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2,093 건 검색)
- ‘마약’ 야산·해안에 숨겨 판매·투약…외국인 등 13명 검거
- 2024. 12. 16 10:09 사회
- ... 창원과 부산지역 야산과 해안가에 은닉 후 일부를 베트남 국적 3명에게 판매한 혐의를 받는다. 마약 매수자 3명은 창원과 진주 등 베트남 전용 유흥업소에서 B씨 등 7명과 함께 필로폰을 투약한 혐의도...
- 마약이 흘러 들어간 바다…돌고래가 죽어간다
- 2024. 12. 15 20:39 과학·환경
- ... 미 해양대기청(NOAA) 소속의 공동 연구진은 이달 초 미국과 멕시코, 쿠바로 둘러싸인 멕시코만에서 마약성 진통제인 펜타닐 성분이 검출된 다수의 돌고래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 펜타닐마약
- 바다 헤엄치는 돌고래 몸에서 ‘좀비 마약’…도대체 왜?
- 2024. 12. 15 08:00 과학·환경|과학·환경
- ... 미 해양대기청(NOAA) 소속의 공동 연구진은 이달 초 미국과 멕시코, 쿠바로 둘러싸인 멕시코만에서 마약성 진통제인 펜타닐 성분이 검출된 다수의 돌고래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 마약·화학무기···알아사드가 퍼뜨린 ‘독’ 찾아야 하는 시리아
- 2024. 12. 13 15:43 국제
- ... 또는 테러리스트에 의해 약탈당할 위험이 커지고 있다”고 WP에 밝혔다. 한편 알아사드 정권이 마약을 제조해 보급한 정황도 드러났다. CNN에 따르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라온 영상에는...
- 알아사드시리아화학무기
스포츠경향(총 1,260 건 검색)
- [종합] 홍진경, 마약 거리 방문…실태에 충격 “팝콘 팔듯 마약을”
- 2024. 12. 13 13:01 연예
- 유튜브 채널 ‘공부왕찐천재 홍진경’ 방송인 홍진경이 미국 마약거리의 실상에 경악했다. 12일 유튜브 채널 ‘공부왕찐천재 홍진경’에는 ‘홍진경 눈을 질끈 감은 미국 최악의 마약거리 실태 (충격,중독자인터뷰)’라는 제목의 영상이 공개됐다. 영상에서 홍진경은 마약 거리의 어두움을 살피기 위해 직접 샌프란시스코의 한 지역을 찾았다. 유튜브 채널 ‘공부왕찐천재 홍진경’ 이날 심혈관계 중환자실 간호사와 신약 개발 연구원을 만난 홍진경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실제로 마약을 판매하고 있냐고 물었다. 이에 간호사는 “고속도로에서 뻥튀기 팔듯이 ‘머쉬룸’하면서 판매한다”고 답했고, 홍진경은 마약 판매상을 보며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팝콘 팔듯이 판다”고 지적했다. 홍진경은 “제가 듣기로는 범죄자를 수용할 감옥이 부족해서 웬만하면 풀어준다고 들었다. 솜방망이 처벌이니 마약을 권유하고 판매하는 사람도 늘어난 거다”라며 안타까워 했다. 실제로 미국의 마약 중독자 수는 2016년부터 5만 명 이상 증가했다고 한다. 이후 미국 내 가장 위험한 지역 중 한 곳인 텐더로인으로 향한 홍진경은 길 한복판에 누운 사람을 발견하기도 하고, 길거리에 앉은 마약 중독자를 보며 경악했다. 유튜브 채널 ‘공부왕찐천재 홍진경’ 신약 개발 연구원과의 작은 친분으로 막간 인터뷰를 진행한 홍진경은 마약 중독자들에게 노숙하는 이유를 물었다. 이에 22살인 한 중독자는 “가족들과 연락은 하고 있다”면서도 마약을 위해 노숙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다 한 마약 중독자는 현금을 달라며 촬영 중 말울 걸어왔다. 이를 본 간호사는 “(노숙자의) 볼에 상처가 있다. 마약을 하고 나서 가려워서 긁는 거다. 깊숙이 파면서 긁어서 상처와 염증이 있는 거다. 마약을 중단하면 가려움이 더 심해진다”며 끔찍한 후유증이 온다고 밝혔다. 이어 또다른 후유증에 대해 “(마약을 하면) 성적 흥분이 되게 심해져서 성추행, 성폭행 문제가 심각하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피의자와 피해자가 된다”고 전했으며 “마약을 한 임산부들이라면 아기까지도 중독이 된다. 중독이 된 채로 태어나는 거다”고 말했다.
- ‘마약 혐의’ 세번째 기소 오재원, 징역 1년6개월 추가
- 2024. 12. 13 08:02 야구
- 연합뉴스 수면제를 대리 처방한 혐의로 기소된 국가대표 출신 전 프로야구 선수 오재원에게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이 선고됐다. 오재원이 마약류관리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건 이번이 세 번째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4단독 유동규 판사는 12일 마약류관리법 위반(향정) 혐의로 기소된 오재원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하고 2365만원의 추징을 명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유명 야구선수 지위를 이용해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운 후배에게 처방을 받게 했고, 3년이 넘는 기간 범행이 계속돼 수수한 양도 많다”고 지적했다. 오재원은 2021년 5월부터 올해 3월까지 86회에 걸쳐 전현직 야구선수 등 14명에게 의료용 마약류인 스틸녹스와 자낙스 2천365정을 처방받게 한 후 전달받은 혐의를 받는다. 검찰은 오재원이 야구계 선배 지위를 이용해 20대 초중반 어린 후배나 1∼2군을 오가는 선수 등에게 수면제를 처방받아 달라고 요구한 것으로 파악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일부 후배들에게 욕설과 협박까지 한 것으로 조사됐다. 오재원은 앞서 2022년 11월~2023년 11월 11차례 필로폰을 투약하고, 지인으로부터 향정신성 의약품인 스틸녹스정(졸피뎀 성분의 수면유도제) 2242정을 받은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 돼 지난 7월 1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2심 재판 중이다. 지난해 11월 지인 이모씨로부터 필로폰 약 0.2g을 수수한 혐의로 지난 5월 추가 기소된 그는 지난 10월 1심에서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추가 선고받고 항소했다.
- ‘유아인 마약류 불법 처방’ 의사들 2심서 일부 감형
- 2024. 12. 13 07:56 연예
- 지난 9월 법정 출석하는 유아인. 연합뉴스 배우 유아인에게 프로포폴 등 향정신성 의약품을 불법 처방해 유죄를 선고받은 의사들이 2심에서 일부 감형이 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9부(이성복 부장판사)는 12일 마약류관리법 위반(향정) 혐의를 받는 의사 A씨에게 벌금 2500만원을 선고했다. A씨는 앞서 1심에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 벌금 200만원을 선고받았다. 1심서 벌금 4000만원을 선고받았던 의사 B씨에게는 벌금 500만원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A씨에게 어린 자녀가 있는 점 등을 양형에 고려했다고 밝혔다. B씨에 대해서는 “투약 내역을 제대로 보고했고 일부 실수라고 본다”고 했다. 유아인에게 타인 명의로 프로포폴을 처방하고, ‘셀프 투약’하기도 한 의사 C씨에게는 원심과 같이 징역 1년 2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또 다른 의사 D씨에게도 벌금 25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유지했다. 재판부는 이들에게 “의료인의 준법의식이 이 정도로 낮으면 안 된다”며 “이 사건 항소심 판결을 떠나서 가볍게 생각하지 말라”고 지적했다. 검찰은 올해 1월 유아인에게 수면제와 프로포폴 등 향정신성의약품을 과다 처방한 의사 6명을 재판에 넘겼다. 유아인은 2020년 9월~2022년 3월 서울 일대 병원에서 미용 시술의 수면 마취를 빙자해 181차례에 걸쳐 의료용 프로포폴 등을 상습 투약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그는 지난 9월 1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고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 ‘특파원보고 세계는 지금’ 日 메이드·집사 카페가 사실은 유흥업소?···‘좀비마약’ 펜타닐, 시날로아 카르텔 제조현장 단독 취재
- 2024. 11. 30 02:09 연예
- KBS 30일 오후 9시 40분 KBS1 ‘특파원보고 세계는 지금’ 381회는 미성년 종업원 접대 발각으로 인해 논란이 일고 있는 日 유흥업의 현실, ‘좀비 마약’ 펜타닐의 제조 현장에 대해 조명한다. 최근 일본에서는 콘셉트 카페와 같은 이색 카페가 확산되고 있다. 콘셉트 카페에서는 종업원들이 메이드, 집사와 같은 코스프레 복장을 입고 서빙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카페에 특정 테마를 도입해 다양한 연령대의 손님을 끌어들이려는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콘셉트 카페는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자 가격을 낮추고 차별화를 시도해 살아남으려는 유흥업소들이다. 일본은 현재 ‘풍속영업 등의 규제 및 업무의 적정화 등에 관한 법률(이하 풍영법)’에서 18세 미만의 미성년자에게 접대를 시키는 것을 금지하고 있으며, 이를 위반할 시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만엔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고 있다. 그런데도 지난 20일, 일본에서는 미성년자 종업원의 접대 혐의로 인한 풍영법 위반으로 도쿄의 콘셉트 카페 책임자 5명이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KBS 이런 콘셉트 카페의 종업원들은 원조 교제나 성매매에 빠지기 쉽고, 심지어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결말을 맞기도 한다. <특파원보고 세계는 지금>은 일본 유흥업계 청년 종사자들을 직접 만나 그 실태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몸이 뻣뻣해지고 복용을 멈추면 엄청난 고통이 따르는 마약성 진통제. 이른바 ‘좀비 마약’으로 불리는 펜타닐이 미국 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한해 약물 과다 복용으로 숨지는 10만 명 중 80%가 펜타닐 중독일 정도이다. 많은 펜타닐은 과연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멕시코 최대 마약 범죄 조직 중 하나인 ‘시날로아 카르텔’은 펜타닐 최대 공급선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지난 10년간 마약 밀매로 최소 30억 달러나 되는 거액을 벌어들였다. ‘특파원 보고 세계는 지금’은 시날로아 카르텔의 거점지 중 하나인 쿨리아칸에서 시날로아 카르텔의 조직원을 어렵게 접촉했다. ‘시날로아 카르텔’의 실제 펜타닐 제조 현장을 단독 취재한다. KBS ‘특파원 보고 세계는 지금’은 윤수영 아나운서, 김재천 교수(서강대학교), 이재환(KBS 국제부 부장), 최재식 교수(KAIST) 출연하며 11월 30일 토요일 밤 9시 40분 KBS1에서 생방송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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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프로야구 선수 오재원, 마약투약으로 징역 2년6개월(2024. 07. 26 15:02)
- 2024. 07. 26 15:02 사회
- 지난 3월 29일 마약류관리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된 국가대표 출신 전 프로야구 선수 오재원이 서울 강남구 강남경찰서에서 검찰 송치를 위해 호송차량으로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 프로야구 선수 오재원씨가 마약 투약 혐의로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8부(한대균 부장판사)는 26일 마약류관리법 위반(향정) 등 혐의로 구속기소된 오씨에게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했다. 공범 A씨에게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오씨에게 80시간의 약물중독 재활프로그램 이수와 2400여만원 추징을 명령했다. 재판부는 오씨에 관해 “마약 동종 범죄로 교육 이수 조건부 기소유예라는 관대한 처분을 받고도 수개월 만에 다시 범행했다”며 “신고로 수사가 시작되자 허위 진술을 종용해 초기 수사를 방해하는 등 범행 경위가 좋지 않고 죄질과 수법이 불량해 엄한 실형이 선고돼야 한다”고 판시했다. 오씨는 2022년 11월∼2023년 11월 11차례에 걸쳐 필로폰을 투약하고, 지난해 4월에는 지인의 아파트 복도 소화전에 필로폰 약 0.4g을 보관한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지난해 1월부터 올해 3월까지는 89차례에 걸쳐 지인 9명으로부터 향정신성의약품인 스틸녹스정(졸피뎀 성분의 수면유도제) 2242정을 받고, 명의를 도용해 스틸녹스정 20정을 산 혐의도 있다. A씨가 투약 사실을 경찰에 신고하려 하자 그의 휴대전화를 망치로 부수고 멱살을 잡는 등 협박한 혐의도 받는다. 오씨는 투약 혐의 등은 인정했지만 보복 목적 폭행·협박 혐의 등은 부인했다. 재판부는 “A씨의 진술내용이 일치되고, 사건 직후 오씨가 적극적으로 부인하기보다는 사과하는 취지로 보낸 대화 내용도 존재한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씨는 지난해 11월 필로폰 약 0.2g을 수수한 혐의로 추가 기소돼 별도로 재판받고 있다. 오씨는 이 혐의도 인정했다.
