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364 건 검색)
- 백남기 농민 잊었나…국민의힘 박대출 “물대포 없앤 물대응, 난장집회 못 막아”
- 2023. 05. 19 10:26 정치
- ... 달라”며 물대포 사용과 관련해서는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다. 더불어민주당은 “국민의힘은 고 백남기 농민의 비극을 되풀이하려고 하나”라고 반발했다. 김한규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이날 서면...
- ‘백남기 농민 사망’ 구은수 전 서울경찰청장, 8년 만에 유죄 확정
- 2023. 04. 13 13:55 사회
- ... 신분으로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2015년 민중총궐기 집회에서 살수차 운영 감독을 소홀히 해 고 백남기 농민을 사망케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구은수 전 서울경찰청장의 유죄가 8년 만에 확정됐다....
- ‘고 백남기 딸 명예훼손’ 김세의·윤서인 벌금형 확정
- 2020. 12. 11 11:24 사회
- ... 전 MBC 기자(왼쪽)와 시사만화가 윤서인씨.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고 사망한 고 백남기 농민의 딸을 비방하는 글·그림을 온라인에 게재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김세의 전 MBC 기자와 시사만화가...
- 백남기 농민 사망 5년…확정 못한 ‘물대포 지침’
- 2020. 11. 10 21:14 사회
- ... 수렴에 시간 걸려” 2015년 11월14일 서울 종로구청 인근에서 경찰이 시위 중 쓰러져 있는 백남기씨에게 멈추지 않고 물대포를 쏘고 있다. CBS노컷뉴스 제공 경찰이 쏜 살수차 물대포에 맞아 농민...
스포츠경향(총 76 건 검색)
- 고 백남기 농민 3주기, 21일 광주서 추모제…추모곡 ‘우리밀밭에서’도 나와
- 2019. 09. 20 17:20 생활
- 고 백남기 농민 3주기 추모제가 21일 오후 12시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에서 열린다. 생명 평화 일꾼 故백남기 농민 3주기 추모제 추진위원회(이하 추진위)가 마련한 이번 행사는 서정숙(춤), 박희원(구음과 장구), 전미선(해금)등의 추모공연과 각계 추모사 등이 이어질 예정이다. 추진위는 백남기 농민 투쟁을 함께 이끌었던 가톨릭농민회, 전국농민회총연맹,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의 전현직 대표자(정현찬, 김순애, 김영호) 등으로 구성됐다. 이번 추모제가 다른 해와 달리 남다른 의미가 있는 것은 백남기 농민 추모가인 ‘우리밀밭에서’가 처음 공개되기 때문이다. 이 추모곡은 고인의 후배인 한국예술종합학교 외래교수인 김정희씨가 만들고, 중앙대 민주동문회 노래패인 ‘어울소리’가 올 2월 창립되면서 가시화됐다. 추모곡 ‘우리밀밭에서’는 백남기 농민과 관련된 기록, 책, 보도 등을 조사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백남기 농민이 삶의 터전을 일군 보성 밀밭을 방문하는 등 발로 뛰어 만든 추모곡이다. 이 노래를 만든 김정희씨는 “백남기 농민과 함께 학교를 다닌 이명준 선배가 노래를 만들려면 보성 밀밭에 가보라고 했고, 이 과정을 거치면서 완성하지 못하고 있던 부분의 노랫말도 저절로 해결됐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밀밭에서’에는 백남기 농민의 생명과 평화에 대한 사랑이 담겼다”고 덧붙였다. 한편 김정희씨는 “‘온 동네 풀 다 깎아주면서 집안 일엔 신경 안 쓰냐’는 아내의 타박에 ‘우리 여보 밭에 갈 때 편하라고 풀을 깎았제’라고 했다는 고인의 말이 가슴에 남는다”고 추모곡 후일담을 밝히기도 했다.
