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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총 1,058 건 검색)

대구, 박정희 동상 추가 설치 ‘보류’…홍준표, 부정적 여론 의식했나
2025. 01. 14 20:11사회
.... 14일 경향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최근 대구시는 남구 대명동 대구대표도서관 앞에 세울 예정이던 박정희 동상의 제작을 두고 재검토에 들어갔다. 시는 이달 초쯤 동상 설치를 맡은 작가에게 해당 사실을...
[단독] 여론 의식했나, 대구시 ‘박정희 동상’ 추가 건립 전격 ‘보류’
[단독] 여론 의식했나, 대구시 ‘박정희 동상’ 추가 건립 전격 ‘보류’
2025. 01. 14 12:18사회
.... 지역 사회에서는 “시대 정신의 퇴행”이라는 비판이 계속되고 있다. 대구시가 지난해 6월 게시한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 설치 작가 모집 공고문. 대구시 홈페이지 갈무리 대구시는 당초 동대구역 광장의...
법원, 동대구역 박정희 동상 공사중지 가처분 ‘신청취지’ 바꿔야…‘이미 끝난 공사’ 이유
법원, 동대구역 박정희 동상 공사중지 가처분 ‘신청취지’ 바꿔야…‘이미 끝난 공사’ 이유
2025. 01. 07 19:16사회
... 광장에 지난달 23일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이 설치돼 있다. 백경열 기자 법원이 동대구역 ‘박정희 동상’ 설치가 위법하다며 제기된 가처분신청에서 ‘신청취지’를 변경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박정희 동상’ 지키려 ‘감시 초소’까지 검토하는 대구시
박정희 동상’ 지키려 ‘감시 초소’까지 검토하는 대구시
2025. 01. 07 10:37사회
... 예정”이라고 말했다. 현재 동대구역 광장에는 50여개의 폐쇄회로(CC)TV가 설치돼 있다. 대구시는 박정희 동상 설치 당시 동상만을 비추는 CCTV 4대를 추가로 설치한 상태다. 한편 대구지역 시민단체 등이...

스포츠경향(총 104 건 검색)

김흥국 “박정희·전두환보다 윤석열이 제일 잘해” 대통령 사수 호소
김흥국 “박정희·전두환보다 윤석열이 제일 잘해” 대통령 사수 호소
2025. 01. 03 09:51 연예
가수 김흥국. 사진 이선명 기자 57km@kyunghyang.com 가수 김흥국이 내란 우두머리 혐의를 받는 윤석열 대통령 사수를 호소했다. 김흥국은 2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 인근에서 진행된 ‘대통령 관저 앞 불법 체포 저지 집회’에 참석해 “매일 유튜브에 공격당하고 있다”며 “‘호랑나비’를 ‘계엄나비’라고 하고 어떤 ○은 ‘내란나비’라고 한다. 정말 살 수가 없다”고 밝혔다. 이어 “방송이 하나도 없다. 윤 대통령 따라 다녔다고 언론에서 날 쓰질 않는다. 이게 대한민국 언론인가. 라디오, TV, 신문에 난 나오지도 않는다”며 “‘호랑나비’ 때문에 평생을 살아왔는데 다른 연예인들은 나오고 김흥국은 안 나온다. 아주 돌아 버리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관저에 계시는 윤 대통령이 하루하루 얼마나 힘들겠냐”며 “어제도 편지를 봤는데 여러분 덕분에 끝까지 싸우겠다는 저런 분이 어딨냐”며 “이승만 대통령도 잘하셨고 박정희 대통령도 잘하셨고 전두환 대통령도 잘하셨지만 윤 대통령이 지금 제일 잘 하고 있다”고 했다. 김흥국은 “오늘부로 반대 쪽에 있는 사람들은 날 쳐 죽이려고 할 것”이라며 “저는 해병대 출신인데 해병대에서 배운 거는 나라가 어렵고 국민이 힘들 때 대한민국 해병대가 제일 앞장 서서 대한민국을 지키는 게 그게 해병대라 배웠다”고 했다. 이와 함께 “제가 알기로는 1월 6일까지니까 이번 주까지니까 우리가 막아내야 된다. 이겨내야 된다”며 “여러분이 반드시 승리할 거다. 하늘이 우리를 도울 거다”고 강조했다.
‘박정희 존경’ 김흥국, 탄핵 반대 의견?…“너나 잘해라” 날선 반응
박정희 존경’ 김흥국, 탄핵 반대 의견?…“너나 잘해라” 날선 반응
2024. 12. 10 11:09 연예
김흥국. 연합뉴스 김흥국이 윤석열 대통령 탄핵 정국 속 날선 반응을 보였다. 김흥국은 최근 유튜브 채널에서 “해병대에서 대통령 퇴진 시국선언 했더라. 어떻게 생각하냐”라는 질문에 “너나 잘해라”라고 말해 화제가 됐다. 이어 계엄령에 대한 김흥국 본인의 생각을 묻는 댓글에는 “용산만이 알고 있겠지요”라며 대답을 회피했다. “당장 해병대를 이끌고 대통령을 지켜라”라는 글에는 ‘좋아요’를 눌렀다. 이에 누리꾼들은 김흥국이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을 찬성하는 거냐, 반대하는 거냐를 두고 갑론을박을 이어가고 있다. 앞서 김흥국은 ‘그리고 하얀 목련이 필 때면’을 제목으로 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생애와 업적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자로 나섰다. 제작에 참여한 이유에 대해 김흥국은 유튜브 방송에서 “평소 마음속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두 분을 존경하며 살아왔다”며 털어놓기도 했다.
[스경X초점] “무례한 사람들”…공유, ‘멋진 박정희·성매매혼’ 인터뷰 後 불쾌감 공개?
[스경X초점] “무례한 사람들”…공유, ‘멋진 박정희·성매매혼’ 인터뷰 後 불쾌감 공개?
