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179 건 검색)
- 비상계엄 지지 글 논란 박종철 부산시의원 “진심으로 사과”
- 2024. 12. 05 10:20정치
- 박종철 부산시의원 3일 SNS에 “윤 대통령 결단에 경의” 시민사회단체들 “사퇴해야” 촉구 비상계엄을 지지하는 취지의 글을 올려 논란을 빚은 국민의힘 박종철 부산시의회 의원(기장1)이 사과 뜻을...
- 비상계엄박종철부산시의원계엄지지탄핵, 국내외 영향
- 박종철 고문조작·삼성 비자금···행동하는 신앙 ‘사제단 50년’
- 2024. 09. 23 12:50사회
- ....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리는데 앞장서다 많은 사제들이 옥고를 치렀고,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조작을 폭로해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70~80년대에는 군부독재 타도와...
- 해병대 박정훈 대령 ‘박종철 인권상’ 수상자로 선정
- 2024. 08. 06 20:32사회
- ... 넘겼으나 항명 및 상관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됐고 현재 재판 중이다. 박 대령은 수상소감에서 “박종철 인권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망설였다”며 “해병대 수사단장으로서 법대로...
- 박정훈 대령, ‘박종철 인권상’ 수상자로 선정
- 2024. 08. 06 14:26사회
- ... 넘겼으나 항명 및 상관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됐고 현재 재판 중이다. 박 대령은 수상소감에서 “박종철 인권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망설였다”며 “해병대 수사단장으로서 법대로...
스포츠경향(총 38 건 검색)
- 배우 겸 모델 변준서, ‘최종병기 앨리스’서 열혈 형사 박종철 역 출연
- 2022. 06. 10 18:13 연예
- 배우 변준서. 스탤리온엔터테인먼트 제공모델 겸 배우 변준서가 드라마 ‘최종병기 앨리스’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열혈 형사 박종철로 분해 대중에게 눈도장을 확실하게 찍을 계획이라고 소속사가 10일 전했다. 왓챠 오지리널 드라마 ‘최종병기 앨리스’(감독 이병헌 / 각본 서성원, 이병헌 / 제작 플러스미디어엔터테인먼트)는 킬러라는 정체를 숨겨야 하는 전학생과 비폭력으로 학교를 평정한 잘생긴 또라이가 범죄 조직에 쫓기며, 핏빛으로 물든 학교생활을 그린 액션물이다. 변준서는 극 중 남우(정승길 분)를 도와 사건을 풀어나가는 형사 ‘박종철’ 역을 맡았다. 카리스마 형사로 분한 변준서는 “배우로서 첫걸음을 떼게 돼 기쁘다. 무엇보다 좋은 감독님과 좋은 드라마를 만나 감개무량하고 설렌다”라는 소감을 전했다. 이어 “배우로서 좀 더 나은 연기를 보여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많은 사랑 부탁드린다”라고 당찬 포부를 밝혔다. 변준서는 현재 MCM글로벌 모델부터 쇼앤텔, 보디가드, 데상트코리아, 피플오브더월드 등과 전속계약을 맺고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그뿐만 아니라 GQ, 에스콰이어, BAZAR, 아레나 등 각종 매거진에서도 러브콜이 쇄도하고 있는 톱 모델이다. 소속사 스탤리온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변준서는 현재 ‘최종병기 앨리스’를 비롯한 세 작품에 동시에 캐스팅되어 바쁜 일정 속에서 촬영에 매진하고 있다. 여러 작품 속의 다양한 캐릭터를 잘 소화해내고 있으며, 그가 보다 역량 있는 배우로서 발돋움할 수 있게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라고 전했다. 모델과 배우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각기 다른 매력으로 인지도를 쌓고 있는 변준서가 펼칠 앞으로의 활약에 업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변준서가 출연하는 왓챠 오리지널 드라마 ‘최종병기 앨리스’는 오는 24일 첫 공개될 예정이다.
- 변준서
- 박주호 유튜브, 故 박종철 희화화 논란에 사과
- 2021. 05. 20 18:00 연예
- 축구선수 박주호가 유튜브 채널을 통해 故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희화화해 뭇매를 맞자 사과했다. 연합뉴스축구선수 박주호 유튜브 채널 ‘예린이 파추호’가 故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희화화해 비판이 일자 뒤늦게 사과했다. ‘예린이 파추호’는 박주호의 예능 도전기를 그린다. 앞서 이들은 지난 4월 28일 공개한 영상에서 박주호가 책상을 치자 영화 ‘1987’ 중 박종철 고문치사 관련 기자회견 장면을 삽입하며 상황을 희화화했다. ‘故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1987년 당시 박종철 열사가 경찰 고문으로 사망하자 이를 은폐하기 위해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라고 거짓 기자회견을 한 내용이다. 이를 접한 누리꾼들은 부적절한 장면이 삽입됐다고 지적했으나 ‘예린이 파추호’ 측은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이후 다음 에피소드 영상을 올리는 등 별다른 조처를 하지 않자 비판이 더욱 거세졌다. 그러자 ‘예린이 파추호’ 측은 뒤늦게 “일부 장면에 사용되었던 자료 화면으로 인해 구독자 분들과 시청자분들께 불편을 끼쳐 드린 점 반성하며 사과 드린다”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 “문제가 되는 해당 영상은 현재 삭제 처리됐다. 문제 되는 부분을 삭제한 후 다시 재업로드할 수 있도록 하겠다. 앞으로 조금 더 좋은 양질의 콘텐츠를 기획하고 신중하게 선택해 편집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알렸다. 이들의 논란은 처음이 아니다. 박주호의 아들 건후가 등장하는 장면에 ‘조회수 치트키’란 자막을 삽입해 뭇매를 맞은 바 있다. 당시 박주호는 “우리는 장난으로 하는 거지만 시청자의 입장에서는 내가 욕을 한다는 상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짢았을거다. 워낙 빨리 지나간 부분인데 팬분들은 멈추고 다시 보고 체크하기 때문에 기분 나쁘지 않으셨나 생각한다”고 해명했다. 박주호는 현재 수원FC에서 뛰고 있다. 그는 가족들과 KBS2TV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출연해 인기를 끌었다.
