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5 건 검색)
- [여적] 민중의 노래
- 2023. 03. 09 20:29오피니언
- ...>에서 1832년 ‘6월 봉기’에 참여한 학생과 시민들이 바리케이드에 올라 ‘민중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 ‘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 분노한 자들의 노래(Do you hear the people sing? singing a song...
- 레미제라블민중의 노래국민의힘 전당대회윤석열 대통령
- 대통령실 “레미제라블 ‘민중의 노래’는 대통령 애창곡”
- 2023. 03. 08 19:32정치
- ... 한 뮤지컬 ‘레미제라블’ 주제가 <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Do you here the people sing?)... 목숨을 걸고 일해야 한다는 그 결기를 다지는 노래”라고 설명했다. 이 곡은 윤 대통령이 가장...
- 윤 대통령, 전당대회 등장하자 ‘분노한 민중의 노래 들리나’ 연주
- 2023. 03. 08 15:57정치
- ...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민중의 노래가 들리나. 분노한 자들의 노래가.’ 윤석열... 장면에서 나온다. 한국어로는 ‘민중의 노래’로 번역되는 곡이다. 윤 대통령은 이날...
- [문화와 삶]민중의 노래 소리가 들리는가
- 2016. 11. 17 20:21오피니언
- ... 분석했다. 작품 속 혁명 가요로 불리는 ‘민중의 노래 소리가 들리는가?(Do you hear the people... 집단에 속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결국 ‘민중의 노래 소리가 들리는가?’와 같은 민중이라는...
- 문화와 삶민중
주간경향(총 3 건 검색)
- [원희복의 인물탐구]시노래마을 대표 신재창 “시노래는 민중의 소리다”(2020. 01. 10 16:39)
- 2020. 01. 10 16:39 사회
- 서울 용산구 청파동 김남조 시인이 살던 집터에 있는 ‘예술의기쁨’(김세중미술관)에서는 매달 시노래마을이 주최하는 ‘일상의 인문학 콘서트’가 열린다. 시인과 대화하고 시를 낭송하고, 시에 곡을 붙여 노래를 부르는 행사다. 시가 사라지는 요즘, 시를 노래에 묶어 조금이라도 잡아두려는 작업이다. 사실 중국의 <시경>이나 우리의 <구지가>·<공무도하가>에서 보듯, 시의 기원은 노랫말이다. 그래서 시노래마을이 하는 일은 ‘뿌리를 이어주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노래마을 대표가 가수 신재창(43)이다. 그러나 내부에서는 대표라는 형식적인 직함보다 행정구역상 가장 작은 단위인 ‘이장’으로 부른다. 그는 ‘이장’이라는 직함은 조직의 장이 아니라 ‘일꾼’이라는 의미라고 말했다. 그의 본업은 노래를 부르는 가수지만 시(작사)도 쓰고 작곡도 한다. 1월 2일 그를 만났다. 시에 곡을 붙여 노래 부르는 행사 -시노래마을이 여는 ‘일상의 인문학 콘서트’를 소개해 달라. 지난해 11월 27일 나태주 콘서트 이후 어떤 행사를 가졌나. “좋은 시인을 초청해 그의 문학세계를 듣고 시노래를 발표하는 문학공연이다. 그동안 고은·김후란·허영자·신경림·정현종·강은교 같은 내로라하는 시인들을 모셨다. 2014년부터 시작해 한 달에 한 번 했는데 너무 추울 때나 더울 때는 하지 않는다. 지난해 11월에 했고, 올 3월에 재개할 예정이다. 개인적으로는 연말 송년 콘서트를 가졌다.” -시노래, 즉 시에 곡을 붙인 것이 500곡이 넘는다고 하는데 웬만한 시인의 시는 다 곡을 붙였겠다. 이를 모두 음반으로 만들었나. “1집은 내가 직접 노랫말까지 써서 곡을 붙였고, <노래로 만나는 시>를 6집까지 냈다. 처음에는 윤동주·신경림·곽재구 등 유명 시인의 시 여러 편을 모아 포크·록·동요 등을 붙여 음반을 만들었고, 나중에는 콘서트에 초청된 노래를 모으거나 한 사람이 쓴 여러 시에 곡을 붙인 노래 시집격으로 만들고 있다. 개인적으로 동요 만들기를 좋아한다. 물론 이렇게 만든 곡 중에 음반으로 만들지 못한 노래도 많다.” -노래를 만드는 시를 선정하는 기준이 뭔가. “사실적이면서 이미지나 스토리가 분명한 시를 선택한다. 