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3,207 건 검색)
- 미 상원도 ‘주한미군 현 수준 유지’ 국방수권법안 처리
- 2024. 12. 19 07:37 국제
- .... 법안에는 “평화롭고 안정적인 한반도라는 공동의 목표를 지원하기 위해” “한국에 배치된 미군 병력을 약 2만8500명으로 유지”한다는 문구가 포함됐다. 또한 “미국의 모든 방위 능력을 사용해...
- 떠나는 주한미군 사령관 “훈련과 작전, 외부요인에 위축되지 않도록 할 것”
- 2024. 12. 12 18:07 정치|정치
- ... 하고 있다.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오는 20일 이임하는 폴 러캐머라 한·미연합군사령관(주한미군사령관·유엔군사령관 겸직)이 12일 “한미연합방위체제 하에서 훈련과 활동, 작전이 외부 요인에 의해...
- 대만 원주민·미군 위안부 이야기···VR로 체험하는 ‘타인의 세계’
- 2024. 11. 14 18:22 문화
- ... VR, 게임, 증강현실(AR) 등을 활용한 한국과 캐나다 작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이곳에선 김진아의 ‘미군 위안부 3부작’을 볼 수 있다. 1992년 벌어진 ‘윤금이 피살사건’을 모티브로 만든...
- VR권하윤김진아미군위안부국립현대미술관
- [속보] 미군 “시리아 내 이란 연계 표적 9곳 공습”
- 2024. 11. 12 07:23 국제
- ... 밝혔다. 미 중부사령부는 이날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성명에서 지난 24시간 내에 시리아에서 미군을 상대로 벌어진 여러 공격에 대한 대응 조치로 시리아 두 개 지역에 공격을 단행했다고 밝혔다. 이어...
- 중동 전운 고조
스포츠경향(총 152 건 검색)
- ‘우리 집 금송아지’ 미군 사격장에서 나온 ‘탄피 재활용’ 금송아지 가격에 ‘깜짝’! 얼마길래?
- 2024. 10. 29 20:17 연예
- KBS 오는 30일 오후 7시 40분 KBS1에서는 ‘우리 집 금송아지’ 제 77회가 방송된다. ‘우리 집 금송아지’는 54년간 미군 사격장 때문에 화약 연기가 가득했지만, 지금은 평화마을로 탈바꿈한 경기도 화성시 매향리를 찾은 경기도 화성시 매향리 평화마을은 바닷가 옆 매화가 많이 피던 작은 마을로 1951년부터 54년간 미군의 사격훈련장이 위치했다. 이곳 주민들의 오랜 노력으로 2005년 사격훈련장이 폐쇄되고, 평화를 기원하는 테마 마을이 조성돼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전국의 마을 구석구석 찾아다니면서 유물과 골동품을 감정하고, 그에 얽힌 사연을 들어본다. ‘우리집 금송아지’ 평화마을 편은 ‘매향리평화생태공원’에서 시작한다. 바다 옆, 50여 년간 포탄과 굉음이 가득했던 자리에 조성된 평화생태공원에는 매향리의 기원이 된 매화나무 숲과 생태 동식물이 가득한 습지, 공원을 둘러볼 수 있는 산책로와 정자가 마련돼 있어 주민은 물론 관광객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KBS 이뿐 아니라 곳곳에 전투기가 전시돼 있어 이곳이 과거 전쟁을 준비하던 사격장이었다는 표식도 남겨두어 이곳이 ‘평화생태공원’이라는 의미도 되짚어 보게 한다. 낙하산과 포탄으로 금송아지를 만들었다고?! 시대적 아픔을 보물로 바꾼, 지혜롭고 알뜰한(?) 매향리 사람들의 금송아지, 놀라운 감정가는? 평화마을에만 볼 수 있는 다양한 금송아지나 나와 눈길을 끌었다. 미군이 쏘아 올린 조명탄, 보조탄 등이 떨어질 때 달려 있던 낙하산은 이불과 옷감으로 재탄생하였고, 함께 떨어진 탄피들은 양동이, 떡시루, 물동이 등 생활용품으로 탈바꿈했다. 평화마을에서만 볼 수 있는 ‘낙하산 이불’과 ‘탄피로 만든 생활용품’은 희소성이 인정되어 놀라운 감정가가 나왔다는 후문이다. 이외에도 정수 항아리와 떡시루, 무궁화 그림 등 다양한 금송아지를 이번 주 ‘우리집 금송아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KBS 20대 때부터 ‘폭격장 폐쇄운동’을 벌이며 이곳을 전쟁을 준비하는 마을이 아닌 ‘평화마을’로 만든 아버님이 등장한다. 또, 포탄의 굉음 소리 속에서도 이웃들과 나눌 떡을 지었다는 어머님과 아버님과 직접 만든 양동이(?)로 드럼 연주하는 흥부자 아버님, 봉산탈춤 교육전승자로 고향 매향리에서 극단을 운영하는 아버님 등 다양한 마을 사람들이 출연한다. 이분들의 ‘금송아지’는 과연 어떤 것들일까? 화성시 매향리 평화마을 주민들의 풍성한 사연은 물론, 그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오래되고 의미 있는 물건까지. ‘우리 집 금송아지’ 경기도 화성시 매향리 평화마을 편은 10월 30일 저녁 7시 40분 KBS1에서 만날 수 있다. (일부 지역 자체 방송) KBS
- ‘강철부대3’ 신재호PD, 미군 특수 부대 섭외? “주한미군 특수전사령부 전임 사령관 만났다”
- 2023. 09. 19 15:34 연예|연예
- ENA· 채널 A ‘강철부대3’ 온라인 제작발표회 사진. ENA· 채널 A 제공. ‘강철부대3’의 신재호 PD가 미군 특수 부대 섭외 비하인드를 밝혔다. ENA· 채널 A 공동 제작 예능 프로그램 ‘강철부대3’는 19일 온라인을 통해 제작발표회를 열었다. 이날 제작발표회에는 신재호 PD와 MC 김성주, 방송인 김동현, 김희철, 윤두준, 츄, 최영재가 참석했으며, 김일중 아나운서가 사회를 맡았다. 신재호 PD는 미군 특수 부대 섭외 일화로 “역대 가장 힘든 섭외였다. 주한미군 특수전사령부 전임 사령관님도 만났다.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셔서 미국 본토 네이비씰과 그린베레의 수십 개의 미군 특수 부대에 메일을 보내주셨는데, 아무런 답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SNS를 통해서 어렵게 찾았다. 그린베레의 한 대원이 소개를 해줘서 타고타고 해서 섭외에 성공했다”며 생생한 섭외 일화를 전했다. 이어 츄는 “시즌 3에 합류하게 돼 영광이고 시즌 1, 2도 재밌게 봤다. 시즌 3에서는 전 시즌과 다르게 미션이 업그레이드됐다”며 합류하게 된 소회를 전했다. 또 김성주는 “‘강철부대’라는 프로그램이 특수부대 요원들끼리의 격렬한 신체접촉 있어서 코로나 시국이 주는 어려움이 있었다. 완벽하게 자유로워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전보다 나아진 환경에서 높은 퀄리티를 보장해 드릴 수 있다”며 촬영 소감을 밝혔다. 이어 그는 “첫 방송에서 배 타고 나갔던 그 장면, 동해상인데, 휴대전화가 터지지 않았고, 군 내 협조가 있어야 가능한 촬영이었다”라고 말해 기대감을 높였다. 츄는 응원하는 부대로 “UDT를 응원한다”고 답했으며 “밀리터리 프로그램은 언제나 심장을 뛰게 한다. 원조 밀리터리 프로그램 ‘강철부대3’가 오늘(19일) 시작된다.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라며 시청을 독려했다. 이번 시즌에는 시즌 1 우승 부대인 UDT(해군특수전전단)의 덱스, 육준서, 정종현 등을 교육시킨 UDT 교관 김경백을 비롯해 유튜브 ‘좀비트립’으로 유명한 격투기 선수 박문호가 특전사(육군특수전사령부)로 출전한다. 또 ‘세계소방관경기대회’ 아시아 최초 우승자 홍범석이 707(제 707 특수임무단) 대원으로 합류한다. 나아가 미 특수부대인 네이비씰(미군 해군 특수부대), 그린베레 (미국 육군 특수부대) 출신들도 도전장을 던져, 글로벌 대전으로 확장된 ‘강철부대3’을 만나볼 수 있다. 한편, ENA· 채널 A ‘강철부대3’는 19일(오늘) 오후 10시 30분 첫 방송 된다.
- 김동연 지사, 美대사와 캠프 험프리스 방문···경기도-미군 협력 논의
- 2023. 09. 13 20:30 생활|생활|생활
- 경기도 제공 김동연 경기도지사가 13일 필립 골드버그 주한 미국대사와 함께 평택 캠프 험프리스를 방문, 폴 러캐머라 유엔군 사령관 겸 한미연합사령관·윌러드 벌러슨 미8군사령관·라이언 키니 미7공군부사령관 등과 만나 경기도와 주한미군 간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김 지사는 “한미동맹의 상징인 캠프 험프리스에 초청해 감사하다. 미군의 안정적 정착과 임무 수행을 경기도가 적극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폴 러캐머라 사령관 등은 “주한미군이 전투태세를 유지하는 동안 이어진 경기도의 지원에 감사하다. 여러 정부 기관 등과 관계를 지속해 강화하고 있다”며 70주년 한미동맹의 굳건함을 강조했다. 경기도지사와 주한 미국대사, 유엔군 사령관, 미8군사령관, 미7공군부사령관이 한자리에 모여 협력관계를 논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용산 미군기지의 평택 이전으로 경기도가 국내 최대 미군 거주지역이 되면서 경기도와 미군의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는 양측의 공감대가 형성돼 이번 만남이 이뤄졌다고 도 관계자는 설명했다. 캠프 험프리스는 미군 해외 단일기지 가운데 세계 최대규모로 지난해 11월 한미연합사령부가 이곳으로 이전했다.