- 박주호
- [간밤TV]“그날의 함성을 기억합니다”…‘선녀들’ 6월 민주항쟁의 주역, 박종철→이한열 열사 실검 등장
- 2020. 04. 27 08:43 연예
- ‘선을 넘는 녀석들’. MBC 제공‘선을 넘는 녀석들’ 6월 민주항쟁의 함성이 안방극장을 울렸다. 4월 26일(일) 방송된 MBC 역사 탐사 예능 ‘선을 넘는 녀석들-리턴즈’ 35회는 ‘세상을 바꾼 학생들’ 2탄으로 꾸며졌다. 1987년 6월의 함성을 되새기고 기억하는 시간은 시청자들에게 커다란 감동과 울림을 선사했다. 이날 방송 후 ‘박종철’, ‘이한열’, ‘1987’ 등이 인터넷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시청률 역시 수도권 가구 기준 6.1%(2부), 분당 최고 7.1%까지 치솟았으며, 2049 시청률은 3.3%(2부)를 기록하는 등 시청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입증했다.(닐슨 코리아 기준) 이날 설민석-전현무-김종민-유병재-김인권은 영화 1987의 배경이 된 장소 ‘남영동 대공분실’을 찾았다. 이곳은 실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벌어진 장소였다. 군사독재 시절 철저히 본모습을 감춘 채 비밀리 운영된 이곳은 1987년 이후에야 그 정체가 밝혀졌다. 설민석은 “인근 주민들조차 이 건물의 정체를 몰랐다고 한다. 피조사자가 여기가 어디인지, 어떻게 들어왔는지, 몇 층인지도 모르도록 계획 단계부터 철저하게 계산된 건물”이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선녀들’은 사람이 빠져나갈 수 없게 폭이 좁게 만들어진 창문, 밖에서 볼 때 문인지 모르게 설계된 후문, 숨 쉴 틈조차 없는 나선형 계단, 출구를 찾을 수 없도록 데칼코마니처럼 설계된 복도 등 소름 돋는 공간들과 마주했다. 전현무는 “지금까지 본 공포영화보다 여기가 더 무섭다. 공간 자체가 너무 무섭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이어 박종철 열사가 고문치사를 당한 9호실 앞에 도착한 ‘선녀들’은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김종민이 사건의 최초 목격자인 오연상 의사와 친분이 있었던 것. 즉석에서 전화 연결까지 성공, ‘선녀들’은 오연상 의사로부터 그날의 진실을 듣게 됐다. 오연상 의사는 남영동 대공분실에 도착했을 때 이미 박종철은 사망해 있었다고 말하며 “형사들이 왕진 요청을 했을 때는 아마 살아 있었을 거다. 그렇지 않았다면 왕진 요청을 했을리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박종철을 응급실로 옮겨 의료사고로 사건을 은폐하려 했던 정황들, 경찰이 요청한 사망진단서를 거부하고 사체검안서를 쓰게 된 사연, 사건의 진실을 알린 윤상삼 기자와의 화장실 대화 등을 이야기했다. 실제 목격자에게서 듣는 진술은 당시 상황을 더 생생하게 짐작할 수 있게 했다. 그렇게 진실을 외면하지 않았던 이들 덕분에 박종철의 죽음은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학생 이한열 열사의 이야기도 이어졌다. 박종철의 죽음이 도화선이 되어 6월 9일 연세대에 2천여 명의 학생들이 모였고, 그 가운데 이한열은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사망했다. 그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 “내일 시청 앞(6.10 국민대회 장소)으로 나가야 하는데…”와 마지막까지 돌아오지 않은 신발 한 짝은 ‘선녀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특히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의 울부짖음은 시청자들의 마음을 울렸다. 그들은 곧 누군가의 친구, 가족, 부모였기 때문. 이들의 희생이 기폭제가 되어 거리로 나온 100만여 명의 시민들은 “호헌철폐 독재타도”을 외쳤고, 그들의 함성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쟁취해냈다. 설민석은 누군가의 친구였고, 자식이었고, 부모였던 이들에게 감사함을 전하며, “그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도 멋진 역사를 만들어가자”고 말해 뜨거운 울림을 선사했다. 한편, 이날 방송 말미에는 SF9 로운과 배우 김강훈이 게스트로 등장, ‘비운의 부자’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역사 탐사를 시작했다. 영조는 왜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였는지, 영조의 발자취를 따라 푸는 미스터리 탐사가 예고되며 호기심을 증폭시켰다. MBC ‘선을 넘는 녀석들-리턴즈’는 매주 일요일 밤 9시 5분에 방송된다.