- [뽕의 계보](5) 마약왕들의 허망한 말로처럼…쓸쓸히 스러진 ‘최후의 뽕 기술자’(2024. 05. 27 06:00)
- 2024. 05. 27 06:00 사회
- 피해자 없는 범죄(Victimless crime). 마약이 대표적이다. 신고할 피해자가 없는 범죄 마약은 조용히 사회 곳곳에 퍼져갔다. 남녀노소·사농공상 가리지 않고 마약 투약자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특히 ‘저연령화’가 두드러진다. 가장 보편적인 마약류가 메스암페타민, 즉 히로뽕이다. 온갖 종류의 마약이 우후죽순 퍼져나간 데는 히로뽕이 60여 년 전부터 한국 땅에 중독의 토양을 만들어 놓은 영향이 컸다. 히로뽕 유통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만연한 마약 유통의 문제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되는 이유다. 주간경향에서 히로뽕의 역사와 현재 즉 대한민국 ‘뽕의 계보’를 5회에 걸쳐 되짚는다. 직업물 웹소설 및 실화 기획사 팩트스토리와 공동기획했다. <편집자 주> ‘회장님’으로 불리던 거물…뽕 다시 만들려 몸부림치다 쓸쓸한 죽음 “이 기술 배운 게 행운이자 불행 시작”…마약왕들 말년 상징적 대변 지난해 12월 13일 K가 87세를 일기로 숨졌다. 사인은 간암이었다. 한 시대를 풍미한 히로뽕 세계의 거물이면서 국내에 남은 마지막 히로뽕 제조 기술자였던 K는 이렇게 사라졌다. K는 숨지기 며칠 전 병원에 입원했다.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기자는 의사의 제안에 ‘집에서 죽고 싶다’라는 말을 남기고 퇴원했다. 경기 여주의 지인 장모씨의 2층짜리 주택의 1층 작은 방이 그의 마지막 안식처였다. K의 사망 일주일 뒤 장씨의 집을 찾았을 때 작은 마당엔 태어난 지 몇 달 안 된 강아지들이 뛰놀았다. 장씨는 “K가 죽기 전 함께 놀며 시간을 보내던 녀석들이다”라고 말했다. K가 숨진 걸 처음 발견한 것도 장씨였다. 장씨는 1990년대에 교도소를 오가며 K와 알게 됐다. 당시 K는 히로뽕 세계에서 손꼽히는 거물이었다. “히로뽕 세계에서는 정규직이라고 할 수 있지. 최고의 기술자, 제대로 된 약(히로뽕)을 만드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고.” K의 마지막은 말 그대로 ‘마약왕의 죽음’이었다. 최후의 히로뽕 기술자 국내 마지막 남은 히로뽕 제조 기술자이자 거물급 유통업자로 꼽혔던 K. 그가 사망하기 1년여 전에 촬영된 사진이다. K는 한때 젊고 건강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아쉬워했다. 전현진 기자 K는 원래 히로뽕 제조 전문가였다. 1990년대 밀조 공장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고 원료 수급이 어려워지자 밀조에서 밀매로 ‘업종’을 바꿨다. 그와 재혼한 아내 Y도 1980년대, 30대 시절부터 히로뽕을 제조해 팔던 ‘히로뽕계의 대모’였다. Y가 이 세계에서 유명해진 것은 다 K의 연락책으로 대신 움직였기 때문이라고 히로뽕 유통업자들은 말했다. 1999년 한 언론에 나온 보도를 보면 국내 마약 밀매 1세대인 K와 Y는 1980년대 말 ‘범죄와의 전쟁’ 당시 붙잡혔다가 만기 출소한 뒤 다시 붙잡혔다. 이들 부부는 1996년 풀려난 뒤 히로뽕 제조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중국산 히로뽕 2.75㎏을 밀수해 팔아온 혐의를 받았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이들 중에 K를 기억하는 이가 많았다. 시리즈 첫 회에 거론한 M은 K의 밑에서 일한 적이 있었고, 2회에 소개한 J도 K를 잘 알았는데, 그가 오래전 일본을 오가며 제조 기술을 배웠다고 했다. K를 “거물 중의 거물”, “회장님”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 K는 국내에 하나 남은 최후의 히로뽕 기술자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은 쓸쓸하기만 했다. K는 무연고 사망자로 장례가 치러졌다. 장씨는 K에게 남은 가족이나 친지가 없다고 했다. K보다 열세 살 어린 아내 Y는 오래전 먼저 숨졌고, 그의 자녀들이 K의 재산까지 챙겨 떠났다고 한다. K가 교도소에 갇히면서 맡겨둔 고급 시계까지 다 빼앗겼다고 장씨는 말했다. 그는 빈털터리로 교도소를 오가다 2019년 간암 판정을 받았다. 항암 투병을 하다 숨진 그가 발견된 것은 화장실 앞 바닥이었다. 장씨가 처음 발견했을 K는 바닥에 누워 하늘을 보고 쓰러져 있었다. 새벽에 쓰러졌다가 그대로 숨진 것으로 추정됐다. “돌아가셨다는 생각도 못 하고 깨워봤는데, 안 일어나더라고. 몸이 그사이에 뻣뻣하고 차가워져서 흔들어봐도 가만히 있는 거야.” 죽기 전날까지도 K는 평소처럼 행동했다. 늘 같은 소파 한쪽 끝에 앉아 TV를 보다 잠자리에 들었다. 말기 간암으로 황달이 심해져 온몸이 노랗게 변했고, 음식도 잘 먹지 못했다. 지난해 12월 26일 찾은 K가 살던 장씨의 집. 장씨는 옛 인연으로 K를 돌보며 함께 지내왔다. K는 사진 중앙에 보이는 소파 끝에 앉아 TV를 보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전현진 기자 쓸쓸한 말년 K는 죽기 전까지 쓸쓸한 말년을 보냈다. 빈털터리가 된 뒤에도 여러 사건에 연루돼 몇 차례 징역을 살았는데 그때 판결문에 남은 직업명은 폐지수집, 주차관리 등이었다. 한때 마약왕이라 불렸던 것과는 차이가 컸다. 그에겐 친구도 없는 듯했다.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지인은 장씨가 유일해 보였다. 그나마 교도소에 수감 중인 몇 사람과 정기적으로 편지를 주고받는 듯했다. 하지만 그 역시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가 쓰던 방에는 과거 징역을 살면서 쓴 공책이나 지인에게 쓸 편지의 초고 등이 남아 있었다. 공책에는 히로뽕의 세계에서 알게 된 이들의 연락처도 여럿 적혀 있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더는 쓸모없는 것이었다. 현실 세계에서 그는 연락할 사람도 없었다. 그가 남긴 전화기에 저장된 전화번호는 10개가 채 되지 않았다. 마지막 통화 기록은 사망 이틀 전의 정부미 배송 안내 전화였다. K를 찾는 이들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다. 하급 품질의 히로뽕인 ‘멍’(혹은 똥술)의 순도를 높여 달라며 찾아오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순도를 높이는 작업도 쉽지만은 않고, 이 역시 제조에 해당한다. 생각보다 신통치 않은 K의 모습을 보고 실망하는 이들도 있었다. 장씨는 자신이 나서 이런 이들이 K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 K는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의 장기를 살려 히로뽕을 다시 만들어보겠다고 늘 생각했다. 하지만 원료를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는 10여 년 전에도 히로뽕을 만들어보겠다며 일본제 비염 치료제를 구입하기도 했는데,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다. 게다가 해외에서 값싸게 히로뽕을 들여올 수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더 무거운 처벌을 감내하고 K에게 히로뽕 제조를 의뢰할 사람들은 없었다. 히로뽕, 불행의 시작 K가 남긴 물품 중 상당수는 쓸모를 찾기 어려운 것이었고 장씨가 버리기 위해 모아뒀다. 전현진 기자 “신세를 진 사람들한테 마지막으로 만들어줘야 할 텐데….” K는 숨지기 전까지 이런 말을 곧잘 했다고 한다. 그가 만든다는 것은 히로뽕이었다. 죽기 전에 한 번 특기를 살려 신세 진 이들에게 갚아 볼 요령이었다. 그런데 정작 오랫동안 그 기술을 써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K는 실제로 죽기 전에 이런저런 화학 기구를 사 히로뽕 제조를 시도했지만, 원료를 구하지 못해 실패했다고 한다. 