- [종합] ‘런닝맨’ 양세찬, 고향 투어 0원 투척...미군 스타일 벌칙 인과응보
- 2023. 03. 19 19:54 연예|연예
- SBS 방송 캡처 ‘런닝맨’ 양세찬이 고향 투어에 돈을 내지 않았다. 19일 오후 방송된 SBS 예능프로그램 ‘런닝맨’에서는 동두천 클라쓰 특집이 전파를 탔다. 이날 양세찬을 낳고 기른 동두천에 멤버들이 모였다. 미션 가방 속에서는 알코인 10개가 들어있었고 제작진은 하나당 만 원으로 환산하며 원하는 만큼 팀 여행경비로 각출한다고 말했다. 유재석은 “안 내도 되는 거잖아요”라고 말했고 하하는 안 낼 사람이 많다며 불신했다. 송지효는 양세찬 고향에 왔으니 여유롭게 써야 한다며 지갑을 열었고 전소민 또한 여행에는 잘 안 아낀다며 알코인을 꺼내 들었다. 김종국은 교차 패션으로 등장했고 전소민은 바지를 왜 안 갈아입냐며 매주 상의만 바뀌는 하체 단벌 신사를 지적했다. 집에 해당 바지가 10벌 있다고 말한 김종국은 숍에서 머리를 했지만 바람이 너무 불어 모자를 쓰며 멋을 냈다. 양세찬 고향 동두천에 유재석은 전소민에게 “남친 고향이야. 시댁 온 거야”라고 말했다. 양세찬은 동두천에 부대찌개, 수제버거도 유명하고 정주리, 유민상 등 코미디언을 배출했다고 말했다. 눈앞에 보이는 아파트를 가리킨 양세찬은 “저 아파트가 동두천에 처음 생긴 거다. 저기 사시는 분들 말고 다른 데 사는 사람들이 엘리베이터 타러 많이 갔다”라며 추억을 회상했다. 오늘은 ‘동두천 클라쓰’ 레이스로 양세찬 추천코스로 여행을 진행한다. 코스마다 7장의 카드 중 하나를 뽑아 비용을 계산하며 각자 제출한 비용이 랜덤으로 들어있다. 한도 초과 시 벌칙자가 추가되며 잡일로 변상하면 추가가 되지 않는다. 송지효는 많이 냈다고 말했고 내 것도 쓸만하다는 전소민에 양세찬은 안 냈다고 확신했다. 유재석은 1만 원이라도 내야 한다며 “안 내면 양아치야”라고 몰아갔고 양세찬을 보고 “너 안 냈지, 이 시끼”라고 의심했다. 여행이 시작되고 제작진은 차량에 기름이 별로 없다고 말해 멤버들의 원성을 샀다. 차에 올라 알코인을 많이 냈다는 하하에 유재석은 “거짓말하고 있네 저거”라며 믿지 않았다. 함께 믿지 않는 전소민에 하하는 “나 여기서까지 버림받으면 이제 갈 데 없는 거 알지?”라며 애처롭게 말했다. 이에 전소민은 “아니야. 내가 영원히 품어”라고 말해 웃음 짓게 했다. SBS 방송 캡처 멤버들은 미군 부대 앞 영어 간판들이 가득한 캠프 보산을 찾았다. 바버숍을 지나가던 하하는 “요즘 솔저컷이 유행입니다”라며 자신의 머리를 보여줬다. 이에 양세찬은 “모지리 컷이야”라고 말했고 유재석 또한 칠뜨기컷이라고 놀렸다. 멤버들은 단체 아이템 장착을 위해 상점을 방문했고 하하는 벽면 가득 붙은 패치를 보고 “미쳤어. 너무 행복해”라고 감탄했다. 이태원에도 이런 가게가 있지만 패치는 동두천에 훨씬 많다는 하하에 김종국은 “이태원 삐끼였으니까 네가 잘 알잖아”라고 놀렸다. 오프닝에서 지석진이 뜯어버린 한정판 미션 가방을 수선한 유재석은 40년 장신의 손길에 흡족해했다. 멤버들은 각자 미션 가방에 패치를 달고 싶다고 말했고 비싸다는 말에 망설였다. 사장님은 작은 건 3달러라고 말했고 멤버들은 눈이 돌아 폭풍 쇼핑에 나섰다. 양세찬은 동두천이 너무 좋다는 전소민과 송지효에게 “계속 재밌다고 얘기해 줘”라고 말해 웃음 짓게 했다. 핑크슈퍼맨을 가방에 박은 핑크 공주 김종국에 이어 송지효는 ‘젊지효’ 이니셜 오버로크를 요청했다. 멤버들의 쇼핑 총금액은 27,300원이었고 지석진이 7번 카드를 골라 무사히 결제 성공했다. 시끌벅적하게 끝난 쇼핑에 만족한 김종국은 “나중에 결혼하면 아내 데리고 올 거야”라고 말했고 지석진은 “언제? 나는 지금 아내 있어서 데리고 올 수 있다?”라고 자랑했다. 앞서서 토크하는 지석진을 본 유재석은 “석진이 형 뒤로 오라 그래. 앞에서 너무 설치면 시청률 뚝뚝 떨어져”라며 그를 뒤로 밀어냈다. 이때 와플 가게 사장님은 문을 열어 유재석에게 반갑게 인사하며 영어로 대화를 건넸다. 외국인 손님이 대다수인 분위기와 밝음 가득한 사람들에 멤버들은 동두천에 빠져들었다. 세찬여행 2코스는 바비큐로 양세찬은 “많이 바뀌었다. 저도 몇 군데는 좀 신기했다. 와플집도 처음 본다”라고 감탄했다. 전소민은 양세찬에게 “명절 때 항상 여기로 오는 거야? 어머님은 어디 계셔? 주거지가 어느 쪽이실까?”라며 새아기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양세찬은 웃으면서 아무말도 해주지 않아 웃음 짓게 했다. 13km 정도 달릴 수 있는 차에 양세찬은 아직 여유가 있다고 말했고 형들은 기름을 미리 주유해야 한다고 걱정했다. SBS 방송 캡처 기름 4km가 남은 상황 바비큐 가게에 도착하자 전소민은 고기는 어디서든 먹을 수 있다며 불신했다. 가게에 들어선 젊은이(하하, 양세찬, 송지효, 전소민)들은 인증샷을 찍었고 멤버들은 총 5만 원어치의 음식을 주문했다. 앞서 전소민이 찍은 사진을 구경하던 지석진은 “지효야. 너는 진짜 미모 박살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김종국은 “애한테 그런 말을 해. 미모 작살이야. 박살은 박살 났다는 거잖아”라고 나무랐고 송지효는 “박살 났다고?”라며 의아해했다. 당황한 지석진은 “내가 맛이갔겠냐? 장난친 거야”라고 말했고 하하는 “형 더는 늙지 마요. 정신 차려. 구구단 외워봐요”라며 안타까워했다. 유재석은 “지효가 늘 갑자기 전화 와서 ‘오빠 죄송해요. 아까 제가 말이 너무 없었죠. 할까 말까 하다가 고민하다 보니 상황이 자나 가서’ 이런 얘기를 한다. 아니면 과메기를 보낼 테니 주소를 보내달라고 한다. 소민이는 전화 와서 ‘오빠. 진짜 김종국은 왜 그래요?’라고 한다”라고 폭로했다. 김종국 심리 해설을 요청하는 전소민에 유재석은 “오늘 왜 그래요? 김종국 나한테”라고 말했다. 아니라고 말 못 한 전소민은 조용히 김종국 사진을 찍었고 유재석은 “전화 끊을 때 맨날 김종국한테는 얘기하지 말라고 한다”라며 극비 통화를 모두 공개했다. 전소민은 “종국 오빠라고 했다”라고 해명했고 김종국은 “김종국이 더 어울려. 괜찮아 소민이는”이라고 대인배 면모를 보였다. 이어 전소민은 하동훈(하하), 양세찬 때문에 너무 열받는다고 유재석에게 전화했고 이를 들은 두 사람은 속닥거리며 전소민을 열받게 했다. 단백질 가득한 고기가 등장하자 기분 좋아진 김종국은 스테이크를 시켰다는 유재석에 “먹어 먹어용”이라고 애교를 터트렸다. 식사가 끝나고 전소민은 카드를 골라 결제했으나 한도 초과가 떴고 해당 카드는 유재석이 알코인 1개만 낸 만 원짜리였다. 벌칙자를 만들지 않으려면 강아지 산책과 스태프 식사 서빙을 해야 한다는 말에 멤버들은 즉시 일을 시작했다. SBS 방송 캡처 하하는 콜라를 시키는 스태프에게 살찌니까 금지라고 외쳤고 전소민 또한 얼음 넣으면 싱거워지니 그냥 마시라며 귀찮음을 폭발시켰다. 이어 멤버들은 물과 앞접시는 셀프라고 차단하기 시작했고 주문이 많아지자 양세찬은 스태프에게 “공지드립니다. 모든 건 다 셀프예요. 버터, 김치 다 셀프요”라고 규칙을 만들었다. 하하 또한 점심시간 5분 남았다며 기습 브레이크타임을 공지해 웃음 짓게 했다. 이때 유재석은 스태프와 섞여 대리 식사를 하다 적발됐고 우아하게 칼질까지 해 폭소케 했다. 만족스러운 식사 후 다시 보산으로 향하던 양세찬은 3km가 남은 차에 초조해했고 형들은 미리 넣었으면 됐지 않냐고 투덜거렸다. 유재석은 카드를 잘못 고르면 주유소에서 일해야 한다고 말했고 송지효는 설마 만 원도 안 낸 사람이 있냐며 의아해했고 양세찬이 입술을 씰룩였다. 양세찬은 언덕만 넘어가면 주유소라고 말하며 “밟아도 돼요. 너무 밟아요”라고 태세전환했다. 겨우 쓸 정도만 밟으라라며 타박받은 유재석은 “내가 얼마나 아껴서 하고 있는데”라고 말했고 전소민은 엔진에 힘이 없다고 걱정했다. 초유의 기름 소진 사태에 동두천 관광객들이 걱정하는 사이 겨우 주유소에 도착했다. 유재석은 5번 카드를 골라 만 원을 선택 후 결제를 시도했고 사용 한도 초과가 떴다. 해당 카드는 0원을 낸 양세찬의 것이었다. 과거 양세찬은 “동두천 왔는데 제가 다 내야죠. 마음으로는 다 냈다”라며 한 푼도 내지 않았고 멤버들은 분노를 터트렸다. 벌칙자 추가에 송지효는 양세찬을 향해 “동두천에 왔는데 어떻게 0원을 내냐?”라고 따졌다. 이때 하하를 바라본 김종국은 “0원이 내가 볼 때는. 얘 표정 봐라. 이 XX 빵원이네”라며 맛 간 눈깔을 추가로 발견했다. 앞서 만 원도 안 낸 사람이 있냐는 말에 유독 조용하던 하하는 진짜로 0원을 냈고 김종국 2만 원, 송지효 9만 원, 불나방 전소민 마저도 6만 원을 냈었다. 잘못했다며 용서해 달라는 양세찬에 김종국은 “만 원도 안 내는 건 무슨 심보야”라며 섬뜩하게 분노했다. 유재석은 양세찬에게 “너희 동네 와서 만 원도”라며 황당해했고 시원시원하게 언덕을 올랐다. SBS 방송 캡처 와플집 사장님은 능숙한 영어를 쏟아내며 유재석, 전소민, 김종국, 지석진이 앉은 테이블에 음식을 쏟아줬고 양세찬 메뉴 또한 내어주며 편애했다. 지석진이 일어난 사이 의자에 앉은 사장님은 시럽을 요청하는 양세찬을 외면하고 김종국과 해맑게 대화를 나눠 웃음 짓게 했다. 동두천에 결혼 후 30년 정도 살았다는 사장님에 김종국은 “뭐 한 열 살에 결혼하셨나?”라며 능글거렸고 지석진은 사기꾼 같다고 경악했다. 이에 사장님은 “알 유 키딩 미?”라며 한껏 기뻐해 모두를 혼돈의 웃음으로 빠뜨렸다. 실컷 웃다 정신 차린 멤버들은 서비스 없이 가격을 물었고 사장님은 7만 원이라고 말했다. 바비큐&스테이크보다 비싼 와플에 유재석은 만 원도 안 낸 양세찬을 타박했다. 4번 카드로 결제한 멤버들은 2만 원 낸 김종국 카드로 한도초과가 떴다. 커피 집으로 향하던 양세찬은 동두천 사랑 이야기를 묻자 “고등학교 때 있었다. 