- 간밤TV
- 박종철 열사 아버지 일기 첫 공개 “잘 가라, 잘 있거라 철아”
- 2020. 01. 13 23:52 생활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박종철 열사 33주기를 맞아 박 열사 아버지인 고 박정기씨가 아들의 사망 이후 20년간 써 내려온 일기장 일부가 최초로 공개됐다. 일기장은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된 박 열사에 대한 단편적인 사실들과 민주항쟁 이후 20년의 역사를 담고 있어 사료로서도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하 사업회)는 박 열사 33주기를 하루 앞둔 13일 유족들이 기증한 박 씨의 일기 원문 가운데 일부인 ‘막내 제1주기를 기해 보내는 글’을 공개했다. 공개된 부분은 1988년 박 열사 1주기 당시 부산대에서 진행한 추모제를 위해 아버지 박정기씨가 작성한 추도사다. 박 씨는 “어머니 누나는 서울 형님 형수 집에 있고 아버지는 혼자 한없는 감홰 톳보기(안경) 속으로 눈물을 닦고 닦았으나 지면이 다 젖었구나. 잘 가라, 잘 있거라 철아”라며 먼저 간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썼다. 또 “지금도 차디찬 감방에서 동기들이 무서운 용기로 투쟁을 하고 있구나. 먼저 간 친구, 선배, 후배, 형들에게 이 아버지 말 전해다오. 모두 걱정 말라고, 우리 아버지까지 민주운동 자신 있다고 하는데 걱정 말라고”라며 다른 민주 열사들을 기리는 말도 쓰였다. 박정기씨는 아들 죽음 후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에 참가하는 등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다 2018년 7월 세상을 떠났다. 사업회는 박씨 별세 1주년인 지난해 7월 유족들로부터 박 씨의 일기장과 그가 자서전 준비를 위해 쓴 회고담 등 모두 14권을 전달받아 문서화 작업을 진행해왔다. 박정기씨 별세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청천벽력 같은 아들의 비보를 듣는 순간부터 아버님은 아들을 대신해, 때로는 아들 이상으로 민주주의자로 사셨다”며 “박종철은 민주주의의 영원한 불꽃으로 기억될 것이고, 아버님 또한 깊은 족적을 남기셨다”고 애도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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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 70년 역사르포](23)남영동 대공분실~연세대… 박종철·이한열, 6·10항쟁 불씨가 되다(2015. 07. 28 10:38)
- 2015. 07. 28 10:38 사회
- 기자는 고등학교 시절인 1976년 서울역에서 전철을 타고 학교가 있는 용산역까지 통학했다. 그 중간 남영역 앞에 한 건물이 신축 중이었다. 검은 벽돌로 창문도 좁게 짓는 이 건물은 마치 토치카를 쌓는다는 느낌을 줬다. 물론 이 건물이 무슨 용도이며, 누구의 소유인지도 몰랐다. 이 건물의 정체가 드러난 것은 한참 후다. 1987년 1월 15일 한 신문에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제목으로 “경찰은 박군의 사인을 쇼크사라고 검찰에 보고했다. 그러나 검찰은 박군이 수사기관의 가혹행위로 인해 숨졌을 가능성에 대해 수사중이다”라는 2단짜리 기사가 실렸다.(중앙일보 1987년 1월 15일자) 이 기사는 제5공화국 보도지침을 뚫고 신문에 실렸다. 당시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이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연행된 것은 1월 13일 밤. 수배된 대학선배의 소재를 대라며 혹독한 물고문이 계속됐다.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말했다. 이 과정을 최근 발간된 박종철의 부친 박정기씨의 회고록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부검을 마친 후 황적준은 안상수(담당 검사)에게 말했다. ‘질식사입니다. 물고문 같습니다’… ‘온몸에 피멍자국이 많아, 두피에도 피멍이 있고’… 경찰은 허위 보고서 작성을 요구했다.… 황적준은 16일 하루 내내 고민하다 그날 밤 잠자는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정의로운 아빠가 되겠다’는 결심을 한다.”(송기역, 유월의 아버지, 2015년) 유명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남영동 대공분실은 철저히 피의자를 위축시키기 위해 설계된 ‘흉기’이다. 정교하게 지어진 공포스러운 ‘흉기’ 이곳은 고문기술자 이근안이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후에 국회의원) 김근태를 고문한 장소였다. 김근태는 이곳 경험을 이라는 책으로 남겼고, 이를 정지영 감독이 로 영화화했다. 하지만 1948년 10월 치안국 특수정보과 중앙분실로 시작된 이곳이 김근태만을 고문한 곳이었을까. 고문으로 조작된 많은 간첩사건의 상당수는 이곳에서 이뤄졌을 것이다. 이 건물은 유명한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이라고 한다. 하지만 기자는 이 건물이 ‘작품’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못한다. 이것은 정교하게 설계된 ‘흉기’다. 검은 벽돌건물에 육중한 철문은 보는 순간부터 위협적이다. 조사실 5층 창문을 매우 좁게 낸 것은 투신을 못하게 하려는 의도다. 1973년 남산 중앙정보부 조사실에서 혹독한 고문을 견디다 못해 창문으로 투신 자살한(중정의 공식발표) 서울대 최종길 교수 사례를 염두에 뒀을 것이다. 건물 뒤 입구와 역방향으로 설치된 5층 조사실까지 원형 계단은 철저하게 피의자의 공간지각 능력을 상실하게 만든다.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를 들으며 철제계단을 오르는 피의자는 이미 절반쯤 의지를 상실했을 것이다. 박종철이 숨진 509호 조사실 내부이다. 5층 조사실에서 보면 복도 출입구와 14개 방 출입구는 크기와 모양이 똑같다. 한 번 들어오면 어디가 나가는 곳인지 알 수 없는 미로이다. 복도 끝에서 보면 일제가 지은 서대문형무소 감방 복도 그대로 빼다 박았다. 밖에 설치된 전기 스위치는 서대문형무소 감방마다 설치된 패통 모습 그대로다. 실내는 철제 방음시설로 둘러쳐져 있다. 인권에 무지하고 승진의 공명심에 불타는 경찰들은 여기서 폭행과 전기·물고문을 일삼았을 것이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건물 외형은 물론, 입구에서부터 실내까지 정교하게 피의자를 시각적·심리적으로 위축시키기 위해 설계됐다. 폴란드에 세워진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유태인을 효율적으로 ‘정리’하기 위한 최적화된 시설이라는 점과 비슷하다. 천재 건축가라는 김수근이 이 건물의 용도를 몰랐을까. 그런 면에서 이 건물은 작품이 아니라 흉기다. 이곳은 2005년 경찰청 인권센터로 바뀌어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아우슈비츠도 보존하듯 이곳 보존도 잘한 것이다. 이곳을 관리하는 한 직원은 “버스를 대절해 단체로 관람하는 대학생들과 고등학생들이 간혹 있고, 개인적으로 관람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말했다. 박종철기념사업회는 단체 탐방하면 안내를 맡고 있다. 김학규 사무국장은 “전시관 운영주체가 경찰이기 때문에 휴일 개방을 하지 못해 일반시민들이 편리하게 찾지 못하고 있다”면서 “단체 관람일 경우 경찰의 협조를 얻어 개방할 수 있다”고 말했다. 1987년 1월 서울대에서 열린 박종철 추도식 모습. | 경향신문 자료사진 분노한 국민에 신군부세력의 ‘항복선언’ ‘광주의 피’를 통해 집권한 전두환은 과거 유신체제를 능가했다. 