왜성과 같은 것일 수 있고, 구례의 경우는 잠시 주둔했던 곳일 수 있으며, 한산왜성은 견내량왜성, 김해왜성은 마사 혹은 농소왜성일 가능성도 있다”면서 “이런 사례를 제외해도 곤양·광양·목창·영춘왜성 등은 새롭게 드러난 왜성”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본도설>의 그림에 의하면 몇 개가 더 추가돼 왜성이 40여개에 이른다. 박 연구가는 “왜성에 대한 묘사가 사실적이어서 향후 왜성 연구와 복원에 큰 도움이 될 자료”라며 “정유재란 당시의 전투 상황을 보다 더 깊게 연구할 수 있게 해준다”고 말했다. 왜성의 대부분은 1597년 2월, 일본군이 다시 침입해 북상하다가 직산에서 명나라 군대에 패전한 뒤 남쪽으로 후퇴해 호남의 순천부터 동해의 울산까지 동·남해안 일대 해안 요충지에 쌓은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와의 강화협상 때 전라·경상·충청도 할양을 요구했다. 이 요구가 거절되자 교두보인 왜성을 쌓았다. 정유재란 당시의 왜성은 그들이 강할 때는 기동전을 위한 침략 전진기지로, 약할 때는 지구전 혹은 진지전을 위한 최후의 보루였다. ‘중로왜채분도(中路倭寨分圖)’(위), ‘동로왜채분도(東路倭寨分圖)’(아래) <조선일본도설>은 정유재란이 끝난 뒤 명나라에서 왜군의 재침략을 대비하기 위해 저술된 책이다. 저자는 나타나 있지 않다. 내용으로 추정해 보면, 정유재란에 참전했던 명나라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책 중 한 목차인 ‘왜채총도설’에서 저자는 ‘1598년 가을, (…) 그들의 영루를 살폈는데 빈틈없고 세밀하게 건설되었고, 교묘한 솜씨가 잘 갖추어 있었다. 그들이 본래 방어를 잘한다고 했는데 실로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려놓았으니 해양 방어를 하려는 사람이 읽기를 기다린다’고 적어 놓았다. 이순신 연구가 박종평씨가 전문 입수 박 연구가는 “<조선일본도설>의 그림에 나타나는 왜성은 상상화가 아니라 실제로 왜성의 형태를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정지에시 박사도 논문에서 밝혔지만, 명나라 조용현의 <조정우서목(趙定宇書目)>, 명나라 전겸익의 <강운루서목(絳雲樓書目)>에 이 책의 제목이 언급돼 있다. <조선일본도설> 중 주목해서 볼 부분은 ‘사로왜채총도(四路倭寨總圖)’다. 왜채는 왜성을 지칭한다. 실록이나 당시 기록에서는 대부분 ‘토굴’이나 ‘소굴’ 등 ‘굴’로 표현했는데, 이 책에서는 왜채라고 쓰고 있다. 사로(四路)는 동로·중로·서로·수로를 말한다. 조·명연합군이 1598년 9월 일본군을 토벌하기 위해 나아간 네 경로를 말한다. 이 책이 일본군에 대한 공격 개시 이전에 저자가 직접 왜성을 살펴보고 그려놓았다가 나중에 정리해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로왜채총도’는 지도에 대한 설명문 ‘왜채총도설(倭寨總圖說)’로 시작해 ‘동로왜채분도(東路倭寨分圖)’와 ‘동로부산채도설(東路釜山寨圖說)’,‘중로왜채분도(中路倭寨分圖)’와 ‘중로사천채도설(中路泗川寨圖說)’, ‘서로왜채분도(西路倭寨分圖)’와 ‘서로순천왜채도설(西路順天倭寨圖說)’, ‘제로왜추수채전도(諸路倭酋水寨全圖)’와 ‘수로남해왜채도설(水路南海倭寨圖說)’로 구성돼 있다. 왜성의 그림 외에도 ‘중로사천채도설’에는 사천왜성의 모습이 묘사돼 있다. ‘심안도(沈安道)라는 사천의 왜구가 교활한 소굴을 만들었다. 그 땅은 바닷가에 매달려 연결되어 있는데, 육지에는 물길을 파서 바닷물을 끌어들였다. 높은 벽과 늘어선 성가퀴로 지키게 했고, 이중의 해자로 견고하게 했다. 언덕에 보루를 지었기에 네 곳으로 정찰하고 살필 수 있다.’ 박종평 연구가는 “다양한 왜성의 존재와 형태를 보면 일본군이 우리나라 남쪽 지역을 영구 지배하려는 야욕을 가졌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 [문화]명량해전 당시 거북선은 없었다(2014. 08. 11 16:51)
- 2014. 08. 11 16:51 문화/과학