그 누나 결혼해 가지고. 1세 연상이었고 사귀었는데 그 시기에 극단 생활로 연락 안 하게 돼서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개그가 재미있어서 못 만날 거 같다고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라고 이야기했다. 서울 오니 예쁜 누나들도 많다는 김종국에 그는 “어유 눈 돌아가더라고요”라고 답했다. 길과 나무뿐인 곳에 도착한 멤버들에게 양세찬은 “동두천에서 제일 유명한 커피 집이다. 자판기다”라고 말해 지석진을 분노하게 했다. 그는 “동두천 시민들 여기 다 와봤다”라며 자신감을 보였고 언론에서도 주목한 커피 명소였다. 밀크커피를 추천하는 양세찬에 김종국과 유재석은 아메리카노를 먹겠다고 말해 당황하게 했다. 밀크 커피와 핫초코가 맛있다는 말에 각자 메뉴를 골랐고 3,500원이 나왔다. 김종국은 7번 카드를 선택했고 한도 초과로 하하의 0원이 들켰다. 여유로운 커피 타임이 끝나고 벌칙자를 늘리지 않기 위해 제작진은 전 스태프에게 커피를 돌리면 된다고 말했다. 한도 초과의 주범 빵원 콤비 양세찬, 하하는 자판기 커피를 뽑기 시작했다. 50명의 웨이팅 고객에 양세찬은 “50잔 어떻게 빼. 기계도 아프다, 살려주라”라고 애원했다. 계속된 커피 뽑기에 자판기는 온음료 판매 중지가 떠 하하를 기쁘게 했다. 그러나 잠시 시간이 지나자 자판기는 은행을 재개했고 스태프들은 환호했다. SBS 방송 캡처 마지막 코스는 벌칙자 2인만 경험하게 될 미군 스타일 바버숍이다. 가장 먼저 가게에 들어온 유재석에게 제작진은 한도초과에 걸리거나 최소 금액을 긁은 사람은 벌칙에 걸린다며 머리를 자르지 않고 할 수 있는 미군 스타일을 보여줬다. 1만 원 석진, 9만 원 지효의 카드에 유재석은 고민하다 2번 카드를 골라 3만 원으로 승부수를 띄웠다. 유재석은 9만 원짜리 지효 카드를 선택해 살아남았고 잔액 6만 원이 남았다. 이어 도착한 김종국은 지석진 카드를 골라 안전하게 5천 원을 결제해 성공했고 지석진 또한 자신의 카드를 골라 남은 5천 원을 결제해 살아남았다. 금손 송지효는 자신의 카드를 골라 46,000원을 과감하게 결제해 성공했다. 잔액 14,000원이 남은 상황에 김종국과 지석진은 5천 원을 결제해 불안감에 빠졌다. 양세찬은 5천 원을 고민하다 금액 잘 결정했다는 김종국에 다시 3,500원을 외치며 지석진의 0원 카드를 선택해 벌칙에 당첨됐다. 마지막 남은 하하와 전소민 중 벌칙에 당첨된 사람은 전소민이다. 앞서 하하는 잔액 14,000원 송지효 카드를 선택했고 전소민은 지석진 카드를 선택해 한도 초과가 떠 벌칙을 받게 됐다. 양세찬은 둘이 80년대로 돌아가는 것 같다고 말했고 전소민은 꽁지를 내려달라고 부탁했고 마음에 들어 했다. 전소민은 치명미를 뽐내며 양세찬과 동두천 투어를 마무리했다. 한편 SBS 예능프로그램 ‘런닝맨’은 매주 일요일 오후 6시 20분에 방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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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한 미 평화봉사단 이야기](5)주한 미군 출신 ‘한국학 시조새’의 대를 잇다(2023. 10. 20 10:44)
- 2023. 10. 20 10:44 사회
- (제임스 버나드 팔레·2008) / 산처럼 비교적 최근에는 한류의 유행으로 한국학을 전공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다. 한국의 드라마, 영화, 아이돌 등을 좋아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어를 익히고 한국의 사회나 역사나 문학 등에 관심을 가지는 듯하다. 그런데 한국이 개발도상국이던 시절에 이미 한국의 역사나 문학을 공부한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고 궁금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 문화가 해외에 잘 알려진 것도 아니고, 심지어 한국이 잘사는 나라도 아닌데 무엇이 그들에게 한국을 공부하도록 이끌었을까?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해외(주로 미국)에서 한국학을 연구한 사람들은 대부분 주한 미군을 배경으로 한다. 주한 미군 근무를 통해 한국을 알게 됐고 이를 계기로 한국의 역사, 철학, 문학, 사회 등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한국학자의 ‘시조새’라고 할 수 있는 에드워드 와그너(Edward W. Wagner·1924~2001)도 하버드대학교 재학 중이던 1943년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휴학하고 미 육군으로 입대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1946년부터 1948년까지 한국의 미 군정에서 외교업무를 담당하는 군무원으로 근무했다. 한국 근무를 하면서 한국학에 관심을 가지게 돼 미국으로 돌아간 이후 동 대학원에서 동아시아 지역학으로 조선시대 역사를 전공한 끝에 1959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35년 넘게 하버드대학교에서 한국학을 가르쳤고, 한국학연구소를 세웠으며, 많은 후학을 양성했다. (데이비드 맥캔, 존 미들턴, 에드워드 슐츠·1979) / 하와이대학교 한국학센터 한국학자의 또 다른 시조새인 제임스 팔레(James B. Palais·1934~2006)는 미 육군 외국어학교(Army Language School in Monterey) 출신이다. 재미있는 것은 팔레가 애초에 러시아어를 공부하기를 희망했으나 그 강좌에서 밀려나는 바람에 한국어를 배우게 됐다는 점이다. 그 덕에 그는 한국과 한국의 역사에 흥미를 가져 조선시대의 유학을 연구했고, 마침내 예일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훗날 그는 워싱턴대학교에서 30년 이상 근무하며 많은 한국학자를 배출했다. 저서 <한미관계 20년사>(U.S.-Korea Relations from Liberation to Self-Reliance)로 한국현대사 연구자들에게 유명한 도널드 S. 맥도널드(Donald S. McDonald·1919~1993) 역시 주한 미군사령부에서 장교로 근무한 바 있다. 미국의 한국학 연구자들을 세대로 나눌 수 있다면 이처럼 1세대는 냉전 시대의 초입 시기 주한 미군에서 일하며 한·미관계를 담당했던 게 계기가 됐다. 한국학자의 등용문, 주한 미 평화봉사단 주한 미 평화봉사단 또한 미국 내 한국학자의 등용문(登龍門) 역할을 했다. 등용문이란 <후한서>에 처음 등장한 표현으로, 전설 속의 잉어가 통과해 용이 되는 문을 일컫는다. 한국사회에서 등용문이란 입신양명이나 출세의 관문을 뜻한다. 뚜렷한 학문적 성취를 이뤄도 등용문이라는 말을 쓴다. 평화봉사단은 단원들이 2년의 복무 기간 동안 초청국 사람들(한국 사람들)이 미국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목표로 했다. 복무 후 미국으로 돌아가서는 미국인들이 한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야 했다. 가족이나 주변 이웃들을 상대로 한국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애써 한국에서 습득한 한국어와 한껏 고취된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을 그 정도 수준에서 그치기엔 아까웠던 봉사단원들은 한국을 좀더 공부하기로 한다. 1966년 주한 미 평화봉사단 첫 기수인 K-1 단원 중 상당수는 1968년 미국으로 돌아가 한국학을 공부할 수 있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이들의 대학원 진학 행보는 모쪼록 주목할 만하다. 선배 기수인 K-1이 대학원이라는 진로를 닦아놓음으로써 후배 기수들도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었으니 말이다. <표 1>은 K-1의 한국학 관련 대학원 석·박사과정 진학 현황이다. 98명의 단원 중 약 12%에 해당하는 12명이 대학원에서 한국학을 전공하거나 한국을 주제로 연구했다. 1968년 당시만 해도 미국에서 한국학을 공부할 수 있는 대학원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한국은 경제적으로는 미국과 비교가 안 되는 개발도상국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에는 그러나 200여 년에 그치지 않는 미국의 역사와 비교했을 때 확실한 비교우위를 가진 유구한 역사가 있었다. 오랜 세월 이어져온 전통과 문명을 엿본 미국 청년들은 한국의 신비와 매력에서 좀처럼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한국 공부에 뛰어든 배경이다. 에드워드 베이커(Edward J. Baker)는 주한 미 평화봉사단 합류 시점에 이미 석사과정으로 예일대학교 로스쿨 재학생이었다. 미국으로 돌아가서는 로스쿨을 마치고 하버드대학교 박사과정에서 한국사를 공부했다. 다른 단원들도 일부는 박사과정까지 진학했고, 이윽고 한국학 전공 학자가 됐다. 대학원에 진학한 K-1 단원들이 주축이 돼 1977년 1월 서울에서 ‘전환기의 한국학(Studies on Korea in Transition)’이라는 주제의 학술대회를 열기도 했다. 