대학 시위자는 철저히 학원에서 내쫓았다. 1983년까지 3년 동안 대학생 1400여명을 제적했다. 단순 시위가담자도 ‘강제징집’으로 군대에 보냈다. 1983년 5월 18일 가택 연금 중인 김영삼은 ‘구속인사 석방과 제적학생 복교, 언론자유 보장’ 등을 요구하며 단식에 돌입했다. 그리고 이듬해 5월 18일 범민주세력을 망라한 정치결사체 ‘민주화추진협의회’가 만들어졌다. 이들이 만든 신민당은 창당 한 달 만인 1985년 2·12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제1야당으로 떠올랐다. 학생 및 재야 노동계도 결집하며 힘을 키워 1985년 3월 29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으로 통합했다. 1986년 2월 12일 신민당은 직선제 개헌을 위한 1000만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정권 재창출을 구상하던 신군부에게는 위협이었다. 전두환은 야만적인 학원 및 재야인사 탄압에 돌입했다. 1986년 10월 28일 서울 건국대에서 열린 학생집회에서 1525명의 학생을 연행, 1259명을 구속했다. 정부수립 이후 단일사건으로 최대 구속사건이다. 연세대에서 열린 이한열 장례식에 모인 군중들이 장례행렬을 따르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런 상황에서 1987년 1월 14일 이곳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실에서 박종철이 죽었다. 신군부세력에는 치명타였다. 민주세력은 ‘고문추방’ 이슈를 추가했다. 3월 3일 박종철 사십구재에 ‘고문추방 국민대행진’이 열렸다.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축소·은폐 사실을 폭로했다. 1987년 6월 10일 서울 잠실 체육관에서는 민정당 노태우 대표가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는 전당대회가 예정돼 있었다. 신민당을 포함한 모든 민주세력이 망라된 국민운동본부는 ‘박종철 고문살인 및 호헌철폐 규탄 시민대회’, 이른바 6·10대회로 맞불을 놓을 계획을 세웠다. 6월 9일 오후 2시 연세대학교 앞에서 ‘구출학우 환영 및 6·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가 열렸다. 집회를 마친 1000명의 학생들이 교문 밖 진출을 시도했다. 오후 5시, 전투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이 직격으 로 날아 시위대 선두에 있던 학생 머리에 맞고 터졌다. 학생의 머리는 흐르는 피와 최루탄 가루가 범벅이 됐다. 그는 경영학과 2학년 이한열이었다. 박종철 고문치사에 이어 최루탄에 맞아 이한열이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자 국민의 분노는 더욱 높아졌다. 전국적으로 시위가 이어졌다. 경찰은 무차별 연행으로 맞섰지만 분노한 시민을 막을 수 없었다. 경찰의 최루탄이 다 떨어졌다. 6월 19일 청와대에서 군 최고회의가 열렸다. 제2의 5·18 광주 비극이 재연될 수 있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극적으로 상황이 반전됐다. 6월 29일 민정당 대통령 후보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용한다”는 이른바 ‘6·29 선언’을 했다. 신군부세력의 ‘항복선언’이었다. 이한열 추도비는 2015년 6월 4일 새로운 기념비로 바뀌었다. ‘198769757922’라는 숫자는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은 1987년 6월 9일과 숨진 7월 5일, 그리고 7월 9일 장례식, 22세라는 의미다. 7월 5일 새벽 2시5분 이한열은 숨을 거뒀다. 그의 장례식에는 8만여명의 조문객이 찾았다. 기자는 당시 그 현장을 취재했다. 문익환 목사의 절규하는 추도사와, 정문에서 펼쳐진 무용가 이애주가 긴 삼베 가운데를 가르다 쓰러지는 ‘바람맞이 춤’이 생생하다. 이 춤에 대해 통일운동가 백기완은 “저 기가 막힌 울부짖음을 보라. 여기서 우리는 춤이란 한낱 표현예술이 아니라 역사를 이끄는 힘의 모든 것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고 평했다.(이애주 한판춤 그림책, 1988년) 수백개의 만장을 앞세운 이한열 운구행렬은 서대문을 거쳐 시청 앞으로 향했고, 100만명이 넘는 시민이 추도했다. 시청 앞 노제 때, 서울시청 옥상에는 정상 태극기가 펄럭였다. 수만명의 시민들은 “조기” “조기”를 외쳤다. 결국 서울시청은 태극기를 조기로 고쳐달았다. 이한열은 고향 광주로 내려가 망월동 묘지에 묻혔다. 박종철이 경찰의 독촉으로 서둘러 화장돼 임진강 샛강에 뿌려진 것과는 달랐다. 정치인 분열로 ‘1987년 체제’는 미완 이한열이 숨지고 1년이 지난 1988년 9월 14일 총학생회는 학생회관 남쪽 작은 동산(한열동산)에 추모비를 세웠다. 추모비에는 “여기 통일 염원 43년 6월 9일 본교 정문에서 민주화를 부르짖다 최루탄에 쓰러진 이한열 님을 추모하고자 비를 세운다”고 썼다. 그러나 인조대리석 추모비는 27년의 세월을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올 6월 4일 통돌 모양의 기념비로 바꾸었다. 길이 약 4.5m 높이 약 1.4m의 육중한 보령산 검은돌에 ‘198769757922’라고 큼직하게 숫자를 썼다.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은 1987년 6월 9일과 숨진 7월 5일, 그리고 7월 9일 장례식, 22세라는 의미다. 그 옆에 납작한 통돌에는 LED 디지털로 현재 연·월·일·시간을 표시하는 시계가 있다. 현대적 감각이 가미되고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교차하는 느낌이다. 요즘 이곳 주변은 수십년된 백양나무를 베고 지하 할인매장과 쇼핑몰을 짓는 ‘백양로 재창조 프로젝트’가 한창이다. 거기다 세브란스병원을 찾는 사람들로 시장통을 방불케 한다. 철저히 자본만 넘쳐나는 느낌이다. 이한열이 꿈꿨던 세상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1987년 6월항쟁은 1월 박종철에서 시작해 6월 이한열로 끝났다. 그러나 6월항쟁은 절반의 승리, 아니 절반의 패배였다. 민주세력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뤄냈지만, 양 김씨가 분열해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젊은이의 순교로 쟁취한 민주 승리를 기성 정치인의 분열로 신군부에 헌납하고 만 것이다. 6·10항쟁의 결과물인 ‘1987년 체제’에 대한 이해다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기성 정치인은 1987년 12월 양 김씨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정략적 이득만 앞세운다. 내각제 개헌 주장이 그것이다. 그러나 ‘1987년 체제’의 결과는 권력구조에만 있지 않다. 양 김씨의 분열은 시민세력·노동·대학 운동권 등 총체적인 민주세력의 분열로 이어졌다. 분열된 민주세력은 1992년 대선에서 ‘신군부 동지’와 손을 잡았고, 1997년 대선에서는 ‘박정희 후예’와 연합했다. 진정한 6·10항쟁의 승리는 2002년 대선에서 겨우 이뤄냈으나 5년밖에 지키지 못했다. 그리고 역사는 곧 반동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6·10항쟁의 결과물인 ‘1987년 체제’에서 진정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는 바로 이것이다.
