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2 건 검색)
- 카운터테너 자루스키 “이 미친 세상에서 ‘마태수난곡’으로 3시간의 단절 경험하길”
- 2024. 03. 27 14:48문화
- ... 온다. 프라이부르크 바로크 오케스트라의 ‘마태수난곡’에서 노래하기 위해서다. 바흐의 ‘마태수난곡’은 종교음악 최고 걸작이자 바로크의 위대한 유산으로 꼽힌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그린 이...
- 되살린 18세기 ‘마태수난곡’ 온몸을 휘감아
- 2007. 02. 26 18:04문화
- ... 2차례 커튼콜을 받았다. 성경 내용을 전달하는 복음사가도 중요하지만 웅장한 합창이야말로 마태수난곡을 ‘음악’이게 한다. 합창단 칸토르답게 크라일레는 합창 파트를 훌륭히 연출해냈다. 반면...
주간경향(총 1 건 검색)
-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바흐의 ‘마태수난곡’ 제대로 다시 듣기(2016. 07. 11 16:02)
- 2016. 07. 11 16:02 문화/과학
- 서른이 넘어서야 을 제대로 다시 듣기 시작했다고 할까. 그것은 문자로 된 고전들을 30대에 이르러 다시 읽으면서 ‘아!’ 하고 격렬한 뉘우침에 빠져드는 것과도 같은 일이었다. 고대 그리스 도시 테베. 오이디푸스는 비운의 신탁을 받게 된다. ‘장차 제 아비를 죽이고 제 어미를 범하게 된다’는 것. 그리하여 부모는 아이를 버리게 되는데, 코린토스의 왕가에서 자라게 된다. 훗날 오이디푸스는 세상을 혼탁하게 만드는 공포의 괴물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해결하여 테베를 구해내는 영웅이 되었으나, 바로 그 전후의 사건들에 의하여 결국 신탁이 예언한 비극의 길을 가게 된다. 황야에서 만난 자를 죽였는데 그가 아버지이고, 테베로 입성하여 권력에 착좌하였는데 이로써 어머니까지 취하게 된 것이다. 비극의 합창단이 이 자의 운명을 노래한다. “죽음의 수수께끼를 풀고 / 이를 데 없는 권세를 누린 사람 / 온 도시 사람들이 그 행운을 부러워했건만 아, 이제는 저토록 격렬한 풍파에 묻히고 말았도다.” 마침내 오이디푸스는 그의 딸이면서도 또한 여동생이기도 한 엘렉트라의 손에 이끌려 황야로 나간다. 스스로 자신을 형벌하고 추방해 버린 것이다. 소포클레스는 이렇게 노래한다. “그러니 사람으로 태어난 몸은 조심스럽게 마지막 날 보기를 기다려라 / 아무 괴로움도 당하지 않고 삶의 저편(죽음)에 이르기 전에는 이 세상 누구도 행복하다고 노래하지 마라.” 고전의 위대함은 그 무슨 인격을 함양하고 인성을 고양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은 이 같은 운명의 비극에 갇혀 고통을 겪게 된다는 것을 수천 년이 지나도록 엄중하게 가르치고 있다는 점이다. 히틀러 시대의 극작가이자 시인이자 저항하는 지식인이었던 브레히트의 시를 빌려 말하자면 “지금 웃고 있는 자는 아직 슬픈 소식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흐가 봉직했던 라이프치히 성토마스교회 소년합창단. 우리는 비극적으로 살기 위하여, 슬픈 일을 겪고 싶어서, 몸이나 마음에 상처를 입고 싶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안전하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한다. 일상의 작은 국면에서 우리는 그런 안전과 행복을 누리기도 한다. 주말이면 큰 즐거움을 주는 , 큰 비 사이에 햇살이 내려 공원을 산책하는 강아지들, 그 뒤에서 해맑게 뛰어노는 아이들을 볼 때 우리는 찰나 같은 행복을 느낀다. 