하와이대학교 출판부는 그 내용을 10개의 챕터로 나눠 책으로 출판했다. 책의 주제는 <표 2>와 같다. 한국이 어디인지도 잘 모르던 미국 청년들이 1966년 봄 주한 미 평화봉사단에 합류해 더듬더듬 한국어를 배웠는데, 그 단원들이 11년 만에 한국학자가 돼 전문적인 주제의 학술대회까지 열었으니, 실로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왼쪽부터) (브루스 커밍스·2023), (돈(도널드) 베이커·2012), (카터 에커트·2008) / 글항아리 / 푸른역사 한국학의 발전을 이끈 냉전 시대 장학금 K-1 선배들이 잘 닦아놓은 길을 따라 주한 미 평화봉사단 복무 후 대학원에 진학한 사람들도 상당했다. 이때 주류가 된 대학은 3개(하버드대학교·워싱턴대학교·하와이대학교)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하버드대학교와 워싱턴대학교에서 한국학을 가르쳤던 교수들은 주한 미군과 인연이 있지만, 그 이후의 대학원생들은 주로 주한 미 평화봉사단과 관련이 있었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 경험자들을 한국학 대학원 진학으로 이끈 또 다른 배경이 있다면, 그건 바로 장학금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선 지역학(area studies)이라는 학문 분야가 부상했다. 한국학 역시 지역학의 한 분과로 역할을 했다. 미국은 냉전 상황에서 전략적으로 해외 지역의 정보를 필요로 했다. 하지만 해당 지역의 문화와 언어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가진 전문가는 턱없이 부족했다. 미국의 사회과학연구협의회(Social Science Research Council)가 이런 미 연방정부의 요구에 부응해 지역학 발전의 거점이 됐다. 해외 지역학을 지원하고, 지역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했다. 아이젠하워 시절의 미 연방정부는 소련의 스푸트니크호 발사에 대한 충격으로 1958년 국가 방위를 강화하고 중요한 국가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확대하고 증진하는 국가방위교육법(National Defense Education Act)을 제정했다. 이 법령 제6조에 의해 외국어 연구와 지역학 연구센터, 언어교육원에 연구비가 책정됐다. 미 연방정부는 연구비뿐 아니라 대학 내 지역학 연구소 설치를 직접 지원함으로써 보다 직접적이고 광범위한 지역학 제도화의 기반을 마련했다. 역대 주한 미 평화봉사단원이 대학원에서 한국학을 전공해 연구자가 될 수 있었던 이면에는 한국에 대한 이들의 학문적 호기심 외에도 지역학으로서 한국학이라는 학문이 공식 프로그램이 됐다는 점과 연구비 수령이 용이하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국가방위교육법 내 외국어교육법 덕분에 아시아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장학금을 받고 공부할 수 있었다. (왼쪽부터) (로렐 켄달·2016), (에드워드 슐츠·2014), (김승경, 마이클 로빈슨·2020) / 일조각 / 글항아리 / 워싱턴대학교 한국학센터 2세대 한국학자, 주한 미 평화봉사단 그렇게 양성된 주한 미 평화봉사단 출신 한국학자들은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해외 한국학을 이끌었다. 최근 새롭게 번역된 <한국전쟁의 기원>의 저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나 <한국인의 영성>의 도널드 베이커(Donald Baker), <제국의 후예>를 쓴 카터 에커드(Carter Eckert), <무당, 여성, 신령들>의 로렐 켄달(Laurel Kendall), <무신과 문신>의 에드워드 슐츠(Edward Shultz) 등 미국의 한국학 관련 연구자 중에서 평화봉사단 출신을 쉽게 찾을 수 있다. 2세대 한국학자로, 미국에서 한국학 연구를 이끌었던 이들 주한 미 평화봉사단 출신 연구자들은 1940~1950년대생이 많다. 이미 학계에서 은퇴했거나 은퇴를 앞두고 있지만, 지금까지도 이들의 영향력은 건재하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이 한국에서 철수한 지 4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신냉전 시대가 도래했다는 분석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미국과 소련이 과거와 같은 수위로 체제 대결을 벌이는 상황까지는 아니다. 냉전 전략으로서 지역학의 의미도 퇴색한 지 오래다. 시대 변화에 발맞춰 한국학도 애초의 모습과는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역대 주한 미 평화봉사단 출신 연구자들의 한국학 박사학위 논문 주제를 살펴보면 한국 역사, 문학, 사회학, 지리학, 인류학, 법학, 교육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다양한 변주를 보여준다. 이를테면 한국 오일장의 경로 선택(노바코브스키), 한국 시조 운율 구조(맥캔), 18세기 한국 유교와 천주교의 만남(베이커), 고려시대 무신정권 최씨 일가(슐츠) 등의 주제는 냉전 전략과는 요원해 보인다. 순수학문으로서 한국학을 발전시킨 셈이다. 이는 평화봉사단 창설 과정에서도, 지역학 지원 시점에서도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전(前) 미국 평화봉사단원들의 조직인 프렌즈 오브 코리아(Friends of Korea)와 미 한국경제연구소(Korea Economic Institute of America), 워싱턴대학교 한국학센터 및 인디애나대학교 한국학연구소가 공동으로 2020년 12월 발간 기념 세미나를 열었다. 코로나19가 ‘심각’ 단계인 시기여서 참석자들은 줌(Zoom)과 유튜브로 만났다. 온라인 세미나에서 그 시절 한국에서의 생활과 일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저자들의 모습.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Donald Baker, Edward Shultz, Clark Sorensen, Katheleen Stepnens, 문옥표, Laurel Kendall / 미 한국경제연구소(KEI) Youtube 채널 캡처 전(前) 미국 평화봉사단원들의 조직인 프렌즈 오브 코리아(Friends of Korea)와 미 한국경제연구소(Korea Economic Institute of America), 워싱턴대학교 한국학센터 및 인디애나대학교 한국학연구소가 공동으로 2020년 12월 발간 기념 세미나를 열었다. 코로나19가 ‘심각’ 단계인 시기여서 참석자들은 줌(Zoom)과 유튜브로 만났다. 온라인 세미나에서 그 시절 한국에서의 생활과 일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저자들의 모습.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Michael Robinson, Bruce Fulton, Donald Clark, Edward Baker, Linda Lewis / 미 한국경제연구소(KEI) Youtube 채널 캡처 평화봉사단과 미국에서 한국학 만들기 2020년 8월, 주한 미 평화봉사단 출신 한국학자들(도널드 베이커·에드 베이커·도널드 클락·카터 에커트·브루스 풀턴·로렐 켄달·린다 루이스·에드워드 슐츠)과 사회학자 김승경, 인류학자 문옥표, 한국학자 클락 소렌슨, 평화봉사단 출신 전 주미대사 캐서린 스티븐스 등 모두 12명이 모여 <평화봉사단과 미국에서 한국학 만들기>(Peace Corps Volunteers and the Making of Korean Studies in the United States)라는 책을 출간했다. 은퇴했거나 은퇴를 앞둔 학자들이 그동안의 성과를 정리하고 미래에 한국학이 나아갈 방향을 조망한 책이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의 활동 시작 50주년을 기념하는 2016년, 주한 미 평화봉사단 출신 한국학자들이 미 인디애나대학교에 모여 평화봉사단이 자신들의 삶과 연구에 미친 영향에 대해 동명의 콘퍼런스를 열고 논의한 내용을 정리했다. 젊은 봉사단원들이 한국에서 ‘개고생’한 에피소드 대목에선 깔깔 웃음이 터져나왔고, 한국 민주화를 위해 애쓴 이들의 회고를 읽으면서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 책에 대해 할 말이 훨씬 많지만, 50여 년간 한국학 분야를 연구한 슐츠 교수의 조언으로 글을 마치려고 한다. 현재 해외에서 한국학은 한류의 확산으로 유례없는 인기몰이 중이다. 반짝인기가 아닌 지속가능한 한국학의 발전을 위해 슐츠 교수는 지켜져야 할 내용을 6가지로 정리했다. ①고급 한국어를 연수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라. ②한국학을 공부하는 학부생들이 1년간 해외(한국)를 경험할 수 있는 컨소시엄을 구축하라. ③한국의 전(前)근대를 공부하는 학생들을 양성하고, 이들이 고전 한문의 문리를 틀 수 있도록 훈련하고 독려하라. ④성별 균형을 염두에 두라. ⑤학제 간의 다양성을 고려하라. ⑥박사 논문 연구 지원을 확대하라. 점점 위축되고 있는 한국의 인문·사회과학 분야 전체에도 해당하는 조언이다.