2024. 12. 08 16:42 연예
배우 공유, 사진제공|넷플릭스 “무례한 사람들 때문에 무해한 사람들이 피해받는 게 싫고 사회가, 자본이 사람들을 바보가 되라고 강요하고 절망에 빠지게 해서 포기하게 만드는 게 싫어. 속상해. 그래서 늘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사는 너를 응원했다.” 배우 공유가 사적으로 오고간 지인의 문자를 왜 굳이 SNS에 올렸을까. 가장 멋진 남자로 ‘나의 아버지, 마이클 조던, 그리고 박정희’라고 쓴 과거 발언을 두고 언론들과 인터뷰한 직후였다. 이뿐만 아니라 출연작 OTT플랫폼 넷플릭스 시리즈 ‘트렁크’가 성매매혼이라는 설정값에 갑론을박이 일자 이에 대한 불쾌한 심경도 노출한 후였다. 그가 발언한 대로 인터뷰가 쏟아졌고, 이에 대한 비난과 질책이 다시 이어졌다. 공유가 SNS에 올린 메시지 발췌문. 공유는 해당 인터뷰 직후인 지난 6일 SNS에 ‘트렁크’ 감상평을 남긴 지인의 메시지를 공개했다. 이 지인은 위같이 문자를 보내며 ‘트렁크’를 본 소감을 전달했다. 이에 공유는 자신이 맡은 한정원 역을 거론하며 ‘고생했어, 한정원. 행복하자!’라는 코멘트를 더했지만, 일각에선 왜 굳이 이 시점에 해당 메시지를 선정해 올렸느냐에 대한 의도에 관심이 집중됐다. 공유는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지난 2005년 한 패션지와 인터뷰 당시 ‘당신이 가장 멋지다고 생각하는 남자 세 명은?’이라는 질문에 ‘나의 아버지, 마이클 조던, 그리고 박정희’라고 답한 사실이 다시금 ‘끌올’ 되면서 논란이 됐다. 특히 지난 3일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령을 기습적으로 선포하면서 국정을 혼란, 마비 시킨 이후라 더욱 논란을 들끓었다. 더욱이 공유는 발언 이후 20여년간 ‘군사 독재 정권’ 상징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멋진 남자’로 언급한 이유나 해명을 전혀 하지 않아 그 이유에도 여러 추측이 몰렸다. ‘트렁크’ 한 장면. 논란이 커지자 공유는 지난 5일 진행된 인터뷰에서 “이런 정치적 이슈나 상황이 생길 때마다 내가 정치적으로 이용을 당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유명인이라서 이야기가 확대 해석되고 덧대어져서 마치 줄 세우기를 당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며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는 인터뷰가 아니라 패션지 인터뷰였다. 서면으로 작성된 한마디가 20년간 꼬리표처럼 이슈가 됐다. 분명한 것은 잘못된 역사의식이나 잘못된 도덕적 윤리로 살지 않았고 그게 분명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결과적으로는 실수일 수도 있고 해프닝이라 생각했다”고 정리했다. 그러나 ‘멋진 남자 박정희’ 발언 이후 생각의 변화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이뿐만 아니라 ‘트렁크’ 속 기간제 결혼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 NM이 성매매혼을 의미하는 게 아니냐는 혹평에 대해서도 불쾌함을 표시했다. 그는 “워딩 자체도 입에 담기 싫은데 성OO 관련된 거 기사 타이틀로 다는 거 보고 나라는 사람 입장에선 충격적이었다. 그렇게까지 간다는 게 좀 충격적이었다. 호불호를 너무 예상했지만 저런 부정적 시선은 일부라고 본다”라고 강조했다. 그가 지인의 “네가 나와서 하는 말이 아니라 ‘해방일지’ 이후 그렇게 곱씹어본 드라마는 없었어. ‘해방일지’는 캐릭터들의 처지가 평범해 보였을 뿐, 오히려 (‘트렁크’가) 더 드라마틱한 상황과 설정을 담고 있었다고 생각해. 그리고 외면할 감정이 없어서 보기가 편했던 것 같아. 주인공들조차 겁냈던 감정들을 직면했을 때, 비로소 시청자까지도 함께 위로받을 수 있었던 거지. 나도 그랬고”라는 문자를 공유한 것도 이를 우회적으로 지적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다. 누리꾼들은 “왜 저러나 싶음” “그냥 가만히나 있지” “갑자기 왜 저러는건지 더 이해 안 감. 원래 저런 유형이었으면 또 그러나 싶을텐데 왜 급발진?” “20살 어린 꼬꼬마라면 이해라도 하지 나이 많지 않아?” 등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인터뷰] 공유 “‘트렁크’ 호불호는 예상, ‘박정희 발언’ 논란은 회의감 들죠”
[인터뷰] 공유 “‘트렁크’ 호불호는 예상, ‘박정희 발언’ 논란은 회의감 들죠”
2024. 12. 05 14:51 연예
배우 공유, 사진제공|넷플릭스 배우 공유가 자신을 둘러싼 뜨거운 논란들에 대해 입을 열었다. 과거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가장 멋진 남자’로 박정희 전 대통령을 꼽은 것부터, OTT플랫폼 넷플릭스 시리즈 ‘트렁크’(감독 김규태) 호불호 반응, 매매혼 소재 의혹에 대해서 5일 스포츠경향과 만나 자신의 생각을 전달했다. 배우 공유, 사진제공|넷플릭스 ■“‘트렁크’ 결혼제공서비스 설정이 매매혼 의혹? 충격적이네요” ‘트렁크’는 어느 날 갑자기 호숫가에 떠오른 수상한 트렁크를 둘러싼 이야기로, 그 안에 감춰진 비밀과 함께 베일을 벗는 의문의 사건과 감정의 파고를 그린 작품이다. 결혼제공서비스 회사 NM 소속으로 ‘기간제 결혼’을 직업으로 선택한 노인지(서현진)가 여섯번째 계약 남편 한정원(공유)과 서로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그러나 공개 직후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결혼제공서비스란 설정을 두고 ‘돈을 주고 결혼을 사고 파는 일종의 매매혼이 아니냐’란 의혹부터 ‘범죄 노출 가능성이 있는 설정이다’라는 지적까지 불호 반응들이 이어졌다. 배우 공유, 사진제공|넷플릭스 “대본 처음 보고 출연을 결정했던 순간부터 작품에 관한 많은 호불호가 있을 거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매매혼이라는 반응에 대해선 다소 충격적이었어요. 그런 시각으로 이 작품을 본다는 게요. 부정적인 시선 중 일부라고 보는데요. 190여개국에서 다양한 의견이 쏟아졌고 우리가 의도하는 바대로 즐기는 사람들도 존재한다는 건 사실이고요. 전 그런 부정적인 시선으로 이 작품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출연을 결정한 거겠죠? 어디까지나 허구의 얘기고 극단적 설정을 통해 하고 싶은 얘기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함께 연기한 서현진에 대해서는 팬을 자처했다. “‘또, 오해영’의 팬이라 함께 연기해보고 싶었어요. 이번에 작업해보니 굉장히 정확하고 작품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사람이란 걸 깨달았죠. 저도 도움을 받은 것 같고요. 날카롭고 똑똑하며 섬세한 배우라 지독한 면도 있었는데, ‘저래서 살이 안 찌는구나’ 싶기도 했죠. 분명 스스로에게 손상이 있을 수 있는 연기였는데, 그 감정적인 연기를 끝까지 해내는 걸 보면서 서현진에게도 ‘지독하다’는 말을 하기도 했고요. 하하.” 배우 공유, 사진제공|넷플릭스 ■“‘멋진남자 박정희’ 언급? 신중하지 못할 때라…정치적으로 이용당한다는 생각도” 그는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여파로 2005년 한 패션지에 ‘가장 멋진 남자로 생각하는 사람은?’이란 질문에 ‘나의 아버지, 마이클 조던, 그리고 박정희’라고 적은 인터뷰가 다시금 소환돼 도마 위에 올랐다. “20년 전 인터뷰잖아요. 그런데 정치적인 이슈나 상황이 일어날 때마다 ‘끌올’(끌어 올리기)되어서 오히려 정치적으로 이용당한다는 생각까지도 들더라고요. 유명인이라서 그럴 수도 있고요. 유튜브 채널에선 제 의도와 의사를 말한 적도 없는데 여러 해석들이 덧대어져 나왔고요. 20년 넘게 연예계에 종사하면서 여러 상황을 겪고 있지만 솔직히 한 인간으로서는 이런 일에 회의감이 든 적도 있어요. 당시 그 인터뷰는 20대 초중반에 생각도 짧고 신중하지 못할 때 패션지와 서면 인터뷰를 한 건데, 그게 또 기사로 나왔떠라고요. 어떤 분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수 있었고, 또 오해의 소지가 있긴 하지만 신중함을 더 기해야했던 워딩이어야 하지 않나란 생각은 해요. 그 한마디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줄 몰랐으니까요. 하지만 잘못된 윤리적·역사적 의식을 갖고 살지 않았어요. 이틀 전 일어난 그 일(비상계엄선포)에 대해 저도 화나고 답답한 마음으로 지켜봤거든요. 결과적으로 (박정희 언급 논란은)실수일 수도 있고, 해프닝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유명세에 대한 질문도 이어졌다. “저와 같은 입장의 모든 사람들이 다 느끼는 거겠죠? 그냥 감내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데, 저도 사람이니까 가끔 뒤에선 속이 썩긴 하죠. 너무 힘들면 떠나야하지 않겠나 생각도 하고요. 여행을 다녀오거나요. 오래된 친구들이 제게 힘이 되고 동기 부여를 해주는데, 나뿐만 아니라 각자 여러 위치에서 느끼는 힘든 일이 있을 거로 생각해요. 그럴 때마다 팬들이 주는 위로가 힘이 되기도 하고요.” ‘트렁크’는 넷플릭스서 스트리밍 가능하다.