병들고 나이 들어 힘도 없는 그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히로뽕 제조였다. 제조법을 알려달라는 이들에게는 조금 알려주는 듯하다가도 정작 중요한 내용은 입을 닫았다. 자신의 비법이었기 때문인지, 자신이 안고 가버리려던 것인지는 알 수 없게 됐다. K는 유일한 장기마저 오랫동안 써먹지 못하고 비루해져 가는 자신의 모습을 한탄했다. 장씨는 K가 과거에는 키 170㎝를 훌쩍 넘는 건장한 체격을 자랑했다고 한다. 2019년의 수용자 건강진단을 보면 그의 키는 167㎝, 체중은 73㎏이었다. 최근 쓰다가 만 편지의 초고로 보이는 글에 K는 자신의 몸무게가 60㎏이 채 안 되게 살이 빠져 뼈만 남았다고 썼다. 이 세계 최고 대부라 여겨졌던 그도 결국은 돈 없고 히로뽕이 없으니 병든 노인이기만 했다. K는 이런 자신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 같다. 편지의 내용은 이랬다. “얼굴이나 몸이 옛날하고는 천지차이지요. 아우님하고 만날 때는 그래도 어디에 가도 다시 쳐다봐주는 그런대로 자신이 있었는데, 지금은 내가 나를 봐도 너무너무 형편이 없는 찌그러진 맥주캔처럼 슬픈 내가 되고 말았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지요.” K는 자신의 불행이 결국 히로뽕 제조 기술을 배워 이 세계에 입문한 것 때문이라고 생각한 듯했다. 그가 교도소 수감 중 쓴 것으로 보이는 작은 메모에는 이런 내용도 있었다. “내가 이런 기술을 배우게 된 것이 나에겐 행운이자 불행의 시작이었지.”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던 마약왕의 마지막은 이처럼 쓸쓸하고 허망한 것이었다. 그는 죽기 전에도 몇 차례나 히로뽕을 투약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욕망은 남았지만 노쇠해진 자신의 불행을 안타까워했다. 그가 남긴 것 중에는 눈에 띄는 유품도, 기억할 만한 업적도 없었다. 마약왕이었던 그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았지만, 그를 추모하는 이는 없었다. K가 사망하기 몇 해 전 장씨가 운전하던 차에 탔다 교통사고가 났다. 두 사람이 함께 찍은 몇 안 되는 사진이다. 전현진 기자 ‘뽕의 계보’의 결말 지난 4회까지는 주로 히로뽕 유통의 역사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주요한 인물들의 경험담으로 전했다. 히로뽕 유통업자들의 경험담과 환경의 변화를 주로 다루고 있기에 히로뽕 유통 방식을 세밀하게 묘사했고, 유통업자의 입장에 선 듯한 표현을 썼다. 주로 히로뽕 유통업계의 거물들을 취재했고, 그 역사적 과정을 소개하는 것이기에 히로뽕의 세계에 잠시 발을 담근 이들이나 중독으로 고통받는 투약자, 재활에 힘쓰는 중독자들에 대해선 다루지 못했다. 지금 진행 중인 새로운 변화에 대해선 짧게 거론하는 선에서 그친 것도 과거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의 마약왕이었던 K의 죽음은 뽕의 계보가 어떻게 끝을 맺을지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처럼 보였다. 취재하면서 K를 비롯해 한국의 마약왕이라 할 만한 이들을 여럿 만났다. 하지만 해외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호화로운 마약왕의 모습은 발견할 수 없었다. 이 세계에 발을 들인 이들은 히로뽕에 중독돼 삶이 망가지는 것을 경험했고, 가족과 헤어지고,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하는 일을 겪어야 했다. 이 히로뽕 세계의 대부들은 마약사범이 무슨 이야기를 하든 절대 믿지 말라고 조언해주었다. 히로뽕 중독에 익숙해진 투약자들은 히로뽕을 사고팔기 시작한다. 그렇게 손에 쥔 돈에 다시 한번 중독됐다. 히로뽕을 전파하며 번 돈은 허무하게 써버리거나 어딘가로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뽕의 계보에 이름을 올린 이들은 늘 수사기관의 추적에 긴장하며 살아갔고, 재판 일정이 다가올 때는 잠을 설치기도 한다. 자살 충동과 불면증을 동반한 우울증 진단을 받기도 한다.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해 우울감을 느끼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다. 수없이 받아도 수사와 재판은 늘 긴장되고 조마조마하다. 반복되는 징역살이에 자신을 ‘사회 부적응자’라 칭하기도 한다. 인생의 상당 부분을 교도소에서 보낸다. 자유 박탈은 익숙해지지 않고, 밖으로 나오면 자유에 굶주린 듯 남용하다 곧 그 자유를 잃는다. 출소할 때마다 새롭게 변한 세상에 익숙해지지 않는다. 히로뽕 거물들은 대면 거래를 선호하는데, 이는 직접 얼굴을 보고 쌓는 신뢰가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비대면거래를 위한 간단한 스마트폰 사용법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반복된다. 지난해 대검찰청이 낸 <2022 마약류 범죄백서>에 따르면 마약류 사범의 전체 재범률은 2018년 36.6%, 2022년 35.0%로 비슷했다. 10년 전인 2004년(30.2%)보다 조금 높은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 특히 향정(향정신성의약품)사범의 재범률이 2018년 41.0%, 2022년 38.2%로 마약·대마 사범보다 높았다. 2004년(36.7%)에도 마찬가지였다. 일회성 단순 호기심에 투약한 이들을 빼면 매우 높은 수치다. 사회와 교도소를 오가는 것이 히로뽕의 세계에 발을 들인 이들이 대부분 겪게 되는 삶의 여정이다. 앞날이 예상되는데도 불길로 날아드는 불나방처럼 히로뽕을 비롯한 마약 판매를 끊지 못하는 이유는 돈이다. 지난 회에 소개한 L은 “마약왕이 되겠다고 이 바닥에 뛰어드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큰돈을 벌어보겠다는 것이죠”라고 말했다. 마약을 팔아 잠깐은 돈을 벌기도 한다. 하지만 언제 붙잡힐지 몰라 유흥비로 탕진하거나, 변호사비로 써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수감 생활을 하고 나오면 빈손이 돼 다시 돈을 벌겠다며 이 일에 뛰어드는 게 반복된다. 히로뽕 유통은 이렇게 생업이 된다. 앞서 언급한 재범률은 투약에 중독되는 것뿐 아니라 판매에도 중독된다는 걸 보여주는 건 아닐까. 먹고살 길이 막막한 히로뽕 중독자는 결국 히로뽕을 파는 것 외에는 생계를 유지할 방법이 없다. 히로뽕을 팔아 큰돈을 벌어 떵떵거리며 사는 예가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순간은 반짝하고 사라지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런 경험을 하게 되는 이도 극소수에 불과하다. 취재 중 직접 만난 이들은 ‘짧게 호화로운 생활을 보낸 적은 있지만, 영구적인 큰 부를 이루지는 못했다’라고 했다. 다수의 마약 사건을 경험한 한 변호사는 “히로뽕 장사로 큰돈을 벌어 잘 유지하고 사는 이는 거의 없다”라고 지적한다. K의 쓸쓸한 죽음이 한탕 벌어보려는 이들에게 전해주는 교훈은 어쩌면 명확하다. “지금은 내가 나를 봐도 너무너무 형편이 없는 찌그러진 맥주캔처럼 슬픈 내가 되고 말았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지요.” K가 지인에게 보내기 위해 쓴 편지의 초안. 그는 소수의 지인과만 연락하고 지냈고, 마르고 왜소해진 자신의 모습을 종종 한탄했다. 전현진 기자 ※이번 호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전현진 기자 / 공동기획 팩트스토리 인생과 직업은 스토리로 가득하다. 팩트스토리는 직업 소재 및 범죄스릴러 웹소설 웹툰, 실화 논픽션 기획사입니다. 드라마 원작 논픽션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의 원작사이며, 웹소설과 논픽션 등 16개 스토리를 만들었습니다.