추상적인 시는 노래로 표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인생의 깊이가 있고 삶의 희로애락이 스민 노래가 좋다.” -대중가요의 흔한 주제지만 ‘사랑’ 얘기가 진짜 인생의 희로애락이 아닐까. “(웃음) 사랑 노래도 감동적이면 좋은데 대부분 금방 식상해진다.” -가장 애착이 가는 시노래는 어떤 것인가. “다 좋아하지만, 요즘이 겨울이니 신경림 시인의 <눈 온 아침>이다. ‘잘 잤느냐고/ 오늘따라 눈발이 차다고/ 이 겨울을 어찌 나려느냐고/ 내년에도 또/ 꽃을 피울 거냐고/ 늙은 나무들은 늙은 나무들끼리/ 버려진 사람들은 버려진 사람들끼리/ 기침을 하면서 눈을 털면서’라는 시다. 짧은 시지만, 서민의 애틋한 마음을 담고 있다.” 그는 가수지만 멜로디보다 노랫말, 즉 메시지가 훨씬 중요하다고 말했다. 심지어 8 대 2 정도로 메시지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는 “노래를 들을 때 귀가 솔깃한 것은 스토리 때문이다, 멜로디만 들려주면 한두 번은 모르지만 계속 좋아하지 않는다”며 “가사 장면이 기억으로 남아 내 안에서 계속 리플레이 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것이 바로 메시지의 힘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가 시인을 초청해 진행하는 ‘일상의 인문학 콘서트’는 시인이 주인이고, 노래는 그다음이다. 대단한 ‘양보’ 혹은 ‘겸양’이다. 그는 우리나라 정통 포크 2.5~3세대쯤 된다. 우리 포크는 사랑과 이별만 아닌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노래한다. 한대수에서 시작해 송창식·김민기·한돌이 1세대라면 김광석·안치환·김현성이 2세대, 그는 2.5세대에서 3세대 사이쯤이다. 그는 “음악적 테크닉은 재즈가 뛰어나겠지만, 음악의 깊이는 포크를 따라갈 장르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멜로디보다 노랫말이 훨씬 중요 앞서 얘기했지만 시와 노래는 원래 한 뿌리였다. 그러나 서서히 분화하고 각자 전문화되면서 배타적 벽이 쌓였다. 이 분야에도 ‘고급’과 ‘저급’이라는 편견과 계급이 생겨났다. 흔히 하는 대중음악과 클래식의 구분이다. 성악하는 사람은 대중음악 가수를 저급하다고 보던 시절이 있었다. 1988년 정지용 시가 해금되자 그의 시 <향수>에 곡을 붙여 대중가수 이동원과 서울대 교수였던 성악가 박인수가 같이 불렀다. 무려 200만 장이 넘는 음반이 팔렸지만, 정작 박 교수는 성악계에서 큰 비난을 받았다. ‘근엄해야 할’ 성악가가 ‘경박스럽게’ 대중가요를 불렀다는 이유에서다. 박인수는 “음악은 삶에 즐거움을 주는 것이지 클래식만 특권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다”라고 항변했다. 결국 그는 국립오페라단에서 제명되고 말았다. 박인수는 “모차르트·베토벤·슈베르트 모두 궁정에 예속된 노예 음악가였다”는 충격 발언까지 했고, 그는 지금 ‘음악의 자유인’이라는 높은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성악가가 가곡을 부르는 것은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가곡의 사전적 의미는 ‘시인이 쓴 시에 곡을 붙인 성악곡’이다. 대중가요 역시 시에 곡을 붙인 것이 많다. 오히려 시와 대중가수의 결합이 더 널리 불린 것이 많다. 김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실버들>·<진달래꽃>·<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등이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모란동백> 등은 많은 이의 사랑을 받았다. 결국 가곡과 대중가요의 차이는 노래를 성악가가 부르냐 대중가수가 부르냐의 차이다. 시노래는 1999년~2003년 서울 대학로에서 활동하던 ‘나팔꽃’의 안치환·김현성·김원중 등 대중가수와 도종환·안도현·정호승 등의 시인이 함께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때 이육사의 <청포도>, 정지용의 <호수>, 유치환의 <깃발> 등이 노래로 만들어졌고, 유명 시인과 대중가수가 결합하면서 이들 공연 때는 대학로에 관객의 줄이 길게 이어졌다. 