내 사는 곳은 아파트의 1층 없는 2층인데, 그래서 4월이면 벚꽃이 베란다 창문까지 스며들고(아, 벚꽃은 너무 일찍 진다), 6월이면 살구가 탐스럽게 열려서 손만 뻗으면 몇 개쯤 딸 수도 있다(아, 어느 날, 동네 사람 몇이 단지를 돌아다니며 탱탱 살이 오른 살구를 작대기를 몰아쳐서 다 따서 사라졌다). 하여간, 그런 일상들이 우리를 견디게 해주지만, 그러나 “조심스럽게 마지막 날”을 기다려야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운명이다. 3시간 동안 꼬박 앉아 듣기는 쉽지 않아 바흐의 이 일러주는 거룩한 가르침 또한 이와 같다. 실제 공연에서는 휴식 시간 포함하여 3시간이 넘고, 음반을 틀어놓고 쏟아지는 거룩한 합창을 정면으로 마주하면 2시간40분가량 걸리는 이 대곡은 문자로 기록된 동서양의 고전들이 그렇듯이 몇 년 간격으로 다시 들을 때마다 새로운 생각을 거듭 던져주는 불멸성을 갖고 있다. 아주 오래전에, 사춘기 시절에 나는 이 대곡을 들으면서 솔직히 말하여 지극히 엄숙한 ‘종교음악’의 장대한 무게에 눌리는 느낌이었다. 부분적으로 몇 개의 아리아와 십자가의 고통을 겪은 드라마틱한 장면들에서 음악 그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이하고도 경이로운 종교적 법열에 몰입하기는 하였으나, 2시간40분이 넘는 곡을 LP를 몇 번씩이나 뒤집어 가며 듣는 것은 쉽지 않은, 그래서 자주 하지 않는 일이었다. 20대 때는 세상의 혼탁함에 휩쓸려 때로는 거리에서, 때로는 지하실에서, 때로는 황량한 들판에서, 때로는 덜컹거리는 버스의 맨 뒷줄에서 이 대곡의 하이라이트 편집판을 이렇게도 듣고 또 저렇게도 들었으나, 그때는 이미 종교적 광휘로부터 멀리 벗어나서 시궁창 같은 현실에 뒹굴고 있었으므로 간혹 그 밑바닥으로 스며드는 빛과도 같은 음악의 위로에 혼절하기도 하였으나, 아무래도 20대에는 저만치 모셔놓고 다른 일에, 다른 음악에, 다른 정념에 파묻히던 때였다. 서른이 넘어서야 을 제대로 다시 듣기 시작했다고 할까. 그것은 문자로 된 고전들을 30대에 이르러 다시 읽으면서 ‘아!’ 하고 격렬한 뉘우침에 빠져드는 것과도 같은 일이거니와, 특히 음악의 수용 측면에서 1990년대 중반 이후에야 이 나라에 제대로 된, 그러니까 휴식 포함하여 3시간 넘는 기나긴 시간을 정본 연주 그대로 실황을 들려주는 공연들이 들어온 것과도 연관이 된다. 1996년에 존 엘리엇 가디너가 바흐의 를 들려주었고, 2004년에는 바흐가 봉직했던 바로 그 곳 라이프치히 성토마스교회 합창단이 내한하여 실로 장엄하고도 거룩한 을 들려주었다. 2007년에는 드레스덴 성십자가 교회 합창단이 왔으며, 올 봄에 다시 성토마스교회 합창단이 왔다. 1990년대 이후 풍성해진 유럽 클래식 명반들과 이런 실황 연주의 진경을 직접 몸으로 겪으면서, 그리고 무엇보다 세상 풍파의 먼지가 몸에 쌓이고 비루한 일들의 모욕들이 마음에 침전되면서, 이 대곡의 특히 좋아하여 수십 번이고 거듭 듣는 대목이 점점 달라지게 된다. 마치 도스토예프스키의 을 10대에 읽은 때는 가히 예수의 재림 수준이랄 수 있는 해맑은 영혼 알료샤에게 매료되고, 20대 때는 모든 전통과 권위와 신성을 모독하며 뒤집어 엎어 버리려는 무신론자 이반에게 이끌리고, 점점 나이가 들면서는 온갖 악행을 하면서도 한 줌의 인간성 때문에 몸부림치는 맏형 드미트리에게 마음이 기우는 것처럼, 도 그렇게 끝없이 주술처럼 나를 휘감는다. 