인터뷰

주간경향(총 20 건 검색)

[주목! 이 사람] “박정희는 한국 쿠데타 중심 인물”(2020. 11. 27 15:52)
2020. 11. 27 15:52 사회
ㆍ「박정희 쿠데타 개론」 펴낸 송철원 현대사기록연구원 원장 <박정희 쿠데타 개론>. 독특한 이름의 책이 최근 출간됐다. 한국현대사를 뿌리째 흔든 쿠데타의 모든 실상이 그대로 기록된 책이다. 부산 정치 파동을 불러온 이승만 쿠데타부터 5·16쿠데타, 유신쿠데타 그리고 전두환 쿠데타까지 등장하고 있다. 쿠데타의 중심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란 인물이 있었다. 저자인 송철원 현대사기록연구원 원장(78)은 서문에서 “책의 제목이 <박정희 쿠데타 개론>인데 이승만과 전두환까지 포함한 것은 박정희가 한국 쿠데타의 중심이자 최정점에 있기 때문”이라고 적어놓았다. 송 원장은 10여년 동안 자료를 모으고, 준비한 끝에 이 책을 출간했다. 서울대 정치학과 4학년 때인 1964년, 송 원장은 한일회담 반대 시위에 참여하고, 박정희 정권의 학원사찰을 폭로했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송 원장은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박정희 체제를 비판하는 글을 쓰면서 여러 고초를 겪게 된다. 1976년 건국대 교수직에서 해직됐다. 송 원장은 “박 전 대통령에 대해 개인적인 감정이 좋지 않을 수밖에 없지만, 부정적인 선입견을 없애고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해 많은 기록을 보았다”고 말했다. 송 원장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는지 샅샅이 들여다보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면서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무작정 찬양과 무작정 비판 수준을 벗어나기 위해 각주를 되도록 많이 넣었고 책의 부피가 커졌다”고 말했다. 의사였던 송 원장의 부친, 송상근 씨는 아들이 도피하고 구속되는 과정에서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한 기록물을 수집·정리하기 시작했다. 아들 때문에 철도병원 원장직을 사임한 부친은 미국으로 떠났다. 송 원장이 땅속에 묻었던 부친의 기록물은 민주화가 된 후 햇빛을 볼 수 있었다. 이 기록물은 2008년 국가기록원에 기증됐다. 이해에 송 원장은 부친의 기록 정신을 이어받아 민주화운동을 중심으로 한 기록사업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현대사기록연구원을 설립했다. <박정희 쿠데타 개론>은 현대사기록연구원에서 펴낸 하나의 성과물이라 할 수 있다. <박정희 쿠데타 개론>은 3부작이다. 1부는 박정희의 형성과 배경, 2부는 박정희 쿠데타의 배경, 3부는 박정희와 쿠데타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다. 이 책은 박 전 대통령이 쿠데타를 일으킨 그 뿌리를 찾아가고 있다. 그 뿌리에는 식민주의 역사관이 있고, 메이지 유신이 있고, 만주가 있었다. 송 원장은 “박 전 대통령이 존경한다고 하는 요시다 쇼인은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지만 정한론을 펼친 인물이었다”면서 “박 전 대통령이 밀어붙인 새마을 운동, 교련, 국민교육헌장 등은 사실상 일본을 따라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이 책에는 ‘박정희 시리즈 ①’이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다. 박정희 시리즈 ②는 <박정희와 일본>이라고 한다. ③은 <박정희와 박근혜>, ④는 <박정희와 전두환>, ⑤는 <박정희와 학생운동>, ⑥은 <박정희와 한국경제>로 예정돼 있다. <박정희와 한국경제>에는 어떤 내용이 실릴까. 송 원장은 “경제 발전은 했지만 영웅주의를 통해 한 사람의 공으로 돌린 것”이라면서 “오로지 통치자의 전지전능한 힘이 한국경제를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국민이 그 역할을 해낸 것”이라고 말했다.
주목! 이 사람
박정희 기념물, 너무 많지 않은가(2017. 11. 21 14:58)
2017. 11. 21 14:58 사회
ㆍ지금까지 세금 1310억원 쓰여… 구미시 박정희 생가에 향후 600억원 투입 11월 13일 오전, 서울 상암동 박정희기념관 앞에서 ‘박정희 대통령 동상 기증식’이 열렸다. 서울시 조례에 따라 서울시의 허가 없이 박정희기념재단에서 임의로 동상을 설치할 수 없었기에, 이날 행사는 동상을 제작한 이승만·트루먼·박정희 동상건립추진모임(동건추)에서 재단에 동상을 기증한다는 증서만 전달했다. 행사에서 좌승희 박정희기념재단 이사장은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대통령 기념관에 동상이 없는 데가 없다. 박정희 대통령뿐만 아니라 이승만,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기념관에도 동상이 있어야 제대로 된 나라”라며 서울시가 박정희 동상 설치를 허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정희재단과 보수인사들은 박정희 동상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전국 방방곡곡에 박정희 기념물은 차고 넘친다.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 해도 1310억원이 넘는 세금이 여러 박정희 기념물 제작과 관리에 투입됐다. 경북 구미시의 박정희 생가에는 향후 5년간 600억원가량의 예산이 더 들어갈 예정이다. 11월 13일 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기념관에서 열린 박정희 동상 기증식에 참석한 조각가 김영원씨가 자신이 만든 박정희 동상의 축소판 조각상을 바라보고 있다. / 김창길 기자 가장 오래된 동상은 문래공원 흉상 박정희 동상만 해도 지난해에 철원 군탄공원 동상과 서울 성북구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본관 서쪽에 위치한 동상 2기가 새로 생겼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유력 대권주자로 떠오르던 2011년은 박정희 동상의 전성기였다. 그해 9월, 경북 청도군의 새마을운동 발상지 광장에 오른손으로 무언가를 지시하는 듯한 자세의 박정희 동상이 섰다. 같은 해 11월에는 경기 성남 새마을중앙연수원 내부에 박정희 반신 동상이 섰다. 비슷한 시기 경북 구미시 박정희 생가에 설치된 박정희 동상은 높이만 5m에 달해 독재자 동상을 보는 것 같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정희 생가에서 6㎞가량 떨어진 구미초등학교까지 가는 길은 ‘박정희 등굣길’이라 불린다. 길가에는 소년 시절의 박정희 모습을 담은 동상이 설치돼 있다. 구미초 안에도 1991년 설치된 동상이 또 있다. 2년 전인 2009년에는 경북 포항 문성리 새마을운동 발상지 기념관 외부에 의자에 앉은 자세의 동상이 들어섰다. 여러 박정희 동상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서울 영등포 문래공원에 서 있는 흉상이다. 문래공원은 과거 육군 6관구사령부가 있던 자리로, 5·16 쿠데타 당시 박정희 등 쿠데타 세력이 군 지휘를 했던 곳이다. 1986년 문래공원이 개장하면서 일반에 이 흉상이 공개됐다. 동상뿐만 아니라 수십억, 수백억 원의 세금이 쓰인 기념시설도 여럿 있다. 박 전 대통령의 고향인 구미시는 박정희 기념시설이 가장 많은 곳이다. 구미시 박정희로(상모동)에 위치한 생가는 박 전 대통령이 1917년 태어나 1932년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1997년부터 박정희 생가 인근에 기념관 계획이 수립됐고, 서울 상암동에 박정희기념관 건립이 확정된 이후에는 생가 주변을 공원화하는 방향으로 계획이 변경됐다. 2013년 생가 인근에 구미시 예산 58억원이 투입된 민족중흥관이 들어선 것을 비롯해, 2013년 초까지 286억원(경북도비 25억원, 구미시비 261억원)이 생가 공원화 사업에 쓰였다. 이후에도 사업은 계속돼 2014년에는 4억3600만원, 2015년 1억9500만원, 지난해에는 4억1772만원이 박정희 생가 주변공원 사업에 쓰였다. 박정희 생가 공원은 앞으로도 꾸준히 개발될 예정이다. 구미시 예산정보에 의하면 박정희 생가 공원사업엔 올해 1월부터 2021년 12월까지 총사업비 511억원이 쓰일 예정이다. 