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1,828 건 검색)
- 1938년 건립 ‘신흥동 옛 인천시장 관사’ 등록문화재 등록
- 2024. 12. 16 10:47경제
- 16일 인천시 등록문화예산으로 등록된 중구 신흥동 옛 인천시장 관사. 인천시 제공 옛 인천시장 관사가 등록문화예산으로 등록됐다. 인천시는 1938년 건립된 일본식 가옥인 인천 중구 ‘신흥동 옛 인천시장...
- 인천신흥동인천시장관사긴담모퉁이집등록문화예산복합문화공간
- 문화재 가득한 충북 청주 중앙공원, 밤이 아름다운 곳으로 변신
- 2024. 12. 13 11:29문화
- ... 지휘본부로서 국토방위 중심지인 충청병영이 있던 곳이다. 또 이곳에는 병마절도사영문(충북유형문화재 15호), 조헌전장기적비(충북유형문화재 136호), 척화비(충북기념물 23호)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 중앙공원충북청주야간경관문화재
- 경복궁 낙서시킨 ‘이 팀장’ 1심 징역 7년···“문화재 더럽혀 사회 충격”
- 2024. 12. 12 15:04사회
- ... 청소년들에게 낙서하면 돈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재판부는 강씨에 대해 “경복궁이라는 상징적 문화재를 더럽힌 점에서 상당한 사회적 충격을 줬다”며 “불법 사이트 이용자를 통해 범죄수익을 올리기...
- 경복궁이팀장
- 바리톤 박주성, 2025 마포문화재단 상주음악가 선정
- 2024. 11. 29 10:59문화
- ... 리사이틀을 열고, 8월23일 야외 특설무대에서 ‘문 소나타’ 무대를 연다. 민간기업이 아닌 기초문화재단에서 상주음악가 제도를 운영하는 것은 마포문화재단이 유일하며, 국내 공연장 상주음악가로...
- 마포문화재단
스포츠경향(총 462 건 검색)
- 관악문화재단, 교통약자를 위한 ‘가족배려주차장’ 조성
- 2025. 01. 02 19:28 생활
- 관악문화재단 관악문화재단(대표이사 차민태)이 관악아트홀 및 관악중앙도서관 주차장에 임산부, 영유아, 노약자 등 교통약자가 우선 이용할 수 있는 ‘가족배려주차장’을 조성했다. 재단은 지난 3월 ‘서울시 관악구 주차장 설치 및 관리 조례’ 일부 개정에 따라 가족배려주차장의 설치 근거를 마련하고 교통약자의 안전과 편의성 제고를 위해 구획 조성을 착수하여 연내 완료했다. 가족배려주차장 이용대상은 임신 중이거나 분만 후 6개월 미만인 임산부, 6세 미만의 취학 전 영유아, 고령 등으로 일상생활에서 차량 이용이 불편한 사람이며, 이들과 동반한 사람도 이용할 수 있는 특별 주차 공간이다. 관악문화재단은 가족배려주차장 조성을 통해 아이가 있거나, 노약자 등 거동이 불편한 교통약자도 편리하게 주차장을 이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관악문화재단 관악문화재단 IT시설지원팀 박홍철팀장은 “가족배려주차장이 단순한 편의시설이 아닌 모두가 교통약자를 배려하는 따뜻한 문화로 정착되기를 바란다”며 “앞으로 재단을 방문하는 모든 이용자들이 더 안전하고 편리하게 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더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 게임문화재단, ‘2024 보호자 게임리터러시 교육’ 마무리
- 2024. 12. 30 11:32 생활
- 게임문화재단은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콘텐츠진흥원과 함께 ‘2024 보호자 게임리터러시 교육’을 성황리에 종료했다고 30일 밝혔다. 김포시북부노인복지관 연계 교육. |게임문화재단 재단은 지난 2019년부터 게임의 긍정적 인식 제고 및 가치 확산을 위해 전국 학부모(일반성인), 고령층을 대상으로 게임리터러시 교육을 운영하고 있다. ‘2024 보호자 게임리터러시 교육’은 지난 3월부터 총 135회 운영했으며, 학부모(일반성인) 및 고령층 1만여 명이 교육에 참여했다. 학부모 대상 교육에는 인지심리학자, 게임개발자, 상담사 등 게임 관련 학계 및 업계 전문가들이 강연자로 나서, ‘게임 문화 이해 및 인식 개선’, ‘게임 이용 지도 방법’, ‘게임 관련 진로 및 직업’ 등 다양한 주제로 교육을 실시했다. 고령층 대상 교육에는 교육 현장 수요를 반영한 ‘보드게임 체험교육’을 신규 개설하여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교육을 운영했다. 재단은 앞으로도 건전한 게임문화 확산을 위해 게임리터러시 교육을 지속 운영,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보호자 게임리터러시 교육’과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게임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게임리터러시 누리집’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교육 관련 문의는 게임문화재단 게임문화교육2팀으로 하면 된다.
- [로컬] 관악문화재단 차민태 대표이사, 대한민국 중소·중견기업 대상 ‘경영혁신상’ 수상
- 2024. 12. 23 20:12 생활
- 관악문화재단 차민태 대표이사, 대한민국 중소·중견기업 대상 ‘경영혁신상’ 수상 관악문화재단 차민태 대표이사가 지난 20일 JW메리어트 동대문스퀘어 서울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2024 대한민국 중소‧중견기업 대상(KOREA SMEs AWARDS)’ 시상식에서 경영부문 경영혁신상을 수상했다. ‘2024 대한민국 중소‧중견기업 대상’은 국내 산업 부문 간 균형 있는 성장을 통해 경제의 선순환을 유도, 선진 경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고, 더불어 우리 경제 성장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중소‧중견기업 및 기관들의 협력적 산업 생태계 조성을 위해 마련된 행사다. 시상식은 경영, 기술‧품질, ESG 등 다양한 부문에서 혁신적 성과를 이룬 기업과 기관을 대상으로 진행된다. 수상은 2019년 설립된 관악문화재단 초대 대표이사로 취임한 차민태 대표이사의 서울시 ‘관악’이라는 지역만의 사업여건을 고려한 차별화 된 리더십과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사업성과를 인정받은 결과다. 문화불모지로 어려웠던 관악의 문화예술 재정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중앙정부와 서울시에서 외부재원을 최고수준으로 확보하고, 2019년 설립부터 강소형 조직으로서 재단을 설계하고, 본부-팀-파트 체제로 확대·개편하여 역할과 책임을 명확히 했다. 또한, 서울시 최고 수준의 문화예술인, 전국 최고의 청년 비중, 관악구의 인적자원과 강감찬 장군, 관악산, 별빛내린천 등의 역사·자연을 활용하여, 골목상권, 전통시장 등 지역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등 뛰어난 경영 성과를 발휘해왔다. 관악문화재단 차민태 대표이사, 대한민국 중소·중견기업 대상 ‘경영혁신상’ 수상 차민대 대표이사는 ‘청년 비중이 가장 높은 도시’, ‘신진예술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도시’, ‘음악예술인이 서울에서 두 번째로 많은 도시’ 등의 타이틀을 지닌 관악구 특성을 적극 반영하여 지난 5년간 다양한 혁신 사업들을 추진해 왔다. 2019년 8월 설립 이후 1,326개의 프로그램을 통해 50만 관악구민에게 문화예술 허파로 자리매김하면서, 축제 관람객 104만 명, 문화시설 이용객 217만 명, 온라인 콘텐츠 조회수 2천56만 회를 기록하는 등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또, 관악아트홀은 빈소년합창단, 유재하 음악가요제, 우리동네 음악회 등 우수단체와 연계하여 킬러콘텐츠를 제작해 매진 행렬을 이어가고 있으며, 주민과 예술이 연결되는 커뮤니티아트홀 조성을 위해 클래식 공연뿐만 아니라 트로트, 국악 등 다채로운 공연을 마련해 모두의 취향을 담아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난해 ‘축제도시, 관악’ 선포하여 사계절 축제를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봄에는 가족들을 위한 ‘관악봄축제’, 여름에는 활기 넘치는 글로벌 스트리트 댄스 축제 ‘그루브 인 관악’, 가을에는 역사문화축제 ‘관악강감찬축제’, 겨울에는 따뜻한 ‘겨울예술축제’까지 각 계절마다 특화된 콘텐츠를 통해 구민들의 삶 속에 문화와 예술을 깊이 스며들게 했다. ‘관악강감찬축제’는 문화체육관광부 지정 ‘2024-2025 예비문화관광축제’로 2020년에 이어 2회 연속 선정되는 쾌거를 이루며, 지역을 넘어선 역사·문화 축제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았으며, 글로벌 스트리트 컬처 축제인 ‘그루브 인 관악’은 전국지역문화재단연합회 주관으로 열린 ‘2024 대한민국 문화예술·관광 박람회’에서 문화향유 부문 지역문화 우수사례에 2년 연속 선정되며 그 성과를 인정받았다. 차민태 대표이사는 최근 ‘월간관악, ’샤로수길 클럽데이‘, ’관악인디위크‘ 등의 사업을 통해 관악구 신림 및 샤로수길 민간문화공간 4곳과 지역문화기획자, 이티스트 중심의 협의체를 구성하여 지역 공간의 매력을 키웠다. 공연장이란 민간문화거점과 신림동, 샤로수길이라는 장소를 연결하여 ’음악 도시 관악‘의 브랜드 가능성을 발견했다. 이러한 사업들은 차민태 대표이사가 혁신적으로 추진한 관악스러움과 탁월한 경영 능력이 합쳐진 결과로 아티스트에게 무대를, 관객에게 위로를, 지역에게 활력을 주는 관악만의 로컬문화를 이끌어낸 대표사업이다. 관악문화재단 차민태 대표이사, 대한민국 중소·중견기업 대상 ‘경영혁신상’ 수상 또, 관악구 로컬 크리에이터를 양성하는 ‘로컬 파운드 관악’, 창작 지원 프로그램인 ‘관희씨를 찾습니다’, 전국 싱어송라이터 콘테스트 ‘비더스타’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지역 예술인들의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이러한 차민태 대표이사의 경영혁신은 관악구 지역특화의 다양한 사업들은 지역 주민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골목상권을 활성화하여, 지역 경제 활성화에 실질적인 효과를 보였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관악문화재단 차민태 대표이사는 “그 어느 때보다 대한민국의 문화예술이 글로벌 무대에서 주목받는 시기에,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함께 모인 ‘관악’이 대한민국의 가장 ‘지역’적인 플랫폼이 되리라 확신한다”라며, “가장 한국적이고 지역적인 문화가 관악에 있다”,“앞으로도 ‘관악’을 통해 대한민국의 매력이 확산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지원할 계획”이라고 수상 소감을 전했다.