- ㆍ영화 의 역사적 사실 논란, ㆍ이미 불타서 없던 거북선 등장시켜 극적 요소 가미 영화 이 연일 최단 기간 관객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개봉 열흘 만인 8월 8일 새벽 800만명 관객 기록을 돌파했고, 최단 기간 1000만 관객 동원을 앞두고 있다. 영화 제작팀은 명량해전의 역사적 사실을 놓고 최대한 역사적 고증을 거쳤다고 밝혔다. 하지만 영화와 역사적 사실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 명량해전의 역사적 사실은 등 여러 기록에서 나타나지만 대부분 이순신 장군이 쓴 에 사실적 근거를 두고 있다. 그렇다면 영화 속 내용은 의 역사적 사실과 어떻게 다를까. 우선 영화 속에서 거북선을 불태우고 달아난 경상우수사 배설의 설정부터 와 차이가 있다. 경상우수사 배설은 원균이 지휘한 칠천량 전투에서 12척의 배를 갖고 도망쳐 나왔다. 이 배가 조선 수군의 마지막 남은 12척이다. 그는 명량해전(1597년 음력 9월 16일)을 보름 정도 앞둔 9월 2일(음력) 새벽에 도망을 쳤다. 이 같은 사실은 이순신 장군의 에 기록돼 있다. 배설이 거북선을 불태우고 달아난 것이 아니라 그냥 육지로 도망친 것이다. 거북선은 이미 칠천량 전투에서 모두 불타고 없어졌다. 영화 에서는 이 거북선이 등장한 것이다. 영화 의 한 장면. 비겁한 도망자 배설, 다소 과장 이순신 연구가로 (일상이상)를 최근 출간한 김태훈 전국은행연합회 기획조사부장은 “거북선이 불타는 장면은 관객들의 공분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극적 요소를 가미한 것에 불과하다”면서 “거북선은 이미 칠천량 해전에서 모두 불탔고, 매일 진을 옮겨 다니는 도중에 거북선을 단기간에 만들 수는 없었다”고 설명했다. (더 퀘스트)를 쓴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는 “기록을 보면 명량해전에서 거북선은 등장하지 않았으며, 다만 거북선으로 위장하려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고 설명했다. 영화 에서 배설은 ‘제2의 원균’으로 등장한다. 거북선을 불태우고 달아나다가 화살에 맞아 죽는 것이다. 실제로는 배설은 도망을 쳤다가 1년 후 권율 장군에게 잡혀 참수를 당하게 된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는 “배설이 이순신 장군을 암살하려 하고 거북선을 불태운 뒤 도망치는 모습은 역사의 왜곡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허구”라고 말했다. 박 연구가는 “비겁한 도망자 배설은 맞지만 이순신 장군을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그를 참혹한 희생양으로 만들었다”면서 “이는 제2의 원균 만들기”라고 비판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 당시 이순신 장군을 극단의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원균을 극단의 희생양으로 삼은 것과 비슷한 설정이라는 것이다. 이에 비해 김태훈 기획조사부장은 배설의 설정에 대해 “극적 재미와 감동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영화에서는 충분히 가공이 가능하다고 본다”면서 “왜곡이 아니라 역사적 상상력을 통한 강조”라고 말했다. 명량해전의 실제 전투에서 영화 이 역사적 사실과 다른 점은 백병전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김태훈 기획조사부장은 “영화에서 대장선에서 백병전이 벌어지는데 난중일기를 보면 본격적인 백병전은 없었다”면서 “대장선에서는 사망자 2명 부상자 3명이 발생한 기록을 보더라도 백병전이 벌어졌다고 보는 것은 무리”라고 말했다. 에는 ‘상선(대장선)이 홀로 적선들 속으로 들어갔다. 포탄과 화살이 비바람처럼 일었지만 여러 배들은 구경만 하고 나오지 않아 일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었다’고 기록돼 있다. 