박정희 생가 공원 관리예산은 매년 11억~13억원 수준이 쓰이다가 지난해에는 30억468여만원이 쓰였다. 올해는 총 22억5400만원가량의 예산이 박정희 생가 공원 관리예산에 배치돼 있다. 구미시 예산에는 박정희 생가 공원과 별도로 새마을운동 테마공원 예산이 있다. 2009년 김관용 경북도지사가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건의해 조성된 새마을 테마공원은 올해 12월 개장 예정이다. 테마공원을 조성하는 데에는 총 870여억원(국비 293억원, 도비 151억원, 시비 426억원)가량이 쓰였다. 구미시 예산정보에 의하면 박근혜 정부 4년간 투입된 예산은 총 339억원이며, 올해에도 테마공원 조성에 구미시 예산 27억원가량이 쓰였다. 스쳐간 인연만 있어도 기념물 생겨 인근 지자체에도 새마을운동과 관련한 기념관들이 있다. 포항시는 1971년 9월 박 전 대통령이 문성리에서 국무위원들을 대동하고 비교행정회의를 주재한 것을 새마을운동의 시작으로 보고, 문성리에 새마을운동 발상지 기념관을 짓고, 일대를 체험공원으로 조성했다. 2011년부터 3년간 총 42억원이 공원 조성에 들어갔다. 올해엔 기념관 운영비용으로 1억8700만원의 예산이 배정돼 있다. 청도군은 1969년 박 전 대통령이 수해재해지역 시찰 도중 청도읍 신도마을을 방문한 것을 새마을운동의 시작으로 보고 신도마을에 새마을운동 발상지 기념공원을 세웠다. 2009년 기념관이 건립됐고, 이후 95억원(국비 45억원, 도비 17억5000만원, 청도군비 32억5000만원)을 들여 테마공원으로 만들었다. 청도군 예산정보를 보면 매년 7억원이 조금 넘는 비용이 새마을공원과 관련해 쓰이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잠시라도 인연이 닿으면 기념시설이 생긴다. 경북 울릉군은 1962년 박정희가 하루 머물다 간 옛 울릉군수 관사에 예산 10억원을 투입해 ‘근대문화유산 전시관’으로 만들었다. 전시관 내에는 박 전 대통령의 식사장면을 재현한 밀랍인형이 제작돼 있다. 문경시는 박 전 대통령이 문경심상소학교 교사 시절 묵었던 하숙집 청운각에 시비 17억원을 들여 정비를 해 기념공간으로 만들었고, 매년 4000만원가량을 유지비로 쓴다. 강원도 양구군에는 박 전 대통령이 1955년 7월부터 1년간 육군 제5보병사단장으로 재직했던 시절의 공관을 2009년 1억1600만원을 들여 복원했다. 서울시 중구 신당동의 박정희 가옥 주변도 2013년부터 ‘역사문화공원’이라는 이름으로 개발이 진행 중이다. 박정희 기념공원이라는 구의회의 지적으로 올해는 관련 예산이 전액 삭감됐지만, 자유한국당 소속의 최창식 서울 중구청장은 ‘역사문화공원’ 추진의 뜻을 굽히지 않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기리는 기념비나 박 전 대통령의 친필이 들어간 기념비, 현판 등은 전국적으로 수백 개가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정희 대통령 전자도서관(박정희 기념재단 운영)에서 읽을 수 있는 ‘위대한 생애’에 의하면, 박 전 대통령은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전국에 1200여점의 친필 휘호를 남겼다. 지난해 12월 15일 ‘독재자’ ‘유신망령’이라는 글귀로 훼손된 제주도 5·16도로 기념비는 박 전 대통령의 수많은 친필휘호 중 하나일 뿐이다. 박근혜 정부 동안 계속된 ‘박정희 찬양’에 경북 주민들도 지친 모양새다. 11월 16일 리얼미터가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의하면, 박정희기념관 동상 건립에 반대하는 의견이 전체 응답자의 66.5%로 찬성 응답의 2배를 넘었다. 박정희 동상이 새로 들어설 예정인 서울에서는 반대 여론이 68.2%에 달했다. 대구·경북 지역에서도 박정희 동상 건립에 반대하는 의견이 54.2%로 절반을 넘었다.
[우정이야기]‘박정희 탄생 100돌 우표’ 정치적 논란(2017. 07. 18 11:08)
2017. 07. 18 11:08 경제
박정희 탄생(11월 14일) 100돌 기념우표 발행이 백지화됐다.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돌 우표’는 경북 구미시청이 지난해 4월 우정사업본부에 신청하면서 진행됐다. 지난해 5월 23일 제1차 우표발행심의위 회의에서 발행키로 결정했다. 당시 야당이던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의원들은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에서 박정희 우표 발행의 타당성을 따지면서 “박근혜 정권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우상화하고 있다”며 이의를 제기했다. 지난 5월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자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민족문제연구소 등 진보진영에서는 ‘박정희 우표’를 ‘적폐청산’의 대상으로 지목했다. 우정사업본부는 결국 지난 7월 12일 우표발행심의위원회에서 발행 여부를 재심의한 끝에 취소를 결정했다. ‘박정희 우표’처럼 제작과 관련하여 재심의 대상이 되거나 철회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특히 전 정권의 계획이 정권교체 후 재심 결정으로 번복되자 정치적인 논란은 증폭됐다. 발행 결정이 내려졌을 때는 시민단체, 국가공무원 노조 등이 “친일파, 독재자의 기념우표는 나라망신”이라며 반대했다. 우표 제작이 철회되자 이번에는 “정권의 입맛에 따라 기념우표를 철회했다”며 우표 발행을 신청한 구미시와 보수단체 등이 들고 일어났다. 지난 2016년 3월 세종문화회관 전시실에서 열린 박정희 전 대통령 특별사진전. /박민규 기자 ‘박정희’라는 이름 자체가 가장 큰 정치적 논쟁거리이자 이념의 시빗거리다. ‘그의 최대 업적’, 즉 경제발전이 민족, 인민, 인권을 훼손시키면서 얻은 대가이기 때문이다. 그는 1917년 선산(구미시로 통합)에서 태어났다. 문경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만주군으로 갔다. 군인이 되기 위해서다.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간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만주신문(1939년 3월 31일자)에 의하면 박정희가 지원서류에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라고 썼다. 당신 만주국은 일본의 괴뢰정부였다. 당연히 만주군은 광복군과 독립군을 궤멸시키는 데 앞장섰다. 광복 후에 육사 졸업과 함께 장교로 임관된 박정희는 친형 박상희의 영향을 받아 좌익분자들과 교류하면서 남로당에 입당했다. 그는 여순반란사건으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당시 한국군 수뇌부를 차지하고 있던 만주군 출신 선배들의 도움으로 감형에 이어 석방됐다. 이 같은 행적은 그에 대한 평가를 할 때면 늘 쫓아다니는 꼬리표다. 4·19혁명이 일어난 지 불과 1년 만인 1961년, 박정희를 비롯한 군부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반공태세의 강화와 부패 척결, 민생고 해결이 쿠데타의 명분이었다. 박정희는 장면 정권을 무너뜨리고, 군정을 거쳐 제3공화국을 출범시켰다. 이것은 18년에 걸친 박정희의 장기집권과 군부독재의 시작이었다. 반공과 국가 번영이라는 명분 아래 인권과 언론을 탄압했다. 급기야 1972년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꾀하는 10월유신을 선포했다. 이로써 민주주의는 완전히 부정됐다. 이런 논리를 펴는 이는 ‘박정희 우표’ 발행을 반대하는 사람들이다. 반대로 경제발전의 업적을 내세우는 사람은 수치를 내세운다. 박정희가 집권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이 88달러에 불과하던 것을 집권 말기인 1978년에 1000달러까지 끌어올렸다. 세계 최빈국에서 선진국의 문턱까지 다다르는 데 박정희 리더십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주장인 셈이다. 이 같은 팽팽한 논쟁이 박정희가 역사 속 기념인물이 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다. 국가와 문화의 상징인 우표는 적어도 논란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나 역사적 쟁점은 피해야 하는 게 마땅한 일 아닌가.