- 광복 70년 역사르포
- [그때 그 장면]박종철 고문치사 사건(2008. 01. 29)
- 2008. 01. 29 정치
- ‘6월 민중항쟁’ 시발점 되다 박종철 열사 21주기 추모제가 1월 13일 부산 민주공원 소극장에서 개최됐다. 이어 14일에는 박 열사가 숨졌던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박종철 열사 고문사망 현장 방문 행사’도 열렸다. 박종철기념사업협회는 국철 남영역의 명칭을 ‘박종철역’으로 개칭하는 것을 추진 중이며, 박 열사의 모교인 부산 혜광고 학생들에게 장학금 지급도 고려하고 있다. 제5공화국 말기인 1987년 1월 13일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회장이었던 박종철은 공안당국에 붙잡혀 물고문을 받다가 사망했다. 사진은 1987년 1월 17일에 거행한 박종철 열사 추모행렬이다. 경찰은 박종철씨의 사망 원인과 관련해 은폐·조작한 끝에 사실이 밝혀지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사건 초기에 ‘탁!’ 하고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고 밝힌 경찰 측의 발언은 군사정권의 비도덕성을 조롱하는 유행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은 이후 한국 민주화운동의 한 획을 그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졌다. 군사정권과 맞서 민주화를 이룩한 6월 항쟁을 계기로 한국의 민주주의는 급속히 발전했다. 이른바 ‘87년 체제’라고 불리는 것도 민주화의 결실을 이르는 말이다. 10년 후 민주개혁진영은 김대중 후보를 앞세워 집권에 성공한 데 이어 노무현 대통령이 재집권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지난해 대선에서는 보수세력인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에 무너졌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인가.
- [6월항쟁 20주년]박종철 사망사건의 전말 (下)(2007. 05. 22)
- 2007. 05. 22 사회
- “진실 여전히 은폐” 사제단 2차성명 박종철군 고문치사 현장검증 모습. 사제단의 발표가 있고 나서, 초조한 하루 이틀이 지나고, 5월 21일 오후 6시 정구영 서울지검 검사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고문살인의 범인이 3명 더 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한다. 그 3일간은 사제단에게는 물론이요 나에게도 숨 막히는 기간이었다. 우리는 과연 권력 당국이 어떻게 나올 것인지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이 아니라고, 거꾸로 사제단이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있다고 덮어씌울 수도 있는 정권이기에 그 기간은 길고 초조했다. 정부 대책회의, 경찰 지체조사 결정 검찰은 5월 20일 재수사를 시작하였다. 이날 밤 경찰은 스스로 범인 3명의 신병을 확보해 검찰에 데려왔다. 21일 오후 4시, 3명의 추가 범인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5월 29일에는 검찰이 축소 조작을 주도한 대공수사 2단 단장 박처원, 5과장 유정방, 5과 2계장 박원택을 범인도피죄로 구속 수감했다. 그러나 사제단이 강력히 의혹을 제기한 축소, 조작, 은폐의 최고 책임자라 할 치안본부장 강민창은 이번 재수사에서도 제외했다. 강민창은 박종철이 죽고 나서 꼭 1년 만인 1988년 1월 15일 부검의인 황적준 박사의 일기장이 근거가 되어, 그가 황 박사로 하여금 허위감정 의견을 제출하도록 한 직권남용과 사인을 은폐한 직무유기혐의로 구속되었다. 사제단의 발표와 강력한 의혹 제기에도 불구하고, 5공 정권은 그때까지도 여전히 조작과 은폐를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제단은 축소조작사건을 5공 정권이 처리하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다가, 6월 22일 ‘진실이 밝혀지기보다는 은폐되고 있다’는 장문의 성명을 발표한다.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1차 성명에 못지않게 이 성명도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마지막까지 박종철사건의 진실을 축소 조작하고 은폐하려는 5공 정권의 안간힘을 이 성명은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전모는 5공 정권에 의해 여전히 은폐되고 있었고, 어쩌면 오늘까지도 당시의 내무장관 등 축소, 조작, 은폐의 책임과 진실은 영원한 미궁으로 남아 있는지 모른다. 사제단의 5·18성명에도 불구하고 5공 정권과 검찰은 여전히 미봉과 봉합에만 열중할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의 전모와 그 이후의 진행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성명을 꼭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자료로 별첨하고자 한다. 이 성명 역시 그 초안은 아직도 수배상태에 있던 내가 작성하고, 사제단의 검토를 거쳐 발표되었다. 오늘 우리는 박종철군에 대한 고문살인과 사건조작은폐의 전 과정에 걸친 실체적 진실은 물론 이 나라 정치권력 자체의 양심의 마비상태, 즉 고문으로 한 젊은이를 죽게 하고, 그 사실마저 조작 은폐하는 그런 도덕적 기반 위에 서 있는 정치권력의 의식세계와 그에서 비롯한 공권력의 원초적 부도덕성과 부정직성을 밝히고 청산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국정조사권의 발동과 변협 조사활동의 자유가 먼저 보장되어야 한다는 우리의 확신을 거듭 내외에 천명하면서 이러한 조사활동이나 재판절차를 통하여 마땅히 밝혀져야 할 문제점들을 다음에 제시하는 바입니다. 1. 고문치사 과정의 진실 구치소로 이송되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범인들. 가) 박종철군이 연행될 당시의 신분은 오직 박종운군에 대한 참고인 자격이었다는 것이 우리의 확신입니다. 나) 연행시간과 연행된 장소를 명백하게 밝혀야 합니다. 렌즈 소독기가 든 손가방과 학교 성적표가 없고, 전날 신고 나갔던 부츠와 하숙집 동료에게 빌린 상아색 털목도리가 없는 점에 비추어 하숙집이 아닌 장소에서 발표와는 다른 시간에 연행되었다는 가족과 그 주변의 주장에 대한 납득할 만한 해명이 있어야 합니다. 