- 뽕의 계보
- [뽕의 계보](3) 새롭게 과감하게…시대 흐름 탄 거래로 ‘마약왕’(2024. 04. 08 06:00)
- 2024. 04. 08 06:00 사회
- 2000년대 초에 히로뽕 유통량의 60~70% 차지했던 거물 중 거물 차명 거래와 힘들수록 사업 더 확장…<범죄도시 3> 모티브 중 하나 피해자 없는 범죄(Victimless crime). 마약이 대표적이다. 신고할 피해자가 없는 범죄 마약은 조용히 사회 곳곳에 퍼져갔다. 남녀노소·사농공상 가리지 않고 마약 투약자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특히 ‘저연령화’가 두드러진다. 가장 보편적인 마약류가 메스암페타민, 즉 히로뽕이다. 온갖 종류의 마약이 우후죽순 퍼져나간 데는 히로뽕이 60여 년 전부터 한국 땅에 중독의 토양을 만들어 놓은 영향이 컸다. 히로뽕 유통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만연한 마약 유통의 문제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되는 이유다. 주간경향에서 히로뽕의 역사와 현재 즉 대한민국 ‘뽕의 계보’를 5회에 걸쳐 되짚는다. 직업물 웹소설 및 실화 기획사 팩트스토리와 공동기획했다. <편집자 주> 1970년대 부산에서 히로뽕을 몰래 만들어 일본으로 밀수해 온 이황순을 모델로 한 영화 마약왕의 한 장면. 이황순이 히로뽕 제조와 밀수를 벌인 1세대 마약왕이라면, Y는 단순 투약 사범으로 시작해 중국의 히로뽕을 국내로 밀반입해 유통한 2세대 마약왕이라 할 만하다. 영화 ‘마약왕’ 캡처 /쇼박스 제공 “마약왕이라 할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히로뽕 유통업계의 ‘상선’(총책을 가리키는 은어)으로 꼽히는 이들을 만날 때마다 물었다. ‘마약왕’이란 용어가 조금 유치하다 생각했지만, 누가 히로뽕 계의 가장 큰 거물이고 영향력이 있는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답변 중에는 ‘그때그때 다르다’라는 말이 가장 많았다. 한때 대량의 히로뽕을 유통했다 사라진 이들도 있고, 오랜 시간 활동해왔지만 다루는 물량의 변동 폭이 심한 이들도 있었다. ‘마약왕이 검거됐다’라는 언론보도도 대체로 부풀려진 사례가 많았다. 이 세계에서 마약왕이라고 부를 만한 이들은 오랜 세월 교도소와 사회를 오가면서도 명성을 잃지 않는 소수에 불과하다. ‘영원한 마약왕은 없다’라는 게 정답에 가깝다. 한때의 마약왕이 평범한 장사꾼이 되기도 하는 게 이 바닥의 생리였다. 하지만 이런 세계에서도 항상 ‘거물 중의 거물’로 거론되는 이가 있었다. 2000년대부터 알려진 Y였다. Y는 히로뽕의 세계에 몸담은 이들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름이라고 한다. 그의 이름을 모른다면 오히려 이 세계에 연륜이 덜 쌓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는 본명보다 ‘성일’이란 가명으로 유명했다. 그의 가명을 딴 조직 ‘성일파’는 언론에도 여러 번 오르내렸다. Y는 2000년대 초 전국 히로뽕 유통량의 60~70%를 차지했던 인물이다. 한국이 주요 히로뽕 생산국에서 주요 소비국으로 자리를 바꾸면서 국내 히로뽕 유통업자들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던 중국이 히로뽕 업계에서도 새로운 공급처가 됐고, 중국에서 대량의 히로뽕을 들여오는 거물급 업자들이 등장했다. Y는 2000년대 초 시장을 장악한 뒤 이후에도 지속해서 명성을 유지한 인물로 꼽힌다. 징역 9년을 선고받아 교도소에 수감 중인 Y와 주로 편지로 대화했고, 한 차례 접견했다. 자타공인 마약왕 중 한 사람이었지만 직접 만난 Y는 동네 사우나에서 만날 법한 평범한 중년 남성이었다. 호기심에 발 디딘 뽕의 세계 대구가 고향인 Y는 1974년부터 경주에 살았다. 타지에 살게 되면서 친구를 따라 가명을 썼다고 했다. Y는 1984년 결혼하는 등 평범한 삶을 살았다. 경주 불국사 인근에서 여관과 기념품 가게를 하면서 도박판도 운영했다. 그러다 예기치 않게 1987년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Y는 히로뽕 투약으로 붙잡혔다 풀려난 후배에게 ‘대체 그게 무엇이냐’고 물었고 후배가 히로뽕을 건넸다. 호기심이 경계심을 허물었다. 그때는 이 히로뽕이 그의 인생을 이전과 전혀 다른 궤도 위에 올려놓을 줄 몰랐다. Y는 그때 이후 투약을 계속했고, 1989년 구속돼 첫 징역을 살았다. 교도소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Y도 수많은 히로뽕 투약자 중 한 사람일 뿐이었다. Y를 마약왕으로 성장시킨 곳은 역설적으로 교도소였다. 감옥은 죄를 처벌하고 잘못을 뉘우치며 사회로부터 범죄자를 격리하기 위한 곳이지만, 히로뽕의 세계에선 인맥을 넓히기 위한 ‘사교의 장’이었다. 전국의 ‘뽕쟁이’들이 교도소에서 안면을 트고, 인사를 하고 안부를 주고받는다. 교도소를 괜히 ‘학교’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이때의 인연이 히로뽕의 세계에서 높은 곳으로 오르는 데 필수적이다. Y는 1980년대 활동한 히로뽕 유통의 거물들처럼 일본에서 온 히로뽕 제조 기술자에게 배우거나, 바다를 누비는 밀수선을 타지도 않았다. 대일본 밀수에 종사한 이들을 국내 히로뽕 1세대라고 한다면, Y는 순수 국내파로 성장한 2세대라고 할 수 있다. 히로뽕 사업은 ‘믿을 수 있다고 판단하는 사람과 불법적인 물건을 사고파는 일’이다. 얼굴을 맞대고 서로에 관해 알아가는 것이 그 출발이다. 이때나 지금이나 히로뽕을 사고파는 데 특별한 기술이나 자격이 필요한 게 아니다. 히로뽕 장사에 필요한 단 하나의 요소만 꼽자면 ‘인맥’이다. Y도 교도소에 들어가서 인맥을 만들었고 출소한 뒤 히로뽕 매매에 뛰어들었다. 교도소에서 만난 이들과 힘을 합쳐 거래를 트고, 지인의 지인을 소개받는 방식으로 발을 넓혔다. 돈만 주고 물건을 못 받는 사기도 당하고, 믿었던 지인에게 배신도 당하면서 Y는 히로뽕 사업의 규칙을 익혀갔다. 1990년대 중·후반 국내 히로뽕 업계는 이전과 본질에서 달라졌다. 우선 히로뽕이 한국의 주류 마약이 됐다. 마약류 사범 중 주로 히로뽕과 관련된 향정(향정신성의약품)사범이 차지하는 비율은 1995년 이후 급속히 증가해 이내 전체 마약류 사범(마약·향정·대마)의 50%를 웃돌기 시작했다. 2001년에는 78.8%를 차지했다. 공급처도 눈에 띄게 달라졌다. 이전까지 국내 유통 히로뽕의 대부분은 국내에서 만들어졌다. 그런데 국내의 히로뽕 제조 공장들이 강력한 단속에 하나둘 문을 닫고 여기에 1992년 한국과 중국이 수교하면서 완전히 다른 길이 열렸다. 중국과 왕래가 자유로워지자 히로뽕 업계에 몸담은 이들은 새로운 기회가 왔음을 바로 알아차렸다. 중국은 히로뽕 제조 원료인 염산에페드린을 만드는 마황을 쉽게 구할 수 있었고, 히로뽕이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아 처벌도, 단속도 거의 없었다. 중국의 한국인들 2001년 10월, 최성홍 외교통상부 차관(오른쪽)이 리빈 주한 중국대사를 집무실로 불러 중국이 한국인 마약혐의자를 사전 통보 없이 사형 집행한 것에 대해 엄중 항의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부활을 꿈꾸던 한국의 히로뽕 기술자들이 중국 동북부로 향했다. 동북부에는 말이 통하는 중국 동포가 많았고, 원재료도 구하기 쉬웠다. 중국에 자리를 잡은 기술자들은 히로뽕을 만들어 한국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히로뽕 생산지이자 수출국이던 한국은 이 무렵부터 히로뽕 수입국이 됐다. 훗날 중국도 그렇지만, 히로뽕 생산국은 결국 소비국이 된다. 2000년대 초가 되자 중국에서도 히로뽕 제조 시설에 대한 단속이 강화됐다. 2001년 9월 한국인 히로뽕 제조업자가 적발돼 사형을 당하기도 했다. 이 일은 외교 문제로 불거졌다. 한국 정부는 중국에 사전 통보 없이 사형을 집행했다며 항의했고, 중국 측은 미리 전달했다고 반박했다. 사형된 신모씨는 1990년대 후반 중국으로 가 히로뽕을 만들어 국내로 밀반입하던 인물이었다. 신씨 외에도 제조 공장을 차려놓고 히로뽕을 만들던 한국인들이 연거푸 중국 공안 당국에 붙잡혔다. 중국에서 직접 히로뽕을 만드는 일의 위험성이 커지던 무렵 ‘북한산 히로뽕’이 시장에 등장했다. 북한산 히로뽕은 북·중 국경을 타고 넘어와 한국인 밀수업자 손을 거친 뒤 한국으로 들어왔다. 중국 남부에서 대만계 폭력조직이 주도해 만든 히로뽕은 가격이 쌌지만 순도가 떨어졌다. 북한산 히로뽕은 조금 비싸도 품질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중국에 자리 잡은 한국인들은 제조 대신 밀수를 전문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Y도 바로 이때 교도소에서 쌓은 인맥을 통해 중국에서 히로뽕을 건네받는 일에 뛰어들었다. 그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거래방식도 과감하게 도입했다. 기존 히로뽕 거래에서는 ‘한 손으로 히로뽕을 건네면 다른 손으로 현금을 건넨다’라는 ‘오른손 왼손 거래’가 주였다. 추적을 피하고자 자동차에서 돈을 확인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해 히로뽕을 건네는 ‘차치기’ 도 있었다. 2000년대 들어 새롭게 등장한 것이 차명계좌를 이용한 거래였다. 지금은 불법 거래를 할 때 차명계좌를 이용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당시에는 신종 수법이었다. 중국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한국으로 숨겨 들어온 히로뽕은 운반책인 ‘지게꾼’이나 고속버스 화물 탁송 등을 이용해 한국의 유통업자 손으로 들어갔다. 직접 만나 현금과 히로뽕을 주고받기 어려운 한·중 간 히로뽕 밀수는 차명계좌 수법의 등장으로 보편화했다. 중국을 통한 북한산 히로뽕 밀수와 차명계좌를 사용하는 거래 방식의 변화를 Y는 제대로 포착했다. Y는 대량의 히로뽕을 전국에 빠르게 유통했고 단숨에 전국적인 히로뽕 유통업자가 됐다. Y가 히로뽕 업계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주도면밀하게 계획해 마약왕의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다. 