우정이야기
[표지이야기]박정희 신드롬의 종말은 오는가
[표지이야기]박정희 신드롬의 종말은 오는가(2016. 12. 19 17:30)
2016. 12. 19 17:30 정치
ㆍ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대구경북 민심까지 흔들… 김재규 재평가론도 등장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혁명을 한 것입니다.”(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11월 초, 디씨인사이드 주식 갤러리를 중심으로 ‘10·26 의거 명예회복 추진위’(이하 추진위)가 결성됐다. 추진위는 김재규 전 정보부장이 법정에서 한 최후진술 내용을 자신들이 최초로 올린 글에 담았다. 이들은 10·26의 주역인 김 전 부장을 ‘의사’(義士)로 부르며, 김 부장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서울 영등포구 문래근린공원에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 옆에 김재규 부장의 흉상을 세우겠다는 취지로 텀블벅에서 모금운동을 벌이고 있다. 김재규를 ‘대통령을 살해한 내란범’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를 앞당긴 사람’으로 보는 시각은 소리소문도 없이 퍼지고 있다. 주식 갤러리 등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김재규의 사진이 담긴 티셔츠를 입고 박근혜 하야 촛불집회에 참석했다는 이들의 인증사진이 간간이 올라온다. 김재규 얼굴이 담긴 피켓도 등장했다. 경기도 광주시 삼성공원에 위치한 김재규 묘소를 참배하는 이들의 발길도 늘어나고 있다. 2011년 11월,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경북 구미시에 위치한 박정희 대통령 생가 인근의 박정희 동상 제막식에 참가하고 있다. / 연합뉴스 김재규 묘소 참배 발길 늘어나고 있어 박근혜 정부의 실정이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역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작업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과연 좋은 지도자였는지 의문을 갖는 과정에서 김재규에 대한 긍정 여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김재규가 살아나는 것은 박정희 신드롬에 치명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김재규는 10·26의 주범일 뿐만 아니라, 중앙정보부장 시절 박 전 대통령에게 최순실의 부친 최태민의 비위사실을 알린 당사자다. 한 교수를 김재규를 ‘박정희의 충신’이라는 관점에서 재평가해야 한다며 “유신시대의 자료를 꼼꼼히 읽으면서 김재규란 사람이 자기가 잘릴 수도 있는데 박정희의 충신으로서 자기 몸을 던져서 최태민을 막으려 했던 것을 알게 됐다. 그때 최태민을 막았다면 오늘의 불행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며 “이런 내막이 최근 들어 다시 알려지면서 집회에 김재규 얼굴이 들어간 깃발을 들고 나오는 사람들이 생기는 게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10·26 명예회복 추진위를 주도하는 이들도 박근혜 정부의 실정 때문에 등을 돌린 이들이었다. 추진위의 제안자 20대 청년 한운씨를 만났다. 그는 “인생 최대의 실수를 조금이라도 상쇄하기 위해서 이렇게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2012년 대선 당시 새누리당 청년당원으로 박근혜 후보의 당선을 위해 뛰던 사람”으로 소개했다. 그는 1년 정도 대통령인수위 청년특위, 새누리당 미래세대위원회 등에서 활동하다가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에 실망하고 탈당했다고 한다. 그는 “박근혜 정부 때문에 박정희나 김재규에 대해서도 더 관심 깊게 알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설명은 이어졌다. “과거 세대는 박정희에 대한 명확한 향수가 있는 반면, 청년세대는 그 시대를 살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박정희 시대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있는 건 아니다. 나도 ‘박정희가 민주주의는 탄압했지만 박정희 시대에 GDP가 올라간 건 사실이지’ 정도의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 들어 민주주의가 탄압을 받고 표현의 자유를 빼앗기는 일들이 생겨나면서 ‘박정희 시절처럼 민주주의가 탄압받으면 이렇게 되겠구나’ 하는 것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이다.” 한국 사회를 20년 가까이 지배한 ‘박정희 신드롬’은 IMF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생겨났다는 것이 정설처럼 굳어져 왔다. 물론 IMF 이전에도 박정희 향수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4년 8월 여론조사에서 박정희는 전·현직 대통령 중 정치력과 행정력이 가장 뛰어난 대통령으로 꼽혔다. 이때만 해도 박정희에 대한 ‘신격화’는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설문 응답자의 40.5%는 박정희를 권위적인 지도자로 꼽았고, 민주적이라고 평가한 응답은 15.3%에 그쳤다. 경제분야에서 가장 공헌한 사람을 묻는 문항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은 박 전 대통령이 아니라 31.5%의 지지를 받은 정주영 현대 회장이었다. 2위는 13.0%의 선택을 받은 이병철 삼성 회장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11.8%로 3위에 그쳤다. 일반적으로 ‘박정희 신드롬’은 IMF 외환위기를 전후로 카리스마가 있는 지도자를 찾는 대중들의 요구가 반영된 현상으로 평가된다. 1997년 4월 여론조사에 따르면, 역대 대통령 평가에서 박정희는 75.9%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다른 역대 대통령들 중 10%를 넘긴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박정희의 최장기 비서실장 김정렴의 회고록 와 류철균 이화여대 교수(필명 이인화)의 박정희를 모델로 한 대하소설 이 출간된 것은 IMF 사태 직전이었다. 조갑제 대표가 쓴 박정희의 일대기 의 1권이 출간된 것은 IMF 직후였다. 물론 진보진영에서는 박정희 신드롬을 비판적으로 바라봤다. 조 대표의 책이 나올 무렵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우익세력의 논리를 그들의 언어로 반박하는 를 출간했다. 하지만 박정희 신드롬의 흐름 자체를 바꾸지는 못했다. IMF 기점으로 생겨난 박정희 신드롬 2000년대 들어서도 박정희 신드롬은 여전했다. 동아시아연구원이 2005년부터 5년마다 실시하는 ‘한국인의 정체성’ 여론조사에 따르면, 박정희 전 대통령은 1~3차 모두 역대 대통령 평가 1위를 기록했다. 지난해 광복절을 맞이해 갤럽에서 실시한 ‘우리나라를 가장 잘 이끈 대통령’ 설문에서도 박 전 대통령은 44%의 선택으로 1위를 기록했다. ‘박정희 신드롬’은 결국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을 이끈 밑거름이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당선으로 박정희 신드롬은 정점을 찍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경북 구미시에 있는 박정희 생가 방문객 통계에서 그 단면을 볼 수 있다. 2005년 4만6000명 수준이던 방문객 수는 매년 증가해 2013년 70만9000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올해까지는 감소세가 이어졌다. 올해 4분기까지 방문객은 29만4000명으로, 지난해 52만2700명의 절반을 약간 넘긴 수준이다. 특히 올해 4분기 방문객 수는 9만500명으로, 박 대통령 취임 이후 처음으로 분기당 10만명 이하로 내려갔다. 박근혜 정부 들어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호감도가 ‘2위’로 발표되는 여론조사도 나오기 시작했다. 