- 백남기
- 김세의 전 MBC 기자·만화가 윤서인, 백남기씨 딸 비방 혐의 벌금형…강용석이 옥중변론
- 2018. 10. 26 11:21 생활
- 고(故) 백남기씨 딸을 비방하는 내용의 글이나 그림을 올려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만화가와 전직 기자가 1심에서 각각 벌금형을 받았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형사16단독 최미복 판사는 26일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김세의 전 MBC 기자와 만화가 윤서인씨에게 각각 벌금 700만원을 선고했다. 최 판사는 “피해자의 사생활은 사회적으로 관심이 된 문제와는 관계없다”며 “사생활을 언급해 비난하는 건 인격권 침해”라고 유죄 판단을 내렸다. 사실과 다른 내용을 유포해 고(故) 백남기씨 유족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김세의(오른쪽) 전 MBC기자와 만화가 윤서인씨가 선고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26일 오전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으로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최 판사는 이어 “두 사람은 언론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칠 지위에 있으면서 피해자를 비방할 목적으로 글이나 그림을 게재해 가족 잃은 슬픔을 가중했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이들은 2016년 10월 백씨가 위독한 상황인데도 그 딸이 해외 휴양지에서 휴가를 즐겼다며 관련 글과 그림을 인터넷 사이트나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에 올린 혐의로 기소됐다. 당시 백남기씨의 딸은 휴양목적이 아니라 발리에 있는 시댁의 집안 행사에 참석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세의 씨는 선고 직후 항소할 뜻을 밝히면서도 “유족에게 일부러 상처를 드리려고 한 건 아니지만 그런 생각을 못 했던 점이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반성했다. 김세의 씨는 자신을 변호해 준 강용석 변호사가 이틀 전 구속된 상황에 대해 “충격과 걱정이 좀 많았다”면서도 ‘변호인을 바꿀 생각이 있느냐’는 취재진 물음에는 “없다”고 말했다. 강용석 변호사는 향후 자신이 맡은 사건들을 ‘옥중변론’할 것으로 보인다.
- 윤서인-김세의-장기정의 故 백남기 향한 ‘독한 발언’ 어땠길래
- 2018. 01. 19 15:42 생활
- 웹툰작가 윤서인, 김세의 MBC 기자, 장기정 자유청년연합대표가 검찰에 넘겨진 가운데, 이들의 발언에 관심이 모이고 있다.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부장 홍승욱)는 지난해 말 이들을 정보통신망 이용 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상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했다고 밝혔다. 지난주에는 이들에 대한 1차 공판이 진행됐다. 이들 세 사람은 경찰 물대포 직사 살수로 사망한 고(故) 백남기씨의 유족 명예를 훼손한 혐의다. 김세의 MBC 기자(사진 왼쪽)과 윤서인 작가가 고(故) 백남기씨의 유족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 송일준 한국PD연합회장 페이스북 윤서인, 김세의 기자, 장기정 대표는 백씨의 둘째딸인 민주화씨가 아버지가 위독한 상황에 치료를 거부하고 휴양지로 휴가를 갔다는 취지의 글과 그림을 온라인에 게시함으로써 유족 명예를 훼손한 혐의를 받고 있다. 윤서인은 이 같은 내용을 만화로 그려 자유경제원에 게재했다. 해당 만화에서 백민주화씨는 비키니를 입고 휴양지에 누워 페이스북에 ‘아버지를 살려내라…X같은 나라’라고 쓰는 모습으로 묘사됐다. 윤서인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쯤 되니 돌아가신 분이 너무 안타깝다”고 썼다. 김세의 MBC 기자도 3일 페이스북에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정한 딸이 있다”며 “사실상 아버지를 안락사시킨 셈”이라고 썼다. 김세의 기자는 이어 “더욱 놀라운 사실은 위독한 아버지의 사망 시기가 정해진 상황에서 해외 여행지인 발리로 놀러갔다는 점”이라고 썼다. 장기정 자유청년연합대표는 지난 2016년 10월 “백도라지, 백민주화, 백두산 3명을 아버지를 죽인 혐의로 검찰에 고발한다”며 “아버지가 적극적 치료를 받지 못하면 사망할 것을 알면서도 적극적 치료를 거부해 사망케 한 것”이라고 썼다. 장기정 대표는 다음날 실제로 고발장을 제출했다. 하지만 백민주화씨에게 발리는 시댁 형님의 친정이었다. 새로 태어난 아이를 친정 부모님께 보여드리고자 발리에서 세례식을 했고, 부모님을 비롯해 가족들과 함께 시댁 형님 친정인 발리로 향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고 백남기 변호인단은 윤서인, 김세의, 장기정을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 혐의 등으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다. 변호인단은 “근거 없는 허위사실 유포로 ‘아버지가 위독한 상황에서 휴양지로 여행을 떠나는 비정한 딸’로 만들고, 부모와 남편을 잃은 가족을 ‘살인범’으로 만드는 행태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법적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며 고소 배경을 밝혔다. 변호인단은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애도와 추모의 시간마저 마음껏 보낼 수 없는 유족들에게 다시 한 번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히고 법적 대응에 나서도록 만든 피고소인들에게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있는지 묻고 싶다”며 당시 검찰에 엄정한 수사를 촉구했다.