- 관악문화재단, 12월 21일까지 관악구 지역예술가의 창작을 담은 ‘찾았다, 관희씨!’ 개최 중
- 2024. 12. 20 11:58 연예
- 관악문화재단 관악문화재단(대표이사 차민태)이 관악 우수창작 문화콘텐츠 지원사업 ‘관희씨를 찾습니다 시즌4’의 이야기를 담은 ‘찾았다, 관희씨!’(성과공유회)를 지난 17일부터 오는 21일까지 관천로 문화플랫폼 S1472에서 진행한다. 관악구는 다양한 예술인이 거주하고 있다. 전국에서 청년인구비율이 가장 높은 도시이자 지방에서 서울살이로 찾는 관문도시로 서울에서 가장 많은 신진예술인이 거주하고 있다. 재단은 이런 인적자원을 도시의 잠재력으로 보고 매년 지역예술인의 창작실험을 지원하는 ‘관희씨*를 찾습니다’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관악 예술희망 씨앗’의 준말 2024년 ‘관희씨를 찾습니다’ 프로그램에 선정된 예술가는 총 10팀이다. 창작활동 지원금을 받고 약 6개월 동안 민간 공연장, 갤러리, 공원, 웹상에서 자신의 예술콘텐츠를 공개해 관객에게 관악만의 예술실험을 소개한다. 관악문화재단 또 예술주체 스스로의 창작활동 경험을 영상으로 남겨 참여예술인을 다시 한번 호명해 지역 내 활동기반을 마련해준다. 지금까지 관악의 예술인 43팀을 온라인, 오프라인을 통해 자신과 예술을 소개했다. 성과공유회는 2024년 선정 예술가 10명의 작품을 직접 경험할 수 있다. AI와 데이터기술이 결합한 미디어아트 ‘Part of Noise’(차유나), ‘Decoding Match’(오은수), ‘길 잃기 놀이’(송정은)는 관악구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제공한다. 관악구 소재를 음악으로 재해석한 ‘관악 플레이리스트’(구제창), 관악의 사람들과 함께 음악을 실시간으로 만들어가는 ‘테이크아웃 뮤직 트럭’(김재은)은 음악도시의 새로운 실험을 선보이고 있다. 공연 △‘깡통’을 지켜라!(남유하) △스탠드업 클래식(오성진) △‘여섯 개의 별’(공연집단 바람길), 체험형 전시 △청년명암(오하준), 웹툰 △‘알콜천국 금주만세’(박하은)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이 전시될 예정이다. 예술인의 이야기를 만나는 오프닝 행사는 지난 17일 신림역 인근 ‘관천로 문화플랫폼 S1472’에서 열렸다. 참여예술가들이 직접 창작과정을 소개하고 그 결과물을 공개했다. 발표 이후 지역예술인의 교류 네트워킹도 이뤄졌다. 관악문화재단 관악문화재단 차민태 대표이사는 “관악의 잠재력은 다양한 예술인이며 그들이 만드는 다채로운 예술실험이다”라며 “앞으로도 기술융합, 장르융합 등 다양한 예술실험을 지원해 관악구에서 대한민국 대표 청년예술이 피어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전했다. ‘찾았다, 관희씨!’의 결과물 전시는 21일까지 관천로 문화플랫폼 S1472에서 관람할 수 있으며 자세한 내용은 관악문화재단 홈페이지에서 확인하면 된다. 관악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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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캘린더]고려사경 등 불교문화재 공개(2024. 04. 24 06:00)
- 2024. 04. 24 06:00 문화/과학
- [전시]국립중앙박물관 새봄맞이 전시품 교체 일시 4월 16일~9월 말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실 관람료 무료 권수정혜결사문/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국립중앙박물관이 봄을 맞이해 상설전시실 전시품을 교체했다. 이번 교체로 국보 3점과 보물 3점을 포함해 총 64점의 유물이 새로 관람객에게 선을 보인다. 이중에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기증한 유물 일부가 포함돼 있다. 중·근세관(고려실·조선실·대한제국실)을 중심으로 전시품을 교체한 국립중앙박물관은 우선 고려실에는 고려사경 4점을 집중적으로 배치해 불교문화 코너를 강화했다. 이중 3점이 이건희 회장 기증품으로 <감지은니불공견색신변진언경>과 <감지은니묘법연화경>은 국보로 지정돼 있다. <감지은니불공견색신변진언경>은 고려 충렬왕 때 <대장경>을 손으로 직접 베껴 쓰는 사경 사업을 왕명으로 추진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그 근거가 되는 충렬왕의 발원 글귀가 마지막 부분에 쓰여 있다. <감지은니묘법연화경>은 금니와 은니로 화려하게 꾸미는 고려사경의 표지 형식을 잘 보여준다. <권수정혜결사문> 역시 이건희 회장 기증품으로 2021년 기증 이후 처음 전시되는 작품이다. 고려 중기를 대표하는 승려 지눌이 올바른 선 수행을 촉구하기 위해 정혜결사 수선사를 시작하면서 쓴 글이다. 조선실에서는 <봉사조선창화시권>을 통해 조선과 명나라의 문화교류 모습을 보여준다. 또 ‘국서누선도’를 통해서는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의 국교 재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보물로 지정된 <봉사조선창화시권>은 1450년(세종 32) 조선을 방문한 명나라 사신 예겸과 집현전 학자 정인지, 성삼문, 신숙주가 주고받은 시를 모은 책이다. 집현전 학자들이 직접 쓴 글씨를 볼 수 있다. ‘국서누선도’는 통신사 일행이 오사카 인근에서 도쿠가와 막부가 제공한 배로 바꾸어 타고 이동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대한제국실에서는 근대식 교과서인 <산술신서>, <물리학초보>를 포함한 다채로운 근대 문물 관련 전시품을 새롭게 볼 수 있다. 이번에 교체한 전시품들은 올해 9월 말까지 전시된다. 02-2077-9000 *주간경향을 통해 소개하고 싶은 문화행사를 이 주소(flycloser@kyunghyang.com)로 알려주세요. 주간경향 독자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공연이나 전시면 더욱더 좋습니다. [연극]클로저 일시 4월 11일~5월 25일 장소 플러스씨어터 관람료 R석 6만6000원, S석 4만4000원 만남과 이별에 대한 연극이다. 영국 출신 극작가 패트릭 마버의 대표작으로 아슬아슬하게 얽힌 네 남녀의 사랑과 이별을 다룬다. 한국 공연에는 아이돌 그룹 원더걸스 출신 안소희가 주인공으로 참여해 화제를 모은다. 02-764-8760 [콘서트]힙합플레이야 페스티벌 2024 일시 5월 4~5일 장소 서울 난지한강공원 관람료 일일권 11만9000원 화창한 봄날 서울 난지 한강공원에서 힙합 공연이 열린다. 이번 공연에는 빈지노, 지코, 다이나믹듀오, 기리보이, 빅나티, 이영지, 창모, 로꼬 등 국내 힙합 가수들이 대거 참여해 무대를 꾸민다. 1544-1555 [국악]위뮤의 여섯거리 일시 4월 27일 장소 서울남산국악당 크라운해태홀 관람료 전석 2만원 경기도당굿, 서울굿, 동해안별신굿, 진도씻김굿, 황해도굿 등의 무속음악을 재해석한 국악 무대다. ‘음악제작소 위뮤’의 색으로 관객들의 안녕과 행운을 빌어주는 6개의 굿을 선보인다. 02-6358-5500
- 문화캘린더문화캘린더
- [우정 이야기]환수 문화재 기념우표 발행(2024. 01. 31 05:30)
- 2024. 01. 31 05:30 경제