- [이기환의 Hi-story](69)불화 조각내 훔친 범인은…미군 사진에 힌트 있었다(2023. 02. 03 11:25)
- 2023. 02. 03 11:25 문화/과학
- 1954년 5~6월 미군 통신장교인 폴 뷰포드 팬처가 찍은 설악산 신흥사 극락보전의 내부 모습(왼쪽)과 같은해 10~11월 미 해병 중위인 리처드 브루스 락웰이 찍은 극락보전 내부 모습. 팬처의 사진에는 분명히 보이는 아미타여래삼존불 뒤의 ‘영산회상도’가 락웰의 사진에서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신흥사를 비롯한 설악산과 속초지역은 미 군정 관할 아래 1954년 11월까지 민간인통제구역이었다. 이곳을 관할한 미군 병사가 뜯어간 것이 분명하다. / 속초시립박물관 제공 2006년 3월이었습니다. 미국 LA카운티미술관 아시아미술실에 부임한 김현정 큐레이터는 소장품 중 한국 유물 파악에 나섰습니다. 그중 눈에 밟힌 불화가 한 점 있었습니다. ‘석가여래설법도(Buddha Shakyamuni Preaching to the Assembly on Vulture Peak)’라 기록된 불화였습니다. 미술관 데이터베이스에는 없고, 흑백폴라로이드 사진만 달랑 목록에 올라 있는 이 작품이 궁금해졌습니다. 부설 수장고까지 샅샅이 뒤지던 중 마침내 한쪽 구석에서 동그랗게 말려 있던 그림을 찾아냈습니다. 이역만리 미술관 수장고에 놓여 있던 설악산 신흥사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가 빛을 보는 순간이었습니다. 영조, 정성왕후, 사도세자를 기린 불화 ‘영산회상도’는 영산, 즉 고대 인도의 영축산에서 석가모니 부처가 법화경을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입니다. 긴급 보존처리 후 불화를 살펴보니 끔찍했습니다. 예리한 칼로 그어진 채 무려 6개로 조각나 있었습니다. 김현정 큐레이터는 우선 ‘영산회상도’에 적힌 화기(畵記·그림의 내력 등을 쓴 기록)의 감정을 연구자(정우택 동국대 교수)에게 의뢰했습니다. 그랬더니 의미심장한 내용이 읽혔습니다. ‘건륭 20년(1755·영조 31) 설악산 신흥사에서 영산해회(靈山海會)를 마치고 봉안한다’는 것과 ‘주상전하 이씨(영조·재위 1724~1776)와 왕비전하 서씨(정성왕후·1692~1757), 세자저하 이씨(사도세자·1735~1762)의 만수·천수무강을 기원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상하죠.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 불화가 왜 산산조각이 난 채, 그것도 미국의 미술관에까지 흘러 들어갔을까요. LA카운티미술관이 이 ‘영산회상도’를 소장하게 된 것은 1998년이었답니다. 뉴햄프셔 홉킨튼 지역에서 살던 매리 S. 프렌치라는 인물이 대리인을 통해 “아들의 집 다락방에서 중국에서 건너온 벽지 같은 그림을 발견했다”며 구입을 의뢰했는데요. 미술관 측은 이때 이 ‘영산회상도’와 함께 ‘시왕도’(죽은 자를 심판하는 10명의 왕을 그린 그림) 6점(1798년 작)까지 사들였습니다. 미술관 측은 두 유물의 ‘화기’ 등을 통해 원래 소장처가 ‘설악산 신흥사’임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신흥사 측에 ‘원소장처 여부’를 확인하는 공문을 두 번(1998·1999)이나 보냈습니다. 신흥사 측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1956년 새로 제작된 불화를 50년 이상 극락보전에 걸어놓았기에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겁니다. 팬처와 락웰의 사진에서는 신흥사 명부전에 붙어 있던 ‘시왕도’의 도난 흔적도 확인됐다. 팬처의 사진(1954년 5~6월)에는 보였던 ‘시왕도’가 락웰의 사진(1954년 10~11월)에는 없었다. 누군가 ‘영산회상도’와 함께 ‘시왕도’를 뜯어간 것이 틀림없다. / 속초시립박물관 제공 미국 현지에서의 특별한 복원 그래도 ‘시왕도’는 미술관 데이터베이스에 남아 있었는데요. ‘영산회상도’는 그나마 대접도 받지 못한 채 부설수장고 한편에 방치되다시피 한 겁니다. 뒤늦게 김현정 큐레이터의 눈에 든 ‘영산회상도’는 비로소 환골탈태합니다. 미국에 있는 한국 불화 중 가장 크고(가로 406.4㎝·세로 335.2㎝) 화격이 높은 작품이라는 찬사까지 받았습니다. 박물관 차원에서 복원작업 과정 전체를 일반에 공개하는 특별전시를 구상했습니다. 마침내 박지선 용인대 교수팀(정재문화재보존연구소)을 초청해 현지 복원하는 야심 찬 프로젝트를 펼쳐나갔습니다. 복원팀은 한국에서 1t 컨테이너 3대 분량의 장비를 가져갔습니다. 2010년 9월부터 시작된 현지 복원은 박물관 전시장이었던 도자실에 마련된 공개 작업장에서 진행했습니다. 복원팀은 영하 10도 정도의 강추위 속에서 쑨 지 10년 이상 묵힌 풀을 썼고, 비단은 수백년 된 것처럼 광선을 쏘이고 염색해 사용했습니다. 오염 제거에만 한 달이 걸렸습니다. 드러난 오염만 제거할 뿐 세월의 흔적까지 지우면 안 됐기 때문입니다. 7겹이나 되는 배접지(비단 위 그림을 고정하기 위해 뒷면에 덧대는 종이)를 제거하고 새 배접지로 다시 7겹 붙이는 작업도 두 달 이상 걸렸습니다. 무엇보다 복원팀이 신경 쓴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미 밝혔듯이 누군가 그림을 가로로 크게 두 번 칼질해 세 조각 낸 다음 윗부분만 다시 세로로 세 번 베어냈죠. 그렇게 석가모니 부처님의 어깨와 가슴을 사정없이 잘라놓았습니다. 누군가 그 커다란 불화를 ‘돌돌말이’로 가져갈 생각만 했던 겁니다. 박지선 교수는 “여섯 조각으로 남은, 참혹한 전쟁의 상처와 시련만큼은 지우고 싶었다”라고 토로했습니다. 그렇게 미국 최초로 기획한 불화 복원공개 프로젝트는 성공리에 마무리됐습니다. 2011년 12월 온전한 ‘영산회상도’가 공개됐습니다. 각종 불교 행사가 열렸고, 많은 관람객이 박물관을 찾았습니다. 마냥 박수 칠 입장이 아니었던 불교계 한국불교계 입장에서 마냥 박수만 칠 수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영산회상도’와 ‘시왕도’는 명백한 ‘불법 반출 문화재’입니다. 무엇보다 불화는 예술품이기 이전에 종교적인 예경의 대상인 ‘성보(聖寶)’라 할 수 있습니다. 여느 문화유산보다 더 본래의 자리에 있을 때 온전하게 빛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언제 사라졌을까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8월 설악산을 포함한 속초 지방은 미 군정에 편입됩니다. 민간인 출입금지구역이 되죠. 미 군정은 한국전쟁이 끝나고도 1년 4개월이 지난 1954년 11월 민정으로 이양될 때까지 이어집니다. 이때 비로소 복귀한 신흥사 스님들은 망연자실합니다. 극락보전의 ‘영산회상도’와 명부전의 ‘시왕도’ 등 사찰의 성보가 사라져버린 겁니다. 용의자는 이곳에 주둔한 미군이나 한국군 중 한 명이겠네요. 그러나 한국군은 분명 아닐 겁니다. 서양에서 기독교 성화를 훼손할 수 없듯이 한국에서 불화에 칼자국을 낼 강심장이 어디 있겠습니까. 게다가 그렇게 뜯은 ‘영산회상도’와 ‘시왕도’가 미국으로 반출되지 않았습니까. 필시 미군 중 누군가가 뜯어갔겠죠. 만약 불법 밀반출 사실이 입증되면 LA카운티미술관은 신흥사에 ‘영산회상도’와 ‘시왕도’를 반환해야 했습니다. 왜냐면 미국 연방 도난품법은 불법 반입된 유물을 유통 및 매매할 경우 재산형 및 몰수형의 처벌을 내린다고 규정했거든요. 1954년 사라진 신흥사 ‘영산회상도’는 44년이 지난 1998년 예리한 칼로 6조각 난 채 미국 LA카운티미술관에 팔렸다. 