- 백남기윤서인장기정김세의
- 檢 윤서인 작가·김세인 기자 등 3인, 고 백남기 농민 유족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
- 2018. 01. 19 15:35 생활
- 고 백남기 농민 유족을 비방한 기자, 만화가, 보수단체 대표 등이 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부장 홍승욱)는 지난해 말 MBC 김세의 기자(42)와 보수성향 윤서인 웹툰작가(44), 장기정 자유청년연합대표(42) 등을 정보통신망 이용 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상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했다고 19일 언론에 밝혔다. 김세의 기자와 윤서인 작가, 장기정 대표 등은 백씨의 둘째딸인 백민주화씨가 아버지가 위독한 상황에서 치료를 거부하고 인도네시아 발리로 휴가를 갔다는 취지의 글과 그림을 인터넷상에 게시해 유족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를 받고 있다.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청사 전경. 강윤중 기자 고 백남기 농민은 2015년 11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민중총궐기 대회에서 경찰의 물대포를 직사로 맞고 사경을 헤매다 2016년 9월 숨졌다. 검찰에 따르면 당시 백남기 농민 가족들은 장기간의 연명 치료가 아버지에게 고통만 줄 뿐 무의미하다고 판단해 의료진과 협의해 혈액 투석을 중단한 상태였다. 이를 두고 김세의 기자는 한달 후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페이스북에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정한 딸이 있다…사실상 아버지를 안락사시킨 셈…더더욱 놀라운 사실은 위독한 아버지의 사망 시기가 정해진 상황에서 해외여행지 발리로 놀러갔다는 점”이라고 주장했다. 장기정 대표는 SNS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아버지가 적극적 치료를 받지 못 하면 사망할 것을 알면서도 적극적 치료를 거부해 사망케 한 것”이라는 글을 올렸고, 고 백남기씨의 세 자녀를 살인죄로 고발하기도 했다. 윤서인 작가는 이런 내용을 만화로 그려 자유경제원 사이트에 올렸다. 해당 만화에서 중환자실 침대에 누워 있는 백남기씨가 가족들 동의를 받지 못 해 아무런 치료를 받지 못 하는 것으로 묘사됐다. 동시에 백민주화씨는 비키니를 입고 휴양지 선베드에 누워 페이스북에 ‘아버지를 살려내라. X같은 나라’라는 글을 올리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검찰 조사 결과 백민주화씨는 휴양 목적이 아니라 시댁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발리에 갔던 것으로 드러났다. 백민주화씨 측은 검찰에서 “새로 태어난 아이 세례식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시댁 형님 친정인 발리로 간 것”이라고 진술했다. 검찰 관계자는 “상당수 내용이 허위 사실이고, 백민주화씨가 공인이 아닌 일반인에 속하기 때문에 해당 글 게재가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윤서인 작가는 검찰에서 “사실에 기초해 표현한 것”이라고 명예훼손 혐의를 부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세의 기자는 검찰 출석도 거부해 조사를 받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 윤서인김세의
주간경향(총 8 건 검색)
- [원희복의 인물탐구]백남기농민기념사업회(준) 공동대표 정현찬 “백남기 정신은 농정틀 바꾸라는 것”(2019. 04. 01 15:06)
- 2019. 04. 01 15:06 사회
- 백·남·기. 참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다. 그는 2015년 11월 14일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고 쓰러져 서울대병원에서 317일간투병 끝에 숨졌다. 그는 촛불혁명의 상징으로 매일 지면을 장식했고, <주간경향>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불과 2년여 지난 지금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기사를 검색해보니 ‘백남기’라는 이름이 언론에 등장한 것은 지난 연말 우리밀 수매를 다시 시작했다는 ‘백남기 우리밀’ 보도가 마지막이었다. 지난 3월 20일 서울 민주노총 회의실에 ‘백남기 사람들’이 모였다. 김영호 전국농민회총연맹 전 의장,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대표, 한상균 민주노총 전 위원장, 조덕휘 전국빈민연합 전 의장, 유영훈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 이사장, 김인한 천주교 사제 등이다. 이 모임은 백남기농민기념사업회를 만들기 위한 준비모임으로 조병옥 전 전농 사무총장이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올해 11월 14일에 창립대회 열기로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에 맞고 쓰러지자 민중단체들은 ‘생명과 평화의 일꾼 백남기 농민의 쾌유와 국가폭력 규탄 국민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백남기 농민이 숨지자 ‘백남기 농민 국가폭력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및 살인정권 규탄 투쟁본부’(백남기투쟁본부)로 전환했다. 