의 다른 전투 기록을 보면 조선 수군은 화포로 왜선을 파괴할 뿐 이순신 장군이 직접 칼을 휘두르며 적과 싸움을 벌였다는 기록은 등장하지 않는다. 지략이 뛰어난 이순신 장군은 왜군보다 우수한 화포와 활쏘기 기술로 원거리 공격을 펼쳤다. 왜군을 쫓아 육지에까지 상륙한다든지 왜선이 판옥선 근처에 접근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근접전에서 왜군이 조총과 뛰어난 검술을 펼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불가피하게 근접전이 필요할 경우 돌격선으로 거북선을 이용했다. 선상 백병전도 영화 속 상상력 명량해전에서 백병전에 가까운 근접전은 안위의 함선에서 일어났다. 정유일기에는 ‘안위가 몹시 당황해 곧바로 뚫고 들어가 교전할 때 적장의 배와 다른 두 척의 적선이 안위의 배에 개미처럼 달라붙었다. 안위의 격군 7~8명이 물에 떨어져 헤엄치고 있었으나 구할 수 없었다’고 기록돼 있다. 김 조사부장은 “안위의 함선으로 왜군이 백병전을 시도했으나 대장선이 도와줌으로써 왜군의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고 설명했다. 영화 속에서 판옥선으로 왜선을 격파하는 장면도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영화에서는 이를 충파(衝破)라고 표현했으나 충파는 중 1593년 2월 20일 기록에 등장한다. 이 뜻은 판옥선으로 왜선을 격파하는 것이 아니라 큰 바람이 불어 배끼리 부딪쳐 ‘구멍나고 깨졌다’는 표현에 등장한다. 이를 당파(撞破)로 표현한 주장도 있다. 하지만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는 “충파든 당파든 난중일기 내용을 보면 모두 잘못 해석됐다”고 말했다. 박 연구가는 “1592년 6월 5일 당항포 해전 기록에서 ‘당파’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천자·지자의 각 총통을 연달아 쏘아 왜적선 50여척을 쳐서 깨뜨렸다’는 표현에 당파가 등장한다”고 설명했다. 이순신 장군의 장계 등에서도 당파는 천자포·지자포·대장군전 등의 총통 등을 활용해 포탄 등으로 맞혀 적선을 깨뜨리는 방식의 전투였다. 박 연구가는 “거북선으로 직충(直衝)했다는 기록도 등장하지만 이 역시 거북선이 왜선들을 들이박았다는 것이 아니라 적의 대열을 깨뜨리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화포가 왜선에서 터지면서 배에 불이 붙는 것도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화포는 당파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왜선을 깨는 역할만 했다. 왜선에 불을 내기 위해서는 따로 불화살을 이용했다. 영화 의 역사적 사실 논란은 결국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제대로 그려냈느냐는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김태훈 기획조사부장은 “영화 이 이순신 장군의 절규와 고뇌를 그려내면서 완전 무오류의 장군상을 만들어낸 이전의 이순신 장군 영화보다 진일보했다”고 평가했다. 김 조사부장은 “신이라면 숭배의 대상이지 따라가야 할 귀감이 되지 못한다”면서 “이순신 장군이 너무 완벽하다면 이순신 장군을 따를 사람이 없으므로 온전히 이순신 장군을 인간의 영역으로 데리고 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는 “탈영병을 처형하는 장면 등은 이순신 장군의 진정한 리더십과 맞지 않는 부분으로, 이순신 장군의 삶을 진솔하게 그려낸 것이 아니라 할리우드식, 사무라이식 영화로 지나친 영웅화를 시도한 측면이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박 연구가는 “영화 이 사실보다는 픽션에 가깝지만 우리 곁에 이순신 장군을 다시 불러냈다는 의미는 소중하다”고 덧붙였다.