가수 신재창은 바로 그 절정기 마지막에 시노래 활동에 가담했다. 시노래마을 신재창 대표가 관객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성악가 박인수가 대중가요를 불러 국립오페라단에서 제명되는 시대는 이제 거꾸로 됐다. 모 방송국 노래경연에는 국제콩쿠르에서 입상한 성악가들이 앞다퉈 출전해 대중가요를 부른다. 정통 성악가와 노래방 가수가 뒤섞인 4중창단은 지금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렇다고 성악계에서 이들을 비난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는 “<목포의 눈물>은 1930년대 민중의 한이나 시대를 정확히 반영하는 대단한 작품이고, <봄날은 간다>는 아름다운 가사상을 여러 번 받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요즘 대중가요는 ‘듣는 것’보다 ‘보는 것’에 치중하는 느낌이다. 그룹 이름만 기억할 뿐 가수 이름도 모르고, 30대만 되면 은퇴하는 등 가수의 생명력도 짧다. 그나마 정통 포크를 하는 가수가 긴 생명력을 유지한다. 신재창 역시 이 점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는 “즉흥적이고 자극적인 세대라 거스를 수 없지만 <친구>나 <아침이슬>은 모두 가사가 이끌어가는 힘으로 지금까지 널리 불린다”고 말했다. 2010년 첫 음반 ‘길’ 노랫말 직접 써 신재창은 1977년 충남 서천에서 태어났다. 고교 시절 친구 따라 통기타 서클에 갔다가 기타를 배우고, 친구에게 노래를 선물하기 위해 작곡을 배웠다. 1996년 충남대 정외과에 입학해 학생운동을 했지만 ‘조용히’ 했다. 물론 이때는 학생운동이 절실할 때도 아니었다. 음악이 좋아 대학도 그만두고 언더그라운드 노래활동을 했다. 의식 있는 대학출신 노래패 ‘노찾사’나 ‘메아리’(서울대 노래패)와 어울리기도 했지만 천성이 그리 ‘전투적’이지 못했다. 그는 2014년 세월호 참사를 보고 정희성 시인의 시 <이 봄의 노래>에 세월호 아픔을 담는 노래를 만들었다. “정답던 친구 어디 가고… 만나면 부둥켜 울고 싶어서…”라는 대목이 세월호 참사 상황에 꼭 맞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노래로 촛불혁명 국면에서 ‘노래 전사’로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노래 부르는 것 말고 그는 소심할 정도로 겸손하다. 그는 “원로시인 허영자 선생이 ‘꼭 투쟁을 얘기해야 참여가 아니라 작고 낮은 것을 사랑하는 것이 참여’라는 말에 공감한다”고 말했다. 2007년 그는 생계를 위해 서울 여의도에 작업실 겸 카페 ‘더 플레이스’를 열었다. 숫자에 지친 금융인들이 즐겨 찾는 라이브카페였다. 5년여 운영했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는 2010년 첫 음반 ‘길’을 내면서 직접 노랫말까지 다 썼다. 그는 “문학적 소양은 별로 없는데 마음에 안 드는 가사의 노래를 부르기 싫어 직접 작사를 했다”고 말했다. 선배 김현성을 만나 ‘노래의 인문학’ 활동을 같이하면서 시노래를 더욱 성숙하게 키웠다. 좋아서 한 음악이지만 유명 기획사에 소속된 ‘브라운관 스타’도 아니고, 대박 난 히트곡이 없는 그에게 경제적 어려움이 뒤따랐다. 그는 주로 도서관·문학관 등 주로 책과 관련된 콘서트에 초대돼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이따금 콘서트와 몇십만원의 저작권료는 생계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인테리어 업체에서 일하고 운전도 했다. 하지만 서울에서 집은커녕 전셋집 마련도 어려웠다. 그는 2016년 고향 근처인 논산으로 내려갔다. 그는 “아이들이 크는데 도시빈민으로 사는 것이 싫어서 시골로 내려갔다”고 말했다. 음악활동 여건은 좋지 않지만 어차피 프리랜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2년 만에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요즘 ‘삶의 시 삶의 노래’ 2집을 녹음 중이다. 하지만 가장 주력하는 일은 역시 일상의 인문학 콘서트다. 