- ‘다시 찾은 소중한 문화유산’ 기념우표 /우정사업본부 일영원구 나전국화넝쿨무늬상자 열성어필 백자동채통형병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우정사업본부는 최근 되찾은 ‘일영원구’, ‘나전국화넝쿨무늬상자’, <열성어필>, ‘백자동채통형병’ 등 문화재 4종을 담은 기념우표 60만8000장을 1월 30일 발행한다. 일영원구는 국내에서 최초로 확인된 구형의 휴대용 해시계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해시계인 ‘앙부일구’는 반구의 형태로 태양의 그림자로 시계를 확인하는 영침(해그림자를 만들기 위한 뾰족한 막대)이 고정돼 있어 한 지역에서만 시간 측정이 가능하다. 일영원구는 2개의 반구가 맞물려 각종 장치를 조정하면서 어디에서나 시간을 잴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한쪽 반구에 12지 명문과 96칸 세로선으로 시간을 표시했다. 반구에 새겨진 명문-금석이나 음식을 담는 그릇(기명)에 새겨 놓은 글-과 낙관(글씨나 그림에 작가가 자신의 이름이나 호를 쓰고 찍은 도장 또는 그 이름·호)으로 1890년 7월 상직현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상직현은 고종대 활동한 무관이다. 문화재청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2022년 3월 미국에서 열린 경매에서 일영원구를 매입했다. 국외 반출 경위는 알려지지 않았다. 소장자였던 주일 미국 장교가 사망한 후 유물을 입수한 개인이 경매에 내놓은 것으로 전해진다. 나전국화넝쿨무늬상자는 고려시대 나전칠기로서 13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나전칠기는 자개(전복·소라·조개 등의 껍데기를 갈아 얇게 가공한 것)로 무늬를 장식하고 칠을 한 공예품으로 ‘공예 기술의 집약체’로 불린다. 고려 나전칠기는 청자, 불화와 함께 당대를 대표하는 미술공예품이다. 현존하는 작품은 세계에 20건뿐이고, 대부분이 외국에 있다. 그중에서도 나전국화넝쿨무늬상자는 고려 나전칠기의 진수를 보여주는 유물로 꼽힌다. 자개 4만5000여개를 일일이 붙여 꽃과 잎 문양을 규칙적으로 묘사했다. 단선의 금속선을 사용해 넝쿨 줄기를 표현했다. 나전 본래의 무지갯빛과 광택이 살아 있다. 금속선 등 장식 재료의 보존 상태도 우수하다고 한다. 나전국화넝쿨무늬상자는 일본 개인 소장가의 창고에 100년 넘게 있었다. 일본에서도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는데,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2022년 7월 일본 현지 협력망으로 유물을 확인했다. 문화재청과 재단이 1년여간 협상해 지난해 9월 환수했다. <열성어필>은 조선시대 왕의 글씨(어필)를 탁본해 엮은 책이다. 1722년에 간행됐다. 1725년 새로운 어필을 추가했다. 2022년 3월 미국에서 국내로 돌아왔다. 백자동채통형병은 조선 후기 백자다. 원통형 병을 구리 안료로 장식했다. 밑바닥에 영국인 선교사 스탠리 스미스가 수집했음을 알 수 있는 스티커가 남아 있어 국외 문화재의 반출 사례를 확인할 수 있게 한다. 2022년 3월 미국에서 환수했다.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국내 문화재는 23만점으로 추정된다. 가까운 우체국이나 인터넷우체국에서 기념우표를 구매할 수 있다.
- 우정이야기
- [이기환의 Hi-story](113) 문화재 ‘죽어도 못 보내’? 이제는 ‘필요하면 보내’!(2023. 12. 20 07:00)
- 2023. 12. 20 07:00 문화/과학
- 한국을 대표하는 국보급 유물. 반가사유상(왼쪽)과 백제 금동대향로(가운데), 그리고 임금의 초상화인 영조 어진 등은 어떤 해외 전시에도 출품하기 어려운 문화유산으로 정리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국립부여박물관·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죽어도 못 보내. 내가 어떻게 널 보내…”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남성 4인조 그룹인 2AM이 2010년 발표한 ‘죽어도 못 보내’라는, 벌써 13년 된 곡입니다. 뜬금없이 웬 노래로 시작하느냐고 할 테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한국 문화유산의 해외 전시 및 수출을 생각하면 자연스레 이 노래가 떠오르기 때문이죠. ■‘죽어도 못 보낼 문화재’ 단적인 예가 있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축구대회를 기념하는 ‘한·일 문화재 국보전’이 개최될 예정이었는데요. 그때 문화재위원회가 ‘백제 금동대향로’(국보)와 ‘영조 어진’(보물)의 반출을 불허했습니다. “백제 예술의 정수인 금동대향로를 내보낼 필요가 없고, 일왕의 유물이 해외에 나가지 않는데 굳이 영조의 초상화가 일본에 출품될 이유도 없다”며 만장일치로 결정한 겁니다. 또 2013년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이 개최하는 ‘황금의 나라, 신라’ 특별전에 국보(옛 83호) 반가사유상이 출품될 예정이었는데요. 당시 변영섭 문화재청장까지 나서 “전 세계에 단 하나밖에 없는 유물이 해외 전시를 위해 수시로 짐을 풀고 싸는 일을 반복해서야 되겠냐”면서 불허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에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측이 문제를 제기하고 문체부까지 개입한 끝에 반가사유상의 반출허가가 이뤄지기는 했는데요. 그해 말 변 청장의 경질 사유에 ‘반가사유상 등의 반출 반대’가 들어 있었습니다. ■국보·보물급 354점이 대거 기내식을 먹었다 예전에도 이렇게 문화유산 반출에 바들바들 떨었냐 하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한국 문화재는 6·25전쟁 직후 여러 차례 대규모 해외 특별전에 출품됐습니다. 1957년 12월부터 1959년 6월까지 1년 반 동안 금관총 금관 등 197점이 미국 8개 도시를 순회함으로써 첫 테이프를 끊었습니다. 이어 1960~1962년 유럽전에 160여 점을 선보였고요. 1976년에는 6개월 동안 일본의 3개 도시에 348점을 내보냈습니다. 급기야 1979년 5월부터 2년 동안 미국 내 7개 도시를 도는 ‘한국미술 5000년’전이 열립니다. 이 순회전에 국보·보물급 유물 264종 등 모두 354점이 총출동했습니다. 빗살무늬토기(신석기)부터 팔주령(청동기), 황남대총 및 천마총 금관, 반가사유상, 백제문양전 등(삼국), 청자(고려), 백자 및 풍속도(조선), 산수도(이상범·현대 회화)까지…. 2019년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호주 빅토리아국립미술관에 수출된 ‘책가도’. 박물관 전시용으로만 활용한다는 조건에서 수출이 허락됐다. ‘책가도’는 중흥군주인 정조의 문체반정 의지를 담았다. 반출이 허용된 ‘책가도’는 19세기 말~20세기 초 제작된 그림이다. 문화재청 제공 ■군사정권의 홍보 차원 이 특별전이 끝나자 다른 목소리가 나옵니다. “군사정권의 홍보 차원에서 기획된 특별전에 국보급 유물을 354점이나 출품한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당시 박물관 학예사들의 수군거림이었다”(당시 이강승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전 충남대 교수)는 증언이 있습니다. 당시 안휘준 홍익대박물관장(서울대 명예교수)이 쓴 기고문(1982년 6월 4일 동아일보)을 보죠. “…어느 나라도 우리처럼 대규모 해외 전시를 그렇게 자주, 또 그토록 오랫동안 개최한 사례는 없다. 문화재의 가치와 해외 나들이에 따른 위험부담을 감안하면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일…. 