- [정치]LH, 통합 당시 우려 현실로 나타났다(2013. 03. 11 18:23)
- 2013. 03. 11 18:23 정치
- ㆍ출범 3년 만에 눈덩이 빚… “공기업 선진화 모델 자랑하더니” 이명박 정부가 공기업 선진화의 대표적인 성과라고 홍보했던 LH공사(한국토지주택공사)가 부채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다. 공기업인 LH공사가 과도한 부채로 인해 부실이 심화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LH공사 본사 사옥 전경 | 경향신문 자료 LH공사는 지난 2009년 10월 주택공사(주공)와 토지공사(토공)가 통합돼 출범했다. 주공은 공공 임대주택 건설 등 주택건설을 주로 담당했고, 토공은 신도시 건설, 산업단지 및 택지조성 등 국토개발 관련 업무를 주로 했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이후 ‘공기업 선진화 계획’을 추진, 우선 주공과 토공의 통합을 밀어붙였다. 당시 정부는 양 공사가 통합하면 조직이 슬림화하고 경영효율화를 도모하는 등 통합의 시너지 효과가 클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통합 이후에도 이명박 정부는 LH공사가 공기업 선진화의 본보기라고 자랑했다. 기획재정부가 발간한 에 따르면 ‘공공기관 통·폐합은 공공기관 선진화 방안의 가장 대표적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주공과 토공의 통합은 현 정부의 강력한 추진 의지를 통해 통합에 성공함으로써 L H공사가 출범하는 결실을 맺게 됐다’고 소개하고 있다. 출범 당시 부채 108조에서 139조로 증가 하지만 통합 당시에 민주당 등 야당과 일부 전문가들은 토공과 주공의 통합은 오히려 부실을 키울 뿐 통합의 시너지 효과는 없을 것이라며 강력히 반대했다. 국회 국토해양위 위원이었던 김진애 전 의원 등은 건설·부동산시장의 장기 침체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국내 최대 규모의 건설·부동산 공기업 통합이 실패했을 경우 막대한 경제적 피해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당시에 토공과 주공의 한 해 사업 투자규모는 각각 20조원 정도로 국내 건설 규모 1·2위를 차지했다. 또한 2008∼2009년은 미국발 금융위기로 전 세계 경제가 침체기로 돌입한 때였다. 임대주택 건설 부채(15조원) 등 과다한 빚을 안고 있었던 주공과 상대적으로 건실한 평가를 받았던 토공의 통합은 동반부실로 이어져, 국가 경제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2009년 4월 김형오 국회의장은 주공과 토공의 통합법안을 국회 본회의에 직권상정했다. 당시 한나라당은 주공과 토공의 통합과 관련한 많은 우려와 사전에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는 민주당 등 야당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강행처리했다. 주공과 토공이 통합해 LH공사로 출범한 지 3년이 지난 지금 성적표는 어떨까. 통합 당시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LH공사는 천문학적인 빚으로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LH공사는 출범 당시 총부채가 108조원이었다. 통합 이후 부채는 계속 증가했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LH공사의 자산은 169조4000억원이며, 총부채는 139조4000억원에 이르렀다. 이 중 금융부채가 무려 104조1000억원이었다. 반면 당기순이익은 1조2000억원에 불과했다. 여기에 장기화하고 있는 부동산 경기침체도 LH공사의 부채 증가에 한몫 했다. 2011년 기준으로 볼 때 LH공사의 부채(130조6000억원)는 국가 부채(434조원)의 32% 규모이며, 지방자치단체 전체 부채(28조원)의 498%에 달한다. 하루 이자만도 120억원에 달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문제는 영업이익으로 이자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여기에 LH공사가 진행하는 사업 특성상 투자비를 조기에 회수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도시개발정비사업의 경우 토지 매각을 통해 투자금 회수 기간이 상당히 길고, 임대주택 사업의 경우 임대보증금 이외에는 투자금 회수가 거의 불가능하다. 