다) 물고문 이외에도 폭행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박군 몸의 얼룩진 반점에 대한 납득할 만한 해명이 없는 점과 연행시간 등의 의혹에 비추어 치안본부 대공수사 2단 5층 9호실이 아닌 장소(신문실)에서 제1차 고문이 선행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사체부검 사진의 공개와 함께 다른 고문의 의혹을 밝혀야 합니다. 라) 강진규 경사가 다른 반 반원으로서 박종철군 조사에 참여한 이유와 역할이 밝혀지지 않고 있는 가운데, 5월 30일 이상수 변호사가 접견했을 때 공포에 질린 표정과 언동이었던 점 등에 비추어, 조·강 두 경관에 대한 신변 안전과 함께 변협 조사단과의 자유로운 면담에 협조해줄 것을 관계당국에 간곡히 요청하는 바입니다. 2. 경찰 명동성당에서 열린 박종철군 추도 및 고문근절을 위한 침묵시위. 가) 박종철군의 죽음이 고문치사로 밝혀진 뒤 당시의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처음 상황 보고를 정확히 하지 않은 사람을 감찰 조사하겠다”고 하였으나 후속조치가 뒤따르지 않았고, 신길동 치안본부 특수수사 2대에서 처음 조사할 때부터 “상부로부터 조한경 경위 등 2명을 조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수사반의 진술 등에 비추어 조작은폐 사실을 치안본부장이 알고 있거나 지시 또는 그에 개입했음이 확실하다 할 것입니다. 나) 검찰은 박처원 치안감 등 경찰 간부 3명을 범인도피혐의로 구속하면서 이들이 두 경찰관을 교도소로 찾아와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가족 또는 관련자 5명을 쏴 죽이겠다고 말하는 등의 협박에 대해서 진상조사는 물론 납득할 만한 조치를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그와 같은 공갈과 협박이 교도소 안에서 계속되고 있으리라는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다) 우리는 더 많은 사람의 형사처벌 등을 결코 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사건 발생 당시 치안본부 대공수사 2단 단장이었다가 직위해제 끝에 4월 8일 보직 발령된 전석린 경무관, 1월 15일부터 18일까지 줄곧 박종철군의 가족을 동행, 감시하고 고문살인사건의 조작은폐를 위한 가족의 회유와 금품제공 등에 가담한 홍승상 경감, 그리고 1차 보고서를 작성하고 가족 면회 때마다 입회 감시한 이태훈, 여건주 경위에 대해서는 납득할 만한 조치나 문책 또는 해명이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3. 검찰 학생들의 시위에 동참하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가) 정구영 전 서울 지검장은 5월 21일 발표에 이르기까지 그때마다 거짓 발표와 기자와의 기만적 일문일답을 하여 왔음이 5월 29일 검찰 발표로도 명백히 밝혀졌습니다. 서울지검 안상수 검사는 2월 27일 조·강 두 경관으로부터 3명의 고문경관이 더 있다는 사실을 청취하고서도 “진실을 밝히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할 것인지 잘 판단하라”면서 계속적인 은폐를 획책, 종용하고 이 같은 사실을 상부에 보고, 2월 28일 김성기 법무부장관이 영등포 교도소를 방문, 새로운 사실이 밖에 알려지지 않도록 철저한 보안단속을 지시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두 경관에 대한 3월 7일의 이감조치는 경찰로 하여금 두 경관에 대해 마음 놓고 회유와 설득을 하게 하기 위함이었음이 명백합니다. 3월 9일 가족 면회 때 조한경 경위는 동생에게 “검사에게 조작 사실을 폭로한 뒤 경찰로부터 죽이겠다는 협박을 당하고 있다. 빨리 변호사를 대라”고 말한 데서도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이 같은 정황에 비추어볼 때 적어도 2월 27일 이후 검찰은 조·강 두 경관의 심경의 변화를 경찰에 알려 합동으로 조작 사실을 은폐, 무마하려 했음이 확실합니다. 나) 조·강 두 구속 경관에 대한 가족 면회가 토요일 오후에 특별면회로만 허용된 점, 또 조한경 경위에게는 이태훈 경위가, 강진규 경사에게는 여건주 경위가 입회한 상태에서만 면회가 이루어진 점, 3월 말께부터 검사의 지시라며 3주간 면회가 금지된 점 등에 비추어 검찰은 2월 28일 이전에 이미 조작은폐 사실을 알고, 경찰과 교도소 당국과 연계하여 합동으로 조작 사실의 은폐를 공모, 혹은 적어도 묵인했음이 명백합니다. 4. 1월 17일 정부대책회의 경찰청 남영동 보안분실 조사실 내부. 박종철군 고문살인사건에 대한 조작은 1월 17일 관계부처 장관과 유관기관 책임자가 참가한 정부 대책회의에서 경찰 자체조사를 결정함으로써 조작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보도에 의하면 내무부장관과 치안본부장의 로비로 그와 같은 결정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이들이 필사적으로 경찰 자체조사를 관철한 뒷면에는 조작은폐를 그 목적으로 하고 있었음 또한 자명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수사 상식에 반하는 이런 주장이 관철되어 그와 같은 결정을 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내무부장관과 치안본부장은 조작은폐를 목적으로 하거나 그 사실을 알고 경찰 자체조사를 고집했을 것임이 명백한 것입니다. 우리는 고문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우리는 민주화된 나라에서 모든 이웃 형제와 ‘더불어 함께’, ‘인간답게’ 살고 싶습니다. 나라의 민주화와 사회정의, 그리고 민족의 자존과 자주를 요구하는 것이 용공 좌경일 수 없고, 그것으로 고문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 우리의 확신입니다. 우리는 누군가 처벌되고 처벌되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진실이 밝혀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또한 고문해 죽여 놓고 징계 정도의 처벌을 예상하는 공권력의 의식구조가 획기적으로 개선되기를 바랍니다. 1987. 6. 22.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김정남〈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 수석비서관〉
- [6월항쟁20주년]박종철 사망사건의 전말 (中)(2007. 05. 01)