그때 ‘시왕도’ 6점도 함께 팔렸다. / 조계종 제공 그 때문에 LA카운티미술관이 1998 ·1999년 두 차례나 유물 구입과 관련해 신흥사에 공문을 보냈던 겁니다. 신흥사 측에서 어떤 답변도 하지 않았던 것도 ‘귀책사유’가 됩니다. 무엇보다 LA카운티미술관이 아낌없는 열정으로 그림의 제 모습을 찾아주었습니다. 그런 마당에 선뜻 “내가 주인이니 돌려달라”고 요구할 수 없었습니다. ‘영산회상도’와 ‘시왕도’가 미국 연방법에 저촉되는 불법 반출품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참전 미군의 사진에 담긴 비밀 사실 비장의 카드는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2005년 개관한 속초시립박물관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군 통신장교(폴 뷰포드 팬처)가 1953년 말에서 1954년 11월 사이 찍은 속초 일대의 사진 271점을 기증했는데요. 그중 신흥사 극락보전과 명부전의 내부 모습을 찍은 사진이 관심을 끌었습니다. 극락보전의 불상(목조 아미타여래삼존좌상) 뒷벽에 1755년 제작된 ‘영산회상도’가 떡하니 걸려 있었거든요. 그뿐이 아니고요. 명부전을 찍은 사진에서도 ‘시왕도’가 3점 남아 있었습니다. 팬처는 사진을 기증하면서 “1954년 5~6월에 신흥사를 방문했다”고 밝혔는데요. 속초지역의 미 군정이 그해(1954) 11월 끝난 뒤 스님들이 사찰로 복귀했다고 했죠. 그렇다면 ‘영산회상도’와 ‘시왕도’가 1954년 5~11월 사이에 반출됐다는 이야기가 되죠. 이렇게 팬처의 사진이 ‘미군=밀반출 자’임을 사실상 입증하는 자료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그렇더라도 여전히 LA카운티미술관의 공을 무시하고 반환을 주장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주저하던 그 와중에 변수가 등장했습니다. 1988년 대구 동화사 염불암에서 도난당한 19세기 불화(‘지장시왕도’) 1점이 다름 아닌 LA카운티미술관에 소장돼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 ‘지장시왕도’는 도난신고된 유물이어서 논란의 여지 없이 반환대상이 됐습니다. 2015년 1월 조계종단과 신흥사 측은 동화사 불화건을 거론하면서 신흥사의 ‘영산회상도’와 ‘시왕도’ 건도 조심스레 포함시켰습니다. 미군 통신장교인 폴 뷰포드 팬처의 사진 등을 근거로 종단 차원에서 이 문제를 공론화했고요. 2017년 2월에는 공무원, 교사, 주부, 불자 등이 주축이 된 ‘속초시 문화재제자리찾기 위원회’가 창립됐습니다. 당초 우려와 달리 LA카운티미술관 측도 예상 밖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후원금으로 운영되는 미술관이니만큼 공공 박물관의 명예를 중요시했던 겁니다. 또 한 장의 결정적인 사진 2019년 ‘결정적인 한 방’이 터졌습니다. 1953년 정전협정 직후 미 해병 중위로 속초에서 근무했던 리처드 브루스 락웰이 신흥사 극락보전과 명부전의 내부를 촬영한 사진 등을 속초시립박물관에 기증했는데요. 만약 ‘영산회상도’와 ‘시왕도’ 등의 불법 밀반출 사실이 입증되면 LA카운티미술관은 신흥사에 조건 없이 반환해야 했다. 미국 연방법이 “불법 반입된 유물을 유통 및 매매할 경우 재산형 및 몰수형의 처벌을 내린다”(도난품법)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 속초시립박물관 제공 그 속에는 팬처가 촬영한 극락보전 사진에서는 보였던 ‘영산회상도’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역시 팬처의 사진에 남아 있었던 명부전 속 ‘시왕도’도 락웰의 사진에서는 감쪽같이 자취를 감췄습니다. 락웰은 “이 사진을 찍은 것은 1954년 10~11월 사이”라고 밝혔습니다. 1954년 5~6월 팬처의 사진에는 보였던 ‘영산회상도’와 ‘시왕도’가 같은해 10~11월 락웰의 사진에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당연히 미군이 1954년 7~11월 사이에 뜯어갔다는 이야기죠. 이 대목에서 첨언할 것은 있습니다. 신흥사 ‘시왕도’는 염라대왕 등 죽은 자를 심판하는 10명의 왕을 각각 그린 작품인데요. LA카운티미술관이 그중 6점을 소장하고 있었고요. 나머지 4점도 미국 내에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누군가 ‘영산회상도’ 1점과 ‘시왕도’ 6점을 한꺼번에 뜯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이 한꺼번에 1998년 LA카운티미술관에 팔린 거고요. 어쨌든 불교계는 ‘영산회상도’와 함께 이 ‘시왕도’ 6점의 환수까지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사족을 달자면 미국 내에 흩어져 있는 나머지 4점의 환수도 추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리영희 교수의 젊을 적 ‘자랑 한마디’ 락웰은 사진뿐 아니라 신흥사에서 뜯어간 경판 1점(17세기 제작)까지 기증했습니다. ‘제반문’(諸般文·사찰에서 수행한 일상의 천도 의식과 상용의례를 기록한 것) 경판 중 87~88장에 해당합니다. 이 경판과 관련해서는 언론인이자 사회운동가인 고 리영희 교수(1929~2010)의 일화가 유명합니다. 리영희 교수는 1996년 12월 4일 법보신문에 흥미로운 회고담(‘내가 젊었을 적 잘한 한가지’)을 털어놓았는데요. “(1951년 겨울) 11사단 9연대 본부중대 병사들이 몸을 녹이려고 신흥사 안팎 여기저기서 활활 불을 태우고 있었다…. 돌과 도끼, 삽으로 빠갠 불경 목판 더미가 타고 있지 않은가…. (장교였던) 나는 부연대장에게 달려가 ‘문화재가 타고 있으니 즉시 불을 끄고 경판을 회수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했다.” 리영희 교수는 그때 불경판을 지킨 공로로 2000년 제4회 만해대상 ‘실천상’을 받았습니다. 락웰의 기증 사진에도 1954년 가을 신흥사에서 미군들이 불을 피우는 장면이 보입니다. 락웰은 이 무렵 신흥사 경판 1점을 전리품 삼아 들고 갔을 겁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8월 설악산을 포함한 속초 지방은 미 군정 치하로 편입된다. 이곳은 민간인 출입금지구역이 된다. 미 군정은 한국전쟁이 끝나고도 1년 4개월이 지난 1954년 11월까지 이어진다. 민정 이양 후 신흥사로 복귀한 스님들은 ‘영산회상도’와 ‘시왕도’ 등 성보 문화유산이 사라진 모습에 망연자실한다. 환지본처 본지풍광 각설하고 팬처와 락웰의 사진과 함께 ‘영산회상도’와 ‘시왕도’(6점) 환수 협상이 급물살을 탔습니다. ‘영산회상도’와 ‘시왕도’ 등이 미군에 의해 불법 반출된 전시 약탈문화재가 분명해진 만큼 반환은 시간문제가 됐습니다. 드디어 2020년 7월 29일 ‘영산회상도’와 ‘시왕도’가 성대한 환영식과 함께 환수됐습니다. 여섯 조각으로 무참히 잘린 채 밀반출된 ‘성보 문화유산’이 66년 만에 귀환한 겁니다. 국내 보존상태 등의 점검이 끝난 8월 28일에는 성대한 이운식과 함께 본향인 신흥사로 돌아왔는데요. 새삼 불교에서 말하는 ‘환지본처 본지풍광(還至本處 本地風光)’의 구절이 떠오르네요. ‘환지본처’는 본래의 장소로 돌아온다는 뜻이고, ‘본지풍광’은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일컫는다죠. ‘영산회상도’의 환수야말로 ‘환지본처 본지풍광’의 정수라 할 수 있겠네요.