그는 이 인문학 콘서트를 같이 하는 시인 다섯 분 이름을 일일이 소개했다. 윤효(전 오산중학교 교장), 오봉옥(서울디지털대 교수), 이정록(천안 청수고 교사), 오성일(KBS 인력관리실장), 류미야(서울디지털대 초빙교수) 그리고 이수열 촬영감독이다. 그는 “시노래는 민중의 소리이고, 서민의 애환”이라며 “2000년 시노래 전성기를 꼭 재연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무대에서 열광하는 가수라기보다 수줍은 시인에 가깝다. 그는 ‘돈’이 별로 안 되는 이 길을 노래 부르며 간다. 2010년 그가 직접 노랫말까지 쓴 첫 앨범 ‘길’에 수록된 대표곡 <길>은 이렇게 끝난다. “인생이란 무대 위를 걸어간다/ 어디가 길인지 모를 때가 더 많다/ 쉽고도 어렵고 멀고도 가까운/ 그 길을 난 오늘도 걷는다”
- 원희복의 인물탐구
- [내 인생의 노래] -함께 손잡고 들었던 희망의 노래(2017. 12. 26 20:01)
- 2017. 12. 26 20:01 문화/과학
- 너는 듣고 있는가? 분노한 민중의 노래 다시는 노예처럼 살 수 없다 외치는 소리! 심장 박동 요동쳐 북소리 되어 울릴 때, 내일이 열려 밝은 아침이 오리라 5년 전, 2012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다음날 아침 해는 떴는데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밤을 꼬박 샜지만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출근을 했다. 한참이 지나도 사무실에 아무도 출근하지 않기에, 하루 쉬자는 문자를 후배들에게 보냈다. 아, 이제 어찌 살아야 할까, 앞으로의 대한민국은…. 이런 걱정도 있었지만, 어떤 생각도, 그 어떤 일도 하고 싶지 않은 멍한 상태와 극도의 피로. 끝이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기분. 인권단체 소장으로부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냐는 걱정과 위로 전화를 받았고, 그 친구도 나처럼 혼자 사무실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어서 일단 만나기로 했다. 둘은 전날 개봉한 영화를 보면서 각자 과거, 현재, 미래의 늪으로 빠졌다. 1991년 대학 입학과 함께 만났던 최루탄과 지랄탄, 그리고 백골단. 눈물범벅, 콧물범벅에 눈밑 코밑에 치약을 처벅 처벅 바른 채 철없이 웃던 그때는 몰랐다. 아스팔트 학번이 될 줄이야. 4월 26일 같은 또래인 명지대 1학년 강경대가 경찰 쇠파이프에 맞아 죽었다. 그리고 며칠 뒤 전남대 박승희 열사가 분신을 했고, 이어서 김영균·천세용, 그리고 경찰의 토끼몰이에 성균관대 김귀정 열사까지.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젊은 청춘들이 하나둘 불꽃처럼 사라져 갔다. 분노는 커졌고, 지금 그 마음 절대 잊지 말자며 우리는 거리에서 수많은 노래를 가슴에 새겼고, 주먹을 쥐었었다. 문학 동아리였지만 4년 내내 마라톤 동호회처럼 전국 곳곳 아스팔트에서 뛰었다. 졸업 후 지역신문사를 거쳐 여의도 방송 공장에서 일할 때도 노동법 파업, 방송법 파업으로 거리에 있는 날이 많았다. 나이가 들고, 가족이 생기고, 스무 살 시절 가슴에 새긴 노래들은 입 밖으로 소환할 일이 없었지만, 시민이자 활동가로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구나 싶었었다. 그런데 시민군 한 명 한 명 깃발을 흔들며 이 장내로 울려 퍼지자, 20여년 이상 감춰뒀던 아픔과 슬픔, 분노가 눈물·콧물로 쏟아져 나왔다. 당황스러울 만큼 주책없이 몸 안의 모든 수분들이 밖으로 외출을 했다. 감정 제어기능 상실. 왜 그랬을까. 부끄러움이었을까, 암담함이었을까? 얼마나 더 많은 피를 흘려야 세상이 바뀌는 걸까? 박영선 전 언론개혁시민연대 국장 2012년 12월 20일 참담함으로 들었던 를 2016년 11월 박근혜 탄핵 촉구 광화문 촛불에서 다시 만났다. 그런데 껌껌한 극장에서 펑펑 울며 듣던 그 노래가 아니었다. 백만 촛불 속에서 교복 입은 딸과 아이들과 함께 손잡고 들었던 민중의 노래는 가사처럼 심장 박동을 요동치게 하는 희망의 노래였다. ‘너는 듣고 있는가, 분노한 민중의 노래를’을 새기면서 나라다운 나라, 내일의 희망을 위해.