바흐 마태수난곡의 명반으로 꼽히는 칼 리히터 음반과 존 엘리엇 가디너 음반. ‘십자가 형벌’ 지켜보는 제자의 심경 노래 요즘 특히 선택하여 자주 듣는 대목은(옛날처럼 3시간을 꼬박 앉아서 다 듣지는 못한다) 예수가 십자가의 형벌을 받을 때 저 멀리서 혼자 괴로워하는 어느 제자의 노래다. 30년 전쟁 이후 독일 전역에 드리워진 참혹한 슬픔과 쓰디쓴 허무주의를 한편으로는 위로하고 한편으로는 정돈하고자 했던 독일, 특히 바흐가 활동했던 작센 공국의 문화적 테마는 ‘죄의식’이었다. 죄 지은 자는 물론이고 가벼운 죄를 지은 자, 심지어 죄 없는 자도 거룩한 종교음악을 통해 어지러운 마음을 정돈하고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하는 것, 그것이 당대의 문화적 과제였다. 바흐는 으로 그 고결한 예술적 의무를 다했다. 제목이 일러주듯이 바흐는 ‘마태복음’의 26장과 27장을 기본 텍스트로 하되 당대의 시인이자 작사가인 프리드리히 헨리히의 수난시를 더하고 여기에 스스로 가사를 지어 거룩한 시적 합창을 일궈냈다. 앞서 말한, 십자가 형벌을 지켜보는 어느 제자의 참담한 심정은 ‘마태복음’의 한 구절은 아니고, 바흐가 가상의 제자를 통해 당대의 통절한 마음과 자신의 신앙적 태도를 노래한 것이다. 그 테마의 핵심은 역시 ‘죄의식’이다. “아, 나의 죄, 내 죄가 당신을 매질했나이다! 그 홀로 외로이 지옥의 모든 고통을 견디시니 당신의 괴로움은 내가 범한 죄 때문입니다. 오! 주 예수여, 당신이 짊어지신 그 고통, 나의 죄지음입니다.” 그러나 이 비통한 참회를 ‘종교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좁은 문이다. 예수가 어떤 고통을, 어떤 수난을, 어떤 죽음의 길을 스스로 갔느냐 하는 물음이 필요하다. 어릴 때는 그런 질문을 몰랐다. 그러나 마흔이 넘고 보니 조금씩 들려온다. 예컨대 이런 질문들이 가능하다. 우리는 참된 지식을 원한다, 우리는 마음의 안식을 원한다, 또한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서의 평화를 원한다. 그것은 종교적이고 내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안전, 현실적인 평화를 뜻한다, 그런데 그것이 여의치 않다, 아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이런 상황에서 희생을 당한다, 희생을 당하면 힘센 자들은 외면한다, 심지어 힐난한다, 이럴 때 내적 평화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십자가 형벌을 당하고 있는 예수를 보면서 가상의 제자가 수난의 시를 노래한다. 그 노래는 지금 참담한 현실까지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안전하게 살기 위하여, 우리가 일상의 행복을 누리기 위하여, 우리가 화평한 세상에 살기 위하여, 예수의 얼굴을 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모욕당하고 있지 않은가. 세월호의 아이들이 예수이고, 스크린도어의 비극이 십자가 형벌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의 다음 구절처럼 이렇게 노래하고 또한 함께 버텨야 되지 않겠는가. “만일 나의 사랑이 당신의 전율과 두려움을 위로할 수 있거나 견디고 참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당신 곁에 있겠나이다.” 며칠 전, 지방의 어느 작은 도시에서 이 노래를 함께 들으면서도 청중들과 함께 나는 한동안 마음이 먹먹했었다.
-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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