우린 늘 문화재를 일방적으로 내보내기만 했을 뿐….” ‘중국의 속국’, 혹은 ‘일본의 식민지’ 취급을 받다가 해방됐으니, 어떻게든 한국문화의 독창성과 우수성을 알릴 필요가 있었죠. 그러나 해외 전시, 그거 쉬운 일이 아닙니다. 유물의 포장, 이동, 전시, 반환 과정에서 어떤 사고가 터질지 모릅니다. 비근한 예로 1979년 샌프란시스코 전시 때 소규모 지진이 일어났다는데요. 박물관 판매대에 놓여 있던 중국 도자기가 깨졌답니다. 등골이 오싹해진 당시 정양모 국립중앙박물관 실장이 도자기들을 낚싯줄로 묶어 고정했다고 합니다. 샌프란시스코가 어떤 곳입니까. 1906년 4월 18일 7.9의 강진으로 도시의 80%가 파괴되고 3000여명이 희생된 곳입니다. 어쨌든 그와 같은 시행착오를 거쳐 나름 정리된 것이 있는데요. 반가사유상, 백제 금동대향로, 어진 등은 일시적인 해외 전시에라도 ‘죽어도 못 보낼 문화유산’ 목록에 들었다는 겁니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의 ‘모나리자’를 보라는 겁니다. ‘모나리자’는 1962~1963년 미국, 1974년 일본·구 소련 순회 전시 등 몇 차례 ‘기내식을 먹은 적’이 있는데요. 그러나 1974년 일본 도쿄 전시 때 ‘붉은 페인트 테러 사건’이 발생했죠. 천만다행으로 페인트는 방탄유리상자에 뿌려졌는데요. 이후 단 한 번도 프랑스 밖을 나선 적이 없습니다. ‘모나리자’를 보려고 해마다 800만명이 루브르박물관을 방문하는데 굳이 해외 전시에 출품할 필요가 없었죠. ■철벽을 뚫고 수출된 문화재 왜 해묵은 이야기를 꺼내냐면 요즘 문화재 반출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전시회를 위한 일시 반출도 아니고, 아예 수출 이야기가 본격 논의되고 있더군요. 아니, 그동안 국내 문화재의 해외 전시에도 ‘가니 못 가니’ 하는 논쟁이 벌어졌던 판인데, ‘수출’이라니요. 따져보죠.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국보·보물 같은 국가지정문화재의 경우는 사실 들춰볼 필요도 없습니다. 해외 전시 등의 이유가 아니면 원천적으로 ‘기내식을 먹을’ 수 없기 때문이죠(문화재보호법 제39조). 그러니 국보·보물 같은 문화유산의 수출은 언감생심 ‘죽어도 못 보내’의 영역입니다. 그렇다면 일반동산문화재(비지정)의 경우는 어떨까요. ‘죽어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역시 ‘못 보내’는 것은 같습니다. 물론 비지정 문화재이니만큼 원칙적으로 문화재청장의 허가를 받아 수출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엄격한 조건이 붙습니다. ‘외국 정부가 인증하는 박물관(혹은 미술관 등)이 전시목적으로 구입 혹은 기증받을 경우’(문화재보호법 제60조제2항)에만 가능합니다. 실제 문화재청장의 허가를 받아 정식으로 수출된 문화유산 6건이 있습니다.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이 전시용으로 구입한 ‘뒤주장 및 떡살’(36점·2011)이 있고요. 호주 빅토리아미술관도 2019~2022년 책가도(1점), 연화도(1점), 백자 달항아리(1점), 백나전함(1점), 나전함(1점) 등 5건을 전시용으로 구입해 갔습니다. 1975년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서 열린 ‘한국미술 5000년 전’ 포스터. 반가사유상과 금관, 금귀고리 등을 대표 모델로 삼았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50년 이상이라는 기준 최근 문제가 제기된 항목이 있습니다. 일반동산문화재(비지정)의 기준과 관련해서 ‘50년 이상’이라는 제작 연한이 도마 위에 오른 겁니다. 이 규정 때문에 이중섭(1916~1956), 박서보(1931∼2023), 유영국(1916∼2002), 김환기(1913∼1974), 이인성(1912∼1950), 곽인식(1919~1988) 같은 화가의 50년 이상 된 작품이 수출의 벽을 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무엇보다 이 규정 때문에 생존 작가들의 작품도 해외로 팔려 갈 수 없다는 비판이 제기됐답니다. 예컨대 최근 타계한 박서보 화백의 작품 가운데서도 1973년을 기준으로 ‘50년 이상 된 작품’은 ‘수출 불가’이고, ‘그 이후 작품’은 ‘수출 가능’으로 나눠집니다. 그러니 한 해 한 해 시간이 흐를수록 ‘판매 불가’ 작품이 늘어날 수밖에 없죠. 이러한 법 규정이 이른바 K미술의 세계화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겁니다. 일리 있는 지적 같습니다. ■1억원 이하의 물품은 수출 가능 외국의 문화재 수출은 어떻게 규정돼 있을까요. 예컨대 영국의 경우 2002년 ‘수출통제법률’을 제정했는데요. 이 법률에 따르면 ‘50년 이상’ 됐어도 특정한 조건을 갖추고, 가격도 6만5000파운드(1억원가량) 이하의 물품이라면 허가 절차를 거치지 않고 수출할 수 있습니다. 다만 50년 이상 된 고고학 유물과 문서, 필사본, 18만파운드(3억원) 이상의 그림 등은 ‘중요문화재’의 취급을 받아 개별심사위원회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요. 이 심사위는 해당 문화유산의 중요도를 감안해 수출통제명령을 내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럴 때는 영국 내 다른 기관(미술관 혹은 박물관)에 해당 물건을 재구입하도록 유도하는 과정을 거치도록 합니다. 수출 통제로 불이익을 당할 매입자에게 적당한 가격을 지불한다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카타르박물관청이 크리스티 경매(2009)에서 구입한 ‘아유바 술레이만 디알로의 초상화’입니다. 세네갈 출신인 디알로(1701~1773)는 노예무역상에게 붙잡혀 미국 담배농장으로 끌려가 노동을 강요당했다가 우여곡절 끝에 영국으로 건너온 인물인데요. 1733년 영국 화가 윌리엄 호어(1707~1792)가 그린 디알로의 초상화는 흑인 노예의 얼굴을 괴기스럽게 그린 당대의 일반적인 그림과는 다른, 생동감 넘치고 사실적인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이 그림의 가치를 알아차린 영국 측이 뒤늦게 수출심사위원회를 동원해 수출을 막았습니다. 심사위원회는 대안으로 영국 내 박물관(국립초상화박물관)에 작품의 재구입을 의뢰했는데요. 결국 박물관 측이 40만파운드를 마련해 초상화의 주인이 된 카타르박물청에 “우리가 되사겠다”는 의사를 표명합니다. 카타르 측은 그러나 그 제안을 거부하죠. 결국 영국·카타르 양국이 문화교류의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영국(국립초상화박물관)에 작품을 두되 소유는 ‘카타르국립박물관’으로 한다는 절충을 마련한 겁니다. 1979년 5월 9일 경향신문 보도 내용.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개막된 ‘한국미술 5000년 전’에 출품된 반가사유상과 신라금관 등을 보고 미국 관람객들이 원더풀을 외쳤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비교적 수출이 자유로운 외국 프랑스는 어떨까요. 2002년 제정된 ‘박물관법’에 따라 전국의 국·공·사립박물관 1220여개 박물관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했는데요. 그것이 ‘프랑스박물관’이라는 인증제도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인증을 받은 박물관의 소장품이 모두 프랑스 문화유산법에 따라 ‘국가 보물’의 범주 속에 포함시켰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프랑스박물관 소장품이 아닌, 그러니까 비지정문화재의 경우에는 마음대로 사고팔 수 있을 뿐 아니라 수출도 가능하다는 겁니다. 