선배의 배신으로 Y를 따르던 동생과 친구들이 모두 구속되는 일도 겪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때쯤 조용히 숨어 지내려고 했을 터지만 Y는 ‘이판사판’으로 사업을 더 확장하기로 했다. Y는 중국에서 밀수업자로 활동하는 친구를 통해 히로뽕 수십㎏을 받아 전국에 유통하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리자 평소라면 감당하지 못했을 만한 양을 과감하게 받아 국내에 뿌렸다. 2002년 Y가 검거됐을 때 관련 기사를 보면, Y는 북한산 히로뽕을 약 7개월간 매달 3㎏씩 모두 20여㎏을 들여와 국내에 유통했다. 당시 가격으로 약 700억원 규모였다. 기사에는 ‘정제가 뛰어나고 순도가 매우 높아 중국산이라기보다는 북한산으로 추정된다’라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분석 결과가 소개됐다. 수십 개의 차명계좌도 발견됐다. 당시 서울중앙지검은 집중적인 히로뽕 유통 단속을 해 10개 밀매팀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이른바 ‘10개 파 사건’이다. 이중에 Y도 포함됐다. 대구 경찰에 붙잡힌 Y는 서울중앙지검으로 이송됐다. 이때를 기점으로 국내 히로뽕 유통량은 크게 줄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증가한다. 대검찰청이 낸 2005년도 마약류 범죄백서를 보면, 향정사범의 수는 2001년 7959명, 2002년 7918명이었다. 10개 파 사건 이후인 2003년 향정사범은 4727명으로 40.3%나 줄었지만, 2004년 5313명으로 바로 반등했고 이후 꾸준히 증가했다. 백서는 “2002년도에 강력한 단속 효과에 힘입어 밀수 등 공급조직 10개 파 224명이 단속됨에 따라 마약류 공급선 차단 등으로 2003년도에 마약류 사범이 급감한 이후 그 여파가 2005년도에도 지속하는 상황”이라면서도 “주종 마약류인 향정사범은 2003년도에 대폭 감소하였으나 2004년도부터 지속해서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적었다. Y는 이 사건으로 징역 5년 6개월의 실형을 살았다. 현재 기준으로 보면 대량의 히로뽕을 밀매하고도 형량이 크지 않았다. 영화 같은 삶과 현실 2018년 Y가 연루된 대만·일본·한국의 히로뽕 밀매 사건이 드러났다.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는 국정원·관세청 등과 공조해 필로폰 112㎏을 숨겨 국내에 밀반입한 한국, 일본, 대만의 마약 조직원 8명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광역수사대 수사관이 서울경찰청에서 압수한 필로폰과 다른 증거물들을 기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Y는 2007년 7월 출소한 뒤에도 히로뽕 판매를 계속한다. 이전과 달리 그의 이름값은 한참 높아져 히로뽕 업계에서 거물급 유통업자로 여겨졌다. Y는 부산과 울산 등 경남지역 수사기관의 정보원으로도 활동하기도 했다고 직접 밝혔다. 히로뽕 세계의 사건 브로커를 가리키는 이른바 ‘야당’이었다. Y는 야당으로 활동하며 히로뽕 유통을 병행했다. 히로뽕의 세계에서 야당을 겸한 히로뽕 유통업자는 매우 위험한 존재로 인식된다. 야당 중에는 자신도 히로뽕을 팔면서 경쟁자를 수사기관에 제보해 밀어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야당 활동을 한 경력은 히로뽕 유통업계에서 누군가를 배반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당연히 이를 대놓고 드러내지 않는 이가 많다. 하지만 Y는 자신이 히로뽕 사건 수사에 도움을 많이 줬다는 걸 숨기지 않았다. “밀반입 판매자들을 작업해 약 8~10㎏을 압수하도록 작업한 적도 있습니다.” Y는 2013년부터 한동안 카드 도박판을 운영하기도 했다. 2000년대 초반, 마약왕으로 불렀던 그의 경력과는 조금 맞지 않아 보이지만, 히로뽕 유통을 하는 이들이 다른 사업을 병행하는 일은 흔하다. Y는 시대의 변화를 제대로 포착해 과감하게 나선 마약왕으로 꼽힌다. 그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세우는 히로뽕 업계 후배도 많다. 하지만 그 역시 사회와 교도소를 오가는 히로뽕 세계의 인과율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Y에 따르면, 그는 2018년 우연찮은 기회로 일본 야쿠자 쪽과 연결됐다. 2018년 7월 대만의 조직에서 일본의 조직으로 넘기기 위해 한국으로 밀반입된 히로뽕 112㎏ 중 22㎏이 Y의 손에 들어왔다. 남은 히로뽕을 판매하려던 대만 조직이 구매처를 수소문하는 과정에서 이들의 계획이 국정원과 서울경찰청 마약범죄수사대에 포착된다. 경찰은 히로뽕을 압수하고 같은 해 11월 20일 부산의 한 호텔에서 Y를 체포했다. 그는 이 일로 징역 9년을 선고받았다. Y는 기자에게 자신의 글솜씨가 부족하고 접견 시간은 짧으니, 출소 후 만나 경험담을 자세히 들려주겠다고 했다. 그에겐 영화처럼 흥미로운 경험담이 많을 테다. 영화 <범죄도시 3>에는 중국과 일본을 오가는 마약거래상의 이야기가 담겼는데, Y의 사건도 모티브 중 하나로 쓰였다고 한다. 하지만 수감생활은 영화가 아닌 현실이었다. Y는 고희(古稀)를 맞는 2026년이 돼야 만기 출소한다. 인생과 직업은 스토리로 가득하다. 팩트스토리는 직업 소재 및 범죄스릴러 웹소설웹툰, 실화 논픽션 기획사입니다. 드라마 원작 논픽션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의 원작사이며 웹소설과 논픽션 등 16개 스토리를 만들었습니다. 공동기획 | 팩트스토리
- 뽕의 계보
- [뽕의 계보](2)히로뽕 10kg ‘퇴직금’으로 마약왕이 된 막내(2024. 04. 01 06:00)
- 2024. 04. 01 06:00 사회
- 1980년 중반 일본의 밀수선 단속 강화로 시장 막히자 국내로 눈 돌려 부산 단속 심해지자 서울로…호텔 방서 현금계수기로 돈 세다 잠들어 피해자 없는 범죄(Victimless crime). 마약이 대표적이다. 신고할 피해자가 없는 범죄 마약은 조용히 사회 곳곳에 퍼져갔다. 남녀노소·사농공상 가리지 않고 마약 투약자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특히 ‘저연령화’가 두드러진다. 가장 보편적인 마약류가 메스암페타민, 즉 히로뽕이다. 온갖 종류의 마약이 우후죽순 퍼져나간 데는 히로뽕이 60여 년 전부터 한국 땅에 중독의 토양을 만들어 놓은 영향이 컸다. 히로뽕 유통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만연한 마약 유통의 문제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되는 이유다. 주간경향에서 히로뽕의 역사와 현재 즉 대한민국 ‘뽕의 계보’를 5회에 걸쳐 되짚는다. 직업물 웹소설 및 실화 기획사 팩트스토리와 공동기획했다. <편집자 주> 1980년대 국내에 대량의 히로뽕이 유통되면서 수사기관에 압수되는 양도 계속 증가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80년대 초 어느 밤, J(1962년생)는 일본 효고현 고베시 앞바다 속에 있었다. 잠수복을 입고 있어도 물이 차가웠다. 육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멀리 세워둔 자동차가 깜빡거리는 불빛으로 신호를 줬다. 등에 멘 가방 속 물건만 전하면 임무가 끝난다. 물건은 한국에서 만들어진 히로뽕이었다. 당시는 일본과 한국을 잇는 히로뽕 ‘한국 루트’의 황혼기였다. 한국의 히로뽕 시장이 근본적 변화를 맞이하기 직전이기도 했다. 40년도 더 지난 일을 회상하며 J가 말했다. “어린 자식들이 있어서 이름은 밝히면 안 돼.” 2023년 여름, 부산 광안리의 한 카페에서 만난 J는 찢어진 청바지에 명품 로고가 새겨진 흰 티셔츠를 입었다. 손목에는 은색 롤렉스 시계를 찼다. 짧게 자른 머리와 밝은 피부 덕분에 실제 나이보다 젊어 보였다. J는 대한민국 ‘뽕의 계보’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이름 중 하나다. 밀수선에 오르다 한국은 1980년대까지 히로뽕 최대 생산지였고, 대부분 일본으로 밀수됐다. 밀수 단속이 강화되면서 일본으로 넘어가지 못한 히로뽕은 국내에 풀리기 시작한다. 1980년대 압수된 히로뽕과 담뱃갑을 비교한 사진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80년대까지 한국은 최고급 히로뽕의 최대 생산국이었다. 한국에서 만든 히로뽕은 세계 최대 소비 시장인 일본으로 건너갔다. 재일조선인 기술자들이 기반을 다진 한국의 히로뽕 생산 체제는 거대한 밀수 산업으로 발전했다. 1980년대 초 고등학교를 졸업한 J는 우연찮은 계기로 히로뽕 업계에 발을 들였다. 댄스 교습소에서 춤을 배운 뒤 실습 삼아 간 부산 중구 백화당 카바레에서 한 여성을 만난 것이 시작이었다. J는 일본과 한국을 오가던 그 여성을 누님이라고 부르며 따랐다. 누님은 어느 날 술 한잔하자며 J를 호텔로 데려왔다. 방안에서 능숙하게 양주와 얼음을 챙겼다. J는 이날 자신도 모르게 ‘뽕’을 배웠다. 며칠 동안 낯선 느낌에서 헤어나오기 어려웠다. 짧은 만남 뒤, 일본으로 떠났던 누님은 얼마 뒤 부산으로 돌아왔다. “J군아, 배 탈 줄 아나?” 누님은 일본을 오가는 활어선에 타라고 했다. 선주로 보이는 노인 S도 소개해줬다. 작은 배에는 선장, 기관장, 갑판장에 선원 1명, 그리고 잡일을 맡는 ‘화장’인 J까지 다섯 정도가 탔다. 수출용 고급 활어를 싣고 일본 각지를 다녔다. 돌아올 땐 ‘코끼리 표 전기밥솥’이나 ‘세이코 시계’ 같은 일제 상품을 가져왔다. “처음에는 밀수도 좀 하나보다 했는데, 7~8번쯤 왔다 갔다 하다가 딱 꿈을 깼어.” 수조 밑바닥에는 히로뽕이 숨겨져 있었다. 노인 S는 거물 히로뽕 제조 전문가이자 밀수 조직의 수장이었고, 누님은 S와 거래하는 일본 야쿠자의 연락책이었다. 정체를 알았어도 발을 뺄 순 없었다. 그는 밀수 조직의 막내로 일을 배워갔다. 1980년대 초반까지 일본에선 단속이 심하지 않았다. 