- 내 인생의 노래
- [특집]점점 설 자리 잃어가는 ‘민중의 노래’(2013. 05. 14 11:12)
- 2013. 05. 14 11:12 문화/과학
- ㆍ시대적 현장 상황과 맞물려 변천… 1980년대 전성기 이후 90년대 후반부터 대중과 멀어져 엄밀하게 따지면 일반적인 인식대로 민중가요가 ‘운동권 노래’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민중가요에 대한 엄밀한 정의 자체가 내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민중가요에는 시위 현장에서 불리는 투쟁가를 비롯해 대학 노래패의 창작곡들이나 번안된 외국 민요, 기독교계 복음성가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범위의 노래들이 포함된다. 실제로 민중·노동운동 진영에서 나온 노래집들을 살펴보면 1970년대 포크송 계열의 대중음악 가수들의 노래도 상당수 실려 있다. 민중가요를 ‘시대적 현장’의 상황과 따로 떼어놓고 볼 수 없다는 점은 바로 이 때문이다. 지난해 6월 10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6월항쟁 25주년 국민행사’에서 ‘610시민합창단’이 ‘아침이슬’을 부르고 있다. | 연합뉴스 1970년대부터 서서히 자리잡기 시작 한국 사회에서 민중가요가 서서히 자리잡기 시작한 시점은 1970년대부터다. 이전 시대에도 민중가요로 나눌 만한 곡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전 시대부터 구전된 ‘해방가’, ‘정의가’, ‘러시아농민가’와 같은 노래들이 1960년대의 시위 현장을 중심으로 ‘데모송’이란 이름으로 자주 불렸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 ‘오 자유’, ‘우리 승리하리라’ 등의 노래가 기독교 학생운동권에서 유입되기 시작했고, 유신정권이 1975년부터 가요 심의를 강화하며 다양한 장르의 곡들을 금지곡으로 지정했지만 금지곡으로 묶인 곡들이 오히려 민중가요로 널리 불리게 되기도 했다. 대중가요로 발표한 가수 김민기의 ‘아침이슬’ 등이 운동권의 시각으로 재해석되면서 크게 유행한 것이다. 또 시인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에 곡을 붙인 동명의 노래는 1980년대 중반 이후까지도 많은 공감을 얻은 이 시대의 대표곡이었다. 민중가요가 확산된 전성기는 1980년대였다. 학생운동권의 성장과 함께 민중가요도 빠른 속도로 확산됐다. 1984년 무렵부터 ‘그날이 오면’, ‘광야에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처럼 현재까지도 유명한 노래들이 만들어졌다. 본격적인 민중가요가 등장함에 따라 이미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곡조 위에 풍자적인 가사로 바꿔 붙인 개사곡들은 비교적 줄어들었다. 19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을 전후한 시기엔 노동문제를 주제로 한 민중가요들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학생운동과 함께 운동세력의 주축이 된 노동운동 진영에서 노동자의 현실문제를 담은 곡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이 시기 ‘파업가’, ‘단결투쟁가’, ‘노동조합가’와 같은 노래들을 작곡한 운동가 김호철씨는 대표적인 노동가요 작곡가로 떠오른 이후로도 노동분야만이 아니라 민주화·빈민문제 등 다양한 문제를 다룬 민중가요를 110곡 이상 작사·작곡했다. 또 당시 ‘노동해방’을 주제로 한 많은 민중가요 중 상당수는 박노해, 백창우와 같은 시인의 시에 곡을 붙여 탄생한 곡으로 운동권 내부에서 인기를 끌었다. 1990년대 민중가요의 흐름 역시 시대적 변화와 맞물려 바뀌었다. 1990년대 초반 김영삼 정권이 출범하며 군부 집권시기는 끝나는 한편 소련의 붕괴로 현실 사회주의 국가를 이상으로 지향하던 민중민주진영(PD)이 몰락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 가장 많이 만들어진 민중가요는 민족해방진영(NL)을 중심으로 만든, 통일을 주제로 한 노래들이었다. 