촛불혁명이 대략 마무리된 2017년 백남기투쟁본부 대표들은 백남기기념사업회를 만들기로 했다. 이후 몇 차례 회의를 통해 오는 11월 14일 창립대회를 열기로 하는 등 기념사업이 구체화되고 있다. 정현찬 가톨릭농민회 (가농)전 회장(71)이 이 기념사업회 준비모임의 ‘좌장’을 맡고 있다. 정 전 회장은 백남기 농민이 쓰러진 제1차 민중총궐기 이후 촛불혁명 맨앞에 선 사람이다. 그 스스로 “팔자에 없던 기자회견 40여회를 비롯해 100차례가 넘게 마이크를 잡았다”고 말할 정도다. 기자가 ‘TV에도 자주 나와 언론 상대하기 익숙해졌을 것’이라고 하자 그는 “그렇지 않다, 나는 농사만 짓던 농사꾼”이라며 웃었다. -백남기농민기념사업회를 만드는 취지가 뭔가. “백남기 농민의 정신을 계승하자는 것이다. 우리가 준비하는 정관에 ‘백남기 농민의 희생은 박근혜를 권좌에서 끌어내는 결정적 동력이 된 1700만 촛불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이러한 백남기 농민의 뜻을 따라 차별과 소외가 없고 억압과 착취가 없는 조국의 평화와 통일 세상을 만들어가고, 나아가 농업·농촌·농민의 평등세상을 만든다’고 밝혔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기념사업회를 만드는 목적이다.” 2016년 9월 정현찬 가톨릭농민회 회장을 비롯한 백남기투쟁본부 지도부가 서울대병원 영안실 앞에서 백남기 농민 시신 사수를 결의하고 있다. / 민주노총 제공 -기념사업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일단은 민중총궐기를 같이했던 사람·단체 중 농민·노동자·빈민 대표들이 먼저 하기로 했다.” -백남기 농민에 대한 보상 등 법적 문제는 마무리됐는가. “정부 보상도 거의 마무리되고 있다. 물대포를 쏜 경찰과 기동단장은 벌금과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를 받는 등 유죄판결을 이끌어 냈다. 그러나 당시 경찰청장 등 수뇌부는 무죄 판결을 받아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허위진단서를 발부해 의료법을 위반한 서창석 서울대병원장과 백선하 교수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등이 남아있긴 하다.” -촛불혁명을 진두지휘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나. “경찰이 백남기 농민의 시신을 탈취하기 위해 서울대병원에 난입했을 때다. 그때가 가장 힘들고 어려운 때였다. 그때 영안실에서 우리 농민들은 조를 짜 밤새 백남기 농민을 지켰고 여기에 노동자·빈민·시민단체들이 함께했다.” 장례식날 전국 30만 명이 촛불 들어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회고해 달라는 것은 기자의 잔인한 질문이다. 경찰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백남기 농민이 2016년 9월 25일 숨지자 경찰은 시신 압수수색영장을 발부했다. 보통 변사의 경우 사인을 정확히 가리기 위해 검사의 지휘로 부검을 하지만 병원에서 숨졌을 때 부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부검은 백남기 농민의 사인을 조작하려는 시도였다. 서울대병원은 이미 ‘병사’라는 사망진단서를 발부했다. 경찰과 당시 여당 새누리당은 ‘일베’들이 주장했던 빨간 우의의 소행인지 밝히기 위해 부검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청와대와 거래하던 법원은 충실히 부검영장을 발부했다. 백남기투쟁본부는 경찰의 부검을 막기 위해 사수대를 만들어 시신을 지켰다. 서울대병원 영안실 앞에서 백남기투쟁본부 지도부는 삭발하고, 청년들은 서로 스크럼을 짜고 진입하는 경찰을 맨몸으로 막아냈다. 하지만 더 이상 공권력을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이때 서울대병원이 백남기 농민에 대해 ‘병사’라는 엉터리 사망진단서를 발부했음이 드러났다. 초보 의대생도 알고, 작성 규정에도 어긋난 이 사망진단서에 민심은 동요했다. 이때 서울대 의대생들이 ‘선배님들에게 의사의 길을 묻습니다’라는 대자보를 붙였다. 대자보는 전국으로 확산됐고 국민적 공분이 이어지면서 촛불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농성장인 서울대병원 영안실에는 컵라면과 식수 등 후원물품이 넘쳤다. 경찰은 백남기 농민 시신 압수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2016년 11월 5일, 숨진 지 41일 만에 치른 백남기 농민 장례식에는 광화문에만 20만명, 전국적으로 30만명이 참가해 촛불을 들었다. -백남기 농민이 쓰러진 2015년 11월 14일부터 장례일까지 근 1년간 서울에서 생활했다. 시골의 농사는 누가 지었는가. “1년간 서울에서 ‘아스팔트 농사’를 지었다. 집사람이 힘들어 했지. 하지만 백남기 농민의 죽음을 밝히는 싸움이 더 큰 농사였다.”(웃음) -백남기 농민의 죽음이 불과 몇 년 만에 국민들에게 잊혀진 것 같다.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백남기 농민이 무엇 때문에 민중총궐기에 참여했느냐를 잊었다. 그것은 이 땅 민중의 삶을 개선하겠다는 일념이었다. 사람들은 단순히 물대포 사고에만 관심 있지 백남기 농민의 정신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단순히 보상금 얼마 주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농정의 틀을 바꿔야 한다. 