가끔 합동 단속이 뜨면 J가 히로뽕이 든 가방을 메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일은 순조로웠다. 1980년대 중반, 분위기가 달라졌다. 히로뽕 밀수선들이 계속 단속에 걸렸다. 그가 타던 활어선도 일본에서 검문을 받았다. 선장이 ‘잡일만 하는 아이’라고 말해줘 J는 겨우 풀려났다. “한국하고 일본이 손잡고 수사가 활발하게 이뤄진 거지. 그때 원로 영감들이 그러더라고. ‘박정희 때는 일본에서 수사비만 받고 모른 척하더니, 전두환 때 돼서 일본하고 미국의 신임을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수사하더라’라고.” 1987년 일본 경찰백서를 보면, 1982년 1㎏ 이상의 각성제(히로뽕) 압수 사례 중 한국산이 87.4%를 차지했다. 그런데 1984년 한국산 히로뽕 압수량은 5.2%로 급감한다. 단속 강화로 밀수 자체가 줄었고, 출발 전 국내에서 붙잡힌 사례도 많았다고 볼 수 있다. 한국산의 빈자리는 대만산이 차지했다. 대만산 압수량은 1982년 0.6%에서 1984년 87.4%로 급증했다. 밀수 막힌 히로뽕, 한국을 휩쓸다 “J군아, 이리 와봐라.” S는 일본에서 붙잡혔다 풀려나 부산으로 돌아온 J에게 고생했다며 히로뽕 10㎏을 줬다. 일종의 퇴직금이었다. “가지고 가서 한번 팔아봐라.” 사실상 테스트였다. 히로뽕을 일본에 팔 수 없다면 한국에서라도 팔아야 했다. 히로뽕계 원로들은 그 일을 맡아줄 ‘젊은 인재’를 찾고 있었다. J는 성매매업소를 운영하던 사채업자를 통해 히로뽕을 유통하기로 했다. 히로뽕 수요는 쾌락을 좇는 이들에게서 나온다. J는 공산품을 도매나 소매로 유통하는 총판이라도 된 듯 히로뽕을 팔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의 히로뽕 투약자는 많지 않았다. 제조업자들이 품질을 확인하기 위해 맛을 보는 정도였다. 일본 밀수가 막히고 대량의 히로뽕이 국내에 풀리면서 중독자가 빠르게 늘었다. 히로뽕은 술·담배 같은 기호품으로 여겨졌고, 많은 사람이 죄책감 없이 금세 빠져들었다. 투약자들은 부산으로 몰렸다. 1988년 부산지검 관계자는 유흥가인 부산 서면 일대 술집의 80%가 히로뽕을 취급하는 것으로 봤다. 당시 부산지검이 보건사회부 통계를 인용해 정리한 자료를 보면, 1980년 이전까지 연간 100명 미만이었던 국내 히로뽕 사범, 즉 향정신성의약품 관리법 위반자는 매년 증가해 1987년 985명으로 늘었다. 특히 투약 사범의 증가 폭이 컸다. 1983년 투약 사범은 68명으로 밀조(75명), 밀매(142명)보다 적었다. 1987년 투약 사범은 765명으로 밀조(32명)나 밀매(170명)보다 월등히 많아졌다. 히로뽕은 온 국민이 한 번쯤은 들어본 이름이 됐다. 중독자가 늘자 한국방송(KBS) 등 주요 방송국에서도 히로뽕 남용 실태를 특집으로 보도했다. J는 서울로 향했다. 단속도, 경쟁도 아직 부산보다 적었다. 신촌, 명동 등에 자리를 잡고 강남의 클럽이나 안마시술소, 영등포와 청량리의 성매매업소 등을 주로 공략했다. 수요는 빠르게 늘었다. 여러 차례 징역을 살았지만, 교도소에서 고객도 만나고 동료도 만났다. J는 불과 수년 사이 서울에서 첫 손에 꼽히는 히로뽕 유통업자가 됐다. J를 따르는 이들도 생겼다. J의 뒤를 이어 히로뽕 유통 거물이 된 A도 그중 하나다. A는 20대 초반이었던 1997년 J를 처음 만났다. “J형님은 당시 마약 세계에서 최고라는 별칭을 지녔고, 일반인들은 쉽게 만나기 힘든 거물이었습니다.” 옥중서신으로 인터뷰한 A는 J를 이렇게 표현했다. 둘이 처음 만난 장소는 서울 잠실의 한 호텔 커피숍이었다. J는 A와 마주 앉아 담담하게 말했다. “사람은 일생에 3번 기회가 온다.” 자신을 만난 것이 성공할 수 있는 일생의 기회 중 하나라는 의미였다. 눈앞에 있는 J의 모습이 그의 말을 보증해주는 것 같았다. J는 외제 차를 탔고, 그를 따르던 이들은 값비싼 양복을 차려입었다. ‘이런 사람들과 마약 비즈니스를 함께한다면 젊은 나에게 영광이다.’ A는 그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고 했다. J는 A에게 서울의 호텔, 나이트클럽, 모델 회사, 유흥업소를 운영하는 사람들을 소개해줬다. 모두 J의 고객이었다. 한국의 히로뽕 수요는 계속 늘었다. 연간 마약류 사범 수는 1999년 1만명을 넘었다. J는 동생들과 밤낮없이 일했다. 물건은 주로 부산에서 가져와 서울에서 2배를 받고 팔았다. 현금을 받고 히로뽕을 건네는 ‘오른손 왼손 거래’만 했다. 호텔 방에 현금계수기를 두세 대 들여놓고 밤새워 돈을 세다가 잠들었다. 하루 동안 들어온 현금이 많을 때는 1억원도 넘었다. 마(魔)약? 1998년 10월 15일 KBS 9시 뉴스에 보도된 검경의 J 추격 사건. J는 총에 맞아 강남구 골목에 차를 버려두고 달아났다. KBS 캡처 J는 시장을 장악했지만, 긴장 속에서 살아갔다. 특히 경찰이나 경쟁자의 ‘작업’을 경계했다. 실제로 신촌의 한 클럽에서 거래를 마치고 나오다가 미리 기다리던 지역 조직폭력배에게 물건을 다 뺏기기도 했다. 검찰과 경찰도 J를 노렸다. 1998년 10월 14일 자정 무렵, J는 서울 서초구 남부터미널 인근에서 히로뽕 115g을 갖고 구매자를 기다렸다. 받을 돈은 1500만원. 구매자가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순간 승합차들이 그의 차를 에워쌌다. J는 급히 차를 들이받아 빈틈을 만든 뒤 도주했다. 총성이 울렸다. J는 “너무 긴장해서 (다리에) 총을 맞은 줄도 몰랐다”라고 떠올렸다. 신발에 피가 들어찼지만 멈출 순 없었다. 지인의 도움을 받아 부산으로 간 뒤 치료했다. 다음날 뉴스는 검경합동단속반이 실탄까지 쏘며 마약 사범을 추격했지만, 검거에 실패했다는 소식으로 도배됐다. J는 약 6개월간 도피 생활을 이어가다 붙잡혔고, 2001년 징역 3년이 확정됐다. 남부터미널의 추격전은 히로뽕 업계에서 ‘영화 같은 총격 사건’으로 여전히 회자된다. “남들은 영화 같은 일이라고 하는데, 나에게는 아주 괴로운 일이었지요.” J는 기자에게 총에 맞은 상처를 보여줬다. 흉터가 흐릿하지만 사라지지 않고 남았다. J는 이후에도 히로뽕 유통을 계속했다. 거물이 됐지만, 피로감도 느꼈다. J가 마약 관련 혐의로 처벌을 받은 것은 2013년이 마지막이다. J는 이제 히로뽕 유통에서 손을 털었고, 약도 끊은 지 오래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는 공사 기기 대여업 등을 하며 평범하게 산다고 했다. 여러 히로뽕 유통업자들도 J가 이 바닥을 떠났다고 말했다. 인터뷰 내내 J의 말투에는 히로뽕 유통의 산증인이라는 자부심이 묻어났다. 그렇다고 자신을 영웅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았다. 이따금 회한을 내비쳤다. “마약이라는 단어에 ‘마’ 자가 껴있어 그런지 몰라도 다들 말년을 비참하게 사는 것 같아요. 저야 이미 나이가 들어 선택에 미련은 없지만, 너무 험난한 세월을 살아왔던 것은 아닌가 싶죠.” 마약의 ‘마’는 삼베 마(麻) 자다. J는 발음이 같은 마귀 마(魔)로 비유했다. 거물로 대접받았지만, J의 인생이 결코 성공적이거나 행복했던 것만은 아니라는 간접적인 고백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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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코니 추락사’ 리암 페인 부검 결과…코카인 등 여러 마약 발견
- 2024. 10. 22 13:52 화제
- 예비 부검 보고서에는 ‘다발성 외상’과 ‘내부 및 외부 출혈’ 등 언급 원 디렉션 멤버인 리아마 페인이 지난 10월 16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호텔 3층 발코니에서 추락해 사망했다. 게티이미지 밴드 원 디렉션의 멤버 리암 페인(31)의 비극적인 사망 소식에 대한 원인이 다양한 마약성 약물이라는 부검 소견이 발표됐다. 리암 페인은 지난 10월 16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호텔 3층 발코니에서 추락해 사망했다. 미국 ABC 뉴스에 따르면, 부분 부검 결과 페인의 체내에서 여러 물질이 발견되었다. 그 물질에는 ‘핑크 코카인’이라고 불리는 향정신성 약물, 코카인, 벤조디아제핀, 크랙 등과 같은 약물이 포함되어 있다. 핑크 코카인은 주로 메스암페타민, 케타민, MDMA 등이 혼합된 기분 전환용 약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마약을 복용하기 위한 급조된 알루미늄 파이프도 그의 호텔 방에서 발견됐다. 페인의 사망 전, 호텔 관계자들은 당국에 전화를 걸어 “마약과 술에 취해 있는 손님이 있으니 긴급하게 출동해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직원은 응급 구조대에 “발코니가 있는 방에 있기 때문에 손님의 생명이 위험할 수 있다”며 긴급 출동을 요청했다. 당국이 도착하고 약 7분 뒤 페인의 시신이 호텔 안뜰에서 발견됐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응급 의료 서비스의 알베르토 크레센티 책임자는 복수의 언론에 현장에서 사망 선고를 받았다고 전했다. 아르헨티나 검찰청의 예비 부검 보고서에 따르면 페인은 ‘다발성 외상’과 ‘내부 및 외부 출혈’로 사망했으며, 25곳의 부상이 보고됐다. 한편, 부에노스아이레스 보안부는 페인의 호텔 방에서 여러 물질과 부서진 물체가 발견되었다고 전했다. 경찰은 페인이 사망한 날 그에게 마약을 제공한 혐의로 호텔 직원을 조사했지만, 현재까지 체포나 기소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페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원 디렉션 멤버인 루이 톰린슨은 10월 17일 인스타그램 게시물을 통해 페인의 아들 베어에게 “베어가 나를 필요로 한다면 그의 인생에서 삼촌 역할을 할 것이며, 그의 아버지가 얼마나 놀라운 사람이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줄 것”이라고 언급했다. 리암 페인은 2017년 전 파트너이자 가수인 셰릴 콜과의 사이에서 현재 7세인 아들 베어를 두고 있다.