리서치뷰는 2013년부터 올해 9월까지 주기적으로 역대 대통령 호감도 여론조사를 발표했다. 2013년 12월 조사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제치고 1위를 기록한 이후, 올해 9월 조사까지 두 전직 대통령의 순위는 그대로였다. 2013년만 해도 박근혜 대통령의 호감도는 19.0%로 2위였으나 조사를 거듭할수록 떨어졌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이제 박정희 신화의 최후의 보루라 할 수 있는 TK(대구·경북)에서도 흔들리고 있다. 11월 이후 갤럽 여론조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은 4~5%를 유지하고 있다. TK에서도 많아야 10%의 지지율에 그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 이후 신드롬 주춤 한홍구 교수는 “우리가 드디어 박정희 신드롬을 박근혜에 대한 환멸과 함께 묻어버릴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박정희와 박근혜의 관계를 과거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와 3세의 관계로 비유했다. 한 교수는 “나폴레옹 1세는 유럽에 민주주의를 퍼뜨린 계기가 됐지만 결국 황제가 됐다. 나중에 그의 조카(나폴레옹 3세)까지 황제가 되니 프랑스 사람들이 얼마나 어이가 없었겠나. 그런 반동적인 상황을 그린 것이 바로 이다. 프랑스처럼 우리 역사에서도 발전이 있으려면 (박근혜 정부와 같은) 반동을 무수히 거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 교수는 비선실세 최순실의 뿌리인 최태민에 대한 언론 보도가 쏟아지면서 박정희가 지금의 국정농단 사태에 책임이 있다는 여론이 형성되고 있다고 봤다. 한 교수는 “박정희가 최태민 문제를 처리하지 못한 책임이 이번에 드러났고, 김기춘 비서실장이나 남재준 국정원장 같은 사람들을 통해 공안통치를 해온 것이 바로 박근혜의 박정희식 통치술이다. 유치원생까지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분위기에서 이제 박정희 신드롬은 미래세대에게는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 교수는 “여전히 박정희를 신격화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겠지만, 그런 사람은 박근혜의 지지율처럼 국민의 4~5% 내외일 것”이라며 “과거 설문조사에서 박정희가 못한 점을 물으면 대체로 독재정치와 민주주의 탄압을 꼽았는데, 이제는 자식을 잘못 키웠다는 게 중요 항목으로 나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12월 13일 한 네티즌이 경기도 광주시 김재규 묘소를 참배한 뒤 인터넷에 올린 사진. / 디씨인사이드 주식 갤러리 한편, TK지역에서 오랫동안 활동해온 김태일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오래된 박정희 신화가 쉽게 무너질 것으로 보긴 어렵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TK에서 박정희는 신화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냥 ‘신’이다. 산에 있는 사찰을 돌아다니다 보면 부처님이나 관우장군의 영정을 모셔놓고 기도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런데 TK의 사찰에는 박정희·육영수 내외의 영정에 기도하고 숭배하는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TK지역에서만큼은 박근혜의 실패가 바로 박정희 신화의 붕괴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봤다. 김 교수는 “박정희와 달리 박근혜까지 ‘신’으로 생각하는 정서는 거의 없다. 하지만 박근혜는 ‘신의 딸’이었기 때문에 TK지역이 박근혜의 열렬한 버팀목이 됐던 것은 사실이다. 박근혜의 실패가 박정희에 대한 실망을 불러오고 있는 건 맞지만 박정희 신화에 큰 금이 갔다고 보기엔 아직 성급하다”고 말했다. 영남대에서 김 교수는 현대한국정치론을 강의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통치는 빠질 수 없는 부분이다. 김 교수는 수업 중에도 박정희 신화의 그림자를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수업에서 ‘유신체제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운 권위주의 체제’라는 취지로 강의를 한다. 하지만 TK 출신 학생들은 어렸을 때부터 현재 자신들이 누리는 번영은 모두 박정희의 성과라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기 때문에 박정희에 대한 존중감이 기본적으로 있다. 이런 학생들이 내 강의를 듣고 놀라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밥상머리 교육 등 사회화 과정의 차이인지 다른 지역 학생들과는 확연한 차이가 느껴졌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TK지역까지 박정희 신화를 걷어내기 위해서는 ‘김재규 재평가론’으로는 어렵다고 봤다. TK 정서상 김재규를 긍정적으로 언급하는 것 자체가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대화를 열 수 없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박정희의 갑작스런 죽음이 동향 사람들의 연민과 동정을 자아냈고, 이를 경제발전 신화와 맞물려 수십년간 확대 재생산돼온 것이 박정희 신화의 실체라고 판단했다. “TK지역 박정희 신화 붕괴하지 않을 것” 김 교수는 김부겸 민주당 의원이 2014년 대구시장 선거에서 박정희 컨벤션센터 공약을 낸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박정희에 대한 좋은 ‘기억’과 박정희 신에 대한 ‘믿음’만 가진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토론과 설득이 아니다. 만주군 경력이나 유신독재 등 실제 박정희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현실에서 보고 느끼게 해주는 것이 ‘역사적 재평가’로서는 훨씬 적절한 방법이라는 게 김 교수의 설명이다. 김 교수는 “TK에서는 박정희에 대해 토론하고 따지기보다 맹목적으로 ‘훌륭한 분이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평가가 많다. 다른 지역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이곳에서 민주화 세력은 박정희에 대한 ‘믿음’과 싸워야 하니까 미치고 펄쩍 뛰겠다. 그래서 현실 공간에 박정희의 잘잘못을 모두 나열한 공간을 마련해서 조금이라도 신화를 역사 영역으로 끌어당기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한홍구 교수도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준비하고 있다. 한 교수 등 지식인들은 지난해 10월 편찬 계획을 밝혔다. 한 교수는 “박정희는 이 열전에 당연히 들어가야 할 집중검토 대상자다. 박정희와 이승만만큼 반헌법행위를 한 사람이 없다. 다만 그들을 전면에 내세웠을 때 열전 작업이 현실적으로 어려울 수도 있다. 우리가 박정희를 반헌법행위자로 선언할 역량이 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라고 말했다. 한 교수는 “그래도 박정희가 박근혜보다는 낫다”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 그는 “박정희에게는 그래도 충신들이 있었다. 김재규 중정부장이나 박승규 민정수석처럼 자신의 직을 걸고 최태민 보고서를 올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김정렴 비서실장도 다른 비서관들에게 최태민과 어울리지 말라고 지시할 정도로 유신정권의 핵심 참모들은 분별력과 상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드러난 바로 볼 때 박근혜 정권의 참모 중에 최순실 문제에 대해 올바른 소리를 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 아니냐”며 씁쓸해했다. 김재규의 변호사 안동일 “김재규는 10·26 정신이 헌법에 들어갈 것이라 말했다” 오랫동안 진보-보수를 가릴 것 없이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을 긍정적으로 보는 여론은 거의 없었다. 