농민이 살 수 있는 틀을 만들라는 것이다.” 정현찬 전 가톨릭농민회 회장이 지난 3월 20일 열린 백남기농민기념사업회준비위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백남기 농민은 우리 먹거리의 소중함을 알리려다 목숨을 잃었다. 그때도 농민들은 밥 한 공기분 쌀값 300원을 요구했지만 촛불정부에서도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촛불혁명 주역인 민중총궐기 참여세력은 “이 정부에게 팽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솔직히 서운한 점이 많다. 이 정부는 노동자·농민 등 촛불의 힘으로 탄생한 정부다, 그러면 노동자·농민에 대한 정책을 펴야 하는데 오히려 거꾸로 가고 있다. 우리 농업이 어렵게 된 이유는 정부가 대기업과 기업농 중심으로 지원했기 때문이다. 아직 우리는 중·소농이 농업의 70% 이상을 지탱하고 있다. 스마트팜은 대기업이 농업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많은 농민들이 생계를 잃는다.” -그래서 엊그제(3월 15일) 여의도에서 전국농민대회를 연 것인가. “그렇다. 한창 못자리를 준비해야 할 시기에 여의도에서 농민대회를 연 것은 그만큼 시급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에게도 지금 시급한 것이 일자리 창출 문제인데, 지금 농촌에 있는 농민의 일자리를 없애려고 하고 있다. 상당히 잘못된 것이다.” -백남기 농민은 평소 자기를 내세우기 싫어했다. 그래서인지 촛불혁명 주역인 농민들은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 않는다. 자신이 하지도 않은 것을 과장해서 앞세우는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너무 순진하다. 그러다 보니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 아닌가. “자신을 내세우기 싫어하는 백남기 농민의 개인적 품성과 촛불혁명은 차원이 다르다. 안중근 의사 어머니는 아들을 내세우기 싫어하는 어머니였지만 아들이 했던 그 정신을 알리려 했다. 우리도 백남기 농민의 본래 정신과 의미를 알리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촛불혁명 정신으로 살아가자는 것이다. 이번에 기념사업회를 만드는 것도 우리가 촛불혁명의 주역임을 당당히 알리고, 상응하는 권리를 찾는 사업도 하기 위함이다.” 가톨릭농민회 가입 이후 세상과 맞서 정 공동대표는 1948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마치고 계속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참 목가적이고 단순한 삶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 농민의 삶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몸부림쳐야 했다. 그는 1979년 가톨릭농민회에 가입하면서 세상과 맞섰다. 그는 82년 농지세 폐지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일제가 우리 농민을 수탈하기 위해 만든 쌀농사에 대한 갑농지세, 밭농사에 대한 을농지세, 그리고 물에 대한 수세가 이승만·박정희 정권 때까지 이어졌다”고 말했다. 가톨릭농민회는 1964년 농촌 청년들이 조직한 가톨릭노동청년회에서 비롯됐다. 이 조직은 1966년 10월 ‘가톨릭농촌청년회’로 설립됐다가 1972년 지금 이름으로 바뀌었다. 가톨릭농민회는 농민을 교육하고 일깨워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조직됐다. 당연히 정부와 농협의 횡포에 맞섰다. 1970~80년대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는 농지세·수세 철폐투쟁을 벌였고, 문민정부 때에는 농산물시장 개방 반대투쟁, 수매가 인상투쟁 등을 벌였다. 최근에는 식량주권과 우리농촌살리기, 생명농업 등을 강조하고 있다. 정 공동대표는 2002년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을 맡았고, 2013년부터 임기 2년의 가농 회장을 두 번이나 연임했다. 백남기 농민은 1986년 가농에 가입해 전국 부회장을 역임, 함께 가농 활동을 한 친구 사이다. 친구가 물대포에 맞아 쓰러지자 그는 서울대병원 옆에 천막을 치고 1년간 투쟁을 지휘했다. 그는 민중단체와 시민·사회단체가 연대, 퇴진행동 주최로 연 촛불집회 첫 연사로 대회사를 직접 읽었다. 이후 100여회 이어진 집회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백남기 농민 장례식을 마친 그는 고향으로 내려갔고, 가농 회장도 내려놨다. 백남기농민기념사업회 일로 가끔 서울에 오지만 조용히 ‘촌로’로 되돌아갔다. 그는 논에 볍씨를 뿌리고 밭에 고추·고구마·참깨도 심었다. 그는 “이제 나이가 들어 조금밖에 농사를 못한다”면서 “한 3000평 농사를 짓고 있다”고 말했다. 기자가 ‘농사를 지어 생활이 되는가’라고 묻자 “자식 농사는 다 지어 돈 들어갈 곳이 별로 없다”면서 “내가 지은 쌀로 밥해 먹으면 되지”라고 말했다. 정 공동대표는 마지막으로 “역사를 보면 나라가 어려울 때 지식인이 나라를 구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농민 등 민중들이 나섰다”면서 “민중이 나라를 구해 놓으면 정치인이 그 과실을 차지하고 민중의 역할은 잊어버린다”고 질타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먹물들’에 대한 준엄한 경고로 들렸다.