- 마약 유통·왕실 혼외자 출산…사교계 여왕 ‘키키’ [세기의 비하인드]
- 2023. 12. 31 09:45 문화/생활
- 미국 뉴욕 명문가에서 태어난 키키 프레스턴. 그는 사교계에 마약을 유통하고 영국 왕실의 혼외자를 낳았다는, 역사가 덮어버린 문제적 여성입니다. 그는 ‘키키’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던 미국 사교계 여왕입니다. 외할아버지가 미국 독립 선언문에 참여한 위인일 정도로 고귀한 혈통으로 태어났지만 행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의 악명 높은 별명은 또 하나 있었죠. 바로 ‘은 주사기를 든 여인’입니다. 그는 은 주사기로 자신뿐만 아니라 쾌락주의에 젖은 상류층 친구들을 마약 중독에 빠뜨립니다. 영국 조지 왕자의 혼외자를 낳았지만 역사가 덮어버린 사교계 여왕, 키키 프레스턴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키키 프레스턴. 키키 프레스턴은 1898년 미국 뉴욕주 헴스테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본명은 앨리스 그윈입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에드워드 어스킨 그윈이라는 귀족이며 어머니 헬렌은 미국 독립 선언문에 서명한 판사 사무엘 체이스였습니다. 앨리스의 집은 아무도 일하지 않아도 풍족하게 먹고 살 수 있는 부자였죠. 그런데 아무리 마르지 않는 샘물이라도 아버지의 도박 중독 앞에서는 무너집니다. 가족은 파산했고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앨리스 그윈의 어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프랑스 파리로 정착합니다. 앨리스는 파리에서 성장하죠. 이어 어머니 집안의 도움으로 영국으로 건너가 양질의 교육을 받으며 사교계 코스를 걷습니다. 아버지의 도박 파산은 감춘 채 말이죠. 그러나 아무리 엄격한 엘리트 교육이라도 앨리스의 자유분방함은 막지는 못했습니다. 앨리스의 첫 직장은 카바레였습니다. 그곳에서 1919년 플라스틱 공장을 운영하는 사업가 호레이스 비글로우 엘런을 만납니다. 사랑에 빠진 이들은 곧 결혼하고 사랑스러운 딸도 낳습니다. 가족은 파리의 호화로운 저택에서 행복한 삶을 꾸렸지만 그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모험심이 지나치게 강한 앨리스에게 평화로움은 곧 따분함이었습니다. 그는 1924년 일방적으로 이별을 선언하고 집을 나갑니다. 사실 그녀는 믿는 구석이 있어 가정을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심취해있던 모임이 하나 있었죠. 바로 ‘해피 밸리(행복한 계곡)’라는 모임입니다. 케냐에 거주하는 영국인들이 조직한 해피 밸리 멤버들의 모습. 해피 밸리는 케냐에 거주하는 영국인들이 조직한 범상치 않은 공동체입니다. 주로 영국 귀족층이지만 여러 스캔들이나 범죄에 얽혀 국외로 추방된 이들로 구성되어 있었죠. 쾌락주의 생활 방식으로 악명이 높았고 아프리카 케냐에 거처를 마련해 과도한 음주(혹은 마약) 난교, 스와핑 등을 사회 규범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며 자유롭게 살았습니다. 부자 남편과의 이혼으로 위자료를 두둑하게 챙긴 앨리스는 이혼한 지 1년 만에 은행가 제롬 프레스턴과 결혼해 이름을 바꿉니다. 바로 키키 프레스턴으로 말이죠. 그녀는 새 남편과 함께 케냐로 날아가 ‘해피 밸리’에 합류합니다. 아프리카의 이국적인 풍광은 프레스턴 부부에게 큰 충격을 줍니다. 이들은 바로 이곳에 정착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결정합니다. 마침 부자 친구가 케냐 나이바샤 호수 근처의 땅도 내줍니다. 부부는 그림 같은 곳에 네덜란드 스타일의 집을 짓고 자유로운 새 삶을 시작합니다. 이들이 지은 집은 ‘프레스턴 맨션’이라고 불리며 해피 밸리 구성원들의 아지트가 됩니다. 유럽 귀족들도 그 소문을 듣고 종종 찾아와 일탈의 장소로 삼았습니다. 그곳은 새로운 자극을 원하는 귀족들로 늘 붐볐고 키키 프레스턴은 사교계 여왕으로 떠오릅니다. 사람들이 키키의 마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바로 그녀의 과감함 때문이었습니다. 기존 마약중독자들이 폐쇄적으로 마약 투약을 감추기에 급급했다면, 키키는 처음 보는 손님들 앞에서도 은 주사기를 들고 보란 듯이 약을 투여했습니다. 케냐에서 키키 프레스턴. 남편과의 관계도 자유로웠습니다. 그녀는 마치 장갑을 바꿔 끼듯 연인을 바꿨고 남편도 이를 묵인했죠. 키키의 연인 중에는 이탈리아 배우 루돌프 발렌티노도 있었고 켄트 공작 조지 왕자도 있었습니다. 영국 왕실의 구성원에게 마약을 소개한 이는 역사상 그녀가 처음이었습니다. 조지 왕자까지 휘감은 키키에 대한 소문이 영국 왕실까지 흘러 들어갑니다. 게다가 그녀가 조지 왕자 사이에서 혼외자 아들까지 낳았다는 소문이 영국 전역에 퍼집니다. 왕실 전기 작가 크리스토퍼 윌슨까지 키키가 왕자의 아들을 낳았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하기도 합니다. 결국 키키와 조지 왕자는 스캔들을 감추기 위해 아들을 다른 귀족 가문에 양자로 보냅니다. 그 혼외자가 런던 주재 미국 외교관이자 출판사 대표인 마이클 템플 캔필드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결국 키키와 왕자는 왕실의 반대로 헤어지게 됩니다. 에드워드 왕자가 그들을 영원히 만나지 못하게 떼어놓았다고 합니다. 키키는 1929년 조지 왕자를 찾아 영국 왕실을 방문했지만 문전박대를 당하고 케냐로 돌아와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두 사람은 진정한 사랑을 나눴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왕족에게 결혼의 자유는 거의 없던 시절이었죠. 키키 프레스턴. 어느덧 키키도 나이를 먹고 40대 초반이 됩니다. 방탕하게 젊은 시절을 보낸 해피 밸리 구성원들은 하나둘 의문의 사고나 질병으로 키키의 곁을 떠나게 됩니다. 솔메이트 남편 제롬 프레스턴부터 진정한 사랑일 수도 있던 조지 왕자까지 말이죠. 키키도 수년간 마약에 찌든 생활을 한 탓에 불안정한 중년을 보냅니다. 이상 행동을 보였고 의사소통도 어려워지며 인간관계도 소수의 사람으로 좁혀졌습니다. 비극적인 종말은 1946년 뉴욕 스탠호프 호텔에서 발생합니다. 그는 머물던 호텔에서 뛰어내리며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키키는 역사적 인물은 아닙니다. 그저 왕자의 혼외자를 낳은 야사 속 인물에 불과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작가와 극작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사라졌지만 폴 디 필리포 의 단편 소설 <세상 끝의 행복한 계곡>, 클린트 제프리스의 연극 <아프리카 밤> 등 여러 작품에서 독특한 캐릭터로 남아있습니다.
- [신호정의 피부 읽기] 우리도 ‘마약화장품’을 만날 수 있을까?