- 이기환의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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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배를 보니 배 위에 태극기를 그려놓았어요. 태극기가 그려진 배를 때리니까(폭격하니까) 적 비행기인 줄 알았는데, 직접 보니까 호주기(미군기)였습니다. 왜 태극기 그려진 배를 때렸는지 지금도 모르겠어요.”(<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중 ‘호남지역 미군 관련 희생 사건’ 조사보고서) 전남 여수시 남면 안도리 이야포 해변에 세워진 ‘평화탑’. 희생자들의 원한을 바다에서 하늘로 올려보낸다는 의미로 탑 꼭대기에 물새 한마리를 올려뒀다. / 최규화 제공 조근자씨에게 그날의 기억은 60년이 지나도록 ‘물음표’로 남아 있다. 1950년 8월 3일 전남 여수시 남면 안도리. 스물한 살의 조씨는 이야포 해변에 정박한 피란선 한척을 봤다. 조씨의 집에서도 태극기가 보일 만큼 가까웠다. 집보다 큰 배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배 위에는 태극기가 달려 있었다. 배 위를 맴돌던 비행기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걸까. 무차별 기총사격이 시작됐다. 총탄에 맞아죽고, 바다에 떨어져 죽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비참한 광경이 펼쳐졌다. 대체 왜 피란선을 향해 폭격을 했는지, 조씨는 알 수 없었다. 이야포 미군 폭격 사건으로 150여명이 사망하고 50여명이 부상당했다. 당시 배에 타고 있던 이들은 모두 350여명. 국군의 지시에 의해 부산에서 배에 오른 피란민들이었다. 폭격이 끝나자 마을 사람들은 뗏목과 배로 생존자들을 날랐다. 생존자들은 마을 사람들의 집에 머물면서 치료를 받고 가족의 시신을 찾았다. 시신을 찾은 사람들은 해안 주변에 묻고 육지로 나갔다. 며칠 뒤 남은 시신들을 모두 배에 실어 배 전체를 불로 태웠다. “어인 날벼락인가? 아군기가 피란민을…” 누가 배에 탔는지, 누가 죽고 누가 살았는지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안도리 주민들이 아니라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피란민들이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마을 사람들의 기억에만 존재하던 이야포 미군 폭격 사건은 2010년 1기 진실화해위원회에 의해 진실이 규명됐다. 그날의 진실을 밝혀달라고 2005년 진실화해위원회의 문을 두드린 신청인은 단 한명, 사건 당시 열두 살이던 이춘송씨였다. 서울 마포에 살던 이씨의 일곱 식구는 전쟁이 일어나자 부산까지 피란을 갔다. 그곳에서 함께 피란선을 탔지만, 부모님과 두 동생은 이야포에서 폭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겨우 살아남은 누나 역시 사건 후유증으로 3년 뒤 숨을 거뒀다. 폭격 당시 소년 이춘송은 선장실 뒤쪽 물통 뒤에 숨어 아비규환의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 총소리가 날 때마다 일고여덟명씩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바다는 온통 피로 물들었다. 죽은 사람들의 피가 머리 위에서 흘러내려 이춘송의 온몸도 피에 젖었다. 아버지는 배 위에서 총에 맞고, 여동생을 껴안고 바다로 뛰어들었다가 목숨을 잃었다. 어머니와 남동생은 마을 사람들의 배를 얻어타고 오다 뭍에 도착하기 전에 숨을 거뒀다. 이춘송과 형, 누나만 다른 배를 타고 육지에 도착한 뒤, 수수밭에 숨어서 살아남았다. 이춘송씨도 그날 배에 달려 있던 태극기를 기억했다. 그는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당시, 태극기가 달려 있던 피란선과 미군 비행기의 모습을 그림으로 또렷이 그려냈다. 심지어 폭격 전 피란민들은 미군 비행기를 알아보고 손을 흔들며 반겼다고 한다. 폭격이 휩쓸고 지나간 직후에도 미군 비행기를 향해 태극기를 흔들던 사람이 있었다. “어떤 아저씨가 ‘태극기, 태극기’ 하고 소리쳤다. 어떤 사람이 조그마한 태극기 수기 하나를 갖다주었다. 이 아저씨는 태극기를 미친 듯이 흔들었지만 비행기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이 어인 날벼락인가? 아군 비행기가 피란민을 폭격하다니. 피란민을 죽이다니.”(생존자 윤학재의 수기 <아리랑 그림자>,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에서 재인용) 72년 지난 지금 ‘마지막 생존자’의 태극기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어떠한 경고도 받지 못하고 무방비의 민간인에 대한 폭격은 ‘사건경고의 원칙’은 물론이고, ‘전시의 약자에 대한 공격금지’인 제네바협약 제16조에 위반하고, 측정된 군사 목표물이 아닌 민간인과 민간시설을 공격한 행위로 헤이그규칙 제24조 및 미군 교범 제19조, 제45조 위반에 해당한다”고 사건의 불법성을 확인했다. 그리고 “(희생자들은) 정부의 소개명령에 따라 임시수도 부산에서 사건 현장까지 이동하다 사망”한 것이므로, 한국 정부 역시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규명 이후 8년이 지난 2018년, 사건 이후 68년 만에 첫 희생자 추모제가 여수 시민들에 의해 열렸다. 2020년에는 사건 현장인 이야포 해변에 평화탑을 세웠고, 지난해에는 희생자 위령사업에 대한 조례안이 여수시의회를 통과했다. 올해 8월 3일에는 처음으로 여수시가 주최하는 추모제를 열었다. 사건 이후 72년 만이다. 이야포의 진실이 사회적 기억으로 자리 잡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사이 이춘송씨도 세상을 떠났다. 1950년 피란길에 오른 일곱 식구 중 당시 열여섯 살이던 형 이춘혁씨만이 살아남았다. 진실과 함께 올 줄 알았던 화해는 아직도 닿지 않았다.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고, 누구도 보상하지 않았다. 이름 모를 생존자와 유족들은 어딘가에서 조용히 사라지고 있다. 지난 8월 18일 ‘이야포 미군폭격사건 위령사업 추진위원회’와 이춘혁씨는 2기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 신청서를 접수했다. 이들은 희생자 추가 신원 확인, 이야포 해저 피란선 추정 잔해 인양 조사, 희생자 유해 매장지 확인 및 발굴을 요구했다. 17년 전 동생 이춘송씨가 그랬듯이, 이번에는 형 이춘혁씨가 다시 한 번 진실화해위원회의 문을 두드렸다. 72년 전 그날 피란선 위에는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그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2022년 마지막 생존자 이춘혁씨가 다시 한 번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여기 대한민국 국민이 있다고, 그날 다하지 못한 국가의 책임을 이제는 다하라고 외치고 있다. ※여수 이야포 미군 폭격 사건은 1950년 8월 3일 전남 여수시 남면 안도리 이야포 해상에서 정부의 소개명령에 의해 부산에서 출발한 피란민 350여명이 타고 있던 피란선이 미군 전투기에 의해 폭격당한 사건이다. 150여명이 사망하고 50여명이 부상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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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 참전 미군 할아버지, 70년 전 첫사랑 SNS로 찾았다
- 2022. 06. 09 16:45 문화/생활
- 한국전쟁 미국인 참전용사인 91세 할아버지 듀안 만은 지난 5월 자신의 SNS를 통해 첫사랑인 일본인 여성 페기 야마구치를 찾아나섰고 두 사람은 70년 만에 재회했다. KETV 뉴스워치 7 캡처미국인 할아버지의 70년 만에 ‘첫사랑 찾기’가 재회라는 아름다운 기적을 만들어냈다. 지난 5월 올해로 91세가 된 한국전쟁 미국인 참전용사 듀안 만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내 생애 마지막으로 옛 첫사랑을 찾고 있다”며 한 동양인 여성의 모습이 담긴 낡은 사진 한 장을 공개했다. 듀안 만이 찾고 있는 이는 페기 야마구치라는 이름의 일본인 여성이었다. 그는 23세이던 1953년부터 1년 간 한국전쟁으로 일본에 주둔하던 중 공군 NCO클럽에서 야마구치를 만났다. 당시 야마구치는 클럽에서 ‘모자 체크 걸(Hat check girl, 손님의 모자나 코트를 보관하는 직원)’로 일했다. 그는 “그와 함께 춤을 추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만난 지 6개월도 되지 않은 시점에 사랑에 빠지고 연인이 됐다”고 회상했다. 두 사람은 당시 3개월 내에 결혼할 계획이었지만 만이 예정보다 두 달 일찍 제대하고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면서 야마구치를 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당시 야마구치는 임신 중이었다. 1954년 미국으로 돌아간 만은 연인 야마구치를 미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모아놓은 저축을 그의 아버지가 모두 써버리면서 난관에 부딪힌다. 또한 야마구치와 주고 받던 서신마저 끊겼는데, 일본인과의 결혼을 반대한 만의 어머니가 불태웠다는 사실마저도 나중에서야 알게되면서 두 사람은 엇갈린 인생 여정을 걷게 됐다. 첫사랑 찾기로 70년 만에 재회한 만 할아버지와 야마구치 할머니. KETV 뉴스워치 7 캡처듀안 만 할아버지의 애타는 첫사랑 찾기는 SNS에서 화제가 되면서 캐나다 밴쿠버의 히스토리채널 연구원인 테레사 웡도 주목하게 됐다. 웡은 ‘도쿄 신부가 에스카나바에서 삶을 만든다’라는 제목의 1956년 기사를 발견한 후 야마구치 할머니의 현재를 추적했다. 올해로 91세가 된 야마구치 할머니는 만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미국에 살고 있었다. 당시 만 할아버지 사이에서 생긴 아이를 잃은 후 만난 미국 해군 출신 남편과 미시간주 에스카나바에 정착했으며 슬하에 세 아들을 두고 있는 것이 밝혀졌다. 미국 KETV 뉴스워치 7은 70년 만에 이뤄진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재회 현장을 카메라에 담았다. 호흡 보조기와 지팡이에 의지한 만 할아버지는 “페기 안녕? 70년 만이야”라며 짧은 인사를 건넸고 야마구치 할머니는 “세상에! 우리가 추던 춤 기억해?”라고 말하며 그를 안아주면서 반가움을 넘어선 뭉클한 장면을 그려냈다. 두 사람의 재회에 동행한 KETV 뉴스워치 7 영상에 따르면, 만 할아버지는 “나는 너를 버리지 않았었다고 말해주기 위해 만나려고 했었다. 하지만 당신을 찾을 수가 없었다”며 70년 동안 지갑에 고이 간직했던 야마구치의 옛 사진을 꺼내 들었다. 야마구치 할머니는 “내 모든 사진을 간직해주어 너무 고맙다. 나를 사랑했음에 틀림없다”며 입맞춤으로 화답했다. 또한 야마구치 할머니가 지금의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에게 ‘듀안’이란 미들네임을 붙여줬다는 사실도 재회 후 밝혀졌다. 서로를 향한 마음은 한마음이었던 것일까. 야마구치 할머니의 아들 마이크 듀안 세덴퀴스트는 “내 이름이 어떻게 얻어졌는지 이제 알았다. 우연이 아닌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며 어머니의 로맨스에 축복을 전했다. 관련 기사가 궁금하다면? 91세 한국전쟁 美 참전용사, 70년 전 첫사랑 찾는다 참고.