- 원희복의 인물탐구
- [주목! 이 사람]김덕진 백남기대책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 “한국의 인권은 퇴보하고 있다”(2016. 11. 01 18:27)
- 2016. 11. 01 18:27 사회
- / 이상훈 선임기자 10월 25일은 고(故) 백남기 농민 부검 2차 영장집행의 만료일이었다. 이날 영장 강제집행을 하기 위해 형사 100여명과 9개 중대 1000여명의 경찰병력이 투입됐다. 하지만 유족과 백남기투쟁본부, 시민지킴이 등의 강한 반대로 강제집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0월 28일 서울 종로경찰서는 “검찰과 협의한 결과 유족이 지속 반대하고 집행과정에서 물리적 충돌 등 불상사를 우려해 백씨에 대한 부검영장을 재신청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백남기 농민은 지난해 11월 22일 민중총궐기대회에서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아 317일간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9월 25일 사망했다. 백남기 농민이 숨진 지 한 달이 지났고 다행히 경찰의 부검영장 강제집행은 막았지만, 장례는 아직 기약할 수 없다. 사과와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대책 등의 약속을 받아야 하는데, 백남기 농민 사망 이후 경찰과 검찰, 그리고 박근혜 정부가 보여준 태도는 이 약속을 쉽게 받아낼 수 있을 거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얼마 전 물대포의 충격적인 압력을 보도한 SBS 에 대한 반향이 컸다. 그런데 경찰은 방송의 실험결과를 수용할 수 없다고 하더라. 경찰이 스스로 변화할 의지를 보이지 않는 것이다. 장례를 잘 치를 수 있는 조건이 마련돼야 하는데, 사실 경찰이나 검찰이 수사 의지가 없는 상황이다. 현재 야 3당이 특검을 요구하고 있고 서명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이런 요구사항들 중에 몇 가지라도 이뤄지는 것이 있어야 한다.” 경찰이 스스로 변화할 의지를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정치권의 노력과 국민적 압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투쟁과정에서 국민들의 지지는 큰 힘이 됐다. “물품이 부족하다고 말하자 많은 시민들이 택배로 물품을 보내줬다. 일주일 내내 택배차량이 줄을 지어 들어와서 장례식장 앞마당을 가득 채울 정도였다. 거리에 나오지는 못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마음으로 함께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힘으로 지난 한 달을 버틸 수 있었다.” 김 위원장은 지난 1년을 “아무리 세상이 후퇴해도 이렇게 비상식적일 수 있는가를 생각했던 시간”이라고 말했다.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에 쓰러지는 장면은 인터넷이든 어디에서든 확인해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그 문제에 즉각 사과하지 않고 조사도 하지 않는다. 여당 국회의원들 중에서는 백남기 농민을 구하러 들어간 게 명백한 사람을 ‘빨간 우의’라 칭하면서 그가 백남기 농민을 가격했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펼쳤다.” 그런 만큼 명백한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은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마지노선이다. “당시 살수차를 조종한 사람, 직사 살수를 지시한 계통, 명령권자인 강신명 전 경찰청장 등의 책임을 명백히 물어야 한다. 서울대 백선하 교수도 특검을 하기 전에 이미 서울대에서 자체적으로 징계를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백 교수에게 압력을 행사한 사람은 없는지 밝혀내야 한다.” 백남기 농민 사건은 국가 공권력이 국민을 보호하는 세력인가 침해하는 세력인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천주교인권위원회에서 오랜 기간 일해온 김 위원장은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와 인권은 계속 퇴보하고 있다”며 “이 사건을 제대로 짚지 않고 넘어가면 이와 유사한 일들은 언제든 다시 발생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지금의 정권이든 차기 정권을 바라는 세력이든 이 문제에 대해 미온적으로 넘어간다면 매우 곤란한 지경에 처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 주목! 이 사람