일본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일본의 문화재보호법은 “중요문화재(국보·보물)는 수출할 수 없다”(제44조)라고 규정했습니다. 한마디로 중요문화재 외에는 원칙적으로 수출할 수 있다는 얘기죠. 한국과 사정이 비슷한(약탈당한 문화재가 많은) 이탈리아를 볼까요. 이탈리아는 50년이 넘은 사망 작가의 작품을 수출허가대상으로 규제하는 문화유산법을 적용해왔는데요. 하지만 최근 들어 그 범위를 ‘70년 넘은 사망 작가’로 완화했습니다. ■문화재 수출을 둘러싼 두 가지 시선 영국,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의 경우를 쭉 훑어보면 한 가지는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의 문화유산 수출 규제가 ‘지구 최강급’이라는 겁니다. 국보·보물 등 지정문화재는 말할 것도 없고요. 비지정 일반동산문화재의 수출도 법으로 철저하게 규제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K미술의 한계’ 운운한 겁니다. 이를 의식한 문화재청이 나섰는데요. 즉 생존 작가의 작품은 50년이 지나도 ‘문화재’의 범주에서 제외해 자유로운 국외반출이 가능하도록 문화재보호법 시행령을 고친다는 건데요. 개정시행령은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2024년 1월 1일부터 적용됩니다. 이를 두고 ‘찔끔 개정’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미술계에서 나오고 있는데요. 아예 일본처럼 자유롭게 비지정문화재의 해외 거래 및 반출을 허용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외국시장에서 한국의 예술품이 가치를 인정받고, 또 그렇게 해야 한국 미술의 세계화가 이뤄진다는 겁니다. 그러나 너무 급진적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습니다. 약탈 및 수탈의 역사로 점철된 한국 역사에서 자유로운 문화유산의 국외반출은 시기상조라는 겁니다. 게다가 장물(도굴 및 도난품)이어서 섣불리 시장에 내놓지 못한 떳떳지 못한 유물도 그 틈에 국외반출될 우려가 있다는 거죠. 또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사이트를 보라는 겁니다. 해외에 흩어져 있는 문화유산이 22만9655점(27개국)으로 집계되고 있는 판이 아니냐는 겁니다. 해외에 흩어져 있는 문화재를 한 점이라도 환수해야 할 판에 수출 규제를 풀면 어찌 되겠냐는 겁니다. 문화유산의 순유출이 불 보듯 뻔하겠지요. 2021년 두 점의 국보 반가사유상의 ‘같은 공간 상설전시’를 위해 불교조각실에 전시돼 있던 불상(옛 83호)을 수장고에 임시로 수장고에 격납하고 있다. 이 반가사유상을 두고 해외 전시가 너무 잦아 이동과 전시 등에 따른 파손 및 훼손 등이 염려된다는 여론이 꾸준히 제기됐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솔직히 어떤 주장에 더 일리가 있는지 판단이 잘 서지 않습니다. 다만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된 지 61년이나 흘렀는데요. 세상은 확확 변해왔는데, 문화재보호법의 이 조항은 환갑을 훌쩍 넘기고서야 문제가 제기됐네요. 뒤늦었지만 시대 상황에 맞게 제대로 법을 다듬을 필요는 있는 것 같습니다. ‘죽어도 못 보내’는 문화유산도 분명 있어야겠지만, 이제 세월이 지났으니 ‘필요하다면, 원한다면 보내줄 수도 있는’ 유산도 허용해주는 시대가 되지 않았을까요.
- 이기환의 Hi-story
- [우정이야기]되찾은 문화재 4종, 우표로 소장해볼까(2023. 02. 17 11:04)
- 2023. 02. 17 11:04 경제
-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우정사업본부는 문화재청과 함께 해외로 반출된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기념우표 ‘다시 찾은 소중한 문화유산’ 64만 장을 2월 22일 발행한다. 우정사업본부 제공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외세로부터 다수의 문화재를 약탈당했다가 현재까지 돌려받지 못한 채 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는 22만여 점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여러 세대를 거치며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다시 찾은 소중한 문화유산’ 기념우표는 긴 세월 동안 어렵게 찾아냈거나 기증 등을 통해 국내로 돌아온 우리 문화재를 소개하고 있다. 우표로 재탄생한 문화재는 ‘나전국화넝쿨무늬합’, ‘낙수정 출토 범종’, ‘감지은니묘법연화경’, ‘동제불감 및 은제금도금관세음보살좌상’ 등 총 4종이다. ‘나전국화넝쿨무늬합’은 나전칠기의 최전성기였던 고려시대(12세기) 작품으로, 일본의 개인소장자에게 구입해 지난 2020년 국내로 환수됐다. 길이가 10.2㎝에 불과한 크기지만, 현재까지 남아 있는 다른 나전칠기와 달리 원형 상태를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가치를 자랑한다. 화려함의 극치를 표현하고 있어 ‘극정교(極精巧)’, ‘세밀가귀(細密可貴)’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세련된 미의식이 투영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낙수정 출토 범종’은 일제강점기인 1926년에 전라북도 부호 박영근이 낙수정(樂壽亭)을 수리하다가 발견했다. 이를 당시 일본 총독 사이토 마코도가 일본으로 반출하면서 한국 땅을 떠났다. 범종을 선대로부터 물려받아 소장해오던 다카하라 히미코가 1999년 기증하면서 70여년 만에 국내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동종은 2001년 9월 21일 보물 제1325호로 지정됐고, 이후 국립전주박물관으로 이관됐다. 용뉴(종의 꼭대기 장식)가 일부 훼손됐지만 거의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어 통일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 범종 양식의 변천 과정과 제작 방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학술 가치를 지닌다. ‘감지은니묘법연화경’은 미국의 소장자에게 2019년 구입해 국내로 환수됐다. 14세기 고려 후반의 특징적인 요소를 보이는 변상도를 갖추고 있고, 표지화가 완벽하게 보존돼 가치가 매우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동제불감 및 은제금도금관세음보살좌상’은 (사)국립중앙박물관회 젊은친구들(YFM)이 일본의 고미술상으로부터 구매한 뒤 기증해 국내로 돌아온 작품이다. 이 불상은 1982년 10월 금강산 향로봉에서 출토된 ‘금동아미타삼존상’의 사례와 조각형식이 같은 유형에 속하면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불상 내 복장물은 2개의 덩어리로 이뤄져 있고, 입구 쪽은 여러 종류의 직물과 색실의 뭉치로 메꿔져 있다. 때문에 불교미술과 금속공예의 변천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기념우표는 가까운 우체국을 방문하거나 인터넷우체국(www.epost.go.kr)에서 구매할 수 있다.