국회 국토해양위원회 박수현 의원(민주당)은 “LH공사는 통합 이후 부채문제가 심각한 상황으로 2016년에는 167조원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LH공사는 이러한 부채의 증가로 차입경영을 계속해야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LH공사 측은 사업조정 등 자구노력으로 부채 증가 속도가 감소하는 등 재무가 개선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LH공사 관계자는 “부채비율이 2009년 말을 기점으로 매년 낮아지고 안정화 추세로 들어가고 있다”며 “지난해의 경우 당기순이익도 전년도의 8000억원에서 1조2000억원으로 증가하는 등 재무구조가 개선되고 있다”고 밝혔다. LH “당기순이익 늘어 재무 개선되고 있어” LH공사 부채의 핵심은 임대주택사업 부문이다. 임대주택의 재원은 국민주택기금에서의 차입 등으로 사업이 전개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보금자리주택 등 임대주택 건설로 2009년 41조원, 2010년 55조3000억원, 2011년 59조1000억원을 들였다. 임대주택의 부채(2011년 말 기준)는 46조9000억원이며, 이 중 이자부담을 해야 하는 금융부채는 34조5000억원이다.(국민주택기금 28조6000억원, 채권 5조9000억원) 하지만 현재와 같이 LH공사가 과도한 금융부채를 안고 있고, 임대주택 1호를 건설하는 데 약 1억여원의 부채가 누적됨에 따라 토지와 주택 매각 수익으로 임대주택의 적자를 보전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담당부처인 국토해양부 등 정부도 임대주택의 재원 마련과 관련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지난 2009년 4월 1일 국회 국토해양위 회의에서 이병석 위원장이 한국토지주택공사법안을 민주당 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통과시키고 있다. | 우철훈 기자 특히 박근혜 정부는 임대주택 건설을 신주거복지정책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에 따라 앞으로도 임대주택 건설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박근혜 정부 일각에서는 임대주택을 전문으로 전담하는 주거복지전담기구를 설치·운영하는 방안도 나오고 있다. 즉 정부가 직접 공공 임대주택의 수요를 측정하고, 정부 재원으로 공공 임대주택 건설을 지원·관리해야 한다는 안이다. 정부는 통합 당시 양 공사가 통합을 하면 임대주택 재원 수단을 마련할 수 있고, 분양가와 임대료 인하를 할 수 있다는 논거를 내세웠다. 하지만 이 같은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당시 정부는 LH공사가 출범하면 토공이 수행했던 토지개발이익으로 주공이 수행하고 있는 임대주택 건설재원으로 활용하고, 택지개발(토공)과 주택건설(주공)을 일괄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주택건설 원가를 인하할 수 있다는 주장을 했다. 하지만 현재까지 주택 분양가격 인하효과는 없으며, 임대주택 건설원가도 상승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임대주택의 경우 통합 전 토지조성 원가의 60∼70%에서 공급받아 건설되던 임대주택이 현재는 건설 원가가 오히려 올랐다는 것이다. 김용구 미래경영개발연구원장은 “당시 정부가 토지개발이익으로 임대주택 재원을 마련한다는 굉장히 무책임한 발상을 했다”며 “토지개발이익은 국토의 균형발전에 사용하고, 임대주택 재원은 정부가 재정정책으로 해결했어야 하는데, 그것을 무조건 합쳐서 문제를 키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LH공사 측은 분양가와 임대료 부문에서도 통합의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LH공사 관계자는 “임대주택의 경우 토지조성 원가가 규모(평형)에 따라 각각 다르게 책정되고 있다”며 “지난해 당기순이익이 1조2000억원 발생했다는 것은 토지부문 이익으로 임대주택 부문 손실을 상쇄하고도 남았다고 해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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