- [렌즈로 본 세상]“더 이상 백남기 농민을 욕되게 하지 말라”(2016. 11. 01 18:09)
- 2016. 11. 01 18:09 사회
- 고 백남기 농민의 부검 영장 기한이 만료된 10월 25일 저녁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열린 촛불집회에서 참가자들이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습니다. 영장 기한 마지막 날, 두 번에 걸친 경찰의 장례식장 진입 시도로 한때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기도 했지만 영장집행이 무산된 이후 대책위와 시민단체활동가, 학생들이 작은 승리에 밝은 표정으로 집회에 참가해서 국가폭력과 정권을 규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진실규명은 충분합니다. 더 이상 고인을 욕되게 하지 말고 고이 보내 드리는 것이 그나마 국가폭력 당사자들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렌즈로 본 세상
- [비상식의 사회]백남기 농민, 애도 받지 못하는 죽음(2016. 10. 11 11:25)
- 2016. 10. 11 11:25 사회
- 사인을 가리기 위해 굳이 부검을 하는 것은 백남기씨를 두 번 죽이는 일과 다를 바 없다. 물대포를 맞고 뇌사상태가 되어 한 번도 깨어나지 못했던 사람이다. 사망 직전에 다른 합병증이 무엇이 있었는지 검찰의 눈으로 확인하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호메로스의 서사시 의 마지막에는 아들 헥토르를 죽인 아킬레우스를 찾아간 프리아모스 왕의 얘기가 나온다.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아킬레우스와의 대결에 나섰던 헥토르는 결국 창에 맞아 숨진다. 친구 파트로클로스를 죽인 헥토르에게 복수의 원한이 사무쳤던 아킬레우스는 그의 시신을 전차에 매달아 끌고 돌아다니며 욕보인다. 그러자 프리아모스는 죽음을 무릅쓰고 아킬레우스를 찾아가 아들의 시체를 돌려달라고 간청한다. “아킬레우스여! 신을 두려워하고 그대의 아버지를 생각하여 나를 동정하시오.” 아들 잃은 아버지의 간절한 얘기를 듣던 아킬레우스도 함께 통곡하고 말았다. 프리아모스는 아들 헥토르를 위해 꺼이꺼이 울었고,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생각하며, 때로는 파트로클로스를 위해 슬피 울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울음소리가 온 집안에 가득 찼다”고 호메로스는 썼다. 프리아모스의 부성애에 감동받은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시체를 깨끗이 씻고 좋은 옷으로 덮어 짐수레에 싣고 진영을 몰래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프리아모스가 아들의 장례를 치르는 기간 동안은 공격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그러고 나서 아킬레우스는 소리내어 울면서 파트로클로스의 이름을 불렀다. 원수 헥토르를 그의 아버지에게 내준 자신을 원망하지 말라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죽음 이 서사는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아버지의 모습 앞에서 복수의 증오심마저 무너져 내리고 함께 슬퍼하는 인간에 대한 얘기이다. 인간이란, 그리고 죽음이란 그런 것이다. 아무리 미워하던, 심지어 전쟁에서 서로의 목숨을 겨냥하던 상대였다 해도 일단 타자의 죽음 앞에서는 예를 표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다. 그런데 그 예를 받지 못한 채 죽어서도 서러운 망자(亡者)가 있다.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317일간 의식불명 상태에 있다가 결국 숨진 농민 백남기씨. 그가 했던 시위가 준법이었는가 불법이었는가를 따지는 것은 지금 할 일이 아니다. 불법 시위를 하면 죽여도 좋다는 법은 대한민국에 없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지금은 책임을 물을 때이다. 하지만 백남기씨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죽음으로 남아있다. 아직까지 진상조차 가려지지 않았고, 누구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아니, 진상은 고사하고 사과 한마디 한 번 하지 않고, 조문 한 번 가지 않는 것이 이 나라 정부이다. 그들은 이 죽음을 조금도 슬퍼하지 않았음이 틀림없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니 유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부검을 하겠다는 발상이 나오는 것이다. 