- 미군들 행패 말리다 흉기에 찔린 박흥식의 새로운 소망
- 2004. 07. 01 화제
- “많은 사람들의 용기와 격려를 이제는 갚아야죠” 지난 5월 15일, 신촌의 대로변에서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미군의 행패를 말리던 박흥식씨가 미군이 휘두른 흉기에 목을 찔린 것. 이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울분을 터뜨렸다. 다행히 박흥식씨는 회복이 빨라 현재 병원에서 퇴원하고 통원치료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신경안정제 먹으면서 진정하고 있어 깜짝할 사이였다. 목이 따끔했을 뿐인데, 숨이 막힐 것만 같아서 목을 움켜잡았다. 3초 정도 지나자 목을 움켜잡은 손 사이로 시뻘건 액체가 나오기 시작했다. 한 젊은이는 길바닥에 쓰러졌다. 젊은이의 옷은 온통 피로 물들었다.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웅성거리는 사이 젊은이는 경찰차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고 한 무리의 미국인들은 경찰차에 태워져 경찰서로 옮겨졌다. 대체 미군 병사와 젊은이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지난 5월 15일 새벽 2시, 신촌 로터리 피자헛 부근에서 큰 소란이 일어났다. 술에 만취한 미군들이 대로변에서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대로변에 눕기도 하고, 지나가는 택시를 붙잡아 본네트 위에 올라가서 난동을 피우기도 했다. 무서움에 떨고 있는 택시기사는 차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미군들은 자랑스럽다는 듯 사진까지 찍어댔다. 미군들의 행패를 말리던 나이 많은 한국 상인도 미군들에 떠밀려 넘어졌다. 급기야 부근에서 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네 명의 직장인이 현장에 뛰어들었다. 다섯 명의 건장한 미군을 진정시키고, 미군의 행동을 말리고 있었다. 미군과 함께 있던 카투사 병사에게 미군들이 밀어 넘어뜨린 아저씨에게 잘못했다고 사과를 하라는 요구도 했다. 그렇게 미군의 난동은 진정되는 듯싶었다. 하지만 순식간이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미군 한 명이 직장인 중 한 명의 멱살을 잡았다. 키 180cm의 거구에서 뿜어나오는 힘으로 직장인의 멱살을 잡고 들어올리더니 20cm 길이의 칼로 목을 찔렀다. 직장인은 쓰러졌고, 미군들은 뿔뿔이 도망쳤다. 주위에 있던 한국인들이 심상치 않은 사태를 직감하고 도망가는 미국인들을 다 잡았다. 그렇게 새벽 신촌 거리에서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미군의 난동을 막기 위해 나섰다가 해를 입은 젊은이는 박흥식씨(27)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걱정 속에 큰 수술을 받았고, 경과가 좋아서 6월 중순쯤 퇴원을 했다. 그리고 현재 통원치료를 받으며 후유증을 치료하고 있다. “외과, 신경과, 정신과, 성형과 치료를 받고 있어요. 얼마 전에 외과와 신경과 치료는 끝났어요. 현재는 결과가 좋은데 6개월 후에 다시 검사를 해봐야 한대요. 그리고 칼로 찔린 부분은 6개월 후에 성형수술을 받을 예정입니다. 지금은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 상태를 치료하고 있어요. 예전에는 꿈도 안 꿨는데, 사건 이후 꿈에 놀라서 깨는 경우가 많아졌어요. 신경안정제도 먹고 있어요.” 예상외로 건강한 모습에 내심 다행이다 싶었는데 그는 아직도 사건의 후유증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세 번의 수술을 받았고, 아직도 칼에 찔린 목 부분의 턱과 귀는 마비 증상이 와서 아무것도 느껴지질 않는다고. 사건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가고 있지만, 그에게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에게 흉기를 휘둘렀던 험프리 일병은 혐의를 모두 부인하고 있는 상태. 하지만 그날 사건을 봤던 목격자들의 진술이 있고, 사건 자체가 공무 수행 중에 일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미군은 한국 법정에 설 가능성이 많다. 검찰은 살인미수로 험프리 일병을 기소하기로 방침을 정했고, 법무부도 재판권 행사 승인을 했다는 소식이다. “지난 6월 9일에 험프리 일병과 제가 대질신문을 받았어요. 대질신문을 하기 전날 너무 떨려서 가기도 싫었어요. 의사 선생님께 이야기했더니 신경안정제를 주셔서 겨우 안정이 됐죠. 저를 찌른 미군을 사건 발생 후 처음 봤는데 정말 분노가 치밀더라구요. 그 미군은 계속 혐의를 부인하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였거든요. 내 앞에서도 당당하게 날 찌르지 않았다고 거짓말하는데 정말 미치는 줄 알았어요. 미군측에서 합의를 하자고 하는데요, 죄값을 치르지도 않았는데 무슨 합의를 해요.” 박흥식씨는 이번 사건이 새로운 판례를 만들어내 만일 이와 비슷한 사건이 다시 발생했을 경우 미군이 충분한 죄값을 치렀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이번에 미군이 한국 법정에 선다면 2002년 국민을 울렸던 미순 효순 사망 사건으로 SOFA(한미주둔군지위협정)가 개정됐기 때문일 것이다. SOFA 협정에 따르면 공무중이 아닌 때에 살인미수, 마약 거래, 음주 교통사고, 강간미수 등 12개 중대범죄를 저지를 경우 기소 즉시 한국이 미군의 신병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이 협정에 따라 험프리 일병은 살인미수죄로 한국 법정에 서게 되는 것이다. 가족의 따뜻한 정 느끼는 계기 박흥식씨는 이번 사건으로 건강을 잃었다. 그리고 한창 일할 나이에(그는 하나로통신 고객센터 직원으로 현재 휴직으로 처리됐다) 일을 못하고 있다. 그리고 사건의 후유증으로 집 밖에 잘 나가지도 못하는 병도 생겼다. 이렇게 그는 많은 것을 잃었다. 하지만 그는 소중한 것 하나를 얻기도 했다. 바로 ‘가족’이다. 미국에서 공인회계사로 일하는 누나는 사건이 터지자마자 이틀 만에 한국으로 들어왔다. 5년 만에 만난 것이다. 그리고 바쁘게 지내다 보니 변변한 대화도 나누지 못했던 어머니와도 오랜 시간 같이 있을 수 있었다. 그렇게 가족은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이번 사건을 해결하는 데 누나의 힘이 가장 컸던 것 같아요. 영어를 잘하니까 미군 담당자와 이야기를 제대로 할 수 있었고, 인터넷에 제 사연을 올려놓아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걱정을 받을 수 있었거든요. 미국에서 공인회계사로 일하는 재원이기 때문에 미군측도 함부로 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박흥식씨는 동생 사건이라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누나의 모습에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현재 이 사건이 어떻게 결론 지어질지 예상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미군이 관련된 사건에서 미군과 합당한 처벌을 받은 경우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려야 사건이 마무리될지도 예상하기 어렵다. 그리고 자신의 빈자리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동료들을 위해서라도 빨리 직장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많은 것들이 그를 힘들게 하지만, 그는 아직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아직까지 오래 말하면 목이 아파서 힘들어요. 하지만 저에게 많은 용기와 힘을 주신 사람들에게 이젠 제가 갚아야죠. 앞으로 다시는 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불평등한 SOFA 협정이 개정됐으면 좋겠어요. 저를 이런 역할로 쓰기 위해서 사건이 터진 것 같아요. 다시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이젠 못 하죠.(웃음)” 이틀에 3건 정도 발생하는 미군범죄, 형사처벌 받은 경우 거의 없어 정부의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지난 1967년부터 2002년 말까지 발생한 미군(미군속 등 포함) 범죄는 대략 5만2천여 건이며, 범죄에 가담한 미군은 5만9천여 명이다. 경찰에 접수되지 않은 사건까지 감안한다면 실제로는 더욱 많은 범죄가 일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연도별로 살펴보면 1967년부터 1987년까지는 평균 1년에 1천9백72건, 하루 5건의 범죄가 발생했다. 이후 매년 감소해 1992년에는 총 발생 건수가 7백54건으로 대폭 줄었다. 2000년 들어 총 발생건수가 5백건대로 대폭 감소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01년 현재 전체 미군 범죄는 총 5백52건으로 이틀에 3건 정도다. 이중 교통 관련 범죄(도로교통법위반, 교통사고처리특례법위반)가 근래 들어 전체의 70%에 달한다. 다음은 폭력 사건으로 전체의 20% 내외를 차지한다. 반면에 살인, 강도, 강간, 방화 등의 강력사건은 매년 감소하여 살인 사건의 경우 많아야 1년에 한두 건 정도 발생하고 있다.미군범죄에 대한 재판권 행사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미군의 경우다. 미군속 등 민간인의 경우에는 우리나라가 100% 재판권을 행사하고 있는 데 반해, 미군의 경우에는 거의 재판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재판권 행사율이 낮은 이유는 우리나라가 적극적으로 재판권 행사를 하지 않는 데도 원인이 있지만, 재판권 행사를 가로막는 현행 SOFA의 구조에도 원인이 있다. 주한 미군의 경우 재판 결과 대개 집행유예나 벌금형을 선고받고 있으며(전체의 80∼90%), 실형을 받는 경우는 많아야 1년에 한두 명 정도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1차적 재판권을 포기한 범죄의 경우 미군측에서 재판권을 행사하는데, 이 경우 미군 당국은 대부분 주의, 견책 등의 행정적 징계로 끝내고 형사처벌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더욱 자세한 사항은 주한미군범죄근절 운동본부(www.usacrime.or.kr)을 참조해보자. 글 / 최영진 기자 사진 / 지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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