- 2007. 05. 01 사회
- 사제단, 국민 의분에 불을 지르다 1987년 5월 18일, 고(故)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진상 조작 폭로 성명을 읽고 있다. 1987년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는 ‘광주민주항쟁 제7주기 미사’가 열리고 있었다. 광주민주항쟁 제7주기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특별하게 준비한 미사였다. 사제단은 이 미사 때 뒷날 역사적인 문건이 된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한다. 그리고 그 성명은 당시 정국의 흐름을 바꾸고, 역사를 바꾸는 폭풍이 된다. 이날 명동성당의 미사에는 2000여 명의 신자와 민주인사들이 참석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강론을 통해 1980년 광주의 아픔과 그것을 막지 못한 우리 모두의 책임, 그리고 얼마 전 고문 끝에 숨진 박종철군의 죽음을 애도했다. 2부 행사가 이어졌다. 김승훈 신부가 제단에 올라가 조심스럽게 손에 든 원고를 차근차근 읽어 나갔다.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제목을 읽을 때부터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듣는 사람들도 놀라움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명동성당서 ‘진상 조작’ 성명 발표 김승훈 신부는 5월 17일 함세웅 신부로부터 이튿날 미사에서 이 성명을 발표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벼르고 벼르던 부탁이었다. 부탁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대비해 전주 교구의 문정현 신부에게도 같은 얘기를 했다. 김승훈 신부는 그 부탁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떠맡을 수밖에 없는 짐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함세웅 신부로부터 그 성명 초안을 넘겨받아 몇 번을 읽고 또 읽었다. 우여곡절을 겪은 이 성명이 이날 드디어 발표됐다. 그것은 어쩌면 사제단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기획, 연출한 사람은 사제단에서 흔히 그래왔듯이 함세웅 신부였다. 1986년 11월부터 나는 5·3인천사태와 관련해 수배 중이던 이부영을 숨겨줬다는 혐의로 수배를 받고 있었다. 정작 내 자신이 수배자가 되고 보니 막막했다. 더욱이 나 때문에 고령의 이돈명 변호사가 구속된 일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수배 중인 다른 사람들의 수발을 많이 들었다. 5·3인천 사태가 있은 후 많은 사람들이 수배되었다. 나는 이부영을 고영구 변호사에게 부탁했다. 고영구 변호사는 “내가 직접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지는 못할망정, 그런 분들을 보살피는 일이야 기꺼이 맡겠다”고 말했다. 1980년 5월 이후 최대의 시위였던 5·3인천사태는 분열된 민주화운동 진영의 자성을 촉발하면서 1년 뒤 1987년 6월항쟁의 시발점이 됐다. 이부영이 어느 날 나를 찾아와 말하길 “고 변호사에게는 80세 노모가 계시고, 부인은 신경성 위경련을 앓고 있다. 만약 내가 이 집에 있었던 것이 밝혀지면, 이 집은 평지풍파가 일어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기회를 보아 이돈명 변호사에게 “만약 이부영이 검거된다면, 선생님 댁에 있는 걸로 하면 어떻겠습니까”라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돈명 변호사도 “그렇게 하지, 뭐.” 하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주었다. 이돈명 변호사는 당시 65세 가까운 고령이었다. 하지만 설마 이돈명 변호사까지 건드릴 수 있으랴 생각했던 게 잘못이었다. 얼마 뒤, 이부영은 나를 만나러 왔다가 검거되었고, 우리들이 지나가는 말처럼 했던 일은 사실이 되었다.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은 이부영의 진술을 듣고 이돈명 변호사를 연행하자마자 구속했다. 그날 저녁 가족들과 함께 있던 이돈명 변호사마저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종로경찰서 검거단이 집안을 샅샅이 뒤졌다. 나는 그 집 안방에 달린 화장실에 숨었다. 안방에 화장실이 있는지는 미처 몰랐다. 나는 그 이튿날 새벽 미사에 가는 사모님과 함께 집을 나왔다. 고영구 변호사는 자신이 진실을 말하고차라리 처벌을 받겠다고 나섰다. 황인철, 홍성우, 조준희 변호사와 함께 만났을 때였다. 우리는 그때 그렇게 되면 괜한 희생자만 더 늘 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진실을 얘기한다고 해서 이돈명 변호사를 내줄 그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마도 3월 중순쯤이었을 것이다. 이미 오래전에 받은 편지를, 장기표를 숨겨준 혐의로 수배 중인 전병용에게 세 통의 편지를 받았다. 영등포 교도소에 수감 중인 이부영으로부터 온 편지였다. 2월 중순께까지 이부영이 교도소에서 들은 바를 정리한 것이었다. 이 교소도엔 과거 서울 구치소에서 정치범들을 돕던 교도관 한재동이 있었다. 이부영이 쓴 편지가 한재동을 거쳐 전병용에게, 그리고 최종 수신자인 나에게 전달된 것이다. 전병용은 그 편지를 내게 전달하고 난 이틀 뒤엔가 검거되었다. 내가 그 편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함세웅 신부, 김승훈 신부에 부탁 그 편지에는 정말 놀라운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해 1월에 있었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범인이 축소,조작되었다는 것이다. 1987년 1월 18일, 영등포 교도소 격리 사동에 갇혀 있던 이부영은 간밤에 들어온 두 명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관련된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경찰관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수감경찰관 방 옆에는 별도의 교도관이 배치되어 특별 감시를 했다. 