- 우정이야기
레이디경향(총 3 건 검색)
- 양조장 건물 문화재로 등록…이규행·송현주 부부의 탁주 사랑
- 2007. 01. 16 화제
- 급격한 산업화 때문에 가업을 대대손손 이어간다는 건 흔히 볼 수 없는 일이 되었다. 하지만 충북 진천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덕산 양조장 건물에서 3대째 술을 빚어오는 가족이 있다. 전통주의 명맥을 잇는 이규행·송현주 부부는 옛것을 지키고, 또 새롭게 하는 일에 여념이 없다. 이 부부의 일과 사랑, 자녀교육 등 어느 것 하나 흘려들을 수 없는 건, 이들의 삶의 모습이 누구보다 행복해 보이기 때문이다.술 빚는 일은 3대째 이어져온 가업 충북 진천은 생각만큼 멀지 않았다. 서울에서 중부고속도로를 타니 한 시간 반 남짓. 특산품인 진천 쌀과 맑은 물 덕분에 예로부터 이곳 탁주와 약주는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왔다고 한다. 그 시초는 192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 이장범 옹이 덕산 양조장을 창립한 이래 2대 사장 이재철 옹의 뒤를 이어 1998년부터 이규행 대표(45)가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덕산 양조장 건물은 2003년에 근대문화유산으로 공인받아 등록문화재 제58호로 지정되었다. 역사와 전통을 인정 받은 곳에서 옛 방식 그대로 빚어내는 술맛 또한 일품일 터. 농촌드라마를 즐겨보는 이라면, 이미 덕산 양조장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KBS-1TV에서 오랫동안 방영 중인 ‘대추나무 사랑걸렸네’에서 ‘장봉’ 역할의 탤런트 임선택이 운영하던 양조장이 바로 덕산 양조장이다. 촬영지인 진천에 머물던 제작진이 우연히 이곳에 찾아와 오래된 건물에 반하고, 또 술맛에 반해 촬영지로 등장하게 되었던 것. 하지만 아쉽게도 장봉이 업종을 변경하는 바람에 더 이상 브라운관에서 덕산 양조장을 보기는 어렵게 되었다. 실제로 본 덕산 양조장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보수를 거쳐 옛 영화 속에나 나올 법한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목조건물인 양조장에는 수십 년 묵은 누룩 냄새가 배어 있었다. 오래된 냄새지만 퀴퀴하기는커녕 도리어 정감 어린 고향의 냄새로 다가왔다. 놀라운 것은, 바깥 날씨가 덥거나 춥거나 상관없이 양조장 안은 항상 일정한 온도와 습도로 유지되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시사철 일정한 술맛을 낼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갖춘 셈이다. 그 비결은 지붕과 벽면 사이마다 완충재 역할을 하고 있는 왕겨와 자연히 환기가 되도록 만든 설계 때문이라고 한다. 물려받은 선조들의 지혜와 얼을 살리고 더욱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것은 가업을 이은 세왕주조 이규행 대표의 몫이다. 그는 귀향 9년 차의 중견사업가로서 비교적 성공한 모델로 손꼽을 만하다. 2000년 진천군 ‘신지식인 1호’로 선정되었고, 최근 도코모모(근대 건물과 환경형성의 기록·조사 및 보존을 위한 조직) 근대문화유산 지킴이 2호로 선정되기도 했다. “저희 술은 좋은 원료만 선별해서 만듭니다. 진천 쌀과 지하 150m의 천연 암반수를 사용해 70년 묵은 거대한 항아리에서 발효시킨 100% 순수 곡주죠. 양심적으로 만드니 소비자들께서 먼저 알아주시더군요. 대형매장에서 구하기도 쉽지 않고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기 위해 광고를 하지 않는데도 철마다, 명절마다 많은 분들이 찾아주시니 감사할 밖에요.”사업한 마음뿐입니다. 실패로 쫓기듯 귀향, 그곳서 제2의 인생 덕산 양조장 전경. 전면의 측백나무들이 해충을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이규행 대표는 원래 건축과 출신으로 건설 사업을 하던 평범한 가장이었다. 3형제 중 차남이었기에 가업을 잇는다는 건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일이라고 했다. 건설 경기가 막바지 호황을 누리던 시기라 건물을 짓고, 또 분양해서 남부럽지 않게 살던 나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금융실명제 도입 이후부터 돈이 돌지 않더니, 급기야 지은 빌라가 분양되지 않아 살던 아파트까지 건설 대금 대신 넘겨줘야 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부도가 나는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하루하루 죽을 만큼 힘겨운 나날이었다고 한다. 바닥까지 내려간 그 시기에 누구보다 힘이 되어준 것은 아내 송향주씨(39)였다. 두 사람은 캠퍼스에서 처음 만났다. 서구적인 이목구비에다 늘씬하기까지한 향주씨에게 많은 남학생들이 눈독을 들인 것은 당연지사. 이 대표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제대 후 3학년으로 복학했을 때 처음 봤는데, 당시 이 사람이 신입생이었어요. 동아리 모임에서 점찍은 이후 1년 동안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듬해 같은 수업을 들으면서 저란 사람의 존재를 알렸지요. 어느 날 수업이 끝난 후에 노트를 빌려 달랬더니 뭘 적어놓았는지 글쎄 강의 부분만 찢어서 주더라고요(웃음).”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은 결혼으로까지 이어졌다. 슬하에 터울이 큰 삼남매를 두었고 졸업 후 바로 결혼했기 때문에 향주씨는 사회생활을 할 기회가 없었다. “집에서 살림만 하다보니 현실에 많이 어두웠죠. 제 목표는 오직 현모양처였거든요. 실제로도 그렇게 살았고요. 살던 아파트를 내놓고 나서 남편이 힘들게 일하는 걸 보면서 ‘우리 아파트 언제 다시 사?’ 이렇게 묻곤 했어요. 매사 긍정적인 남편은 ‘조금만 기다려. 금방 살 수 있을 거야’ 늘 그랬지요. 지금은 아파트하고 상관없는 시골에 살고 있지만 둘이 함께 일할 수 있는 지금이 훨씬 행복해요. 사람들 만나서 회의하는 것도 너무 재미있어요. 뒤늦게 적성을 발견한 것 같아요.” 이규행 대표는 개발과 영업을, 송현주씨는 운영을 책임진다. 손발이 척척 맞는 두 사람.이 대표는 신제품개발과 영업, 물류 담당이고, 향주씨는 직원 관리와 재정 등 양조장 운영을 도맡아하고 있다. 따로 또 같이 자기 몫을 해내고 손발도 척척 맞는 두 사람이지만, 처음부터 수월했던 건 아니다. 진천으로 들어오게 된 것도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가장 큰 난제는 아이들 교육 문제였지만,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이어서 귀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곳으로 들어온 것도 운명인 것 같아요. 1997년에 남편이 내려오자마자 IMF가 터졌으니까요. 힘들게 끌어오던 사업을 계속했더라면 결과가 어땠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죠. 1998년에 아이들과 온 식구가 진천에 들어왔지요. 모시고 있는 아버님하고 어머님도 너무 좋으셔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세요.” 술 팔아 생긴 수익은 술에 모두 재투자 나이 드신 아버지 대신 덕산 양조장을 이어받은 후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이었다. 술을 팔아 생긴 수익은 다시 새 제품을 만들기 위한 개발에 투자했다. 이 대표는 새로운 약주를 만들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거듭해야만 했다. 처방은 한의사가 했지만, 쓰디쓴 생약재들을 하나하나 씹어가며 원료의 성질을 연구하고 배합과 발효방법 등을 연구하는 일은 언제나 그의 몫이었다. 세왕주조의 약주는 다른 약주처럼 엑기스를 첨가하는 것이 아니라 생약 12종 이상을 직접 항아리에 담가 만든다. 그 노하우야말로 다른 이들이 흉내낼 수 없는 비법이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처음 만들어진 상품이 천년주이고, 이후 신제품 개발에 게을리하지 않고 소비자들의 입맛을 사로잡기 위해 35종의 제품을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전통방식을 고수하다 보니 생산량이 많지 않아 공급이 늘 달리는 편이다. 그야말로 ‘없어서 못 파는 술’인 셈이다. 그런데도 가격은 비싸지 않다. 좋은 술을 저렴하게 파는 것이 세왕주조의 인기 비결이다. 이 대표의 표현처럼 ‘수제화를 기성화와 같은 가격에 판매하는 셈’이다. 단기간의 큰 이윤보다는 멀리 내다보고 양조장을 운영하고 있고, 축적된 기술이 돈보다도 값진 재산이라고 여기는 까닭에서다. 체에 내려진 고두밥(멥쌀가루)을 일일이 덩어리가 지지 않도록 풀어준다.“저희 덕산 양조장이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후에는 어느 개인의 공장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930년에 지은 목조건물이 지금까지 이렇게 보존되어 있는 건 그야말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 건물과 전통주를 잘 보전해서 후대에 물려줄 사명감으로 일하고 있지요. 제가 아니면 또 누가 하겠습니까. 하지만 제 자식에게 그대로 물려주지는 않을 겁니다. 