고려대 최동호 교수(국문학)가 한국 현대 민중가요 1700여곡을 통계적으로 분석한 연구논문을 보면 1987년에서 1992년까지 기간에 노동을 주제로 한 민중가요가 116곡 작곡돼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한 데 비해 1993년부터 1998년까지는 통일 관련 민중가요가 가장 많이 만들어지며 89곡이 작곡됐다. 1990년대 중반부터 학생운동이 침체를 겪는 동시에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노동운동의 사회적 발언권이 약화하면서 민중가요는 투쟁현장 외엔 점차 설 곳을 잃게 됐다. 대학가의 노래패와 전문적 문화운동 집단을 중심으로 민중가요의 형식을 바꾸거나 보다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정형화한 민중가요의 음악적 특색을 지우고 시대에 맞는 옷을 갈아입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1992년 결성돼 현재까지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민중가요 팀 ‘꽃다지’의 민정연 대표는 “투쟁현장은 계속 남아 있지만 대중과의 접점을 잃은 것이 민중가요가 침체를 맞은 근본적 이유”라고 말했다. 민 대표는 “꽃다지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시기는 90년대 초·중반까지였다. 현재까지도 90년대 대학을 다닌 세대를 비롯해 다양한 연령층의 팬들이 남아 있긴 하지만 갈수록 공연장을 채우는 청중의 수는 줄어들고 있다. 꽃다지는 초기부터 대중음악의 영향을 받은 세대에 맞춰 지속적으로 음악적인 변신을 시도했지만, 시대의 전반적인 흐름을 뒤집기는 역부족이었다”고 말했다. “대중과 접점 잃은 게 침체의 근본 원인” 민중가요를 부르는 음악인들이 대중과 멀어졌다고 느끼는 지점은 단순히 운동권 문화의 침체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2000년대 들어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여중생 추모 촛불집회를 시작으로 2008년 광우병 쇠고기 반대 집회에 이르기까지 보다 시민 참여적인 집회문화가 자리잡게 됐다. 이 시기 집회 현장을 중심으로 ‘Fucking USA’, ‘헌법 제1조’ 등 엄숙한 분위기를 떨친 민중가요가 선보이기도 했지만, 대부분 그 영향력은 집회장소를 벗어나지 못했다. 민중가수 연영석씨는 “사회운동의 현장이 노동, 통일문제 등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공간에서 벌어지면서 기존의 민중가요 이미지와는 다른 다양한 음악적 흐름도 여기에 합류하고 있다”면서 “하지만 대중매체에서 주로 유통되는 대중음악과 비교할 때 민중가요의 파급력은 이전 시대와 비교해 미미한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민중가요가 설 자리를 잃은 것은 대중음악과의 경쟁에서 밀린 것이라기보다는 대중음악시장이 편향된 흐름을 보였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민중가요는 1970~80년대 시민들의 자발적인 시대적 요구에 맞춰 생겨난 대중음악의 한 분야이기 때문에 대중음악의 지평을 넓힌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성공회대 김창남 교수(신문방송학)는 “지금 우리가 기억하는 민중가요는 특정한 시대의 산물로 민중가요의 비판성 덕에 현재의 대중음악인들이 현실정치와 사회운동에 참여하도록 하는 경향을 이끌어낸 것”이라며 “대중음악과 민중가요의 이분법 대신 현실의 대중음악에서 민중가요가 했던 역할과 그 수용집단을 찾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강웅식, ‘민중가요의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 최동호, ‘한국 현대 민중가요의 통계적 분석과 그 의미’. 김창남, ‘민중가요의 대중음악사적 의의’.
-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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