보수 세력은 김재규를 ‘박정희를 죽인 사람’으로 생각했고, 진보 세력은 ‘부마항쟁으로 유신정권을 몰아낼 기회를 박탈한 사람’으로 취급했다.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던 안동일 변호사는 “김재규가 10·26 거사를 한 동기에 대해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민주화 인사들 중에는 10·26이 없었다면 이승만처럼 박정희를 끌어내릴 수 있었는데, 10·26 거사 때문에 박정희를 영웅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저는 10·26 거사가 있었기에 유신이 종식되고 긴급조치가 해제되는 등 김재규에게 민주화의 공로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안 변호사는 “김재규가 유신의 앞잡이 노릇을 한 것은 맞지만, 그는 오랫동안 유신헌법의 비판자였다”며 10·26이 우발적인 권력 내의 다툼에 불과하다는 세간의 평에 동의하지 않았다. “김재규는 유신헌법이 제정된 때인 3군단장 시절부터 유신헌법에 비판적이었다. 건설부 장관, 중앙정보부장 시절에도 유신체제를 완화시키려 노력했던 인물이다.” 김재규는 1심 최후진술에서 10·26의 동기를 5가지로 설명했다. 그 중 첫째는 자유민주주의 회복이었고, 둘째는 국민의 많은 희생을 막는 것이었다. 안 변호사는 “세계적으로 우리나라가 독재국가로 몰리고 대미 관계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김재규는 유신체제를 무너뜨려 민주회복을 하자는 뜻에서 거사를 했다”며 “차지철은 캄보디아를 거론하면서 거기는 200만 명이 죽었는데 몇십만 명이 데모하는 게 별거냐고 말했고, 박정희는 ‘내가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재규는 ‘대통령 한 사람만 희생하면 되는데 왜 여러 사람이 피해를 봐야 하냐’는 생각에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것”이라고 설명했다. 안 변호사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10·26 거사의 직·간접적 동기를 재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재규는 유언을 남기기 전에 주변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대법원 재판이 끝난 후 안 변호사 등 변호인단은 신군부의 손길을 피해 도피 생활을 시작했다. 안 변호사가 도피하면서 친구 집에 보관해 둔 10·26 재판기록은 26년이 지난 2005년에서야 란 책으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안 변호사는 “전해 듣기로 김재규는 ‘언젠가 10·26을 혁명이라 부를 것이고, 헌법 전문에 4·19와 함께 10·26 혁명정신도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 이승만 12년 독재를 깨뜨린 4·19가 헌법에 들어갔는데 18년 군사독재를 무너뜨린 10·26도 언젠간 헌법 전문에 들어갈 수 있지 않냐는 취지였을거라고 생각한다”며 말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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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lk 화제의 현장]‘박정희 3세’ 태어나던 날
2005. 10. 01 화제
박정희 대통령의 외아들 박지만씨가 지난 9월 12일 새벽 첫아들을 얻었다. 지난해 12월 변호사 서향희씨와 화촉을 밝힌 지 꼭 10개월 만의 일. 만난 지 4개월 만에 결혼, 허니문 베이비로 집안의 대를 이을 귀한 손을 얻은 박지만. 한때 마약에 손을 대는 등 방황의 시간을 보냈지만 고통의 시간을 접고 재기해 건강한 삶을 사는 동생을 지켜보는 누나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감회는 남다르다. 박지만 주니어는 가문의 영광!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지난 9월 12일 고모가 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남 박지만씨(47)의 부인 서향희씨(31)가 강남 차병원에서 같은 날 새벽 3.58kg의 건강한 아들을 순산한 것. 이로서 박 전 대통령 집안도 대를 잇게 됐다. 박 전 대통령과 부인 고 육영수 여사는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와 근령(서영에서 개명) 육영재단이사장, 지만씨 등 1남 2녀를 두었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늦장가를 든 막내 지만씨를 제외하고 두 딸은 현재 독신으로 살고 있다. 때문에 주변에선 ‘대를 이을 수 있을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물론 박 전 대통령과 전처 김호남씨 사이에 태어난 딸 재옥씨가 한병기 전 국회의원과 결혼해 자녀를 두긴 했지만 외손자다. 지난 12일 태어난 아이는 박정희 전 대통령 집안에서 오래도록 기다려온 귀하디귀한 손. 박지만씨와 박 대표로서는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박지만씨는 “건강한 아들을 낳아 더없이 기쁘다”며 늦깎이 아빠가 된 심경을 밝혔고, 박 대표는 오전 10시 10분쯤 병원을 찾아 조카를 보고 난 뒤 “집안에서 오랫동안 기다리던 아이가 태어났다. 정말 행복하다”며 “건강하고 밝고 씩씩하게 자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이날 동생 지만씨와 올케 서향희씨의 손을 잡고 몇 번이나 “축하한다”는 말을 되풀이했는지 모른다. 박근혜 대표는 조카를 품에 안은 뒤 “엄마와 아빠를 꼭 반반씩 닮았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오전에 꽃다발을 들고 병실을 찾은 박근혜 대표는 오후에 다시 들러 축하 선물을 전달, 조카에 대한 사랑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현재 산모와 아이는 모두 건강한 상태. ‘박정희 3세’의 이름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육사를 졸업하고 육군 대위로 예편한 박지만씨는 91년 전기·전자제품 자성 재료 등을 생산하는 삼양산업을 인수, 2000년 코스닥 등록과 함께 회사명을 EG(산업폐기물 가공업체)로 바꿔 회장을 맡고 있다. 그의 아내 서향희씨는 전북 익산 출신으로 고려대 법대를 졸업하고 1999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새빛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로 활동중이다. 지난해 12월 14일 올린 결혼식에서 박지만씨는 자신의 성장 과정을 담은 영상물을 선보이며 “늘 봄날처럼 나누며 살아가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겠다”고 다짐한 바 있다. 만난 지 4개월 만에 결혼, 허니문 베이비로 아빠가 됐다. 지난 8월 15일 ‘육영수 여사 31주기 추도식’에서는 그동안 박근혜 대표가 맡아오던 유족 대표 인사를 지만씨가 하며 공식석상에서 집안의 가장으로서도 인정받았다. 연이은 겹경사. “늘 봄날처럼 살겠다”는 그의 다짐은 이렇게 지켜지고 있다. “부모님께서 살아 계셨다면 더없이 기뻐하셨을 텐데…” 우리 가문의 귀한 아이가 태어나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오랫동안 마음 졸이고 기다리던 동생 내외에게 진심으로 축하를 보냅니다. 아침에 소식을 듣고 꽃다발을 가지고 축하를 해주고, 다시 오후에 들러서 조카에게 탄생을 축하하는 한아름의 선물을 전달했습니다. 우리 가문에 귀한 선물을 안겨준 올케에게 다시 한번 감사하고, 늦둥이 아빠가 된 동생에게도 고마운 마음입니다. 우리 조카가 아무 탈 없이 건강하고 맑고 밝게 자라길 기도하며, 아이 엄마도 건강하게 산후 조리를 잘 했으면 합니다. 부모님께서 살아 계셨다면 이 세상의 무엇과도 바꾸지 못할 만큼 기뻐하셨을 텐데… 그분들을 대신해서 많은 분들이 축하와 축복의 글 올려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 가족의 가슴을 따뜻하고 환하게 해준 조카가 모든 사람들에게도 사랑과 희망을 주는 축복의 아이로 자라나길 바라며, 무엇보다도 아무 탈 없이 건강하게 자라주길 바랍니다. 조카의 탄생을 축하해주신 모든 분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 2005년 9월 12일 박근혜 대표 싸이월드 미니홈피 게재 글 전문 글 / 최은영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박정희 전대통령의 외아들 박지만씨 결혼현장 공개