친자식이 아니더라도 누가 이곳을 잘 지켜나갈 수 있을지 심사숙고한 후에 대를 이어가야지요. 자유경쟁시대에 명맥을 이어가려면 안일한 자세로는 안 되니까요.” 이런 자세로 술을 만들다보니 소문이 나서 직접 찾아오는 사람도 많다. 방송에도 여러 차례 출연했고, 인터뷰 요청도 줄을 잇는다. 일본의 전통주 만드는 사람들이 직접 찾아온 이후 지속적으로 교류도 하고 있다. 전통주 만드는 방법은 일본과 큰 차이가 없다. 제품을 주입하는 일부과정은 기계화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손으로 직접 만들어야 한다. 약주 만드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멥쌀을 불려 증기로 고두밥을 짓고 물과 배양한 종국(누륵을 제조할 때 씨가 되는 것)을 넣어 밑술을 잡는다. 이틀간 실내 온도에서 발효시킨 후 다시 멥쌀을 섞어 덧술을 앉히고 한약재를 넣어 10일 정도 두면 술이 익는다. 파스퇴르가 고안한 저온살균방식을 채택하고 있는데, 1년이 지나도 술이 상하지 않는다고. 없던 기운도 생긴다는 천마활보주(앞)와 옥수수술 등 세왕주조의 제품은 무척 다양하다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은 두 사람이다. 일에 재미를 붙이다보니 예전에는 품에서만 아이들을 키우려하던 향주씨도 이제 자녀교육에 있어선 전문가가 다 되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아무래도 교육상 힘들어서 맏딸 혜진(16)이는 호주로 유학보낸 지 2년째다. 아들 건직(14)과 건화(10)는 시골서 뛰어놀며 자연을 배우는 중이다. “자기계발에 열심인 사람이 자녀교육도 잘할 수 있거든요. 아이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해요. 공부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립심을 키우는 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 같아요. 혜진이는 현지에서 대학을 가고 싶어해서 장학금을 받으면 보내준다는 조건으로 허락했어요. 그러니 열심히 공부 안 하고 배기겠어요(웃음)? 과외니 뭐니 다 시키지 않는데도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줘서 감사해요.” 발효상태를 점검하고 종균을 관리하기 위해 365일 양조장을 떠나지 않는 부부는 아무래도 이 일이 천직인 듯하다. 짧은 만남에도 잊혀져가는 것들을 되살리고 숨결을 불어넣는 일에 느끼는 신명이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기대 없이 온 이곳에서 평생 눌러 있을 줄은 전혀 몰랐지요. 창조적인 작업이라 힘들지만 재미도, 보람도 큽니다. 중저가의 술로 입지를 다지는 한편, 고부가가치를 지닌 술을 개발하는 데 힘쓸 겁니다. 약주는 약이 되는 술이지만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정도가 넘어가면 독이 되게 마련이지요. 모쪼록 저희 술이 많은 분께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기획 / 최은영 기자 ■글 / 위성은(자유기고가) ■사진 / 원상희
- 박사 출신 준 인간문화재 양승희의 열정적인 삶
- 2005. 11. 01 화제
- “삶의 중심은 가야금의 맥을 지키는 일과 스승에게 받은 예술혼을 꽃피우는 것” 가야금 산조의 본향 영암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가야금 명인 양승희씨가 반가운 웃음으로 반겨준다. 그는 가야금 산조를 만든 김창조 선생의 생가를 중심으로 오는 2008년 완공 예정인 ‘가야금 테마파크’의 고문이다. 또 그의 남편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고체산소 특허 기술 개발 회사인 벤처기업 제이씨테크놀로지 대표이사로도 활동중이다. 그는 승승장구하는 사업도 결국은 자신의 예술혼을 살찌우는 일이라며 예술에 대한 식지 않는 열정을 표현했다. 양승희씨에겐 올해가 가장 빛나는 한 해로 남을 것이다. 스승의 유언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일도 불사 서울에서 광주, 나주를 지나 영암으로 들어가는 13번 국도. 독특한 대형 입간판 하나가 눈길을 끈다. ‘가야금 산조의 본향 영암’이라는 문구와 함께 가야금을 연주하는 여성의 사진이다. 사진 속 주인공은 바로 가야금 명인 양승희씨(57·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준 인간문화재)다. 지역에서 ‘내 고장 모델’로 내세웠으니 자부심을 가질 만도 하다. 그만큼 가야금 산조에 바친 열정과 헌신을 영암군이 인정했다는 이야기와 상통한다. 더구나 최근에는 영암군이 가야금 산조를 만든 김창조 선생의 생가를 중심으로 1만 평 부지에 ‘가야금 테마파크’를 조성하면서 양씨를 고문으로 위촉, 그의 입지와 위상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2008년 완공을 목표로 하는 가야금 테마파크는 김창조·김죽파 기념관, 공연장, 음악박물관, 수련실 등으로 구성된다. “스승은 죽어서까지 저를 움직이고 계시는 것 같아요.” 1989년 김죽파는 귀애(貴愛)마지 않던 제자 양씨에게 자신의 친할아버지(김창조)가 산조 음악의 창시자임을 밝혔다. 그리고 서울대 학·석사를 마치고 러시아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은 학구파 가야금 연주자 양씨가 음악 가문을 지켜줄 것을 당부하며 눈을 감았다. 스승의 유언이 항상 머릿속에서 맴돌았어요. 당신도 못 찾는 할아버지를 어디서 찾나 고민스러웠죠. 그러던 차에 중국 옌벤(연변)에서 가야금 독주회를 가졌어요.” 스승이 세상을 떠난 지 1년 뒤인 1990년 7월의 일이다. 이때 양씨는 스승의 유언을 풀어낼 단서를 얻는다. 김창조의 직계 제자로 월북한 평양음대 안기옥 교수에게 가르침을 받은 옌벤예술학교 김진 교장을 만난 것. 김 교장은 자신이 채보하고 녹음한 김창조 산조에 관한 모든 자료를 양씨에게 건넸다. 그러나 당시 사정으로는 북한에서 나온 자료를 국내에 들여온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일이었다. 그렇게 수집한 자료를 분석해 세상에 내놓기까지 또 10년이 걸렸다. “2000년 김창조 가야금 산조 원형을 발표하고, 영암이 김창조, 한성기, 김죽파, 김병호 등 가야금 명인을 배출한 산조 음악의 본향임을 선포했습니다. 이후 양씨는 ‘김창조 산조 현창 사업회’를 발족했고, 2001년부터 매년 산조축제와 학술회의를 개최했다. 마침내 2004년에는 문화관광부에서 ‘산조의 창시자 김창조’를 문화 인물로 선정했다. 고체산소회사는 일본, 미국, 싱가포르에서도 합작 문의 쇄도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것이 인생이지만 스승이 타계한 1989년은 정말 힘들었어요.” 떠난 스승에 대한 허전함도 컸지만 이 무렵 양씨는 안팎으로 어려움에 처했다. 전기, 수도세를 못 내 냉방에서 오들오들 떨었을 정도로 곤궁했고, ‘죽음보다 깊은 고통’을 맛봤다. “호흡곤란으로 응급실에 실려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그때 남편이 산소 목걸이를 만들어 목에다 걸어주더군요.” 그의 남편은 미국 국방과학연구소와 해군연구소(NSEW) 연구원 출신의 ‘고체산소’ 개발자 노만균 박사다. 남편은 호흡곤란을 겪는 아내를 위해 우주인들이 좁은 우주선 안에서도 쾌적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산소를 고체 상태로 변환, 저장시킨 기술을 응용해 ‘산소 목걸이’를 만들어준 것. “효과가 상당했어요. 그래서 남편에게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눠주면 좋겠다고 제의했지요.” 뜻밖의 사건을 계기로 부부는 ‘고체산소’ 제작 회사 (주)제이씨테크놀로지스(J.C. Technologies, INC)를 설립했다. 고체산소는 웰빙 시대를 맞아 공기청정기뿐만 아니라 자동차, 컴퓨터, 심지어 비누, 베개, 마스크 등 일상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들어가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고부가가치 물질이다. 비누곽만한 고체산소 하나면 집 안에서도 마치 수목원을 거니는 듯한 시원하고 상쾌한 공기를 맛볼 수 있다. 더군다나 전원이 필요 없어 누구나 원하는 장소에서 쉽게 사용할 수있다. 고체산소의 ‘피톤치드’ 함량은 잣나무나 소나무, 포플러 등 자연의 나무보다 높은 것으로 한국화학실험연구원의 비교 실험으로도 증명됐다. 새집증후군의 요인인 포름알데히드(HCHO) 제거 효과도 뛰어난 것으로 조사돼 아토피 등 피부 질환의 예방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양씨는 이산화황(SO2), 이산화질소(NO2), 강산성가스(SOx/NOx) 등 예술가에게는 외계의 문자처럼 생소한 단어와 화학적 원리를 막힘 없이 설명했다. “아니 선생님 어떻게 그렇게 어려운 걸 화학 선생님보다 쉽게 이야기하세요?”라는 기자의 말에 그는 “예술가 양승희가 하는 말이 아니라 첨단 벤처기업 CEO의 설명”이라면서 웃어넘겼다. “원래는 무기의 재료로 국가간 거래가 이루어지는 제품인데, 한국의 조그만 회사에서 엄청난 원료를 사 가는 걸 보고 세계가 놀라고 있어요.” 그는 한국의 작은 회사 제이씨테크놀로지스가 적어도 고체산소 분야에서는 세계 최고라는 자부심을 슬쩍 내비쳤다. 최근 양씨는 베이징(북경)에 한·중 합작 ‘고체산소유한회사’를 설립해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제이씨테크놀로지스’의 고체산소는 중국 최대 컴퓨터 회사 ‘CCID’에서 생산하는 모든 제품에 내장될 예정이다. 컴퓨터에 부착되는 고체산소는 컴퓨터 전자파와 열기를 식혀준다. 중국뿐 아니라 일본, 미국, 싱가포르에서도 합작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 “이 모든 일이 결국은 저의 예술혼을 살찌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고체산소회사 CEO, 가야금 테마파크 고문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지만 그것은 모두 자기 인생의 곁가지일 뿐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중심은 오로지 “김창조·김죽파, 그리고 양승희로 이어지는 가야금의 맥(脈)이라고 했다. 가냘프지만 굳센 심지를 가진 그는 마치 흔들릴지라도 꺾이지 않는 가을날의 갈대와 같았다. 글(영암)/김후남 기자(경향신문 매거진 X부) 사진 / 박재찬 기자(경향신문 사진부)