교도관들을 통해 이상한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가족들이 면회를 왔을 때 그들은 억울하다는 말을 했으며, 특히 강진규 경사는 시멘트 바닥에 엎드려 엉엉 울면서 칠순의 아버지에게 불효자식을 용서하라고 하소연했다는 것이다. 이내 그들의 가족 면회가 금지됐다. 곧이어 대공수사단의 간부진이 찾아와 그들 사이에 언쟁이 벌어지고, 회유와 협박이 있었다는 얘기가 속속 전해져 왔다. 내용인 즉, 이들 두 사람 말고도 고문 경찰관이 세 명이 더 있으며, 조직의 보호를 위해 두 사람만이 희생양이 되어 ‘고문살인 경관’이라는 오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대공수사단 간부들은 두 경찰관에게 “일 년만 참아라” “입을 다물고 있으면 이 통장을 넘겨주겠다”면서 1억 원짜리 은행 통장을 보여주고 회유했으며, 또한 침묵하지 않으면 밖에 나와서 제대로 살 수 없을 거라고 협박했다는 것이다. 이부영은 교도관들을 통해 이 같은 사실을 취재하는 한편, 2월 7일 추모행사를 맞이하여 20일간의 단식에 돌입했다. 단식을 하는 동안 쇠창살을 통해 두 경찰관에게 소리쳤다. “두 분도 박종철군의 영혼 앞에 참회하고 그 넋을 위로하시오, 나는 두 분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박종철군이 그렇듯이 두 분도 전두환 군사독재의 희생자들입니다”라고. 이를 계기로 이부영과 이들 두 사람은 주전자에 김치를 넣고 끓인 라면을 서로 나누어 먹는 관계로까지 발전했다. 이부영에게 두 고문 경찰관의 동태, 그들로부터 들은 고문치사 과정의 진실, 검찰의 태도, 경찰의 회유내용 등을 전달한 것은 교도관들이었다. 특히 한재동이 그 중심적 역할을 했다. 한재동은 자신들이 전한 내용을 이부영으로 하여금 정리하여 내게 편지로 쓸 수 있도록 필기도구를 제공했고, 그렇게 쓴 편지를 한재동은 밖에 있는 전병용에게 전달한 것이다. 상당기간 한재동의 이름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던 것은, 그가 그 사건 후에도 상당기간 교도관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부영의 편지를 받은 뒤 박종철과 관련된 기사란 기사는 모두 다 스크랩했다. 수배 중이라 행동이 부자유했기 때문에 사실을 직접 확인하진 못했다. 이렇게 얻은 정보와 이부영이 보낸 편지의 내용을 종합하여, 하나의 정리된 문건을 만들었다. 이제 어떻게 이 엄청난 사실을 세상에, 국민 앞에 알리는가 하는 것이 절박한 문제였다. 처음에는 야당 국회의원의 본회의 대정부 질의를 통해 공개하는 방법을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선뜻 나서질 못했다. 시간은 흘러 5·18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나는 사제단에 기대를 걸었다. 사제단은 나에게는 물론 민주화 운동 진영 전체에도 언제나 보호막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일을 해낼 수 있는 곳은 사제단뿐이었다. 그때 나는 고영구 변호사의 집에 은신하고 있었다. 나는 함세웅 신부와 김수환 추기경에게 편지를 썼다. 그것을 고영구 변호사의 부인 황국자 여사와 딸 고은영(당시 이화여대 4년 재학 중)양을 통해 전하게 했다. 함세웅 신부·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이돈명 변호사·전 조선대 총장, 고영구 변호사·전 국정원장(왼쪽부터). 이부영 옥중편지로 진상 밝혀져 나는 “최악의 경우 축소, 조작을 사실로 확인하고 사제단에게 제보한 사람이 수배 중인 김정남이라고 밝혀도 좋다”면서 “어떻게든 발표만 해달라”고 졸랐다. 김수환 추기경도 이 문제에 대해서 매우 조심스러워했다. 그만큼 그것을 발표하는 일은 구속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위험한 일이었다. 고심 끝에 사제단은 ‘5·18 광주 민주항쟁 7주기 미사’를 봉헌하기로 하고, 거기서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당시 5공 정치권력에 맞선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같은 것이었다. 사제단의 성명의 핵심은 박종철을 물고문하는 데 가담한 경관이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 외에 3명의 경관이 더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데 있었다. 3명의 경관은 경위 황정웅, 경사 반금곤, 경장 이정호라고 구체적으로 이름까지 밝혔다. 그들은 다 같은 고문 경관인데도 여전히 경찰관 신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제단의 발표에서 ‘반금곤’이 ‘방근곤’으로, ‘이정호’가 ‘이정오’로 되어 있는 것은 의도적인 오류가 아니라, 처음부터 그렇게 듣고 그렇게 적었던 탓이다. 한때 경찰 내부에서 사제단이 경찰의 대응을 알아보기 위하여 의도적인 오기를 했다는 의문이 제기되었다고 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또 하나 사제단의 발표는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의 증언과 진술을 바탕으로 하다 보니,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의 역할을 애써 축소하거나 경미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마치 두 사람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그들이 생짜로 억울하게 차출되어 구속 기소된 것처럼 되어 있다. 뒷날 최종적으로 확인된 바에 의하면 조한경은 물고문을 지시했고 강진규 역시 물고문에 상당한 역할을 한 것이 드러났다. 사제단의 성명을 읽으면 그것이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의 진술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경찰도 그것을 이내 눈치 챘을 것이다. 이는 경찰로 하여금 사제단의 성명을 사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한 중요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이런 사제단 성명의 구체성이 경찰로 하여금 더 이상 진실을 은폐할 수 없게 만든 요인이었다. 김정남〈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 수석비서관〉
- 6월항쟁2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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