- 2020. 07. 13 09:39 뷰티
- 대마는 우리나라에서는 마약으로 분류돼 사용이 엄격하게 제한될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부정적인 인식이 깊다. 그러나 세계보건기구는 2017년 11월 의료용 대마가 알츠하이머병, 파킨스병, 다발경화증, 정신병, 암, 당뇨병 합병증, 우울증 등 다양한 질병에 효과가 있다는 발표했다. 전 세계 의약계도 대마 성분 의약품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2019년 3월부터 의료 목적으로 대마를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또 국내에서 환각성분 0.3% 미만의 의료용 대마 추출물의 재배가 허용되면서 지난 6일 국제자유특구위원회는 사업을 추진할 7개 지역을 특구로 지정했다. 대마.▶의료용 대마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마약’인 대마와 ‘의료용’ 대마를 바르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대마에는 60여 종의 칸나비노이드 성분이 함유돼 있는데, 그중 THC(테트라히드로칸나비놀)와 CBD(칸나비디올)가 대표적이다. 대마는 환각이나 중독을 유발하는 THC의 함량에 따라 마리화나와 헴프로 구분된다. 흔히 ‘대마초’라 불리는 마리화나는 THC 함유량이 높은 반면 헴프는 THC 함량이 매우 낮고 CBD를 다량 함유하고 있다. CBD는 강력한 항염작용을 하며 통증과 메스꺼움을 줄여주고 면역력 개선과 노화방지 효과가 있다. 또 뇌에서 기분과 불안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세로토닌 수용체와 주요 신경전달물질인 GABA 수용체와 상호 작용해 뇌를 진정·이완시켜 불안·우울증·스트레스를 줄이고 불면증 개선에도 도움을 준다. ▶마약 화장품이란? ‘마약 화장품’은 대마 성분이 들어 있기는 하지만 향정신성 환각증세를 일으키는 THC를 배제했기에 ‘마약 화장품’이 아닌 ‘CBD 화장품’ 혹은 ‘헴프 화장품’이라는 명칭이 맞는다. CBD는 항염증·항박테리아 효능이 있어 과도한 피지 생성을 억제해 여드름 치료에 도움이 된다. 오메가3와 오메가6를 포함한 필수지방산이 풍부해 피부에 충분한 보습을 주어 건조하고 연약한 피부뿐 아니라 가려움 증상이 있는 건선피부에도 효과적이다. 비타민C와 비타민E보다 강한 항산화 효과가 있어 콜라겐이 파괴되는 것을 막아 주름예방에도 효과적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현행법에 따르면 CBD 제품은 마약과 동급으로 화장품 제조는 물론 수입·유통도 불법이다. 최근 국내에서 만날 수 있는 ‘헴프씨드 화장품’는 헴프씨드 성분이 함유된 제품으로 CBD 화장품은 아니다. 미국에서는 2018년 12월 농업법(Farm Bill)이 통과되면서 대마 성분 중 THC 함량이 0.3% 미만인 CBD 활용이 합법화돼 CBD를 이용한 의약품·화장품 등 다양한 제품이 쏟아져 나오고, CBD 화장품이 명상·요가와 함께 새로운 인디 뷰티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의 대표적 화장품 브랜드인 오리진스와 키엘에서도 CBD를 함유한 화장품들을 출시했다. 그러나 CBD 제품의 안전성에 대한 논란이 끝난 것은 아니다. 화제의 ‘마약 화장품’을 우리가 언제 만날 수 있을까? ■신호정은 누구? 신호정은 이화여자대학교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학교 동서의학대학원에서 임상영양학을 전공했다. 현재는 피부건강 분야 강의를 하고 있으며, 뷰티칼럼니스트와 컨설턴트로 활동 중이다. 또한 여성 건강에 관한 책을 집필하며 콘텐츠 기획과 제작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약초, 피부에 물들다’(도서출판 파람)가 있다.
- [단독]국내 마약 밀매 의혹 티모시, 본인이 직접 밝혔다
- 2015. 02. 26 16:55 연예
- 아침 방송 리포터와 재연 배우로 활약하던 나이지리아 출신 방송인 티모시를 기억하는가. 그는 프랑스 출신 이다도시와 함께 외국인 방송인 1호 멤버였다. 요즘처럼 방송에서 외국인이 많이 보이지 않던 시절, 능숙한 한국어 솜씨의 그는 마치 옆집 아저씨 같은 친근함으로 어필했다. 그랬던 그가 어느 순간 TV에서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1 방송인 티모시가 마약 밀매 조직원이라고 명시한 수많은 인터넷 글들. 2 늘어나는 외국인 마약 밀매 정보를 전하며 그의 사진을 내보낸 어느 종편 프로그램의 화면. 티모시가 마약 밀수 조직원? 2011년에 한 언론사 사회부에서 ‘나이지리아 국제 마약 밀수 조직이 우리나라 여성들에게 접근해 시가 90억원 상당의 필로폰을 운반시키다 적발됐다’라는 기사를 보도했다. 기사의 말미에는 ‘달아난 나이지리아인이자 모 방송사 드라마 단역배우인 운반자 모집책 D씨 등 2명은 지명수배했다’라는 내용도 언급돼 있었다. 기사 속 해당 드라마 단역배우가 바로 나이지리아 방송인 티모시 으츠바(48)라는 소문이 인터넷을 통해 돌기 시작했다. 그 소문은 최근까지 이어지고, 종종 외국인 방송인들이 물의를 빚는 사건이 불거질 때마다 다시 티모시의 이름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아침 방송 리포터로 시골 동네방네를 돌아다니며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스러운 이미지로 다가왔던 그였기에 사람들의 충격은 더 컸을 것이다. 게다가 어느 순간 우리는 그의 근황이나 소식을 전혀 들을 수 없게 됐으니 의혹은 더욱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얼마 전 한 종편 방송국의 프로그램에서는 외국인 마약 밀매에 대한 내용을 다루며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그의 사진을 뿌옇게 처리해 화면에 내보내기도 했다. ‘마약 밀매, 그래 역시 티모시였어!’ 이제 그는 확신범이 돼 있었다. 「레이디경향」은 사실 확인을 위해 취재를 시작했다. 이것이 모두 사실이라면 국가적인 차원으로도 문제시될 수 있는 부분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티모시는 2007년 ‘미녀들의 수다’ 출연진과 함께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 홍보대사로 위촉된 적이 있다. 마약 조직원이 법무부 홍보대사라니. 사실이라면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다. 가장 먼저 인천지방검찰청을 통해 지명수배 건에 대해 확인했다. 결과는 해당 지명수배범은 티모시가 아니었다. 마약 사건에도 그는 전혀 개입돼 있지 않았다. 누군가의 장난 혹은 오해로 인해 지금껏 누명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남은 일은 하나다. 티모시를 찾아야 한다. 왜 방송 일을 그만뒀는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한국에서 돌고 있는 자신에 대한 소문을 알고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는 누구보다 한국을 사랑했던 외국인으로 기억한다. 티모시가 마지막까지 출연했던 방송 제작사에 연락해 그의 소식을 물었다. 그러나 시간이 많이 지난 뒤인지라 그에 대한 이야기나 연락처를 아는 사람들은 없었다. 한때 활발한 활동을 한 방송인인 만큼 종적을 알 길이 없게 됐다면 아마 외국에 있을 확률이 크리라 짐작됐다. 그의 고향인 나이지리아로 돌아갔을 수도 있고, 일본인 아내를 따라 일본에 체류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의 행적을 찾기 위한 오랜 노력 끝에 그와 아내가 해외 전용 메신저 사이트에 가입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여기는 한국입니다. 혹시 방송인 티모시씨인가요?” 이제 메시지를 남겼으니 기다리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3시간 뒤, “누구시죠?”라는 티모시의 답변이 돌아왔다. 티모시가 「레이디경향」에 보내온 사진. 일본에 정착한 그와 가족의 단란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그렇게 연락이 닿은 티모시는 기자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현재 그는 아내 기요미 토킨씨와 아들 제프타, 딸 나오미와 함께 일본 오사카에 거주하고 있었다. “2010년 아이들의 교육 문제로 가족 모두 일본으로 이사를 했어요. 큰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고 둘째가 올해 입학합니다. 저는 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중·고등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올해부터는 초등학생을 가르치기로 했어요.” 그는 한국을 떠났지만 인연만큼은 끊지 않고 있었다. 1년에 한 번씩 한국으로 가족 여행을 오고, 국내 사이트를 통해 다양한 뉴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대한 소문도 알고 있을까? “네,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덤덤한 한마디. “그동안 왜 가만히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아이고…”라는 한국식 탄식이 먼저 터져 나왔다. “처음 그 소문을 들었을 때는 너무 억울해서 한동안 잠도 못 이뤘습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변호사도 알아보고 소송을 할까도 했어요. 그렇지만 여기 생활도 있고 너무 신경쓰이는 일이라 그냥 용서하는 마음으로 접어두기로 했어요. 그래도 나에 대해 아는 사람은 진실을 알지 않을까, 그들만 알아주면 그걸로 만족하자고 생각했죠.” 그가 한국에서 보낸 시간은 자그마치 15년이다. 정작 태어나고 자란 나이지리아보다 한국을 더 많이 생각하고 가깝게 여기고 있다고 털어놓는다. “어찌 보면 저에 대한 관심의 표현일 수도 있지요. 그만큼 한국인들에게 많은 사랑도 받았고요.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거라고 마음을 다스렸어요. 제 마지막 방송에서 우리 가족은 모두 일본으로 간다는 것도 털어놨기 때문에 마약 밀수범은 터무니없는 소리란 걸 아는 사람은 알 거라 여겼어요. 그런데 좀처럼 사라지지 않더라고요. 더 이상 이런 소문이 안 났으면 하는 게 가장 큰 바람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먼저 연락을 해준 기자에게 몇 번이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번 기회로 지금까지의 오명을 지울 수 있다는 사실에 매우 기뻐했다. 더구나 그는 한국에서 법무부 홍보대사로 일했다는 자부심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제가 외국인 홍보대사였잖아요. 여전히 자랑스러워요. 여기서도 학교에서든 어디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면 전 늘 한국 자랑을 합니다. 정말 즐거운 나라이고 좋은 사람들이 많은 나라니까 안 가봤다면 한 번쯤 꼭 가보라고 권하고요.” 그럼에도 여전히 한국을 사랑하고 있는 티모시. 소문을 접했을 때 그는 얼마나 당황스럽고 또 괴로웠을까. “여러분,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웃음). 관심을 가져주시는 건 고맙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소문 퍼뜨리지 말아주세요.” 확인되지 않은 유언비어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어느 정도 상식선의 여과지를 통해 정보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한 때다. 다수의 시청자가 접하는 방송을 만드는 관계자들은 더욱 그렇다. 인터넷에 떠도는 소문을 확인 절차 없이 내보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이번 티모시의 경우처럼 말이다.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제공 / 티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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