사인을 가리기 위해 굳이 부검을 하는 것은 백남기씨를 두 번 죽이는 일과 다를 바 없다. 물대포를 맞고 뇌사상태가 되어 한 번도 깨어나지 못했던 사람이다. 사망 직전에 다른 합병증이 무엇이 있었는지 검찰의 눈으로 확인하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다른 합병증을 이유로 사망원인에 대한 물타기를 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심만 살 뿐이다. 그토록 부검에 매달리는 사람들은 물대포가 아닌 다른 이유로 사망한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 아니겠는가. 수사의 논리를 들이대기 이전에, 아버지를 죽인 쪽의 편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시신을 넘겨주고 싶지 않은 유족들의 마음을 헤아려야 할 일이다. 마침 서울대병원 백선하 교수가 ‘병사’라는 사망진단서를 작성해주었다. 고인의 사망이 물대포에 의한 ‘외인사’가 아니라, 병에 걸려 죽었다는 의미인 ‘병사’라니. 이 기막힌 도피구에 어찌 경찰과 검찰의 눈이 번쩍 뜨이지 않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여당 정치인들의 입에서는 부검하기 전까지는 사인을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말들이 나온다. 물대포를 맞아 뇌사상태가 된 환자가 결국 신부전증으로 사망한 것이 병으로 죽은 것이라니. 게다가 사망의 이유를 연명 치료를 원하지 않은 유족에게 떠넘기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의료인의 윤리라는 것이 존재하는가라는 탄식을 낳는다. 백 교수가 무슨 이유로 이렇게까지 하면서 ‘외인사’라는 진단을 극구 피하려 했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지만, 어떤 이유로든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아무리 세상을 보는 눈이 달랐어도, 한 가정의 아버지가 물대포에 맞아 비통하게 갔는데 가는 길에조차 곳곳에서 잔인한 정치적 물대포를 쏘아대서야 되겠는가. 가는 길에조차 잔인한 정치적 물대포 사람이 죽으면 가까웠던 사람들이 애도를 하면서 그를 떠나 보낸다. 슬픔의 시간을 갖고 고인을 잘 보냄으로써 살아있는 사람들은 조금씩 마음을 치유하고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그런데 죽음의 원인이 사회에 있는 경우에는 특별히 사회적 애도가 필요하다. 세월호 참사가 그러했다. 세월호는 이윤에 눈먼 사회와 무능한 국가가 초래한 죽음이었다. 그렇다면 세월호에 갇혀 죽어간 어린 학생들의 가엾은 죽음 앞에서 이 사회는 함께 슬퍼하고 책임을 인정했어야 했다. 그러나 참사가 있은 지 2년 반이 다 되어가도록 우리 사회는 무엇을 했던가. 어째서 단 한 명도 구해내지 못했는가를 밝히려 했던 진상조사 작업은 권력이 세워놓은 벽 앞에서 막혀버렸다. 물론 제대로 된 책임조차 물은 적이 없다. 권력은 세월호라는 말 자체를 더 이상 입에 올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세월호는 단지 하루라도 빨리 잊고 지나가기만 바라는 지겨운 족쇄일 뿐이다. 이 사회는 어린 학생들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지 않았다. 죽어간 학생들을 자기 자식처럼 생각했던 많은 국민들이 죄책감에 시달리며 슬퍼했지만, 정작 책임져야 할 국가는 이를 철저히 외면하고 말았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가족들은 치유 받을 수 없었고 아픔을 이겨내면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없었다. 그래서 비극은 여전히 우리 주변을 맴돌며 우리를 가두고 있다. 백남기씨의 죽음 앞에서 우리 사회가 보이고 있는 모습은 세월호의 죽음 때 보였던 광경과 다르지 않다. 물대포에 맞아 쓰러져 죽은 사람을 놓고 병들어서 죽은 것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버젓이 활개치는 미친 세상이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모든 인간에 대한 조건없는 환대를 말했다. 외모, 능력, 빈부, 생각의 차이에 관계없이 인간은 누구나 환대 받을 권리가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누구나 세상을 떠나가는 길에서 애도 받을 자격이 있다. 애도 받을 자격을 심사하는 차별은 인정되지 않는다. 인간은 누구나 환대 받으며 세상에 왔다가 애도 받으며 가는 존재여야 한다. 그러나 국가폭력으로 인한 죽음 앞에서도 그 예를 갖추지 않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끝내 애도를 거부하는 사회. 그래서 우리가 우리에게 묻는다. 지금 이 곳이 사람들 사는 곳이 맞느냐고.
- 비상식의 사회
맨위로