2005. 01. 01 화제
“행복한 가정 이루고 서로 믿고 의지하며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고 박정희 대통령의 외아들이자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동생 박지만씨가 12월 14일 낮 12시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변호사 서향희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당초 가족과 일부 친지들 중심으로 조촐하게 결혼식을 치르기로 하고 결혼식 장소와 시간을 비밀에 부쳤으나 식장에는 2천여 명에 이르는 하객들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뤘다. 결혼 현장을 공개한다. 각계각층 유명 인사들 줄지은 축하 행렬 소문을 듣고 찾아온 하객들의 행렬(?)은 예식 시간이 지나서까지 이어졌다. 식장에 들어가기 전 자줏빛 한복으로 차려입은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박지만씨(46) 남매와 악수를 나누기 위해 결혼식 1시간 전부터 100m 가까이 줄지어 기다리기도 했다. 특히 고 박정희 대통령의 조카사위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 박태준 전 총리 내외를 비롯, 민관식 전 문교부장관 등 3공화국 시절 핵심인사들이 대거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또 박준규, 이만섭 전 국회의장, 이한동 전 총리, 홍사덕, 이철 전 의원 등 전직 의원과 국무위원들도 자리를 함께 했다. 현역 의원 가운데는 한나라당 김덕룡 원내대표와 김형오 사무총장, 이강두 최고위원, 진영 비서실장과 김정부, 박성범, 공성진, 전재희, 권영세, 송영선, 김충환, 한선교, 박진 의원 등 10여 명이 참석했다. 그밖에 황우석 교수와 방송인 유동근, 이정길, 김흥국씨 등도 자리를 빛냈다. 손님들 가운데는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동창생과 은사 8분도 찾아와 반갑게 악수했다. 이번 결혼식에선 신랑, 신부측 모두 축의금을 일절 받지 않았으며 축하 화환도 모두 돌려보냈지만 유일하게 노무현 대통령이 보낸 화환만은 식장 입구에 세워져 있었다. 이에 대해 신랑측 관계자는 “다른 분들의 화환은 모두 정중히 돌려보냈으나 현직 대통령의 화환조차 거절하는 것은 예의에 맞지 않는 것 같아 받았다”고 설명했다. 1 결혼식 전경. 2 기독교식으로 치뤄진 예식. 3 신랑 박지만씨와 악수를 나누는 가수 김흥국. 4 신부 서향의씨 부모님. 5 흑백영상물을 바라보는 신랑 신부. 6 축하인사를 건네는 탤런트 유동근. 정확히 12시가 되자 결혼식은 거행됐다. 검은색 턱시도 차림의 신랑 박지만씨와 민소매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 서향희씨(30)가 동시 입장하자 하객들은 박수를 보냈고, 디지털카메라와 카메라폰으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예식은 압구정동에 있는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의 주례로 기독교식으로 진행됐다. 수백 명의 하객들은 식장 주변에 선 채 앞쪽 2개 대형 스크린을 통해 예식을 지켜봤으며, 식장에 입장하지 못한 하객들을 위해 따로 마련된 홀에서도 결혼식을 생중계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특히 주례사에 이어 박지만씨가 소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와 함께 청와대에서 생활하던 어린 시절부터 육사생도 시절까지 ‘`추억의 흑백사진’을 소개하는 영상물이 감미로운 음악을 배경으로 상영돼 장내가 숙연해지기도 했다. 박근혜 대표는 부모와 동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을 보면서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는 모습도 보였다. 영상물 말미에 ‘늘 봄날처럼 나누며 살아가는 행복한 가정이 되도록 애쓰겠습니다’라는 다짐의 글이 적혀 있어 박수를 받기도 했다. 박 대표는 인사말을 통해 “이 자리에 부모님께서 참석은 못하셨지만, 하늘나라에서 지켜보며 기뻐하실 것입니다. 많은 분들의 사랑과 축복 속에 결혼한 동생 부부에게는 행복하고 모범적으로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라는 축하 메시지를 전했다. 또 “다가오는 새해 더욱 복된 한 해 맞으시길 기원합니다”라며 연이어 감사의 뜻을 전했다. 결혼식이 끝나고 신랑 신부가 퇴장하자 이들을 둘러싼 육사 37기 동기 회원 30여 명이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뜻의 육사 응원 구호 ‘무락 베니 비디 비키’를 큰 소리로 외쳐 하객들의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박지만씨는 신부에게 키스를 해달라는 친구들의 요청에 살짝 키스를 한 후 얼굴이 상기됐다. 이를 지켜보던 하객들은 “나이가 들어도 역시 새신랑”이라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박지만씨 부부는 결혼식 직후 폐백을 생략한 채 곧바로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의 고 박 대통령 부부 묘소로 참배하러 갔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들은 서울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15일 경북 포항으로 내려가 박태준 전 총리의 출판기념식에 참석했다. 이어 경주에서 1박을 한 후 인도네시아로 떠나 일주일가량 신혼여행을 즐긴 뒤 강남구 청담동의 한 빌라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다.  박지만씨는 육사를 졸업하고 육군 대위로 예편한 뒤 1991년 전기·전자 제품의 자성 재료용 복합 재료 등을 생산하는 (주)삼양산업을 인수, 지난 2000년 코스닥 등록과 함께 회사명을 EG로 바꿔 경영하고 있다. 서향희씨는 부산 중앙여고를 졸업하고 1993년 고려대 법대에 입학했다. 그녀는 사회적으로 문제의식이 있는 것들을 주로 공연하는 극예술연구회라는 동아리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99년 사법시험에 합격, 2004년 1월부터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새빛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새빛회계법인 고문을 맡으면서 여러 기업인들을 소개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2004년 9월경 지인의 소개로 박지만씨를 만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런 만남이 이어지면서 사랑의 감정이 싹텄으며, 팔짱을 끼고 다니는 다정한 모습이 종종 눈에 띄어 ‘연인 사이’라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 둘의 관계가 점점 깊어질 무렵인 지난 11월 3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서향희 변호사의 부모와 상견례를 가진 뒤 촬영한 기념사진을 자신의 홈페이지에 공개하고 “동생의 결혼을 축하합니다. 부모님이 안 계신 지금 큰누나인 저는 동생의 결혼이 너무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동생이 막상 결혼한다고 하니 지난날에 대한 생각 때문에 눈물이 나려고 합니다”라는 축하 메시지를 남기면서 결혼이 초읽기에 들어갔음을 공식적으로 드러냈다. 만난 지 4개월 만에 이뤄진 이번 결혼에 대해 당사자들보다 주변에서 걱정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16살의 나이차이와 성장 배경에 관계없이 순수한 두 사람이 만나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 모습에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글 / 강수정 기자  사진 / 장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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