- 생방송 MC와 문화재단 설립 준비로 바쁜 고도원의 행복한 하루
- 2004. 01. 01 화제
- “빌라 팔아서 문화재단 설립할 거예요” 아침마다 ‘고도원의 아침편지’ 읽기로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루가 행복해지는 글귀를 전해주는 사람은 바로 전 청와대 연설담당관 고도원씨. 그가 요즘 새롭게 도전하는 일은 ‘문화재단’ 설립이다. 웃음 많은 아내 덕분에 온화한 인상 생겨 나이가 많아지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살아오면서 걸어온 자취가 얼굴에 고스란히 남기 때문이다. ‘고도원의 아침편지’로 일약 유명인(?)이 된 고도원씨(51)의 얼굴에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깊숙이 새겨져 있다. 그의 웃는 얼굴은 주위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고도원씨는 아침마다 메일을 통해 행복과 사랑이 있는 아름다운 글을 전해주는 ‘행복 메신저’다. 2001년 8월부터 시작된 ‘고도원의 아침편지’(www.godowon.com)는 얼마 전에 회원 1백만 명을 넘어섰다.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과 친지들을 위해 좋은 글을 전해준다는 소박한 생각에서 시작된 것이 이렇게 커졌다. 처음 시작할 때는 청와대에서 대통령 연설담당 비서관(1급)으로 일할 때여서 많은 의혹과 불신을 받기도 했다. “정치적인 의도가 있는 게 아니냐는 억측이 많았어요. 하지만, 제가 청와대를 나오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죠. ‘고도원의 아침편지’가 가장 소중한 일이 됐어요. 지금은 ‘아침편지’가 문제없이 나오도록 시스템화하고 내실화하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청와대를 나온 후 비영리법인 ‘고도원의 아침편지’를 만들었다. 사무실을 마련했고, 직원들도 뽑았다. 메일을 통해 아침마다 행복이 가득한 좋은 글귀가 지금까지 전해지는 이유다. 흔히 돈 안되는 일을 왜 하느냐라는 질문을 많이 받지만, 자신의 일이 타인에게 행복을 전해줄 것이라 믿기 때문에 계속하고 있다. “일을 그만두고 먹고 사는 일이 급했으면 ‘아침편지’를 계속 운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내가 고깃집도 하고 있고 가족들이 제 일을 인정해주니까 계속 할 수 있었죠. 당장에 생활비가 문제되는 것도 아니고.(웃음)” 고도원씨는 아내 이야기가 나올 때 가장 행복하다. 지금이야 얼굴에 미소와 웃음이 가득하지만, 아내를 만나기 전에는 인상만 쓰고 다니던 학생이었다. 대학 시절 사진 중에는 웃는 모습이 하나도 없을 정도. 연세대학교 신문 ‘연세춘추’ 편집장을 맡았던 때는 암울했던 ‘유신시절’. 필화사건도 많이 겪었고,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면서 제적을 당했다. 10·26 사건이 일어나면서 복권했다. 혈기왕성했던 젊은 청춘에게 당시 사회는 웃음보다는 찌푸린 인상을 강요했다. 당시에는 글 하나를 쓴다는 것은 인생을 거는 일이었다. 글 하나를 잘못 썼을 때는 평생 직업을 구하기 어려워지는 시절이었으니, 글쟁이 고도원씨에게는 얼굴에 웃음이 생길 수가 없었다. 그런 대학 시절,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6~7년 정도 연애를 했으니까 오래 한 거죠.(웃음) 동갑인데, 아내는 말하면서도 웃는 여자예요. 웃음이 넘치는 아내를 만나서 제가 이렇게 변한 거죠. 친구들도 여자는 정말 잘 만났다고 부러워한다니깐요. 아내를 만나기 전에는 친구들이 함부로 말을 못 붙일 정도로 무서운 얼굴이었어요. 부부는 서로 닮는다고 하잖아요. 35년을 같이 살면서 제가 아내 얼굴을 닮은 거죠.(웃음)” 학교를 졸업하고 ‘뿌리깊은 나무’와 ‘중앙일보’ 기자를 거쳐서 청와대에 들어갔다. 고도원씨가 하고 싶었던 대통령 연설을 쓰는 일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고 수락했다. 4월 총선 NO, 정치할 생각 없다 “대통령 연설을 쓰는 것은 기자로서는 최고의 관직이라고 생각했어요. 항상 마음속으로만 품고 있었던 일이에요. 그래서 제안이 왔을 때는 ‘9급이라도 하겠다’라고 말했어요. 얼마나 행복했는지, 그 다음날부터 바로 근무를 시작했어요. 만일 정치보좌관 제안이었으면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았을걸요.” 정부가 바뀐 후에도 고도원씨는 계속 청와대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우연히 시작한 ‘고도원의 아침편지’가 무엇보다 소중해졌다. 그래서 남들은 부러워하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내년 4월에는 총선이 있다. 전국적인 유명도를 가지고 있는 그에게 정치권으로 나오라는 이야기도 많다. 하지만, 그는 정치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정치권에 진출하게 되면 ‘고도원의 아침편지’가 쓸데없는 의혹에 빠지고, 사람들도 많이 실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고도원의 아침편지’는 정치보다 더 중요한 것이 됐다. 항상 긴장하면서 살았던 청와대에서 나오면 쉴 줄 알았지만 여전히 그는 바쁘다. 전국 각지에서 쏟아지는 강연회 요청도 많아서 쉴 틈이 없다. 얼마 전에는 CBS 라디오의 ‘고도원·이효연의 행복을 찾습니다’(표준 FM, 월~토 오전 9시 5분 ~ 11시 30분) 진행도 맡았다. 방송 개편 때에는 그에게 시사프로 진행자 요청도 들어왔다. 게스트로 출연하는 것과 진행자로 일하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다. “요즘, 문화재단 만드는 준비로 시간이 없어요. 강연 요청도 많고. 그런데 CBS에서 요청한 프로그램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저에게는 새로운 영역이고, 도전이라는 생각에 시작했죠. 방송을 한 지 얼마 안 됐지만, 큰 실수는 안 했어요.(웃음)” 고도원씨의 진행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면 오래전부터 해온 사람처럼 편안해 보인다. 스튜디오에 온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모습과, 상대 진행자와 호흡을 맞추는 것도 자연스럽다. CBS 라디오 프로그램 중에서 인기가 좋아 광고가 모두 찼다고 자랑을 한다. 고도원씨는 요즘 라디오 진행말고는 다른 일정들을 모두 취소했다. 쏟아지는 강연 요청도 어렵게 뿌리치고 있다. 대신 ‘문화재단’ 설립 준비에 힘을 쏟고 있다. ‘아침편지’를 운영하면서 꿈을 꾸게 된 것이다. 문화재단은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의 재산으로 대물림 할 수 있게 만들 예정이다. 12월 중순까지 ‘아침편지’ 가족들의 조그마한 정성이 합쳐져 약 3억원 가량이 모아졌다. 문화재단 설립을 위해서는 기본 자금 5억원이 필요하다. 그는 자본금 마련을 위해 기자 시절, 주택조합으로 마련한 구기동 빌라를 팔기로 했다. “문화재단은 제 꿈으로 시작했지만, 많은 사람들의 꿈을 담아서 함께 나누고 싶어요. 공공성을 띤 문화재단의 시스템을 갖추고, 우리 사회의 문화적 자산과 가치를 높이는 일을 하고 싶어요.” 고도원씨는 문화재단을 통해 기존의 ‘책읽고 밑줄긋기 대회’ ‘아침편지 여행가족’ 프로그램을 확대할 예정이다. 그리고 장학사업을 신설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 특히 ‘깊은산속옹달샘’(가칭)이라는 명상센터 건립에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약 60여만 평 정도의 거대한 공간이 생기지 않을까요? 꿈이죠. 꿈”이라며 웃는다. 고도원씨는 자신과 타인의 행복을 꿈꾸면서 ‘고도원의 아침편지’를 시작했다. 그리고 몸집이 커지자 이제 ‘문화재단’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이렇게 남들은 어렵다고 지레 포기하는 일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누군가가 희망을 가지고 걸어가면 뒤따라가는 사람에게 희망이 생기는 것’이라는 그의 말처럼. 고도원씨의 새로운 도전, 문화재단 설립이 성공하기를 바란다. 글 / 최영진 기자 사진 / 지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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